1。
누군가가 사라지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책을 하나 알고 있다. 더럽고 달콤한 쥐약 같은 책이다. 그 책 속에서는 누구나 사라진다. 나는 그 책에서 당신이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나 역시 오래전에 그 책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는.
그 책은 지금껏 출판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출판되지 않을 것이다. 그 책이 출판될 가능성은 밀봉된 플라스틱 지퍼백 안의 산소처럼 희박하다. 수천억년 된 호박 속의 모기가 1초 만에 되살아나는 기적을, 그것도 내가 맨손으로 행할 확률과 비슷한 가능성. 그것은 무한 속에 누워있는 0바이트짜리 희망이다. 그 책을 보고 싶은가, 당신? 미안하다. 당신은 결코 그 책을 들여다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책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기억이란 것은 연약하여 때로는 하룻밤 꿈속의 바람에도 송두리째 마모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그 이야기는 단 두 사람의 기억에서만 모서리가 닳은 채로 존재한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책은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글이다. 그 책에 대해 한 글자라도 기억하고 있는 첫 번째 사람은 작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사람은, 물론 나다.
그 책을 쓴 케이라는 여자는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동안 내가 아는 것만 해도 100여 편이 넘는 소설을 써냈다. 그 중의 50% 이상이 누군가가 사라지는 데서부터 시작하거나 끝나는 소설이었다. 나머지는 소설의 중간에 사라졌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100편의 소설들 가운데 똑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케이는 100개의 미묘하게 다른 노선을 통해 주인공을 지구에서 삭제시켜버렸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리고 이제 그 100개의 노선 중 99개는 암묵적으로 케이의 기억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삭제된 상태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기껏해야 첫 번째 노선의 아주 희미한 도로표지판 몇 개 정도다. 여기서부터는 일방통행, 목적지까지 1억 킬로미터, 이곳에서 우회할 것, 바로 이 지점에서 사라지시오……. 그것은 케이의 첫 소설이었고, 내가 통독한 케이의 유일한 소설이었다. 나머지 99개의 소설들, 그러니까 내가 읽다 던져버렸거나 아니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던 소설들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가진 기억들은 마른 풀로 쌓은 탑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대며 흩날렸었다. 지금 그것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누구를 증오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좀 더 많은 케이의 소설을 읽어두지 못한 게 후회 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후회라는 것은 언제나 한발씩 늦고, 버스는 늘 후회하는 자보다 한발 먼저 출발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내가 아는 한, 케이를 제외하고는 내가 케이의 첫 소설의 첫 독자이자 마지막 독자다. 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그녀의 소설을 읽어볼 영광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케이의 첫 소설을 읽는 동안 아주 여러 번 “이렇게 엉망으로 배배 꼬인 한심한 얘기는 처음”이라고, 그것도 케이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케이의 귀 바로 앞까지 걸어가서 알맞은 각도로 고개를 꺾고 큰 소리로 말해줘야만 했다. 사실이 그랬다. 유일한 독자라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케이의 주인공들처럼 불가해하고 한심한 인물을 어느 책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 인물들은 병들고 욕심 많고 슬프고 배고픈 눈 먼 쥐들처럼 책의 이 구멍 저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독약을 할짝댔다. 그런 뒤에는 하나씩 하나씩, 결국은 몽땅 사라졌다. 도대체 왜 일이 그렇게 돼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케이에게도 똑같이 말해주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이런 걸 왜 쓰는 건데?” 케이는 그냥 웃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저 한심한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한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이 사라지던 마지막 장면을 읽는 동안 내가 세 번이나 울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나는 울었다. 그리고 케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전부 나와 케이 둘 다 아주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이다. 지금 나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져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그 글을 읽을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울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남아있다. ‘내가 울고 울지 않고가 중요한가?’ 하는 문제다. 대답은? 당연히 NO. 즉, 내가 울고 울지 않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수천억년 된 호박 속의 모기가 눈을 뜨고 있느냐 아니냐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설령 내가 세 번이 아니라 삼백 번쯤 울었다고 고백했다 한들 케이의 소설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을 되돌려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케이는 고집 있는 작가였다. 그녀는 있었던 일을 글로 옮기는 류의 작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글로 쓴 일들을 현실로 옮기는 쪽에 가까웠다. 예컨대 위장병에 걸렸다가 몸이 쪼그라들어 사라지는 여자의 얘기를 쓴 뒤부터 케이는 계속해서 위장병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서른한 살이 된 지금까지 계속. 한번은 귀 뒤에서 자라나는 괴물사마귀에 대한 소설을 쓴 뒤 정말로 귀 뒤에서 괴물이 자라났다고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그 괴물은 케이의 소설에서처럼 곧 사라졌지만. 그건 케이가 열아홉 살쯤 됐을 때의 일로 기억한다. 죽은 강아지가 찾아온 적도 있었다. 열세 살 때던가 열네 살 때던가, 하여간 그때. 그 후로 십오 년 이상의 세월이 줄줄 흘러갔다. 때로는 한여름 폭우에 불어난 강물처럼 조급하게, 때로는 한겨울 얼음 밑을 흐르는 고요처럼 더디게. 그리고 이번에는 이 일이 일어났다. 케이가 가장 즐기는 주제가 실현된 것이다. 누군가 사라지는 일. 사라진 것은 케이 자신, 그러니까 내 하나밖에 없는 언니였다.
2。
그날 겨울이 시작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전봇대도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이 날카로운 날이었다. 케이는 계절이 시작되는 날을 언제나 정확히 감지했다. 그것도 케이의 재주 중 하나였다. 바람의 습도가 바뀌는 가을의 첫 밤, 볕을 타고 내려오는 첫 봄의 오후. 겨울은 입김과 함께 새벽에 찾아온다고 케이는 말했었다.
“그런데 여름은 어렵단 말이야. 그냥 어느 날 와 있어, 여름은. 목이 왜 이렇게 마르지? 하고 생각하다보면 벌써 여름 안에 내가 들어와 있는 거지.”
나에게는 모든 계절이 다 어렵다. 그래도 첫 입김이 나는 날을 구분해내는 건 할 수 있다. 케이의 기준으로 내가 감지해낼 수 있는 계절은 겨울뿐인 셈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날이었다고 기억한다. 바람이 몹시도 찼던 그날 새벽. 모르는 전화번호가 핸드폰의 액정에 떴을 때, 나는 어째서인지 창문을 열고 아직 밝아지지도 않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었다. 그러면서 오늘쯤이면, 어쩌면 오늘쯤이면, 하고 생각했다. 내 예감은 맞았다. 나의 ‘여보세요’에서는 제법 뽀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겨울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는 내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남자가 서있었다. 형사였다. 그가 내게 케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안다고 대답했다. 나는 케이를 알고 있었으니까. 혹은 그때까지만 해도 케이를 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누군가 나에게 케이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어렵다. 내가 정말 그녀를 알았었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그것이 내가 이제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할 때마다 ‘내가 아는 한’ ‘내가 기억하는 한’이라는 말들을 덧붙여야만 하는 이유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기 속의 형사는 이미 나를 어느 정도 동정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케이의 사건은 반쯤 종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결론을 짓고 말을 건네는 사람과의 대화는 갈증이 난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형사의 목소리가 너무 건조해서 나는 통화하는 내내 마른 침을 꿀꺽꿀꺽 삼켜야만 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는, 그래서 목이 메었다. 창밖의 거리는 내 입에서 새어나온 입김 탓인지 온통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형사는 한강대교 근처의 둔덕에서 케이의 가방을 찾아냈다. 그 안에는 현금 오백 삼십 원과 몇 장의 영수증, 명함,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과 비스듬히 굽이 닳은 빨간색 스웨이드 구두가 들어있었다. 형사는 아직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살, 살해, 납치와 같은 단어들을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을 수는 있었지만 그는 아직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을 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납작하게만 보이는 그 싸구려 벨크로 지갑 속에는 사실 지폐가 두둑하게 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폐들은 도난당한 것이리라. 구두는 사실 케이의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케이의 가방에 음모와 거짓말을 쑤셔 넣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 구두를 아십니까?”
하지만, 그렇다. 나는 그 구두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그 구두는 케이의 것이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해서 가능성 하나가 너무 손쉽게 사라져버렸다. 케이가 고르고 아빠가 선물한, 한참이나 유행에 뒤쳐진 그 구두를 케이가 아직도 버리지 않았다는 게 놀랍긴 했지만.
구두바닥에 묻은 흙 때문에 약간 더러워진 지갑 속에는 내 중학교 때 학생증도 들어있었다.
“왜 이 안에 당신의 학생증이 들어 있는 거죠?”
형사가 물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물을 소리였다.
“지금 학생이십니까?”
“중학생이냐고 묻는 거예요?”
형사는 왜 나에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 걸까. 나는 왜 형사에게 저런 말도 안 되는 대꾸를 한 걸까. 누구도 스물아홉 살의 여자에게 중학생이냐고 묻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축복이나 아주 특별한 저주 탓으로 한 시점에 묶여버린 얼굴이 아닌 이상. 그리고 내 얼굴이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래 전부터 늙기 시작했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중학교 학생증 속의 나는 늙음을 모른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웃으면서 찍은 몇 장 안 되는 사진 중 하나였다.
내 학생증 뒤에는 케이의 구두보다도 낡은 아빠의 옛날 명함이 들어있었다. 그 뒤에는 도서관 회원증이, 교통카드가, 할인쿠폰이, 핸드폰 수리기사의 명함이, 지하철 노선도가, 그리고 케이의 주민등록증이 들어있었다. 마지막 칸에서 나온 건 2020의 명함이었다. 봄까지 케이가 일했던 카페다. 2020, 미래를 향했으나 지난 봄 이미 사라진 카페. 영수증은 모두 케이의 집근처 편의점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케이는 겨울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편의점에서 다크초콜릿과 검정색 스타킹을 샀다. 그보다 이틀 전에는 다크초콜릿과 저지방우유를 샀다. 그보다 이틀 전에는 다크초콜릿과 다크초콜릿과 다크초콜릿……. 케이 자신의 명함이나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케이는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다. 그것뿐이다. 그것이 케이가 남긴 잔해의 전부였다. 형사는 그 잔해를 뒤적여 케이의 삶이 지나치도록 단조로웠으리라는 사실을 유추해냈다. 그러나 그것이 케이의 자살을 증명해줄 수는 없었다. 그가 케이의 자살을 증명해줄 증거로 제시한 것은 결국 그 빨간 구두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두를 벗어놓는 건 강물에 뛰어들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통과의례랄까, 뭐 일종의 전통 같은 거니까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구두밖에는.
혈흔, 반항한 흔적, 하다못해 머리카락 한 올도 남아있지 않았다. 발자국은 이틀 전 내린 빗물에 다 쓸려 내려갔고, 지문은 케이 자신의 것뿐이었다. 형사는 케이의 자살을 증명해줄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했지만 그것을 부인할만한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단서가 없었으므로 그는 케이가 강물로 걸어 들어갔으리라 추정했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그는 내가 아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케이는, 내 언니는, 물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해 여름, 케이는 바위에 앉아서 큰 눈을 굴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구두와 지갑이 케이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형사가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날의 일은 나와 케이, 그리고 아빠의 기억 한 구석에 고이 접힌 채 웬만해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 독백이다.
‘한 사람에 대한 진실들은 거의 대부분 가려져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이 멍청한 형사님아. 구두나 지갑을 봤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전부를 안다고 착각하는 건 무슨 경우지?’
케이에 비하면 100배는 멍청한 나도 그런 건 안다. 하지만 나보다도 100배나 멍청한 형사는 그걸 몰랐다. 그러니까 그해 여름, 케이는 큰 눈을 굴리며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케이가 첫 소설을 완성하기 훨씬 더 전의 일이다. 심지어 나는 그때 제대로 글자를 읽을 수도 없었다. 우리는 둘 다 너무 어렸다. 그리고 그날 좋아하던 체리무늬 샌들 한 짝을 잡으려고 강물로 걸어 들어간 건 케이가 아니었다. 물속에서 이끼를 밟고 넘어진 것도 케이는 아니었다. 내가 허우적대며 급류 쪽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을 때 나를 구하려 물에 뛰어든 건 케이가 아니었다. 나를 뭍으로 밀어올린 뒤 강가에 새파랗게 누워있던 건 케이가 아니다. 그것은 엄마였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제일 크게 운 것도 물론 케이는 아니다. 제일 크게 울었음에도 용서받지 못한 것 역시 케이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 큰 소리로 우는 법을 잊어버린 건 케이가 아니다. 그것은 나였다. 그런데 어째서 형사는 케이가 강으로 걸어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쯤에서 미리 말해두겠다. 이 이야기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나에게 케이만큼만 글을 쓰는 재주가 있었다면 나는 이 글을 스릴 넘치는 추리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글조차도 쓸 수 없는 인간이다. 노력? 왜 안했겠는가? 나라고 노력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나는 형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고, 나는 케이의 하나뿐인 동생이고, 그러므로 나는 누구보다 끈질기게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나갈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노력, 나도 해봤다. 하지만 내 고백은 이렇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현실에서 한 단어도,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케이가 돌아오지 않는 한 그 어떤 진실도 나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내가 형사도 당신도 그 누구도 아닌, 케이의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게 바로 그 이유다. 그러므로 나의 얘기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끝난 것과 같다. 이 글을 끝까지 읽지 말기 바란다. 아니, 당신은 처음부터 이 글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 이것이 내 경고다. 글의 끝에서 당신은 결국 당신이 읽은 것이 아주 긴 제목에 불과하다는 것만을 깨달을 것이다. 정신 건강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달려 나가서 잉글리쉬 리스닝 테이프나 하와이언 보사노바를 듣는 게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읽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당신은 이 미친 여자의 반복되는 헛소리를 끈질기게 들어줘야만 한다. 어쨌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케이는 물을 싫어했다. 끔찍하게. 형사는 그걸 몰랐다. 아마 당신들도 몰랐을 것이다.
유능한 형사였다면 케이의 욕실에 욕조가 없다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어야 했다. 케이의 욕실은 욕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작지 않다. 집의 크기에 비하면 차라리 크다고도 볼 수 있는 욕실이다. 그런데도 그 넓은 욕실에는 샤워기마저 보기 싫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있다. 형사는 왜냐고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까지 이사를 나가 집에 혼자 남게 됐을 때, 케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욕조를 들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케이는 언제나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은 후 몸에 물을 댔다. 더러운 년. 아무도 몰랐다. 내색은 안 했지만 케이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그런 나쁜 습관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할 만큼 견고한 미모를 갖고 있다는 걸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세포라도 지워버릴 듯 몸을 씻는 쪽은 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였고, 또한 우리 아빠였다. 아빠를 닮은 건 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였고, 엄마를 닮은 것이 케이였다. 아니다. 케이는 부모의 유전자로 구성할 수 있는 모든 잘난 것들의 합이었고, 나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리고 물을 싫어하는 건 내가 아니라 케이였다. 형사는 그걸 몰랐다. 그건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도 케이에게서 늘 물 냄새가 났던 이유는, 나도 모른다.
“언니가 물로 죽으려고 했다면 강이 아니라 차라리 여기에 코를 박았을 걸요?”
나는 케이가 쓰던 머그잔을 들어 보이며 형사에게 말했다. 나에게 연락이 닿은 뒤 형사는 일단 케이의 집을 수색해야겠다고 했다.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케이의 생존에 대한 아무런 가능성도 믿지 않는 주제에, 누구를 위한 가능성을 찾으려고 케이의 삶을 수색하겠다는 거지? 어째서 당신은 케이의 집에 순순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거야?’
나는 형사에게 그렇게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고, 그는 발을 들였다. 형사의 무모한 계획을 순순히 실현시켜준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가 아는 한, 나는 케이의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케이와 나의 가련한 아버지를 말하는 거다. 케이의 집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빠의 집이었다. 물론 나와 엄마의 집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족들이 하나씩 집주인으로써의 권리를 포기해버린 후로는 케이만이 혼자 남아 집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어느덧 꽤 멀고 흐린 기억이 됐다. 오래 묵힌 절임음식 같은 기억, 가끔씩 꺼내어 맛을 본 뒤 다시 찬장 구석으로 밀어두는 기억, 내 유년의 아픈 조각, 죽을 때까지 딸들에게서 잃어버린 아내의 모습을 찾아 헤맸던 남자, 셀 수 없이 많은 암의 희생자 중 하나. 형사는 그걸 모른다. 당신도 모른다. 한동안 케이는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숨죽여 울었었다. 나는 케이의 옆에 앉아 모든 걸 지켜봤다. 그 여름날 이후로 우는 능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케이를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울거나 우는 척하며 우리가 어둠 속에 함께 앉아있었던 건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우리가 바랐던 기적은 아무리 기다려도 올 줄 몰랐다. 칠 년이다. 아빠는 무려 칠 년 동안 그 끔찍한 병과 싸웠다. 때로는 이겼고 때로는 졌지만, 그 병과 싸운 모든 사람들처럼 결국은 죽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결국, 죽는다.
이제 아빠는 케이의 이야기들처럼 그를 아는 몇몇의 나약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를 기억하는 나약함의 개체수도 줄어들어가고 있다. 아버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의 아버지, 두 딸들이 제 어미처럼 물에라도 휩쓸릴세라 밤에도 단꿈 하나 꾸지 못하던 내 가련한 아버지, 그런데 당신의 착한 딸은 지금 어디로 갔나요, 내 아버지?
강을 건너가지 못하는 질문들.
강을 건너오지 못하는 대답들.
그리고 여기 한 쌍의 머저리들이 강물의 기억을 넘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다. 텅 빈 케이의 집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은 머저리 형사와 머저리 나였다.
“어이구, 이런 집은 또 처음이네? 언니분이 아주 그냥 깔끔한 성격이셨나 봅니다. 아니면…… 얼음공주였나?”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형사는 굽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 말도 틀리다고 볼 순 없었다. 그렇게 냉기 가득한 집은 나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곳이 나의 고향이었다. 그 집의 냉기는 나의 일부이기도 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케이의 집은 내 낡은 기억 속의 모습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내가 발을 들이지 않은 몇 년 동안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 듯했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세간들, 온기가 결여된 새하얀 가구들, 새하얀 벽들, 높은 천장들, 분획되지 않은 공간들, 그리고 사철의 냉기와 유령들. 그 사이로 이 문을 열면 아직도 아빠가 나올 것 같고, 저 모서리를 돌면 아직도 엄마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케이를 물가로 가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이게 답니까? 카드도 없고, 통장도 없고, 달랑 이 박스 하나예요?”
형사는 내가 내민 박스를 1등에 당첨된 로또라도 되는 듯 황송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원래는 오래 전 아빠가 출장길에 사온 버터쿠키가 들어있던 커다란 알루미늄 박스다. 지금은 케이의 전 재산이 들어있는 금고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래요.”
이불 홑청 속이나 서까래 위에 전 재산을 숨겨두는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하면 쿠키 박스는 별로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빨간 구두를 다시 본 순간 나는 케이가 이 박스를 버리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했다. 쿠키를 다 먹은 날부터 케이는 박스에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내 생각이 맞는다면 케이는 그날 이후 평생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그곳에 모아온 게 틀림없었다. 형사에게는 믿기 힘든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케이라면, 그 낡은 구두를 여태 버리지 않은 여자라면 가능했다. 박스는 늘 있던 자리에 놓여있었다. 케이의 침대 밑 한 켠에. 숨긴다고 숨겼지만 누구나 알 만한 그 자리에. 달라진 건 없었다.
“생각해 봤는데요……. 그냥 여행을 간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을 때 형사는 여전히 박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박스 속의 돈을 눈으로 헤아리며 마분지처럼 무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재작년에 만료된 여권으로 멀리는 못 갔을 겁니다. 아, 놀랄 거 없어요. 뭐 그 정도는 우리도 조사할 줄 아니까. 밀항의 가능성은 제외하자구요, 우리.” 찌든 커피 비린내. 찌든 담배 비린내. 터진 점퍼 주머니. 여전히 박스를 향한 눈. 그때 나는 형사의 뺨을 한 대 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치지 않았다. “만약 여행을 갔다면 국내에 머무르고 있을 거라는 얘기죠, 내 말은. 살아있는 모습으로든, 죽어있는 모습으로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때 나는 그를 쳤어야 했다. 그러나 치지 못했다. 내 분노는 언제나 종잇장처럼 납작하고도 비겁했다. 그리고 저기 저 용감한 형사. 마분지 같은 목소리로 죽음을 말하는 마분지 같은 눈의 형사. 아무 말이나 멋대로 내뱉고도 한 대 얻어맞기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는 형사. 그 대신 특권이라도 되는 양, 아무 허락도 없이 케이의 의자에 걸터앉는 형사. 고로 개자식. 그 의자만은 안 된다. 아빠가 직접 만들어준 나무의자였다. 그 의자는 누구도, 심지어는 나조차도 함부로 앉지 않는 케이만의 의자였다.
“유서가 안 나오는 경우에는요, 구두를 유서로 봐야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뭐가 자꾸 그렇지 않냐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구두는 구두고 유서는 유서다. 유서는 말이 있지만 구두는 말이 없질 않은가. 나는 잠시 형사가 13세기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것도 13세기 뒷골목의 꼬마 불한당. 나는 저 꼬맹이의 엉덩이를 걷어찬 뒤 케이의 의자를 되찾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그러기 전에 그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의자의 한쪽 다리를 축으로 거실바닥에 원을 그리며 뺑 돌았다.
“그나저나 언니분이 상당히 미인이셨네요.”
형사는 벽면에 걸린 케이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의 감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형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생명을 소실한 과거의 보물을 보는 자의 눈으로 케이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수천억년 된 호박 속의 모기 같은 것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말에는 대꾸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라도 케이의 사진을 보면 ‘진짜 미인이잖아!’라고 말할 줄 알았으며, ‘이게 정말 너네 언니라고? 하나도 안 닮았는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줄도 알았다. 그런 말에는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대꾸가 별 소용없다는 것을 나는 거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형사도 내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는 나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지 몰랐다. 형사는 이제 상당히 미인이셨던 케이의 의자에서 일어나 상당히 미인이셨던 케이의 추억을 멋대로 밟고 다니는 중이었다. 아빠가 직접 짠 하얀 옷장과, 그 안에 걸린 엄마의 오래된 원피스와, 그 옆에 걸린 내가 5년쯤 전에 선물한 머플러를 그는 멋대로 헤집어놓았다. 그러고도 케이의 자살을 증명해주거나 그 반대의 것을 증명해줄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수첩쪼가리 하나 안 나오기도 힘든데 말이죠. 어떻게 된 게 주변에 당신 언니를 안다는 사람이 없어요. 현장에 무슨 목격자가 있길 하나, CCTV에 잡힌 건 편의점이 끝이고 나 참. 이런 깜깜한 사건은 우리도 진짜 힘들다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유능한 형사였으면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찾아내지 못했다.
대신 뭔가를 찾아낸 것은 나였다. 형사보다 유능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적어도 그보다는 내가 케이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형사의 눈에는 평범한 물건으로 보였을 것을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형사에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형사는 황급히 몇 가지의 추억을 핀셋으로 집어 들기 시작했다. 그 추억들은 플라스틱 지퍼백으로 떠밀려 들어간 후 밀봉됐다. 증거물 1, 2, 3……. 우리의 추억에 번호가 매겨졌다. 그리고 곧장 형사의 터진 점퍼 주머니 속으로 쑤셔 박혔다. 어쩌면, 어쩌면 형사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 번호들이 내가 원하는 바를 증명해주지는 못하리란 걸 말이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일련의 숫자들이 그저 하룻밤의 악몽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어제의 삶이 이어지기를 나는 바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라진 사람들이 되돌아오길 바라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훼손된 추억들이 복원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저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지퍼백 안의 산소보다도 희박한 것이었다. 그 안에서는 어떠한 생명체도 오래 견뎌낼 수가 없다.
수집할 추억이 다 떨어지자 형사는 할 일을 잃고 말았다. 몇 개의 지퍼백으로 주머니를 부풀린 후, 그는 찌든 악취를 풍기며 잠시 내 앞에 서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나기라도 한 듯 말했다. 일단은 돌아가 봐야겠다고. 일단은 케이의 집을 수색해야겠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 형사께서, 고작 몇 시간도 못 견디시고는 이렇게 나약하게 등을 보인다. 그러세요. 그러도록 하세요.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길.
3。
내가 찾아낸 것은 한 장의 CD였다. 함께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규칙이란 게 있는 법이다. 케이는 그런 규칙을 아주 많이 가진 사람이었고, 그 CD는 케이의 규칙에 어긋나는 장소에 꽂혀있었다. 솜씨 좋은 추리작가의 글 속에 등장하는 명탐정이었다면 그 CD를 통해 지금쯤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냈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역추적 했을 것이고, 일이 잘못된 첫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을 것이며, 바로 그 지점에 박힌 탄환을 꺼낸 뒤 봉합해두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상처는 흉터도 없이 아물고, 모든 잘못된 기억들은 쌓이기도 전에 지워졌겠지.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나는 솜씨 있는 사람의 글 속에 등장한 적이 없다. 나는 형편없는 독백 속의 형편없는 탐정이었다. 또한 형편없는 탐정이기 이전에 형편없는 동생이기도 했다.
형사의 차가 골목을 다 벗어난 뒤로도 나는 꼬박 10분을 더 기다렸다. 그런 다음 케이의 노트북을 열고 CD를 밀어 넣었다. 700MB짜리 CD-R. CD의 앞면에는 케이의 필체로 <my everything>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내가 아는 한, 케이는 ‘모든 것’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썼다. 다시 말해 그 CD는 케이의 규칙에 어긋나는 장소에 꽂혀있었던 데다 케이의 규칙에 어긋나는 이름까지 달고 있었다. 아무리 멍청한 탐정이라도 그쯤이면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챈다. 결정적인 증거가 손에 들어왔음을 확신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이제 곧 내 손이 종을 울리고 내 입이 빙고를 외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승리의 도취감보다 먼저 찾아온 건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700MB짜리가 누군가의, 그것도 케이 같은 사람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CD가 실행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물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얘기는 달라진다. 일반적인 CD 한 장에 거는 기대치를 기준으로 한다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이전보다 조금 더 쓸모없는 사람이 됐다고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얘기다. CD의 실제 내용물은 겨우 50KB밖에 안 됐다. 파일명은 ‘01’. 저장된 날짜는 한 달 전. 50KB에 비하면 광활한 평야 같은 공간이 단 하나의 파일 주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평야 위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것은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케이의 신발 굽은 늘 비스듬히 닳았다. 그건 케이가 발레리나처럼 바깥세상을 향해 발을 뻗고 걷는 여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녀의 마음은 밖으로 향한 적이 없다. 케이는 일생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데 보냈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그 잘난 얼굴을 가지고도 서른하나가 될 때까지 흔하디흔한 친구 하나 내게 보여준 적 없는 여자가 케이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의 동생이다. 나는 지금 케이의 심장이 차갑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케이의 심장은 항상 뜨거웠다. 적어도 당신이나 나만큼은. 하지만 그 심장에서 품어져 나오는 피는 오로지 그녀 자신만을 위해 돌았다. 그런 얘기다. 우정? 그런 건 어린이를 위한 교양서 시리즈 속에서나 찾을 일이고. 사랑? 그런 건 재고로 남은 발렌타인 초콜릿더미 속에서나 찾을 일이다. 케이는 그런 것들로부터 멀찍이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케이가 다른 사람과 네 문장 이상 대화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나 같은 열성 유전자의 조합조차도 가짜 눈물이나마 몇 명의 남자를 위해 흘려봤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남자를 울렸다. 그러나 케이는 내 앞에서 자기 이외의 사람 때문에 운 적이 없다. 병든 아빠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발레를 했더라도 케이는 잘 했을 것이다. 좋은 유전자에서 기인한 선이 예쁜 몸을 갖고 있었고, 하려고만 한다면 뭘 해도 사실은 다 잘했다. 우물쭈물 거리다 다된 일마저 그르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케이가 아무것도 하려고 들지를 않았다는 거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사춘기 이후로 케이의 열정은 자신이 살아있는지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자주 거울을 보거나,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데에만 사용됐다. 그러므로 만약 CD 안에 들어있던 게 케이의 사진이었거나, 하다못해 케이의 이름 석자였다 하더라도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케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케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케이 자신이어야 했다. 내가 아는 한, 케이는 세상에서 가장 자기 자신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녀의 이름 석 자가 그녀 자신의 자리를 채우기도 했다. 나와는 한 글자밖에 다르지 않은 이름 그 세 글자에도 세상 모든 것의 가치보다 더 소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 언니라는 호칭 대신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달라고 한 것도 케이였다. 나는 언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이 아니라,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러 왔다. 케이, 케이, 케이……. 하지만 CD 안에 누운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때, 나는 내가 과연 그 이름을 알았던 적이 있긴 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게 다인가? 이것이 남아있는 모든 것인가? 텅 빈 모니터 안을 헤매는 텅 빈 커서, 0바이트, 0바이트. 정말로 그게 다였다. 그것이 남아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하드디스크는 완전히 포맷되어 있었다. 휴지쪼가리 하나 남기지 않고 케이는 전부 다 지워버렸다. 내가 아는 케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케이는 자신의 흔적을 세상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짜 케이는, 내가 아는 케이는 어디로 갔단 말이지?
이쯤에서 다시 또 말해두겠다. 오늘 나는 감히 재능 있는 추리소설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 이 시간이 소설의 마지막 장이 아닌, 첫 장이기를 나는 원한다. 내가 써놓은 글 안에 치밀한 복선들이 행간을 비집고 숨어있기를 나는 바란다. 모든 게 내가 아는 그대로이고, 내가 아는 것들이 하나의 완전한 세계이기를. 그리고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 거짓말처럼 케이가 돌아오거나, 실은 이 실종사건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며, 실은 아주 먼 타인의 사정일 뿐이며, 실은 어떤 꾸며낸 이야기의 극적 구성을 위한 미끼일 뿐이며, 실은 지구를 구원할 거대한 계획의 일부이며, 그래서 사실 케이는 지금 따뜻하고 안전한 섬에 잠복한 채 진짜 삶다운 삶을 누리고 있고 언젠가는 천국처럼 달콤한 치유의 선물을 가지고 돌아와 나에게……
그러나,
그러나 벌써 한 계절이 다 지나간다. 나는 겨우내 사진 한 장과 이 책을 붙들고 있었다. 어떤 새로운 문장도 더 나타나지 않았다. 0바이트, 0바이트, 텅 빈 평야.
맞다. 나는 조금 전 케이의 피가 그녀 자신만을 위해 돌고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형편없는 동생의 형편없이 편협한 오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나는 그녀의 피가 흘렀던 비밀스러운 방향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했으며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한 계절 동안 깨달은 것의 전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너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적인 선택이 아닌 줄 알면서도 엉뚱한 곳에서 기적을 찾았다. 예컨대 삼주 전에는 시험 삼아 케이의 티셔츠 한 개를 갈기갈기 찢어버려 봤다. 그보다 하루 전에는 케이의 화장품들을 집어던져보기도 했다. 그보다 30초 전에는 케이의 이름 앞에 내가 아는 모든 욕을 덧붙여 불러봤다. 그보다 한 시간 뒤에는 좀 더 많은 욕을 배워두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 내 머리를 열 번쯤 세게 때렸다. 그런 다음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말아 쥔 뒤 가위로 잘라버렸다. 쩔꺽쩔꺽 은색 날이 울어댈 때마다 머리카락은 헛된 미련들처럼 흰 마룻바닥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이루어주지 못했고 아무것도 증명해주지 못했다. 다만 목뒤가 서늘해졌을 뿐이다.
형사는 지금도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나에게 진척상황을 묻는다. 하지만 그건 내가 물어야 하는 질문 아닌가? 모두들 아웃이다. 작가는 지독하게 무능한 걸로 판명되었고, 탐정은 해고되었으며, 형편없는 동생은 이 사건에서 영원히 제외되었다. 그런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이 땅의 모든 겨울은 언제나 다른 계절보다 길었지. 그런데도 올겨울이 이토록 예외 없이 춥고 길다는 것에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해 여름 보라색 입술로 강물에서 구조됐을 때, 내 몸 어느 구석인가에 깊고 어두운 추위가 숨어들어왔다. 그날 이후 나에게는 몸을 떠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케이의 스웨터를 입고 케이의 이불을 뒤집어쓴 채 케이의 책상에 앉아 케이의 머그잔에 든 커피를 마시며 케이의 노트북을 열고 케이의 everything을 한 계절이 다 지날 때까지 쏘아보았다. 주인 몰래 영혼을 보는 병든 개처럼 덜덜 떨면서. 그렇지만 그 50KB의 조악한 스캔본 얼굴에서는 무엇도 더 나타나지 않았다.
계절의 끝은 너무나도 멀다. 시작된 날은 분명한데 끝나는 날은 지워져있다. 어느새 삼월이지만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두껍고, 내 옷은 그들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두껍다. 아무도 모른다. 이번 달만 해도 내 몸에서 0.7㎏의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그러니까 어제와 오늘 이틀 새에. 지난달에는 자그마치 6㎏이었다. 숙면도 식욕도 이제 나에게는 먼 얘기들이다.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옷을 덧입었다. 빈 공간을 채워주기에 두꺼운 옷만큼 좋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두 개의 티셔츠, 두 개의 스웨터, 두 개의 코트, 그리고 0바이트, 0바이트.
“자동응답기에는 당신의 메시지가 일곱 개, 서점에서 온 메시지가 한 개(주문한 책이 들어왔다네요), 그리고 기막힌 알짜배기 땅이 있다나 뭐라나 하는, 스팸으로 생각되는 메시지가 또 한 개. 그런데…… 당신은 언니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더군요. 왜죠?”
뉴스에서는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들판을 뛰어오르는 절기가 다가온다며, 오늘 저녁쯤 첫봄비가 온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누구에게 반가운 소식인지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케이가 아니었다. 나는 케이와 달랐다. 나는 양 발을 11자로 두고 똑바로 걸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하지 못했다. 언제나 평행선 위를 위태롭게 걷는 여자. 그게 나였다. 그게 나다. 케이였다면, 내가 케이였다면 오늘쯤은 봄이 시작되는 볕의 변화를 감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케이가 아니다. 나는 한 번도 케이인 적이 없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연락했습니까? 언니분 명의로 된 핸드폰이 없더군요. 먼저 연락을 하는 쪽은 당신이었습니까? 당신의 메시지를 들으면 언니 쪽에서 곧바로 전화를 걸어오나요? 사이는 좋은 편이었습니까?”
형사는 끊임없이 묻고 빠르게 수첩으로 옮겨 적는다. 내가 전화하면 케이의 녹음된 음성이 응답하는 것처럼 그의 반응은 기계적이었다. 나는 기계에 일일이 대꾸해줄 만큼 관대한 사람이 아니다. 형사는 전화기 속의 작은 테이프를 꺼내 플라스틱 봉투에 집어넣었다. 증거물 9. 이제 일곱 개의 내 목소리는 친절한 서점주인 하나, 불친절한 알짜배기 스팸 하나와 함께 봉투 속에 밀봉된 채 언제까지고 갇혀있게 될 것이다. 사이가 좋은 편이었냐고 내게 물었는가? 그런 건 모른다. 어디에 기준을 둬야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족을 다른 누군가의 가족과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케이와 나의 관계에 대해 굳이 알아야겠다면, 나는 이렇게는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이나 같은 기적을 바라왔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유대감이 우리에게는 있었다고. 케이와 내가 공유한 것은 몇 번이나 바라왔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종류의 기적들이었다. 그리고 그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나란히 자라났다. 그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함께 설익은 밥알을 씹어 삼켰고, 그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함께 눈물을 숨겼으며, 그 상실감 속에서 남들은 모르는, 오로지 자매들만이 아는 놀이를 하며 밤을 기다렸다. 지금도 잠들기 전이면 나는 어린 시절의 케이를 어둠속으로 불러내 단둘이서 그 놀이를 하곤 한다. 그 게임에는 아무도 끼어들지 못한다. 아무도.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건 언제였죠?”
“가을이요. 두 달 전쯤.”
“그게 일반적인 간격입니까?”
“일반적이라고 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린 반년 동안 만나지 않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반년 동안 매일 만난 적도 있죠. 형사님은 형제가 없으신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찌든 커피 비린내. 찌든 담배 비린내. 터진 점퍼 주머니.
“두 달 전이라, 두 달.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떤 낌새 같은 거 없었어요? 평소와는 다른 그 무엇?”
케이는 그날 두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국을 담아도 될 만큼 커다란 머그잔으로. 평소와 다른 건 하나도 없었다. 에스프레소는 케이의 구멍 난 위장에 좋지 않았지만 그 머그잔으로 두 잔까지가 그녀가 타협할 수 있는 한계점이었다. 케이는 살면서 아주 소수의 몇 가지 것들에만 중독되었는데 첫 번째는 물론 자기 자신이었고, 두 번째는 쓰는 행위, 세 번째는 석유원액처럼 진한 커피였다. 어쩌면 CD 속의 남자도 케이가 중독된 몇 가지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아니면 그는 100%의 우연으로 만들어진 함정일 수도 있다. 케이에게는 우연히 빈 CD에 무의미한 제목을 적어 넣은 잘못밖에는 없다. 남자의 사진이 우연히 그 CD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남자의 사진이 잘못이었다. 케이가 아니었다. 사실 케이는 그 CD 안에 100편의 소설들을 넣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 쪽이 말이 된다. 어때, 케이? 내 말이 맞지?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지? 실수였지? 그렇지?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제 그 실수는 내가 가진 유일한 단서다. 고작 50KB의 희망.
유능한 형사였다면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케이의 지갑 속에 어째서 핸드폰 수리기사의 명함이 들어있는지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나는 의아했다. 왜냐하면 명함에 수리기사의 얼굴이 박혀있었던 걸 내가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그 얼굴과 CD 속의 얼굴이 동일한 이목구비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내가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몇 주의 시간이 걸렸다. 깨닫고 나서야 ‘아, 그때 그 얼굴! 이 얼굴이랑 똑같은 얼굴이었잖아?’ 무릎을 치며 자신의 낮은 지능과 협소한 기억력을 탓하게 되는 그런 것. 케이보다 100배는 멍청한 나도 아는 그런 것. 그런데 형사는 그걸 몰랐다. 지금쯤 그 명함 속의 얼굴은 플라스틱 지퍼백에 담겨 케이양 실종사건과 관련된 저 불충분한 증거물들과 함께 경찰서 어느 구석에선가 썩어 들어가고 있겠지. 우리가 마지막 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었는가? 나는 기억해낼 수가 없다. 케이가 입고 있던 오래 된 스웨터의 색을 기억하지만, 그 스웨터의 나달거리는 소매 단을 기억하지만, 그 스웨터의 올 풀린 구멍을 기억하지만,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케이의 말들은 그녀의 소설 주인공처럼 입에서 나오자마자 내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버리곤 했었다. 케이의 말들은 늘 그랬다. 쉽게 잡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잡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말들이 스웨터의 구멍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버린 뒤였다. 내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었는가?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날 케이의 얼굴이 하룻밤 새에 늙어버린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보였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날 케이의 눈이 내가 모르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날 케이가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을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내가 기억하는 한, 케이의 얼굴은 언제나 늙은 아이의 얼굴이었고, 케이의 꿈은 언제나 내가 모르는 영역에 속해 있었으니까. 그리고 케이는 언제나, 언제나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내 인생에는 구멍이 많다. 내게 무엇을 기억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구멍 주위로 너풀대는 연약한 털실들만을 기억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 구멍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므로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날 케이는 그냥 케이였다. 평생 동안 내가 알았던,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냥 케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계절이 언제 끝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뉴스는 온 세상을 적셔줄 반가운 봄비를 얘기한다. 그렇지만 내 몸은 여전히 떨고 있다.
4。
처음 형사의 전화를 받은 날 이후로 많은 일들이 어그러졌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많은 일들이 바로잡힌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내 직장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더구나 케이의 거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사태는 좀 더 명확해진다. 특히 나는 거실 끝에 놓인 이 오래된 등나무의자를 좋아했었다. 어릴 적, 엄마가 하얗게 햇볕을 받으며 책을 읽을 때면 나와 내 강아지가 기어 올라가 낮잠을 자곤 했던 이 의자.
그렇다. 나는 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할 일이 있다.
내 사표가 수리되는데 걸린 시간은 열두 시간 남짓이었다. 뭐든 빨리 빨리 처리돼야하는 이 나라에서 간단한 서류 처리 하나에 열두 시간씩이나 걸렸다고 심통을 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7년 6개월을 뇌 없는 소처럼 일한 것에 비하면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누구도 진심을 가지고 나를 붙잡지 않았다. 더러는 등 뒤에서 입을 가리고 웃기도 했으리라. 그게 다였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직원 한 둘 사라진다고 눈 껌뻑할 만큼 정다운 곳이 아니었다. 빈자리는 즉각 채워진다.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온 도시에 널려있다는 걸 회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회사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새벽의 수영강습, 저녁시간을 쪼갠 일어강좌, 새로 생긴 파스타집 순례 같은 건 일단 끊고 나니 내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도 차지하지 않고 말끔히 지워졌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3년 넘게 산 아파트였지만 돌아선지 30분도 못 돼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로도 지울 수 있을 만큼 희미해져버렸다. 집주인도 이웃들도 석판화처럼 납작하고 차가운 인사만을 내게 보냈다. 나 또한 그 정도의 인사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지금쯤이면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나와 달리, 벌써부터 집주인과도 이웃들과도 좋은 친구가 됐을지 모른다.
괜찮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다. 나는 오늘 케이의 거실에서 편안하고, 그걸로 됐다. 케이의 것이자 나의 것, 내가 늘 도망쳐야 했던 고향에서.
등나무의자에 기대 앉아 나는 생각한다. 왜 도망쳐야 했는지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운이 좋다고. 도망쳐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유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더 운이 좋다. 나쁜 과거를 지울 수 있는 축복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는 이러나저러나 나도 행운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망쳐 나온 순간 나는 모든 이유들 위에 종이 한 장을 덮었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을 때만 그 종이를 들춰본다. 나는 확실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제 나는 그 종이의 끝을 슬쩍 젖혀 당신에게 한 조각을 보여준다. 그 조각 위에는 십대의 내가 서있다. 그때 나는 누구보다도 머저리 같았었고, 내가 쓸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이 집에서 도망치려고 했었다. 그리고 매번 실패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모든 성공하지 못한 시도 끝에 다시 돌아왔을 때마다 어김없이 케이와 아빠가 이 거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끝내 내가 탈출에 성공한 건 아빠가 돌아가신 후였다. 그 무렵엔 이미 도망치고자하는 욕망도, 내 가여운 십대도 나약한 촛불처럼 사그라져버린 뒤였다.
한때는 케이와 나와 아빠가 함께 아침마당이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같은 TV 프로그램에 나가 그 미친 개 같던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는지에 대한 얘기들을 화기애애한 미소와 함께 늘어놓는 몽상에 빠져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집을 떠나있던 열 번의 무자비한 겨울은 그런 몽상들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기적으로 바꿔놓았다.
자, 그렇지만 기적은 기적이고 과거는 과거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더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는 것이다.
형사는 전화를 걸 때마다 말했었다. 뭔가를 더 발견해 내면 자기한테 꼭 말해야 한다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넌짓 덧붙이는 말버릇. 하지만 그 말이 전화의 목적이라는 걸 나는 늘 알고 있었다. ‘혹시 뭐 찾아낸 거 없어요? 혹시 더 알아낸 거 없어요?’ 바보 같은 새끼. ‘없어요, 아무것도.’ 하고 매번 대답하지만, 나는 사실 이 집에서 거의 매일 매시간 뭔가를 발견해낸다. 지나치게 단조로워 보이는 이 집은 알고 보면 놀라운 창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물 같거나 악마 같은 추억들이 뚝뚝 떨어져 나온다. 어떻게 이것들을 잊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그것은 함께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절대로 알지 못할 흔적들이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형사가 그것들을 훼손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 일을 해치울 것이다. 나에게는 오늘, 할 일이 있다.
군인들은 전장에 나가기 전 무장을 한다. 나는 케이의 옷장을 열고 두꺼운 옷들을 꺼내 겹쳐 입었다. 그리고 가장 겉에 입은 코트 주머니에, 내 손이 가장 잘 닿을 수 있는 그 위치에, 접을 수 있게 된 작은 칼을 집어넣었다. 옷장 밑의 먼지 속에서 찾아낸 칼이었다. 그것은 케이의 것일 수도 있고 아빠의 것일 수도 있었다. 혹은 다른 모든 사람의 칼일 수도 있었다. 그 칼에는 초라한 사이즈에 걸맞지 않게 <sword of vengeance>라는 거창하고도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이름이 고쓰풍의 필기체로 음각돼있었다.
어째서 칼이냐고 묻는 건가, 당신?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나도 안 해본 게 아니라 이거다. 칼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다 해봤다. 케이가 갈만한 곳은 진작에 다 가봤고, 케이를 알 만한 사람들도 진작에 모두 찾아봤다. 심지어는 일찌감치 우리의 삶에서 떨어져나간 친척들에게까지 전화를 걸었었다. 낡아빠진 안부를 묻는 척 하며 나는 케이의 이름을 슬쩍 흘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 기억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케이는 이미 삭제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디에서도 케이의 체취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열 번의 겨울을 지나보내는 동안 케이와 나 사이의 틈이 너무 벌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케이는 너무 자기 자신인 사람이었다. 케이는 너무 오래 혼자였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 속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것은 오로지 등나무껍질처럼 빳빳한 그녀 자신의 이름과 냉기뿐이었다. 바로 그 점이 이 실종사건을 칼끝으로 몰아넣었다. ‘케이? 케이가 누구였더라?’로 시작되는 수많은 무심한 말들 안에서 나는 케이의 현재를 알려줄 글자 하나, 숫자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그 CD 밖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 50KB의 사진 한 장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칼을 들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겨우내 별렀던 일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 건 오늘 아침이었다. 그동안은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었고, 사실은 상황도 내 마음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가 나를 돕고 있다. 대지는 단단하고, 바람의 세기는 적당하며, 햇볕은 완벽하다. 나는 먼저 물을 끓였다. 거기까지는 수십 번도 더 시도해 본 과정이다. 그런 뒤 케이의 머그잔에 끓는 물을 가득 부었다. 거기까지도 수십 번. 그 다음 단계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처음이다. 나는 아직도 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잔 안의 물속으로 핸드폰을 빠뜨렸다.
1……
2……
3……
이런 기회나 되어야 우리는 가까스로 생각이란 걸 해본다. 그제야 우리가 이 작은 기계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겨넣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친구, 가족, 사랑, 미래, 고향, 반가움, 미련, 허황된 꿈, 집합된 기술, 내 나라의 자부심, 탑 모델의 미소, 거짓말, 갈증, 실패한 혁명, 경쟁, 차별, 허영, 혈투, 사기, 질투, 거품, 전쟁, 할부금, 연체료, 이자, 이자, 불어나는 이자, 어쨌거나, 어쨌거나 유명한 이름을 소유했다는 으쓱함. 그러나 그 값비싼 이름도 뜨거운 물속에서는 별 수 없었다. 단지 몇 초를 기다렸을 뿐인데 튼튼하기로 소문난 내 핸드폰은 맥을 못 추고 익사해버렸다. 케이는 말했었지. “난 말이야. 물속에 몸을 담그는 게 무서워. 그래서 욕조가 필요하지 않은 거야.”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는 욕조에 누워 자신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여자가 있을 것이다. 겨우내 별렀던 일을 이제야 해치운다는 듯이, 속 시원하다는 눈빛으로 따뜻한 물이 빨갛게 물들어가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겠지. 그녀는 몇 시간 후 시체로 발견되거나, 혹은 그 이전에 발견되어 응급실로 실려 가고, 수혈을 받고, 산소를 공급받고, 그리고 스스로 지옥이라 명명한 삶을 다시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커다란 머그잔에 코를 처박고 죽어가는 사람도 한 둘쯤은 있을지 모른다. 매일 자신이 두 번씩 에스프레소를 들이키던 바로 그 잔에. 액정이 깜빡거리는 걸 보면서 미처 백업해놓지 못한 전화번호들과 사진 몇 장이 아직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게 기억났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CD 한 장 안에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여자에 비하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대기업의 서비스센터는 서울시내에 최소한 구마다 하나씩은 있다. 내가 서있는 케이의 거실에서는 20분 거리 내에 3개의 서비스센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야 하는 곳은 벌써 정해져있다. 그곳의 위치를 여러 번 검색해봤었다. 여기서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한번 갈아탄 뒤 또 버스를 타고 나서도 300미터나 더 걸어가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서울시내에 있는 몇 안 되는 교통의 사각지대였다.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한 시간이 아니라 일 년이 걸린다 해도 가야 한다. 가서 그 50KB의 얼굴을 찾아내야만 한다. 찾아내서 그 얼굴 앞에 잘 벼려진 sword of vengeance를 들이밀어야만 한다. 어떤가? 내 실패들에 대해 듣고 싶은가, 당신? 오로지 그 얼굴에 칼을 들이밀겠다는 일념으로 그동안 내가 어떤 참혹한 실패들을 겪었는지 듣고 싶은가? 그랬다. 겨울 동안 나는 케이의 집을 중심으로 자그마치 열다섯 개가 넘는 서비스센터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내가 원하는 얼굴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네 번째, 아홉 번째, 열여섯 번째의 허탕. 헛걸음치며 되돌아 나올 때마다 나는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누구의 머릿속에나 잘못된 장소에 놓인 기억들은 있다. 내 경우에는 너무 많은 기억들이 잘못된 장소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었다. 겨울의 첫날, 형사가 케이의 지갑을 보여주며 아는 지갑이냐고 물었을 때, 그 지갑속의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였을 때, 그래서 내가 핸드폰 수리기사의 명함을 스치듯 보았을 때, 그때 나는 충분히 신중했던 걸까? 그 얼굴이 케이의 CD 안에 들어있는 얼굴과 동일하다는 것은 단지 내 기억의 오류 아니었을까? 애초에 이 계획은 첫 조각부터 잘못 끼워 맞춘 퍼즐 같은 것 아니었을까?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의심했고, 의심들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지나치게 의심을 많이 한 날에는 영락없이 슬픈 꿈을 꿨다. 꿈속에서 케이와 나는 아주 어렸다. 우리는 강가에서 시체처럼 파란 낯빛을 하고 우리만이 아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물이 불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젖는다. 온 세상도 젖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꿈에서 깨어나 보면 내 몸은 젖은 걸레가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때마다 오래도록 가슴 밑바닥에 눌러두었던 기도가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신의 음성은, 그러나 나에게서 너무 멀었고 내 영혼의 귀는 너무 딱딱했다. 이렇게 이어진 한 계절의 허탕, 한 계절의 실패……. 그러다 어떤 깨달음이 온 것은 일주일 전이다. 깨닫고 나자 내 자신의 어리석음이 새삼스럽게 크게 느껴졌다. 왜 이제야 기억난 걸까?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케이가 아는 동네라면 그곳뿐이지 않은가? 그 동네에 2020이 있었다. 케이가 일했던 그 미래의 카페 말이다.
한번은 형사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안 우네요?”
“울어야 돼요?”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뭐 보통은 울고들 그러죠.”
“난 안 울어요. 다 큰 뒤에는 우는 법을 잊어버렸거든요.”
“다 컸다? 흐음.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굳이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잘 웃고 잘 울고 말없이 참는 건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케이였다. 나는 울지 않고 웃지 않고 큰 소리로 말하고 화를 내는 쪽이었다. 그러나 형사에게는 화를 내고 싶지도,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말입니다. 당신도 꽤 이상하다 이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꼭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단 말이죠. 혹시 당신, 당신 언니를 숨겨두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형사는 입술 속으로 키득댔다. 그는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농담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혹시 형사님이 케이를 숨기신 거 아닌가요? 형사님의 플라스틱 지퍼백에 케이를 감금시켜 놓은 건 아닌가요? 형사님은 그저 나와 케이를 괴롭히고 놀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아닌가요?’ 이 말도 안 되는 농담이 진담일 가능성을,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케이가 플라스틱 봉투 속에 숨어 있다가 돌아오는 거라면……. 지금도 케이양 실종사건의 첫 번째 용의자는 나다.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 같은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형사는 웃는 얼굴로 나의 침착함을 줄곧 의심해왔다. ‘울며 보채지 않는 동생’이라고 수첩에 적은 뒤 물음표를 잔뜩 그려 넣었다. 그딴 글자들로 나를 협박할 심산이었겠지. 그렇더라도 나는 형사에게 협조할 마음이 없었다. 내가 우는 걸 포기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카페 2020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와 케이만 아는 동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희망을 갖지는 말라구요, 아가씨.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에요. 그렇잖아요. 가능성이란 게 너무 희박하다 이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대개 끝이 안 좋거든.”
그렇겠지. 당신이 믿는 것은 안 좋은 끝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필연적으로 안 좋은 끝을 맞이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믿는 건 그런 끝이 아니었다.
“잘 들어요, 아가씨. 뚜껑을 열고 말고는 당신 마음이라 이겁니다. 하지만 열지 않는다고 그 안에 든 게 바뀌는 건 아니죠. 똥이 든 상자에는 계속 똥이 들어있고 황금이 든 상자에는 계속 황금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도 안다. 내가 믿는 구석이 별 볼일 없는 CD 한 장일 뿐이라는 것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내 50KB짜리 희망이 우스꽝스럽다고 함부로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바보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안 좋을 끝만을 바라보는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여기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고전적인 문장이 하나 있다. 뚜껑은, 열어 봐야 안다는 것.
그리고 내 뚜껑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케이가 돌아오기 전에는.
자, 보라. 색이 좀 바래긴 했지만, 케이의 머그잔에는 아직 카페 2020의 로고가 새겨져있다. 나에게도 똑같은 잔이 하나 있다. 케이가 그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던 첫날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케이가 안다면 나 역시 안다.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 동네는 케이를 만나기 위해 나도 몇 번이나 가봤던 동네였다.
인터넷 검색창에 서비스센터의 주소를 치자 카페 2020도 동시에 지도에 나타났다. 지금은 없는 카페인데도 지도 속에서는 간판을 선명하게 빛내며 서있었다. 서비스센터의 간판은 카페보다도 훨씬 컸고, 빨간색 기호로 깜빡이고 있었다. 두 건물은 겨우 건널목 한 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였다. 케이는 2020에서 꽤 오랫동안 일했다. 그러니 단골도 제법 생길만 했다. 그 단골이 마주보는 건물의 서비스센터 직원이라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케이가 그 먼 동네의 카페를 직장으로 선택했을 때, 나는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가야만 하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케이에게 매일 편도 한 시간분의 여행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케이에게는 단지 여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행…….
여행이…….
됐다. 더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모르는 믿는 구석이 내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이고, 누구도 모르는 가능성이 내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이며, 내가 오늘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리라는 사실이다. 나는 등나무의자를 삐걱이며 겨울 아침의 빛을 두 손에 저장한다. 나에겐 너무 작은 빨간 스웨이드 구두가 발끝에서 덜렁이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투둑. 툭. 툭. 투둑. ‘어릴 땐 가끔 이 집에서 유령을 보기도 했었지. 그건 엄마의 모습이거나, 아기 때 죽은 강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 케이, 혹시 언니도 그 유령들을 봤어? 혹시 그 유령들하고 내내 함께 살았던 거야? 그래, 케이?’ 됐다. 더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이제 내 핸드폰이 유령이 될 차례다. 핸드폰은 그새 머그잔 안에서 익사체처럼 퍼렇게 뻗어있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나는 오늘 그곳으로 간다. 가야 한다. 갈 것이다.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나는 먼저 한강에 들를 것이다. 그리고 케이의 가방이 발견됐던 곳에 앉아 시간을 좀 흘려보낼 것이다. 사실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척하며 속으로는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저 무심한 형사에게 낱낱이 일러바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생각해볼 테지만.
글쎄, 어떻게 될까? 내가 기대하지 않았으나 형사가 나에게 보여준 놀라운 점 하나는, 그가 아직까지 이 사건을 ‘종결사건’으로 분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것을 말하면 형사는 내게 조금 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일단 형사는 사명감 투철한 베테랑 탐정이 된 것처럼 으스댈 것이다. 그런 뒤에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일을 해낼 수도 있겠지. 케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낱낱이 밝혀낼 수도 있을 거야. 심지어는 내가 모르는 케이를 시간 순으로 정렬해서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알고 보니 케이라는 여자에게는 이런 저런 원한관계가 있었단다, 얘들아. 그중 한 명이 범인이었어요. 그 놈에게 바로 이 자리에서 납치당한 뒤 살해된 거지.’ 그러면서 형사는 아이들에게 CD안의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바로 이 남자란다. 어때, 착하게 생겼지? 하지만 바로 이 남자가 그 예쁜 언니를 죽인 거야. 끝이 아주 안 좋았던 거지. 이해가 되니, 얘들아?’ 아이들은 모두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높은 데시벨로 대답할 것이다. ‘네! 네! 전부 이해할 수 있어요!’ 병아리처럼 입술을 삐약삐약거리며, 개새끼들. 나는 절대로 애를 낳지 않을 것이다.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다. 바로 이 남자가 그 예쁜 언니를 죽인 거예요. 바로 이 남자가 언니를 칼로 찌르고, 목을 조르고, 강물에 머리를 처넣고, 증거를 인멸하고, 메모리를 삭제하고, 개새끼들. 나는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가 형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이유다.
5。
회사를 그만둔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케이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 서점으로 가서 케이가 주문했다던 책을 건네받는 일이었다. 그 책을 세 번이나 읽었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 메시지는 그 안에 없었다. 책의 행간에 케이의 암호문이 숨어있기를 바랐던 게 애당초 잘못이었던 걸까? 아직도 내 가방 속에는 그 책이 들어있다. 더는 읽지 않을 것이지만 부적이나 행운의 동전처럼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백과사전이 아니라 백오십 페이지를 갓 넘긴 문고본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새 책을 주문한다는 게?”
내가 물었을 때 형사는 무심함과 천진한 욕망이 반반쯤 섞인 꼬마의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건 모르죠. 하지만 죽기 전에도 먹고 싶은 건 많지 않겠어요? 같은 거라고 보는데, 난. 그렇지 않습니까?”
그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한강으로 향하는 버스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한강에서 내리지는 않을 것 같다. 겨울, 평일 오전 11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시각에 한강을 보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난 이십구 년간의 나였다면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이렇게 버스를 타고 오직 한강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앉아있다. 차창 밖의 풍경은 온통 창백하다. 눈이 왔나 했더니, 세상이 아직껏 하얗게 질려있는 것일 뿐이었다.
고개를 다시 버스 안으로 돌렸다. 준비한 것들을 되새겨볼 시간이 필요했다.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호흡을 다스리며, 나는 리스트에 오른 질문들을 하나하나 연습했다. 긴장할 거 없어. 겨우내 샅샅이 관찰한 이목구비잖아. 난 그 얼굴이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 얼굴에게 모두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의 잘못이 확인되는 순간 칼이 사용될 것이다. 도대체 두려울 게 무언가?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항상 계획했던 것을 실패하는 인간이었지. 몇 번씩 밑줄을 그어놓은 리스트에서도 뭔가를 누락시키곤 했어. 계주를 하다 바통을 놓치거나 결승점에서 엎어지는 마지막 주자가 바로 나였다.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마음속에서 누군가 나를 비웃었다. 그것은 선생님의 목소리였고, 아빠의 목소리였고, 친구들의 목소리였으며, 나 자신의 목소리였다. 큰 시험을 앞둔 아이처럼 손이 떨렸다. 하지만 나는 그 여름날 이후 언제나 떨고 있었지…….
머리가 조금 아파졌다. 감기가 오는 것 같았다.
어느 정류장에선가 사람들이 꽤 많이 탔다. 겨울 들판처럼 성글었던 좌석들이 금세 빽빽이 메워졌다. 버스 안의 밀도가 불쾌할 정도로 조밀해졌다고 느낀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나의 질문 리스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한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뚱뚱한 여자였다. 내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시야는 보고 싶은 모든 것을 볼 만큼 넓지도, 또한 외면하고 싶은 것을 전부 외면할 만큼 좁지도 않다. 그녀의 부피는 내 시야를 넘어섰다. 50대 후반 정도일까, 혹은 막 예순을 넘겼을 것이다. 아직 그렇게까지 늙지는 않았다. 나보다는 훨씬 많은 나이지만 내가 자리를 양보해 줄만큼 늙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아빠 또래다. 내가 아빠에게 해온 그 모진 행동들을 생각하자면 지금 버스 안에서 그 또래의 낯선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는다고 무슨 죄가 될까 싶었다. 살아있다면 엄마도 비슷한 나이가 됐을 것이다. 나는 잠시 내 기억 속의 젊고 예쁜 엄마가 나이를 먹어 그 여자처럼 뚱뚱해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케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일어났겠지.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케이는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는 아무런 욕심도 부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케이는 분명 저 뚱뚱한 여자가 자기 앞까지 오기도 전에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미소를 가득 머금은 그 잘난 얼굴과 함께. 그러나 나는 케이가 아니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계속해서 정면을 바라봤고, 시야의 또 다른 한 끝으로 한강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체크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동방예의지국 같은 건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썩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이제 예의 같은 것들이 모두 썩어버린 땅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심지어는 나조차도 이렇게 나이 들어가고, 허약해져가고, 무너져가는데, 그런데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하나의 기억에 매여 있는 삶은 진절머리가 난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아는 한, 내가 아는 한, 나는 말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 여름날 강물에 빠져 사라진 건 내가 좋아하던 체리무늬 샌들 한 짝만이 아니었다. 그 여름날 이후 강물에 영혼 한 자락을 담가놓고 사는 사람은 케이가 아니었다. 물기 없는 도시 한 가운데서 날마다 익사하는 사람은 케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왜 그렇게 꼬인 거냐고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늘 준비해두고 있다. ‘매듭은 엮은 자가 풀어야하는 법이야.’ 그러나 내 사건들의 매듭이 누구의 손끝에서 꼬여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꼬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십대들은 꼬여있다. 어떤 인간들은 이십대가 된 후 갑작스레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꼬이기 시작한다. 태어날 때부터 꼬인 인간도 물론 있다. 그들보다 더 나쁜 건 시작이 언제였든 죽을 때까지 꼬인 것을 풀지 못하는 이들이다. 나는 내가 그런 인간이 될까봐 두렵다. 그렇지만……
“아! 두려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케이.”
“두려움이라고? 그렇지만…… 치마를 걷어 올리고 건너면 물은 무릎까지 밖에 안와. 찰랑찰랑.”
“그게 무슨 말이야, 케이? 언니는 왜 항상 그렇게 이상한 소리만 하는 거지?”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득 목뒤가 시리다. 한참을 갔다고 생각했는데 한강은 아직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내 앞에 선 여자가 나를 성가시게 만들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여자는 버스가 덜컹일 때마다 박자를 맞춰가며 내 쪽으로 몸을 밀착시켜오는 중이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항의임을 간파했다. 자신이 나보다 나이 들고 약하다는 것에 대한 무언의 항의. 가관이로군, 재수 없는 늙은이. ‘하지만 이걸 알아야지, 이 아줌마야. 난 당신보다 어릴지는 몰라도 강하지는 않다고. 그러니까 그런 항의는 노약자석에나 가서 하란 말이야.’
누가 이 예의 없는 자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나는 아프다. 나는 약하다. 오늘 아침 재어본 몸무게는 거의 중학교 입학 때의 무게와 비슷했다. 내가 다 기록해 놨다. 이번 달엔 0.7㎏, 지난달엔 6㎏, 그 전달엔 각각 4.4㎏, 3.1㎏, 5.7㎏이었다. 다시 말해 도합 19.9㎏이 겨울동안 사라져버린 후 돌아올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레깅스조차 흘러내린다. 부츠는 헐떡인다. 코트는 가장 작은 사이즈임에도 가장행렬에서 포대자루를 연기해야 하는 아이의 의상처럼 크다. 무릎까지 늘어진 회색 가디건은 영락없이 아빠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아빠의 것이었다. 아직도 암 바이러스를 잔뜩 묻히고 있는 아빠의 가디건. 궁상 바이러스, 미련 바이러스, 두 딸에 대한 지나친 걱정, 걱정, 걱정 바이러스를 아직도 잔뜩 묻히고 있는 아빠의 커다란 가디건. 반면 내 앞의 여자는 어떤가? 그녀의 재킷은 타이트하다 못해 가슴과 배 부분이 터질 것 같다. 싸구려 아크릴 단추들은 반드시 말해야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앙다문 입처럼 힘겹게 다물어져있었다. 그녀가 입은, 족히 20년은 됐음직한 두터운 자카드 재킷에서는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묵은내가 났다. 또 소주 냄새도 약간. 재킷의 무늬는 설령 20년 전이었다 해도 그다지 세련돼 보이지 않았을 듯한 빨간 꽃무늬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꽃무늬를 보고 있는데 돌연 내가 줄에 달린 마리오네트로 변신했다. 내 사지가 저절로 벌떡 들려 일어서더니 여자의 옆쪽으로 비켜선 것이다. 동작 어디에도 내 의지가 섞여있다는 걸 나는 느끼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정신과는 무관하게, 내 육체가 스스로, 또는 보이지 않는 줄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행동을 구경하는 것처럼 생경했다. 어쩌면 그 꽃무늬가 주는 묘한 향수나 비현실적인 감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저 여자가 실은 마녀여서 나에게 나쁜 마법을 걸었든가. 그것도 아니면 이제 곧 내가 걸리게 될 지독한 감기 때문에 생긴 환영이겠지. 그러나 아무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비현실은 현실이 되었다. 여자는 나를 흘끗흘끗 쳐다보더니 만족을 숨긴 밋밋한 얼굴로 내가 일어선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여자의 부피는 좌석을 채우고도 남아 흘러내렸다. 옆으로 질질 삐져나온 저 엉덩이를 좀 보라지.
내 머릿속에 키보드가 하나 생겨났다. 여자의 살찐 둔부와 부피를 잃은 내 자신과 대답 없는 케이와 현재의 세계에 대한 욕설이 계속해서 키보드 위를 누르기 시작했다. 딸깍딸깍. 미친 년. 바보. 미친 년. 딸깍딸깍. 하지만 현실의 나는 동상처럼 굳게 입을 닫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버스의 뒷문이 열렸다.
내리지 말아야 할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잠시 길을 잃고 멍하니 서있었다. 또 한 번 나의 계획이 어긋났다는 게 이렇게 자명해졌다. 또 실패다. 또 놓쳤다. 정신을 벗어난 육체가 나를 와 본 적 없는 낯선 곳에 또 데려다놓고 말았다. 도대체 몇 번째의 실패인가, 이따위 패배, 연속된 거절, 부질없는 기대, 그런데, 그런데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버스노선 표지판에는 한강이 일고여덟 정류장 후에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정류장 앞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된 곳에 서있는 것은 나뿐인 듯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갑자기 그 장소를 견디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한강 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에 발가락은 몇 걸음 못 가 얼어버렸다. 겨울 오전 열한시 반이 발끝에서 질 나쁜 냉각제처럼 걸리적거렸다. 가시거리 내의 대한민국 전체가 겨울로 가득 차있었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새삼 쓸쓸하게 느껴졌다. 빳빳해진 발을 기계처럼 뻗으며, 나는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버릴 거라면 어째서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는 건지에 대해 생각했다. 키보드를 다시 작동시켰다. 모두 다 개새끼들이라고. 딸깍딸깍. 모두 다 정신 나간 미치광이들이라고. 딸깍딸깍. 어째서 한꺼번에 싹 다 없어지지 않는 거야? 그러면 사라지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편하잖아? 한 번에 몽땅 죽어버리라고, 한 번에, 엄마고 아빠고 언니고 개고, 딸깍딸깍. 하지만 이 생각이 용서받으려면 인간은 모두 동시에 태어나고 동시에 죽어야 하며, 아니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고, 아니 존재하지도 말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들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머리가 또 지끈거린다. 잊지 말아야지. 그 여름날 이후로 용서는 나와 무관한 단어가 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흥, 용서 따위…….
“아! 더는 못 참겠어, 케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날이 너무 찼다. 뾰족한 바람의 끝이 겹겹이 입은 옷들을 찢고 들어와 내 살갗을 꼬집고 있었다. 언니가 사라졌다고 해서 내가 이런 추위까지 참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심장이 파래질 것 같았다. 나는 눈에 보이는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내 계획은 수정됐다. 한강은 서비스센터에 들른 다음에나 찾아갈 것이다. 한강은 나를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은 나를 기다려줘야 한다.
6。
서울시내 서비스센터들의 첫 번째 특징은 자랑해도 좋을 정도의 큰 규모다. 직접 서비스센터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스물아홉 살씩이나 먹고도 대기업과 구멍가게를 구별하지 못한 내 불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처음 케이의 집에서 제일 가까운 서비스센터를 찾아가던 날만 해도 나는 줄곧 작은 사무실을 상상하고 있었다. 슬라이드가 뻑뻑하다거나 이어폰 잭의 접촉 불량 같은 핑계거리를 미리 구상해뒀지만 그런 얘기는 꺼낼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나란히 앉아있는 서너 명의 사원 가운데서 1초 만에 내가 원하는 얼굴을 구별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직접 마주한 센터의 외관은 작은 학교만 했다. 각도에 따라서는 작은 우주라고 볼 수도 있을 듯했다. 그 우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1초 만에 사건을 해결하려던 나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그 안에는 나 같은 바보가 최소한 수십 명은 서있었다. 나는 일단 대기 번호표를 뽑아야 했고, 나보다 먼저 온 바보들의 차례가 다 지나가길 기다려야 했고, 접수처의 예쁜 여직원에게 내 핸드폰의 가짜 상처와 가짜 증상에 대해 설명해야 했고, 수리기사가 핸드폰을 넘겨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가 상처들을 점검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했으며, 그런 뒤에야 가까스로 그 불확실한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분에 넘치도록 일사분란하고 분에 넘치도록 친절한 절차들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친절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낯익은 50KB의 얼굴이 손을 흔들며 나타나 “안녕? 케이를 찾아오셨죠? 케이는 지난겨울부터 우리 센터 지하에서 커피콩을 볶고 있답니다. 맛 좋은 커피가 다 끓여지면 집으로 돌아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걸까?
앞선 열여섯 번의 허탕과 똑같은 과정이 오늘도 반복됐다. 작은 우주, 대기표, 접수창구, 기다림, 기다림. 나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커피콩 볶는 냄새 같은 것도 날 리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 핸드폰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한 상처를 입고 있으니까, 그 상처만큼이나 확실하게 50KB의 남자를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이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다고. 나는 대기 번호표를 들고 접수처로 걸어갔다. 창구의 여직원에게 사진을 내미는 나의 손은 전에 없이 당당했다. 손이 당당한 만큼 내 속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내민 것은 케이의 프린터에서 A4에 흑백으로 프린트해낸 남자의 얼굴이었다. 해상도 조절을 실패하는 바람에 얼굴은 용지의 전면에 가득 차는 크기로 인쇄되어 나왔다. 언뜻 보면 그것은 경찰서 벽에 걸린 지명수배자 사진처럼 보였다. 비록 사진 안의 흉악범은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평화롭게 웃고 있었지만.
“지난번에 이 분한테 수리를 맡겼었는데 친절하시더라구요. 아직도 계시다면 이번에도 이 분에게 수리 받고 싶은데요.”
나를 보는 여직원의 눈빛에서 아주 잠깐, 잘 교육받은 대기업직원 특유의 친절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케이였다면 좀 더 그럴싸한 구실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케이가 아니다. 나는 상상력 없이 배배 꼬인 속 빈 꽈배기에 불과하다. 겨우내 생각해낸 게 겨우 이거였다. 열여섯 번을 실패하고도 내가 쓸 수 있는 방법 역시 이것뿐이었다. 남들에게 이것은 고작 50KB짜리의 집착, 턱없이 부실한 지푸라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세상을 전복시킬 수도 있는 희망이었다. 내 손에 들려있던 희망이 가늘게 떨리며 여직원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나의 희망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물론, 물론 나는 형사에게 케이의 지갑에 들어있던 명함을 좀 보자고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명함에는 내 희망의 이름도, 주소도, 전화번호도 다 적혀있을 테니까. 그러나 쉬운 방법을 택했다면 나는 형사에게 내가 케이에 대해 알고 있는 마지막 비밀 하나를 빼앗겼을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나의 유일한 언니를 지켜줄 마지막 방법일 수도 있었다. 더불어 법이 대신 해주지 못할 가장 적절한 복수를 해줄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이렇게 머저리 같은 꼴로 잘 교육 받은 아가씨 앞에 서있는 것이다. 흑백의 종이 한 장과 작은 복수의 검 하나를 양 손에 품고서.
다행히 그 예쁜 아가씨는 내 미욱함을 덮어줄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직원이었다. 그녀는 금방 미소로 점철된 친절을 되찾았다. 나는 그녀가 파블로프의 개 같다고 생각했다. 또는 버튼만 누르면 미소가 굴러 나오는 즉석자판기라던가.
“아, 이 기사님은 예약 고객님만 받으시는 분이라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고객님? 문의 후 즉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예뻤으나 너무 오랜 부자연스러운 웃음의 결과로 입가의 화장이 들떠 있었다.
모든 것이 내가 원했던, 혹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즉시’ 처리되었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없다. 그 남자를 만난 후에도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뿐이다.
거짓말.
사실은, 쿵쾅거렸다. 심장이 하얘졌다 까매졌다 다시 빨개졌고, 어깨와 무릎과 뒷목이 덜덜 떨렸으며,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주머니에 넣은 손 안에서는 접혀진 칼이 새파란 땀들과 함께 연신 미끄러지고 있었다.
남자는 칸막이로 가득한 수리실의 20번 창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뭘 바라고 여길 온 거지, 케이? 대답 좀 해 봐.’ 방금 전 나는 내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거짓말의 부작용이 나를 후려치고 있었다. 막상 그의 얼굴과 직면하자 끝을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내 가슴을 꾸덕꾸덕 메웠다. 그의 얼굴은 사진과 똑같았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너무 당연해서 나는 약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흔히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사람들은 사진이 잘 나왔네 못 나왔네에 대해서 한 마디쯤은 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내가 가진 사진과 너무 완벽하게 일치했다. 심지어 그는 늙지도, 헤어스타일을 바꾸지도, 타이나 셔츠를 바꾸지도 않은 듯 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 접수처에서 만난 여직원이나 나머지 수십 개의 창구에 앉은 수리기사들과 동일한 종류의 미소가 번져있었다. 일말의 악의도, 가식도 서려있지 않은 순수한 미소처럼 보였으므로 나는 당황했다.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대기업과 유명 브랜드의 마수에 걸려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현대인들이 걸려들었고, 마지막으로 케이가 걸려든 저 미소.
“물에 빠뜨리셨다고요? 어떤 물이었죠?”
나는 주머니 속의 칼을 만지작거렸다. 칼의 표면은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눅눅하게 젖어있었다. 만약 남자가 정말로 나쁜 놈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보는 즉시 케이를 망가뜨린 것이 증명된다면, 그러면 나는 두말 않고 그를 찔러버릴 작정이었다. 만약 남자가 내게 물었다면, 그러면 나는 케이의 얘기를 할 작정이었다. 자신의 사진까지 들고 와서 수리를 맡아달라고 하는 이 낯선 여자에 대해 그가 의심 섞인 단 한 마디라도 내뱉었다면. 그러나 그의 얼굴은 흉악범의 그것과도 달랐고, 여자를 울리는 놈들의 그것과도 달랐다. 그 얼굴은 오로지 고장 난 핸드폰과 미소의 유지에만 관심이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파블로프의 개나 자판기 같은 표정.
“머그잔이었어요.”
“머그잔이요? 속상하셨겠네요. 흔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문 경우도 아니죠.”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는 눈치였다. 미소는 여전히 V자형으로 산뜻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내가 이렇게 담담하게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에 한 번, 나 이외의 사람들도 머그잔에 핸드폰을 빠뜨릴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많이들 빠뜨리나보죠?”
“그럼요. 내용물은요?”
“물.”
“맹물인가요? 다행이네요. 언제쯤 빠뜨리셨어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질문을 하고 그가 대답하는 상황을 예상했었다. 내 머릿속의 질문 리스트는 예, 아니오로 대답해야하는 문답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가 질문을 하면 내가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상문제는 모두 빗나갔다. 밤새 영어공부를 했는데 수학시험지를 받은 학생이 된 기분. 형사의 유도질문 앞에서 진땀을 흘리는 현행범이 된 기분. 이 지점에서 나는 현실감각을 조금 상실했다. 머리가 또 아파왔다. 남자와 형사의 얼굴이 겹쳐졌다. 남자의 질문이 기계음처럼 들렸다.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케이의 음성과 같은 기계음들. ‘지금은 부재중이오니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일그러진 케이의 응답. 하지만 케이는 약속과 달리 곧 연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세상을 대하는 케이의 방법이다. 발신자의 위급한 상황들은 케이의 응답기를 경유하면 언제나 먼 동네의 한없이 느긋한 풍경이 되곤 했다. 남자의 손은 이제 핸드폰을 분해하고 있었다. 빠르고 능숙한 손놀림이다. 역시 기계다. 기계가 기계를 만지고 있었다. 나는 현실감각을 조금 더 상실했다. 거짓말 같았고, 믿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간단하게 해체될 수 있는 기계였다니. 몇 달 동안 손바느질을 해 만든 아끼던 원피스가 가위에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기분. 하지만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아끼는 원피스 같은 건 몇 벌이라도 가위에 내맡길 수 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어째서 누군가의 everything이 이렇게 태연히 자리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지?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지? 당신은 내가 모르는 무슨 짓을 하면서 살고 있는 거지?
“그래도 운이 좋으신 편이에요, 고객님. 확인해 봐야 되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에요. 오늘 아침이라고 하셨죠? 잘 하신 거예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경우에는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거든요.”
“살릴 수 있나요?”
주머니 속의 칼이 내 손끝에서 한번 펼쳐졌다가 닫혔다. 정말 살릴 수 있는 걸까? 정말?
“한번 살려 봐야죠.”
더럽게 더러운 낙관의 더러움. 정말 살릴 수 있을까? 정말?
그때였다. 내 시야가 또 한 번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향해 열렸다. 남자의 책상 유리에 끼워진 사진이었다. 그와 한 여자의 부둥켜안은 미소가…… 거꾸로 보고 있었지만 그게 케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으음…… 아닌가? 글쎄…… 다시 보니 케이 같기도 하고, 특히 저 입술이…… 맞다, 케이다. 저건 분명 케이…… 아니야……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 모르겠…… 맞다…… 아니다…… 아무것도 분별할 수가 없……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아, 이제…… 이제 그의 손바닥에는 내 핸드폰이 아닌, 서너 조각으로 분리된 칩과 플라스틱 쪼가리들만이 들려있었다. “어……. 기계 내부에도 물이 좀 고여 있네요. 이건 좀 안 좋은데…….” 남자는 물기 때문에 내장된 데이터가 손상됐을 우려가 있다고, 그래서 참 안타까우시겠다고, 처음으로 미소를 지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갈피도 잡을 수 없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아, 나는 분리된 칩들처럼 현실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 버렸어, 케이. 나 이젠 어떡해야 되지?
“어떡해야 되는지 나한테 묻는 거야? 강을 건너야 한다니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케이?”
너는 남자의 목을 찌를 수도 있겠지. ‘정말 그래요. 너무 너무 안타까워요. 그렇지 않나요?’라고 말하면서. 혹은 지난 이십 구년간의 너처럼 아무 것도 읽히지 않는 굳은 얼굴로 그를 한껏 조롱할 수도 있어. 그의 복부를 찌르면서, 그의 쇄골을 찌르면서, 그의 미간을 찌르면서. 그런데…… 여기서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늘 내 몸이 자꾸 의지를 벗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입술 사이로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 것이다.
웃으면서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 번째는 내가 케이의 망령이나 영혼 따위에 빙의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라고 당신은 말한다. 그러나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곤 하는 게 이 세상이다. 그건 아마 당신도 잘 알 것이다. 케이는 내게 말했었다. “사람은 웃어야 돼. 일단 웃으면 안 될 일도 된다니까?” 그런 말을 할 때는 케이도 어김없이 웃고 있었다. 웃는 케이를 볼 때마다 나는 그녀 속에 숨은 여우같은 면면에 놀라곤 했다. 그녀 속에 숨어있는 그런 면들은 인생의 의외성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놀라웠었다. 케이처럼 예쁜 여자들에게는 세상이 조금 더 친절한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었다. 적어도 뭔가를 용서받는 데에 있어 케이가 나보다 재주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지. 나였다면 그렇게 쉽게 용서받지 못했을 일들이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지나가곤 하는 걸 줄곧 봐왔으니까. 케이는 그것이 내가 웃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봐. 우리는 웃는 모습이 똑같잖아. 내가 되는데 네가 안 될 이유가 뭐야?” 케이는 말했었지. 그게 내가 두 번째로 한 생각이다. 우리의 웃는 모습이 똑같다는 것. 우리가 자매인지 몰라봤던 사람들도 웃을 때면 혹시 자매 아니냐고, 정말 닮았다고 말하고들 했다. 이제 내가 그런 미소를 지을 차례였다. 뭔가를 공짜로 얻어내거나 용서받을 때 케이가 짓던 울듯 말듯 한 그 미소. 그런 미소를 지으며 내가 남자에게 말했다.
“정말 그래요. 너무 너무 안타까워요. 산지 몇 개월밖에 안 된 건데 속상하네요. 수리비가 많이 나오겠죠?”
이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나는 완전히 빙의됐다고 느꼈다. 케이가 내 속에 들어와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는 얼마나 많이 웃었던 걸까? 이 남자의 얼굴을 보며, 케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용서했을까? 얼마나 많은 것이 용서받기를 바랐을까? 순간, 나는 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더 친절해져가는 것을. 내 장기들이 일제히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내 눈이 발갛게 부풀어 올랐다. 복수의 검이 내 안에서 울었다. 알아볼지도 몰라, 알아볼지도 몰라, 나와 케이의 미소는 닮았으니까, 알아봐줄지도 몰라.
그러나
또 실패다. 그는 알아봐주지 않았고, 내 미소의 가장자리에서는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케이를 닮은 나의 미소가 아니라 불편함을 담은 고객의 미소였다. 나나 케이가 아니라도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그런 미소.
“글쎄요. 어느 정도나 손상됐는지에 따라 수리비도 차이가 나는데요. 고객님의 경우에는 부품 교체가 불가피하겠네요. 메인보드랑 액정, 스피커에도 물이 들어간 걸로 보이고. 이런 경우 보통 십만 원 이상이 예상되는데…… 구입하신지 얼마 안 되셨다니 일단…… 무상으로 가능한 범위를 조절해봐야겠죠?”
그의 말끝에는 잘 익은 미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수리는 10분이 지나지 않아 끝났다. 비용은 한 푼도 청구되지 않았다. 그것은 케이의 승리였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쉽게 용서받은 적이 없었다. 또한 그것은 다수의 승리였다.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승리. 처음부터 모든 미소 짓는 사람들만의 것이었던 바로 그 승리. 당신은 알았는가? 승리가 미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소가 승리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었다. 이 커다란 서비스센터에 발을 들인 후에야 알게 된 또 하나의 진실이 그것이었다. 한편 이 승리는 대기업의 것이기도 하다. 미소로 승리를 얻어냈다며 환호한 모든 고객들은 지금부터 점점 더 대기업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나갈 것이 분명해졌으니까. 딸깍딸깍.
“보시는 것처럼…… 이제 전부 잘 작동 되죠? 안심하고 사용하셔도 됩니다.”
완성된 친절의 마지막 단계로 그는 내 핸드폰의 전원을 켜며 흔들어보였다. 부활한 것처럼 생생해진 액정에는 케이와 내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케이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웃고 있지 않았다. 잘 웃는 건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케이였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것도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케이였다. 하지만 나는 웃고 있는 케이의 속눈썹이 자주 젖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나 잊었었다. 잊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물 냄새가 났던 거야. 그래서 항상 케이에게서 물 냄새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는 한 계절을 끌어 온 마지막 가능성이 지금 막 물거품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인간들은 미련을 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만 더 봐 주실래요? 정말 다 제대로 된 건지, 다시 한 번만 봐 주세요.”
나는 웃고 있는 케이와 그렇지 않은 나를 남자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으리라. 나는 0.001밀리미터의 흔들림도 놓치지 않으리라. 흔들려라, 흔들려라 눈동자여. 그러면 나의 단검이 너를 향해 달리리니.’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면을 다시 쳐다봤다. 그러나 그의 눈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는 마른 땅에 꽂힌 말뚝처럼 꼿꼿하기만 하다. 그는 키패드를 몇 번 눌러보더니 평생 아무것도 잃어보지 않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부 정상이에요.”
나는, 조금 더 미련을 부려보기로 했다. 마지막 고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좀 더 노력해봐야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었다.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손으로는 언제든 꺼낼 수 있게 칼을 꼭 쥐고, 심장을 악문 채,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면 혹시, 누군가 사라지는 얘기를 아세요?”
“네?”
“소설이요. 누군가 사라지는 소설을 읽어본 적 있냐구요.”
“소설…… 말씀이십니까, 고객님?”
“네.”
“글쎄요.”
“잘 생각해보실래요?”
“글쎄…….”
“생각해 보세요. 한번만 더. 사라지는 얘기에요.”
“사라진다. 사라진다라…….”
부탁이야. 제발 기억해줘. 제발 내가 당신을 찌를 수 있게 해줘.
“하지만…… 그런 얘기는 너무 많지 않나요? 아무튼 저는 안 읽습니다, 고객님.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럼 혹시 커피 좋아하세요?”
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미소 지었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미소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대낮에 낯선 남자에게 촌스러운 방법으로 구애나 해대는 맥 빠진 여자로 보일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변명거리도 없었다.
“좋아했죠, 커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못 마십니다. 위에 구멍이 생겼거든요.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객님.”
나는 무력한 최선 끝에 내가 모든 고삐를 놓쳐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 지점에서 내 리스트는 완전히 지워져버렸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질문들을 모두 잃었다.
“더 궁금하신 사항 있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조심해서 사용하시구요. 이젠 잘 작동되겠지만, 물에 한번 빠졌던 기기는 잔고장이 생길 수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그가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 핸드폰의 슬라이드가 닫히면서 액정이 까맣게 다물어졌다. 나에게로 돌아온 것은 영원처럼 까만 얼굴을 가진 멋대가리 없는 기계일 뿐이었다. 나는 내 손에 들어온 작고 견고한 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고쳐지다니, 그렇게 깊숙이 물속에 잠겼는데, 이렇게 간단히, 이렇게 완벽하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가능성을, 이렇게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희망을. 그렇지만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더는 없었다.
나는 서비스센터를 나오면서 그 모든 빌어먹을 친절한 서비스를 향해 키보드를 눌렀다. 그리고 이제 그 남자를 잊을 것이었다. 미친 년. 이깟 게 뭔데? 이걸로 뭘 증명해내려고 한 건데? 아무 것도 모르잖아, 미친 년. 널 알지도 못하잖아, 미친 년. 널 기억도 못하잖아, 미친 년. 딸깍딸깍. 나는 잊을 것이다. 잊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한다. 나에게는 질문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한 가지 위안은 내가 언제고 다시 핸드폰을 물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가려는 강에 가서 그대로 던져버릴 수도 있다. 아니지. 그러면 강물로 들어가야만 핸드폰을 건질 수 있잖아. 난 강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나도 물이 싫다. 나도 물이 무섭다. 그냥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안테나를 잡고 핸드폰의 몸체만 강에 빠뜨려야겠다. 이르면 오늘 중으로 서비스센터를 다시 찾을 수 있겠지. 그때는 내가 기억하는 케이의 소설 제목들을 전부 남자에게 불러줄 것이다. 이거라면 읽어본 적 있지 않느냐고. 이 이름들이라면 알지 않느냐고. 내가 모르는 케이를 알고 있지 않느냐고. 왜냐고. 왜 그랬냐고. 도대체 케이가 왜……. 그러나 이미 나는 알았다. 시도조차 하지 않은 그 일에서 내가 실패할 것임을.
나는 이제 이 이야기가 웰 메이드 판타지가 되기를 소원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각색된 제3세계 거장의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흑백의 겨울에 오렌지빛 샹들리에가 켜지고, 거리의 사람들이 하늘로 솟아오르기를 원한다. 하늘과 땅이 전복되고, 강물이 역류하며, 산 자와 죽은 자가 강가에서 뒤섞이기를 희망한다. 믿기 힘들만치 끝이 허탈한 코미디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예컨대, 사라졌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늘 마시던 머그잔 바닥에 납작하게 고여 있었다던가……. 하지만 내 이야기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강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오랜만에, 너무나도 오랜만에 무릎을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7。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인간의 시체가 완전히 썩어 흙이 되는지 누구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빠가 충분히 썩을 만큼의 계절이 흘러갔다는 것을 딸들은 안다. 아빠는 이제 아빠보다 10년도 더 전에 묻힌 엄마와 다시금 하나가 됐을 것이다.
가족들의 죽음이란 대부분 몹시 갑작스럽고, 대부분 몹시 이르게 느껴진다. 그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빠는 달랐다. 아빠는 자신의 죽음이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이 정도면 너무 오래 참은 거라고, 기다리는 이를 너무 힘들게 했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불현듯 아빠를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었다. 만약 저 남자가 자기 부인의 장례식 이후 줄곧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라면, 그런 생각들과 함께 암세포가 자라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아빠는 엄마의 몸이 영원히 젖어있으리란 걸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스스로 암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워졌다. 사실은 그날 이후 아빠가 단 한 순간도 날 용서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여 무서웠고, 두개의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날 바라본 게 아닌가 하여 서러웠으며, 그래서 그 마지막 순간에 아빠를 증오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혼란스러워했다. 케이는 내게 말했다. “아빠가 용서를 빌어야 할 존재는 너나 나나 다른 누군가가 아닌 아빠 자신이야. 모르겠니?” 나보다 한 살 반밖에 많지 않은 왕눈이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지껄여댔었지.
“하지만 케이. 그건 아니잖아. 언닌 항상 이해 못 할 말들을 해. 용서받지 못한 건 나였다고. 잊은 거야?”
그렇다. 용서받지 못한 건 나였다. 하지만 내가 용서하지 못한 건 누구지, 케이?
생각해보면 나는 거의 모든 순간 거의 모든 말의 의미를 몰랐던 것 같다. 케이였다면 알았을지 모른다. 케이는 늘 나보다 두세 발씩 앞서 갔으니까. 케이, 착하고 예쁜 딸, 말 없는 소녀,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으며, 한 번도 잡히지 않은 아이, 백 마디의 말 대신 언제나 미소를 선택했던 여자. 그러나 나는 케이가 아니다. 나는 늘 두세 발씩 뒤쳐져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단절되었으나 둘만은 끔찍하게 엮여져있는 영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두 사람의 매듭은 그 누구도, 심지어는 그들의 자식들조차도 끊을 수 없다고 했다. 케이가 내게 들려준 얘기의 일부다. 나는 그 얘기를 믿지 않았다. 나는 많은 것을 믿지 않았었다. 아빠가 동일한 관대함으로 케이와 나를 키웠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충분히 안전하다는 말, 충분히 괜찮다는 말, 충분히 사랑한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꼬여야 지금의 내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케이였다면…… 믿었을까? 케이 자신과 또 다른 누군가의 영혼이 아무도 끊지 못할 매듭으로 엮일 수 있다는 것을, 케이는 믿었던 걸까?
다 지나간 얘기라고 나는 말한다. 엄마도 아빠도 이미 오래 전에 복구될 수 없을 지경으로 완전히 썩어버렸다고. 나에게 그들에 관한 기억이란 풍화되어 글씨조차 알아볼 수 없는 구시대의 표지판과 다르지 않다고. 그러나…… 케이는?
자신이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 자신이 그때 죽었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 대개의 인간들은 그런 것을 몇 번이나 겪은 뒤에야 진짜 죽음을 맞는다고 언젠가 케이는 내게 말했었다. 그리고 대개의 인간은 자신의 진짜 죽음을 맞기 이전에 또 다른 죽음들을 몇 번이나 목격해야만 한다고. 그러나 나는 케이가 목격해온 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본 케이만을 알고, 내가 들은 케이만을 믿는다. 그러나…… 케이는?
좋다. 내 쪽에서 100번 양보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형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케이의 시체 말이다. 그 나쁜 년의 시체는 약 올리기 좋아하는 못된 꼬마처럼 강 어딘가에 꼭꼭 숨은 채 나타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교각의 뿌리를 잡고 나를 비웃는 케이, 물풀 사이에 앉아 나를 비웃는 케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붙들고 나를 비웃는 케이, 강바닥에 고요히 누워 나를 비웃는 케이. 그러나 그런 케이는 내가 아는 케이가 아니다. 그런 케이를 알고 있는 나를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아는 한, 나는 그런 케이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안 적도 없다. 케이 같은 인간이 충분히 썩을 시간의 길이를, 완전히 사라져 다른 형태가 될 시간의 길이를 나는 짐작도 할 수가 없다. 그것을 짐작해낸다는 것은 내가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됐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기온이 매우 낮은 지역에서는 익사한 시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것도 역시 케이로부터였다. 케이는 언제나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케이가 써낸 이야기들은 너무 적은 것들이었다. 아무도 몰랐다. 케이의 가슴 밑바닥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는지, 아무도, 심지어는 케이 자신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곳의 기온이 시체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낮은지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누구처럼 계절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방패처럼 겹겹이 걸쳐 입은 두터운 겉옷들이 민망하지 않은 계절이라는 것을 안다. 강물 위로 떠오르는 시체보다 더 나쁜 건 영원히 떠오르지 않는 시체다. 나는 끝내 봄이 언제 시작되는지 알 수 없을지 모른다.
8。
버스는 봄이건 겨울이건 같은 노선을 달린다. 볕 좋은 오후의 한강변에 나를 떨어뜨리고, 버스는 매일 가던 길을 향해 다시 떠났다. 내가 모르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내가 눈물을 흘렸던 자리에 앉을 것이고, 더러는 그 자리에서 울기도 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오래 전 한 여자가 울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서 오래 전 한 여자가 울었다 해도 나 또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게 인생이겠지, 아마도.
자, 어쨌거나 버스는 떠나갔다. 강이 잘 보이는 둔덕이 이제는 내가 앉을 자리였다. 나는 버스정류장을 뒤로 하고 강가로 내려왔다.
오전에 나를 지하철역으로 몰아넣었던 바람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거짓말 같이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 있었다. 계절이 이렇게 계절의 기억을 뒤덮는다. 그리고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줄지어 봄 소풍을 나온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햇살……. 햇살……. 햇살……. 그런데 이상도 하지. 몸이 떨린다. 강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저 물의 가장 깊은 바닥에 누워있는 기분이 든다. 강물과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건 그해 여름 이후로 처음이다. 겨울이 시작되던 날, 나는 형사와 함께 한강대교 위에 서있었다. 강가로 내려오는 게 두려워 다리 난간에 기대서서 이곳을 내려다봤었다. 케이의 가방이 죽은 악어처럼 입을 벌리고 늘어져있던 자리에는 이제 옅은 초록색의 볼품없는 풀들이 듬성듬성 솟아나 있다.
문득 그 기억이 난다. 내가 열여덟인가 열아홉일 때였으니까 아빠가 쉰 살쯤 됐을 때의 일이다. 아빠는 그때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거실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걸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빠가 느닷없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
“질문이란 게 참 많지, 얘들아. 나한테도 있다. 한 번도 풀어보지 못한 질문이란 게 있어, 이 아빠한테도. 난 앞으로도 절대로 그 문제를 풀 수 없을 거다. 누구나 그런 질문을 서너 개쯤은 갖고 태어나는 거야.”
그때 나는 그 말의 의미도, 그 말을 하는 아빠의 의중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노을이 저렇게 빨간 걸 보니 세상에 먼지가 참 많은가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있던 케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는 거냐고 내가 물었지만 케이는 대답도 없이 태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울기만 했다.
그 기억에서도 이제는 절임음식처럼 묵은내가 난다. 여러 개의 질문으로 쪼개진 기억들이 내 안의 찬장 구석에 꾹꾹 들어 차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 봄이 지나면 나도 서른인데,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치 많다. 내 생각은 이렇다. 그때 아빠는 나이를 먹을수록 질문이 늘어난다는 얘기도 해줬어야 한다. 때로는 나이보다 많은 개수의 질문들이 한꺼번에 찾아오기도 한다는 얘기를 해줬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얘기들을 다 해주기도 전에 아빠는 먼지 많은 날의 태양처럼 내 삶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못 다한 얘기들은 오롯이 내 몫의 질문이 되어 불면의 밤마다 나를 찾아온다. 아무도 나대신 그 질문들에 맞서주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나 스스로 그것들에게 맞서는 중이다. 내가 만약 좋은 추리소설 속의 탐정이었다면 수백 가지의 질문 중 적어도 몇 가지에는 명확한 답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어쩌면 아빠도 몇 가지쯤은 옳은 답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런데 아버지, 봄이 오면 저 볼품없는 풀들에게서도 꽃은 피어나는 걸까?
강을 건너오지 못하는 대답들.
강을 건너가지 못하는 질문들.
자, 어쨌거나 버스는 또 떠나갔다. 나는 이제 강이 잘 보이는 둔덕에, 볼품없는 풀들 사이에 앉아있다. 겨울, 평일 오후 3시. 한강을 구경하기에 적절한 시간은 여전히 아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시각에 한강을 보고 싶어 하는지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렇지만 강가에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앉아 강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머리 위에는 께느른한 3시의 햇살이 길게 늘어져있다. 온다던 봄비는 아직 다른 하늘에 머물러 있나보다. 구름조차 가벼운 하얀 하늘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보다 조금 일찍 강변을 찾은 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나와 강물 사이를 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넓은 여자의 등판과 그 위로 가득 펼쳐진 빨간 꽃을 보고 나는 그녀가 오늘 오전 버스에서 마주친 아줌마임을 알았다. 왜 이런 우연이 이야기에 끼어드는 거냐고, 당신들은 묻는다. 눈을 크게 뜨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당신들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질문은 이미 충분하고도 넘친다. 만약 내가 눈을 뜬다면 그것은 그저 흘러가는 강물을 배경으로, 벽 같이 넓은 한 여자의 등짝을 감상하기 위함이다. 왜 안 되는가? 새 계절은 멀고, 케이는 돌아오지 않으며, 나에게는 이미 끝나버린 하루가, 그러므로 무한할 정도로 긴 하루가 아직 남아있는데. 겨울, 평일 오후 3시.
여자는 아까 그 버스에서 내린 뒤로 한강을 떠나지 않은 듯 했다. 그녀의 옆에는 세 병의 소주가 놓여있었다. 두 병은 이미 비었고, 나머지 한 병은 새 것으로 보인다. 또 한 병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녀가 병을 기울여 강물에 술을 따랐다. 그러고 나서 한 모금을 마신 후 또 따르고, 또 한 모금을 마셨다. 강물도 그녀도 죽은 내 아버지도 말이 없었다. 술병 속의 술은 아주 천천히 줄어들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줄어드는 술과 함께 강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햇살…….
햇살이 자꾸만 강물 위로 부서져 일렁였으므로 나는 눈을 잘 뜰 수가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부서진 햇살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휘청거렸다. 회색 강변 위 오로지 한 개의 빨간 점. 그녀는 24시간 가동되는 거대한 기계처럼 같은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보니 그 모습은 흡사 춤을 추는 곰처럼도 보였다. 그녀의 스텝을 따라 빨간 꽃들이 빙글빙글 돌며 내 시야를 흐트러뜨리고, 그리고 모든 것이 흔들렸다.
나는 생각한다. 만약 이 이야기에 판타지가 끼어들어야 한다면 바로 이 대목이라고.
가끔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몇 달 몇 년씩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과제가 생긴다. 내가 겨우내 붙들고 있었던 것은 한 장의 사진과 케이의 첫 번째 소설이었다. 나는 케이의 노트북에 조각난 수십 개의 텍스트들을 배설물처럼 여기 저기 흘려놓았다. 그것들을 퍼즐 맞추듯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 한 편의 완벽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으리라는 허망한 믿음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나를 책상 앞에 앉아있게 했다. 물론 실패다. 설사 내가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구성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원래의 이야기와는 같지 않을 것이다. 또 모르지. 잘 하면 케이가 만들어낸 100개의 이야기 중 하나와 정확하게 들어맞을지도. 그러나 그것은 내 연약한 기억으로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만들겠다는 소망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오만이고, 미련이며, 이미 실패한 계획이다. 한 번도 열리지 못한 채 내 주머니에 접혀있는 칼처럼 말이다.
그러니 자, 지금부터는 당신의 차례다. 나는 이미 경고했었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지 말라고. 그러나 당신은 읽었고,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온전히 당신의 책임이다. 만약 이 책이 제대로 된 추리소설이었다면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첫 장에서는 알 수 없었던 비밀들을 차례차례 터뜨림으로써 독자의 궁금증을 지속적으로 자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이 이야기는 아니다. 당신은 이제 제대로 되지 못한 추리소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 소설은 머저리 같은 주인공의 불완전한 심리상태와 무의미한 묘사만 나열하며 시간을 끈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에서야 모든 비밀을 앞뒤도 맞지 않는 방식으로 폭로하거나, 심지어 마지막 장에서조차 아무것도 밝혀내지 않는다. 그런 책은 일종의 악마다. 쥐약이다. 독자들은 울화통을 터뜨리고, 그 고약한 책을 읽느라 허비한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할 것이다. 이제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행동이다. 내가 쓴 것이 바로 그 쥐약이니까.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나 또한 그 독의 희생자다. 어차피 나에게는 처음부터 글을 쓰는 재주도 없었단 말이다.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재주 없는 작가의 손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망가지든,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한마디 말도 없이 언니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이 끔찍한 계절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해서,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다 그만두자.
나는 이 이야기를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황당한 결말로 끌고 갈 것이다. 사라진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모든 결말이 같다. 이를테면 나는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나는 한강물을 다 퍼낸 뒤 그 바닥에 아무도 누워있지 않다는 것을 밝혀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이를테면 나는 숙련된 다이버라도 되는 양 한강으로 첨벙 뛰어들 수도 있다. 뛰어든 물속에서 케이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이 얼마나 깊은 물속이든, 케이를 만나면 제일 먼저 꼭 끌어안아줄 테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다 할 수 있다.
당신, 이제 당신의 의자에 앉아 똑똑히 보라.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두 지켜보라. 나는 다시 머릿속의 키보드를 꺼낼 것이다. 딸깍딸깍. 인물들을 재배치해나갈 것이다. 뒷모습으로 앉아있던 아줌마를 일어나게 만들 것이다. 그녀가 술병을 내려놓고 한쪽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게 만들 것이다. 반대쪽 주머니에서는 라이터가 나온다. 불이 옮겨간다. 종이는 아주 천천히 타오른다. 아줌마와 종이는 커다란 아지랑이에 휩싸여 하나가 되고, 24시간 춤을 추는 거대한 공기인형처럼 계속해서 흔들릴 것이다. 당신은 운 좋게도 종이가 다 타기 전 그 위에 남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 작가의 소원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몸을 틀었다는 것을 당신은 읽어낸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빛이 작가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당신은 본다. 왜냐하면 종이 위에 있는 것이 한 남자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흑백으로 프린트된 누군가의 everything 말이다. 당신은 책장을 몇 페이지 넘겨 16등분으로 꼬깃꼬깃 접힌 A4를 찾아낼 것이다. 같은 얼굴이다. 당신도 잘 아는 CD에 들어있던 그 50KB짜리 얼굴, 동시에 온 세상, 그리고 전 인류. 바로 이 장면에서 당신은 불현듯 작가의 성공을 확신한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작가만의 판타지가 완성됐다고. 아니,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가 완성된 거라고. 딸깍딸깍.
오오, 하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애원해도 소용없다. 나는 손바닥을 펼칠 것이다. 칼로 그 중심을 찌를 것이다. 얼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피가 솟아나 웅덩이처럼 옴폭하게 고일 것이다. 나는 주먹을 쥐고, 이제 칼은 할 일을 잃는다. 나는 피를 움켜쥔 손을 코트 주머니에 우겨넣는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칼을 접어 먼 강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이제 그런 건 필요 없다. 내게 필요한 건 다른 칼이다. 어차피 내가 아는 세상은 물 위에 뜬 종이뗏목 같은 것이었어. 만약 내가 케이의 모든 소설을 읽었다면 알 수 있었을까? 무언가 제대로 된 것을 말이야. 나는 그런 생각도 강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그런 고민도 이제는 필요치 않다. 나는 키보드마저 둔덕 너머 멀리로 내던져버린다. 그리고 자리를 털며 벌떡 일어나 아줌마에게로 다가간다. 아무런 의지도, 아무런 항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발걸음으로.
“저기…… 불 좀…….”
내가 말할 것이다. 아줌마는 라이터를 건넬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질문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이제 대답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우리는 강변에 앉아 사이좋게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나눠 피는 사람들처럼 종이를 태울 것이다. 누군가의 모든 것이 쥐불을 놓은 겨울 끝의 논밭처럼 타들어갈 것이다. 아지랑이가 커지고, 해묵은 재킷 속의 꽃들이 생명을 얻으며, 케이의 이야기가 하나씩 하나씩 현실로 실현됐던 것처럼, 아, 당신은 볼 것이다, 세상이 불타오르는 것을, 물에 떠내려가던 사람들이 물가로 걸어 올라오고, 통증에 입을 가리고 울던 사람들의 환부가 아무는 것을, 용서받지 못한 이들의 용서가 세상을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한 이들의 손이 당신의 손을 잡는 것을. 이렇게 나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간다. 내가 원하던 그대로다. 거의 다 왔다. 이제 마지막 장면이다. 마침내 당신은 본다. 꽃잎들 사이에 숨어있던 하지 못한 얘기들이 강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사실은 말야’라는 글자, ‘내 진심은’이라는 글자, ‘당신’이라는 글자, ‘이제 그만’이라는, ‘제발’이라는, ‘그쪽은 괜찮니?’라는, ‘이쪽은 괜찮아’라는, 내가 알지 못하는 위로의 말들, 사과의 말들, 고백의 말들, 원망의 말들 혹은…… 100개의 알려지지 않은 독백들, 응답받지 못한 기도들.
그때서야 당신이 아는 누군가는, 그러니까 나는,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말 없는 자매들이었는지를.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말들을 숨겨왔는지를. 케이, 물가에 스웨이드 구두를 신고 가는 바보 같은 년, 예쁜 내 언니. 난 우리가 그 미친 개 같은 시절들을 함께 견뎌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사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혼자 그 시절에 짓눌려왔던 거야.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당신이 그러는 것처럼.
바로 그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은 그 글자들 속에서 내 언니의 이름을 발견할 것이다. 그 이름은 빨간 스웨이드 구두를 신고 ‘안녕?’ 하며 강물 위를 빙그르르 돌고 있다. 그러다 이름은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한다. 내게는 너무 멀어 들리지 않는 노래들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그렇지만 강물은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고. 귀를 기울이면 들린단 말이지. 어때? 들리니?”
“뭐라고, 케이? 잘 안 들려. 언니 지금 뭐라고 했어?”
내 언니의 이름은 대답 대신, 이제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손을 몇 번이고 흔들 것이다. 그것은 흡사 바다가 얼마나 멀든 꼭 그곳으로 가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딸깍 딸깍.
나는 다시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칼과 핸드폰을 번갈아 잡았다가 놓아본다. 그것들은 여전히 내 주머니 속에 있다. 기계가 수리되고 있는 동안 형사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의 전화번호는 부재중 전화 목록에 오십일 번째로 추가됐다. 만약 이 이야기에 기적이 끼어들어야 한다면 그래, 바로 이 대목이라고 나는 다시금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에 걸려올 전화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번호가 부재중 목록에 추가되기 전에 전화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당신의 번호도, 형사의 번호도 아닌 케이의 번호가 될 것이다. 내 메시지를 들은 케이가 한 계절을 에둘러 내게 연락해왔을 때, 나는 완전히 새로 태어난 전화기로 그녀의 새 인사를 받을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하고 뾰로통한 목소리로 투정할 것이다. 그러면 케이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언니의 목소리로, 아주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갔었다고, 그곳에서 아주 아주 긴 소설을 한 편 쓰느라 연락을 못한 거라고, 이제 다 끝냈다고, 모든 게 다 잘 되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겨우내
꿈꿔온
기적.
나는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하며 웃고 있는 케이와 나의 얼굴 위로 형사의 번호가 새겨졌다 지워졌다 새겨졌다 지워졌다 새겨졌다 지워지는 모습을 본다. 이 기억도 언젠가는 마모되겠지. 이 기억 위에서도 언젠가는 새 풀이 돋아나겠지.
하지만 나는 한 번 더 무모한 생각을 반복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다시 쓰여야 한다면 바로 이 대목이라고.
어떤 작가들은 한 편의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몸을 단련한다. 무슨 일이든 장기전은 곧 체력전이다. 나는 이제 내가 내 앞에 뻗은 긴 길에 발을 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시 밥을 먹고, 살을 찌우고, 나를 떠나간 옷들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만들고, 그리고 모든 숨겨진 말들을 되살려낼 준비가 되어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 결국 나는 놓을 수 없으니까. 내가 놓으면 케이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기도는 계속될 것이다. 그 목소리를 직접 들을 때까지 나의 심장은 계속해서 피를 뿜어낼 것이다. 눈물이 마르며 눈가가 빳빳하게 당겨온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가 쓰려고 하는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종이가 필요한지를 깨닫는다. 이것은 아주 긴
얘기가 될 것이다. 나는 아직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정유경
1979년 서울 출생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