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2층 유리창 아래를 내려다본다. 지하철 역 광장에 아침 햇살이 팽팽하게 비춰든다. 어둠 속에 구겨져 있던 온갖 사물들이 아침 햇살에 주름을 펴는 시간이다. 광장 왼쪽에 조성된 소나무 숲에도, 화단 경계석에도 투명한 햇살이 들어찬다. 광장 바닥에 떨어져 내린 햇빛 조각을 비둘기들이 쪼아대고 있다. 순간 지하철 7번 출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으로 휩쓸려가거나 횡단보도 앞으로 몰려간다. 순식간에 지하철 7번 출구는 텅 비어버린다. 하지만 오늘도 빨간색 배낭을 멘 남자는 7번 출구 앞에 미동도 없이 서있다. 반삭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 비쩍 마른 몸매도 여전하다. 남자는 왼 발은 약간 앞으로 내밀고 팔꿈치는 허리춤에 바짝 붙인 채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내어 밀듯이 프, 쓰, 라고 반복해서 외쳐댄다. 봄부터 여름이 다 지날 때까지 저렇듯 7번 출구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1번 전화기에 빨간 불이 깜박인다. 여자는 상담 테이블로 돌아서서 수화기를 든다. 네, 상담실입니다. 수화기 저 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저기요… 막 변성기에 들어선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잠시 기다린다. 거기가 자꾸 간지러운데 어떻게 해요? 그거 말이에요. 가랑이 사이… 나른하게 늘어지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이는 외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지금 수화기를 든 채 사타구니를 긁거나 바지를 내린 채 자위행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많이 불편하겠네요. 아이가 키득거리며 네, 라고 대꾸한다. 동시에 수상쩍은 신음이 이어지더니, 뚜- 하며 신호가 끊긴다. 여자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상담실 문 옆의 세면대 앞으로 걸어간다. 상담이 순조롭지 않으면 여자는 늘 손을 씻는다. 손바닥에 물을 받고 투명한 물빛을 내려다본다. 아니, 손바닥에 그어진 붉은 선을 본다. 손바닥 가운데를 가로지른 운명선보다 붉은 선이 더 길고 선명하다. 어젯밤 칼끝을 쥐던 통증 역시 길고 선명했다. 갈수록 칼끝을 더 힘주어 쥐었고 칼끝에 눌린 흔적도 비례해서 깊어 갔다. 여자는 검지로 손바닥의 붉은 선을 몇 차례 문지른다. 그런 뒤 손바닥 가득 비누칠하여 거품을 한꺼번에 씻어낸다.
상담실 옆 창으로 와이엠시에이 사무실이 보인다. 직원들이 활기 있게 움직이고 있다. 갑자기 네 평 상담실이 비좁게 느껴진다. 여자는 책장에서 책을 한 권씩 빼낸다. 책장 깊숙이 꽂힌 책을 빼내어 빈 공간을 만든다. 책장이 비자 숨통이 트인다. 꺼낸 책을 모두 쇼핑백에 담는다. 쇼핑백에 책이 가득 차면 책상 아래 구석에 내려놓는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제도 그제도 여자는 퇴근만 하면 집안의 물건을 하나씩 포장했다. 쇼핑백이나 비닐 백, 박스가 방구석 마다 가득 찼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흥분이 일었다. 그 흥분은 정우와 격렬히 껴안았을 때의 설렘 같았다. 그런 낯선 감정 때문에 여자는 더 자주 서랍을 뒤지고 물건을 박스에 담았다. 처음 짐을 싸기 시작한 날은 비가 많이 쏟아지던 저녁이었다. 목련 나뭇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요란하게 들려왔다. 개울 옆에 서서 물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빗소리가 몸에 새겨지듯 생생했다. 여자는 빗물을 저벅저벅 밟고 다닐 정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늘 슬리퍼를 끌고 다녀서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맨발. 발가락의 작은 뼈들이 유독 도드라졌던 발을 기억했다. 그가 곤히 잠들었을 때 이불 밖으로 나온 맨발을 여자는 손으로 만지곤 했다. 메마른 그 발은 훌쩍 떠날 것처럼 가벼워보였다. 지금 그는 어느 골목을 걷는 중일까. 라디오를 켤 때마다 지진 소식이 귀에 박혔다. 그가 혹시 그 부근을 지나지는 않았을까. 그럴 때마다 여자는 서랍장을 열고 가지런히 정돈된 장신구를 끄집어냈다. 목걸이와 귀걸이, 반지, 학용품, 화장품도 꺼냈다. 방안은 도둑이라도 다녀간 것처럼 어수선해졌다. 여자는 물건을 쇼핑백에 담거나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하루에 한 두 개의 짐이 늘어갔다. 이사 가도 되겠어. 여자는 자주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겠다는 계획조차 없었다. 가지런한 것을 흩트려 놓았을 뿐인데 여기까지 와버렸군. 여자는 텅 빈 거실을 밤새 서성거렸다.
화요일은 상담이 뜸한 편이다. 여자는 지하철역 광장 너머의 도로를 바라본다. 녹색 인도와 살구 색 자전거 도로가 선명히 구분되어 있다. 정우는 인도와 자전거 도로의 경계선을 밟으며 걷는 것을 좋아했다. 인도의 보호벽 옆을 걸으면 가슴이 답답해져. 자전거 전용도로로 걸으면 자꾸 경적이 울리고 말이야. 인도조차 이등분해서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이 도시가 하는 짓이야. 정우가 웃옷 단추를 풀어헤치며 떠들던 것도 반년 전의 일이 되었다. 인도와 자전거 도로 옆으로는 6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다. 출퇴근 시간이 지나면 건물과 주차장이 사람과 차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다 흡입한다. 그 대신 가로수 그늘이 하루 종일 아스팔트 위를 훑고 다닌다. 가로수 뒤편으로는 회색 아파트 단지들이 붙어 있다. 단지들을 끼고 극장과 헬스장과 마트와 사우나장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이어진다. 이 도시는 인공폭포와 잘 조성된 공원까지 완벽하게 쾌적한 곳이다. 하지만 정우는 늘 미로를 꿈꾸었다. 복잡하고 무질서한 미로를 헤맸어. 자다 말고 일어나서 중얼거리거나 잠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이 도시에서 떠났다. 하지만 정우가 떠난 이곳은 오늘도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공원이나 도로나 아파트 단지에는 운동복을 입고 비슷한 동작을 하며 걸어 다니는 사람들 천지다. 여기는 지상의 천국이야. 하늘 아래 이보다 더 좋은 데는 없어. 사람들은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넨다.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나 깍지 끼어 손을 잡고 벤치에서 떠드는 연인, 배드민턴 치는 노인의 모습이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여자는 컴퓨터의 마우스를 쥐고 커서를 움직인다. 미로라고 단어를 입력한다. 그러자 미로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한 페이지 가득 화면에 나타난다. 그중에서 미로, 페즈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마우스로 페즈를 클릭한다. -모로코에 있는 도시. 최대의 미로. 고도이자 험준하기 그지없는 미들 아트라스 자락에 위치. 구 도시의 반경은 2킬로미터에 불과한데 골목의 길이는 70킬로미터. 반경의 35배에 가까운 골목길. 팔천 개가 넘는 길은 한번 들어가면 찾아 나오기 힘들 정도. 미로를 즐기는 여행지로는 최상의 장소. 페즈… 정우가 가고 싶어 하던 미로도 저렇듯 팔천 개가 넘는 길이 구부러진 곳 일까. 여자는 미로를 검색하는 동안 정우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점점 더 가슴에 차오른다. 페즈라는 검색어 창을 닫고 메일함으로 이동한다. 휴면 메일이라서 수신이 되지 않습니다. 라는 응답이 와 있다.
어젯밤에도 그 메일을 확인한 뒤 여자는 식탁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정우가 늘 하던 말이 술을 배워 보라는 것이었다. 술을 한번 마셔 봐. 섹스나 연애, 영화 보다 더 좋은 친구야. 라고 늘 말했다. 떠나기는 쉽지. 무책임하게. 그에 대한 분노는 늘 여자의 술안주가 되었다. 소주 한 병에도 취하지 않는 날이 있고 맥주 한 잔에 취해 버리는 날도 있었다. 술을 마신 뒤 울음이 복바쳐 오르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울음소리가 여자를 사로잡았다. 여자는 그런 자신의 울음소리를 따라 들어갔다. 내면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키 작은 정우가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정우의 모습은 여자의 유년시절과 겹쳐졌다. 기억 속의 아이는 늦은 밤에 길을 잃고 전등 불빛을 무작정 따라가는 중이었다. 전등 불빛은 어디서나 한결같이 주황색이었다. 불빛이 아이의 작은 몸을 삼킬 듯 무시무시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밤거리에 매달린 전등만이 아이에게 길을 찾아줄 유일한 단서였다. 문제는 타원형 모양으로 나열된 전구가 어디서나 똑같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헤매도 전등은 똑같이 흔들렸다. 낯선 골목을 벗어나지 못한 채 길을 못 찾을까봐 아이의 얼굴은 두려움에 얼어붙었다. 새엄마와 헤어진 길 입구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새엄마는 다시 그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 빠져 있다가 여자는 조금씩 울음을 멈췄다. 그 울음소리도 더 이상 갈 수 없어진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면 여자는 기진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짐을 싸서 늘어놓은 쇼핑백들 사이에 여자는 웅크리고 누웠다. 그때마다 무덤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들판을 지나 바닥을 드러낸 하천이 보였다. 여자는 십 여 미터도 넘는 다리를 건너서 뒷산에 올랐다. 진달래꽃이 활짝 피었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이 꽃잎마다 새겨져 있었다. 그 꽃잎이 바람에 이따금씩 흔들렸다. 여자는 아버지의 산소를 한나절 동안 찾아 다녔다. 주변의 봉분이나 나무들이 비슷한 크기와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다. 고만고만해서 구별해 낼 수 없는 무덤을 찾아서 헤매 다녔다. 여자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낯선 곳에서 길을 찾는 일이었다.
7번 출구 앞에는 빨간 배낭을 멘 남자가 여전히 입을 달싹이고 있다. 남자는 어쩌면 페즈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며칠 전 퇴근길에 그 남자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날은 남자가 늘 서있던 7번 출구 앞으로 여자가 다가서던 중이었다. 7번 출구 앞에 서있던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발아래 놓였던 빨간색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런 뒤 남자는 버스 정류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졸지에 여자는 남자의 뒤를 따르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이윽고 남자는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222번 시외버스에 남자가 올라탔다. 늘 미동도 없이 서있던 남자가 버스에 올라타는 것 자체가 여자에게는 충격이었다. 여자는 강한 호기심에 이끌려 엉겁결에 남자를 뒤따라 승차했다. 버스 안에서 남자는 무표정하게 바깥만 내다보았다. 내릴 곳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버스는 점차 신도시를 벗어나서 구도시로 진입했다. 이제 그만 내려야 하지 않을까. 여자는 차창 밖의 낯선 풍경을 자꾸 살폈다. 신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여자는 불안했다. 신도시로 입주한 뒤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종점이 가까워서야 남자는 비로소 버스에서 내려섰다. 여자도 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남자를 따라 내렸다.
남자가 내린 곳은 무질서해 보이는 사거리였다. 높은 건물과 낮은 건물,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뒤섞여 있었다. 신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전선이 하늘을 조각내어 잘라 놓았다. 위치를 알려 주는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예측할 수 없이 나타나는 길과 건물들. 탁 트인 것 같다가도 엉겨버리는 길을 남자는 배회했다. 그 남자의 뒤를 쫓던 여자는 한순간 남자를 놓치고 말았다. 얼마나 헤매 다닌 걸까. 이윽고 부동산이 보였고 여자는 그곳으로 들어섰다. 이사 올 거예요? 글쎄요. 그건 아니고……. 여자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주인은 마침 부근에 내놓은 집이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내일이라도 이사를 올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내일이요? 여자의 되물음에 여주인이 웃었다. 내일이라도 이사할 수 있다는 것이 왜 놀라운지 의문이라는 표정이었다. 빌라 나온 거 있는데 지금 보여 드릴까요? 주인이 덧붙였다. 저, 사실은 그게 아니고 여기가 어딘지 좀 알고 싶어서요. 여자는 벽에 걸린 지도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지도의 방위조차 잘 가늠되지 않았다. 그거 봐서는 몰라요. 직접 나가 봐야 어딘지 알 수 있죠. 일단 집을 보면 마음이 동할 걸요. 아주 깨끗하고 전망이 좋은 집인데. 주인은 계속 빌라를 한 번 보라고 부추겼다. 주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늘 이사를 가고 싶어 하던 정우가 떠올랐다. 그는 땅이 있고 골목이 있는 곳으로 이사 가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가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는 이미 상담실에서 자리도 잡았고 도시의 주가도 높아가는 중이었다. 도시가 성장하면 여자도 덩달아 성장할 것이었다. 그것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여자가 지도를 쳐다보고 있는 사이 주인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여자가 밖으로 나오자 주인은 승용차에 타라고 재촉했다. 어쨌든 이곳을 벗어나야 했으므로 여자는 일단 차에 올라탔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주인은 빌라가 늘어선 곳에 차를 주차 시켰다. 여자는 주인에게 이끌려서 그 중 한 군데의 빌라로 들어섰다. 낮에 보면 또 다르니 시간 내서 다시 보라고 주인이 말했다. 몇 군데를 더 보여 주겠다는 주인에게 대답 대신 여자는 신도시로 가는 버스 정류장을 물었다.
7번 출구에 서있던 남자를 뒤쫓아 낯선 곳에서 헤매다 돌아온 그날 이후 여자의 퇴근길은 애매해졌다. 집으로 바로 가는 것보다 낯선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싶어진 것이다.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곧바로 집으로 가면 후회의 감정이 올라왔다. 집으로 가는 길의 아름답던 장미넝쿨조차 표지판이나 칸막이처럼 보였다. 어디를 가나 조경된 꽃을 보면 오히려 멀미가 치밀기도 했다. 도시 곳곳에 무더기로 심어진 메리골드 옆을 지날 때면 역한 냄새 때문에 코를 싸쥐었다. 메리골드는 멀리서 볼 때는 황금색 꽃잎마다 빛이 나던 꽃이었다. 꽃이 흐드러진 거리를 걷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자주 올라왔다. 어김없이 들어찬 비슷한 것의 나열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따르르릉.”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가출을 반복하는 아이에 대한 상담 전화다. 아이의 엄마는 상담 중에 자주 침묵에 빠진다. 매일 두 시만 되면 상담 전화를 해오던 수아 엄마도 그랬다. 한숨 반, 이야기 반이었다. 좀 크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수없이 부탁했던 그 낮은 목소리도 열흘 째 끊겼다. 저어, 가출한 아이는 지금……. 여자가 침묵에 슬쩍 끼어들려는 순간 전화가 툭, 끊어진다. 십여 분 기다려도 전화는 다시 오지 않는다. 전화기 사이에 놓인 화분에 허브가 말라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정우가 떠나면서 두고 간 허브. 금방 돌아올 거지? 여자는 화분을 받는 대신 물었다. 정우가 화분을 전화기들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런 걸 왜 묻고 그래. 하도 재미없어서 떠나는 사람한테. 그가 시선을 외면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정우는 즐거운 소풍이라도 떠나는 사람 같았다. 추리닝 바지와 도복 같은 흰색 상의를 입은 채 작은 배낭을 멨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눈부셨다. 손을 내밀어서 그의 여행을 진심으로 축하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내려다보려 했지만 그는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수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날이 바로 수아 엄마가 첫 상담 전화를 해온 날이었다. 수아 엄마는 전화기를 붙들고 내내 울었다. 며칠 뒤 수아가 돌아왔다고 다시 연락이 왔다. 전혀 다른 아이가 된 것 같아요. 키우던 내 딸이 아닌 것처럼 정말 낯설기 그지없다니까요. 수아는 어디에 갔다 온 것일까요.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네요. 돌아오면 정말 잘 해주려고 했는데 배신감 때문에 손도 잡아주지 못했어요. 수아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거의 매일 상담 전화를 걸어 왔다. 아이가 잘 때나 목욕할 때, 잠시 친구 만난다고 외출 했을 때도 통화를 하고 싶어 했다. 상담을 할 때는 안심이 되는데 전화를 끊고 나면 불안하고 막막하다는 것이다. 아, 물론 그래요. 60평 아파트에서 내다보는 창문 밖은 숲속처럼 멋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참 이상해요. 언제부턴가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늘 아이가 이 도시에서 불시에 흔적도 없이 삼켜질 것 같단 말예요. 이 도시에서 우리 아이는 아무래도 너무 연약하지 않나요? 그래서 난 아이가 집에 있을 때조차도 이 방 저 방 문 열고 아이가 있는 것을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니까요. 아, 어쩌면 좋아요. 수아 엄마의 하소연이 연일 길어지더니 기어코 일이 터졌다. 수아가 다시 가출 했다는 전화였다. 그런 뒤 며칠 동안 수아 엄마에게는 아무런 전화가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담자는 수없이 묻는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되묻는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그 질문에 끝없이 대답을 재촉하는 것은 여자 자신이다. 그 질문에 붙들려 버린 날이면 여자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매일 한 시간만 마시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은 지켰지만 빈 병은 두 배로 늘어갔다. 술을 마시면 단정한 자신의 모습이 허물어지고 억눌렀던 내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서 살만해졌다. 여자는 술을 비우고 혼자 떠들고 웃었다. 그와 지냈던 시간을 반추하느라, 혹은 서러워져서 울음이 이어졌다. 울음을 자를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여자는 싱크대 서랍을 열어서 칼을 꺼냈다. 칼날은 손에 쥐는 것에 공포를 느낄 만큼 날카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바닥 안에서 통증을 느끼지 못할 만큼 무딘 것도 아니었다. 삼십 센티 중간 크기의 칼이 가장 손에 쥐기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칼날을 손바닥으로 향하도록 놓고 있는 힘을 다해 손바닥을 오므렸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더 꽉 쥐었다.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손바닥이 배어지고 피가 흘러내리면 여자는 울음도 그칠 수 있을 듯했다. 길 잃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고 자위행위 같은 짓은 그만 두고 내일 출근을 위해 빨리 자라고 타이르는 이성적인 어른으로 돌아갈 것이다. 깊이 쥘수록 손바닥은 정직하게 아파왔다. 칼날은 자극을 어디서 끝내야할 지 정확히 알려 주었다. 언제부터 이 방법을 쓰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마 그가 떠난 다음 날부터였던 것 같다. 그날 여자는 자극이 필요했다. 똑 같은 자극을 주면 대부분 자극에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칼은 달랐다. 칼은 자극을 주면 줄수록 자국이 비례해서 남는다. 손에 어렴풋이 붉은 자국이 생기고 조금 베일 것 같고 어느 날은 살이 배어져 피가 나온다. 그 행위를 멈추면 고통은 끝나고 계속 자극을 가하면 상처를 남긴다. 그것보다 더 정직한 자극을 아직 여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평소에 했던 대로 그 자극이 상처가 되기 전에 여자는 손바닥에 쥐었던 칼날을 내려놓는다. 언제나 크게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자극은 마무리 된다. 이것이 정우와 여자의 가장 큰 차이였다. 그는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내던지고 떠났다. 여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것을 바닥까지 내려놓아본 적이 없다. 길의 끝까지 가 본 기억 역시 없다. 정우와 함께 있을 때 여자가 가장 원한 것은 이 도시의 편리함 속에 안전하게 사는 것이었다. 안전이 무엇보다 여자에게 소중한 가치였다. 하지만 지금 정우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아갈 수 있을까. 만약 만나게 된다면 다시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헤어지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그를 따라가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원하는 미로와 여자가 원하는 도시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거리 같았다. 그러니 어쩌면 정우를 그리워하지만 정우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정우와 여자는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여자는 안전하게만 여겨지던 이 도시가 너무나 막막해지는 것이다. “죄송해요.”
일방적으로 끊었던 전화가 다시 들어온다. 너무 감정이 복받쳤나 봐요. 내담자는 대뜸 사과부터 한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편안한 목소리다. 한바탕 울고 난 모양이다. 아이가 오면 같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오지로 가면 좋겠죠. 절대 아이 손 놓지 않고 붙어 다닐 거예요. 물론 형편이 어렵지만요. 지금이라도 내가 돈이 될 일을 찾아보면 안 될까요? 그동안 너무 겁을 먹고 살았어요. 아이에게 힘들게 한 것도 불안해서 그랬어요. 이곳에서 살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이젠 안 그래요. 꼭 돌아오겠죠? 내담자는 몇 번이나 묻는다. 정우도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까.
여자는 정우 생각에 붙들릴 때면 초록색 222번 버스를 탔다. 7번 출구에 서있던 남자가 내렸던 바로 그 도시로 숨어들었다. 뒷모습이 허름한 남자만 보면 뒤쫓아 갔다. 뒤쫓던 남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여자는 한순간 집 앞에 버려진 미아 같았다.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으면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짓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골목을 벗어나기 위해 허적허적 걷고 있으면 또 누군가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정신 나간 여자 마냥 낯선 사람을 몰래 뒤쫓았다. 여자에게는 그 낯선 남자들이 모두 정우처럼 여겨졌다.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만큼 좁은 골목에 여자는 혼자 우두커니 섰다. 그 골목이 왠지 낯익었다. 문득 정우와 함께 손을 잡고 잠시 머물 데를 찾아다니던 바로 그 골목길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우와 함께 밤새 다녔던 골목에는 폐쇄된 우물과 이파리가 늘어진 버드나무와 철제 일인용 의자가 두 개 있었다. 막다른 골목의 좁은 의자 위에 정우가 드러누워 버리던 기억도 났다. 나지막이 부르는 노랫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정우가 곧잘 여자에게 불러주던 노래였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 가로등 아래 흩어지는 눈처럼 보이던 밤이었다. 라일락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골목 구석에 앉은 여자의 무릎을 베고 정우가 드러누웠다. 정우가 노래를 흥얼거리고 여자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런 자세로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여자는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골목에 대한 추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퇴근한 뒤 골목을 헤매고 다니던 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 여자는 전에 보았던 빌라로 가보기로 했다. 집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하자 부동산 주인은 열쇠를 쥐어 주었다. 벽돌로 지어진 오층 빌라가 있는 단지로 들어섰다. 하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번지수만 알면 돼요. 번지수를 확인해요. 담벼락에 적혔으니까. 부동산에서 일러준 대로 집을 찾았다. 과연 번지수가 벽마다 적혀 있었다. 마침내 그 집을 찾았고 텅 빈 집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이곳으로 이사를 올 것인가 생각하자, 여자는 갑작스런 한기를 느꼈다. 그것은 미로에 떨어뜨려진 유년의 기억처럼 두려웠다. 그러자 여자는 뜨거운 것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졌다. 가방을 내려놓고 여자는 지갑만 꺼내 들었다. 잠시 슈퍼에서 뜨거운 것을 사들고 와서 이 빈 집을 구경하기로 했다. 여자의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를, 두려움을 천천히 풀어내고 싶었다.
빌라에서 나온 여자는 두리번거리면서 슈퍼를 찾았다. 골목길과 벽돌색 빌라가 이어졌다. 맞은편에 슈퍼가 보였다. 여자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음료를 사들고, 왔던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조금 전 나왔던 현대아트 빌라의 붉은 벽돌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번지수가 달랐다. 대부분 13번지부터 시작되었다. 쭉 올라가면 14번지가 나올 거라고 어림짐작했다. 14번지는 찾을 수 없었다. 가방에 핸드폰을 두고 나와서 부동산에 연락할 길도 없고 상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주소를 내밀고 물어봐도 한결같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여자는 빵집으로 들어갔다. 14-29번지가 어디예요? 빵집 주인은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반대 방향이라는 말만 믿고 여자는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그제야 14번지라고 담벼락에 쓰여 있는 글씨가 보였다. 그러나 14-25번지 다음 집은 15-1번지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일단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까. 가방 안에 핸드폰이 들어 있는 것도 문제였다. 여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토바이 소리가 나더니 자장면 배달원이 여자가 서있는 빌라 앞에서 멈췄다. 배달원에게 여자는 다가갔다. 14-29번지가 어디죠? 청년이 조끼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곳엔 14-29번지가 없는데요. 이것 봐요. 14-25번지가 마지막이잖아요. 아니, 내가 조금 전에 14-29번지에서 나왔다니까요. 여자는 중얼거리며 배달원이 내민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블록으로 구획된 어디에도 29번지는 없었다. 근데 무슨 동네 찾아요? 여자는 수진동이라고 대답했다. 아유, 동네가 다르잖아요. 전혀 다른 동네예요. 여긴. 하지만 분명히 빌라의 이름도 생김도 블록의 모양도 똑같았지 않은가. 동네가 너무 비슷해서요. 여자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요? 우린 모르겠는데. 배달원은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가버렸다. 어디를 가나 또 다른 블록의 변주인가. 모든 도시는 신도시처럼 반복 재생된 블록들로 만들어졌을까. 도대체 어디까지 나가야 이런 반복 재생된 블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자는 속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기획된 것들 속에 가지런히 놓인 소도구들. 이를테면 적당한 위치에 놓인 조경, 벤치, 울타리, 신호등처럼 이 도시에서 자신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정우가 늘 그랬던 것처럼 여자는 웃옷의 단추를 모두 풀었다. 그러자 전봇대를 붙들고 오랫동안 토하고 싶었다. 그러나 메스꺼움을 전복시킬 아무 것도 뱉어지지 않았다.
“저어. 수아 엄마예요.”
바닥에 가라앉을 것처럼 작디작은 목소리가 수화기 안에서 들려온다. 아, 수아 어머니. 반갑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크게 말씀해주세요. 여자가 부탁한다. 수아는 집에 잘 돌아 왔지요? 여자가 묻는다. 한동안 대답이 없다. 수아는, 수아는 죽었어요. 네? 다시 묻는다. 순간 허브의 녹색 이파리가 새까맣게 보인다. 여자는 한동안 눈을 깜박인다. 죄송하지만 목소리를 조금만 더, 여자가 부탁하는 도중에 수아 엄마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아는 죽었어요. 약을 먹었어요. 장례도 다 치렀어요. 그러고 나니까 왠지 수아가 떠났다는 걸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런데, 잘 아시잖아요. 우리 수아 이곳에 살았던 거. 내가 우리 수아 이야기 늘 했던 거……. 수아 엄마는 한동안 흐느낀다. 수화기를 붙들고 여자는 울음소리를 듣기만 한다.
흐느낌 끝에 전화는 툭 끊어지고 말았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지만 수아는 여자와 늘 함께 했던 것만 같다. 그리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가까운 친구가 죽은 것처럼 여자는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아는 과연 어떻게 생긴 아이였을까.
여자는 무심코 창문 너머 하늘을 본다. 하늘이 뿌옇게 흐리다. 이 도시에서, 이 안정된 도시가 지니고 있는 칼날이 쓰라리게 느껴진다. 안정하게만 느껴지던 이 도시의 칼날을 피해 정우는 그토록 미로로 숨어들고 싶어 했던 것일까. 여자는 차츰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활짝 연다. 아, 7번 출구에 늘 서있는 빨간색 배낭을 멘 남자가 서있고 그 옆에 낯익은 남자가 눈에 띈다. 여자는 창문에 얼굴을 더 바짝 들이대고 남자를 살핀다. 혹시 정우……. 남자는 모자를 눌러썼지만 정우의 몸매와 비스듬히 서있는 포즈까지 비슷하다. 여자는 얼른 창가에서 돌아서서 상담실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걸음은 더 황망해진다. 정우가 금방이라도 사라지고 없어질까 봐 조급증을 내며 허둥댄다. 계단은 평소보다 몇 배나 많아진 것 같다. 정말 정우라면, 정우가 돌아온 거라면. 그 한 문장 밖에 다른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우가 아니다. 모자를 쓴 남자는 일행을 만나자 정류장으로 걸어가 버린다. 여자는 건물 입구에 우뚝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7번 출구 남자가 입을 달싹이고 있다. 등산복 차림으로 끝없이 프, 혹은 쓰,라고 외쳐대는 중이다. 여자는 남자의 초췌해진 얼굴을 힐끗 본다. 남자의 얼굴은 전보다 더 창백하다. 입은 옷이 무겁고 지나치게 커 보일 만큼 몸이 더 수척해진 것 같다. 그는 또 하나의 기둥이 되어 붙박인 듯 서 있다. 여자는 그만 상담실로 올라가야겠다고 발을 뗀다. 그때였다. 흰 가운을 입은 건장한 사내 두 명이 7번 출구 남자에게로 다급히 다가선다. 그들은 남자에게 달려들어 양 쪽에서 팔을 꽉 움켜잡는다. 여자는 깜짝 놀라서 남자가 서있는 곳으로 단숨에 다가선다. 남자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작적으로 버둥댄다. 그들 옆에는 남자의 어머니인 듯한 노인이 눈물을 찍어내고 있다. 건장한 사내의 힘에 못 이겨서 남자는 질질 끌려가는 중이다. 그 순간에도 남자는 무어라고 소리치고 있다. 허공을 향해서 열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친다. 어느새 남자는 앰블런스 가까이 끌려간다. 사내 한 명은 시동을 걸기 위해 앰블런스 운전석에 올라탄다. 나머지 한 명의 사내가 문을 열기 위해 남자의 한 쪽 팔을 놓은 채 잠시 주춤한다. 그때 버둥대던 남자가 사내의 손에서 놓여난다. 남자는 순식간에 여자가 서있는 도로 앞까지 달려온다. 놀라서 뒷걸음치던 여자와 남자의 눈이 마주친다.
“빨리 도망쳐.”
남자가 큰소리로 외친다. 도망치라니. 지금 도망쳐야 할 사람은 남자 자신 아닌가. 남자는 마치 적군에 포위된 채 아군을 만난 듯 여자에게 소리친다.
“이곳에서, 빨리 도망쳐!”
여자는 손으로 입을 막고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선다. 그때 사람들이 꾸역꾸역 7번 출구로 나오기 시작한다. 남자는 그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사내들이 무리를 헤치며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어느새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여자는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무리에 떠밀려서 버스 정류장 쪽으로 휩쓸려 간다. 정류장에서 여자는 한동안 남자가 서 있던 7번 출구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다.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사람들이 여자를 스치며 우르르 몰려가거나 우르르 내린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여자는 섞였다가 혼자되기를 반복 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여자는 움직이지 못한다. 줄지어 서있던 버스들이 출발하기 시작한다. 222번 버스도 여자 앞을 스치듯 지나가는 중이다. 아, 버스 안에 빨간 배낭을 멘 남자가 여자를 주시하고 있다. 여자는 깜짝 놀라서 버스 앞으로 한 발 다가선다. 어느새 버스는 저만치 달려간다.*
(끝)
김미선
1963년 경북 칠곡 출생
성신여대 국어국문과 졸업
박범신 소설가·정과리 문학평론가
예심에서 올라 온 11편의 소설 대부분은 만화적 상상력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만화는 현실의 축약과 변용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무미건조한 일상을 건너뛰도록 하는 힘이 있지만, 그러나 그 대가로 현실로부터의 검증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김엄지의 ‘돼지우리’, 이정옥의 ‘치코의 숲’, 김미수의 ‘미로’가 마지막 후보작으로 거론되었다. ‘돼지우리’는 현대인의 욕망을 돼지의 탐식에 빗대어 풍자하는 힘이 돋보였다. 그러나 작위적 설정이 진실에 다가가는 걸 방해할 수도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치코의 숲’은 유한자인 인간 삶의 근본적인 이원성, 즉 창조가 파괴가 되고 선과 악이 등을 맞대고 있는 상황을 환상적 형상들을 통해 추구한 소설이다. 데미안적 주제와 수미일관한 구성이 돋보였다. 그러나 동원된 형상들이 적합하다기보다는 장식적이어서 그로 인해 소설이 공소한 난해성 속에 빠진 게 아니냐는 물음이 따랐다. ‘미로’는 불우한 유년으로부터 벗어나 가까스로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성공한 상담원이 겪고 있는 삶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두 가지 낯선 경험을 통해 충격적으로 부각되고 의미화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 과정을 통해 문명사회의 화사한 외관 뒤에 숨어 있는 정신적 불모성을 진지하게 되묻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문체를 다듬는 데 공을 들이면 좋은 소설세계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당선을 축하한다.
김미선
1963년 경북 칠곡 출생
성신여대 국어국문과 졸업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를 간신히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지지리도 불운했던 그 분들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그날 나는 변기에 앉자마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정말 느닷없이 닥친 감정이었다. 새벽 장사를 나가야 하는 매운 겨울, 쏟아지는 잠을 깨우기 위해 벽에 등을 툭툭 치면서도 눈을 못 뜨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자 목이 메어왔다. 그러자 나는, 내 삶은 뭐란 말인가. 누군가에게 헌신하기 위해 벼랑 끝에 서거나 손톱에 피가 나도록 벼랑을 기어본 적이 있는가. 그저 포즈에 익숙하고 관념에 찌든 먹물 아니었나. 그러니 나는 똥물이다. 라고 나를 명명한 뒤 변기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제발 똥물이라도 될 수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시금치를 키우거나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가라앉힌 뒤 들이 마시던 내 할머니의 그 똥물. 내 새로운 이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이름이 나를 더 없이 편하고 자유롭게 해주었다.
자신의 상처를 사랑하라는 송기원 선생님. 그 말씀을 어렴풋이 알아차리는 데도 이렇듯 십 년이 걸렸네요. 선생님은 제게 스승이라기보다 아버지였습니다. 침묵의 가르침을 주신 황충상 선생님과 최인소설교실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단 한 문장도 관념의 치장 없이, 세상을 읽어내고 인간을 파고드는 치열한 글을 쓰고 싶다. 아마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노력한다면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디 한번 시작해보라고 등 떠밀어주신 박범신, 정과리 선생님. 정진해서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