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산사일기

by  최영주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
  • S#1. 入山의 冬
    하얀 화면에 검은 글씨.
    入山의 冬

    S#2. 산길 (오후)
    아무도 밟지 않은 전인미답의 하얀 눈길...
    뽀드득 소리와 함께 눈에 젖은 벽돌색 어그 부츠가 발자국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윽고 드러나는 부츠의 주인공, 은선희(20세)다.

    S#3. 일주문 앞 (오후)
    힘겹게 올라와 산문 앞에 서는 선희.
    지치고 사연 많은 눈빛으로 산문을 올려다본다,

    S#4. 대웅전 뜰. (오후)
    바람이 불때마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청량한 소리 내며 운다.
    강행자(25세)가 싸리비로 눈 쓸고 있는데 다가오는 선희.

    선희 - 저.... 스님예, 말씀 좀 묻겠습니더.
    강행자 - (건조하게) 물어 보이소.
    선희 - 주지스님 좀 뵐라꼬 왔는데 어데로 가면 됩니꺼?

    S#5. 요사채 마당 (오후)
    선희가 다가와서 보면...
    연화스님이 절에서 기르는 강아지에게 눌은밥 주고 있다.
    가사는 물론 양말까지 기워 입은 모습이나, 초겨울 햇살 아래 청초한 노비구니가 강아지에게 밥 주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게 보인다.
    문득 인기척 느끼고 돌아보는 연화스님.

    연화 - 응? 니가 누고?
    선희 - (꾸벅 인사하는) .....!

    S#6. 암자 안 (오후)
    연화(67세), 주지(53세), 법우(38세), 세 스님 앞에 선희가 주눅 든 표정으로 앉아있다.
    주지스님이 부젓가락으로 놋쇠화로의 숯을 뒤적인다.
    연화스님이 차를 권한다.

    연화 - 몸 녹구로 뜨신 차 좀 마시라..
    선희 - 고맙습니더...

    찻잔을 두 손으로 들고 차 한 모금 마시는 선희.

    주지 - 그래, 니 어데서 왔노?
    선희 - .... 부산 장전동에서 왔습니더.
    주지 - 길이 마이 미끄러벘을 낀데... 절집에는 머 할라꼬 왔노?
    선희 - ..... 중 될라꼬예.
    주지 - 중은 와 될라 카는데...?
    선희 - (약간 당황) ..... 좋은 시를 쓰고 싶어서예...

    세 스님, 마주 보며 의외라는 표정 짓는다.

    법우 - 야가 벨 희안한 소리를 다 하네. 시하고 비구니 사는 절집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꼬?
    선희 - (난처한) .... 그기...!
    연화 - (O.L) 와? 큰 스님들 게송이나 법문이 다 시지 벨게 있다 카더나. 절집에도 얼마든 지 시가 있을 수 있제.
    법우 - 그거야 그렇지만도.. 귀때기 새파란 얼라가 그런 경지를 알 턱이 있습니꺼. (선희 유 심히 보며) 니 속가에서 무슨 사연이...?
    선희 - (당황하는) ....!
    연화 - (법우에게 눈치 주는) 음...!
    법우 - 지난달에도 중 되겠다고 왔다가 사흘을 몬 버티고 사라진 처자가 넷이나 된다 아입 니꺼. (선희에게) 남자 친구하고 싸우고 홧김에 올라 왔으마 절밥이나 얻어 묵고 내 리 가거라.
    선희 - (난처한) 지는... 그래서 찾아온 기 아닌데예..
    법우 - 아니기는! 얼굴에 딱 써 놨구마는.
    주지 - (법우에게 끌탕하고) .....속가에서 사연이 있으마 시가 더 술술 잘 나오겠제.
    법우 - (입 다무는) .....!
    주지 - 그래, 니는 어떤 시를 쓰고 싶은데?
    선희 - 꽃도, 새도, 바람도, 구름도... 다 쓰고 싶습니더. 그들이 부처님 섭리인거 같아서....

    연화스님과 주지스님, 다시 마주보며 빙긋 미소 짓는다.

    주지 - (연화 스님에게) 큰 스님 뜻은 어떻습니꺼?
    연화 - (웃으며) 눈 맞고 찾아든 강새이... 내 쫒을 수가 있나...
    주지 - (웃으며 끄덕이는) ....!!
    법우 - (눈치 채고 선희에게) 니 그래 보리자루 맨치로 앉았지 말고 주지스님께 삼배 올리 라. 받아주실 마음이 있으신 갑다.
    선희 - (반가운) 예....! (일어서려는데)
    지주 - 내는 됐다. 큰 스님한테나 삼배 올리라.
    연화 - 아입니다. 주지 스님 한테나 삼배 올리라.
    선희 - ....??
    법우 - 뭐 하노? 퍼뜩 절 안올리고?

    선희가 일어서다 발이 저린지 휘청한다.
    얼른 콧등에 침 세 번 바르고는 서툴게 삼배 올린다.
    그 모습 보고 세 스님들 다시 미소 짓는다.

    S#7. 공양간 (오후)
    부뚜막에 산채, 장아찌 등의 소박한 점심상이 차려져있다.
    은행자(여기서부터 선희가 아닌)가 절밥을 허겁지겁 먹는다.
    숭늉 그릇 놓아주며 옆에 앉는 여주보살(48세).

    여주 - 천천히 먹어요, 체하겠다.
    은행자 - (겸연쩍게 배시시) ... 절밥이 꿀맛이네예. 청도역에 내리고 나서부터 굶었거든예.
    여주 - (빤히 보며) 올해 나이가...?
    은행자 - 스무 살입니더...
    여주 - 머리 깎고 사미니계 받게는 안 생겼는데 어쩐 일로 절에는 들어 왔수?
    은행자 - .... 시인이 될락꼬예.
    여주 - (의외라는 듯 웃는) 비구니 되려는 이유치곤 예술적이네. 연애 실패해서 들어오는 처녀가 제일 많은데... 계모, 계부 구박 피해 서 들어오거나...
    은행자 - (문득 굳어지는) ....!!

    이때 철(10세)이 발로 공양간 문을 뻥 차며 들어온다.
    왼쪽 콧구멍에 누런 코를 매달고 있다.

    여주 - (질색하며) 살살 다니라니까! 법우스님한테 혼나려고...
    철 - (아랑곳없이) 엄마, 배고파.. 대구 할머니 보살이 해온 백설기 줘!
    여주 - (앞치마 자락으로 코 닦아주며) 그게 언젠데 아직도 남았겠니. 밥 먹어.
    철 - 밥 먹기 싫어!
    여주 - 참기름 부어 줄 테니까 산나물에 비벼먹어.
    철 - 싫어. 산나물 지겹단 말야. 누룽지에 설탕 뿌려줘.
    여주 - 아유, 참. 절에 사는 놈이 입이 짧아 가지곤.

    여주, 지청구 하면서도 준비해둔 누룽지에 설탕 솔솔 뿌려준다.

    여주 - 옛다. 얼른 들어가서 숙제해.
    철 - (누룽지 먹으며) 이 누난 누구야?
    여주 - 은행자님이야. 오늘부터 공양간에서 일할거야.
    철 - 쳇, 돈 많은 은행장이 좋지 은행자가 뭐야. (문 뻥 차고 나가는)
    여주 - 아니,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은행자 - (웃으며) 아드님 이라예?
    여주 - 아들이 아니라 업장이에요. (한숨) 저거만 없었어도 벌써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었을 텐데...
    은행자 - ....!!

    강행자가 싸리비 들고 들어온다.

    강행자 - 저녁 공양 준비 안 합니꺼?
    여주 - 지금 시작할 참이야. 참 인사들 해요. 새로 온 은행자고, 이쪽 은 강행자...
    은행자 - (미소) ...아까 뵈었지예?
    강행자 - (냉랭한) 아직 절식구 될지 어떨지 확실히 모르니까 인사는 천천히 하지요. (여주 보살에게) 저녁에 땔 장작 안 모지랩니꺼?
    여주 - 간당간당 하겠네. 눈 온 뒤라 군불도 넉넉히 지펴야하는데...
    강행자 - 알았심더. 부목처사님한테 얘기할께예. (휙 나간다)

    강행자가 휙 나가버리자 무안한 기분이 드는 은행자.

    여주 - (보며) 강행자가 사람이 좀 차갑죠?
    은행자 - (그냥 웃는) ....!
    여주 - 스님 되겠다고 와서 며칠 못 버티고 사라지는 처녀들이 부지기수라 그래요. 법대 다 니다 온 사람인데... 잔정은 없어도 속정은 깊은 사람이니까 잘 사겨 봐요. 아마 경 전 공부도 꽤 깊을 거에요.
    은행자 - 알았심더. 근데 지는 뭐부터 하면 됩니꺼?
    여주 - 부엌일 많이 해봤어요?
    은행자 - 자취를 오래 해서 밥하고 국 끓이는 거 흉내는 냅니더.
    여주 - 나는 밥하는 공양주고, 강행자는 반찬 만드는 채공이니까... 은행자는 국 끓이는 갱 두를 맡아요. 오늘은 처음이니까 땔나무 가져다가 큰스님 방에 군불부터 지피고요.
    은행자 - 예.

    S#8. 연화스님 방 아궁이
    은행자가 장작더미 한 아름 안고 들어와 아궁이 앞에 부려놓는다.
    이마의 땀 닦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군불 지피기 시작한다.
    통성냥 여러 번 켜서 장작에 불붙이는 은행자.
    불은 안 붙고 연기만 나자 콜록콜록 기침하는데 지팡이 짚은 연화스님이 다가온다.

    연화 - 아이, 야야 니 여게서 뭐하노?
    은행자 - 큰스님 방에 군불 땔라 카는데예...
    연화 - 군불 때기 전에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뚜디리 줬나?
    은행자 - 아니예. 그래야 됩니꺼?
    연화 - (웃으며) 그래야... 따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자던 생쥐들이 나와서 살강 우에로 도망갈 거 아이가.
    은행자 - (끄덕이며) 아아....!
    연화 - (웃는) 신식 까막눈 행자가 들어와가 여주보살이 군기 잡을라 카마 애 묵겠다.
    은행자 - (겸연쩍게 웃는)
    연화 - 욕 보거라.
    은행자 - 예....

    지팡이 짚고 천천히 갈 길 가는 연화 스님.
    은행자 부지깽이로 이맛돌 툭툭툭 두드린 다음에 다시 불 지피는데.
    어디선가 쏙톡쏙톡 박새 우는 소리 들린다.

    연화 - (두리번거리며) ...아이, 야들이 어데서 울어쌌노?
    은행자 - 저기 무슨 소린데예?
    연화 - 저래 약하기 속닥속닥 우는 놈은 밀화부리도 휘파람새도 아니고 박새가 틀림없다. (두리번거리는) 야들이 다 저녁때 숲에서 안 울고 우째 여게서 우노?

    다시 박새우는 소리.
    소리 나는 곳 찾다가 굴뚝 안 들여다보는 은행자.

    은행자 - (놀라서) 엄마야! 굴뚝 안에 새 둥지가 있습니더.
    연화 - 참말이가?

    다가와 굴뜩 안 들여다보는 연화 스님.

    연화 - (찌푸리며 보는) 눈이 침침하이... 안 빈다...
    은행자 - (가리키며) 저게예... 저게 안 있습니꺼.
    연화 - (감탄) 그러시리..! 소리 소문 없이 진객이 찾아 들었구마는.

    굴뚝 속 작은 둥지에 박새가 알을 품고 있다.

    은행자 - 우짜면 좋습니꺼? 쟈들을 쫒아내야 군불을 땔낀데예.
    연화 - (빙그레 미소) 문수 보현 보살님이 돌보싰는 갑다.
    당분간 내 방에 군불 때지 마라. 박새가 알을 까서 새끼 데리고 둥지를 떠날 때 꺼 정은...
    은행자 - (놀라) 날이 추워서 안 될낀데예..?
    연화 - 괘안타. 처서 추위에 늙은 중년 고뿔 밖에 더 걸리겠나.
    니 여주보살한테 좁쌀 한 주묵 얻어다가 둥지 주변에 뿌리주거라.
    은행자 - 예.

    연화 큰스님 지팡이 짚고 간다.

    은행자 - (박새 둥지 보며) 새야... 니가 아무래도 이 방 주인 보리심을 알고 둥지를 틀었는 갑다. 니는 잘됐지마는 큰스님 감기 걸리면 우짤꼬.

    굴뚝 속에서 속없이 우는 박새.

    S#9. 대웅전 앞 (저녁)
    산사에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강행자가 석등 안의 호롱불에 통성냥으로 불을 켜자 오렌지색 꽃불이 번진다.
    대웅전 안에서 법우스님의 저녁 예불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S#10. 연화 스님 방 (밤)
    큰 스님 방 아랫목에 옥돌매트 깔고 이불 펴는 은행자.
    네 귀 딱딱 맞춘 이불 속에 고타쓰 넣는 은행자.
    (고타쓰 - 뜨거운 물을 넣어 쓰는 난방기구)
    손으로 온기 가늠해보는 은행자.

    은행자 - (안도하는) .....!

    머리맡에 자리끼와 타호도 가지런히 놓아두고 나간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연화스님이 들어와 장삼 벗는다.
    이불 속에 누우려다가 고타쓰 발견하자 빙그레 웃는다.

    S#11. 행자방 (밤)
    윗목에 자리끼 주전자와 그릇이 놓여있다.
    그나마 따뜻한 아랫목부터 철이 여주보살이 눕고.. 한자리 비워두고 은행자가 누웠다.
    강행자는 서안을 벽을 향해 놓고는 스탠드 불빛 낮추고 공부하고 있다.
    철이와 여주보살은 곤히 잘 자는데 낯선 잠자리 탓에 은행자는 잠이 오지 않는다.
    말똥말똥 상념에 잠겨있는데 강행자가 넘기는 책장 소리만 들린다.
    은행자, 억지로 눈 감고 잠을 청하지만 감은 눈가에 시름이 깊다.
    멀리서 산바람이 겨울 숲 흔드는 스산한 소리가 들린다.
    산바람에 무심히 탱강 거리는 풍경소리도...

    여주 - (눈 감은 채 어눌하게) ...바람소리 좀 봐... 바깥 날씨가 엔간히 추운 모양이네..

    철이가 자다가 기침하자 여주보살이 이불 끌어 덮어준다.

    강행자 - (미동도 없이 책 읽고 있는) ......
    은행자 - (잠이 오지 않는) .....!!

    산사의 첫 밤이 외롭고 길다.

    S#12. 대웅전 앞 (이른 새벽)
    동녘이 아주 조금 희부염하다.
    가사 장삼 제대로 차려입은 법우스님이 목탁 치고 염불하며 천천히 절 주위를 돈다.
    아주 작은 소리로 시작해서 점점 크게 염불하는. (도량석)

    S#13. 몽타주 (이른 새벽)
    * 일어나 앉아 타호에 가래침 뱉고 좌선 삼매에 들어가는 연화 스님.
    * 일어나자마자 서안 앞에 앉아 불경 펼치는 주지스님.

    S#14. 행자방 (이른 새벽)
    윗목의 자리끼 그릇에 살얼음이 잡혀있다.
    강행자가 먼저 일어나 옷매무새 고치고는 세수하러 밖으로 나간다.
    은행자도 일어나 앉았지만 벽에 기대어 계속 존다.
    여주 보살이 일어나 철이 깨우는.

    여주 - 철아, 새벽 예불 시간 다 됐어. 일어나서 종 쳐야지.
    철 - (엉덩이만 치켜들고 짜증) 아이잉....!
    여주 - 늦으면 법우 스님한테 또 혼난다!
    철 - 아잉... 씨이....! (간신히 일어나는)
    은행자 - (눈 번쩍 뜨며) 철아, 내가 같이 가 줄까?
    철 - 으응....

    S#15. 종루 앞 + 종루 (이른 새벽)
    철이와 은행자, 외투와 목도리로 무장하고 종루로 간다.
    둘 다 새벽바람이 추워서 오들오들 떤다.

    철 - (치 떨며) 어휴, 추워! 새벽 예불 없는 나라에서 살았음 소원이 없겠다.
    은행자 - 철아.. 추운데 내가 대신 종 쳐줄까?
    철 - (무시하듯) 치, “쾅더웅” 하고 몇 번 치는 지나 알고 그런 소리 해?
    은행자 - 그기 무슨 소린데?
    철 - 절에서 치는 종은 학교 종처럼 방정맞게 “땡그랑 땡그랑” 치면 안되고 “쾅더웅”하고 울림 있게 쳐야 하는 거야. 정확하게 스물 여덟 번 치는 것도 헷갈리면 안 되고.
    은행자 - 스물여덟 번?
    철 - (달달 외우는) 그래야 욕계6천, 색계18천, 무색계 4천의 하늘나라 대중들이 미망에서 깨어나 부처님 도량으로 모여든대.
    은행자 - (감탄) 철이 니 억수로 잘 아네!
    철 - 종 잘못 치면 법우스님한테 꿀밤 맞으니까 달달 외웠지. (입 쑥 나오며) 염불은 안하 고 종소리만 세는 지 한번만 틀려도 귀신같이 안다니까.
    은행자 - (픽 웃는) 니는 주지 스님 보다 법우스님이 더 무섭제?
    철 - (끄덕이며 퉁명스레) 법우스님은 나 혼내려고 사천왕이 환생한 게 틀림없어.

    종루로 올라오자 철이가 종을 친다.
    그 동작이 어린 아이 답지 않게 능숙하면서도 힘차다.
    종소리가 쾅더웅 하고 장중하면서도 여운 있게 울려 퍼진다.
    종소리 음미하느라 은행자의 표정이 경건해진다.
    철이 계속 힘차게 종을 친다.
    범종 소리가 더욱 깊은 울림으로 새벽하늘에 울려 퍼진다.
    은행자가 동녘의 히끄레한 여명을 바라본다..

    은행자 - ....철아... 니도 어른 되면 내 맨치로 중 될끼가?
    철 - 치이, 웃기고 있어.
    은행자 - 와...?
    철 - 나는 음식 중에서 신라가든 돼지갈비가 젤로 맛있는데 어떻게 중이 돼. 산토끼도 아니 고 평생 풀만 먹는 거 완전 질색이야. 주지 스님하고 연화 큰 스님하고 풀만 먹고 가부좌 오래 틀어서 골다공증이란 말야.
    은행자 - 아하, 그래서 두 분이 지팡이를 짚으시는구나.
    철- 완전 무식하기는! 스님들이 짚는 지팡이는 주장자라고 부르는 거 야.
    은행자 - (겸연쩍게) 그렇구나...!

    철이 하품 찢어지게 하면서도 계속 종친다.
    은행자가 경건하게 합장하고 기도한다.

    은행자 - 부처님예, 훌륭한 중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이소!
    철 - 그렇게 말고 마음 속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라고 하는 거 야. (찌푸리며) 진짜 초짠가 봐, 이 누나!
    은행자 - (겸연쩍게 웃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S#16. 대웅전 (새벽)
    대중들, 모두 모여 새벽예불 드리고 있다.
    낮은 소리로 종송을 시작해서 점점 크게 게송을 읊는다.
    종루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에 따라 법우스님이 법고를 친다.
    퉁투웅퉁퉁 퉁투웅퉁퉁 .... 두 개의 북채로 마음 心자를 그리며 두드린다.
    그 동작이 힘차면서도 아름답다.
    주지스님이 낭송하는 예불문에 맞추어 삼보에 귀의한다는 장엄한 예불을 드린다..
    대중들이 반야심경을 독송한 후 삼배하는 것으로 아침예불이 끝난다.

    S#17. 공양간 (아침)
    여주보살, 강행자가 부산하게 아침 공양 준비하고 있다.
    은행자도 처음으로 가마솥에 국 끓이고 있다.
    솥뚜껑 열고 간을 보는데 싱거운지 미간 찌푸리는 은행자.
    꽃소금 한 줌 넣고 또 간을 봐도 안 맞는다.

    은행자 - (눈치 보며) 저기... 보살님예....
    여주 - (밥 푸다가 돌아보는) 왜 그래요?
    은행자 - 큰 솥에 끓이는 게 처음이라 영 간을 못 맞추겠어예.
    여주 - 아아...!

    다가와 국자로 간 보는 여주보살.

    여주 - 응, 됐어요. 첫 솜씨치고는 합격이네요. 들고 나가요.
    은행자 - ....?? 영 맹탕 아닙니꺼?
    여주 - 절에선 속가에서처럼 짜게 안 먹어요.
    은행자 - 아아...!

    S#18. 대중방
    대중 스님들이 전부 모여 아침 공양하고 있다.
    계율과 원칙에 맞춰 경건한 분위기 속에 발우공양 한다.

    S#19. 공양간
    은행자만 공양에 참여하지 못하고 부뚜막에서 혼자 굉이밥 먹고 있다.
    김치, 장아찌, 고추무침, 콩나물국, 잡곡밥의 공양이다.
    먹고 나자 공양간 문 열고 산사의 풍경을 들이마시는 은행자.
    겨울 아침 새들의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아침 햇살 속에서 기지개 켜는 은행자.

    S#20. 산사 전경 (다른 날 오후)
    겨울 숲과 절집에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공양간 뒤 굴뚝에서 연기가 한줄기 피어오른다.

    S#21. 공양간
    공양간에 여주보살과 은행자가 아궁이에 불 때고 있다.
    여주보살이 열린 문틈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여주 - .... 올해는 눈이 참 흔하네. 보리농사가 풍년이 들려나..
    은행자 - (하품하는)
    여주 - (힐끗 보고) 은행자님, 많이 피곤하죠?
    은행자 - (겸연쩍게 웃으며) 쪼매이...
    여주 - 새벽 3시에 일어나 백 팔배 하랴... 대중들 국 끓여대랴... 땔나무 울력하랴... 왜 안 피곤하겠어요. 집 생각 많이 나죠?
    은행자 - (겸연쩍게) 안 난다카마 거짓말이지예... 먼데 있는 엄마 생각도 나고.... 밤에 잠자 리 들 때는 너무 힘들어서 내일 새벽에 일어나면 아무도 몰래 집에 가야지 하다 가... 막상 새벽에 일어나서 주지스님 독경 소리 들으마 정신이 번쩍 납니더.
    여주 - (웃으며) 은행자님 밤마다 가방 쌌다가 새벽에 다시 푸는 거 다 알고 있었어요.
    은행자 - (겸연쩍게) 그랬어예?
    여주 - 창피해할 거 없어요. 나도 그랬고 강행자님도 그랬으니까...
    은행자 - 참말예?
    여주 - 그럼요. 절집 생활 다 힘들죠. 힘 안든 사람 없어요. 그래도 뜻 한바 있어서 절에 왔 으면 참고 열심히 해보세요.
    은행자 - (끄덕이며) 예.

    두 사람 아궁이에 삭정이 집어넣는데 법우스님이 눈 털며 들어온다.

    법우 - 하이고! 눈도 눈도 징그럽기 내리더마는 인자 그쳤다. 눈 치우구로 비짜리 들고 나 온너라.
    은행자 - (일어서며) 예, 알았심더.

    S#22. 대웅전 앞 뜰 (오전)
    대중들이 싸리비 들고 몰려나와 쌓인 눈을 치운다.
    손을 호호 불면서도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다.
    은행자가 장난스럽게 철이에게 눈 뭉쳐 던지면 둘이 눈싸움한다.
    철이가 눈 속에 돌멩이 넣어서 던지면 그대로 복수하는 은행자.
    철이가 석등 뒤로 숨다가 눈 쓸던 강행자를 넘어뜨리면 다른 스님들도 어어.... 하며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법우스님도 넘어지자 철이가 겁먹고 쳐다보는.

    법우 - (우정 무섭게) 이 놈아야! 다치면 우짤라꼬 장난이고?

    철이가 놀라 부리나케 달아나자 모처럼 즐거운 웃음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진다.
    다시 눈 쓸어내는 대중들.
    연화스님과 주지스님이 지팡이 짚고 조심조심 다가온다.
    대중들 모두 물러나 인사한다.
    두 스님이 위태하게 걸어오자....

    은행자 - 큰스님예, 그 쪽은 빙판이 져서 미끄럽심더. 이쪽으로 오이소.
    연화 - (유심히 보며) ...아이, 니는... 보름 전에 시 쓴다꼬 찾아왔던 그 처자 아이가?
    아직도 안 내려가고 절에 있었더나?
    은행자 - (배시시 웃으며) 인자 여게가 우리 집인데 지가 어데로 갑니꺼? 그라고 보름 전이 아니라 한 달 전에 왔어예.

    마주보며 고개 끄덕이는 연화스님과 주지스님.

    연화 - (진지하게) 주지스님, 이번 내기에는 지가 이긴 거 같습니더.
    주지 - (진지하게) 그렇네예. 지가 졌습니더.
    은행자 - (어리 둥절) .... ?
    법우 - (웃으며) 니를 두고 두 분 스님께서 한라봉 내기를 하셨다 아이가. 주지스님께서는 열흘 안에 돌아간다는데 걸었고, 큰 스님께서는 한 달은 버틴다는데 걸었제.
    은행자 - ....!!
    주지 - (진지하게) 니가 절집 늙은이 쌈지돈을 톡톡 터는구마.
    연화 - (진지하게) 엄살 부리싸도 내기는 내깁니더.
    주지 - 알았슴니더. 눈 녹으마 강행자 시켜서 한라봉 몇 개 구해오겠 습니더.
    연화 - (진지하게) 밀감 쪼가리는 안됩니더. 꼭 한라봉이라예.
    주지 - (진지하게) 예. 여부 있겠습니꺼.

    두 스님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대중들 모두 큭큭 거린다.

    은행자 - (꾸벅 절하며) 큰 스님예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더.

    연화스님, 밝게 웃는다.

    주지 - 법우수좌야, 야 인자 머리 좀 깎아 주거라.
    이나 쌔가리는 없겠지만도 쌔가리 보다 더 무섭은 번뇌 망상이 득시글거릴라.
    법우 - 예, 알겠습니더.
    은행자 - (놀랍고 벅찬) ....!!!!!
    연화 - (은행자가 입은 스키니진 보고) 그... 뭐꼬? 쫄때바지가?
    은행자 - 스키니진인데예.
    연화 - 뺄초하이 영 비기 싫다. (법우에게) 물색 옷 벗기고 행자복도 한 벌 챙기주거라...
    법우 - 예.
    주지 - 그 동안 부뚜막에서 굉이밥 묵었제? 저녁 공양 때부터는 큰 방에 들어와서 바리때 펴고.
    은행자 - (거푸 절하며) 고맙습니더! 참말로 고맙습니더!

    두 스님, 먼 산의 설경 구경하며 다른 쪽으로 간다.

    법우 - 은행자는 수곽으로 나온너라. 머리 깍자. 오늘이 마침 보름이라 날짜도 좋네.
    은행자 - 예. (부리나케 가는)

    S#23. 수곽 (점심)
    은행자가 보자기 둘러쓰고 빨래집개로 고정한 다음 설렌 표정으로 앉으면...
    법우스님이 가위로 긴 머리 먼저 자른다.
    삼단 같은 머리채가 잘려 나가자 은행자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은행자 - (의아한) ...법우 스님예, 삭발식도 안하고 막바로 머리만 깍습니꺼?
    법우 - (퉁명스레) 야가 벨 포시랍은 소리를 다 한데이. 무명초 벌초하는데 삭발식은 무슨 삭발식이고! 참 깨달음이 중요하지 그까짓 형식이 중타 카더나.
    은행자 - (눈물 핑 도는) 그래도... 우리 엄마가 배냇머리로 길러주신 긴데...

    법우스님이 바가지에 찬물을 퍼서 은행자 머리에 끼얹는다.

    은행자 - (기겁 할 듯 놀라) 엄마야, 찹아라!
    법우 - (심술궂게 킬킬거리는)
    은행자 - (화나는) 뒤꼭지가 다 얼얼합니더. 와 찬물을...?
    법우 - 니 눈물 짜는 거 보기 싫어서 눈물 쏙 기드가라꼬 끼얹었다.
    절 집에 스님 한분 옳게 나면 속가의 구족이 생천한다 소리도 못 들었더나.
    은행자 - ....!!

    법우스님이 남은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기 시작한다.
    바리캉을 마구 밀어대자 머리카락이 집혀 아파하는 은행자.

    은행자 - 아아아....!
    법우 - (바리캉 들여다보며) 이기 와 이래 안 드노? 다시 해보자.

    은행자가 겁먹는데 법우스님은 거침없이 바리캉 들이댄다.
    다행히 이번에는 잘 된다.
    은행자의 감춰져있던 하얀 속알머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마지막에는 면도기로 한 오락 머리카락까지 깨끗이 걷어낸다.
    바닥에 수북이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는 은행자.
    마음이 한없이 착잡하다.

    법우 - 이기 머리카락이 아니고 무명초다. 무명초가 잘려나가면서 세속의 번뇌가 다 잘려 나가는기라. 그러니 청승 떨지 말고 혜연 선사 발원문이나 암송해라.
    은행자 - (찔끔해서) ....알겠심더.
    법우 - 무명초는 태우든가 파묻든가 니가 알아서 하고.
    은행자 - 예.

    법우스님이 가위와 바리캉 들고 가버린다.
    은행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놋쇠대야의 찬물에 머리 씻는다.
    까실하게 만져지는 맨 머리의 감촉에 삭발한 것이 실감난다.
    군데군데 생채기가 났는지 따갑기까지 하다.

    은행자 - (불만스런) 처삼촌 벌초 하듯이 이기 뭐꼬! 온 머리통에 훼를 쳐놨데이!

    놋쇠대야의 수면에 맨머리 비춰보는 은행자.
    긴 생머리 아가씨 대신 문어 머리의 스님 얼굴이 비친다.

    은행자 - (약간 충격 받은) .....!!

    어디선가 마른 잎 하나가 날아와 대야에 툭 떨어지자
    까닭 모를 설움에 눈물이 절로 뚝뚝 떨어진다.

    은행자 - (혼잣말) 엄마... 내.... 머리 깍았다..

    손등으로 눈물 닦는 은행자.
    땅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한줌을 주워 신문지에 곱게 접어 간수한다.

    S#24. 행자방 (오후)
    은행자, 속세 옷 벗고 밤색 행자복으로 갈아입는다.
    동방, 바지, 행전.. 다 차려입자 속세 옷은 보따리에 싸놓는다.
    신문지에 싼 머리카락도 잘 간수한다.

    S#25. 공양간 (오후)
    여주보살이 아궁이에 불 때고 있는데 은행자가 들어온다.
    이제 완전히 행자의 모습을 갖췄다.

    여주 - (놀라) 어머나, 은행자님 머리 깎았어요?
    은행자 - (수줍게) ... 예.
    여주 - (요리조리 보며) 호호호, 앞짱구 뒷짱구라 머리통이 참 이뿌네.
    머리통 이뻐서 우리 은행자님 중노릇 잘 하겠다.
    은행자 - (살짝 반색하는) 참말예?
    여부 - 그럼요. 울퉁불퉁 옆짱구에 부스럼 자국 있는 강행자 보다 훨씬 이뿐데 뭐.
    은행자 - (헤 웃는) ...!

    강행자가 들어오자 흠칫하는 여주보살과 은행자.
    강행자, 은행자 머리 한번 쳐다보고는 쓰다달다 말없이 들통 가지고 나간다.

    여주 - (가슴 쓸어내리며) 들은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그래, 기분이 어때요?
    은행자 - (머리 쓰다듬으며) 시원섭섭 하다카까... 머리 감을 때 빨래비누 안 들어서 좋을 거 같기도 하고... 뒤꼭지가 선득선득한 기 더 추운 것도 같고. 어른스님들 독경소 리가 더 잘 들릴 것도 같 고...
    여주 - (재미있다는 듯 입 가리고 웃고) 차 한 잔 만들어 줄 테니까 주지스님 방에 가봐요. 좋은 말씀 해주실 거에요.

    S#26. 주지스님 방
    서안 하나와 벽에 걸린 일원상 그림 하나가 전부인 무소유를 실천한 듯 조촐한 방이다.
    주지스님이 불경 읽고 있는데 은행자가 찻쟁반 들고 들어온다.
    조심스럽게 서안에 찻잔 올려놓는 은행자.

    주지 - (책 보며) ..... 저녁 공양 준비 안하고 와 들어왔노?
    은행자 - ..... 차 한 잔 올릴라꼬예.
    주지 - 내 다 안다. 니... 덕담 한 소리 듣고 싶어가 들어왔제?
    은행자 - ....예.
    주지 - (바로 보며 빙그레) 정수리가 솟아오른 도골이구마. 그기 다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한 징표 아이가.
    은행자 - (헤벌쭉 웃는)
    주지 - 거룩하다는 이름도 구하지 말고, 재물도 구하지 말고, 영화스러운 것도 구하지 말고, 그렁저렁 인연 따라 한세상 지내면서 옷은 떨어지거든 거듭거듭 기워 입고, 양식은 없거든 가끔가끔 구하여 먹어라.....
    은행자 - (어리벙벙) .....!!??
    주지 - (웃으며) 좋은 말은 지루한 법이다. 쉽게 말해주꾸마. 머리 깎 았으면 중노릇 똑바로 해라. 대충 하다가 싫다고 관둬버리면 안 된데이? 모르는 것 같아도 근성 없이 대 충하는 거, 딱 보면 안다. 중은 평생 정진하다가 논두렁 베고 죽을 각오를 해야된다 말이다. 알겄나?
    은행자 - (그제야 밝게) 예!?
    주지 - 니 공양간에 가서 고구마 몇 개 썰어가 개울가에 뿌리 놓고 온나.
    은행자 - 고구마를예?
    여주 - 눈이 많이 와서 산짐승들이 먹이가 부족할끼라. 그것들도 다 부처님 품 안에 중생인 데 묵고 살아야제. 그 동안 강행자 시켰는데 머리 깍은 기념으로 그 일은 인자 니 가 해라.
    은행자 - .....! 예.
    여주 - 산짐승들 물 마시구로 얼음 구멍도 몇 개 뚫어주고.
    은행자 - 예, 알겠습니더.

    S#27. 개울가 (오후)
    은행자가 고구마 썬 것 들고 개울가로 나오면 사슴과 다람쥐가 개울이 얼어 물 마실 곳이 없어서 서성거리고 있다.
    은행자가 다가가자 저만치 달아나는 사슴과 다람쥐.
    은행자는 고구마를 개울가에 이리저리 뿌려놓고 돌을 집어 들어 얼음을 깨뜨린다.
    손 시려서 호호 불어가며 몇 군데 숨구멍 뚫어주고는 자리를 피하자 눈치만 보던 사슴과 다람쥐가 슬금슬금 다가와 고구마도 먹고 물도 마신다.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 은행자.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은행자, 문득 깍은 머리통 만져본다.
    산바람이 휘이이잉 소리 내며 스쳐간다.
    이제 머리 깎은 게 확실히 실감이 난다.

    S#28. 因緣의 春
    하얀 화면에 검은 글씨.
    因緣의 春

    S#29. 오솔길 (오후)
    풀색 봄코트 입은 대구보살이 올라오고 있다.
    기사 둘도 음식과 시주물 바리바리 지고 올라온다.

    S#30. 일주문 앞
    대구보살이 올라오다 멈춰서더니 경건하게 합장한다.
    기사 둘은 짐 든 처지라 엉거주춤..

    S#31. 공양간 안
    여주보살은 뒤집은 솥뚜껑에 기름 두르고 두부 부치고 있고,
    철이는 부뚜막에 앉아 백설기 먹고 있다.
    불사가 있는지 큰 소쿠리에 부침개 등이 가득 하다.

    여주 - (철이 보며 흐뭇하게)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철 - 괜찮아... 식혜나 더 줘.

    여주보살이 대접에 식혜 덜어주는데 강행자와 은행자가 들어온다.

    은행자 - (군침 꿀꺽 삼키며) 엄마야, 오색 나물에... 녹두지짐에... 절고기꺼정...! 오늘 무슨 날인데 절고기를 다 부칩니꺼?
    여주 - (웃는) 두부를 절고기라 부르는 거 보니 은행자님도 절 식구 다 됐네.
    대구 보살님이 불사 드리러 오셨어요. 어른 스님들 좋아하시는 백설기랑 약밥 해가 지고..
    은행자 - 시주 많이 하신다는 부자 보살님 말입니꺼?
    여주 - 그래요. 은행자님은 아직 뵌 적 없죠?
    은행자 - 예!
    강행자 - (철이 보고) 니는 부처님한테 먼저 올리고 묵는 기가?
    여주 - (눈치 보며) 아유, 그럼요. 부처님 앞에도 올리고 어른 스님들 한테도 다 올렸죠.
    강행자 - ....
    철 - (강행자 안 보게 입 삐죽하는) ....!
    은행자 - (분위기 무마하려 얼른) 저녁 공양이 늦었네예. 오늘은 무슨 국 끓일까예?
    여주 - 시래기 된장국 어때요?
    은행자 - 알았심더. 시래기 씻어올께예.

    S#32. 수곽 (오후)
    수곽 옆 옥매화가 고운 분홍색 꽃망울을 터트렸다.
    은행자, 다라 들고 나와서 소매 걷고 배추 시래기 씻기 시작한다.
    손 시려서 호호 불며 씻는데 발자국 소리 들리고 대구보살이 다가온다.

    은행자 -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서는) 엄마....!
    대구 - .....??
    은행자 - (아차 하고) ...미안합니더. 지가 사람을 잘못보고...
    대구 - 괘안습니더.

    대구보살은 인자하게 웃고는 대야에 물 받아서 손 씻는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는 은행자.

    은행자 - (마음의 소리) 우리 엄마하고 영판 닮았데이...

    대구보살이 손 다 씻고 일어난다.

    대구 - (미소 지으며) ...새로 오신 은행자님이시지예?
    은행자 - ...예.
    대구 - 산속이라서 물이 얼음장 같은데 손 마이 시리지예?
    은행자 - 괘안아예.

    대구보살이 은행자의 손을 잡고 만져본다.

    대구 - (애틋하게) 애기 같이 이뿐 손인데... 손등이 터서 갈라졌네예.
    은행자 - (쑥스러운) .....!!
    대구 - 백팔 배를 하고 났더니 목이 마르네예. 마실 물 한 바가치 줄랍니꺼?
    은행자 - 예.

    은행자, 물 한 바가지 퍼서 건네려다가 얼른 수곽 옆 매화나무로 간다.
    옥매화 꽃잎 따서 바가지에 띄워 대구보살에게 건넨다..
    대구보살, 꽃잎을 훌훌 불어가며 물 마시고는 바가지 도로 준다.
    은행자, 대구보살의 인자한 눈빛을 보자 공연히 수줍어진다.

    대구 - 은행자님 올해 몇 살 입니꺼?
    은행자 - ....스무 살입니더...
    대구 - 부처님이 극락으로 델꼬 가신 우리 집 막내하고 동갑이네예.
    아직 어린냥이 남아 있을 나인데 속가의 어무이 안 보고 싶습니꺼?
    은행자 - (눈빛 한없이 착잡해지는) ......!
    대구 - 은행자님이 마음에 보리수 심어서 그 열매 열리면, 염주 만들 어서 사람들한테 노나 주이소. 그라먼 그 공덕이 기특해서 부처님이 속가의 어무이도 잘 보살펴 주실 겁 니더.
    은행자 - ...예.
    대구 - 장차 성불해서 수미산 제석천에 드갈 수 있도록 용맹정진하이소.
    은행자 - 예, 보살님도예.

    대구보살이 은행자의 손에 뭔가 살짝 쥐어주고 간다.
    손바닥 펼쳐보면 깨강정하고 색동사탕이다.

    은행자 - (감동해서) ....!!

    은행자, 새삼 대구보살이 사라진 쪽을 바라본다.
    깨강정 입에 넣고 깨물어 먹는다.

    은행자 - .... 대구보살님은 얼굴만 닮은 기 아니라 마음씨도 우리 엄마 닮았데이. 우리 엄마 도 일 갔다가 돌아오면 핸드백에서 군고구마나 국화빵 꺼내줬는데...(문득 시름없 이) .... 우리 엄마... 영치금도 다 떨어지고 없을 낀데... 꽃샘추위에 내복은 입고 지 내시는지...

    바람에 매화꽃잎이 난분분 난분분 수곽 위로 떨어진다.

    S#33. 공양간 (오후)
    여주보살이 바가지에 산나물 무치고 있는데,
    은행자가 색동사탕 오물거리며 다라 들고 들어온다.

    여주 - 뭘 그렇게 먹어요?
    은행자 - 대구 보살님이 준 색동사탕이라예. 하나 드릴까예?
    여주 - 아니에요. 그 보살님이 또 돌아가신 막내 따님 생각이 나셨던 모양이네....
    은행자 - 그 보살님 따님이 와 돌아가셨는데예?
    여주 - 선천성 심장병이었다죠. 수술하면 고칠 수 있는 병인데 돈이 없어서 놓치고 말았대 요. 그게 한이 돼서 악착같이 돈 벌어서 부자가 됐다는데.. (작게) 물장사로 치부한 게 부끄럽다고 은퇴한 뒤에는 보시하고 공덕 쌓는 일로 참회하고 계신 거래요.
    은행자 - ...아하...!
    여주 - 어린 딸이 눈에 밟혀서 또래 되는 처자들만 보면 손이라도 잡아봐야 직성이 풀리시 나봐요, 은행자님한테도 그러시죠?
    은행자 - ....!

    부목처사 김씨가 들어와서 땔나무를 바닥에 부려놓는다.
    김씨를 보자 여주보살이 흠칫하며 외면한다.

    김씨 - (퉁명스레) 날 보자마자 왜 입을 다물어? 또 내 흉 봤어?
    여주 - (톡 쏘듯) 입 섞어 말 할 인사나 돼야 흉이라도 보지.
    김씨 - (뭐라고 하려다 은행자 보고 참는) ...에이!

    김씨, 심통 사납게 여주보살 앞의 부지깽이를 발로 툭 차고 나간다.
    여주보살이 눈 흘기며 군시렁대면 은행자가 픽 웃는다.
    은행자가 솥뚜껑 열면 단김이 물씬 난다.

    여주 - 아유, 구수하다! 김가가 이번에 사온 쌀이 우리 고향 여주 쌀인가 보다.
    은행자 - 그렇네예.
    여주 - 흥, 심술첨지가 일 제대로 할 때가 다 있네. 신통방통 꼬불통도 하지.
    은행자 - (웃는) 보살님은 처사님을 와 그래 싫어하시는 데예?
    여주 - 말두 말아요. 이 나이에 공양간에 피신 와 있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절 아래에 셋 방 얻어서 살림 차리자고 자꾸 수작을 걸잖아.
    은행자 - (웃는) 아하...!
    여주 - 실실 웃지 말고 들통에 국 퍼 담아서 들여가요.
    은행자 - (그래도 웃는) 알았어예, 흐흐..
    여주 - (겸연쩍게) 아, 자꾸 웃지 말라니까 그러네.
    은행자 - (웃음 참느라 외면하는) 예, 예 알았심더.

    S#34. 큰 방 (저녁)
    대중들이 모두 둘러 앉아 저녁 공양하고 있다.
    연화스님, 주지스님, 법우스님, 다른 스님들, 강행자, 은행자, 대구보살 등이 큰 발우에 천수를 받아 왼쪽 발우부터 오른쪽 발우 순으로 헹군다.
    밥 받고, 국 받고, 반찬 받아 앞에 진설한다.
    은행자가 두부부침만 잔뜩 담자 법우스님이 어른 스님들 모르게 눈 부라린다.
    찔끔해서 덜어내는 은행자.
    대구보살이 보고 미소 짓자 은행자도 겸연쩍게 웃는다.
    대구보살이 제 발우 안의 두부부침을 은행자 발우에 슬쩍 올려준다.
    은행자가 사양도 못하고 얼굴만 빨개지면 어서 먹으라고 눈짓하는 대구보살.
    대중들, 본격적으로 공양하기 전에 수발계 암송한다.

    대중들 - ...불생가비라... 성토마갈타... 설법바라나....!

    대중들, 맛있게 공양한다.

    S#35. 행자방 (밤)
    은행자가 이부자리 펴기 전에 방 쓸고 있다.
    서안에 놓인 문고판 반야심경을 시렁 위에 올리다가 책갈피에서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진다.
    주워들고 보다 문득 가슴이 먹먹해지는 은행자.
    엄마와 소녀 선희가 얼굴 붙이고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엄마와 대구보살이 많이 닮아 보인다.

    은행자 - (글썽해서 입엣말로) ...엄마.

    이때 문 열리고 대구보살이 들어온다.

    은행자 - (얼른 감정 수습하고) 보살님이 이 방에 우얀 일로...?
    대구 - (웃으며) 이방에서 잘라꼬 왔지예.
    은행자 - (놀라) 안됩니더. 귀하신 분이 행자방에서 우예 주무실락꼬예?
    대구 - 보살방 행자방이 따로 있습니꺼. 오늘은 이방에서 잘끼니까 물리치지 마이소.

    하고는 손바닥으로 아랫목 온기를 가늠해본다.

    대구 - 아랫목도 시원찮은데 위풍까지 세네. 날 따뜻해지마 온돌 공사 해야되겠다..

    이부자리 먼저 펴는 대구보살.

    은행자 - (난감하기도 설레기도 한) 법우스님 아시면 걱정하실 낀데....

    (시간경과)
    철이, 여주보살, 대구보살, 은행자, 강행자가 나란히 누워 자고 있다.
    비좁은지 강행자가 끙하며 벽보고 돌아눕는다.
    어쩐지 눈치 보이는 은행자와 대구보살.
    서로 마주보다가 피식 미소 짓는다.
    이불 밖으로 나온 은행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대구보살.
    은행자,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이다.
    은행자가 갈라 터진 손등이 가려운지 박박 긁어대자..
    대구보살이 보고 안쓰러워한다.

    은행자 - (작게) 괘안습니더.. 이러다 말아예..
    대구 - 불사 마치고 내려가마 인편에 구리세린 올려 보내 드릴께예.
    은행자 - .....!!

    대구보살, 은행자 손 끌어다가 호호 불어주고 손등을 살살 긁어준다.
    은행자의 눈가에 촉촉 이슬이 맺힌다.
    손 꼭 잡고 누워 잠청하는 은행자와 대구보살이다.
    그렇게 그 밤이 깊어간다.

    S#36. 대웅전 마당. (낮)
    은행자가 땔나무 울력 나갔다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온다.
    법우스님이 막 대웅전에서 나온다.

    은행자 - 법우스님예! 대구보살님 어데 계십니꺼?
    법우 - 조금 전에 가셨는데 와?
    은행자 - (당황하여) 아, 아무 것도 아닙니더.

    은행자 땔나무 부려놓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S#37. 산문 밖 (낮)
    은행자가 달려 나와서 살펴보면 저만치 가물가물하게 대구보살의 치마자락이 보인다.

    은행자 - (안타까워, 큰 소리로) 보살님예... 살피 가이소!

    그러자 가물가물 보이던 대구보살이 돌아서서 손 흔들어준다.
    아쉬워서 오래오래 손 흔드는 은행자.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입술 앙 깨문다.

    S#38. 뒤란 채마밭 (다른 날 오후)
    은행자가 밭에서 꽁꽁 언 무우를 뽑고 있다.
    손 시려 입에 대고 호호 부는데 손등이 몹시 갈라 터져 아프다.

    은행자 - (찡그리며) 아이구, 따가바라... 거북이 등더리가 돼뿠네.

    S#39. 산문 앞 (오후)
    은행자가 뽑은 무우를 다라에 담아 들고 오는데 우체부가 다가온다.
    합장 인사하는 은행자와 우체부.

    우체부 - 천진암 은행자님이시지예?
    은행자 - 예.
    우체부 - 소포가 왔습니더.
    은행자 - ....!!

    꾸러미 꺼내서 건네주는 우체부.
    은행자 소포 꾸러미 살펴보면 주소가 대구 황금동이다..
    좋아서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은행자.

    S#40. 행자방 (오후)
    은행자가 방으로 들어와 소포 꾸러미 풀어본다.
    상자 속에 대용량 글리세린과 털모자 털장갑이 들어있다..
    감동으로 눈가가 촉촉해지는 은행자.

    은행자 - .... 우리 엄마 같이 생긴 사람들은 다 마음씨가 고운 갑다.. 대구 보살님예 감사합 니더.

    소포 안에 쪽지 발견하고 펴보는 은행자.

    INS. 쪽지 - ...... 핸드크림을 보낼까 보습크림을 보낼까 궁리하다 글리세린을 보냅니다.
    아직도 손 터서 갈라진 데는 글리세린 이상 없는 모양입니다.
    자기 전에 글리세린을 골고루 바르고 마사지 해주다가 목장갑을 끼고 주무세요.
    그러면 얼른 나을 겁니다.
    추운 겨울 우리 은행자님 정도 가게 해 달라는 소원 하나로 두 손 모아 기원하나이 다....... 2월 열닷새, 대구 황금동에서... 박경화.

    뭉클해져서 눈빛이 젖은 은행자.
    글리세린 덜어서 손등에 바르고 또 바른다.

    S#41. 뒷산 원경
    온 산에 진달래꽃이 군락을 지어 피었다.

    S#42. 공양간 (낮)
    강행자는 부뚜막에 앉아 책 읽고 있고 은행자는 설거지 하고 있다.
    강행자가 무슨 책 읽는지 궁금해진 은행자가 어깨 너머로 보려하면 강행자가 자세 바꿔서 못 보게 한다.
    약이 오른 은행자가 기를 쓰고 보려는데 김씨가 불쑥 들어온다.

    김씨 - (퉁명스레) 은행자, 여기 있어요?
    은행자 - 예.
    김씨 - 누가 찾아 왔던데 나가봐요.
    은행자 - ...!! 누가 왔는데예?
    김씨 - 그거야 나는 모르지. 일주문 밖 개울가에 있으니까 어서 나가 봐요.
    은행자 - 예. (나가는)

    S#43. 일주문 밖 개울가 (낮)
    온 산에 진달래 붉은 꽃물이 들었다.
    은행자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살펴보면 개울가에 아무도 없다.
    갸웃거리는데 명우가 뒤에서 불쑥 나타난다.

    명우 - 선희야!
    은행자 - (돌아보다 놀라) 명우야~!!!! 니가 여게 우짠 일로...?

    마주보고 선 둘의 눈빛에 만감이 교차한다.

    명우 - (은행자 행색 보고 울컥하는) ....가서나.. 그 꼴이 뭐꼬?
    은행자 - (새침하게) 내 꼴이 어떤데..?
    명우 - 문어 대가리에 할마시들 입는 몸빼나 입고....문예반에서 얼짱이라 불리던 가서나가...
    은행자 - (발끈해서) 문디 머스마! 사람 보자마자 하는 소리하고는!
    아무리 무식해도 몸빼하고 행자복도 구별 몬 하나?
    명우 - 가서나 말 뽄새하고는? 이 절에는 니 같이 대 쎄고 고집스럽은 가서나 한테도 공밥 주나?
    은행자 - (약 올라서) 이 머스마가 참말로! 하나 보골깜은 된데이.
    명우 - 가서나.. 내가 언제...
    은행자 - (앙칼지게) 도 닦는 사람한테 가서나가 뭐꼬? 행자님이라꼬 불러야제. 그래 배찬 소리하면서 허파 디빌라카면 퍼뜩 내려가뿌라. 다시는 내 찾지 말고..

    은행자, 휙 돌아서서 가버린다.

    명우 - (당황하여) 아,아이다! 내 잘몬 했다. 가지마라 선희야.
    은행자 - 듣기 싫다! 선희가 뭐 말라죽다 비 맞아 썩은 이름이고?
    일 없으니까 퍼뜩 가뿌라.
    명우 - 은행자야, 가지마라. 내 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다.
    니 좋아하는 초코파이하고 맥반석 계란 사가주고...
    은행자 - (돌아보며) 참말이가?
    명우 - 그래. 햄버거나 통닭 사올라 카다가 스님들은 고기 묵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계란 사 왔다.

    그제서야 은행자 다시 다가온다.
    민준이 검은 비닐봉지를 풀어놓자 은행자가 바위 위에 앉는다.

    은행자 - (군침 삼키며 계란껍질 벗기는) 통닭이나 계란이나 고기는 마찬가진데 기왕이면 통닭 사오지. 내는 아직 계도 안 받은 행자라서 고기 묵어도 괘안는데... (우걱우걱 먹는)
    민준 - 언치겠다. 천천히 묵어라.

    명우가 캔콜라 따주자 벌컥벌컥 마시는 은행자.

    은행자 - (감탄) 콜라가 와이래 달달하노? 입에 착착 붙는다!
    명우 - (짠한) 여게는 묵는 것도 제대로 안주나? 콜라가 그래 맛있구 로?
    은행자 - 모르는 소리마라. 순한 무공해 웰빙 음식만 먹으니까 뱃속이 편해서 피부트러블이 싹 없어졌다.
    명우 - (짠하게) 앓느니 차라리 죽제....

    은행자, 초코파이도 단숨에 서, 너개 먹어치운다.
    그 속도가 빨라서 명우가 신기한 듯 쳐다본다.

    은행자 - (입 닦으며) 아, 잘 묵었다. 석 달 동안은 단거 안 묵어도 버티겠다.
    명우 - 초코파이 남았는데 마저 묵어라.
    은행자 - 남은 거는 행자방 철이 줄끼다.
    명우 - (놀라) 여승만 있는 절인 줄 알았는데 남자도 있나?
    은행자 - (흘기며) 이 머스마가 무슨 잡소리를 하노? 철이는 초등학교 다니는 공양주 보살 아들래미다.
    명우 - 그라마 아까 그 아저씨는..?
    은행자 - 사하촌에 살면서 일 봐주러 출퇴근하는 부목처사님이다.
    명우 - (그제야 안심하는) 아아...
    은행자 - 니 볼일 다 봤으면 그만 내리가라.
    명우 - 맘에 없는 말 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은행자 - (싯뜻 하며 개울가 바위에 걸터앉는)
    명우 - (옆에 앉는)
    은행자 - (흥 하고 외면하는)

    명우와 은행자, 바위 위에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다.
    어색해진 명우가 분위기 바꾸려는 듯 풀 뜯어서 풀각시 만들어 은행자에게 준다.
    은행자, 못생긴 풀각시 보고 픽 웃는다.

    은행자 - 풀각시가 와 이래 몬 생깄노?
    명우 - (짐짓) 니 닮았네.
    은행자 - (흘기고는) ... 대학 생활은 재미있나?
    민준 - 그냥 그렇제..
    은행자 - 동아대 여학생들 예뿌나? 여친은 생깄나?
    명우 - 여친 있으면 뭐 하러 여게 왔겠노?
    은행자 - 바보 또디기... 나는 인자 서면 코엑스 나이트도 몬 가고, 옆에 있어주지도 몬 하 는데....
    명우 - 그런 줄 알면서 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산에 들어왔노?
    은행자 - (시무룩) 다 알면서.....
    명우 - (착잡) ....
    은행자 - (한숨 쉬는)
    명우 - ...며칠 전에 너거 어무이한테 면회 갔다 왔다.
    은행자 - (눈빛 마구 흔들리는) ... 잘 계시더나...?
    명우 - 니 절에 들어간 거 때문에 많이 우시더라.
    은행자 - (마구 도리질하며) 아, 아니다! 몬 들었다. 내는 인자 속세하고 인연 끊은 수행잔 데 뭐.
    명우 - (안타깝게 보는)
    은행자 - 니 인자 고마 내려가 봐라. 저녁 공양 시간 돼서 들어가 봐 야 된다.
    명우 - 알았다... (일어서는)
    은행자 - (따라 일어서며) 잘 가거라. 먼데 꺼정 못 내려간다.
    명우 - 알았다. 밥 잘 묵고 건강해라.. 편지 자주 할 테니까 답장하고..
    은행자 - (고개 가로젓는) 인자 내한테 편지도 엽서도 보내지 마라...
    명우 - 와?
    은행자 - 행자방에 성격 깍쟁이 같은 선배 행자가 한 사람 있는데 속가의 사람들하고 편지 질하고 만나고 하는 거를 제일 천박스럽다고 경멸하더라. 때 묻은 속세 미련도 하 나 몬 떨칠 걸 뭐 할라꼬 산에 들어와서 대중들 맘 산란하기 하느냐고..
    명우 - ....!!
    은행자 - 첨에는 참 야박시럽은 소리를 따박따박 잘도 한다 생각했는데 곰곰 생각해보이 그 말이 맞더라. 스스로 견성성불은 몬할 망정 대중들 방해나 해서야 되겠나...
    명우 - ....!!
    은행자 - 인자 니캉 내캉은 길이 마이 달라졌다 아이가...
    명우 - (자르듯) 선희야, 그라지 말고 도로 내려가자!
    은행자 - (깜짝 놀라) 이 머스마가 지금 뭐라 카노?
    명우 - (손잡으며 간절하게) 니 평생 내 안보고 살 수 있겠나? 너거 어무이는 우짤낀데?
    은행자 - (당황하여) ....!!!
    명우 - 꼭 중이 안 되더라도 속세에서 선한 마음으로 업 짓지 않고 착실하게 사는 것도 나 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희야!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 응?

    순간 은행자의 눈빛 속에 갈등과 번뇌가 넘실거린다.

    은행자 - (얼른 손 빼며) 내려가 봐야 마음이 지옥일 낀데.. 내가 와 도로 내려가노.
    그 번뇌 구렁텅이에 다시 내려가기에는 내가 자신이 엄따.
    명우 - 선희야~ 제발~!

    은행자가 바위에서 일어선다.

    은행자 - (냉정하게) 인자 참말로 니하고 이별할 때가 됐는갑다. 니 퍼뜩 내려가라. 이런 소 리하면 내 다시는 니 안 볼끼다. 아직 중도 못 된 예비 중년 파계시킬라 카는 번뇌 마는 필요 없다.
    명우 - (안타까운) ......!!

    명우,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산을 내려간다.
    말 없는 은행자.
    아쉬워서 자꾸 뒤돌아보는 명우.
    은행자가 간신히 손 흔들어준다.
    명우도 손 흔든다.
    산모롱이 돌아가자 명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돌아서던 은행자, 눈물이 날 것 같아 공연히 하늘을 본다.
    온통 산이 진달래 서러운 불길로 붉디 붉다...

    S#44. 주지스님 방. (밤)
    열어놓은 방문으로 솔가지에 걸린 하현달이 보인다.
    은행자가 차 준비하는 동안 주지스님은 가부좌 틀고 앉아 선에 들어있다.
    은행자가 시름없이 차 따르다가 찻물 흘린다.
    책이 젖자 깜짝 놀라 행자복 소매로 황급히 닦는데 주지스님이 눈을 뜬다.

    은행자 - (어쩔 줄 몰라) 송구합니더... 송구합니더...
    주지 - (미소) 괘안타... 원승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제..
    은행자 - .....!
    주지 - (향기 음미하는) ...어데 찬데 향기가 이래 은은하노?
    은행자 - 대구 보살님이 중국 여행 갔다가 어른 스님들께 선물로 가져왔다 캅니더.
    주지 - 이래 고마울 데가 있나. 법문 하나도 전해드리지 몬 하는데 신세가 많아 우짤꼬.

    차 한 모금 음미하는 주지스님.
    은행자, 일어나서 뒷걸음으로 조용히 나가려는데...

    주지 - 은행자야...
    은행자 - ... 예.
    주지 - 니는 저 소리가 들리나?
    은행자 - ...? 무슨 소리예?
    주지 - 철새 날아가는 소리 말이다..

    은행자, 밖을 보면 달빛만 교교할 뿐 철새 떼는 보이지 않는다.

    은행자 - 잘 못 들었는데예?
    주지 - 산 중에 오래 살면 오관 중에서도 특히 청력이 예민해진다 아이가. 철마다 우는 철 새 소리가 다 다른데 이맘때 북쪽으로 돌아가는 기러기 날개 짓 하는 소리를 들으 마 잠자던 미망이 번쩍 깨서 온 정신이 맑아진다. 과연 남은 세월을 우째 잘 살아 낼꼬 싶어서...

    은행자가 주지스님 보면 눈 속에 성찰의 고요함이 보인다.

    은행자 - .....!!??
    주지 - 은행자야...
    은행자 - ... 예.
    주지 - (차 한 모금 마시고) 니... 공양간 생활은 잘 하고 있나?
    은행자 - ...예.
    주지 - 요새 무슨 공부 하고 있노?
    은행자 - (당황) ...봄볕이 너무 좋아가.... 진달래꽃에 눈이 팔리서....
    주지 - 꽃 보고 새 보고 봄 느끼는 것도 공부는 공부제.. 그 동안 시는 많이 썼나?
    은행자 - (도리질만) .....
    주지 - (웃으며) 아직 시가 나올만치 니 마음이 준비가 안 됐는갑다.
    은행자 - ......
    주지 - 니 불경 공부는 좀 해봤나?
    은행자 - 고등학교 때 문예반 하면서... 문고판 반야심경을..
    주지 - (끄덕이며) 반야심경이 니를 부처님 앞으로 이끌어 줬는갑다..
    그라먼 이 책 한번 읽어봐라.

    은행자 앞에 책 한권 밀어놓는 주지스님.

    은행자 - 이기 무슨 책인데예?
    주지 - 초발심 자경문이라 카는긴데.... 옛날 큰 스님들께서 출가한 사람들이 맨 처음에 익 혀야할 거를 조목조목 적어놓으신 기다. 수행자로서 간소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에 든든한 뒷받침이 되줄끼다. 내일부터 한바닥씩 같이 공부할 테니까 미리 예습해 오 너라.
    은행자 - 예, 알겠습니더. (물러나는)

    S#45. 개울가 (오후)
    개울물에 진달래 꽃잎이 떠내려간다.
    은행자가 빨래를 바위 위에 널어놓고 책 읽고 있다..

    은행자 - ...부초심지인수원리악우친근현선... 계십계릉지지.... 법개차란의금구언... (갸웃하며) 어데서 끊어 읽고 어데서 숨을 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은행자, 책 읽다말고 바위에 벌렁 드러눕는다.
    습관처럼 포오하고 한숨 쉬며 억새풀 입에 물고 하늘 본다.
    등산복 차림의 남녀가 다가오더니 남자가 은행자에게 다가온다.

    남자 - 저 스님..

    은행자가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은행자 - 누구십니꺼?
    남자 - (싱긋 웃으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셔터 좀 눌러 주시겠어요?
    은행자 - (미남이라 수줍어하며) ...예.
    남자 - 감사합니다. (여자에게) 자기야, 이리 와!

    은행자, 여자가 웃으며 다가오자 약간 실망한다.

    여자 - 스님, 하늘하고 숲하고 바위가 다 나오게 찍어 주세요. (디카 건네주는)
    은행자 - 알았습니더. 포즈 잡아보이소.

    두 남녀, 거의 껴안다시피 진한 포즈 취하며 깔깔거린다.
    은행자, 건성으로 셔터 눌러준다.
    심술이 나는지 얼굴 반을 잘라서 찍어주는.
    찰칵 찰칵 찰칵 얼굴 잘린 사진 한 컷씩 스톱 모션.

    남자 - 고맙습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쭤볼게요. 텐트 치고 야영하기 좋은 곳이 어딥니까?
    은행자 - (건성으로) 저어게.... 계곡 쪽으로 가보이소...
    여자 - 고마워요, 스님. 성불하세요.

    두 남녀, 밀착하여 허리 끌어안은 채 시시덕거리며 간다.

    은행자 - (입 삐죽하며) 그래 시시덕거리미 훼방을 해쌓는데 내가 우 째 성불을 하겠노...

    바위 위에 다시 벌렁 드러눕는 은행자.

    S#46. 주지스님 방. (밤)
    주지스님과 은행자가 마주 앉아 공부하고 있다.

    주지 - 오늘 배울 데를 한 번 읽어봐라.
    은행자 - 예... (긴장하여) 부초심지인수원... 리악우친근현서....
    주지 - (웃으며) 가만 가만! 그래 요량없이 읽으마 우짜노. 내가 읽는 거 듣고 토를 달아보 거라.
    은행자 - 예.
    주지 - 부초심지인 은... 수원리악우 하고... 친근현선 하여... 수오계십 계릉하되... 선지지법개 차 하라...
    은행자 - 부초심지인 은... 수원리악우 하고... 친근현선 하여... 수오계 십계릉하되...선지지법 개차하라
    주지 - 옳지! 뜻은?
    은행자 - 처음에 맘 묵고 출가한 사람은 나쁜 친구를 멀리하고... 승가의 수행 질서와 전통 을 존중하고...

    S#47. 암자 뜰 (밤)
    은행자가 책을 가슴에 품고 주지스님 방에서 나온다.
    E. 어디선가 들리는 구슬픈 밤새 소리.
    새소리 들리는 쪽 바라보는 은행자.

    은행자 - (문득 한숨 포오 쉬며) .... 주지스님 말씀은 구구절절이 옳으신데... 밤새야.. 내 맘이 와 이래 싱숭생숭하노? 낮에 절에 놀러왔던 사람들 때문에 바람이 들어갔나? 싱겁이 명우 생각만 자꾸 나고....이 머스마는 내려가더마는 소식이 깡통이네. 연락 하지 말라 했다꼬 진짜 연락도 안하나? 보름 후에 오신다던 대구보살님도 한 달이 되도록 소식도 엄꼬...

    E. 다시 밤새 소리..

    은행자 - (울먹하는) 부처님예... 지는 불제자가 될 소질이 없습니꺼? 입산 삼 개월에 맴이 이래 복잡한 거는 무슨 조홧속 입니꺼? 오늘 밤은 유난히 명우도 보고 싶고 엄마도 궁금하고.. 따뜻한 내방 침대도 그립습니더. 행자방은 군불이 안 들어서 자고 일어 나면 아직도 자릿끼에 살얼음이 잡힙니더. 누비 행자복이 한 벌 있으면 꽃샘추위 견디기가 한결 쉬울 낀데...

    이때 저만치 어둠 속에서 강행자가 나타난다.
    은행자를 미처 못 본 듯 한숨 푹푹 쉬며 안절부절 한다.
    진정이 안 되는지 소리 지르며 숲 쪽으로 달려간다.

    은행자 - ...? 강행자님은 밤중에 와 저카노?

    S#48. 공양간 (오후)
    은행자와 여주보살이 부뚜막에 앉아 채소 다듬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 쉬는 은행자.

    여주 - (슬쩍 보며) ...은행자님, 요새 무슨 고민거리 있어요?
    은행자 - ....봄 타는강 입맛도 없고 그렇네예.
    여주 - 은행자님 출가한 지 얼마 됐죠?
    은행자 - 며칠 있으마 석 달 됩니더.
    여주 - 그 맘 때가 갈등이 제일 심할 때긴 하죠... 안 그래도 봄바람 부니까 마음이 괜히 숭 숭한데 행자 두 사람이 마음을 못 잡으니 괜히 나까지 심란하네요.
    은행자 - 강행자님도예?
    여주 - 네.
    은행자 - 불심 깊고 공부 열심히 하는 강행자님이 와예?
    여주 - 입 무거운 강행자 속내를 낸들 알겠어요. 분위기로 짐작하는 거지.
    은행자 - .....!
    여주 - 수도승 되려고 절에 들어오는 사람들 보면 들뜨기 쉬운 봄에 충동적으로 출가한 사 람은 뿌리 못 내리고 되돌아가고.. (코 팽 풀고) 가을이나 겨울에 온 사람들은 어지 간해서는 버텨내더라구요.. 두 사람은 겨울에 들어왔으니까, 뭐... 잘 버텨낼거라 믿 어요..
    은행자 - (끄덕이고) 여주보살님은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절에 들어 왔 는데예?
    여주 - 다 풀어놓자면 소설책 열 두 권짜린데...
    은행자 - .....??
    여주 - 듣고 싶어요?
    은행자 - ...예.
    여주 - 나 사실은 서커스단에서 곡예하던 사람이예요. 통도 굴리고 노래도 하고 남편이 하 던 마술도 거들고... 그러다 경산 공설 운동장에서 공연 중에 난로 취급 부주의로 불이 나서 마술하던 남편은 죽고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죠.
    은행자 - ...!! 우야꼬! 그래서예?
    여주 - 남편 영가를 이 절에 모셔서 천도하고 돌아가는데.... (눈가가 젖는) 앞날이 하도 막 막해서 칠성각 처마 밑에서 철이 안고 울고 있었더니... 연화 큰스님이 보시고는 절 에 머물면서 공양간 살림을 맡도록 해주셨죠.
    은행자 - (고개 끄덕이는)_ ....!
    여주 - (심란하게 한숨) 남편 천도하고 철이 공부나 시킬까 해서 절에 머물렀는데... 심술궂 은 부목처사 등쌀에 공양간 공덕도 못 쌓게 생겼네요.
    은행자 - ....!!
    여주 - (격앙되어) 수퉁 맞은 인간! 수절과부 돕지는 못할망정 제 말 안 듣는다고 땔 나무 속에 옻나무를 넣어와서는.... 나하고 철이하고 옻이 올라서 몇날 며칠을 고생했는지 몰라요.
    은행자 - 엄마야, 큰 욕 보셨겠네예!
    여주 - 그 뿐이면 내가 말을 안 해요. 가시 많은 엄나무, 돌배나무만 해 와서 내 손을 온통 상처투성이로 만들질 않나. 뱀 허물을 주워 와서 기암하게 안하나...
    은행자 - 엄마야!
    여주 - 그래 놓고는 내가 악다구니 한 마디 하면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었던지 일체유심조 라네요. 생노병사가 다 마음먹기 달린 건데 그깟 옻 좀 오르고 손에 상처 난 거 하 나 못 참느냐구요.
    은행자 - (웃는) 처사님 마음을 받아주시지 그랍니꺼? 얼마나 좋으면 그라겠어예.
    여주 - 어유, 두 번만 좋았다간 아예 사람 잡겠네요. 그리고 여기가 어디에요? 비구 보다 지킬게 98가지나 더 많은 비구니 도량 아니에요. 큰 스님하고 주지스님 뵙기 민망 해서, 원.....

    김씨가 땔나무 들고 불쑥 들어온다.
    여주보살, 찔끔해서 입 다문다.
    김씨가 일부러 여주보살 앞에 땔나무를 와르르 부려놓는다.

    김씨 - (미심쩍게) 내가 들어오니까 왜 하던 얘기를 멈춰? 또 내 흉 봤어?
    여주 - (쌀쌀맞게) 그러게 누가 뒤 구린 짓 하고 다니래?
    은행자 - (웃음 참으며) 처사님, 오늘도 먼데 산에 가서 가시 많은 엄나무 해 오셨어예?
    김씨 - 은행자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은행자 - 삼천 대천 세계 내다보시는 부처님이 우리 아부진데 막내 딸년이 그거 하나 모르 겠어예? (웃으며) 처사님 지 좀 잠깐 보입시더.
    여주 - (당황하여) 아니, 은행자님! 무슨 소릴 하려고?
    은행자 - 중이 지 머리 깍는 거 봤습니꺼. 지한테 맡기고 기다리보이 소.
    여주 - 아이, 참...!
    김씨 - (어리 둥절) ...??

    S#49. 개울가 (오후)
    절 주위가 온통 진달래 꽃밭을 이루고 있다.
    마주 보고 서 있는 은행자와 김씨.

    김씨 - (어색하게) 나 왜 보자고 했어요?
    은행자 - (팔짱 끼고 취조하듯) 처사님 젊었을 때 연애 안 해 보셨지 예?
    김씨 - (겸연쩍게) ....수행자가 잔망스럽게 뭐 그런 걸 물어?
    은행자 - 다 이유가 있으니 묻지예. 지금은 수행자라도 머리 깍기 전 에는 연애박사 였어예.
    김씨 - (어이없이) 나 원 참, 절집에서 별 자랑을 다 들어보네. 집도 절도 없이 떠돌던 놈이 연애는 무슨 연애요. 그런 재주 있었으면 장가도 못가고 불목하니 하고 있겠어요?
    은행자 - 그럴 줄 알았습니더... 그라마 여주보살님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예?
    김씨 - (약간 당황하여) 그거야...!
    은행자 - 처사님, 여주보살님 많이 좋아하시지예?
    김씨 - (붉어지며) 좋아하기는 뭐...
    은행자 - 처사님 눈에서 하트가 뿅뿅뿅 나오는데 속일 생각 마이소.
    김씨 - (음) .....!!
    은행자 - 그런데 좋으면 좋은 표현을 하지 와 자꾸 심통을 부리가 일을 망칩니꺼?
    김씨 - (당황하여) 내가 뭘....?
    은행자 - 곰취나물 어린 이파리같이 보들보들하기 굴어도 일이 될까 말깐데, 맨날 해찰하고 심통 부리면 여자는 절대 마음을 안 엽니더., 여자 마음은 조가비나 마찬가지라예.
    김씨 - ,....!
    은행자 - (손짓 섞어가며) 땡깄다가 늦찼다가, 달랬다가 왈깄다가! 터프할 때는 강호동 같 이, 부드러울 때는 이승기 같이 말입니더! 아시겠어예?
    김씨 - (눈만 껌뻑껌뻑 하는) ....!
    은행자 - 당장 내일 아침부터.... 입가에 부드럽게 미소부터 짓고... (굵은 소리로) 여주댁, 간 밤에 편히 잤어? ..... 이렇게 인사 먼저 건네 보이소.
    김씨 -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이렇게.....?
    은행자 - 아니.. 그래 어색하기 하지 말고.. 입 꼬랑데기를 살짝 두시 방향으로 올리고...
    김씨 - (여전히 어색 미소) ..이, 이렇게...?
    은행자 - 아니, 그기 아니고.... (웃어 보이며) 미르치 삼치 꽁치 갈치이..! 해보이소.
    김씨 - (열심히 따라하는) 멸치 삼치 꽁치 갈치이~!!

    S#50. 공양간 (오후)
    여주보살이 아궁이에 불 지피고 있는데...
    등 뒤에 뭔가 감춘 김씨가 불쑥 들어선다.

    김씨 - 여주보살 뭐해?
    여주 - (깜짝 놀라) 에구머니나, 인기척 좀 하고 다녀요!
    김씨 - 인기척 냈는데 못 들어 놓구선..
    여주 - (싯뜻 해서 외면) .....
    김씨 - 젊은 행자들은 어디 가고 여주보살만 일을 해?
    여주 - 별 간섭 다 하네.. 싱거운 지게 작대기 아니랄까봐..
    김씨 - (둥 뒤에서 불쑥 내미는) ...이거나 받아!
    여주 - ....?? 이게 뭔데 날 줘요?
    김씨 - (멋쩍어하며) ...철이 사타구니에 옻 오른 거 아직 다 안 나았다며? 연고제야. 이건 프라모델이라고 모형공작인데 맞추다보면 머리가 좋아진대.
    여주 - ....!!!
    김시 - 여주보살 건 주부습진에 좋다는 화장품 하나 골랐어.,
    여주 - (펄쩍) 어머어머! 싫어요! 내가 이걸 왜 받아?
    김씨 - (눈 부라리며) 안 받으면 내일부터 또 옻나무하고 독버섯만 캐다 줄 거야?
    여주 - ....!!
    김씨 - 아, 빨리 받어! 팔 아파!

    여주보살 하는 수 없이 받는데 은행자가 소쿠리 들고 들어온다..
    깜짝 놀라 외면하며 딴청부리는 김씨와 여주보살.

    은행자 - ....? 두 분 여게서 뭐 하십니꺼?
    김씨 - 뭘 하기는..! 땔감이 떨어졌을까봐 들여다 본거지.
    여주 - (꾸러미 감추며) ...그, 그래요 맞아요.
    김씨 - 시렁에 못 박을 일 있으면 불러. 괜히 혼자 박다가 손가락 찧지 말고. (연습한 대로 입꼬리 올린 미소 지어보이는) ...!!
    여주 - (헉) ....!!!
    김씨 - (나가며 노래하듯) 오늘은 어느 산에 가서 불 잘 붙는 솔가지를 찾아올까?
    여주 - ...!!!
    은행자 - ....!!??

    여주보살, 어색함 모면하려는 듯 솥뚜껑 열어본다.

    은행자 - (놀리듯) 물도 안 끓는데 솥뚜껑은 와 열어 봅니꺼?
    여주 - (당황) 아, 아니...
    은행자 - (넌즈시) 오늘 따라 처사님이 미남으로 보이네예. 이발을 하셨나 면도를 하셨나..
    여주 - 그래봤자 못생긴 지게작대기지 뭐...
    은행자 - (킥킥거리며) 그 꾸러미 처사님이 준 사랑의 선물이지예?
    여주 - (밉잖게 흘기며) 은행자님이 다 꾸며놓고 그렇게 놀리면 재미 있어요?
    은행자 - 요즘 속가에서 연상연하 커플이 대세라예..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캅니더.
    여주 - 아유아유! 정말 얄미워! (웃고 마는)

    S#51. 수곽
    여주보살이 철이 몸 씻겨주고 있다.
    춥다고 지청구하는 철이 달래가며 씻겨주고는 옻 오른 곳에 김씨가 준 연고제 발라준다.

    철 - 이게 뭔데?
    여주 - 연고야. 바르면 금방 가려운 거 나을 거야.
    철 - 그럼 엄마도 발라야지..
    여주 - (웃으며) 그래, 이따 엄마도 바를 거야.

    개수물 버리러 나오던 은행자,
    모자의 모습 보고 빙그레 미소 짓는다.

    은행자 - (혼잣말) 참 이상하네? 마음이 온통 산란해서 도통 살맛이 안 났는데 두 분 잘되 는 거 보이 마음이 한결 가볍네...

    S#52. 煩惱의 夏
    하얀 화면에 검은 글씨.
    煩惱의 夏

    S#53. 주지스님 방 (오후)
    열린 방문 밖으로 초여름 산이 연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주지스님 앞에 다과상 내려놓는 법우스님.

    주지 - 다각 소임 끝난 지가 10년인데 니가 우짠 일로 차를 다 끓여왔노?
    법우 - 은행자가 부뚜막에서 졸고 있길래 지가 들어 왔습니더.
    주지 - (보며) 거짓말도 잘 한데이. 은행자가 졸면 니 야단소리가 와낭성 같이 들렸을낀 데.... 니 내한테 무슨 할 말 있어가 들어왔제?
    법우 - (무색하게 웃는) ....!
    주지 - 뭐신데? 퍼뜩 말해봐라.
    법우 - ...... 지한테 방학을 좀 주이소.
    주지 - 와?
    법우 - 공부도 영 시원찮고... 마음에 봄바람이 들어갔다 나갔다.. 갈피를 못 잡겠습니더.
    주지 - (새침하게) 니 또 그 병 도진 거 아이가?
    법우 - (당황하여) 아, 아입니더...
    주지 - 아이기는! 그 놈의 바람병 또 도졌구마는.

    그제사 법우스님이 납작 엎드리며 이실직고 한다.

    법우 - 하안거 들어가기 전에 남도 한 바퀴 만행이나 다녀왔으면 합니더. 세상 공부 눈으로 하면서 마음 가다듬어가 하안거에 집중할 수 있도록예....
    주지 - (여전히 새침한) 내 그럴 줄 알았다....”
    법우 - 송구합니더...
    주지 - 손바닥만한 절이라도 시자가 없으면 영 잘 안 돌아가는 거 모르나...
    법우 - 여주보살도 있고.... 강행자 은행자가 야물어서 지 대신 잘 할낍니더. 이번 한 번 만....
    주지 - 정 떠나야 되겠나?
    법우 - 한 달만 말미를 주이소. 절 안에서 나태하게 안주하는 거 같아서 통 마음이 안 편합 니더. 끝도 없는 길이 저한테 주는 의미가 뭔지도 깨닫고 싶고... 길에서 사람들도 만나 속내도 주고받고 싶고... 온전히 저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싶습니더..

    주지스님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법우스님은 고개만 조아린 조아린다.
    잠시 후 주지스님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떠오른다.

    주지 - 그래... 니 뜻이 정 그렇다면 가야지 우야겠노... 무기한으로 떠난다 안 해서 다행이 구마.”
    .법우 - (확 밝아지며)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더.
    주지 - (찻잔 들여다보며) 찻잔 속에 달이 들어앉아서 달 부서질까 차도 몬 마시겠다.....
    법우 - .....!!

    S#54. 산문 앞 (낮)
    만행 떠나는 법우스님을 강행자, 은행자, 여주보살이 배웅하고 있다.
    모두들 표정이 착잡하다.

    법우 - (웃으며) 표정들이 다 와 그렇노? 밖에서 자 면서 별 구경 좀 할라카는데..
    은행자 - 아직 밖에서 자면 추울낀데예..
    법우 - 고생 사서 할라카는 사람한테 별 포시랍은 소리가 다 많다.
    일동 - ....!!!
    법우 - 절 살림 야무지게 잘하고 있으마 금방 돌아올끼다. 잘들 있거라.
    은행자, 강행자 - (합장 하며) 잘 댕겨 오이소.
    여주 - (합장 하며) 다녀오세요!

    법우스님이 산문을 나선다.
    착잡하게 보고 있는 은행자와 강행자.
    걸음이 가볍고 빨라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강행자 - (시 읊듯 작게 혼잣말) 산문을 나서는 푸른 운수납자의 먹 물 소매 자락이 이루는 물결을 보면서 한없는 경배를 드립니다.
    은행자 - (강행자 보는) .....!!

    강행자의 눈 속에 착잡한 일렁임이 보인다.

    은행자 - (보고) .......?

    산길에 신록이 우거져서 어느새 법우스님의 모습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S#55. 행자방 (밤)
    강행자가 서안 앞에 앉아 공부하고 있다.
    바람이 문풍지 울리면 문득 고개 들어 창밖 쳐다보는데 표정이 영 심란하다.
    다시 책으로 시선 옮겨보지만 머리가 복잡한 듯 탁 소리 나게 책장 덮는 강행자.
    서안 위의 작은 부처님 향해 합장하고는 참회진언 암송한다.

    강행자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바하... (심호흡하며) 부처님 제발 번뇌의 열탕에서 저를 구 해 주이소. 진심으로 참회진언 암송합니더...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바하...

    하지만 진정이 안 되는 듯 벌떡 자리 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은행자가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 닦으며 들어온다.

    은행자 - (갸웃) 이 밤중에 어데를 저리 가노?

    앉으려다가 강행자의 책에 시선이 가자 들여다보는

    은행자 - (놀라) 엄마야! 이 책은 불경이 아이고 법전 아이가?

    여주보살이 눈감고 자는 척하다가 눈뜬다.

    여주 - 모른 척해요.. 강행자님 요즘 복잡하다니까요.
    은행자 - 늘 용맹 정진한다 생각했는데.....
    여주 - 석 달 짜리는 석 달 짜리 번뇌... 일 년짜리는 일 년짜리 번뇌..... (돌아눕는) 용맹 정 진하는 행자 가슴에 피멍이 드나보네..

    S#56. 주지스님 방 (밤)
    주지스님 앞에 강행자가 엎드려 있다.

    주지 - (눈 감고 잠잠히 있는) .....
    강행자 - (숨 죽여 흐느끼는) ....!
    주지 - (천천히 눈 뜨는) ..
    강행자 - (여전히 흐느끼는)
    주지 - .... 니를 이래 힘들게 하는 기 대체 뭐꼬? 행자방 생활이 고되더나?
    강행자 - (울음 잦히려 애쓰며) ... 손등이 갈라터지든, 잠이 모자라든, 병마가 들든.....그깟 육신의 고생은 다 참을 수 있습니더. 지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마음속이 무간지옥이 라... 화두는 판판이 깨져나가고 번뇌 망상이 모시바구니처럼 뒤엉켜서.... 책상을 벽 에 붙이고 불경을 백 번도 더 읽어도 마음이 외롭고 서럽기가 끝이 없어... (흐느끼 는)
    주지 - 마음이 외롭다....?
    강행자 - 예....
    주지 - 그래서 니가 서원하는 바가 뭐꼬?
    강행자 - 대중 생활 잠시 멈추고... 홀로 참선할 수 있게 해주이소. 그렇게 해주시면 하루 한 끼 한 숟가락만 공양하면서 화두와 정면으로 맞서 보겠습니더.
    주지 - ... 니 품은 뜻은 알겠다마는 아무리 작은 절집이라도 절집 나 름의 질서가 있는기라. 계 받고 몇 년 된 스님들도 여럿이 사는 대중방 생활을 하는데 계도 안 받은 행자 한테 우째 그런 권한을 주겠노?
    강행자 - 방자하다 하실지 모르지만도... 도 통하러 절집에 왔지 계 받으러 온기 아니라고 생각합니더. 수행한 기간 보다 수행의 열정 과 깊이가 더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꺼.

    주지스님, 눈 감은 채 잠시 말이 없다.
    초조하게 허락 기다리는 강행자.

    주지 - (느닺 없이) ...버려라!
    강행자 - ...??
    주지 - 비워라!
    강행자 - .....!!??
    주지 - 도는 생나무 가지 뚝 뿐지르듯이 우격다짐 한다꼬 통하는 기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견성성불 하기 전에 조급하고 성마른 니 맘부터 다스리는 기 순서가 아닌가 싶다.
    강행자 - ....!
    주지 - 대체 견성성불이 무엇이더노? 온갖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람이 우 주와 하나 되는 것 그것 아니겠나.... 그러자 면 마음부터 비워야제.. 집착부터 버려야 제.
    강행자 - ....!!
    주지 - 니.. 저 벽에 붙어있는 일원상을 떼 가지고 가서 행자방 벽에 붙여놓고 다시 참선정 진에 들어가 보거라. 과연 저 동그라미의 의미가 뭔지 알게 되거든 그때 다시 얘기 해 보자.
    강행자 - (고개 숙인 채 대답 없는) .....
    주지 - (다시 지긋이 눈 감는)

    너울대는 황촉의 그림자가 벽에 험상궂도록 크게 비친다.
    바람벽에 붙어있는 일원상이 뚜렷이 보인다.

    S#57. 대웅전 안 (오전)
    은행자 강행자, 여주보살이 법당 안을 청소하고 불구들을 손질하고 있다.
    은행자가 법경대를 면포로 닦고 있다.

    여주 - ... 은행자님 법경대는 조심스럽게 다뤄요..
    일 년에 세 번, 그 거울에 보는 사람의 선악업이 다 비친다는 신령스러운 물건이니 까..
    은행자 - (호기심으로 눈 빛내며) 세 번이 언제 언젠 데예?
    여주 - 잘 모르지만 귀동냥한 소리로는 3월, 5월, 9월이라고 하대. 불 심 깊은 사람이 들여다 보면 악업의 형상이 눈앞에서 보듯이 훤히 비친다고....
    은행자 - 보살님은 보신 적이 있어예?
    여주 - 아유, 나 같은 게 그런 신통력이 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그리고 보인다고 해도 솔직 히 무서워서 안 볼 것 같구먼. 명부의 염라 대왕이 내 악업을 족집게 보듯이 들여다 보고 있을 걸 생각하면.. (오싹하는)
    은행자 - ....!!

    은행자도 새삼 두려운 눈으로 업경대 들여다보는데...

    강행자 - (듣고 있다가 퉁 주듯) 업경대에 업이 비친다 카는 거는 종교를 실천하는데 척도 로 삼으라는 상징적인 의미인데 미신처럼 그런 소리를 하면 우짭니꺼.
    여주 - (무안해서) 아니... 나는 잘 몰랐지...
    강행자 - (심란하게 혼잣말) ... 이제 너로 하여금 업경의 객진 일등을 깨끗이 털고 너의 심 중에 조그만 불성을 보리라.... (한숨)
    여주 - ......!?
    은행자 - ....!?

    은행자와 여주보살, 눈 마주치자 영문 모르겠다는 듯 어깨 춧썩 한다.
    철이가 문을 뻥 차며 헐레벌떡 들어온다.

    여주 - 저.. 버르장머리.. 대웅전에선 뛰지 말라니까...!
    철 - (아랑곳없이) 엄마, 엄마! 대구 할머니 보살이 돌아가셨대!

    일동, 깜짝 놀란다.

    여주 - 그게 정말이니?
    철 - 응, 중국 여행 다녀오신 뒤로 몸이 안 좋았는데 오늘 새벽에 돌 아가셨대. 할머니 보살 아들이 천도제 때문에 주지스님하고 의논 중이야.
    여주 - 아유 참, 그 정정하시던 분이 어쩌다가..!
    철 - 엄마, 그럼 인제 백설기랑 경단은 못 먹는 거야?
    여주 - (당황하여) 아니, 얘가 별 소릴 다...!

    은행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INS. 유리 화병에 꽃을 꽂다가 쓰러지는 대구보살.
    산산조각 깨어지는 화병과 흩어지는 꽃들의 이미지. 슬로우.

    은행자가 갑자기 울음 터트린다.

    여주 - (의아하게) ...은행자님은 대구 보살님 몇 번 뵌 적도 없잖아요?
    은행자 - 딱 한 번 뵈었지예.. 모습이 영판 속가의 엄마 닮았었는데... (울먹이는)
    강행자 - (일 계속하면서 냉정하게) 생자필멸 회자정리라 캤어..
    불심은 깊으신 분이었지만 속가의 보살님을 두고 출가한 수행자가 속내를 드러내는 기 좋은 기 아닌기라..
    은행자 - (머쓱해서) ....!

    연화 큰 스님이 느린 걸음으로 들어온다.

    연화 - 강행자가 누구를 그래 딲아 세워쌌노?
    강행자 - 별 일 아닙니더.. 지들끼리 얘기했어예.
    은행자 - ....!
    연화 - (은행자 보고) 저런... 은행자야 니 울었더나? 눈이 토까이 눈 맨치로 빨갛네?
    은행자 - 송구합니더.. 대구 보살님 돌아가셨다 카는 소리 듣고 그만..
    연화 - (인자하게 웃는) 우리 착한 은행자가 정이 많아서 그렇제.. 수 행자는 피도 눈물도 없 는 목석이 돼도 안 되겠지마는, 하찮은 속세 인연에 이끌려서 평정심을 잃어도 안 되제.. 모름지기 속은 따뜻해도 겉은 냉정을 유지해야 하는 기라..
    은행자 - 주의 하겠습니더...
    연화 - 그래, 그래야제... 은행자는 개울물에 세수하고 무상계나 암송 하거라..
    은행자 - 예. (나가는)

    S#58. 개울가 (오전)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세수하는 은행자.
    젖은 얼굴 들고 먼 산 바라보는 은행자.
    자꾸 속가의 엄마 생각이 난다.

    S#59. 교도소 면회실. (회상)
    간막이 앞에 마주 앉아 하염없이 우는 수의 입은 엄마와 어린 선희.

    엄마 - (울음 잦히고) ....선희야... 니 요새 우째 지내노?
    어린 선희 - (울음 잦히려 애 쓰는) .....
    엄마 - 얼굴이 와 이래 에빘노? 밥은 잘 묵고 학교는 잘 댕기나?
    어린 선희 - 내는 잘 있다. 걱정마라 엄마...
    엄마 - 내가 죄가 많다... 에미가 돼서 니 하나 지켜주지 몬 하고...
    어린 선희 - 그런 소리 마라.. 내 때문에 엄마가 이래 됐는데....
    엄마 - 아이다.... 내가 재혼만 안 했어도...
    어린 선희 - (울먹이는)
    엄마 - (울먹이는)
    어린 선희 - 엄마... 교도소 안이 많이 춥제? 우리 엄마 추위 많이 타 는데.... 잘 때도 발시리 다꼬 양말 안 벗고 자는 사람인데.... (울먹이는)
    엄마 - 괘안타.. 니가 넣어준 영치금으로 내복하고 양말 사서 입었다... (또 울먹하는) 니가 무신 돈이 있다꼬 다달이 영치금을...
    어린 선희 - 아이다. 내 돈 많다. 오삼촌한테 용돈 받는다.
    엄마 - 너거 오삼촌이 니한테 용돈 줄 형편이 되나..... 빤한 살림에 니 하나 더부살이 하기 도 눈치 보일낀데...
    어린 선희 - 지난 달부터 분식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 한다 아이가..
    엄마 - 우짜꼬... 아가야... 설거지도 한번 안 해본 니가 아르바이트를... 조금만 더 참거래이. 엄마 만기 될 때 꺼정만... 모범수가 돼마 특사도 있을지 모르고...
    어린 선희 - (울먹이는) 엄마... 엄마.....!

    S#60. 개울가 (오전)
    물에 젖은 얼굴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은행자.

    S#61. 행자방 (밤)
    나란히 누워 자고 있는 철이, 여주보살, 은행자, 강행자.
    은행자가 가위 눌렸는지 식은 땀 흘리고 잠꼬대하며 몸 뒤척인다.
    그 위에 요란하게 겹치는 물건 깨지는 소리.

    S#62. 은행자의 꿈.
    어린 선희가 골방 벽에 부딪쳐 쓰러진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면 거인처럼 크게 보이는 계부의 검은 그림자.
    술이 잔뜩 취해 호흡이 몹시 거칠다.
    계부가 어린 선희를 겁탈하려고 덤벼든다.
    선희가 계부의 팔뚝을 물어뜯지만 계부의 거친 폭력에 나가떨어지는.
    기어이 계부가 거칠게 선희의 옷을 찢고는 자신의 허리띠 푼다.
    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계부가 비명 지르며 푹 고꾸라진다.
    계부의 뒷머리에 피가 철철 흐른다.
    선희가 놀라서 계부 밀쳐내고 보면 엄마가 피 묻은 수석을 들고 서 있다.
    엄마의 얼굴이 무섭기도 서럽기도 해서 혼란스럽다.
    마구 비명 지르는 선희.

    S#63. 행자방 (새벽)
    은행자가 소스라치며 꿈에서 깨어난다.
    온 얼굴에 식은땀이 지룩하다.
    꿈인걸 알고 안도하면서도 마음이 심히 괴롭다.
    가쁜 호흡 내뱉다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S#64. 법당 안 (밤)
    은행자가 들어와 부처님 전에 삼배 올린다.
    무릎 꿇고 무상계 암송한다.

    은행자 - ... 언젠가는 이 대천세계도 불타고 수미산과 큰 바다도 없어질 것을... 어찌하면 이 작은 몸통이 생로병사의 슬픔과 고뇌로 부터 벗어날꼬...

    그래도 영 마음이 산란하기 그지없다.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

    은행자 - (목메는) 큰 스님예..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그래도 자꾸 눈물이 납니더... 우짜면 좋습니꺼...(오열하는)

    멀리 대웅전에서 주지스님의 영가 천도하는 독경소리가 들린다.
    (DIS.)

    S#65. 개울가 (오후)
    초여름이라 온 산에 신록이 짙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래 소리도 들린다.
    은행자와 강행자가 빨래하고 있다.
    빨던 큰 스님 가사 장삼을 살펴보는 은행자.
    온통 기우고 또 기운 누더기 장삼이다.

    은행자 - (혼잣말) ... 큰스님 가사 장삼을 새로 장만해 드리야 되겠네... 어데 한군데 빠 꼼한 데가 없노.
    강행자 - (툭 내뱉듯) 어만 데 돈 쓴다꼬 경을 칠낀데...
    은행자 - (보는) 와예?
    강행자 - 큰 스님은 무소유를 실천하시는 분이시잖아..... 개인 사물이 라고는 누더기 가사 장 삼 한 벌하고, 이 빠진 다기하고, 낡은 옥색 고무신 한 켤레가 다니까...
    은행자 - (감탄하듯 끄덕이는) ....! .하이고, 부끄러버라...
    아직 새벽에는 추워서 누비 가사 장삼 한 벌만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했는데...
    강행자 - 말단 행자가 감히 큰 스님 법력을 따라 갈라꼬....
    은행자 - (웃는) ....!

    강행자, 문득 신록이 짙은 산을 본다.

    강행자 - 연초록이 참 좋구나.. 온 산에 상큼하니...!
    은행자 - (의아한, 보는) ...강행자님도 그런 말을 다 할 줄 압니꺼?
    강행자 - 와? 나는 사람도 아이가?
    은행자 - 그런 뜻이 아니라.. 행자방 생활도 반듯하고, 오전오후 용맹 정진도 잘 하는 거 같 아서 속으로 많이 부러웠거든예.
    강행자 - (쓰게 웃으며) 은행자 거짓말 잘하네.. 겉으로 그래보였을지 몰라도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거 알았을낀데...
    은행자 - (무안하게 웃으며) ...번뇌까지도 앞서 가는 거 같아서 부러웠거든예.
    강행자 - 별 게 다 부럽다... 내가 그 동안 은행자한테 많이 까칠하게 굴었제?
    은행자 - (웃는) 쪼깨이... 손톱에 반달만큼...
    강행자 - ... 첫 눈에 은행자 보고 수도 생활 얼마 몬하고 도망칠 날라린 줄 알았거든. 그래 서 정 안 줄라꼬 일부러 안 그랬나..
    은행자 - (끄덕이고)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꺼?
    강행자 - 뭔데?
    은행자 - 법대 다니다 왔다 카던데.... 전에 고시공부 했어예?
    강행자 - 그래. 이 얘기 듣고 놀랄지 모르지만 옛날에 내 화두가 돈에 하도 포원이 져서 돈 이었지. 엄마가 부잣집 첩이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상속도 못 받고 알거지로 쫒겨난 기 분해서 법으로 복수할라꼬 법대를 갔지. 돈 없고 빽 없는 첩의 딸이 세 상에 대해 복수할 방법이 그거 뿐 인거 같아서...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꾸 한 두점 차로 낙방만 하다가 생각한 바 있어서 절로 들어왔제...... 그런데.... 사실 삭 발염의한 지금도 그 미련 다 못 떨치고 가끔 법전을 들춰 보는갑제...
    은행자 - ....!!
    강행자 - 은행자 니는 요새 맘이 어떻는데...?
    은행자 - 번뇌 망상이 많아가.... 밤마다 왜가리 소리 지르면서 속가로 달려가고 싶습니더.
    강행자 - (웃는) 증세가 내캉 똑 같네...
    은행자 - (웃는) ....!
    강행자 - (가볍게 한숨) 속가의 첩 출신 어무이는 간장병에 당뇨에 합병증이 와서 치료도 제대로 몬 받고 진통제로 간신히 연명한다 카는데 내 혼자 견성성불 할라꼬 이라고 있다. 눈앞에 번뇌마가 설치면 한달음에 우르르 속가까지 달려 내려가서 병든 어무 이 붙잡고 통곡하고 싶은 거를 그간 해온 공부가 아까바서 마음을 누르고 있다 아 이가...
    은행자 - (약간 놀라) ......!!
    강행자 - 대구 보살님 졸하시고 은행자가 울었을 때 내가 나무랜 적이 있었제?
    은행자 - 예.
    강행자 - 그때 사실은... 은행자 보다 내가 더 울고 싶은 거를 참느라 고...그랬다 아이가.
    은행자 - (측은히 보는) ....!!

    두 행자가 모두 속가 생각으로 착잡해져 먼 산 바라기 하고 있다.
    철이가 과자봉지 들고 달려온다.

    철 - 누나! 누나!
    강행자 - 행자님이라꼬 불러야지 그래 부르면 안 된다 안 카더나. 만행 떠난 법우스님 돌아 오시면 다 일라 줄끼다...
    철 - 치이, 이제 하나도 안 무섭네 뭐!
    은행자 - (웃는) 철이 니 그래 큰 소리 치다가 큰 코 다친데이. 법우스님 금방 돌아오실지 모르는데..
    철 - (혀 쏙 내밀며) 상관없네, 뭐. 나는 오늘부터 절에서 안 사는걸.
    은행자 - 그기 무슨 소리고?
    철 - (신바람 나서) 절 아래에 전세방 얻어서 처사님이랑 엄마랑 같이 살지롱!
    은행자 - (반색하는) 옴마야! 그단새 이야기가 그래 진행됐는가베! 참 말로 잘됐다! 철아 니 도 좋제?
    철 - 응, 처사님이 프로야구 개막전에 데려가 준댔어.
    은행자 - 아이구야~! 철이 니 복 터짔다 복 터짔어!
    강행자 - 이기 다 은행자 소술이라메?
    은행자 - (살짝 눈치 보며) 전부 다 지 소술은 아이고.. 연애코치만 살짝...
    강행자 - (웃으며) 참.... 오지랖 넓은 행자 다 봤데이..
    은행자 - (겸연쩍게 웃는) ....!
    강행자 - 근데 철이 니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노?
    철 - 참, 엄마가 누나들 공양간으로 오라 하던데!
    은행자 - 와?
    철 - 난 몰라. 어서 가봐!

    S#66. 공양간 (오후)
    여주보살과 김처사가 은행자, 강행자에게 살림살이 인수인계하고 있다.
    여주보살이 걱정 많은 눈으로 공양간을 둘러본다.

    여주 - 밥하는 공양주는 은행자님이 맡아서 하세요. 국 끓이는 갱두까지 같이 하자면 손이 한층 바빠지겠지만 강행자님은 아궁이 앞에서 불 지피다가도 제 생각에 빠져서 밥 뜸 들일 때를 잘 놓치거든요. 다른 영양 섭취 없이 삼시 세 때 공양만 기다리는 어 른 스님들하고 대중들한테 삼층밥 오층밥 지어 올리면 그 노릇을 어떡해.
    강행자 - (끙) ....!
    은행자 - 예, 알았습니더. 지가 할께예.
    여주 - 설거지 할 때도 큰 스님 주지스님 발우도 꼭 은행자님이 다뤄요. 손바닥에 가시 돋 친 강행자님이 이 빼먹거나 깨박산치기 일 쑤일 테니까..

    강행자, 겸연쩍게 뒤통수 긁고 은행자는 쿡 웃는다.

    여주 - 그리고... 큰 스님은 파, 마늘은 물론이고 고춧가루 한 톨만 들어가도 설사하시니까 반찬 만들 때 조심해야 해요. 아예 큰 스님 반찬은 따로 만들면 더 안심이구요.
    강행자 - 알았심더.
    여주 - 그리고 찬장 제일 위 칸에 있는 중국차는 큰 스님하고 주지스님께만 올리는 거니까 대중들 절대 손 못 대게 하구요.
    은행자 - (웃으며) 알았심더. 인자 그만 좀 하이소..

    여주보살, 그래도 맘이 안 놓이는지 자꾸 둘러본다.
    급기야 눈가에 이슬이 매달린다.

    은행자 - 인자 처사님하고 함께 할낀데 뭔 걱정을 그래 하십니꺼. (김씨에게) 처사님, 우리 보살님하고 철이 잘 보살펴 주실끼지예?
    김씨 - (싱글거리며) 암, 두 말하면 잔소리지. 이제 내가 가장인데...
    여주 - (말이라도 고마운) ....!
    김씨 - 중매해준 은행자님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서 둘이 고생 안 시킬거야.
    은행자 - (끄덕이는) ....!
    여주 - (은행자 손 잡으며) 은행자님 정말 고마워요.
    은행자 - (웃으며) 벨 소리를 다합니더. 어두워지기 전에 고마 내려가이소.
    여주 - 알았어요. (나가는)

    S#67. 공양간 밖 (오후)
    일동 나오면 철이가 공양간 밖에서 놀고 있다.

    철 - 엄마, 이제 가는 거야?
    여주 - 그래.

    연화스님과 주지스님이 주장자 짚고 다가온다.

    여주 - 찾아뵈려 했는데 나오셨네요.
    연화 - (두 사람 보며 흐뭇하게) 신랑각시가 나이를 묵어가 원앙새 한 쌍은 무리라 캐도 청 둥오리 한 쌍은 되겠다.
    주지 - (웃으며) 그러시리예.
    여주, 김씨 - (수줍어하는)
    연화 - (미소) 둘 다 중 만들라 캤는데 영 틀리뿠네. 둘이 저래 좋으이 그 일을 우짜겠노 말이다. 이기 다 부처님 뜻인 듯 하니 같이 살게해 줘야제.
    주지 - (웃으며) 비구는 칠십, 비구니는 오십은 돼야 진짜 중노릇 할낀가 안 할낀가 알 수 있다 카더마는 그 말이 딱 맞는 갑습니더.
    김씨, 여주 - 송구합니다.
    연화 - (웃으며) 괘안타. 삭발염의는 못 했지만도 속가에 내려가서 서로를 부처님 모시듯이 섬기면 그기 또 옳은 견성일 수 있지 않겠나.
    주지 - 절에 꺼정 시끄러운 소리 올리 보내지 말고 부디 구순하게 잘 살거라.
    김씨, 여주 - (조아리며) 명심하겠습니다.
    주지 - 꾸물거리지 말고 퍼뜩 내리 가거라. 어둡어질라..
    여주 - (눈시울 적시는) 여기가 제 친정이니까 자주 올게요.
    주지 - 절에 일은 다 이자뿌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카이.
    여주 - (목메는) 건강 조심 하시고 크게 견성성불하세요! (합장하는)
    김씨 - (합장하며) 성불하세요!
    철 - (합장하며) 할머니 스님들, 성불하세요!
    주지 - (흔연히 웃으며) 오냐 오냐!
    연화 - (철이 머리 쓰다듬으며) 우리 똑또구리 보고싶어... 우짤꼬... 인자 할매 등더리 가려 운거 누가 긁어주노?
    철 - 내려가면 효자손 사서 보낼게요. 전화도 자주 하고요.
    연화 - (웃으며 끄덕이는) ....!
    철 - (헤 웃는) ....!
    여주 - 강행자님 은행자님도 잘 있어요.
    강,은행자 - 예, 잘 가이소.
    여주 - 철아 너도 인사 드려야지.
    철 - 안녕히 계세요.
    주지 - 오냐,. 새 아부지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된데이.
    철 - 예.

    세 사람 나서면 절식구들 배웅한다.
    먼데 산에 노을이 짙붉게 타고 있다.

    S#68. 공양간 (저녁)
    은행자가 저녁 공양 지으려고 가마솥 뚜껑 열고 물 붓는다.
    쌀통에서 쌀 꺼내려다가 쿡 웃는.

    은행자 - ...참, 공양 때 쌀을 얼매나 안치는지 안 물어봤네.
    드는 사람은 몰라도 나는 사람은 안다카디...

    이때 바랑을 맨 법우스님이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선다.

    은행자 - 옴마야, 법우스님예! 만행에서 언제 돌아 오셨습니꺼?
    법우 - 남도 일주하고 지금 막 도착했다 아이가.
    은행자 - 고생이 많으셨지예?
    법우 - 고생은 무슨 고생. 돈 주고 고생 살려고 나선 길인데... 세상에서 제일 맑은 별 보고 돌아왔다.
    은행자 - ....!!
    법우 - 밥 남은 거 쫌 없나?
    은행자 - 식은 밥 반 공기 밖에 없는데예. 지금 저녁 공양 채비하는 데 쪼끔만 기다리이소.
    법우 - (바랑 내려놓고 부뚜막에 앉는) 기다릴 때 꺼정 초롬요구나 하구로 식은 밥 이리 도고, 고추장에 비비 묵을란다.
    은행자 - 예, 알겠습니더.

    은행자가 식은 밥과 고추장 내주면 발우에 넣고 썩썩 비벼먹는 법우스님.

    법우 - 참기름이나 깨소금 없나?
    은행자 - 있습니더.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주자 다시 썩썩 비벼서 맛있게 먹는 법우스님.

    은행자 - 여러 끼 굶은 사람 같아예.
    법우 - (먹으며) 민폐 끼친다꼬 탁발을 몬하게 해서 묵는 날 보다 굶 는 날이 더 많았다카마 니 믿겠나.
    은행자 - ....!
    법우 - (밥 먹다가 무심히) ...참, 내가 만행 중에 포교차 마산 교도소 에 들렀는데....
    은행자 - (흠칫 보는) ....!!
    법우 - 우연히 곱게 나이 자신 수인 한분을 만났다. 그 보살님이 출가한 딸이 생각난다카미 누비 승복 한 벌을 보시하셨는데 암마캐도 그 옷이 내 몫이 아닌 거 같다. 바랑 안 에 들었으니까 니가 입어라.
    은행자 - ....! 아입니더! 지가 우째....!
    법우 - 아무 소리 말고 니가 입어라. 그 보살님이 교도소 안에서 비즈공예를 배워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마련한 기라 카더라.
    은행자 - ....! 그 보살님... 인상이 우떻던데예?
    법우 - 얼굴이 갸로무리한 기 젊었을 때 니 맨치로 참 고왔겠더라.
    은행자 - ....!!!
    법우 - 청상으로 살다가 중년에 재혼했다가 업이 많아서 영어의 신세가 됐다 카시더라. 딸 이 견성성불하기만 바란다고 우시는데 맘이 영 짠하더라.
    은행자 - (어떤 예감에) ....!!
    법우 - (숟가락 놓으며) 아, 잘 묵었다. 누비 승복 꺼내 가라카는데 와 말 안 듣노?
    은행자 - (목메어) 알았심더.

    은행자, 바랑에서 누비 승복 꺼내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눈물이 흐르자 얼른 외면하며 소매 끝으로 눈가 훔친다.

    법우 - (보고 혀 차며) 자알 한다. 수행자가 걸핏하면 눈물바람이고.
    장삼 한 벌에 그래 눈물 흘리싸머 그 볼때기 남아나겄나?
    은행자 - .... 송구합니더.
    법우 - 울다가 공양 시간 늦을라. 퍼뜩 쌀 씻어 안치라.
    은행자 - 예...

    법우스님이 바랑 들고 나가자
    은행자는 누비 가사 장삼을 와락 품에 안고 참았던 울음 터트린다.

    은행자 - 엄마...엄마....! 이 딸년은 엄마 버리고 산에 들어왔는데... 엄마는 감옥에서도 딸 못 잊고..... 엄마.... 참말로 미안타...(오열하는)

    INS. 감방 안의 광경이 떠오른다.
    웅크리고 앉아서 열심히 비즈 발 만들고 있는 엄마.
    그 손길이 구도하는 사람처럼 정성스럽다.*

    아픈 표정으로 장삼 자락 매만지는 은행자.
    문득 표정이 결연해진다.

    S#69. 대웅전 앞
    강행자와 은행자가 싸리비로 마당 쓸고 있다.
    강행자가 손 멈추고 먼 산 바라보며 한숨 쉰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는 은행자.
    우체부가 가방 메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우체부 - 강영혜씨한테 편지 왔습니더.
    강행자 - ...!! 예, 감사합니더.

    우체부 합장하고 돌아간다.

    은행자 - 강영혜가... 강행자님 속가 이름입니꺼?
    강행자 - ..... (고개 끄덕이는)
    은행자 - 무슨 편진지 퍼뜩 읽어보이소.
    강행자 - (망설이는) ... 집에서 왔는데... 겁이 나서 못 읽겠다. 대신 좀 읽어줄래..?
    은행자 - ....!! 그래 하입시더... (받아서 읽는) .... 영혜야... 병원에서 몇 자 급히 쓴다. 네 어 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 의사 말로는 며칠 못 버티실 거라는데 잠깐 내려와서 임 종이라도 하면 안 되겠니.. 어머니가 ... 네 이름만 자꾸 부르면서....

    굳어져서 듣고 있던 강행자가 휙 몸 돌려서 개울가로 간다.

    은행자 - .....!!

    .S#70. 개울가
    개울가로 온 강행자가 찬물에 세수한다.
    행자복 앞섶이 펑하니 젖도록 큰 동작으로 씻다가 다시 한숨 쉰다.
    온갖 번뇌와 미망이 득시글거리는 표정이다.

    INS.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의 초췌한 모습.

    한달음에 대웅전으로 가는 강행자.

    S#71. 대웅전
    강행자가 부처님 앞에서 절한다.
    끝도 없이 계속 절하다가 앞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져 울음 터트리는 강행자.
    한참을 서럽게 목 놓아 울다가 벌떡 일어난다.

    S#72. 행자방
    강행자가 들어오더니 행자복 벗고 감춰두었던 속세 옷 꺼내 입는다.
    따라 들어오던 은행자가 보고 깜짝 놀란다.
    강행자는 이미 싸두었던 가방 들고 그대로 휙 나가버린다.

    은행자 - (놀랍고 당황스러워) ......!!

    S#73. 주지스님 방 앞
    주지스님이 돋보기 쓰고 누더기 장삼 꿰매고 있는데 은행자가 급히 온다.

    은행자 - (다급하게) 저...주지스님예!
    주지 - (보며) 와, 무슨 일이고?
    은행자 - 강행자가.... ! 강행자가....짐 싸서....!
    주지 - ...!! (알아듣고 차분히) 오늘 따라 허기가 지네.... 점심 공양이나 준비해라.
    은행자 - .....??!!

    S#74. 산문 밖
    강행자가 가방 들고 한달음에 산문을 넘어선다.
    내쳐 가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신록 속에 절집이 보인다.
    순간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이 떠오르다가 그대로 돌아서서 산을 내려간다.

    강행자 - (아프게 혼잣말) 주지스님예, 지를 용서해 주이소. (가는)

    강행자가 완전히 사라져서야 은행자가 달려 나와 산 아래를 굽어본다.

    은행자 - (눈가가 젖어서) .... 강행자님 작별 인사도 몬 하고....

    S#75. 주지 스님방 (밤)
    주지스님이 서안 앞에서 불경 퍼놓고 읽고 있다.
    은행자가 자리끼 쟁반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은행자 - (눈치 보며 조심스럽게) ...이부자리 봐 드리러 왔는데예...
    주지 - (보며) 오늘 밤은 자리에 눕지 않을 작정이니 그럴 필요 엄따. 가서 자거라.
    은행자 - 예....

    주지스님 다시 불경 읽는데 은행자 나가지 않고 머뭇거린다.

    주지 - ....? 와? 할 말이 있나?
    은행자 - ....예.
    주지 - 해보거라.
    은행자 - ..... 천수경도 다 읽었고... 대승기신론소도 뜻을 다 깨쳤는데... 인자는 선방에 들어가서 참선하고 싶습니더.
    주지 - (빙그레 웃는) .... 선방에는 와 들어가고 싶은데....?
    은행자 - 저... 그기....
    주지 - (웃는) ...내 니 마음 다 안다. 니도 열심히 공부했으니 와 선방에 안 들어가고 싶 겠노. 중이 참선하겠다 카는데 누가 말리겠 노 말이다. 선방 말석에 니 자리 하나 마련해 줄 테니까 이번 하안거부터 들어오너라.
    은행자 - (감격하여) 고맙심더. 참말로 고맙심더!
    주지 - 그란데 선방에 드갈라카면 화두를 하나 잡고 들어가야 되는데 니는 시방 그런 기 있나?
    은행자 - ...예.
    주지 - 호오, 그래? 그기 뭔데?
    은행자 - 밤마다 속가의 엄마 생각에 울었더니... 큰 스님께서... 당최 니를 그래 울리는 슬 픔 이전에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더.. 저는 바로 그 무엇이 무엇인 가 하는 것을 화두로....
    주지 - (웃으며) 과연 큰 스님이시다. 니 한테 딱 맞는 화두를 내려 주셨구마.
    은행자 - ....!!

    S#76. 산사 전경. (아침)
    여름의 신록이 싱그러운 진초록으로 우거져 가는.

    S#77. 선방 (시간 없음)
    대중들이 가부좌 틀고 앉아 선 삼매에 들어있다.
    말석에는 은행자의 모습도 보인다.
    연화 큰 스님이 죽비 들고 천천히 움직이며 경책하고 있다.
    사이.
    문밖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반복하며 시간이 흐른다.
    여전히 가부좌 튼 자세로 참선하는 은행자.
    문득 자세가 흐트러지며 꾸벅꾸벅 졸자 큰 스님이 은행자의 어깨에 대고 죽비 때린다.
    깜짝 놀라 자세 바로 하는 은행자.
    어디선가 독경과 목탁 소리가 들리며 서서히 신비롭고 유현한 분위기로 바뀌면
    선방은 은행자의 의식세계를 표현하는 또 다른 공간이 된다.
    갑자기 칼 들고 삼지창 꼬나잡은 사천왕들이 부릅 뜬 눈에 붉은 갑옷을 입고 나타나 은행자 주위를 덩싯덩싯 춤추듯 돌며 위협해댄다.
    법고 소리 마구 높아져 긴장감이 극도에 이른다.
    은행자가 두려워 떨자 큰스님이 나타나 다시 어깨에 죽비를 사정없이 친다.
    그러자 사천왕들은 물러나고 은행자는 다시 화두와 싸운다.
    이번에는 개울가에 나타났던 남녀가 나타나 거의 벗은 모습으로 히히덕거리며 음란한 춤을 춘다. 꿋꿋이 입술 사려 물고 선에 집중하는 은행자.

    남녀 - (깔깔대며 유혹하는 ECHO) 스님... 우리 함께 어울려요.. 어서 요...

    명우 마저 벗은 모습으로 나타나 은행자를 유혹한다.

    명우 - (ECHO) 선희야... 보고싶었어... 선희야... 사랑해... 이리 와! 널 피안의 세계로 데려갈 게.

    참지 못하고 번쩍 눈을 뜨더니 명우의 내미는 손을 잡는 은행자.
    명우가 기다렸다는 듯 은행자의 옷을 벗기려하자 명우는 사라지고 대신 계부의 음탕한 모습이 나타나 은행자를 유린하려 한다.

    계부 - (ECHO) 너도 밤마다 날 기다렸지? 어서 이리와.. 함께 즐겨보자...

    은행자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데 큰스님이 나타나 죽비로 왼쪽 어깨를 강타한다.
    죽비 소리와 함께 남녀도, 명우도, 계부도 사라지고 은행자는 다시 자세 바로잡고 참선한다.
    필사적으로 화두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은행자.,
    그때 뿌연 안개 속에서 교도소의 엄마가 나타나 처연한 눈빛과 몸짓으로 도살풀이 춤 추기 시작한다.

    엄마 -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아가야... 가엾은 내 아가야~!

    그 모습이 한없이 애처롭고 측은하여 은행자는 자신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 흘린다.

    은행자 - (목메어)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와 은행자가 와락 끌어안으려는 순간 큰 스님의 죽비가 다시 한 번 은행자의 어깨를 강타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홀연히 사라지고 은행자는 비명 지르며 나동그라진다.
    사이.
    한층 눈빛이 깊어진 은행자가 참선하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백 팔배 하기 시작한다.
    한번 두 번 세 번...
    은행자의 절은 끝이 없다.

    S#78. 受戒의 秋
    하얀 화면에 검은 글씨.
    受戒의 秋

    S#79. 선방 밖 뜰 (오후)
    어느새 절 주변에 가을색이 짙어져 있다..
    선방 문이 열리고 은행자가 밖으로 나온다.
    부신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은행자의 얼굴에 깊은 참선으로 다크서클이 짙다.
    그 얼굴 위에...

    바람 소리....
    물 소리....
    새 소리.,,,,
    풍경 소리.....

    이전과는 다른 창백할 만큼 단정한 얼굴 위에 알 듯 모를 듯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가 가섭의 염화미소를 닮았다.

    S#80. 대웅전 (낮)
    전 대중이 모인 가운데 은행자가 수계식 치르고 있다.
    (몽타주 경건하게 보여지는)

    * 법우스님의 목탁집전,
    * 주지스님의 거향찬,
    * 은행자의 연비,
    * 대중들의 참회진언,
    * 꽃비내림,
    * 회향,
    * 발원문?낭독.
    * 은행자의 맑은 얼굴 위에....

    은행자N- .....하안거를 무사히 마친 나는 입산 한지 9개월 만에 수계식을 치르고 은행자가 아닌 향연 스님이 되었다. 향기로울 향에 연꽃 연.... 연화 큰 스님이 지어주신 법명 이다. 나는 이제 겨우 마음에 보리수 묘목 한 그루를 심었다.... 그 나무 굵어져 열 매 열릴 때까지 열심히 용맹정진 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 바하...

    S#81. 낙엽이 쌓인 오솔길 (오후)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오솔길...
    바스락 소리와 함께 여자용 운동화가 낙엽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S#82. 일주문 앞 (오후)
    힘겹게 올라와 산문 앞에 서는 초라한 차림의 소녀.
    지치고 사연 많은 눈빛으로 산문을 올려다본다,

    S#83. 대웅전 뜰. (오후)
    바람이 불때마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청량한 소리 내며 운다.
    향연 스님(은행자)이 싸리비로 떨어진 낙엽 쓸고 있는데 다가오는 소녀.

    소녀 - 저.... 스님예, 말씀 좀 묻겠습니더.
    향연 - (상냥하게) 예, 물어 보이소.
    소녀 - 주지스님 좀 뵐라꼬 왔는데 어데로 가면 됩니꺼?

    향연스님, 소녀를 말없이 무연한 눈빛으로 보는데....
    가을바람에 단풍비가 우수수 그들 위로 떨어진다.

    <끝>

    최영주

    1969 부산 출생

  • 1. 제목
    <山寺日記>

    2. 기획의도
    위대한 고승들의 크고 높은 경지의 견성성불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이제 막 공양간 행자로 들어간 스무 살 소녀의 서툴고 실수 잦은 수행도 아름다울 수 있다.
    그 녀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 인정스러움이 때로는 더 우리 가슴에 와 닿기도 하니까.
    20살에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한 소녀의 산사일기를 통해 작은 깨달음의 화두 하나를 관객에게 던져본다.

    3. 줄거리
    재혼한 엄마를 따라 계부의 집에 살게 된 은선희는 ...
    어느 불행한 밤, 계부에게 겁탈당할 뻔 한 순간에 엄마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난행을 모면한다.
    그 일로 계부가 사망하고 엄마는 감옥으로 들어가자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다.
    혼자서도 잘 해내겠다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악물고 3년을 버텨보지만 그것이 한계.
    세상의 벼랑 끝에 몰려 허덕이던 어느 날...
    뜻한 바 있어 비구니 도량을 찾아가 행자가 된다.
    불심이 깊거나 불연이 이어져 절집에 온 게 아닌 사연 많은 그녀...
    번뇌 망상에 빠지지 않도록 코에서 단내가 나도록 바삐 보내야하는 행자생활..
    정 많고, 호기심 많고, 엉뚱하기까지 한 이 소녀는 과연 속세의 엄마와 남친을 다 잊고 수행자로서 용맹정진 할 수 있을까?
    연필심에 침 묻혀서 꼭 꼭 눌러쓴 그녀의 산사일기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4. 등장인물
    * 은행자 - (여, 20세) 비구니가 되려는 눈이 맑은 엉뚱 소녀
    * 연화 큰 스님 - (여, 67세) 생불같이 인자한 노스님.
    * 주지 스님 - (여, 53세)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주지스님.
    * 법우 스님 - (여, 38세) 힘세고 엄하지만 인간적인 상좌스님.
    * 강행자 - (여, 25세) 학승이 되고픈 깍쟁이 행자.
    * 엄마 & 대구보살 - (여, 50세) 엄마... 혹은...?
    * 여주보살 - (여, 48세) 사연 많은 공양주 보살. 철이 엄마.
    * 김씨 - (남, 44세) 무뚝뚝한 성격의 부목처사.
    * 명우 - (남, 20세) 은행자의 속세 남자 친구.
    * 철 - (남, 10세) 여주보살의 철부지 아들.

    최영주

    1969 부산 출생

  • 허진호 영화감독, 심재명 MK픽쳐스 대표

    전반적으로 소재주의에 휘둘리거나, 장르의 유행을 쫒지 않으며 작가적 뚝심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았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중 ‘퍼플 레인’ ‘절대 지지 않아’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산사일기’가 최종적으로 언급되었다. ‘퍼플 레인’은 인물의 입체성과 안정된 극 구성이 돋보였으나 참신성이 부족했고, ‘절대 지지 않아’는 고무공처럼 탄력있게 만들어낸 여주인공이 매력적이었다. 판타지 로맨스물이라는 젊은 장르를 배경으로 생생하게 구현한 인물묘사에 비해 단조로운 사건의 구성과 배열이 아쉬웠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은 작가의 성숙한 시선이 무엇보다 장점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군상의 리얼리티가 뛰어났으며 현실성을 획득하면서 정서적 공감대를 충분히 끌어냈다고 보여졌다.

    당선작 ‘산사일기’는 제목처럼 이제 막 절에 들어가 행자가 된 소녀의 스무살 일기로, 산사를 배경으로 소녀의 성장담을 그렸다는 점이 무엇보다 신선했다.
    여주인공 은행자의 밝고 맑은 성격 뒤에 숨어있던 커다란 상처를 보여주는 방식이 서툴러 못내 아쉬웠지만, 뛰어난 대사 구현이 단점을 가릴 정도로 훌륭했다. 그녀를 둘러싼 각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도 섬세하고 예민했다.

    작품 속 대사처럼, 이후 작가의 용맹정진을 기대해본다.
  • 최영주

    1969 부산 출생

    내 유년의 기억 속에 까까머리에 볼 빨갛던 막내 이모 친구 김행자님이 있었다.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말로는 연애 실망해서 절로 들어갔다던 그 분은 가끔 탁발 나온 길에 친구인 막내 이모를 만나고 가곤 했다. 그분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은 묘한 미소 때문이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 것처럼 그렁그렁 젖어있던. 그때는 그 슬픈 미소의 의미를 짐작도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행자 복에 가려진 어깨에 업장이 그렇게 힘겨웠던 것이리라. 속세의 티끌 다 버리려고 절에 들어가서는 속세에 연연하는 수행자라니. 불심이 깊은 것도 불연이 깊은 것도 아니기에 속가의 인연에 연연하는 그 슬픈 미소. 큰스님들이 들으시면 끌탕을 할 일이지만 내게는 왠지 그 연연함이 인간적으로 다가왔다.그래도 다 잊고 잔걸음이나 자박자박 스님의 길로 가신 그 분. 몇 년 전 신록이 우거진 날 청도 운문사를 다녀오고 난 후 까까머리에 볼 빨갛던 김행자님이 생각나서 글로 한번 남겨볼까 했는데 집안의 세 남자들(남편과 두 아들)과 싸우며 살다보니 탈고에만 2년이 넘어 걸렸다. 내 2년짜리 번뇌를 알아봐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고 기회를 주신 동아일보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지금쯤 깊은 산사에서 초로의 비구니가 되어 있을 김행자님께도.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