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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의 미메시스: 무수한 '지금'들의 투사 -황동혁의 '남한산성'이 시간을 은유하는 방식

by  김예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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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의 균열에서 포착한 아포리아


    곱씹을수록 묘연해지는 말들이 있다. 그렇다고 진실의 행방을 좇다가는 심연에 빠져 버리고 말테다. 이를테면, ‘지금’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시간 사이의 균열이 발생한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의도한 ‘시간’에의 지위를 상실하고 만다. ‘지금’이란, 발화 이전과 이후 가운데 절단된 하나의 점과 같은 순간인가? 혹은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모두 포섭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재인가? 필연적으로, 시간을 규정하려는 시도 역시 미궁에 빠진다. 시간은 하나의 전체인가, 혹은 단편들의 합계인가? 가장 결정적으로,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도 재현될 수 없다. 시간은 명백한 아포리아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 영역 안쪽에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의 균열이다. 파편화된 시간의 틈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시간을 체험한다는 것은, 사실 시간이라는 거대한 아포리아의 이야기를 가지고 줄거리를 만들어가는, 끝없는 파편화-재조합의 과정은 아닐까? 이야기하는 행위의 본질은 줄거리를 구성하는 일이다. 또한 줄거리는 이질적인 단편들이 하나의 시간적 단위로 조합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시간 체험과 연관을 가진다.

    폴 리쾨르는 아포리아의 시간에 맞서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시간을 형상화하며, 따라서 이야기와 시간 사이에는 일종의 은유적 관계가 성립된다. 이야기는 텍스트라는 매개를 통해 독자를 만나며, 이야기를 읽은 독자는 다시 현실의 시간으로 복귀하게 된다.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사료와 흔적이라는 시간의 파편들을 재조합하여 형상화하는 과정이다. 시간은 그 자체로는 재현될 수 없다. 따라서 역사의 생성에는 역사적 상상력이라는 매개가 개입된다. 다시 말해, 허구성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은 역사와 시간 사이의 은유를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다루는 영화들은 시간에 대해, 역사적 상상력과 스크린이라는 이중의 매개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은유는 비유하는 대상들 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는 성질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시간과 역사 사이의 틈, ‘지금’이라고 외쳤을 때 생기는 균열. 그 사이로 영화를 바라보는 것은 아포리아의 시간을 이해하는 무수한 방법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영화 ‘남한산성’은 그 본적을 패배의 서사에 두고 있다. 질 것이 명백한 게임을 대면한 관객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영화는 깊은 심연의 무력감과 비애의 ‘길’을 함께 걸을 것을 권한다. 영화의 존재 자체가 역사이며 ‘스포일러’인 상황에서 관객은 더 이상 앞으로가 궁금하지 않다. 영사기를 통해 투사된 무력감은 어떤 변화도 암시하거나 예고하지 않고 그저 순간의 묘사에 총력을 다 할 뿐이다. 관객은 이제 러닝타임이라는 영화 속 아포리아의 시간을 정직하게 따르면서 현재의 슬픔에 동승해야 한다. 끊임없이 ‘지금’을 외치면서. 영화 '남한산성'은 살아있는 줄거리로서, 불가능한 시간의 미메시스(mimesis)로서 읽혀질 것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글은 영화가 무수한 ‘지금’을 통해 시간을, 세계를 은유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이다.

    불가능의 죽음, 가능성의 죽음


    ‘남한산성’의 성 안에서 진동하는 무력감은 죽음을 내면화한 사람들의 것이다. 성 안의 사람들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여 ‘버티어내는’ 싸움이 실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며 어떤 식으로든 죽음으로써 종결됨을 알고 있다. 결국, 현란한 말의 잔치는 죽음의 방식에 대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어찌하면 살 수 있는가’라는 왕의 탄식어린 질문은 이렇게 고쳐져야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남한산성 안에는 삶과 죽음이 뒤섞여있다.

    명길과 상헌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삶과 죽음의 테제를 통찰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표면적으로 대립하며, 영화는 두 배우들이 벌이는 ‘설전’에 뼈대를 두고 대립의 전개에 따라 전투 장면(스펙타클)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서사의 플롯에는 어떠한 기교도 없다. 관객들에게는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지위가 부여된다. 이 설전의 구경꾼이 되는 것.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이야기에 조금 더 기울게 된다. 하지만 명길과 상헌의 경우에는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가 꽤 어려워 보인다. 마치 영화 ‘주먹이 운다’에서 태식과 상환이 대결하는 결승전을 보는 것 같다. 두 사람의 결승전을 보는 관객은 누구의 편도 쉽게 들지 못하게 된다. 인간애에 호소하는 각자의 사연이 첨예한 평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남한산성’은 두 가지 방식으로 평행한 대결구도를 제시한다. 명길과 상헌이라는 캐릭터의 인간성을 보여줄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대립으로만 일관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러닝타임 내내 명길과 상헌은 대치-협동의 구조를 반복한다. 필요한 순간에 그들은 같은 마음임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서사 장치는 ‘김류’라는 내부의 절대 악이다. 김류는 영화 속에서 권위의식으로 가득 찬 사대부의 전형으로 묘사되며 카테고리화 된다. 이러한 대비는 명길과 상헌을 ‘우리의 착한 주인공들’이라는 같은 분류 속으로 편입시킨다.

    영화는 두 개의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명길의 오프닝과, 상헌의 오프닝이다. 이 등장 방식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인물의 성격을 암시하는 설명적인 장면일 뿐 아니라, 인물들이 퇴장하는 방식과의 유사성을 통해 일관된 캐릭터의 구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길과 상헌이 퇴폐한 사대부들에게서 보기 드문 실천가의 기질을 가진 우직한 인물들임을 보여준다. 혹은, 영화 형식의 측면에서 보자면 수미상관 구조를 통해 관객의 형식적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명길의 테마는 뒷모습과 간격이다. 명길의 등장 장면이자, 영화의 첫 장면은 용골대가 이끄는 군사들과 대면한 명길의 뒷모습이 담긴 익스트림 롱숏이다. 무리들로부터 상당한 간격을 둔 채 홀로 서 있는 그의 등은 마치 이탈자의 형상 같다. 이후 전개되는 영화 안에서 그의 외침은 대부분 고독하다. 성 안에서 명길의 유일한 벗인 수어사 이시백은 북문전투에서 군사의 전멸을 막아내고도 상부의 지시라면 그저 곤장을 맞아야 하는 신분에 불과하다. 상헌과 명길은 대립과 협동을 반복하는 관계로, 대의 앞에서 서로의 말을 두둔하기도 한다. 하지만 명길이 화친을 발설하는 순간, 상헌은 적대한다. 왕의 처소 밖에는 명길의 목을 베자고 상소하는 자들의 무리가 있고 이 장면에서도 명길은 역시 혼자다. 성의 안팎이 명길의 적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명길은 스스로를 역적이라 칭하며 상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말한다. 명길에게 죽음은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타자성의 죽음’에 가깝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죽음은 주체에 의해 이해되거나 소유될 수 없는 전적으로 타자의 것이다. 시백과의 대화 장면에서 명길은 스스로의 죽음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탄식한다. 명길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배태하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죽음 안에서 용감한 결의의 주체가 아닌,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삼전도의 치욕을 치른 뒤 어가행렬이 서울의 궁으로 돌아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무리로부터 간격을 두는 뒷모습이 있다. 이탈자가 고개를 돌리면, 관객은 그 뒷모습이 명길의 것임을 확인한다. 명길은 그의 뒤편에 남겨진 길을 응시한다. 관객은 영화의 처음에 이어 다시 한 번 명길의 등을 본다. 등은 침묵한다. 늘 그래왔던 방식으로. 날아드는 화살들을 속절없이 바라보았던 그 뒷모습이다. 이윽고 성문이 닫힌다.

    상헌이라는 캐릭터의 구조는 살해와 이에 동반되는 유혈로써 시작되며, 완결된다. 그는 등장과 동시에 사공을 살해하여 인상 깊은 롱숏을 선사하고, 끝에 가서는 치욕적인 상황에 좌절한 나머지 할복자살을 시도한다. 하얗게 언 설원 위로 사공의 피가, 상헌의 백색 두루마기 위에 상헌의 피가 퍼진다. 백과 적의 대비는 영화 전체의 테마이자, 남한산성의 형식이다. 그 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으며 적들은 강했기 때문에. 추위와 전투는 남한산성의 시간을 지탱하는 하나의 체계였다. 성 안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는 것도, 끝나지 않는 것도 두려웠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 안의 시간을 따르고 결말을 유예하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영화의 표현 방식에 따르면, 상헌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을 캐릭터 구조로 가진 인물이다. 그는 전체의 부분임과 동시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는 ‘동일자’로 기능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상헌은 드라마 그 자체이다. 따라서 그는 영화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장의 리듬을 따르는 인물로 나온다. 그가 자결을 시도하기 전 명길과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상헌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깨달음은 성장의 부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상헌이 나루와 조금씩 유대를 쌓아가는 모습은 나루의 유일한 혈육인 뱃사공을 살해하는 첫 장면과 대비되어 한 편의 신파(드라마)를 완성시키기에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대장장이인 서날쇠를 대하는 태도 또한 변화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상헌이 날쇠에게 나루를 맡기면서 두 사람이 맞절을 하는 장면은 뭉클함마저 자아낸다.

    한차례 성장통을 겪은 인물이 다다르는 드라마의 결말은 주인공의 자살로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영화는 캐릭터의 완결성을 위해 상헌의 자살을 원작 소설과 다르게 표현하였다. 소설에서 상헌은 할복이 아니라 목을 매어 자살하려 한다. 하지만 이를 할복으로 바꾼 것은 ‘백과 적의 대비’라는 상헌의 테마를 완성시킬 뿐 아니라 결말의 페이소스를 심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상헌이 할복하는 장면은 인조가 3배 9고두를 하고 명길이 울부짖는 장면들과 교차되어 강렬함을 더한다. 상헌이라는 캐릭터는 밋밋할 수 있는 남한산성의 서사 구조에 드라마적인 신파를 가미한다. 따라서 그의 행동양식이 우악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상헌이라는 캐릭터 구축에 있어서 영화는 신파의 공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상헌의 자결이 나타내는 또 한 가지는 그가 명길과는 다른 죽음에 대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헌에게 죽음은 레비나스보다는 하이데거의 설명에 가깝다. 죽음은 실존의 과정에 놓여 있는 주체의 가장 분명한 ‘자기 것’으로서의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야말로 현존재를 진정한 자기의 존재로 만든다. 주체는 죽음에 의해서 죽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인하여 살게 된다. 따라서 상헌이 명길을 ‘삶과 죽음을 뒤섞는 자’로 지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명길에게 죽음이 주체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는 무한한 타자의 것이라면, 상헌에게 죽음은 스스로의 의지 그 자체이며 삶의 방식 중 하나이다. 상헌의 자결 시도는 생존에의 몸부림이다.




    노에마와 노에시스: 대립이 아니라, 상생


    이처럼 명길의 죽음과 상헌의 죽음은 다르다. 필연적으로, 삶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리게 된다. 칸에게 답서를 보낼 것을 두고 명길과 상헌의 교전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은 인상 깊다. 전형적인 대사들이 아닌, 소설처럼 정제되고 단단한 문장들이 부딪힌다. 대충 들어도 이 문장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를 전제한 무거운 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헌이 명길의 답서를 두고 이것이 살고자 하는 글이냐고 외치면, 명길이 그 말을 이어받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글이 아니라, 길이옵니다.’ 명길이 말을 하면 상헌이 뒤집고, 그걸 다시 명길이 뒤집어서 두 사람의 교전은 마치 끝없는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일까.

    명길과 상헌은 견고하고 품위 있는 논리로, 때로는 말장난에 가까운 가벼운 반동으로 서로를 반박한다. 하지만 그들의 문장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반박은 후행하는 논리이며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문장의 성질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험적인 존재 자체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명길이 앞면을 말하면 상헌이 뒷면을 말하고, 또 그 반대가 반복된다. 두 사람의 논쟁은 한 장의 한 장의 카드를 함께 완성시키는 협업의 과정과도 같다. 문장들은 하나의 카드에서 태어났다. 이 ‘설전’은 더 이상 말장난이 아니다.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서 의식은 내용적 요소와 작용적 요소로 구성된다. 후설은 전자를 노에마, 후자를 노에시스로 규정하고 선험적 주관의 작동방식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눈 여겨 볼 것은 노에마와 노에시스가 놓여있는 ‘상관자들 관계’이다. 두 가지는 서로 별개이지만, 그럼에도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을 띤다. 후설에 의하면, 노에시스는 반드시 노에마를 갖고 또 노에마는 반드시 노에시스에 의해 사유되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앞, 뒷면의 구조와 유사해 보인다. 물론 상헌과 명길의 신념을 각각 노에마와 노에시스에 대입해서 설명하는 것은 자칫 비약일 수 있다. 두 사람의 신념을 내용과 작용으로 구분하기에는 두 사람이 주장하는 논의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또 평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에마와 노에시스라는 두 테제의 상호보완적 ‘상관자들 관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명길과 상헌이라는 극단이 하나의 의식에서 잉태되었을 가능성. 그것에 대해 숙고해보아야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애초에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었던 건 아닐까.

    이 상생의 대화에 유일한 심판자가 있다면, 그는 오직 임금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인조는 이미 너무 많은 한계와 무력을 내면화한 인물로 그려진다. 인조는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하여 신하와 책임 전가의 문제로 자주 충돌한다. 따라서 그는 상헌과 명길의 대화에 주체로서 참여하지 못하고 경유의 기능만을 담당하게 된다. 세 사람이 이루는 삼각형의 대화 안에서 꼭짓점을 자청한 인조는, 그러나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는 않았을까. 두 사람의 논쟁이 평행하며 상생한다는 것을. 인조는 애초에 심판할 생각이 없었다. 상헌의 말처럼, 임금도 그저 ‘당면한 것을 당면할 뿐이다’. 삼각형의 대화 구도는 이외에도 여러 장면에서 포착된다. 용골대와 명길의 대화는 역관의 중개에 의해 이루어진다. 유사한 방식으로, 날쇠와 상헌의 대화 속에도 칠복이라는 중개역이 있다. 날쇠가 상헌에게 조총의 보수를 건의하는 장면, 상헌이 날쇠에게 격서를 부탁하는 장면에서 칠복은 날쇠가 윗사람에 대한 예를 명분으로 삼가야 했던 말들을 속 시원히 내뱉는 대리자처럼 보인다. 칠복은 마치 용골대의 역관처럼, 날쇠의 소심한 문장들을 거칠고 솔직한 언어로 통역한다. 이 유사성은 영화가 제시하는 풍자처럼 보인다. 사대부와 천한 백성이 소통할 때, 분명 같은 언어로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통역’이 필요한 아이러니를 표현한 것이다. 또한 칠복으로 인해 직설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이 삼각형의 대화는 왕과 명길, 상헌이 이루는 삼각형과 대비되어 사대부와 왕족이 구사하는 말의 허식을 꼬집는다. 그들의 대화에는 장막이 가득 드리워져 있다. 그들의 화법은 역사극의 웅장함과 고전미를 자아내어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하지만, 모든 미적인 것들과는 별개로 안타까운 역사를 마주한 현대의 우리가 견지하게 되는 필연적인 아쉬움이 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솔직했으면, 그들 대립의 본질은 상생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더라면, 역사는 달리 쓰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역사라는 불가역의 흐름, 아포리아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남한산성의 그들 못지않은 무력감을 느낀다. 영화는 이제 그들의 무력감에서 우리의 내적 체험으로 서서히 전이된다.



    시간을 은유하는 무채색의 힘


    성 안에 혀의 전쟁이 있다면, 성 밖에는 칼의 전쟁이 있다. 영화는 보이는 피와 보이지 않는 피로 낭자하다. 하지만 이 색채를 강렬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보이는 피조차 낮은 채도로 표현되어 흑색에 가깝다. 영화는 온전히 무채색이다. 영화 속 유일한 원색은 선명한 레드로 표현된 임금의 곤룡포뿐이다. 어떤 것이 가장 기대되는 순간에 오히려 그것을 배제함으로써 취득되는 페이소스는 그 무엇보다 강렬할 수 있다. 또한 영화 안에서는 긴 호흡의 롱숏이 자주 포착된다. 대상을 적요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응시의 방식은 무채색의 원리와 비슷하다. 강조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는다. ‘남한산성’의 무채색은 이토록 고요해서 슬프고도 잔인한 이미지의 침묵이다.

    논쟁과 논쟁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네 번의 전투 장면이다. 영화의 주제와도 같은 백과 적의 고요한 대비가 시각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 전쟁인 북문 전투는 성 안의 체계로서의 폭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작 소설에는 이시백이 김류를 보며 그가 ‘싸움의 형식 속에 투항의 내용을 키워가는 듯’싶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결국, 남한산성 안에서 전투는 형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공허한 전투를 김류는 강행한다. 바로 그 북문 전투 장면에서 무채색의 페이소스가 정점을 찍는다.

    설원 위의 유혈이라는 점에서, ‘남한산성’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와의 비교는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작정하고’ 촬영한 ‘레버넌트’의 생생한 롱테이크 만큼은 아니지만, ‘남한산성’의 전투 시퀀스 또한 나름의 파괴력을 가진다. 영화는 디제시스 안에서 펼치는 롱숏과 조이는 클로즈업 사이에서 발생하는 낙차를 통해 혈투의 참혹함을 묘사한다. 북문 전투 시퀀스의 후반부에는 적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아군의 모습을 하이앵글 롱숏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화살을 맞은 사슴의 클로즈업이다. 쓰러진 사슴의 뒤로 아군의 시체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뛰어다니는 적군의 다리가 화편화 되어있다. 전체를 보여주는 롱숏과 부분들을 보여주는 클로즈업의 낙차는 곧 시각적 정보량의 낙차이다. 펼쳤다가 조이고, 보여줬다가 가리는 구조의 장면구성은 맥동하는 편집리듬을 생성하며 전투는 한층 더 잔혹하게 느껴진다.

    ‘남한산성’과 ‘레버넌트’의 또 다른 접점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다. 앞서 언급한 클로즈업숏에서 오디오는 텅 비어있다. 디제시스 안의 소리는 물론, 전투 장면 내내 흐르던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도 끝나 있다. 영화 전체에서 음악은 감정을 앞서지 않는다. 인물의 한 발 뒤에 있으면서 은근한 발자국으로 그를 좇는다. 인조가 칸에게 투항하러 가는 대목을 보라. 신하는 임금을 앞서서는 안 된다. 사카모토의 음악은 한 사람의 신하가 되어, 임금의 한 발 뒤에서 기다리며 그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각각의 전투는 서사의 구조에 따라 절묘하고 적절하게 짜여 있다. 청의 막강한 군사력을 설명하는 첫 번째 전투의 패배 뒤에, 날쇠의 조총 수리 덕분에 승전한 두 번째 전투가 따르는 방식은 익숙한 구성이다. 한차례 패배 뒤에 변화가 따르고, 그 변화로 인해 승리가 얻어지는 구조.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서사이다. 또한 세 번째 전투가 참패의 페이소스를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전투는 영화가 결정적인 장면을 앞두고 절정으로 달려 나가는 타이밍에 배치된다. 이 시퀀스는 서사상의 절정에 해당하며, 상업영화의 절정이 필요로 하는 신파와 서스펜스의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전투 장면과 명길이 칸에게 전달할 답서를 들고 이동하는 장면이 교차편집 되어 한층 더 긴박함을 자아낸다.

    ‘남한산성’은 시간의 모순과 빈틈에 의존하는 형식으로 우리를 혼란시키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이미 검증된 방식으로 사건을 빽빽하게 나열하여 시간을 진행시킨다.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죽음의 가능성이 임박했을 때 희망적인 대사를 말하는 인물은 대부분 죽게 된다. 이 현상을 사망플래그라고 부르는데, 날쇠가 아끼던 칠복은 전쟁이 끝나면 장가를 가겠다는 희망을 품은 인물이다.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전형적인 사망플래그를 남기고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답서는 영화가 계산한 방식대로 한차례 비극이 밀어닥친 후에야 뒤늦게 도착한다.

    ‘남한산성’ 속 전투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서사의 장치로서 소비되는 측면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단조롭지 않은 숏의 구성과 촬영기교 덕분에 영상 자체는 충분히 압도적이었으나 기계적인 구성방식에서 느껴지는 인위성은 영화의 슬픔에 완전히 동조하는 것을 방해한다. 영화의 무채색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이는 영화가 시간을 형상화하는 방식, 즉 시간을 대하는 태도와도 같다. 감정의 채도를 낮추고 원작 소설과 같은 건조한 문체로 시간을 은유하겠다는 결심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펙타클의 상투성은 무채색의 감상을 저해하는 요소이며 이는 영화의 아쉬운 대목 중 하나이다.



    진부한 겨울, 유난스러운 봄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인조가 칸에게 투항한 뒤 서울의 궁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나는 듯싶었다. 아니, 그렇게 끝나도 이상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프닝이 두 개의 시퀀스였던 것처럼, 영화는 또 하나의 결말을 둔다. 가장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새삼스럽게도 봄이 온다. 겨울이 끝나는 것과 봄이 오는 것은 동어반복처럼 같은 일이지만, 남한산성의 사람들은 유독 봄이 온다는 표현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 그것은 ‘봄’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는 희망과 생명성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었을까.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것들이 그저 민들레 꽃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결말에서 민들레 꽃과 얼음이 녹은 송파강의 인서트컷으로 봄의 정경을 보여준 뒤에 따라오는 장면은 날쇠와 나루의 평온한 일상이다. 이 목가적인 장면은 너무 평화롭게 묘사되어서 마치 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겨울 뒤에 봄이 왔다는 사실은 시간이 증명하는 진실이다. 겨울이 있었으므로, 봄은 온다. 날쇠와 나루도 민들레 꽃을 보았을 것이다.

    영화는 왜 두 개의 결말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영화가 형상화하고 있는 남한산성의 시간은 두 개의 층위로 분리되어있다. 즉, 영화는 두 개의 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헌과 명길, 김류 등의 대신들을 모두 포함한 사대부와 왕족은 하나의 결이다. 또 다른 결은 전쟁에 직접 몸소 참여한 병사들과 날쇠, 칠복 그리고 나루를 포함한 백성들의 것이다. 말의 전쟁, 그 반대편에는 모든 명분과 가치와는 무관한, 백성의 일기로서의 서사가 있다. 단적으로 보자면 영화의 이야기는 ‘날쇠의 남한산성 탈출기’라고 일컬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 북문 전투를 앞두고 춥고 굶주린 병사들은 자신들의 운명도 모른 채, 사슴을 잡고선 오랜만에 고기를 먹겠다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한차례의 격전이 지나간 뒤에, 영화는 카메라라는 시선으로 쓰러진 사슴과 병사들의 시체를 동시에 화편화하면서 백성이라는 층위를 강조한다. 그것은 먹이사슬 속 사슴의 위치와 다름없다.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사자와 사슴이 서로 쫓고 쫓기는 장면은 흔한 딜레마를 제공한다. 사자의 편에 설 것인가, 사슴의 편에 설 것인가? 결정에 따라서 장면의 희비가 전도된다.

    영화의 표면적인 딜레마는 명길과 상헌의 교전으로 나타나는 척화파와 주화파의 갈등에 있다. 하지만 실상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현실적인 갈등은 계층의 딜레마처럼 보인다. 이것은 공감의 문제이다. 사대부들이 울부짖는 치욕의 서사에 우리는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또한 명분과 가치에 대한 말다툼 그 자체는 소모적인 비효율의 행위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 문제를 의식한 걸까. 원작에는 없지만 영화에는 상헌과 명길이 서로를 대면한 채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상헌은 말한다. 백성을 위한 진정한 삶의 길이란, 낡은 것이 모두 사라진 곳에서 열리는 것이라고. 그 곳은 상헌도, 명길도, 그리고 임금까지도 사라진 세상이다. 다소 혁명적인 이 발언은 명분을 중시하는 척화파인 상헌의 발화라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상헌은 성장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필연적으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영화에 ‘우리의 시간’이 개입된 것처럼 느낀다. 역사적 상상력이라는 허구의 통로를 통해 우리의 시간은 역사의 시간과 마주 본다.

    영화 ‘남한산성’은 대체로 명쾌하다. 따라서 해석의 여지는 적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사고(思考)의 여지를 남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에 동참한다는 것이며 미메시스의 불완전을 인식해가는 과정이다. 역사의 지금과 우리의 지금 사이의 간극에는 무한한 심연이 놓여있다. 그러나 영화라는 은유를 통해 ‘남한산성’은 살아있는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과거를 재해석하는 힘, 따라서 미래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바로,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성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우리의 ‘지금’들을 맞이한다. 아무래도 아포리아의 시간은 아포리아로 남아야 할 것 같다. 불가능의 미메시스를 통해, 영화가 현실의 시간을 바꿀 수 있도록.
    김예솔비

    김예솔비

    1995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 믿음을 경유한 것들만이 진실이 된다 -조현훈의 '꿈의 제인'에 대한 단평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영원한 불행을 예고하는 이 문장은 어떻게 위로가 되는 걸까. 제인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살다가 때때로 그녀의 무대가 생각나면, 그녀의 웃음이 떠오르고, 그럼 그걸로 그만이다. 비록 불행은 연속이고 행복은 점처럼 드문 일이라 하더라도, 불행이 진실은 아닐 것이다.

    소현이 제인과 함께 살던 이야기가 끝나면, “이제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예요” 라는 소현의 독백과 함께 거짓말처럼 제인이 없는 세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첫 번째 이야기가 꿈 내지는 환상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두 번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예단할 수 있을까. 꿈이라는 현상이 무의식의 재조합이라면, 두 이야기는 동일한 등장인물과 소재를 공유하는 여러 가지 조합의 가능성들 중 하나는 아닐까.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꿈의 제인’에서 무의미하다. ‘있는데도 없는 것’을 가진 제인과 소현에게,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은 경계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에 의하면, 제인과 소현의 존재 기반은 ‘거짓’이다. 트렌스젠더 제인은 자신의 성기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성 정체성은 의도치 않게 거짓말이 된다. 소현의 거짓은 그녀의 의도와 행위의 결과 사이의 간극에서 기인한다. 소현은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저 사람들과 같이 있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는 결국 지수의 죽음을 방관하고 심지어 이용하기까지 한 사람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소현에게 말한다. ‘이기적인 새끼’. 아무도 그녀의 의도가 그토록 천진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서 거짓말 취급을 당하는, 발가락에 대한 그녀의 환상통과도 같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소현의 본능에의 희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의 존재 기반 또한 거짓과 분리될 수 없게 된다.

    제인은 거짓된 존재라는 모순을 믿음의 방식으로 극복하려 한다. 제인은 믿음을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믿음에 맞추기로 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믿으면, 그럼 됐어’식의 화법은 사지도 않은 물건을 가져가며 ‘주운 사람이 임자에요’라고 말하는 억지처럼 들릴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그녀의 믿음은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그녀가 경환이 아닌, 제인이 되기 위해서는 약을 먹어야 한다. 제인은 매일 밤 꿈에서 좋아하는 정호와 연인이지만,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다. 정녕 제인의 말이 모두 옳은 걸까.

    어차피 삶은 불행의 연속이니 모두가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믿는 소현과, 케잌을 나눠 주면서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라고 말하는 제인. ‘나누기’는 두 이야기 안에서 모두 중요하게 작동하는 삶의 체계처럼 보이지만 그 양상은 너무도 다르다. 제인의 세계에서는 파이를 공평하게 나눌 수 없다면 차라리 ‘다 같이 안 먹고 마는’ 게 옳은 일이지만, 가출 청소년들은 파이를 먹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들이 말하는 단체생활의 ‘공평함’은 맹목적이어서 본질은 왜곡된다. 죽은 지수의 돈을 나눠 가짐으로써 소현은 시시해졌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사실 소현이 원한 것은 지수의 파우치였지만,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에서 그 말은 차라리 거짓에 가깝게 느껴진다. 결국 소현은 거짓의 굴레에 사로잡힌다. 소현의 달리기는 존재 기반의 모순에 좌절하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소현은 달리면서 제인의 말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꿈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것은 ‘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누군가의 방문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는 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소현이 직접 쉼터의 문을 열고 나가는 것으로 끝난다. 두 이야기 사이에는 시간적인 인과성이 없을뿐더러, 영화의 형식은 오히려 시간을 뒤섞는 서사에 가깝다. 하지만 이 ‘변주’에 가까운 변화가 어떤 성장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현은 제인의 방식을 믿어보기로 한다. 비록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진실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제인의 방식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용기는 소현을 위한 노래였다는 사실은 믿는 순간 진실이 된다. 우리는 불행한 얼굴로 살다가도, 때때로 제인의 무대를 떠올릴 것이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행복이라 믿으면서. 오직 주체의 믿음을 경유한 것들만이 진실이 된다.
    김예솔비

    김예솔비

    1995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 김시무 영화평론가

    영화평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이론 및 미학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문학적 지식도 겸비해야 한다. 객관적이고 합리적 판단력도 있어야 한다. 평론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장력은 기본이다.

    올해 응모작은 38편이었다. 문제적 사극 ‘남한산성’과 실화에 바탕을 둔 ‘택시운전사’를 다룬 글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에 대한 평문도 있었다.

    눈에 띄는 응모작은 5편이었다. ‘택시운전사’를 다룬 ‘역사는 어떻게 집단기억이 되는가’는 적절한 인용을 통해 설득력 있게 논지를 전개했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초창기 영화의 이미지에 빗대어 다룬 ‘0과 1이 된 링컨과 릴리안 기쉬’는 응모자의 전문성이 엿보이는 글이다. 서사가 거의 없는 독립영화 ‘더 테이블’을 짐작의 사유로 분석한 ‘언어보다 강한 침묵’은 그만큼 분석력이 돋보였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예술을 사유하는 법’은 문제의식은 좋았지만 다소 산만한 게 흠이었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시간의 관점에서 분석한 ‘불가능의 미메시스: 무수한 지금들의 투사’까지 이들 5편은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불가능의 미메시스: 무수한 지금들의 투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남한산성’을 오늘날 정치적 상황 및 현실에 빗대어 분석하는 글들은 많이 있었지만, 시간을 화두로 삼아 극한 상황 속 삶과 죽음의 문제를 치밀한 논리로 풀어가고 있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매우 안정적인 문장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어 평론가로 손색이 없다고 본다.
  • 김예솔비

    김예솔비

    1995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마감일에 원고를 부치고 극장에 갔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봉한다는 대만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어떤 일이 막막하게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게 무서워서 결말을 유예하는 쪽을 택했다. 내 세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해프닝들과는 무관하게, 나는 습관처럼 수첩과 펜을 들고 극장에 갈 거라고.

    많은 영화들에 빚을 지고 있다. 비밀처럼 꺼내어 보던 영화들. 스무 살에는 무의식적인 척력으로 사람들을 많이 밀어냈고 필연적으로, 자주 낮아졌다. 바닥을 가늠하기 위해 영화를 틀었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혼잣말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용기 내어 던지는 대화에의 암시가 아니었을까. 응답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평론 강의를 해 주셨던 정한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탈속만이 본질이라고 믿으며 글을 멀리했던 내게, 글과 나 사이의 소중한 접점 같은 것도 있다고 평론과 들뢰즈라는 세계를 통해 알려 주셨다. 꿈결 같았던 수업 이후 일 년 동안 잔상 속에서 읽고 보고 쓰면서 지냈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날에는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의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함께 기뻐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다시 모호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밀이 일상처럼 흐르는 암실 안으로.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섬광처럼 스치는 진실을 믿는다. 찰나를 기다리는 사진가의 근력으로 써나가겠다. 직시하면서 관조하면서 때로는 방관에 가까운 방식으로 넋 놓고 바라보면서.
  • 작품전문
  • 단평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