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행복설계사무소

by  김경원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
  • 오프닝



    # 1-1. 레스토랑


    - 분위기 있는 음악이 깔리면서, 남자(동일)와 여자(주애)가 누가 봐도 선보는 분위기로 식사를 하고 있다. 차분한 단발머리에 얌전한 원피스, 긴장한 표정으로 동일의 눈치를 보며 스테이크를 열심히 썰고 있는 주애. 주애는 아직 반도 못 먹었는데 동일은 마지막 고기를 삼키고 입을 닦는다.


    동일 (무뚝뚝하게) 다 묵었이면 가입시더. (일어나 나간다)


    - 놀라 고기가 목에 걸린 듯 하지만 참고 얼른 일어나 따라가는 주애.


    진영(E) 제가 탄생시킨 1호 커플입니다. 성격차이요?

    결혼에는 절대 문제가 안 되죠.


    # 1-2. 예식장


    - 머리가 살짝 희끗해진 50대의 신랑, 신부(명호, 선경)가 돋보기를 꺼내들고 혼인서약문을 읽고 있다. 잠시 후, 마주보며 어색하게 입맞춤을 하는 두 사람. 민망해 하며 고개 돌리는 하객들.


    진영(E) 인생의 반을 낭비한 후에 깨닫기도 해요.

    결국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사실을 말이죠.


    # 1-3. 댄스 동호회 연습실


    - 야시시한 복장을 하고 살사댄스 삼매경에 빠져 있는 서라. 정열을 불태우는 마지막 동작, 얼결에 그녀를 안게 된 순진하게 생긴 순용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다.


    진영 (E) 마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도, 마지막 시선이 머무는 곳!


    # 1-4. 트루웨딩’ 커플 상담실


    - 책상에는 ‘웨딩컨설턴트 실장 오진영’이라는 명패가 놓여 있다. 진영 뒤로 ‘만남부터 결혼까지 트루웨딩과 함께 하세요’ 라는 문구가 벽에 걸려있다.

    - 진영 앞에 앉아있는 20대의 남자.


    진영 결혼이라는 이름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매직!


    (cut to)

    - 모든 세팅이 똑같고, 진영 앞에 앉아있는 20대의 여자.


    진영 결혼이라는 거,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cut to)

    - 진영 앞에 앉아있는 남자와 여자, 서로를 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손을 맞잡아 포개주는 진영.

    - 두 사람 사랑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는데,


    진영 (은밀하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다면 말이죠.


    - 두 사람, 뜨악해서 진영을 보는 위로, 웨딩마치가 흐르면서 타이틀 뜬다.


    Title : 행복설계사무소


    - 와자작 금이 가면서 깨지는 타이틀, 그 위로 ‘땡’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


    웨딩홀 복도 엘리베이터 앞 / D


    - 엘리베이터 문 열리면 다급한 표정의 보라가 서 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진영.


    진영 상황은?

    보라 아직.. 대기실 문은 잠가놨어요.

    진영 몸과 마음을 따로 하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그게 어려운가?

    보라 결혼이.. 어려운거겠죠.

    진영 어려울 게 뭐 있어? 거짓말탐지기로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식 올리고 그런 다음에 자기 맘대로 살면 되지.

    보라 그러다 이혼하면요?

    진영 (걸음 멈춰 보며) 난 커플매니저에요. 당신은 웨딩플래너구요.

    고로 이혼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보라 (그렇긴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진영 식까지 얼마나 남았지?

    보라 10분이요.


    - 시계를 한 번 보고, 여유 있게 걸음 옮기는 진영.


    동 신부대기실 앞 / D


    - 신부대기실 앞에 모여 있는 하객들. 문이 닫힌 것을 보고 이상해 하며 웅성거린다. 불안해 보이는 신랑 순용과 신부측 부모의 모습도 보인다.

    -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하객들 앞으로 가는 진영.


    진영 여러분, 여자들은 그래요..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큰 고통이 밀려 오죠. 이 행복이 깨질 것 같은 불안감, 어떻게든 행복을 지켜야겠다 는 책임감, 그러면서도 가장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미적 우월감까 지.. 신부님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하객들 ??

    진영 (주변 보다가 속삭이듯) 변.비.


    -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자리를 떠나는 하객들.

    - 자리를 뜨지 못하는 순용과 신부측 부모에게도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진영. 그리고는 신부대기실로 들어간다.


    동 신부대기실 / D


    - 진영, 들어온다. 안이 담배연기로 뿌옇다. 화장실에서 계속해서 올라오는 담배연기. 신부 서라의 통화 소리가 들려온다.


    서라(E) 내가 뭐에 씌웠었나봐. 결혼은 무슨 결혼.. 아, 싫어..

    지금 와서 나 좀 데리고 가면 안 돼 오빠?


    - 진영, 노크한 뒤 기다리지 않고 문을 벌컥 연다.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담배를 손에 든 채 전화하고 있는 서라. 진영이 서라의 손에서 휴대폰과 담배를 손가락으로 뽑아내듯 쏙쏙 집어낸다.


    서라 뭐예요?!

    진영 (미란다 원칙을 외듯) 신부님은 계속해서 어장 관리를 할 수도,

    이 결혼을 깰 수도 있습니다. 단, 성혼선언문이 선포되고

    혼인신고를 한 후 말이죠! 오케이?


    - 벙찐 서라 얼굴을 향해 향수를 마구마구 뿌려대는 진영.


    웨딩홀 / D


    - 울 듯한 서라의 표정과 대비되는 순용의 표정. 순용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 맨 뒤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영과 보라.


    주례사 신랑 정순용군과 신부 고서라양의 결혼이 이루어졌음을 엄숙히

    선포합니다.


    - 결혼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그제야 한시름 놓는 신부측 부모.


    진영 (일어나며 보라 향해) 비행기 타는 것까지 확실하게 보고 와.

    보라 네.

    진영 (가려다 생각난 듯 보라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뭔가를 올려놓는다) 얘도 다시 주인 찾아 주고.


    - 보라의 손바닥에는 담배꽁초와 수지의 휴대폰이 담긴 비닐 봉투가 있다.

    - 유유히 식장을 빠져 나가는 진영.


    트루웨딩 건물 1층 / D


    - 진영이 전화하면서 들어온다. 진영을 향해 인사하는 건물관리인.


    진영 네 대표님, 잘 끝났습니다. 지금 올라갈 거예요.


    - 엘리베이터 문 열리고 진영이 올라타려는데,


    관리인(E) 잠깐만요, 황변호사님!


    - 진영, 전화 끊고 돌아보면 후다닥 진영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남자가 있다. 대범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진영을 향해 빨리 타라고 손짓하는 대범.

    - 진영이 올라타자 ‘닫힘’버튼을 마구 누른다. 관리인이 잡기 전에 겨우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 떡진 머리에 꼬질한 셔츠 차림의 대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진영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6층 버튼을 누른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엘리베이터 안.

    - 6층에 서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왼쪽 복도에서 둔탁한 무언가가 날라 온다. 법전이다.


    빚쟁이(E) 똥변 나와! 남의 돈을 썼으면 갚아야 할 거 아냐!!


    - 바닥에 뒹구는 법전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 돌리는 대범.

    - 엘리베이터와 마주 보이는 벽에는 각 사무실 안내 표지판이 있고, 왼쪽 화살표 아래 606호 ‘황대범’변호사 사무실 간판도 보인다. 그 아래 대충 쓴 글씨로,

    –이혼상담환영-’이라는 A4용지가 달랑거린다.


    진영 (대범 보고) 안 내려요?

    대범 (굳은 얼굴로) 못 내리죠..


    - 다시 닫히는 엘리베이터.


    7층 건물 복도 / D


    - 대범의 사무실 간판과 비교되게 화려한 장식의 ‘트루웨딩’간판. 그 위에,

    ‘만남에서 결혼까지, 당신의 아름다운 인생을 책임집니다’ 홍보문구가 보인다.

    - 엘리베이터 문 열리면 대범을 뒤로 한 채 진영이 내린다.


    진영 (문 닫히자) 완전히 빚 좋은 개살구잖아.

    법조인이라고 아무나 받아선 안 되겠어. 이참에 수질관리를..


    - 그 때,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사람이 와서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층을 누르지 않고 서 있던 대범과 다시 마주치는 진영. 자신의 말을 들었을까.. 당황하는데,


    대범 (아무렇지 않은 척 명함 꺼내 내밀며) 혹시 상담 필요하시면..

    (그러다 트루웨딩 간판 보고 더 당황해) 아니 뭐, 여기 고객이면

    저희 쪽 잠정 고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하.. 그럼.


    - 얼른 엘리베이터 문을 닫는 대범.

    - 진영, 어이없어하며 명함 보다 대충 가방에 넣고 사무실로 향한다.


    트루웨딩 사무실 / D


    - 들어오는 진영. 사무실이 어둡다.


    진영 왜 불도 안 켜고.. (하는데)


    - 폭죽이 팡- 터지면서 환해지는 사무실.


    직원들 축하드려요!


    - 벽에는 ‘500커플 달성! 트루웨딩의 자랑, 트루웨딩의 최고 사원, 축하합니다!’라는 플랜카드가 붙어있고, 감동하는 진영.

    - 박대표가 꽃다발을 들고 진영에게 다가온다.


    박대표 수고했어. 오실장. 우리 회사 오실장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지?

    이렇게만 쭉- 가자고.

    진영 대표님.. (눈물까지 그렁해 직원들 보고) 뭐야 자기들..

    이렇게 사람 놀래 켜도 돼?

    직원1 그 벌은 회식자리에서 달게 받을게요~

    대표 이 사람들이, 우리 오실장이 얼마나 고된 하루를 보냈는지 알면서..

    진영 그죠? 이 눈치 없는 사람들 손 좀 봐줘야겠어요.

    자 다들 **호텔 연병장으로 집합!


    - 환호하는 직원들, 내키지는 않지만 분위기에 더 말 못하는 대표.

    - 그 때, 진영의 휴대폰에 카톡이 들어온다. 네임에 ‘내 보물’이라고 뜬다.


    하진(E) 아빠 생일, 잊은 거 아니지?


    - 카톡을 보고 뜨끔해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는 진영, 울 남푠 생일이라고 적혀있지만 알람은 꺼져 있다.

    - 진영, 하진에게 전화를 하는데 바로 음성으로 넘어간다. 이상해하며 전화 끊는데, 다시 들어오는 톡.


    하진(E) 톡했는데 웬 전화?

    진영 기집애.. (톡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톡으로 보내는)

    진영(E) 깜짝 파티하려고 티 안내고 있었쥐~ 무슨 케익 사갈까?

    하진(E) 남아있는 케익 별로 없잖아. 있는 걸로 사와.

    진영 (톡 확인하고, 휴대폰 향해 삐죽) 지는 말도 안 되는 양말이나 샀을 거면서.

    직원2 실장님, 얼른 오세요~ (무리들과 함께 나가고)

    진영 으응.. (그 때 다시 들어오는 톡)

    하진(E) 아빠 들어오기 전엔 올 거지?


    - 진영, 난감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다가 직원들 따라 나간다. 꺼지는 사무실 불.


    호텔 나이트 / N


    - 신나는 음악, 정신없이 돌아가는 싸이키 조명.. ‘트루웨딩’직원들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열심히 흔들어댄다. 은근히 중앙에 나가려는 대표, 하지만 직원들은 진영의 이름을 부르고, 뻘쭘하니 뒤로 물러나는 대표.

    - 진영, 직원들의 환호를 받으며 중앙에서 멋진 댄스를 선보인다.


    (cut to)

    - 테이블 위에 직원 수 대로 술잔이 쌓여 있고, 맨 꼭대기에 놓인 양주잔 하나를 빠뜨리자 차례대로 술이 섞인다. 능숙한 솜씨로 폭탄주를 제조해 돌리는 진영.


    진영 자, 다들 원샷!

    박대표 하여튼 우리 오실장 화끈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진영 그럼 화끈한 거 한 번 더! 오늘 회식은 미리, 제가 쏩니다!


    - 나오는 환호성. 가장 크게 기뻐하는 박대표.


    박대표 근데 왜 미리야?

    진영 트루웨딩에 이만큼 성과를 올려줬는데 설마,

    통 큰 대표님께서 축하 꽃다발로 끝내겠어요?

    박대표 (억지 웃음 지으며 시선 피하는)

    진영 (신용카드 꺼내놓고 일어나는) 그리고, 제가 먼저 좀 가야해서..

    직원들 왜요??

    진영 울 서방님 생일~

    직원1 에이, 아직도 그런 거 챙기세요?

    진영 아직이 뭐야. 평생 챙길 건데~! 그럼. (배꼽 인사를 한다)


    - 직원들의 질투어린 야유 속에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나는 진영.


    호텔 베이커리 / N


    - 역시나 진열장에 남아있는 케익은 달랑 하나다. 유아 캐릭터로 장식된 케익을 보고 난감한 진영. 직원 향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호텔 로비 / N


    - 케익 들고 나오며 시계를 보는 진영, 10시가 넘어가고 있다. 남편 태하에게 전화를 하는 진영. 신호는 가지만 전화받지 않고.. 그 때,

    - 갑자기 로비가 소란스러워진다. 입구에 구급차도 대기 중이다. ‘비켜주세요’라는 구급대원들의 소리가 들리고, 한 남자가 들것에 실려 나온다. 그 뒤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구급대원들을 쫓아 나오는 젊은 여자.

    - 어디선가 들리는 짱구 목소리의 캐릭터 벨소리. 진영, 전화기 든 채 뭔가하며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 들것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벨소리도 점점 커진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들것을 보고 있는 진영. 들것에 누워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게 되는데, 남편 태하다! 얼굴이 울긋불긋해져 의식을 잃었지만 분명 태하다.

    - 잘못 봤나..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남자의 양말, 낡은 짱구 캐릭터 양말이다.


    <플래쉬백 – 진영의 집 거실 / 1년 전>

    - 생일 케잌 앞에서 난감하게 짱구 캐릭터 양말을 들고 있는 태하. 12살 하진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다.


    진영 (양말을 보며 어이없어) 이게 아빠 선물이야?

    하진 응! 어른들 거는 없다 그래서 마트까지 가서 샀어.

    진영 그래도 이건 좀..

    태하 아빠도 짱구 너무 좋아하는데.

    하진 그치? 아빠랑은 통할 줄 알았어.

    앞으로 생일날에는 맨날맨날 이거 신어야 돼! 알았지?!


    - 짱구 양말을 신어 보이며 환하게 웃는 태하.


    진영 (멍해서) 저기.. 잠깐만요..


    - 하지만, 이미 들것은 로비를 빠져나갔다.


    호텔 입구 / N


    - 쫓아 나오는 진영. 주변을 둘러본다. 구급차에 젊은 여자가 올라타고 있다.

    - 진영이 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 보지만 떠나는 구급차. 진영, 주변을 살핀다. 뒤이어 오는 택시에 올라타는 진영.


    병원 응급실 앞 복도 / N


    - 진영, 허겁지겁 들어와 주변을 둘러본다.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들고 뭔가를 물어보려는데 응급실에서 소리가 들린다.


    간호사(E) 류태하님 보호자분-


    - 진영, 얼른 그 쪽으로 향하며,


    진영 여기요! (하는데)


    - 거의 동시에 응급실 입구 의자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희주)도 벌떡 일어난다.


    희주 저예요!


    - 마주하는 진영과 희주. 진영을 보고 누군지 알아본 듯 서서히 놀라는 희주. 그런 희주의 표정을 보고 진영 역시 마음 한 구석이 쿵- 하고 무너지는 느낌이다.

    - 간호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가까이 있는 희주를 향해,


    간호사 혹시 환자분 음식 알러지 있나요?

    희주 그런 거 없을 텐데..

    진영 해조류, 해조류 알러지 있어요.

    희주 ! 오늘 생일이라 미역국을 먹었는데..

    간호사 (대수롭게 않게) 응급처치는 했구요, 깨어나시면 퇴원하셔도 돼요.


    - 들어가는 간호사. 진영과 희주만이 남았다. 케익을 들고 있는 손이 자꾸 떨리는 걸 주먹을 꼭 쥐어 보며 겨우 참고 있는 진영.


    희주 여긴 어떻게..?? (하다 마음먹은 듯) 더 이상 숨길 필요 없겠네요.

    우리.. 3년 됐어요. 입사할 때 차장님께서 제 사수였는데..

    제가.. 제가 먼저 좋아한 거예요. 제가 좋아서 따라다녔어요.

    차장님은 아무 잘 못 없어요.


    - 희주가 주저리주저리 얘기 하는데 점점 소리가 작아진다. 진영은 그저 희주의 입만 멍하니 볼 뿐이다.

    (암전)


    진영의 집 침실 / 다음날 아침


    - ‘헉’하고 눈을 뜨는 진영. 악몽인가.. 몸을 일으키는데, 문 열리고 초췌한 몰골의 태하가 들어온다. 짱구 양말 그대로다.


    태하 일어났어?

    진영 응.. 이상한 꿈을 꿨어. 당신이.. (하다)


    -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익 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어찌나 꽉 쥐고 있었던지 손잡이 부분이 심하게 구겨져 있다. 꿈이 아니었던 거다.


    태하 우리.. 얘기 좀 해.

    진영 (시선 외면하고 침대에서 내려오며) 당신 생일인데 케익도 안 하고 그냥 잠들었나봐. 하진이한테 또 한소리 듣겠다.

    태하 미안해..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진영 우리 결혼한 해, 내가 모르고 미역국 끓인 걸 당신이 한 그릇 다 먹 었잖아. 그 때도 생일날 하루 종일 병원에서 보냈는데..

    왜 또.. 먹은 거야?

    태하 미안해서.

    진영 뭐?

    태하 그 친구한테 미안해서.


    - 진영이 태하를 쳐다본다. 태하에게 분노가 치솟는다.


    진영 지금 뭐하는 거야?

    태하 서두르지 않을게.. 당신 정리 되는대로,

    진영 정..리..?

    태하 (결심한 듯 진영에게 시선 고정하고) 그 동안 생각 많이 했어.

    생각하고 망설이느라 너랑.. 모두한테 상처 준 거 같아.

    진영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게 정리야? 말할 용기는 없고,

    어떻게든 나한테 들키기라도 기다렸어?

    그래서 들키자마자 정리라고 말하는 거야?!

    태하 .. 미안해..

    진영 미안하면 나한테 이럴 게 아니라 그 여잘 정리 해야지.

    그러고 나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빌어야지.

    기억이 지워질 순 없겠지만 지워질 때까지 빌어야지!

    태하 나.. 그 사람 좋아하게 됐어..

    진영 (떨리는 몸,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태하 처음엔 지칠 때 그냥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진심어린) 정말 미안해.

    진영 (태하의 진심어린 표정에 서늘해지는) ..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태하 ?

    진영 이대로 살 거니까. 이대로 쭉-


    - 진영, 케익을 쓰레기통에 쳐 박아 버린다.


    진영의 집 주방 / D


    - 까만 미역이 냄비 가득 끓고 있다. 하진이 냄새를 맡으면서 주방으로 들어오다 미역국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영을 본다.


    하진 아빠 생일 어제였는데?

    진영 알아.

    하진 아빠 미역국 못 먹잖아?

    진영 알아.

    하진 나도 이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진영 알아. 내가 먹을 거야.


    - 미역국을 한 그릇 잔뜩 퍼서 아구아구 먹는 진영. 하진은 진영이 이상하다.

    - 어느 새 나와서 그런 진영의 모습을 미안하게 보는 태하.


    진영의 집 외관 (D/N)


    - 한적한 동네, 아담한 단독주택.

    - 집에서 같이 나오는 진영, 태하, 하진.. 하지만, 가는 길은 각각 다르다.

    - 시간이 흐르고.. 진영과 하진, 혹은 태하와 하진으로 나누어지더니 그 다음에는 각각 따로 따로 나온다.

    - 밤.. 쓸쓸하게 한 명씩 집으로 들어가고, 하나씩 꺼지는 집안의 불 빛..

    (F.O) (F.I)


    상담녀(E) 사랑이 어떻게 변해요?


    트루웨딩 진영의 상담실 / D (자막 - 3개월 후)


    - 결혼 상담을 받고 있는 상담녀. 마흔은 족히 넘은 모태솔로. 어울리지 않는 공주풍 의상을 입고 사랑에 대한 환상을 마구 늘어놓는다.

    - 심드렁하게 그 앞에 앉아서 낙서하고 있는 진영. 3개월 전과 달리, 의상도 많이 루즈해 졌고, 그녀의 태도에서도 의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려진 썩은 생선.


    진영 (혼잣말처럼) 변해요. 한여름 생선 변하는 거처럼..

    상담녀 그건 사랑이 아닌 거죠.

    인연을 만나면 영원할 수 있는 게 사랑 아니에요?

    평생 나만 보고 그 넒은 가슴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

    진영 그러면서 적당히 돈도 있고, 키도 적당히 크고,

    얼굴도 적당히 잘 생기고?

    상담녀 어머, 매니저님은 역시 다르다. 제 이상형을 어떻게 아셨어요?

    진영 그런 사람이 딱 나타나서 고객님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상담녀 (잔뜩 기대하는 눈빛)

    진영 벼락과 원자폭탄을 동시에 맞고 살아남을 확률과 같은 거죠.

    상담녀 !

    진영 (볼펜 딱 내려놓고) 혼자 사세요.

    뭐하러 마흔 넘어서 그 험한 전쟁터로 가려고 그래요?

    (쭈욱 훑으며) 보아하니 가진 무기도 없어 보이는구만.

    상담녀 (상처받은 표정)

    진영 결혼은! (얼굴 들이밀며 스산하게) 전쟁이에요. 잔인하고, 살벌한!

    상담녀 (울 거 같다)


    트루웨딩 대표실 / D


    - 책상에 던져지는 고객파일. 상담녀의 웃고 있는 사진이 가히 엽기적이다.

    - 대표의 표정이 폭발직전이다. 책상 앞에 고개 숙인 채 서 있는 진영.


    대표 서류 확인 안했어?!

    진영 (시큰둥) 딱 봐도 견적 안 나오던데요 뭐.. 나이도 그렇고 외모도,

    대표 (말 끊으며) 배경을 봐야지 배경을!


    - 진영, 그제야 상담녀의 파일을 슬쩍 보면 아버지 직업란에 ‘전 국회의원’적혀 있다. ‘이걸 왜 놓쳤지’낭패감이 스치는 진영.


    대표 이번 건 성사시켰어봐 전반적인 고객 레베루가 확 달라지잖아!

    진영 죄송합니다.

    대표 그 쪽에서 컴플레인이라도 걸면 어떡할 거야..

    이 바닥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면서 그래!

    진영 ...

    대표 (보지 않고) 능력 안 되면 얼른얼른 자리를 비켜주든가.

    진영 ..

    대표 됐어. 나가봐.


    - 진영, 나오는데 뒤에서 대표 소리 들린다.


    대표 기껏 연봉 올려줬더니, 먹튀야 뭐야..


    - 뒤통수에 꽂히는 대표의 말을 들으며 나오는 진영.


    ‘트루웨딩’ 사무실 / D


    - ‘600커플 달성! 트루웨딩의 자랑, 트루웨딩의 최고 사원,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 붙어있고, 한 직원이 다른 직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 씁쓸한 표정으로 직원들을 지나쳐 가는 진영.


    건물 옥상 휴게실 / D


    - 휴대폰을 만지작하며 망설이는 진영. 결심한 듯 전화를 건다.


    진영 (가식적으로 바뀌며) 여보세요. 한대표님? 트루웨딩 오실장입니다... 덕분에 잘 지내죠.. 저번에 넓은 방 하나 준다고 하셨잖아요. 거기.. 아직 비었어요? (갑자기 표정 굳다가 가식적으로 더 웃으며) 아유- 농담이에요 농담. 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에요. 하하.. 트루웨딩 저 없으면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네.. 한 번 놀러갈게요. 네네..


    - 얼굴 굳어지며 후회와 창피함이 밀려온다.


    보라(E) 힘드실 거예요.


    - 진영, 깜짝 놀라 돌아보면 보라가 커피 두 잔 들고 서 있다.

    - 다가와서 진영에게 커피 건네는 보라.


    보라 박대표 입 가벼운 거 모르세요? 트루웨딩 오진영 옛날 같지 않다,

    실적은 고사하고 굴러온 고객도 차버린다, 아마 대한민국 웨딩업계 가 다 알고 있을걸요.

    진영 (허탈하게 웃는)

    보라 실장님 회사 옮길까봐 슬슬 눈치 볼 땐 언제고.

    진영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원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세상 모든 남녀가 짝을 이루는 그 날까지 부지런히 짝짓기에 힘쓰자!

    내가 자기 교육시켰던 거 같은데?

    보라 (조심스럽게) 근데, 요즘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진영 나? 일은 무슨.. 감긴가봐, 좀 오래가네.. (시선 피하며 커피마시는)


    ‘트루웨딩’ 엘리베이터 안 / N


    - 진영이 맥없이 서 있다. 6층에서 문 열리지만 타는 사람이 없다. 마주보이는 벽에 대범의 변호사 사무실 간판이 보이고,‘이혼상담환영’이라는 A4 용지가 진영을 손짓하 듯 대롱대롱 매달리며 흔들린다. ‘이혼상담’이라는 문구에 시선이 고정되는 진영.

    - 진영 생각을 지우 듯 얼른 ‘닫힘’버튼을 눌러버린다.

    -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열리는 엘리베이터. 결심한 듯 진영이 내린다.


    대범의 변호사사무실 안 / N


    - 노크 소리 들리고 진영이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진영 아무도 안 계세요?


    - 낡은 책상과 낡은 소파가 전부인 허름한 사무실. ‘변호사 황대범’이라는 달랑 명패 하나, 책상 위에는 서류 대신 벼룩시장 같은 생활정보신문이 굴러다니고,

    ‘축 개업 –만강루-’리본을 단 화분은 말라비틀어져 있다.

    - 그런 곳에 들어온 자신을 한심해하며 발길을 돌리려는데, 책상 아래서 쑥 올라온 손이 진영의 가방을 잡는다.


    진영 엄마야---!


    - 놀란 진영이 가방을 휘두르면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들리는 외마디 비명소리.


    대범(E) 으악-


    - 진영, 불안한 표정으로 책상 아래를 들여다보면 대범이 한쪽 눈을 가리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cut to)

    - 소파에 앉아있는 두 사람. 진영의 콤팩트 거울에 비치는 대범의 얼굴, 눈 위에 밴드를 붙이고 있다.


    대범 똑바로 좀 들어봐요.

    진영 (거울 올리며 못마땅하게) 아니 왜 거길 들어가 있어요?

    대범 돈 달라는 사람들이 예고하고 오는 게 아니잖아요.

    (거울 보고 다시 울상) 엄마 말 들을 걸.. 울 엄마가 그랬거든요.

    난 얼굴 뜯어먹고 살 팔자니까 얼굴에 보험이라도 들어놓으라고.

    진영 (어이없는 실소)

    대범 웃을 여유 있는 거 보니까 마음 정리는 얼추 되셨나보네..?

    진영 (표정 관리하며) 마음 정리라뇨?

    대범 정리 안 된 사람들 오면 좀 피곤하거든요.

    법률 상담이 아니라 하소연을 하러 온 건지, 눈물에 콧물에..

    누가 이혼하라고 등 떠밀었나.

    진영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다)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닌데요.

    대범 이혼 상담 아니에요? (진영 살피며 갸웃) 느낌은 딱 그건데..??

    진영 아니라니까요!

    대범 알았어요. 왜 화를 내고.. 그럼 무슨 일로..?

    진영 그러니까, (문에 써진 홍보문구 보고) 고용상담 같은 거..

    대범 잘렸어요? 부당해고를 입증하는 것도 힘들지만, 설사 인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계속 버티긴 힘들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거 같은데 자격 증 같은 건 있어요?

    진영 (자존심 상한다) 잘리긴 누가 잘려요! 그러니까, 내가 온 이유는요! .. (뭐라고 해야 하나)


    - 진영, 미치겠다.. 진지하게 빤히 보고 있는 대범을 보다 문득 스치는 생각.


    <플래쉬백 - 씬 7, 엘리베이터>

    - 진영에게 명함을 내미는 대범


    대범 아니 뭐, 여기 고객이면 저희 쪽 잠정 고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진영 잠정 고객..!

    대범 ?

    진영 잠정 고객 500명쯤 있는데, 날 고용할래요?

    대범 ??


    진영의 집 침실 / 아침


    - 재채기 소리. 진영, 이불 뒤집어쓰고 전화를 하고 있다.


    진영 죄송합니다 대표님.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내일 뵐게요..


    - 전화 끊는 진영. 휴대폰을 내려놓고 누우려고 하는데 바로 문자가 온다.


    박대표(E) 이참에 몸 관리하면서 푹~ 쉬기 바람.


    - 진영, 열이 솟구치는 듯 이불을 재끼고 일어난다.


    진영 지금 나 자른 거야?! 이 인간이 보자보자 하니까!


    - 하다 어제 일이 생각난다.


    대범(E) 잘린 거 맞네.


    대범의 사무실 (회상) / N


    - 대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너저분하게 놓인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대범 단물 쓴물 다 빨리고 버려지는 기분 진짜 그지 같죠. 나도 어지간 하면 힘 모아 싸워보자 하고 싶은데 법보다 지랄 맞은 게 현실인지 라, 씁쓸하죠. (하다 정색하고) 그래도 그렇지!

    왜 남의 사무실에 와서 헛소립니까?

    진영 그게 아니구요, 저희 쪽 고객이면 잠정 고객이라면서요?

    내가 그 잠정 고객들을 오백명이나 만들어 냈구요.

    대범 그래서요, 그 사람들이 이혼이라도 한답니까?

    진영 (시선 피하며) 아뇨.

    대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

    진영 그래도 지금쯤, 금은 가 있을걸요..

    대범 (어이없는) ..



    진영의 집 침실 / 아침


    - 진영, 이불에 얼굴을 파묻는다.


    진영 (이불 감은 채로)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아~~~


    - 진영이 회사로 다시 전화를 하려는데 문 열리고 가방 맨 하진이 얼굴을 내민다.


    하진 엄마, 아침.

    진영 아빠는?

    하진 출장 갔잖아.


    - 어쩔 수 없이 휴대폰 닫고 일어나는 진영.


    동 주방 / 아침


    - 텅빈 냉장고. 진영, 식탁에 앉아있는 하진의 눈치를 보며 냉장고 문을 닫는다.


    진영 시리얼 괜찮지?


    - 시리얼을 그릇에 담아 우유를 부어 하진 앞에 내민다.

    - 시리얼을 내려다보던 하진, 못마땅한 얼굴로 가방을 들고 일어난다.


    진영 왜?

    하진 (말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나가는)

    진영 (발끈해서) 하여튼 니 아빠가 버릇을 잘 못 들여놨어.

    어떻게 맨날 밥만 먹고 사니? 너 그거 요즘 세상에 얼마나 촌스러 운 건줄 알아?!


    - 쾅, 문 닫히는 소리 들린다.

    - 진영, 약이 올라 시리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다 바로 싱크대에 뱉어버린다. 우유 날짜를 보면 한참이나 지났다. 긴 한숨을 내쉬는 진영.


    동네 상가 거리 / D


    - 장 본 물건들을 들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진영. 세탁소 앞을 지나는데 주인이 나와 진영의 앞을 가로막는다.


    진영 (귀찮지만) 안녕하세요.

    세탁소 주인 (못마땅하게 보며) 자기, 내가 뭐 서운하게 한 거 있어?

    진영 아뇨..?

    세탁소 주인 근데 요즘 왜 그렇게 뜸해? 같이 한 시간이 몇 년인데 그렇게 쉽게 변하면 안 되지.

    진영 나 변하는 인간 딱 싫어하는 사람이거든요.

    세탁소 주인 (안심한 듯 웃으며) 그치? 자기 옷 좀 신경 써야겠다.

    누가 보면 소박맞은 조강지천줄 알겠어. (깔깔대며 웃는)

    진영 ! (씁쓸하게 따라 웃는)


    (cut to)

    - 진영이 반짝거리는 상가들을 지나간다. 악세사리 가게부터 커피원두가게, 예쁜 빵집, 인테리어 소품 가게까지 진영이 지나가자 주인들이 진영을 아는 체 하려하지만 진영은 그냥 지나쳐 간다. 이상해 하는 주인들.

    - 터덜터덜 걷던 진영이 걸음을 멈춘다. 낡은 DVD대여점 앞이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정말 그렇게 보이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 벌컥 열리면서 대여점 주인 나온다.


    대여점 주인 환영합니다 고객님~


    DVD대여점 / D


    - 상점 안은 밖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낡았다. 곳곳에 폐기처분이라고 묶어놓은 DVD더미가 진열대에 놓인 것보다 많아 보인다.


    진영 (건성으로 둘러보며) 영화 재미난 거 있어요?

    대여점 주인 (로코물 영화 들어 보이며) 이번에 새로 나온 건데 남주가 진짜

    예술이거든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달달한 사랑얘기..

    진영 흥, 개나 물어가라지.

    대여점 주인 취향이 그게 아니시구나.. 저도 사실 이런 영화는 오그라들어서

    못 보겠더라구요.. (액션 영화 들고)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화끈한

    액션이 최고죠.

    진영 (외면하며) 시끄러운 거 질색이에요.

    대여점 주인 아주 시끄럽죠. 깨고 부수고, 아우 시끄러.. 그럼..

    날도 더운데 으스스한 공포 스릴러? (슬쩍 눈치 보며) 딱이네.

    진영 (어이없게 보며) 사는 게 공포거든요.

    대여점 주인 (멜로 영화 들고 혼잣말처럼) 이거 진짜 슬프다던데..

    진영 (버럭) 지금 울고 싶은 거 억지로 참고 있는 거 안 보여요?!


    - 얼른 DVD 꽂아 넣는 대여점 주인.


    진영의 집 거실 / N


    - 혼자 돌아가고 있는 영화. 흑백화면의 ‘굿나잇 앤 굿럭’이다. 구겨진 맥주 캔 몇 개가 뒹굴고, 진영은 이미 술에 취해 골아 떨어졌다.

    - 하진이 들어온다. 진영의 모습을 시니컬하게 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영화 속 주인공 ‘데이빗 스트라던’의 모습이 보이고, ‘굿나잇 앤 굿럭’이라는 마지막 인사가 흐르는데, 울리는 진영의 휴대폰.

    - 부스스 잠이 깬 진영이 전화를 받는다.


    진영 네..

    대범(E) 그 프로젝트 아직도 유효합니까?

    진영 뭐라구요.. ?

    대범(E) 합시다! 그 잠정 고객들 우리 사무실로 데리고 오자구요.

    진영 (반쯤 감긴 눈이 점점 커진다)


    트루웨딩 건물 로비 일각 / D


    - 인포메이션에 앉아서 CCTV를 체크하는 관리인. 의자 뒤에 숨어서 인폼 쪽을 주시하는 두 사람.. 진영과 대범이다.


    진영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요?!

    대범 좀 있으면 순찰 돌러 갈 거예요.

    진영 (한심하다) 매일 이렇게 출근해요?

    대범 관리비 못 내는 달엔 뭐..

    진영 (벌떡 일어나며) 이건 아닌 거 같네요. 전 이만.


    - 하고 가려다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는 진영.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트루웨딩’박대표와 다른 직원의 모습이 보인다.


    박대표 오실장 사표처리 했지? 딴 말 못하게 얼른 4대 보험도 정리하라고.

    - 진영, 자존심이 상한다. 그런 진영을 슬쩍 보는 대범. 갑자기 진영을 끌고 벌떡 일어난다.


    대범 (큰소리로) 잘 오셨습니다. 오실장님.


    - 박대표 가다가 돌아본다. 오실장을 보고 놀라는 직원.


    진영 (당황하는)

    대범 제가 오실장님을 스.카.웃.하려고 1년을 공들인 거 아십니까.

    이제라도 승낙해 주시니 이거 아주 영광입니다.

    진영 (표정 관리하며 작게) 왜 그래요?

    대범 트루웨딩이었나요? 그런 듣보잡 회사는 빨리 정리해 달라고 하세요.

    가시죠.


    - 진영을 이끌고 당당하게 박대표 앞을 지나쳐 가는 대범. 박대표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 인폼에 있던 관리인이 대범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대범 당당하게 손으로 저지하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버린다. 얼떨결에 그대로 있는 관리인.


    대범의 변호사사무실 / D


    - 태연하게 진영을 이끌고 들어오는 대범.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바로 표정이 바뀐다.


    대범 (신나하며) 안 쫓아오죠? 와- 내 연기 진짜 죽이지 않았어요?

    진영 지금 뭐한 거예요?

    대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거니까.

    진영 하- 누가 댁보고,

    대범 (말 끊고) 처음엔 진짜 이상한 여자구나.. 남편이 정말 못생긴 여자 랑 바람이 났든가 아님 남자한테 빠졌나보다.

    진영 뭐예요?!

    대범 처음엔 그랬다구요. 근데 뭐 아주 말도 안 되는 얘긴 아닌 거 같아 서.. 금간 게 확실하다면요. (확인하는 눈빛)

    진영 (시선 피하며) 그럴 거예요. 아니면,

    대범 아니면?

    진영 브레이커가 돼야죠.

    대범 ?

    진영 얼음 깨봤어요? 무식하게 힘으로 여기저기 두들겨 댈 필요 없어요.

    가장 중요한 한 곳만 치는 거예요. 그럼 쫘악- 바로 갈라지죠.

    (일어나며) 시작할까요?


    몽타주


    - 엘리베이터 앞에 붙은 A4용지를 과감히 떼어 버리는 진영. 거기에 ‘행복설계사무소’. 라는 간판을 새로 단다. 진영은 만족해 하지만, 대범은 오글거린다는 표정 짓고.


    - ‘새 출발의 길라잡이, 이혼플래너’라는 문구가 써진 현수막, 이혼컨설팅에 관한 강좌를 듣고 있는 진영. 열심히 필기하며 수업을 듣는다.


    - 까페에서 트루웨딩 보라와 마주하고 있는 진영. 비밀 접선을 하듯 주변을 살피며 테이블 위에 파일을 올려놓는 보라. ‘트루웨딩 커플 (2000~2015년) 담당 오진영’ 써 있다. 첫 장을 넘기면 나오는 커플 신상들.. 만족스러운 듯 보라를 보며 웃는 진영.


    - 진영의 집 거실.. 혼자 돌아가고 있는 ‘굿나잇 앤 굿럭’ 영화. 여기저기 커플 자료가 널려 있고 굴러다니는 맥주 캔.. 진영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퇴근해서 들어오는 태하. 소파에서 잠든 진영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 하진의 방으로 들어오는 태하.. 헤드폰을 끼고 잠이 든 하진의 헤드폰을 빼 주고, 꺼지는 불..


    - 깨끗하게 정리된 거실.. 소파에 누운 진영에게 이불이 덮어져 있다.


    대범의 사무실 / D


    - 커플 파일을 보고 있는 대범, 한 파일을 보더니 탁 치며 말한다.


    대범 찾았다! 이 커플 어때요?

    진영 (슬쩍 넘겨본다) 거긴 아니에요.

    대범 (고개 갸웃) 남자가 하루도 못 살 거 같은데..

    진영 쯔쯧.. 부부가 얼굴만 보고 사는 줄 알아요?

    그 사람들은 피터지게 싸워도 다음 날이면 바로 풀어진다구요.

    대범 어떻게 압니까?

    진영 (얼굴 들이밀며) 속궁합이 퍼펙트!

    대범 (얼굴 붉어지며) 커플매니저는 그런 것도 봅니까?

    진영 다 보는 건 아니죠. 저같이 전문화된 데이터로 승부하는 사람들만 본다고 할까.. 프로필 보고 절대 안 만난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얼굴 이 확 폈다, 그럼 딱 그거거든요.

    대범 (시선 피하며) 흠흠..

    진영 왜 그래요, 총각도 아니면서?

    대범 ...

    진영 (뜨악) 미혼이에요??

    대범 (말 돌리며) 그래서, 저 사람들이 우리 고객이 될 거라는 근거는 뭡 니까?


    - 대범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 화이트보드에 붙여진 세 커플 사진.

    ‘동일-주애, 순용-서라, 명호-선경’의 커플 사진이다.


    진영 (동일 가리키며) 아주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 그야말로 무뚝뚝 함의 전형이죠. 지금까지 함께 산다면 그게 기적이에요.

    대범 (순용 서라 커플 보며) 두 번째 커플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거 같은데?

    진영 끝내기 딱 좋은 시기죠. 와이프 바람기에 적응은 안 되고,

    그걸 끌어안을 만큼 정이 붙지도 않은 단계!

    대범 (명호, 선경 가리키며) 저기는 정이 붙을 대로 붙었을 거 같은데요?

    진영 일명 하프커플! 이 분들도 신혼이에요.

    대범 (헉!)

    진영 반백의 나이에 만나 결혼한 만혼 커플이죠. 하지만,

    나이 50넘어 도전하기에는 결혼이라는 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거 든요. 지금쯤, 절실하게 솔로일 때를 그리워할걸요. 두 사람 다!


    해안도로 + 차안 / D


    - 대범이 운전을 하고, 진영이 옆에 타고 있다.


    대범 그렇게 끝이 보이는 사람들을 왜 굳이 엮은 겁니까?

    500커플 달성, 오실장님 목표 때문인 거예요?

    진영 물론, 아니라고 할 순 없겠죠. 그게 내 일이었으니까.

    대범 참 장하십니다.

    진영 (구시렁)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구요.

    끝을 알고 시작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대범 ...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멀리 살아.. (둘러보는)

    진영 신랑분이 4대 독자였어요. 아마 시댁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대범 10년 더 됐다면서요? 모든 커플들을 그렇게 다 기억하는 겁니까?

    진영 .. 주애씨랑 결혼준비를 같이 했어요. 주애씨 식 올리고 일주일 뒤 에.. 나도 결혼했으니까.. 언니 동생 하면서 친했는데..


    - 먼 기억을 떠올리 듯 창밖을 보는 진영.

    - 바다를 옆에 두고 달리는 차.


    고택 입구 / D


    - 시골의 아담한 동네. 조용한 동네의 적막을 깨고 진영이 탄 차가 들어온다. 골목 맨 끝에 종갓집다운 고택이 보인다.

    - 차에서 내려 사뭇 긴장한 얼굴로 집을 보는 두 사람.


    고택 안 마당 / D


    -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


    진영 계세요. 주애씨~ (하는데)


    - 안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 들린다. 놀란 두 사람.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하고,

    - 부엌 아궁이 앞에서 주애가 바닥에 그릇들을 내던지고 있다. 바닥에 산산조각이 나는 그릇들.. 주애 옆으로 아직 그릇들이 잔뜩 쌓였다. 주애가 또 하나를 내던지려는데,


    진영 서주애씨?


    - 그제야 사람이 들어왔다는 걸 알고 깜짝 놀라 당황하는 주애. 얼굴은 울었던 흔적이 역력하다.

    - 진영, 대범을 향해 거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고택 안채 마루 / D


    - 마당에는 정성 들여 가꾼 화초들이 있고, 오래된 한옥이지만 먼지 하나 없이 정결하다.


    진영 (바닥 만져 보며) 나무 바닥이 이렇게 윤이 나려면 하루에 청소를 몇 번 해야 돼..

    주애(E) 윤이 날 때까지요.


    - 주애가 차 쟁반을 들고 마루로 올라온다.


    진영 대단해. 내가 주애씨 특기란에 청소 써 있는 거 보고 이 커플 무조 건 된다 했다니까. 이런 종갓집 아무나 못 지키거든.

    애 키우기도 서울 아파트 살이 보다 훨씬 낫고 그치?

    주애 (찻잔 내밀며) 차 드세요.

    대범 (눈치 보며) 아이고, 감사합니다.

    주애 여긴 어떻게.. 어쩐 일이세요?

    진영 (주애에게 명함을 내밀며) 나 회사 바꿨거든.


    - 명함을 받아보던 주애. ‘이혼컨설팅’이라는 문구에 서서히 얼굴 굳어진다.


    주애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대범 (얼른 끼어들며)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오실장님이 제일 기억에 남 는 커플이라고 보고 싶다고 해서, 지나는 길에, 지나는 길에 들렀어 요. 하하..

    진영 (진지하게)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참는 게 최선은 아니니까.

    대범 (민망해 시선 피하는) ..

    주애 (명함 보다) 오실장님이 커플 연결시키는 안목은 정말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요.

    진영 그..래..?

    대범 (역시 아니잖아, 진영 눈치 주는)

    주애 (생각난 듯) 아이는 많이 컸겠네요? 우리 결혼할 때 생겼죠?

    진영 (새삼 부끄럽다) 으응.. 초등학교 6학년. 맨날 전쟁이지 뭐..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네.

    주애 실장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아서요. 보통 결혼 전에 애가 생기면 엄 청 심란할 텐데, 큰일 났다고 하면서도 너무 행복해 보였거든요.

    진영 .. 그랬나.. 자기도 애가 컸겠네. 몇 살이야?

    주애 (차 마시고) .. 없어요.

    진영 ! 미안..


    - 표정 없이 찻잔에만 시선 고정하고 있는 주애. 감정을 읽기가 힘들다.


    동네 어귀 + 차 안 / D


    - 멀리 고택 앞에 서 있는 주애에게 손 흔들고 차에 오르는 진영과 대범

    대범 이게 금 간 겁니까? 저렇게 참한 마누라라면 절대 이혼 안 하지.

    진영 남편 마음이 뭐가 중요해요. 부인이 결정만 하면 되는데.

    부엌에 앉아서 그릇 깨는 거 못 봤어요?

    대범 부부가 살면서 그릇 한 번 안 깨고 사는 집 있습니까?

    진영 부부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대범 그걸 꼭 살아봐야 압니까.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하면 안돼요. 결국 마음 따라가는 게 인생이라구요.

    진영 그러니까요. 그 마음이 지금 그릇을 깨고 있다구요. 기다려봐요.

    조만간 저 그릇처럼 지긋지긋한 결혼생활도 깰 테니까.

    출발하죠 다음 커플로.


    - 출발하는 대범. 주애는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 주차장 / D


    - 빨간 립스틱에 야시시한 스커트를 휘날리며 또각또각 걸어 나와 차에 오르는 서라. 그 모습을 차안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 서라의 차가 출발하자, 지켜보던 차도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그 앞을 가로막는 똥차. 대범의 차다. 그제야 운전대를 잡고 있는 순용의 모습이 보인다.


    순용의 집 / D


    - 벽에 걸린 결혼사진. 환하게 웃고 있는 순용과 인상 쓰고 있는 서라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그 옆으로 각종 댄스 대회에 출전한 서라의 사진이 걸려 있다.

    - 불안한 얼굴로 휴대폰을 보며 왔다갔다하고 있는 순용. 휴대폰에는 서라의 휴대폰 위치 추적이 표시되고 있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 진영과 대범.


    순용 (머리 감싸며 울 듯) 여긴 또 어디지?? 이쪽엔 연습실이 없는데..

    진영 정순용씨?

    순용 (들리지 않는다) 어, 왜 안 움직여?? 뭐하는데 안 움직이냐고..

    진영 파트너 체인지 중인가부죠.

    순용 ! (그제야 진영을 본다)

    진영 (와서 휴대폰 뺏고 앞에서 서라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은 어장 관리 하는 여 자와 마음고생하면서 계속 살 수도, 그러다가 보기 좋게 차 일 수도 있습니다.

    순용 (절망적인 표정) ..

    진영 아니면,

    순용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다)

    진영 이 거지같은 호구 짓 때려 치는 게 어때요?


    - 순용에게도 명함을 내미는 진영. 대범, 그런 진영의 행동에 혀를 내두른다.


    대범의 사무실 / D


    - 피곤한 듯 들어와 소파에 주저앉는 진영. 대범이 뒤따라 들어온다.


    대범 (꺼림칙한 표정) 이봐요 오실장님, 난 이거 아무래도..

    진영 이봐요 똥변, 아니 황변호사님. 그 동안 찾아오는 서비스만 해 주시 다보니까 찾아가는 서비스가 낯설어서 그러시나 본데, 어차피 법적 으로 갈라놓나 심적으로 갈라놓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대범 (그런가 싶다가) 어떻게 그게 같은 겁니까?

    이혼결심, 그 발현의 주체가 달라지는데..

    진영 됐구요. 뭐 달라진 거 없어요?

    대범 (시큰둥한 표정)

    진영 이래서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다르다니까.

    우리 올라올 때 관리실에서 안 잡았잖아요.

    대범 ! 그러네..

    진영 (당당하게 통장 보여준다) 세 번 째 커플, 착수금 입금 완료!

    대범 (믿기지 않는 듯 통장을 뺏어 확인한다)

    진영 잠시 뭐에 씌어서 결혼은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솔로 관성의 법칙이 라는 게 있는 거죠!


    - 진영, 화이트보드에 붙여진 명호-선경 커플 사진으로 시선 향한다.


    명호와 선경의 집 거실 / D


    - 웨딩드레스를 입고 입맞춤을 하는 결혼식 사진이 거실 한 가운데 걸려 있다.

    - 욕실에서 나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소파에 앉는 선경. 스포츠 채널을 틀면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가 한창이다. 홈런이 터지고 선경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른다. 그 때,

    - 서재방 문이 열리고 명호의 얼굴이 보인다. 선경, 명호를 의식하며 미안한 표정이 되고, 명호 친절을 잃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스트레스 받는 듯한 선경.


    동 서재방 / D


    - 좀 전에 웃던 표정과는 달리 피곤한 얼굴로 헤드셋을 끼고 책을 펼치는 명호. 클래식 선율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클래식 선율은 또 다시 MLB 관중석의 응원소리와 겹쳐지고.. 명호 헤드셋을 던져 버린다.

    - 그 때, 들어오는 진영의 문자.


    진영(E) 당신의 행복을 재.설.계. 해 드리겠습니다.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면 언제든 문을 두드리세요.


    - ‘이혼컬설팅 실장 오진영’.. 명호 삭제하려다 말고 문 쪽을 본다.


    (cut to)

    - 선경 역시 문자를 보며 서재방 쪽을 쳐다본다.


    대범의 사무실 / D


    - 진영, 화이트보드에 붙여진 명호와 선경의 사진을 떼낸다.


    진영 난 그저 하나의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에요.

    선택은 그들이 한 거라구요.


    - 두 사람의 사진이 오려진 채로 고객1, 2 파일란에 붙여진다.

    - 뭔가 떨떠름한 표정의 대범. 통장에 들어온 돈과 파일에 붙여진 사진들을 번갈아 보며 애써 심란함을 떨쳐버린다.


    진영의 집 앞 / N


    - 진영의 차가 와서 서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하진이 집에서 나온다.


    진영 (기분 좋아) 우리딸~ 엄마 오늘 대개 기분 좋다. (하는데)


    - 태하가 뒤이어 나온다.


    진영 (태하 보지 않고 하진 향해) 어디 가?

    태하 (하진의 눈치 보며)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진영 (그제야 가방에서 휴대폰 꺼내면 전원이 꺼졌다)

    태하 (작게) 오늘.. 잊은 거야?

    하진 괜찮아. 엄마한테는 기대감 제로니까. (차로 가는)

    진영 저건 말을 해도..

    태하 (진영에게 다가와) 하진이 생일이잖아.

    진영 (낭패감에 버럭) 왜 진작 얘길 안 해! (차로 가며) 하진아~~


    패밀리 레스토랑 / N


    - 메뉴판을 보고 있는 진영, 태하, 하진.


    하진 난 베이비 백립하고,

    진영 그거 먹을 것도 없어 생일인데 좋은 거 먹어. 엄마 간만에 실력 발 휘 했거든요. 여기요 스테이크세트 주시고요, 스프는 브로콜리,

    하진 나 브로콜리 싫어.

    진영 몸에 좋은 거야. (메뉴판 가리키며) 이거랑 이것도 주세요.


    - 뾰루퉁해서 메뉴판을 놓는 하진. 태하는 진즉에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하진 맨날 엄마 맘대로.

    진영 엄마야. 엄마가 좋은 거 주지. 안 좋은 거 주겠어?

    하진 아빤 내가 좋아하는 걸 해줘.

    진영 (욱하지만 참고) 손을 안 씻었네. 얼른 갔다 올게. (일어나서 나가는)


    동 화장실 / N


    - 들어와서 신경질적으로 물을 켜는 진영. 물이 옷에 확 튄다.


    진영 (신경질적으로 얼른 끄고) 나쁜 기집애, 그럼 둘이 살든가..

    (하다 거울 보며) 아니지, 누구 좋으라고?


    - 전투적으로 손을 씻는 진영.


    동 레스토랑 일각 / N


    - 화장실에서 나오던 진영. 태하가 하진과 뭔가 얘기하고 있고, 하진이 수줍게 웃는다. 어쩐지 소외감이 느껴지는 진영.

    - 그러다 다른 일각에서 어린 아이(7세 정도)의 생일 축하 모습을 본다. 아이는 고깔을 쓰고 마냥 즐거워하고, 직원들이 노래를 불러주는 분위기다.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는 진영.


    (cut to)

    - 진영의 가족이 있는 테이블. 음식이 하나, 둘 나오자 진영이 어딘가로 사인을 준다. 갑자기 요란해지는 레스토랑 안. 직원들 악기를 연주하며 진영의 테이블로 케잌을 가지고 온다. 놀라는 하진과 태하.


    진영 놀랐지? 엄마가 준비했다~

    하진 (당황하며 어딘가를 본다) ..

    진영 (고깔을 넘겨받아 하진에게 씌워주며) 우리 딸 생일 축하해.

    하진 (질색하며) 됐어. 이런 거 안해.

    진영 왜~? (억지로 씌우며) 애들 다 하던데.


    - 터지는 폭죽, 하진의 고깔에 덕지덕지 붙는다. 하진에게 케잌 생크림을 얼굴에 살짝 묻히며 장난까지 치는 진영. 분위기를 풀기 위해 좀 더 요란하게 웃는다.


    하진 (벗어 던지며) 내가 애야?! 뭐든지 엄마 맘대로.

    엄마 같은 사람하고 사는 아빠가 제일 불쌍해.

    태하 류하진!


    - 연주를 멈춘 레스토랑 직원들, 눈치 보면서 슬그머니 빠지고.. 진영 무안하고 화가 치민다. 하진이 던진 고깔을 주워 하진의 등짝을 있는 힘껏 내리친다.

    -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진영의 테이블 쪽을 쳐다보고, 진영을 말리는 태하.

    - 하진, 맞은편을 보더니 눈물 뚝 흘리며 밖으로 나가버린다.

    -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주저앉는 진영. 태하, 길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린다.


    태하 당신 맞은편에 체크 무늬 입은 남자애 보여?


    - 진영,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맞은 편 보면 하진이 또래의 남자애가 진영을 보다가 얼른 시선 피한다.


    태하 하진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앤가봐. (진영의 손에 든 고깔을 보며) 그거 쓰는 게 창피하게 느껴졌을지도 몰라. 그럴 나이잖아 하진이..

    진영 (정말.. 절망적이다) ..

    태하 하진이한테 신경을 더 쓰는 게,

    진영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게 뭔 줄 알아?

    상처는 내가 받고 내가 제일 아픈데 난 나쁜 엄마라는 거야.

    태하 하진이한테는 내가 말할게. 우리 그만하자.

    진영 싫어!

    태하 너만 더 힘들어져.

    진영 그 생각, 좀 더 일찍 하지. 상처주기 전에 하지 그랬어.


    - 일어나 나가는 진영. 덩그러니 남은 태하가 케익에 꽂힌 촛불을 본다. 촛불이 12살로 꽂혀 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남은 성냥개비 하나를 마저 꽂는 태하.


    태하 해피버스데이 우리 딸.



    진영의 집 거실 / N


    - 각 방들이 닫혀 있다. 또 다시 돌아가고 있는 영화.

    - 진영이 맥주 캔을 손에 든 채 영화를 보고 있지만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진영의 표정. 휴대폰이 울린다. DVD대여점이다.


    진영 (힘없이 받고) 네..

    대여점 주인(E) (눈치 없이 밝게)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비랜듭니다.

    반납일이 지나서 전화 드렸어요.

    진영 이봐요.

    대여점 주인(E) 네, 고객님~

    진영 내가 슬픈 영화 싫다고 그랬잖아요.

    고객의 요구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예요?!

    대여점 주인(E) 그건 슬픈 영화가 아닌..

    진영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 듯)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야지..

    왜 사람 마음을 맘대로 오해하고 그러냐구요.. 정말 속상하게..


    - 다리에 얼굴을 묻고 작게 흔들리는 진영의 어깨.


    대범의 사무실 / D


    - 말라비틀어진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대범. 진영이 쾡한 얼굴로 들어온다.


    대범 (냄새를 맡으며) 누가 보면 술상무라도 시키는 줄 알겠어요.

    무슨 술을 매일 밤 전투적으로 마십니까?

    진영 원래 사는 게 전쟁이에요. 몰랐어요? (하다) 아, 아직 모르겠구나.

    대범 그거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사는 게 전쟁인 것도 전쟁이 비극인 것도 너무 잘 알죠.

    진영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 될까봐 결혼 안했어요?

    대범 주인공, 이런 거 아주 질색입니다. 드라마 봐요.

    기억상실에 남편 바람에 계모 구박까지.. 그게 어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입니까. 아무 일도 겪지 않고 주인공 맞장구만 쳐주고 사 는 조연급 인생이 딱이죠.

    진영 황변 같은 사람을 요즘 애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대범 ?

    진영 루-저.

    대범 (어깨 으쓱) 뭐, 그럴지도..

    그래서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계신 오실장님은 뭡니까?

    진영 ?

    대범 기억상실, 계모 구박은 아닌 거 같고.. 남편 바람?

    진영 (뜨끔, 말 돌리며) 말라 비틀어졌구만 물 줘서 뭐해요?

    대범 혹시 압니까. 기적같이 살아날지.


    - 열심히 물을 주는 대범을 못마땅하게 보는 진영. 그 때, 진영의 휴대폰 울린다.


    진영 (받고) 오진영입니다.. 주애씨? (의기양양해지는 표정)

    대범 (보는) ?


    주애의 집 마당 / D


    - 전화하는 주애. 마당에 여행 가방이 두어개 서 있다.


    주애 좀 있으면 남편이 올 거예요. 그 전에 가려구요.

    완벽히 정리될 때까지 그이.. 안 보게 해 주세요.


    - 깔끔하게 정리정돈 된 집을 눈으로 훑는 주애.


    (cut to)

    - 열린 대문으로 동일의 차가 와 서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후 들어오는 동일.


    동일 문은 죄다 열어제끼고 뭐하노.


    - 주애가 서 있던 자리에 진영이 서 있다.


    진영 김동일씨 오랜만이에요.

    동일 누군교?

    진영 (미소) 기억 못 하시는 게 오히려 다행이겠네요.

    신주애씨 이혼플래너 오진영입니다.

    동일 지금.. 이혼이라고 했습니꺼?

    진영 법적인 부분은 따로 진행될 거구요, 모든 의사소통은 저를 통해주세 요. 이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부터 감정적인 표출까지 주애씨가 아 닌 저에게요!

    동일 (어이없다) 하- (안으로 들어가며) 니 빨리 안 나오나?!


    - 부엌부터 방문 여기저기를 열고 다니는 동일. 그러다가 주애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 울리는 벨소리. 동일, 그럼 그렇지 하는데, 진영의 손에 있다.

    - 동일에게 휴대폰을 들어 보이는 진영. 동일, 당혹스러움이 역력하다.

    - 그 때, 울리는 진영의 휴대폰. 대범이다. 왜 하필 이때..


    진영 (받고 작게) 왜요? 나 지금 바빠요.


    대범의 사무실 / D


    - 순용이 소파에 앉아 엉엉 울고 있고, 그 앞에는 몇 장의 사진들이 놓여 있다. 서라가 남자들과 만나는 사진들이다. 대범, 난감하게 사진들을 들어서 본다.


    대범 (작게) 이거 당신 짓입니까?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될 수 있다구요!


    주애의 집 마당 / D


    주애 그건 나중 문제죠. 마음의 결심을 해야 법적으로도 갈 거 아니에요! 금방 갈 테니까 계약서 작성하고 진정시켜.. (하는데)


    - 쏟아지는 물벼락. 진영이 쫄딱 젖는다.


    동일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그 사람 델따 노이소.

    진영 (손수건 꺼내 닦는다)

    동일 순진한 사람 꼬셔가 이게 사람이 할 짓이고?!

    진영 동일씨한테 주애씨는 뭔가요? 그냥 아무 말 없이 종갓집 종부 노릇 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 아니에요?

    동일 말이면 단 줄 아나?!

    진영 식장에 들어갈 때까지 주애씨는 당신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모르겠 다고 했어요. 10년이 넘도록 당신은 주애씨에게 당신 마음을 보여주 지도 않고, 당신 행동을 설득하지도 않았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10년 넘게 유기한 거라구요.

    동일 게우 그걸로다 갈라서자 캅니까?

    진영 주애씨가 지친 이유는 아셔야할 거 같아서요.


    진영의 달리는 차 안 / D


    - 운전하는 진영. 물에 젖어 먹통인 휴대폰을 옆으로 던진다. 마음이 편치 않다.


    태하(E) 당신한테 우린 뭐야?


    진영의 집 거실 / 5년 전 / N


    - 퇴근해서 들어온 듯한 진영. 지친 모습이다. 진영의 시선에 나들이 복장으로 소파에서 잠이 든 하진이 들어온다. 그 옆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태하가 원망스럽게 진영을 보고 있다.


    태하 금방 온다고 기다리게 하고선 하진이 여태 기다리다 방금 잠들었어.

    진영 (그제야 생각난 듯) 미안해. 갑자기 회사에 일이.. 당신도 알잖아.

    최교수라고 아니 교수도 아닌데 교수 사칭해서 여자쪽에서 컴플레 인 들어오고,

    태하 (말 끊고) 이번이 벌써 3번째야. 애랑 아예 약속을 말든가.

    진영 나도 힘들어. 그렇다고 일 그만둘 순 없잖아.

    이번 일 잘 마무리하고 싶어.

    태하 너가 좋아하는 일 그만두게 하고 싶진 않아. 그런데..

    (차갑게) 우리도 지친다는 것만 알아줘.


    진영의 달리는 차 안 (54와 동) / D


    - 심란한 표정으로 운전하는 진영. 떨쳐내는 듯 속도를 내는 진영.


    ‘트루웨딩’ 건물 로비 / N


    - 들어오는 진영. 관리인 진영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대범을 보고 손을 흔드려는 찰나, 누군가 진영의 얼굴 앞에 확 나타난다. 서라다.

    다짜고짜 진영의 뺨을 때리는 서라. 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대범.


    서라 이건 3개월 전 진 빚이구요. (한번 더 세게 다른 뺨을 때린다) 이건 이번 거예요. 더는 내 결혼에 대해서 간섭하지 마세요. (가려는데)

    진영 난! 내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3개월 전에는 철없는 딸래미 죽기 전에 시집보내겠다고 찾아온 당 신 부모님이 내 고객이었고, 지금은 자기 마음 다치는 것도 모르고 당신만 보고 있는 정순용씨가 내 고객이에요.


    -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진영을 쏘아보다 가는 서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진영은 눈물도 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서 있다.


    포장마차 / N


    - 한잔 따라 원샷, 두 번째도, 세 잔까지 마시려 하자 대범이 진영의 잔을 뺏는다.


    대범 그만해요. 들이부으려고 그래요?

    진영 나보고 지금 이것도 하지 말란 거예요?!

    대범 아니,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살살.. 천천히 가자구요.

    진영 천천히 가면 뭐가 달라져요? 이미 난 상처가 사라지기라도 하나..

    대범 그렇다고 달리는 게 상책은 아니죠.

    오실장님이면 저 상황에서 달리고 싶겠어요?

    진영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지만) .. 그래도 달려야죠.

    가만 있는다고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니까.

    그래야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으니까.

    대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진영 (시선 피하며) .. 뻔한 거 아니에요.

    대범 사람 일에 뻔한 게 어딨습니까. 어쩐지 난..

    더 큰 상처를 주는 거 같아서 양심이 계속 간질간질해요.

    진영 (벌떡 일어나며) 사람들이 매달려서 도장 찍게 만드는 건 괜찮고,

    매달리지도 못하는 사람들 일으켜 세워서 도장 찍게 만드는 건

    양심에 찔리기라도 한 거예요? 무능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어설픈 비겁자셨네. 당신 양심은 어디 있는지나 찾아보세요. 무능한 머린지 비겁한 가슴인지!


    - 가버리는 진영. 대범, 진영이 따라 놓은 술잔을 쓰게 들이켠다.


    진영의 집 앞 길 / N


    - 터벅터벅 걸어오는 진영. 진영의 집은 불이 꺼져 있다. 대문에 걸린 문패. 류태하, 오진영 두 사람의 이름이 써 있다.


    <플래쉬 백 / 13년 전>

    - 태하가 문패를 달고 있고, 그 뒤로 만삭의 진영이 서 있다.


    진영 좀 더 왼쪽으로 아니아니 오른쪽 아니 너무 갔잖아.

    태하 (돌아보고) 너무하는 거 아냐? 벌써 30분 째야.

    진영 히- 좋아서.

    태하 ?

    진영 우리 집인 게 좋아서.

    태하 (진영을 감싸며) 우리..집.

    진영 (아기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는 듯) 하진이도 좋대.

    태하 하진이?

    진영 (문패 이름에 시선을 두고) 우리 애기. 태하, 진영. 하진!

    태하 하진.. 류하진.. 좋은데?


    -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행복하게 보이고..


    - 문패만 남겨진 채 진영은 보이지 않는다.


    까페 / D


    - 진영이 들어와 두리번거리다. 창가에 있는 동일을 보고 가서 앉는 진영.


    동일 (놀라서) 그 사람한테 연락한긴데..

    진영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심적인 부담을 최소화하는 게 제가 나서는 이 유라서요, 주애씨 대신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동일 (자조적인 웃음) 이 사람, 이리 독했나..

    진영 보내드린 이혼 사유가 혹시 미흡하다고 생각하시면,

    동일 어데예 차고도 넘친다 아입니꺼.

    진영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게 더 이상하다 물컵을 멀리 밀어놓으며)

    자녀분이 없으신 관계로 절차는 좀 더 간단할 수 있을 거 같구요,

    재판까지는 안 가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동일 (허한 눈으로 창밖을 본다)

    진영 (더 설명을 해야 하나) ..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면,

    동일 하입시다.

    진영 (잘 못 들었나) 네?

    동일 갈라서라꼬 나오 거 아인교? 그라입시다!

    진영 이혼에 동의하신다는..??

    동일 (차분하게 동의하는 눈빛)

    진영 !!


    대범의 사무실 / D


    - 소파에 앉아서 초조하게 진영을 기다리는 주애.


    대범 차라도 드릴까요?

    주애 괜찮아요..


    - 어색해하며 괜히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는 대범. 그러다가 진영의 책상 서랍에서 봉투를 발견한다. 열어보면, 이혼신고서다. 칸칸히 채워져 마지막 싸인란만 비어있다. 심란한 표정으로 이혼신고서를 보는 대범.

    - 그 때, 문 열리면서 진영이 들어온다. 얼른 신고서를 자신의 파일에 넣는 대범.


    진영 (감격에 겨워) 신주애씨!

    주애 ?

    진영 동일씨가 동의했어요.

    대범 진짜요..?!

    진영 (서류 보여주며) 설마 이게 가짜로 보이는 건 아니죠?


    - 동일의 싸인을 보는 주애,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다.


    대범 (서류 보며) 그 양반, 쉽게 보이지 않았는데..

    진영 (서류 뺏으며) 이게 쉬운 걸로 보여요? (주애 향해 표정 바뀌며 오버하듯) 주애씨, 당신은 이제 자윱니다! 저와 같이 해요 제2의 인생 설계!!


    - 덥석 주애의 손을 잡는 진영. 주애 여전히 얼떨떨한 채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건물 1층 로비 / D


    - 출근하는 진영. 관리인 진영을 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만족스럽게 인사를 받으며 가던 진영, 1층에 엘리베이터 선 것을 보고는 서둘러 뛰어간다.


    진영 잠시만요.


    동 엘리베이터 안 / D


    - 미안해하며 엘리베이터에 타는 진영. 그 앞에는 ‘트루웨딩’박대표가 서 있다.


    박대표 이게 누구야. 스카웃 되가신 오실장님이네.

    진영 (떨떠름하게 슬쩍 고개 까닥하고 6층을 누른다)

    박대표 이왕 갈 거 좀 좋은 데로 가지 그랬어.

    거기 매일 빚쟁이 드나들고 아주 시끄럽던데.

    진영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박대표 그렇겠지. 바닥에서 더 내려갈 데가 있을라고.

    진영 (못마땅하지만 참고)

    박대표 (느끼한 눈빛으로 어깨 두드리며) 사람이 좀 밝고 희망찬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힘들면 언제든 연락해. 내가 우리 오실장한테 술 정 도는 얼마든지 사줄 수 있으니까.


    - 꾹꾹 눌러 참는 진영. 그 때, 박대표의 전화벨이 울린다. 집사람 써 있다.


    박대표 (받고, 퉁명스럽다) 왜?.. 왜 남의 주머니는 뒤지나?

    (하다 진영 신경 쓰며 작게) 접대야 접대. 남편 사업하는데 여편네가 아침부터 가타부타, 끊어!


    - 6층, 엘리베이터 선다. 내리려던 진영, 박대표를 향해 돌아보며 미소 띈 얼굴로,


    진영 (명함 건네며) 사모님께 전해 주세요. 혹시 살기 힘드시면 연락 주시 라고. 대표님 봐서 특별히 20%할인 해 드릴게요.


    - 정중하게 인사하고 내리는 진영. 박대표 명함을 보면, ‘행복설계사무소’

    -이혼상담환영- 문구가 써 있는 명함이다. 얼굴 일그러지는 박대표.


    대범의 사무실 / D


    - 문 열리고 들어오는 진영.


    진영 하여튼 정을 줄 수가 없다니까.

    내가 조만간 당신 와이프 우리 사무실 찾는다에 백원 건다!

    대범(E) 오실장님..

    진영 똥변 아니 황변도 전에 봤죠?

    박대표라고, 진짜 비호감 캐릭터 있잖아요.

    대범 여기부터 봐주셔야 겠는데요.


    - 대범의 시선을 따라가면 좁은 사무실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진영 (대범 향해) 누구..?

    여고객1 오실장님? 저 기억 안 나세요? 300번째 커플이라고 울 신랑한테

    스파르타 속옷까지 선물해주셨잖아요. 스파르타는커녕 스파 가기도 부끄러운 몸이었지만요.

    진영 !

    남고객2 (벌떡 일어나며) 그러지 않아도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으니까 외모만 신경써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드렸는데 그럴 수 있습니까?!

    진영 (이 사람은 누군가) ??

    남고객2 이백 칠십 두 번쨀겁니다.

    진영 (생각하다) 아.. 그 정도면 꽤 미인이실텐데.

    남고객2 앞에 두자가 붙어야죠. 성형미인. 그것도 중.독.!

    진영 !!


    -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그런 시댁이 어딨냐’ ‘내가 데릴사위냐’‘남편이 의처증에 강박증 환자다’ ‘돈먹는 하마라고 들어봤냐’ 등등

    - 멍한 진영을 끌고 나가는 대범.


    동 사무실 밖 / D


    - 진영을 벽에 밀어붙이고 얼굴 들이미는 대범.


    대범 대체 저 사람들 뭡니까?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진영 (혼잣말처럼) 그냥 한 번 보내 본 건데, 신기하네..

    대범 뭘 보냈다는 거예요?

    진영 이메일요.

    대범 ?


    고객 몽타주


    # 66-1. 가정집 거실


    - 고객1로 보이는 여자가 집안청소를 하고 있다. 무거운 화분도 들어서 옮기고, 벽에 못을 박고, 걸레질까지 끝도 없이 움직이는 여자..


    남편 여보 미안해 힘들지..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


    - 남편의 모습 보이면, 소파 위에서 300의 스파르타 트렁크를 걸치고 찜질팩으로 허리를 감싼 채 누워있는 남편. 한 눈에 봐도 여리여리 골골할 거 같다. 억지웃음 지으며 전투적으로 걸레질하는 여자.

    - 그 때 여자의 휴대폰이 울리고 메일 알람이 뜬다.


    진영(E) 결혼하고 여성성을 잊어버리셨다구요?


    - 놀라는 여자,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건가 주변을 둘러본다.


    # 66-2. 가정집 안방


    - 씻고 나오는 고객2로 보이는 남자. 침대에 누워있는 와이프를 향해 돌진하는데 돌아서는 와이프. 마이클잭슨 성형 후처럼 얼굴의 반쯤을 반창고로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 헉! 놀라서 뒤로 자빠지는 남자.


    아내 며칠만 참아줘. 더 예뻐져서 돌아올게.


    - 김새는 남자.. 역시 남자에게도 메일 수신 알람이 뜨고..


    진영(E) 매일매일 다른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기도 하구요,

    # 66-3. 시골집 마루


    - 한상가득 차려진 음식. 시부모, 시누이, 아이들까지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하고 있다.


    시모 차린 게 없어가 우야노. 내 강아지들 마이 무라~

    시누이 엄마, 근데 뭐가 빠진 거 같다.

    남편 니는 항상 글더라. 차린 기 이리 많은데 모가 빠졌다 그르나.

    시누이 아이다. 모가 허전하다.

    아이 (남편 향해) 근데 아빠, 엄마는?


    - 그제야 일제히 시선을 돌리면 며느리로 보이는 여자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전을 부치고 있다. 불쌍한 표정으로 드디어 자신을 찾는건가 하는 표정 지어 보이는데, 어색해하며 시선 돌리는 시부모.


    시모 (손주들 향해) 마이 무라.


    - 진영의 메일을 다시 열어보며 망설이는 며느리.


    진영(E) 투명인간 놀이에 지칠대로 지치셨다면 망설이지 마시고 연락주세요.


    # 66-4. 백화점


    - 쇼핑에 빠진 모녀.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뒤로 따라오는 럭셔리한 유모차에 아이 역시 아주 편해 보인다. 하지만 그 유모차를 미는 남자, 그 집 사위다. 양 어깨에는 쇼핑백들을 잔뜩 메고 힘들게 유모차를 밀며 오는 남자.


    장모 권서방, 얼른 오게.


    - 순간, 걸음 멈추고 쇼핑백을 내던진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장모와 아내.


    진영(E) 당신은 행복해 질 권리가 충분하니까요.


    사위 (버럭) 나 돌아갈래~~~~


    대범의 사무실 앞 / D


    - 기가 차다는 대범.


    대범 당신이 맺어준 커플 모두한테 메일을 보냈단 말예요?

    진영 미끼 던질 때 물고기 가려서 던지는 거 아니잖아요,

    무는 게 임잔 거죠.

    대범 저 사람들 다 이혼을 시키겠다구요?

    진영 이제부터 옥석을 가려봐야죠.


    - 문을 여는 진영.


    진영 자자, 오신 순서대로 앉아주세요.


    - 대범, 따라 들어가지 못한 채로 난감하게 얼굴만 쓸어내린다.


    대범의 사무실 / D


    - 길게 늘어선 줄. 고객들과 상담하고 있는 진영, 그들의 하소연에 적극적으로 동감하며 계약서를 작성한다.

    - 그 옆에서 법률 상담을 하던 대범, 그런 진영을 불안하게 본다.


    까페 / D


    - 조금 야윈 듯한 주애가 차를 앞에 두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앉아있다.

    - 들어오는 진영, 주애를 발견하고는 밝은 얼굴로 가서 앉는다.


    진영 많이 기다렸어?

    주애 저도 지금 막 왔어요.

    진영 갑자기 고객들이 몰려서 상담 좀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네.

    주애 하는 일이 잘 되시나 봐요.

    진영 (오버해서) 잘되고 말고 할 게 뭐있어 책임감으로 하는 거지.

    우린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잖아. 그 행복찾기에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보람될 거 같아.

    주애 실장님은, 행복하세요?

    진영 (순간 당황하지만 이내 웃으며) 그럼~ 자기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서류 접수 언제쯤 할까? 동일씨 도장까지 받았으니까 바로 하면 되 는데.

    주애 잠시만..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진영 (보다) 맘 결정되면 알려줘.

    주애 네.. 근데 오늘은 왜..?

    진영 갈 데가 있거든.

    주애 ??


    요리교실 강의실 앞 복도 / D


    - 창문 너머로 한식을 배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복도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진영과 주애. 주애가 의아한 표정으로 진영을 돌아본다.


    주애 이제 상 차릴 일도 없는데요?

    진영 무슨 소리, 다시 상 차리겠다고 하면 내가 말릴 건데.

    주애 그럼..

    진영 배우는 쪽 말고 앞에 선 사람을 보라고.

    주애씨 그 솜씨 아끼면 뭐해. 종갓집에서 몸으로 부딪쳐가며 배운 거잖아. 이제 드디어 그걸 써먹을 때가 온 거다 이거지.

    주애 내가 어떻게..

    진영 그렇게 힘든 결혼생활도 버틴 사람이야 주애씬.

    요즘 요리가 트랜드잖아. 하늘이 만들어 준 기회 같지 않아?


    - 신나서 요리하는 사람들을 보는 진영. 하지만 주애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가 않다.


    진영의 집 앞 / N


    - 진영의 차가 와 서고, 진영 내려서 들어가려는데 나오던 하진과 마주친다.


    진영 (여전히 어색해하며) 어디..가?

    하진 학원.

    진영 아..

    하진 (가려는데)

    진영 학원 재끼고, 엄마랑 놀래?

    하진 (보는)


    찜질방 사우나실 / N


    - 양머리 수건을 말고 앉아있는 진영과 하진. 하진은 평온한 데 비해 진영은 답답해 죽겠다.


    진영 안 답답해?

    하진 좋은데.

    진영 무슨 어린애가 이런 걸 좋아하니?

    하진 어린애 아니라고 했잖아.

    진영 (아차 눈치 보는)

    하진 비오면 여기저기 쑤시다며? 엄마야말로 필요한 거 아냐?

    진영 정도껏이지. 살이 다 익을 거 같아.

    하진 뜨끈하고 좋은데..

    진영 (더 이상 못 참겠다) 니 엄마 노릇도 좋지만, 살고 봐야겠다.


    - 벌떡 일어나 후다닥 나가는 진영. 그런 진영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 흔드는 하진.


    찜질방 홀 / N


    - 식혜를 벌컥벌컥 마시는 진영. 하진은 구운 계란을 먹고 있다.


    진영 (내려놓고) 아, 살 거 같다.

    하진 (깐 계란을 진영에게 내민다)

    진영 (감동하며) 내 딸..

    하진 (쑥스러운 듯 시선피하며) 오버 좀 하지마.

    진영 감정은 표현하라고 있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한테도 당당하게 말해.

    촌스럽게 혼자 끙끙 앓는 거 하지 말고.

    하진 아빠한테 무슨 얘기 들었어?

    진영 아니 뭐.. 앞으로 누굴 만나든 그렇게 하라고.

    하진 근데 엄마, 직장 옮겼어?

    진영 어떻게.. 알았어?

    하진 부모 직업 써가는 거 있었는데 아빠가 커플매니저 아니라고 하던데.

    진영 흥, 그 인간은 어떻게 알았대니.

    하진 그럼 이제 뭐하는 건데?

    진영 음.. 뭐라고 해야 이해가 쉬울까.. 어른들이 결혼해서 살다가 성격차 이나 다른 여러 가지 문제로 결혼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 어. 그러면 법적으로 그 관계를 정리하는데,

    하진 이혼? 쉽게 말하면 될 걸.

    진영 (뻘쭘)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야.

    하진 이혼시키는 건 나쁜 거 아냐?

    진영 (찔리지만) 얘는 누가 잘 사는 사람들 갈라놓는대?

    살다가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정리해야할 때, 서로한테 상처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엄마가 나서서 도와주는 거지. (의기양양 구운 계란 을 하나 입에 넣는다)

    하진 근데 왜.. 아빠랑은 이혼 안 해?

    진영 ! (갑자기 정지된 듯 계란을 문 채 하진을 본다)

    하진 아빠한테 다른 여자가 생긴 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냐?

    진영 (계란이 목에 걸린 듯 켁켁댄다)

    하진 (진영에게 식혜를 건네는)

    진영 (마시고) .. 언제부터.. 알았어?

    하진 작년 아빠 생일 날, 엄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왔을 때부터.

    진영 (시선 피하는) 넌.. 그런데도 괜찮아?

    하진 .. 엄마, 아빠 문젠데 뭐. (구운 계란 입에 가져가는) 내 친구들도 다 그래. 우리도 알 거 다 아는데 엄마아빠들만 쉬쉬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던데, 아빠들은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 얼굴 잠깐 보고, 엄마들은 늘 원수 보듯 하고..

    진영 (서운함을 감추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언성 높아지며)

    걔들이야 지 아빠 일주일에 한 번 본다고 하지만 니 아빤 안 그렇 잖아. 아빠 없으면 못산다고 할 때 언제고, 그런데도 괜찮아?

    하진 (눈만 껌벅이는)

    진영 거봐. 안 되겠지? 그래서 엄마도 쉽게 결정 못하는 거야.

    하진 엄마, 나랑 살 거야? 난 당연히 아빠랑 사는 걸로 생각했는데..

    진영 !!


    - 시선 피하며 식혜를 마시는 하진. 진영, 마지막 끈마저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국밥집 / D


    - 대범과 식사중인 진영. 진영, 뚝배기 안에서 헛수저질만 연거푸하고 있다.


    대범 여기 맛있는 데라고 노래 불렀잖아요.

    진영 소화가 안 돼서 그래요.

    대범 고기뼈까지 소화시킬 거 같은 사람이 왜 그래요?

    진영 나도 그랬음 좋겠네요. 고기뼈도 소화시키고 뚝배기도 소화시키고, 쇠꼬챙이도 소화시키고.. (가슴을 쓸며) 이놈의 쇠꼬챙이가 계속해서 콕콕 찌르네.

    대범 (정신없이 먹으며) 어제 공포영화 보다 잤어요?

    진영 사는 게 공포라니까요.

    대범 (진영 살피며) 저기.. 내가 보려고 한 게 아니라..

    진영 ?


    - 진영의 휴대폰이 울린다.


    진영 (보고) 네, 과장님.. 아.. 오늘이었죠.. 아뇨, 지금 갈 거예요. 네-

    (전화 끊고 서둘러 물건 챙기며)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건지..

    대범 왜요?

    진영 오늘 고객들 건강 검진 예약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아, 아까 무슨 얘기하려고 했어요?

    대범 아뇨. 쉬엄쉬엄 일 하라고요.

    진영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일을 하든 쉬든 확실히 해야지.

    이렇게 흐리멍텅하니까 관리인 눈치 보고 출근하지. (일어나며)

    나 가요. 놀지 말고 일해요!


    - 가는 진영을 어이없게 보다 피식 웃는 대범. 밥이 그대로 남은 거 보고 그래도 걱정이 된다.


    종합 병원 로비 / D


    - 병원원무과 관계자의 얼굴이 보인다.


    병원관계자 예수천국 불신지옥보다 더 어리석은 믿음이 뭔 줄 아십니까?

    바로 내 몸이 건강하다고 믿는 겁니다.


    - 쭈르륵 앉아서 경청하는 진영과 진영의 고객들. 주애와 순용도 그 사이에 있다.


    병원관계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 그제야 아 잘못됐구나 깨닫지만 그 땐 이미 늦었다는 거! 지금 종합검진을 받으러 온 여러분들은 정말 현 명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진영 (일어나서 고객들 향해) 그 동안 전쟁 치르느라 다들 소홀하셨을 거 같아서 이 자리를 마련했어요. 더욱 심기일전해서 승리하자구요.


    - 상기된 얼굴로 검진표를 들고 이동하는 사람들.


    병원관계자 (진영에게 다가가) 근데..무슨 전쟁이에요?

    진영 (은밀하게) 핵전쟁보다 더 끔찍한 전쟁이요. 알면 다쳐요.

    병원관계자 ??


    - 진영, 사람들이 검사실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속이 계속 답답한지 가슴을 툭툭 쳐 본다.


    병원관계자 같이 안 받으세요?

    진영 (손사래 치며) 에이, 저는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계속 가슴 치는)


    - 그 때, 진영의 휴대폰이 울리고 받으면,


    진영 네 오진영입니다. 김동일씨?


    진영의 차 안 + 도로 / D


    - 진영 운전하고 있고, 옆 좌석에는 주애가 있다.


    진영 검진 받아서 피곤할텐데.. 혼자 가도 된다니까.

    주애 제 짐이니까요. 제가 챙기는 게 편해요.

    진영 동일씬 회사에 일이 있어서 집에 없을 거야. 확인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주애 (서운함을 감추며) 네..


    - 주애에게 신경 쓰며 좀 더 속력을 내는 진영.


    고택 마당 / D


    - 주애가 나왔을 때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집 안. 주애의 물건을 담은 박스들이 마루 한켠에 쌓여 있다.


    진영 (애써 밝게) 주애씨 온다고 사람 불러서 치웠나보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센 척하는데 뭐 있다니까.

    주애 그 사람이 치웠을 거예요.

    진영 ?

    주애 어머니 몰래 저 많이 도와줬거든요.

    진영 (의외다)


    - 진영, 박스를 열어본다. 주애의 책들과 앨범, 손때 묻은 그릇들도 있다.


    진영 (그릇 들어보며) 이건 진짜 오래 썼나보다.

    주애 어머님께서 시집 올 때 가져오신 거래요.

    진영 아..

    주애 그래서 더 애틋하셨나 봐요.

    진영 시어머니들도 며느리 때가 있었을 테니까.

    주애 (그릇 만져보며 아련하게) 첫 제사 때 그릇 깨고 어머니께 엄청 혼 났는데,, 어쩌다보니 저도 이 그릇들을 좋아하게 됐어요. 결국 저한 테 주고 가셨죠.


    - 감정을 떨쳐내려는 듯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는 주애.

    - 진영, 그릇 아래 놓인 한지로 만들어진 편지봉투를 발견한다. 부엌 쪽을 보다가 편지를 꺼내 보는 진영. 주애의 시어머니가 쓴 편지다.


    시어머니(E) 사랑하는 내 며느리 주애야, 좀 더 좋은 걸 줘야 하는데 아무리 찾 아봐도 마땅한 게 없구나.


    (cut to)

    - 자신의 손때가 묻어있는 부엌 곳곳을 훑어보는 주애.


    시어머니(E) 밤새 집안 살림을 전부 꺼내 고민하다 널 닮은 이 그릇들을 찾아냈 다. 내게 너무 소중한 거라는 게 너와 같고, 너무 아까워 자주 만져 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것도 너를 닮은 것 같구나.


    (cut to)

    - 정갈한 집안 곳곳, 안방, 작은방, 서재방, 마당, 수돗가, 꽃밭..


    시어머니(E) 손주를 포기하는 내 마음이 이런데, 자식 품에 안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니 마음은 오죽할까. 자식 그렇게 낳은 이 에미 를 탓해다오. 이 순간에도 너보다 흠 있는 내 자식 혼자 남겨질까 걱정하는 이 못난 어미를 용서해다오.


    - 먹먹해지는 진영. 편지를 그릇위로 놓아두고 부엌 쪽으로 향한다.

    - 부엌 한켠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주애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인다.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영.


    진영의 집 주방 / N


    - 소화제를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는 진영.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 진동소리 들린다. 남편 태하의 전화다. 최희주라는 이름이 떠 있다. 받을까말까 갈등하는 진영. 그 때, 태하가 주방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전화 받지 않는다.


    태하 .. (식탁 위에 놓인 약봉지 보고는) 어디 아픈 거야?

    진영 (조소 스치며 나가려는데)

    태하 언제까지 이럴 거니? 서로에게 더 큰 상처 주기 전에.. 그만 하자.

    진영 왜? 그 애가 더 못 기다리겠대?

    태하 너하고 내 문제야.

    진영 걔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태하 이러는 거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든 거잖아.

    진영 (감정적으로) 생각해 주는 척 좀 하지 마!

    태하 ...

    진영 그리고 착각했나본데, 당신은 지금 기다리는 게 아니라 벌을 받고 있는 거야. (들어가는)


    - 식탁 위에서 계속 울려대는 태하의 휴대폰. 태하 받지 못한다.


    동 안방 / N


    - 들어와서 문에 기대는 진영. 여전히 가슴에 뭔가 걸려 있는 듯 답답하다.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화장대 위에 놓인 휴대폰에서 알람이 운다. 진영이 확인하면 ‘내일은 우리 결혼기념일, 잊지말 것!’써 있다.

    - 벽에 걸린 웨딩사진을 보는 진영. 진영과 태하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cut to)

    - 웨딩 액자는 보이지 않지만 벽지에 선명한 액자 자국.


    건물 앞 횡단보도 + 거리 / D


    - 멍하니 생각에 빠진 진영.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그대로 서 있다. 그 때, 진영을 치는 누군가의 손. 트루웨딩의 보라다.


    보라 신호 바꼈어요!


    - 진영, 보라를 보고 웃으며 두 사람 뛰는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가까스로 건넌다.


    (cut to)

    - 보라에게 커피를 건네는 진영.


    보라 (오버액션 취하며) 이게 얼마 만에 얻어먹는 커피냐.

    진영 나 없으니까 커피 사주는 사람도 없지?

    보라 커피만 그런가요, 좋은 일 생겨도 통 크게 쏘는 사람이 없네요.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지만..

    진영 다들 사느라 바빠서 그렇겠지.

    보라 그렇다고 올 해도 잊으시면 안돼요!

    진영 ?

    보라 오늘 실장님 결혼기념일이죠?

    진영 (놀라는) 어떻게.. 알았어?

    보라 결혼하고 한 번도 기억한 적 없다고 작년에 나한테까지 부탁하셨잖 아요. 꼭 알람 울려달라고. (커피 흔들며) 저 커피 값 한 거예요.

    진영 (쓸쓸한 웃음)


    대범의 사무실 / D


    - 두툼해진 고객 명단을 건성으로 넘겨보며 앉아있는 진영.

    - 순용과 전화 통화중인 대범.


    대범 고서라씨한테는 소장 갔을 거구요, 두세 달 안으로 재판 날짜 잡힐 겁니다.. 정순용씨 듣고 계세요? .. 네,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전화 끊고 입맛 다시는) 어떻게 목소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우울해..

    진영 우울하면 안 되죠. 명색이 여기가 행복설계사무손데!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는)

    대범 (흘끔 보고) 약을 먹지 그래요?

    진영 먹었는데도 그러네요.

    대범 감정에 체하면 약도 안 듣죠.

    진영 (대범 보는)

    대범 일하는 것 말고,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요?

    진영 (눈만 껌벅이는)

    대범 음주는 좀 줄여야할 거 같고, 가무? 파티?

    진영 .. 파티?





    호프집 / N


    - 하나로 모이는 맥주잔.

    (E) 건배!


    - 진영과 대범, 그리고 진영의 고객들이 둘러앉아 있다. 주애는 보이지 않는다.


    여고객1 그 인간하고 살면서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이혼 도장 찍으면서 한 번도 안 싸웠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순용 그 싸움을 오실장님이 다 한 거 아닙니까.


    - 여기저기 동의하는 말 들린다.


    진영 (기분 업돼서) 저야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힘든 일 잘 견뎌주셔 서 제가 더 고맙죠. 의기소침하지 말고 그 동안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여서 못 해 본 게 있다면 다 해보시고, 외로움도 당당하게 즐겨주 세요.


    - 여기저기서 박수 쏟아져 나온다.


    대범 (진영 귀에 대고 작게) 이게 파티예요? 일의 연장선이지.

    진영 즐기라니까요. 주애씨는 안 오려나.. (둘러보는)


    (시간 경과)


    - 고객들이 거나하게 취했다.


    여고객1 근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혼도장을 그렇게 쉽게 찍 을 수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진영 저기, 고객님.. 쉽게 찍은 게 아니구요 제가 일주일동안 졸라서,

    여고객1 (듣지 않고 있다) 나 없으면 굶어죽을 거 같던 위인이 글쎄, 마트에 서 장을 보고 있는 거예요.

    진영 거길 찾아가셨어요?!

    여고객1 아니.. 나는 궁금해서..

    진영 (답답하다) 굶어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겠다면서요?

    순용 (소리 나게 잔 내려놓고) 나쁜년..

    진영 (헉! 이 사람은 또 뭔가)

    순용 난 이렇게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우리 허니는 속 편히 잘 살고 있 겠죠? 그럴 거야.. (울 거 같다)

    진영 (애써 웃으며) 저기요~ 우리 다시 한 번 건배할까요?

    순용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

    진영 ?

    순용 외로움을 어떻게 즐깁니까?

    그것도 당당하게 즐기라니, 실장님은 그게 돼요?

    진영 (당황하는)

    여고객1 제가 정리할게요. 순용씨 말은, 실장님께선 이혼에 대한 경험도 없 으시고 하니까 우리 마음을 잘 알기 힘들지 않냐.. 그쵸 순용씨.

    진영 (감정 누르며) 내가 더 뭘 알아야 하는데요?

    대범 오실장님,

    진영 불과 일주일 전이에요. 당신들 마음이 어땠는지, 간절히 원하던 게 뭐였는지 기억 안나요? 다들 집단 치매라도 걸린 거예요?!

    순용 (감정 복받쳐) 네. 기억 안 납니다!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힘들었던 건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우리 서라 얼굴만 떠올라 미치겠다구요!

    진영 (싸늘하게) 구질구질해.

    대범 (말리며) 오실장님,

    진영 똥변도 지금 보고 있잖아요. 다들 좀 쿨해질 수 없어요?!

    그렇게 질척거리니까 질려서 떠나는 거 아니에요!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해지는 자리. 상처받은 표정으로 진영을 보는 사람들. 진영, 더 있지 못하고 자리를 나온다.


    호프집 앞 거리 / N


    - 나오는 진영. 뒤따라 나오는 대범. 진영을 잡는다.


    대범 이렇게 가면 어떡해요?

    진영 (뿌리치며) 더 이상 어떻게 하라구요?! 안 산다고 할 땐 언제고 기껏 행복하게 해줬더니 이제 와서.. 저게 할 소리예요?

    대범 행복이 서류 하나 정리됐다고 바로 찾아집니까?

    진영 그러니까 노력해야죠.

    대범 지금 노력하는 거잖아요. 누구는 푸념으로 누구는 후회로 보이겠지 만 그게 다 노력하는 과정 아닙니까.

    진영 글쎄요. 난 다 패배자들 같아요.

    이것도 저것도 만족 못하는 패배자들. (가려는데)

    대범 푸념도 후회도 못하고 사는 사람은 뭡니까?

    진영 !

    대범 보려고 본 건 아니지만, 당신 서랍에 있는 거, 버리지도 갖다 내지 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당신은 무슨 노력을 하는 건데요?

    진영 난.. 난 복수하는 거예요!

    대범 (실소) 하-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복수를 하시네.

    혹시 복수가 아니라 용서할 빌미를 찾는 건 아니구요? 왜?

    아직 사랑하니까!

    진영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대범 난 몰라요. 루저,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겁나서 결혼도 못하는

    루저 겁쟁이가 하는 충곱니다. 맘 그만 괴롭히고, 어디든 뛰어드세 요. 발을 떼지 못하면 다음이라는 건 영원히 안 오니까.

    진영 (울컥하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돌아서며) 나 내일 월차예요!


    - 대범, 걱정스러운 눈으로 진영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거리 / N


    - 진영이 터덜터덜 걷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누군가와 함께다. 걷다가 걸음을 멈추는 진영.


    진영 (자조적인 웃음) 외로움을 즐기라니.. 병신같은 말 맞네..


    - 진영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 그 속에 진영이 혼자 서 있다.


    진영의 집 앞 / N


    - 불꺼진 집. 진영이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희주(E) 오진영씨.


    - 진영이 돌아보면 불안한 표정의 희주가 서 있다.


    까페 / N


    - 테이블에 놓이는 아이스커피 한잔. 잔뜩 긴장한 얼굴의 희주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다.

    - 진영은 팔짱을 낀 채 평정을 가장하고 희주가 하는 양을 말가니 보고 있다.


    희주 죄송해요. 이렇게 찾아오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차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하다 아차 싶다)

    진영 용건이 뭐에요?

    희주 (금방이라도 울 거 같다) 차장님이 계속 제 전화를 안 받으세요.

    오진영씨하고 얘기 될 때까지 먼저 집을 나오진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냥 기다리자고만.. 그래서 참고 기다렸는데, 이제 전화도 안 받으 시고..

    진영 두 사람 문제잖아요.

    희주 그렇죠.. (이내 불안해져) 설마, 마음이 바뀌신 건 아니겠죠?

    생각만 해도 숨이 안 쉬어져요. 이대로 있다가 죽을 거 같아서 저도 모르게 여길 왔어요..

    진영 (겨우 감정을 참고 있다)


    <인터컷 – 진영의 생각>

    진영 그냥 죽지 그래요?

    희주 !

    진영 당신 살자고 여러 사람한테 총 겨누지 말고 그냥 깨끗하게 그 쪽이 죽어요.

    희주 어떻게 그런 말을..

    진영 (점점 더 흥분해서) 유부남 꼬리쳐서 남의 가정 파탄 낸 나쁜 년한 테 말은 무슨 말?! (앞에 있는 아이스커피 끼얹는다)

    희주 (놀라 소리를 지른다)

    진영 (벌떡 일어나서) 이런 게 너 같은 애들한테는 정답이야!


    - 진영, 정신을 차리면 희주가 진심어린 얼굴로 앉아 있다.


    희주 정말 죄송해요. 어떤 말로도 용서 구할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이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우는)

    진영 (맥이 빠진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 쪽 위로해 줄 여력이 없네요.


    - 일어나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한다. 들키지 않으려고 테이블을 꽉 잡는 진영. 그 때, 희주가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진영 (놀라고 당황해서) 뭐하는 거예요?!

    희주 (간절하게)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제발 차장님을 놔주세요. 부탁드려요.


    - 진영,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스커피잔을 잡아본다. 하지만 끼얹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지는 손.


    진영의 집 거실 / N


    - 들어오는 진영. 태하와 하진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깔깔거리는 두 사람. 진영, 그런 태하를 보고 분노가 솟구친다.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TV를 꺼버리는 진영.


    하진 왜그래.

    진영 엄마가 일하고 들어왔으면 인사를 하는 게 먼저야!

    하진 짜증나. (신경질적으로 문 쾅 닫고 들어간다)

    태하 무슨 일 있었어?

    진영 (싸늘하게 보다) 아니.


    - 안방으로 들어가 문 쾅 닫아버리는 진영.


    동 진영의 집 안방 / N


    -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진영. 그러다 답답한지 벌떡 일어난다. 가슴을 쓸어내리다 가방에서 약을 찾는다. 그 때 울리는 휴대폰. 주애다.


    진영 (전화 받고) 주애씨, 이 시간에 웬일.. (하다 얼굴 굳는)


    동 진영의 집 거실 / N


    - 대충 챙겨 입고 서둘러 나오는 진영. 그 때 하진이 화장실에서 배를 움켜쥐고 나온다.


    하진 엄마, 나 배가 계속 아파.

    진영 서랍에 배탈 약 있어.

    하진 먹었어. 근데..

    진영 하진아 나중에..


    - 뛰어 나가는 진영. 그제야 소리 듣고 서재방에서 나오는 태하.


    태하 (하진 향해) 엄만?

    하진 (고개 절레절레)

    태하 (엉거주춤한 하진 보고)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하진 .. 아냐.. 괜찮아. (들어가는)


    병원 복도 / N


    - 정신없이 걸어오는 진영. 간호사에게 병실을 묻고는 다시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구조대원(E) 혼자 사셨나봐요. 밤새 개짓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옆집서 찾아 갔다 가 발견했데요. 유서도 없고, 저장된 번호도 다 지워져 있고.. 통화 버튼 누르니까 번호 뜨길래 연락드렸습니다.


    주애의 병실 / N


    - 누워있는 주애. 진영이 들어온다. 간호사가 상태를 체크하고 있다.


    간호사 위세척은 끝냈어요. 안정제를 놔 드렸는데 그래도 옆에서 지켜봐 주 세요.


    - 나가는 간호사.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주애를 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진영. 서서히 주애에게 다가간다. 야윈 손을 꼭 잡으며 고개 떨구는 진영.


    주애(E) 저 실패한 거죠?

    진영 괜찮아? 정신 들어?

    주애 기억이라도 사라졌으면 좋았을걸.

    진영 그걸 말이라구 해? 왜 그랬어..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래..

    주애 그러게요 어쩜 이렇게 바보같은지..

    그러니까 평생 그 거짓말에 속았겠죠.

    진영 ?

    주애 어머님까지 그 상처를 안고 가게 했는데.. 저 어떡해요.. 그 사람이 분명히 그랬어요. 아이가 안 생기는 건 자신의 문제라고. 그 원망을 들으면서도.. 저 때문이라는 거.. 정말 몰랐어요.


    - 점점 감정이 복받치는 주애. 결국 오열하고 만다.


    주애의 병실 앞 / N


    -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나오는 진영. 벽에 기댄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미안함이 교차하고 있다.

    - 넋이 나간 듯 어기적 걸어가는 진영. 주애의 말이 계속 따라온다.


    주애(E) 평생 그 짐을 안고 살 생각을 어떻게 해요.

    어머님 가슴에 그 못을 박고..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요..


    -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는 진영. 그 때 넋이 나간 듯한 주애의 모친이 들어온다.

    - 진영, 주애 모친을 보고는 일어나 인사를 한다.


    주애모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우리 주애 어떻게 된 거예요?

    진영 고비는 넘겼고, 지금 막 잠들었어요.

    주애모 (누군가 보는)

    진영 전화 드린 오진영입니다.

    주애모 (진영 멱살 잡으며) 당신이 뭔데 애를 저지경으로 만들어?!

    진영 죄송합니다.

    주애모 죄송하면 다야. 저 꼴 만들려고 잘 사는 애 이혼시킨 거냐고!

    진영 .. 죄송합니다.

    주애모 (울음 섞인) 지 남편 그늘에 있을 땐.. 지 목숨 끊는 그런 모진 애는 아니었어!.. 당신이 저렇게 만든 거야!


    - 원망 섞인 주애모의 울음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진영. 그 때, 주애모의 팔을 잡는 남자의 손, 태하다.


    태하 그만하세요! 이 사람은 도와주려고 한 것뿐입니다.

    선택은 따님이 한 건데 왜 이사람한테 그러십니까?!

    (진영 향해) 바보같이 왜 그러고 있어?!


    - 진영을 끌고 나가는 태하.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주애모.


    주애모 자기도 남편 기둥 붙들고 살면서 남의 기둥을 왜 뽑아놔..

    남의 상처 팔아서 장사하는 건 아니지.. 그럼 안 돼지..


    병원 앞 / N


    - 진영을 데리고 나오는 태하. 걸음 멈추고 진영에게 돌아선다.


    태하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하든가.

    진영 .. 돈?!

    태하 그것도 아니면 나 골탕 먹이려는 거야?

    당신 말대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벌주는 거냐고.

    진영 그렇다면? 그런 거라면 어떡할 건데?

    태하 정신 차려! 대체 왜 이래!

    진영 그래, 나 망가지는 거야.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똑똑히 보라고.

    태하 저 사람들은 무슨 죄니.

    진영 (진짜 믿는건가) 뭐..?

    태하 당신이 못하는 거 저 사람들한테 시키면서, 정말 장사한 거야?


    - 진영이 태하의 뺨을 내려친다. 눈물 그렁해 태하를 보는 진영.


    태하 그래, 차라리 이게 낫겠다. 제발 좀 쏟아내라고!


    - 진영이 참았던 것들이 터져 나오듯 들고 있던 가방으로 있는 힘껏 태하의 가슴을 치기 시작한다. 때리고 또 때리고.. 점점 거세지는 진영의 손길. 이를 악물고 때린다. 그대로 맞고 있는 태하. 미안함에 태하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해진다.

    - 진영의 마음에 서러움이 복받친다. 꼼짝 않고 진영의 모든 것을 받아내는 태하가 그렇게 서러울 수 없다. 그제야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진영. 태하의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확인한 듯 하다.


    대범의 사무실 / D


    - 출근한 대범. 책상 위에 놓인 진영의 메모를 본다.


    진영(E)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했다가 혼나는 중.

    사람 마음 아는 척 그만하고 정말 알아보려구요.

    그 때까지 우리 프로젝트도 잠깐 보류에요.


    - 대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다가 책상 위에 놓인 화분에서 꽃이 핀 것을 발견한다.


    대범 (신기해하며) 죽은 줄 알았더니 죽은 척 한 거구나.

    고놈 아주 이쁜 꽃을 숨기고 있었네.


    - 신나서 물을 주는.


    주애의 집 고택 마당 / D


    - 물을 가득 머금은 마당 꽃밭의 작은 들꽃들..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 나고 진영 들어온다.


    진영 계세요.

    동일(E) 잠시만 계이소.


    - 잠시 후, 부엌에서 서툴게 앞치마를 둘러맨 동일이 허둥대며 나온다. 손에는 절구공이를 들고 있다. 진영과 동일 서로를 보고 당황한다.


    (cut to)

    - 앉아있는 진영 앞에 내려지는 얼음물.


    동일 이 사람은 금새 잘도 내오든데.. 드릴 게 물뺀이 없심더.


    - 진영이 물을 마시면서 동일이 매고 있는 핑크빛 꽃무늬 앞치마를 보며 피식 웃는다. 그제야 앞치마를 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푸는 동일.


    진영 의외의 색깔이 잘 어울리시네요.

    동일 놀리지 마이소.

    진영 주애씨 얘기.. 들으셨어요?

    동일 장모님께서 전화하셨심더.

    진영 놀라..셨죠..?

    동일 (말없이 먼 곳만 본다)

    진영 주애씨한테 그런 선택하게.. 제가 만들었어요.

    동일 .. 지더러 이 사람 꽉 잡으라 칸 것도 실장님이셨심더.

    진영 ..


    <인터컷>

    - 레스토랑. 1회 1씬 동일의 모습이 보인다. 주애가 앉은 자리에 진영이 앉아있다.


    진영 아뇨아뇨. 그건 고기 썰 때 쓰는 나이프구요, 그 옆에 걸 사용하셔 야죠.

    동일 (나이프 들었다놨다 하며) 뭐 이리 어렵나. 시험 보는 게 낫다 카이.

    진영 당연하죠. 세상 제일 힘든 일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인데. 밤새 연습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주애씨 꼭 잡으세요.

    동일씨 옆에 그 분보다 잘 어울리는 분은 없을 테니까.

    동일 (결의를 다지 듯 고기를 썰고)


    - 그 때를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이 되는 동일.


    동일 밤새 외운 거 다 까먹을까봐 으찌나 서둘렀는지..

    이 사람 난중에 그러데예. 뭐 저런 문디가 다 있나 켔다꼬..

    진영 (웃음)

    동일 지두 잘 한 게 모 있겠습니꺼. 평생 문디 노릇 벗지 몬 하고,

    이래 살고 있는 거로..

    진영 그래도 아이 일은.. 힘드셨을 텐데요.

    동일 얼라는 하늘이 하시는 일인데,.

    그 사람 땜에든 내 땜에든 그기 모가 중요합니꺼.


    - 진영,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이혼신고서다.


    진영 이건.. 동일씨한테 드리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동일 (신고서 보는)

    진영 주애씨가 기다려달라고 해서 아직 접수 못 하고 있었어요.

    동일 .. 혹시 깨죽 만들 줄 아십니꺼?

    진영 ?


    동 고택 부엌 / D


    - 난장판이 된 부엌. 여기저기 음식들이 뒹굴고, 집기들이 널부러져 있다.


    동일 세상 쉬운 기 죽인 줄 알았드만 이리 맨들기 어려운 긴지 처음 알 았심더.. 그 사람이 깨죽이라카믄 환장하는데..


    - 하면서 진영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팍팍 보낸다.


    진영 물론이죠. (팔 걷어붙이며) 저한테 맡기세요!


    진영의 차 안 / 대범의 사무실 - 교차로 / D


    -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운전하는 진영. 대범과 통화중이다.


    진영 지금 막 동일씨 만나고 나오는 길이예요.


    (cut to – 대범의 사무실)

    - 화분 보면서 전화하는 대범.


    대범 목소리만 큰 줄 알았더니 간도 크시네. 남편분이 만나는 줍니까?


    (cut to – 차 안)

    진영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잖아요. 동일씨가 원래 마음이 넓어요. 또.. 내가 간만에 실력발휘 좀 했구요.


    (cut to – 대범의 사무실)

    대범 오실장님이 실력 발휘하면 겁나는데..


    (cut to – 차 안)

    진영 있어봐요. 왕년의 실력을 보여줄 테니까.


    - 쭉 뻗은 길을 달려가는 진영의 차.


    주애의 병실 – D


    - 깨죽을 앞에 두고 있는 주애. 죽이 좀 어설퍼 보인다. 그 옆에 선 동일, 무뚝뚝하게 수줍은 채로 서 있다. 주애모는 동일의 손을 절대 놓지 않으려고 꼭 잡고 있다.


    주애모 아이고 세상에.. 자네밖에 없어.


    - 미안한 마음에 차마 수저를 들지 못하는 주애. 보다 못한 동일이 수저로 깨죽을 휘휘 저어 준다.


    동일 (한 수저 떠서 주며) 먹어 보래이.. 모냥은 저리 보이도, 맛은 괘안 을기다..


    - 눈물 그렁해지는 주애.


    동일 묵진 않고 왜 우노..


    - 동일이 감정 감추며 수저를 자기 입으로 넣는데, 헉! 일그러지는 얼굴. 머쓱해서 깨죽 뚜껑을 닫는 동일. 동일을 보며 눈물 그렁한 채 그제야 미소 짓는 주애.


    댄스 연습실 / D


    -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댄스 동호회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룸바를 춘다. 들어오는 진영. 서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 회원을 붙잡고 물어보는 진영. 회원이 탈의실 쪽을 가리킨다.


    동 탈의실 / D


    - 어두운 탈의실. 섹시한 복장을 하고 기운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서라.


    진영(E) 지금쯤 훨훨 날고 있을 줄 알았는데.


    - 서라, 돌아보면 진영이 서 있다. 표정이 싸늘해진다.


    서라 우리 법정에서 보는 거 아니었어요?

    진영 그렇게 싫어하던 결혼생활이 깨졌는데, 지금쯤 행복해야 하는 거 아 니에요?

    서라 네- 아주 해피해요. 지긋지긋하게 나한테 집착하는 사람도 안 보고 얼마나 편한지.. 처음부터 이 결혼 원한 거 아니었으니까.

    진영 그래도 순용씨가 파트너가 됐을 때 싫지 않았잖아요.

    서라 (시선 피하며) 댄스 안 해 보셨죠?

    원래 하다 보면 감정에 취할 때가 있어요.

    진영 물론 당신이 만나왔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겠죠.

    그런데 순용씨는 진심이었어요.

    서라 누가, 자기 맘대로 진심 주래요?

    진영 그건 의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서라씨가 지금 서라씨의 의지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건 아닌 거처럼요.

    서라 누가 그래요 내 마음이 허전하다고?! 난 아-주 해피해요.

    진영 .. 순용씨는 그렇지 못해요.

    서라 왜요?! 보기 좋게 날 버리고 갔음 좋아서 춤이라도 춰야 하는 거 아 닌가?

    진영 나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근데 파트너 없인 혼자 안 되나부죠.

    서라씨도 이러고 있는 거 보니.

    서라 .. 난 아무하고나 잘 춰요.

    지금이라도 나가서 파트너 고르면 된다구요.


    - 보란 듯이 나가는 서라.


    댄스 연습실 / D


    - 탈의실에서 나온 서라. 큰 소리를 치고 나왔지만 정작 의욕이 나진 않는다. 선뜻 걸음을 떼지 못하는 서라. 그 때, 입구의 문이 열리고 순용이 들어온다.

    - 진영을 찾는 듯한 순용. 그러다 탈의실 앞에 서 있는 서라와 눈이 마주친다.

    - 진영이 서라에게 다가온다.


    진영 이제 아무도 당신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요.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죠.


    - 서라가 머뭇거리는 사이 음악이 끝나버린다.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용.


    서라 (다급히) 잠깐만!


    - 순용이 돌아본다.


    서라 나랑.. 춤출래요?


    - 순용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서라. 순용이 주저한다. 그 때, 진영이 다가가 순용의 손을 서라 위에 얹는다.


    진영 당신은 오늘 벼락과 원자폭탄을 동시에 맞고 살아남은 거예요.


    - 스텝을 떼는 두 사람. 두 사람 위로 감미롭게 흐르는 음악.


    포장마차집 / N


    - 소주잔을 부딪치는 대범과 진영.


    대범 뭘 위한 건뱁니까?

    진영 커플이여 영원하라~ 정도?

    대범 하프커플은 어떻게 됐어요? 거기도 다시 원위칩니까?

    진영 음.. 거긴 제 3자가 나타나니까 두 사람 취향이 딱 떨어지던데요.

    대범 ?


    (인터컷 - 요가학원)

    - 인도풍의 명상 음악이 흐르고.

    - 서로 등을 맞댄 채 요가명상 자세를 하고 있는 명호와 선경. 주변의 신혼부부들 두 사람을 보며 키득거린다. 두 사람 등은 맞댔지만 손은 꼭 잡고 있다. 카메라 빠지면 ‘임산부를 위한 부부요가 교실’이라는 현수막이 벽에 걸려 있다.


    포장마차 / N


    - 놀라는 표정의 대범.


    대범 두 사람 다 오십이 넘었다면서요?

    진영 이불 속 일은 아무도 모른다니까요.

    대범 흠흠.. (소주잔을 털 듯이 원샷한다)

    진영 우리 똥변도 빨리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와야 되는데..

    장가를 가야 어른이 되지요.

    대범 그래서 뭐, 다들 해피엔딩입니까?

    오실장님도 남편과 화해하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뭐 그런 거예요?

    진영 ... 해피엔딩, 새드엔딩, 엔딩이 뭐 두 종류밖에 없어요?

    대범 또 뭐가 있는데요?

    진영 뭐.. 열린 결말도 있고.. 아, 그 영화 결말 봐야 되는데.. (일어나는)

    난 바빠서 이만.


    - 서둘러 가는 진영. 대범, 잔을 채워 털어넣는다.


    대범 (인상 팍 쓰며) 왜 이렇게 써. 으 써.. (얼른 어묵 국물 떠먹는)


    진영의 집 거실 / N


    - ‘굿나잇 앤 굿럭’이 흐르고 있다. 처음으로 맨 정신에 영화를 보는 진영.

    빨갱이 색출 작업에 열을 올리는 조셉매카시의 모습이 흐르고, 그와 힘들게 싸우는 뉴스 앵커 머로와 CBS뉴스 제작진의 모습이 흐른다.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에 이르는 머로의 후배. 신념을 굽히지 않고 매카시와 대결을 벌이는 에드워드 머로의 인사 ‘굿나잇 앤 굿럭’.. 마지막 자막이 흐르고, 진영이 DVD를 정리한다.

    - 서재방을 열어보면 태하는 들어오지 않았다. 쓸쓸하게 문을 닫는 진영. 그 때,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진의 방이다.


    동 하진의 방 / N


    - 문 열리고 불을 켜는 진영. 하진이 거의 탈진한 상태로 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진영 하진아, 왜 이래. 정신 차려봐.


    - 땀으로 범벅이 된 하진. 침대에 남아있는 핏자국. 진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거리 / N


    - 축 늘어진 하진을 업고 엉엉 울며 뛰는 진영. 슬리퍼에 맨발이다.


    진영 하진아, 정신 차려야 돼. 금방 병원에 도착하니까 조금만..

    엄마 말 들리지? 너 없으면 엄마 죽어. 나 못살아..


    병원 응급실 앞 / N


    - 두 손 모으고 안절부절 못하는 진영. 그 때, 응급실에서 의사가 나온다.

    - 얼른 달려가 의사를 붙들고 흐느끼며 말하는 진영.


    진영 선생님.. 우리 하진이.. 왜 그러는 거예요? 불치병이에요?

    저 마음의 준비 됐으니까.. 솔직하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의사 (의아하게 보며) 보호자 맞으세요?

    진영 네, 제가 엄마예요.

    의사 (어이없어 하다) 크램이에요.


    - 그 때, 응급실에서 빼꼼히 고개 내미는 하진.


    하진 (소리 죽여) 엄마..

    진영 (그제야 하진을 보고) ?!

    의사 생리통은 특별한 약은 없으니까 지금처럼 정말 심하면 진통제를 주 시구요,

    진영 (울음 멈추고) 생리..통이요?


    - 하진, 창피해 죽겠다. 고개 푹 숙이는 하진.


    거리 / N


    - 맨발인 하진을 업고 걷는 진영.


    하진 이제 창피해서 저 병원 절대 못 가. 불치병이 뭐야..

    진영 누가 아니래니. (버럭) 왜 엄마한테 말을 안 해?!

    진작 말했으면 이런 망신도 안 당하고 이것저것 준비해 줬잖아.

    하진 말 했어. 배 아프다고.

    진영 ! (그랬다) .. 미안.

    하진 ...

    진영 우리 딸은 이렇게 어른이 돼 가는데 엄만 언제 어른다운 어른이 될 까. 나 크느라 우리 딸 크는 것도 보지 못하는 엄마가 밉지?

    하진 ...

    진영 기집애.. 빈 말이라도 아니라고 해 주지..

    하진 아빠랑.. 이혼할거야?

    진영 .. 엄마도 최선은 다해 봐야지.

    하진 최선이 뭔데?

    진영 글쎄.. 왜곡하지 않고 마음을 바로 보는 거.

    정치판이나 사랑판이나 생각을 왜곡하는 건 안 좋은 건 같아.

    하진 그게 다야?

    진영 그래서.. 아쉬움이라는 거 한 조각도 안 남기는 거..

    하진 굿 럭.

    진영 어, 너도 그 영화 봤어?

    하진 무슨 영화?

    진영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마녀사냥을 하는 건데,

    하진 빨갱이가 뭐야?

    진영 음.. 옛날 미국에서..


    - 어둠 속에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진영의 집 앞 / D


    - 시동을 걸고 차에 올라타는 진영. 하진이 안에서 따라 나와 쭈볏거린다.


    진영 (창문 열고) 상희이모 좀 있다 올 거야. 전화할게.

    하진 (불쑥 조각 케잌 상자를 내밀고) 한 조각도 남기지 말고 와.

    진영 (피식 웃으며 상자를 받는다)

    하진 엄마.

    진영 ?

    하진 엄마랑 아빠 둘 다 좋으니까.. 필요한 사람 옆에 있어 주는 게 나을 거 같아. 엄만, 아직 크는 중이니까.

    진영 (짠해진다) ..

    하진 그래도 최선을 다하기!


    - 쑥스러운 듯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하진. 진영, 고마움에 케잌을 보다가 차에 타서 출발한다.


    바닷가 / 늦은 오후


    - 휴가철이 지나고.. 한바탕 인파가 몰렸을 거 같은 철지난 바닷가. 쓸쓸함 보다는 바다의 모습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다.


    인근 민박집 / 늦은 오후


    - ‘철지난 민박집’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차 소리가 들리고 집 앞에서 졸던 늙은 누렁이가 멍멍 짖어댄다. 안에서 민박집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나온다.


    민박주인 (누렁이한테) 니도 생각나나? 반갑다고 인사하는 기재?


    - 들어오는 진영과 태하.


    진영 안녕하셨어요? (누렁이 향해 가며) 양군아~ 잘 있었어?

    민박주인 저그 꼬랭지 쫄래쫄래 흔드는 기 봐라.

    태하 어떻게 지내셨어요?

    민박주인 내사마 늘 똑같지예. 양군이랑 늙는 거 밖에 더 있겠습니꺼.

    진영 아주머니도~ 전에 뵀을 때랑 똑같으신데..

    민박주인 아이코마 얄궂네.. 그기 우리 양군이 이 집에 들어온 해 아잉교,

    10년도 훨씬 전인데 똑같다니예.. (싫지 않은 웃음)


    동 방 / 늦은 오후


    - 문 열리고 진영과 태하 들어온다. 문 앞에 서 있는 민박주인.


    진영 (아련하게) 그대로다.

    민박주인 벤할 기 무에 있습니꺼.

    이런 촌구석의 민박집은 벤하믄 그걸로 끝이라예.

    진영 좋네요.

    민박주인 (은밀하게) 좋은 일 있나부지예. 편히 쉬다 가이소.


    - 민박주인 문 닫아주고 가면, 진영과 태하만 남았다.


    진영 (어색함을 깨려고) 밥부터 먹을까?

    태하 (미소 지으며 고개 끄덕)


    몽타주 / 늦은 오후


    - 바닷가 근처 횟집에서 팔딱거리는 생선을 잡아올리는 진영. 생선이 어항 밖으로 튀어나가자 태하까지 합세해 잡느라 정신이 없다.

    - 마늘과 와사비를 넣고 간장과 쌈장까지 태하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놓는 진영. 주인이 커다란 접시의 회를 들고 나오자 아이처럼 좋아라 한다.

    - 양군이를 데리고 바닷가 마을을 도는 진영. 양군이가 도로 가운데로 뛰어들고 쫓아가던 진영. 차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자 태하가 진영을 잡아준다. 태하 품에 안기는 진영. 서로 어색한 두 사람.

    - 고즈넉한 해변가. 진영과 태하가 각각 자신의 이름을 쓰고 그 가운데 하트 대신 하진의 이름이 써 진다. 하지만 밀려오는 파도에 금새 지워지는 이름.

    -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


    바닷가 일각 / N


    - 바다를 보고 앉아있는 진영과 태하.


    진영 정말 주인아주머니 말대로 여긴 변한 게 없네.

    태하 (한결 편해졌다) 그러게..

    진영 우리 하진이가 여기서 만들어졌는데.. 기억나?

    태하 (미소) 응..

    진영 그게 벌써 13년 전이라니..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태하 (결심한 듯) 진영아,

    진영 (보지 않고) 내가 먼저 얘기할게.

    당신이 얘기하고 나면 마음에 있는 말 영영 못할 거 같아.

    태하 (기다리는)

    진영 아마 사람들이 나보면 바보 같다고 말할지 몰라. 다른 여자가 바람 난 남자 붙들고 안 놓는다고 그러면 나도 그렇게 말했을 거니까. 숨 막힐 정도로 화도 나고 당신 정말 미운데.. 그래서 헤어지는 게 최 선인지는.. 잘 모르겠어.

    태하 나도.. 그날 그 호텔에서 너랑 마주치지만 않았으면,

    어쩌면.. 우리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진영 운명인건가..

    태하 지나고 나면 다 운명이지. 그런데.. 그 전에 선택을 해야 돼.

    진영 (보는)

    태하 미안해. 나중에.. 내가 혹시 후회하면.. 보기 좋게 차주라.

    진영 ! ... (마음의 정리가 된다) .. 왜 이 일 하냐고 했지? 그 사람들 상처 너무 잘 알아서.. 그 사람들한테 내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 떠난 사람 마음 붙들고 있지 못하게, 과감하게 그 마음 끊어줄 사람.. 그 게 아니면 오만 정이라도 떨어지게 해 줄 사람 필요할 거라고.. 내 가 그랬으니까.

    태하 ..

    진영 연습 충분히 했으니까 이제 할 수 있을 거 같아. 마음 끊는 거.

    태하 !

    진영 당신이 상처 준 거 전부 용서한다는 건 아냐. 자존심 세우느라 고상 한 척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 까. 눈에 보이지 않아도 결국 마음 따라가는 게 인생이라니까..

    태하 (눈물 그렁한) 미안하다 진영아..


    - 바다로 허한 시선을 보내는 진영. 깊은 밤.. 파도 소리는 계속되고,


    (cut to)

    - 두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 작은 조각 케익만 남아 있다.

    (F.O)


    DVD대여점 앞 / D


    - 반납기를 여는 대여점 주인. 그 안에 놓여 있는 ‘굿나잇 앤 굿럭’ DVD와 함께 진영의 메모.


    진영(E) 당신의 마음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겠습니다.

    행복을 재.설계하고 싶을 때 연락주세요.


    - DVD에 붙어 있는 ‘행복설계사무소 –실장 오진영-’명함.. 대여점, 그 명함을 버리려다가 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대여점으로 셔터를 힘차게 올린다.


    대범의 사무실 / D


    - 텅빈 사무실. 책상 위에 꽃이 활짝 핀 화분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 요란하게 들린다.


    관리인(E)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이번 달까지 해서 3개월치, 이번 주까지 입금 안 되면 당장 사무실 폐쇄조치 들어갑니다!


    - 조용해지는 사무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린다.


    진영(E) 이 사람들은 아니라니까요.

    대범(E) 뭐 이 사람들도 이불 속 궁합, 그런 겁니까?


    - 소리 나는 곳 따라가면 사무실 책상 아래, 진영과 대범 쭈구리고 앉아서 파일들을 펼쳐 놓고 있다.


    진영 노! 백퍼 이상형 커플이에요.

    대범 말도 안돼. 남잔 이렇게 못생겼고, 여잔 이렇게 뚱뚱한데?

    진영 남녀 관계를 상식적인 잣대로만 보지 말라니까요!

    절대로 예측할 수 없는 게 이 세계라구요!

    대범 그건 맘에 드네. 예측 불허.. (무심하게) 실장님이랑 나.. 우리도 알 수 없는 거고..

    진영 (뜨악해서) 네?!

    대범 (아무 말 안 한 것처럼) 뭐가요? 다음 커플 보자구요.

    이 커플 진짜 백퍼다.. (파일과 진영 번갈아 보며) 백퍼..


    - 진영, 괜히 어색해져 벌떡 일어난다.


    대범 어디가요. 커플 분석 해야죠.


    - 바닥에 놓인 커플 파일들..


    에필로그


    # 트루웨딩 사무실. (5년 전)

    - 여기저기 상담하는 사람들 보이고, 진영의 모습도 있다.


    커플매니저 (파일 보며) 작년에 연수원 졸업하셨네요?


    - 커플매니저 시선을 따라가면 대범이 앉아있다. 고개 끄덕이는 대범.


    커플매니저 고용, 인권 쪽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대범 아무래도 그 쪽이 절 더 필요로 하니까..

    커플매니저 홀 어머님에 시누가 다섯이고, 인맥 제로라.. (난감한 웃음)

    대범 (실없이 따라 웃는)

    커플매니저 (파일에 하위 등급 표시하며 건성으로) 이상형은 어떻게 되세요?

    대범 다른 건 필요 없고, 그냥.. 쉽게 포기하지 않는 여자면 좋겠는데,

    일도 사랑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보는 사람..

    (쑥스럽게 웃으며) 좀 어렵겠죠..?


    - 맞은편에서 진영이 파일을 잔뜩 들고 오면서 전화통화 중이다.


    진영 하진아 엄마 금방 갈 수 있으니까 좀 만 기다려.. 그럼, 후룸라이드 도 타고 릴리댄스도 타고, 사파리도 가야지. 일? 얼마 안 돼~ 엄만, 슈퍼우먼이니까.. 그건 엄마만 할 수 있는 마법이지.. 응 이따봐~


    - 파일들을 책상에 내려놓는 진영. 그 앞에는 화난 표정의 고객이 앉아있다.


    진영 (진심을 다해) 정말 미안해요 효정씨. 최교수 아니 교수도 아니지, 그깟 미친놈 지금 바로 머릿속에서 지우자구요. 더 근사한 사람 분 명히 있어요! 제가 최선을 다해 찾아드릴게요.


    - 진영을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대범의 표정. 파일을 보며 열심히 설명하는 진영의 모습에서.


    <끝>
    김경원

    김경원

    1975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일어일문학과

  • 기 획 의 도

    이혼은,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전쟁이라고 했다.

    영원할 거 같은 사랑에 균열이 일어나고, 그 균열에 일상이 흔들리고,

    지탱해 온 한 세계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승자를 논한다는 거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여기, 다른 여자가 생긴 남편에게 쿨하게 작별인사를 건네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복수한답시고 남편의 숨통을 조이다 자신에게 호흡곤란이 온지도 모르고,

    구질과 질척이라는 미련의 감정을 잘라내기 위해 악역을 자처하는 여자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여자가 붙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안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결혼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도 익숙해져 당연하다고 치부된 소중한 것들을 찾아가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등 장 인 물


    오진영 (39세 / 여) : 전직 커플매니저, 현재는 자칭 이혼플래너.

    웨딩업계 레전드 커플매니저에서 직업군의 불모지 이혼플래너로 거듭난 ‘행복설계사무소’ 실장. 일과 가정에서 옛 영화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황대범 (38세 / 남) : 변호사 인 듯 변호사 아닌 변호사 같은 변호사.

    최저시급이라도 보장받기 위해 인권 변호사에서 이혼상담까지 영역을 넓힌다.


    류태하 (40세 / 남) : 진영의 남편, 대기업 마케팅팀 차장.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정과 새로 나타난 사랑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한다.


    류하진 (13세 / 여) : 진영과 태하의 딸.

    혼자 쿨한 척 어른인 척 하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


    행복설계사무소 고객 1. 김동일 – 신주애 커플

    종갓집 종손에 권위적인 남편과 순종적인 아내. 아이는 없다.


    행복설계사무소 고객 2. 정순용 – 고서라 커플

    아내에 집착하는 남편과 끼와 자유분방함을 맘껏 펼치고 사는 아내.


    행복설계사무소 고객 3. 송명호 – 이선경 커플

    50 넘어 결혼한 만혼 커플. 서로에 대한 예의가 지나치다.


    그 밖에,

    ‘행복설계사무소’ 고객들, 트루웨딩 박대표, 트루웨딩 직원 보라, 그 외 직원들,

    진영의 동네 상가 사람들 외..


    전체 줄거리


    ‘트루웨딩’의 살아있는 전설, 오진영이 500커플 달성을 이룩했다.

    박대표와 직원들의 축하를 받으며 내친김에 호텔 회식까지 골든벨을 울리는 진영, 그 때 진영의 휴대폰에 톡이 들어온다. 딸 하진이다.

    ‘아빠 생일 잊지 않았지?’ 요즘 들어 남편보다 더 눈치를 보는 사람이 바로 사춘기에 막 접어든 딸 하진이다. 하루를 30시간처럼 쓰는 진영이 남편 생일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호텔 나이트에서 직원들에게 과감히 카드를 던져 주고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진영.

    케익을 사들고 남편 태하한테 전화를 하면서 호텔 로비를 나가던 중, 구급차 들것에 실려 나가는 호텔 투숙객의 모습을 보게 된다.

    들것이 가까워올수록 남편 벨소리와 같은 짱구목소리도 점점 커지는데, 진영의 앞을 지나는 투숙객의 짱구 캐릭터 양말을 보는 순간, 진영은 아찔해 진다.

    그 양말은 매년 남편 생일에 하진이 사주는 양말이었다.

    정신없이 구급차를 따라 병원까지 간 진영, 보호자를 찾는 소리에 자신보다 더 사색이 된 얼굴로 ‘저예요!’를 외치는 여성과 마주친다.

    남편을 쓰러뜨린 건 다름 아닌 미역이었다. 해조류 알러지가 있던 남편은 생일 때도 미역국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딱 한 번 미역국을 먹은 것이 진영과 결혼 후 첫 생일 때였고, 그 때도 남편은 응급실에서 생일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남편은 두 번째 미역국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남편에게 결혼 14년 만에 다른 여자가 생겼고 남편은 진영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변명도 발뺌도 아닌 모든 것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사과까지 하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진영은 미안해하지 말라며 이대로 쭉 살자고 독기어린 말을 내뱉는다.

    그렇게 조용한 전쟁을 치른 지 3개월 후,

    먼저 망가진 건 진영이었다. 진영의 실적은 500커플에서 멈췄고, VIP 고객에게까지 실수를 하면서 박대표는 진영에게 노골적으로 퇴직을 요구한다.

    결국 그 날 엘리베이터를 탄 진영은, 트루웨딩 아래층인 6층을 누르고 만다.

    ‘황대범 변호사 사무실’-이혼상담 환영- 이라고 대충 써진 A4용지가 호객행위라도 하 듯 진영을 향해 덜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무실은 그야말로 무능의 종합선물세트였다.

    그 곳에 들어간 자신을 한심해 하며 발길을 돌리려는데, 사채업자들을 피해 책상 밑에 숨어있던 대범이 진영을 잡는다. 다짜고짜 이혼상담 고객으로 취급하는 대범의 태도에 아니라고 잡아떼는 진영.

    ‘그렇다면 회사에서 잘린 건가요?’ 그것도 자존심이 상한다.

    예전에 대범이 농담처럼 던진 말을 떠올린 진영은,

    ‘잠정 고객 500’명 있는데 자신을 고용하는 게 어떠냐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혼컨설팅이었다.

    자신은 이혼플래너로 필드에서 몸으로 뛰면, 대범은 벤치에서 편하게 법적인 서류작업만 하면 된다고 큰소리치는 진영.

    대범에게 정곡을 찔린 진영이 당혹스러움에 던진 말이었지만,

    관리인들을 피해 하루도 허리 필 날 없이 몰래 로비를 통과하던 대범이 진영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행복설계사무소’의 문은 열리고 만다.

    일을 핑계로 태하와의 문제는 덮어둔 채, 듣도 보도 못했던 ‘찾아가는 이혼컨설팅’을 시작하는 진영.

    치부를 들킨 듯한 고객들의 싸늘한 반응도 잠깐,

    그들의 지난했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주겠다는 진영의 과감한 호객행위는 예상외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며 상담 신청은 늘어가고,

    ‘행복설계사무소’가 고객들의 온기로 뜨거워질수록 진영이 태하와 함께 만들고 그들의 딸, 하진이 태어났던 진영의 집은 점점 싸늘한 냉기가 감돌게 되는데..
    김경원

    김경원

    1975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일어일문학과

  • 주필호 주피터필름 대표·이정향 영화감독

    커플 매니저에서 이혼 플래너가 된 여성을 그린 ‘행복설계사무소’, 미제 사건을 15년 전 연쇄살인범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형사 앞에 진범이라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나는 ‘철수삼촌’, 출산은 인생의 늪이라고 여기는 정치부 여기자가 쌍둥이를 낳고 베이비 시터계의 신과 같은 이모님을 만나는 ‘육아의 신’을 놓고 고민했다.

    졸혼, 휴혼 등 이혼 관련 단어들이 만들어지는 요즘, 아이러니한 설정의 인물을 내세워 행복과 사랑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행복설계사무소’를 망설임 없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소재가 신선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공감을 이끌어내는데다 재치 있고 완성도도 높았기 때문이다.

    ‘철수삼촌’은 초반 설정이 강렬했지만 진범의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다소 힘이 빠졌다. ‘육아의 신’은 정치권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를 진부하게 만들었다. 주인공이 쌍둥이를 낳고 육아의 신을 만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코미디로 접근하면 좋을 듯 하다.

    ‘프롬, 안드로메다’도 따뜻한 여운이 남지만 갈등이 약하고 작은 이야기였다. 이밖에도 갓 출소한 범죄자가 끌려간 이상한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비밀을 그린 ‘증오의 시간’, 증거조작의 달인인 형사와 사건조작의 달인인 기자의 대결을 그린 ‘인간사냥’, 조선의 통역관 가문에서 서양아이가 태어나면서 집안의 비밀을 파헤치는 며느리를 그린 ‘원죄’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요소가 부족하거나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응모자에게 감사하며 지금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정진하길 응원한다.
  • 김경원

    김경원

    1975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일어일문학과

    짝사랑도 이런 짝사랑이 없습니다. 반하고 설레고 두들겨보다 낙심하고 그런데도 다시 보게 되는…. 그것은 저에게 늘 인색하기만 합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나 봅니다. 세상 무엇보다 예뻐 보이고 너무 소중합니다. 보기 싫게 튀어나온 부분도 다듬고 다듬다 그것마저도 품게 됩니다. 그런데도 살가운 말 한 번 건네지 않습니다. 무심함에 지쳐 뻥 차버리려고 하니, 그 안에 지난날 나의 시간들이 빼곡히 담겨 그게 제가 돼버렸습니다. 글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마감에 쫓겨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순간에 당선 연락을 받았습니다. 캐릭터는 울고 있는데 ‘배시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결국, 잠깐 글쓰기를 중단했네요.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영상으로 옮겨져야 하는 글이기에, 가야할 길이 멀고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안에 들어갈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감안하면 책임감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그래도 제가 쓰는 글이 언젠가는 많은 이들을 웃게 하고, 따뜻한 감동을 안겨 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는 않겠습니다.

    때로는 지지자로, 때로는 냉정한 관객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 가족, 친구들,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께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계속해서 달려갈 힘을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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