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우따는 우따였다. 제임스 T 우드(James Thompson wood)를 왜 우따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방과 후의 운동장에서 캐치볼을 하다가 문득, 저 아이를 우따라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까지가 내 기억의 전부다.
그날도 나는 언제나처럼 그를 우따라고 불렀다. 그의 집에서 비디오와 만화책을 보고, 함께 피자를 시켜 먹고, 마지막 조각 하나를 서로 먹겠다고 투닥거렸다. 그러니까, 『지각의 현상학』과 『존재와 시간』을 베고 누워 아기 같은 얼굴로 낮잠을 자던,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 줄기에 얼굴을 찡그리던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를 죽이려는 생각이 들어있었다는 건 아무래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따가 경찰차에 실려 떠난 지 정확히 1년이 지나자 그를 만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내 인생에서는 가장 큰 용기를 낸 결정이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교도소에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발길을 돌리고 싶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우따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나를 앞으로 걷게 했다. 교도소에 도착해서 우따를 기다리는 동안 온 몸이 떨렸다. 왼손을 붙잡으면 오른 다리가 떨리고, 오른 다리를 붙잡으면 어깨가 말썽이었다. 내가 알던 우따가 더 이상 세상에 없을까봐. 그날의 우따만이 남아서 나와 마주보게 될까봐. 그런 것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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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따를 처음 만난 건 2,000년도의 일이었다. 뉴 밀레니엄이라는 말에 전 세계가 묘한 흥분 상태에 빠져 있던 때였다. 내가 살았던 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근 1년 동안 지구 종말에 대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사로잡혀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나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적그리스도가 파나마에 강림해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건 내가 어떻게 막아볼 도리가 없는 일이니까 매일 밤 공포에 떨며 잠을 설쳤다.
새해가 되고 겨울 방학이 끝날 때까지 밀레니엄 버그도, 그랜드 크로스도, 가장 무서웠던 적그리스도의 출현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도, 이 세상 사람들도, 조금 더 살아도 되나 보다. 교회에서 듣던 구원이라는 것을 받은 것 같았다. 우따가 전학을 온 건 그 무렵이었다.
영국 리버풀에서 온 제임스 T 우드라고 짤막한 소개 인사를 마친 우따는 성큼성큼 걸어와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기 전에 반 아이들은 우리를 한 무리로 묶었다. 반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나와 유일한 아프리카계였던 우따를 ‘아아아미(AAAmi)’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개미가 등산을 갔는데 알고 보니 거기가 아기 엉덩이였다더라 하는 내용의 동요에서 따온 멜로디까지 붙여 불렀다.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지만 왠지 싫지가 않았다. 우따가 좋았기 때문이다. 우따는 좋은 향기를 내며 간결하게 움직였다. 그 몸동작들이 아주 매력적이어서 단 하루, 아니, 고작 몇 시간 나란히 앉았을 뿐인데도 거부할 수 없이 우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따가 나와 ‘아아아미’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게 싫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반 아이들이 우리 옆을 지나며 노래를 부를 때 우따는 빙긋 웃을 뿐 딱히 반응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꽤 조급한 마음이 되었지만 우따의 생각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우따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따는 혼자 살고 있었는데 파리에 온 첫날부터 혼자 저녁을 먹기는 싫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기쁜 마음이 되었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따라나섰다.
“파리에는 왜 혼자 온 거야?”
내가 물었다.
“할아버지가 보내 주셨어.”
우따는 그렇게 말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우따가 지은 미소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 얼굴은 아주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우따가 갑자기 크게 보였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는 모습, 가방을 책상 의자에 걸어두는 모습, 냉동실에서 감자튀김을 꺼내는 모습, 하나의 팬에 계란과 베이컨을 동시에 굽는 모습, 내가 앉을 자리에 방석을 깔아주는 모습,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나 따위는 가늠할 수 없는 그릇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우따와 친해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시무룩해졌다.
저녁 식사는 조용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우따는 내 컵에 물을 채워 주고, 호밀빵과 튀긴 감자를 더 가져다 주었다. 우따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책장을 구경했다. 꽂혀 있는 책들은 하나 같이 두껍고 무거워 보였다. 그 책들을 보고 있자니 시무룩해지다 못해 기가 눌리는 기분이었다. 나의 15년과 저 아이의 15년은 왜 이렇게 다른가.
“재밌는 거 많지? 빌려가도 돼.”
설거지를 마친 우따가 내 옆에 와서 말했다. 우따는 나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책장 세 번째 칸 바로 아래에서 드래곤볼, 슬램덩크, 스누피, 도널드덕 같은 것들을 잡히는 대로 꺼냈다. 그 때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아아미’에는 ‘우리 교실의 유색인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점점 조심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우리 뒤에서 웃었지만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고 장난은 딱 그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하거나 화나지 않았다. 우따의 태도도 비슷했다. 법을 전공했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따는 학교의 암묵적인 룰에 대해 금세 이해한 것 같았다.
우리가 따르던 룰은 학교의 인종 구성에 그 기원이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백인 학생이 많았는데, 학생들의 부모가 다국적 기업의 주재원이거나 경제규모가 큰 나라의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집안 사정이 유복한 아이들만 모여 있어서인지 눈에 띄는 차별이나 따돌림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왠지 모르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아이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들의 커뮤니티에 속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쪽이 마음 편했다. 겉으로는 모두가 웃으며 지냈지만 백인과 유색인이 교문을 함께 통과하는 일이 없었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도 없었다. 그런 사정으로 내가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마음 편히 속할 자리를 찾아내는 방법이었다. 가끔 한국에 들어갈 때면 친척들의 부러움을 받는 유학생이었지만 학교 안에서는 조용히 지내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누군가에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없었고, 그건 다행이었지만 외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와 우따는 아주 친해졌다. 나의 15년과 우따의 15년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컸다. 학교를 마치면 우리는 골목에서 공을 차거나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무언가를 보냈을 때 돌려주는 사람이 있는 놀이가 즐거웠다. 집에서 놀 때면 각자 한국과 영국에서 봤던 코미디 쇼의 유행어를 가르쳐 주며 웃었다. 손을 대는 순간 엄청난 좌절을 안겨줄 것 같던 책들은 펼쳐본 적이 없었고 만화책만 보며 마냥 뒹굴 거렸다. 걱정이 없는 날들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책들은 사실 우따의 아버지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펼쳐보고 나서였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관한 수업에서 언급된 책이어서 눈길이 갔다. 책의 속지에는 ‘zu Stephen T Wood, 1972.07.21.'이라고 적혀 있었다.
“1972년 7월 21일은 대학생이던 아버지가 한나 아렌트를 직접 만난 날이었어.”
거기까지만 말하고 우따는 내 손에서 책을 가져갔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받아간 책을 양손바닥으로 누르듯이 덮었다. 그 모습이 처음 만난 날의 옅은 미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미소에서 느껴졌던 위화감도 함께 기억났다. 그 위화감의 정체는 쓸쓸함이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는 감추는 것이 자연스러울 쓸쓸함, 그러나 도저히 감출 수 없었던 쓸쓸함이었다. 우따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겠다, 그러지 않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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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소에 나온 우따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짧은 면회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나를 봐 주지 않는 그를 우따라고 불러야 할지 우드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 부를 수 없게 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부르지 못해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창을 두드렸다. 그는 가만히 있었다. 다시 한 번 유리창을 두드렸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뒤에 앉아있던 간수가 내 쪽을 힐끗 보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간신히 입이 떨어졌다.
“우따.”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오래 전에 잊었던 기억을 되찾은 사람의 얼굴 같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우따! 우따 맞지? 응?”
면회소 내에 버저가 울렸다. 신경질적인 기계음이었다. 마이크의 불이 거지고 간수가 일어나 우따의 옆으로 다가왔다.
“우따. 우따 맞지? 맞는 거지?”
간수의 손에 이끌려 우따가 돌아가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평소의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간수가 문을 열기 위해 잠깐 멈추었을 때 우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딱 한번이었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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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되고 새로운 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름까지 같이 학교를 다녔던 마리엘(Mariel)이라는 여학생이 실종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소문을 듣고 나서야 그런 아이가 있었음을 알게 된 나와는 달리 우따는 마리엘에 대해 제법 자세히 알고 있었다. 마리엘은 필리핀 출신이었고 어머니가 모토로라 프랑스 지사의 전산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리엘이 어릴 적 돌아가셨고 오빠와 남동생이 파리 7구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질투가 나는 것을 최대한 숨기며 우따에게 물었다.
“그냥. 우리 학교에 동양인 여자애는 걔 뿐이었잖아.”
나는 그게 이유가 되나 싶었지만 우따의 표정이 또 쓸쓸해 보여서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내가 우따에게 더 많은 것을 물어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이가 되었을까, 마리엘에게 조금은 다른 선택이 주어질 수도 있었을까, 그때 그 일들의 사이에 내가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었을까, 여러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생각들이 후회나 반성이길 바라지만 확신할 수가 없다. 그 때 나는 알고 싶은 것만 알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모르는 사이, 그러려고 애쓰는 사이에도 우따는 마리엘을 찾고 있었다. 그때 우따는 쓸쓸했을 것 같다. 그 느낌을 생각하면, 싫다고 해도 더 묻고 더 옆에 있을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리엘은 11월이 넘어가도록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마리엘의 어머니가 회사의 공금을 횡령해서 가족이 모두 달아났다는 말이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마리엘이 빈민가에서 필로폰을 하다가 경찰에 잡혔다는 말도 퍼져 나왔다. 또 한편에서는 그녀가 임신을 했기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도 인기를 끌었다. 대놓고 흉흉한 이야기들이 학교의 곳곳을 잘도 누볐다.
그런 이야기들은 10월을 지나면서 차츰 사라졌다. 더 이상 자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에 아직 어린 나이들이었고, 11월 초에 있을 축제가 아이들의 관심을 끈 탓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리엘이 아니라 자기 옆의 누군가의 눈에 드는 일이었다. 우따만이 마리엘을 잊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 마리엘에 관한 소문들을 해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께 받은 마리엘의 집 주소로 여러 번 찾아가기도 했다. 경찰서를 찾아가 마리엘의 실종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우따가 그런 일들을 하는 동안 나는 우따와 함께 있거나 혼자 있었다. 처음에는 우따가 마리엘을 짝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질투가 연민으로 바뀌었다. 우따의 감정이 우정이 아닌 연정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따의 마음은 우정도 연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보였다. 우따는 난민을 구제하는 자원봉사자처럼 마리엘을 걱정하고 그녀의 무사와 안전을 기원했다. 엄청나게 강하고 지속적인 감정이었다.
나는 우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마리엘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도 없었다. 마리엘이 정말 형편없는 아이라서 형편없는 짓을 하고 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우따에게 말했다. 우따의 반응은 격했다.
“마리엘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말은 절대 할 수 없어!”
우따가 화를 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당황스럽고 분해서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후로 우따와 나는 조금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여전히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그것은 수업 시간일 때뿐이었고 대화는 깊이와 폭이 모두 어정쩡했다. 내가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도 우따는 마리엘에게만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응답 없는 마음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이 없음을 배우게 될 즈음, 마리엘이 학교에 나타났다. 축제날이었다.
무대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축제는 한껏 달아올랐다. 공연이 끝나면 곧이어 댄스파티가 열릴 것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하나같이 기대감으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 우따와 화해하지 못한 나는 댄스파티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도 없었다.
마리엘이 강당 2층을 통해 메인 무대로 내려가는 것을 발견한 건 우따였다. 무대에 오른 피터(Peter)가 독창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우따가 내 어깨를 잡고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몸집이 작은 여자 아이가 모자를 쓰고 책가방을 맨 채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우따의 눈에서 긴박함과 간절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무대를 향해 뛰었다. 관람석 중앙에 있던 우리가 촘촘한 의자 사이를 헤치고 무대 근처까지 갔을 때 선생님들이 우리를 막아섰다. 그 사이 마리엘은 가방에서 작은 병을 꺼내며 피터에게 걸어갔다. 무대 아래가 소란스러운 것을 본 피터가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때 마리엘이 병에 든 액체를 피터에게 뿌렸다. 액체는 염산이었다. 피터의 얼굴을 겨냥하고 뿌렸으나 피터가 일찍 몸을 돌린 덕분에 맞은 곳은 어깨였다. 피터의 새된 비명이 마이크를 타고 강당을 울렸다. 공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생님들이 모두 무대로 올라갔다. 우따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무릎을 꿇었다. 손틈새로 눈물이 번져 나왔다.
마리엘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피터는 어깨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지만 고급의료시설에서 회복되어 갔다. 신문과 TV뉴스에 의해 사건이 알려지고 파리 전역이 마리엘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찼다. 우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학교에 나왔다가 조용히 집에 갔다. 나는 마리엘이 원망스러운 한편 우따에게도 마음이 상해서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마리엘 염산 테러 사건’의 여운이 남은 학교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 역시 학교는 물론 파리, 그리고 프랑스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제임스 T 우드의 학교장 살인 미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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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심한 자상을 입은 교장은 9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우따가 휘두른 칼날이 동맥을 비켜갔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성대와 기도에 심한 손상이 와서 호흡기와 소형 마이크를 부착한 상태로 남은 생을 살게 되었지만 그것도 그가 받아야 할 몫의 기적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일생을 교육에 바쳐온 것에 대한 보답 운운. 그럴수록 우따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되어 갔다. 우따는 그 어떤 항변도 하지 않았다.
우따가 교장을 공격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면회를 가기 시작하고 7개월이 흐른 뒤였다. 우따의 행동에 대한 궁금증도 많이 옅어진 때였다. 그 즈음 나는 우따를 찾아가는 일 자체에 어떤 보람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뜨거운 우정의 주인공이자, 숭고한 정신의 실천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런 것이 기뻤다. 면회는 우따가 아닌 나를 위해서 한 일이었던 셈이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우따가 저지른, 아니, 우따에게 일어난 일은 나의 철없는 사춘기의 감정놀음에 사용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건 마리엘의 유서 때문이었다. 피터를 공격한 죄로 복역 중이던 마리엘은 감춰둔 면도칼을 삼키고 자살했다. 유서는 모두 네 장이었는데 각각 주인이 달랐다. 편지의 주인은 그녀의 가족, 피터, 교장, 그리고 우따였다.
생전에 마리엘은 우따와 몇 통의 메일을 주고 받았다. 먼저 메일을 보낸 건 마리엘 쪽이었다. 마리엘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학교의 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상호평가에서 백인 아이들끼리 좋은 점수를 나누어 갖는 것부터 식당에서 유색인종 아이들이 출입구 가까이에 앉는 것까지 모든 일에 문제를 제기하려 했고, 우따에게 함께 행동할 것을 요청했다. 우따는 섣부른 행동은 도리어 역효과를 낼 수 있으니 자중하자는 입장이었다.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감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없음을 근거삼아 마리엘을 설득하려고 했다.
“겁쟁이. 도망자!”
마리엘은 우따를 비난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학교 내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 알리기 시작했다. 백인과 유색인종의 그랑제콜(Grandes Écoles) 입학률 차이를 그래프로 정리했다. 여름방학 중에는 거리에서 인종 차별 개선을 위한 서명 운동도 펼쳤다.
마리엘은 개학 일주일 전에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들고 교장실을 찾아갔다. 교장은 마리엘을 칭찬하고 너그럽게 웃으며 내가 조금 더 잘하겠다는 말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런 마리엘을 눈여겨 본 사람이 피터였다. 우리 학년의 대표였던 피터는 마리엘의 집에 직접 찾아가 자신이 도울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피터와 마리엘은 저녁을 같이 먹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리엘은 정신을 잃었고 근처 공원에서 하혈을 한 채로 깨어났다.
“살던 대로 살아. 조용하게.”
깨어난 마리엘에게 피터는 그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마리엘은 흔들리는 몸과 마음을 붙들고 자신이 당한 일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차고 넘치는 증거가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경찰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고 마리엘의 집으로 험악한 사내들이 찾아오거나 한밤 중에 아무 말도 없이 숨소리만 들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모든 일의 뒤에 피터와 그의 부모, 그리고 교장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던 마리엘의 유서가 또 한 번 파리를 들끓게 할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문의 사회면 마지막 장에 ‘염산 테러 사건의 주인공 자살’이라는 짤막한 기사 하나가 실렸을 뿐이었다. 모두가 마리엘과 그녀의 일을 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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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우따가 나에게 딱 한 번 무언가를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마리엘의 유서를 읽고 나서의 일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이었다. 면회를 마치고 곧장 우따의 집으로 가서 책을 챙겼다. 오랜만에 간 김에 환기를 하고 묵은 먼지를 털었다. 먼지를 털고 집을 정리할수록 마음이 왠지 허전해졌다. 냉동실에 들어있던 감자를 꺼내 튀겨 먹어 보았지만 우따가 만든 것처럼 되지가 않았다. 어둠이 깔릴 때까지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집이 자꾸만 나를 붙잡는 기분이었다.
다음 면회에서 책을 받은 우따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속지를 오랫동안 들여다 보다가 빨간 색 펜으로 표시된 몇 개의 페이지를 읽더니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책 위로 굵은 눈물이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소나기처럼 책장을 덮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우따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책이었다. 그를 감동시킨 것은 한나 아렌트가 아니라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인간성의 자리에 관료의식만이 남은 평범한 악, 그렇기에 지닐 수 있었던 법정에서의 당당함, 스테판 T 우드의 인생에 큰 영감을 준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빈민가 출신의 흑인 고아였던 우드 씨는 하늘이 주신 총명함과 뼈를 깎는 노력의 힘입어 영국 중앙법원의 판사가 된 기념비적 인물이었다. 우드 씨를 보살폈던 고아원에서는 그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조금 무리를 하면서까지 제법 큰 파티를 열었지만 정작 그는 파티의 초대장을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린 우따에게 그 모습은 큰 충격으로 남았다.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은 우따가 조금 더 자랐을 때 일어나는데, 우드 씨가 자랐던 빈민가 출신의 흑인 청년의 손에 그와 그의 아내가 살해당한 것이었다.
우따의 부모를 죽인 사람은 흑인 처우 개선과 근로 차별 금지 운동을 주도하던 활동가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시위가 벌어졌던 어느 날 경찰 폭행 혐의로 연행되었고 곧바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실 그는 폭력 시위를 기획하지도 않았고, 뜻밖의 소요 사태에서 쓰러진 경찰을 공격하려는 다른 참가자들을 막아서기까지 했다. 증거는 충분했고 변호인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우따의 아버지는 그에게 11년형을 선고했다. 판결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인종 차별 관련 재판의 대다수가 그에게 넘어갔고 그는 일관된 판결을 내렸다. 그가 사망한 것은 우따의 생일 전날이었고, 아내와 우따의 선물을 사서 나오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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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우따를 찾아간 건 월드컵을 앞둔 평가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프랑스 대표팀을 집요하게 몰아붙였다는 뉴스를 본 날이었다. 그 경기에서 한국은 3대2로 졌지만 경기 내용만큼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참 쓸쓸한 위로 같다,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파견 근무가 끝났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 면회 날에 우따는 개운한 얼굴로 나타났다. 다시 못 볼 사람처럼 굴지 말자는 것이 우따의 첫 마디였다. 그 말 이후로 우리는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나를 보는 우따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우따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우따가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건네는 손과 받는 손이 봉투의 양끝을 쥐고 한참 그 자리에 머물렀다. 편지가 나의 손으로 넘어온 다음 우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하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빛이 드는 문 너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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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귀국했을 때 한국은 절대 꺼지지 않을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온 나라가 그랬다. 어디를 가나 붉은 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으로 넘쳐났다. 그런 옷을 입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당할 것 같아서 우리 가족도 붉은 티셔츠를 입고 시청과 광화문 앞으로 갔다. 하지만 온 세상을 불태울 것 같던 기세는 생각보다 금세 꺾였다.
“프랑스에 있지 왜 들어왔어.”
선생님들이 나에게 자주하던 말이었다. 악의는 없었고 수업이 안 풀릴 때 던지는 농담이었다. 나는 그 말이 재미있지 않았다. 대통령의 탄핵을 놓고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하는 장면을 TV 생중계로 보았던 날에는 그 말이 어쩌면 농담보다 더 악질인 종류의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파리와 서울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겁함이 영리함이고 침묵이 성숙이라는 것은 8,960km를 날아와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우따와의 만남이 후회스러웠다. 그날들에서 등을 돌려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우따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탁 트인 길을, 누군가가 그런 길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는 길을, 빠르게 달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빛나는 어떤 것을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그 정도의 인간이 되었다는 확신이 없다. 다만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고 그것에 기대었다. 누군가를 짓밟으면 무엇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따에게서 온 편지들을 읽었다. 우따가 보낸 편지는 언제나 같은 문장으로 끝났다.
‘더 나은 무엇이 되자. 그때 만나자.’
편지를 읽고 나면 그 위로 우따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그 얼굴은 우는 얼굴이기도, 찌푸린 얼굴이기도, 잠든 얼굴이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내 기억에서 가장 선명한 우따의 얼굴은 웃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내가 우따를 왜 우따라고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강석희
1986년 경남 진주 출생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동대학원 석사 재학
청주 흥덕고 국어교사
오정희·성석제 소설가
본심에 올라온 9편을 통독하면서 새삼 ‘소설은 소통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技術)’이든 ‘기술(記述)’이든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는 대전제 없이 소설은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통해 작가와 독자는 대화를 시도하며 작가와 시대가 소통하고 작품과 현실, 상상의 세계가 서로의 경계, 세포벽을 넘나들게 된다. 물론 모든 시도가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결국 작품의 완성도, 온축의 흔적이 평가를 다르게 만들었다.
‘영지’는 경주로 여행을 간 두 사람의 이야기로 섬세한 심리 묘사와 정교한 세부 묘사가 돋보인다. 하지만 화자 내면의 목소리가 경주라는 외경과 시각장애인과 동반하는 데 따른 쉽지 않은 여정에 종속되어 입체적이라기보다는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키친 트렁크’는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의 내면과 피폐한 일상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다. 묘사가 핍진하나 이미 익숙하고 많은 사람에 의해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뒤로 미뤄졌다.
당선작인 ‘우따’는 흠잡을 데 없이 완성도가 높다는 점에서 압도적이다. 인종차별과 사법적 정의처럼 다루기 쉽지 않은 재료를 능숙하게 요리해내면서도 독자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신선한 패기가 넘치면서 오랜 수공을 거친 장인의 손놀림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작품이 새로운 소설 문학을 이끌어 가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당선자에게 아낌 없는 축하를 보내며, 다음을 기약하게 된 분들의 분발을 바란다.
강석희
1986년 경남 진주 출생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동대학원 석사 재학
청주 흥덕고 국어교사
당선 연락을 받은 날 밤, 좋은 사람들과 꽤 많은 술을 마시고 말았습니다. 다른 목적으로 모인 자리였지만 자연스럽게 당선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속수무책으로 기뻤습니다. 침대에 누웠을 때 머리가 어지러웠고 딸꾹질과 함께 쓴물이 올라왔는데도 ‘아, 좋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머릿속이 궁금해서 쓰다 보니 이제는 온 세계가 궁금해져 버렸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라 당선이라는 말에 겁이 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방에 달린 물음표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정말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감도 갖게 됩니다. 겁과 기대 사이에서 꾸준히 쓰겠습니다.
제 삶의 첫 어른이신 김신선 선생님, 용기와 조언을 주신 ‘소설만세’의 정용준 작가님, 시를 읽는 감동을 나누어 주신 임수만 교수님과 대학원 선생님들,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부터 응원해 준 창용 종률, 청춘을 함께 보내고 있는 운석 형택 소현 치웅 아람 성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갈수록 이상해지고 복잡해지는 저를 늘 사랑해주는 부모님과 누나에게 고맙습니다. 이 소설을 처음 쓰던 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글을 꼼꼼히 읽어주고 히스테리를 받아준 지혜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냅니다.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당선작으로 올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