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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에이미 선생님의 하루

by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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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미 58세. 여자. 본래는 서선생이지만 별명이 에이미.

    최선생 56세, 여자. 학년 부장 선생님. 이 교무실의 책임자.

    이선생 37세. 여자.

    강선생 29세. 여자.

    학 생1~7 17세. 남자. 학생은 한 명이 연기하되, 매번 다른 학생이다.


    1장. 출근


    무대는 작은 교무실이다. 가운데 미닫이 문이 있고 책상이 디귿자로 배열되어 있다. 오른쪽은 부장님의 책상, 가운데는 이선생님과 강선생님의 책상, 왼쪽이 에이미의 책상이다. 왼쪽 뒤편에는 파티션이 있고, 그 뒤에는 싱크대가 있다.

    암전 중에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불이 켜지고, 이내 미닫이 문이 열린다. 에이미가 등장한다. 에이미의 손에는 작은 손가방과 검정 비닐 봉다리가 들려있다. 에이미는 단정한 바지 정장 차림이다. 에이미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가방과 봉다리를 서랍에 넣고 파티션 뒤로 가서 걸레를 가져온다. 깨끗하게 빤 걸레로 자신의 책상을 꼼꼼히 닦는다. 다른 선생님들 책상이 교과서, 참고서, 노트북, 여러 가지 서류 더미로 복잡한 반면 에이미의 책상 위에는 교과서 한 권만 있어서 대조를 이룬다. 에이미는 자신의 책상만을 꼼꼼히 닦은 후, 걸레를 다시 파티션 뒤에 가져다 두고 이번에는 예쁜 물뿌리개를 가져와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물뿌리개는 만화에 나올 정도로 귀엽고 예쁜 반면, 화분의 난은 시들었다.


    에이미 안녕, 좋은 아침이야. 이거 먹고 빨리 커라. 얼른 크면 내가 더 큰 새 화분에 좋은 흙 깔아서 이사시켜 주께. 얼른 얼른 커야지. 무럭 무럭 커야지. 그래야 착안 애지. 그렇지? (사이) 너는.. 내가 이렇게 맨날 정성을 들여서 물을 주는데 왜 이 모냥이니? 왜 이렇게 힘없어? 매일 물줘, 영양제 꽂아줘. 내가 이렇게나 헌신하고 있잖아. 매일 매일 한통씩 물을 주는데 왜.......


    에이미는 물을 주다가 슬슬 부아가 나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웃는다. 물 한통을 화분에 다 쏟아 붓고서야 돌아서서 파티션으로 들어간다. 문이 열리고 최선생이 들어온다. 검소한 차림에 깡마른 인상이다. 아침부터 지쳐보인다.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켠다. 학생이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학 생1 샘!

    최선생 어. 윤성이구나. 안녕!

    학 생1 컴싸있어요?

    최선생 컴싸?

    학 생1 컴퓨터용 싸인펜이요.

    최선생 아~ 잠깐만.


    최선생이 자신의 서랍을 뒤져 컴퓨터용 싸인펜을 찾는 사이, 에이미가 파티션 뒤에서 나타난다. 에이미가 등장하자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최선생의 목소리가 급격히 작아진다.


    최선생 여깄어. 가져가. 시험 잘 봐.

    학 생1 네, 샘. 감사요!


    에이미 (나가는 학생1을 바라보며) 오늘 시험이예요?

    최선생 네, 오늘 학력평가가 있어요.

    에이미 그래요? 몰랐네. 우리 반 애들은 알아요?

    최선생 알겠지요. 어제 종례 시간에 방송으로 안내했어요. (에이미의 시선을 피하며 컴퓨터 화면을 응시한다)


    문이 열리며 이선생이 들어온다. 청바지에 운동화, 허름한 티셔츠에 노메이크업이다. 귀에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있다.


    최선생 안녕하세요.

    에이미 안녕하세요

    이선생 네.


    이선생은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켜더니 파티션 뒤로 가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좋은 커피 향이 난다. 이선생이 파티션 뒤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나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종이에 전달사항을 적는다. 이선생의 책상은 부장님 왼편이다. 에이미가 등 뒤로 와서 이선생이 적는 것을 본다.


    에이미 아유.. 커피 냄새 좋네.


    이선생은 반응이 없고, 잠시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 펜이 굴러가는 소리만 들린다.


    에이미 이선생님. 뭘 그렇게 적어요?


    이선생은 열심히 적기만 한다.


    최선생 (헤드셋을 가르키며) 귀에 이걸 하고 있어서 안들리나봐요. (손을 저으며) 이선생님, 서선생님이..

    이선생 네? 아! 네~ 뭐라고 하셨죠?

    에이미 뭘 그렇게 적어요?

    이선생 아, 전달 사항이요. 장학금 신청이랑, 체험 학습 결재 맡을 거랑, 뭐 그런 거.

    에이미 우리 이선생님은 정말 꼼꼼하셔. 애들이 정말 좋아하겠어.

    이선생 글쎄요.

    에이미 근데, 오늘 학력평가라면서요?

    이선생 네.

    에이미 그걸 왜 안알려줬지?

    이선생 네? 어.. 그거 3월 초에 나눠준 학사 일정표에도 있고, 지난번에 온 11월 행사일정에도 적혀있었는데?

    에이미 어머, 그래요? (최선생에게) 오늘 조회 사항이 뭐예요?

    최선생 학력평가라 시간표 바뀐거 적어주시는 거랑 칠판에 응시 현황 적어주시고.... 급식 신청서 받아주시고, 다음주에 토론대회 참가 희망자 조사하시면 될 것 같아요.

    에이미 뭐가 이렇게 많아. 늙어서 담임하려니 참 기억력도 딸리고, 기운도 딸리고. 옛날에는 오십 넘으면 원로 대접해주면서 수업도 적게 주고 일도 안했는데....


    최선생과 이선생이 시계를 보고, 밖으로 나가자 종이 친다. 에이미도 수첩을 들고 가정통신문 한 뭉치를 들고 나가려는 찰나, 문이 거칠게 열리며 강선생이 들어온다. 긴 생머리, 새빨간 입술. 하얗게 뜬 화장, 하이힐, 짧은 치마 차림이다.


    강선생 죄송합니다!

    에이미 늦었어요.

    강선생 죄송합니다!


    에이미가 문 밖으로 나가고, 강선생은 컴퓨터를 켜고 책상앞에 앉는다. 숨을 고르더니 이내 책상에 엎드린다. 문이 열리고 학생이 들어온다.


    학 생2 쌤! 이나쌤!

    강선생 응? 민석이 안뇽~

    학 생2 조회 안해요?

    강선생 조회? 해야지.


    강선생이 펜과 출석부 등을 챙기는 사이 학생이 강선생의 책상을 이리 저리 뒤진다. 에이미가 들어와서 자리에 앉는다.


    학 생2 먹을 거 없어요?

    강선생 배고파?

    학 생2 당연하죠. 아침을 못먹었어요.

    강선생 이거 먹을래?

    학 생2 뭔데요?

    강선생 젤리.

    학 생2 싫어요. 초코파이 뭐 그런 거 없어요?

    강선생 응. 미안해. 다음엔 사다 놓을게.

    학 생2 아. 배고픈데...

    강선생 이거 라도 먹어.

    학 생2 저, 젤리 싫어해요.

    강선생 그래?

    학 생2 밥 좀 먹고 오게 외출증 끊어주시면 안되요?

    강선생 외출증?

    에이미 얘, 여기 교무실이니까 조용히 해라.

    강선생 나가자.


    강선생이 학생2를 데리고 나간다.


    에이미 원, 여기가 무슨 시장도 아니고.


    에이미가 교과서를 펴고, 연필을 깎는다.

    최선생이 들어온다. 학생3이 따라 들어온다.


    학 생3 샘, 진짜 아파요.

    최선생 그래, 그래도 조금 있어봐바.

    학 생3 여기 만져보세요, 이마. 진짜 아파요.

    최선생 민수, 내가 너 안아프다는 거 아니지.

    학 생3 병원 갔다 올께요.

    최선생 일단 한 시간만 더 견디고 와봐. 지금은 병원 오픈 시간도 아니야. 9시는 넘어야 병원이 열지.

    학 생3 그럼 한 시간만이죠? 있다 올게요.


    학생3이 나간다.


    에이미 요새 애들은 근성이 없어. 선생님 반은 지각생 없죠?

    최선생 왜 없어요. 아직도 두 명이나 안왔어요. 부모님께 문자 했으니까 연락 오겠지요.

    에이미 우리 반도 한 명 안왔어. 시원이. 또 지각이야. 맨날 이래. 하기사, 애만 지각하나, 강선생 오늘도 지각했어요.

    최선생 강선생님 오셨어요? 못봤네.

    에이미 아니, 애가 지각하는 것도 문젠데 선생이 지각하는게 어딨어요.

    최선생 요새 젊은 선생님들이 좀 그렇지요?

    에이미 누가 아니래. 기간제라 그런가?

    최선생 에이, 그건..

    에이미 아니, 기간제라서 제대로 훈련을 못받아서 그런 거 아니예요? 옷 입은 것도 그래. 오늘 입은 치마도 그렇고.. (목소리가 커진다.) 강선생 좀 이상하지 않아요? 맨날 지각하지 않나, 하루 종일 쩝쩝거리고 먹지를 않나, 화장도 야하게 하고, 뭣보다 애들이 자꾸 와서 시끄러와. 강선생 학교 어디 나왔어요?

    최선생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네?

    에이미 사대는 나왔나?

    최선생 저는 모르는데요..

    에이미 지방대 나왔나? 집은 어디래요?

    최선생 그것도 잘.. 아마 이 근처에 살겠지요?

    에이미 부모님은 뭐하신대요?

    최선생 그런건 개인 정보라 저도 잘..

    에이미 부모님이랑 같이 안사나? 남자 친구는 있겠지요?

    최선생 ......

    에이미 나는 강선생이 무서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최선생 강선생님이 뭐가 무서워요. 수업 없으세요? 1교시 시작한 것 같은데.

    에이미 아우, 나 힘들어서 1교시 못해요.

    최선생 어디 아프세요?

    에이미 아니, 우리 아들이 혼자 살잖아. 대학교 앞에. 아침마다 거기 가서 청소하느라 너무 힘들어요. 아들 녀석이 뭘 할 줄 알아야지.

    최선생 의대 다니느라 힘들어서 그렇겠지요.

    에이미 공부만 잘하면 뭐해요. 빨래는 커녕 청소도 내가 매일 해줘야 돼.

    최선생 그래도 아드님이 곧 의사 되실텐데 자랑스러우시잖아요.

    에이미 아침마다 밥 먹이고 오는 것도 힘들어요. 1교시에 좀 쉬어야 2교시부터 수업을 하지.

    최선생 아침부터 힘드시면, 퇴근하시고 하시지..

    에이미 아들내미 아침은 먹여서 보내야지.

    최선생 그럼, 아침마다 아드님 자취방에 가셔요?

    에이미 네, 그렇다니까. 애미가 아침에 꼭 깨워서 밥먹여 줘야 돼. 그리고 애 나가면 청소하고.

    최선생 대단하세요.


    종이 치고, 강선생과 이선생, 학생4가 들어온다. 다음의 대화는 동시에 벌어진다. 학생과 강선생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선생과 최선생의 대화가 동시에 진행되며 그 시끄러운 대화 사이에 에이미의 통화 내용이 들린다. 대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어수선하면 어수선할수록 좋다.


    학 생4 샘~ 오늘은 머리 감으셨네요.

    강선생 응? 오늘은 감았지. 어제 티났어?

    학 생4 이거 드실래요?

    강선생 뭔데?

    학 생4 껌이요. 박카스 맛이래요.

    강선생 와.. 그런 것도 있어? 헐인데?

    학 생4 맛있죠? 똑같죠?

    강선생 와~ 이거 진짜 박카스 맛인데?

    학 생4 카페인도 있대요. 공부할 때 씹으면 좋대요.

    강선생 그래? 근데 넌 공부를 안하잖아.

    학 생4 아, 샘! 왜그래요. 저 요새 좀 해요.

    강선생 진짜?

    학 생4 네, 맘 잡았어요.


    위의 대화와 아래의 대화가 동시 진행된다.


    이선생 부장님, 지난번 인문학 특강 정산 하셨어요?

    최선생 정산이요?

    이선생 네, 지난번 인문학 특강에 학생 간식비랑 학부모 간식비 따로 정산하라고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그리고 그 때 쓴 학교 카드 아직 반납이 안됐다고 저한테 메신저로 연락이 왔는데요.

    최선생 그래요? 카드가 아직 반납이 안됬어요? 내 지갑에 넣어놨나?

    이선생 여기, 영수증. 날짜별, 시간대별, 항목별로 제가 붙여놨거든요. 지출 품의서랑 대조해보시면 항목 딱 맞구요, 예산도 남김없어 사용해서 잔액 0원으로 딱 맞췄어요.

    최선생 이선생님이 알아서 잘 하셨겠지요. 이상하다 카드가 어디갔지?

    이선생 잘 찾아보세요. 지난번에도 선생님 카드랑 혼동해서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두셨다가 찾았잖아요. 제가 영수증을 봤는데, 실수로 지난번처럼 학교 카드 써야 하는데 부장님 카드 쓰신건 아닌가 하고. 카드 번호를 하나하나 다 확인해봤어요. 영수증에서


    에이미는 이 사이, 전화를 건다. 에이미의 카랑한 목소리가 이 소란을 뚫고 명확하게 들린다.


    에이미 아우.. 인제 전화도 안받나봐. (한참만에 통화된다) 여보세요, 김시원 학생 집인가요? 저는 김시원 학생 담임 선생님인데요, 애가 아직 학교를 안왔어요. 네, 오늘도 안왔어요. 나갔어요? 언제 나갔어요? 그러지 말고 애 방에 한번 가보세요. 아직 자고 있는 거 아니예요? 거봐요. 아침에 애를 깨워서 학교에 보내셔야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요? 내가 왜 걔를 깨워요? 아니.. 애를 깨워서 학교에 보내는 건 엄마 책임이지.. 여튼 애가 계속 지각하니까 곤란해요. 아니, 오늘은 모의고사 보는 날인데, 시험인데도 안오면 어떻게 해요? 벌써 1교시 끝났는데 아직까지 애가 집에서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빨리 보내주세요.


    에이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수화기를 내려치듯 내려놓는다.


    에이미 개같은 년!


    대화가 중단되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에이미 개같은 년, 꼴에 그것도 애미라고.


    강선생은 서둘러서 학생4와 함께 나간다. 이선생은 헤드셋을 켜고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만 본다.


    에이미 싸가지 없는 년, 애미가 되었으면 새끼를 돌봐야지. 어디서 감히 나보고 애를 깨우래? 상스러워. 응? 내가 선생이지 지 도우미야? 어디서 그 따위로 배워먹어서 나보고 애를 깨우래. 기가 막혀서. 애미가 아침에 애 밥먹여서 학교 보내는 게 제일 중허지.

    최선생 선생님, 진정하세요. 시원이가 엄마랑 둘이만 산다면서요.

    에이미 아니, 이게 말이돼요? 선생님이 전화해서 애 좀 깨워주세요. 어떻게 이런 말을 해요?

    최선생 엄마가 저녁 늦게까지 일하면 피곤해서 못 일어나시나봐요.

    에이미 아니, 그래도 그렇지.

    최선생 아빠도 없고 엄마 혼자 애 건사하려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에이미 아니, 저만 남편 없어?

    최선생 아, 죄송합니다.


    때마침 친 종에 모두들 서둘러서 나간다. 에이미만 혼자 씩씩대고 있다.

    암전.


    2장. 점심 시간

    최선생, 이선생, 강선생 모두 앉아서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있다. 다들 자기 일에 바쁘다. 에이미가 눈치를 보다가 서랍에서 검은 비닐 봉다리를 들고 밖으로 스윽 나간다.


    강선생 (에이미가 나가기를 기다려) 들으셨어요?

    최선생 뭐가요?

    강선생 샤워실에서 정동기 선생님이랑.

    최선생 샤워실?

    강선생 1층에 숙직실 옆에 샤워실이 있다면서요?

    최선생 그래요? 나는 몰랐는데.

    이선생 그게, 숙직 기사님이 주무시는 방 옆에 샤워실이 있대요. 그래서 남자 선생님들도 운동하고 거기서 샤워 하시나봐요. 근데 거기 세탁기가 있대요.

    최선생 아, 그래요?

    강선생 근데, 동기샘이 아침마다 자전거 타고 오시잖아요. 아침에 거기서 샤워하는데 에이미샘이 들어왔대요.

    최선생 정선생님이 샤워하는데?

    강선생 네, 완전 네이키드(naked) 한 상태였는데 들어왔대요.

    이선생 저도 들었어요. 동기샘이 다 벗고 샤워하는데 에이미샘이 들어와서 세탁기에서 빨래 한 거 꺼내갔다고. 동기샘이 교무실에서 옆자리 샘한테 재수가 옴붙다고 막 그랬다던데.

    강선생 근데, 거기 샘도 가보셨어요?

    이선생 응.

    강선생 거기 샤워실에 칸막이는 있는 거죠?

    이선생 아니. 샤워기만 세 대 주루룩 있어. 그 옆에 제일 안쪽에 세탁기 있고.

    강선생 그러니까 진짜로 동기샘이 다 벗고 샤워하고 있는데 에이미샘이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죄송해요. 빨래만 꺼낼께요. 하던거 마저 하세요. 하면서 들어갔다 나왔다구요?

    이선생 그렇겠지?

    최선생 빨래요?

    이선생 아드님 속옷이요.

    강선생 부장님 모르셨어요? 아침마다 아드님 자취방 청소하고 아드님 속옷을 가지고 와서 빨잖아요. 아침 일찍 와서 세탁기에 넣고 빤다고 하던데, 그 날따라 둘이 딱 마주친 거지. 그 후로 시간대를 점심시간으로 바꾸셨나봐요.

    최선생 어머, 세상에....

    이선생 아까 들고 나간 검정 비닐이 그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랑 상관없는 일이고 나한테 뭐 좀 안물어봤으면 좋겠어. 지난번에 엑셀 땜에 아주 곤란했어요.

    최선생 또 그랬어요?

    이선생 네. 계속 혼자 컴퓨터한테 막 짜증내셔서요.

    강선생 (에이미 흉내를 내며) 내가 이걸 왜 해야돼. 선생이 애만 잘 가르치면 되지. 도대체 왜 엑셀을 하라는 거야. 거지같은 것들. 그리고 왜 나한테 일을 떠넘기는 거야. 아. 나쁜 새끼.

    최선생 또요?

    이선생 듣기 싫어서 슬쩍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어봤다가 된통..

    최선생 그럼 지난번에 내신 야자 출석부 엑셀로 만든 거 이선생님이 하신거였어요?

    이선생 네, 그거요.

    최선생 아, 어쩐지 깔끔하게 잘 했다 했어요.

    이선생 여튼 또 당했어. 옆에서 해줄 때까지 버티시는 재주 만큼은 정말 최상인 듯.

    강선생 저는 지난번에 인터넷 쇼핑몰 결재해드렸잖아요?

    최선생 인터넷 쇼핑몰이요?

    강선생 광고가 떴나봐요. 타임 한정 세일이라고 세제 다섯 통에 50프로 세일인가? 그거 하시겠다고 저보고 대신 해달라고 하셔서.

    최선생 인터넷 쇼핑도 할줄 모르시나?

    이선생 핸드폰도 아직 2G 잖아요. 실버폰. 자판 큰 거.

    최선생 그래서 해드렸어요?

    강선생 네. 아예 쇼핑몰 가입도 안되어 있어서 인터넷 쇼핑몰 가입부터 해야 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제 아이디로 들어가서 결재하고 그 다음날 현금 주셨어요.

    이선생 강샘같은 사람이 옆에서 자꾸 도와주니까 더 그러시는 것 같아요. 다음부터는 그냥 바쁘다거나 모른다고 해.

    강선생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러다가 저 소문 나빠지면요? 저 비정규직 이잖아요.

    이선생 아.. 또 그런게 있었네. 여튼 부장님도 저희를 생각해서 전자결재 할 때 대신 해주지 마세요. 옆에서 자꾸 해주니까..

    최선생 젊은 선생님들이 좀 도와주세요. 저도 겨우 겨우 하는 거예요.

    이선생 무슨 말씀이세요. 샘이랑 두 살 차이 나신대매요? 같은 50대라도 샘은 전자결재 척척하시는데 그 분은 왜 그러실까.

    최선생 늙으면 원래 뭘 배우기가 무서워요.

    이선생 컴퓨터 하실 때 보면 조마조마해 죽겠어요. 언제 또 화내시고 부르실까. (헤드셋을 들어보이며) 제가 이걸 왜 샀겠어요.


    문을 똑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일동 긴장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학생5가 들어온다.


    학 생5 (최선생에게 다가가서) 샘!

    최선생 어, 성호야. 무슨 일이야?

    학 생5 샘, 저희반 수업이요.

    최선생 응? 5교시야? 벌써?

    학 생5 아까 종쳤어요.

    최선생 어머, 세상에. 깜빡했어.

    학 생5 아유 샘! 수업을 까먹으시면 어떻게 해요.

    최선생 미안하다. 얼른 가자.


    최선생이 황급히 책과 노트북을 챙겨서 나간다.


    학 생5 (강선생에게) 샘, 있다가 저희반 수업 알죠?

    강선생 응, 알지!

    학 생5 저 지난번에 퀴즈 맞춰서 초코렛. 지금 주시면 안되요?

    강선생 지금?

    학 생5 당 떨어졌어요.

    강선생 그래.

    학 생5 스니커즈 말고 킷캣이요. 스니커즈 좀 물려.


    강선생이 서랍을 뒤지는 사이. 에이미가 들어온다.


    에이미 성호구나. 왜 여깄어?

    학 생5 제가 저번 영어 시간에 잘 해서 초코렛 받으려구요.

    에이미 (혼잣말로 그러나 들으라는 듯이) 애가 공부를 잘하며 칭찬해주면 그만이지. 저렇게 꼭.

    강선생 (눈치보며) 가. 얼른.

    학 생5 (그 자리에서 초코렛을 까서 입에 넣고) 계세요~


    학생5가 나간다. 에이미가 자리에 앉고 강선생은 나간다. 이선생은 귀에 헤드셋을 끼고 마우스를 딸깍거린다. 컴퓨터로 일을 하는 모양이다. 에이미는 교과서를 펴고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문이 열리고 학생6이 들어온다. 쭈뼛거리며 살금살금 에이미 앞으로 간다.


    학 생6 선생님..

    에이미 (학생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높인다.) 뭐야? 지금 왔어?

    학 생6 네.

    에이미 이게 하루 이틀이야? 화내는 것도 지겹다.

    학 생6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다)

    에이미 애미가 그 모냥이면 너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둘이 같이 자빠져 자면 뭐가 돼? 못배우면 배우려고 노력을 해야지. 오늘 만이야? 3월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러잖아. 본데없이 자라가지고. 어디 되먹지 못하게 맨날 자다가 늦어? 그렇게 게을러서 벌어먹고 살겠어?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너같은 거 한테 일자리를 준대? 여기가 학교니까 그렇지. 직장이라고 생각해봐. 니가 이게 말이 돼? 너 알바 한다며? 알바도 지각하니? 안해? 어린 것이 돈만 밝혀가지고. 알바는 지각 안하면서 학교는 왜 자다가 늦게 와. 오늘은 또 뭐야? 어디가 아팠다고 또 거짓말 하려고. 오냐, 내 그럴줄 알았다. 손에 든거 그거 처방전이지? 어디 늦잠자다가 늦은 주제에 맨날 감기야 몸살이야 처방전만 꼬박꼬박 내면 다야? 그 정도도 안아픈 사람이 어딨어? 어린애가 맨날 병원이나 들락거리고. 내가 모를 줄 알아? 어디서 선생님한테 사기를 칠라고. 병원가서 적당히 둘러대고 처방전만 끊어오면 다야? 니 애미가 그렇게 가르치대? 그래, 설사 니가 진짜 아프다고 치자. 니가 아픈 것도 다 애미가 널 잘 못돌봐서 그래. 니 애미가 아침마다 밥해 먹여서 학교 보냈어봐. 애가 이렇게 비실 비실 하겠어? 그리고, 공부를 해야 할 학생이 알바가 다 뭐야. 너는 그래서 안되는거야.


    에이미의 음성이 점점 높아지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되자. 이선생은 슬그머니 나간다.


    에이미 무릎 꿇어. 이노무 새끼. 내가 오늘 아주 버르장머리를 고쳐야겠어. 망할놈의 자식. 무릎 꿇어!


    학생6은 망설이다가 순순히 무릎을 꿇는다. 저항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에이미가 종이와 펜을 던져 준다.


    에이미 반성문 써.


    에이미가 자리로 돌아간다. 학생6은 부동자세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3장. 같은 시각 복도


    교무실 밖 복도.

    안에서 에이미가 학생6에게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선생이 문 앞에 초조하게 서있고, 최선생이 컴퓨터와 책을 들고 온다.


    최선생 여기서 뭐하세요?

    이선생 (문을 열려는 최선생을 말린다) 안에 시원이가..

    최선생 시원이요? 오늘은 많이 늦었네. 5교시 지나서 온 적은 없었는데.

    이선생 하루 이틀 이런 건 아니지만 오늘은 좀 심하세요.

    최선생 그럼 어째요?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우. 화가 많이 나셨네.


    강선생이 학생7과 함께 등장. 학생7이 강선생이 수업 시간에 걷은 노트를 들어다 주는 듯 잔뜩 짐을 들고 있다. 강선생이 문을 열려는 찰나, 최선생과 이선생이 동시에 말린다.


    최,이 강선생님!

    강선생 네? 아.. 네.

    학 생7 샘. 저 착한 일 했으니까 초코렛 주실거죠?

    강선생 응, 줘야지.

    학 생7 아, 무거워. 문열어요.

    강,최,이 안돼!!

    강선생 내일, 내일 줄게. 그거 이리 줘.

    학 생7 아, 오바야. 지금 줘요.

    강선생 그럼 니가 저기 들어가서 꺼내 올래? 샘 책상 위 상자 안에.

    학 생7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에이미의 고성을 듣고) 아, 아니예요 샘. 내일 주세요.

    강선생 안뇽~


    학생7이 사라진다.


    강선생 뭐예요?

    이선생 시원이. 맨날 지각하는 애.

    강선생 도대체 왜 맨날 저렇게 화를 내신대요? 기운도 좋으셔.

    최선생 애가 불쌍하니까 그렇겠지요.

    강선생 불쌍해서 혼낸다고요?

    이선생 서선생님도 아들 혼자 키우셨대매.

    강선생 그래요?

    이선생 아.. 모르나? 괜히 말했네.

    강선생 말 안할게요.

    이선생 더운 여름날에. 아드님 일곱 살 때. 같이 주무시던 남편이 너무 덥다고 밖에 나가서 주무신다고 했대. 쇼파에.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런걸 돌연사라고 하던가?

    강선생 심장마비 뭐 그런거요?


    학생6이 뛰쳐나온다.


    에이미 (교무실 안에서 목소리만) 야! 너 이리 안와?

    학 생6 아, 씨발. 존나. 아. 씨발.

    강선생 시원아. 왜그래?

    학 생6 (울먹이며) 아 존나. 아 씨발.

    최선생 시원아. 울지말고 선생님한테 천천히 말해봐.

    학 생6 아. 씨발. 아오 씨. 아무리 그래도 패드립은! 아오. 씨. 나 학교 안다녀.


    최선생과 이선생이 학생6을 붙잡고 강선생이 나가려는 아이를 막아선다.


    최선생 잠깐만

    이선생 야!

    강선생 시원아!


    암전.


    4장. 7교시


    다시 교무실 안. 한쪽에는 에이미와 이선생이, 다른 한쪽에는 최선생과 학생6이 앉아있다. 둘씩 하는 대화이지만 묘하게 겹치기도 하고 서로 끼어들기도 한다.


    최선생 많이 속상하지? 그래도 너가 그러면 안되지. (학생6의 등을 토닥여준다)

    이선생 선생님, 커피 좀 드세요. (에이미에게 커피를 건네준다)

    에이미 아니, 안먹어요. 그거 선생님 돈으로 사는 거잖아.

    이선생 아유, 그냥 좀 드시고 마음 푸세요.

    에이미 뭐가 속상해.

    학 생6 그냥 갈래요.

    최선생 어디를?

    에이미 (최선생에게) 자퇴서 쓰라고 해요.

    이선생 그래도 시원이는 착한 거예요. 어제 인터넷 신문에 뜬 기사 못보셨어요? 부산인가에서 애가 5교시에 학교 왔다고 선생님이 야단치니까 애가 막 주먹이랑 발로. 그것도 남자 선생님을.

    에이미 뭐 그런 개새끼가 다있어.

    학 생6 아. 씨발 그냥 간다고요.

    최선생 욕하지말고. 갈 때 가더라도 니가 이렇게 가면 안되지. 선생님한테 말하기 싫으면 여기 종이 줄 테니까 좀 적어볼래?

    학 생6 적으면 뭐해요.

    이선생 세상이 그런거죠. 걔도 평소에 선생님이 자기만 혼낸다고 앙심 품고 그랬다던데요?

    에이미 아니, 애가 잘못하면 혼내는게 교사의 일이지.

    이선생 샘이 다치실까봐 그렇죠.

    에이미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내가 뭘 잘 못했다고?

    이선생 아니, 저한테 화내시는 건 좀..

    학 생6 다 필요 없다고요.

    최선생 화내지 말고 말해봐. 화내면서 말하니까 하나도 못알아듣겠다.

    학 생6 제가 지각하는 게 제 탓만은 아니잖아요. 저도 노력하고 있는데.

    이선생 애한테 욕하지 마시고 찬찬이 타이르시면 어떨까요?

    에이미 내가 처음부터 이래요? 이선생님도 봤잖아요. 3월 첫날부터 지각하던 애야. 처음에는 내가 불쌍해서 잘해줬잖아. 강선생 초코렛도 얻어서 주고.

    최선생 너네 담임 선생님이 나쁜 의도로 그러시는 건 아니잖아.

    학 생6 너무하시잖아요.

    이선생 그래도 오늘은 너무 심하셨어요.

    에이미 내가요? 뭘요?

    최선생 너도 심했어.

    에이미 애가 먼저 심했지. 아니 세상에 학교를 5교시에 오는 게 어딨어?

    학 생6 아, 몰라. 학교 그만 다니고 싶어요.

    에이미 내 더러워서 학교를 때려치던지.

    최선생 (학생에게) 진짜 때려칠거야? 후회하려고?

    이선생 명퇴 신청기간 되면 제가 알려드릴께요.

    에이미 뭐요?

    학 생6 집에 갈래요.

    이선생 아.. 퇴근하고 싶다. 선생님, 부산의 그 학생도 갑자기 선생님한테 마구 주먹질을 했대요. 옆에서 다른 애들이 말리고 옆 교실에서 선생님이 뛰어와서 겨우 말렸대요.

    에이미 미친놈..

    이선생 무자식이 상팔자래잖아요. 선생님, 올해 지나면 쟤 안봐도 되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쟤 엄마는 오죽하겠어요.

    학 생6 왜 저만 반성해야 되요?

    최선생 니가 먼저 잘못했잖아. 지각을 많이 해서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

    에이미 아니, 지각한 애를 야단치는게 뭐 어때서?

    이선생 선생님이 다치실까봐 그렇죠. 부산처럼. 애들이니까. 욱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

    에이미 내가 뭘 어쨌다고, 애미라는 년은 애를 내팽개치고 자빠져 자고, 저 새끼는 알바는 안늦으면서 학교는 맨날 늦는데.

    최선생 어쩔 수 없잖아. 상황이. 그러니까 니가 마음 풀어.

    학 생6 (울기 시작한다.)

    최선생 서선생님, 시원이는 제가 상담실에 데려가서 따로 얘기를 좀 할께요. 애가 너무 흥분을 해서.

    이선생 그렇게 하세요.

    에이미 아니, 우리반 학생을 왜 선생님이 가르쳐요? 지금도 그래.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거예요? 이선생님. 나한테 왜 이래요?

    학 생6 저 갈래요.


    학생6이 나간다. 최선생이 따라 나간다. 에이미와 이선생의 짧은 대치.


    이선생 죄송합니다. 저도 종례하러 가봐야겠어요. (나가려다 뒤돌아서) 마음 푸세요. 선생님. 다 힘들잖아요. 저는 그래도 자식은 없어서 다행이예요.


    때마침 7교시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암전.


    5장. 방과후


    텅 빈 교무실.

    에이미 혼자 책상에 앉아있다.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건다.


    에이미 아들? 수업 끝났어? 냉장고 냉동실에 미역국하고 육개장 얼린 거 넣어놨어. 밥 거르지 말고. 응. 그래. 우리 아들 힘들어서 어떡하니.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먹어. 내일 아침에 엄마가 또 들를게. 그래, 닥터 김. 수고해. 응, 끊어!


    전화기를 끊고 전화기를 바라보며 계속 말한다.


    에이미 맨날 먼저 끊어버리기는.


    파티션 뒤편에서 걸레를 가지고 와 꼼꼼히 여기 저기를 닦는다. 책상도 꼼꼼히 정리하고 하루를 마무리 할 준비를 한다. 서랍에서 가방과 검정 비닐 봉다리를 꺼내서 들고 나가려다가, 화분쪽으로 다시 간다. 화분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방과 봉다리를 내려놓고 파티션 뒤로 가서 물뿌리개에 물을 가득 넣어 온다. 시든 난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에이미 얼른 먹고 건강해야지. 민우가 와서 보면 어째. 민우가 너 들고 여기 온 지도 꽤 됐다. 민우가 그 때 와서 내가 가르쳐준 근의 공식 증명 아직도 기억 난다고, 그 때 선생님 정말 멋있었다고. 그랬잖아. 너도 그 때 들었지? 호호호. 내가 증명을 잘 해. 지금도 칠판에 한바닥 쓰고 나면 애들이 감탄을 한다니까. 알아듣는 애들만. 멍청한 것들은 모르지. 점점 그런 애들이 줄어. 근데 너는 왜 이렇게 비실하냐. 너야 말로 내가 이렇게 꼬박꼬박 한 통씩 물을 충분히 주고 있는데. 싱싱하고 무럭무럭하게 자라야지. 다른 사람들 보니 일 년에 한번씩 난 꽃 피었다고 자랑하던데. 너는. 어째 한번을 꽃을 안피우니. 내일은 영양제를 사올까? 까탈스럽기는.


    에이미가 두런두런 화분에게 말을 거는 사이, 물뿌리개 한통의 물이 난화분에 다 떨어진다. 화분 밑으로 난이 오줌을 싼 듯, 눈물 흘린 듯, 물이 흥건하다. 파티션 뒤로 물뿌리개를 되돌려 놓는다. 에이미는 가방과 검은 봉다리를 들고 퇴장. 덜그럭 거리며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암전. 마지막으로 난 화분에 빛이 남았다가 사라진다.

    -막.
    이수진

    이수진

    1978년 대구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 김철리 연출가·장우재 극작가 겸 연출가

    젠트리피케이션, 사이비 종교집단, 남자 임신 등 소재가 다양해졌다. 로봇, 대리기사, 고양이도 등장했다. 멈춰버린 지하철, 개 경매장, 수중도시도 나왔다.

    이런 변화를 환영한다. 그 다음은 말하려는 바를 알고 썼는지 묻게 된다. 경험을 포함해 ‘그것’을 껴안고 뒹굴며 사유를 전진시켰는지, 자신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발견한 현실이 있는가. 발로 뛰어다니며 썼으되 핵심을 짚은 작품, 자기객관화가 되어있는 작품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양한 소재에 비해 압도적인 새로운 발견은 없었다.

    ‘구멍을 살펴라’는 이야기꾼을 소재로 필력을 과시했으나 그 재능이 일반 인물에게 투영 되었으면 좋겠다. ‘제사상에 스파게티’는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까사노다’는 나가사키의 게스트하우스를 배경으로 이국의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가진 편견에 대해 얘기했지만 이런 경험을 했다면 누구나 알 만한 것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친절한 에이미 선생님의 하루’는 고등학교의 학년 교무실을 배경으로 각각 50대, 30대, 20대인 여교사를 등장시켜 변화된 교육환경을 경험해 본 것처럼 써나갔다. 다만 후반부가 약했다. 그럼에도 ‘친절한 에이미 선생님의 하루’를 당선작으로 결정한 건 새로운 소재가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보여줬고, 문제적 인물이라 할 만한 ‘에이미 선생’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변화된 사회 현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선작에 육박하는 작품은 많았다. 그분들을 응원한다. 조금 더 평정을 찾고 발로 누비며 두 눈을 똑바로 뜨면 등단이란 절차도 어느 순간 발아래 놓일 것이다.
  • 이수진

    이수진

    1978년 대구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무언가 되려 했으나 끝내 되지 못했다”는 안톤 체홉의 ‘갈매기’ 속 쏘린의 한탄처럼, ‘미생(未生)인 채로 삶이 끝나면 어떻게 하나’하는 막연한 두려움의 끝에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삶이 니나의 재기발랄함보다는 쏘린의 하품을 더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 때였습니다.

    아직도 당선 소식을 보이스 피싱 전화가 아니냐며 어리둥절할 만큼 부족한 저에게 좋은 평가를 해주신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

    김석만 선생님, 이상우 선생님, 박근형 선생님 고맙습니다.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그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선생님들의 조언이 되살아나 한밤중의 등불처럼 한 발 한 발 앞을 비춰주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음악극 ‘러브(LOVE)’를 함께 했던 ‘모멘텀 프로젝트’팀 덕분에 나른한 삶에서 탈출해서 신춘문예 접수 마지막 날 원고를 넣을 수 있었습니다. 전환과 도약, 추진력을 뜻하는 ‘모멘텀’이라는 단어처럼 팀원들 모두 좋은 기운을 받아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삶은 ‘갈매기’의 4막처럼 여전히 춥고 나른하겠지만, 그래도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선생님들, 그리고 동아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리지 않은 딸을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살뜰히 돌봐주시는 어머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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