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이중섭의 팔레트

by  신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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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선소감
  • 그래픽 서장원 기자

    그래픽 서장원 기자

    알코올이 이끄는 대로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나는 자주 까먹었다


    날마다

    다닌 이 길은


    처음 보는 사막이었다
    신준희

    신준희

    1955년 전북 고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 이우걸 이근배 시조시인

    응모작이 크게 늘었다. 감사한 일이다. 시조에 매력을 느끼는 지망생의 수가 그만큼 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형식을 운용해내는 능력도 대부분 수준 이상이어서 쉽게 제외할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다.

    몇 번을 거듭 읽은 뒤 ‘구름평전’, ‘블랙커피 자서전’, ‘모감주나무 문법’, ‘봄의 온도’, ‘이중섭의 팔레트’가 남았다.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작품이었다. 함께 투고한 작품들을 살피며 개성있고 참신한 작품을 고르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다 최근 당선작 유형으로 굳어져버린 안이한 연시조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기본형인 단시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중섭의 팔레트’를 뽑기로 했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선자의 다른 작품인 ‘개성댁’, ‘개심사 석탑’ 등 연시조에서 받은 신뢰 때문이기도 했다.

    이중섭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다. 오히려 소재로는 식상하다. 그러나 화가의 아내가 서귀포시에 기증한 팔레트에는 아직도 물기가 마르지 않아서 이렇게 섬뜩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놓았다. 알코올이 환기하는 정상적이지 않은 삶, 정거장이 은유하는 생의 여러 고비들을 어느 날 이중섭은 사막처럼 느꼈을까. 이러한 상상은 화자 한 사람만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가파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의 풍경이다, ‘날마다/다닌 이 길은//처음 보는 사막이었다’의 극적인 비약은 얼마간의 난해성이 시의 매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당선자가 오랜 연마를 통해 얻은 결실을 읽으며 그 이상의 작품으로 시조시단의 내일을 열어갈 것이라 확신하며 축하를 보낸다.
  • 신준희

    신준희

    1955년 전북 고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섭씨 1000도가 넘는 불길 속에서 세 시간만 지나면 깨진 백자항아리 같은 흰 뼈로 환원되는 삶. 그토록 고달프고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던 삶은 눈물겨워 촉촉이 젖어있는 함초롬한 꽃이었다.

    길 끝의 낭떠러지, 나를 짓누르던 두려움, 떨어지거나 날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써야한다는 그 막막하고 깜깜한 압력에 감사한다. 나만의 밀도를 얻고 싶었다. 깡통처럼 짜부라지던 리듬은 괴로웠다. 단어와 문장들이 서로 할퀴고 싸우는 하얀 감옥.

    얼어붙은 털신에 달라붙는 눈덩이처럼 아름답고 무서운 눈길에 갇혀 더는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그런 때, 푹푹 꺼지는 눈길, 길도 없는 흰 종이 위를 365일 맴돌았다.

    조금만 더 걷자. 연필을 새로 깎고 낯선 기차를 타고 사연 많은 사람 속에 섞여 또다시 떠나야겠다. 가끔 언니들이 묻는다. 어디 있어? 밥은? 그 소리가 나를 웃음 짓게 한다.

    나의 시조도 누군가에게 그 정도였으면 참 고맙겠다. 거울도 볼 줄 모르고 자기만의 향기에 몰두하는 꽃. 오늘은 장미에게 거울을 보여 주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 오랜 친구들, 늘 응원해 준 박공수 시인, 문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강기옥 선생님, 김대규 시인님, 이지엽 교수님, 윤금초 교수님, 꿈속에서도 감사드립니다. 더 정진하라고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민족의 횃불을 지켜온 동아일보에도 감사드립니다. 꾸지람 듣지 않도록 부지런히 뒤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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