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

by  김정현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1. 그는 ‘지금’ 어디에

    잔뜩 쌓인 눈이 소리를 모두 흡수해서 아주 고요하다

    세상에는 온통 텅빈 벌집 뿐이다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 <건축> 중에서


    우리가 황인찬에 대해 중요하게 물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 언어적 특이성 그 자체가 아니다. 물론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던 첫 시집《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에 관한 세간의 평에서, 논자들이 기본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그의 시가 단순하며 반복적인 형태의 독특한 언어적 형식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었다.(장이지, 「탈정서적인 경향과, ‘주체’의 문제」, 『실천문학』, 2015년 봄호.) 이 측면에서 황인찬이 전세대인 미래파의 시인들과 다른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 역시 받은 바 있다.(이찬,「우리 시대 시의 예술적 짜임과 미학적 고원들 Ⅱ」,『시작』, 2012년 겨울호.) 그러나 그가 선배들인 미래파와 무언가 다른 감각을 지녔다고 해서, 그를 새롭다고만 평가하는 것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즉 명확해 보이는 것 이면에는 항상 알지 못하는 무엇이 놓여있다고 한다면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까. 황인찬은, 그러니까 그는 ‘무엇’이며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현재의 관점에서 판단해 본다면, 황병승을 통해 촉발된 2000년대 미래파 논쟁이 남긴 유산이란 결과적으로 시의 ‘언어’, 즉 무엇이 시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가장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 코리아, 2005)로부터 시작된 논의들은 시어, 무엇이 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통과해야 했다. 파괴적이고 도발적인 언어를 무기로 삼았던 미래파와 전통적인 서정을 변형하려 했던 신서정의 영역까지 2000년대 중후반의 시단은 모두 이 물음에 답해야 했던 셈이다. 완결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이 논쟁을 통해 언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가능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미래파 시인들에 대한 개별적 평가를 잠시 제쳐둔다면, 우리는 분명 그 시점 이후부터 무언가 ‘다른 시’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황인찬을 위시한 2010년대 시단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이 이를 토대로 출발했다는 점 역시도.

    그의 언어를 미래파의 전위적 언어와 비교한다면, 이는 시어의 표면적이고 기능적인 차원, 혹은 선배들과의 유사성이나 차이성에서만 설명될 수 있지 않다. 평가의 차원과는 무관하게 미래파의 전위는 언어의 문법을 파괴하고 인과관계의 사슬을 붕괴시키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게 함으로서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야 하는가. 이는 필연적으로 ‘언어’의 본질적 차원에서 답을 구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에 담겨있는 사유처럼, 미래파의 전위가 사람들이 자명하게 여기는 시를 무너트리고 붕괴시켰다면. 그러니까 우리들의 세상을 헤테로토피아처럼 무(無)의 세계로 환원시켜버렸다면. 그 지평 속에서 어떠한 언어들이 새로 탄생하고 있는 지를 물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가 황인찬을 통해, 그가 전세대인 미래파가 파괴적이고 부정성을 토대로 한 언어들과 무엇을 공유하고 또한 무엇을 다르게 형성해가고 있는가를 질문해본다면, 이는 다음의 문장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를 통해 돌아온 ‘그’는 누구인가.

    이는 황인찬이 구축해놓은 언어들의 ‘세계’를 통해 그의 언어들이 존재하는 이유, 그 욕망에 대해 보다 깊숙이 다가서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 전제해야 하는 것은 그의 언어가 보여주는 단순성의 세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언어의 자명함과 정의(正義)란 그것이 품고 있는 무수히 많은 개별성들과 잠재성을 가리는 얄팍한 가면에 지나지 않았던가. 즉 알고 있음, 자명함, 정의로운 인간. 그래서 명확하다고 확신되는 세계. 그러니까 또다시 나, 혹은 나의 판단, 나의 올바름. 하나하나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정의로운 말들이 넘쳐나는 것을 매우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런데 이 모든 말들의 토대가 언어라면, 그것이 언어라는 심연의 겨우 일부분에 불과하며, 명확히 보이는 것들 이면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자명한 언어와 그에 기반한 ‘나’를 버려야 비로소 미지의 언어를, ‘희지’의 영역이자 알지 못함의 세계를 맛보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미래파는 기존의 시, 혹은 ‘나’를 버리고 언어의 정의와 올바름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 존재방식을 입증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시인들이 이와 같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올바름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 미래파와 황인찬을 교차시키는 것이라면, 그는 무엇을 이어받았고 무엇을 달리 했는가. 결론을 미리 말해보자. 황인찬은 그의 선배들과 부정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는 파괴하지 않는다. 그는 ‘목적없는’ 부정성의 세계(이재원, 「‘나’라는 이름으로 자라난다는 것」, 『시작』, 2013년 여름호)를 언어를 통해 구축하며 즐긴다. 요컨대 파괴와 부정과는 다른 ‘즐거운’ 것. 이것이 황인찬의 세계가 보여주는 간극이자 변곡점인 것이다. 황인찬의 시는 롤랑 바르트가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말했던 바대로 미지의 언어를 기다리는 행위 그 자체로부터 온다. 따라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보여주는 단순성과 반복성의 이면이다. 그곳에는 언어가 사실적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전으로 사유된 흔적들이 놓여있다. 이 즐거우면서도 또한 엄격한 행위를 명확하게 확인하려면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씌여지지 않은 것을 읽”(발터 벤야민,『일방통행로』)어야 한다.

    황인찬의 시가 단순함을 통해 감춰둔 어떤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 언급해 둘 필요가 있겠다. 거창하게 말해본다면, 그것은 언어를 쓰는 자가 자신의 언어 이면에 감추어둔 것. 언어의 사용이 아닌, 언어를 통해 꿈꾸고 있는 것. 폐쇄된 감옥의 운명이자 동시에 그로부터 세계를 구원해야만 하는 순수함과 잠재성의 즐거움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는 말을 벗어나기 위해 “은유를 쓰지 않는”자(<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이다. 그러니 물어보자. ‘그’는 누구인가.



    2. 반복성의 이면, 즐거움의 자리

    (…) 그래서 이 문장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냐고 선생님은 대답을 기다리가 죽었다 나는 종이

    한 장 들고 집으로 간다 가정은 많이 어렵고 문은 활짝 열

    린다 여기로 들어오라고

    -<연역> 중에서


    황인찬은 소리 높여 주장하고 흐트러뜨리거나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희미한 형태로 감춰져 있으며 자기 자신과 구분되지 않을, 그러니까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할 자기 자신, 말하자면 부정성을 통해 드러나는 순수한 잠재성을 즐기며 욕망하는 자의 본질이 놓여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그는 그가 되기 위해 수련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를 버린다. 그는 자신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고 잘못됨을 행하는 엄격한 자의식을 지닌 자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언어를 조탁하는 것이 기존 시인들의 자명한 임무였다면, 황인찬은 그것을 ‘알지 못함’으로서 보여주는 순수한 언어의 운동을 구현하려 한다. 따라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닌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순수한 운동’의 존재론적 영역이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음이란 단순한 하지 않음이 아닌, 보다 본질적 차원의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황인찬의 시를 ‘시적 미니멀리즘’(이재원)과 ‘세련된 진술의 아크로바크’(장이지), 혹은 ‘낯설게 하기라는 세계’(김행숙)와 ‘주체의 무능력을 통한 윤리성의 확보’(이찬)로만 판단하기 어렵다.(물론 위 분석들에도 충분히 유의미한 지점들이 있다) 어쩌면 이 견해들은 사실상 황인찬의 텍스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오해가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일견 담백한 느낌. 소위 시적 기교가 잘 보이지 않고 그래서 단순해 보이는, 시적 서술의 주체인 나를 부정하는 듯한 무수한 발언들 덕분에라도 더욱 그렇다. 그러나 황인찬이 보여주는 세계, 말하자면 그의 반복성과 부정성이 그의 전부라고 답할 수는 없다.


    멍하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시에는 개가 새가 나오고 무슨 개고 무슨 새인지 알기

    가 어렵고

    그건 누구 잘못인지 모르지만 다 잘못했어요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고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고


    그렇게 모두 다 잘못했어요


    그러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


    내가 잘못했어요 잘할 수도 있는데

    안 그랬어요


    반성하는 의미에서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새가 시라는 은유는 몰라요 시가 개라는 은유도 몰라요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에요


    (…)


    잘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기로 했어요

    그냥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자꾸 멍하면 좋아요 아주 좋아요

    -<멍하면 멍>, 부분


    《희지의 세계》 맨 첫 장에 실린 <멍하면 멍>은 이러한 측면에 황인찬의 시가 왜 반복성과 수동성의 태도를 취하는지, 혹은 왜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지, 그 부정의 이면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 지를 보여주는 표지로 검토될 수 있다. 황인찬 특유의 부정적이고 반복적인 진술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도. 주의하여 들여다봐야 하는 핵심은 언어들의 반복이 아니다. 여기에는 반복을 통해 생성될 심층적 ‘운동’이 있다.

    시의 첫 구절부터 이야기되는 것. “멍하면 멍 짖”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란 <점멸〉(《구관조 씻기기》, p.85)에 등장하는 ‘새’처럼 단순히 사실적 재현의 맥락으로 보기는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란 표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언급되듯, ‘새’란 시적 자아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새의 존재는 내가 좋아하고 내가 따르며 말하자면 ‘되기’ 원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망을 형성하는 기호이기 때문이다.(<희지의 세계〉의 ‘목양견 미주’, <오수>의 ‘개’처럼 그의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개는 새와 유사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지점은 이러한 동물들(새와 개)에 비춰볼 때, 텍스트의 표면에 등장하는 나는 실질적으로 나 혹은 그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 시를 올바름의 언어사용을 보여주는 주체인 나와, 올바르지 않고 잘못하고 있는 수동성을 지닌 나로서 구분해본다면. 시적 주체인 새이자 개가 짖으려 하지 않는 세계와 좋아서 ‘멍’하고 짖는 세계로서 구분해볼 수 있다면. 시의 전체적 구절을 통해 드러나는 유의미한 사항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올바름이 아닌 ‘좋아함’의 세계일 것이다. 그 즐거움의 언어인 ‘멍’을 통해 나는 그이자 새이며 개로 존재하며, 동시에 올바른 자가 아닌 잘못된 자이자 그 잘못됨을 ‘사랑’하는 자로서 존속하려 한다. 그는 말한다. “내가 잘못했어요 잘할 수도 있는데/ 안그랬”다고. 우리는 이를 언어의 표층적 차원에서 드러난 단순한 자기부정과 반성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겠다. 황인찬은 ‘안 그런자’이자 잘못을 사랑하며 즐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맥락은 황인찬의 시에서 왜 무수히 많은 너 혹은 그녀들이 등장하는지, 혹은 그러한 너와 나(혹은 그녀들) 사이의 세계가 무엇 때문에 중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말하자면 황인찬은 새나 개와 같은 동물이 되기를 원하며 그녀가 되기를 꿈꾼다. 들뢰즈식으로 보자면 ‘되기(becoming)’를 가능케 하는 시적 자아의 이상인 것. 새(이자 개)가 존재하는 세계를 부정적인 형태로서 욕망한다는 것. 이런 측면에서 판단해보면 기존의 논의들이 황인찬에 대해 주목했던 부분은 어느 정도 전자의 차원에만 집중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멍하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처럼”, 그리고 “잘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기로 했어요/ 그냥 멍 짖어요”라는 반복적 언어의 형태들은 단지 단순한 반복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이재원의 지적처럼 아감벤 식의 ‘~하지 않음’이란 형태를 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윤리성의 맥락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는 ‘즐거움’의 차원에 속한다. 즉 올바름이 아닌 “자꾸 멍하면 좋아요 아주 좋”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 되고자 하는 역설적이며 역동적인 욕망이 언어의 심층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요컨대 ‘즐거움’이란 황인찬이 자신이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가리킨다. 그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존재처럼 즐거운 운동을 지속시켜 나가기를 원한다. 이것이 언어의 표면인 ‘부정성’과 ‘수동성’에 의해 가려져 있는 그의 본질적 영역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에는 개나 새가 나오고 무슨 개고 무슨 새인지 알기가 어렵고/ 그건 누구 잘못인지 모르지만 다 잘못했어요”라는 표현을 섬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황인찬이 자각하고 있을, 미래파의 엄격하고 파괴적인 부정성의 언어와 자신과의 근본적 유사성을 발화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말하자면 “그렇게 모두가 다 잘못했”다는 것은 그의 선배들과 그의 근본적인 공통지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과 구분되는 자신의 존재방식이 있다. 그것은 황인찬의 “새가 시라는 은유는 몰라요 시가 개라는 은유도 몰라요/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에요”라는 것이다. 알지 못하며 모른다는 이 지점. 황인찬은 그의 선배들과 언어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공유하지만, 동시에 그 엄격함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지켜내고 새롭게 의미화하려 한다. 동의하던 동의하지 않던, 이러한 맥락에 황인찬은 자신의 시가 어디에 놓여있으며,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아는 ‘영리한 아이’인 셈이다. 그 영리함은 시의 표면적 단순함을 넘어서는 어떤 심층을 형성한다. 이것이 황인찬의 시를 표면적 발화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이다. 마치 <연역>에서 말했던, ‘여기로 들어오라고 외치는 활짝 열린 문’처럼 말이다.



    3. 순진함과 진정성의 차이, 그 냉소적 의지

    우리 할머니는 아직도 하신다 백 년 동안 움직여 온 그

    입술로 내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을 자꾸만 하신다


    나는 망하지 않는다 살아서

    있다

    - <종의 기원> 중에서


    말했다시피, 황인찬은 ‘영리한 아이’이다. 그의 영리함이자 심층은 살펴본 바대로 언어의 표면적 발화 그 자체로서만 파악되기 어렵다. 즉 그는 끊임없이 아님을 말한다. 이러한 ‘부정성’의 태도를 지속하면서 드러날 수 있는 순수한 언어를 지향한다는 것. 혹은 언어의 표층적 의미를 있는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그것 이상의 잠재적인 운동성을 즐기는 것이 황인찬의 욕망이라면, 그가 구축해놓은 세계의 세부들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왜 이러한 수동성의 가면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드러내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우선 동물들, ‘새’와 ‘개’가 혹은 ‘그녀’들이 없는 그의 세계로부터.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책상이 있고 책상에 누가 누운

    흔적이 있고 수백 개의 창이 있고 거기서 뛰어내리는 사람

    이 있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조용히 움직이는 초침이

    있고 망상과 전망을 혼동하는 시인이 있고 점차로 잦아드

    는 들숨과 날숨이 있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낮과 무관

    한 밤이 있고 눈뜨지 않는 육체에 갇힌 영혼이 있고 창밖

    으로 무수하게 펼쳐진 마지막 잎새가 있는 이곳은 네가 아

    닌 병원 자주 아픈 사람은 병원에 자주 가고 계속 아픈 사

    람은 병원에 계속 있고 아프지 않으면 오지도 못하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아무런 비밀도 없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다

    - <네가 아닌 병원>, 전문


    <네가 아닌 병원>이란 황인찬이 지각하는 세상을 형상화한 크로키일 것이다. 이 시는 그의 세계감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조율>에서 등장하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이자 “그건 일어나지 않는 일”의 세계, 그러니까 “아름다운 숲속을 거닐게 될 거”라는 “이미 있어났던 일”들이 사라져 버린 세상을 말이다. 따라서 그녀들이 없는 그의 세계란 어떠한지를 물어야 한다. 왜 순수한 아이는 이토록 황량하며 또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가.

    시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병원이란 세계는 내가 되고자 하는 너, 혹은 내가 머무르기를 욕망하는 이상적 대상인 네가 부재한다. 시인 자신의 언급처럼 “네가 아닌 병원”인 이곳은 “수백개의 창이 있고 거기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는” 곳이며, 또한 “망상과 전망을 혼동하는 시인”이 있고 “낮과 무관한 밤”이 있으며, “창밖으로 무수하게 펼쳐진 마지막 잎새”들와 격리되어 있는 곳이다. 마치 “인간으로 있는 것이 자꾸 겸연쩍”(<여름 연습>)어지는 병원의 세계란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모두가 단순히 병들어 있고 미쳐가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세상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마치 이성복의 <그날>처럼, “아무런 비밀도 없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일 뿐인 것들 속에 있다는 시인의 세계감은 우울과 멜랑콜리적 인식을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다 압니다/ 모든게 않 좋아요 언젠간 좋아질 테지만”(<머리와 어깨>)이라고 중얼거리는 냉소적이고 영리한 아이, 황인찬의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공포감과 무의미성, 혹은 ‘수동성’이라 통칭되는 그의 언어적 태도란 단순히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보기 어렵다. 황인찬이 근본적으로 ‘나’라는 주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 혹은 그가 판단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으며, 묘사하지 않으려 하는 언어로 일관하는 것은 단지 단순함을 가장한 세련된 기교의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연인처럼 구는” 진짜가 아닌 자들의 세계 속에서 “말없이 그냥 앉아 있”는 자만이 꿈꿀 수 있는 어둠의 영역,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수 없을 것 같”(<실존하는 기쁨>)은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한 엄정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즉 이 영리한 아이란 균질하고 무의미한 세계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라보는 자의 ‘냉소’적인 시선을 통해 존재한다. 그렇기에 황인찬의 전언처럼 우리는 그의 언어 속에 감춰져 있는 ‘순진함과 진정성을 구분’(<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알아차리는 것이다 수조에서 살아 움직이던 생물

    들이 온 힘을 다해 헤엄치다 결국 힘을 다해버린 것을


    우리 삶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서서히 고조되거나 혹은 가라앉으며


    우리에게 약간의 침울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다 갑작스레 무언인가의 파열음이 들리게 되고, 그

    러면 깜짝 놀라게 되고, 둘러보면 아무것도 달리진 게 없

    더라는 식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 이야기는 빈 공간을 구성하고 싶어 하고,

    두 사람이 멍청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채로


    이야기는 순진하게 시작된다

    거실에서, 항상 거실에서

    -<실내악이 죽는 꿈>, 부분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야기와, 묘사, 표층이 아니다. 우리는 순진한 이야기이자 언어의 표층들이 아닌, 언어의 심층이자 그의 행위, 텍스트의 이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진정성’의 영역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황인찬의 시에서 나타나는 수동성이자 부정성이 단순히 텍스트의 표층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의 말처럼 순진함이 아닌 진정성이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실내악이 죽는 꿈>은 무엇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 하는가.

    결과적으로 <실내악이 죽는 꿈>이란 한편의 시 전부이자, 동시에 시를 쓴다는 행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황인찬은 자신이 생산하는 혹은 써내는 텍스트의 차원을 부정함으로써, 혹은 자명하고 이해되는 시의 세계를 부정함으로서 능동성을 생산하는 행위 자체가 된다. 말하자면 ‘어디서 들리는 건지 모를 불길한 실내악의 음향’,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우리 삶에 갑작스레 틈입해오는 어떤 불안”, ‘결국 온 힘을 다 헤엄치다 죽어버린 것’ 등을 포괄하는 이야기들. 즉 <실내악이 죽는 꿈>이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시라고 ‘착각’해왔던 무수한 자명성들이 결국 “순진”한 것이자 “거실”이라는 공간에 머무는 안락한 자들의 세계일 따름이라는 점이 아닐까. 그 순진함을 냉소하는 시선의 존재 자체가 <실내악이 죽는 꿈>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말하지 않음으로서 텍스트에 쓰여지지 않은 채 말해지는 영역들은 죽음 그 자체나 단순한 부정성의 맥락으로서만 파악될 수 없는 차원에 속하게 된다.

    황인찬이 자신의 텍스트를 스스로 부정하며, 그 부정성을 순진한 것이 아닌 ‘진정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란 근본적인 사유의 엄격성이자, 언어에 대한 본질적 태도라 칭해져야 할 성질의 것이다. 냉소하는 자의 치열함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며 완성해가는 언어와 텍스트인 것. ‘(미지이자 희지인) 알지 못함’의 근간에는 바로 이러한 사유가 놓여있다. 그 사유야 말로 그의 시에서 무수히 발생하는 죽음의 근본적 지향점이 아닐까. 따라서 “이 시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영원한 친구>)라고 말하는 명랑한 말투가 드러내는 것처럼, 그의 감각은 사실 “예술에 대해 자명한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자명해”(『미학이론』)졌다고 선언한 아도르노보다 “몰락하는 자를 사랑”(『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한다고 말하는 니체에 보다 가까운 것이라 보인다. 황인찬의 냉소는 부정성을 지속하는 형식 자체를 예술의 목적으로 삼고자 했던 아도르노와 분명한 거리가 있다. 그는 세상에 대한 냉소를 통해 몰락을 사랑하고 즐기며, 세계 자체의 무의미성을 넘어서려 했던 니체적 사유에 보다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이 흔적들을 종합해서 검토할 때에, 그가 자신의 언어 속에 감추어 두었던 양상들이 정확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모든 것을 반대로 말하고 있는 그의 말을 고쳐서 들어보자. 즉 ‘이 겨울의 길이 지독하게 고독하다는 사실에 자신을 의탁해야 만하는 자’이자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질 수 있는 자’ 즉 ‘그믐 아래 야습을 도모하는 미지를 원하는 자’이자 ‘내일의 불가능을 믿는 자’ 그리하여 ‘너의 집을 찾으려 하는 자’(<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인 지점.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보여주었던, 질문하는 낙타와 세계를 파괴하는 사자가 도달해야하는 순수한 생성과 창조의 어린아이가 되는 것. 정상적이고 무균질한 세계가 아닌, 순수성을 목표로 하는 운동인 것. 단지 이를 위한 즐거운 행위가 그의 가장 깊은 심연이자 ‘진정성’의 영역이라 불리워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종의 기원>에서 언급한 망하지 않고, ‘살아서 있다’는 말의 본질적 의미이다. 그것은 바로 새이자 개인, 인간이 아닌 동물인, 진정한 그인, ‘그녀’들의 세계로부터 오고 있기에.



    4. ‘그녀’들, 순수하고 따뜻한 세계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 <희지의 세계> 중에서


    따라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함축한다.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황인찬의 욕망이 구축하려 하는 무표정하다면 무표정한 언어들이 스스로의 진술을 알지 못함의 형태로서 구현하고 있을 때, 도래하게 될 ‘그녀’들의 세계, 혹은 ‘새’이자 ‘개’들인 동물들의 세계는 어떻게 현전할 수 있는가. 그가 “어느 날 나는 나의 영혼을 견딜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원하는 것. 그러니까 “나는 나의 아름다운 소설을 보여주고 싶”은 ‘그 아이가 아닌 개’의 존재(<오수>)를 강렬히 바라는 이유. 그 슬픔과 고통, 혹은 《구관조 씻기기》의 <듀얼 타임>에서 언급된 “It's dark, 말한다”고 언급된 어둠과 심연의 세계가 보여주는 근본적 정체를 말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황인찬이 깊숙이 침윤되어 있는 심연의 세계를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 니체를 빌려 말해보자면, ‘심연을 들여다보려 하는 자는 심연 속의 괴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의 죽음을 포함해서, 자신의 세계 속에 무수히 등장하는 죽음 자체 속에서 무엇이 ‘되기’를 원한다. 심연에 깊숙이 침몰하려는 자가 원하는 세계. 어쩌면 유토피아, 어쩌면 그의 꿈. 그리고 어쩌면 진정으로 그 자신이어야 하는 것. 그러니까 <희지의 세계>처럼 고요하고 아득한 ‘그녀’들의 세계는 어떠한가.


    그 애는 어째서 나를 이 깊은 산속으로 데려왔을까 모

    든 것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나쁘지 않다


    나의 마음은 기묘하게 뒤틀려 가고 있었으나 점차로 모

    든 것이 명료하였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곳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구나


    그러한 생각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나무 아래 완전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애의 팔

    이 내 몸을 감싸 안은 채였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그 애가 말했다


    명료하게


    미지근한 그 애의 체온이 내게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 <서정> 부분


    그가 <인덱스>라는 시를 통해 《희지의 세계》 맨 마지막에 배치해두었던 구절, “이제부터 평생 동안 이 죄악감을 견딜 것”라는 말은 단순하게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그가 아닌 그가 되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되고자 하는 그 혹은 황인찬의 본질적 욕망이자 죄책감이란, ‘그녀’들이 부재하는 세계에 대한 냉소와 환멸의 감각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숨을 쉬면 빛이 흩어지는 곳”이자 “어두운 데로 무엇인가 몰려가는 곳”인 영역을 보는 자가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섬세한 감각을 토대로 한다. 그렇기에 그가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있는 것. “내 사랑의 미래가 거기에 있고 지금 내가 그것을 보았다는 것”(<인덱스>)은 스스로 ‘믿는’ 자에게 주어질 ‘그녀’들의 세계에 대한 명료한 선언이지 않을까. 자신을 빛이 아닌 어둠으로 몰려가는 자라고 명확하게 선언하는 자의 목소리가 이와 같다. 그의 죄책감이란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을 미래이자 과거에 이미 존재했었던 차원에 속해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덧없고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도래할 미래와 존속해야할 과거를 ‘믿는’ 자만의 것이다. 이것이 황인찬의 세계이자 ‘그녀’들의 세계가 가진 ‘원천’이다.

    즉 “나뭇잎이 이렇/게 섬세하게 무엇인가 잔뜩 돋아나서 징그럽다는 것”을 알아버린 자이자 “팔월의 열기”가 미치지 못하는 “나무의 어둠 아래”(<서정>)를 마주하고 있는 자. ‘바다를 보며 감탄하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를 듣는’ 자.(<유사>) 죽음을 마주하고 그것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는 자만이 말할 수 있는 세계 속에서 황인찬은 서있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나무에 기대 앉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행/하지 않은 채 가슴속에 묻기로”(<종로이가>) 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비밀을 결코 쉽게 발언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지와 그 행위의 실천을 정의롭게 소리 높여 떠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명료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녀’들의 세계로부터 전해질, 거대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말하자면 사소하다면 사소한 “미지근한 그 애의 체온”을 말이다.


    어린 새가 가지에서 떨어진 것을 올려 주었다 가지 위의

    새들이 다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이 시는 사랑에 대한 시는 아니다

    어둠이나 인간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것도


    어린 새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러다 곧 날아가겠

    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해가 진다


    이 시는 슬픔에 대한 시는 아니다 저녁의 쓸쓸함이나

    새의 날갯짓 아니면 이별 뒤의 감정에 대한 것도


    “미안, 늦을 것 같아 어디 따뜻한 데 들어가 있어”

    누군가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갑자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혹시 누가 보고 있나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새로운 경험>, 전문


    (…) 공원의 모두가 은총

    아래 있다 나란한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는 노부부도 물 위

    를 홀로 걷는 고독한 남자도 모두 완전하다 나는 은총 아

    래 연인을 기다렸다 주말 오후의 빛이 공원을 비춘다 돌이

    킬 수 없는 평화가 공원에 서려 있다 호수 공원의 주변을

    걷고 있었다 연인은 물속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지국총>, 부분


    그는 언어화한다. “이시는 사랑에 대한 시는 아니다/ 어둠이나 인간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것도”. 그리고 “슬픔에 대한 시는 아니다 저녁의 쓸쓸함이나/ 새의 날갯짓 아니면 이별 뒤의 감정에 대한 것도”. 그 모든 것과 언어의 자명한 의미들에 대한 경험이 아닐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시의 제목에서 언급된 ‘새로운 경험’이자 그가 말하는 세계의 이면이자 본질은 결과적으로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 나쁘지 않다”(<서정>)라고 말하는 행위를 통해 열려질 ‘가능성’인 셈이다.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그가 구축하려는 세계의 기본적 행위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말은 분명하게도 ‘나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거쳐 좋고 즐거운 것이 지닌 잠재성을 활성화하려는 의지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그는 시의 제목을 ‘서정’이라고 붙였다) 언어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그 자체로서 현전시키려는 행위. 그가 원하는 “미지근한 체온”의 세계는 결코 단순하게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그 도래함은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사랑”(<두희는 알고 있다>)해야 한다는 조건을 가진다. 즉 그가 보여주는 수많은 “혼란”들 속에서 황인찬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녀’들의 세계인, 나에게 부재하는 바로 그 “따뜻함”이 아닐까. 확정과 자명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닌 잠재적인 믿음의 영역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 너무나도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진부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인간적’이어야 하는 나이자 무수한 ‘아니다’의 세계를 통해 겨우 희미하게 보여질 수 있는 ‘그녀’들의 세계. 혹은 “미안 늦을 거 같아 어디 따뜻한 데 들어가 있어”라는 말이 지닌 온기의 영역들을 말이다.

    따라서 그가 두리번거리며 ‘둘러보고’ 찾고자 하는 ‘그녀’들의 세계란, 명료하게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찾으려 하는 자에게만 갑작스레 (그의 시 속에서 갑작스러움이나 깜짝 놀람의 표현들은 빈번하게 출현한다) 들려올 ‘무엇’인 셈이다. 그렇기에 황인찬은 기다린다. “이 작은 물건은 기다리는 것이다 영혼을 얻을 때까지”.(<조물>) 그 믿음을 통해 도달할 그의 영혼이란 “모두가 은총아래 있”는 밝은 곳이 아닌 세계를 통해 비로소 현전할 수 있게 되는 잠재적인 가능성들이 아닐까. 그가 끊임없이 말하는 죽음과 심연의 세계가 깊숙하게 감추어 둔 것. 모두가 “완전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평화”로 가득 찬 세계가 아닌 곳. ‘그녀’들의 세계가 지닌, 불타오르는 거대한 불이 아닌 “미지근한 체온”을 말이다. <지국총>의 ‘무덤’을 통해 나타난, 그가 꿈꾸고 있는 ‘연인(들)이 물속에서 나올 줄을 모르는’ 것처럼.

    이제 《희지의 세계》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것을 말해보자. 황인찬의 단순함과 부정성 이면에 감춰진, 냉소의 진정성을 통해 도달할 ‘그녀’에 대해서 말이다. 그가 말하지 않고, 혹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그 대신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 미지이자 희지인, 알지 못함으로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저 ‘따뜻함’의 영혼이라면. 언제나 항상 부재하는 ‘그녀’들의 영역이 그가 꿈꾸는 고요하며 아득한 세계라는 점을 말이다. 그의 텍스트가 무수히 알지 못함의 언어들을 통해 희구하는 ‘그녀’들의 세계란 결국 ‘믿음’의 즐거움인 셈이다. 따라서 어느 순간, 갑자기, “느닷없이 세상이/망하고 내가” 발견한 저 “아름다운 뿔/나팔/소리”(<반주자>)란 불현듯 도래할 순수성의 영역으로부터 들려올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을까. 그 노래를 위해 그는 단지 믿음을 말하지 않고 즐기면서 행할 뿐이다.

    결국 그가 철저하게 밀어붙이는 하나의 태도란 그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빨을 들이대는 자명함, 저 “익숙한 한기”의 세계에 대해서 “문을 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세계 ‘전체’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적으로 적대적이어야 가능할 믿음을, ‘그녀’들의 미지이자 희지를 전제로 한다. 즉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서는 안되는 것”이란 말을 온전히 실천하는 행위야 말로,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의 가능성을 믿고 또한 확인하며, 현전시킬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알지 못함이란 ‘희지’의 언어들을 통해서 ‘그녀’들의 “체온”을 믿는다는 것. 마치 ‘목양견 미주가 희지의 하얀 배 위에서 머리를 누인’(<희지의 세계>) 모습처럼, “내가 되고 싶었던 것”같은 “뒷산의 돌무덤 아름다운 세계”를 향한 마음이란 아름답지 않음으로서 아름다울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그이자, ‘새’와 ‘개’이자 동물들인 ‘그녀’들의 세계. 아마 황인찬은 알 것이다. ‘그녀’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희지’를 위해 무엇을 원하고 믿으며, 또한 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는 아이니까. 황인찬은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영리하고 또한 착하고 즐거운 아이니까.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뒷산의 돌무덤 아름다운 세계가

    자꾸 이곳에 있고, 항상 까닭 모를 분노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도 다 지나갔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내가 되고 싶었던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


    눈을 뜨면 아침이 오고, 익숙한 한기가 발밑을 맴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지만 열지 않았다

    -<풍속>, 부분



    5. 결과적으로, 남겨질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 너는 무심코 만

    지는 것이다

    평화롭게 잠든 사람의 부드러운 볼을


    너는 흠뻑 젖어 있다

    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비의 나라> 중에서


    그는 더욱 나아갈 것이다. 《구관조 씻기기》를 통해 시작되었고 《희지의 세계》에서 도달한 부정성의 깊숙한 이면을 향해 말이다. 말했지만 그는 영리하며 또한 착하고 즐거운 아이니까. 그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새와 개인 동물들의 세계를, ‘그녀’들의 ‘희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부정성과 단순성을 통해 도래할 수 있는 마음을, 그 순수한 잠재적인 언어의 행위를 ‘즐길’ 것이다. 이것이 황인찬이 스스로에게 시인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자, 진정으로 쓰기를 원하는 자의 운명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결국 그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의 필연성이다. 저 순수한 언어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부정성과 냉소의 이면. 말하지 않음으로서 필사적으로 구성하려는 비밀스러운 의지의 즐거운 운동을 말이다.

    결론을 맺자. 2010년대 이후 황인찬이란 시인을 주목해야 할 근본적 이유가 단순함과 부정성의 언어 자체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분명 그의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세계를 이해하고 그들과 부정성을 공유하지만, 또한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이런 점에서 황인찬이 그들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은 뚜렷해 보인다. 즉 그를 통해 듣게 될 말이란 필연성의 언어들이자 ‘그녀’들의 마음인 셈이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오게 될 ‘따뜻함’의 체온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시인 자신의 말을 빌려보자면, 그는 자신의 필연성에 “흠뻑 젖어 있”으며, 또한 자명하고 정상적인 이 세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꿈꾸고 있을 뿐이기에. 그 언어의 비밀들 속에서 만질 수 있게 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그래서 우리가 “무심코 만”지게 될 “평화롭게 잠든 사람의 부드러운” 즐거움을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이 ‘즐거움’의 세계에 대해 한마디만 더. 어쩌면 범박하다고도 느껴지겠지만, 언어란 결국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사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를 통해 무엇을 담던 간에, 그 속에는 자기 자신이 항상 있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씁쓸하게도 요 근래 몇 년간 문단을 휩쓸었던 무수한 말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얻었으며 건져낼 수 있었을까. 이미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의로움을 보아왔다. 올바름이란 나름대로의 가치를 분명히 지니지만, 때로는 올바름 그 자체가 문학이란 이름을 얻기는 어렵다. 지극히 주관적이겠지만, 문학이란 결국 언어 그 자체에 매달리는 어리석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황인찬의 시가 보여주듯이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란 정의(正義)의 문학이 아닌 문학의 정의(定議)일 따름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말은 정의(定議)가 자명하고 확정적인 형식으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의(正義)의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 즉 ‘결정되지 않은 형태’로 주어져야 할 다양한 잠재적인 정의(定議)‘들’이다. 그의 텍스트처럼 시인이 된다는 것이자 우리가 누려야 할 ‘즐거움’이란 항상 미지의 세계 속에 있을 것임으로.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문학의 정의(正義)라는 거대함이 아닌 사소하고 고요한 ‘희지’들을 꿈꾸어야 한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이제, 이 영리하고 영특하고 착한 아이의 말을 빌려 말해보도록 하자. “아무도 없는 교실에 종이 울리고 아무도 학교를 떠나지/ 않고 요새는 정말 애들이 큰일이다”(<역사수업>) 그러니까 똑똑, 아 아, 여기가 즐거우십니까?
    김정현

    김정현

    1979년 대전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 신수정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김영찬 계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전반적인 풍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경향의 작품이 등장하고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새롭게 그리고자 하는 의욕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판단도 든다. ‘‘희재’가 이룬 것과 ‘김지영’이 묻는 것-‘외딴방’과 ‘82년생 김지영’이 그리고 있는 파국의 지도’와 ‘비규정적 장소 위에서 울리는 언어-배음(倍音)-김행숙, 안태운, 한인준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이전과 구분되는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징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를 통해 우리 문학이 나아갈 바를 모색하고자 하는 의욕이 돋보였다. 반면 다소 거친 범주화나 이론에 대한 기계적인 적용이 아쉬웠다.

    최정화의 소설에 나타나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통해 우리 시대의 신경증을 분석하고 있는 ‘집 없는 시대의 파라노이아, 손님의 건축술’은 독창적이고 미시적인 텍스트 분석력이 눈에 띄었으나 하나의 키워드를 일관되게 밀고나가는 응집된 논리력이 약했다.

    결국 당선은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에 돌아갔다. 비평 역시 이론적 성찰 이전에 문학적 감수성을 요구하는 창작의 일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이 보여주는 황인찬의 시에 대한 매혹과 활달한 문체, 비평적 자의식은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때로 드러나는 공허한 수사와 감당할 수 없는 과장에 유의한다면 한국 비평계의 큰 자산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깝게 고배를 마신 응모자들에게는 아쉬움을,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 김정현

    김정현

    1979년 대전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그리 긴 생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나는 어두웠고 앞으로도 그닥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인간으로서 혹은 일상을 견디던 나와는 또 다른 나에게, 세상이 무채색이었다면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까. 언젠가부터 자각해왔던 그 균열은 타인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한 나에게 텍스트들은 스스로를 확인시켜 준 유일한 고유함이었다. 천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러한 나‘들’을 만났고 함께 울었다.

    눈 오던 날 들려온 믿기 어려운 소식에 과거의 기억들이 꿈결처럼 밀려왔다. 한동안 접어둔 일기를 펴보니 ‘나에겐 생을 살아가기 위한 분노와 힘이 필요해’라는 구절이 손에 잡혔다. 나는 자신의 나약함을 견딜 수 없었고,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공부와 음악은 스스로를 지탱할 이유가 되었다. “우리의 말이 참이라면, 불행히도 결코 끝내 이해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참이다”라던 니체처럼, 늘 항상 패배하지만 ‘언어’는 언제나 지속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아둔한 제자를 격려해주시는 신범순 선생님과 조영복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여전히 모자라지만 두 스승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부족했을 것이다. 대학원 시절 만날 수 있었던 선생님들과 동학들에게 감사드린다. 같이 음악하는 팀원들과 주위 지인들 그리고 오랜 친구인 성우가 기뻐해주었다. 문학을 공부한답시고 아둥바둥하는 자식을 걱정하시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면피한 느낌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 색깔을 부여해준 그분에게도. 헤매이던 글을 붙잡아주신 김영찬 선생님과 신수정 선생님이 안계셨다면 여전히 내 글은 머물 곳 없이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끝나지 않던 기나긴 터널에서 조금은 벗어난 느낌이다. 그저 약간 운이 좋았을 뿐이란 마음가짐으로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단지 읽고 또한 쓰며, 오롯이 불행하여 사랑하기에. 나에게는 오직 ‘그것’뿐이니까.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