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타임루프 영화?
청년시절 짐 자무시는 파리의 시네마테크에서 오즈 야스지로, 장 뤽 고다르, 로베르 브레송 영화에 심취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뉴욕대 티쉬 대학원 재학 중에 데뷔작 <영원한 휴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4년 선보인 <천국보다 낯선>으로 칸에서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네필들에게 알려졌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발화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죽은 시간'과 '일상성'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요소들은 이 후 자무시 영화의 인장이 되었다. 안토니오니의 미국식 버전으로 불릴만한 자무시 영화가 유럽의 모더니즘과 변별점을 지닌 지점은 팝음악을 비롯한 '대중문화'에 대한 유별난 애착이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죽은 시간'과 '일상성'으로 엮은 미니멀리즘 그리고 대중문화는 자무시 영화를 해석하는 키워드였다. 자무시는 최근작 <패터슨>에서 새로운 미학적 장치를 도입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이 변화에 주목한다면 기존의 자무시 작가론과 다른 층위의 해석을 시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영화라는 매체와 호응하면서 예술적 효과를 빚어내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패터슨>의 반복구조는 할리우드의 타임루프 영화들의 그것과 외견상 유사해 보인다. <사랑의 블랙홀>, <나비 효과>, <어바웃 타임>, <이프 온리>와 같은 타임루프 영화들은 동일한 시간과 사건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같은 상황 속에서 다른 결과를 유도해낸다. 타임루프 영화들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사랑의 블랙홀>에서는 성촉절 아침이 반복된다. 주인공 필 코너스는 잠에서 깨어나도 매번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아침에 호텔 방문을 나서면 반갑게 인사하는 남자와 마주치고, 취재하러 가는 길에서는 보험 판매원인 동창을 만나며, 물구덩이에 발이 빠지는 실수를 한다. 다음(혹은 같은 날) 날, 같은 시간에 만나는 사람들과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필이 다르게 반응하면서 같은 하루에는 미세한 차이가 발생한다. 대개의 타임루프 영화는 반복된 일상과 사건, 운명을 바꾸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패터슨>에서는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날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행위가 반복된다. 같은 날,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는 것과 다른 날, 비슷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서브 장르적인 관점에서 타임루프 영화의 반복된 일상은 주인공의 인격이나 인물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에 반해 <패터슨>의 반복은 인간 행위가 지니는 패턴의 유사성을 통해 우주적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반복 구조를 가진 영화들에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구제할 수 있는 상상 가능한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불가능한 판타지에 의존한 반복과 끊임없이 '주사위'를 던지는 니체적 반복. <패터슨>은 타임루프 영화가 의존하는 '벌거벗은' 반복을 뒤로한 채, 일상 속에서 '시 쓰기'라는 새로운 주사위 놀이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시 쓰기'라는 풍요로운 반복이 <패터슨> 안에서는 전혀 다른 형식들로 변주된다.
세 개의 패터슨
평생 누구와도 언쟁을 벌이지 않을 것 같고 남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시를 쓰는 특별한 버스 드라이버, 패터슨은 아담 드라이버라는 배우가 없었다면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며 영화의 운명도 그러했을 것이다. 2013년 이탈리아 영화 <헝그리 하츠>로 베니스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블루칩을 자무시는 영화가 아닌 TV 드라마 '걸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오디션을 거치지도 않고 <패터슨>에 곧바로 캐스팅된 드라이버는 배역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버스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자무시는 다른 목적으로 드라이버와 버스가 한 몸이 되길 원했다. 그는 버스에서 바라본 쇼트를 '시인의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비평가 테리 그로스와의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이렇게 말한다. "도시를 돌아다니는 거대한 이 기계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스 운전석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인의 시선과 일치하죠." 다다미 쇼트가 세계를 대하는 감독으로서 오즈 야스지로 자신의 시선을 대변했다면, 버스 드라이버 쇼트는 보들레르와 그 후예인 '산보객flâneur'들의 시선과 일치한다. 군중과 함께했지만 때로는 군중을 멀리서 관조하며 19세기 아케이드를 떠돌던 시인들은 현대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견자voyant'의 시선으로 세계의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포착하던 데카당과 댄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패터슨과 같은 일상의 시인들이 차지한다. 패터슨은 출·퇴근길에서 시를 구상하고 반려견 마빈과 함께 하는 저녁 산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리고 버스 운전석에서, 패터슨이라는 도시로 은유된 세계를 시인의 시선으로 응시한다. 21세기의 산보객, 패터슨은 이렇게 일상 속에서 예술과 함께 하며, 예술 속에서 삶과 조우한다.
패터슨은 뉴욕 맨해튼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대략 서울 근교의 수많은 소도시 중 하나쯤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패터슨에 사는 사람들은 대도시 뉴욕에 주눅 들지 않고, 한적하고 조용한 이곳의 역사와 문화에 나름대로 자긍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영화는 아이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는 파란만장한 삶의 복서 허리케인 카터, 'who's on first'(1루수가 누구야)라는 희대의 만담극을 만들었던 루 코스텔로, 비트 세대의 상징 앨런 긴즈버그 그리고 주인공이 사랑하는 윌리암 카를로스 윌리암즈와 그의 시집 '패터슨'을 동원해 이 도시를 소개한다. 뉴욕파(New York School)의 상징처럼 추앙받던 자무시에게 패터슨이라는 소도시는 충분히 예술가의 영감을 떠올리게 만든 공간이었으리라. 평소 자신만의 '비밀노트'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해왔던 자무시는 뉴욕이라는 대도시 곁에서 특별한 아우라를 뽐내는 이 소도시 속에 자신의 '대리인'을 데려다놓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일상을 대변하는 버스 노선과 그 위를 움직이는 버스 드라이버라는 매듭을 통해 '이야기'는 어느 순간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자무시는 아름다운 풍광과 흥미로운 사람들이 넘치는 일상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이 공간을 바라보면서 예술과 삶이 어우러질 수 있는 한 편의 영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정도면 도시 패터슨을 배경으로 사람 패터슨이 만들어나갈 '시의 세계'를 펼치기에 충분한 조건은 갖춰진 셈이다.
두 종류의 시(詩)
패터슨은 아침 6시 15분 정도면 일어나서 시리얼을 먹고 아내 로라가 마련한 도시락을 들고서 출근한다. 집과 버스 차고를 오가는 길에서 그는 시상(詩想)을 떠올린다. 패터슨의 시 세계 재료는 도시 패터슨에 내리쬐는 햇빛, 부는 바람 그리고 버스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다. 그는 이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성냥, 담배, 맥주라는 소재로 응축해 '러브 포엠'을 완성한다. 따라서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의 이야기 <패터슨>은 '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패터슨이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이며 영화의 소재 또한 시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의는 타당하다. 나아가 영화의 형식을 떠올려 봐도 '시적인 영화'라는 표현은 <패터슨>에 부합한다. 이처럼 우리는 영화를 비평할 때 종종 '시적poetic'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시적'이라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사전적 의미로 '시적'이라는 용어는 '시의 정취를 가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를 영화에 적용시켜보면 첫째, '이미지 자체가 시적이다.'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미지가 서정적 분위기나 감수성을 담고 있으며 때로는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뉘앙스를 내포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미클로스 얀초의 영화 세계를 정의하기에 알맞은 개념이다. 영화가 시적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시의 형식미를 차용했다는 뜻이다. 시는 단어, 행, 연과 같은 요소들을 통해 시의 리듬과 형식을 구축한다. 영화 역시 시가 그러하듯 프레임, 쇼트, 씬, 시퀀스와 같은 요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배치해 영화의 형식미를 창조한다. <패터슨>은 월요일에서 다음 월요일까지 8일을 8개의 시퀀스로 구성한다. 따라서 침대에서 매 시퀀스를 여는 패터슨과 로라의 쇼트는 8연으로 구성된 시의 첫 번째 행에 해당된다. 패터슨과 로라가 맞는 아침으로 시작된 '시'는 이후 '패터슨과 회사 동료 도니와의 대화', '패터슨의 시 쓰기', '출·퇴근길, 집 앞 우체통', '버스 차고', '산책' 이라는 '행'들을 반복하고 변주한다. 하루의 일과는 닥이 운영하는 바에서 나누는 대화로 구성된 행으로 마무리된다.
파졸리니는 말의 사전에서 단어를 끌어오는 문학과 달리 "시는 사전 자체가 부재한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시가 가진 창조성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그는 고전적 내러티브 세계와 결별하며 또 다른 의미의 '시적 영화'를 내세웠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서 '시적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와 아피찻퐁으로 대표되는 '디스포지티프(dispositif) 영화'로 이어졌다. 장 루이 보드리와 같은 현상주의자들은 디스포지티프(장치)의 의미를 "영사기, 스크린, 관객석, 어두운 공간이라는 조건들의 배열·배치가 영화를 발생시킨다."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호주 평론가 에이드리안 마틴은 이러한 정의에 예술가의 새로운 미학적 기준, 즉 '관객입장에서의 영화적 경험의 획기적 변화'라는 기준을 첨가한다.
디스포지티프 영화라 할 수 있는 아피찻퐁의 <엉클 분미>에는 내러티브의 선형성을 구축하는데 동원되는 고전적 의미의 시퀀스가 부재한다. 새로운 개념의 시퀀스들은 그 자체로 자족적이며 특별한 순서를 가지지 않은 채 어떤 시퀀스들과 병치되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관객은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이 시퀀스들을 재조립해서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키아로스타미의 유작 <24프레임>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시퀀스와 씬 자체를 파기하고 쇼트들로 파편화시킨다. 이 쇼트들 역시 완벽한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어떤 쇼트들과도 몽타주가 가능하다. 니콜라 레의 <안더스 몰루시아> 역시 더 이상 시퀀스라고 불릴 수 없는 9개의 '이야기 더미(stack)'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심지어 레는 매번 무작위로 이것들의 순서를 바꾸어 상영하기까지 한다. 이들 영화에서는 쇼트와 시퀀스의 연대기적 몽타주가 더 이상 의미를 생산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연과 행에 해당하는 시퀀스와 씬을 해체한 후, 관객 스스로가 이를 자율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새로운 '시적 영화'와 비교한다면 자무시의 <패터슨>은 꽤나 보수적이다. 그러나 자무시는 시를 단지 '감화'를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지 않는다. 패터슨의 일과는 강도적 차이를 가진 채 반복됨으로써 비슷한 두 상황 사이에 틈을 만들고 궁극적으로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리고 영원이라는, 차이를 지닌 반복적 패턴으로 나아간다. 자무시는 해가 떠오르고 지면서 계절이 반복되는 자연의 섭리를 일상 속에 투영함으로써 '시'라는 도구로 '우주적 진리'를 포획하려 한다. 그러므로 <패터슨>이 감동적인 이유는 단순히 시 형식의 차용에 있지 않은 것이다.
쌍둥이들의 의미
오프닝 씬. 로라는 아침에 출근하는 패터슨에게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한다. "멋진 꿈을 꿨어. 우리에게 아이가 둘 있는데 쌍둥이야. 만약 아이가 있다면 쌍둥이도 좋아?" 패터슨은 "쌍둥이 좋지. 한 사람에 하나씩"이라고 답한다. 이후 영화에서 쌍둥이는 수차례 등장한다. 시를 쓰는 소녀 쌍둥이, 출근길에 잠시 스친 중년의 쌍둥이, 바에서 만난 샘과 데이브 그리고 버스 운전 도중에 마주친 쌍둥이 자매. 그들을 바라보는 패터슨의 표정은 의미심장하다. 로라와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미래의 자녀들을 상상하는 것인지,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인지 패터슨의 시선과 표정만으로 관객은 쌍둥이의 명확한 의미를 읽을 수 없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쌍둥이에 관한 첫 번째 해석은 그것을 차이를 가진 반복의 철학적 개념으로 상정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자무시의 의도를 헤아려보는 것이다. 쌍둥이는 동일한 유전자로 인해 생물학적으로는 일종의 개체 반복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세계와 소통하며 살면서 차이를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 실제로 영화 속의 쌍둥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죽어가는 반복된 패턴 속에서 새계와의 작용, 반작용이 만들어낸 미세한 차이로 인해 개별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라서 사람들은 이내 잊고 지낸다. 자무시는 패터슨의 반복되는 일상과 쌍둥이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차이와 반복을 통한 영원회귀의 원리를 영화적으로 구현하려 했다. 미세한 차이를 가진 반복은 시나 영화의 구조, 심지어 타자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인용하는 일상적인 언어에도 적용된다. 이 차이와 반복이 만들어낸 진리를 쌍둥이는 가장 효율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무시는 니체와 들뢰즈의 개념을 영화적으로 되풀이하기 위해 쌍둥이들을 네 번씩이나 등장시켰을까? 의심이 드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해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자무시가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아무리 시를 영화로 구현하고 '시적인 영화'에 집착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가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시'가 아니라 '영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쌍둥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영화적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월요일 아침 패터슨은 쌍둥이에 관한 로라의 꿈 이야기를 듣고 출근하면서 중년의 쌍둥이를 바라본다. 이 장면에서 감정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초현실적인 전자음이 배경음악으로 등장한다. 화면에는 오하이오 블루팁 성냥을 소재로 한 사랑 시가 텍스트와 패터슨의 음성으로 동시에 지원된다. 그날 퇴근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들른 바에서 패터슨은 오랜만에 샘을 만난다. 샘은 쌍둥이 동생 데이브를 소개해준다. 이 장면은 '샘 앤 데이브'라는 1960년대 인기 듀오가 패터슨 출신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상기시킴과 동시에 영화 <패터슨>이 쌍둥이와 연관된 이야기일수도 있다는 가설을 심어준다. 버스 운전석에서 어린 여자 쌍둥이를 바라보는 패터슨의 시선은 첫 번째 중년 쌍둥이를 바라볼 때와 유사하다. 이 쇼트 바로 앞에서 패터슨은 구두 박스를 통해 삼차원을 인식하고 시간을 덧붙여 사차원 개념을 떠올리는 시를 구상한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 패터슨의 시점 쇼트는 광각렌즈를 사용한 듯 왜곡이 심해 건물들이 비뚤어져 보인다. 불안정한 심리상태나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때 주로 사용되는 광각렌즈는 평화롭고 일상적인 영화의 분위기와 매끄럽게 호응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운전 중인 패터슨의 옆모습을 보여줄 때에는 망원렌즈의 사용이 잦다. 망원렌즈는 특정 대상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동일시를 유발하고, 관객이 인물에게 감정이입하도록 유도하려는 목적 하에 주로 쓰인다. 그러나 패터슨의 하루는 불안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무시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의미심장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쯤 되면 동일한 신디사이저 배경음악이 선사하는 낯선 감정과 이야기를 접목시키고 싶어진다. 연이은 쌍둥이들의 등장은 영화의 흐름과 상관없이 잠시 동안의 긴장감과 더불어 약간의 공포감마저 불어넣는다.
영화 기법적 차원에서 쌍둥이들의 등장은 일종의 맥거핀macguffin이다. 표지mark와 탈표지demark 사이를 오가면서 서스펜스를 조장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맥거핀 효과로 인해 우리는 끝까지 쌍둥이들의 등장에 이목을 집중하게 된다. 자무시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관심을 끈 이후 히치콕의 방법론으로 관객을 자신의 영화에 붙들어놓는다. 그러나 자무시가 고안한 쌍둥이라는 장치는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사는 사자"를 잡기 위한 히치콕의 그것과는 다르다. 자무시의 쌍둥이는 한편으로는 맥거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와 반복'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영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쌍둥이는 맥거핀과 철학적 개념 사이에서 관객을 끊임없이 진동하게 만든다.
패터슨은 왜 비밀노트를 복제하지 않았을까?
패터슨은 참으로 사려 깊은 인물이다. 풍족한 살림살이가 아니지만 로라가 컨트리 가수를 꿈꾸며 기타를 구매해도 한마디 타박하지 않는다. 그녀가 방울 양배추와 체다 치즈가 들어간 정체불명의 파이를 저녁식사로 내놓을 때도 입에 맞지 않지만 물을 가득마시고 삼켜버린다. 산책할 때 역시 마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그리고 매일 같이 마빈이 우체통을 삐딱하게 만들어놔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곧장 세우고 집에 들어간다. 영화의 시작점인 월요일부터 로라는 패터슨에게 비밀노트를 복사해놓으라고 제안한다. 그녀는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 윌리암즈처럼 그의 시가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길 원한다. 그러나 마치 세상사에 달관한 듯 모든 것에 순응하던 패터슨은 로라의 제안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바쁘지 않을 때 복사하겠다고 마지못해 약속한다. '사건'이 발생한 토요일, 패터슨은 비밀노트를 항상 놔두던 지하 작업실이 아닌 소파 위에 두고 로라와 외출한다. 카메라는 앞일을 예견하듯 마빈과 소파 위의 노트를 번갈아 보여준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패터슨의 비밀노트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자연스레 눈치 채게 된다. 그러므로 이미 결말을 예견한 관객은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보여줄 패터슨의 태도에 더 집중하게 된다.
로라는 패터슨을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쓴 시를 나한테 읽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내가 기억할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러자 패터슨은 이렇게 응답한다. "괜찮아. 그냥 물위에 쓴 말일 뿐이야." 패터슨에게 시는 잔잔한 호수위로 돌을 던졌을 때, 만들어지는 각기 다른 문양을 가진 물결과도 같다. 패터슨은 사랑하는 로라에게마저 자신의 시를 들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의 세기가 매순간 달라지듯 자신의 감정도 그때마다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가 언어로 고정되는 순간, '시'는 더 이상의 질적 도약을 멈추고 화석화된 감각의 미메시스에 머문다. "사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에도 이념이 깃들여 있지 않다.(No ideas but in things)"라고 했던 패터슨의 멘토, 윌리암즈의 시적 신념의 요체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연히 홍차를 마시면서 맛본 마들렌을 통해 과거의 기억이 우리에게 침투한다."라고 했던 프루스트는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거꾸로 물질 안에 깃들여있던 기억이 신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도래하면서 우리는 세계를 체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 쓰기'는 이 감각적 경험을 회복하는 일과 다름없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로라는 '영원히 부치지 못한 편지'와 같은 패터슨의 사랑 시들을 읽지 못할 것이다. 생성, 변화하는 감각을 통해 형성된 감정은 결코 고정된 지표를 가지지 않는다. 폭포, 비, 가을 햇살에 담겨있던 감각과 감정들은 이제 자연의 시인이 된 패터슨에게 그대로 스며들 것이다. 그는 매번 자연이 품어 온 감각들이 자기 안에 도래하는 것을 느끼면서 읽히지 않을 시를 매 순간 새로 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를 충실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주사위를 던져야한다는 니체적 정언명령이 과거를 구제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패터슨은 이미 자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밀노트 사건으로 패터슨이 새롭게 깨달은 것은 시를 종이 위에 낱말로 고착시키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시의 본질에 위배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텍스트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시를 쓰는 행위는 시뿐만 아니라 삶을 구제하는 유일한 길이 된다.
<패터슨>이 감동적인 이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패터슨의 눈에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녀가 들어온다. 혼자 있는 소녀가 걱정된 그는 잠시 소녀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비밀노트에 시를 쓰는 소녀는 패터슨이 자기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소녀는 패터슨이 '폭포'(waterfalls)라고 오해할까봐 두 단어(water falls)로 이루어진 제목이라고 일러주면서 '물이 떨어진다.'라는 사뭇 감동적인 시를 들려준다. 자무시가 직접 쓴 소녀의 '시'는 영화 속에서 형태를 달리하면서 계속 반복된다. 빨래방에서 힙합 라임으로 랩하는 청년의 '시'에 감동받은 패터슨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패터슨은 묻는다. "여기가 당신 작업실인가요?" 그러자 청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데서나 생각나면 연습하죠." 패터슨이라는 공간에서 시를 쓰는 사람은 결코 패터슨 혼자만이 아니었다. 마리를 짝사랑하는 연극배우 에버릿은 술집 주인 닥의 표현처럼 줄리엣의 로미오이거나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하는 안토니우스이다. 장난감 총으로 손님을 위협하고 자해소동을 벌이다가 닥에게 핀잔을 듣고 난 후, 그는 "사랑 없이는 사는 의미도 없다."라는 문장을 연극 대사처럼 발화한다. 그동안 시를 써 놓았던 비밀노트를 마빈이 갈기갈기 찢어서 상심한 패터슨에게 에버릿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있잖아. 해는 매일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진다. 오늘만 날이 아냐"라고 위로한다. 자무시는 흔한 말들, 매일 쓰는 단어들로 이뤄진 일상의 언어가 때로는 보통사람들이 쓰는 '시'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를 쓰는 존재는 어쩌면 인간만이 아닐 것이다. 매일 우체통을 비딱하게 쓰러트리는 마빈의 반복된 행동이나 도시 패터슨의 사계절을 풍요롭게 하는 자연도 자신의 위치에서 그들만의 시를 쓴다. 이렇게 만물이 쓰는 시는 세계를 감싸고돌면서 우주적 보편성을 구성하는 원리가 된다.
에버릿과 헤어진 패터슨은 홀로 폭포 앞 벤치에 앉아 마음을 다스린다. 잠시 후 일본인 시인이 다가와 그에게 옆에 앉아도 되는지 양해를 구한 다음 윌리암즈의 시집 '패터슨'을 꺼내 읽는다. '패터슨'을 읽고 있던 시인은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에게 이곳에 사느냐고 묻는다. 기상학자 출신 시인 장 뒤비페와 뉴욕파 시인 프랭크 오하라에 대한 이야기를 패터슨과 나누던 도중 시인은 '아하'라고 읊조린다. 이윽고 시인은 마치 그의 상심을 알고 있다는 듯이 "가끔은 빈 노트가 많은 가능성을 주죠."라고 말하며 노트를 선물로 준다. 감사를 표하는 패터슨을 잠시 돌아보던 시인은 다시금 '아하'를 외치고는 자리를 뜬다.
실제로 비밀노트를 간직하고 있던 자무시의 분신들뿐만 아니라 패터슨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들만의 '시'를 노래하고 말하고 쓴다.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듯이, 사람들의 시 쓰기도 반복된다. 시인의 입을 통해 발화된 '아하'는 우연처럼 보이는 반복된 행동들이 사실은 보편적인 인류의 행동 양식임을 깨닫게 한다. 비밀노트가 있건 없건 간에 사람들은 술집 주인 닥처럼 'who's on first'를 시처럼 말하고 에버릿처럼 셰익스피어 연극에 나올법한 대사를 일상의 언어로 바꾼다. 이렇게 패터슨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시인이 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철학적 사유를 의미하는 '글쓰기'는 체험한 상황과 사건에 고정적인 '형식'을 부여하는 미메시스적 재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언제나 미완성으로 끝나는 형태여야 하며 태동하는 생성과 변화의 양상을 드러내야 한다. 패터슨이 상실한 '시집' 때문에 빠져든 멜랑콜리에서 벗어난 계기 역시 '빈 노트'가 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이 가능성은 그를 진정한 자유로 인도할 것이며, 빛과 공기와 물질이 생성하는 리듬 속에서 '시'가 편재(遍在)함을 깨닫게 할 것이다. 자무시는 강도적 차이를 지닌 반복이 우주의 원리이며 시가 추구하는 보편성이 이 원리와 맞닿아 있음을 한없이 부드럽게 속삭인다. 최첨단의 디스포지티프로 영화를 만드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패터슨 : 시를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시인 : 저는 시로 숨을 쉽니다.(I breathe poetry)
모두가 시인이 되는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이 혹은 영화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은 상상적 기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와중에 자무시의 <패터슨>은 잠시나마 시로 우리를 숨 쉬게 하며 위무한다.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이 시대에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아하!
김채희
1990년 부산 출생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재학
〈공동정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이야기하다.
영화를 공동 연출한 이일란, 이혁상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공동정범>은 국가폭력을 성찰하는 다큐멘터리,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작품이길 바란다." 영화를 본 관객은 그들의 의도대로 공동정범으로 구속되었던 다섯 사람 이외에 공권력도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한편으로는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폭력인 공권력이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공동정범>은 국가폭력을 되돌아보는 '성찰적 다큐멘터리'의 첫 번째 목적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영화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망라해 수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제는 자칫 관객의 피로도만 자극할 수 있다. 현명한 연출자들은 이를 피하고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영화의 한 축으로 설정했다. 그들은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의 입장이 충돌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을 영화에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상황을 재구성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고발, 성찰과 더불어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가장 필수적인 덕목인 사건의 '진실'에 대해 <공동정범>은 어떻게 접근하는가? 2000쪽이 넘는 검찰 조사기록이 끝내 변호인단에게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은 다섯 명의 피고인을 '공동정범'으로 기소했다. 쟁점은 여섯 명이 사망한 사건의 책임이 특공대와 농성자 중 어느 쪽에 있는가라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공동정범>의 전작에 해당하는 <두 개의 문>은 책임 공방 그 자체가 의미 없다고 결론 내린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진술을 해줄, 살아남은 농성자들은 감옥에 있고, 검찰의 조사기록은 누락된 상태에서 진실에 대한 접근은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호인과 인권단체 그리고 용산참사진상위원회가 벌인 현실에서의 진실 추적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다. 세상이 용산을 잊고, 언론의 관심도 이 사건에서 멀어졌지만 '영화'는 구속된 농성자들이 풀려날 때를 기다렸다.
<두 개의 문>의 배턴을 이어받은 <공동정범>은 '내부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의 목소리로 망루 안의 진실을 재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수많은 목소리들로 구성된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가 그 풍부한 아카이브로도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재현하지 못했던 것처럼, <공동정범> 역시 같은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7만 명이 넘게 관람한 <두 개의 문>과 비교했을 때, <공동정범>이 동원한 1만 명이라는 숫자는 실패라 규정지을 수 있는 또 다른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관련 영상, 증언, 기록물 그리고 한 맺힌 절규의 목소리로도 진실을 재구성하는 데 실패했으며 관객에게 호소하는 데도 실패한 이 영화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가?
브레히트는 죽은 동료들보다 오래 산 자신을 자책했다. 그는 꿈속에서 친구들이 이야기했던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말 때문에 자신이 미워졌다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토로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강한 자'라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브레히트처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며 그들이 더 강했더라면 이 사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출소하고 난 이후 누구도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큰 고통을 느꼈다고 말한다. 가슴속 회한을 털어놓을 길 없었던, 말을 잃은 자들은 종교에 귀의했고, 술로 연명했고, 사람들과 담을 쌓은 채 살았다. <공동정범>의 연출자들은 '말의 통로'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두 개의 문>이 광장과 영화의 언어로 외연을 확대하고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 집중했다면 <공동정범>은 그 반대의 전략을 취했다. 대중의 관심과 참여를 통해 정치, 사회적 이슈를 자극했던 전작이 그 결과로 '분노'와 '연대'를 얻었다면, <공동정범>은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를 영화에 가득 채워 서로의 상처를 보듬게 했다. 공적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이행한 <공동정범>은 이렇게 실패를 통해 '치유'라는 예술의 오래된 기능을 탐색한다.
김채희
1990년 부산 출생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재학
김시무 영화평론가
이번에 응모된 원고는 모두 33편이었다. 이 가운데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다룬 장문평론이 무려 여덟 편이나 되었다. 단평도 3편이었다. 다음으로 장률 감독의 '군산'을 비롯한 그의 작품세계를 포괄적으로 다룬 장평이 3편, 단평이 2편으로 그 뒤를 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세계를 다룬 장평과 '죄 많은 소녀'를 다룬 장편이 각각 2편씩 있었다. 이는 그만큼 예술성과 작품성을 담보한 작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지표라고 하겠다. 이 가운데 다음 5편이 특히 주목할 만했다. '미완의 누빔점, 완성된 몽상'이라는 화두로 '버닝'을 풀어간 평론과 사르트르의 존재론으로 '버닝'의 본래성을 살피고 있는 평론은 나름 신선해보였다. '더 테이블'에서 언어보다 강한 침묵을 '짐작'으로 읽어낸 글과 '죄 많은 소녀'에서 영화적 요소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낸 글도 인상적이었다.
최종 선택은 '시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짐 자무시의 '패턴슨'을 분석한 평론이었다. 영화는 뉴욕 맨해튼 근교의 소도시 '패터슨'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곳에서 버스기사로 일하는 '패터슨'은 운전을 하는 틈틈이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비밀 노트에 적는다. 상기 글은 패터슨의 일상적 행위의 의미를 매우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영화매체에 대한 평자의 이해력이 일정수준에 올랐음을 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글은 해당 영화를 직접보지 않은 독자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이 있다. 평론의 순기능 중 하나가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을 비전문 독자에게 안내하는 것이라면, 이 글을 그런 점에서 매우 적합한 평론이라 여겨진다.
김채희
1990년 부산 출생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재학
이 부끄러움을 어찌할 것인가? 나의 ‘행복극장’은 12월 초에 시작되었다. 투고할 원고를 퇴고하고 난 후 잠시 상상의 나래를 폈다. 만약에 당선된다면 갑자기 생긴 상금을 어찌할지, 축하 인사에는 어찌 응대해야할지 즐거운 플래시 포워드를 펼쳤다. 그러나 정작 ‘행복극장’의 내러티브는 오프닝 시퀀스와 전혀 상관없이 흘러갔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업무와 대학원 수업에서의 누적된 과제들로 인해 오프닝 시퀀스의 화려한 플래시 포워드는 일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까맣게 잊고 있던 상상의 플래시 포워드가 낯선 전화번호를 타고 느닷없이 내게 도래한 순간, 나는 그만 부끄러워졌다. 나의 성과는 당첨인가? 당선인가? 혹은 그 사이 어디에서 길을 잃은 결과인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부끄러움은 고개를 더욱 쳐들었다. 그래서 텅 빈 지식 창고에서 간신히 꺼낸 몇 줄의 문장으로 얻은 이 영예가 더욱 나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끝없는 부끄러움의 원천임과 동시에 영화를 공부한다는 사실에 자존감을 불어넣어준 부산대학교 예술문화영상학과 서대정 문관규 조선령 교수님그리고 인생의 멘토인 최찬열 선생님께 가장 먼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더불어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언니 이모 이모부 친구들 그리고 나의 부끄러움을 키우는데 한몫했던 지식창고가 충만한 대학원 선생님들과 교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지금 당장은 어찌해볼 길 없는 부끄러움을 조금은 덜어낸 먼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서 오늘 다시 출발점에 서려고 한다. 나의 부끄러움이 담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리길, 더불어 오늘의 부끄러운 영광이 먼 바다로 향해 나아가려는 나 자신에게 생의 의지를 불러오길 조심스레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