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오즈

by  성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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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사평
  • 당선소감
  •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그 여름, 나는 구에서 주관하는 주거 사업의 세입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독거노인의 남는 방을 청년들에게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세주는 하우스 쉐어링 사업이었다. 입주 희망 신청서에는 값싼 임대료를 지불하는 대신 노인의 말벗이 되어주거나, 스마트기기 사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혼자 오래 살았던 어르신들이라 성미가 까다로워요.

    신청서를 작성하는 나를 보며 구청 직원은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어르신들 성질에 질려서 계약을 중도 파기하는 학생들도 있는데, 그런 일이 있을 때 제일 곤란해지는 건 중간에서 실무 처리 하는 우리거든.

    직원은 계약을 파기하지 않을 확신이 있는지 몇 번이고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겐 주거 환경이나 집주인의 성정을 따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 해 봄에 나는 질식사한 사람을 보았다. 그렇게 죽은 사람을 본 건 그 때가 두 번째였다.

    엄마가 반년 간 기거했다던 정선의 모텔은 어두웠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6평 남짓한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스페이드 문양의 비키니 옷장이 한쪽 벽에 세워져 있었고, 녹아내린 장판에 타다 만 번개탄이 네 개 놓여 있었다. 모텔 사장은 그 방에서 세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두 남자와 엄마.

    김미지. 죽은 여자 이름이 정말 김미지 맞아요?

    오염된 장판을 변상하라는 사장에게 나는 재차 물었다. 내가 알던 엄마는 그런 곳에서 하루도 견디지 못할 사람이었으니까. 라벨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각을 맞춰 매니큐어를 정리하고, 화장실 손잡이도 크리넥스 티슈로 여러 번 문질러 닦아야 겨우 잡던 엄마가 토굴 같은 방안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사장은 비키니 옷장에서 인조가죽으로 된 숄더백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 안엔 크리넥스 티슈와 색이 다른 립스틱 두 개, 그리고 전당포 상호가 새겨진 라이터가 한 움큼 들어 있었다.

    외조모의 귀금속 가게를 담보로 잡은 것이 시작이었다. 카지노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타고 다니던 세단을 팔고, 종신 보험을 해약해 돈을 구하고, 그마저 떨어졌을 때는 핸드폰과 입고 있던 명품 바지까지 전당포에 맡기며 돈을 마련했다.

    죽어서도 돈이 드는구나.

    엄마의 장례비와 밀린 모텔비를 정산하며 나는 중얼거렸다. 엄마와 남자들은 대부 업체로부터 사채를 쓰고 있었다고 했다. 원금보다 이자가 더 큰 빚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카드 회사에 전화를 돌려 신용 한도를 최대로 올리고, 친척에게 돈을 빌리고, 전세 집의 보증금을 뺀 후에도 원금은 끝내 상환하지 못했다.

    집을 내놓은 뒤, 나는 강북에 사는 이모 집에 들어갔다. 이태 전 재혼한 이모는 학원 강사인 남자와 그가 데려온 중학생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모부라고 불러요.

    이모보다 두 살이 많다는 남자는 친절했고, 늘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를 대했다. 그의 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이좋은 부녀였고, 이모가 늦게 퇴근하는 밤이면 둘이서 심야 영화를 보러 가거나 야식을 시켜 먹곤 했는데, 그때마다 넉살 좋게 나를 챙겼다.

    하라 씨도 우리랑 같이 극장 갈래요?

    하라 씨도 이거 같이 먹을래요? 맛있는데.

    내가 사양하면 그들은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다가가긴 어려웠지만,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과 달리 이모는 자주 석연치 않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곤 했다. 그 집엔 방이 두 개뿐이었다. 안방은 이모 부부가 썼고, 화장실 옆 작은 방은 남자의 딸이 썼다. 작은 방을 내게 양보하자는 남자를 향해 이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차피 잠깐 있다 갈 텐데.

    며칠 후, 남자는 실내용 텐트를 하나 사와 거실에 설치했다. 이모의 집에서 지내는 줄곧 나는 그 텐트 안에서 생활했다.

    텐트에서 지낸지 두 달이 지났을 때, 이모가 불쑥 텐트 안으로 들어와 말을 걸었다.

    너 요한이 돌잡이 때 뭐 집었는지 기억나니?

    이모는 물었다. 이모의 시모가 갑작스럽게 방문했던 날이었다. 경북 상주에서 올라온 남자의 어머니, 나의 사돈어른은 거실에 자리 잡은 텐트와 그 안에 있는 나를 번갈아 보다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사돈어른이 한숨을 내쉬고, 혀를 차는 소리를 나는 텐트 안에서 전부 들었다.

    복주머니 집었잖아. 기억 안 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는 먼 데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때 참 좋았는데.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요한이 복되게 살아가길 기원했어. 죽은 네 이모부도, 외할머니도, 너희 엄마도. 네가 동생 안고 찍은 사진도 있는데 기억나니? 그 사진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이모는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어렵게 마련한 돈이라고 이모는 말했다.

    그렇게 좋았는데, 우리 왜 이렇게 된 걸까 하라야.

    대답 대신 나는 무릎을 가슴 쪽으로 구부렸다. 이모와 나 둘이 있기에 텐트는 비좁았다.

    이모가 마련해준 보증금으로는 구할 수 있는 방이 없었다. 하우스 쉐어링 공고를 보고 무작정 구청에 찾아간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걱정스럽게 나를 보는 구청 직원에게 신청서를 내밀었다.

    구청에서 연락이 온 건 신청서를 제출하고 2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하우스 쉐어링을 했던 집은 북아현동에 있는 연립주택이었다. 부엌을 겸한 거실을 끼고 두 개의 방이 나란히 붙어 있는 작은 평수의 투 룸. 그 집에 할머니 혼자 살았다. 이복례. 구청 직원이 일러준 집주인의 이름은 그러했다.

    그 할머니는 신청 안할 줄 알았는데.

    계약서를 넘겨주며 구청 직원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워섬겼다.

    원체 사람이랑 어울리길 성가셔하는 어른이거든. 복지과 직원들이 찾아가면 문도 안 열어 줘요.

    서류 마지막 장에는 할머니가 제출한 신청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공란이 많은 신청서였다. 혼인 여부도, 부양가족 인적 사항도 전부 빈칸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채워져 있는 항목은 질병의 유무를 묻는 비고란이었는데, 그 칸에 볼드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82년 인공심장 박동기 삽입술 받음

    가끔 호흡곤란이 올 때가 있나 봐요.

    직원은 비고란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다.

    아가씨는 담배 안 피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깔끔하고, 깐깐한 노인이라 호흡장애 외에는 신경 쓸 만한 게 없을 거라고 직원은 덧붙였다.

    이복례 할머니의 집은 무악산 아래에 있었다. 한 손엔 타투 머신과 니들, 잉크를 넣은 가방을, 다른 손에는 옷가지를 넣은 캐리어를 끌고 할머니 집으로 통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노상의 과일 트럭에서 자두를 팔고 있었다. 빈손으로 가기 뭣해 멈춰서 자두를 한 봉지 샀다. 봉지 입구에 코를 대자 달고 향긋한 냄새가 훅 풍겼다. 벌써 여름이네. 폴로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근린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셔틀콕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할머니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움푹 들어간 초인종은 아무리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계세요, 부르며 한참 문을 두드리자 누군가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은발의 노인이었다.

    이복례 할머니?

    내 물음에 그녀는 대답 대신 현관문을 조금 더 열었다. 할머니의 외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키가 크고, 뼈대가 가는 체형에, 짙게 그린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강한 인상을 풍겼다. 할머니는 목이 다 덮이는 반팔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 날이 무더웠는데도 그녀는 더운 기색 없이 연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짐이 그것뿐이냐?

    할머니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훑어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노골적이고 집요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눈길을 거두고 들어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집안에 들어서자 향내가 은은하게 풍겼다. 줄기를 떼어낸 꽃을 거실에 말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냄새였다. 분홍 보자기 위에 펼쳐놓은 꽃들은 색도 종류도 다양했다. 베란다 창틈으로 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꽃들이 모양이 바꾸며 흩어졌다.

    생각보다 좁구나.

    생각하며 나는 집안을 조용히 누볐다. 금성 냉장고와 브라운관 TV, 흰 레이스 천을 씌운 비닐 소파…… 옛날 통속극에 나올법한 가구들이 집안 이곳저곳에 정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오래된 세간 틈에서 유독 튀었던 건 거실 중앙에 놓인 나비장이었다. 자개로 만든 모란이 겉면에 장식되어 있고, 3칸의 서랍마다 나비 모양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장. 볕이 들어올 때마다 자개장식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지 말고 앉아라.

    이곳저곳 서성이는 나를 향해 할머니가 소리쳤다. 눈치를 보다 소파 왼편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할머니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누군가와 어울리길 성가셔하는 사람. 구청 직원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소파의 끝과 끝에 나란히 앉아 할머니는 정면을, 나는 스마트 폰을 응시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저 꽃들은 왜 말려놓은 거예요?

    침묵 끝에 내가 먼저 말문을 뗐다. 할머니는 나를 힐끗 보더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압화 만들려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 동네는 분리수거 배출일이 언제인지, 도울만한 집안일은 있는지, 주방기구나 세탁기를 함께 사용해도 괜찮은지……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았다. 할머니의 집에서 육 개월을 살기로 계약한 이후였다. 막역한 사이는 되지 못해도 한 집에 사는 동거인으로서 가깝게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살갑게 질문을 던지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할머니는 대답 없이 침묵만 유지했다. 나는 구청 직원에게 전해들은 할머니의 심장 질환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했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어요? 같이 병원에 가거나, 제 때 약을 챙겨드려야 하거나 그런 것들요.

    그 물음에 내내 말이 없던 할머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적적하고 사람 손이 필요해서 세입자를 들인 게 아니라.

    그녀는 싸늘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이걸 하면 보조금이 나온대서. 그래서 하는 거다.

    사나운 얼굴로 할머니는 못 박아 말했다. 그녀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내게 적시했다. 식사는 알아서 해결할 것, 허락 없이 사람을 들이지 말 것, 벽체가 얇은 집이니 통화는 작은 소리로 할 것.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방에는 들어오지 말 것. 할머니는 마지막 사항을 특히 강조했다.

    너 혹시 담배도 피우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 그럼 됐다, 말하며 나란히 붙은 두 개의 방 중 왼편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저기가 네 방.

    방문을 열자 매캐한 냄새가 훅 밀려왔다. 오래간 창고로 썼다는 방안에는 말려놓은 고추며 둘둘 말아놓은 전기장판, 녹이 슨 빨래 건조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채반에 벌려놓은 고추를 거실로 옮겨 놓으며 할머니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고추를 모조리 치우고,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켜도 냄새는 빠지지 않았다.

    보조금이 뭐라고. 괜한 일을 벌여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할머니는 코를 움켜쥐었다. 주변을 정리하자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할머니는 이불과 요를 꺼내와 내게 건넸다. 인견으로 짠 얇은 여름 이불이었다.

    배기면 말해라. 매트리스 구해다 줄 테니.

    무심하게 말한 뒤, 할머니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얼떨떨해진 채로 매캐한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방안에 서 있었다. 캐리어 손잡이에 노상에서 산 자두 봉지가 걸려 있었다. 봉지 안에서는 여전히 달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와 함께 먹을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괜한 일을 벌여서는…… 할머니가 웅얼거리던 말이 속에서 맴돌았다. 말린 고추냄새가 나는 방안에 앉아 자두를 하나씩 꺼내 먹었다.

    이젠 돌아갈 곳도 없으니까.

    한입 크게 자두를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덜 익은 자두는 시고 떫었다.


    *


    할머니의 요구대로 나는 눈에 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집안에선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 다녔고, 식사는 편의점이나 방안에서 조용히 해결했다. 욕실이나 주방을 쓴 뒤에는 휴지나 수건으로 물기를 깨끗이 훔쳐내곤 했는데, 잠결에 화장실에 들를 때도 무의식중에 물기 없는 세면대를 닦아내 흠칫 놀랄 때가 있었다. 이모의 집에서 지낼 때 들어버린 습관은 그새 내 몸에 각인처럼 배어 있었다.

    할머니는 말이 없었고, 수도승처럼 조용히 생활했다. 그녀와 나는 하루에 세 마디 이상 주고받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문을 닫을 때는 소리 나지 않게 닫아라, 설거지한 그릇은 제자리에 두어라 같은 다분히 형식적인 대화였다. 그 집에서 지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어디선가 매트리스 하나를 구해와 내가 지내는 방에 힘겹게 설치해주었다. 주워온 것이 분명한, 낡고 지저분한 매트리스였다.

    그나마 멀쩡한 걸 골라왔는데…… 모양새는 이래도 쓸 만할 거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에 가만 누워 있으면 할머니 방에서 나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쌕, 쌕 하고 가쁘게 숨을 뱉는 소리였다. 숨소리는 주로 새벽에 들렸고, 그때마다 잠에서 깨어 한참을 뒤척여야했다. 옆방으로 가 할머니의 병색을 살펴야 하나, 고민하다가도 그녀가 내게 엄포했던 사항들을 떠올리면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쌕 쌕 하는 천명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그럴 때면 나는 캐리어 깊숙이 숨겨놓은 담배를 꺼내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리고 할머니의 호흡곤란이 잦아들 때까지 연립 앞 놀이터에서 천천히 담배를 태웠다. 서로의 생활에 발을 담그지 않고, 세입자와 집주인의 명분으로 한시적 동거하는 것. 그렇게 호의도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할머니와 나는 한 집에서 살아갔다.


    에어컨이 없는 집은 한낮엔 견딜 수 없이 무더워 그 여름내 나는 하루에 세 번씩 샤워를 했다. 유독 습한 팔월이었다. 찬물을 끼얹고 나와도 얼마 안 있으면 불쾌할 정도로 온몸이 끈적해졌다.

    또 씻었냐.

    화장실에서 나오는 나를 향해 할머니가 넌지시 말했다. 그녀는 나비장 위에 놓인 손거울을 보며 공들여 눈썹을 그리고, 정수리에 헤어피스를 붙여 머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에 그녀는 연립 뒤편에 있는 산책로로 산보를 나가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목욕 바구니를 들고 나갈 때가 있었는데, 돌아올 때면 그 바구니에 여름 꽃이 한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모아온 생화를 말리고, 습자지 사이에 넣은 뒤 압축하는 게 할머니 일과의 전부였다.

    더워서요.

    나를 빤히 보는 할머니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평소에도 그녀는 물을 너무 낭비하는 게 아니냐고 자주 나를 다그치곤 했는데, 그날은 잔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젯밤엔 어디 갔다 온 거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던데.

    할머니의 물음에 숨이 턱 막혀왔다.

    편의점에 다녀오느라…….

    대답을 얼버무리며 빠르게 방으로 향했다.

    얘.

    방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할머니가 다시 불러 세웠다. 담배 피운 걸 들킨 걸까, 긴장하며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건 언제 새긴 거냐.

    할머니는 내 허벅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놀라 서둘러 바지를 끌어내렸다. 왼쪽 허벅지엔 손가락 세 마디 길이의 작은 타투가 있었다. 대에 뾰족한 가시가 촘촘하게 달린 보랏빛 엉겅퀴. 허벅지에 길게 나 있는 흉터를 감추기 위해 처음으로 새긴 타투였다.

    예전에요.

    그런 거 하려면 얼마나 드냐.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멀뚱히 서 있는 나를 향해 할머니는 되물었다.

    돈. 얼마나 필요하냐고.

    모르겠어요. 이건 제가 직접 새긴 거라…….

    네가?

    할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내 허벅지를 자세히 살피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유튜브에서요.

    그게 뭐냐?

    영상을 공유하는 사이트라고, 그곳에서 타투 강습을 보고 따라했다고 나는 답했다.

    관심 있으세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너한테 괜한 말을.

    그녀는 여러 차례 고개를 가로젓다가 목욕 바구니를 들고 성급히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할머니가 문 밖에서 신발을 꿰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세로로 길게 난 우툴두툴한 흉터가 만져졌다. 오래전 생긴 상처였다.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딱딱한 매트리스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커튼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빛줄기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와중에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비몽사몽간에 묻자 나, 라고 할머니가 문밖에서 대답했다. 남아 있던 수마가 한꺼번에 달아났다. 한 달을 살았지만, 할머니가 내 방문을 두드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허겁지겁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암것도 들여놓지 않고 사는구나.

    할머니는 방 안을 힐끗 둘러보며 말했다. 플라스틱 도시락 통, 딱딱하게 마른 수건, 찌그러진 맥주 캔…… 칩거의 흔적들이 매트리스 주변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할머니는 문 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 들어오라고 말해도 한사코 마다하며 고집스럽게 서 있을 뿐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할머니는 팔짱을 끼고 서서 말을 고르더니 느닷없이 종이봉투를 하나 들이밀었다. 봉투 안에는 천 원권, 오천 원권, 만 원권 지폐가 뒤섞여 들어 있었다. 십이만 원이었다. 방을 비우라는 신호인가 싶어 급히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쭈뼛대며 말했다.

    내 몸에도 그거 하나 새기고 싶은데.

    할머니는 내 허벅지를 가리켰다. 타투요?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돈이 부족해서 그러냐?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타투는 왜요……?

    내 물음에 할머니는 한참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지우고 싶은 게 있다.

    그녀는 검지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러 보였다.

    여기부터.

    검지는 가슴을 지나 오른쪽 늑골 위에서 멈춰 섰다. 할머니가 입은 터틀넥 위에 가는 선이 생겼다.

    여기까지.

    할머니는 손가락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오래간 대고 있었다.

    나도 문신이 있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해서 한 건 아녔어.

    평소와 다르게 자꾸만 주저하고 머뭇대는 할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할머니는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


    가방을 열어 잉크와 일회용 니들을 꺼내고, 코일머신에 라이너 니들을 끼운 뒤 고정했다. 머신을 작동시킬 때마다 날카로운 구동음이 들려왔다. 니들과 팁이 단단히 고정되었는지, 니프가 머신에 알맞게 결합되었는지 나는 몇 번이고 꼼꼼히 살폈다. 할머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 내 행동을 하나하나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기존에 있던 타투 위에 새로운 타투를 덧씌우는 커버업을 원했다.

    그건 너무 어려운데요.

    사람의 몸이 아닌 고무판에 몇 번 연습해본 게 다라고 답해도 할머니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녀의 피부는 살성이 좋지 않았고, 잔주름도 짙었다. 바늘이 들어갔을 때 가해질 고통이 다른 사람들보다 클 게 분명했다. 할머니가 감내해야 할 고통도 염려되었지만, 그보다는 내가 저지를지 모를 실수 때문에 긴장되었다.

    많이 아플 거예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내게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괜찮대도.

    고집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할머니에게 한풀 꺾여 결국엔 무엇을 새기고 싶냐 물었다.

    보통은 무얼 새기냐.

    좋아하는 문구나 그림 같은 걸 새기죠.

    좋아하는 것……. 할머니는 고민하다 나비장 안에서 무언가 꺼내왔다. A3 사이즈의 두툼한 스크랩북이었다.

    조심해서 봐라.

    스크랩북을 건네며 그녀는 당부하듯 덧붙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겼다. 페이지마다 화지로 감싸 보관한 압화와 마른 들풀들이 꽂혀 있었다. 스크랩북에 보관된 꽃은 대체로 들에서 피는 것들이었다. 꽃과 풀은 저마다 생생했고, 그 색이 온전했다. 할머니는 그 꽃들을 몸에 새기고 싶다고 했다.


    전사를 몸에 찍기 전, 나는 할머니에게 윗옷을 벗어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옷을 벗지 못한 채 한참 머뭇댔다.

    흉할 텐데.

    기존에 있던 타투가 마음에 차지 않을 때 사람들은 커버업을 하곤 했다. 할머니도 그런 경우일거라 생각했다.

    괜찮아요.

    주춤대는 할머니를 향해 나는 가볍게 말했다. 오랫동안 망설이다 할머니는 터틀넥을 천천히 벗었다. 옷을 벗자마자 오른쪽 빗장뼈 아래 큼직하게 박힌 일어 레터링이 먼저 눈에 띄었다.

    くそ

    가슴부터 늑골까지 이어져 있는 여러 개의 문신들은 누군가 장난삼아 한 낙서처럼 무늬도 엉망이고, 잉크도 심하게 번져 있었다. 의미도, 형태도 알 수 없는 문신들보다 더 눈길을 끈 건 심장이 있어야할 곳에 심장 대신 붙어 있는 인공 박동기였다. 할머니의 얇은 피부 밑에서 박동기는 붉은 불빛을 내며 깜박이고 있었다.

    흉하지?

    할머니가 물었다. 그녀의 몸 이곳저곳 엉터리로 새겨진 문신들에 적잖이 놀랐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바늘이 지나야 할 면적은 예상보다 넓었다. 숨을 고르며 전사액을 바르고, 압화를 본 뜬 전사지를 가슴과 빗장뼈 아래 꼼꼼히 붙였다. 외곽작업을 시작하기 전, 나는 바늘이 들어갈 자리를 손등으로 다시 한 번 쓸어보았다. 할머니의 가슴팍에 소름이 돋았다. 문신 흉 때문에 오래간 곪고 굳은 피부가 피막처럼 얇아져 있었다. 바늘을 꽂은 코일머신을 가슴에 가져다대자 할머니는 몸을 움찔댔다.

    움직이면 안돼요.

    내 말에 할머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살갗에 손상이 가지 않을 만큼 약한 세기로 코일머신의 전압을 조절했다.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바늘이 피부에 빠르게 박히는 느낌이 조금씩 전달되었다. 할머니는 참을성이 좋았다. 중간 중간 어깨를 움츠리거나, 입술을 깨물긴 했지만 방해가 되진 않았다. 빗장뼈부터 천천히 꽃의 윤곽을 새겨 넣는 동안 그녀는 미동도 없이 꼿꼿이 누워 있었다. 사람의 피부는 고무판 질감과는 달라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살의 감촉과 뼈의 단단함이 느껴질 때마다 손이 떨리고, 땀이 맺혔다. 입을 앙다물며 통증을 참는 할머니보다 더 긴장한 건 나였다. 땀을 뚝뚝 흘리는 나를 할머니는 빤히 바라보았다.

    아파요?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젓더니 말을 이었다.

    너 사과가 웃으면 뭔지 아냐?

    네?

    사과가 웃으면…… 풋사과다.

    그 말을 하며 할머니는 농담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긴장 좀 풀어라.

    그녀는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과가 웃으면 풋사과. 내가 들었던 농담 중 가장 싱거운 농담이었지만, 그 말에 긴장했던 몸이 서서히 풀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나는 테두리를 새겨나갔다. 험하게 새겨진 일어 레터링 위에 작은 꽃이 새겨졌다.

    침착하게 고통을 참던 할머니가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 건, 빗장뼈 부근의 외곽작업을 막 마쳤을 때였다. 고르게 이어지던 호흡이 한순간 거칠어지고 인공 박동기가 기계음을 내며 깜박였다. 괜찮으세요? 소리쳐도 할머니는 의식 없이 가쁜 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그녀의 입술 틈으로 맑은 침이 줄줄 새어나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력하게 괜찮냐고 되묻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괜찮아요?

    할머니가 몸을 뒤틀며 발작을 일으키던 그 순간, 오래 전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세탁기 안에 웅크리고 있던 요한, 창백한 그 애의 얼굴과 세탁기 안을 들여다보며 비명을 지르던 엄마, 집안에 쳐진 폴리스라인……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것들이 뒤엉키며 서서히 아득해졌다.

    괜찮아요? 괜찮냐구요?

    할머니를 향해 지르던 고함은 울부짖음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정신 좀 차려요, 소리치는 내 팔을 붙잡으며 할머니는 다급하게 무언가를 가리켰다. 나비장이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 허겁지겁 서랍을 한 칸씩 뒤졌다. 서랍 가장 아래 칸에 소형 네블라이저가 들어 있었다. 내가 그것을 찾는 동안 할머니는 물밖에 오래 놓아둔 고기처럼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떨고 있었다. 동공은 풀려 있었고, 입술 주위엔 푸른 기운이 돌았다. 나는 서둘러 네블라이저를 할머니 입에 물렸다. 무릎이 달달 떨렸다. 후우우. 잠수를 하다 뭍으로 나온 사람처럼 할머니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아. 그렇게 긴 시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다보니 거칠던 숨도 서서히 잦아들고, 판막의 기계음도 희미해져갔다.

    괜찮아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벗어놓은 터틀넥을 도로 입었다.

    구식이라 그런다. 밧데리가 고장 난 후론 이렇게 숨도 안 쉬어지고, 몸도 떨리고.

    할머니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말끝에 호흡곤란의 잔류가 묻어 있었다. 빗장뼈 쪽 라인작업을 겨우 마친 후였다. 호흡이 가빠질 때마다 오류를 일으키는 박동기, 얇고 회복속도가 느린 피부 때문에 작업은 더디고 고통스럽게 진행될 것 같았다. 짧으면 한 달 길면 세 달까지 지체될 커버업 작업을 할머니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할머니, 힘들면 여기서 그만둘까요?

    물티슈로 빗장뼈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왜, 돈까지 받았는데 물리려고?

    그녀는 나를 살짝 흘긴 뒤, 손거울을 이리저리 돌리며 타투를 비추어 보았다. 외곽뿐인 꽃들은 아직 조악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녀는 거울을 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작고 둥근 손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할머니,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요?

    오즈.

    할머니가 말했다. 오즈. 뜬금없는 대답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당황한 나를 향해 할머니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오즈. 그게 내 이름이야.


    사위가 어두워져 창밖으로 산의 실루엣만 간신히 보였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할머니는 내 손에 무언가 들려주었다. 꽃 모양 모나카였다.

    고맙다.

    뒤돌아서며 그렇게 말한 것도 같은데, 하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딸기 향이 나는 모나카를 입에 넣었다. 달달한 찹쌀가루가 입천장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혀로 살살 모나카를 녹여낼 때마다 자꾸 그 이름이 떠올랐다. 오즈.

    할머니는 자신을 오즈라고 불렀다.

    할머니의 고집스런 얼굴과 받침 없는 부드러운 이름은 좀처럼 매치되지 않았다. 그렇게 오즈, 오즈. 되뇌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몸이 떠올랐다. 노인의 몸을 만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늙고 주름지고 굴곡진 몸. 그 몸을 덮고 있던 유추하기 힘든 과거의 흔적들. 나는 스마트폰으로 할머니의 빗장뼈 아래 새겨져 있던 레터링의 뜻을 검색해보았다.


    くそ [糞] 똥; 대변


    이국의 언어와 그 뜻을 한참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잘못된 표기가 아닐까 싶어 다른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뜻을 검색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존재를 저주하고 부정하는 뜻의 속어.

    단어의 속어와 예문까지 너무도 친절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쿠소. 쿠소. 번역기를 통해 일어 발음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이런 것을 할머니 몸에 새긴 사람은 누굴까. 끔찍하고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흉한 것을 본 사람처럼 나는 서둘러 팝업창을 닫았다. 모나카의 단맛이 여전히 입안을 감돌고 있었다.


    *


    이후에도 나는 할머니의 몸 상태를 살피며 간격을 두고 꽃을 새겨주었다. 두 번째 작업을 하던 날은 처음보다 더 많은 준비를 했다. 방에 있던 매트리스를 끌어 거실에 가져다 놓은 뒤, 그 위에 할머니를 눕혔다. 볕이 잘 드는 자리였다. 할머니는 지난번보다 편안해보였다.

    바람이 부네.

    창밖을 보며 할머니가 말했다. 누워 있는 할머니 뒤로 숲이 울창했다. 바람이 불때마다 나뭇잎이 맞부딪히며 쏴아아하는 소리를 냈다. 청량한 하늘 아래 나무가 고요히 흔들리는 풍경을 할머니와 말없이 바라보았다.

    할머니와 나는 상의를 해 간단한 신호도 하나 만들었다.

    숨이 안 쉬어지면 참지 말고 바닥을 치세요. 한 번 치면 괜찮다, 두 번 치면 멈춰라.

    할머니는 대답 대신 바닥을 한 번 쳤다. 그녀가 윗옷을 벗는 동안 나는 가방 안에서 코일머신과 잉크, 그리고 메트로놈을 꺼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나는 할머니의 가슴에 조심스럽게 귀를 가져다댔다.

    뭐하는 거냐?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더듬더듬 할머니의 말을 받았다.

    자기 심장박동이랑 비슷한 박자의 소리를 들으면 긴장이 풀어진다고 해서요.

    할머니의 심박과 비슷한 속도로 메트로놈을 조정했다. 틱 탁 틱 탁. 느린 박자로 바늘이 움직였다.

    할머니 심장은 오십 비피엠이에요.

    말하며 좌우로 움직이는 추와 할머니의 가슴을 번갈아 가리켰다. 할머니는 미심쩍은 얼굴로 메트로놈을 쳐다보았다. 틱 탁 틱 탁. 박자에 맞춰 메트로놈이 움직이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 추가 움직이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심장박동 소리에 맞춰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느리고 깊은 숨이었다. 메트로놈의 박자와 합을 맞추듯 박동기도 붉은 불빛을 내며 깜박였다.

    괜찮아요?

    걱정 되어 묻자 할머니는 대답 대신 바닥을 한 번 쳤다.


    50BPM의 리듬 속에서 할머니는 고요히 숨을 쉬었다. 빗장뼈에 새겼던 꽃의 외곽을 따라 딱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가렵지 않았어요?

    참느라 혼났다.

    할머니는 불평하듯 말했다. 긁거나 딱지를 떼어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꾸준히 보습연고를 발라 반질반질해진 가슴팍을 나는 조심스럽게 쓸었다. 테두리뿐인 꽃 아래로 くそ가 비쳐보였다. 똥; 대변…… 포털 사이트에서 찾은 단어의 뜻이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댔다.

    누가 이런 거예요?

    늑골까지 이어진 문신들을 보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은 그대로 할머니에게 향했다.

    왜, 궁금하냐?

    할머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적막한 집안에 틱 탁 틱 탁, 하는 추의 울림만이 맴돌았다.

    한때 이걸 약점으로 잡은 사람이 있었다.

    빗장뼈를 만지며 할머니는 말했다. 덤덤한 한마디였지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공포와 좌절의 순간들이 할머니의 얼굴에 전부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난 사람을 잘 믿지 않아.

    팔짱을 마주 낀 채 할머니는 조그맣게 덧붙였는데, 그 말이 왜인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박동기가 평소보다 옅은 빛으로 깜박이고 있었으니까.

    나는 입고 있던 조거 팬츠를 내렸다. 드러난 맨살을 보며 할머니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몸에 상처를 낼 때만 나를 봐줬거든요.

    수없이 자해를 하고, 피를 내고 응급실에 실려 간 흔적들이 허벅지부터 치골까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모두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낸 상처들이었다.

    타투도 그래서 시작했어요. 이것도 상처를 내는 작업이잖아요.

    왼쪽 허벅지의 엉겅퀴, 그 위에 새긴 도깨비 문양 타투, 癡暗衆罪今日懺悔 오른쪽 허벅지의 한문 레터링…… 상흔을 덮은 타투를 하나하나 짚으며 말했다.

    이제 할머니도 나도 서로 약점 하나씩은 알고 있는 거예요.

    나는 웃었다. 나를 보는 할머니의 얼굴이 점점 슬프게 일그러졌다.


    양 가슴과 늑골에 새겨진 문신들은 빗장뼈의 레터링보다 흐렸지만, 면적이 넓어 전사를 찍고 외곽 작업을 하는 데에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들여야했다. 꽃을 새기는 내내 할머니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전처럼 시시한 농담을 하지도 않았다. 화났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눈을 피할 뿐이었다. 약점이란 말은 사용하지말걸.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침묵하는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왼쪽 가슴에 꽃을 다 새기고 오른쪽으로 옮겨갈 즈음 박동기에서 삐 삐 삐 하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신호음은 메트로놈보다 훨씬 더 빠른 박자로 이어졌다. 할머니가 다급하게 바닥을 두 번 쳤다. 나는 네블라이저를 꺼내 할머니의 입에 서둘러 물렸다. 그녀는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오른쪽 가슴에 꽃 몇 송이를 새긴 채 작업은 맥없이 끝이 났다.


    그 밤에도 할머니의 방에선 숨죽이며 통증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얇은 벽을 타고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캐리어를 열었다. 캐리어 맨 밑바닥, 겨울 옷 틈에 손바닥만 한 액자가 숨겨져 있었다. 가압류 스티커가 붙은 집에서 내가 유일하게 챙긴 물건이었다. 액자 안에는 오래 전 찍은 사진이 한 장 꽂혀 있었다. 붉은 복주머니를 쥔 요한과 그 애를 어정쩡하게 안고 있는 열두 살의 내가 담긴 사진. 쌍꺼풀이 없는 눈매나, 콧대가 낮은 코. 그런 부분이 엇비슷하게 닮은 사진 속 남매를 보며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우.

    요한을 떠올릴 때면 나는 늘 숨이 막혔다.

    드럼 세탁기 안에 있던 요한을 처음 발견한 건 엄마였다. 실종신고를 한지 일곱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인은 질식사. 밖에서 닫히는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 세탁기 안 이곳저곳 남아 있었다고 담당 형사는 말했다. 요한은 또래보다 빨리 글을 익혔다. 벽에 붙은 한글 낱말 포스터를 또박또박 읽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며 알파벳을 외는 요한은 한없이 기특하고 영민한 아이었다. 요한이 다섯 살이 되면서 엄마는 외조모의 귀금속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창 호황을 타던 가게에서 주 3일을 일하기로 했던 엄마는 점점 시간을 늘려 주 5일, 손님이 많을 때는 주말에도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바빴고, 요한의 육아는 자연스럽게 중학생이던 내가 전담하게 되었다.

    누나.

    갓 한글을 깨친 아이들이 그렇듯 요한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부르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입꼬리랑 강아지 꼬리랑은 뭐가 달라? 훗은 꼭 모자 쓴 사람처럼 생긴 거 알아? 그 애가 종일 조잘대는 말, 집요하게 던지는 질문들, 쉼 없이 갈구하는 애정을 다 받아 주기엔 나 역시 어리고 모자라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요한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방과 후엔 그 애의 밥과 간식을 챙겨주고, 엄마를 대신해 학예회나 체육대회에 참가하고…… 서툴게 동생을 챙기고 돌보는 하루가 반복되는 동안 내 몸엔 전에 없던 이상증세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실이나 화장실, 급식실 어디서든 쉽게 선잠에 빠져들었고, 느닷없이 생리가 끊기기도 했다. 뜀틀 수행평가를 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도 있었는데, 그 상태 그대로 잠들어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과로인 것 같은데.

    내 이마를 짚으며 보건교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보다. 가볍게 이야기하는 교사를 따라 나는 웃었다. 그때까진 나도 모든 증세를 단순한 몸살의 일종으로 치부했으니까.

    이게 뭐야?

    양호실 침대에 모로 돌아 누운 나를 보며 보건교사는 소리쳤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머리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폈다. 귀 뒤로 꽂은 머리칼을 들추자 두피에 듬성듬성 생겨난 동전 크기의 탈모반이 보였다. 정수리 근처와 뒤통수에도 탈모의 흔적이 퍼져 있었다.

    혹시 집에서 학대 받니?

    조심스럽게 묻는 보건교사를 향해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게 일어난 증세가 육아 스트레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바닥을 주먹으로 치는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채 소리가 잦아들기를,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과거의 잔상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할머니의 호흡곤란이 심해질수록 오래 전의 기억은 선명해져만 갔다.

    담당형사는 내가 진술을 번복한다는 점, 그날 친구들을 집에 불러와 함께 술을 마신 점을 질책하며 매섭게 심문을 이어갔다. 술은 자주 마셨니? 그런 애들이랑은 언제부터 어울렸어? 취조 내내 나는 딸꾹질을 했고, 술을 마신 건 그날이 처음이며 동생이 조용해 낮잠을 자는 줄 알았다는 진술만 반복했다. 대부분은 진실이었지만, 아닌 것들도 있었다.

    하얀 맥주 거품처럼 방안에 가득 차오르던 웃음소리, 열일곱의 쌉싸름한 비밀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기쁨. 처음 술을 마시던 그날, 나는 애들 틈에 섞여 큰 소리로 웃고, 호들갑을 떨며 관심 있는 남자애 이야기를 하고, 음담을 나누며 얼굴을 붉혔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즐거움이었다. 맥주 한 캔을 비울 때마다 터져 나오던 간지러운 비밀과 환호성은 요한이 방문을 열고 나를 찾을 때, 뚝 끊겼다.

    잠이 안와.

    거실의 불을 끄고, 배와 등을 쓸어주어도 요한은 쉽게 잠들지 않았다. 방안에서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고개가 그 쪽으로 향했다.

    나도 누나들이랑 놀면 안 돼?

    칭얼거리는 요한을 나는 매섭게 흘겨보았다. 방안의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나도 누나들이랑 놀고 싶은데, 자꾸만 보채는 요한을 내버려둔 채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문을 잠갔다. 요한은 닫힌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소리쳤다. 누나, 누나.

    열어줄까?

    친구들이 문 쪽을 힐끔대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한참을 이어지다 점차 잦아들었다. 문 쪽을 잠시 바라보다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는 시원했고 친구들은 웃고 있었고, 불행한 일은 어쩐지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의 호흡은 평소처럼 차분해졌다.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와 물을 마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숨을 죽였다. 그녀의 고통을 엿들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정도로 고요히 숨을 쉬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던 할머니와 세탁기 안에서 웅크려 있던 요한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어둠 속에서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할머니 방에선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건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되새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3주차에는 할머니도 나도 꽤나 익숙해져서 특별한 지시나 합의 없이도 자리를 펴고,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둘 수 있게 되었다. 외곽 작업은 거의 갈무리 되었지만, 꽃에 색을 채워 넣는 채색 작업은 시작조차 하지 않아 지난번보다 속도를 내기로 했다. 오른쪽 가슴부터 늑골까지 꽃 테두리를 새겨 넣는 동안 할머니와 나는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지난 작업 이후로 나와 할머니의 관계는 더 서먹해진 것 같았다. 가라앉은 공기 사이사이 머신의 구동음과 할머니의 숨소리만이 떠돌았다. 할머니는 평소보다 더 힘겨워했다. 바닥을 한 번 치며 멀쩡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결국 도중에 잠시 쉬기로 했다.

    아직 화 안 풀렸어요?

    창밖을 보며 차가운 녹차를 마시는 할머니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는 무심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화 안 났다.

    얼굴에 다 표 나요.

    화난 게 아니라 그게 자꾸 마음에 쓰여서…….

    할머니는 우물쭈물 망설이다 내 허벅지를 가리켰다. 상흔과 타투로 덮인 허벅지.

    만져볼래요?

    나는 할머니에게 허벅지를 내밀었다. 머뭇하다 그녀는 내 허벅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아프지 않았냐.

    지금은 괜찮아요.

    허벅지를 쓸던 손을 멈추고 할머니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아프더라.

    그녀의 얼굴이 전처럼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 말을 하며 할머니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슴에 낙서 비슷한 문신이 생긴 경위나, 그것을 새긴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해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얘기 없어요?

    점점 일그러지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빠르게 말을 돌렸다.

    왜 있잖아요. 전에 했던 농담 같은 거요.

    할머니는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잔을 기울일 때마다 각얼음이 잘랑였다. 잠시 고민하다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영화 좋아하냐?

    영화요?

    할머니는 적적할 때마다 간다는 종로의 한 극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일 오랜만에 거기 갈 생각인데 혼자가기엔 먼 곳이기도 하고, 너도 할 일이 없는 것 같고…… 같이 갈 테냐.

    무심하게 말하는 할머니를 보니 왠지 장난기가 발동했다.

    데이트 신청이에요?

    내 말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홍조가 올라 있었다. 가기 싫음 말고. 할머니가 작게 말했다.

    갈게요.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한다.

    당부하며 할머니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나는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기분 탓인지. 오른쪽 갈비뼈의 문신 위로 꽃을 조금씩 채워 넣는 동안 할머니는 전에 없이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이 보기 좋았다.


    *


    알람을 맞추고 잤는데도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났다. 할머니는 집 어디에도 없었다. 혼자 가신건가. 초조해하며 집안을 배회하던 중에 방문에 붙어 있는 메모를 보았다.

    <일어나면 주차장으로 나올 것>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은 뒤,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차장 쪽에서 경적소리가 들렸다. 시동이 걸린 차는 상향등 하나가 깨진 구형 프라이드가 유일했다. 하얀색 프라이드 운전석에서 할머니가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일찍 좀 일어나지.

    차에 올라타자마자 할머니는 혀를 차며 핀잔부터 주었다. 능숙하게 후진 기어를 넣고 핸들을 돌리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조그맣게 탄성을 뱉었다.

    운전도 할 줄 아세요?

    왜, 노인네가 운전하니까 꼴사나우냐?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할머니는 핸들을 빠르게 꺾었다. 오래된 차는 작은 흔들림에도 반동이 심하게 일어 할머니가 핸들을 꺾을 때마다 몸이 좌우로 움직였다. 오래 전 방문 판매 일을 했을 때 이 차를 샀다고 할머니는 설명했다.

    무거운 리어카 끌고 이집 저집 다니니까 몸이 쑤셔서 면허를 땄는데 좋더라.

    짐 말고 사람을 태운 건 네가 처음이다. 할머니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차는 조금 힘겹게 주차장을 벗어나 북아현로를 따라 달렸다. 날이 좋았다. 잎을 늘어트린 플라타너스가 햇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어두운 나무 그늘 밑으로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신호를 철저히 지켜가며 꾸준히 시속 50km로 달렸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여름의 풍경들이 적당한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극장은 낙원상가 안쪽에 있었다.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할머니와 나는 극장까지 조금 걷기로 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탑골공원을 나란히 걷는 내내 할머니는 팔짱을 지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집에 있을 때도 그녀는 늘 화난 사람처럼 팔짱을 끼고 있었다.

    팔짱 좀 풀면 안돼요?

    팔짱?

    할머니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항상 팔짱을 끼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요.

    그게 나쁜 거냐?

    외로워 보이잖아요. 심술 맞아 보이기도 하고.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팔짱을 더 단단히 지르고 앞서 걸었다.

    하여간 고집은.

    빠르게 걷는 할머니를 나는 조용히 뒤따랐다.

    극장 주변에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유니폼을 입은 늙은 남자가 입구에서 매표를 하며 팝콘을 튀기고 있었다.

    오즈 씨 오셨네.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할머니를 보며 그는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오셨네.

    할머니는 고개만 까딱 숙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극장 안은 사람 하나 없이 휑했다. 상영하는 영화도, 상영관도 딱 하나 뿐인 작은 극장이었다. 내가 표를 끊는 동안 할머니는 소피가 급하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할머니가 떠나자 매표원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꼭 닮았네. 눈매가.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오즈 씨 손녀인가 보죠?

    할머니와 나의 관계를 정의하기 어려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매표원은 할머니를 오즈 씨라고 불렀다. 그녀를 늘 그렇게 부르던 사람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오즈 씨.

    왜 할머니를 오즈 씨라고 부르세요?

    내 질문에 매표원은 상영관 앞에 걸린 간판을 가리켰다. 유화로 그린 <오즈의 마법사> 포스터가 입구에 크게 붙어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상영하는 날엔 꼭 오셔요. 우리 극장 개관했을 적부터 매번. 최근엔 서부 영화만 상영해서 통 못 봤는데 오늘은 이렇게 손녀랑 오셨네.

    매표원은 포스터를 한 장 집은 뒤, 그걸 솜씨 좋게 감고 접어 고깔로 만들었다. 테이프로 틈새를 봉한 고깔 안에 그는 갓 튀긴 팝콘을 옮겨 담았다.

    오즈 씨 손녀니까 특별 선물.

    매표원은 내게 팝콘을 내밀었다. 갓 튀긴 팝콘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상영관 안에도 관객은 나와 할머니 둘 뿐이었다. 할머니는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사람이 진짜 없네요.

    극장 안이 너무 조용해 소곤소곤 말하자,

    요즘엔 그렇지. 옛날에는 사람으로 꽉 차서 좌석 앞에 신문지 펼쳐놓고 쭈그려 앉아서 보는 사람도 숱했다.

    할머니도 따라서 목소리를 죽였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나는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왜 웃냐. 할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흑백의 루니툰이 몇 편 상영되었다. 아까 보았던 매표원이 영사실 안에서 부지런히 영사기를 돌리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 실베스터가 트위티를 쫓다 물에 빠지고 넘어지는 장면을 보며 나는 크게 웃었다. 객석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어려 있을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이따금 흣, 흣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사자가 울부짖는 MGM의 로고가 지나가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할머니는 팔짱을 지르고 자세를 바꾸었다. 내가 팝콘을 내밀어도 먹는 체 마는 체 온전히 영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면 정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앉아 있는 할머니를 나는 보며 생각했다. 도로시가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부르고, 마블교수를 만난 이후부턴 잠이 쏟아졌다. 세피아 톤의 지루한 장면들이 내내 이어졌다. 꾸벅 졸며 정신을 못 차리는 나와 달리 할머니는 영화를 처음 본 사람처럼 시종일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개관했을 때부터 이 영화를 찾아봤으면 도대체 몇 번이나 본 걸까. 백 번? 천 번? 허리케인이 불고, 집이 날아가고, 불규칙한 곡조의 관현악곡이 흘러나오는 동안 눈꺼풀은 서서히 감겨왔다.

    잠에서 깬 건, 어깨에 살이 닿는 감촉 때문이었다. 살짝 눈을 떴다. 할머니가 꼭 지르고 있던 팔짱을 풀고, 내 어깨에 조심스럽게 팔을 두르고 있었다. 할머니의 살에서 자두 냄새가 났다. 달달하고 향긋한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며 나는 잠든 척을 했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할머니가 몸을 움찔했다. 놀라 다시 눈을 떴다. 스크린 속 세피아 톤의 밋밋한 화면이 컬러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었다. 물감이 번지듯 천천히. 연꽃이 떠 있는 호수와 장미 넝쿨이 만발한 정원이 색을 되찾고, 색채가 없던 도로시와 토토에게도 색이 입혀졌다. 토토, 여긴 캔자스 같지 않아. 무지개를 타고 온 게 확실해. 따뜻한 색으로 덧입혀진 오즈를 천천히 거니는 도로시를 보며 할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웃을 때면 왼뺨에 보조개가 잡히는구나.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나는 생각했다.

    오즈 씨. 라는 부드러운 이름과 왼뺨의 보조개가 묘하게 어울렸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왔는데도 밖은 여전히 환했다. 산책을 겸 해 할머니와 탑골공원부터 고

    궁이 이어진 길목을 천천히 걷기로 했다. 고궁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할머니는 자주 걸음을 멈췄다. 운현궁을 따라 죽 이어진 낮은 돌담 아래, 여름 꽃이 수수하게 피어 있었다. 꽃들을 가리키며 할머니는 말했다.

    다 여름 한철에만 피는 꽃들이다. 그래서 다들 꽃 이름을 몰라. 언제 피고 졌는지도.

    그녀는 쓰고 있던 베이지색 버킷햇을 벗은 다음, 담 아래 떨어진 꽃을 하나씩 주워 그 안에 넣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깃대는데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꽃을 주웠다. 눈치를 보다 나도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줄기에 붙어 있는 꽃은 따면 안 된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로만. 뿌리까지 꺾는 나를 향해 할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꽃 중 성한 것만을 골라 모자 안에 넣었다. 꽃은 돌담 아래나 벽돌 틈새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물을 때마다 할머니는 귀찮은 기색 없이

    이건 돌양지꽃, 이건 자주괭이밥, 이건 목백일홍 떨어진 것.

    하며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잎이 뭉개진 꽃이나 햇볕에 타거나 시들어 말라버린 꽃들까지 모아 돌담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마치 꽃 무덤 같았다. 꽃을 다 줍고 자리를 뜨기 전, 할머니는 그 무덤에 대고 무어라 혼잣말을 했다.

    뭐라고 한 거예요?

    물어봐도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할머니는 거실 책장에서 양장본으로 된 식물도감을 꺼냈다. 그녀는 도감을 반으로 펼쳐 한 면에 고궁에서 따온 꽃을 겹치지 않게 올려두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자 손짓을 해보였다.

    구경하고 싶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꽃을 정렬한 다음. 할머니는 무늬가 없는 하얀 티슈를 꽃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그녀는 바람이 일지 않도록 조심조심 책을 닫았다. 그 다음 닫힌 책을 손바닥으로 힘주어 눌렀다.

    해보겠냐?

    할머니는 내게 도감을 내밀었다. 나도 할머니와 비슷한 방식으로 도감 사이에 꽃을 올려두고 덮은 뒤, 손바닥으로 압력을 가했다.

    이렇게 닷새를 기다리면 꽃 누르미가 되는 거다.

    할머니는 손바닥으로 책을 꾹 누르며 말했다. 생각보다 단순하고 시시한 작업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손목도 저려왔다. 무료하게 압화를 만드는 나와 달리 할머니는 진지한 표정으로 묵묵히 꽃을 정렬하고, 티슈를 올리고, 적당한 압력으로 책을 눌렀다.

    재미없냐?

    건성으로 꽃을 배열하는 나를 보며 할머니가 물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지만,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할머니와 나는 잠시간 어떤 말도 나누지 않은 채 반복적으로 압화만 만들었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시작했다.

    할머니가 먼저 말문을 뗐다.

    혼자 있다 보면 그때 일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더라. 내 몸에 억지로 그런 걸 새기고 욕을 하고 또…….

    그녀는 돌연 말을 멈추더니 손목에 더 힘을 실어 꽃을 눌렀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다. 미움도, 분노도 여기 이렇게 꾹 눌러 넣다보면 좀 나아지니까.

    담담한 말투였다. 할머니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다는 말도,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란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저 침묵한 채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말없는 나를 힐끔 쳐다보다 할머니는 다시 꽃 누름을 이어갔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할머니가 소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힘껏 꽃을 눌렀다. 모자 한 가득 담겨 있던 여름 꽃이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밤에는 악몽을 꾸었다.

    세탁기 투입구를 청테이프로 친친 돌려 감고, 시도 때도 없이 비명을 지르고,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피하던 엄마가 꿈속에서 내내 맴돌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캐리어를 뒤졌다. 담배를 꺼내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옆방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잘게 뱉고 내쉬는 소리. 삐, 삐, 삐 하는 기계음 소리.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소리였지만, 그 밤 나는 담배를 캐리어에 도로 집어넣고 할머니 방 문을 열었다.

    할머니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 그녀의 실루엣만 언뜻 보일 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삐, 삐, 삐, 삐.

    느린 박동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천천히 침대 맡까지 걸어갔다.

    안 잤냐.

    힘이 모조리 빠진 것 같은 목소리로 할머니는 말했다.

    소리 때문에 잘 수 있어야죠.

    할머니가 그러듯 부러 무뚝뚝하게 대꾸해보았다. 흣, 흣.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인공심장은 그 와중에도 곧 멈출 것처럼 여린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병원 가보면 안돼요?

    나중에.

    할머니는 고개를 저은 뒤, 가슴부터 배꼽 위까지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거 다 새기면 그때.

    흉부에 있는 문신과 흉을 보여줬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한결같은 그 반응들이 자신을 얼마나 비참하고 아프게 만들었는지 할머니는 짧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늘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하지 못했다.

    말주변이 없어 그렇지.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침묵 뒤에 감추어놓은 이야기를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에 익숙해져 시야가 조금 환해졌을 즈음,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너는 꿈이 뭐냐. 타투…… 그거냐?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타투는 할머니까지만 하고 접으려구요. 어차피 재능도 없고.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꿈, 희망 그런 말 싫어해요. 나한테 해준 게 없거든요 그게.

    어둠 속에서 할머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꼭 겁쟁이 사자 같다.

    그녀는 쉽게 겁을 내고 안주하는 <오즈의 마법사> 속 겁쟁이 사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용기를 가지기 위해 에메랄드 시티로 떠나는 사자에 대해. 막막한 여정 속에서 자주 겁을 내고 움츠러드는 겁쟁이 사자에 대해 그녀는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괜히 퉁명을 부렸다.

    겁내고 울고 짜고. 그런 건 하나도 멋지지 않아요. 찌질하지.

    할머니는 내 허벅지에 손을 얹은 뒤, 조용히 속삭였다.

    그게 진짜 멋진 거야.

    우툴두툴한 상흔 위로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지나갔다.

    난 너 그거 계속 했음 좋겠다. 타투인가 타토인가 그거…… 도망치지 말고.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그거 할 때 너 참 좋아 보이더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있다 할머니의 손 위에 내 손을 조심스럽게 포갰다. 할머니의 손이 상흔을 더듬을 때마다 내 손도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50BPM의 고요한 박동 속에서 우리는 손을 겹친 채 오래간 서로를 마주보았다.


    *


    외곽을 그려 넣던 때는 한여름이었는데, 그새 밤낮으로 날이 서늘하고 해가 이우는 시간이 조금 빨라져 있었다. 9월 초순부터 나는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뭐든 해보라는 할머니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그림을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내 실력은 다른 수강생들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밤낮없이 데생 연습을 하고, 크로키를 숙련하는 동안 할머니 몸에 꽃을 새기는 작업은 계속 유보되었다.

    정신없이 진도를 따라잡느라 계절이 바뀌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다 자두를 팔던 트럭에서 청귤을 파는 걸 봤을 때 비로소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막 9월 달력을 뜯고, 10월을 맞이한 주에 할머니와 나는 거실에 모였다. 볕이 좋은 토요일이었다.

    오늘은 안 나가도 되냐?

    할머니가 물어 오늘은 휴일이라고 답해주었다.

    전엔 만날 쉬는 날이더니.

    할머니가 옅게 웃음 지었다. 그녀의 왼뺨에 살짝 보조개가 졌다.

    절기를 세 번쯤 지나온 동안 타투 위에 내려앉았던 딱지는 말끔히 벗겨져 있었다. 그 후에 생기는 각질과 투명한 피부막도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착색이 잘된 푸른 꽃이 햇볕에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하얀 잉크로 꽃의 틈새와 테두리를 메웠다. 명암까지 주니 본래 문신을 했던 자리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해졌다. 늑골까지 꽃을 채우고 완성이 다 될 즈음, 할머니가 바닥을 두 번 쳤다.

    오늘은 이만 하자.

    그녀는 숨이 차는 듯 힘겨워보였다. 오른쪽 빗장뼈 아래 있는 くそ는 완전히 덮지 못한 상태였다. 화사한 꽃 아래로 일어 레터링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그게 아쉬워 쉽게 작업을 마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낯빛이 전보다 더 창백했다.

    잠을 설쳐서 그런지…… 몸이 따라주질 않네.

    시간이 지나자 해쓱했던 얼굴색도 돌아오고, 거칠던 호흡도 점차 잦아들었다. 정신을 차린 뒤, 할머니는 나비장 속에서 무언가 꺼내왔다. 네블라이저를 꺼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손에 전혀 다른 것이 들려 있었다.

    누구 주려고 뭘 사본 게 하도 오래 전이라…….

    할머니는 그것을 내게 건넸다. 표지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단단한 재질의 책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물릴 수는 없다. 영수증을 어디다 뒀는지 몰라서.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표지를 조심조심 넘겼다. 일반 책과는 달리 종이에 검은 코팅이 되어 있었고, 검은 바탕에 <오즈의 마법사> 캐릭터인 도로시, 럼버잭, 허수아비, 그리고 겁쟁이 사자의 테두리만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책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책 맞아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잖아요.

    나는 검게 코팅된 빳빳한 종이들을 하염없이 넘겼다.

    숨어 있으니까.

    뭐가 숨어 있는데요?

    그걸 찾아내는 건 네 몫이지.

    할머니는 조그맣게 웃었다. 영문 모를 말들에 의아해하며 책을 덮었다.

    작업을 재개하기 위해 니들을 교체하고, 머신을 정비했다. 오른쪽 빗장뼈 아래 있는 문신들만 조금 덧칠하면 모든 작업이 끝이 났다. 할머니 상태도 호전된 것 같아 금방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에 하면 안 되냐.

    잉크를 준비하는 내게 할머니는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완성된 타투를 보고 흡족해하는 할머니의 얼굴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학원을 다니며 익힌 것들을 시험해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금방 끝날 거예요.

    나는 말했다. 굳은 얼굴을 한 채 할머니는 자리에 가만히 누웠다.


    *


    다른 환자들은 길어야 오 분 지속하는 발작을 할머니는 이십 분에 걸쳐 이어갔다.

    중환자실 한편에서 몸을 뒤트는 할머니와 제세동기를 들고 심폐소생을 하는 의사를 나는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압박 소생을 다섯 차례나 지속하고, 약물을 주사한 뒤에야 할머니는 겨우 깨어났다.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신형 박동기를 삽입해야 하는데, 환자 상태가 좋지 않네요.

    엑스레이를 가리키며 그는 할머니의 심낭에 물이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교체 주기가 한참 지난 박동기를 떼어내지도 않고 그대로 착용했던 게 그 이유였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대답 대신 말려 올라간 할머니의 옷을 끌어내렸다. 질책하는 의사에게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두 달 동안 문안을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우스 쉐어링에 대한 공문을 전하기 위해 구청직원이 한 차례 들렀을 뿐이었다.

    할머니 가족들한테는 연락 왔어요?

    문안 선물로 들고 온 오렌지주스를 건네며 직원은 물었다.

    없었어요.

    그치? 그럴 줄 알았어. 조카가 하나 있긴 한데 서로 왕래가 없었나 봐요. 할머니가 위독하다고 전했더니 전화를 끊더라고.

    속이 타 주스를 들이켰다. 오렌지의 시고 쓴 맛이 입안에서 잠시 고였다 사라졌다. 직원은 가져온 공문을 하나씩 펼쳐보였다. 계약만료에 대한 서류들이었다. 애초 할머니 집에서 지내기로 한 육 개월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가씨도 슬슬 다른 거처 찾아봐야지.

    공문을 대강 훑는 나를 향해 직원은 타이르듯 말했다.

    안쓰럽긴해도 어쩔 수 없잖아. 아가씨가 가족도 아닌데.

    대답 없이 병상에 누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팔뚝에 링거를 꽂은 채 그녀는 겨우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천천히 떨어지는 링거액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가족으로 묶이지 않은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입원신청서를 작성하는 것부터 같은 병동 사람들에게 할머니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까지 보호자로 호명되기 힘든 나는 늘 망설이고 머뭇댈 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생활하며 차츰차츰 쌓아온 감정의 지층은 가족이라는 명목 앞에서 쉽게 허물어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구청직원은 병원에 그만 드나들라고 했지만, 이후에도 나는 학원과 병원을 오가며 할머니를 돌보았다. 이전보다 더 잦은 빈도로 호흡곤란이 일어나고, 약물치료와 심폐소생으로 고비를 넘기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 시간동안 할머니는 먹는 음식마다 게워내길 반복했고, 점점 말라갔다. 후에는 물도 제대로 못 넘길 때가 허다했다.

    한 번은 병상에 누워 있던 할머니가 느닷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 팔을 뻗었다.

    나한테 혹시 냄새 나냐?

    테이블 데스의 확률이 높아 개복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들은 날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에 코를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독한 약 냄새가 풍겼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몸에서 역한 냄새가 풍긴다는 건,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온 증거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너도 담배 이젠 그만 펴. 몸에 해롭다.

    알고 있었어요?

    그럼 알지, 모를까.

    할머니는 쓸쓸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그녀와 눈을 맞추는 대신 떨어지는 링거액을 빤히 바라보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할머니의 얼굴은 지나치게 상해가고 있었다. 뼈 밖에 남지 않은 얼굴을 나는 좀처럼 마주할 수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죽음에 관한 말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 말을 돌렸다.

    할머니가 준 책 말이에요. 거기 뭐가 숨겨져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조용히 웃었다. 입술 틈으로 바람 새어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책을 가져와보라고 했다. 책을 내밀자 그녀는 <오즈의 마법사> 캐릭터가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자, 봐라.

    그녀는 손톱으로 럼버잭의 테두리를 천천히 긁어냈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은 코팅지를 긁어낼 때마다 무채색을 띄던 럼버잭이 색을 찾아갔다. 양철로 만든 은빛 갑옷, 커다란 도끼, 푸른 눈.

    이제 네가 해봐.

    할머니는 내게 책을 넘겨주었다. 나도 그녀처럼 코팅지를 조금씩 긁어냈다. 가슴 부분을 긁어내자 텅 비어 있던 럼버잭의 가슴에 심장이 생겨났다. 따뜻한 색감의 붉은 심장이었다. 병상에 앉아 우리는 계속 검은 테두리를 긁어냈다. 색채 없던 도로시도, 허수아비도, 겁쟁이 사자도 그렇게 전부 제 색을 되찾을 때까지.


    *


    병실에 비치된 할머니의 짐은 간소했다. 여행용 세면파우치와 작은 손거울, 헤어피스, 입원 전 입었던 옷가지, 집에서 가져온 압화 몇 점이 전부였다. 그것들을 종이박스에 주섬주섬 챙겨들고 나는 병원 지하로 내려갔다.

    장례는 지하에 있는 추모관에서 치러졌다.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상주가 될 수 없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구부정한 할머니의 조카가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았다. 상이 치러지는 삼 일간 나는 그와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할머니와 나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는 그에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얼버무린 게 대화의 전부였다.

    하나 씨는 어려서 이런 게 왜 중요한지 모를 수도 있겠네.

    그는 내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 하나가 아니라 하라라고 고쳐주어도 다음에는 다시 하나라 불렀다.

    몇 차례 변호사가 다녀갔고, 할머니의 재정상태와 재산목록에 대해 그와 진지하게 의논했다. 상속세는 언제쯤 신고해야하고, 유품은 어떻게 처분할지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자꾸만 내 쪽을 힐긋댔다. 그때마다 나는 멋쩍게 안치실을 나가 공터에서 담배를 태웠다.

    한 번은 그가 담배를 태우는 내 곁에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하나 씨는 가족이 없어요?

    잠시 이모를 떠올리다 오래 전 가족을 잃었다고 답했다.

    젊은 사람이 안됐네.

    그는 중얼댔다. 멀거니 서 있는 그에게 나는 담배를 내밀었다.

    금연 중이라서.

    은단을 입에 털어 넣으며 그는 말했다.

    입주 계약을 육 개월로 잡았다고 들었는데…….

    네.

    퇴거가 얼마 안 남았겠네요.

    그의 입에서 맵고 화한 냄새가 훅 풍겼다.

    혹시 입원 전에 고모님이 하나 씨한테 남겨준 유품이나 서류는 없어요?

    그런 건 없다고 거듭 말해도 그는 끈질기게 재산상속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 묻고, 변호사와 나눈 특별연고자 분여법에 대해 설명했다. 사망 전 생계를 함께 한 연고자의 경우 상속재산의 일부를 분여 받을 수 있다, 변호사에게 듣기론 연립이 고모 명의로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그건 가족에게 상속되어야 온당하지 않느냐 같은 말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조카가 하나 있긴 한데 서로 왕래가 없었나 봐요. 할머니가 위독하다고 전했더니 전화를 끊더라고. 구청직원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다. 할머니의 안부나 생전의 일들은 전혀 궁금해 하지 않고 오로지 상속이니 분여니 하는 말만 뱉어대는 사람을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화가 치밀어 오르고, 속이 끓다가도 짙은 눈썹이나 날카로운 눈매. 이런 부분이 할머니와 묘하게 닮은 그를 보면 내가 아니라 그가 할머니의 가족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연립에 대한 언질도 없었어요? 하나 씨한테 넘겨준다거나 하는.

    묻는 그에게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하나가 아니라 하라예요.

    네?

    내 이름은 하나가 아닌 하라라고, 그러니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부르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할 수 있는 말은 딱 그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그를 내버려둔 채 나는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조카는 내게 장지에는 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고맙지만 앞으로의 절차는 제가 처리할게요.

    정중하고도 단호한 말투였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발인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우는 사람도, 기도를 하거나 작별 인사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조문객도 얼마 없는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화장장 맨 끝에 서서 나는 할머니의 관이 가마로 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또 다시 끝이구나.

    고요히 타오르는 가마 앞에서 나는 중얼댔다. 요한의 죽음, 엄마의 자살. 일생동안 내가 겪은 상실과 사별이 스쳐갔다. 누군가의 죽음을 접할 때마다 밀려오던 허무와 절망도 다시금 발화되었다. 유골은 작은 나무 상자에 담겨 장지로 옮겨졌다. 장지로 향하는 행렬을 지켜보다 나는 머뭇머뭇 돌아섰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


    베란다에 말려놓은 꽃잎들은 햇볕에 바싹 타들어가 있었다. 부서지는 꽃잎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할머니의 연립으로 돌아왔지만, 무얼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정리해야 할지는 막막했다. 돌아갈 곳도, 나를 받아줄 곳도 더는 없었다.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적한 집에서 무기력하게 잠을 자고 끼니를 때우고, 서성였다. 할머니 방에는 거의 들어가 보지 않았다. 할머니의 물건도, 냄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에 들어서면 물기 없이 건조했던 가슴에 조금씩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점막에서 늑골로 천천히 차오르다 후에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득, 깊이. 슬픔은 뒤늦게 밀려왔다.

    할머니의 조카가 연립에 찾아온 날에도 나는 무력감에 빠진 채 방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지금이 몇 시인지도 가물가물하던 나날이었다. 몇 차례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도 잇달아 들려왔다. 그즈음에는 바깥에서 들리는 사람 소리에도 흠칫 놀라곤 했다. 숨을 죽인 채 외시경으로 바깥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다 하라 씨, 하라 씨 부르는 소리에 그인 것을 알아챘다. 저 사람이 왜……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뒤섞였다. 이제 정말 이 집을 나갈 때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외시경에서 눈을 떼고 한참을 망설이다 나는 문을 열었다.

    이런 곳에 살고 계셨구나.

    20평 남짓한 집안을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그는 누수를 확인하고, 하자를 살폈다. 최근 부동산업자가 방문한 적 있는지 내게 묻기도 했다. 그가 이곳저곳을 기웃대고 들추어볼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에게 이 집은 살 곳住이 아닌 살 곳買 같았다.

    마음이 갑갑해져 베란다로 나갔다. 말려놓은 꽃잎들은 이제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발바닥에 닿을 때마다 파삭, 하는 소리가 났다. 창문을 열고, 까맣게 타 버린 꽃들을 날렸다. 힘없이 흩날리는 꽃들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다.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그가 다가왔다. 흘깃 눈치를 살피는 그를 애써 모른 체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돈에 관한 이야기. 기껏 해봐야 언제쯤 집을 비울 거냐는 독촉이겠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한 번도 뵌 적 없어요.

    발코니에 몸을 기대며 그는 덧붙였다. 고모님 말이에요.

    왜 가족 중에 꼭 그런 사람 있잖아요. 다들 쉬쉬하고, 묵인하는 사람. 있어도 없는 존재. 고모님이 그랬어요.

    고모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적은 있으나 그것도 자라오며 서서히 증발되었고, 종국에는 아예 잊게 되었다고. 구청에서 고모의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도 잘못 걸려온 전화인줄만 알았다고. 그는 술회했다.

    그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그가 물었다.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나. 상기할수록 머릿속이 뿌예졌다. 한 사람을 온전히 알아가기에 한 계절은 너무 짧았던 걸까.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서 나는 오직 한 단어만을 건져 올렸다. 내가 정말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

    …… 강한 사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였다. 멀리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습관처럼 그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담배를 받아 천천히 태웠다. 금연 아니냐고 묻는 내게 그는 말했다.

    오늘 하루만 피죠.

    비좁은 베란다에 그와 나란히 서서 숲을 내다보았다. 농밀하게 자란 침엽수 사이에서 한 무리의 새 떼가 날아올랐다.

    환율이 또 올랐더라구요.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조금의 텀을 두고 그는 말을 이었다.

    보스턴으로 매달 돈을 부치거든요. 애들도, 애들 엄마도 다 거기 있어서.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가끔은…… 가족이란 게 뭔가 싶어요. 달에 몇 번 스카이프로 전화 하는 게 고작인데. 그것도 못할 때가 숱하고. 이제는 서로 쓰는 언어나 생활습관도 너무 달라서…… 돈 때문에 겨우 지탱되는 관계가 과연 정상적인가 그런 생각도 들고.

    두서없이 속내를 늘어놓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나 사이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정적 끝에 그가 먼저 입을 뗐다.

    그때, 장례식에 왔던 변호사가 내 대학 동기예요. 그 친구가 이 연립은 빠른 시일에 처분하는 게 좋겠대요. 누구에게 세를 주거나, 아예 매각하거나.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필터만 남은 담배를 창밖으로 내던지며 그는 중얼거렸다.

    마지막 송금을 한 지 벌써 세 달이 다 되어가서…….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는 그에게 나는 빠른 시일 내로 짐을 빼겠다고 힘겹게 약조했다.


    그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할머니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눌 수 있는 것들은 나누었다. 오래된 가전과 나비장은 그가 가져가기로 했고, 나비장에 차곡차곡 보관해온 할머니의 스크랩북은 내 소유가 되었다.

    줄 게 있었는데.

    떠나기 전, 그는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 꺼냈다.

    유골을 다 쓸어 담고 보니 이런 게 남아 있더라고요.

    인공심장 박동기였다. 그가 건네는 박동기를 나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티타늄 재질의 인공 심장은 겉만 조금 그슬렸을 뿐, 아직 온전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동기에 살포시 귀를 댔다. 고장난 박동기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공연히 50BPM의 느슨한 박동 소리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삐, 삐, 삐.

    구식이라 그런다. 밧데리가 고장 난 후론 늘 이래.

    어디선가 할머니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삐, 삐, 삐. 알레그로에서 안단테로, 다시 라르고로 느리게 뛰는 박동. 그 박자에 맞춰 희미하던 할머니의 윤곽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걷는 할머니. 웃으면 왼뺨에 보조개가 잡히는 할머니. 가슴에 푸른 꽃을 품은 할머니. 나의 오즈.

    티타늄으로 만든 오즈의 심장을 가슴에 가져다댔다. 불기가 가신 심장은 따뜻했다.


    *


    새로 구한 집은 좁고 창도 하나 뿐이었지만, 산책로와 마주해 있어 조용했고 무엇보다 볕이 잘 들었다. 남향으로 난 창으로 반듯하게 볕이 쏟아졌고, 그 빛 속에 누워 있으면 혼자라는 말이 더 이상 쓸쓸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래간 방치되어 있던 타투머신을 소독하고, 새 니들을 끼웠다. 바지를 걷어 올린 뒤, 왼쪽 복사뼈에 마취 크림을 얇게 발랐다. 상처 없이 깨끗한 살에 타투를 새기긴 처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이 점차 뻐근해져왔다. 자세를 잡고 니들을 가져다 댔다.

    생각해놓은 도안은 없었다. 마음 가는대로 니들을 움직이고, 문양을 새길 생각이었다. 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갈 때마다 따끔하고,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몸을 곧추세웠다. 뼈와 접해 있어 작업이 쉽지 않은 부위였다. 머신의 전원을 내렸다. 행여 니들이 엇나갈까 겁이 나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만둘까.

    중얼대며 오즈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새 살에 타투를 하는 내게 오즈는 어떤 말을 해주었을까. 후우우. 숨을 뱉자 굳어 있던 몸에 다시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머뭇하다 다시 머신을 작동시켰다.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방은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졌다. 어느새 가는 실선 하나가 복사뼈에 새겨졌다. 니들이 지나간 자리를 나는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반듯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실선. 선이 어떤 문양으로 이어질 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성해나

    성해나

    1994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 6월, 나는 구에서 주관하는 하우스 쉐어링 사업의 세입자로 참여하게 된다. 독거노인의 남는 방을 청년들에게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내주는 단기 임대 프로젝트였다.

    그해 봄에는 나의 엄마가 죽었다. 엄마는 카지노를 드나들며 사채를 쓰고 있었고, 원금보다 이자가 더 큰 빚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신용 한도를 최대로 올리고, 전세 집의 보증금을 뺀 후에도 원금은 끝내 상환하지 못했다. 하우스 쉐어링 공고를 보고 무작정 구청에 찾아간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내가 6개월간 머물 곳은 북아현동에 있는 연립이다. 20평 남짓한 그 집에 이복례라는 할머니 혼자 살고 있다. 심근증 때문에 반평생을 인공심장 박동기에 의존해온 그녀는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도울 것은 없느냐’는 내 물음에도 그녀는 ‘적적하고 사람 손이 필요해 세입자를 들인 게 아니라, 보조금이 나오니까 한 것’이라며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벽이 얇은 집에선 어떤 소리든 쉽게 공유된다.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키거나, 숨을 가쁘게 들이쉬는 소리도 밤마다 내 방으로 넘어온다. 쌕 쌕, 하는 천명음이 들릴 때마다 할머니가 염려되지만,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고, 세입자와 집주인의 명분으로 한시적 동거하는 것. 그렇게 호의도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할머니와 나는 한집에서 살아간다.

    나의 몸 이곳저곳엔 수많은 타투가 새겨져 있다. 자해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커버업 타투로, 집안에서는 긴 바지를 입어 그것들을 가린다. 어느 날, 무방비 상태로 욕실에서 나온 내게 할머니는 허벅지에 새긴 타투에 대해 묻는다.

    “그런 거 하려면 얼마나 드냐.”

    그녀에게 이것은 내가 직접 새긴 것이며,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타투를 배웠다고 설명한다. 할머니는 한참 망설이다 자신의 몸에도 타투를 새겨달라고 말한다. ‘지우고 싶은 게 있다’고 그녀는 덧붙인다.

    사람의 몸이 아닌 고무판에 몇 번 연습해본 게 다라고 답해도 할머니는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다. 고집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할머니에게 나는 무엇을 새기고 싶냐 묻는다. 그녀는 고민하다 자신이 직접 만든 압화를 가슴에 새기고 싶다고 한다.

    전사(문신을 위한 밑그림)를 몸에 찍기 전, 나는 할머니에게 윗옷을 벗어달라고 부탁한다. 할머니는 머뭇대다 윗옷을 들춘다.

    ‘くそ’

    오른쪽 빗장뼈 아래 큼직하게 박힌 일본어 레터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가슴부터 늑골까지 이어진 여러 개의 문신들은 누군가 장난삼아 한 낙서처럼 무늬도 엉망이고, 잉크도 심하게 번져 있다. 그것을 보며 나는 크게 놀라지만, 애써 담담한 척 작업을 시작한다. 문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바늘이 피부에 빠르게 박히는 느낌이 조금씩 전달된다. 험하게 새겨진 일어 레터링 위에 푸르고 작은 꽃이 하나 둘 새겨진다.

    빗장뼈 부근의 외곽작업을 막 마쳤을 때, 이제까지 침착하게 고통을 참던 할머니가 호흡곤란 증세를 보인다. 고르게 이어지던 숨이 거칠어지고, 인공심장박동기가 기계음을 내며 깜박이던 그 순간, 불현듯 오래전 질식사로 죽은 남동생을 떠올린다. 세탁기 안에 웅크리고 있던 동생과 그 안을 들여다보며 비명을 지르던 엄마, 집안에 쳐진 폴리스라인….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것들이 뒤엉키며 서서히 아득해진다.

    할머니의 의식은 곧 돌아온다. 할머니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짧으면 한 달 길면 세 달까지 지체될 ‘커버업’ 작업을 그녀가 과연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어영부영 첫 번째 작업을 끝마치고, 나는 구글 검색엔진에 빗장뼈 아래 새겨져 있던 레터링의 뜻을 검색해본다.

    ‘くそ [糞] 똥; 대변’

    이런 것을 할머니 몸에 새긴 사람은 누굴까. 끔찍하고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후에도 나는 할머니의 몸 상태를 살피며 시간차를 두고 꽃을 새긴다. 두 번째 작업부터 할머니와 나는 서서히 가까워진다.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가하면 서로 상의를 해 간단한 신호도 만든다.

    “숨이 안 쉬어지면 참지 말고 바닥을 치세요. 한 번 치면 괜찮다, 두 번 치면 멈춰라.”

    조금씩 마음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가슴에 새겨진 문신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똥; 대변…’ 포털 사이트에서 찾은 단어의 뜻이 자꾸만 마음에 맴돈다. 나도 모르게 실언이 나온다.

    “누가 이런 문신을 새긴 거예요?”

    내 물음에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먼저 상처를 내보인다. 수없이 자해를 하고, 피를 내고 응급실에 실려 간 흔적들이 허벅지부터 치골까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제 할머니도 나도 서로 약점 하나씩은 알고 있는 거예요.”

    할머니는 여전히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밤, 나는 얇은 벽을 타고 넘어오는 할머니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과거를 떠올린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돌봐야 했던 날들. 쉼 없이 애정을 갈구하고, 보채는 동생을 온전히 전담하기엔 나 역시도 너무 어리고 미숙했다. 동생을 내버려둔 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연애담을 나눴던 열일곱의 그날을 회고하며 나는 중얼댄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동생의 죽음이 내 과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면서도, 나는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한다. 할머니의 방에서는 여전히 신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녀의 고통 역시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며 잠이 든다.

    세 번째 작업을 하던 날, 이전의 일들로 서먹했던 그녀와 나는 갈비뼈 위로 꽃을 조금씩 새겨 넣으며 전보다 더 긴밀해진다. ‘재미있는 얘기 좀 해달라’고 장난을 거는 내게 할머니는 넌지시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함께 종로에 있는 단관 극장에 간다. 매표원은 ‘오즈의 마법사’가 상영하는 날마다 매번 극장을 찾는 할머니를 ‘오즈 씨’라 부른다. 언젠가 할머니는 자신을 ‘할머니’가 아닌 ‘오즈’라 부르라고, 그것이 제 진짜 이름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나는 기억해낸다. 그 말을 들은 후에도 나는 그녀를 오즈라 부르지 않았다. 퉁명스럽고 고집 센 그녀와 받침이 없고 부드러운 오즈란 이름이 영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오즈의 마법사’를 본다. 꾸벅꾸벅 졸며 정신을 못 차리는 나와 달리 할머니는 영화를 처음 본 사람처럼 시종일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허리케인이 불고, 집이 날아가고, 불규칙한 곡조의 관현악곡이 흘러나오는 동안 내 눈꺼풀은 천천히 감겨온다.

    어깨에 살이 닿는 감촉 때문에 나는 잠에서 깬다. 할머니가 꼭 지르고 있던 팔짱을 풀고, 내 어깨에 조심스럽게 팔을 두르고 있다. 그 순간, 스크린 속 세피아 톤의 밋밋한 화면도 서서히 컬러로 전환된다. 연꽃이 떠 있는 호수와 장미 넝쿨이 만발한 정원이 색을 되찾고, 색채가 없던 도로시와 토토에게도 색이 입혀진다. 할머니의 냄새와 촉감을 느끼며 나는 오즈 씨, 나지막이 속삭여 본다.

    동생과 엄마의 죽음 이후 의욕도 꿈도 잃었던 나는 할머니의 부추김으로 가을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데생 연습을 하고, 크로키를 숙련하는 동안 할머니 몸에 꽃을 새기는 작업은 유보된다.

    계약 만료까지 두어 달을 남겨 놓고, 할머니와 나는 마지막 작업을 위해 거실에 자리를 잡는다.

    “누구 주려고 뭘 사본 게 하도 오래전이라…….”

    선물이라며 할머니는 표지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단단한 재질의 책을 건넨다. 일반 서적과 달리 종이에 검은 코팅이 되어 있는 스크래치북이다.

    “이거 책 맞아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데.”

    검게 코팅된 종이를 빠르게 넘겨보는 내게 할머니는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는 건 네 몫”이라 답한다.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해하며 니들을 교체하고, 머신을 정비한다. 오른쪽 빗장뼈 아래 있는 도안들만 조금 덧칠하면 작업이 마무리될 듯해 속도를 내 작업을 재개한다.

    “오늘은 이만 하자”는 할머니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완성된 타투를 보고 흡족해하는 할머니의 얼굴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학원을 다니며 익힌 것들을 시험해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힘겨워하는 그녀를 향해 나는 곧 끝날 거라는 말만 반복한다.

    다른 환자들은 길어야 오 분 지속하는 발작을 할머니는 이십 분에 걸쳐 이어간다. 의사는 할머니의 심낭에 물이 가득 차 있다고 진단한다. 교체 주기가 한참 지난 박동기를 떼어내지도 않고 그대로 착용했던 게 그 이유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는 의사에게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두 달 동안 문안을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우스 쉐어링에 대한 공문을 전하기 위해 구청 직원이 한 차례 들렀을 뿐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할머니는 약물 주입과 심폐소생을 이어가며 겨우 고비를 넘긴다. 계약 만료는 점점 다가오고, 할머니의 혈육이 아닌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다.

    할머니는 먹는 음식마다 게워내길 반복하고, 점점 말라간다. 죽음에 대한 말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 나는 할머니 앞에선 늘 말을 돌린다.

    “할머니가 준 책 말이에요. 거기 뭐가 숨겨져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책을 가져와보라고 한 뒤, 손톱으로 코팅지를 천천히 긁어낸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검은 코팅지를 긁어낼 때마다 ‘오즈의 마법사’ 캐릭터에 색이 입혀진다.

    “이제 네가 해봐.”

    할머니는 내게 책을 내민다. 색채 없던 도로시도, 허수아비도, 겁쟁이 사자도 전부 제 색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는 검은 코팅지를 긁는다.

    할머니의 장례는 병원 지하에 있는 추모관에서 치러진다.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상주가 되지 못한다. 대신 키가 크고 어깨가 구부정한 할머니의 조카가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는다. 그는 내 이름을 ‘하라’가 아닌 ‘하나’로 잘못 부르는 사람이고, 상중에도 할머니의 재산상속 문제만 집요하게 따져 묻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할머니의 장례를 책임진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짙은 눈썹이나 날카로운 눈매가 할머니와 묘하게 닮은 그를 보면 내가 아니라 그가 할머니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절감된다.

    발인은 조용히 진행된다. 우는 사람도, 기도를 하거나 작별 인사를 하는 사람도 없다. 화장장 맨 끝에 서서 나는 할머니의 관이 가마로 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본다.

    “또다시 끝이구나.”

    고요히 타오르는 가마 앞에서 나는 중얼댄다. 누군가의 죽음을 접할 때마다 밀려오던 허무와 절망이 다시금 발화된다. 장지로 향하는 행렬을 지켜보다 나는 머뭇머뭇 돌아선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갈 곳이 없어진 나는 연립을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무력하게 살아간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지금이 몇 시인지도 가물가물한 나날들이 이어진다. 할머니의 조카가 연립에 찾아온 날에도 마찬가지다.

    돈에 관한 이야기나 언제쯤 집을 비울 거냐는 독촉을 할 것만 같았던 그는 의외로 자신이 아는 할머니에 대해 담담히 술회한다.

    “왜 가족 중에 그런 사람 있잖아요. 다들 쉬쉬하고, 묵인하는 사람. 있어도 없는 존재.”

    가족들에게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고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내가 아는 할머니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다 나는 오직 한 단어만을 건져 올린다. 내가 정말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

    “강한 사람.”

    할머니의 조카는 내게 줄 것이 있다고 말한다. ‘유골을 다 쓸어 담고 보니 이런 게 남아 있었다’며 그는 인공심장 박동기를 건넨다. 고장 난 박동기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심장에 귀를 댄 채 나는 할머니의 박동 소리를 떠올려본다.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걷는 할머니. 웃으면 왼뺨에 보조개가 잡히는 할머니. 가슴에 푸른 꽃을 품은 할머니. 나의 오즈.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는 법을 익힌다.

    할머니의 집에서 나온 뒤, 나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한다. 좁고 창도 하나뿐이지만, 산책로와 마주해 있어 조용하고 볕이 잘 드는 집이다. 남향으로 난 창 아래 앉아 나는 타투를 한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타투 머신을 소독하고, 새 니들을 끼운다. 생각해놓은 도안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니들을 움직인다. 상처 없는 깨끗한 살에 처음으로 새기는 타투다.

    가는 실선 하나가 새겨진다. 니들이 지나간 자리를 나는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반듯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실선. 선이 어떤 문양으로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다.
    성해나

    성해나

    1994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 구효서·은희경 소설가

    소설은 불특정한 독자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로 씌어진다. 모르는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들 모두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이 엿보였다. 그러나 구체적 실감이 없고 개연성이 떨어져서 공감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았다. 상상력은 이야기 소재나 자료가 아니라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세탁소 주인이 베트남 출신 아내와 함께 손님이 맡긴 옷을 입고 역할극을 하는 ‘나의 선녀, 그레이스 켈리!’에는 극적 요소가 있다. 또 군대에서 죽은 후배의 행적을 추적해가는 ‘인사이드 제이’의 기자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예민하고 진중해 보인다. 그러나 쓰는 사람의 에고(Ego)가 지나치게 강하면 소설 속 캐릭터가 혼선을 일으킨다.
    ‘장례식의 멤버’는 효율적인 단문과 뛰어난 이야기 솜씨, 유머감각과 재치 있는 내레이션이 경쾌함을 준다. 그러나 속도감이 빠르다보니 편견이 여과 없이 노출되고, 트렌디한 소재를 총망라하다보니 디테일이 허술하다. 잘 쓴 글이지만 이 모든 연쇄적 이야기들이 과연 어떤 사유에 가 닿는지 다소 공허하다.
    당선작은 ‘오즈’이다. 독거노인과 빚에 몰려 그 집에 살게 된 젊은 여성을 통해 가해와 피해로 얽혀 있는 삶의 상처와 죄의식, 관계의 회복 등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정형화된 인물을 탈피해서, ‘문신을 새기고 압화(꽃과 잎을 눌러 말린 것)를 만들고 영화를 보는’ 피해자 할머니라는 개성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소박하고 감상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지나친 욕심없이 이야기를 적당한 규모로 꾸리고 담담하게 전개한 데에서 엿보이는 균형 잡힌 시각이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당선을 축하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문단을 배경으로 한 <미나미 토키마사는 어디로 갔을까>는 흥미로운 설정에 재미를 갖췄지만 다소 상투적이고 평면적이었다. 집배원 생활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안녕, 로시난테 3세>는 입심이 뛰어난 한편 정제되지 않은 낭만적 자기토로가 장황하게 느껴졌다. <미토콘드리아> 역시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신발과 시간과 미토콘드리아를 연결시키는 데 그리 성공한 것 같지 않다.
  • 성해나

    성해나

    1994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오즈’는 근 일 년 간 조금씩 쓰고, 고친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 네 계절이 지났고, 몇 번 울었다. 숨죽여 울고 나면 다행스럽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주인공 오즈와 하라에게 조금씩 다가가고 있구나, 그들도 내게 마음을 열고 있구나. 생각하며 안도했다.

    그 마음을 알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부족함이 많은 제자에게 기꺼이 자신의 한편을 내어주신 윤성희 선생님, 송승환 선생님, 김태용 선생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글이 무언지, 용기와 긍지를 가지고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던 창작 시간이 내겐 정말 귀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오랜 벗들에게 고맙다. 그들 없는 내 세계는 더없이 작고 빈약했을 것이다. 삶은 끊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라 일러준 사람들. 그들을 통해 사랑을 배웠고, 여전히 배우고 있다.

    새해가 되면 품이 넓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매번 갖게 된다. 누군가를 함부로 이해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다정한 어른. 올해는 그런 어른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날마다 슬펐지만. 다가오는 새해엔 다를 거라 믿는다.

    쓰며 겪는 이입과 교감이 소중하고 좋다. 이 아프고 생경한 감각을 오래간 이어가고 싶다.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 작품전문
  • 줄거리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