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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틀리는 곳에서 나는 옳다

by  박다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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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돌본다는 행동이 주는 우월감 같은 것.("의무감 같은 불순한 감정이 들 때마다 자신을 더욱 혹사시켰고 이것은 온전히 우리의 문제이며 마땅히 지켜져야 할 도리라고 마음 깊숙이 새김질했다. 그럼에도 돌본다는 행동이 주는 우월감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있어」, 181쪽) 혹은 타인의 불행을 대할 때 느껴지는 안도감 같은 것들.("그런 사람들을 보면요, 나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요. 그래서 그걸 들킬까봐, 그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런 마음을 읽어버릴까봐 두려워요." 「말하는 사람」, 244쪽) 그런 감정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문제와는 별개로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이기적인 감정들, 간사한 생각들은 어쩔 수 없다. 행동의 잘못과는 달라서 생각의 잘못은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했다면, 다음번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것까지 같이 생각날 뿐이다. 작디작은 감정들, 삐져나온 이기심이나 순간을 장악하는 불쾌감 같은 것들을 우리는 어쩔 수가 없다.

    이처럼 사소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에 임현은 주목한다. 그의 첫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이루고 있다. 인간의 아주 작은 '어쩔 수 없음'도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런데 평자들 사이에서 그의 소설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읽힌다.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해설의 제목은 '틀린 옳음(황현경)'이며, '내가 뭘 잘못하지 않았는데?(김형중, 『현대문학』, 2017년 12월호)'라는 제목의 평문이 쓰이기도 했다. 임현의 소설집을 다뤘던 한 대담(『창작과 비평』, 2017년 겨울호)에서도 ''윤리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윤리를 가지고 실험한다(김성중)', '임현 소설의 근저에는 어떤 순결한 '심리적 결벽'같은 게 있는데 (…) 그 결벽이 죄책감 혹은 책임감 같은 윤리를 종용하고, 인물 내면의 깊숙한 지점을 꿰찌르는 것(박소란)' 같은 의견들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논의들은 대개 소설 속 인물을 척도로 삼아 임현 소설의 윤리를 판별하고자 했다. 등장인물이 느끼는 죄책감을 근거로 그 인물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규정해 내거나, 인물이 하는 말이 이치에 닿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다투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이 심도 있게 다뤄졌고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다양한 기준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처럼 임현의 소설에 대해 논할 때 윤리의 문제가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소설이 옳지 않다는 걸 아는데 자꾸자꾸 생겨나는 어떤 마음을 읽어 내거나, 의도하지 않은 채 초래한 잘못된 상황들을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옳은 일이든, 그른 일이든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알량한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런 일들이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기 위해서는 이 '어쩔 수 없음'을 톺아봐야 한다.



    2.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수렴하는 곳: 근원적 불가능성



    예기치 못한 불행 앞에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감정들, 나의 무심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가닿으면 상처가 되고 마는 그 어쩔 수 없음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왜 이다지도 어쩔 수 없는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의 옳음과는 무관한 어쩔 수 없음은 도대체 왜 존재할까. 두 소설이 만나는 곳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 개와 같은 말』의 첫 작품은 「가능한 세계」이고 마지막 작품은 「불가능한 세계」다. 이런 식의 소설 배치는 이 소설집이 가능성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해 종내는 불가능성에 대한 인지로 끝나는 이야기라거나, 다양한 세계상(世界像)을 제시하려는 시도라는 예측을 낳기 쉽다. 그러나 이런 안일한 예측은 아홉 살 소년의 질문에 의해 산산조각난다.



    "만약에요, 자녀가 장애인이 되는 것과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요?"(「가능한 세계」, 18쪽)



    「가능한 세계」의 주인공은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아홉 살 소년이다. 소년이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주차장이 무너(「가능한 세계」, 22쪽)"지거나, "긴 호우 탓에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22쪽)"지거나, "유전과는 무관한 뇌종양이 발병(22쪽)"할 수 있다는 것, 또는 "내가 테러리스트가 될 확률이 아주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도 아(12쪽)"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세계」가 묻는 것은 다음과 같은 암담한 질문이다. '미래가 지금보다 더 부정적인 세계라면?'

    '가능성(可能性)'은 사전적으로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를 의미하는 단어다. 사전적 정의에는 긍정적 뉘앙스도 부정적 뉘앙스도 없지만 꿈꾸기 좋아하는 우리는 '가능성'을 '(모든 좋은 일들의 실현)가능성'쯤으로 읽는다. 하지만 임현의 '가능성'은 우리의 '가능성'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이 단어의 유토피아적 함의들을 배제한 채, 「가능한 세계」는 '(모든 나쁜 일들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묻는다. 이쯤 되니 '내가 가진 가능성이 불행해질 가능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보다 더 궁금한 것이 생긴다. 임현은 왜 이런 것을 묻나. 이런 절망적인 질문은 어디에서 오나.

    그 질문은 「불가능한 세계」에서 온다. 전산학자인 소진의 아버지는 무작위의 점들 사이에 가능한 모든 경로 중 가장 짧은 경로를 단 한순간에 알려줄 수 있는 알고리즘을 고안하게 된다. 이 알고리즘에 의하면 최단경로인 하나의 경로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경로의 가능성('이 길이 최단경로일지도 몰라!')은 몰살된다. 가능성들의 현존이 불가능한 세계가 도래하는 것이다. 소설은 노교수(老敎授)가 발견한 불가능성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불가능한 세계'의 '세계'를 두 가족(소진과 부모님, 소진과 민재)으로 국한해보면 조금은 결이 다른 이야기를 얻게 된다. 이 소설에서 불가능은 그 어디에서보다 두 가족 관계 속에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소진의 부모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이혼했다. 소진과 엄마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아빠와 소진의 관계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민재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소진의 근거 없는 불안"(「불가능한 세계」, 255쪽)이지만 근거 없는 불안이 소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녀는 의심할 수 없는 것까지 의심하는 사람이다. "아주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조차 소진은 의심했다."(256쪽)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가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단단하게 사랑하고 있다. 소진의 어머니는 딸이 가출했다 돌아온 이후 조그만 기척에도 잠을 깨고 현관에 나가 신발들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한다. 소진은 하나뿐인 아버지를 이해하기위해 노력한다. 아버지의 은퇴 이후의 삶을 걱정하고, 위로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살핀다. 민재는 소진의 근거 없는 불안을 이해할 수 없지만 '제발 그만해. 그렇게 말하는 대신 민재는 이불을 걷어내고 소진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279쪽)'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내가 너를 엉망으로 만든 것 같다(273쪽)'는 어머니의 고백에 소진은 '맞아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에요(274쪽)'라고 답해주고 싶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찾아와서는 마치 요양이 필요한 노인처럼 대하는 소진이(266쪽)' 맘에 들지 않는다. 민재는 이 순간이 어떻게든 지나갈 거라고 믿고 있지만 소진의 생각은 다르다.



    소진을 자리에 눕힌 뒤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이 순간이 어떻게든 지나갈 거라고 민재는 믿고 있었다. 그때가 우리의 최대 위기였지, 회상하며 안심할 날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겪는 위기란 고작 견딜 수 있을 만한 것들뿐이었다. 임신 중에 충분히 생길 수 있는 호르몬 문제일 수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소진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281-282쪽)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란 이런 식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나의 노력은 오해받기 마련이며 나를 이해하려 애쓰는 누군가를 우리는 오해한다. 서로는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때에 줄 수가 없다. 인간관계는 언제나 어긋나며 우리는 늘 서로에게 실망한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럴 것이다. 인간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자고 일어난다고 기분이 나아질 그런 문제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근원적이라 할 만한 불가능이 있다. 그리고 '세계'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것을 그 본래의 의미대로 확장해도 이야기는 같다. 근원적 불가능은 세계 자체에도 각인되어 있어서 완전하고 안전한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세계는 없다.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누군가는 부당하게 목숨을 잃는다. 세상의 형상이란 언제고 어그러진 채, 금간 채 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사회, 정쟁 없는 국가, 자연재해 없는 나라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 세계는 미래에 대한 소망 속에 있거나 각색된 과거 속에만 있다.

    이제는 소년의 질문이 이해가 된다. '당신의 자녀가 테러리스트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냐'는 잔인한 질문은 세계의 불가능성에서 연원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불완전하기에 가능성은 언제든지 참혹한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이렇게 「가능한 세계」에서 가능성의 존재는 우리를 막막하게 한다. 그리하여 반대되는 제목을 가진 두 소설(「가능한 세계」, 「불가능한 세계」)은 수렴되고 마는데, 두 소설이 만나는 지점에는 '근원적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3. 불가능성의 증거: 어쩔 수 없는 것들



    임현의 '어쩔 수 없음'을 살피다 보면 그의 소설이 레비나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은 레비나스가 보지 못한 것을 임현이 보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레비나스는 '얼굴'의 형상에 주목한다. 그에게 얼굴은 단순히 눈과 코, 입의 집합이 아니다. 얼굴은 이목구비의 합을 뛰어넘는 하나의 이미지로 기능한다.('얼굴은 코와 입, 두 눈의 집합이 아니다. 얼굴은 책상이 단지 네모난 판자와 서랍과 책상다리의 집합이라는 것과 전혀 다르다. 책상은 바라보지도, 호소하지도, 스스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얼굴의 만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147-148쪽) 눈이 아니라 얼굴이 우리를 바라보고, 입술이 아니라 얼굴이 우리에게 호소한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은 도움을 요청하며 이 얼굴과 만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의 얼굴은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에 대해 저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로 이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148-149쪽) 도움을 요청하는 타자의 무력한 얼굴은 우리에게 '윤리적이 되라'고 강요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고 했는데, '얼굴'의 도덕적 호소력과 마주한 임현의 기분은 단순하지가 않다. 임현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타자의 '얼굴'을 보며 우월감, 안도감을 느끼거나 불쾌해한다. 교통사고로 오른팔을 잃은 무영을 돌보는 '은우는 자신의 온전한 희생으로 무영이 회복되길 바(「거기에 있어」, 181쪽)'라지만 '돌본다는 행동이 주는 우월감은' 어쩌지 못한다. 「말하는 사람」의 문영은 천막을 세워두고 농성하는 노동자, 유족, 해고자들을 마주치고 나서 느낀 안도감과 두려움에 대해 고백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요, 나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요. 그래서 그걸 들킬까봐, 그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런 마음을 읽어버릴까봐 두려워요.(「말하는 사람」, 244쪽)"

    레비나스가 옳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윤리적 행동을 종용한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타자의 요청에 응할 때 우리가 느끼는 시혜심이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불온하게 싹트는 우월감 같은 것들. 타인의 불행과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비열한 안도감.('민재의 경우,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의 삶은 난치병이나 가정의 심각한 불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가능한 세계」, 255-256쪽)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타자의 자리에 서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기적인 두려움.("미혼모라든가, 장애인 같은 말들이 나는 무서워요. 그런 것들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데 그게 내가 될까봐 무서운거지." 「그 개와 같은 말」, 160쪽)

    조금 더 나쁜 것도 있다. 타자의 '얼굴'에 불쾌감을 느끼는 일. 「무언가의 끝」의 화자는 가든 마트가 어디냐 묻는 중년의 여자를 '어딘가 부담스럽고 술 냄새도 나는 게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 여(「무언가의 끝」, 142쪽)'긴다. 화자는 결국 가든 마트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후에 가든 마트가 자기에게 아주 익숙한 장소였음을 상기하고는 스스로에게 변명한다. 당시 형의 죽음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그럴 만큼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라고. 하지만 화자는 이것이 변명임을 알고 있다. '나는 그날 그 여자가 내가 가는 곳까지 따라올 것 같아 불안했다. 무언가 계속 부탁할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무언가의 끝」, 147쪽)' 도움을 청하는 이웃의 얼굴은 그 찡그린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어딘가 초라한 행색 때문인지 어쨌든 부담스럽다. 내게 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나 나의 호의를 독촉하는 것 같은 압박감 등으로 인해 '얼굴'은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얼굴'의 불쾌감은 「불가능한 세계」에서 '젖은 털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로 형상화된다. 소진은 퇴근시간의 지하철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는다. 냄새의 진원지로 의심되는 사람이 내렸는데도 냄새가 계속되자 그녀는 자기에게서 나는 게 아닐까 걱정한다. 그러다가 행색이 초라한 중년 여성을 발견하게 되고 자기가 냄새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무척 안심'한다. 불쾌한 냄새가 상징하는 '불행'이 소진의 것이 아니고 타인의 것이라서 그녀는 마음이 놓인다. '이러면 안 되지'라고 나를 다그치기 전에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안도감. 이것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편,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 중년 여성은 소진에게 말을 건다.



    여자가 말을 걸어왔을 때 소진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지금 이 냄새 때문에 그러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나를 계속 보고 있는 거죠?"

    소진은 아니라고,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그런 것뿐이라며 급하게 변명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안 좋은 일이 좀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일은 자주 겪는 것도 아니고 나는 평소에는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오늘은 정말 예외적인 날이예요."(「불가능한 세계」, 264쪽)



    '얼굴'이 말을 한다. 소진이 '얼굴'이라 생각했던 것이 눈과 코와 입이 되어 항변한다. 나의 얼굴은 '(레비나스의)얼굴'이 아니라고. 오늘은 정말 예외적인 날일뿐이라고. 여기에 '얼굴' 개념의 문제가 있다. 중년 여성의 얼굴이 '얼굴'이 되는 것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소진의 시선 속에서 뿐이다. 때때로 우리는 '얼굴'이 아닌 타자를 '얼굴'이 되게 한다. 누군가의 무심한 행동이나 섣부른 판단은 한 인간을 '곤궁과 궁핍'을 가진 '얼굴'로 바꿔 놓기도 한다.

    여기 그런 장면이 있다. 내게 전공을 묻는 질문에 '내 친구가 고졸이다, 상고 나왔다고 대신 대답(「좋은 사람」, 103쪽)'한다. 질문한 사람은 민망해하고, 좌중의 분위기는 어색하게 흘러간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어색하게만 흘러가는 분위기가 점점 기분이 나빠진다.



    왜 나를 장애인이나 노인처럼 보살피려고 할까.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면서 왜 중요한 사람 대하듯 그 자리에 내가 이 대화를 이해하고 있는지 살피고, 모를 만한 주제는 피하려 드는지, 나를 두고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너무 빤히 보여서 불쾌하더란 말입니다. 왜 함부로 나를 배려하려 드나. (「좋은 사람」, 103쪽)



    남자는 그를 위한 배려가 불쾌했다고 말한다. 배려의 이면에는 배려하는 사람이 은밀히 즐기는 우월감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배려를 받은 사람의 열등감도 있다. 누군가를 함부로 배려하면, 배려 받는 사람은 '얼굴'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불가능한 세계」의 중년 여성이나 「좋은 사람」의 식당 남자는 '너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구나'라는 일방적 판단 속에서만 '얼굴'이 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임현의 주인공들은 '얼굴'의 요청에 응해 타자를 돕는다. 시혜심과 우월감, 두려움을 느끼며. 혹은 '얼굴'의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쾌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아가 '얼굴'아닌 타자를 '얼굴'이 되게 한다. 섣부른 배려에 의해 타자는 '얼굴'이 된다. 시혜심, 우월감, 두려움, 불쾌감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만큼이나 타자를 '얼굴'이 되게 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계는 불가능하고 너와 나 사이에는 근본적 다름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은 세계의 근원적 불가능성에 대한 증거다. 세계는 균열로 가득 차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해소할 수 없는 적대가 가로놓여 있다. '전공'이라는 단어가 가진 간극("그런데 그때 나는 대답을 할 뻔했거든요. 내 친구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상고에서 내 전공이 세무행정이었다고 그렇게 대답했을 겁니다. 뭘 묻는지 몰랐던 거지."「좋은 사람」, 104쪽)으로 인해 사람들의 입장은 달라진다. 각자의 이해 불가한 입장 속에서 어떤 배려는 지나친 것이 되어 원치 않는 누군가를 불쌍한 사람이 되게 한다.



    4. '어쩔 수 없음'이 말하게 하기 : 소설의 옳음



    임현이 찾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어쩌면 좋을까. 그것들을 '진실'이라 부르면 지나친 명명일까. 여기서 말하는 '진실'은 '거짓이 없는 사실(fact)'을 의미한다. '참된 이치, 참된 도리(truth)'를 뜻하는 단어인 '진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옳은 것(진리)'이 아니라 '있는 것(진실)'이다. 인간의 옳음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잔혹한 진실'이라 할 수 있겠다. 자비를 베풀 때 느끼는 우월감, 불행한 타자를 불쾌하게 느끼는 일,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주는 일 모두 잔인한 진실로서 이미 거기에 '있다'

    임현은 이 잔혹한 진실(즉, 어쩔 수 없음)을 그의 소설에 포착해두었다. 그런데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그려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발 더 나아가, 어쩔 수 없음이 직접 말을 하게 한다.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음의 목소리를, 그 잔인한 '있음'의 발화를 기록해 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고두」는 돌올한 작품이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켜라. 그것이 너희에게 더 이로운 쪽이다.(「고두」, 33쪽)'라고 가르치는 고등학교 윤리 선생 '나'가 제자인 연주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게 되는 이야기가 골자를 이루는 이 소설은 선생과 미성년 제자와의 성관계라는 소재로 인해 논란이 된 바 있다.

    「고두」의 화자인 윤리선생은 특별한 인물이다. 임현 소설의 주인공 중 유일한 악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인물들과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무언가의 끝」의 '형수' 같은 사람들이다.



    남자는 1년을 살다가 석 달분의 방세가 밀렸을 때 나가야 했다. 겨울이었고 한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으므로 새로 이사를 오는 사람은 드물 테고 빈방으로 봄까지 놀릴 것을 형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는데도 어떤 계산 끝에 그런 확신이 들었는지 형수는 남자를 내보내기로 했다. 보름 후에는 밀린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형수는 믿지 않았다. (…)

    형수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었나 생각하면 아니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자주 라디오를 들었는데 거기 나오는 사연만으로도 훌쩍거리던 사람이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모르는 노인들과도 자주 대화했고 야밤에 쓰러진 취객을 일으켜 세우거나 남의 싸움에 관여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무언가의 끝」, 137-138쪽)



    이유 없이 매정해지기도 했다가, 또 본성은 선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괜한 죄책감에 서럽게 울기도 하는 주체. '인간은 다면체(「생명연습」)'라는 김승옥의 말대로 임현의 인간은 다면체다.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착하다, 좋다, 그런 건 일종의 상태 아니냐? 그랬다가 안 그러기도 하는 거 아니냐? 그냥 너랑 나 같은 사람이잖아.' 「좋은 사람」, 114쪽) 그에 반해 윤리선생은 단면으로 이루어진 인물이다. 그는 복잡다단한 감정에 휩싸이는 주체가 아니다. 그는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으며 반성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유리한 입장을 고수하고 끝까지 변명한다. '내가 바란 게 아니었다.' '나보고 뭐 어쩌라고.'

    임현이 그린 이 뻔뻔한 악인을 '어쩔 수 없음'과 연관 지어 보자. 다른 작품들에서 다양한 양태로 나타났던 '어쩔 수 없음'을 「고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음'은 무엇일까. 제자인 연주와 부적절한 사이가 된 것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아니면 부른 배로 학교에 찾아와 "사랑했어요."라고 사과하는 연주를 '나'는 어쩔 수 없었나?

    「고두」의 어쩔 수 없음은 조금 다른 층위에서 찾아야 한다. 이 소설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은 어떤 상황이 아니고 어떤 감정도 아니고 윤리선생 그 자체다. 윤리선생의 존재 자체를 우리는 어쩔 수가 없다. 사회의 악랄한 생태대로 살아온 자, 그 생태대로 살아야 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자, 비겁한 자, 이상한 말을 논리적으로 하기 위해 애쓰는 자, 끊임없이 변명하는 자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혹독하기 그지없는 진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은 완전하지 않으며 사회는 균열을 품고 있다. 윤리 선생은 균열을 체화하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고두」가 윤리선생의 목소리로 쓰여졌다는 사실은 작가 임현의 치열함을 돋보이게 한다. 「고두」에서 '어쩔 수 없음'은 목소리를 얻어 말을 한다. 가해자인 윤리 선생의 목소리로 서사를 끌고 나감으로써 이 소설은 '어쩔 수 없음'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어쩔 수 없는 삶의 진실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라는 질문에 임현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것도 같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기록한다. 잔인한 진실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잔인한 진실이 스스로를 기록하게 한다. 우리가 「고두」를 읽으며 느낀 불편함은 세상의 추악한 진실들을 마주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만의 논리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추악함을 보는 일은 견디기 어렵다. 이 점이 「고두」를 문제적 작품이 되도록 한 것은 아닐까.

    언제고 어려운 것은 마주보는 일이다. 숨기고 없는 체 하기보다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삶의 진실을 마주보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삶의 불가능성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정해진 패배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착 상태를 치밀하게 제시하는 것이 진보주의자의 단순한 해결책보다 더욱 적절하다.(지젝, 『시차적 관점』, 258쪽)'는 지젝의 말은 이런 상황을 대변한다. 임현은 섣부르게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인물상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세상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인간의 비겁한 진실을 마주보고, 때로 죄책감을 느끼며, 치밀하게 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며 안도하는 인간들을 그린다. 배려가 폭력이 되는 순간을 그린다.

    만약 소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임현의 소설이 하고 있다.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사의 한 단면을 글이라는 형식으로 기록해두는 일, 잔인한 것들을 잔인한 채로 그려두는 일이 소설이 해야 할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럴 때 '옳음'은 기록 그 자체에 있다. 윤리선생이 틀리는 곳에서 「고두」는 옳다. 우리가 틀리는 곳에서 소설은 옳다. 우리의 틀림을 기록하고 있는 소설만이 오롯이 옳다. 윤리 선생이 자기 상황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곳, 우리가 잔혹한 진실의 잔혹함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소설은 옳다. 그래서 소설의 옳음은 고고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진흙탕에 발이 빠진 모습을 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누가 옳은가. 모든 것이 문제고 아무도 옳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의 옳음이다.
    박다솜

    박다솜

    1990년 충남 공주 출생

    한양대 사회학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수료

  • 신수정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김영찬 계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비평의 위상과 입지가 점점 위축되어가는 와중에도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신선하고 활기찬 것 같다. 이번 문학평론 부문 응모작들을 보며 느낀 감상이다. 대체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몇 가지 결함도 여전히 눈에 띄었다. 많은 응모작들이 외국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해 정작 작품의 실제가 실종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설득력 있는 비평적 문제의식과 정확한 문장에 대한 자의식의 결여도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 가운데 최종적으로 논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세 작품이다. ''응시'하는 존재들 – 임승유, 안희연, 백은선의 시세계'는 이론적 개념과 작품의 실제가 잘 조응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고, 특히 '응시'라는 개념이 이 세 작가의 작품세계를 포괄할 수 있는지가 끝내 의문스러웠다. '일상을 사유하는 두 가지 방식 – 최정화, 김금희 소설론'은 '일상'을 천착하는 두 작가의 개성적인 방식을 논한 작품이다. 그러나 논의가 기존 논의의 틀에 머물러 있고 너무 소박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한 것은 임현의 소설을 다룬 '네가 틀리는 곳에서 나는 옳다'이다. 최근 문학계의 화두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간파하는 감식안, 그럼에도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유의 힘에 주목했다. 현실의 '옮음'과는 다른, 또 달라야 하는, 문학의 '옮음'이라는 문제의식을 자기의 언어로 차분히 설득해내는 유려한 문장도 눈길을 끌었다. 당선을 축하한다.
  • 박다솜

    박다솜

    1990년 충남 공주 출생

    한양대 사회학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수료

    안 된다고 죽나 뭐, 지금도 행복한데. 싶다가도 안 되면 죽을 것 같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아무 죄책감 없이 한 글자도 쓰지 않은 날들과, 매달려 엉엉 울고 싶은 날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죽을 것 같던 날들, 매달려 엉엉 울던 날들에 이제는 감사합니다. 그 고통스런 시간들이 제게 있어줘서 이 당선 소감을 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있는 힘껏 고통스러워 보겠습니다.

    제 모든 공부의 출발점이 되어주신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같이 공부한 대학원의 학우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아빠 말이 맞아요. 저 어릴 적 엄마가 목이 쉬도록 읽어주신 그 많은 이야기들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쓰는 글 어딘가에는 분명 엄마의 쉰 목소리가 묻어 있을 거예요. 많이 기뻐해주신 시부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뒤뚱거리는 글을 당선작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로서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 당신이 있어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힘으로 밥도 먹고 글도 쓰고 합니다. 못나고 모난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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