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발판 끝에 매달린 두 편의 동화

by  최상운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1경(勞童話): 호이스트

    등장인물: 재형, 정섭, 형민/안전요원

    무대: 한가운데 비계가 서 있다. 오른편엔 이동식 잭이 있다. 잭 위에는 가슴팍 높이까지 가지런히 자재(9.5T 900*1800 석고보드, 가장 위의 첫 장만 실물이다)가, 굄목을 댄 채 불투명 비닐로 덮여 있다.



    오후. 이정섭이 자재를 등지고 앉아, 장갑 벗은 채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 조명이 들면 전재형이 양 손 각각 공구함과 경광봉을 들고 왼편에서 등장한다. 힘겹게 비계 오른쪽까지 와 공구함을 놓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한 바퀴 돈다. 정섭을 발견하고 재빨리 그리로 간다.



    재형: (촐싹대며) 정섭이 형, 왜 또 짱박혀 있어요. 나 물건 찾으러 보내놓고서, 어디 가버린 줄 알았잖아요. 그럼 저 혼자 어쩌라고요. 전 말귀도 못 알아먹는데, 팀장님 오더는 형이 받는데, 저 혼자 얼마나 불안해요. 샵장, 그러니까 우리 팀 작업도구 모아놓은 구역에서, 혼자 이것저것 뒤적이기도 얼마나 적적했는데요. 그래도 봐요. 다 챙겨왔어요. (공구함에서 나사 자루를 하나하나 들춰 보이며) 가장자리 재단할 때 쥐꼬리톱이랑 망치 있고요, 여기 쓰리피스 박는 7.5미리에요. 이정도 있으면, 여기 벽 한 면 다 박고도 남을 거예요. 이렇게 작아도, 지탱 못하는 게 없는 콩피스도 한 자루 있어요. 콩피스? 콘피스? 이름이 왜 그렇게 붙었어요? 콩알만 해서 그런가요? 옥수수처럼 원뿔이라 콘피스인가요? 한번 확실히 듣고 나면 아- 할 것 같은데, 사람마다 발음이 달라요. 형, 이거 원래 이름이 콩피스예요, 콘피스예요? (정섭 무반응) 형 화났어요? 제가 좀 늦기는 했죠. 아직도 눈으로 봐선 구분도 못하니까, 일일이 살펴보느라고요. 맨날 저 기다리느라 답답하시죠. 그래도 화나서 어디로 가버리시면 안 돼요. 그럼 제가 형을 도와드릴 수 없잖아요.

    정섭: (재형 대사 중에 계속 핸드폰만 만지며 무심히) 난 너 없이도 혼자 작업할 수 있어. 왔다갔다 번거롭고 시간 걸릴 뿐이지. 근데 네가 날 돕느라 걸리는 시간이, 나 혼자 시간보다 더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꼭 네가 도와주게 하려고, 그걸 위해서 작업하는 거 같다.

    재형: 에이, 형 또 괜히 그러신다. 저 노력 많이 하는 거 알잖아요. 일머리 타고나지 않았는데 어쩌겠어요. 대신 죽기 살기로 구른다고요. 그래야 쫓겨나지도 않죠.

    정섭: 소장은 그럴 생각 없을걸. 한 사람이라도 현장에 집어넣어야 득이 되니까. 팀장도 그래. 지금 공기工期는 빠듯한데 사람이 없으니, 일단 투입하고 보는 거야.

    재형: 그럼 TBM, 그러니까 아침조회 후에 왜 절 픽pick하셨어요. 저랑 그래도 잘 맞는 점이 있어서잖아요?

    정섭: 박 팀장, 정 반장, 심 반장이 잘하는 애들 먼저 데려가잖아. 난 남은 애들이랑 해야지.

    재형: 어? 오늘 정 반장님, 심 반장님 게이트에서 음주 걸린 거 모르세요? 아예 조회 오지도 못하셨는데. 왜 모르는 것처럼 말씀하세요.

    정섭: 우리 팀이 몇 명인데, 하나하나 오는지 마는지 관심 가질 건 또 뭐야.

    재형: 어제 숙소 거실에서 밤새 떠들썩하니 한잔 하시더니- 전 이렇게 될 줄 알았죠.

    정섭: 진짜? 너 여기서 그 사람들이랑 같이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고?

    재형: 아뇨, 그 알았다는 게 아니잖아요. 저야 뭐, 그렇고 그런- 사람인데, 여기 반장님들처럼 다양하고 재밌는 분들이랑 엮일 기회가 있었겠어요. 형만 해도 그래요. 공장 조금 다니시다가, 그만두고 피자집인지 뭔지 배달하던 중에 거기 인수까지 하시고- 무슨 시험도 잠깐 준비해봤다 하셨죠? 그리고 지금은 저랑 여기서 작업 대기하고 있으시고요.



    정섭은 재형이 자기 얘기를 시작하자, 대사가 끝나고도 계속 그를 빤히 바라본다. 재형의 웃음이 경직돼간다. 왼편에서 안전요원 등장. 느긋하게 사방을 둘러보며, 어슬렁어슬렁 비계를 한 바퀴 돌아 왼편으로 온다. 정섭이 일찌감치 기척을 느끼고 핸드폰을 넣고 장갑을 끼며 털고 일어난다. 재형은 하는 것 없이 부산을 떨며, 정섭에게 괜한 신호를 보내기도 하는 등 불안해한다. 정섭은 외면한 채 딴전피울 동안, 안전요원이 자재를 잠시 본다.



    안전: (재형에게) 이거 뭐예요?

    재형: (어색하게) 대기 중인 거예요. 7층이랑 여기랑 어디 먼저 작업할지 지시가 안 떨어졌대요. 위에부터 하기로 하면 바로 올려야죠, (왼편 너머 가리키며) 저기 저걸로요.

    안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애매하게 여기다 둬도 되나. 렌탈 왔다갔다하는 덴데-

    재형: 아, 렌탈, 그러니까 배터리 충전해서 타고 다니는, 이동 작업대 말이죠? 여기저기서 올라갔다 내려가고 하는 거 보면, 꼭 게가 집게로 허공에다 밥을 먹이는 것 같아요. (안전요원이 별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위축된다) 물론 제가 운전했다는 건 아니고요. 자격증 없으면 금지니까요. 딸 생각도 안 해봤어요.

    안전: (재형의 손을 가리키며) 그 장갑 뭐예요? 못 쓰게 된 거 몰라요?

    재형: (손을 사리며) 저는 재단, 그러니까 커터 칼로 석고를 자른다거나 안 해요. 제가 하면 꼭 치수가 틀려서, 애초에 아무도 안 시키거든요. 애초에 날 서 있는 걸 만질 일이 없으니까- 괜찮죠? 저는 일단 자재 지키다가, (정섭 가리키며) 다른 분이 렌탈 몰고 오면, (경광봉을 내보인다) 유도원 하려고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렌탈 동선 살피면서, 사고 안 나게 주의하는 일요.

    안전: (재형의 안전모 가리키며) 유도원이면 따로 유도원 하이바를 써야죠. 조끼도 그렇고-

    재형: 그게, 렌탈 필요 없을 수도 있고, 그럼 일반 안전모만 쓰고 작업해야 하잖아요.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필요하게 되면 꼭 제대로 갖추고 하겠습니다.



    안전요원 재형을 훑어보더니 왼편으로 퇴장. 재형은 안전요원이 퇴장하고 나서도 잠시 가는 길을 바라본다. 정섭 주저앉아 장갑 벗고 핸드폰을 만진다.

    재형: 하여튼 저 인간들! 어디 트집 하나 잡아다가 식권 삥 뜯으려고 저러지. 그러니까 업체에서 식대 대신, 현장 매점에서만 쓰게 지급한 상품권 있잖아요. 그걸로 빵 사먹으려는 게 아니라, 쟤네한텐 그걸 현금으로 바꾸는 수가 있대요.

    정섭: 쟤네가 식권 받고 봐주니까 그렇지, 아니면 잘못하는 대로 퇴출이야, 우리는.

    재형: 하긴 수칙 안 지켰다고 다 집에 보내면, 공사할 사람이 남아나겠어요. 그게 다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법칙인데, 이 현장이라고 피해가란 법 없겠죠. 하지만 제가 맘에 안 드는 건 다른 거예요. 쟤네들 평소엔 현장의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다가, 웬일로 숨이 턱에 차서 어디론가 달려갈 때가 있잖아요. 그 다음엔 시끌벅적하던 현장이 조용해져요. 그곳에서 뭔가가 퍼져나간 거예요. 그러면 모두,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돼요.

    정섭: 진짜? 난 여태 그런 적 없었는데, 넌 일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게 정말이야? (침묵) 건너 듣기라도 했어? (침묵) 왜 있지도 않은 일을 갖고 말질을 하냐, 분위기 썰렁하게.

    재형: (잠시 어색해하다) 아, 그러게요. 매일 떡이 되도록 바쁘다가, 모처럼 아무것도 안하고 꿀 빠는 것도 참 허한데요. 이러다 우리 박 팀장님, 소리 고래고래 지르면서 튀어나오면 어째요? "다들 바빠 죽는데, 말 없으면 눈치껏 올라와서 거들든가, 니들만 여 숨어서 놀고 자빠졌나" 하면서요.

    정섭: 그냥 있을래. 나는 계속 여기 기다렸잖아. 잊히면 잊어버린 쪽 잘못이지.

    재형: 그럼 전 원래 어리바리한 데서, 더 어리바리한 척하면서 이래야죠. "몸만 가면 소용없잖아요. 석고부터 올리려는데, 호이스트가 안 잡혀서요." (왼편을 보며) 그러니까, 도르래로 감아올렸다 내렸다가 하는, 고층현장 화물 승강기 말이에요. 사실 걱정은 되는 게, 안 잡히면 어쩌죠? 저걸로 올라가면 편하겠다, 하는데 타본 기억이 없거든요. 형은요?

    정섭: 그게 무슨 엘리베이터인 줄 아냐. 몸뚱이만 덜렁 가니까 못 타지. 지금같이 바쁜 때엔, 어지간히 무거운 거 양중 아니면 바라지를 마.

    재형: 양중? 그러니까, 자재를 한꺼번에 올리고 나르고 하는 거 말이죠. 근데 어떤 자재라도, 사람보다 무거운 게 있어요? (사이. 점점 도취되어) 헤헤, 방금은 말도 안 되는 얘기한 거 알아요. 일부러 해본 소리예요. 살을 암만 돼지처럼 찌워서 무거워진들, 제 앞에서 세워주진 않겠죠. 살 뺄 겸 걸어가라고 욕이나 할 거예요. 그러니까 더 타보고 싶은 거죠.

    정섭: 막상 별 거 없어. 좀 심하게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야.

    재형: 대신 사방이 뻥 뚫렸잖아요. 우린 종일 꽉 막힌 데에서 일하고요. 하늘 좀 보고 싶어요. 낮 동안이면 파래서 좋고, 야근 있는 밤이면 이슥하니 깊어서 좋은 하늘이요.

    정섭: 너 혼자 퇴근 안 해? 내려가서 실컷 볼 건데 뭘.

    재형: 의미가 다를 거예요, 이 석고 가루랑 쇳밥 날리는 현장에서 보는 하늘은요. 그러니까, 사는 게 이 현장처럼 거칠고, 위협적이기만 한데- 거기서도 모두에게 탁 트여 있는 하늘은, 어, 그러니까, 희망이나, 이유나, 하다못해 그저 긍정이나-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아시죠?

    정섭: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넌 여기 현장 얘기를 하는 것 같지가 않아.

    재형: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 호이스트 철망이 제 앞에서 철커덩하고 열리는 날, 모든 걸 알게 될 것만 같아요. 제가 여기 왜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왜 있는지 말이에요, 형도요.

    정섭: 난 좀 빼주라. 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에 핑계를 대고 싶은 거야. 그러느니 모른 채로 있을래.

    재형: 실현될 수 없는 꿈이죠. 전 그 길이 왜 막혔는지 알아요. 벌이잖아요. 누가 주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받는 사람만 있는 벌을 우리 다 같이 받는 중이잖아요.

    정섭: 받으려면 혼자 받지, 왜 네 멋대로 나까지 죄인으로 만들어?

    재형: (주변을 맴돌며 허공에 호소하듯) 그러니 말이죠.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됐어요? 천하장사는커녕, 그냥 몸 건강하게만 태어난 게 뭐가 잘나서요? 평범한 사람들은 손일에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끼면 안 돼요? 땀구멍에서 땀 한 방울 비집고 나올 때, 자칫 상쾌함을 느낀 순간 영원한 축복을 받은 거예요?

    정섭: 넌 몸도 약하고, 손재주도 없고, 맨날 힘들어 죽잖아.

    재형: (무시하고) 시험지 위에다 사각사각 사각거리는 건, 드릴의 진동에 비하면 전혀 실감이 안 나요. 그깟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분필 선- 그 위에 서기를 점잖게 경멸한 게, 얼마나 대단한 자질과 권리를 타고난 거라고요. 세상의 구석진 곳에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일- 그러니까 진실한 일을 한다는 숭고한 책임을, 왜 우리들만 짊어져야 할까요. 아, 전 지쳤어요. 부러움으로 그렁그렁한 사람들의 그 눈망울- 전 더 이상 마주하기가 힘들어요.

    정섭: 여기 수천 명 몇 달 동안 지은 것보다, 너 혼자 지은 건물이 더 큰 거 같다.

    재형: (비계 주변 맴돌며) 맞아요, 전부 세상이란 건물을 지어요. 먼저 기반 다져놓은 데다 빔, 그러니까 굵은 쇠기둥을 박아서 뼈대를 심죠. 그 사이마다 12.5밀리 석고보드를 세워요. 반장님들이 너비 따라 계산해서, 딱 맞게 분배하시는 거 보면 신기해 죽겠어요. 아, 물론 구획마다 런너, 그러니까 양 날개 길이가 같냐 다르냐로 C랑 J런너로 쓰임이 달라지는, 넓은 철판 레일로 경계를 정해야지요. 여기까지를 골조 작업이라 불러요.

    정섭: 너 지금 누구한테 설명하는 거냐.

    재형: 다음엔 제일 재밌는 거예요. 먼저보다 얇은 9.5밀리 석고를 골조 위에 세 번 겹쳐 박아요. 그래서 쓰리피스라는 거겠죠. 이걸 층마다 반씩 엇갈리게 해서, 서로를 지지하게 하는 거예요. 듣기만 해도 오밀조밀하고 의미심장하지 않아요? 하지만 보온 단열재 차례가 오면, 모두가 괴로워하죠. 암면, 그러니까 유리섬유라고 썩은 카스텔라 같은 스펀지 블록을 끼우는데, 이게 아주 개 씹 좆같아요. 보이지도 않는 매캐한 가루가 피부에 온통 박혀서, 암만 샤워해도 씻어지지가 않거든요. 마지막 고비로 SGP, 그러니까 얇은 석고에 철판을 씌운 자재가 있어요. 근데 SGP가 뭐의 약자죠? S는 석고의 S고, P는 판넬이겠고, 나머지 G는- 지랄맞다의 G일 거예요. 모서리 날카로워서 스치면 찢어지는데다, 잘못 들면 휘어서 못쓰거든요. 아무튼 그것까지 덧대면, 내벽 작업이 일단은 마무리되죠. 마침내 그 벽들이 쌓여서 세상이 지어지는 거고요. 우리가 늘 그냥 있는가보다 하고 지나치는 벽 뒤에, 이런 구조와 체계가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신비롭지 않으세요?

    정섭: 그런 거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아.

    재형: (비계를 오르며) 그럴 리가요. 이건 보이고 만져지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잖아요. 여기가 아니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는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지금도 다들 손에 땀을 쥐고, 침은 바싹바싹 말라가며 궁금해 죽을 지경이라고요. 그러면서 왜 현장으로 수학여행을 오지는 않는 걸까요? 유도원이 안전한 동선 따라 "참새 짹짹, 돼지 꿀꿀" 인솔하면 되잖아요. 끝나고 가면서 반장님들한테 사인도 받고.

    정섭: 뭐? (코웃음 치며) 정 반장, 심 반장 같은 사람들 사인?

    재형: (널리 내다보며) 젊어서 물장사 하셨다던 정 반장님- 농담인지 진담인지 돈 많은 과부 하나 무는 거, 그게 남은 인생 목표라고 하시던데. 멀리서 오신 심 반장님은 처음엔 그런 줄도 몰랐어요. 생긴 거부터, 말하는 게 우리랑 똑같잖아요. 숙소에서 가족이랑 '쏼라쏼라' 통화할 때 그렇구나 했죠. 누구보다 박 팀장님, 예전에 선수 하시다 사고 나서 이 길로 드셨다는- 박형민 팀장님도 빼놓을 수 없죠. 겉은 거칠지만 속마음만은 자상한, 옛날식 사나이의 표본이잖아요. 여기 아닌 인간들은 그냥 가짜고 딴따라예요. 이왕이면 진짜 슈퍼스타한테 사인을 받아야죠.

    정섭: 그래서 다들 "나중에 저렇게 된다, 저렇게 된다" 하는 건가.

    재형: 바로 그거예요. 자기 스스로 되새기는 주문 같은 거죠.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자, 우리 모두 이 다음에 저렇게 되고 말 거야" 쉴 새 없이 다짐하는 거죠. 그게 모두에게 허락된 행운이 아니니까, 결국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어요. 사람 사는 모든 건축물은, 저 반장님들의 노래가 적힌 시집인데.

    정섭: 너 그렇게 입 놀리다보면, 부끄러운 생각 안 드냐.

    재형: (퍼뜩 정색하여 잠시 멍하니 있다) 형,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사이) 없잖아요. (팔 내두르며) 여기 그런 사람들 아무도 없잖아요. 그 사람들이 여기 왜 있어요. 다 딴 데 가 있지, 한 명도 없을 게 뻔하잖아요. 더구나 좋은 얘길 했으면 했지, 욕을 한 것도 아닌데 그게 뭐가 부끄러워요. 어차피 지금 알지도 못하고 있을 텐데- 지금은 우리끼리잖아요. 형이랑 저 사이에 그런 얘기도 못해요?



    정섭 핸드폰 넣고 장갑 낀 다음 재형을 외면한 채 일어선다.



    재형: 어디 가세요. (침묵) 올라오래요? (침묵) 같이 가요.

    정섭: 다 가버리면 여긴 누가 있어.

    재형: 그럼 제가 갈게, 형 쉬세요. 오전 타임에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내려오려 한다)

    정섭: 아서- 혼자 할 줄 아는 거 아무것도 없으면서, 네가 어딜 가서 뭘 어쩐다고. (오른편으로 돌아선다)

    재형: 팀장님 오기 전까진 기다리고 있어요.

    정섭: 싫어- 그거 싫은데.

    재형: 아깐 그냥 있겠다고 하셨잖아요. 뭐 하러요. (사이. 정섭이 몇 발짝 내딛는다) 형, 정섭이 형. 제가 싫어서 그런 거죠. 그러시면 안 돼요. 제가 평소에 얼마나 형한테 미안해하는데요.

    정섭: (멈춰선 채) 아니, 하지 마.

    재형: 하지만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어떡해요. 저도 저 자신이 답답해요. 늘 함께 하고 싶거든요. 쪼그린 채 몇 모금에 줄담배 후딱 피우고도 싶고, 온갖 기상천외한 전문용어들 상스럽게 내뱉고도 싶고, 끝난 다음 함바집 가서 찌개 한 냄비에 소주 댓 병 까고 신트림 늘어지게 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러다 이따금씩 좋은 데 가서 몸도 좀 풀고요. 그러니까, 아시죠? 우리 생활이란 게, 원체 굳건한 사내조차 외롭게 하잖아요.

    정섭: 그만, 그만 하라고.

    재형: 그래서 더 미안해요. 저는 어쨌든 못 하니까요. 지금 안 하고 있고, 앞으로도 어찌 될지 모르니까요. 이 세상 보람찬 사업을 다 같이 참여하면, 모두가 얼마나 좋겠어요. 반장님들처럼 그리고 형처럼- 강인하고 머리회전이 빠르지 못하니까, 저만치 양보하고 입맛만 다시는 거죠. 그 찬란한 빛 속에 쓸쓸히 남겨둬서 미안해요. 분발할게요. 그동안 할 수 있는 게 미안해하는 것뿐이라, 더 미안하지만요.

    정섭: 그거, 내 앞에서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 하지 마. 미안하다던가 뭐 그딴 거- (몇 발짝 내딛는다)

    재형: 제가 언제 형한테 대가라곤 식권 한 장 바랐어요? 알아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저 놔두세요. 제가 실컷 미안해하게 내버려 두시라고요. 그럼 저는 모든 걸 '있는 것처럼' 만들게요. 접때 우리가 저 각파이프 똑바로 세워서, 우뚝한 기둥을 만든 것처럼요. 물론 그냥은 안 되죠. 요꾸라고, 그러니까 현장에 남은 일본어 잔재인데, 좌우 양 날개를 달아야 해요. 그 의미를 아시겠어요? 이것만은 육각볼트로 드릴 팁이 나가도록 박는답니다. 혹 길이가 넘으면 톱으로 잘라야죠. 톱도 그냥 톱이 아니고 충전 배터리로 돌리는 전기톱이에요. 그걸 카시오? 혹은 컷소기라고들 하는데, 진짜 이름은 과연 뭘까요. 알고 싶지만, 보안경 착용이 먼저죠. 우리 팀 막내 태호 있잖아요. 친구들끼리 사업하다 망해서 빚 갚으러 온 친구요. 전에 각파이프 썰다 쇳가루가 튀어서, 큰일 날 뻔했다고요. 하마터면 TBM, 이거 얘기 안 했죠? 그러니까 운동장에 모아 놓고 하는 조횐데, 전날 사건사고 주의시키기도 해요. 거기 등장할 뻔했다니까요.

    정섭: (재형의 대사 시작된 후 같이 말해, 두 대사의 끝을 거의 맞춘다. 제자리 서성이며 외듯 하여) 나는 숙소에 일어나면 셔틀 타고 현장 와서 매점 조식 먹고 오전 일하다 매점 점심 먹고 컨테이너 휴게실 낮잠 한 숨 자고는 화장실 갔다가 다시 현장 와서 오후 일 있으면 하고 클린데이면 대청소하고 서너 시간 연장 잡히면 1.5공수 여서일곱 시간이면 두 대가리 채우고 가끔가다 다음날 아침까지 철야하면 4공수인데 그럼 다음 날 의무적으로 쉬고 셔틀 타고 숙소 오면 씻고 요기 좀 하든 폰으로 뭘 좀 보든 하다못해 헛헛할 참이면 정처 없이 읍내 시내 구경 좀 하고 잡화점에서 별 쓸데없는 병든 원숭이 보기도 사기도 하고 영화관은 너무 번거롭고 대형 창고 마트 가서 이리저리 원숭이 외로워 쭉 구경하다가 걷기가 일하기보다 힘들 참이면 다시 터덜터덜 돌아간다- (몇 발짝 움직여 비계 옆을 지나친다)

    재형: (발판에 엎드려 절박하게) 그래도 어디 가세요. 아직 TBM 얘기 끝까지 못해드렸어요. 그러니까 마지막엔 다들 민망한 구호를 외치면서 끝난단 말이에요, 이렇게- "구호 준비! 안전고리 좋아!" (난간 너머로 팔 뻗어 정섭의 안전고리에 자신의 고리를 체결하며 발악하듯) "좋아! 좋아! 좋아!"



    정섭 가만히 재형의 고리를 풀어 난간에 체결한다. 자기 안전모에 이름 적힌 스티커를 떼어, 재형의 안전모 위, 이름 위치에 살짝 어긋나게 붙인다. 터덜터덜 오른편으로 퇴장.



    재형: (일어서서 오른편 향해, 비아냥조에서 점점 악에 받쳐) 헛수고하시는 거예요. 형은 아무 데도 못 가요. 형이 일도 지지리 못 하는 저를 고르시는 게, 그 때문 아니었어요? 형은 입이 없잖아요. 어디 떨어지고 깔리고 찔리고 처박혀도 말 한 마디 못하잖아요. 그러니 사실은 제 쪽에서 형을 고른 게 되는 거죠. 저마저 입을 다물어 봐요. 세상의 그림자에서 피어나는, 이 현장이란 우리들 정원도 없어지는 거라고요. 그럼 어째요. 모든 일하기가 먹고살기를 넘어선 형벌이 되겠죠. 뭔가 죄를 짓지 않고서야, 도저히 저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그러니 네가 힘들수록 더욱 조져놔야겠다고- 하늘을 대신하여 서로가 하는 일을 심판하고 만단 말이에요. 그러니 모두의 마음을 한 점으로 모아 모아서, 선망하고 사모할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야죠. 미래에 건물을 무슨 레고 쌓듯 쉽게 짓게 돼도, 그럼 뭐 해요? 저랑 형, 그러니까 우리 없이는, 건물보다 긴밀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잖아요. 그러니 갈 테면 가세요. 얼마든지 가보시라고요. 저는 쉴 새 없이 이름들을 꽃피워서, 형을 다시 이리로 불러낼 거니까요.



    재형의 대사 중간에 박형민이 왼편에서 등장한다. 재형의 배면에 서서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형민: (혼잣말처럼) 절마, 저기서 혼자 뭐 하노, 저거? (험악하지만 악의 없이) 정섭아, 야, 정섭이 이 문디 자슥아. 다들 바빠 죽는데, 말 없으면 눈치껏 올라와서 거들든가, 니만 여 숨어서 놀고 자빠졌나.

    재형: (허둥대며 팀장 쪽으로 향하려다 고리가 걸려 허우적댄다.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여) 아뇨, 팀장님. 그러니까, 저는 여기, 그게, 기다렸잖아요, 그러니까 잊어버린 건-

    형민: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우짰는데? 니 말 알아듣게 똑바로 안 할래? 퍼뜩 내려오기나 해라. 이따 7층에 다 달라붙을 기다.

    재형: (내려오며 어색한 방언으로) 어, 정말로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빨리 갈게요.

    형민: 이정섭 니 지금 나 놀리나? 서울말 쓴다고 나 무시하는 거 맞제? 어디서 되도 않는 흉내를 내고 지랄인데. 이리 와 봐라. 어디 한 군데 칵 분질러주꾸마.

    재형: (살살거리며) 저야 팀장님이 좋아서 그러죠. 말씀하실 때마다 그 안에 뭔가가 느껴져요. 그러니까, 살아 움직이는 진짜 말을 듣는 거 같아요.

    형민: 뭔 팔딱팔딱 생선이가? (때리는 척 하며) 아나 그럼 회쳐 묵어라, 그놈의 말. 거 개소리 씨부릴 시간 없고, (자재 가리키며) 저거 부려다가 7층 A01열 갖다놓고 기다리라. 난 업체에서 도면 나오면 받아다 바로 갈 테니까. 혼자 할 수 있제?

    재형: (잭까지 달려가 손잡이를 잡으며)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문득 난처하게) 근데 그때까지 호이스트 안 잡히면 어쩌죠? 마냥 늦어질 텐데요.

    형민: 너 이 새끼 박형민이 파워를 우습게 아네. 팀장 해먹은 지가 몇 년인데, 호이스트 하나 못 잡을까봐. 얘기 다 해놨다.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설 기다.

    재형: (사이) 어- 그게, 그래도 될까요.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쉽게 탈 수 있어버리면-

    형민: 그게 뭔 소린데. 호이스트 아니면 뭘 어쩌자고. (재형 우물쭈물한다) 오늘따라 너 이상하네. 왜 자꾸 그러는 긴데. (침묵) 또 그 생각 하나? (침묵) 그 재형인지 재경인지, 난 이름도 생각 안 난다, 오래돼서. 어쩔 수 없는 핑계 말곤, 입 뻥긋해봐야 무슨 말을 하겠노.

    재형: (외면한 채 떨며 겨우) 거기, 그거에 휩쓸려서 그래요.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 거죠.

    형민: (짜증스럽게) 뭐? 뭐라고? (침묵. 한숨 쉬고 누그러져) 너 힘든 거 다 안다카이. 당장은 7층 공사만 마무리 짓자고. 그 다음부턴 한 숨 돌리니까, 어디 네 맘대로 해보그라. 그러니까 알았제, 7층?



    재형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팀장은 재형의 얼굴에 잠깐 시선 고정시킨 채 빠르게 오른편으로 이동한다.



    재형: (팀장이 한창 퇴장해갈 때 뒤에 대고, 떨리지만 큰 소리로) 팀장님. (팀장 의아하여 돌아다본다) 호이스트, 그러니까 호이스트가요- (사이. 팀장이 짜증스런 몸짓으로 말을 재촉한다) 호이스트는 이름이 왜 그래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형민이 무시하는 몸짓하며 빠르게 오른편으로 퇴장한다. 재형은 형민이 완전히 퇴장하고 나서도 잠시 오른편 너머를 본다. 기운 없이 공구함을 정리해서 자재 위에 올리고 굄목도 빼서 올려놓는다. 잭을 들어올려 비계를 크게 한 바퀴 돌며 밀고 나간다. 왼편 끝으로 올 때쯤 망설임 실린 움직임이 무거워진다. 똑같이 한 번 더 돈다. 크게 한숨 쉬며 잭을 세우고 공구함을 내리고 굄목을 댄다. 덮개 들춰 석고보드 한 장을 짊어지고 힘겹게 왼편으로 퇴장해간다. 사이. 안전요원이 오른편에서 등장하여 숨을 헐떡이고 무겁게 발을 굴러가며 왼편으로 달려 퇴장한다. 사이. 조명이 오른편에서부터 왼편으로 사그라진다.



    2경(NO動?): 바벨의 마을에 눈이 내리면



    등장인물: 관람객, 관리자



    무대: 한가운데 전망대가 서 있다. 전망대 위에는 망원경과 관람객이 올라가 있다. 관리자가 전망대 뒤에 대기한다.



    -



    초저녁. 난간 위까지만 비추는 조명이 들면, 관람객이 망원경으로 객석을 왼편에서 오른편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시점 이동이 끝날 때쯤 계단을 타는 발소리가 울려온다. 관리자가 천천히 전망대 위로 올라온다. 잠시 관람객을 바라보다 헛기침을 한다.



    관람객: (돌아보며 반갑게) 오셨어요? 내 정신 좀 봐. 죄송해요, 시간 된 줄도 몰랐네요.

    관리자: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일찍 올라와본 거예요. 아직 조금 남았어요.

    관람객: 그럼 그때까지 더 보다 가도 되죠? 제가 번거롭게 해드리는 건 아닌지-

    관리자: 아니, 아녜요. 보세요, 끝날 때까지. (관람객 미소 짓고 망원경을 본다. 관람객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 전망대가 참 좋으신가 봐요. 선생님 같은 분이 잘 없어요. 매일, 끝까지-

    관람객: (돌아보며) 적어도 한 분은 더 계시잖아요, 여기 매일, 끝까지-

    관리자: 나요? 저야 일이니까 그런 거죠. 선생님도 제 위치였으면, 이렇게 좋아하시진 않았을걸요.

    관람객: (관리자 말할 동안 망원경을 보고)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이 전망대를 맡으셨다고 해서, 종일 올라와 계시지는 않잖아요. 대부분의 시간은 땅 위에서 보내시죠. 관람객 받고, 시설관리 하시고, 전화 서류랑 씨름하시면서- 선생님이 제 위치였으면, 제 심정 이해하실 거예요. 정말이지 이건 말로 다 표현 못해요, 환상적이랄 만치 리얼하다고요-

    관리자: 그럴 것까지야 있어요. 지금 멀리서 본다 뿐, 우리가 실제 저 속에서 살고 있는데.

    관람객: 죄송하지만 그거, 깜빡 속으신 거예요. 제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사람이랑, 저기 직접 내려가면 보게 될 사람이랑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요. 그럼 어느 쪽이 실재일까요?

    관리자: 직접 만나볼 사람이겠죠, 상식적으로는-

    관람객: (관리자 말이 끝나기 전에)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요? 가장 가까이 접할수록 실재고, 멀면 환상인 것처럼요. 사실은 정반대예요. (객석 한군데 시점 고정하고) 보세요, 대신 묘사해드릴게요. 저 사람, 이마를 훔치고 있어요. 머릿기름이랑 땀이랑 범벅이 돼서 흘러내리는데요. 이젠 또 늘어지게 트림을 하더니, 핸드폰에 대고 이를 쑤시고 있네요. 막 저녁 먹고 오는 길인가 봐요. 메뉴는 뭐였을까요? 일단 고춧가루 들어간 건 알겠는데- 그래도 가서 물어보고 싶지는 않네요. 분명 마늘 냄새 진한 땀내를 푹푹 풍길 거라고요. 여기서 봐도 느껴질 정돈데, 직접 보게 되면 그저 냄새에만 정신이 팔릴걸요. 그리고는 적당히 추접스런 사람이구나, 하고 마는 거죠. 하지만 여기선 보여요. 저 사람이 멀리 누구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지. (사이) 남편이네요. 저 사람도 사랑을 주고받을 줄 알던 거죠. 자신의 개기름과 고춧가루까지 사랑해줄 사람하고요.

    관리자: (관람객이 망원경을 볼 동안 무심히 전면을 본다) 그런가요? 하지만 동년배의 이성이라고 다 배우자는 아니잖아요. 혈연, 친구, 동료, 사업관계거나- 어쩌면, 어떤 은밀한 마음의 사이일 수도 있고.

    관람객: 그럼 왜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모두 기각이에요. 왜냐면, 내 눈에 지금 부부 쪽이 가장 그림이 잘 나오거든요. 농담 아녜요. 어쩌면 저 둘은 아래에선 원수지간일 수도 있겠네요. 그건 일테면 서로 가까이 맡은 체취 때문이겠죠. 자기들 내면에, 서로 가장 이상적인 단짝이 될 자질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 거예요. (사이) 저 몸짓, 분위기 좀 봐. 맞다니까요. 혹여 실제로 부부나 연인이 아니면 어때요. 여기서 보기에 부부면, 아래서 보기에 부부보다 더 부부인 거예요.

    관리자: 그럼 정해 놓은 누군가를 망원경으로 보게 되면, 그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겠네요, 지금 선생님처럼-

    관람객: (생각 없이) 아, 그야 그렇겠죠- (정신 차려) 아니,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사이) 망원경으로 본다는 건, 이미 아주 떨어져 있다는 건데- 그럼 아무 관계도 아닌 거잖아요.

    관리자: 그럼 선택지는 두 개뿐인가요? 착각한 채로 함께하거나, 떨어져서 지켜만 보거나?

    관람객: 그래서 제가 여기서 못 벗어나는 거죠. 저요, 저도 내려가고 나면 저기랑 다 똑같아요. 똑같은 것들끼리,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지지고 볶고- 시시비비에 지쳐빠지면, 아주 나 자신이 싫어져요. 아니,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돼요. 그런 중에 여길 오게 된 거죠.

    관리자: 아, 벌써 오래 전 일이네요.

    관람객: 아니라는, 그걸 알게 됐어요. 나는 무력한 바보가 아니었다고요. 또 오해도 풀게 됐죠. 세상은 저 아래서 말하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무질서하지 않아요. 외려 얼마나 조화롭게 짜여 있다고요. 이유 없이 닥쳐온 것만 같던 무서운 일들- 그 모두가 다 세상 전부를 이루는 것들이었어요. 단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거였지요. 그걸 깨달을 때면, 내 예전의 고통까지 황홀하게 다가와요. 나의 고통이 곧 세상의 고통이었으니까요.

    관리자: 그럼- 굳이 따지려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세요. 그럼 아래 사람들도 모두 그, 만족이든 안정감이든을 깨닫게 돼서, 망원경만 보고 있으면 어쩌죠?

    관람객: (생각 없이) 어쩌긴요, 다 같이 느끼게 되겠죠. (정신 차려) 아니, 저마다 더 높은 전망대를 세울 거예요. 망원경을 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려고요. 참 우습겠네요,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해서 높아지려는 거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세상의 구조 아니겠어요.

    관리자: 미안한데요, 그건 구조가 아니에요. 세상은 더 아니고요.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들- 거기에다 뒤따라 붙는 말들이에요.

    관람객: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게 뭐가 대단해서요? 그래서 가장 강력한 환상인 거죠. 그 속에서 저는 실컷 허우적거려 봤어요. 그러다 남을 팔다리로 치기도 했고, 되게 얻어맞아도 봤죠.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납득한 적은 없었어요, 단 한 번도. 현실감은 그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지랑은 전혀 무관해요. 현실감은 오직 거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정한다고요.

    관리자: 여기 오래 근무하면서 느낀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높이란 건 없다고요. 우리 발바닥만 닿을 수 있으면, 하늘 끝이라도 맨땅이나 다름없는 거예요. 높이란 건, 수직으로 세워놓은 거리일 뿐이죠.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가까워지는 거예요. 밀접해봐야 실망할 뿐이라고, 선생님 말씀이 아마 맞겠죠. 하지만 실제 가까운데도 멀다고만 믿는 거야말로, 진짜 환상이에요. 더 나쁜 거죠.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 기분을 망치려들지는 않고요. (다소 허둥대며) 선생님, 그래서 당부 말씀, 아니, 오래 얼굴 알고 지낸 사람으로서 부탁드릴게요, 이제 그만-

    관람객: (관리자 말 끊으며 가식적으로 신나게, 망원경을 객석 이리저리 돌리면서) 야, 저기 저거 보세요. 사람들이 막 싸워요. 사소한 오해 갖다 참 박 터지게 싸우다가, 말리러 온 사람까지 열 받아서 한 판 끼어들고, 옆에 지나가던 애먼 사람 엉겁결에 휘말려들다가는, 이젠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대대적으로 편을 갈라 싸우네요, 마치 자기네들은 아주 객관적인 줄 아나봐.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란 걸 모르는 걸까요? 아, 드디어 싸우다싸우다 못해 지쳤나보네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아주 화기애애해요. 악수하고 포옹하고 입 맞추고, 새끼손가락 꼬리 걸고 꼭꼭 약속을 하는데요. 보고 박수치고 환호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저게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요, 네? 이러나저러나 모두, 세상에 그렇고 그런 일뿐이라는 거, 내 눈엔 보이지만요. 저는 안다고요, 다-

    관리자: (엄숙하게) 모르시는 게 하나 있습니다. (관람객 망원경을 멈춘다. 사이) 그 망원경, 보는 기능 없는 모조품이에요. (사이) 정해진 필름을 영사해서 보여줄 뿐이죠. 물론 파일은 매번 다르게 편집하지만요.

    관람객: (돌아보며 경악해서)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요. 이렇게 생생한데, 이렇게 다채로운데-

    관리자: 말 떨어짐에 따라, 진짜와 가짜가 정해진다는 건가요? 그럼 어쩌시겠어요, 지금껏 봐온 그 파노라마가 거짓이었다고 한다면요. (관람객 잠시 넋 나가 있다. 안쓰럽게) 안 되겠네요. 선생님 괴로워하시는 건 못 보겠어요. 거짓이었어요. 망원경 말고, 제 방금 말이요.

    관람객: (안도감이, 속았다는 분함을 압도하여) 아!

    관리자: 그래서 기쁘신가요?

    관람객: 어디 기쁘다 뿐이겠어요? 세상을 잃었다 되찾은 기분인데요.



    관리자 품에서 주섬주섬 눈송이구슬snow globe을 꺼내 잠깐 바라보다 관람객에게 내민다.



    관람객: (받아들고) 이게, 뭐예요?

    관리자: 여러 가지죠. (사이) 전망대고, 망원경이고, 그리고 세상이에요.

    관람객: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이걸 왜 제게 주시죠.

    관리자: (반쯤 외면하고) 그 속을 잘 들여다보세요. 성이 있고, 마을이 있어요. 우리가 사는 곳이죠. 그 옆 숲과 들판은, 우리 네 발 달린 친구들이 사는 곳이고요. 다들 너무 작아서 안 보이지, 거기 속속들이 있는 게 믿겨지시죠? 그럼 이제 흔들어 봐요.

    관람객: (말에 홀린 듯이 따르고는 객석 쪽으로 뻗어 조명에 비춰본다. 감탄하여) 예뻐요, 아름다워요-

    관리자: 맞아요. 세상은 원래 그런 거예요. (사이) 이 전망대에 오고 싶어지면, 대신 그놈을 흔드세요. 흔들고 가만히 보세요.

    관람객: (돌아서서 불안하게 웃으며) 이상하게 들려요. 저는 앞으로도, 당장 내일부터도 계속 올 건데요, 쭉-

    관리자: 이 전망대는 이번 달 끝으로 폐쇄될 예정이거든요. 위에서 결정 났어요, 벌써-

    관람객: (사이. 공격적으로)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우린 그저 입장객과 관리자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아까도 그렇고, 또 사람 놀려먹는 거죠?

    관리자: 전 선생님이 전망대 좋아하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정말 좋아하신다는 거, 그것만은 잘 알고 있어요. 불시에 알게 되면 충격 받으실까봐, 미리 직접 알려드리러 온 거예요. 또, 대신할 것도 전해드리고-

    관람객: (구슬을 내려다보며 성난 혼잣말처럼) 대신? 대신한다고, 이게?



    관람객 갑자기 거칠게 난간까지 가 구슬을 전망대 밑으로 내던지려 한다. 관리자 기겁하여 관람객의 팔을 잡고 겨우 구슬을 뺏어 제지한다.



    관리자: 미쳤어요? 누가 맞으면 어쩌려고-

    관람객: 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요. 절망 말이에요. 이건 씁쓸한 진실, 그 깨달음의 알레고리잖아요. 난 그에 맞춰 행동한 것뿐인데, 뭐가 어때서요.

    관리자: 사람이 죽어나가도 그저 알레고린가요, 선생님의 렌즈 너머에선?

    관람객: (사이. 충격으로 누그러져) 그러고 보니 난, 이 망원경으로 누가 죽어가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어요. 다른 온갖 걸 보면서도- (사이) 연출한 필름도 아닌데 그럴 리가요. 전 그런 예감 앞에서, 나도 모르게 망원경을 돌려왔었나 봐요.

    관리자: 나는 돌리지 않았어요. 폐관하고 나면, 선생님 자리는 제가 차지했거든요. 어둔 밤이 세상에 내려앉는 걸 똑똑히 봐왔다고요. 선생님 돌아가는 뒷모습에도 다-

    관람객: (놀라 나지막하게) 그럼, 봐왔던 거예요, 돌아가는 나를, 매일? (어색한 침묵. 자조적으로) 어땠어요? 참 우스꽝스러웠죠? 저 기만에 빠진 조그만 벌레가, 무슨 세상을 굽어보는 절대정신인 양 뻐기는 게 참 처량하구나, 하고?

    관리자: (도리질하며) 제가 본 건 그냥 인간이었어요. 지금 보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인간 말이에요.

    관람객: 아니야, 그 둘은 다른 인간이에요!

    관리자: 오늘 그러셨잖아요.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는 것도 있다면서요. 선생님 뒷모습에 켜켜이 쌓여가는 어둠- 그건 제 발로 죽음을 향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쓸쓸함이기도 했어요.

    관람객: (사이) 누군가를 망원경으로 보게 되면, 많은 걸 알 수 있겠네요, 지금 선생님처럼?

    관리자: 그럴지도 모르죠. 그보다 사람들이 봐야 할 건 자신 온전한 모습이에요. 헌데 자기 눈과 등은 꼭 지구 한 바퀴만큼 멀잖아요.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관계라고요. 그 둘을 좁힐 수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조차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예요.

    관람객: 선생님은 분명, 여기 다 정리하고 마지막에 가시죠? 그럼 선생님 뒷모습은 누가 봐 주나요? 선생님 몫으로 짊어진 건요? 그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관리자: 나도 모르죠. 그건 왜요? (사이) 그럼, 퇴근 준비할 동안 기다릴 수 있어요?



    관람객과 관리자 가까워진다.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는다. 사이. 관리자의 얼굴을 주시하던 관람객의 표정이 굳어지며 뒷걸음질 친다.



    관리자: (당황하여) 왜 그러세요? 뭐 묻었어요?

    관람객: 선생님, 이빨에, 고춧가루-

    관리자: (고개 돌려 혀로 잇새를 문지르며) 아, 이거 부끄럽네요. 신경 쓴다고 썼는데-

    관람객: (담담하게)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혼자요. (관리자 놀라 바라본다) 전 지금까지 이 위에서 하나만 생각해왔어요. 내 눈에 보이는 남 말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말았네요. 그건 내 이빨에 꼈을지도 모른 고춧가루예요.

    관리자: (황급히) 하나도 안 꼈던데요. 내가 봤어요, 정말로요-

    관람객: 언젠가 보고야 말 거예요. 온 집안 김장하고도 남게, 잇새마다 덕지덕지 낀 걸요.

    관리자: 그게 어때서요, 그건 실제예요. 새빨간 빛깔과 매콤한 맛이 증명해주는 실제라고요.

    관람객: 그리고 그만큼 실제적으로 추접스럽게 되는 거죠. (사다리 쪽으로 가며) 마주선 눈에는 내 그 모습이 어룽어룽할 거예요. 다시 환상적으로 추접하게 말이에요.

    관리자: 그냥 가시면 안 돼요, 이게 마지막이잖아요.

    관람객: 내가 어리석었어요. 남의 있는 모습을 감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만 생각했지, 내 있는 모습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는, 절대 꿈도 못 꿨다고요.

    관리자: (구슬을 내밀며) 그럼 이것만이라도 갖고 가요.

    관람객: (잠시 구슬을 바라보다) 아뇨.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깨우쳐 주셨잖아요. 세상 어디나 가장 높은 전망대가 될 수 있다는 걸요. 이 전망대가 폐쇄되지 않더라도, 전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올 필요가 없겠죠. 이젠 내 방에만 있을 테니까요. 물론 거긴, (구슬 가리키며) 이것처럼 아름답진 않지만요. (사이) 저기, 미안해요-

    관리자: (앞쪽으로 외면하며 감정 억눌러) 오늘 관람은 여기까집니다. 장내에 계신 관람객 여러분은 귀가를 준비해주세요. 항상 전망대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관람객 아쉬운 눈으로 관리자를 보다 전망대를 내려간다. 계단 타는 효과음이 장면 끝까지 울려온다. 관리자 멋쩍게 웃으며 혀로 잇새를 문지른다. 구슬을 보며 난간까지 간다. 난간 밑을 유심히 본다. 구슬을 흔들고 팔을 앞으로 뻗어 조명에 비춰본다. 미소를 띠고 두 손으로 굴려가며 본다. 잠시 멈춘다. 구슬을 난간 밑으로 놓아버린다. 그대로 허공을 본다.



    잦아드는 발소리의 여운과 함께, 막.
    최상운

    최상운

    1885년 서울 영등포구 출생

    국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김철리 연출가·장우재 극작가 겸 연출가

    응모편수는 줄었지만 수준은 높아졌다. 희곡쓰기의 어려움은 올해 더 가중되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기본적으로 극작술을 내 것처럼 부리는데 일정 시간이 걸리는 것에 더해, 올해처럼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이 많은 시기에 자신만의 통찰이 있어야하는 희곡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예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 현재 우리 사회가 아파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속속들이 소재가 침투되어 있었다. 그것을 다룸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췄다. 무엇보다 발로 뛰며 쓴 희곡들, 당장 배우 입에 붙여도 손색없는 대사쓰기, 그리고 소재를 대하는 쓰는 사람의 윤리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아름다웠다. ‘치킨 런’, ‘플랫폼’, ‘마지막 헹굼 시 유연제를 사용할 것’, ‘그토록 찬란한 생일 파티’, ‘유리구두’, ‘걔가 왜 그랬을까’, ‘불면증’, ‘그 남자 흉폭하다’가 그랬다. 최종 논의작은 ‘발판 끝에 매달린 두 편의 동화’와 ‘풍등’이었다. ‘발판…’은 문학적 희곡이 ‘행위’를 지연시키며 ‘수사(rhetoric)’에 빠지는 함정을 가뿐히 건너뛰며, 작가가 깊이 곱씹어본 ‘사유’의 말들로 말의 발화 자체가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풍등’의 공연성은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생존으로 전환해가는 과정을 ‘육체의 생존’과 ‘정신의 생존’ 중 어떤 것이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끝까지 맞붙임으로써 윤리적으로 탁월했다. 두 희곡 다 좋았다. 우리는 우열 가리기를 포기하고 어떤 선택을 했다. 결과는 ‘발판…’이었다. ‘풍등’이 단막보다는 좀 더 긴 호흡의 길이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통찰이 어려운 시대, 오히려 더 맹렬하게 희곡쓰기에 몰두하는 작가들의 출현을 보고 경외감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들었다.
  • 최상운

    최상운

    1885년 서울 영등포구 출생

    국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랍 속에 두고 읽고 살아도 벅차오르고, 쓰고만 지내도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말(言) 속으로 밀려난 아이였던 저는 구름을 잡아두던 데 쓰던 거울들을 어느 새 얼굴 바짝 들이대 면도하고 늘기만 한 흰머리 뽑는 데 쓰고 있었습니다. 뿌옇게 맺힌 상(像)들이 못마땅해 씩씩댈수록, 떠오른 것들은 뜬구름보다 빨리 이지러졌습니다. 저의 말이 차츰 오므라들고 일그러져 가니, 침묵의 삶 속에 잠겨드는 게 차라리 사람 된 도리 아닐까, 머뭇대고 또 망설이던 게 바로 어제 일입니다.

    빠직, 하고 일순 그 참람한 거울을 깨뜨린 건 당선을 알리는 벨소리였습니다. 제 말들의 미약한 떨림이 세상과 진동을 공유할 수도 있겠다는, 작은 가능성을 남겨줬습니다.

    하여 옛 임금이 등장하는 작품을 쓴 다음이면 그의 무덤으로 참배를 가고 마는 저, 그 사실에 악의 없이 폭소하던 친구에게 "넌 작가 뒈지고 나면 책도 안 읽을 거냐?"면서 반향 없는 혼잣말만을 되뇌어왔던 그런 저, 이젠 마주 울리는 다른 소리들과 공명하고 싶습니다.

    그 전에,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제 작품은 몹시 둔중하고 투박합니다. 보다 날카로운 안목 앞에 그 부족함이 훤히 드러났다 생각하니, 지금도 얼굴이 홧홧합니다. 당장 성과보다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계신 거라고, 부끄럼을 내심 무마해봅니다. 저버리지 않게, 앞으로 더욱 구르겠습니다.
    시민을 위해 늘 쾌적한 환경 가꿔주시는, 광적도서관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S여대 김정숙 교수님께 가장 큰 감사를 전합니다. 매번의 조언과 격려를 넘어서, 작기만 한 제게 보여주신 그분의 인간적 관심이 없었다면, 이 날은 제게 오지 않았을 겁니다. 지면 통해 마음 표하지 못한 모든 것에겐, 지면 밖에서 갚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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