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비어 있는 방

by  최인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오층이나 육층 높이에서 인간의 모습을 내려다보자. 그들은 보도 위를 당당하게 걸어다니지만, 하나같이 이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흉측하게 불거진 엉덩이며 가슴, 그리고 연신 앞뒤로 뻗치는 팔과 다리, 모든 게 꼴 불견이다. 그들의 위대한 눈과 코, 그리고 입은 어디로 갔는가. 인간들은 모두 바닥에 납작하게 눌려서, 마치 게처럼 땅 위를 기어다니고 있다.


    그는 책을 덮고 소파에서 일어선다. 해는 아직도 아파트 옥상에 걸려 있다. 물탑 뒤로 몸을 숨긴 채 쏟아내는 햇빛은 투명하다 못해 예리하다. 그 빛을 타고 물탑의 그림자가 옆 건물 벽으로 날아가 박힌다. 하늘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물탑은 톱날의 날카로운 음영으로 옆 건물 벽을 자르고 있다. 엷은 미색의 아파트 벽은 잘리기 직전의 마디카나무처럼 위태롭다. 그 밑으로 고압 전선이 늘어져 있고, 전선에 매달려 있는 애자가 보인다. 해는 아주 조금씩 물탑 뒤로 숨어들어간다. 그는 창가에 서서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해의 움직임과 물탑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

    아파트 앞 도로에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 선다. 승용차 문이 열리며 옆집 여자가 내린다. 여자는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아파트 정문을 향해 걸어간다. 승용차는 여자를 내려놓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던 여자가 돌아서서 웃는다. 여자의 웃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승용차 유리창이 반짝 빛난다. 여자가 아파트 안으로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승용차도 느릿느릿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정적에 휩싸인다.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돌아선다. 그의 발 밑에 반라의 모델들이 누워 있다. -나를 가꾸는 여자가 아름답다- 여자는 커다란 젖무덤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말한다. -발도 스킨 케어가 필요해요- 금발에 갈색 눈을 가진 여자가 발가락 사이에서 웃고 있다. 그는 여자의 얼굴에서 발을 뗀다. 그러자 발 밑에 숨어 있던 글자들이 튀어나온다. -피부 미용의 기본 스킨 케어- 거실 바닥은 널려 있는 광고지로 어지럽다. 그는 광고지를 밟으며 거실을 가로질러 간다. 그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얼굴에 물을 축인 다음 쓱쓱 비누칠을 한다. 꺼칠꺼칠한 수염 때문에 비누 거품이 잘 일지 않는다. 그는 수납장 안으로 손을 넣어 면도기를 찾는다. 손끝에 만져지는 건 도막난 칫솔과 쓰고 버린 립스틱 뚜껑이다. 그는 계속 수납장 안을 이리저리 더듬다가 아무거나 집어든다. 그의 손에 잡힌 면도기는 손잡이가 굵고 거친 것으로 보아 질레트가 분명하다. 그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린다. 면도를 하기에는 질레트보다 쉬크가 한결 부드럽다. 그는 질레트를 내려놓고 쉬크를 집어든다. 그는 실눈을 뜨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비누 거품 위로 시커먼 수염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일주일이 넘도록 밀지 않은 수염은 발이 굵고 거칠다. 그는 면도기를 턱밑에 대고 앞으로 당긴다. 그러자 면도기가 사선으로 쭉 미끄러진다. 잠시 후 턱밑에서 피가 배어난다. 그는 허겁지겁 물을 축여 피를 닦는다. 하지만 피는 계속해서 배어난다. 그는 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누른 채 욕실 밖으로 나온다.


    나는 갈 곳이 없다. 어디를 가든 기지와 재치에 번뜩이는 인간들만 득 실거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아이큐가 150 이상이거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다. 나는 이제 살아갈 의욕조차 상실했 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도 어려웠고, 끝까지 버 텨봐야 결국 이용만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간다. 이차선 도로 가장자리에 벤치가 있고, 거기에 남자가 앉아 있다. 남자의 모습은 마치 벤치 위에 놓여 있는 정물처럼 보인다. 벤치 뒤로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다. 하지만 남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남자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그도 창가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는 언제나 반소매 셔츠와 회색 바지를 입고 있다. 단 하루도 옷차림에 변화를 준 적은 없다. 행동도 언제나 똑같다. 해가 뜨기 무섭게 어디선가 나타나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닌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사람처럼. 그 일이 끝나면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 다시 벤치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벤치 위에서 하루를 보낸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한다. 가끔씩 심하게 기침을 하며 가래침을 뱉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 남자는 아주 드물게 진씨의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국물을 얻어먹기도 한다. 그러나 남자의 움직임이나 태도로 보아 먹는 것 자체도 망각해버린 사람 같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의 등뒤로 대로처럼 공터가 보인다. 공터의 나무 위로 고압 전선이 지나간다. 전선은 공터 끝의 2층 건물과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선이 닿아 있는 2층은 H아파트 상가 건물이다. 고층 아파트 사이에 끼여 있는 상가는 터널을 통과하는 열차처럼 보인다. 남자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 앞에 무심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는 창가로 바짝 다가선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그는 남자에게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둬 전화기를 바라본다. 전화기는 `자동 응답기 켜짐' 에 불이 들어와 있다. 벨은 다섯 번을 울리고 응답 메시지를 전한다. 지금은 외출 중입니다. 메모 남겨주세요. 나 퀸 광고 기획 박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 놀라게 해도 그렇지…. 궁금해서 전화 걸었어. 들어오면 전화해 줘. 그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돌아선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팜플렛을 주워든다. -산 마리노, 플레이보이, 보스렌자 신사 정장- 남자 모델이 웃고 있다. -140데니아의 초고탄력 스타킹- 반라의 여자는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누워 있다. 그는 다른 종이를 집어든다. -금세기 최고의 인공 가슴 하이테크 실리콘 바스트-

    옆집 여자가 음악을 듣고 있다. 템포가 느리고 무거운 것으로 보아 클래식이 분명하다. 그녀가 클래식을 듣는 건 기분이 나쁘다는 징조다. 주로 재즈 풍의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클래식은 폭풍의 서곡이나 다름없다. 그, 새, 끼, 누, 구, 야? 옆집 남자의 목소리가 토막토막 끊기며 들려온다. 빨, 리, 못, 대? 당, 신, 이, 나, 조, 심, 하, 고, 다, 녀!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도 뒤따라 들려온다. 그는 벽쪽으로 귀를 세우고 있다가 천천히 돌아선다. 그리고 서재 안으로 들어간다. 서재 바닥에는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고, 그 위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먼지 위에 찍힌 발자국은 서재 입구에서 시작해 모두 컴퓨터 쪽을 향해 있다. 그는 먼지 위에 나 있는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들이 풀썩 솟아올랐다가 내려앉는다. 그는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파워 버튼을 누른다. 컴퓨터는 이내 날카로운 전자음을 내며 작동을 시작한다.

    그는 MAZE-A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간다. MAZE-A 속의 방들은 온통 붉은 벽돌담과 푸른 철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푸른 문을 열고 나가면 또 푸른 문이 나오고, 붉은 벽돌담을 통과하면 또 붉은 벽돌담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는 푸른 문과 벽돌담 사이에 숨어 있는 비밀 통로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아까운 시간만 흐를 뿐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출발한 곳에서 멀어질수록 주위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힘은 떨어져간다. 어디선가 에너지를 보충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돌아가지도 못한다. 그는 땀을 흘리며 높은 담사이를 헤맨다. 하지만 아무리 헤치고 나가도 끝이 없다. 이제 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남아 있는 건 괴물의 음산한 숨소리 뿐이다. 그는 마우스를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서재 밖으로 나간다.

    남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를 아무런 표정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남자의 모습은 마치 아파트 담장과 함께 굳어버린 콘크리트 조형물처럼 보인다. 남자 앞에 진씨의 봉고 트럭이 멈춰 선다. 진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적재함 천막을 걷어올린다. 그러자 적재함 속에 숨겨져 있던 포장마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진씨는 주위를 둘러본 후 플라스틱 의자를 보도 위에 늘어놓는다. 진씨가 벤치의 남자를 향해 씩 웃는다.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진씨는 적재함 밖으로 음식물과 술병을 가지런히 진열한다. 정, 말, 대, 지, 않, 을, 거, 야? 잠잠하던 옆집에서 다시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지, 금, 누, 가, 누, 구, 한, 테, 큰, 소, 리, 치, 는, 거, 야? 진씨는 아주 가끔씩 공원 쪽을 쳐다본다. 진씨가 올려다보는 공원 언덕에는 S모텔이 자리잡고 있다. 누구든 모텔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씨의 포장 마차 앞을 지나가야 한다. 거리는 아주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끼니도 거르고 잠 도 자지 않았다. 아파트 출입문은 이중으로 잠그고, 안전 걸쇠도 단단히 걸어 두었다. 나는 밖으로 나간다거나 창문을 열거나 불을 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놀라 책에서 눈을 뗀다. 어미다.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통장에 입금시켰다. 아무말 말고 쓰거라. 그리고 끼니는 제때 찾아 먹어야 혀. 그래야 건강 해치지 않는다. 내 며칠 후에 가 보마. 에이구, 남편복 없는 기 자식복은 있겠누? 그는 다시 창문 아래로 눈을 던진다. 그때 진씨의 포장마차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선다. 승용차 문이 열리고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와 중년 남자가 내린다. 그들은 손을 잡은 채 포장마차 앞으로 다가간다. 진씨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그들을 맞이한다. 두 남녀는 포정마차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는다. 그들은 어두워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진씨가 그들 앞에 음식물을 내놓는다.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뭐라고 말한다. 남자도 여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여자의 빨간색 립스틱이 쉴새없이 움직인다.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당겨 안는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남자가 여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여자가 환하게 웃는다. 그들은 이내 모텔 쪽을 바라보며 즐거운 듯이 웃고 떠든다. 그는 창가에서 한걸음 물러선다.

    아파트 옥상에 걸려 있는 붉은색 노을 위로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비둘기는 한 무리씩 떼를 지어 건물 사이를 날아다닌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의 시선도 아파트 옥상을 향해 있다. 남자가 보고 있는 건 비둘기가 아니면 노을이다. 노을은 상처에서 배어나는 혈흔처럼 연한 살색 건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건물 한쪽 귀퉁이를 베어문 것 같은 노을은 점점 더 빨갛게 물들다가 한 순간에 사라진다. 네, 가, 나, 한, 테, 해, 준, 게, 뭐, 있, 다, 고, 패, 는, 거, 야, 패, 기, 를…! 악을 쓰는 여자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온다. 너, 오, 늘, 죽, 는, 날, 인, 줄, 알, 어! 남자의 목소리도 악에 받쳐 있다. 빨간 노을이 아파트 옥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는 창가에서 물러선다. 그때서야 그는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는 주방 쪽으로 걸어간다. 주방의 식탁 위에는 먹다 만 음식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먹을 만한 음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냉장고 안에는 시든 사과 서너 개와 먹다 만 꽁치 통조림, 그리고 자연촌 연두부 반 도막, 스파클 식수, 골드 마요네즈와 쭈글쭈글한 당근 몇 개가 처박혀 있을 뿐이다. 그는 냉장고 문을 닫고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빵조각을 집어든다. 그리고 커피포트에 물을 채운다.

    그는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팜플렛을 주워든다. 팜플렛에서는 전라의 여자가 머드 팩을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사용해왔다는 머드 팩은 클레오파트라가 나일강의 `이토' 진흙으로 팩을 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발끝에 걸리는 또 다른 종이를 집어든다. -직업과 외모의 함수 관계- 알몸의 남자 여섯 명이 얇은 천으로 성기만 가린 채 웃고 있다. 그들은 소리친다. WHAT'S HE? 그는 허리를 굽혀 신문지를 뒤적인다. 종이를 뒤질 때마다 그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날아오른다. 하지만 그는 행동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튀어나온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당신 왜 약속 지키지 않는 거예요? 당신이 이렇게 뻔뻔스런 사람인지 몰랐어요. 내 말 듣고 있어요? 듣고 있다면 전화 받아요. 아내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다. 그는 종이를 뒤지다 말고 일어선다. 당신 정말 집에 없어요? 좋아요. 경고하겠는데… 앞으로 대치동에 전화해서 속 긁어놓지 말아요. 우리 엄마는 이제 당신 장모가 아니니까. 그리고 혜원이도 만나지 말고요. 자동 응답기는 아내의 앙칼진 목소리를 쏟아놓고 끊어진다. 그는 담배를 집어들고 창가로 다가간다. 거리는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있다. 어둠이 내리는 것과 동시에 남자도 벤치에서 일어선다. 어, 이, 년, 이, 사, 람, 잡, 겠, 네? 잠잠하던 옆집에서 다시 악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거, 내, 려, 놓, 지, 못, 해? 남자가 떠난 벤치 주위는 적막감마저 감돈다. 가끔씩 라이트를 켠 승용차가 모텔 쪽으로 올라갈 뿐이다. 모텔을 향해 속도를 내던 승용차들은 모두 D아파트 입구에 설치된 속도 방지턱 앞에서 급정거한다. 차들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모텔을 향해 한 차례씩 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리가 다시 조용해진다. 거리가 조용한 것처럼 진씨의 포장마차에도 손님이 없다. 진씨는 이따금씩 모텔 쪽으로 눈을 던지지만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돌아선다.


    그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뜬다. 시계는 벌써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빠, 나 혜원이야. 전화 좀 받아 봐. 아직 안 일어났어? 엄마가 아빠한테 전화하면 혼내준다고 그랬어. 그래도 난 아빠가 좋아. 아빠도 나 보고 싶었지? 모레가 내 생일인데 꼭 와야 돼. 안녕!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응시한다. 그런 상태로 한참 동안 누워 있다가 천천히 일어선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간다. 창밖으로 먹구름이 낀 하늘과 날아 떨어지는 빗줄기가 보인다. 그는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려다본다. 남자가 우산을 받쳐든 채 몰아치는 비바람과 싸우고 있다. 남자의 우산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다. 남자 앞으로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자가 지나간다. 분홍색 우산 밑으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날린다. 비바람에 날리는 여자의 머리카락은 우산 가장자리를 따라 부챗살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모텔 쪽으로 올라간다. 그는 창문을 닫고 거실로 나간다. 거실은 아직도 광고지로 어지럽다. 그는 광고지를 밟으며 현관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통기구 밑에 떨어져 있는 우유와 신문을 집어들고 돌아선다. 그는 거실 쪽으로 가려다 말고 주춤 멈춰 선다.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 건 몇 달씩 밀린 청구서들이다. 그는 허리를 굽혀 청구서 뭉치를 집어든다.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다. 다시 초인종 소리가 길게 공기를 찢는다. 그는 잠시 숨을 멈추고 밖의 동정을 살핀다. 초인종 소리는 코앞에서 울리고 있다. 그는 천천히 보안경으로 눈을 가져간다. 벨을 누르고 있는 사람은 신문대 수금원이다. 우락부락한 체격의 남자는 얼굴에 핏대까지 올리며 서 있다. 그는 보안경에 눈을 박은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수금 사원은 한참 동안 벨을 눌러대다가 돌아간다.

    그는 머그잔에 우유를 따른다. 그리고 빵조각을 들고 창가로 다가간다. 남자의 우산은 거의 다 찢어져가고 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남자는 비바람에 온몸이 노출될 것 같다. 그는 아주 천천히 빵을 씹으며 우유를 들이킨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한 과장님, 저 오 마담이에요. 과장님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 요즘 왜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한번 놀러 오세요. 쌈빡한 애들 몇 명 새로 데려왔어요. 과장님이 보시면 아마 홀딱 반할 걸. 그런데… 과장님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 이 전화 받는 대로 곧장 달려오세요. 안녕, 마이 달링. 그는 전화기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본다. 세차게 쏟아지던 비는 한결 누그러져 있다. 하지만 바람은 아직도 남자의 우산을 흔들고 있다. 죽, 일, 테, 면, 죽, 여! 옆집에서는 난투극이 벌어진 듯하다. 그는 소파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집어든다. -사십대 정신 질환- 그는 신문 기사를 들여다본다. -실직 바람이 불면서 사십대 남자에게도 정신 질환이 나타나고 있다. 이 질환은 직장과 가정에서의 지위 상실과 함께 무력감에 빠져 자살을 생각하는- 그는 전화벨 소리로 인해 신문에서 눈을 뗀다. 과장님, 저 광고 기획부 미스 윤이에요. 이렇게 늦게 알려드려서 죄송해요. 그 동안 저도…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요. 과장님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건 정 이사 짓이에요. 회사 공금도 정 이사가 가로채서는 과장님한테 덮어씌운 거예요. 이런 건 미리 알려드려야 했는데…. 저는… 과장님이 사표까지 내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더군다나 사모님하고 이혼까지….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서재 쪽으로 걸어간다. 자동 응답기에서는 계속해서 미스 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만, 그는 서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이, 년, 이, 사, 람, 잡, 겠, 네? 너, 죽, 고, 나, 죽, 자, 이, 놈, 아! 옆집 부부는 이제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싸우고 있다.

    서재 안에서는 언제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난다. 그는 곰팡이 냄새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방 가운데로 들어선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서재 한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거기에 컴퓨터가 놓여 있고, 모니터에서는 군인이 피를 흘리며 서 있다. 아군의 부상 정도는 60%, 실탄 5발, 휴대 병기 기관총, 적의 수 30명. 그는 마우스를 움직인다. 적의 보급 창고로 가서 의료 상자와 탄약 상자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 있으면 죽음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 차 어둠과 죽음의 공포에 익숙해졌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란 그다지 무 섭지도 않고, 또 슬프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 연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는 죽음…, 하고 중얼거리며 책에서 눈을 뗀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간간이 햇살이 비친다. 남자는 벤치에 비스듬히 앉아 온몸으로 햇살을 받고 있다. 옆집 부부의 싸움도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 가벼운 발걸음 소리만 들린다. 남자 뒤쪽 공터에 수코양이가 나타난다. 수코양이는 아파트 지하 창고에서 살고 있는 놈이다. 놈이 보금자리로 정한 B동의 지하 창고는 언제나 어둡고 음습하다. 놈이 언제부터 그곳에서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하다. 고양이는 아파트 A동과 B동 사이의 풀밭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비가 그친 공터는 물기를 머금은 풀들로 싱그럽다. 고양이는 유난희 물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앞쪽으로 몇 걸음 가지 않아 발을 흔들며 물기를 털어낸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가 쿨럭거리며 기침을 한다. 고양이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본다. 그때 A동 모퉁이에서 몰골이 사나운 개가 뛰어나온다. 고양이는 개를 발견하고 재빨리 B동 지하 창고 안으로 숨는다. 개는 고양이가 들어간 창고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남자가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다가간다. 개는 남자의 발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남자가 개를 정겨운 눈으로 내려다본다. 개도 남자를 올려다본다. 개의 털은 흙먼지가 뒤엉켜 있어 차라리 잿빛으로 보인다. 그는 창가에서 돌아선다. 그리고 주방 쪽으로 걸어간다. 그는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코드를 꽂는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간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자동 응답기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은 외출 중입니다. 메모 남겨 주세요.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걸어간다. 한 과장, 나 이 사무장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그러니까… 아파트하고 시골 땅도 전부 경매 처분하는 걸로 결정이 났어. 여기저기 손은 써 봤는데…. 젠장, 쓰러진 놈 밟고 지나가는 세상이야. 또 전화할게. 자세한 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구. 그는 느린 동작으로 커피를 넣고, 프림을 타고, 티스푼으로 젓는다. 먹물처럼 까맣던 물빛은 이내 뽀얗게 변한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간다.

    남자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개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든다.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낸다. 개의 시선이 남자의 손끝을 주시한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개에게 던져준다. 개는 남자가 던져준 물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이내 입에 물고 어디론가 뛰어간다. 남자는 그런 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잔잔해졌던 바람이 다시 일기 시작한다. 아참, 깜빡했네. 경매일도 확정됐어. 이 달 말이야. 하루가 급한데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이거 일이 꼬여도 한참 꼬이는구만…. 이 사무장은 다시 전화를 걸어 허겁지겁 말하고 끊는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서재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꺼낸다. 책이 뽑혀져 나올 때마다 먼지가 우수수 쏟아진다. 그의 손에 의해 뽑힌 책들은 모두 허옇게 속이 뒤집혀진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일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가 찾고 있는 물건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유독 표지가 누렇게 바랜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 천천히 책갈피를 넘긴다. -현실과 이상 사이- 책갈피에 숨어 있던 바퀴벌레가 놀란 듯 허둥지둥 달아난다. 그는 또 다른 책 -피안으로 가는 길- 을 골라든다. 그 속에도 그가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잠시 꺼내놓은 책을 둘러보다가 -죽음 앞에서- 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 래, 찔, 러, 봐, 라! 남자의 격앙된 목소리가 옆집에서 들려온다. 내, 가, 못, 찌, 를, 거, 같, 아? 여자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남자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벽을 울린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책상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책상 위에 쌓여 있는 광고지를 뒤적거린다. 그 바람에 먼지와 범벅이 된 종이들이 방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내린다.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웃으며 방바닥에 나뒹군다. 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반라의 여자들을 쫓아간다. 그때 여자들 사이에 끼여 있는 검은 약봉지가 보인다. 그는 그 약봉지를 집어든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거실로 나간다.

    남자는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린다. 개는 기침을 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올려다본다. 남자가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개는 꼬리를 흔들며 낑낑거린다. 잠시 후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내 개에게 던져준다. 개는 남자가 던져준 물건을 입에 물고 달려간다. 뛰어가는 개의 목걸이에서 햇빛이 반짝 빛난다. 남자는 기침을 하면서도 이러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나 마케팅부 강인데. 한 과장, 당신 정말 이럴 수 있어? 광고업곈 신용이 목숨이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이거 큰일 낼 사람이구만. 알고 있겠지만… 사흘 안으로 자금 메워놓지 않으면 나도 이젠 가만있지 않겠어! 전화기는 격앙된 목소리를 쏟아놓고 다시 조용해진다. 남자는 이제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다. 그때 어디선가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그는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뜬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침대 머리를 비추고 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다.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할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본다. 시계는 벌써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지근거린다. 그는 침실에서 나와 주방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스파클 식수를 꺼낸다. 그는 물을 마시며 거실 쪽으로 간다. 이상할 정도로 주위가 조용하다. 옆집 부부의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습관적으로 자동응답기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xx전화국입니다. 귀하의 전화 요금이 연체되었으니 속히 납부하시기 바랍니다. 삐…. 나, 형구다. 네 승용차 팔렸다. 돈은 예금 계좌에 넣을게. 삐…. 어미다. 시간 나면 김치 가져다 먹어라. 내가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요새 천식이 도져서…. 삐…. 과장님, 저 이 주임입니다. 짐 안 가져가실 겁니까? 회사에서 짐 치우라고 난립니다. 전화 주십시오. 삐…. 여보세요? 여기 삼천리 가스 동부 대리점인데요. 가스 요금이 연체되었으니 속히 납부하시기 바랍니다. 삐…. 저 xx경찰서 권 형삽니다. 조사할 게 있으니 유월 삼십일 열시까지 수사과로 출두해 주시기 바랍니다. 삐…. 나 황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친구 돈까지 떼어먹을 수 있냐? 우리집 담보로 돈 빌린 거 너도 알지? 나 그거 날리면 거지다 거지! 그는 정지 버튼을 누른다. 발 밑에서 벌거벗은 여자가 웃으며 말한다. -당신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는 광고지를 밟고 지나간다. 하지만 광고지는 계속해서 앞을 가로막는다. -아름다운 욕심, 아름다운 도전, 아름다운 성공- 어딘가 낯익은 광고문이다. 그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다가 말고 멈춰 선다. 탈진한 모습으로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물병을 들고 소리친다. -나는 소망한다. 한 방울의 물을- 그는 그 옆에 떨어져 있는 또 다른 광고지를 내려다본다. -하늘을 나는 남자가 아름답다-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른 조종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그 광고지를 조심스럽게 집어든다.


    어느날 나는 알지 못할 힘 같은 걸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땅속에 숨어 있다가 기어나온 매미와 같은 힘이었다. 그렇다. 나 자신이 매미 같은 존 재였다. 몇 주일을 살기 위해 수천일을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나는 이제 어둠을 뚫고 나가 화려한 삶을 끝마치는 그날까지 마음껏 날며 소리 지를 것이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간다. 벤치는 텅 비어 있다. 햇빛이 내리쬐는 벤치 옆에 몰골이 험한 개가 앉아 있다. 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던 청년이 개를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준다. 그러나 개는 꼼짝도 않는다. 개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아이들은 개를 만져보기도 하고 꼬리를 잡아당겨 보기도 한다. 개는 그런 아이들이 귀찮게 느껴지는지 한 차례 컹 짖는다. 아이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개는 다시 먼 하늘을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한참 동안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블라인드를 내린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밖으로 나온 그는, 맑고 싱그러운 공기에 취한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파릇한 풀과 나뭇잎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가슴을 펴고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어디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매미는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에서 울고 있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나뭇잎 사이를 올려다본다. 지나가던 경비원이 아는 척을 한다. 그 동안 어디… 외국 출장이라도 다녀오셨나보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셨군요. 하도 안 보이시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했죠. 경비원은 겸연쩍게 웃으며 걸음을 떼어놓는다.

    그는 남자가 앉아 있던 벤치 쪽으로 걸어간다. 몰골이 사나운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개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벤치에 앉는다. 개는 계속 낑낑거리며 그의 주변을 맴돈다. 그는 개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누군가 아파트 창문을 열고 홑이불을 털고 있다. 하얀 천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퍼덕인다. 그 아래층에서 젊은 여자가 유리창을 닦고 있다. 여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유리창에 물을 뿌린다. 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은 유리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빨래를 널고 있는 남자가 보이는 것은 9층이다. 남자는 속옷 차림으로 간이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있다. 검은 빨래가 바람에 날린다. 남자는 한참 동안 날리는 빨래와 씨름을 하고 있다. 그는 5층으로 시선을 옮긴다. 푸른색 블라인드가 보이는 창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매미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옆에 앉아 있던 개가 컹 짖는다. 그와 동시에 매미가 푸드득 날아간다. 매미는 검은 점을 남겨놓으며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개는 매미가 사라진 하늘은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시 벤치 아래 웅크리고 앉는다. 저기 말이에요. 오백 오호 여자…. 중년 부인 두 명이 가로수 밑에 서서 수다를 떨고 있다. 누구요? 아, 그 있잖아요. 오층 여자 말이에요. 남편이 논다는…. 그런데요? 그 여자가 남편을 칼로 찔렀대요. 그래요? 잘은 모르겠는데 중태라지요. 아마…. 다른 남자한테 미쳐 돌아다니더니… 쯧쯧. 그리고 말이에요. 매일 이 벤치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 김 부장이라는 사람 말인가요? 그래요. 글쎄, 그 사람 병이 도져서 어젯밤 갑자기 죽었대요. 무슨 병으로요? 급성 폐렴이라나, 폐암이라나. 에이그, 그 좋던 직장 잃고, 재산 날리고, 여편네까지 도망치더니…. 사람 일 알 수 없는 거예요. 언제 어떻게 될지. 그리고 저 개 말이에요. 안경을 쓴 여자가 슬그머니 개를 가리킨다. 집도 없이 나돌아다니는 갠데… 매일 그 사람하고 붙어 있더니만…. 미친 개는 아니겠죠? 아니에요. 오갈 데가 없어서 그렇지 귀엽게 생겼잖아요. 하긴…. 뚱뚱한 여자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춘다. 근데, 저 사람은 누구예요? 글쎄… 인물은 훤하니 잘생겼는데…. 우리 아파트 사람은 아닌가보죠?

    그는 낑낑거리는 소리에 눈을 돌린다.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개에게 줄 무언가를 찾는다. 하지만 줄만한 게 없다. 그는 잠시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검은 약봉지를 꺼내든다. 그리고 개에게 던져주려다 말고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안 돼….
    최인

    최인

    1963년 경기도 여주 출생

    서울예술신학대학 문예창작과 졸

  • 박완서 박범신

    최종적으로 논의대상에 오른 작품은 「녹슨 기억의 철길」(천은영)「앵 속」(백성우)「낮쥐」(이영주)「수수바람」(조은성)「비어있는 방」(최인 ) 다섯편이었다.

    그중에서 「녹슨 기억의 철길」은 소외된 땅으로 흘러다니는 소외된 인 물들의 삶을 주정적인 유려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으로 그렸지만 지나치게 감성과 직관에만 의존해 인물들의 비극성을 현실적인 삶과 너무 유리된 위치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앵속」은 「양귀비」를 화해의 상징으로 적절히 이용하고 있으면서 긴장감있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잘 끌어가는 솜 씨를 보여주고 있으나 인물관계의 필연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일단 아깝 게 제외됐다.

    「낮쥐」는 식량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의 우리민족문제를 새끼쥐를 향한 어미쥐의 집요한 사랑으로 형상화하고 있고 쥐와의 대결을 통한 화 자의 내면갈등을 좋은 문장으로 집요하게 추적하여 인상적이었으나 주제의 식을 강조한 나머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그려진 인물의 문제가 결함으로 지적됐다.가령 후반부에 불현듯 등장해 육화되지 않은 행동과 주장을 보여준 운동권교사의 경우가 그렇다.

    「수수바람」은 아주 서정적인 문체에 이미 사라진 복고적 풍경과 그리 움을 어린아이 시점으로 담아낸 작품인데 하나하나 인물을 잘 형상화했을 뿐 아니라 시류와 상관없는 인간원형의 그리움을 아름답고도 안타깝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큰 호감을 느꼈으나 너무 복고적이라는 사실과 현 재에서 과거로의 전환등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아깝게 당선작이 되 지 못했다.

    「비어있는 방」은 욕망이 끝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소비사회의 경쟁 구도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부서져가는지를 밀도있는 문장과 재치가 번뜩이는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인데 철저한 객관묘사인데도 큰 무리가 없 이 화자의 내면풍경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또 주인물의 위치가 특정한 위치라기보다 현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의 보편성을 확 보하고 있다는 점,광고문안들로부터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주제를 형상화해 내는데 다양한 소도구들이 적절히 이용되고 있다는 점등이 높은 평가를 받아 당선작으로 뽑는데 이의가 없었다.

    소설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는 문화적 현상 속에서도 응모된 작품들이 그 양으로보나 질로보나 풍성했다는 것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당선 자는 물론이고 최종심에서 안타깝게 제외된 모든 이의 정진을 빈다.


  • 최인

    최인

    1963년 경기도 여주 출생

    서울예술신학대학 문예창작과 졸

    오늘따라 별빛이 영롱하다. 아이들 작품 전시회를 끝내고 늦은 밤 유치원에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그만 손으로 만든 아이들의 작품들이 제일 먼저 달려나와 반겨 주었다. 키가 커다란 기린은 고개를 흔들며 좋아하고,비누방울을 불고 있던 아이들은 구름기차를 타고 다니며 고운 방울로 큰 교실을 하나 가득 메워갔다. 늘 나의 마음을 마르지 않게 도와준 아이들이 더욱 보고 싶다. 아침 이슬 같이 맑은 이 아이들과 매일 눈을 맞추면서 나는 지나간 시간의 옹이진 아픔을 견딜 수 있었고 나의 마음에 작은 씨앗을 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씨앗이 발아되어 어린 나무가 되고 큰 나무가 되어 마음이 상한 아이,마음이 닫힌 아이들을 위해 넓은 그늘막을 만들어 주는 동화를 쓰리라는 소망을 새롭게 갖는다. 오늘의 이 영광은 우선 하느님게 돌린다.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늘 힘이 되어 주신 전용식 목사님께 큰절을 올리고 싶다. 동화 나무 친구들과 늘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할 분들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느라 애쓰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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