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알레르기 알레고리

by  이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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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선소감
  • 등장인물
    702호 (남자, 슈퍼마켓 주인, 40대 초반)
    602호 (남자, 꽃집 주인, 40대 초반)
    502호 (여자, 30대 후반)
    402호 (여자, 30대 후반)
    경찰 (남자, 30대 중반)
    무대 슈퍼마켓 내부.

    무대 전체를 하나의 슈퍼마켓으로 꾸민다.

    무대 앞에 배우들이 서있을 수 있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무대 전체에

    세겹 이상의 진열대를 설치하고 진열대 위에는 물건들을 놓는다.

    진열대는 관객이 보면 미로 같은 분위기가 나야 한다.

    배우들의 출입구는 왼쪽 하나만을 쓰도록 하고 계산대는 중앙에 놓는다.

    계산대 앞에 작은 휴대용 TV가 켜져있다.

    무대 밝아지면

    702호가 계산대 옆에서 작은 TV를 보고 있다.

    602호와 502호가 차례로 등장해 물건을 고르려는 듯 진열대 사이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바구니에 물건을 담는다.

    602호와 402호 물건을 고르다가 같은 진열대 앞에서 만난다.

    같은 물건을 고른다. 서로 본다. 서로 집어든 물건 본다.

    서로 집어든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다. 서로의 물건을 찾아 다른 진열대로 간다.

    경찰 등장한다.

    경찰 (702호에게) 실례합니다.

    702호 무슨 일이십니까?

    경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실종 신고를 받았거든요.

    나이 46세, 키 175, 그리고 얼굴이 동그란 남자 못 보셨습니까?

    실종 당시 옷은 청바지에 파란 스웨터 차림입니다.

    702호, 자기를 아래 위로 내려다본다.

    청바지에 파란 스웨터를 입은 702호.


    702호 쌍카풀이 있나요?

    경찰 (수첩을 뒤적이며) 있습니다.

    702호 혹시 덧니가 있습니까?

    경찰 네, 맞습니다.

    702호 그럼, 그건 전 데요?

    경찰 (그제야 702호를 가만 살펴보고 끄덕인다)

    아저씨가 요앞 21세기 아파트 101동 506호에 사십니까?

    702호 전 104동 702홉니다.

    경찰 그럼 아저씨가 아니군요.......아저씨랑 똑같이 생긴 분 못 보셨습니까?

    702호 못 봤는데요.

    경찰 (끄덕이며) 아무튼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아저씨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즉시 연락 부탁드립니다.

    경찰 퇴장한다.

    진열대 사이에서 502호가 나온다.

    502호 아저씨, 402호가 어떤 된장 먹는지 아세요?

    702호 402호가 누구시더라......

    502호 있잖아요. 환경운동함네 하면서 히쭈구리한 옷 입고 다니는 여자.

    702호 아, 그분! (재채기하려고 한다) 에......... !

    그분은 슈퍼마켓에서는 절대 물건을 안 삽니다.....(재채기한다) 에.....에취!

    502호 그럼 그렇지.........(바구니를 계산대 옆에 던지듯이 둔다)

    어쩐지 오늘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췄는데 메주 냄새가

    진동하더라니까........하여간 웃기는 여자야........

    제 남편이 그 집에서 된장찌개를 먹고오더니 맛이 확 틀리다고 그래서요.

    702호 왜 댁에 남편이 402호에 가서 된장찌개를 먹습니까?


    502호 (웃음을 감추며) 그럴 일이 있었어요. 아저씨도 그런 일 있으세요?

    702호 어떤 일이요?

    502호 자기 집인 줄 알고 남의 집을 불쑥 들어간다든지 ...........

    702호 그럼요. 전 잠까지 자고 나온 적이 있는 걸요.

    502호 (놀란다. 찬찬히 702호를 살핀다)

    702호 왜 그러십니까?

    502호 언제요? 혹시 어제 밤 아니세요?

    702호 아뇨. 한달 전 일인데요.

    502호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난 또..........깜짝 놀랐잖아요.

    702호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502호 (한숨) 실은.......어제 우리 집에 끔직한 사건이 있었어요.

    702호 뭔데요?

    502호 전 지금도 어젯밤만 생각하면 제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꿈만 같아요. (몸서리친다)

    702호 가슴의 응어리는 풀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홧병이 되거든요.

    502호 (누가 듣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 바로 어젯밤이었어요. 제 남편이

    새벽 두시가 지나도록 안 들어왔거든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거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4시쯤인가, 인기척이 있기에 보니까 제 옆에 누가 누워있는거에요.

    전 제 남편인줄 알고 자기야, 방에 가서 자. 그랬는데.........

    702호 (호기심에 어려) 그랬는데요?


    502호 번뜩 스치는 예감이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주위를 둘러본다)

    우리 신랑이 아니었어요. 어찌나 놀랐든지 (소리를 지른다) 아..........아.........악!

    702호 (놀라서) 쉬이-잇, 누가 관리실에 신고하겠어요. 조용히 하세요.

    502호 그 남자도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살피더니 허겁지겁 도망을 가더군요.

    양말 한 짝을 남겨놓고.

    702호 그 남자가........ 에취, 에취! 누굽니까?

    502호 (신경질적으로)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남긴 거라곤 그 흔해빠진 양말 한짝 뿐인데. 그저 도둑이었나 보다, 하는 거죠.

    702호 그거 이상하군. 일을 더 크게 벌릴 만도 한데 그냥 그렇게 끝나다니.......그렇죠?

    502호 그렇죠? 단순 도둑이라고 하기엔 너무 수상하죠?

    702호 저도 하나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비밀스럽게) 1단지 2단지에 있는 개들이 전부 없어졌다는군요.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502호 어머, 어머.........다들 너무 개를 좋아해서 오줌 못가리는 개들은 거세까지 해가며

    길렀는데......... 개들이 전부 어딜 갔을까요?

    702호 그럼 아줌마네 개도 거세를 했습니까?

    502호 우리 집 개는 혈통이 있는 개에요. 충분히 가려요.

    (갑자기 생각난 듯) 어머,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집 개를 한번도 못 봤네.

    혹시...... 그럼 우리 집 개도......?

    702호 노파심은 위장병을 부르는 법입니다. 집안 어딘가에 있겠죠.

    502호 가서 찾아봐야겠네요.

    502호 퇴장한다.

    진열대 사이에서 602호 나온다.

    602호 오이 없어? 배추도 없고..........시금치도 없구먼.

    702호 시금치도 없어? 나참! 이 인간들, 배추 갖다 달라고 했더니 사과를 잔뜩 갖고

    왔길래, 도로 가지고 가라고 했더니 애매한 시금치를 가지고 갔나보군.

    다시 주문해서 배달해 줄께.

    602호 거, 이상하군. 카센타에 갔더니 거기도 주문한 바퀴가 오지 않는다고 난리더니,

    어디는 밧데리를 주문했는데 엔진오일만 잔뜩 왔다고 그러더니.....이거 피곤하군.

    (바구니를 계산대 옆에 던지듯이 둔다)

    702호 그러게, 얼굴이 안 좋네 그려.


    602호 아침에 배달 나갔다가 이제 들어왔어. 8단지에 벤자민 한 그루 배달 나갔는데

    집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세 번째나 가는 집인데도 뺑뺑 돌았네........

    점점 더해......... 기억력이 자꾸 떨어져.

    (심각하다) 나 아무래도 치매야. 심각해 (주머니에서 약을 하나 꺼내 먹는다)

    702호 (재채기한다) 에.....에취! 이놈의 알레르기.

    602호 (재채기한다) 에취!

    702호 왜 그래? 자네도 알레르기성 비염인가?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거라던데.........


    602호 모르겠어. 요즘 가끔 이래.

    두사람 얘기하는 사이 402호가 와서 진열대 안으로 들어간다.

    702호 웬일이야, 한동안 안보이더니......

    602호 저 아줌마 낯이 익는데 말씀이야........

    702호 자네 가게에서 봤겠지. 화초를 사러 오거나 꽃받침 대를 사러 왔었겠지 뭐.

    드럽게 깐깐하게 생겼지? 내가 이 슈퍼마켓을 연지 벌써 육개월짼데 말이야............

    와서 물건을 사가는 꼴을 봇봤다니까. 구경만 해요 구경만......도대체 이유가 뭘까?

    602호 그 아줌마가 저 아줌만가?

    베란다에다 직접 텃밭을 꾸미고 야채를 심어 먹는다는.

    우리 마누라 얘기로는 참기름이니 쌀이니 다 어디선가 직접 가지고 온다더군.

    절대 슈퍼마켓에서는 물건을 안 산대. 전부 직접 만들어 먹는다던데........


    702호 따로 채소를 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현대적 식생활을 책임지는 슈퍼마켓이라는 것이 폼으로 있는 거야?

    잘난 척할 게 따로 있지.

    602호 왜 꼭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서 먹어야 되는데?

    702호 유통질서 교란시키지 말고 약이나 먹게.


    602호 (약을 하나 더 먹는다) 그래 맞아. 난 약을 먹어야 돼.

    어제도 약 먹을 일이 있었어.

    벨을 눌렀는데도 문을 안 열어주잖아. 마누라가 장난치는 줄 알고 죽치고

    기다리다가 문을 발로 찼지. 그랬더니 경비원이 올라오더라구.

    나참 창피해서.........우리 집이 아니더라구.

    702호 (웃음 터뜨린다) 푸하하하하하.......

    602호 웃기는.......

    602호 퇴장한다.

    602호 나가자마자 402호가 진열대에서 나와 퇴장한다.

    702호 나가는 402호를 뚫어져라 본다.

    702호 슈퍼마켓도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니까.

    702호, 불현듯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을 본다.

    702호 샴푸 통이 왜 음료수 쪽에 와있지? (물건을 옮겨 놓는다)

    가만.......이거 샴푸가 아니라 주스 맞네. (다시 옮겨 놓는다)

    주스라고 크게 좀 써놓지, 이러니 기름대신 물비누를 부었다는 사람이 안 생겨?

    702호, 다시 계산대에 앉을려다가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을 살핀다.

    몇 개 물건들의 자리를 다시 옮겨놓는다.

    이상한 듯 옮긴 것을 다기 옮긴다. 또 다시 옮긴 것을 다시 옮긴다.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진다.

    사이


    경찰 등장한다. 진열대에서 물건을 옮기는 702호를 보고 얼른 쫓는다.

    702호 번뜩 스쳐 가는 경찰을 봤다. 누군가하고 얼른 진열대 사이로 쫓는다.

    경찰 잽싸게 진열대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702호 잽싸게 경찰을 따라서 진열대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경찰 702호의 뒷모습을 보고 쫓는다. 702호의 빨라진 경찰의 뒷모습을 보고 쫓는다.

    서로의 뒷모습을 보고 진열대 안에서 왔다갔다하는 경찰과 702호.

    경찰 무대로 나온다. 702호도 무대로 나온다.

    경찰 잡았다!

    경찰, 702호를 잡았다가 어! 하는 얼굴로 손을 놓는다.

    702호 무슨 일이십니까?

    경찰 아까 그 양반이시군요. 전 실종자가 이리로 들어왔다는 제보를 받고 왔는데.......

    702호 그래, 저 안에 누가 있습니까?

    경찰 있었는데, 사라졌습니다.

    702호 유감입니다.

    경찰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했습니다.

    702호 사회 문제라뇨?

    경찰 실종자가 점점 속출하고 있어요.

    702호 세상에!

     

    경찰의 핸드폰이 울린다.

    경찰 얼른 핸드폰을 받는다.

    경찰 네! 네! 네?

    뛰어나가는 경찰.

    602호 등장하다가 경찰과 부딪힌다.

    정신없이 뛰어나가는 경찰 보며 602호 무대에 선다.

    702호 불현듯 602호의 바지를 보더니 602호 옆에 선다.

    두사람 똑같은 바지를 입고 있다


    702호 어!

    602호 어!

    702호 역시 우린 비슷한 점이 많단 말씀이야. 기분도 그런데 악수나 한번 할까?

    두사람 새삼스럽게 악수한다.

    602호 언제 바둑 둘래? 그때 빚진 걸 갚아야지.

    702호 그러지 뭐. 나 요즘 21세기 스포츠센터에 다니고 있는데 그쪽으로 한번 놀러오던지.

    정기적으로 운동을 했더니 이 추운 날에도 양말을 안 신어.

    602호 (놀라며) 그래? 나도 한달 전부터 거기 다녔는데 왜 한번도 못 봤을까?

    702호 그러게.

    602호 (하품을 한다) 졸립군.

    702호 (하품을 한다) 졸렵군.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야겠는데.......

    602호 그러지 그래.


    두 사람 퇴장한다.


    무대 잠시 어두 어졌다가 다시 밝아진다.

    502호 등장한다.

    물건을 몇 개 골라서 바구니에 담는다.

    계산대 앞에 바구니를 두고 이리저리 사람을 찾는다.


    502호 이 집 장사 안하나. 다들 어디 간 거야? (시계를 본다) 점심 먹으러 갔나?

    502호 무대를 왔다갔다한다.

    기다리다가 신경질이 나는지 인상을 쓴다.

    바구니에 있던 물건을 아무렇게나 도로 진열대에 놓고 퇴장하려다가

    주위를 은근 슬쩍 둘러본다. 물건을 몰래 몇 개 가방에 넣고 퇴장한다.


    사이


    702호와 602호가 아까와는 다른 옷차림으로 등장한다.

    두사람 똑같은 스웨터를 걸치고 있다.

    602호는 난초 화분을 들고 있다.

    602호 점심 잘 먹었어, 얼른 가봐야지. 화분 기다리겠네.........

    602호 퇴장하다가 등장하는 402호와 마주친다.

    두 사람 가볍게 목례로 인사한다.

    두사람 서로 '어디서 봤는데......' 하면서 서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402호 아저씨. 아저씨...... 502호 혹시 못 보셨어요? 여기 갔다고 그러던데........

    702호 못 봤는데요.

    402호 그 아줌마 만나기 힘드네. 어디로 갔는지 모르시죠?

    702호 글쎄요. 급한 일이십니까? 내일 아침에 찜질 방에 가면 만나실 텐데.

    402호 (놀리듯) 어머, 아저씨가 어떻게 그런 거 까지 아세요?


    702호 우리 마누라하고 찜질방 회원이거든요. 근데 왜요?

    402호 글쎄 그 집 남편이.......(웃음을 참으며) 아무튼 그럴 일이 있어요.


    702호 오신 김에 야채좀 한번 보시죠.

    402호 배추씨 있나요?

    702호 배추가 있는데 웬 배추씨요? 5% 세일입니다.

    402호 전 배추가 자라는걸 보는 게 좋거든요. 아침마다 아파트 뒷산의 텃밭에 가서

    오늘은 싹이 얼마나 올랐나.......벌레는 먹지 않았나..........

    (가방에서 과자를 꺼낸다) 제가 만든 건데 좀 먹어보실래요?


    702호 (과자 봉투를 하나 뜯는다) 그것보다는 이걸 먹어보시죠.


    402호 (인상쓴다) 어유......이게 무슨 냄새야. 화학 약품 냄새 나지 않아요?

    702호 (과자 냄새를 맡아보며) 화학 약품이라뇨? 맛있는 냄새만 나는데.......

    402호 그럼 댁이나 많이 드세요.

    702호 지금 비아냥거리는 겁니까?

    402호 비아냥이라뇨? 전 그저 이 따위는............

    702호 (자르며) 말조심하세요 아주머니! 언젠가 아주머니의 그 슈퍼마켓에 대한 혐오증에

    대해서 한마디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402호 혐오증? 전 그런 거 없어요........

    단지 우리 집 베란다엔 깻잎이 자라고 있고, 작은 병엔 양파를 심었을 뿐이에요.

    다용도실에는 닭을 기르고 있죠. 계란을 먹기 위해서........

    702호 (자르며) 이보세요 아주머니. 우리는 같은 평수, 같은 구조의 아파트 단지에서 함께

    살아가는 처집니다.

    혼자 베란다에 깻잎을 심는다 어쩐다 하면서 왜 유별을 떨어요. 떨기를........

    상추는 무슨.......심는다고 다 상추가 돼나.......남들처럼 베란다에는 화초를 갖다놔야죠.

    402호 (기분 나쁘다) 전 제 방식대로 살겠어요.

    인간의 손으로 가공한 것들이 죄다 환경오염의 주범들이라고요.


    702호 아주머니, 주방의 오른 쪽 귀퉁이에는 가스 렌지가 있죠?

    왼쪽에는 싱크대. 그 사이에 도마를 두고 칼질을 하면서 주방 쪽에 난 문으로

    아파트 주차장을 바라보지 않습니까? 에........에취!


    402호 그런데요?

    702호 댁이나 저희 집이나 똑같은 구조에다가 오염을 일으키는 화학물질들로 인테리어하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판인데, 밖에 나와선 왜 유별을 떠세요?

    당신의 그 고매한 논리답게, 환경적 동물답게 여건에 맞춰서 살아야지 꼭 그렇게

    광화문 네거리에 소달구지 끌고 다니는 격으로 그게..........에.....에취!

    (코를 푼다) 오늘 웬일이야.........부쩍 심하네..........

    402호 (입을 삐죽거린다)

    702호 (바구니에 물건을 담아서 402호 앞에 내민다) 오늘 저녁 메뉴는 생태찌개에

    반찬으로는 참치 통조림과 구이햄, 구이김 입니다.

    모든 분들이 그렇게 준비해 가셨습니다. 에......에취!


    402호 (바구니를 702호에게 밀며) 전 절대 제 손으로 그런 것을 사는 일은 없을꺼에요.

    제가 슈퍼마켓에서 사는 건 개밥 사료밖에 없어요.


    402호 702호를 무시하며 퇴장한다

    702호 얼굴 일그러진다.

    402호가 나가자마자 화가 나서 바구니에 물건을 잔뜩 넣는다.

    전화를 건다.

    702호 나야, 지금 급한 배달이 생겼어. 그 잘난 402호 여자 알지?

    그래, 그 우리 집에서 물건을 절대 안 사는......그 집에 급히 배달 해야된다구.

     

    경찰 뛰면서 등장한다.

    오자마자 얼른 702호에게 수갑을 채운다.

    702호 어! 어! 왜이래요! 왜이래!

    암전.

    어둠 속에서.

    702호 왜이러냐니까! 야! 이 거지같은 새끼들아! 이거 안 놔!

    조용.

    잠시후, 무대 밝아지면 무대 전과 다름없다.

    702호 다른 옷차림에 조끼를 입고 모자를 쓰고 등장한다.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에 세일이라는 종이를 붙인다.

    사이


    602호 상가 집에서 쓰는 휜 국화 화분을 들고 등장한다.

    602호 어, 축하하네.

    702호 뭘?

    602호 경찰의 실수로 (강조) 거기! 들어갔었다며?

    702호 나참, 재수가 없어서 원........금방 오해가 풀렸기 마련이지, 다시 한번 무고한

    시민을 이렇게 개똥으로 알면 정식 고발할 생각이네.

    602호 그 정도 사과 받았으면 됐지뭐.......근데 뭐하나?

    702호 (세일이라고 쓴 종이를 보이며) 으응.....이거, 경찰서에 갔다 느낀 게 많아서.

    602호 뭔데?

    702호 착하게 살아야되겠더라고.

    602호 (702호의 모자를 뺏어서 자기가 쓰며)

    자네만큼 착한 사람이 또 있을 라고, 내 모자를 이렇게 착실히 보관해줬구만.

    702호 (다시 뺏어서 쓴다) 무슨 말씀을. 이건 내 꺼야.

    602호 왜 그래 이거, 우리 마누라가 한달 전에 결혼 기념 일날 선물로 사준 건데.

    702호 그때 내 마누라도 샀나보지.

    602호 그래? 이상하네..........(702호의 조끼를 본다) 그 조끼 말인데..........자네 꺼 맞나?

    702호 왜? 이것도 자네 건가?

    602호 어떻게 때 탄 것도 똑같네.

    702호 괜히 딴 소리는.........이게 그렇게도 탐나나?

    602호 이 사람이! 그만한 것들은 나도 있어.

    702호 알았어, 알았어. 오늘 또 부부싸움 나겠군.

    602호 (심각하다) 자네.......혹시.......우리 마누라 못 봤나? 여기 왔다가지 않았어?

    702호 (슬쩍 웃는다) 벌써 한바탕 한 거야? 꽉 잡히긴 잡혔군. 아무리 봐도 자넨

    현명하단 말이야. 그것도 괜찮지.........꽉 잡혀서, 괜찮지.......괜찮아........


    602호 그게 아냐. 오늘 아침에 말다툼을 했는데 5회말도 못 가서 집을 나가버렸어.

    702호 왜? (의미 있는 웃음) 자네 꼬리 잡혔군.

    602호 그런 게 아냐. 난 절대 흔적은 안 남겨.


    702호 (은근히) 그래? 그 비결이 뭐야?


    602호 그 비결은 내일 사우나에서........하하하하......에취!

    702호 하하하하......... 근데 왜 싸웠어?

    602호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누가 아파트 현관 앞에 사과 두 박스와 꽃 다발을

    놓고 갔더라고. 누가 잘못 놓고 갔구나 싶어서 앞집 601호에도 물어보고

    밑에 위에 다 물어봤는데 주인이 안 나서는 걸 어떻게 해.

    그냥 우리가 슬쩍하자고 그랬더니 날 보고 도둑이라는 거야. 지 남편을 도둑이래,

    다 우리 식구 잘살자고 한 소린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702호 그래서 안타를 친 거야?

    602호 (한숨 쉰다) 오히려 내가 삼진을 당했네 당했어.

    702호 역시 자넨 시대 감각이 뛰어나. 그게 요즘 유행하는 생존 방법이라니까. 그거 알어?

    삶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늘 안타를 치다가 가끔 홈런도 치기, 가끔 안타를

    치다가 삼진도 당하기. 늘 삼진 당하기. 자넨 어느 편이야?

    602호 글쎄. 모르겠어. 대책없이 부닥치는 거지 뭐, 난 그냥 다 때려치우고 어디

    조용한 전원에 가서 자리를 잡고싶어. 그래야 내 치매 증상이 없어질 거 같네.

     

    702호 (갑자기 입이 딱 벌어진다. 모자를 벗어서 옆의 간이 의자 위에 놓고 이마의 땀을

    씻는다)

    602호 과일 나무나 심고 낚시나 좀 하고......어때 멋있을 것 같지 않은가?

    702호 (602호의 손을 거세게 잡는다) 역시.......우린 친구야.......

    우리가 언제부터 같은 꿈을 꾼 거지?......하하하하..........

    602호 그래? 난 자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는데? 자넨 돈이나 많이 벌어서

    아파트니 슈퍼마켓이니 평수나 늘리는 게 꿈인 줄 알았지.

    반갑군..........참! 내 정신, (꽃을 준다)

    702호 (받으며) 선물인가? 고맙군.

    602호 계산은 카드로 할건가?

    702호 자넨 선물도 돈 받나?

    602호 선물이라니? 이거 자네가 아까 와서 직접 골라놓고 간 거잖아.

    702호 내가? 언제?

    602호 아침에.


    702호 자네 약 있지. 먹게.


    602호 (반색한다) 아니 왜이래! 배달해 달랬잖아!

    702호 약, 에.......에취! 약 먹으라니까!

    602호 (풀이 죽는다) .............나 병원에 가볼까? 에취!

    702호 약을 두알로 늘려.

    602호 (약을 먹는다)

    502호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등장한다.

    멀리서 602호를 보자마자 슬며시 웃는다.

    502호 (602호에게) 자기 슈퍼마켓엘 다오고 웬일이래요? 알았다. 요즘 매일 늦게 들어온 게

    미안해서 저녁거리 사러왔구나. 난 당신을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호호호호........

    저녁은 안 지어도 좋으니까 이번 주말에 등산이나 가요. 네?

    602호 (어리둥절하다)

     

    502호 이이는, 꼭 어디 가자고 하면 못들은 척하더라. 이왕 온 김에 그럼 같이 장이나 봐요.

    내일 당신 어머님 오시는데 갈비찜이라도 준비해야죠.

    602호 어머님이라니? 누구 어머님?

    502호 누군 누구에요? 우리 결혼할 때 그렇게 반대하던 당신 어머님이지.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서럽고 섭섭한지.....자기 생각나? 내가 자기네 집에

    처음으로 인사하러 갔을 때, 어머님이 날 보시자마자 하시던 말씀.

    눈매가 쫙 찢어진 것이 보통은 넘겠구나, 내 아들이 눈이 뼜지 하시면서.......


    602호 (웃음을 참으며) 저.......아주머니.......

    502호 난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 가슴이 떨린다구.

    602호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린다) 푸, 푸하하하하하.......

    502호 (비로소 자세히 602호를 쳐다본다) 어머, 누구세요?

    602호 전 101동 602호에 사는데요.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502호 (몹시 부끄럽다) 어머, 이를 어째. 제 남편인줄 알고......너무 똑같아요......에취!

    머리 모양이며........배 나온 거 까지.......(이상한 듯 보며) 근데 저.....혹시, 저 모르세요?

    602호 글쎄요. 어디서 뵌 것도 같고.


    502호 그렇죠? 어디서 봤죠? 저도 분명히 봤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602호 저도 그렇습니다. 혹시 자제 분이 21세기 국민학교에 다닙니까?

    502호 전 아이가 없는데요.

    두사람 이리저리 살펴본다.

    기억하려고 애쓰나 기억나지 않는 표정.

    602호 죄송합니다. 제가 치매가 있어서 영 기억을 못하겠군요. (약을 하나 먹는다)

    하나 드시겠습니까? 기억력에는 아주 좋습니다.

    502호 (하나 받아서 먹는다)

    602호 (간이 의자 위의 702호가 벗어둔 모자를 쓰고 702호에게)

    나가네!

    602호 퇴장한다.

    702호, 물건을 이리 저리 옮겨놓으면서 정리하고 있다가 퇴장하는

    602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502호 그럼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결혼이란 꼭 쵸코렛 같다니까.

    먹을 때야 단 맛에 좋아죽겠지만 먹고나면 이빨이 썩어서 꼭 고생하고 마는 쵸코렛!

    (소리 높여서) 쵸코렛!

    702호 저기 과자류 있는 쪽에 쵸코렛 없습니까? 그쪽에 있을 텐데.......

    502호 전 쵸코렛은 절대 안먹는다고요!


    502호 진열대의 쵸코렛을 본다. 702호 모르게 주머니에 슬쩍 넣는다.

    702호 (은근히) 아주머니 요즘은 별일 없으십니까? 특히 밤에요.


    502호 무슨 일이요? 아, 그 양말 사건이요? 그건 요즘 문제도 아니에요.

    제 남편 때문에 그쪽 일은 신경도 안 써요.

    702호 아니 왜요?

    502호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한다) 전 이혼 할거에요.

    702호 무슨 일이십니까?

    502호 삼일 째 집에 안 들어오고 있어요. 날마다 새벽에 들어오더니 이젠 아예 외박이에요.

    그러면서도 아침에 내가 회사로 전화를 걸면 너무나 당당한 거 있죠.

    자기가 무슨 외박을 했냐면서 나보고 정신병원에 가보래요.

    지나친 기억력 감퇴는 치매 증상 초기래 나......뭐......

    702호 미스테리군요. (물건을 이리저리 옮겨 놓는다)

    502호 정말 미스테리에요. 밤새 전 한번도 남편을 본 적이 없어요. 아침에도 남편이

    출근한 흔적이 없고요. 근데 제 남편은 제가 잠든 사이에 왔다갔다는 거에요.


    702호 뜬 눈으로 밤을 새워보시지 그래요.

    502호 전 밤새는 건 죽었다 깨나도 못해요. 차라리 이혼을 하지.

    702호 이혼이 꼭 최선의 선택은 아닙니다. 함께 여행을 떠나보시지 그러세요.

    502호 듣기 싫어요. 전 이혼하고 말꺼에요!.........에취! 에취!

    502호 (휴지를 준다) 아주머니도 알레르기성 비염이십니까?

    502호 글쎄요. 전에 없던 증센데........요즘...... 에.....에취!

    702호 (502호와 동시에) 에......에취! .........아,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502호 무슨?

    702호 지방자치 지역마다 색깔이 틀린 깃발을 집집마다 달기로 한 안건이 국회에서

    통과가 됐답니다.

    502호 아니 웬 깃발?

    702호 각 도시마다 특색을 살리자는 뜻이겠죠. 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502호 서울은 무슨 색이래요?

    702호 노란 색이랍니다.

    502호 어머, 난 노란 색 알레르기 있는데.......깃발은 정부에서 나눠 준 데요?

    702호 그러겠죠. 당연히......... 아니지. 슈퍼마켓을 통해서 공급해야 옳지 않겠어요? 슈퍼마켓!

    502호 비장한 얼굴로 끄덕인다.

    402호가 502호와 똑같은 커다란 가방을 메고 등장한다.


    402호 (가방에서 물건들을 죽 꺼내 놓는다) 아저씨 이거 아저씨가 보내셨죠?


    702호 (은근히) 드셔보셨습니까?

    402호 (화를 낸다) 난 안 먹는다는데 왜 함부로 물건들을 보내시고 그래요?

    난 이런 거 절대 안 먹는다니 까요.

    502호 어머, 어머, 이 아저씨 사람 차별하시네.........언제 저희 집에 이런 거

    보내주신 적 있어요? 정말 웃기는 아저씨네.

    702호 아주머니 그게 아니고요.......

    502호 (말을 가로막으며) 됐어요. 됐어......... 잘못하면 또 한사람 이혼 당하겠네.


    502호, 402호와 702호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면서 퇴장한다.

    402호 어머, 웃기는 여자네......내참.

    702호 진짜 웃기는 여자네요.

    (은근히) 맛을 보셨습니까? 어떠십니까? 역시........에취!........역시죠?

    402호 물어내세요! 저도 모르게 이것들을 먹었잖아요!

    702호 축하합니다. 이제 아주머니도 현실에 참여하신 겁니다.

    402호 그런 끔직한 소리 마세요!

    우리 집 다용도실에 기르는 닭이 알을 품기 시작했지 뭐에요.

    그건 우리 집 환경이 자연에 가깝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702호 아주머니,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같은 재료를 사다가 같은 요리를 해먹고 같은

    프로그램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드는 민촙니다. 슈퍼마켓을 거부하는 건 공동체를

    거부하는 겁니다. 거 뭐라더라......집단 공동체적 무의식적 공동체라고 하던가?

    그래서 이웃 아닙니까. 난 그저 뭔가 배운 듯한 아주머니께서 도태되는 것을

    (재채기하려고 한다) 에.........에! .......원치 않아서.......

    402호 계속하세요.

    702호 한 마디만 더드리죠. (작은 소리로) 튀면 손해에요.

    402호 (의심스러운 눈초리) 아저씨 참 수상하시네요.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에요?

    오직 그것 때문에 저한테 관심을 보이시는 거에요?

    요즘 가뜩이나 우리 집 개가 없어져서 심란해 죽겠으니까 제발 더이상 절 우울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702호 뭐가 없어졌다고요?

    402호 우리 집 개요. 아시겠어요? 전 요즘 세상이 싫어졌어요.

    갑자기 이 세상 밖으로 증발해버렸으면 좋겠어요. 그 개가 사라진 후로는 더 그래요.

    개 사료나 한 포 주세요.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기도하는 맘으로..........

    702호 슬픈 소식이군요. (개 사료를 갖다 준다)

    402호 아, 끔찍해. 왜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진 걸까. (울먹이며) 전 동물애호가거든요.

    전 정말 비인간화되어 가는 이 세상을 생각하면 소금물 삼키는 것 같다니 까요.

    702호 소금물은 약입니다. 어려운 일은 인생의 약이 된다는 소리죠.

    402호 그래도 전 제 인생이 자꾸 방향을 뒤트는 건 못 참아요.

    그나저나 개를 찾아야 할텐데....... 제 남편이 중국에 가있는 동안 얼마나

    그 개가 위로가 됐는지 몰라요.

    702호 고정하세요. 우리 집 고양이가 새끼를 납니다. 지금 잔뜩 배가 불렀거든요.

    털이 빨간 고양이 입니다, 그중 가장 빨간 놈으로 한 마리 드리죠.

    402호 싫어요. 고양이는. 다용도실에 있는 닭을 놀라게 할텐데......

    이러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요?


    702호 걱정 마십시오. 에취! 에취! 에취! 죄송합니다.

    402호 (갑자기 재채기를 한다) 에.....에취! (놀래서) 어머, 그새 옮았나보네.

    702호 (얼른 캔 커피를 하나 준다) 이걸 드십시오.

    402호 에......에취!.......(얼른 마신다)

    702호, 얼른 또다른 음료수를 준다.

    402호 음료수를 받아 마신다.

    402호 에, 에취! 에.......에취! 어머, 내가 왜이러지?

    702호 402호가 재채기하는 틈을 타서 402호의 가방에다가 물건을 몇 개 넣는다.

    그리곤 얼른 진열대 뒤로 숨는다.

    602호 다른 옷차림으로 등장한다.

    멀리서 402호를 보더니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살금살금 402호 뒤에 가서 와락 껴안는다.


    402호 (놀래서 소리지르며 602호를 확 민다) 아.......악.......!

    602호 (뒤로 넘어지면서) 아니, 이 사람이!

    402호 내 몸에 손대면 죽여버리겠어요.

    602호 (달래듯 다가오며) 아참, 창피하게 왜 이래! 남들 보겠네.

    402호 (확 민다)

    602호, 장난기 있는 얼굴로 슬슬 402호 가까이 간다.

    가까이 가서 쳐다보다가 깜짝 놀란다.

    너무 놀라서 얼굴을 감싸 안는다. 살짝 손을 떼서 402호의 얼굴을 쳐다본다.

    고개를 푹 숙인다.

    402호 여긴 법치 국가에요. 당신을 경찰에 고, 고, 고발하겠어요.

    602호 죄, 죄......송합니다. 전....제 마누란 줄 알고......

    402호 그런 얘기는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

    602호 정말 죄송합니다. 순전히 착각이라고요. 제 마누라도 늘 이런 고전적인

    옷차림이거든요. 그리고 특히.....에취!......웬 재채기야......죄송합니다. 가방이

    똑같아서........에취!....에취!........에취!

    (괴로워한다) 난 안돼. 그렇게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어.......(약을 한줌 먹는다)

    제가 치매가 있어서 기억력이 전혀 없습니다.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402호 기가 막혀서 정말, 남자라면 다 지긋지긋해. (홱 돌아서서 퇴장한다)

    602호 거, 되게 무안하네.

    702호 진열대 안에서 나온다.


    602호 이거 인생 꼬이는군.

    702호 그래? 그럴 때는 공상 드라마가 최고지.

    702호 TV를 켜고 마주 앉는다.

    602호 옆에 조용히 앉는다.

    두사람 TV속으로 같이 빨려 들어간다.

    두사람 시선을 TV에 고정한 채, TV에 빠져있다.


    사이.


    702호 꾸벅거리면서 졸기 시작한다.

    602호도 꾸벅거리면서 졸기 시작한다.

    702호 답답한 듯 조끼를 벗어 바닥에 던진다.

    다시 졸기 시작한다. 그대로 계산대 위에 엎드린다.

    602호 하품하면서 같이 계산대 위에 엎드린다.

    무대 조금 어두워진다.

    사이

    702호 불현듯 눈을 뜬다.


    702호 (시계를 보며 놀랜다) 아니 12시가 넘었잖아? 물건 다 집어가도 모르게 잠을 잤네.

    (하품한다) 아이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가서 잠이나 푹 자자.


    702호 퇴장한다.

    602호는 그대로 엎드려 있다.

    암전.


    사이

    무대 밝아지면 물건들이 모두 사라졌다.

    무대 중앙에 노란 깃발이 걸려있고 판매용 노란 깃발 한 다발만 진열대에 남아있다.

    702호 다른 옷차림으로 등장하다가 깜짝 놀란다.

    잘못 왔나 싶어 도로 퇴장하려다가 다시 들어온다.


    702호 아니, 이럴 수가, 도,도둑이......도둑이 들어, 도둑이야! 도둑이야!

    602호 상가 집에서 쓰는 조화를 들고 702호가 바닥에 던졌던 조끼를 입고 등장한다.

    602호 무슨 소리야? 뭐, 뭐라고? 도둑이라고?

    도, 도...........(사방을 둘러보며) 둑........이 들었었네.

    702호 (털 퍼덕 바닥에 주저앉는다)

    602호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떤 놈이야? 문을 안 잠그고 간 거야?

    702호 모르겠어.........허망할 뿐이야.

    602호 (약을 준다) 약을 먹고 잘 기억해 봐. 누구 짚이는 인간 없어?


    702호 (약을 받아서 먹는다)


    602호 경찰에 신고했어? 내가 해줄까?

    702호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여긴 공단입구 슈퍼마켓인데요.....도둑을 맞았습니다

    네........홀라당 털어갔어요.........(신경질 낸다) 완전히 당, 에....에취! 당했다니까요!

    602호 이보게 진정하게. 화를 낸다고 없어진 물건이 들어오나.

    이 기회에 정리해서 같이 전원으로 내려가세. 나도 이혼 수속중이니까.

    702호 그게 무슨 소리야?

    602호 내 마누라가 그날 싸운 이후로 아직 집에 안 들어오고 있어.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지. 이유는 단 하나. 딴 남자가 생긴 거야.

    702호 자네도 완전히 삼진을 당했군.

    602호 아니야. 차라리 이건 홈런이야. 덕분에 전원으로 내려 갈 수 있게 됐으니까.


    702호 (602호가 입은 조끼를 본다) 근데..... 혹시 그 조끼 내꺼 아닌가?

    602호 아니. 이건 내 조끼야.

    702호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602호 왜 그래?

    702호 자네 어제 밤에 어디서 뭘 했나?

    602호 여기서 잤잖아.

    702호 (점점 얼굴빛이 변한다)

    602호 우리 둘이 TV를 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잖아. 자다가 일어나서는 여기가

    어딘가 한참 생각했었네. 잠결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단 말씀이야.


    702호 다시 한번 정리하지. 분명히 자네가 어젯밤에 여기서 잤다이거지.

    602호 그렇다니까. 왜?

     

    702호 (전화를 건다) 경찰서죠? 아까 신고했던 슈퍼마켓입니다.

    빨리 와주시죠. 도둑을, 에취!...... 잡았습니다.


    602호 도둑을 잡았다고? 어디?

    702호 (602호를 보다가) 자네지 누구야.

    602호 뭐? 이 친구 가끔 사람 웃기는 재주 있다니까.

    702호 이 조끼가 증거야. 오리발 내밀지 마. 에,.....에취! 이거 신경을 썼더니 더하군.

    602호 뭐, 뭐야? 난, 에, 에.........취! 난, 아, 아냐!

    경찰이 등장한다. 노란 완장과 노란 색의 경찰 모자를 쓰고 있다.


    702호 (602호를 가르치며)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제 밤 우리 집 물건을

    훔쳐서 어딘가에 숨기고 오늘 사태를 파악하려고 여기에 왔어요.

    602호 (경찰에게) 아닙니다. 난 아니에요!

    (702호에게) 자네 미쳤나? 친구를 이렇게 음모해도 되는 거야?

    702호 음모? 먼저 배신한 건 누군데 그래?

    경찰 아아, 조용히들 하십시오. 조사하면 금방 밝혀지는 일들이니까.

    (무대 구석 구석을 둘러본다) 특별한 흔적은 없군요.

    (602호에게) 꽃집 주인이시죠? 어제 왜 여기서 잠을 잤습니까?

    602호 놀러왔다가..........(약을 한 움큼 먹는다) 죄송합니다. 제가 치매라서 잘 기억이.....

    그렇죠. 놀러왔다가 같이 TV를 봤죠. 그러곤 깜박 잠이 들었다가 여기서

    나갔습니다. 그뿐입니다. 여기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702호 이 조끼가 증겁니다. 이 조끼는 제건데 이 사람이 입고 있어요.

    이 사람이 여기에 있던 물건과 조끼를 훔쳤어요.

    602호 이건 내 조끼야. 지난 추석 때 우리 마누라한테 선물을 받은 거라고. 알어!

    경찰 부인에게 확인해 보면 되겠군요. 부인은 지금 어디 계시죠?

    602호 네?..........그게..........저도 모릅니다. 가출, 에, 에........취! 했습니다.

    경찰 가출이라.........에,.......에취!

    그럼 이 조끼가 당신 조끼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겠군요.

    602호 이 조끼가 이 작자의 조끼라는 근거는 또 어딨습니까?

     

    경찰 아참! 그것도 증명이 안됐군요.

    (702호에게) 이 조끼가 당신 조끼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까?

    702호 글쎄요........에..........에취! (602호를 가리키며) 그걸 증명할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는데요.

    602호 전 한번도 이 사람이 조끼를 입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702호 (602호의 멱살을 잡는다) 내 조끼를 보고 멋있네 어쨌네 저쨌네 했잖아!


    경찰 폭력은 어떤 의미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손놓으세요.


    702호 멱살 잡았던 손을 놓는다.

    502호 포스터를 한 묶음 들고 등장한다.

    502호 (둘러보고 놀랜다) 어머........이게 웬일이래요?

    702호 모두 도둑을 맞았습니다.


    502호 세, 상에.........! (노란 깃발을 본다) 깃발은 있군요.

    (깃발 하나를 집어들고 계산대로 가서) 아저씨 이거 계산해주세요.

    702호 오늘은 장사 안합니다.

    경찰 장사하십시오. 소비자는 물건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702호 (계산대 두드린 후 퉁명스럽게) 500원 입니다.

    502호 (돈을 낸다)

    402호 등장한다.

    402호 (슈퍼마켓 둘러본다) 가게 문 닫았나요?

    502호 도둑을 맞았대요.

    402호 정말, 꼭 이렇다니까. 이제 막 슈퍼마켓에 정이 들라하니까.......

    에취! 에취!

    경찰 아주머니들도 참고인으로 잠깐 수사에 협조좀 해주시겠습니까?


    502호와 402호 눈짓으로 긍정의 표시를 한다.

    경찰 이 조끼를 누가 입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502호와 402호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이 나지 않는 표정이다.

    602호 (불쑥 두사람에게 약을 권하며) 이 약을 드시고 잘 기억해보세요.

    분명히 제가 입고 있었죠?

    702호 (가로막으며) 두분은 우리 집 단골 아닙니까. 제가 입고 있던 것을 보셨죠?


    경찰 아주머니들, 이 조끼를 누가 입고 있었는지 기억 나십니까?

    402호 저........에취!

    경찰 기억 나십니까?

    402호 저..........그 조끼를 훔친 사람은 아마........, 연쇄범일거에요.

    물건을 훔쳐서 매일 우리 집에 갖다놓고 있어요. 덕분에 저는 저도 모르게 슈퍼마켓에

    맛이 들려서 베란다에 있던 상추를 모두 뽑아버리고 닭들을 양계장에 보냈죠.

    에취! 에취! 에취! 하지만 늘은건 이 알레르기밖에.....에취!

    그 사람이 범인일거에요. 저한테 매일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

    제게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에요. 범인을 꼭좀 잡아주세요. 전 무서워요.

    (가방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꺼낸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음란 테이프까지........

    502호 세상에.........한 동네에서 이게 무슨 일일까요?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는 삼강오륜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나라인데........

    702호와 602호 슬쩍 비디오 테이프를 곁눈질로 본다.

    경찰 사건이 확대되는군.

    조끼를 훔친 사람이 아주머니 집에 아무 이유없이 매일 물건을 갖다 놓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에.......에취! 슈퍼마켓을 털었다.

    502호 저.......저도 하나 참고로 말씀드릴께요.

    (가방에서 양말 한 짝을 꺼낸다) 이 양말의 주인공이 바로 그 조끼의 주인이 아닐까요?

    밤에 저희 집에서 몰래 잠을 자다가 세번이나 들킨 사람이거든요.

    양말 한 짝만 남겨두고 도망갔죠. 이것 때문에 제 남편이 오해를 하고........에취!

    집을 나갔어요. 제가 딴 남자를 집에 끌어들였는줄 알고........분명히 상습범이에요.

    경찰 이거 점점 수사의 범위가 확대되는군. 조끼를 훔쳐 입고 아주머니 집에

    매일 물건을 갖다놓고 또 아주머니 집에 밤에는 몰래 들어와서 잠을 자고 간 사람.

    그 사람이 슈퍼마켓을 털었군요.

    (양말을 비닐 봉지에 넣으며) 이 양말은 제가 증거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502호 그리고........(가방에서 '사람을 찾습니다' 라고 써있는 포스터를 하나 꺼내서 준다)

    제 남편이에요.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아직도 행방불명이라서.............

    402호 어머, 이 사람은!

    502호 왜요? 보셨어요?

    402호 어디서 본듯한데.......글쎄요.

    경찰 (502호에게) 요즘 가출 신고가 매일 폭주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집 못 찾아서 오는 아이들, 집 잃어버린 개들까지, 에.......에취!

    저희는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어요.

    402호 개라고요? 개들이 전부 경찰서에 와있어요?

    502호 아주머니도 개를 잃어버리셨어요? 우리 집도.....에취!

    경찰 아니, 아파트에서 개들을 기르셨다는 말씀입니까? 벌금들 내세요. (딱지를 뗀다)

    502호 어머, 아저씨.......한번만 봐주세요. 전 그래도 최소한 거세는 안했어요. 인간적으로

    길렀다고요.

    402호 경찰 아저씨! 지금 개를 잃어버려서 심란해 죽겠는데 딱지라뇨? 개만 찾아주신다면

    그까짓 딱지는 얼마든지 떼겠어요. 안 그래요?

    502호, 702호, 602호 긍정의 고개를 끄덕인다.

    세사람 동시에 재채기한다. <에취!>


    702호 (402호에게) 그래도 아주머니께서 슈퍼마켓의 진가를 알고 닭들을 양계장으로

    보냈다니 그건 축하를 드립니다.

    경찰 닭들을 길러요? 아파트에서? 신분증좀 주십시오. (딱지를 떼려고 한다)

    402호 이미 다 양계장에 보낸 과거를 가지고 딱지를 떼겠다니, 이런 법이 어딨어요?


    경찰 그럼 양계장에 보냈다는 확인 서류를 이 달 말일까지 제출하십시오.

    402호 (단호히) 저도 경찰이 이 달 말일까지 제 개를 찾아주셨으면 해요.

    502호 전 남편 때문에 개는 포기했어요. 가출한 남편이지만 개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아주머니도 포스터를 한번 이용해보시지 그러세요. (포스터를 준다)

    402호 (받는다) 포스터 참, 잘 만들었네요. 누가 봐도 어디선가 본듯하게 만드셨어요.

    (깃발을 본다) 근데.......아줌마. 그 깃발이 뭐에요? 집집마다 걸렸던데.

    502호 (얼른 402호를 구석으로 잡아끈다) 아니, 아줌마 모르세요? 서울은 노란 깃발,

    경기도는 녹색..........뉴스 안 보시나 봐.

    402호 예........전 안 봐요.

    502호 (경찰이 못 듣게 속삭인다) 안 달면 이거야말로 진짜 벌금이에요.

    경찰 아참! 모두들 노란 깃발은 달았죠?

    702호, 602호, 502호 고개를 끄덕인다.

    402호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경찰 그럼 일단 1차 조사는 여기서 마치고.........에취!

    602호 (경찰에게) 그럼 그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꽃배달이 있어서요.


    경찰 그러시죠. 일단 저희 경찰에서 좀더 조사를 한 후에 다시 소환하겠습니다.

    그 조끼는 증거물로 가지고 가겠으니 벗어주시죠.


    602호 조끼를 벗는다.

    경찰 조끼를 비닐봉지에 넣어 가지고 퇴장한다


    602호 (들고 왔던 조화를 가지고 퇴장하려다가 도로 들어와서 702호에게 준다)

    깜박하고 도로 가지고 갈뻔 했군. 도둑은 맞았지만 꽃값은 있겠지?

    702호 (얼떨결에 받는다)

    602호 카드로 계산하면 수수료는 자네가 지불해야 하네.

    702호 내가 언제 이따위 조화를 배달시켰나?

    602호 (버럭) 또 날 모함할 셈이야?

    702호 모함? 이봐, 자네, 순순히 자백하는 게 어떻겠나?

    602호 뭘 자백해? 덜 떨어진 소리 그만하고 빨리 꽃값이나 내놔! 카드는 안 받겠네.

    702호 이거 미치겠군. 약 먹게. 약 먹어! 응?

    인생을 그따위로 사니까 마누라가 도망을 안 가나?

    602호 뭐? 자네 지금 말 다했나? 내 인생이 어떻다는 거야?

    702호 몰라서 물어? 어디 훔칠 물건이 없어서 친구 껄 훔치나? 그래도 고맙네!

    다행히 내 마누라가 아닌 물건을 훔쳐가서!

    602호 (702호의 멱살을 잡는다) 이 인간이! 야! 너 말 다했어?

    702호 오호! 이젠 폭력까지?

    602호 702호를 주먹으로 세게 친다.

    702호 뒤로 넘어졌다가 벌떡 일어나 602호에게 달려든다.

    502호 악!

    402호 악!

    무대는 지금부터 잠시 아수라장이다.

    602호와 702호는 서로 주먹질을 하고 싸운다.

    싸우다가 화분을 떨어뜨리고 꽃이 바닥에 떨어진다.

    502호와 402호는 소리를 지르면서 이리저리 뛰면서 구경한다.

    602호와 702호는 <이 배신자> <자백해> <꽃값이나 내> <도둑놈>하면서

    그 싸우는 강도가 쎄진다. 두사람 싸우면서 꽃을 밟는다.

    502호와 402호는 말릴 생각 않고 이리저리 소리지르면서 도망 다닌다.

    602호와 702호 어느 순간에 주먹질하면서 재채기하기 시작한다.

    구경하던 502호와 402호도 재채기를 한다.

    702호 (잠시 싸움 멈추고) 에취! 에취!.........빨리 자백하라고! 에!.........취!

    602호 (숨 몰아쉬며) 자백 좋아하시네? 꽃값이나 내놔!

    502호 에취! 에취!......이웃끼리 이게 뭐라는 짓......에취!....에요?

    402호 그래요. 그만들 하세요. 가뜩이나 여러 가지로 심란한 일도 많은데.......에.....에취!

    702호 자백해! 에취!

    602호 꽃값이나 내놔! 너같은 인간은 상종하고 싶지않........에취!

    702호 (602호에게 다시 달려들며) 에취!

    602호 (702호에게 달려들며) 에취! 에취!

    502호 (두사람을 말리며) 에취! 에취!

    402호 (두사람을 말리며) 에취! 에......취!

    재채기하면서 싸우는 702호와 602호.

    재채기하면서 702호와 602호를 말리는 502호와 402호.

    무대 어느 순간에 암전.

    사이.

    무대 밝아진다.

    진열대에는 물건들이 들어와 있고 노란 깃발이 꽂혀 있다.

    702호 다른 옷차림으로 계산대에 앉아있다.

    502호 402호가 한사람씩 등장한다.

    진열대로 가서 각자 물건들을 고른다.

    서로 물건들을 고르다가 부딪히기도 한다.

    한 사람씩 계산대 앞에 일렬로 선다.


    502호 (바구니를 계산대 앞에 놓는다) 에.......에취!

    702호 (502호를 본다) 당신 철들었군. 우리 집에서 물건을 사면서도 계산을........

    (502호를 찬찬히 다시 본다) 이거 죄송합니다.......에취!

    502호 괜찮아요. 오늘 벌써 다섯번짼걸요 뭐. 어디 한두번 겪는 일인가요.

    702호 (계산대 두들기면서) 에취! 에취!

    502호 (돈을 주면서) 에취! 에취!

    502호 퇴장하고 402호 물건을 계산대에 놓는다.

    702호 (계산대를 두들기며) 에취! 에취!

    402호 (돈을 주면서) 에취! 에취!

    402호 물건을 들고 에취! 에취! 하면서 퇴장하려는데

    노란 국화 화분을 들고 등장하던 602호와 마주친다.

    402호 (앙칼지게) 일찍 들어오세요.

    602호 그러지.

    402호 퇴장한다.

    702호 602호 가까이 온다.

    702호 저 여자가 자네 부인이었나?

    602호 글쎄.......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게 다 붕괴됐는데. (노란 국화를 702호에게 준다)

    702호 난 꽃배달 시킨 적 없네.

    602호 알어.........자네가 전원에 내려가는 걸 포기했다고 해서 내 가지고 왔네.

    702호 그래? 고맙군. 자네는 옛날 내 친구에 비하면 정말 신사야.

    602호 옛날 친구라니?

    702호 같이 21세기 스포츠쎈타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집 물건을 홀라당

    털어갔지뭔가.

    602호 그래? 자넨 나랑 비슷한 경험이 있군. 내 옛날 친구도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글쎄,

    나더러 도둑이라지 뭔가? 기가 막혀서!

    702호와 602호 서로 얼굴을 쳐다본다.

    사이.

    602호 그 친구가 자네 아니지?

    702호 자네도 그 친구 아니지?

    702호와 602호 서로 고개를 끄덕인다.

    602호 자네 요즘 알레르기 어떤가?

    702호 점점 심해져. 하루에 약을 다섯 알씩 먹는데도 말이야.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먹는다)

    602호 요즘은 집에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702호 아예 안 들어가. 마누라 얼굴 본지 꽤 됐네. 마누라도 여길 못 찾으니 오지도 못하고.

    살맛이 안 나네.

    602호 살맛? 별 이상한 소리를 다하는군. 뭐 어떤가. 사회적 현상인걸.

    이제 우리 부부는 서로 남의 집에 가서 자고 들어와도 이해하네.

    702호 그래?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군.

    602호 TV에서는 모든 일은 잘되고 있다고 하더군.

    702호 그래? 그럼 그렇겠지 뭐.......

    (생각하며) 근데말이야난 왜 이렇게 자꾸 어딘가에 가고 싶은지 모르겠어.

    가슴이 자꾸 답답해.

    602호 여보게, 내가 사는 곳이 천국이지 생각하게. 나무처럼 뿌리를 내려보라고.

    어딜 가야 다 그게 그거야, 별 수 없어.

    702호 (끄덕거리며) 그렇겠지?

    602호 그럼!.......

    702호 그런데도 말이야, 난..........에취!

    602호 뭐가? 에취?

    702호 에취!

    두 사람 관객을 향해 깃발처럼 서있다.

    두사람 동시에 <에취! 에취!> 한다.

    무대 서서히 암전 된다.
    이향희

    이향희

    1965년 서울 출생

    서울예전문예창작과 졸업

    현 KBS신세대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작가

  • 이윤택(극작가·연출가)

    예년에 비해 다양한 작품성향들이 펼쳐졌다.1차 심사를 거친 7편의 작품들은 모두 달랐고 나름대로 독창적 세계를 드러내고 있었다.이제 우리의 희곡문법도 바뀌기 시작하는구나!하는 흥분과 기대.평자를 긴장시키 고 한편의 선택을 고민하게 했음을 미리 밝힌다.

    「희망」「당동만 귀신이야기」「죽음」「낚시론」「빠알갛고 동그란 모자」 모두 공연 가능한 가작들이다.

    결국 분단분제를 블랙유머로 뒤집어 버린 「공후인」과 산업화문제를 치 밀한 계산으로 알레고리화한 「알레르기 알레고리」 두편이 최종대상으로 남았다.두편 다 우리 극문학의 상투적 엄숙주의와 개인사적 요설성을 극복했다는 점,인간과 세계에 대한 객관적 통찰의 구조로 형상화해냈다는 점,구체성있는 문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알레르기 알레고리」를 당선작으로 미는 것은 좀 더 안정된 역량을 선택하는 평자의 생리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 이향희

    이향희

    1965년 서울 출생

    서울예전문예창작과 졸업

    현 KBS신세대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작가

    361-0334에서 연락이 왔다. 여의도동 18번지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낮에는 영상, 저녁은 영하의 날씨가 가슴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날이었다. 달러가 1500원인 때였고, 기호2번이 대통령으로 당선 된 날이었다. 바람이 3전 4기로 불어왔다. 바람인가 싶더니 이내, 햇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지나가는 사람들의 팔 다리에 박자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4956은 부재중이었고 0113은 먼저 집으로 갔다. 그러나 집에 오니 U2가 있었고 핑크프로이드가 있었다. 화초들이 물을 먹고 있었고 빔 벤더스의 포스터가 삐딱하게 걸려 있었다. 방바닥을 혹성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헤메고 있는 개미도 보였다. 밤인데도 창문 너머 구름이 선명히 보였다. 잠깐, 우리 집에서도 별이 보였나! 어? 창틀에 먼지가 너무 많네. 무엇보다도 평소 무심히 지나치던 사물들을 자세히 보게 해준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이 많다. 서울예전의 은사님이신 윤대성 교수님과 오규원 교수님. 그리고 최하림 선생님, 나의 오랜 싸부 4679, 안부나 형식하고는 오래전에 헤어진 나에게 언제나 따뜻하기만 한 우리 식구들, KBS 신세대보고 식구들과 친구들. 특히 지우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같이 화장실 안갈래? 나의 91년형 엑셀도 한마디 할꺼다. <서울 추! 기름 없이도 한 삼개월 갈 것 같지 않니?> 나란히 서있던 엘란트라 왈, <아니야! 한 일년은 가> 동아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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