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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인간을 파괴했을까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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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가 인간을 파괴했을까 : 영화 <바빌론>의 관점에서



    시작부터 코끼리의 배설물을 쏟아내는 영화 <바빌론>(2023)은 그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의 난잡한 난교파티와 영화 중반부 '교양 떠는' 사업가들의 연회 사이의 간극만큼, 코끼리의 항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드니 팔머의 트럼펫을 자주 비춰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트럼펫의 깊고 어두운 금관이 인간의 이성을 창조하는 굴이라면, 코끼리의 항문은 근원적인 욕망을 나타낸다. 욕망과 이성이 밀고 당기기를 하는 북새통 중에 쉴 새 없이 두드려대는 타악기와 관악기의 행진곡이 어울리지 않는 두 이미지를 바느질하며 통일성을 부여하듯,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특히 주목하는 부분도 바로 ‘소리’의 존재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바빌론>은 할리우드의 역사를 담고 있는 메타 무비다.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처음 극장에 놓은 지 고작 30년이 지난 1920년대 즈음, 본격적인 무성영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영화는 하나의 실험을 벗어나 산업으로 그 가능성이 확장될 수 있음이 발견된다. 이제 걸음마를 뗀 영화 산업은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게 일상다반사라, 극 중에서 묘사된 것처럼 처음 할리우드에 발을 디딘 영화인들은 그야말로 야생의 산업 현장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걸핏하면 망가지는 필름 카메라와 조명이라곤 조악한 아크 등과 한낮의 태양뿐인 상황에서, 전문적인 분업이 돼 있지도 않다. 닥치는 대로 멱살 잡아 움켜쥐면 그놈이 곧 책임자가 되는 시스템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영화 시장의 무한한 가능성을 선점하려고 햄버거를 찍어내듯 미친 듯이 쇼트를 생산해내기 일쑤였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필름에 소리를 입힐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영화 촬영에서 중요한 건 당연히 배우의 연기뿐이었다. 말로 설명하지 않기에 연극처럼 과장된 연기를 하면서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의 미묘한 미세표정을 표현해내야만 영화가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 시절 할리우드는 인간을 소모품처럼 쓰면서도 인간 그 자체가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곧이어 닥쳐온 유성영화의 시기에서 넬리와 잭을 조금씩 영화계의 변두리로 밀어낸 '소리'의 탄생은 영화를 점점 더 이성의 영역으로 몰아가면서 그 안에서 일하던 인간적인 그 모든 것들을 도태시키기 시작한다.

    영화 <바빌론>에서 소리는 온갖 쾌락을 좇는 인물들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로, 우선 시드니 팔머의 트럼펫이 상징하는 ‘음악’들은 처음에는 영화판 파티에서 흥이나 돋우는 정도로 쓰였지만 유성영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조악한 음향 기술 덕분에 잡음 하나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넬리의 스튜디오 촬영 신은 소리에 지배당한 배우들이 제 역량을 제한받는 모습을, 종래엔 방음 스튜디오의 열기를 이기지 못한 채 질식사한 촬영 감독의 모습을 통해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는 모습을 연출해 낸다. 엉망진창이었던 촬영장이 점차 질서가 잡힌 스튜디오로 옮겨가듯이, 소리 역시 질서를 가진 순간 교양이 되고, 소리의 또 다른 형태인 '말'에도 규칙이 부여되면 예의나 규범 같은 일종의 틀이 된다. 얼굴로 모든 걸 말하던 구시대의 넬리는 소리가 중요해진 세상에서 점점 자리를 잃으며 훗날 매니의 배려로 '교양 넘치는' 사교모임에 나가 발음을 교정받거나 예의 바른 척을 강요받지만, 재밌지도 않은데 예의상 하는 농담, 상대를 무시하기 위한 교양, 점잖은 척 엉덩이에 손을 뻗는 신사 같은 꼴사나운 꼴을 보고선 마침내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온 바닥에 구토를 쏟는다.

    욕망의 세계에서 태어난 한 배우가 이성의 세계 속에서 몰락하는 과정은, 특히 잭 콘래드를 통해서 더 생생하게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영화를 찍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광기 어린 촬영장에서 가짜 소품이 즐비한 스튜디오로 옮겨가 단체로 우스꽝스러운 비옷을 입고 엉덩이를 씰룩대야 하는 영화를 찍거나 혹은 남들이 다 거절한 삼류 영화에 억지로 캐스팅되는 상황에서, 그에게 결정타를 날린 건 그의 스타일대로 '사랑해'라는 대사를 남발하며 마무리 지은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웃는 장면이었다.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해야 하는 '소리의 시대'에서 그의 본능적이고 직설적인 화법과 연기는 더이상 관객들에게 감흥을 주지 못하고 심지어 경멸의 대상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인간에게 옳은 세계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욕망을 탐닉하던 시대가 절멸하고 남은 것은 뭘까. 할리우드에는 이제 서로의 수상한 의중을 몇 번이나 돌려보면서 간신히 파악하는 위선의 세계와 음욕과 뒤틀린 욕망이 똬리를 튼 제임스 맥케이의 하수구가 LA 변두리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뿐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을 보면서 우리는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는 모습과 그 과정을 들여다보게 되지만 실은 소리의 인간 파괴는 <바빌론>에만 국한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소리는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을 파괴하고 있으며, 그 영화적 표현은 단순한 스피커의 울림을 넘어선, 복잡한 메커니즘마저 가지고 있다.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는 방법 1 : 영화적 장치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인간을 파괴하는 소리’를 추적하기 전에, 우리는 영화 속에서의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먼저 영화의 음악과 음향은 내재(內在)와 외재(外在)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화의 인물들이나 극 중 사물에 의해 발생되는 소리가 극 안에서도 공유되어 내러티브의 일환이 되고 관객도 청취하게 된다면 그것은 내재 음악으로서 다이제틱(Diegetic) 음악이라고 한다. 반면에, 영화의 OST나 효과음같이 관객들에게는 들리지만 극 중 인물들이나 극의 공간 속에서는 재생되지 않는 가상의 음악은 외재 음악으로서 논-다이제틱(Non-diegetic) 음악이 된다. 영화가 다양한 장소의 편집적 작용으로 몽타주를 이루듯이 음악들은 내재와 외재의 층위를 오가면서 편집되며, 영화 몽타주가 행하지 못하는 숏과 숏을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의 소리는 관객과 인물들에게 차별적으로 부여되는 그 속성으로 인해 더러 서스펜스의 성질을 띤다.

    가령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죠스>(1975)를 생각해보자. 튜바의 굵직한 소리가 반복되는 존 윌리암스의 메인 타이틀 곡이 배경에 깔리는데도 스크린의 인물들은 섬찟한 삼각형의 상어 지느러미를 등지고 평화롭게 수영을 하거나 카약을 탄다. 이때 배경음은 명백히 관객들에게만 들릴 뿐이고 내러티브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극 중 인물들과 관객에게 주어진 정보의 차이처럼 배경음 또한 극 중 인물과 관객에게 차별적으로 청취 되면서 서스펜스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2003)에서 은신처에 숨은 스필만이 건반에 손을 대지 않고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어떨까. 쇼팽의 ‘Andante Spianato And Grand Polonaise Brillante Op.22’가 스필만의 손가락을 따라 울려 퍼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귀에만 들릴 뿐이며 스필만에게는 상상으로, 극 중에서는 무음으로 인식된다. 음악의 진원이 내러티브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취의 대상은 외재해있을 때 이를 ‘메타-다이제틱(Meta-diegetic)’ 음악이라고 하며, <피아니스트>의 경우에는 서스펜스의 기능도 수행한다. 스필만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가 은신처가 발각된 전적이 있고, 나치의 경찰서 앞에서 어떤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할 텐데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는 셈이므로.

    영화 속 인물에게 ‘죽음의 소리’를 몰고 오는 경우라던가, 혹은 내러티브의 인과율에 따라 ‘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놓인 경우라던가, 두 경우 모두 소리가 직간접적으로 인물의 위험과 관련돼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면, 소리가 인물에게 직접적인 위해는 되지 않지만 인물의 파괴를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2014)에서 OST ‘Caravan’의 도입부 빠른 템포로 연주되는 드럼 심벌 연주는 주인공 앤드류의 파괴를 종용하는 시그널이라고 할 수 있다. 플레쳐 교수에게 실컷 욕을 얻어먹은 뒤 홀로 드럼 연주에 매진하다 손가락이 찢어져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도 ‘Caravan’의 도입부가 변주되어 흘러나오는데, 이때 연주 음악은 내러티브에 개입하지 않는 외부의 배경음으로 흘러나옴과 동시에 앤드류가 드럼 스틱을 쥘 때는 극 내부의 사운드로 극 중에 빨려 들어가기도 하는, ‘엠비-다이제틱(Ambi-diegetic)’ 음악으로서 플롯을 관통하며 인물을 몰아세우기도 하고 디제시스로 편입되어 인물과 상호작용하는 내러티브 음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피 튀기는 앤드류의 드럼 연습을 본 관객들은 시각 이미지와 청각 정보의 화학적 융합에 따라 이제 빠른 드럼 심벌 소리만 들려도 앤드류에게 위험 내지는 염려를 느낀다. 그리고 앤드류는 관객들의 우려대로 자신의 드럼 파트에 몰입한 나머지 플레쳐 교수와 함께하는 공연 당일 날 교통사고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고서도 무대에 오르는 기행을 보여준다. 물론 이때 앤드류가 연주하는 곡 역시 재빠른 드럼 심벌 소리와 굵고 중후한 콘트라베이스가 어우러진 전주의 ‘Caravan’이다.

    이처럼 영화에서 소리는 인물의 파괴를 암시하는 역할을 하며, 때로는 그것 자체가 목적으로 작용-특히 음악 영화에서-하면서 파괴를 종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위험한 진동’은 나아가 아예 그 자체가 위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는 방법 2 : 내러티브에 의해서



    영화 이미지가 주가 되고 음향이 부수적으로 인물의 위험을 거들거나 안내하는 게 다소 싱겁게 느껴진다면 좀 더 영화에 깊숙이 관여하는 소리도 발견할 수 있다. 소리가 직접 인간을 파괴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배우이자 감독인 존 크래신스키의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 시리즈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소리가 가지는 위협이란 평범한 서스펜스 물에 국한했을 때 숨어있는 사람이 내는 급작스러운 고함이나 잘못 밟은 물건의 시끄러운 소리 정도겠으나,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는 어떤 수단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외계생명체의 초능력 수준의 청각이 문제가 된다. 이 경우에는 일반적인 영화에서 평범한 소음으로 다뤄질 만한 정도의 소리도 충분히 작중인물들에게 위험으로 다가오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 인물들은 작은 소리 때문에 외계 생명체에게 끔찍하게 살해되거나 난관에 부닥치는 등 소리의 강도 높은 위협에 직접 노출된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큐브>(1999)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육면체의 살인 공간에 갇힌 주인공들 또한 소리를 내면 트랩이 작동하는 방을 지나면서 ‘소리’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주인공들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는 인물과 함께하며,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고함이나 비명을 통제하지 못하는 자폐인의 돌발 행동 때문에 ‘소리의 방’에서 갈등을 겪는데, 트랩을 지나지 못하고 파괴되는 인간은 묘사되지 않지만, 불화의 씨앗이 증폭돼 인물들이 서로에게 더 적개심을 갖게 된다.

    이처럼 내러티브의 요소로써 소리 자체가 원인이 되어 영화 속 인물이 사망 혹은 부상을 입는 경우는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적극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직접 공격받는 것은 아니지만 <바빌론>에서 방음 부스의 고열, 저산소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음향 감독의 모습도 소리라는 매개 대상이 내러티브에 개입해 그 죽음에 상당한 관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한 편, 앞서 영화적 장치에 의한 암시와 유사하게 ‘인간을 파괴하는 소리’로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인간을 파괴로 내모는 현장을 청각적으로 부각하는 방법도 있다. <라라랜드>(2016)에서 주인공들이 무명 시절에 겪게 되는 설움들은 환상적인 OST의 뮤지컬 신과는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소음들로 덧칠된다. 이를테면 오프닝 시퀀스에서 고속도로에서 단체로 군무를 추던 사람들이 일제히 차량으로 돌아간 뒤 세바스찬이 힘차게 눌러대는 경적 소리, 세바스찬이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Mia & Sebastian's Theme’를 피아노로 연주한 뒤에 곧장 사장에게 듣게 되는 “넌 해고야”라는 대사가 꼭 그러하다. 뮤지컬 신에서 논-다이제틱 음악으로 외경에 위치한 음악은 관객을 주인공들과 함께 환상으로 한껏 밀어 넣다가 뮤지컬 신이 종료되는 순간, 현실적인 소음과 함께 주인공을 삶의 구질구질한 면으로 안내하면서 비극을 더욱더 증강한다. 이는 죽음이나 심각한 부상 같은 극단적인 파괴에 이르지는 않지만 극 중의 인물들이 가질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나 희망을 꺾어버리는 연출을 가함으로써 소음으로 전환된 소리가 인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는 방법 3 : 이성적 산물에 의해서



    소리의 배치에 따른 효과도 좋고, 소리가 처음부터 내러티브의 요소로써 파괴의 조건이 되는 것도 좋지만,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기 쉬운 가장 흔한 형태는 역시 직접 전달되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의 전달과 같은 이성적 사고의 착오, 혹은 교란은 인간을 쉽게 나락으로 보내버린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이성적 사고가 담긴 소리란 우리 인간이 말로 자아내는 언어가 대부분이며, <이미테이션 게임>(2014)이나 <미드웨이>(2019)와 같이 암호를 다루는 영화에서 암호화된 정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사람의 입으로 전해진다.

    언어가 인간을 직접 파괴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라고 한다면, 그 선두에는 응당 욕설 또는 인신공격과 같은 원초적인 언어가 있을 것이다. 영화가 수행하는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전지적 시점의 공유’로 우리는 영화가 표현하는 내밀한 영역을 항시 들여다본다. 또한, 영화의 가장 기초적인 내러티브 전달 수단이자 청각 요소인 ‘대사’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거나 언급되어선 안 될 문제들도 어떤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채 관객에게 쏟아내곤 하는데, 특히 <위플래쉬>에서 플레쳐 교수가 학생들에게 쏟아내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그 거친 욕설들은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지 않는 관객들조차도 불편함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극 중 플레쳐 교수의 욕설은 인물을 자살로 몰아붙이기도 하며, 주인공 앤드류의 심리를 짓이기는 결정적인 역할도 한다. 원초적이고 단순하지만, 도가 지나친 욕설은 분명히 인간을 파괴하는 소리임은 틀림없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1987)을 들여다봐도 신병을 훈육하며 마주치는 해병마다 ‘구더기’라고 욕하는 하트만 상사를 발견할 수 있다. 플레쳐 교수가 울고 갈 실력으로 개인 신상까지 적나라하게 비난한 까닭에 하트만 상사는 결국 부적응자인 로렌스 이병에게 총을 맞게 된다. 물론 로렌스 이병 자신도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것을 인지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하트만 상사의 죽음, 그리고 하트만 상사의 인간 이하 취급에 결국 살인과 자살을 택한 로렌스 이병 그 자신의 상황도 모두 언어폭력이라는 소리가 인간을 파괴한 직접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인간의 음성이 직접 인간 파괴에 관여하는 장은, 개인과 개인의 모욕에서도 분명 큰 힘을 발휘하지만, 개인을 넘어 사회적 수단이 가미될 때 더 파급력을 지닌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다는 소식이 퍼지는 초반부 스필만의 가족은 전쟁의 위기에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국의 선전포고 방송을 듣고 크게 안심하며 저녁 성찬까지 즐기지만, 그다음 숏은 점령당한 폴란드의 대로를 나치 군대가 행진하고 스필만과 그의 가족들이 우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소리가 전달하려는 의도와 현실이 상반될 때 인간은 또 한 번 파괴된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내부자들>(2015)에서 안상구가 미래자동차의 비자금 파일 폭로에 실패하고 곧이어 풀려난 이강희가 “깡패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매우 개탄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진실이 발언자의 사회적 위치와 발화의 방법에 따라 전도되는 현장이 드러난다. 언어는 그것이 아무리 명백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해도 언어를 활용하는 자의 활용법,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선입견이나 상식 등에 가로막혀 무용한 지경에 이를 때가 있다. 진실과 거짓을 다투는 장에서 소리는 청취자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더라도 ‘말(Speech) 수용체’인 사회적 협의로 청취자를 간접 파괴할 수도 있다.

    결국, 지극히 저속하고 원초적인 것, 사실이지만 청자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거나 행동의 오판을 야기하는 것,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청자를 직간접적으로 오도하고 계층의 벽을 세우는 것 등은 모두 인간의 말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며, 이들은 어떤 방향이라도 효과적으로 인간을 부순다. 이런 관점에서 데이미언 셔젤 감독 또한 소리 중에서 특히 인간이 내뱉는 말이 가장 위험하고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것을 <바빌론>을 통해 강조하기도 한다.

    커리어가 거의 끝장난 잭 콘래드가 비평가 엘리노어를 찾아가 자신을 비난한 칼럼에 대해 따지고 드는 장면에서 엘리노어는 그녀를 바퀴벌레라 욕하는 잭 콘래드에게 나지막이 일러둔다. 집이 불타면 인간은 모두 죽고 결국 살아남는 것은 바퀴벌레라고. 불이 나면 깊고 어두운 굴속을 찾아 영원히 살아남을 바퀴벌레의 집요함을 일깨우던 그녀는 배우도 비평가도, 잭 콘래드와 나눈 대화조차도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라고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음표를 뽑아내는 시드니 팔머의 트럼펫 속 깊은 금관의 어둠과 엘리노어의 목젖 뒤로 넘어가는 어두운 굴속의 말은 이성의 늪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한 사람의 가치를 아득히 넘어서는 인간의 이성이란 존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이성의 언어가 파괴할 무수한 인간들을 소모하기 위해서 말이다.



    ‘욕망의 소리’는 있다 : 영화 속 인물들이 소리와 대적하는 이유



    소리가 인간을 파괴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시각 이미지 못지않게 청각 효과 또한 중요하게 다루는 영화가 인간을 파괴할 소리를 창출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탁월한 음악 기교와는 별개로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애써서 소리로 파괴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소리에 파괴될 운명처럼 묘사된다.

    먼저 <위플래쉬>의 주인공 앤드류가 셰이퍼 음악 학교에 진학한 건 최고의 드러머가 되겠다는 ‘편안한 말 한마디’였지만, 플레쳐 교수가 그에게 전수해 준 ‘찰리 파커의 길’은 핏물이 낭자한 드럼 스틱과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주의가 결합된 매우 고된 길이었다. 분명 앤드류는 처음엔 플레쳐 교수의 가학적인 이끌림에 끌려가는 처지였으나 극이 진행될수록 그 자신이 오히려 완벽주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라라랜드>의 주인공 세바스찬과 미아 역시 마찬가지다. 세바스찬은 프로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미아는 배우로서 성공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결국 두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서로의 사랑을 지켜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랑을 끝까지 지킬 수도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이상향을 위해 달리자는 무언의 합의를 이룬다.

    즉 앤드류는 드럼 소리에, 세바스찬은 피아노 소리에, 그리고 미아는 배우의 대사라는 소리에 자신의 모든 걸 걸거나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한 가지 문제를 과감히 포기해버린다. 이때 그들을 파괴로 내몬 건 소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소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들 자의로 이루어진 결정들이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작품 중에서 자의가 아님에도 소리의 발전에 따라 고사 되어가는 인물들은 <바빌론>의 주인공들뿐이다. 무성영화의 시대에 태어나 유성영화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배우들이 자연스럽게 몰락하는 가운데, 특히 잭 콘래드가 엘리노어와 말다툼을 하는 그 장면에서 ‘시대’라고 하는, 무한히 증식하는 소리의 물결이 언제든지 인간을 파괴하고 그걸 다시 반복할 수 있다고 하는 부분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놓고 보면 더 그럴싸하게 보인다. 애써서 욕을 듣거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도, 영화 속 소리의 위협적인 칼날이 몰아치지 않아도, 인간은 결국 이성을 위해 자기를 파멸로 몰아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궁극적으로 남기는 질문은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는 현장을 중계하는 것이라기보다, ‘왜 소리에 파괴되면서까지 그렇게 하느냐’에 있다. 피를 흘리고 아름다운 인생마저 내다 버린 채 추구한 결과물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런데 묘하게도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그 피투성이 ‘소리의 결과물’들은 왠지 감동을 자아낸다. 어째서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에서 주인공 메기는 나이 서른한 살에 권투를 배우겠다고 체육관 관장 프랭키에게 온다. 당연히 프로 복서를 키우는 노련한 코치인 프랭키의 눈에 메기의 꿈은 허황돼 보인다. 당장 시작해도 연습에 4년, 서른 중반이 되어 프로 무대에 서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러나 관장의 무관심에도 일 년이나 꿋꿋이 버틴 메기는 어느 날 여전히 냉담하게 구는 프랭키에게 말한다. 권투를 하는 게 너무 좋다고. 엉망진창인 인생에서 그 자신에게 권투마저 빼버린다면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메기는 이상적인 소리를 하지만 프랭키는 메기에게 그만 정신 차리라는 현실적인 소리를 한다. 프랭키의 조언이 실로 옳은 듯도 보이고, 메기는 손대지 말아야 할 위험한 꿈을 꾸는 것도 같다. 그러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자기만의 욕망을 욕망한다면, 그 욕망이 간단한 욕구가 아니라 이성의 영역에 놓여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성의 산물일까, 욕망의 산물일까. 소리가 지배하는 잃어버린 욕망의 세계에서 이 문제를 판별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영화 <퍼스트 맨>(2018)의 후반부 닐 암스트롱이 달착륙선에서 내리는 장면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한 인간을 파괴로 내모는 소리로부터 격리된 이 상황에 이르기까지, 닐 암스트롱은 인류의 모든 지성이 집약된 새턴-5 로켓과 아폴로 11호에만 의존한 게 아니다. 그 자신이 달에 발을 딛겠다는 자기만의 욕망을 기꺼이 욕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험 도중 위험에 빠지고 동료가 사고로 죽는 끔찍한 상황을 지나오면서도, 가족의 반대와 딸의 죽음, 여론의 부정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말이다. 자신의 의지와 스스로 일군 욕망을 욕망하려는 마음만이 충만할 때, 비로소 소리는 숨죽여 한 인간이 ‘고요의 바다’에 내딛는 발자국을 지켜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성의 잡음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욕망을 잃지 않을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욕망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코끼리의 항문이나 세속적인 욕구에서 그 근원을 찾지 않아도, 트럼펫의 깊은 금관 속에도 지극히 인간다운 욕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세계가 속삭이는 이성이 아니라 자기가 암송하는 이성으로서의 욕망. 우리는 바로 그런 욕망을 탐닉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혹시나 자기 욕망을 찾고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작품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피날레를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세바스찬과 미아, 앤드류와 매니까지 피투성이가 되도록 소리가 집요하게 괴롭혔던 그의 모든 영화에 나온 주인공들의 마지막 표정은, 그 삶이 어떤 여정을 지나왔든지 간에 언제나 미소지으며 끝난다는 것을 말이다.
    민경민

    민경민

    1989년 대구 출생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사람이 나쁜가, 아니면 상황이 나쁜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의 특별한 점이라고 한다면 평범한 재난영화가 보여주는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는 '재난을 책임질 컨트롤 타워의 부재', 혹은 '지배 권력과 평범한 시민과의 사투', '재난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소외된 힘없는 서민들' 같은 요소가 묘사되지 않는다. 단지 거대한 지각 해일을 스크린 가득 채우면서 '이 세상은 뭔가를 논의할 새도 없이 끝장났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해 버린 채 클리셰와 함께 재난을 설명할 연구원들의 분투까지 한꺼번에 매몰해 버린다.

    완전히 파괴되다 못해 재난영화의 고전 서사까지 철저하게 말살해 버린 이 영화 속에 남은 것은 우연히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 한 채와 그 주변의 사람들뿐이다.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살아남은 선량한 시민들이 악당과 대치하는 그림이 있어야 할 텐데, 이 세계관 속에서는 그럴만한 악당마저도 모조리 지하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래서 이 영화엔 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런 덕분인지 극의 초반부는 이타적인 사람들과 공생의 가치가 생명력을 지니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생태계에 균열이 생기고 만다. 다시 말해, 대재앙으로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았던 부정과 악랄한 무엇인가가 그저 선량한 시민들이었던 이들의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1971년 스탠퍼드 대학의 사회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가 실험한 '감옥 실험'에서도 참가자들은 모두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설정한 공간에서 교도관과 죄수로 역할을 부여받고 갇히게 되자 그들은 정말로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 교도관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교도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정말로 죄수와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다면성이 선천적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에 따라 후천적으로 드러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을 부추기는 이 실험에서 논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원래 실험자들은 교도관도, 죄수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면 이 작품이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 '모호함'에 있다는 것도 보인다. 극한의 환경에서 인간의 면면을 다루는 재난영화들은 인간의 선악과 같은 명확한 특성을 특정 캐릭터에 부여함으로써 캐릭터가 서로 대결을 펼치는 그림을 그리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인간의 다면성을 캐릭터 하나하나마다 부여하지 않는다. 누구나 악할 수도 있고, 누구나 선할 수도 있고, 또한 누구나 어리석을 수 있고 또한 누구나 총명할 수 있다. 단지 그 모든 인간성은 상황이 바뀔 때마다 적절한 가면을 쓰고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만 보더라도 그들은 처음에 외부 생존자들과 딱히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흔쾌히 집을 내어줄 만큼 이타적이지는 않지만 차마 사람들을 내치지는 못할 선량함을 가진 이들은 재난이 닥치기 전에는 부나 권력의 척도에서 한참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대재난이 닥쳐온 뒤에 멀쩡한 황궁 아파트만이 가장 가치 있는 공간이 되자 그들은 한순간에 가장 부유한 집단에 소속된 기득권이 되는 경험을 한다.

    평소 같았으면 소시민의 곁에서 함께 지탄했을 집단이기주의나 선민의식 같은 생각도 그들이 주도권을 잡을 위치에 서는 순간 그들 자신의 것이 된다.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다가도 기회만 주면 언제든 '간수'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는 봉준호식 고발과 맞물려 아파트 주민들은 더이상 선량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파트 주민들이 행하는 비윤리적 행태에 의문을 제기하고 목소리를 내는 소수 주민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악랄해진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은 마치 자동차를 처음 운전해 보는 사람처럼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우위에 섰다는 기분에 감정적으로 쏟아지는 표정들을 풀어내지만 그걸 지키고 유지하는 데는 서툰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려고 대리인을 내세우거나 책임을 유예하는데 항상 치밀한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데 반해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문제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감정이 상하면 상한 대로 자기감정과 탐욕만을 표출할 뿐이다.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할 만큼 오랜 세월 다듬어진 그 교활함을 하루아침에 이양받은 사람들이 왼손, 오른손 다루듯 자유자재로 하는 게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종래엔 주민들을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히고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영탁도 결국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고 주민들 역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 행했던 행위의 결과물이 가족의 죽음과 같은 일로 돌아오자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분열되고 만다.

    끝장난 세계에서도 우열은 생기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우위를 차지한다. 문제는 그 지배의 권좌, ‘가진 자’라는 기득권의 위치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이 생존이라는 목표를 가지는 순간 누구에게나 열리는 매혹적인 빈자리가 된다는 점이다.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경멸하고 죄라고 여기는 인간 세계의 그 모든 상황 또한 항상 열려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자리를 누군가 차지하고 있지만, 생존이라는 인간의 걸출한 목표는 누구든 그 자리에 사람을 앉힌다. 그게 선량한 사람이었든 태생적으로 악한 사람이었든 간에.

    다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극 중 한결같이 윤리적 태도를 고수하던 명화의 탈출로부터 다음 한 가지를 암시한다. 명화는 황궁 아파트에서 탈출해 결국 다른 생존자 무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살아도 되냐'는 명화의 말에 '살아있으면 사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건물 전체가 넘어져 벽이 바닥이 되고 천장이 벽이 되어 뒤집힌 빌라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벽과 물건의 쓰임새가 완전히 뒤죽박죽인 세계. 명화가 도달한 그 세계는, 온전히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황궁아파트의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미 공간 자체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즉, 인간은 완성된 것을 찾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망가지고 미완성된 세계 속을 완성으로 만들어나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미 완성된 세계가 마련한 자리에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뒤틀리는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목격하지 않았는가. ‘지금의 부족함을 완성으로 만들어가는 긍지를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와 삶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결말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민경민

    민경민

    1989년 대구 출생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김시무 영화평론가

    심사할 때 나름대로 방식이 있다. 응모된 원고들을 꼼꼼하게 읽어본 후 베스트 5를 먼저 선정한 후, 재독하면서 최종 한편을 선정하는 것이다. 영화상 등에서 5배수 후보작을 미리 선정하는 방식에 따른 것이다. 격려의 의미도 있다. ‘캘리포니아 양귀비가 K-휴먼에게 전하는 말’은 요즘 새롭게 화두로 떠오른 포스트휴먼의 관점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와 ‘공기인형’을 분석하고 있어 시의적절했다고 본다. ‘20세기 소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으로 스필버그 감독을 논한 평문도 흥미로웠다. ‘어머니에 겁먹은 소년’이라는 화두로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분석한 글은 독특한 해석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변죽과 딜레탕티즘’이라는 키워드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해부한 글도 전문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리가 인간을 파괴했을까’라는 도발적 제목으로 데이미언 셔젤의 일련의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는 평문은 우선 무엇보다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평자는 소리가 인간을 파괴하는 방법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첫째는 영화적 장치에 의한 것이다. 예컨대 ‘위플래쉬’에서 엠비 다이제틱(Ambi-diegetic) 음악으로 처리된 도입부 OST가 그렇다.

    둘째는 내러티브의 의한 것으로 ‘라라랜드’에서 주인공들의 무명 시절에 현실적인 소음들로 덧칠된 배경음 처리는 OST의 환상적인 뮤지컬과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이성적 산물에 의한 것인데,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쟈켓’에서 폭력적 상사부터 ‘위플래쉬’의 플레쳐 교수에 이르기까지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캐릭터들은 그 단적인 예들이다. 이처럼 평자는 색다른 화두로 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서 듣는 것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 평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 민경민

    민경민

    1989년 대구 출생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7년 무렵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처음 냈던 영화 평론이 심사평에 언급된 뒤,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햇수로는 6년이지만 응모 횟수는 7차례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칠전팔기의 당선 소식이었다. 무도(武道)를 깨우치기 위해 도장을 전전하던 이름 없는 수련생이 마침내 도복을 한 벌 얻어 입는다면, 마치 이 같은 기분이 아닐까.

    물론 나는 신춘문예가 완성을 고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알을 깨고 나온 그 어떤 새라도 고작 발랑거리는 붉은 핏덩이에 불과하니, 앞으로 깃털을 갖춰 멋진 비상도 하려면 알 속에서의 삶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태도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데이미언 셔젤 감독에 관한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특히 ‘위플래쉬’라는 영화를 셀 수 없이 돌려보았다.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드럼 스틱을 휘두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연마한 주법을 꼭 마무리 짓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지 않나. 비록 단 한 곡일지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의 마음처럼, 앞으로의 나의 글쓰기 역시 그런 불굴의 의지를 답습하기 위한 노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이 둔재의 부족한 작품을 두고 고심하느라 고생하셨을 심사위원님, 신춘문예 운영에 동분서주한 모든 분께 다시금 감사 인사를 드린다. 또한, 긴 시간 동안 많은 응원과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준 나의 친구들과 독자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마지막까지 물심양면으로 응원해준 나의 어머니, 가족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작품전문
  • 단평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