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고기, 순댓국, 부속 일체. 악기점 옆 빈대떡집 간판은 언제 봐도 애매했다. 두희가 읽어내지 못하는 악보 같았다. 부속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빈대떡집에서 하는 것이 더 묘했다. 두희는 저도 모르게 보도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누가 지켜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져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대여섯 사람이 건널목 앞에 서 있을 뿐, 딱히 수상쩍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미세 먼지 때문에 원근감이 사라져 낡은 스크린 속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이백만 달러짜리 플루트는 어떤 소리를 내는 걸까. 두희는 잰걸음으로 걸으면서 아까 악기점에서 들은 갖가지 플루트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가격에 놀라 웃음만 지었는데 율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겸연쩍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천만 원은커녕 이백만 원도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그나저나 율은 왜 한 번도 자신의 악기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을까. 두희는 율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음악에는 문외한이고 몸까지 피곤하니 아이가 떠드는 소리가 때론 소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가끔은 아이조차 귀찮아질 때가 있었다.



노래연습장의 바깥 출입문을 열어젖히자 옅은 곰팡내가 지하에서 올라왔다. 계단참에 구정물 같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두희는 벽을 짚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순식간에 어둠이 달아나고 기역 자로 꺾인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두희는 공기청정기의 전원을 켰다. 공기청정기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외투를 벗고 카운터 서랍에서 부증 방지용 토시를 꺼내 손에 끼운 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수술한 지 오 년이 다 되어가지만 몸은 여전히 균형 감각을 놓치곤 했다. 방사선 치료를 포함한 모든 치료 과정을 마치자 두희를 기다리는 건 기억력 쇠퇴와 팔에 생기는 부증이었다. 나빠진 기억력은 누가 짚어주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가기도 했지만 부증은 당장에 드러나는 통증이었다. 치료 초기에, 두희는 아이를 안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달려오기라도 하면 두 팔로 가슴부터 가리게 되었다. 바느질을 할 때도 찌릿찌릿 쏘는 통증이 손끝에서 시작해 어깻죽지로 빠르게 뻗어 나갔다. 주먹을 움켜쥘 수 없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룸의 문을 전부 열어두고 환기를 시켰다. 창고에서 자루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기계처럼 손을 움직이면서 머리로는 악기점에서 본 플루트를 생각했다. 두희는 한 달 전부터 악기점 밖에서 가게 안에 진열된 악기들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율이 영재원에서 만난 한 아이의 이름을 재차 말하고 난 후였다. 율은 로즈골드색 플루트를 가진 아이를 ‘그 악기로 그 정도밖에 연주를 못 한다’고 비난했다. 대체 어떤 소리를 내는 악기일까. 두희는 처음으로 악기가 궁금해졌다. 이름처럼 둥글고 환한 소리가 악기에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 끝에 아이의 플루트가 고장 났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다. 두희는 그길로 아이의 플루트를 챙겨 악기점으로 갔다. 악기들이 진열된 가게 안쪽에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 거리의 가게들 사정이 거의 그런 것처럼 악기점도 한가해 보였다. 대신 배달을 서두르는 오토바이들이 거리에 늘어났다. 한번은 가게 안쪽을 살피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하더니 두희가 여전히 망설이고 있자 벌떡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다가왔다. 두희는 당황한 나머지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두희를 알아보고 남자가 장갑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좀 보라는 듯 그가 몸을 틀어 작업대 위에 널린 것들을 보여주었다. 두희가 무슨 악기냐고 물어보았다. 남자가 색소폰이라고 알려주었다.

“색소폰은 덩치와 소리에 비해 예민한 악기죠. 덜렁대느라 케이스 지퍼가 열린 것도 모르고 들었다가 그냥 바닥에 떨어뜨린 거죠. 우리 색소폰 동호회 총무님 겁니다. 마우스피스며 키 레버며, 다 휘어지고 우그러졌어요.”

두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들고 온 소프트 케이스를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가 케이스를 열어 세 부분으로 분리해놓은 플루트를 꺼냈다.

“소리가 나질 않는대요.” 두희가 말했다.

남자가 플루트 중간 마디에 새겨진 메이커와 숫자를 엄지로 쓱 문질렀다.

“야마하 221, 진짜 오랜만에 보는 모델이네요.”

남자가 능숙하게 관을 조립한 후 마스크를 턱으로 내리고서 플루트를 불었다.

“보세요, 키 하나를 눌렀는데 여러 개가 동시에 움직이죠? 키 아래 패드가 찢어졌거나 키 덮개 조절 나사에 문제가 있어요.”

두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사야 조절하면 되고 패드는 교체하거나 교정하면 되니까, 한 이틀 걸릴 것 같은데요.”

두희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영재원 수업이 다음 주부터 시작되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아이가 영재원 수업에 가야 해서요.”

“영재원요?”

남자가 미간을 모으며 두희를 쳐다보았다.

“연주를 잘하나 보네요?”

“글쎄요, 전 음악은 잘 몰라서요. 그래서 애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도 모르겠고요.”

웃느라 두희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윗니들이 드러났다. 그녀는 정색하듯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물고 나서야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요사이 이런 일이 잦았다.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있고 잠깐 마스크를 벗고 있다는 걸 잊을 때도 있었다. 송곳니가 부러진 자리는 검게 변해 두희가 봐도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율의 동영상이 생각났다.

“사장님은 보면 아시겠죠? 전문가시니까.”

두희는 지금껏 수십 번도 더 되돌려 본 영상을 찾아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허리가 잘록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커트 머리를 한 율이 등장했다. 율은 무대 의상을 직접 골랐고, 수료식의 곡도 알아서 선택했다. 율은 테두리가 번진 둥근 조명을 받으며 연주를 시작했다. 사분의사 박자로 이어지는 도입부부터 곡을 장악했다고 심사위원이 평을 했는데, 두희로서는 그 말의 의미를 대충 이해할 듯하다가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무대 위의 율이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중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은 것처럼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만큼 율이 낯설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도대체 저 아이는 누구인가 싶었다.

“염소의 춤.” 남자가 말했다.

두희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염소가 춤을 추는 내용이라고 율이 말한 뒤로 곡을 들을 때마다 그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리듬이 빨라지면서 불안정하게 튀는 부분에서 폴짝대는 염소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삼 분 사십오 초 동안의 연주가 끝났다. 남자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 곡엔 샤프와 플랫 따위의 임시표가 붙어 쉴 새 없이 호흡을 붙들고 내달려야 하는데, 이런 입문자용 플루트로 이 정도까지 표현한다는 건 분명 특별한 재능인 거죠.”

두희는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으쓱해졌다.

“물론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요.”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다시 아이의 동영상을 재생했다. 실수? 그것에 관해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외우다시피 한 선율이 다시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로즈골드 정도만 되어도 소리는 더 화려하고 풍부했을 겁니다.”

남자는 무슨 뜻인지 아느냐는 듯 마스크 위로 드러난 두희의 눈을 쳐다보았다. 두희는 남자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단지 플루트 하나로 얼마나 화려하고 풍부한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남자가 유리 진열장 쪽으로 가서 플루트 하나를 집어 왔다. 몸체가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악기 재질이 음색을 낳지요. 니켈 재질에 은도금한 플루트부터 실버 플루트, 로즈골드, 도금한 것, 골드 플루트, 플래티넘 플루트까지 다 다르죠. 가격도 천차만별이고요. 좋은 건 이백만 달러가 넘습니다.”

반은 알아듣고 반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두희는 전부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악기가 연주자의 실력에 적합하면 더 좋아요. 이 아이는 당연히 연주용을 사용해야 하고요.”

이번에도 남자는 두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헤드 부분만 실버로 바꿔도 소리는 훨씬 더 좋아질 겁니다. 아니면…….”

금빛 플루트를 진열장에 도로 가져다 놓으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아이 거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델도 있어요.”

두희는 겨우 한 단계 나아진 악기가 얼마나 달라진 소리를 낼지 궁금했다.

“옵션 키 하나가 추가되면서 3옥타브 ‘미’음을 좀 더 쉽게 낼 수 있죠.”

“지금 볼 수 있나요?” 두희가 물었다.

“내일이라도 가져다 둘게요. 그런데 하루에 연습을 얼마나 하고 있어요?”

남자가 율의 플루트를 안쪽 작업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두희는 아이의 연습시간을 일일이 체크하지 않았다. 집안일을 하거나 가게에 나가기 전 잠깐 눈을 붙일 때도 아이의 방에서 플루트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딱 세 시간, 매일 연습만 한다면 이 아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플루티스트가 될 겁니다.’ 플루트 전공자들을 오래 지도한 교수가 했던 말을 남자에게 전했다.

“그렇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시간. 그런데 그게 어렵죠.”

두희의 생각에도 초등학교 5학년이 날마다 세 시간씩 악기를 연습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율은 공부에도 욕심이 많았다.

“영리한 아이일수록 기계적인 반복을 싫어하고 자기 재능에 대해 의심하면서 빨리 싫증을 낼 수도 있으니까요.”

두희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남자의 말을 적었다.

“제가 건망증이 심해서요.”

두희는 아무렇지 않게 건망증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자신을 못마땅해하며 수첩에 악기 모델명과 악기점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가게를 나서다 두희는 고개를 돌리고 우물거리듯 말했다.

“지금 악기보다 좋은 거라면요. 소리만 더 좋다면요. 좋아요, 중고라도.”

“네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가게 문이 닫히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창고에서 음료수 박스를 드는데 예리한 통증이 팔을 관통했다. 두희는 화장실로 가서 거울 앞에 섰다. 타일 벽에 붙여 둔 방향제에서 옅은 코코넛 향이 분사되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부증 방지용 압박 토시를 팔에서 벗겨 냈다. 손끝이 저렸다. 두희는 두 팔을 높이 쳐든 채 후후 숨을 내쉬었다. 어디쯤에서 실수를 했다는 걸까. 동영상을 본 악기점 남자는 율의 작은 실수를 알아차렸다. 두희는 동영상을 다시 봤지만 그 지점을 알아낼 수 없었다.

율이 평범하고 적당히 약게 살아간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무난한 세계. 그 세계에서 숭굴숭굴하고 원만히 살아가기를 두희는 바랐다. 율이 플루트를 처음 만진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지역복지관에서 아동복지단체의 후원을 받아 음악 교실을 개설했는데 최소 인원이 채워지지 않자 학교로 연락을 했다. 복지담당 선생님의 추천을 받은 율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먼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율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빠르게 습득했다.

두희는 아이에게 플루트를 권했다.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고 싫증이라도 나게 되면 한쪽에 치워두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좌식 책상 위에 악보집을 올려놓고 음대생에게 기초를 배웠다. 초견 실력이 뛰어난 율은 금세 재능을 발휘했다. 모든 악기는 복지관을 벗어날 수 없어, 율은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와 상상의 플루트를 만지며 오래 놀았다. 그러던 중, 동네 음악학원에서 십만 원이 안 되는 중고 플루트를 내놓아 사게 되었다. 악기는 낡아 구릿빛을 띠었다. 복지관의 음대생이 율의 재능을 알아보고 따로 시간을 만들어 개인 지도를 해주었다. 율은 집에 오면 지치지도 않고 악기를 만졌다. 하나씩 음을 찾아가며 마디를 완성하고 마침내 두희가 듣기에도 그럴듯한 곡을 만들기도 했다.

3학년을 마칠 무렵 담임 선생님이 주었다면서 율이 영재원 지원서를 가지고 왔다. 두희는 대수롭지 않게 서류를 한쪽에 치워두었다. 영재원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율의 담임 선생이었다. 두희는 집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학교로 담임을 만나러 갔다.

이십 대 후반인 담임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서둘러 가정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녀는 율의 집안 환경을 안타까워했다. 율의 재능에 대해 여러 수식어를 붙여 가며 칭찬을 했다. 그러나 두희는 율의 재능에 대한 담임의 평가가 다소 과장된 것 같았고, 담임이 예상하는 율의 미래는 두희에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두희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나중에 아이가 이도 저도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악기 해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을까요?”

담임은 침착했다. 나중에 중단한다 해도 한번 배운 악기는 아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거라고 말했다. 두희는 영재원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아이들의 가정환경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부족하지 않게 지원받는 아이들 틈에서 율이 괜스레 주눅이 들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두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임의 책상에 놓인 화분을 보았다. 필레아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선생님, 저 식물은 그늘을 좋아해요.” 두희가 화초를 가리켰다.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화상을 입거든요, 그늘진 곳에 두면 아주 작고 흰 꽃을 피울 거예요.”

“그래서 시들했나 봐요.” 담임이 일어나 화분을 그늘에 옮겼다.



일 년 중 날이 가장 맑다는 때. 두희는 낱말 퍼즐을 풀다가 여기서 멈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머지 힌트를 마저 읽어 보았다. 춘분과 곡우 사이에 있는 절기. 두희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오후 네 시가 되면 가게 바깥문을 열어야 했다.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서 낮에 들어오는 손님도 생겼다. 손님이 있든 없든 평일에는 자정까지 가게를 지켜야 했다. 코로나 전에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같이 새벽까지 영업했지만, 지금은 수입이 적어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생을 잘라야 했다. 두희는 룸을 돌아다니며 물티슈로 테이블을 훔쳤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발짝 소리가 들렸다. 누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올지 발소리만으로도 짐작이 갔다. 두희가 일을 시작한 지난해 가을부터 단골처럼 찾아오는 학생들이었다. 가게로 들어선 남자애가 마스크를 내리고는 눈짓으로 인사했다. 어디선가 먼지 냄새가 확 풍겨왔다. 여자애는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았다. 아예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뽀얀 얼굴에 새빨갛게 칠한 입술이 강렬했다. 두희는 마스크 착용을 알리는 안내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자애가 혀를 날름거리고는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지난번에 화장이 좀 진하다고 반농담조로 말했다가 되레 여자애에게 면박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자애는 화장하지 않은 검고 거칠한 두희의 얼굴을 쓱 훑더니 뭘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투로 쏘아붙였다. “아줌마, 화장은 원래 눈에 띄라고 하는 거예요.”

방학에는 사흘에 한 번은 찾아오더니 개학을 하고 나자 일주일에 한 번으로 횟수가 줄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 방에서 쏟아지는 소리가 복도에 고여 웅웅댔다. 여러 번 듣다 보면 저절로 노랫말이 외워졌다. 지난번에는 노랫소리가 한참이나 들리지 않아 뭔가 기계가 잘못되었나, 룸의 작은 창으로 안을 살펴보았다. 노래는 하지 않고 둘은 테이블에 엎드려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여학생이 남학생의 아래턱을 손끝으로 간지럽혔다. 남학생이 꺽꺽대며 웃더니 여학생의 손목에서 팔오금까지 검지와 중지로 살금살금 기어오르다 또 자지러지게 웃었다.

오늘 남학생이 부른 노래는 모두 이별과 관련된 노래였다. 남자애의 노래가 끝나고 한참 뒤에 여자애가 노래를 불렀다. 전주와 간주 부분이 귀에 익었다. 조지 윈스턴의 음반을 온종일 듣던 이복언니 옆에서 악보를 외워 피아노로 연주해보겠다고 큰소리치게 만들던 곡이었다. 지금 그 음반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는지 언니도 모를 것이다. 여자애의 노래가 띄엄띄엄 이어지다가 아예 끊겼다.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고 반주만 되풀이되었다. 두희는 여자애의 목소리를 흉내 내 몇 소절 웅얼거렸다.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리고, 뛰쳐나온 남학생이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두희는 심장이 펄떡대는 것을 느꼈다. 여자애가 탁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고 있었다. 두희는 또 한 번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 같아 망설이다가 여자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자애가 고개를 들고 흘낏 두희를 쳐다보았다. 또 한 소리 듣겠구나, 움찔했는데 여자애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두희는 여자애가 진정할 때까지 말없이 곁에 앉아 있었다. 우는 모습이 낯익은데 누구를 닮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애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얼룩이 눈가에 번져 있었다. 두희는 카운터에서 물티슈를 가져와 여자애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여자애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왜, 헤어지자 그래?”

두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자애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비죽거렸다. 언제 울었냐는 듯 말짱해진 목소리로 쏘듯 말했다.

“아줌마, 헤어지자고 한 건 저예요, 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걔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면 얼마든지 자신 있어요.”

여자애는 입을 꾹 다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룸을 나가던 여자애가 돌아섰다.

“아줌마, 환자처럼 그러지 말고요. 어떻게 좀 해봐요. 네? 서비스업이잖아요.”

두희는 당황했다. 여자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가끔 율이 립 틴트를 들고 와 자는 두희의 입술에 바르곤 했다. 율이 크면 여자애처럼 남학생과 연애도 하고 노래연습장의 아줌마에게 잔소리도 늘어놓을까, 두희는 상상해보았다. 율이 크는 만큼 자신은 늙어가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면서도 홀가분했다.



이번에도 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수첩 두고 가셨어요. 내일 오시면 찾아가세요.’ 악기점 사장이었다. 허겁지겁 가방을 뒤져보니 수첩이 보이지 않았다. 수첩을 놓고 오고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요즘 기억력이’라고 쳤다가 지웠다. 노랫소리가 쏟아지는 룸을 등지고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악기점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남자는 거리가 멀지 않으니 노래연습장으로 수첩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고 했다. 두희는 그깟 수첩을 핑계 삼아 남자가 가게에 오는 걸 바라지 않았다. 다만 수첩에 적어둔 온갖 메모를 남자가 눈여겨보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남자는 내일 낮에 시간을 낼 수 있는지 물어왔다. 자신이 회장을 맡은 색소폰 동호회에서 야외 공연을 하는데 분위기를 본 후 회원가입을 하라고 했다. 악기 하는 사람들이니 사귀어두면 해될 건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두희는 뜸을 들였다. 그러자 남자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아이도 거기에 데려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이를 위한 후원회를 타진해보면 좋겠어요. 물론 저도 그 영재를 보고 싶고요.”

두희의 입에서 버릇처럼 감사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남자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구했어요, 악기.”

전화를 끊고 바로 율에게 연락했지만 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손님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네 개의 룸에서 박자와 템포와 장르가 다른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율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마음이 급해졌다. 피아노 학원과 친구 집에도 연락해보았지만, 율은 없었다. 막연했던 공포감은 점점 구체적인 그림으로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별일 없을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음료가 엎질러진 바닥을 닦고 소파 위 새우깡 가루를 쓸어내고 보니 어느새 시간이 열 시에 가까웠다.

“엄마!”

열 시 반쯤에야 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너 도대체…….”

율의 밝은 목소리를 듣자 거짓말처럼 율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지가 떠올랐다. 율은 오랫동안 모차르트 클라리넷 명곡 콘서트를 기다려 왔다. 아침에도 두희에게 종알종알 콘서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깜빡하고 만 것이다. 두희는 낮시간이나 일요일을 활용해 율과 함께 외출하곤 했다. 함께 갈 수 없는 날이면 이렇게 율이 혼자 다녀오기도 했다.

“율아, 콘서트는 어땠어?”

두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율은 무척 만족한 것 같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기가 고스란히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난간에 가려 무대가 잘 안 보였지만 괜찮았어. 어차피 귀로 듣는 연주니까, 히히.”

“우리 딸, 추웠겠다. 엄마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갈게. 그때까지…….”

율이 두희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알았어요, 무서우면 유진 이모네 가 있을게.”

두희는 전화를 끊고 복도 안쪽 특실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웃고 떠들고, 그동안 어떻게 참았나 싶었다. 악기점 남자가 말한 후원회에 대해 생각했다. 율에게 후원회가 생긴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에 세 시간씩 아이가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다면.



일찍 문을 닫은 상점들로 거리는 어둑했다. 두희는 불이 꺼진 꽃가게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가게 안쪽 냉장고에서 푸르스름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실내는 커다란 수족관처럼 보였다. 소국과 마리골드와 펜타스가 유리꽃병에 꽂혀 있었다. 졸업과 입학 시즌이 끝났으니 꽃집은 오월 대목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두희는 십 년 동안 꽃집을 했었다. 병이 나고서도 계속하려고 했지만 욕심이었다. 가위질을 더는 할 수 없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감전된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팔 전체로 뻗어갔다. 도매 시장에서 꽃을 떼 오고, 시들지 않게 관리하는 모든 일이 이제는 무리한 노동이 되었다. 꽃은 무거웠고 며칠이 지나면 쓰레기가 되었다. 두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복언니가 노래연습장을 두희에게 맡겼다. 언니는 다른 업소 하나를 지인에게 넘겨받아 지방에서 몇 년을 버틸 생각이었다.

학교 담장을 따라 난 길은, 특히 방학 때가 되면 인적이 끊겼다. 두희는 일을 마치고 이 길을 지나 집으로 갈 때면 매번 시험을 치르는 심정이었다. 그럴 때면 예리한 칼을 품에 숨긴 사람처럼 예민해졌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차들이 전속력으로 오가는 사거리에 다다르면 다리에 힘이 풀려 신호등 기둥을 짚고 서 있어야 했다.

창문마다 뿌옇게 먼지가 낀 집들을 지나면 오르막이 나타났다. 오르막 끝에는 등산로가 시작되는 산 초입이었는데 거기에 못 미쳐 두희가 사는 다가구주택이 있었다. 녹슬고 삭은 대문이 늘 열려 있는 집. 지하 방에는 동남아인들이 거주하고, 일 층에는 할머니와 아들이 살고, 이 층에는 두희네와 율이 이모라고 부르는 유진이 살았다.

두희는 유진이 이사 오던 날을 기억했다. 바쁘게 짐을 나르는 젊은 여자는 가뿐하고 깨끗한 인상이었다. 과연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싶은 커다란 침대와 운동 기구가 두희는 걱정스러웠다. 처음 인사를 나누는데 유진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자신을 요가선생이라고 소개했다. 결국, 유진의 퀸사이즈 침대와 근력 운동 기구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트럭에 실려 재활용센터로 갔다.

두희는 마당에 들어서며 환하게 불이 켜진 유진의 집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유진은 불면증에 시달려 새벽 다섯 시쯤에야 잠이 든다고 했다. 다음날에 수업이 있으면 아예 자는 걸 포기했고, 일이 없는 날이면 서너 시간 눈을 붙인 후 깨어 있었다.

유진은 출입문 앞에 커다란 쇼핑백을 내놓았다. 잘 개킨 옷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유진은 환절기마다 옷을 정리했는데 입지 않거나 작아진 옷들을 죄다 두희에게 주었다. 고가의 옷들이었지만 대부분 몸에 들러붙는 소재여서 두희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

율이 유진의 집에서 뛰어나와 춤추듯 두희의 주변을 맴돌았다. 두희는 율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유진이 출입문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율은 흥분해 풀쩍거리면서 유진 이모와 아까 콘서트에서 들은 곡들을 찾아 들었다고 했다. “좋았죠? 이모, 진짜 좋았죠?”

두희는 율의 손을 잡고 집으로 오면서 내일 악기점 사장님을 만날 건데 너도 같이 만날 거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율은 오늘 갔던 콘서트 때문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율아, 작년 영재원 수료식 연주에서 혹시 실수했었니?”

두희가 율의 젖은 머리를 말리는 동안에도 율은 두희의 종아리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키 누르듯 계속 움직였다.

“아, 그거? 십육분쉼표에서 빨리 숨 쉬고, 크게 소리를 내야 하는데 숨이 차서 못했어요.”

율이 고개를 휙 돌려 그런데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았어요? 라는 눈빛으로 두희를 올려다보곤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흥얼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어딘가로 달려가듯 빨라지더니 점점 더 커졌다. 소리는 멀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작아졌다가 느려지고 끝내 잔잔해졌다. 율은 드라이어 바람에 눈이 시린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낡은 보일러가 점화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두희는 창고 구석에 놓인 항아리 앞에 쭈그려 앉아 뚜껑을 열었다. 소금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항아리 밑바닥까지 손을 찔러 넣자 비닐봉지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검은 봉지 속에 오만 원권 지폐 뭉치가 들어있었다. 암 진단비와 수술비, 입원 일당까지 쳐서 받은 보험금이었다. 보험에 가입한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약정 금액의 오십 퍼센트만 받을 수 있었다. 소금 단지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다. 전화 금융사기나 해킹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돈이 사라지는 상상을 한 뒤로 그녀는 무서워졌다. 그럴 때면 이제는 재발해도 보장받으실 수 없습니다, 라는 보험 설계사의 사무적인 말투가 떠올랐다.

오 년 동안 암세포의 전이가 없으면 안정기에 접어든 셈이라고 주치의가 말했다. 다음 달이면 오 년이 된다. 두희는 지폐 다발에서 스무 장을 뽑아내었다. 아이가 현재 사용하는 플루트보다 한 단계 좋은 악기의 중고 가격이었다.

두희는 아이 방의 불을 끄고 어둑한 주방으로 나왔다. 주방 창으로 보안등 불빛이 스며들었다. 바람이 부는지 옥상에서 지하 방으로 늘어진 검은 유선방송 케이블이 부엌 창문을 탁탁 쳤다.

전등이 나가듯 어느 날 많은 것들이 제 기능을 잃어 아이조차 못 알아보게 될 자신을 상상하면 두희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숨이 찼다. 그때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악기점 남자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클래식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었다. 율은 낯가림하는 것처럼 차를 탄 이후로 창밖 풍경만 바라보았다.

“남자친구 있니?”

남자의 말에 율이 두희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헐’하고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자는 율의 반응을 본 건지 만 건지 “그래그래, 남자친구는 천천히 사귀고”라고 말했다.

“율이는 플루트가 왜 좋니?” 백미러에서 남자의 두 눈이 웃었다.

“플루트는요, 하나의 멜로디만 연주할 수 있어 아쉽지만, 그래도 소리가 부드럽고 아름다워 좋아요.”

차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두희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오랜만에 나들이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한낮의 햇빛이 강물 위에 떨어져 함석판처럼 반사되었다. 가로수가 춤을 추듯 바람에 흔들렸다. 바람은 지난밤보다 기세등등해졌다. 바람이 불면 미세 먼지가 덜하니 차라리 쌀쌀해도 그게 나은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 차는 강변 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면도로 위로 올라섰다. 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멀미를 하는 모양이었다. 두희는 손수건으로 율의 턱을 받쳤다.

유럽 스타일로 내부를 꾸몄다고 광고 중인 카페에서 뜨거운 음료를 마셨다.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는 율을 보던 남자가 별안간 자신에게도 율이 같은 아이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좋은 환경에서 잘 키워 본인이 이루지 못한, 세계적인 연주자로 성장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고 했다. 오랜 시간 애썼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두희는 난감해졌다.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바람은 잦아들다 거세지다 하며 변덕을 부렸다. 바람이 새어들지 못하도록 두희는 자신의 스카프로 아이의 목을 친친 둘러주었다.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눈이 활짝 웃었다. 강변에 설치된 야외무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율이 손가락으로 무대 쪽을 가리켰다. 색소폰을 목에 건 채 사람들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기가 더 작은 색소폰을 목에 건 여자들도 보였다. 사람들이 악기점 남자를 알아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한 여자가 따뜻한 꿀차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남자가 두희를 향해 눈짓을 했다.

“네?”

“색소폰요.”

“네?”

“어제 색소폰요, 망가지고 우그러진. 하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덜렁대다가 색소폰을 망가뜨린 사람. 두희는 웃음이 나서 마스크 속의 입을 벌리고 소리 내어 웃었다.

두희는 율의 손을 잡고 강가로 갔다. 검푸른 수면이 한눈에도 깊은 물 속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창창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팔짱을 낀 연인들이 포토존, 이라고 쓰인 팻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텐트 안에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두희는 보도블록이 깔린 길을 따라 걷다가 뒤돌아보았다. 주변을 두리번대던 악기점 남자는 이내 무리 속으로 섞여들었다. 길 끝에서 시작된 계단을 올라가니 비닐하우스로 만든 사무실이 보였다. 좌판에 개망초와 쇠별꽃이 나와 있었다. 사람들이 밭에서 검은 비닐을 걷어내고 흙을 골랐다. 길 가장자리를 따라 심겨 있는 탱자나무에 자잘한 꽃들이 매달려 있었다. “엄마, 여기 좀 보세요!” 율이 말한 곳에 대형 거울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오전 해가 눈부시게 거울에 되비치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바람이 없었다. 야외 나무 울타리에 세워둔 거울은 어딘가 생뚱맞아 보였다. 율이 두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거울 앞 흙밭 가장자리에 이 미터는 되어 보이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파리 하나 없는 나무는 옮겨 심은 것처럼 주변과 어울리지 않았다. 긴 줄 양 끝에 물이 담긴 페트병을 묶어 가지마다 걸쳐 두었다. 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두희에게 까닭을 물었다. 두희는 대답 대신 페트병을 단 나무처럼 두 팔을 벌려보았다. 두희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이 잔인한 농담 같았다. 나무의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물, 그러나 나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물. 두희는 율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바람이 불어도 꼼짝하지 않는 나무를, 오랜 날 오랜 밤을 견뎌왔을 나무를 오래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