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향 영화감독, 주필호(글) 주피터필름 대표
이번 시나리오 부문 본선 진출 작품은 모두 10편이었다. 작품 편차가 들쑥날쑥해 심사위원들은 전체적인 수준이 예년보다 매우 낮다는 공통된 평가와 함께, 당선작 없음을 한동안 고민했다.
당선작인 ‘더 홈’은 집을 소재로 한 이른바 ‘하우스 호러’로 어린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캐릭터들이 신선했고 뉴 타운 피해자들의 ‘공포와 눈물’도 느껴졌다. 저예산으로도 충분히 제작 가능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다만 마무리가 미흡하다는 지적과 함께, 이야기가 다소 모호하고 기승전결이 편평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공포 장르를 좋아하는 작가의 내공과 필력도 느껴졌다. ‘자극적인 흥미는 있으나 개연성 부족한 이야기’라는 평을 받았던 작년도 본선 진출작을 대폭 뜯어고쳐 그 개연성의 빈 공간을 잘 메워 영화화 가능한 시나리오로 각색해냈다.
이재희의 ‘왕의 목소리’는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패왕별희’ 같은 동성애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의 ‘쿠데타’ 플롯을 한 축으로 설정해 수정하면 보다 좋은 시나리오가 탄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궐 생활의 여러 디테일에 대한 보다 꼼꼼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듯 하다. 김진우의 ‘심장에 남는 사람’은 작가의 안정적인 필력이 돋보였고 이야기가 순하고 곱지만, 실화에 입각해서인지 너무 신파적이었고 소재의 신선함도 아쉬웠다. 최지운의 ‘미드나이터’는 따뜻한 인물과 소재와 설정의 신선함은 좋았지만 ‘중경삼림’의 기시감이 들었다.
잘 쓴 시나리오는 많지만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새롭고 신선한 소재 선택과 기획력을 키워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의 고통을 익히 알기에 당선작 선정과 추천에 심혈을 기울다. 당선자를 비롯해 본선 진출 작가님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오후 4시 반이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고, 해가 떠 있을 때조차 두껍고 낮은 구름에 가려 늘 어둡고 음습한 독일의 초겨울. 창마다 두꺼운 셔터를 내려 밖은 아예 보이지 않고, 기압이 낮아서 유난히 크게 들리는 비행기소리가 밤하늘을 찢는 가운데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시나리오를 써내려갔습니다. 그것도 공포 시나리오를요.
새벽 2, 3시쯤 되었을까요. 한참 쓰고 있는데 방에서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는데 그 순간 떠오른 사실! 지금 남편은 출장 중인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누가 봤다면 분명 “네 시나리오보다 네가 더 무섭다!” 했겠지요. 제가 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시간이 됐을지 모를 그 시간을 현실로 불러와 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우리 사회가 세렝게티라면 난 얼룩말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육식동물도 아니고, 초식동물 중에서도 남들보다 빨리 뛸 다리나 뿔도 없이, 가진 거라곤 오직 왜 있는지 모를 얼룩무늬뿐인 얼룩말 말입니다. 그렇게 생겨먹어서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싶은 흰 바탕에 검은 줄무늬. 하지만 오늘은 “어쩜 얼룩말이 뛰면 흰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착시효과를 일으킬지도 몰라!”하는 농담 같은 믿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든든한 베이스캠프였던 심산스쿨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같은 길을 걸어준 글동무들과 오랜 세월 함께 해준 ‘패밀’에게 고맙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부모님과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비로소 마음을 전합니다. 곁에서 저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동행에게 제게 허락된 모든 기쁨을 바칩니다. 이런 날은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거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