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연희(여, 25)
배달원(남, 20대)
부동산 중개업자
세입자 1, 2, 3
무대
푸른 타일이 깔린 화장실.
무대 오른편에는 화장실 문이 있다. 그 옆에는 짧은 복도가 있다.
왼편에는 뚜껑이 닫힌 변기와 세면대가, 중앙 뒤편에는 욕조가 있다.
변기 옆에는 가릴 수 있도록 허름한 커튼이 하나 달려 있다.
어두운 화장실에 불이 켜진다.
문이 열리며 중개업자가 들어온다.
연희가 그 뒤를 따른다. 주위를 연방 둘러보며 모든 것이 낯설어 보인다.
중개업자
깨끗하죠? 오래된 집 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요. 집 주인이 제법 꼼꼼해요. 골동품에 애착도 많고요.
연희
(주위를 둘러본다)네. 깨끗하네요.
중개업자
(속사포처럼) 저도 처음 여기가 매물로 나왔을 때 놀랐어요. 요즘 흔치 않은 곳이잖아요. 크기도 적당하고요. 뭣보다도 개성이 있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 그거 얼마나 따집니까? 남들이 안 가진 거, 못 가진 거, 그걸 찾느라 정신이 없잖아요. 우리 아들놈은 말이죠.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줬더니그걸 꾸미느라 돈이 더 들어갑디다. 아무것도 안 씌우고 돌아다니면 촌스럽다나 뭐라나. 우리 때는 안 그랬어요. 그저 남들 가진 걸 갖는 게 소원이었다니까.
연희
아......
중개업자
그런 점에서 젊은 사람들 보면 참 부러워요. 재미나게 사는 거 같아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자세히 둘러 봐요. 아마 맘에 쏙 들 거야.
연희는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중개업자는 그런 연희의 뒤를 바싹 붙어 따라다닌다.
연희는 그런 그를 의식하여 위축된다.
연희
(얼마 둘러보지 못하고) 참 좋네요.
중개업자
그죠? 내가 말했잖아요. 집주인이 꼼꼼하다고. (세면대 가리키며) 아까 보니 저것들도 물때 하나 없더라고요.
연희
(세면대 앞에서) 물은 잘 나오나요?
중개업자
그럼, 아주 기똥차지요.
연희는 세면대 물을 틀어본다.
한동안 불쾌한 소리가 나고, 미약한 물줄기가 힘겹게 흐른다.
연희
수압이 좀 약한가 봐요.
중개업자
(천연덕스러운) 기똥차게 적당히 나온다니까. 콸콸 나오면 오히려 못 써요. 물낭비하기 십상이지. 한 푼이라도 더 아껴서 얼른 좋은 집으로 이사 가야죠. 안 그래요?
연희
(고개를 끄덕인다) 지은 지 몇 년이나 됐다고 하셨죠?
중개업자
가만 보자. 한 20년은 됐지.
연희
그렇구나. (세면대를 쓰다듬는다) 전 오래된 게 좋아요.
중개업자
어린 아가씨가 현명하네. 새것은 모든지 돈이 드니까.
연희
꼭 돈 때문만은 아니에요. 누군가 이곳을 보살피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중개업자
(성의 없게) 그렇죠. 사람들은 가끔 오래된 건 값이 싸다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보살피는데도 돈이 만만치 않게 드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니까. 그래서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연희
(주위를 보며 고민하다가, 바닥을 보며) 바닥이 많이 차네요.
중개업자
타일이 반질반질 하죠? 청소도 정말 쉬울 거예요. 물만 쫙 뿌려주면 그만일걸요. 우리 젊은 친구들 공부하랴 취업준비 하랴 정신없잖아요. 청소 같은데 신경 쓸 시간도 없고.
연희
이제 곧 겨울인데... (조심스럽게) 난방은 안 되죠?
중개업자
겨울은 전기장판 하나면 나지. 등짝만 따듯하면 추운 걸 모른다니까. 대신 여름에 기가 막히게 시원할거예요. 내가 보증할게.
연희
여름도 겨울을 나야 오는 걸요.
중개업자
멀리 보고 생각해요. 에어컨이랑 전기장판 중에 뭐가 더 싸겠어요?
연희
이곳에 에어컨도 들여 놓을 수 있어요?
중개업자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에요.
연희
고민이 되는 건 사실이에요. (사이) 화장실에서 살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중개업자
아니, 화장실이 뭐 어때서요?
연희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요?
중개업자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화장실 안 가는 사람 본 적 있어요?
연희
아니요.
중개업자
그렇다니까. 이 세상에 화장실을 가지 않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저는 화장실에서 살아요. 라고 말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물론 사람들이 당신이 장이 매우 안 좋은 여자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정도야 다른 사람들에게 깔보고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연희
무시당하다니요?
중개업자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서너평 남짓한 고시원이나 단칸방에서 산다고 이야기 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다리 하나 제대로 뻗을 공간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화장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보는 눈이 달라질 걸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화장실만 가진 게 아니라 화장실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연희
하지만 그건 사람들을 속이는 거 같은데.
중개업자
다들 그렇게 살아요. 오해를 푸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죠. 그냥 믿도록 내버려두면 되요.
연희
그런가요?
중개업자
게다가 이 집에 사는 다른 사람들은 12명이 하나의 화장실을 써요. 당신이 이곳을 선택한다면 이 집에서 유일하게 화장실을 가진 세입자가 되는 거예요.
연희
그럼 여긴 누구도 쓰지 않았단 말인가요?
중개업자
아니요. 썼죠.
연희
누가요?
중개업자
집주인이요. 1년에 한 번씩 방문할 때마다 썼는데 이젠 아예 이민을 갈 생각인가 봐요. 그래서 세를 주게 된 거죠.
연희
왜 다른 세입자들에게 쓰도록 두지 않는 건가요?
중개업자
그 사람들은 이미 12명이서 화장실 하나를 쓰는데 익숙해요. 새 화장실을 주게 되면 오히려 혼란스러워 한다고요.
연희
아......
중개업자
손바닥만한 창에서 흐르는 한줌의 빛에도 몇 만원씩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에요. 이쯤 되면 화장실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겠어요?
연희
네,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중개업자
그리고 무엇보다
연희
(보면)
중개업자
당신은 돈이 없잖아요.
연희는 당혹감에 잠시 얼굴이 붉어진다.
중개업자는 무심하게 시계를 본다.
중개업자
아가씨, 내 딸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젊어서 고생을 피하면 못 써요. 게다가 생각해 봐요 다른 사람들이 화장실 순서 기다리느라 동동거리는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를요.
연희
(풀이 죽어) 저,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중개업자
(말 자르며) 이제 빨리 결정했으면 해요. 사실 이 뒤에도 일정이 많이 잡혀 있거든요.
연희
(짧은 사이) 계약할게요.
중개업자
잘 생각 했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바로 진행하죠.
중개업자는 품에서 서류를 꺼낸다.
중개업자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됩니다.
연희
어쩌죠? 깜빡 잊고 도장을 안 가져 왔어요.
중개업자
그럼 지장이라도. (인주를 내밀며) 여기에 찍고, 이렇게...
연희
(중개업자에 이끌려 도장을 찍는다)
중개업자
이제 됐어.
연희
이제 된 건가요?
중개업자
네. 다 끝났어요. (바삐 서류를 챙긴다)
연희
(안심해서) 서울에는 연고도 없고 처음이라 사실 겁을 많이 먹었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좋은 곳을 알게 돼서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중개업자
(성의 없이) 네. 이제 이곳에서 행복을 쌓아가며 사시길 바라겠구요. 안녕히 계세요.
연희
벌써 가시나요?
중개업자
서울에는 사람도 많고 집도 많지요. 도통 쉴 틈이 없답니다.
중개업자 바삐 문을 나선다.
그 뒤를 허둥지둥 따라가던 연희는 화장실 손잡이가 잠기지 않음을 깨닫는다.
연희
저!
중개업자
(뒤를 돌아본다)
연희
화장실 문이 안 잠기는 것 같은데요.
중개업자
그럴 수도 있죠 뭐.
연희
그럴 수도 있다니요. 도둑이 들기라도 하면.
중개업자
바보 같은 걱정이에요. 거긴 화장실이잖아요.
연희
네?
중개업자
화장실은 버리러 가는 곳이에요. 뭔가를 가지러 가는 사람은 없다고요. (휴대폰을 꺼내며) 네, 어디시라고요? 금방 갑니다. 앞 일이 조금 길어져서요...
중개업자는 완전히 사라진다.
홀로 남겨진 연희는 잠시 서 있다가, 짐이 담긴 트렁크를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코트를 벗고 트렁크를 열어 물건을 꺼낸다.
곰인형, 액자, 탁상 거울, 시계 등을 이곳저곳에 올려놓는다.
연희가 화장실을 꾸미는데 열중하는 사이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한 손에 작은
상자를 든 배달원이 등장한다.
배달원은 복도에서 송장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윽고 화장실 앞에 선다.
살짝 열려 있는 화장실 문틈을 엿본다.
그 때, 연희가 뒤를 돌아본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친다.
연희
(반사적으로) 꺅!
배달원은 놀라 문을 닫는다.
배달원
죄송합니다.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요.
연희
누구세요?
배달원
택밴데요.
연희
택배요? 누구한테 온 건데요?
배달원
누구한테 온 게 아니라 이곳에 온 거예요.
연희
이곳이요?
배달원
네. (흘끗 문에 적힌 호수를 본다) 바로 이 화장실이요.
연희는 일어서서 문을 살짝 연다.
연희
누구에게 온지는 안 적혀 있나요?
배달원
네. (송장을 보여준다) 이것 보세요.
연희
진짜네.
배달원
(택배를 내밀며) 이거 받고 싸인 좀 해주세요.
연희
전 택배를 시킨 적이 없는 걸요.
배달원
보셨잖아요. 이곳으로 배달하라고 적혀 있어요.
연희
하지만 이곳엔 그걸 받을 사람이 없는 걸요.
배달원
(머리를 긁적이며) 하긴 저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화장실에 배달 온 건 처음이거든요. 이렇게 방이 많은데 왜 하필 이곳인지. 누가 화장실에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연희
전 이곳에 살아요.
배달원
(놀라) ......이곳에요?
연희
네.
배달원
새로 이사 오셨나요?
연희
네. 얼마 안 됐어요.
배달원
그럼 누군가가 주는 이사 선물이 아닐까요?
연희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걸요.
배달원
혹시 배달시키고 잊어버리신 건?
연희
전 아직 이곳 주소도 제대로 모른단 말이에요.
배달원
실례지만 성함이?
연희
송연희요.
배달원은 배달 명부를 뒤적여 본다.
배달원
혹시나 했는데 역시 없네요.
연희
다시 가져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배달원
하지만 송장에는 수령인의 이름이 적혀져 있지 않아요. 아마 이 화장실에 배달되길 원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전 이곳에 이걸 두고 가는 게 맞는거죠.
연희
그건 안 돼요.
배달원
왜요?
연희
지금 여기 사는 사람은 저고, 그 물건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제 책임이 되는 거잖아요.
배달원
그것도 그렇네요.
연희
연락처도 없나요?
배달원
(송장을 다시 보며) 네. 주소뿐이에요.
연희
그러면 그 송장이 잘못된건가 봐요.
배달원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연희
네?
배달원
배달원에게 송장은 나침반과 같아요. 송장이 잘못 되면 갈 곳을 잃어 버리는 걸요.
연희
(걱정스럽게) 그럼 잠깐 기다려 보시는 건 어떠세요? 받아야 할 사람이 이곳으로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배달원
(잠시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시계를 본다) 제가 이 앞에 잠깐 서 있어도 불쾌하지 않으시겠어요?
연희
네. 그럼요. 근데... 답답하지 않으세요? 그 헬멧이요.
배달원
이걸 쓰고 있어야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거든요. 잠시 머물렀다 곧 떠날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니까요. 다들 제 공간에 누군가가 침범할까봐 두려워 해요.
연희
험한 세상이니까요.
배달원
맞아요. (더운 듯 부채질을 한다)
연희
더우시면 벗으셔도 되요.
배달원
(사이) 그래도 괜찮을까요?
연희, 고개를 끄덕인다. 배달원은 그제야 헬멧을 벗는다.
배달원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연희
배달원도 참 힘든 직업이군요.
배달원
그래도 달려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누군가 날 기다려 준다는 건 행복한 일이죠.
연희
이 일을 오래 하셨나요?
배달원
얼마 되진 않았어요. 이제 겨우 적응해 가는 중이에요.
연희
그런데 이렇게 일이 꼬여서 어떡해요.
배달원
한 두 번이 아닌 걸요, 뭘. 서울은 정말로 크고 복잡한 도시거든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도 다반사니 주소를 헷갈려 하는 것도 이해가 되요.
연희
(불안해져) 그렇게나 복잡한가요?
배달원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시나 봐요.
연희
네. 일을 구하려 왔어요.
배달원
그렇군요. 이렇게 살 곳도 얻었으니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연희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배달원
이 정도야. (사이) 화장실에 사는 건 어떤가요?
연희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사 온지 정말 얼마 안 됐거든요.
배달원
그래도 화장실을 혼자 쓰면 쾌적하고 좋겠어요.
연희
(뿌듯하게) 그건 그래요. 사실 저도 화장실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도 사고를 바꾸니 새로운 길이 보이더라고요.
배달원
긍정적이시네요. 보기 좋아요.
연희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사실 지금도 많이 불안해요. 여긴 정말 낯선 곳이거든요. (사이) 여기서 제 이름을 물어봐 준 사람도 당신이 처음이에요.
배달원
(사이) 외롭지는 않나요?
연희
그 정도는 이겨내야죠.
배달원
저는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어요. 언제나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게 좋았거든요. 택배 상자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수많은 집들이 다 제 친구처럼 느껴져요. 현관문 앞에서 끝나는 짧은 인연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늘 택배를 시키고, 배달할 곳은 많으니까요.
연희
멋진 일이에요.
연희와 배달원은 마주 보고 미소 짓는다.
그 때 배달원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울린다.
배달원
이제 가봐야 해요.
연희
(쓸쓸해진다) 결국 주인은 오지 않았네요.
배달원
이건 (상자를 내밀며) 연희씨에게 드리고 갈게요.
연희
네? 하지만...
배달원
이곳으로 온 택배에요. 여기 사는 사람이라면 받을 자격이 있어요.
연희
그래도 될까요?
배달원
(고개를 끄덕인다)
연희는 조심스럽게 택배를 받아든다.
임무를 완수한 배달원은 가벼운 목례와 함께 돌아선다.
연희
저!
배달원
(돌아보면)
연희
이 택배를 뜯어볼 동안만 거기 계셔주시면 안될까요.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서 혼자서는 무서울 것 같아요.
배달원
배달은 수없이 했어도 뜯어보는 건 처음이네요.
연희
싫으신가요?
배달원
아니요. 원하신다면 기꺼이.
연희는 그 자리에서 택배를 열어본다.
배달원은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온다.
안의 내용물을 본 연희는 놀라 배달원을 바라본다.
연희
인어알이에요.
배달원
(들여다보고) 정말이네. 전 이런 건 처음 봐요.
연희
누가 이런걸...
배달원
역시 이곳에 오는 게 맞았군요.
연희
네?
배달원
인어는 물이 없으면 죽잖아요. 여기 어디에 인어가 필요한 만큼 물을 담아 둘 수 있는 곳이 있겠어요.
연희
빨리 물에 넣어주어야 할까요?
배달원
(상자 안에서 종이를 집어 든다.) 개봉 후 십 분 내로 물에 넣어야 한다고 적혀 있어요.
연희
십 분이요? (놀라 일어선다)
연희는 욕조로 다가가 물을 튼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무대를 점점 채운다.
핸드폰 진동 소리. 배달원은 핸드폰을 바라본다.
연희는 욕조 안에 조심스럽게 인어 알을 집어넣는다.
배달원은 그런 연희를 보다가 돌아선다. 그가 나가는 소리는 물소리에 묻힌다.
연희
(돌아보며) 물은 이 정도면 될까요?
이미 배달원은 사라지고 없다.
연희는 빈자리를 보다가 이내 체념하고 수도를 잠근다.
욕조 옆에 앉아 안을 들여다본다.
연희
정말 아름다워. 어쩜 이렇게 생겼을까?
사이.
연희
(물을 살살 휘저으며) 인어를 키우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널 배달해 준 사람도 좋은 사람이었고... 근데 이름도 못 물어 봤네. 몇 살 일까? 나이는 나랑 비슷해 보였는데.
사이.
연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때, 연희는 택배 상자 위에 남겨진 송장을 본다.
곧 그가 나침반을 두고 갔음을 깨닫는다.
연희는 송장을 들고 그가 사라진 어둠 속을 잠시 응시한다.
암전.
무대가 밝아지면 연희가 화장실 한 가운데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전기매트를 깔고 요를 덮은 채 웅크려 있다.
그 때 세입자 1이 등장한다.
화장실 앞에 선다. 문을 거세게 두드린다.
연희는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서 깨어난다.
연희
누구세요?
세입자1
잠깐 문 좀 열어 주세요.
연희
잠그지 않았어요.
문이 열리면 세입자 1이 고개를 디밀고 화장실 안을 둘러본다.
연희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한다.
세입자1
진짜였네.
연희
무슨 일이세요?
세입자1
소문을 듣고 왔어요. 화장실 문이 열렸다고.
연희
여긴 처음부터 열려 있었어요. 문고리가 고장 난 걸요.
세입자1
잠겨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이곳에 앉아 있다가 주인의 눈에 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그나저나 정말 쾌적하네요. (냄새를 맡는다) 좋은 냄새도 나고. 변비가 없으신가 봐요?
연희
(민망해서) 네. 어릴 적부터 장은 건강한 편이에요.
세입자1
저도 예전엔 그랬어요. 하지만 이곳에선 아무리 튼튼한 장이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죠. 도통 싸고 싶은 시간에 싸게 두질 않으니까. 열 두 명이 한꺼 번에 화장실을 사용하는 아침을 상상해 보셨어요?
연희
아니요.
세입자1
전쟁터나 다름없죠. 출근 시간 및 등교 시간이 지나고 나면 폐허가 되어 버려요. 머리카락, 뜯어 쓴 샘플들의 잔해, 흠뻑 젖은 수건 같은 것들이요. 게다가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화생방 테러죠. 그 냄새는 정말... (고개를 젓는다)
연희
힘드시겠어요.
세입자1
돈 안 들이고 살려면 어쩔 수 없죠. 여긴 어때요?
연희
이제 겨우 정 붙이는 중이에요. 추위는 도통 익숙해지질 않지만요.
세입자1
흠. 월세는 얼마나 내요?
연희
20만원이요.
세입자1
우리랑 같단 말이에요? 우리는 방에서 겨우 잠만 자는데 당신은 화장실 까지 가지고 있잖아요.
연희
제가 계약한 곳은 이 화장실이 전부에요. 보셔서 아시잖아요.
세입자1
하지만 우리들의 화장실은 이곳보다 더 좁고 지저분해요. 열 두 명이 쓰는 데도요. 당신 같으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연희
(기가 죽어) 전 잘 모르겠어요. 그쪽의 화장실을 가보지 않았거든요.
세입자1
세상엔 보지 않고도 알아야 하는 것들도 많답니다. 어쨌든 반가웠어요. 조만간 또 볼 일이 있겠지요.
연희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세입자1은 연희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사라진다.
연희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 때 세입자2가 등장한다. 화장실 문을 노크한다.
세입자2
계십니까?
연희
누구세요?
세입자2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화장실 문이 열렸다고.
연희
(요를 바삐 정리하며)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세입자2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죠.
연희
네?
세입자2
화장실은 누가 있으면 들어가는 안 되는 곳입니다. 다들 부끄러운 짓을 하니 까요. 벗고 있거나, 배설하거나.
연희
(문에 다가가 화장실 문을 벌컥 연다)
세입자2
(눈을 가리며) 으악!
연희
들어오세요. 오셨는데 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이야기해요. 아까도 손님이 오셨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냥 보내고 말았거든요.
세입자2
그럴 순 없습니다. 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거든요.
연희
지금은 말씀하신 것 중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걸요.
세입자2
(젠체하며) 그래도 세상엔 원칙이란 게 있습니다. 화장실은 혼자서 써야 하는 곳이죠. 더러운 행동들을 하니까요.
연희
(조금 상처 입고) 하지만 전 이곳에서 사는 걸요.
세입자2
그래서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참입니다.
세입자2는 살짝 열린 문틈 사이를 훔쳐본다.
세입자2
깨끗해 보이는군요.
연희
네. 청소에는 신경 쓰고 있어요. 제 살 곳이라고 생각하니까 손이 한번이라도 더 가게 되더라고요.
세입자2
보통은 뭘 하시죠?
연희
(쑥스럽게) 사실 아직 일을 구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열심히 이력서를 보내고 있는 중이니까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세입자2
화장실에서 일을 구하고 이력서를 쓴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네요. 정말 특이한 사람이군요.
연희
여기가 단순한 화장실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전 이곳밖에 머물 곳이 없는 걸요.
세입자2
자원 낭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연희
자원 낭비요?
세입자2
이력서는 어디서나 쓸 수 있지만 목욕이나 배변은 다르죠. 욕조와 변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이 화장실을 당신이 쓰잘데기 없는 일을 하는데 쓰도록 두다니... 정말 불공평해요.
연희
(혼란스럽다) 죄송해요.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어요.
세입자2
아직 이사 온지 얼마 안 됐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해요. 다시 볼 일이 있을 겁니다. (목례한다)
세입자2는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홀로 남겨진 연희는 기운이 빠진 듯 이마를 짚는다.
곧 힘을 내 욕실을 마저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 때 세입자3이 등장한다.
세입자3은 문을 부드럽게 노크한다.
연희는 움직임을 멈춘다. 잠시 머뭇거린다.
연희
(조금 겁에 질려) 누구세요?
세입자3
옆방에 사는 사람이에요. 이사 오셨다길래 인사드리러 왔어요.
연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연희
문이 열렸다는 소문을 듣고 오셨나요?
세입자3
여긴 문이 잠긴 적이 없었어요. 문고리가 고장 나 있잖아요.
연희
알고 계셨군요.
세입자3
그럼요. 잠긴 건 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죠. 다들 집주인을 겁내 하니 까요.
연희
그런가요?
세입자3
이해하세요. 이렇게 좁은 곳에서 부딪히고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요.
연희
(마음이 풀려) 들어오시겠어요? 차라도 한 잔 드리고 싶어요.
세입자3
저야 좋죠.
세입자3은 연희의 뒤를 따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다.
연희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신기한 듯 화장실을 둘러본다.
세입자3
정말 넓고 쾌적하네요.
연희
모두 그런 말을 해요. 저 쪽 화장실은 그렇게 지저분한가요?
세입자3
그런 편이죠. 열 두 명이 쓰기에는 턱없이 좁구요. 하지만 화장실 탓만은 아니에요. 아무도 먼저 청소하려고 들지 않거든요. 다들 자기 것이 아니면 보살피려고 하질 않아요. 하지만 이곳은 열심히 가꾼 티가 나네요.
연희
(컵을 건네며) 아무래도 오랜 시간 있으니까요.
세입자3
고마워요. 앉아도 되나요?
연희
그럼요. 하지만 그 전기장판 위에 앉으셔야 해요. 타일이 아주 차거든요.
세입자3
맞아요. 발이 시렵네요. (앉는다) 당신은 어떡하고요?
연희
전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사실 손님용 방석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이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건 처음이거든요. 아까도 손님들이 오셨는데 좀 낯설어 하시는 것 같고.
세입자3
다른 세입자들이 왔었어요?
연희
네.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해서 마음에 걸려요.
세입자3
불만만 이야기 하진 않던가요?
연희
(머뭇거리다) 조금 그렇게 들리는 것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에요.
세입자3
다들 기대가 컸었거든요. 집주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을 때요. 화장실을 세 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내심 자기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연희
(풀이 죽어) 제가 이곳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나 봐요.
세입자3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어차피 다들 하나의 화장실에 길들여져 있는 걸요. 두 개가 되건 세 개가 되건 하나씩 갖지 않는 이상 만족하지 못할 거예요.
연희
다른 분들도 저를 이해해 주실까요?
세입자3
그럴 거예요. 사실 다들 마음이 여리거든요. 처지도 비슷하고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연희
일을 구하러 왔어요.
세입자3
무슨 일이요?
연희
구체적으로 정하고 온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서울로 가길 바라셨거든요.
세입자3
지방분이세요?
연희
네.
세입자3
어머, 전혀 몰랐어요. 사투리를 전혀 안 쓰시네요.
연희
서울에서 살 팔자라고 사투리를 못 쓰게 하셨어요. 전 원래 서울에서 났다나 봐요. 기억도 안 나지만요.
세입자3
서울에서 났으면 서울 사람이죠.
연희
저도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사이)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세입자3
저런.
연희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것도 마음에 들고,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좋은 사람들도 만났거든요. 앞으로는 더 많이 만날수 있을 것 같아요.
세입자3
저도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요. 저, 종종 놀러 와도 될까요?
연희
(기뻐) 그럼요. 자주 놀러 오세요.
세입자3
(미소 지으며 차를 마시려다) 아...
연희
어디 불편하세요?
세입자3
아니에요. (그러나 곧 배를 만지며) 아 배가...
연희
배가 아프세요?
세입자3
네, 조금.
연희
(당황해서) 이상하다. 차가 잘못 됐나? (냄새를 맡는다)
세입자3
저기 죄송한데.
연희
네.
세입자3
변기 좀... 쓸 수 있을까요?
연희
얼마든지요. 저는 나가 있을게요.
연희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다.
세입자3은 변기에 앉아 커튼을 치고 힘을 준다.
시간이 지나고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개운한 얼굴로 세입자3이 문 밖으로 나온다.
세입자3
오래 기다리셨죠. 미안해요.
연희
아니에요. 이제 괜찮으세요.
세입자3
네. 안 아플 배도 화장실에 가면 아파지곤 하더라고요. 참 이상하죠?
연희
저도 가끔 그래요.
세입자3
그런데 욕조 안에 뭔가가 있던데.
연희
저, 인어 알이에요.
세입자3
인어 알이요? 그 귀한 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연희
사실 제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 걸 맡아서 보관하고 있는 거죠. 물속에 담가 놓지 않으면 금방 말라버린대요.
세입자3
(인상을 찌푸리며) 정말 인어 알일까요?
연희
네?
세입자3
뭔가 이상한 것의 알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안 찾아가는 것 같은데. 상어 라거나, 끔찍하게 생긴 심해 생물일지도 몰라요.
연희
하지만 설명서에는 인어라고 적혀 있었는걸요.
세입자3
너무 순진하시네요. 요즘 사람들은 어차피 설명서를 안 읽기 때문에 파는 사람들도 얼마나 대충 만드는데요. 믿는 사람을 오히려 바보 취급 해요.
연희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세입자3
부화하기 전에 깨뜨려 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연희
(놀라) 하지만 제 것도 아니고...
세입자3
주인이 와도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에요. 안 찾아간 사람이 잘못이죠.
연희
저것도 생명인걸요.
세입자3
그건 저도 알아요. 다만 곤란해지실 것 같아서 드린 말씀이에요.
연희
알아요. 정말 감사해요.
세입자3
이만 가 볼게요.
연희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세입자3
물론이죠. (사이) 정말 자주 놀러 와도 되나요?
연희
언제든지요.
세입자3
그래요. 이제 친하게 지내요. 다음에 또 봐요.
세입자3은 손을 흔들고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기분 좋게 화장실에 들어서던 연희는 악취에 코를 막는다.
연희
으, 냄새.
연희는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들어간다.
바닥에 있는 찻잔을 치우고 욕조 옆에 앉는다.
욕조 안에 알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연희
그새 또 자랐네. 네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까 궁금해. (사이) 네가 바다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면 좋겠다. 그럼 이런 좁은 욕조에서는 행복하지 못할 것 아니야.
연희는 피곤한 듯 욕조에 기대 눈을 감는다.
조명이 물빛으로 바뀐다. 첨벙첨벙 물을 튀기는 소리가 난다.
곧 희미한 빛만을 남기고 어두워진다.
세입자3이 허겁지겁 무대로 뛰어 들어 온다.
3의 손에는 세면도구와 옷이 들려 있다.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무대 밝아진다. 연희는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연희
누구세요?
세입자3
저에요, 저.
연희
(문을 열어준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이세요?
세입자3
아침 인사 하러 왔어요.
연희
이렇게 이른 시간에요?
세입자3
하는 일이 없이 집에 늘어져 있으면 생활 패턴이 불규칙적으로 되기 십상이에요. 그래서 깨우러 왔어요.
연희
아, 고마워요.
세입자3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연희
(비켜서며) 그러세요.
세입자3
아, 바쁘다 바빠.
세입자3은 연희의 화장실에서 자연스럽게 이를 닦기 시작한다.
연희는 당황해 뒤에 가만히 서 있다.
세입자3
(그제야 뒤돌아보며) 아, 놀러온 김에 잠깐 세면대 좀 써도 되겠죠?
연희
(얼떨떨한) 네, 그러세요.
세입자3이 이를 닦는 동안 연희는 구석에 서있는다.
그 때 세입자1이 휴지를 들고 바삐 뛰어 들어 온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연희는 깜짝 놀란다.
세입자1
안녕하세요. 어제 봤었죠?
연희
무슨 일이세요?
세입자1
배가 너무 아파서요. 잠깐 화장실 좀 쓰게 해주세요. 양심적으로 휴지는 들고 왔으니 걱정 마세요.
연희
네? 하지만, 그건 좀...
세입자1
(세입자3을 향해) 저기 저 사람도 쓰고 있잖아요.
연희
저분은 그냥...
세입자1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 이거에요? 저 사람이나 나나 마려운 건 똑같은데,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어요? 차별당하니까 기분 더럽네.
연희
차별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알겠어요. 쓰세요.
세입자1
진작에 그럴 것이지.
세입자1은 부리나케 변기에 앉고 커튼을 친다.
연희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문밖으로 나간다.
그 때 세입자2가 뛰어 들어온다.
연희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깜짝 놀란 연희가 그를 붙잡는다.
연희
들어가시면 안돼요!
세입자2
전 지금 너무 바쁩니다. 방해하지 마세요.
연희
하지만 안에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세입자2
그 사람들보다 제가 더 바쁩니다.
연희
네? 하지만 어젠 사람이 있는 화장실엔 들어가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하셨잖아요.
세입자2
원칙보다 자원을 아껴 쓰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 큰 화장실을 둘이서 사용하다니, 그건 정말 큰 낭비라고요!
세입자2는 연희를 밀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세입자3
아니 당신까지 이리로 오면 어떡해요?
세입자2
저 급합니다. 비키세요.
세입자1
저 아가씨는 부끄러움을 모른다느니 어쩌니 할 때는 언제고 이리로 와요?
세입자2
아 진짜 바쁘다니까요!
세입자들은 서로 화장실을 편하게 쓰기 위해 다투기 시작한다.
연희는 문밖에서 그 모습을 황망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쪼그려 앉는다.
암전.
무대가 약하게 밝아지고 복도에 핀 조명 비춘다.
연희는 그대로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화장실 안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때, 헬멧을 쓴 배달원이 등장한다.
배달원은 연희를 발견한다. 헬멧을 벗는다.
배달원
연희씨.
연희
(본다)
배달원
(반가워)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연희
(기운 없이) 네. 오랜만이네요.
배달원
(송장을 툭툭 두들기며) 나침반을 여기 두고 가서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새 나침반이 생겼어요.
연희
저한테 온 건가요?
배달원
네. 어머니가 보내신 건가 봐요.
연희
뭔데요?
배달원
(상자의 냄새를 맡는다) 글쎄요. 아마도 밑반찬, 그런 거?
연희
이리 주고 가세요. 바쁘시잖아요.
배달원의 얼굴이 흐려진다.
배달원
기운이 없어 보이네요. 무슨 일 있어요?
그 때 커튼 안쪽에서 세입자2가 나와, 문을 열고 나온다.
손에는 양치 도구를 들고 있다.
세입자2
아 상쾌하다.
배달원은 놀라 본다. 세입자2는 퇴장한다.
연이어서 커튼 안쪽 변기 위에서 세입자1이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온다.
손에는 휴지를 들고 있다.
세입자1
아 살 것 같네.
세입자 1도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 후 욕조에서 세입자3이 몸을 일으킨다. 문을 열고 나온다.
손에는 목욕 도구를 들고 있다.
세입자3
아 개운하다.
세입자3은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가다 배달원을 본다.
세입자3
택배에요?
배달원
네.
세입자3
헬멧 안 쓰고 있어서 몰라봤네. 어디 거예요? (배달원의 상자를 당겨 본다) 우리 집에 이런 사람 안 사는데?
세입자3은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연희는 힘없이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열려 한다.
배달원
왜 저 사람들이 연희씨 화장실에서 나와요?
연희
빌려 줬어요.
배달원
빌려 쓰는 것 치곤 너무 뻔뻔한데요.
연희
다들 바빠서 그럴 거예요.
배달원
고맙다고 말 한마디도 못할 정도로 바쁜가요?
연희
상관 마세요.
연희는 화장실 문을 연다. 무대는 완전히 밝아진다.
화장실 안은 엉망이 되어 있다. 물건들은 쓰러지거나 널브러져 있고 물이 사방에 튀어 있다.
연희
(변명하듯) 정돈할 시간이 없었어요. 사람들이 다들 바쁘거든요.
배달원
무슨 사람들이요?
연희
이 집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요.
배달원
(놀라) 그 사람들과 화장실을 같이 쓰나요?
연희는 정리를 시작한다.
연희
아까도 말했지만 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모두 바빠서 들락날락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대학 면접이다 아르바이트 면접이다 회사 면접이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샤워를 하고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어요. 그래서 청소하러 들어갈 시간이 모자라요. 기다려야 하죠.
배달원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어디 있는데요?
연희
보통은 복도에서요.
배달원
바보 같네요.
연희
좋은 일을 하는 거예요.
배달원
왜 그 사람들에게 빌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건데요?
사이.
연희
모두 나한테 불평을 해요. 열 두 명이서 하나의 화장실을 쓰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라고요.
배달원
그래서 그 사람들은 당신에게 뭘 해 주죠?
연희
그런 걸 바라면 나쁜 거예요.
배달원
위선이에요.
연희
(진심으로) 그 사람들은 가진 게 없어요.
배달원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뭘 가졌는데요?
연희는 말문이 막힌다.
그런 연희를 배달원이 잠시 바라본다.
배달원
이곳에서 나가요.
연희
......
배달원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당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혼자만의 공간에서 살기에 당신은 너무 외로움을 잘 타잖아요.
연희
(애써) 안돼요.
배달원
왜요?
연희
(욕조를 본다) 저기.
배달원은 욕조에 가까이 다가선다.
배달원
(감탄한다) 이게 정말 그 때 그 알인가요?
연희
(미소 짓는다) 네. 조금만 기다리면 알을 깰 것 같아요.
배달원
이렇게 소중히 보살피고 있었군요.
연희
태어나면 바다로 돌려 보내줄 작정이에요. (사이) 그리고 저도요.
배달원
고향으로 돌아갈 건가요?
연희
어제 엄마하고 통화를 했어요. 근데 그러더라고요. 서울에서 났다고 한 거, 거짓말이라고. 그냥 그랬으면 했던 거라고.
배달원
......
연희
누구나 제자리를 찾기 전에는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애한테는 이 욕조가, 그리고 저한테는 이 화장실이 필요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할래요.
배달원
힘들 거예요.
연희
얼마 안 남았어요. 그리고 오늘은 문을 잠글 거예요. 편안히 태어날 수 있게요.
배달원
망가지지 않았나요?
연희
고친 지 오래인 걸요.
배달원
그동안은 왜 잠그지 않았던 거죠?
연희
잠그면 정말 혼자가 될 것 같아서.
배달원은 연희의 손을 잡는다.
배달을 재촉하는 핸드폰 진동소리가 울린다.
연희
괜찮아요. 가 보세요.
배달원은 연희의 택배에 붙여진 송장을 잡아 뜯는다.
배달원
가끔씩은 누가 부르지 않아도 찾아올 곳이 있었으면 했어요. (사이) 다시 올게요.
배달원은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연희는 화장실을 깨끗이 정리한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잠근다. 달칵 하고 문 잠기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욕조 옆에 앉는다. 욕조에 편하게 기대고 눈을 감는다.
세입자1이 등장한다. 문을 열려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세입자1
이게 왜 안 열려?
세입자2 등장한다. 세입자1을 이상하게 보며 문을 열려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세입자2
여보세요! 안에 아무도 없어요?!
세입자3 등장한다. 역시 문을 열려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세입자3
이거 왜 이러죠?
세입자2
문이 고장 났나 봐요.
세입자1
그럼 문을 부숴버리죠.
세입자3
그거 고치는 값은 누가 내는데요?
세입자2
여기 사는 사람이 알아서 하겠죠. 그게 원칙이니까.
세입자3
집주인한테 그 말이 들어가기라도 하면요.
세입자1
당신은 입 나불대는 것 말곤 대체 뭘 할 줄 알아?
세입자들은 아우성치며 문을 두드린다.
조명 어두워진다. 쩌적-하고 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정적.
조명 어슴푸레 밝아지면 세입자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화장실 천장에는 인어의 형상이 그림자로 꼬리치고 있다.
철썩이며 물장구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그 모습을 보며 연희는 밝게 미소 짓는다.
조명 어두워진다.
막.
김경민
1988년 서울 출생
중앙대 연극영화학부 졸업
제10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 수상
김철리 연출가, 배삼식(글)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삶의 고통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 뒹구는 돌멩이처럼. 그것을 주워들고 팔매질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곰곰이 들여다보는 눈길은 드물다. 이러한 성찰 없이는 '팔매질'은 겨냥해야 할 과녁을 찾지 못한다. 응모작들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있어 아픈 구석들을 제각각 품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작품이 현실에 결과로서 드러난 고통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데 그칠 뿐, 그 고통의 근원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다음 네 작품을 두고 논의하였다. 유종연의 ‘지나간, 시간들’은 장면을 엮어가는 연극적 재치가 돋보였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치 못해 통속과 감상에 머문 점이 아쉬웠다. 윤나라의 ‘백년손님’은 진득하게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힘이 좋았다. 다만 극 후반에 갑자기 끼어든 상징들이 극적 세계의 일관성을 깨뜨린 것이 흠이다. 최보영의 ‘호랑이 발자국’은 시간과 기억이라는 쉽지 않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패기는 눈여겨 볼 만하나 주제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사유와 구성에 있어서의 밀도가 필요해 보인다.
당선작인 김경민의 ‘욕조 속의 인어’는 엉뚱한 이야기다. 작가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게 풀어놓음으로써, 말도 안 되는 이 세계의 속살 한 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극적 구조가 탄탄하며 간결한 언어는 울림이 깊다. 작가가 보여주는 절제와 유머에 대한 감각은 자신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성찰의 힘을 느끼게 한다. 다소 전형적이라는 지적도 있었으나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김경민
1988년 서울 출생
중앙대 연극영화학부 졸업
제10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 수상
한동안 글이 태산처럼 커 보여서, 다시는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기쁨보다 두려움이 큰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안일하게 갇혀 있으려 했던 껍질을 박살내야만 할 때가 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 속에서 오로지 제 힘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 또렷이 다가옵니다. 때문에 저를 지지해준 감사한 분들부터 밝히려 합니다.
가장 먼저, 저 자신보다 제 글을 더 믿어주시는 부모님, 오빠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제 말과 이야기 또한 그 분들의 사랑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제게 희곡과 그 아름다움을 만나게 해주신 중앙대 디지털문예창작과 교수님들과 고연옥, 장성희 선생님, 그리고 제 글의 가능성을 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분들의 작은 격려 하나하나가 제게는 얼마나 큰 꿈으로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내 청춘을 함께 그려나가는 친구들에게도 감사합니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가장 먼저 전하고픈 중앙대 디지털문예 49기 동기들 나원, 동경, 수, 수정, 유리와 대산대학문학상 관계자 분들(특히 최종원 과장님, 장근명 대리님)과 우리 언니, 서현 언니, 진하, 재민 오빠, 언제나 아름다운 친구들 보미, 주현, 유진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름은 다 적지 못했지만 아낌없는 축하로 저를 행복하게 해준 분들께 일상에서 전하지 못할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겨우 스물여섯 해를 살아냈지만 글을 쓰는 모든 순간이 최고로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글이 운명이길 바랍니다. 그렇게 믿고서라도 계속 글을 써내려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쉬어가되 포기하지 않는 작가 되겠습니다. 지치지 않고 글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