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활발하고 고요한 코의 자세

by  최윤혜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오, 나의 콧대

    콧대가 아름다운 당신, 최근에 높인 코의 각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군요.
    2주를 쉬고 다시 출근하던 날, 나는 적어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J로부터는 이런 말이라도 들을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우아하고 기품 있게, 하지만 결국은 진정성을 담아 정직한 태도로 말하려고 했습니다.

    이건 친구의 친구의 이모의 친구 옆집 사람의 소개로 삼십 퍼센트나 할인을 받은 가격인데다가, 동안에 피부가 좋고 목소리마저 느끼하지 않은 그 의사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란 마치, 당신은 지금 매우 중요한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삶의 격을 높이려는 고귀한 선택을 하였고, 나는 그 길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설마 당신보다 고귀하지는 않겠지만 확실히 실력만큼은 매우 탁월한, 아무 하고나 말을 섞지 않는, 머지않아 이 병원이 세 들어 있는 5층 빌딩의 실소유주가 되고자 하는, 그러니까 겸손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착실한 사람이라는 듯한, 그러나 결국은 당신이 바로 지금 내린 그 귀중한 선택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배를 불리고, 또한 그 불린 배를 다시 홀쭉하게 만들어 세상의 맵시 좋은 옷들을 마네킹처럼 걸치고 나가,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아들이고서도 모른 척 시크하게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교양이 있는, 바로 그 재력가이지요, 하는 듯이, 거만하고도 겸손하게 사람을 홀리는, 다사로운 훈풍과 같은 기품이 서려 있는 것이어서, 높아진 코 높이의 수백, 수천 배 만큼이나 인생의 격조가 격상될 수 있도록 도와줄 것만 같은 신뢰감을 주었던 던 바로 그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시술한 최상위 케이스에 속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이런 경험은 어디 가서 아무나 맛볼 수가 없는, 아주 희귀하고도 기분이 좋아 우쭐해지는, 가슴 안쪽에 수천 개의 스파클링이 불특정다수로 리드미컬하게 터질 것만 같은, 그런 뿌듯한 것이었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J로부터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을 뿐더러, 내가 이루어낸 이토록 과감하고도 소중한 도전과 성취에 대해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건 뭐 그다지 특별하게 실망스런 일이라고도, 기대에 어긋난 일이라고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삶이란 나에겐 이미 익숙한 일상이었고, 어쩌면 일부러 길들여온 운명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도대체 콧대를 높인 뒤로부터 나의 감각에는 이상이 생겼더랬습니다. 코란 게 뭐 별 것 아니어서 그저 숨을 쉬고 내뱉고, 냄새나 향을 분별하는, 호흡 기관에 불과한 것이겠지마는, 글쎄 코를 높이고 나자, 나는 이제야 비로소 세상의 중심이 되어버린 듯한 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리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다른 마음의 감각에 휘둘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나 할런지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것은 그저 기분이 좋은 상태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실 시술을 마친 후의 내 모습은 매우 이상하고 낯설어서, 기대하던 바와 같아 만족스럽다거나 달라진 외모에 자신감이 붙었다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시술을 마친 뒤에는 코를 돌보느라 집에만 있었고(아, 방에만 있었다고 해야 할는지), 나의 달라진 모습을 혹시라도 누가 눈치챌까봐 신경 쓰느라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 따위는 조금도 가질 수 없었으니까요. 괜찮다면 그것을 사람맹이라고 해도 될는지. 그게 다른 사람이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안맹이 된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눈에 들지 않아, 할 때의 그런 사람맹이 되어버린 거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최악의 사태로 가기 위한 일종의 통과적 징후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걸 깨닫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시술 후 애프터서비스 기간을 훌쩍 넘겨버린 후였던 것이지요. 무언가를 바로잡는 데에는 어쨌든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니까요.

    의사는 부기가 가라앉은 2주 후에 병원을 찾아오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수정해 준다고 하였더랬습니다. 마치 수정액을 가볍게 흔들어 종이에 쓴 글자에 살짝 묻히고 입김으로 후 불어 그 위에 새 글자를 다시 적는 것과 별다르지 않다는 듯이, 의사는 무심하고도 친절하게, 예의 그 거만하고도 겸손한, 야릇하게 복종적이면서도 지배적이게 우월한, 바로 그 태도로, 더할 나위없이 세심하게, 소중하고도 고귀한 내가, 높아진 코의 형상적 완성도를 높이고자 수정하기 위해 병원을 다시 방문할 날짜를 지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사실 다시 가려고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꼼꼼하게 체크를 받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하지만 시술 후에 한층 높아진 코에 대해 나는 다시금 수정을 해야 할 필요를 절대로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코는 그 어떤 형식의 가감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높이와 각도로 고정되어 있었으니까요.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볼 수 있는 S씨와 K씨의 바로 그 각도와 높이와 사이즈의 코가 내 얼굴의 정 중앙에 솟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바로 새로 태어난, 그런 사람이 되어 있던 것이었어요.

    리터칭이 필요 없이 완벽하게 시술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잘 관찰해 보세요, 라고, 나란 사람, 충분히 거만할 만한 사람이지만 당신에게만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친절하답니다, 라는 메시지를 두 눈에 가득히 담아 팡팡 터뜨리던, 다정하고도 고결한 의사의 말은 바로 나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더란 말입니다. 내가 바로 그 완벽한 상위 32%의 케이스, 그러니까 리터칭을 받으러 올 필요가 없는, 그런 부류에 해당했다는 말씀이에요.

    뭐랄까, 상위 퍼센트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숫자가 과하다고는 느꼈지만, 또 그들이 재방문하지 않았던 건 단지 게으르기 때문이거나 형상성의 문제를 감지할 정도로 예민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질문 자체가 의사의 자존심에 태클을 거는 형국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로서는 별스럽게 질문할 거리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의사가 내게 말하고 싶었던 요지는 내가 시술에 성공한 바로 그 케이스라는 사실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코의 숨겨진 기능을 내가 알아차리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특정 감각의 냄새를 맡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나는, ‘원래부터 있었지만 모르고 있다가, 사라져버린 뒤에야 깨닫게 된다’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바로 코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다가 돌아가신 뒤에 문득 깨닫고 눈물을 흘리듯이(이 얼마나 상투적인 진실입니까), 물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잠시 단수가 되어버리자 물이 없는 재난상태의 거의 폭력적인 난감함에 어쩔 줄 몰라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처럼(뉴스에서 가끔 끔찍한 그 사례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당한 몹쓸 예로써 보게 된단 말이지요), 코의 숨겨진 기능을, 이미 되찾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코는 단지 공기를 몸 안으로 실어 나르고, 또 다 쓴 산소를 내뿜는 호흡 기관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더란 말입니다. 코는 언제나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에게 관심이 있거나 없는, 내 주변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타인을 위해서 말입니다. 코는 나와 나 아닌 사람 사이의 균형 관계를 알게 모르게 탐지하면서 양자 간의 평화 협정을 수시로 조율해왔었다는 것을, 나는 코의 감각을 잃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어떤 감각의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건 장미향이나 하수구향, 먹다가 대충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어둔 레드와인 향, 저녁에 먹다 남긴 커피가 하룻밤 자고 난 뒤에 절대로 나를 먹지 말라고 말하는 듯한(사실 나는 그 향으로부터 나를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엄포를 듣기도 했었지만) 시큼한 향이나 장마철에 잘 말리지 않아 눅눅해진 수건에 남아 있는 난처한 세제 향 따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어떤 향기, 그리고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해야 할,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할, 바로 그 타인의 향기이자, 나와 타인의 사이에 적당히 가로 놓인 그 거리감의 향기였던 것입니다.

    나 자신의 향기라니, 게다가 타인의 향기라니,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감의 향내라니, 이 무슨 돼먹지 않은 아티피셜(artificial: 인공적인)하고 수퍼피셜(superficial: 얄팍한, 천박한)한 발언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나의 이성은 어느 때보다도 활성화되어 있으니까요. 나는 나 자신과 타인을 인지할 감각을 잃어버린 대신, 머릿속의 활기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하게 브라운 운동을 하고 있는 상태이니까요.

    문제는 균형 감각을 상실한 내 코가 언제나 그렇게 불필요할 정도로 예민하게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잠을 자고 있을 때조차도, 나는 무의식 속의 달콤한 자유 여행 따위는 이제 할 수 없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안데르센 동화의 분홍 신을 신은 여자 아이처럼, 날이 선 스케이트를 타고 스타트 선을 넘어 날렵하게 질주하기 시작한 쇼트트랙 선수처럼, 내 코는 더 이상 멈출 수 없게 항상 깨어 있는, 하지만 일정한 기능을 상실한 채로 각성되어 있는, 분주하고도 무기력한 상태가 된 것이었습니다.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나의 모든 감각이, 시술을 마친 최초의 긴 호흡 속으로 아주 깊이 빨려 들어가,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하데스의 늪으로 꺼져 들어간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도대체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단 말이지요. 단 하나의 감각이 사라져버렸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처음에는 나 자신의 그런 상태를 지각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저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기묘한 상태를 마치 가끔 시선이 흐릿해지면 두 눈을 비벼 곧 원래의 시력을 되찾게 되는 것처럼, 금세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것이 지나쳐 사람맹이 되고, 나 자신에 대한 맹증에 사로잡히게 되리라고는, 정말이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는 시술 후에 의사와 매니저로부터 내 자신이 한층 더 아름다워지고, 그로 인해 멋있다는 찬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뭔가 얼떨떨하고(자신의 모습이 바뀌었는데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미세하지만 작은 차이가 사실은 차이의 기본이니까요. 저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구요.)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최초의 감정은 불안이었습니다. 과연 내가 저지른 것이 잘 한 선택일까에서부터(할인을 받기는 했지만, 이게 대체 얼마짜리인데 하는 본전 생각부터 나더군요. 다행히 카드 결재가 아니라 일시불로 낸 거라, 이후에 돈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내가 그간 백화점과 대형 마트, 도서관에서 일하며 그야말로 한푼 두푼 모은 돈이었기 때문이지요. 아, 카드결재를 하지 않은 건, 현금가로 해야 십 프로 디스카운트를 더 해준다는 매니저의 솔깃한 제안 때문이었어요. 친구의 친구의 이모의 친구의 옆집 사람 덕에(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이모의 아는 사람의 옆집에 사는 사람의 소개 덕분이지요) 삼십 퍼센트의 할인을 받은 데에다가 다시 십 프로의 할인을 받았던 것이지요. 정말 다행이지 않습니까. 병원 측에서도 아마 그로 인해 그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시술이 잘 되었다는 의사와 매니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한 없이 넉넉한 미소를 지어주던, 직원 할인가로 성형과 시술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이는 아리따운 간호사들의 표정을,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나는 의심하고 있었으니까요.

    매니저로부터 시술 후 2주 동안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기에(의사는 그런 하찮은 정보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 듯하였습니다. 그런 작은 일을 대신 하려고 이토록 유능하고 기계처럼 정확하게, 신속친절하게 반응하는 매니저를 고용한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으니까요. 아, 그것은 정말이지 지루한 일이었습니다만, 나는 미리 얻은 휴가(사실 휴가랄 것도 없는 것이, 주급을 받는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2주 동안의 주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지요.)를 이용해 2주 간은 그저 집에 있을 것을 각오해 두었더란 말입니다.

    최근에 일하게 된 곳이 도서관인 만큼(아, 저는 시립 어린이 도서관에서 잡무를 하는 계약직 주급 인턴이랍니다. 여기가 천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계약직의 장점은 여러 직장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전에는 백화점 구두 판매점의 직원으로 일한 적도 있었고, 탈모용 샴푸와 비누를 파는 대리점에서 물건을 관리하는 보조로, 그리고 대형 마트의 검수 보조로 일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모두 다 내 인생을 바쳐 오래 있을 곳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직장을 옮기게 되었지요. 판매직이란 게 좀처럼 적성에 꼭 맞는다고 할 수가 없더라구요. 물론 내가 적성 운운할 형편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다른 무엇을 감수하면서라도 판매직에 내 혼을 불태워야겠다, 이런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꼭 혼을 불태울 무언가를 직장이라는 아이템 속에서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운 좋게 직종이 다른 계약직에 곧잘 취직이 되는 편이었습니다. 주급이라도 괜찮다고 하면 대체로 잘 받아주었으니까요. 절대로 먼저 잘린 것은 아니에요. 나에 대한 성취욕구랄까, 뭐 그런 것 때문에 직장을 스스로 옮긴 것이었단 말입니다.), 나는 시술 후에 혼자서 집(아니, 방이라고 해야 할는지.)에서 심심치 않게 보낼 만한, 적어도 적당하게 지루함을 해소할 만한 소일거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직장을 이용해서 책을 여러 권 빌려 두었더랬지요. 계약직에게도 사원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더군요. 시립도서관의 복지 관념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여기는 어린이 도서관이었던지라 도서관에서는 내가 한 삼년은 읽어도 줄어들지 않을 분량의 만화책 서가가 있었고, 나는 마음껏 만화책을 빌려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원(아, 계약적 인턴에게 사원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불리기도 했으니까요.)에게도 대여 권수에 제한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니, 만화를 보면서 여러 차례 웃었을 법도 한데(만화 작가란 대개 독자를 웃겨주려는 성심성의를 갖고 있는 것을 일종의 직업윤리로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요.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 웃음 코드야말로 만화가들의 철저한 직업 정신이자 서비스 요건이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웃어 본 기억이 나지는 않는군요. 어쩐지 나는 심각한 자세로 만화책을 읽어갔지만, 그것은 도서관에 소장된 만화책인 만큼 대체로 교육용 만화였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의식하지 못했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만화책에서도 손을 떼고 단지 첫 권의 열 페이지쯤까지만 열어보고는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수상하기는 하군요. 어린이용 만화이기 때문에 다 큰 어른이 읽고 웃음이 나올 리가 만무하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한 번도 웃지 않게 만드는 만화책을 읽어 본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지금 방금 들었던 것입니다. 아, 나는 도대체 웃지 않았단 말이지요.

    나는 그저 초조하게 2주간을 보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말입니다. 작은 집이자 방에서만 지냈었단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고지식했던 것 같기도 하군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밤중이나 새벽에는 집 밖을 산책해도 좋았을 것을, 그런 생각이 좀처럼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2주가 무사하고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어쩐지 인터넷을 하거나 컴퓨터로 텔레비전을 볼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귀찮았다고나 할까요. 어쩌면 나는 지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기력하게 늘러 붙은 껌 딱지처럼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있었던 것이지요.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처럼 말입니다(아, 이건 내가 카프카의 소설을 직접 읽은 게 아니라, 언젠가 웹툰에 인용된 걸 본 것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어쩐지 내 마음에 무척 와 닿는 이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의 감각에 대해 관찰하거나 이야기할 어떠한 계기도 만들어내지 않았던 것이었으니까요. 별다른 자극이 없으니 별다른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 그리고 나와 타인의 거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처음부터 내가 추구해왔던, 무언가 나 자신을 눈길로 즐길 수 있는,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는 상태를 확인할 그 어떤 기회도 만들지 않았던 것이었어요.

    나는 다만 생각했습니다. 내 코는 완벽하고, 그 코가 얹어진 나는 소중하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일상으로 복귀하면서부터(아, 그건 내가 다시 직장에 나가게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뭔가 나 자신의 감각 체계가 이상하게 움직이고 또 반응한다는 것을 미세하게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긍정적인 감각을 가져볼 수가 없게 된 그런 상태에 대해 말입니다. 직장 사람들은 나의 달라진 외모에 대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들은 평소에도 주급 계약직원인 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주급 인턴사원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규직 사원들의 가장 드높은 우월감 놀이의 최상위 만족도의 표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이런 직종을 오래 하다보면 그 정도의 직업적 감각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단순히 자기 보호라고만은 할 수 없는, 직장 생태계의 룰을 알아가는 사회인의 생리적 감각이라고나 할 수 있을는지요.

    이런 이유로 나는 혹시나 누군가 나의 우월하게 달라진 외모를 알아차리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혹시나 누군가 그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나는 여러 버전의 답변을 준비해 두었었지만,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뭐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결론은 질문의 강도에 따라 솔직하게 응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요즘 세상에 시술을 밝힌다는 게 뭐 별로 숨길 일은 아니니까요. 병원의 매니저는, 물론, 나의 변화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이지만,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호감을 갖게 될 거라는 거라는 달콤한 말을 해주었지만 말입니다. 아, 물론 J에게는 자세히 말해줄 용의가 있었습니다만, 쩝.)

    하지만 당연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원래의 내 얼굴을 잘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눈치 챌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2주라는 시간은 하찮은 주급 계약 인턴의 존재감 같은 건 완전히 지워낼 수 있을 정도의 효력을 지닌 강력한 시간이기도 했으니까요.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직장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나 또한 조용히 복사 업무를 실수 없이 하는 데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불만이나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에게 2주 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그것이 편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것이야말로, 쥐꼬리만한 월급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으니까요(아, 사실 돈을 조금 포기하면 의외로 많은 것들이 수월해지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의 돈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뼈를 깎는 고통에 가까웠던 모양입니다. 좀 더 나은 삶이란 좀 더 시급을 더 쳐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을 뿐더러, 바로 그 차이가 바로 나의 소셜 레벨을 훈장처럼 대변해주는, 가릴 수 없이 확실한 징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당신, 시급이 얼마입니까, 라고 실제로 묻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내 직장생활, 아, 시급생활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는 거니까요, 에서는 연봉이라는 말이 무색한 것이기는 하였더랬습니다. 물론 나 혼자 시급과 주급을 월별로 계산해서 곱하기 12를 해보면 연봉 계산이란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나는 주급을 조건으로 11개월의 계약을 한 인턴이라 사실상 12개월을 전제로 하는 연봉생활자와는 구분이 있었을 뿐더러, 아예 아무 계약조차 하지 않은 진정한 시급생활자와는 또 조금은 사정이란 게 다르기는 하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 세세한 차이를 일일이 확인해 본다는 것이 어쩐지 두렵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원래부터 있을 수 없는 단어인, 연봉에 대해 말입니다.).

    나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절대로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내버려둔다는 것은 무척 큰 혜택인 것처럼 여겨지기조차 했으니까요. 어쩌면 바로 그런 상태조차 나의 감각이 불균형한 지점을 통과하면서 요동치는 바로 그 과정이자 결과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백화점 구두 코너에서 일할 때는 항상 그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도, 정말로 귀신이 곡할 정도의 미세한 차이를 지적하면서, 그 향수는 뭐냐는 둥, 머리는 어디서 하냐, 부모 형제는 뭐 하시냐, 집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냐, 주머니에 삐져나온 그 빨간 색 지갑은 어디서 샀느냐, 누가 사 주었냐, 요즘 듣는 음악을 USB에 담아서 가져와라, 스마트폰에 다운받은 앱들을 자신의 폰에도 그대로 설치하라, 손님이 없는 틈을 견디지 못하는지, 함께 일하는 사원은 내게 끊임없이 질문과 요구를 퍼부었습니다. 나는 항상 퀴즈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맞히지 못하면 퇴출당한다는 듯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선임이었기에 질문에 대한 답변을 무시하기도, 자잘하고 소소한 요구를 거부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가 나와 똑같은 향수를 뿌리고 빨간 지갑을 꺼내어 점심 값을 지불했을 때에도, (아, 그에게서는 바로 내 냄새가 나더란 말이었습니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 그것이 불쾌한 기분으로 정확히 감지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특별히 예민하다거나 민감한 종류의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 같군요. 그 사람에 대해 나 자신이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회사를 그만 둔 게 꼭 그것 때문이었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생각해보니 바로 그 요인이 제일 컸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아무튼 그런 피로도가 없는 이 직장이 나는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용히 집중해서 반복적이고도 기계적인 일을 마치고 나면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그 시간에 구태여 꼭 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의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달라진 내 코에 만족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우월한 외모를 갖추게 된(마치 브랜드 로고나 이니셜이 도드라진 가죽 벨트의 버클을 허리의 정 중앙에 채웠을 때처럼 말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 자긍심이 생긴다거나 하는 분명 긍정적인 감각을 누려야 마땅할 터인데, 나는 코를 바라볼 때조차도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미세하게 무언가 향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습니다. 시각적으로 그것은 너무나 확연한, 작지만 결정적인 질적 차이를 나타내주었으니까요.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나는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달라진 내 모습이 낯설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낯선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나 자신의 모습일지라도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쨌든 스스로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나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애프터서비스의 유효기간을 넘겨버린 것이었지요. 나는 긍정적인 감각의 체계를 송두리째 상실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으로서는 이러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다’는 자료를 수집해 두고 있었더랬습니다. 일부러 그런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코의 감각을 상실한 뒤에 저절로 알게 된 것이었지요. 마치 오래 쌓아둔 단어의 축적물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과 같았습니다. 레고로 지은 성벽이 잘못 끼운 한 조각 레고 때문에 일시에 허물어져버리는 것처럼, 시술을 마치고 부기가 가라앉은 거울 속의 코를 바라보면서, 우월한 기쁨에 터질 듯이 부푼 환희의 스파클링이 은하수처럼 터지던 바로 그 가슴 안쪽으로, 나 자신이 이제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상실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야 말았다는 절망감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형상 없이 수북하게 마치 모래 더미처럼 쌓이는 것을 무렴히 바라보고 있더란 말입니다. 느낌을 잃어버린,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내 자신의 균형점이, 무게 없이 뻥 뚫린 내 가슴 안 쪽으로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긍정의 감각이 사라진 내 안에는 모든 감각이 흔들리고 혼돈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도대체 알 수 없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물론 나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말하자면, 사려 깊고 신중하다라든가 겉과 속이 다르다든가, 참을성이 있다든가, 여우같다 라든가, 영민하다, 외곬수다, 불필요하게 나댄다, 끼가 많아 보인다 라든가, 음침하다, 자신 있어 보인다든가, 도도하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다, 당차고 드세다, 난리도 아니다, 개차반이다, 얼마든지 이런 단어들을 열거할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이 어디에 해당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멍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잃어버린 긍정의 감각을 찾기 위해 스스로의 내면을 충실히 바라보는 성찰형 인간으로 거듭 났다고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감각을 상실한 자의 내면 또한 공허한 것이니까요. 자기 의존력이란 자기 집중력과는 다른 것이니까요. 타인에 대한 소소한 관심과 타인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이성이 아닌 감각이 열려 있을 때 비로소 활동력을 갖게 되는, 우주만물의 생리구조라는 말씀입니다. 내 드높은 코는 마치 아름다움의 대가로 별도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듯이 내 코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원초적 감각을,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감각을 가져가 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 나는 나 자신의 어둡고 부정적이며 버리고 싶은 감각들을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타인에 대한 나의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발발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애프터서비스 콜

    나는 용기를 내어, 내 코를 시술한 그 도도하면서도 멀쩡하게 친절한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물론 의사와 직접 통화하기 전에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야 했지요. 까칠한 듯하면서도 상냥한 그 매니저는 마치 다사로운 아침 햇살을 받으며 꽃꽂이라도 하는 듯한 음성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더군요. 단골 은행이라도 된다는 듯이, 고객님 운운하면서 말이에요.

    그곳이 정말로 은행이라면 나는 원금 상환을 요구하듯이 원래의 내 코를 돌려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겠지요. 아, 물론 우월하게 우뚝 솟은 내 코를 돌려주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아, 과연 시간이 지나서 약발이 빠지면 나는 원래의 내 코를 되돌려 받을 수 있기나 한 것일지).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매니저에게 나는 시술의 부작용 사례에 대해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매니저는 어찌나 영악하던지 먼저 무언가의 정보를 건네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떤 부작용이라도 있는 거냐고 말하더군요. 나는 코의 감각이 좀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냄새를 잘 분간하지 못하시나요, 라는 매니저의 말은 마치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냐고 묻는 것처럼 수치스러웠습니다. 향기라는 단어를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매니저는 평소의 그 새침하면서도 상냥한 표정을 보자기에 싸두었는지, 한껏 도도함을 뽐내면서, 남다른 아름다움을 소지하려면 그만큼의 불편쯤을 감수하는 게 대수냐는 듯한 어조로(절대로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런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겠네요. 생각해 보니, 우리는 어찌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무수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는지......), 무슨 변화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거기에다 대고 내가 나에 대한 집중력을 상실했다느니, 타인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는 말을 한다면, 매니저는 옳다구나 싶게 나를 정신이상자나 분열자로 몰아갔겠지요. 외모지상주의자들이란..... 이라고 금방 태도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요. 생각해 보니, 병원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런 뉘앙스를 마치 밑자리를 깔아두는 것처럼 풍기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들과 외모지상주의자들은 정말로 한끝 차이니까요. 미모를 아끼는 사람들과 외모집착형 인간들이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경제관념이 있는 사람과 인색한 사람, 자기절제력이 있는 사람과 독한 사람, 매너남과 바람둥이, 개성적인 사람과 고집 센 사람, 순수한 사람과 성장이 덜 된 숙맥, 정직한 사람과 독설가, 글래머와 비만녀, 오타쿠와 취향의 인간, 애호가와 중독자, 천재와 바보란 게 결국은 같은 사람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했습니다. 말을 하게 되면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하지만 의사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만은 걷어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통화를 해야 했으니까요.

    부작용에 대해 알고 싶다는 나의 말은 의사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의사는 자신의 완벽한 시술에 태클을 거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애써 부여해왔던 고결한 고객님의 지위를 훌쩍 걷어내고서 곧장 멍청한 환자로 취급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아마도 그 병원의 성공적인 경영 원칙이기도 할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순간 나는 고객에서 환자로 추락하고 만 것이었지요. 부작용이라는 금기의 단어를 입 밖에 내어, 질문이라는 갈고리를 던졌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 갈고리는 정확하게 의사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것이 분명했습니다. 내 인생에 잘못이란 없다, 내원객에게 사과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경영 원칙에 예외란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약간 콧대가 휜다든가, 콧망울이 불균형한 것은 부작용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은 간단한 리터칭으로 충분이 수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시술의 과정에 속하는 것이지, 부작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지만, 고객님의 경우는, 아, 리터칭 기간에 내원하지 않으셨군요. 그럴 경우, 수정이 필요하다면 추가 비용이 필요합니다만, 특별히 고객님께는......

    그런 건 아니에요. 코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아, 그럴 겁니다. 저희는 항상 정품을 쓰니까요. 알레르기나 안면 마비 따위는 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저희는 리터칭이 필요 없는 완벽한 시술을 하려고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객 만족도도 최고의 수준이지요. 국내 고객만으로도 언제나 예약이 넘치기 때문에, 외국인 예약은 받지 않고 있지요. 중국 쪽에도 워낙 유명하다고 소문이 나서 문의 전화가 어찌나 많이 오는지, 매니저가 수고가 참 많지요. 음, 재시술 기간이 되면 저희 쪽에서 먼저 체크해 드려서, 남들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도록, 철저히 고객 관리를 해드리고 있어요. 평생 만족 시스템이라고나 해야 할지, 마치 고객님이 원래부터 그런 모양으로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저희 기술력과 고객 관리는 최고 수준이지요. 아, 그렇다면 무슨......

    어쩐지 좀 감각이......

    아,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겁니까, 혹시?

    순간, 나는 매니저에게서 느꼈던 똑같은 모욕감이 느껴졌습니다. 의사는 그렇다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타인이 내게 느끼는 부정적인 감각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시큼하고도 씁쓸한 의심과 경멸의 냄새 말입니다.

    아, 아니에요. 냄새는, 아, 향기는 잘 맡고 있어요. 그런 건 문제없어요.

    나는 마치 동물병원에 찾아온 개나 고양이가 되어 주인을 통해 수의사와 교신하는 것처럼 나의 냄새 맡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내가 불편을 느끼는 코의 감각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개와 고양이가 주인을 통해 전달할 수 없었던 종류의, 말할 수 없는, 신호조차 낼 수 없는 불편함에 대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인데 말입니다.

    시술의 부작용에 대해 간혹 심인성 사례가 보고된 바가 있기는 합니다만.

    의사는 수화기 너머로 의혹과 불신의 신호를, 마치 쏘아진 화살표 묶음을 툭 건네듯이 건네주더군요. 나는 의기소침해졌지만 더 이상 대화를 진척시키는 것이 서로에게 불편을 가중시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통화를 마치는 의례적 인사를 건넸습니다만, 전화는 끊기지 않고 매니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매니저는 나와 의사의 통화 내용을 내내 듣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도록 답변을 대신해주더군요. 아, 마치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든지 달려오는 영화 속의 김반장처럼, 매니저가, 내 귀의 도청장치같이 숨어 있다가 통화를 가로채, 뭐든지 해결해주겠다는 준비 자세로 통화를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시술의 부작용은 환자에 따라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매우 희소한 것으로, 학계의 따르면 다소간, 또는 확연한 성격 변화를 수반하여 심리불안, 대인기피증 등이 보고된 바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 원장님이 꼬박꼬박 월세를 내어, 머지 안아 건물주로 자리바꿈할 이 건물 3층의 병원에서는 있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부작용이 있다면, 그건 심인성으로서, 이 병원에서는 내가 최초의 사례가 되어, 심리불안이나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부작용 환자에 관한 임상 사례로서 학계에 보고된 논문의 타당도를 높이는, 모델케이스에 해당하리라는 요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냄새를 맡지 못해요. 나 자신에 대한 좋은 향기를, 그리고 타인의 것을,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에 대한 안전하고도 균형이 잡힌 향내를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호소하면서 사례를 탐문하고 싶었지만, 아마도 그런 사례는 보고된 바가 없거나, 적어도 이 의사가 알고 있지는 않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의사들 사이에 비밀리에 오가는, 학계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대중에게 알리지는 못하는, 일급 정보로서 쉬쉬하면서 축적해오고 있는 비밀 자료에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어째든 어떻게든 유사 사례를 찾아 도움을 얻고 원래의 감각을 회복하고 싶어 했던 나 자신의 희망사항일 뿐이었겠지요.

    나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인터넷 정보를 탐색해 보았습니다. 의사나 매니저에게 매달려봤자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시간 낭비였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탄생시켜준 일종의 산파로서의 역할까지가 의사의 몫이었으니까요. 누구도 산파에게 내 인생을 책임지라고 하지는 않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그저 산파의 노고를 치하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그와의 단기 계약적 관계를 맺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미의 산파(이것은 그 병원의 벽에 아름다운 붓글씨로 적힌 글자 그대로의 내용이기도 하였습니다. 큰 붓으로 먹을 흠뻑 적셔 쓴 것이 분명한 그 글자의 모양이 너무나 근엄해서, 보는 순간 웃을 수도 없는 글자였습니다만, 아마도 포스트잇이나 쪽지 따위에 볼펜으로 흘려 적은 글자였다면 웃지 않을 수 없는,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코믹한 문구였지요. 하지만 위엄 있는 사이즈의 글자로 적혀 금색 프레임으로 장식되어 벽에 걸린 그 액자를 본다면 누구도 웃을 수는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감히 웃을 수 없게 하는 붓글씨의 포스가 마치 나를 믿고 따르라는 계시처럼 느껴지기조차 했으니까요. 정말 그 병원은 흥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꽉 잡아채는 것으로 경영 원칙을 삼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 정말 믿음직한 영악함이었지요.)에게 내 인생을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일 테니까요.

    인터넷 검색 창에 코시술 부작용이라고 치자 상당한 분량의 사례가 찾아졌습니다만, 대개의 정보는 나와 통화했던 의사가 부작용이 아니라 시술의 과정에 해당한다고 말한 리터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대개가 코의 형상성에 대한 부작용들이었지요. 냄새에 관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향기라니요. 그런 것은 도대체 한 글자도 얻어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는 나의 특별한 사정을 위해 정말로 필요한 정보는 없는, 기묘한 곳이었더란 말이지요.

    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은 정말 절망적이고도 미칠 지경인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의 우월해진 외모, 오똑한 코의 형상미에 대한 만족감(아, 그것은 사실 심리적으로 흡족함을 주는 만족의 감각이라기보다는, 만족에 대해 내 경험의 축적이나 지식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지.)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긍정적 포인트도 찾을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완벽해진 코를 가진 덕분에, 내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해왔는지, 그것을 어찌나 타인과 나누고 싶어 하던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상실된 형태를 통해서, 내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의 형태로서 말입니다.

    나는 마치 타인의 음흉한 속내를 읽는 심연의 복화술사처럼, 타인이 몰래 감추어둔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들, 불길하고 어두운 감정에 예민해져갔습니다만, 반대로 그들이 보내는 긍정의 사인을 어느 곳, 어느 때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아, 그것이 내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라고 하지는 말아 주세요. 도대체 단 한 사람으로부터라도 좋은 신호를 받을 수 없는 인간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내 이성이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것은 화염이 가득한 장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문을 찾는 사람처럼, 절박하고도 절망적으로 나 자신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느 순간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답답하고 괴로워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코를 가졌으니, 그래서 완벽한 미모의 소유자가 되었으니, 그 정도는 감내하는 게 옳다거나, 어쩔 수 없으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런 당신의 위로 속에는 외모지상주의를 추구하다가 내면을 잃어버린 나를 멸시하고 비난하는 뾰족한 입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리고 나와 당신의 관계로서도 불행이로군요. 참담한 불행이로군요.

    나는 문득, 어쩌면 의사가 넌지시 알려준 대로, 정말 심인성 증후군에 시달리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문제해결이 보이는 법이니까요. 나는 나 자신을 관찰해보기로 하였습니다만, 사실은 지나간 내 경험의 흔적들을 상기해서 무언가 그럼직한 스토리가 만들어지도록 기억의 지도를 만들어 나갔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시술을 마친 이후에 달라진 나의 감각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느새 사라진 나의 긍정적인 감각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덧 나를 엄습해 온 불안과 불편의 감각에 대해서 말이에요.

    불안에 사로잡힌 이유는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어쩌면 생체적인 발발이었을 테니까요. 뚜렷한 사건이라면 그건 코 시술을 성공적으로, 그것도 아주 예외적 수준에서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사실일 테지요. 미세하게 달라진 코의 높이가 내 인생의 감각을 이다지도 바꿀 수가 있다니, 도대체 나란 존재, 감각의 존재였다는 것을 코의 형상이 수정된 이후에 깨닫게 되다니, 하는 한탄은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이너스의 지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교체할 수도, 수정할 수도 없는, 말하자면 리터치가 불가능한 확정된 사실이었으니까요. 그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나의 과거에 발생한, 일말의 의심도 허용할 수 없는 사실이었단 말입니다. 도대체 나는 영혼이 증발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의사는 시술에 사용하는 의약품은 인체 조직과 거의 흡사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백 퍼센트 정품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말했었지요. 아, 의사는 거의 모든 말에 거의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완전히 단언하지는 않음으로써 무언가에 대한 여지, 말하자면 도망칠 구멍을 만드는 화법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었는데, 처음에 나는 그런 표현이 왠지 겸손해 보이고 솔직한 것 같아서 무척 마음에 들었었지만, 상황이 바뀌고 보니, 의사가 거의라는 단어를 써가며 하는 모든 말에 내가 수긍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의사의 모든 행위를 지지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리적으로가 아니라 법적 효력을 갖는 동의와 지지로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의사 자신은 단연코 무죄(아, 죄라기보다는 뭐랄까, 면책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인지하는 부작용은 오직 나만의 문제로서 나 스스로 해결해야 마땅한 것이라는 것을, 내가 의사와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나 자신이 스스로 수락하고 동의해 왔었던 것입니다(아,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인데 자꾸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 내 마음 속 어딘가에 모종의 억울함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분명하겠군요. 이 역시 긍정적인 요소를 감지하지 못하는 부작용의 일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코에 삽입되어 이제는 코의 일부가 되어 버린 그 의약품은 성분이 인체와 거의 흡사한 것으로, 좀처럼 부작용이 나지 않는 무해한 물질이라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백 퍼센트의 정품이었지요. 미국의 유명 제약회사 P사의 백 퍼센트 정품 말입니다.

    하지만 침팬지와 인간이 98%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2% 때문에 종이 다른 생명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차이의 기본은 극세사 나노 사이즈의 바로 그 미미함에 있는 것이니까요. 눈금으로 잴 수 없이 근소한, 그러나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감정에 정직해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지요. 차이가 아주 크다면 존경이나 사랑 따위의, 애초에 류가 다른 감정적 반응을 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무리 인체 조직과 유사한 물질이라고 해도, 바로 그 한 끗의 차이로 종이 다른 삶을 살게 된 나 자신에 대해,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이해시킬 수 있는 어떤 이유가 나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 그것은 어찌나 하염없는 여정이 되었던지, 처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더란 말입니다. 질문을 가진 순간, 해결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질문을 가진 채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의문의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나만의 문제로서 말입니다.

    나는 인터넷으로 성형 동호회 카페에 가입해 보기로 했습니다. 성형과 시술을 엄밀히 가르는 카페도 있었지만, 대개는 동지애를 발휘해서 서로가 서로를 더 많이 감싸 안아 다수의 위안과 격려를 통해 힘의 강화를 얻으려는 매커니즘이 지배하고 있었으니까요. 단순한 경험 공동체만이 아니라, 모종의 피해자 집단이랄까요. 분명히 돈을 지불하고 어떤 효과를 구매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성형 동호회 사람들은 자기 투자라는 말의 이면에 모종의 피해의식과 불안의식을 공기처럼 호흡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만 초보자로서의 내 기분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유사 경험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선택이 올바르며 앞으로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서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자는 취지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물론 성형과 시술을 엄밀히 가르면서 미세한 차별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태도는 어려움에 처한 동지애를 방해하는 것이라 여겨졌던지, 대체로 좋은 평가를 얻지는 못하고 있는 듯해 보였습니다.

    나는 이 안에서 나와의 유사 사례를 찾아 대화를 하면서 같이 해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여럿이 힘과 지혜를 합하는 게 나을 테니까요. 익명으로 무책임한 정보를 나누는 포털 사이트의 정보보다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 자기 정보를 드러내면서 이루어지는 동호회라면 서로 간에 책임 있는 발언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호회 카페에서 그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코시술 이후에 약간 움직임이 불편해졌어요.

    ㅋㅋ 원래 우리는 코를 잘 안 움직였어요. 달라졌다는 사실에 집착하니까 코의 움직임까지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코를 움직였었는지^^

    정말 글쿤요.ㅋㅋ

    콧구멍은 움직였잖아요.ㅋ

    아, 그렇네요. 콧구멍....!

    콧구멍이 이상하세요?

    그런 건 아닌 듯... 넘 예민해져서 그런가봐여.^^

    동호회답게, 게다가 아픔을 나눈 공통점을 지닌 동호회답게, 거기에는 상호 지지와 격려의 멘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당장 퇴출당한다는 암묵적인 룰이라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인지, 거기에는 그야말로 긍정의 멘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거기엔 ㅋㅋ와 ^^로 넘쳐나는 호의의 공간이었지요. 상호적 격려와 협력 의지로 가득 찬 곳 말입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사연과 댓글을 읽어가는 동안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긍정성의 무엇이 아니라, 긍정의 외연 아래로 짙게 깔린 불안의 그림자였습니다. 긍정은 그저 포즈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짙게 드리워져 좀처럼 떨치기 어려운 불안의 덩어리들이 흡착되어 있었다고나 할까요.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자신의 경험에 대한 동의와 지지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가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증거이자 애정결핍의 고백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또한 이미 균형이 깨져버린 코의 감각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세상을 느끼는 무언가의 시스템이 조금씩, 처절하게 망가진 상태였으니까요.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과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성형 동호회 카페에서는 내가 찾는 답을 결코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그만 알아버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이다.

    시술한 의사도, 언제라도 내 편에서 도움이 되어 줄 것 같았던 매니저도, 같은 경험을 가진 동호회 회원들도, 나에게 그 어떤 도움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정한 원인이 분명하게 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내 코는 냄새나 향기를 맡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사직동에 있는 시립 어린이 도서관의 계약직 주급 사원으로 일하는 나의 직업에도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사태였지요. 게다가 나는 1910년대 희귀본 어린이 잡지를 스캔하여 보관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별달리 타인과의 접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직접 부딪쳐서 일을 하지 않는 대신에 나는 도서관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었을 때는 양자 간의 조화로 아무런 감정을 전달받지 못했었지만, 이제 긍정의 감각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둡고 음침한, 불편하고 어려운, 고통에 가까운 부정성의 심성을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아, 이제는 균형이 깨어진 코의 감각이 나 자신이 타인의 긍정적인 감정을 읽을 수도, 느낄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거대한 부정성의 공기들을 감정의 쓰나미처럼 대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민해진 것은 언제나 쉴 틈 없이 브라운 운동을 하는, 뇌의 작용이었습니다(실제로 뇌가 브라운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정신없이 혼돈스럽게, 그러나 크게 보면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는 내 두뇌 안쪽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로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로군요). 코가 전달해주던 일부의 감정 전달 체계가 망가져버리자, 나의 두뇌는 이제 그 부족하고도 결여된 기능을 대리보충이라도 하겠다는 듯,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었지요. 그것은 마치 알전구가 반짝하고 켜지듯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A 잡지의 1912년 7월호부터 스캔하도록 하세요. 절대로 제본된 곳의 가운데를 펼치지 말고 양 끝을 문진으로 살짝 눌러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요.

    이 말은 며칠 전 5월호와 6월호의 작업을 할 때와 숫자만 바뀐 채 어휘적으로 동일한 문장으로 건네졌지만(어찌나 그토록 똑같을 수 있었던 것인지, 나는 마치 지난 번 발성을 송두리째 컨트럴 C키로 복사했다가 컨트럴 V키로 붙여버린 줄 알았다니까요.), 그 뉘앙스는 몹시도 달랐습니다. 그때에는 알지 못했던 권위적이고 위압적이면서도 꽤나 불쾌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게 그 사람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의 날씨 때문이었는지, 같은 업무를 반복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는지, 아침에 있었던 남편과의 소소한 언쟁 때문이었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지요. 모든 원인은 결과로 불거지기까지 수많은 가깝고 먼 요인들이 접속하고 여러 변종의 화학 작용을 함으로써 원래의 순정한 자기 모습을 숨기는 법이니까요.

    아무튼 주임의 목소리는 습도 83%의 날씨처럼 축축하고도, 채도가 낮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자신에 대한 호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건 단지 내게 호감의 센서가 사라졌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주임에게서 그런 감정이나 감각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지금 내가 예민해졌기 때문이겠지요. 이전 같다면 친절과 예의가 덧칠되어 불편한 감각 따위를 파악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아, 그러니까 나는 불행해진 거란 말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차질 없이 세심하게 희귀본 잡지를 한 장씩 한 장씩 스캔하기 시작했습니다. 차질이라니요, 그 순간 나는 해고될 확률이 급증할 것이기 때문에 실수 따위는 절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수를 복원할 기회를 갖는 것은 정규직만의 특권이었으니까요. 사원 내규라는 것은 여전히 정년이 보장된 선택받은 요원들 위주로 형성되고 유지되며 수정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주급 계약직 인턴을 위한 내규 따위란 존재할 수도 없었고, 그런 상상의 여지조차 가져볼 수 없는 것이 바로 계약직의 존재 조건이었으니까요.

    때문에 나는 점점 더 일용직 업무에 헌신하며 나 자신의 기술을 발전시켜 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계약직인 관계로 이전 직장에서 익힌 기술이 곧바로 다음 직장에서 발휘되거나 발전적으로 계승되는 경우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검수하는 작업을 반복했다고 해서 그것이 복사 업무를 원활하게 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내 삶은 직업적으로 쪼개지고 잘라져서 단지 그때의 경험만을 고수하고 괄호쳐버리는 것으로 분절되어 전개되고 있었다고나 할는지요. 그것은 그냥 그때그때의 생존의 법칙으로서 나 자신의 몸에 쌓이게 된 한시적 숙련에 불과했다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나는 시선을 외로 두고 피자 도우를 머리 위로 높이 던져 올려 세 손가락으로 거뜬히 받아내는 피자의 달인처럼, 스캔이나 복사라면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반듯하게 해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습니다(그러고 보면 판매직보다는 역시 복사 업무가 내 적성에는 맞는 모양이네요. 이전 직장에서 나는 한 번도 판매왕이 되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물론 대형 마트의 검수 보조 일도 곧잘 했습니다만, 그것은 그저 숫자를 세어 맞추는 것이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페이지를 세는 복사 업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겠습니다.). 이 명민하고도 문제적인 코의 시술 비용도 꼼꼼히 복사해서 착실하게 모은 돈으로 마련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 거만하고도 호의적인 의사의 친절한 눈빛 서비스까지 아낌없이 받으면서 말입니다.

    복사 일처럼 반복되는 업무를 하는 동안에는 정신 집중을 할 수가 있어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잃어버린 감각, 망가진 균형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문제는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단지 복사기를 함께 쓰는 직장 동료(물론 그들 모두는 나보다 직급이 높으니까 동료라는 말이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그런 표현을 나 스스로 입 밖에 내본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이거 은근히 스릴이 있군요.)이거나 귀중본 도서를 열람하러 오는, 나에게는 구체적인 관계가 필요 없는 익명의 학생과 연구자, 동화작가, 때때로 나이든 할아버지들이었지만, 감각의 균형을 잃어버린 나로서는 이제 그들이 하나하나 영향력 있는 내 삶의 환경으로서 감지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긍정의 요소가 거세된, 부정성 가득한 개체로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힘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증기기관 같았던 것입니다. 긍정과 부정, 호감과 혐오가 일종의 매너라는 촉매로서 융화되어 투명하게 존재할 수 있었던 평화의 시기가 나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이었지요. 내 곁에 머물거나 지나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감정의 신호를 보내며 자기를 표현하고 또 감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내 삶의 환경적 인자였던 것입니다. 이제 내 감각의 균형이 보기 좋게 깨어지고 난 뒤에 나는 그 사실은 뒤늦게 알아차리는 불행의 한 가운데에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산소와 질소, 헬륨 분자들이 하나씩 모여서 공기를 이루고, 날씨를 이루고, 계절을 이루어 환경이 되듯이, 사람이라는 분자들이 하나씩 모여 공간을 채우고 사회를 이루는 환경이 된다는 것은 나에게는 재난의 경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몰라야 할 것을 알아버렸을 때, 그것이 매우 곤경스럽고 난처한 것이라면, 재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가 달라졌으리라는 파스칼의 추측은, 아, 이 시점에서 나는 왜 그런 철학자의 이름이 적절하게 떠오르는 것인지, 정확한 예고였던 것입니다(역시 그는 천재였던 것 분명합니다. 공연한 가정이 아니었던 거지요.). 내 코가 단지 조금 높아졌다는 이유로 나는 완전히 종이 다른 개체가 되어 세계와 융화하지 못한 채, 홀로 우뚝 도드라진,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긍정적 센서가 사라진 나의 감각이 타인의 부정적 마음이나 감각을 정확한 단어나 어휘로 읽어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뭐랄까, 총체적인 느낌의 체계라고 하는 게 좀 더 가까울 것 같군요. 시시각각 날씨가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저 맑음, 흐림 따위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말하게 되듯이,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같은 정도의 어휘 수준밖에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감각을 상실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착하다느니, 즐겁다느니 하는 말이란, 정말 아무 것도 표현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단어들이 아니겠습니까. 기분이 나쁘다느니 불쾌하다느니, 하는 것들은 너무도 싱겁고, 사실 아무런 정보도 포함하지 않는 단어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의 상태를 단순화시켜버리는 것이지요. 날씨를 표현하는 언어가 간편함을 선택한 대신 세심함을 포기한 것처럼, 마음을 표현하는 기호에 대해서라면 사람들은 여전히 무능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개의 사람들이 몸과 마음의 안쪽과 기억 속 깊숙한 곳에 품고 있는 부정성의 감각과 감정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만큼이나 변화무쌍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치 심전도나 뇌파를 기록한 그래프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며 움직이는 부정성의 감각들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민한 것은 피곤한 것이다, 사람은 무던해야 좋지, 라는 말이야말로 원래부터 감각이 무딘 사람들의 자기 위안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나로서는 이제야 비로소 예민한 것이 왜 피곤함이 되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 대한 피로도를 가중시키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부정성의 감각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누군가 겪는 마음의 상처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색의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섞여 색맹 검사지를 이루듯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열대 과일들을 섞어 갈아 트로피칼 쥬스가 되듯이(아, 그것은 또 어찌나 무책임한 명명이던지. 트로피칼이라니......), 각자의 마음 속 응어리에는 여러 가지 감정의 이야기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뭐랄까 나는 그것들을 언어가 아닌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것이 단지 사람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쓰레기통 옆을 재바르게 지나가는 검정고양이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져 골라 먹은 음식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고양이는 어쩐지 낭패한 기분이 되어 신세한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 자신이 알아차렸기 때문이지요. 고양이는 뭐랄까, 비터 사우어하다(It's incredibly bitter sour!), 씁쓸하고 쉬어 터졌다는 불만을 터뜨리며, 예의 그 점잖은 자태를 유지하면서도 재바른 속도로, 타고난 턱시도 몸매를 뽐내며, 이것이 고양이의 걸음이라는 듯, 우아하게 쓰레기통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고 보면 나는 정말로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마음의 신호를 보내는 환경 요인에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고양이까지 가세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개나 비둘기, 참새, 제비, 어쩌면 하루 묵은 바나나 껍질 속에서 이제 막 기지개를 펴고 나온 하루살이의 환희 터지는 음성이나 욕실 천장 모퉁이에서 자가 설계의 집을 짓고 있는 거미의 자뻑하는 소리, 도대체 지루할 틈이 없이 할 게 많다는 위풍당당 일개미의 음성까지도 나는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아, 단지 코가 조금 높아졌을 뿐인데, 나의 삶은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혹시라도 희귀본 잡지의 지면이 훼손될까 신경을 쓰면서 스캔을 할 때에, 나는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잠시 손을 놓고 쉬면서 주변을 돌아보거나, 눈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여지없이 그 마음에서 풍겨 나오는 부정성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뭐랄까, 어떨 때는 정말로 마음이 저릿해질 정도로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상처가 아주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슬픔에서 연유하고 있을 때, 마음의 화학 변화를 일으킨 누군가로부터 피할 새도 없이 상처받아, 씁쓸하고도 시큼한 마음의 고통이 전해왔을 때, 가끔은 심장이 부푸는 것 같이 숨이 차는 경험도 한 적이 있으니까요.

    왠지 그 사람을 돕고 위로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면 내 입장이 매우 곤란해질 뿐더러 상대방도 곤혹스러워지리라는 것을 내 이성은 분명히 감지하면서 내 감정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상한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감각을 상실한 대신, 이성이 과부하된 것이었지요. 하루 종일 틀어놓은 에어컨 팬처럼, 뜨거운 열을 내뿜으며 폭발 직전의 열기를 뒤로 한 채, 차갑고 냉정한 마음을 언제까지나 붙들고 있도록 지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면 되도록 나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반듯하게 복사해서 오늘의 분량을 마쳐야 한다,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집중하는 동안에는 감각의 피로도를 낮출 수 있었으니까요. 말하자면 마음의 진공 상태에 나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일에 집중하면서 지낼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귀중본 열람실의 폐가 시간은 다른 곳보다는 빨랐고, 근무 시간 이후에도 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규칙은 지켜져야 했고, 주급 단위의 계약직으로서, 나 자신이 거기에 이의를 걸어 규칙을 바꿀 수 있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마음에 드는 음식을 먹을 때나 책을 볼 때, 잠을 잘 때도 상태는 괜찮았습니다. 다행히 나에게는 혼자 지낼 수 있는 나만의 방이 있었으니까요. 나 혼자 사는 2층의 원룸(누군가는 고시텔이라고도 했습니다만) 말입니다. 단, 텔레비전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이라는 기기가 없었기 때문만이 아니라(나는 항상 노트북을 통해 텔레비전을 보았으니까요.), 거기에는 사람이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하는 말과 속마음이 괴리되었을 때, 서로의 원심력이 팽팽히 당겨지는 긴장감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경쟁 구도가 확실하고 정확한 규칙이 지배하는 스포츠 경기와는 상황이 달랐으니까요. 게다가 환희나 기쁨, 만족이나 즐거움 따위의 긍정성이 사라진, 불편하고 곤란한 부정성의 감정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각자를 잡아당기며 힘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복잡하다기보다는 시끄러웠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 되었겠지요.

    근무 시간이 끝난 뒤, 나는 도서관의 일반 열람실로 내려갔습니다. 아무래도 내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나는 ‘정신분열’이나 ‘과대망상’ 등의 단어를 검색하면서 내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심리치료 서적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 도서관이었는지라 그런 책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을 뿐더러, 가끔 발견한 책에서는 너무 어려운 말로 무언가의 질환에 대해 적고 있어서, 도대체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한글로 되어 있는데도 외국어보다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대중을 위한다는 취지로 쉽게 풀어쓴 책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증상이 별스럽지 않은 소소한 것들을 신변잡기처럼 풀어낸 것들이더군요. 아동의 심리 불안이나 의존성에 대한 책들, 정신이 산만한 아이들이나 언어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에 대한 일상적 조언들이 적혀 있었지만, 무언가 딱 들어맞는 케이스를 찾기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나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일반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대체 가당키나 한 욕망인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로 원하는 정보를 찾는다는 것은 이처럼 어렵고도, 심지어 불가능한 것이었는가, 새삼 생각해보게 된 것이었지요.

    나는 이에 관해서는 인터넷 검색으로 사례를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성형 동호회 카페에 가입했던 경험이 그다지 유익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갑자기 홀로 고립된 느낌이 들더군요. 외롭다는 것은 이런 것일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니까요. 누구와도 나의 현실을 나눌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을 때, 나는 이 변화무쌍한 환경의 고립된 개체가 되어 버린 것이었지요. 그 막막하고도 처절한 기분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는지, 또 전한다 한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나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는 불안과 불편의 망령이 깃든 것처럼 몹시도 황황하고 외로웠습니다. 아, 이렇게 해서 나는 기묘한 존재가 되어가는 거로구나,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실패는 기회다(이런 말이야 말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적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들을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실패는 기회인가요.), 그러니까 이 희귀하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을 나만의 고유한 장점으로 살려서, 이 지루하고도 피곤한 인생을 즐겨보자, 뭐 이런 생각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이제 ‘즐겨보자’는 것 자체가 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지요. 이성이 불러온 나의 기억 속 지식의 형태로서 그것은 가능한 선언이었고,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였지만, 나의 신체와 감각 속에서 그것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다시 절망으로 향하는 생각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한 없이 가속도가 붙은 기세로 내리막길을 치달려야 했던 것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감정에 휩싸여 있다, 가 아니라 사람들은 항상 감정의 한 가운데에 휩싸여 자기만의 노를 저어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들뿐이었지만 말이지요. 사람들은 항상 여러 가지 감정들의 화학작용에 휘말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딸기바나나 쥬스나, 민트 초코칩 아이스크림, 삼 대 일로 섞은 식초와 간장처럼 서로 다른 두 성분이 섞이되, 항상 조화롭게 어울려서 더 큰 만족을 주는 그런 성공적인 조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뭐랄까, 소주에 올리브오일을, 포도에 홍삼을, 토마토케첩에 두유를 섞은 듯한 곤란하고도 낭패스러운 조합이라고나 해야 할는지요.

    사람들이 자신의 불행과 불편함, 부정적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그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차리는 감각도 저마다 달랐던 것이지요. 그들의 내면을 송두리째 훤히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처리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순간순간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나 곤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주파수가 다른 음계를 듣는 박쥐가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사람의 몸에 박쥐의 귀를 가졌다면 도대체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도대체 나는 사람의 몸에 좀비 같은 심장을 가진 기분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음험하고, 숨기고 싶은 어두운 데를 알아차려 버리는 좀비 말입니다. 정말로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그곳을 파고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에 절대로 접속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생각했습니다(아, 이럴 땐 어쩐지 공상과학 만화를 많이 보았던 것이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지.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던 것이었는지.).

    단지 코를 조금 높이는 시술을 했다는 이유로 이런 대가를 치르는 것은 매우 불공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조금씩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느라 심호흡을 하였더랬습니다. 지금의 내 상태는 내가 원하거나 기대했던 것이 아니어서, 나 스스로 감당하기도 어려웠고, 그 때문에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던 그런 일이었던 것이지요.


    J가 밥을 먹자고 해서

    밥을 먹으러 가자는 동료 J의 심상한 말 속에서도 나는 무언가 내키지 않는 불투명한 기운을 읽었습니다. 오늘 눈길이, 뭔가 깨끗지 않군, 뭐지, 저런 눈빛, 하는 따위의 느낌은 정확히 어떤 언어로서가 아니라 마치 마음에 여러 가지 색깔의 커튼이 하늘거리는 듯 스쳐 지나는 기분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왠지 소화가 안 돼서 그냥, 커피나 마실까 해(아, 나는 J에게 삐친 걸 혼자서 티내고 있었나 봅니다.).

    소화가 안 되는데 커피가 되겠어?

    그냥, 빈속은 좀 그러니까. 입맛도 없고(어쩐지 변명하는 기분이군요).

    그럼, 그러던지.

    J의 대답은 애초에 내가 원하는 대답이었는데, 어쩐지 서운하더군요.

    J는 내게 모처럼 말을 건넸는데 거절당했다고 생각했는지(아, 그는 나와는 처지가 달라, 대학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입사한 정규직 9급 공무원이었습니다. 서서 일하는 나와 달리 그에게는 엄연히 혼자서 방해받지 않고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칸막이가 세워진 책상도 있고 그 위에 비록 약간 구형이기는 해도 당당히 그만의 컴퓨터가 놓여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 J를 내가 우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다만 나이가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출생 년도에 대해 빠른 몇 년생이라고 말한다면 뭔가의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습니다. 다행히 서로의 생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그런 위험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말을 놓게 된 것은 우연한 실수에서 비롯되었지만, 곧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는지, 우리는 곧 말을 놓게 되었지만, 사실은 반말과 어중간한 존대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별로 말을 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예의 그 무던한 말투에서는 섭섭함이라기보다는 난처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뭐,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겠지요. 그는 어쩌면 밥을 먹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그런 기분이 느껴지더군요. 자신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상대란 반드시 필요한 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원활한 관계의 균형이 망가진 채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정직원으로 살아가는 뿌듯함이라든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기대에 대한 어떠한 호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달라진 감각 때문이겠지만 말입니다. 그에게 내재하는 긍정적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오직 그 반대급부의 부정적 감정만을 인지하는, 나의 깨어진 균형 감각 때문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상실된 균형 감각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타인과의 직접적인 접속을 차단한 채 살아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을 뿐더러, 살아가는 데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살아 있지만 타인에게 접근할 수 없다, 함께 있지만 섞여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투명한 감옥에 갇힌 것처럼 불편하고 비참한 기분이었습니다.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는 삶이라고 해 본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만, 그런 고립이나 차단, 격절감은 심한 경우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 심각성에 대한 이해는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부정성의 감정들은 내가 그에 대한 총체로서가 아니라, 긍정의 요소와 그 밖의 다른 것들이 결여된 요소로서 상정해야 할 것들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감지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좋은 것들, 무언가 호감어린 감정들이 단지 누락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려야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제 긍정성에 대한 것은 내가 상상을 통해서 복원해야 할 과제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아, 나는 언제까지나 이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는지요. 아마도 나는 어떻게든 지속해 나갈 것입니다. 그게 아닌 다른 삶은 없을 테니까요. 물론 나는 이 상태를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놀이공원의 자유이용권을 최대한 이용하는 즐거움을 누리려 할 때처럼, 이제는 다른 감각의 균형을 상실해 보는 또 다른 아찔한 인생을 살아봐야겠다고 생심을 낼 수도 있었겠지요. 내 얼굴의 다른 부분에 대한 시술을 시도하면서 말입니다.

    이미 안면을 튼 그 전도유망하고도 잘 나가는 성형외과 매니저를 찾아가 상담을 한다면, 아마 어떤 경우일지라도 염가의 할인 혜택을 운운하며 나를 특별 대우해줄 것은 분명했으니까요. 아, 그것은 병원의 경영 방침이기도 했으니까요. 누구에게나 단 하나의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정성스러운 맞춤형 눈높이 서비스 말입니다. 현찰을 들고 간다면, 언제까지나 친절할 것 같은, 그 아늑하고 기품 있는, 누구에게나 도도하지만, 오직 비용을 지불하는 나에게만은 다함없이 다정한 낯빛으로 환영해주는 실력파 의사의 바로 그 병원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모험심을 다시 가져보기에, 나는 어쩐지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남과 다른 감정의 반응 체계를 경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전에는 가져본 적이 없는 감정 체험이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모아놓은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별도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몇 달로 분할해서 후불로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돈이 별로 없는 나에게도 의사결정의 제일 요소가 돈은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해 두고 싶군요. 정말로 그걸 강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점심도 먹지 않고 커피로 때우려는 것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건만, 일단 말로 뱉어낸 것이니 지켜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커피를 마시러 조금 걷기로 했습니다. 1층에 커피 자판기가 있었지만, 어쩐지 점심을 대신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처에 커피 전문점이 없으니 조금 멀리, 적어도 점심을 먹으러 갈 식당만큼은 걸어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산책도 하면서 손과 다리를 쉴 필요도 있었으니까요. 아무래도 복사 업무는 뒷목을 긴장해야 할 정도로 집중력을 요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요.

    어, 커피 마시러 가는 거야?

    도서관 정문을 나서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뒤에서 J가 말을 건네었습니다. 나보다 먼저 내려갔는데, 내 뒤에서 나에게 말을 건 것입니다. 아마도 지갑을 가지러 자리에 들렀었거나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온 모양이었지요. 얼굴만으로는 감정의 변화를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차분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 것입니다. 그에게서는 나를 발견한 데 대한 어떠한 환대나 반가움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건 당연히 나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럴 경우, 대체로 반가워하는 게 상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불쾌감이나 거부감도 찾아내기 어려웠습니다. 아, 무언가 감정의 제로 상태라고나 할까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문득 호기심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사건이었으니까요. 새로운 종류의 균형점과 맞닥뜨린 것입니다. 마치 내가 복사에 집중할 때처럼, 아무런 부정적 감정을 찾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점심을 같이 하자고 말을 건넬 때와는 무언가 감정의 색깔이 분명히 달랐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관찰점에 주목하면서, 나는 새로운 균형감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데이터가 부족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에게 찾아온 거의 최초의 감각적 경험이었기 때문이지요.

    음. 그냥 좀 걸어볼까 해서......

    같이 가. 나도 왠지 입맛이 없어.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달리 거절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J가 점심까지 거르면서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하니 마음이 그저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커피 타임이라고 할 만한 적절한 시간대는 아니었으니까요.

    배고프지 않겠어? 점심은 먹어야 하잖아.

    커피집에서도 간단한 먹을 거는 파니까. 빵이나 뭐 그런 거.

    J는 마치 마음속에 조각보가 있어서 그걸 하나하나 세는 것처럼 천천히 말했습니다. 뭔가 햇빛에 바삭하게 말린 과일 향 같은 게 나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말입니다. 목소리에 옅게 밴, 채도가 낮은 여운이 마치 찍어 먹어도 좋을 것 같은 생크림처럼 부드러웠지만, 막상 그렇게 해보면 사우어 크림 맛이 날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무언가 망설이는 어떤 것이 처음과 끝이 조금 다른 그의 음성에 담겨 있었습니다. 숨겨진 목소리의 색채를 나는 감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든지.

    어쩐지 환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불만스러운 것도 아닌 그런 목소리로 대꾸를 하고 말았습니다(그러고 보면 실제로 우리가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말이란 그 얼마 만큼일는지요. 우리는 항상 누군가와 말하고 있지만, 정말 말하고 싶은 것들은 힘겹게 꺼내게 되는 것들이고, 더 많게는 힘겹게 꺼내지 않도록 억누르고 있는 것들이겠지요.).

    J는 아이스 라테와 베이글 세트를, 나는 따뜻한 카라멜 라테를 주문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건 당분이었다기보다는 카페인을 초과하는 어떤 것이었을 텐데, 다른 무엇을 선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페 안에서는 습기 찬 커피 향내로 가득했습니다. 공간이 좁기도 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배어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무언가 여러 겹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는 공간이 바로 카페이기도 했으니까요. 카페에는 별로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 듯한 아르바이트생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나는 이런 이름조차 촌스러운 골목길 구석의 작디작은 카페에서 일할 사람은 아닌데 말이에요,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런 표정과 모습은 이 카페에 더 없이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종의 작은 불만이 넘실거려서, 무언가 조금 부족한 공간의 안정성을 채워주는 느낌이라고나 할는지.

    여기서 일하는 거, 맘에 들어요?

    갑자기 J가 존댓말을 하는군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커피를 젓는 플라스틱 스틱을 종이컵을 덮은 뚜껑에 난 작은 틈새로 깊숙이 꽂아 한껏 빨아들여, 따뜻한 라테를 입속 가득 길어 올리려는 자세를 하느라 푹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냥 스캔 업무가 어떤가 해서......

    그는 다시 말끝을 흐리며 반말을 했습니다.

    이건 J가 나에게 업무에 대해 말한 거의 최초의 질문이자 의견이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도 일에 대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요. 물론 지금의 이 대화가 업무에 관한 제대로 된 대화라고 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 뭐라고 해야 할지, 묻는 대로 대답하면 좋을 텐데, 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난감해졌습니다. 그렇게 묻는 질문의 이면에는 무언가 J가 이 직업에 대해 마뜩해 하지 않는 무언가가 묻어있었다고나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답변의 수준을 어디에 맞추어서 해야 할지 곤란해졌던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내가 들은 그대로의 수위에서 대답을 해야 할는지, 아니면 그가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답변을 해야 할지 곤란해 진 것입니다.

    예전 같다면 나는 당연히 전자에 맞추어 대답을 했었겠지요.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균형이 깨어진 덕에, 한 쪽으로 편향된 교감신경의 과잉 정보가 넘쳐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뭐, 그럭저럭. 일이란 게 그렇지 뭐.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하지만 반듯하게 한 장 한 장 스캔하다보면 정신 집중도 되고 뭐.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

    아마 한 육 개월 정도? 중간에 2주는 쉬었어. 휴가를 내서.

    여기, 마음에 들어?

    그는 나에게 질문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게 무얼까, 정체 모를 무언가가 불투명한 검정 봉지에 싸여 그의 목구멍 안에서 대롱거리는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재촉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내 쪽에서 질문을 한다면, 그 검정 봉지는 곧장 쪼그라들어 목구멍 안쪽 깊숙한 곳으로 떨어져 영영 숨겨질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러면 그는 마치 생선 가시를 삼킨 것처럼, 불편한 느낌을 가진 채로, 그것이 서서히 위산에 녹아 사라질 때까지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습니다만, 정확한 느낌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요.

    뭐, 꼭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그냥 일하는 거지 뭐.

    여기서 밤에 지내본 적 있어?

    아니. 여기는 칼 퇴근하는 게 장점이잖아. 야근이 없는 거, 요새 흔치 않은 직장이지.

    오늘, 나 당직인데, 같이 있지 않을래?

    오늘?

    음. 몇 번 해봤는데 좀 심심하더라고. 뭐 다른 일이 없다면......

    예기치 않은 부탁이었지만, 어쩐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집에 간다고 해서 달리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당직하면서 뭐 하는데?

    한 번도 안 해 봤어?

    (당연하잖아. 주급 계약직에게 도서관을 지키는 업무를 줄 리가 없잖겠어? 하지만 뭐 모르고 한 질문이니까 화를 낼 필요는 없다, 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나는 일 센티 미만 정도로 고개를 끄떡인 것 같습니다. J는 당연히 내 몸짓을 알아차렸겠지요. 작은 몸짓도 금세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앉아 있었으니까요.

    음. 뭐, 달리 할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각 층마다 불이랑 문단속 하는 게 다야. 별다른 건 없어. 가끔 열람실 책상에 쓰레기 같은 걸 치우기도 하는데, 안 해도 되는 일이고. 다음날 일찍 청소하러 아주머니들이 오시니까.

    계속 돌아다니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 모두들 퇴근한 뒤에 층마다 이상이 없는지만 체크하면 돼. 한번 돌고 난 뒤에는 12시에 다시 한 번 점검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고 나면 당직실에서 자면 돼. 별 다른 일이 없는지 완전히 체크하고 난 뒤에. 다들 퇴근하는 게 한 아홉시 쯤 되니까, 그때까지는 밖에서 지내다가 와도 좋아. 아홉시에서 열두시 사이에는 숙직실에서 쉬어도 좋고. 완전히 체크를 한 뒤에 말이지.

    J는 완전히 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쓰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강박증까지는 아니지만 어떤 강력한 스트레스가 느껴지더군요. 그의 마지막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했고, 어쩐지 호기심도 생겨서 나는 그냥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부탁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상태는 아니었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여기 와서 업무에 대한 명령 이외에 어떤 부탁을 받은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탁을 받는다는 건 신뢰나 기대를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요. 그건 매우 오랜만에 생겨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내 이성은 나에게 그런 정보를 주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바로 그게 나의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 어떤 호감도 느낄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발언을 애써 호감 어린 것으로 해석하려는, 내 이성의 몹쓸 의지, 과잉 해석에 근거한 오독의 덫에 스스로를 옭아맨 경우였더란 말입니다.

    나는 마치 닭다리를 뜯는 것처럼, 질긴 베이글을 찢어 먹는 J의 볼록해진 두 뺨 위로 조그만 보조개가 바운스 바운스 미세하게 요동치는 것을 바라보면서, 검정색 스틱에 난 가느다란 틈을 힘껏 빨아 따뜻한 라테를 입 안 가득 불어 넣었습니다. 이토록 달콤하고 따뜻한 카페 라떼는 이후에는 결코 내가 맛볼 수 없었던 평온한 맛이었다는 것을, 그때에는 알지 못했더란 말씀이지요. 무언가 감각의 평온점이 따뜻하게 머물러 있는 느낌. 이후에는 결코 맛볼 수 없게 된, 부정성이 제거된, 감정의 스타트 선인 제로 상태의 그 신선하고도 따뜻한, 바로 그 맛이었다는 말입니다.

    카페를 나오면서 나는 비로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J와 대화하는 동안에는 내 오똑한 코에 대한 생각이 J에게서나 나에게서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 어쩌면 J는 도대체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나 했었겠는지요. 말하는 내내 그는 오직 자신이 목구멍 안에 걸어 둔 검정 봉지에 집중한 채, 그것을 개봉할까 말까하는 망설임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도서관의 밤

    말하기 아까울 정도의 소중한 기억이나 스스로가 정성스레 키워온 자기만의 취향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소문으로 전하는 음성 속에서 남루하게 해지고 낡아져, 보잘 것 없이 가련하고 누추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는 법입니다. 이런 느낌이란,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본 적이 있는 것이니까요. 어떤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감정 상태에서 함께 손을 마주 잡고 가슴을 맞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거쳐 온 생활의 역사 속에서, 각자의 몸에 자기도 모르는 의미로 간직된 유전자가 익숙하게 대응해온 결과로서, 단지 유사한 신체적 표징을 확인하는 일에 불과한 경우에 가까운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다만 환경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물체의 본능에 해당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퇴근한 뒤의 도서관은 어쩐지 기괴한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그곳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활기를 얻었다가, 움직임이 사라지면 묘비처럼 생기를 잃어버리는 무덤과 같았다고나 할까요. 서가에 빽빽하게 몸을 세운 책들은 마치 황제의 무덤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사열병으로 잡혀와 산 채로 묻힌 순장병들처럼 섬뜩하였습니다.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바로 그 천년 전 황제의 무덤 속 병사들처럼, 영혼을 드러낼 수도, 스스로 바라볼 수도 없게 눈동자를 빼앗겨버린 병마용처럼 음습하고 어쩐지 억울해 보였으며, 분위기가 삼엄해보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느낌은 이미 되돌릴 수 없게 균형이 깨어져버린 나 자신만의 독특한 것임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느낌이 아닌 타인의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또 다른 이성의 경계를 요청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퇴근을 임하는 다른 직원들을 살피는 것이 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가장 먼저 퇴근할 자유가 나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지요. 정규직과는 다른 자유인 동시에, 근무 시간외에 남아 있을 권한이 박탈된, 말하자면 근무 시간 외에 직장에 머무는 것이 금지된, 주급 계약직 인턴의 비감한 자유였던 것입니다.

    퇴근하는 풍경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되도록 빨리 자리를 뜨려는 사람들로부터 되도록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사람까지, 누군가와 같이 가려는 사람들로부터 어쩐지 황황히 혼자만의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까지, 남아서 더 일을 하려는 사람들로부터, 퇴근 후에야 비로소 나 만의 사생활을 누리겠다고 작심한 사람들까지 다양했습니다. 퇴근시간까지 쌓인 피로감과 묘한 해방감이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어울러져 있었다고나 할런지요.

    J는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였습니다. 점심에도 거절했었는데 저녁까지 거절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뭘 먹을까?

    뭐, 좋을 대로.

    자주 가는 데 있으면 거길 가지.

    그래, 그럼 간단히 찌개 같은 걸 먹자.

    J는 도서관 근처에서 주택가로 이어지는 골목의 허름한 분식점으로 데려갔습니다. 나는 어쩐지 식욕이 나지 않았지만, J가 주문한 대로 부대찌개를 먹기로 하였습니다. 아, 그것은 정말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맛이었습니다. 맵고 짜고 어쩐지 더운 맛이 나는(아 더운 맛이라는 것은 뜨겁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몸에 엄습해 오는 더운 습기의 느낌이라고나 해야 할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불쾌한 맛이라고 해야 할는지요. 나는 그저 밥알을 씹어서 삼키는 일을 천천히 몇 번 하는 것으로 저녁 식사 시간을 지탱했습니다. 아, 그것은 어쩐지 무언가의 긴장을 천천히 연장하면서 다가올 불안을 지탱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 정확할 듯 싶었으니까요.


    종이 유령

    J는 휴대용 플래시를 들고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도서관의 모든 건물에 불이 꺼지고, 우리는 지하층에서부터 6층으로 걸어 올라가 순서대로 스위치를 켜고 점검한 뒤에, 다시 불을 끄고 내려와서 지하층과 1층의 사이에 놓인 계단 뒤쪽의 작은 숙직실에서 잠을 자면 되는 것이었지요. J의 이야기를 듣고 애초에 내가 짐작했던 대로라면 말입니다.

    J는 능숙하게 플래시를 켜고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어쩐지 J의 뒷모습이 초조해 보였습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예의 균형점이 깨어진 감각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단지 나만의 문제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J가 말했습니다.

    어쩐지 여기서는 아무리 이상한 말을 해도 납득이 될 것 같아서......

    나는 어색함을 누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컴컴한 곳에서는 표정을 들키지 않는다는 점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무언가 기묘한 느낌이었으니까요.

    사실 밤에 도서관에 남아 있는 게 좋아. 아무도 없지만 사실은 있어야 할 누군가와 함께 있는 느낌이랄까. 두렵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을 마주친 것 같은 거 말이야......

    나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더 할 말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으니까요.

    머리 위에 무언가가 나를 덮치려 하는 느낌에 시달리게 돼.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 도대체 알 수가 없어서 같이 있자고 했어.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통 같은 거를 말하는 건가? (당연히 아니겠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말을 이어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타이레놀이나 아스피린으로 해결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뭐가 덮치려는 건데? 밤인 데다가 여기가 너무 어두워서 긴장 돼서 그러는 게 아닐까? 불을 켜봐. 플래시 말고.

    아니, 불은 켜지 말아줘.

    J가 짧지만 단호하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문득 어쩐지 이상한 일에 연루되고 말았구나,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또한 나의 코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언제부터 그런 건데?

    사실을 말하자면 좀 이해하기 힘든 문제야. 사실 나는 당직 시간 이외에도 밤에 자주 여기에 남아 있었어. 나에게 여분의 열쇠가 있었거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이유는 단 하나야. 여기에서는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돼.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요. 나 말고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또 있다니, 그것은 정말 놀랍고도 몹시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사라지다니, 뭐가?

    나, 자신이 말이야.

    너,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거야?

    글쎄. 전에는 몰랐는데, 여기 와서 알게 되었어. 내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내 마음과 달리 언제나 나는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왜 여기인지는 모르겠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하기도 어렵지. 좀 이상하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실 나 자신도 이상한 상태였으니까요. 나보다 더, 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상태의 이상함을 J 또한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으니까요. 뭐랄까 나는 묘한 동지애라기보다는 일종의 패배감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유를 그때에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라지는 건데?

    그냥 나 자신이 없어져버리는 거지. 다음 날이 되더라도 사람들은 내가 그냥 출근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여기겠지. 직장인의 운명이라는 게 그렇지 않을까.

    나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어엿한 직장인이면서 계약직의 아픔 따위를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정규직이 그런 말을 하면 쓰나.

    나는 내가 왜 흥분하는지도 모른 채 질문을 쏟아내었습니다.

    글쎄. 정규직이고 계약직이고가 무슨 차이가 있겠어. 또 그 사이에 무수한 단계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일까. 일한다는 게 그런 거겠지. 무언가에 삼켜지는 느낌이야. 거대한 커튼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면서 소리 없이 삼켜버리는 거지. 그리고는 사라지는 거야.

    직장생활이라는 게 그런 거겠지 뭐.

    나는 예의 조직사회에서의 자아 상실이라든가, 업무 과부하에 따른 박탈감이나 뭐 그런 흔한 감정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흔하다고 해서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불행한 사람이 많다고 해서, 이 세상은 불행으로 가득 차도 괜찮다거나, 폭력으로 희생당하는 사람이 많이 발생한다고 해서, 세상은 어차피 폭력적이니까 누군가의, 또 누구나 한번쯤의 (어쩌면 두세 번의, 아니 그저 죽지는 않을 정도의) 희생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테니까요. 말하자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일이며, 애초부터 뿌리까지 옳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미 삶이 전쟁터라는데, 전쟁 때는 일상의 원칙이 하나도 들어맞지 않아서 비상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데, 도덕이니 자아니 인간성이니 하는, 푸딩 귀퉁이 뽀개지는 얘기를 한다는 게 도대체 씨알이나 먹히는 소리인가, 하는 말이 바로 목구멍에서 탈출하여 소리를 내려는 욕망을 억지로 밀어내려고 용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정말 그럴까? 직장 생활이라는 게.

    그렇지 뭐. 요즘에 누가 직장에서 자아실현 따위를 추구하겠어. 그건 퇴근 후에나 가능한 거라구. 대개는 퇴근이 너무 늦어서 그 뒤에는 잠자는 시간 밖에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잠을 잘 자야 다음날 출근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정규직이니까 퇴근이 좀 늦어서 잠자는 시간조차 제대로 없겠다고 말하면(사실은 그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하려 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그런다는 게 어쩐지 좀 심하다 싶어서 수위를 낮추었더랬습니다. 정규직이고 연봉도 더 높으니까 부당한 일을 좀 더 감수해도 되지 않나, 달달한 사생활쯤은 조금 희생해도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바로 눈 앞에서 콧김을 날리며 불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었다기보다는 사실 여기서 누구와 어깨를 맞잡고 뒷말을 나눌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아, 이런 건 회사에서 좀 떨어진 후미진 뒷골목 포장마차에서 오뎅 국물이라도 떠먹으면서 뒷담화로 해야 제 맛일 텐데 말입니다.) 화를 내려나? 암튼, 내 경우는 좀 일찍 퇴근하니까 좋기는 하지. 그렇다고 그 뒤에 뭔가 특별히 의미 있는 일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닌데. 아무튼 대체로 그래서 연애도 하고 쇼핑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뭐 그러는 거 아닌가. 사생활이라든가 취미활동이라는 거 말이야(이렇게 말하고 나니 마치 사생활은 취미활동이라고 말한 셈이 되어 좀 뻘쭘해졌지만, 말인즉슨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완전히 비뚤어진 품성의 찌질이가 된 기분이더란 말입니다.)

    나는 어째서 내가 J의 편에 서는 게 아니라 마치 회사를 대변하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말문을 닫았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매우 이상한 형국이었으니까요. 도대체가 나는 말이 되지 않는 응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든 말을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엉켜버린 투명한 낚시 끈처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씨팔). 사라지지 않으면 되잖아.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밤에는 뭔가 사람들이 좀 더 불안해지기도 하지.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문장들을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황급히 변명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명해내고 있지 못하는 것을 말입니다.

    역시 그런 건가? 넌 그렇게 말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J가 적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어쩐지 그 말의 꼬리에는 불신과 의혹의 뉘앙스가 따라붙었다고나 할까요.

    아니, 난 그냥......

    전에 있던 직장에서도 이런 느낌이 있었어. 동사무소였는데, 밤이 되면 아무도 없는 직장에 혼자 남아 있는 느낌이 차분하고 좋았지. 하지만 한밤중에 그곳에 가만히 있으면 내가 사라지는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했어.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왠지 모를 편안함이 있었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그건 결국 내가 나를 포기하는 거니까.

    J는 플래시를 이리저리. 그야말로 영혼 없이 비추며,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나는 일렁이는 불빛이 어쩐지 움직이는 바다 속에서 전기장어가 마지막 유언 삼아 혼자서 해보는 불 쇼같이 예쁘고 로맨틱하다는, 망측하고도 외람된 생각을 하면서 세 걸음쯤 뒤에서 그를 따라갔습니다. 마치 양손에 요령을 든 시동처럼 말입니다. 손에 쥔 요령이 너무나 예뻐서 그게 장례식을 장식하는 죽음의 전령이라는 것도 모르고 음악 같은 소리에 취해 관을 뒤따라가는 시동처럼 말입니다.

    J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플래시를 비추고는 숙직실로 내려갔습니다. 층과 층 사이의 계단 아래에 만든 방이라 한쪽 벽이 비스듬하게 만들어진 방이더군요. 지하층에 숨겨진 다락방의 느낌이랄까요. 기울어진 벽의 반대편 구석 쪽에 이층침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위쪽에 누우면 거의 천장이 닿을 것처럼 침대가 한쪽 벽 면을 꽉 채울 정도의 작은 방이었습니다. J는 침대의 아래 칸에 조용히 눕더군요. 나는 자연스럽게 이층으로 올라가야 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아마도 집까지 걸어서 새벽쯤 도착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어쩐지 내가 J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버림받은 것 같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두운 밤길의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이것이 혼자만의 현실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씨발. 이게 뭔가, 나는 어떤 감성의 리듬이 꼬여버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내 삶의 리듬의 한끝을 무언가가 밟았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밤새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마치 먹먹해진 먹지 속을 통과하는 검은 지렁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느리고 길고 차갑고 습하다. 쉼표 같은 집으로 걸어가고 있지만 안식처가 될 수는 없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스물아홉, 내 마지막 20대를 통과하는 삶의 느낌이라고나 할는지요.

    검은 밤에 주차장 길 쓰레기통 근처에서 마주친 고양이는 늠름하고 귀태 넘치는 자세로, 인간으로서는 이처럼 누추한 곳에서 이토록 우아한 걸음걸이는 나올 수가 없지, 라고 말을 건네듯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고양이의 자세는 이곳이 도저히 쓰레기통 앞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멋있고 당당하기조차 해보였습니다. 어쩐지 나는 고양이라는 대상이 품고 있는 실존의 냄새를 맡아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내내 익숙하게 나를 괴롭히던 부정성의 감각과는 거리가 좀 먼 것이라는 것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고 난 뒤에도 한참 후에, J가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였던 것입니다.


    J의 실종

    J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의 결근이 며칠이고 계속된 뒤였습니다. 어쩌면 나는 의식적으로 J를 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럴수록 나 자신이 점점 더 J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습니다. J가 사라졌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 나 자신을, 그리고 아무도 J의 사라짐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직장 내의 기묘한 분위기에 나는 점점 더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J가 출근하지 않는 것이 도서관에서 별다른 일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저 그런 결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보다 그것은 절대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J의 결근을 둘러싼 분위기는 내가 2주간의 휴가를 보내는 동안의 직장 내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는 데 충분할 만큼, 자연스럽고 무덤덤하였습니다. 아무도 J의 근황에 대해 묻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런 질문조차 무덤덤하게, 마치 스팸 문자를 지우는 것처럼 심드렁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할 듯 싶군요.

    하지만 어쩐지 나는 J의 결근이 단지 개인적 사정이나 신변의 변화로 일시적으로 직장에 나오지 않는 행위라기보다는 사라짐이나 실종이라는 단어로 표현해야 할 무언가의 사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이미 균형을 상실해 버린 나의 기묘한 감각 때문이었던 것이 분명하겠지만 말입니다.

    J의 결근은 마치 내가 정성들여 시술한 코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아무도 신경 쓰지도, 알아차리지도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J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될 만큼, 숨 막히는 고요함이었습니다.

    대신 나에게는 작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J의 업무를 대체한 당직 업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아무도 그 일을 대신 맡을 사람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J의 업무는 여분의 것이 되었고, 복사 업무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여분을 처리하기에는 나와 같은 처지가 제격이라는 빠른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을 맡고 보니, J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어쩌면 거의 매번 당직 업무를 담당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J의 결근이 닷새째 접어들었을 때, 주임이 나에게 오늘밤 특별한 일이 없느냐, 당직을 맡을 사람이 없는데, 할 수 있느냐, 당연히 수당은 주겠다, 숙직실에서 잠을 잘 수 있고, 아침 식사비용과 목욕비를 주겠다고 제안을 하였더랬습니다. 무언가 길게 말할수록 좋은 것들이 덧붙여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무한히 반복하는 되돌이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달리 거절할 명분도 없을뿐더러, 혹시나 거절했을 경우 생길지도 모르는 불이익이 거슬려 그러겠다고 답변을 했습니다만, 이후로도 주임은 이틀이 멀다하고 줄곧 당직 업무를 내게 제안했고, 그 뒤로는 별다른 지시가 없어도 의례히 당직은 이틀마다 돌아오는 나만의 몫으로 정착해 갔습니다.

    어쩌면 도서관에서 J외에는 아무도 당직을 서지 않았던 같기도 하였습니다. 정확히 이틀마다 J가 당직을 맡아 근무했다고 보는 게 맞는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J는 왜 당직을 맡지 않은 날까지도 이곳에 와 있었을까, 여분의 열쇠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마치 이곳의 낮은 자신의 직장이고 이곳의 밤은 자신의 집이라는 듯, J는 줄곧 이곳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에 금을 그어 낮과 밤을, 직장과 삶을, 사생활과 일을 구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밤이면 여기서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고 말했던 J, 머리가 아프지만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로는 나아지지 않는 통증을 호소하던 J가, 과연 낮에는 여기서 살아 있는 경험을 하기는 했던 것인지, 나는 혼란스러워졌던 것입니다. 그가 경험한 낮이란 온통 도서관에서의 단순 업무에 집중하는데 바쳐졌었기 때문입니다. 존재 자체가 귀하고 드물어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이 드물어서 희귀본이라 불리는 것 같은 귀중본 열람실의 잡지를 한 페이지씩 정확히 펼쳐서 구김 없이 복사 업무를 하는 나와 다름없이 말입니다.

    며칠이 지나도, 주가 바뀌어도 사람들이 J를 수소문하거나 찾는 일은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J의 결근은 그저 접수 처리의 대상이었을 뿐,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라거나 호기심을 자극하여 탐구하고 수사해야 할 사안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문자해 봤는데 답변이 없네요.

    주임 역시 시큰둥하게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용직이 문제라니까. 책임 의식이 없어요, 도대체가.

    어차피 일자리가 급해 보이지도 않았잖아요. 도서 목록을 입력하는 업무니까 다른 인턴을 구해봐야죠 뭐. 일용직 신청 리스트가 있으니까 금세 찾을 수는 있어요. 내일까지 처리 완료해둘게요.

    아, J는 정규직이 아니었을까요. 나는 어쩐지 그가 당직도 맡아보고, 또 4년제 대학을 나온 데다가 9급 공무원 시험에도 붙었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 역시 정규직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진짜 일용직인 내가 옆에 버젓이 있는데,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이 저렇게 말하다니, 하긴 나는 마치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래서 들은 바에 따라 내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고 대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생수통이라도 된다는 듯이, 푸르스름하고도 투명한 물통이 얹어진 정수기 옆에 서 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하필이면 복사기가 있는 위치가 구석에 세워둔 정수기 옆이었던 바람에, 나는 사각지대에 놓인 보이지 않는 물체처럼 취급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통 안의 물이 쿨럭쿨럭 내게로 쏟아지기라도 한 듯이 수치스러워졌던 것입니다. 아, 도둑이 제발이 저린 거라고나 해야 할지, 나는 도대체 열등감에 사로잡힌 주급 사원이라는 게 이런 불필요한 욕을 먹어도 마땅한 존재일까 하는 의문과 더불어, 그것은 어쩐지 부정당하다는 느낌을 해소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무지 저들은 왜 문자가 아니라 직접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그와는 문자 같은 걸 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요. 아, 그런데 어쩐지 나는 내가 J의 일을 대신 맡음으로써, J가 그토록 시달렸던 어떤 상실감마저 삼켜버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뭐랄까, 부정한 것을 잉태한 느낌이라고나 할는지. 내 몸 안에서 부정당한 이물질을 키워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양심의 문제도, 기분의 문제도 아닌, 나이 들면서 짊어져야 할 생활의 감각에 대한 느낌에 가깝게 다가왔다고 해야 할 바로 그러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J의 업무를 대신 맡음으로써, 어쩌면 그 만큼의 몫으로서 비어 있던 노동의 역할을 대체함으로써, 나는 이 직장에서 J가 완전히 실종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애프터 서비스기간조차 없이 주어진 그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이없게도 이 지점에서 나는 문득 내 자신이 과감히 단행했던 코의 시술에 대해 J에게 어떤 말이든 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을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J에게 공평하고 떳떳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를 나 자신이 정확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할 밖에.

    (대개의 생각이나 짐작이 그렇듯이 이 또한) 혼자만의 잘못된 생각일 수는 있겠지만, J가 나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J는 하고 싶은 어떤 말, 해야 할 무언가의 말을 다 하고서 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마치 유언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J는 사라짐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라짐으로써 존재하는 기묘한 삶의 형태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J에게 무언가의 말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나의 달라진 코에 대한 것이었을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올바른 생각이었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였는가에 대해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요즘 나의 달라진 코는 어느새 내 자신의 일부로서 익숙해져서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모양새로 내 얼굴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조차 했습니다. 달라진 모든 것은 금세 익숙해지고, 불편해하던 부정성의 감각도 어느새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자연스럽게 정착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불편한 감각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정당한 자기에의 배려가 아닐까, 불안한 감성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섬세한 자기 관찰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이미 내 몸의 일부로 익숙해진 내 코와 인생의 향기에 대한 감각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금세 익숙해지고, 새로운 모든 것, 불편하고 곤혹스런 모든 것은 생존의 이름으로 덮씌워진다는 사회생활의 생리를 어느덧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J를 삼킨, J의 실종을 완성한 나 자신을 확인하는 형식으로서 말입니다.

    당직을 서게 되면서부터 나는 잡지의 페이지를 하나씩 넘겨 반듯하게 복사하는, 무수히 반복되는 낮 시간 동안의 업무로부터 헤어날 틈 자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만의 밤이, 누추하고도 따스한 작은 방(아니, 집이라고 해야 할지)에서의 사생활이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당직실의 이층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아, 어쩐지 나는 침대의 일층 칸을 비워두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을씨년스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왜 그랬었을까, 나는 퇴근 후의 사생활을 운운하며 삶의 질과 가치를 J에게 늘어놨다는 것이 부끄럽고 민망해지더군요. 거의 매번 당직을 맡았을 J에게는 퇴근 후의 사생활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 지금의 나처럼 말이지요.

    아, 역시 타인의 인생에 대해 무언가 말한다는 것이 갖는 근원적인 외람됨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다니요. 그게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라는 것을 나는 마치 형벌처럼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생활이 사라져서 슬프다거나 안타깝다, 속이 상하다, 어째 이럴 수가 있냐는 낭패감보다는 어쩐지 내가 추구해야 할 사생활이 무엇이었는가를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쓸데없는 앎의 대가로 나는 사생활을 저당 잡히게 된 것이었더란 말입니다.

    순간, 나는 매우 이상한 감각이지만 내가 돌아가 눕던 원룸, 아니 더 정확하게는 고시원이라 해야 할 그 쪽방이 내가 사생활을 누리기에는 더없이 누추한 함량 미달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어쩐지 내가 끊임없이 은닉하려 했던 나 자신의 정체를 대신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나는 사라진 시간에 대한 거리 감각이 생기면서부터 비로소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고나 해야 할는지. 그것은 별로 참담할 것도 없는 따스한 진실이었으니까요. 나 자신이 눈에 보이게 살아 있고, 여전히 더 잘 보이로 하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에 대한 무모한 투자를 하고 바로 그 때문에 힘겨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신체의 일부가 만족스럽게 수정된다고 해서 내 자신의 삶의 모양이, 방향이 그와 같은 커브를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바로 내가 그런 전환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확인시켜주려고, 마치 문신을 새기듯 몸의 일부를 바꾸는 형태로 스스로에게 메시지를 준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 몸을 바꾼다, 가 아니라, 나 자신이 달라진 무언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말하기 위해 몸을 통해 나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라는, 매우 소모적이지만 절실한 순환론에 빠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내 삶은 사라져버린 J의 선택만큼이나 무모하고, 또한 절실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밤에 당직을 돌 때면 어쩐지 나는 J가 여전히 도서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으로서, 또 나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감각으로서 말입니다. 어쩐지 J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가 되어 도서관의 어딘가에서 이 모든 광경을 무덤덤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내 코를 둘러싼 성형 시술의 이야기는 엉뚱한 데서 결말이 나는군요. 그건 내게 절대 미가 아닌 불안을, 호감이나 찬사가 아닌 은둔과 차단을, 격리와 고립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닌 제로 상태로 되돌려놓는 억지의 포장을, 마치 원 플러스 원 할인 상품처럼 세트로 안겨다 준 이야기로서 말입니다.

    인생은 그런가 봅니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생겼을 때, 정말 갖게 되는 것은 애초에 내가 짐작하거나 예상했던, 또는 겨냥하거나 목적했던 것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예측불가의 기상천외한, 얼토당토않게 기가 막히는 결과를 안겨주는 것이더란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그 어떤 정성스러운 투자와 헌신과 기대와 욕망과 교섭과 움직임의 대가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저녁이 되어 하나둘 퇴근을 하게 되자, 나는 예의 당직을 맡아 도서관에 혼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경비 아저씨도 퇴근을 한 뒤에 나는 도서관의 정문을 잠그고 건물로 들어가 6층으로 곧장 올라갔습니다. 한 층씩 돌아보면서 점검하고 불을 끈 뒤에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 다음 층으로 내려가 살피는 일을 마치고 일층에서 지하층까지 내려오면 업무가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수상한 소음이나 빛이 들어오는 일이 발생한다면 다시 지하층에서 일층으로 올라가 차례로 불을 켜고 한 층씩 점검을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있다면 나와 봤으면 좋겠어.

    나는 내가 미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서관의 어딘가에 J가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 내뱉어진 목소리는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습니다. 음파가 먼지처럼 뿌옇게 흩어지는 것을 나는 본 것도 같습니다.

    니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

    나는 은근이 말을 놓았습니다. 너라고 불러본 것도 처음이군요. 하지만 말을 놓아버리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어쩐지 진짜 친구나 동료가 된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 나에게 건네는 말을 들은 것처럼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여기에 아무도 아닌 것처럼 있는 게 좋다고 했잖아. 정말 그런지 말해 줘야지.

    어쩐지 채근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적어도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 그와 대화를 나눴던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일단 말을 건네고 나서 알게 된 감각이었습니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어.

    하지만 원래부터 니가 여기서 살아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게 돼 버리니까. 어쩌면 눈앞에 명백히 보이더라도 없는 것들이 있지. 투명하게 살아 있는 거 말이야.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를 알려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알릴 필요도 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감각을 어떻게 끌어안고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안보이는 나를, 절대로 보지 않으려는 나를 어떻게 살아가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병원을 소개시켜줄 걸 그랬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무튼 잘 모르는 아는 사람이 소개해 준 거라 삼십 프로나 싸게 해 줄 수 있는데, 현금으로 내면 좀 더 싸게 할 수 있는 건데, 너한테도 알려줄 걸 그랬어. 달라진 감각 따위에 시달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닌데.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은 걸 텐데.

    J.

    나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 보았던 것입니다. 어느새 익숙해진, 칼날처럼 날카롭게 우뚝 솟은 내 콧날 위로 스치는, 어둠 속의 종이 바람 속에서 말입니다.


    * 소설의 배경이 된 시립어린이도서관에 관련된 내용은 사실과는 무관한 온전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최윤혜

    최윤혜

    1968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박사)

  • 조남현 문학평론가, 구효서(글) 소설가

    개인적 이유만으로는 소설이 쓰이지 않는다. 쓰인다면 그것은 그 개인만을 위한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개인의 이유는 그래서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에 의해 늘 환기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이른바 소설의 효용이라는 것이 생기며 소설은 공기(公器)가 된다. 응모작에서 효용의 효과를 확신할 수 없었던 데는 그것을 갈무리해 내는 솜씨가 부족했거나 기대를 빗겨가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본심에 오른 6편 중 특히 3편을 눈여겨보았다.

    김의경의 ‘물건들’은 ‘다이소’라는 공간을 문제적 공간으로 보기 보다는 들여다보기에 흥미로운 공간으로 처리해 버린 느낌이다. 흥미가 흥미답기 위해서는, 일테면, 다이소 공간과 가난한 청춘의 동거공간이 소비사회에서 인간 및 인간관계가 겪는 물화의 과정 따위를 비추어내야 했을 것이다.

    옥림씨라는 인물의 고생스러운 일대기와 그 피붙이들의 형편을 다룬 김혜자의 ‘정류장’은 어떤가. 고유어를 쓰고 읽는 맛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삶의 세부와 그것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어법까지도 퍽 고유어적인데 그 운용이 놀랍도록 세련되고 자연스럽다. 다만 그뿐이다. ‘기다리지 마세요, 어머니’라는 부제와 그에 맞닿는 결미로써 소설의 효용을 가까스로 높이려 했으나 역부족인 건 어쩔 수 없었지 않은가.

    ‘활발하고 고요한 코의 자세’의 입심은 수다스럽고 장황하고 능청스럽다. 밑도 끝도 없이 왜 이러나 싶을 즈음 J가 등장하며 시나브로 조용하고 진지해진다. 그 J가 사라지고 도서관에 ‘나’홀로 남았을 때는 비감하다. 비로소 작가의 수다와 장황이 전략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한다. (짐작이 아닌 확신이었으면 좋겠다) 앞의 두 편에 비하면 이 작품은 지나칠 만큼 작품의 효용성과 그에 대한 자기정리가 두드러진다. 솜씨로 보아 쉽게 극복될 것이라 보고 당선작으로 밀었다.
  • 최윤혜

    최윤혜

    1968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박사)

    지난 계절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혹독한 시련이라고 할 어떤 앎을 통과하고 있었다. 신이나 마음에도 육체가 있다면 그것이 산산이 깨어지는 슬픔에 대해 나는 생각했고, 그것이 혼자만의 고립된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그것의 전개에 대해 아무 것도 이해하고 있지 못했을 때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고, 그것이 스스로 자기 육신을 꾸려가는 과정 속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됐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무언가에 열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이며,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의 정면을 직시하는 일이다. 일상적 삶의 경계를 흔드는 경험 속에서도 자신의 가장 예쁘고 좋은 것을 찾아 그것이 잘 자랄 수 있게 최선의 정성을 다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글 쓰는 즐거움을 방해하지 않으며, 심지어 격려하는 세상의 모든 에너지와 실체들, 내가 알거나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과 마음들에 감사드린다. 내가 작가가 된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으셨던 어머니와 마음속에 살아있는 나의 아버지께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의 어리둥절하고도 기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인생이 힘들었을 때 문득 칸트의 심미적 개념이 떠올랐다. 아무 이해관계가 없지만 시간을 저절로 바치면서도 즐거워지는 것, 목적 없이 만나도 마음이 행복한 사람들을 위해 내 인생의 소중한 시간과 마음을 쓰는 것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 길 아닐까. 글쓰기가 흘러가는 시간 위에 적은 작은 낙서일지라도 누군가에게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기억이 될 수 있게, 내가 아는 가장 깊은 언어를 찾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단련하겠다.

    이 수상을 나는 그 길을 걸어가도 괜찮다는 세상의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길을 열어준 동아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전한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