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악의는 결코 사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악랄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약간의 가치가 있다.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에서
1. 사라지는 빛
현실을 잊고 가상 속에서 위로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박훈정의 영화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영화가 상영하는 디제시스(diegesis)는 현실만큼이나 치열하고 죽음이 공존한다. 그렇다고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평온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추악한 삶과 위태로운 죽음이라는 두 진자의 마주침 속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욕망하고 파괴되어 간다. 산자의 고통 그리고 망자의 죽음이 우울하기만 하다.
필름은 우리 삶의 표면을 빛으로 인화(印畵)하지만 영화관에서 사라지는 빛은 우리의 망막 너머 기억 저편으로 삶의 양식을 되돌려준다. 삶은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한 바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면,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화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박훈정의 영화는 우리 삶의 환부를 더듬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몽타주들은 불순하고 거칠기만 하다. 그리고 추악하고 잔혹한 현실이 내 삶의 거리와 멀지 않다는 두려움을 준다.
더 이상 우리는 의지할 신도 없고, 사는 것이 버거운 현실에 놓여있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용기 있는 일이지만 결코 유쾌한 일도 아니다. 반복되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킨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합리화시킬 위기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박훈정은 파국에 도달한 영화적 사건을 봉합할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카메라로 현실의 정면을 치열하게 응시할 뿐이다. 적어도 그의 영화가 관습적인 장르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윤리적이라면 시시콜콜한 거짓된 낭만적 이미지들을 끌어와 현실을 봉합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삶이란 더럽고 잔혹하지만 살아볼만하다고 자위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잔혹한 삶의 표면을 지속적으로 탐사하고 관찰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관찰의 시선은 아름답지 않은 투박한 핏빛으로 점멸한다.
2. 몰락하는 세계와 추락하는 인간
세계의 몰락은 항상 지속되어 왔다. 순간마다 세계는 퇴락하고 낡아빠지며 그렇게 지속된다. 그것이 악마의 꼬임이거나 성경에 적힌 말들처럼 인간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이후부터인지 확실치 않다. 누구나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와 눈을 떠보니 세계는 위기 아닌 적이 없었고, 전쟁터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 많은 영웅서사들은 이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조금 과장을 섞어 할리우드에서 탄생하고 보급되는 그 많은 영웅들은 세계의 몰락을 잊고자 하는 무의식적 징후는 아닐까? 위기를 느끼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는 수많은 동물들처럼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숨어드는 것인지도.
영화관의 한쪽에서 할리우드 판타지 영웅물이 흥행하는 동안 한국영화는 느와르(noir)에 심취한 것 같다. 느와르 장르는 부패하고 퇴락한 세계에 대한 냉소주의 그리고 환멸의 감정을 담아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최근 한국의 느와르 영화들도 기존의 장르적 문법으로부터 멀리 위치해있지 않다. 가깝게는 《범죄와의 전쟁》 (2012)에서부터 《신세계》 (2013) 현재에는 《친구2》 (2013), 《창수》 (2013)등을 들 수 있으며 스릴러이지만 범죄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화이》 (2013) 또한 몰락하는 세계에 대한 냉소를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영화관 한쪽에서 관객들이 판타지 영웅들과 함께 세계의 몰락을 스펙터클하게 즐기고 있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몰락하는 세계에 대한 환멸을 관객의 피부에 각인하고자 한다. 영화가 세계의 몰락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망각’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각인’이다. 판타지 영웅물이 세계의 몰락을 해결 가능한 사건으로 취급하면서, 봉합 가능하다고 환상을 심어주는 동안 최근 한국 느와르 영화들은 하드보일드(hide-boiled)한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관객의 영혼에 상처를 내겠다고 손톱을 세운다. 따지고 보면 느와르 장르의 문법은 몰락하는 세계의 환부를 담아내기에 적절한 장치다. 일상적인 범죄와 폭력의 세계에 은폐된 사회구조적 모순을 면밀히 해부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몰락하는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를망정 감각적으로 위기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은 공통된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 도시의 아케이드를 걸으며 몰락하는 세계의 징후를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던 모더니스트들에게 세계는 비극적이지만 낭만적 영감을 선사하는 새로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느와르 영화들 속에서 과거의 낭만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하드보일드 이미지들은 관객에게 틈을 주지 않고 서사적 긴장을 이끌어간다. 냉담한 카메라의 권위, 응시의 강제성은 시각 체험의 유비를 통해 잔혹한 이미지들의 폭력성을 피부에 각인한다.
올해 상반기 개봉한 박훈정의 《신세계》 또한 최근의 경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감독은 범죄와 폭력의 세계에 대해 일회적 폭로가 아닌 총체적 구조를 포착하려고 시도한다. 《신세계》 (2013) 뿐만이 아니라 각본이나 연출을 맡았던 《부당거래》 (2010), 《악마를 보았다》 (2010), 《혈투》 (2011) 등에서도 박훈정은 세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감독에게 인간은 반복되는 사건의 가해자이거나 혹은 피해자의 위치만을 반복한다. 그에게 삶은 지긋한 시소놀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세계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금기를 어겼고 다시 안전한 관습과 상식의 영역으로 귀환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패한다. 그들이 사회적 금기를 어기는 순간 강력한 처벌이 뒤따르며, 기성의 세계 내부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박훈정 영화의 인물들이 집요하게 보여주는 생의 의지는 자기 파괴적인 죽음충동(death drive)으로 귀결된다. “욕망하는 순간 파괴된다.”는 감독의 냉소적 세계인식은 현실 사회 내부에 대한 깊은 절망을 표현한다. 어쩌면 박훈정의 영화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완곡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3. 선악의 경계에서
이자성(이정재 역)과 정청(황정민 역)은 의형제이자 골드문이라는 범죄 조직의 이사이다. 골드문 조직의 보스 석동출이 검찰에서 출소하자마자 교통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조직은 정청 계파와 이중구 계파로 분열된다. 마침 조직이 분열된 틈을 타서 경찰청은 ‘신세계’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신세계 프로젝트는 경찰 출신 스파이를 골드문의 보스가 되도록 도와주고 수많은 범죄를 중간 관리한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정청은 이자성이 비밀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청은 이자성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비밀로 묻어둔다. 한편 경찰의 이간질에 속아 넘어간 중구는 정청이 방심한 틈을 타서 그를 제거한다. 이후 이자성은 강과장의 신세계 프로젝트의 비밀을 알게 되고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찰과 갱스터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이자성은 자신의 의형이었던 정청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과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면서 골드문의 회장으로 군림한다. 이상이 영화 《신세계》의 줄거리이다.
영화 《신세계》를 이끌어가는 몇몇 장치는 진실과 거짓 또는 선과 악 같은 윤리적 분별의 문제를 환기한다. 영화는 짝퉁 안경, 짝퉁 시계, 그리고 바둑돌의 뒤얽힘 등을 사용하여 진실과 거짓 사이의 혼란스러움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한다. 모양은 같지만 진품과 가품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흑돌과 백돌이 얽히면서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구성되는 것이 바둑이듯이 선과 악의 문제는 이분될 수 없는 혼종의 것이다. 신세계는 극중 주인공들이 가고자 했던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지시하는 단어라기보다 그들조차 예측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현재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미장센이란 언어적이지만 영화적이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통찰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중요한 것은 미장센이 언어적이라는 점이다. 흑돌과 백돌이 얽히는 바둑이나 정청의 짝퉁 안경, 마지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짝퉁 시계 모두가 이자성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언어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영화 《신세계》는 감독의 개입이 강하고, 이미지를 통해 발생되는 의미의 영역을 감독이 점유하고자 한다.
박훈정이 시나리오나 연출을 맡았던 작품들을 살펴보면, 선악의 불명료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해왔음을 알 수 있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맡았던 《부당거래》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최철기’가 부당거래를 시작한 원인은 경찰 동료 대호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의 호구지책 마련에 있다. 법과 윤리가 상실된 비정한 사회를 살아가는 자가 살아남는 방법은 비겁해지는 것이다. 최철기를 일방적으로 비난 할 수 없는 이유다.
다음으로 《악마를 보았다》는 아내를 살해한 살인마에게 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는 국정원 요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살인마에 대한 복수는 결과적으로 자웅동체의 살인마를 탄생시킨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자리를 반복하며 뒤바뀔 뿐 애초에 변한 것은 없다. 영화는 기성 세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비극적인 세계 인식을 보여준다.
박훈정의 세계에는 순환적인 모순과 비극은 있지만 대안적 삶의 양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는 어두운 분위기에 침윤될 뿐 새로운 잠재적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는다. 아직 젊은 감독은 세계의 어둠이 더 크게 보이는 듯하다. 하긴 시간이 흐른다고 세상살이가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의 영화는 남성적 주인공들의 치열한 권력 의지로 가득하다. 감독의 세계는 일견 사실적이지만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권력의지로 단순화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박훈정은 분명 우리 시대의 문제적 일면을 격앙되게 표현하고 있다.
카메라의 잦은 클로즈업과 긴장감 있는 사운드의 활용은 그의 영화적 스타일을 형성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배우의 표정과 언어의 불일치를 통해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생생히 잡아내는 연출이 돋보인다. 클로즈업을 통해서 런닝타임 동안 지루함을 덜어주고, 사운드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확실히 영화적 연출에 재능 있는 감독임에 분명하다.
모던한 작가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박훈정 영화가 관습적인 극영화의 문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디제시스적 환상을 통해 환기하는 의미적 측면에서 그의 영화는 나름의 윤리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의 영화가 지닌 윤리성은 잔혹한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정투쟁을 옹호하지 않고, 몰락하는 세계의 허무(虛無)를 느와르 장르의 문법으로 치열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감독의 니힐리즘은 세계에 대한 무관심이나 열패감과 다르다. 그는 세계를 잔혹하게 인식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잔혹성의 표면 뒤에 감춰진 숭고한 것, 그러니까 보다 리얼한 진실을 말하기 위한 그만의 어법이다. 그의 언어는 그래서 공포다. 보이는 표면 뒤에 감춰진 진실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4. 얼굴의 감각
이상한 세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혀 특이할 것이라고는 없는 줄 알았는데, 박훈정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이렇게 구역질나는 곳이 없다. 수많은 카메라의 클로즈업 숏(close-up shot)과 긴장감을 교직하는 사운드는 그와 세계가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를 알아차리게 해준다. 일반적으로 클로즈업 숏에 찍힌 대상은 미묘하게 과장되기 마련이다. 일상 속에서 대상을 현미경처럼 분할해서 보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이것은 두 가지 욕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상을 디테일하게 관찰하려는 욕망과 하나는 숏과 숏 사이의 긴장감을 내포시켜 관객의 지루함을 덜어주려는 의도다.
잦은 클로즈업에 포착된 세계는 쪼개진 세계를 붙여 만든 가공의 것이다. 세계의 속살을 하나씩 분할하여 보고자하는 욕망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분할된 쇼트들을 이어 붙인다고 세계가 재현되지 않는다. 스크린 위에 또 다른 가상 세계를 건축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끝없는 재현의 실패를 상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독에게 카메라와 사운드는 비극적 세계의 잔혹성을 포착하고 관찰하는 도구이며 동시에 원인을 탐구하고 호명하는 방식이다. 그의 영화가 만들어내는 폭력적 이미지들은 실제보다 더 과장되어 있다. 이 같은 감독의 연출은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불편한 진실을 관객에 충격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로 파악된다.
감독의 영화 《혈투》와 《신세계》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공허와 환멸을 표현하는 색조들로 가득하다. 《혈투》의 공간성 자체를 규정하는 키워드들을 꼽자면, 어둠, 고립, 객잔을 덮은 눈 등등이며, 《신세계》는 서로가 넘을 수 없는 바다와 육지를 대립시키고, 도시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원경(遠境)을 통해 안개 낀 감독 내면을 표현한다. 카메라의 음산하고 음울한 이미지들은 영화의 내러티브와 어울려 멜랑콜리(Melancholy)한 분위기를 머금게 한다.
감독의 데뷔작 《혈투》는 그의 연출 스타일에 관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 작품은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복수와 생존의 핏빛 결투를 소재로 한다. 영화 《혈투》의 시공간적 배경은 모호한 편이며 인서트(insert)를 사용하여 세 사내의 감춰진 진실을 관객에게 알리고 그들의 생존 욕망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영화 《혈투》에서 클로즈업 카메라는 몸을 광학적(光學的)으로 스크랩(scrap)한다. 전우의 손을 붙잡을 것인가, 혹은 말 것인가? 서로 뻗은 두 손이 정지되는 스테이 숏(stay-shot). 전우를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과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클로즈업된 배우의 표정과 서로를 향해 뻗은 육체의 미묘한 움직임은 몽타주의 연결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구성한다. 그리고 ‘얼굴’은 그들이 내뱉은 ‘말’을 배반한다.
관객은 표정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짐작한다. 그리고 얼굴 표정과 사소한 움직임을 클로즈업으로 세밀하게 분할하고 연결시킨다. 이러한 기법을 통해서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신경전을 긴장감 있게 이끌어간다. 한정된 공간에서 배우의 액션을 통해 극을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연극적이지만, 잦은 클로즈업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인서트를 통해서 그들의 복잡한 심경을 노출시키는 기법은 영화적이다. 연극적 영화라고나 할까? 극중 인물들의 말과 얼굴의 불일치는 영화 《혈투》의 서사를 긴장감 있게 이끌어가는 힘이다.
역시나 박훈정은 신작 《신세계》에서도 전작에서 보여준 자신의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바다 위에 떠있는 선박들 너머로 안개가 끼어있는 도시. 청점(聽點)을 알 수 없는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고 바다의 일렁임처럼 은밀하게 사운드가 퍼져나간다. 외곽과 도시 사이의 심도를 보여주는 롱숏(long-shot)과 함께 외딴 곳에 위치한 공장에서는 잔혹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카메라에 포착된 원경의 흐릿한 색채와 저음의 음울한 사운드는 은밀하고 잔잔하지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카메라에 포착된 원경의 도시는 잿빛이며 겨우 그 실루엣을 짐작할 뿐이다. 실루엣을 통해서 존재하지만 내부의 비밀을 알 수 없는 도시는 환상처럼 보인다.
영화 《신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는 역시 얼굴이다. 전작 영화 《혈투》에서 그랬듯이 지속적으로 ‘얼굴’과 ‘말’이 불일치하는 장면들이 많다. 영화적 배경이 되는 골드문 석동출 회장의 죽음이 선언되는 병원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골드문 후계자들의 얼굴을 순차적으로 클로즈업한다. 이로써 보스의 죽음을 둘러싼 그들 사이의 감춰진 이해관계 암시된다.
주목할 장면은 정청이 부두 근처 외딴 공장으로 이자성을 호출하는 시퀀스이다. 피사체와 가깝지만 낮은 카메라 앵글로 클로즈업하고 위험을 직감한 이자성의 얼굴을 비춤으로써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차가운 분위기와 달리 능청스러운 정청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이 구성하는 정서상의 불일치는 둘 사이의 심리적 대립을 극대화시킨다. 동요하는 이자성의 목소리와 그것을 애써 감추려는 얼굴의 움직임. 그리고 조직 내부의 첩자를 색출하고 핏물에 젖은 정청의 모습과 당혹해하는 이자성의 표정을 서로 거울을 보듯 배치시키는 투숏(two-shot).
이러한 대비적인 배치를 통해 정청이 이자성의 또 다른 자아임이 암시된다. 이자성 스스로그것을 거부하고 인정하려하지 않을 뿐이다. ‘말’과 ‘얼굴’이 서로를 배신하듯이 이자성의 무의식은 자신이 경찰이라는 의식을 배신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이자성이 정청을 대신해서 골드문의 보스가 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다. 스크린 위에서 배우는 연기하고 욕망은 얼굴 위를 스쳐간다. 카메라는 편집증적일 만큼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말과 대비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뇌리에 배우의 내면은 표정으로 기억된다.
미셀 시옹이 《영화와 소리》에서 지적한 바, 관객들은 하나의 공간과 시간에 자신의 시선을 제한하며, 어떠한 A의 사운드에 관하여 응답하는 소리의 출처를 찾기 위해서, 카메라 외부의 공간을 탐색하고 구심점을 찾는다. 이것을 청점(聽點, point d’ecoute)이라 하고 앞서의 원리를 통하여 감독은 소리를 조직함으로서 의도적 효과를 생산한다. 또한 사운드의 의미는 시각적인 쇼트들을 통해 고정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 정청이 동전을 마찰시키는 소리는 시퀀스 전체를 채우며, 석동출의 부고(訃告)를 기다리는 이들의 긴장감을 표현한다. 반면 후반부에는 이자성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번민하는 정청의 심경을 표현한다. 이렇듯 같은 사운드라고 하여도 의미 효과는 시각적 쇼트를 통해서 고정된다.
영화 《신세계》의 런닝 타임은 2시간 30분에 달한다. 자칫 영화가 관객에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은 사운드 효과 때문이다. 영화 《신세계》에서 사운드는 예고, 반응, 노출이라는 효과를 창출한다. 이자성의 정체가 정청에게 노출된 이후 사운드는 새로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리듯 저음의 낮은 사운드를 통해 위기감을 조성한다. 이때 사운드는 스크린 외부에서 발생되는 것으로 그 청점(聽點)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스크린 속에 등장하는 이자성의 당황한 표정을 통해 사운드는 관객에게 앞으로 중요한 사건이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다.
영화 《신세계》에서 정청이 보낸 수하들과 경찰임이 발각된 신우(이자성의 바둑선생)의 총격씬이 디졸브(dissolve)된 이후 정청을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는 이자성의 모습이 담긴 쇼트들이 이어진다. 이자성이 외딴 공장에 도착했을 때, 능글맞은 정청의 표정과 대비되는 이자성의 놀라움이 사운드를 통해 표현된다. 이자성의 긴장된 내면은 심장박동 소리라는 사운드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자성의 심리적 긴장을 표현하는 심장박동 소리가 외로이 들렸다면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지만, 전후 관계에 맞춰 구성된 시퀀스에 배치된 사운드는 이자성의 긴장을 외부로 표현한다.
정청이 경찰의 스파이로 밝혀진 이자성의 수하를 삽으로 내려치는 순간 동시적으로 카메라는 이자성의 얼굴을 포착한다. 그리고 카메라 밖으로 사운드가 들려온다. 정청이 삽을 내려치는 소리가 실제라면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을까? 이것은 사운드가 과장의 의도를 가지고 사용된 미학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음으로 정청이 스파이의 목을 써는 장면에서도 긴장감을 교직하는 것은 사운드이다. 실제로 화면에서 목을 써는 포즈는 있지만 노출되지 않는다. 감독은 소리를 통해 관객이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실제로 사람의 목을 써는 소리가 영화에서처럼 들린다는 보장은 없다. 사운드의 과장이다.
박훈정의 영화 《신세계》는 사운드의 예고, 반응, 노출 효과를 통해서 영화적 긴장을 교직하고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다만 그 장면은 시각적 몽타주뿐만이 아니라 관객의 청각적 몽타주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일(정청이 목을 써는 장면)이 일어나고 있으며, 보이는 것 뒤에 감춰진 것(이자성의 긴장된 내면)이 있음을 알게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운동이 사운드를 통해서 관객의 시청각적 긴장을 유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소멸된 기억과 망각의 흔적
마지막으로 박훈정의 《신세계》를 둘러싼 하나의 징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박훈정의 《신세계》를 관람한 많은 관객들은 배우 황정민의 정청 역에 공감을 표현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 능청스러운 표정 뒤에 숨겨진 정청의 피에 젖은 얼굴을 보았다. 정청 역을 맡은 배우 황정민의 연기가 아무리 훌륭했다고 하여도, 왜 정청은 관객들의 뇌리에 남성적 버디무비(buddy-movie)를 연상하도록 만드는 낭만적 인물로 기억되는 것인가. 미묘한 문제다. 보았음에도 믿지 않는다는 것. 혹은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영화 《신세계》의 주인공 이자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두 명의 상징적 아버지가 존재한다. 그들은 각각 강과장과 정청이라는 인물로 구체화된다. 강과장은 이자성에게 비밀경찰의 신분을 부여한 인물이고, 정청은 언급했듯이 정체성의 문제로 흔들리는 이자성에게 조직의 보스가 되도록 조언하는 인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누가 좋은 아버지이고, 나쁜 아버지인가? 강과장은 국가의 공권력을 대변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골드문에 비밀경찰을 심고 그들을 소모품으로 전락시킨다. 반면 정청은 골드문이라는 범죄조직의 보스임에도 불구하고 형제애를 강조한다. 영화는 선악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고 출구가 없다.
이 점은 홍콩 느와르 《무간도》와 《신세계》의 차이를 선명하게 해주는 국면이다. 적어도 영화 《무간도》는 진영인(양조위 분)과 유건명(유덕화 분)에게 있어서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가 구분된다. 황국장과 삼합회 보스 한침의 거리는 선명하다. 진영인과 유건명이 힘을 합쳐서 삼합회 보스 한침을 총으로 쏘아 죽이듯이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 보이지만 어느 사이에 제자리를 되찾는다. 하지만 영화 《신세계》는 단순한 정체성의 문제를 떠나서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점 자체가 무너져 있다. 이것은 강과장과 황국장이라는 캐릭터에 가로놓인 심연의 깊이다. 어쩌면 《무간도》와 《신세계》 사이에 놓인 시간의 주름인지도 모른다.
영화 《신세계》가 의미 있는 지점은 국가와 범죄 조직 간의 차이가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 《신세계》에서 강과장의 발상은 사회적 범죄를 용인하고 일정 부분 국가가 리스크를 관리하겠다는 태도에서 특이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강과장은 범죄 조직의 소탕이 아닌 범죄의 사회적 ‘관리’에 무게 중심을 둔다. 즉, 국가가 범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자성은 국가에 의해 탄생한 범죄의 결과이다. 이 점에서 영화 《신세계》는 단순한 버디무비가 아니다.
과거 선악이 분명하다고 믿었던 근대적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대기 속으로 사라지고 자명한 것이 사라진 세계, 모든 대의와 가치마저도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린 허무의 세계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왜 우리는 정청의 잔혹함과 폭력성에 대한 기억을 누락시키는가. 선악의 윤리적 잣대가 모호하고 부재하기에 동물적 생존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운명에 관객은 공감한 것은 아닐까? 정청의 ‘살아남으라’는 정언명령은 이자성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인간적 조건을 인정하고 능동적으로 순응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다. 현대의 형식적 윤리는 불합리한 세계 내에 거주하는 인간의 냉소를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며, 정청의 ‘살아남으라’는 정언명령은 사회의 모든 대의를 무의미로 환원시킨다. 이 점에서 영화 《신세계》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디스토피아의 불편한 실재를 잘 보여준다.
6. 시선의 윤리
영화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뭘까? 수많은 영화이론을 가져와 답변 할 수 있겠지만 우선 바라본다는 것 아닐까? 대상을 바라보기. 영화가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상연하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남성적 관음증의 시선이라고 비판해도 좋다. 그렇지만 영화가 무엇인가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카메라 앵글에 담기는 것이 아름답던 혹은 비루한 것이던 피사체의 민낯은 아니다. 대상의 표면을 훑고 지나간 빛의 이미지를 포착할 뿐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들고 여러 번 같은 각도에서 얼굴을 찍어도 그 순간마다 각기 다른 느낌의 사진들이 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영화관을 찾아들어가는 순간, 영화의 이미지들은 세상 그대로의 날 것도 아니고, 감독이 의도한 세상만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이미지들은 저마다 시간의 흔적이다.
인간 지각의 물질적 구현물이 카메라일 때, 그것이 파악한 세계는 언제나 세계 내에서 절취한 일부분으로 남는다. 세계는 알 수 없는 사물 그 자체로 남겨진다. 그럼에도 영화는 끈질기게 세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처절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던 치열하게 바라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존재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박훈정 영화의 삐딱한 시선은 불편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새롭게 감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남자들의 의리를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세상에 은폐된 비루한 일상에 고개 돌리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가상이지만 현실을 의심하게 한다. 이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기회다. 선택만 남았다. 세상에 고개 숙이던가, 세상을 치열하게 응시하던가.
심우일
1983년 전북 전주 출생
중앙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강유정 영화평론가
2013년 한 해, 영화를 본 관객이 2억 명을 넘어섰다. 양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풍성함의 이면도 생각해봐야 한다. 평론이라 부르기에 소루한 줄거리 소개가 평론을 대신한다. 논쟁적 가치를 넘어 학술적 가치까지 갖는 문제적 평론을 기대할 만한 지면 자체가 거의 없다. 여느 문화계처럼 영화 평론 역시 만성적 위기론에 빠져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꽤 많은 편수의 응모작을 만날 수 있었다. 인터넷의 블로그나 개인 지면에 올릴 법한 소박한 영화 감상평부터 논문 수준에 이르는 학술적 글까지 그 진폭이 넓었다. 눈 여겨 보았던 작품은 조동범의 ‘창과 방패, 두 개의 세계와 하나의 비극’과 김범주의 ‘누가 감히 아버지의 자리에 가랴’, 마지막으로 심우일의 ‘디스토피아의 윤리와 에피스테메’ 세 편이었다.
앞의 두 편은 공교롭게도 김기덕과 홍상수를 비교하는 글이었다. 공교롭다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응모한 작품의 3분의 2이상이 김기덕과 홍상수 영화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숫자로 환산되는 영화계에서 소수에 속한다지만 두 감독의 작품이 매우 중요한 참조사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선작은 ‘신세계’를 중심으로 박훈정의 영화 세계를 살펴 본 ‘디스토피아의 윤리와 에피스테메’로 결정했다. 앞서 두 작품이 스토리 분석과 주제적 해석에만 치우친 데 비해 당선작은 영화가 카메라와 빛, 편집과 호흡으로 이루어진 종합적 예술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영화를 진지한 영화언어로 접근했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캐릭터 분석과 사운드나 촬영기법 등 다양한 접근으로 박훈정의 영화세계를 종합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안정된 문장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등단 이후 활발한 활동을 기대해본다.
심우일
1983년 전북 전주 출생
중앙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려 ‘12’라는 숫자가 나온다고 마블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열두 칸을 전진하여 무인도에 빠질 수 있고, 요령껏 무인도를 벗어나도 돌아올 곳은 ‘출발’이라는 단어가 적힌 시작점일 뿐이다. 그동안 당연히 내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내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잠시 나에게 누군가를 대신하여 운명의 주사위를 던질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주사위 놀이의 끝은 내가 지닌 모든 것들이 타자의 손을 거쳐 나의 빈손에 넘겨진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은 인생의 어느 순간 당신들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 놀이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대여, 주사위를 던지라!
당선 소식에 나를 대신하여 눈물 흘려주신 분들이 있었다. 내 눈물마저 당신들의 것이라 행복하다. 누구보다 부족한 제자의 글을 많이 읽어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박명진 교수님, 존경하는 이명재 교수님, 글쓰기의 기초를 일러주신 김흥식 교수님,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주신 임영봉 교수님, 평론가의 꿈을 지켜주신 이경수 교수님, 후배의 당선을 축하해준 강진구 교수님과 류찬열 교수님, 항상 학문적 영감을 주시는 김재용 교수님, 문학의 즐거움을 가르쳐주신 양건섭 선생님, 이제는 없으면 허전한 이희문 형과 문종필 형, 말벗이 되어준 지혜 누나와 예진, 나를 위해서 기도해준 경희 누나와 성애, 힘들 때마다 위로해준 승원 형, 산하, 동혁, 종원, 선배이자 동료인 승우 누나, 혜숙 누나, 경혜 누나, 설아 누나, 유진 누나, 지금도 함께 공부하고 있는 민영 누나, 현준 형, 덕원, 종수, 정현,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