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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밤, 구애(求愛)의 시간 - 편혜영, ‘밤이 지나간다’

by  박진아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1.


    잔혹함에 대해 논할 때 시간은 늘 다른 대상들보다 우위를 점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대개 시간이란 조금씩 우리의 존재를 죽음으로 떠미는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밤이 지나고 또 다른 아침이 시작되며 그렇게 단 한 번뿐인 기회들이 무심히 스쳐가는 동안 우리는 어느덧 그 종착지가 머지않았음에 놀라게 될 것이라고, 생이 단 한 번이라는 진리를 그제서 체득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서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은 지금을 막연하게 통과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시간은 가끔씩 한 없이 앞으로 나아가라는 채찍질 속에서도 문득 '구부러진' 모습을 드러내어 그제야 우리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때 우리가 발견하는 얼굴은 명료하기 보다는 흐릿한, 어떠한 표정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심지어는 나 자신의 것이자 완전한 타인의 것으로, 그 어떤 예상도 모두 뛰어넘은 충격적인 어떤 모습이다.

    시간의 구부러짐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이는 니체였다. 주판치치에 따르면 그가 자신의 시간으로 설정한 '정오'는 하루 중 가장 구부러진 시간으로, 한 낮의 태양으로 인해 '가장 짧은 그림자'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정오는 그 구부러짐으로 인해 시계를 파고 들어가 시간을 도려내며 '시간 속의 시간'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지는 그림자는 사물의 본래 크기 그대로인 가장 짧은 그림자로서 사물로 하여금 비로소 그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한다. 그러나 이때의 그림자는 '하나'를 '둘'로 만드는, 실체와 허상이라는 구도 자체를 교란시키는 분열의 그림자이다.1) 그렇다면 그 다음은?

    편혜영의 최근작들이 제기하는 물음이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다. 그동안 편혜영에게 시간이란 한편으로는 일상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죽음이라는 존재를 상기시키며, 그 일상에 정주하지 못하게 만드는 양면적인 존재로, 그녀의 소설은 시간의 그 커다란 양손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 해 왔다. 통조림을 만들 때 뭐가 힘드냐는 질문에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된다고 대답하고 나서 그럼 통조림을 만들 때 재밌는 건 뭐냐는 질문에 역시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편혜영 식의 블랙유머가 이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2) 끊임없이 긴 꿈을 꾸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바닥없는 추락을 예비하고 있는 잔혹함. 그것이 곧 편혜영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저녁의 구애」 무렵부터 그녀의 시간은 그 의미가 서서히 변화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밤을 밝히는 느닷없는 교통사고가 다시 그 자신조차도 전혀 예기치 않은 어설픈 구애로 연결되는 이 작품은 그녀의 전작들과는 달리 시간이 그토록 잔혹하지만은 않다는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 시간은 때때로 구부러짐으로 인해 그도 몰랐던 그 자신의 맨얼굴을, 그리고 그것의 가능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시간 그 자신이 '인간의 얼굴'을 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육화(肉化)된 시간은 편혜영의 근작 『밤이 지나간다』3)에 실린 단편들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구부러진 시간, 시간이되 그 어떤 시간도 아닌 시간으로 그녀가 선택한 지점은 니체의 빛이 쏟아지는 정오 대신에 '밤'으로 표현된다.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긴 밤의 시간을 지나가면서 그녀가 새롭게 찾아낸 결과물들은 우리에게는 그 자체로 하나의 두근거림으로 다가온다. '불안'의 문제를 제기했을 때부터 그녀의 문제는 늘 우리 자신의 문제였으니까.


    2.


    긴 밤의 서두에서 편혜영은 하나의 '몸'이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야행」은 '벨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부엌에서 뒷물을 하고 있었다'(9)는 불편한 문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녀가 이토록이나 애써 간수하고자 하는 몸은 그러나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9), '주검의 일부'(13)에 더 가까운 마모된 몸이다. 여기에 '재건축 시행일이 임박한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20)라는 공간은 매순간 무너져가는 그녀의 몸이 최대치로 확장된 것과도 같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정신이 마치 시계와도 같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계절의 변화, 외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은 시간과 분리된 시계와도 같이, 끝까지 독립적일 것이라는 착각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란 실은 우리의 몸이다. 몸은 감정이 없는 시계와 같이 시간에서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도 시간에 '일일이'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몸의 우둔함, 몸의 무식함, 몸의 천박함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부딪힘'들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단 한 순간도 쉽게 흘려보내지 못하고, 마치 강물의 한 가운데 박혀있는 아둔한 바위처럼, 몸은 시간에 대해 참으로 수동적이니 말이다.

    여기서 「야행」의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것은 불편한 다리, 아무때나 실금하여 그녀를 난감하게 하는 그녀의 몸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녀를 괴롭히는 주체는 올지 안 올지 확실치 않은 아들의 전화이다. 여기서 아들의 존재는 당신이 무엇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취향에 따라, 그것은 그냥 못난 아들이면서 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이다. 아들의 연락이 오고 그녀가 무너져가는 아파트로부터 다른 세계로 옮겨가기 전까지의 그 한정 없는 시간이야말로 그녀의 몸이 겪어내어야 할 형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을, 벗어나게 해 줄 '다음' 순간을, '밤과 밤이 이 만 번쯤 지나가는 것처럼 긴 시간'(29) 을 견뎌가며 계속 바라봐야 한다는 것.



    "준비하고 계십니까?" 시행사 직원이 물었다. 그녀는 현관 쪽에 대고 "그럼요, 준비하고 있어요. 늘 준비하고 있지요." 하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16)


    그렇다면 여기서 의아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녀가 그토록 호소하는 몸의 고통이야말로 그녀가 가진 괴로움의 근원이 아닌가 하고. 아들이 한정없이 만들어내는 시간으로 인해 그녀의 몸은 매 순간 '벼린 칼로 베어졌고'(11), '머리털이 뭉텅뭉텅 잡아뽑혔으며'(11), '날카로운 침으로 눈알이 찔리고'(11), '심장이 사정없이 옥죄어 드는'(11) 고통을 견뎌내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견디어냈던가? 오히려 고통은 비밀조차 가지지 못한 '시시한 인생'(19)에서 그녀에게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 되어주었다. 고통은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12)이며 이것이 그녀를 '유일'하게 만들어준다. 고통의 흔적으로 새겨진 몸의 상처들은 그녀와 타인을 구분하게 하며, 고통이 지나가는 순간, 처음부터 마지막 작은 느낌 하나까지 모조리 그녀의 몸을 통과하는 그 동안만은 아들이 부여한 기다림의 형벌에서 놓여날 수 있다. 때문에, 고통이야말로 초라한 그녀를 빛내주는 아우라4)이고, 그녀의 ‘정신’이다. 마모되어가는 그녀의 몸은 이렇게 ‘그녀의’ 정신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녀의 몸 곧 정신이 최대치에 이르는 순간은 낯선 남자의 재방문으로 끝나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다. 한껏 옷을 입어 부풀어 보이는 그녀의 몸, 그것으로 점점 다가서는 낯선 존재는 그녀로 하여금 아들의 시간에게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혹은 계속해서 그녀를 마모시킬 아들 그 자체인가. 그녀의 고통은 '쾌락을 무한하게 연기시키는'5),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고통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를 위해 편혜영은 '비밀'이라는 개념을 조심스럽게 그녀의 작품들에 새겨넣는다. 「야행」에서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녀가 발견한 '비밀'은 이어지는 「밤의 마침」, 「비밀의 호의」에서 더욱 더 작품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마치 석양이 호를 그리며 떨어지는 것처럼 서서히 시간은 스스로를 굽히기 시작한다.

    「밤의 마침」은 줄거리 상으로만 본다면 식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작품이다. 한 남자가 있다. 어느 정도의 나이와 안정된 가정, 그에 걸 맞는 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시간은 예의 이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남자의 삶에 예기치 않은 사건을 발생시킨다. 우연히 들어간 한 호프집의 화장실에서 그가 발견했던 만취한 소녀가 느닷없이 그를 성추행 혐의로 고발한다. 당연히 이후 남자의 삶은 형편없이 망가지고 만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편혜영은 전작들에서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이러한 시간이 얼마나 공포 스러운가, 혹은 인간이란 시간 앞에 얼마나 대책 없이 약한 존재인가를 상기시키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때때로 시간이 내밀어주는 맨얼굴에 관한 것이다. 「밤의 마침」에서 시간은 그가 소녀를 만나는 시간인 밤을 중심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소녀가 곧 밤이고, 소녀가 드러내는 밤의 맨얼굴이란 그녀의 분홍색 면 팬티이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검은 바지와 샅을 연결하는 것이 살색의 두툼한 허벅지가 아니라 분홍색 팬티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아슬아슬하면서 생기 있게, 지저분하면서 음탕하게 아이의 벌린 무릎에 걸려 있었다. (50)


    정리하자면 이렇다. 어느 날 밤 그가 어떤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이제까지 뒤에서 자신의 등을 떠밀고 간혹 예기치 않게 너무 세게 밀어서 혹여 그가 넘어질라치면, 즉시 그를 일으켜 다시 앞으로 걷게 만들었던 가혹한 시간이 (어쩌면 그것은 그의 아내의 손과 닮아있지 않았을까), 느닷없이 전연 무방비인 상태로 선명한 핑크빛의 얼굴을 내밀며 변기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전연 비밀이라고는 없던 그에게 몸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그에게 하나의 비밀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어쩌면 그는 소녀를 실제 성추행한 것보다 더 외설적인,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억을 가지게 된 셈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시간이 준 그 비밀을 통해서 시간을 넘어갈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된 셈이니 말이다. 그는 이제껏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단 하나도 성취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그의 지난 인생은 늘 수동태였다. 그러나 얼굴을 드러낸 '시간의 시간'은 그에게 밀려가는 삶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탈출의 기회와 불안의 공포는 그를 두 시간 사이의 경계에 서게 한다.

    그러자 그는 알게 된다. 자기와 같이 시간이 굽어지는 순간을 만났던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 커다란 즐거움인 동시에 엄청난 재난과도 같은 비밀의 존재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수신인과 발신인이 불명확한 엽서를 통해 자신의 몸이 담고 있는 아프면서도 미치도록 매혹적인 특별한 상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자신의 엽서가 그에게 도착한다. 비밀의 처분과 비밀의 실현사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소녀를 만나기 위해 깊은 밤거리를 걸어간다.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점은 그가 끝내 그 사이에서 ‘비밀을 비밀인 채 두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이에서 그저 중간을 선택했을 뿐이 아니냐고? 이때의 비밀은 그가 '선택'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비밀을 품고 살아가기를 선택함으로써 그는 수동을 가장한 능동, 항상 두 시간 사이에서 두 개의 시간 모두를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는, 노예를 사칭한 주인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밤이 전해준 비밀이라는 열쇠를 아주 제대로 활용한 셈이다. 이를 통해 그는 오히려 한층 더 깊숙이 밤의 어둠 속으로 잠입하였으니.

    그러나 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비밀이 절대 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 때문에 그는 마지막에서 이제까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건강한 이기주의자가 된다. 비밀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라야 한다. 그의 표현대로 그의 비밀이 그만의 것이 아니게 만드는 또 다른 존재는 비밀마저 빼앗긴 그를 '두고두고 외롭게'(56)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밀이 모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비밀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비밀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다. 동시에 비밀은 그 비밀을 품고 있는 자가 남에게 알리고 싶어 해야 비밀이 된다. 타인에게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한편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알려주고 싶은 것이라야, 그것은 비밀이 될 수 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충족되지 못하면 비밀은 폭로되어 사실이 되거나 혹은 잊혀진 기억으로 전락한다. 모순되는 두 가치 사이에서 그렇게 비밀은 마치 '세포처럼 자생하거나 자멸'(38) 한다.

    「밤의 마침」이 이같이 비밀을 통한 자기의 발견을 말하고 있다면, 「비밀의 호의」는 비밀이 가진 이 모순점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비밀의 호의」는 비밀과 타자와의 관계로 비밀에 관한 편혜영의 성찰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밀의 호의」는 실로 비밀로 점철되어 있다. 작품에서 끝내 밝혀지지 않은 어린 경술의 가출에 대한 비밀은 물론이고, 점점 사라져가는 경술의 시력에 대한 비밀과 마침내 경술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그의 비밀까지 이 작품에서 비밀은 겹겹이 중층되어 그와 경술간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와 경술, 이 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시점은 경술의 가출사건 이후부터이다.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그 나흘간의 비밀에 대해, 그는 단 한 번 경술에게 물어보고자 하였으나 실패한 이후로 그것을 끝내 알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다는 의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후로 눈처럼 쌓인 경술의 비밀들은 모두 이때 생겨난 그의 갈등 위에서 존재한다.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하게, 이 갈등관계에서 가까스로 그의 의지가 우위를 점함으로써 경술은 비밀을 지키고 계속해서 ‘경술’로 존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약간의 우위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는 수 없이 엉킨 갈등관계들을 작품은 제목을 통해 경술에 대한 그의 ‘호의’라는 말로 정리한다.

    그러나 그의 호의만큼 경술은 섬세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경술은 그가 비밀을 만듦으로써 가까스로 찾은 그의 노년을 무참하게 훼손하고 그를 다시 자비심 없는 시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한다. 여기서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것은 그의 비밀이 폭로된 이후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그것에 경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틈날 때마다 혼자 매만지며 즐거워했던 그의 비밀이 폭로된 이후로도 아무도 그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결국 그 누구도 '적막과 고독'(104)을 피할 수 없음을 상기시켰고, 그것은 차라리 그의 뒤에서 그를 욕하며 그의 비밀을 능욕하는 것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때문에 그가 경술에 대한 호의를 지속할 의지를 상실하게 된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럼 이제 이들의 결말로 넘어가보자. 너무나 순수한, 그래서 그의 내미는 손이 더욱 부끄럽고 불편한 나의 동기(同氣)와의 관계라는 부분은 박완서를, 서로가 뻔한 거짓말을 하고 이를 알고도 속아줌으로써 서로 다가가지도 멀어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묘한 긴장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은 마치 오정희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비밀을 둘러싼 관계의 결말을 묘사하는 부분에 이르러 박완서의 따스함과도 오정희의 섬뜩함과도 다른 양상으로 귀결된다.


    지금 당장 모든 일을 물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일렀다. 내일이면 늦을 게 분명하지만. (107)


    잠깐 마주잡은 경술의 메마른 손은 곧 그의 손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경술의 불편함마저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더 큰 '호의'를 보여주기엔 경술이 깨뜨린 그의 비밀이 남긴 조각들이 그를 너무도 아프게 찌른다. 그렇다고 곁에서 서로의 상처를 후비며 끊임없이 작은 복수들을 시도하고 피고름과 함께 엉켜 살기에는 그에게 그녀가 소중하다. 마침내 그는 경술과의 '거리 두기'를 실행한다. "오빠"라고 부르는 경술의 소리가 들릴 수 있는 '열 한 걸음'(106)만큼의 거리로 '편치 않은'(108) 걸음을 걸어가는 것이 그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호의였던 것이다. 결국 그와 경술이 나아갈 수 있었던 최대치인 서로의 손이 닿았던 자리에서, 비밀의 호의는 환상처럼 잠시 닿았다 떨어진 피부의 감촉으로 남는다.


    3.


    그래도 영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다. 비밀을 통해서 겨우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간 사람들이 다름 아닌 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의 손을 잡을 수가 없다? 과연 이 상황에 대안은 없는가. 여기서 편혜영이 제시하는 또 다른 키워드가 바로 ‘구애(求愛)’이다. 시간의 구부러짐으로 인해 사고처럼 우연하게 발견한 '자신'이 세계에서 튕겨져 나온 존재라는 비밀을 고백하고, 자신과 함께 튕겨져 나온 존재‘들’이 되어줄 생각은 없는지를 타인에게 묻는 행위인 구애는 필연적으로 ‘전적(全的)’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담아 있는 힘껏 내미는 손짓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항상 돌이킬 수 없는 손실과 도저히 주워 담을 수 없는 수치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진심과 상관없이, 여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는 두려움이 점지해준 고백 때문에 곧 부끄러워질 것이며 어떤 말도 돌이킬 수 없어 화가 날 것이고 그 말이 불러온 상황과 감정을 얼버무리려고 애를 쓸 것이며 그럼에도 당시 그 마음에 인 감정의 윤곽이 무엇인지 헤아릴 것이었다.6)



    그래서 이 구애는 도대체 아름답지가 않다. 오래 계획된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그에 걸맞는 감동을 발산하기에 이 구애는 너무나 부담스럽다. 그것은 전혀 계획되지 않았기에 더욱더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밀어닥치고, 그래서 정제된 꽃이나 향수의 냄새가 아니라 불규칙하게 내뿜는 숨소리, 작게 포장된 선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서 있는 고깃덩어리 같은 하나의 존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쪽으로 4센티미터?는 구애의 그러한 무게감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업무상 매일 왕복 5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는 서로간의 ‘가족 같은 팀워크’(145)를 견디지 못하고 쭉 고속도로 외근만을 자처하는 고독한 인물이다. 사람과의 접촉 없이 다만 긴 고속도로를 묵묵히 달리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그는, 고속도로라는 거의 완벽히 차단된 공간 안에서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관계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책임감이다. 그것은 사무실을 나와 애써 되찾은 자신만의 시간을 앞으로 어떻게 바꿔놓을지 모르는 불안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때문에 조는 자신만의 비밀을 오로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고독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선택하는 대신 차라리 지금의 고립된 현재가 앞으로도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볼 수 있었다. 근무 중이지만 객기를 부려 달려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코 용기를 내지 않았다. 객기를 부리지도 않았다. 여자와 자신이 현재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지 계산하고 이대로 달려가면 몇 시간 후에 조우할지 생각해보았으나 그게 전부였다. (158)


    여자는 조에게 존재하지 않는 먼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단 한 가지의 행동이 필요하다. 조가 근무지를 이탈해 쉼 없이 여자에게 달려가 그녀가 말한 미래들을 실현시킬 뜻이 있음을 말하는 것, 그렇게 그녀의 구애를 받아들이기.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그가 고속도로를, 안전한 차 안을 벗어나 맨몸으로 그녀 앞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을 뒤덮는 아무런 외피(外皮)도 없이 피부 밑에 숨겨져 있는 맨 살을 온전히 그녀에게 맡긴다는 것은 그에겐 아무래도 힘든 일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았던, 그래서 돌이킬 수 없이 맨 살 그대로 고속도로에 방치된 수많은 사람들과 우그러진 자동차들을 그는 이미 수 없이 만나지 않았던가.

    이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이가 교통사고에서 사라진 남자이다. 안정된 가정도 직장도 모두 버린 채 교통사고 이후 홀연히 사라져버린 한 남자. 남자의 존재는 조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하다. 잠깐의 한눈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마는 고속도로에서 필연적으로 ‘조금 어긋난 시선’(163)을 가지고 있는 조가 갓길을 걸어가는 그 남자를 발견한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지금 위태위태하게 홀몸으로 해무가 낀 고속도로의 갓길을 걸어가는 남자는 조가 가장 되고 싶은 존재이면서 가장 자신과 멀어지기를 바라는 단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극단의 사이에서, 망설임 끝에 조는 ‘호의’(163)를 선택한다. 그것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르게 고속도로를 환상처럼 희미하게 만드는 해무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등을 압박하는 통증 때문이기도 하다. 맨 몸으로 걷는 남자가 그의 차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그는 순간적으로 고속도로에 멈춰 남자가 걸어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 조는 차의 밖으로 나가 다시 남자를 기다린다. 밖으로 나간 그의 옆으로 차들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옆을 스쳐간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그의 몸이 딱딱한 외피가 사라짐으로 인해 심한 한기를 느낀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까지도 조는 끝내 도로를 떠나지 않는다. 대신 ‘갓길을 걷는 남자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164)는 마지막 문장이 그가 서 있는 서쪽으로 약간 비뚤어진 위치를 가늠하게 할 뿐이다. 이렇게 구애는 손을 맞잡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해물 1킬로그램?의 구애는 보다 도발적이다. 이 작품에서 구애는 느닷없는 웃음소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남편의 권유로 실종된 자식을 가진 여인들의 모임에 가게 된 엠은 모임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두 개의 극단적인 요소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하나는 그들의 검은 정장들이 상징하는 깊은 슬픔과 애도의 경직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정장 안에서 ‘패턴이 강한 스카프’(64)나 ‘잘 빠진 스커트 라인’(65), ‘화려한 팬던트’(65)를 써가며 끝내 살아있고자 하는 욕망의 유동성이다.

    아이를 잃어 상복을 일상복처럼 입어야 하는 여인들의 내부에 도사린, 실은 자신의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마저도 자신을 더욱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개별성의 도구로 인식한다는 이기적인 욕망을 편혜영은 부정하지 않는다. 모임에서 여인들의 입은 아이를 잃어버려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들의 몸은 이미 ‘상복’에서 탈피해 있다. 모임이 더해갈수록, 여인들의 분위기가 더욱 엄숙해지고 슬픔의 언어가 깊이를 더해갈수록, 여인들이 내뿜는 생명체로서의 이기주의는 점점 더 강해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아닌가’ 라는 도덕의 자기검열은 이들이 그 솟아나오는 생명력에 대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거세하게 한다. 그 에너지가 강할수록 더욱 지독하고 잔인하게. 금욕주의란 실은 욕망의 다른 이름인 것처럼7), 이들 두 요소는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은 평범하고 무기력하던 그녀의 삶을 어느 순간 갑자기 특별히 불행한 것으로 바꾸었다. (78)



    이때 긴장을 가르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케이가 참지 못해 터뜨린 웃음소리는 그 어떤 말보다도 여인들에게 강한 충격으로 인식된다. 슬픔을 탈색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그 슬픔을 빛나게 하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찾고 심지어는 즐거움을 찾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케이는 이렇게 한 번의 웃음소리로 여인들이 망각했던 강렬함을 일깨운다.

    여인들이 계속해서 말을 통해 추구해왔던 건, 슬픔이 없는 상태, 즉 자기만의 슬픔을 소유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도덕의 명령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고, 그럼에도 사회는 이 슬픔을 미리 ‘코드화’하여 강요한다고 바르트는 지적한 바 있다.8) 그 말대로 케이의 버릇없는 웃음에 대해 큐는 즉각적으로 케이에게 제제를 가한다.

    혹시 누군가에게 문학은 어디에서 탄생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이때 나오는 케이의 멋진 대답을 예시로 들고 싶다. 케이는 해물 1킬로그램이라는 은유로 큐의 비난을 가볍게 뿌리쳐낸다. 해물 1킬로그램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고. 수분이 많은 해물을 어떻게 정확히 1킬로그램을 재어 담을 것이며, 담는다 해도 그것이 더도 덜도 아닌 딱 1킬로그램이라고 그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케이는 그것이 못내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말대로 슬픔이라는 것에 대해, 또 그 슬픔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그 어떤 누가 정확하게 그것을 재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정하게 그것을 담을 수가 있겠는가.

    결국 공정한 도덕이 환상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웃음밖에 없다. 상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마음껏 웃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케이의 구애는 이렇게 강렬하게 엠에게 전달된다. 그 어떤 언어보다 직설적이기에 또한 거절하기 힘든 케이의 구애를 마침내 수용한 엠은 다시 남편에 대해 구애를 시도한다. 자신의 비밀이 자신들의 비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세계 안에서 허락받은 연인은 이미 연인이라 할 수 없으므로, 엠은 구애를 통해 연인이 됨으로써, 아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공동체로의 확장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한다.9)

    그리고 다가오는 구애의 마지막 단계에서, 다시 우리는 애써 잊고 싶었던 하나의 문제와 대면해야만 한다. ?가장 처음의 일?은 구애의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작품이다. 구애는 실패할 수도 있다. 아니, 성공하는 것이 더 드물지 않던가. 실패는 그저 상정된 위협이 아니라 늘 구애하는 행위자의 옆에서 분명하게 존재한다.

    한윤수에게 구애란 책의 위치를 뒤바꿔 놓는 것이다.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185)으로 고정시키는 시간에서 함께 벗어나자는 제의를, 그는 ‘털어놓는 것을 포기’(187) 하고 만다. 대신 그는 언어가 아닌 끊임없는 책의 이동을 통해 그의 의도를 드러낸다. 계속해서 그가 말하는 책을 찾기에 실패하는 여자가, 어느 날 그의 의도를 깨닫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의 책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한윤수가 생각하는 구애에 대한 '응답'이다. 이렇게 몽상적이기까지 한 그의 구애는 매일매일 실패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서 매일매일 조금씩 더 완성되어 간다. 서로 다른 위치에 산재해 있는 그의 구애의 시도들 사이로, 여자는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비켜 다닐 것이며, 마침내 어느 날 마지막 책이 자리를 바꿈으로써 서점의 모든 책이 자리를 이동한다면?


    여자는 조금씩 새로워졌다. 어느 날 여자는 옅은 밤색의 작은 눈동자를 품은 쌍꺼풀 없는 눈이었다. 어느 날은 크기가 고르지 않은 치아를 숨긴 장난기 어린 입술이었다. 손님에게 짓는 무덤덤하면서 친절해 보이는 미소였다가 따분하고 지루해서 터져나오는 하품이기도 했다. 동료들과 잠깐씩 목소리를 낮춰 수다를 떨 때의 장난스런 말투와 손짓이었다가 책을 찾아 서가를 다닐 때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이기도 했다. (187)


    그러나 그의 ‘비밀’을 목격한 여자의 반응은 그의 구애가 얼마나 몽상적이고 깨지기 쉬운 것이었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만다. 그의 책을 뒤바꿔놓는 행동을 우연히 목격한 여자는 한윤수의 생각과는 달리 그를 서점의 감시자에게 밀고한다. 그때까지 한윤수가 조금씩 그려온 여자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점점 다정해진다고 생각했던 모습,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웃어준다고 생각했던 미소, 그리고 책을 옮기는 그의 행동을 보고 무언가를 이제야 알겠다는 듯 보였던 표정 등은 일순 사라지며, 그가 처음으로 부모의 말을 어기고 계획했던 ‘쓸모없는 일’(167)은 아무런 대가도 얻지 못한 채 그를 완벽하게 무용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놀랍게도 가치 없음, 쓸모없음으로 낙인찍힌 존재는 여기서 위대한 반전을 기획한다. 그는 이제 완전히 낯설게 된, 전혀 모르는 여자를 다시 만난다. 어제까지 그가 알았고 더 알아간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쓸모 있음’의 존재는 아마 이 지점에서 실패를 반성하고 미래를 도모할 것이다. 그러나 한윤수의 반응은 다르다. 그는 매일 새로워지는 여자의 모습을 대하며 구애의 ‘완성’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생애 처음으로 ‘농담’을 시도한다. 그가 걸었던 모든 것이 부서진 것에, 그녀는 죄책감도 부담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왜냐면 그는 우연히 ‘쓸모’를 벗어난 순간부터 ‘재생’의 가능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가장 무거우면서도 무엇보다 자유로운, 이제까지 뱉어온 모든 말을 무화시키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뱉는 최초의 언어가 된다. 역설적으로 구애는 여기서 가장 충만해진다. 끊임없는 실패를, 새로움의 근원으로 삼게 되기에. 이렇게 거리는 파토스의 원천으로 탈바꿈한다.


    여자가 그에게 꺼내는 말은 대부분 ‘죄송해요’로 시작했다. 죄송해요, 책이 없네요. 죄송해요, 전산에 재고가 잘못되었나 봐요. 죄송해요, 책을 못 찾았어요 같은 말들. 하지만 죄송해요 뒤에 하는 말이 ‘다음에 다시’인 경우가 많았다. 그랬다. 걱정할 건 없었다.

    ‘다음에 다시’가 있으니까. (170)


    4.


    다시, 우리는 첫 부분에서 시간의 굽어짐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편혜영의 밤을 헤쳐온 지금 시간은 어떤 모습이 되었는가? 영원한 다음을 기약하는 한윤수의 구애를 통해 그것은 우연한 한 번의 굽어짐이 아니라, 횟수를 거듭할수록 긍정성이 증폭되는 굽어진 시간'들'로 변화한다. 굽어진 시간은 복수로 분열되면서 우연히, 마치 시간 자신의 의도치 않은 실수처럼, 문득 나타나는 행운이라는 의미를 탈피한다. 시간의 얼굴을 찾고, 그것에서 응답을 구하려 노력하는 이는 이제 그 자신이 시간을 스스로 구부러트릴 수 있는 강인함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은 너무 소설적인 마무리라고 비판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다음에 다시'라는 있을법한 결론이라도, 소설이 현실을 바라볼 때에는 늘 어느 정도의 아련함을 담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괜히 ‘소설같다’는 말이 있겠느냐면서. 특히나 소설이 힘을 잃은 지금 그 비판은 더욱 뼈아프다. 그 말대로 소설은 본질적으로 현실보다는 꿈에, 꿈보다는 현실에 가깝기에, 그래서 더 한없이 무능하고 또 가여울만큼 끈질기다.

    여전히 현실을 직시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유약한 나로서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유명한 '인민의 아편'이란 표현과 함께 그것은 '영혼이 없는 세상의 영혼(heart of the heartless world)'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정의는 문학에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영원히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그러나 그것을 계속적으로 말함으로써 실재시키는 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행위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하여도 그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 환상은 그것 없이는 실재 또한 감당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편혜영의 글들은 한 없이 새벽에 가까운 옅은 밤에서부터 심연의 한 가운데, 낮과 같은 백야, 해가 지기 직전의 어둑한 저녁 무렵을 끊임없이 지나가는, 그리하여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지향하는 긴 순례와도 같다. 그것은 존재의 문제를 담고 있기에 짙은 밀도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유희처럼 가볍고 자유롭다. 그녀의 글들은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영혼을 찾기 위해 걸어가고 역설적으로 영혼은 그녀의 그 움직임을 통해 옅은 그림자를 내보인다. 그러니 영혼이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없는 무력한 존재들은 아직도 소설이라는 환상을 믿으며 그녀가 헤집고 먼저 나아간 밤거리를 뒤따라 밟아갈 수밖에.

    혹시 그녀를 따라 걸어가는 그 여정 동안 시간은 당신을 향해서도 얼굴을 돌려 주었는지, 그리하여 문득 당신 자신도 그 어떤 비밀을 품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그것을 절대 숨겨야 할 혹은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누군가를 떠올리지는 않았었는지. 그렇다면 밤을 지나가는 긴 구애의 끝에 선 지금 당신의 답변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박진아

    박진아

    1985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권성우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권혁웅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글)

    문학평론 부문 응모작은 12편이었다. 다음과 같은 응모작이 우선 탈락했다. 비평의 자의식이 없는 글. 사유가 성글고 문장이 허술한 글. 대상 텍스트 선정이 잘못된 글. 최종 세 편의 응모작이 남았다.

    고광식의 ‘시적 모자이크, 상처라는 멜랑콜리한 기억들-김민정론’은 김민정 시의 주체가 갖는 성격을 ‘상처’라는 키워드로 분석했다. ‘상처’가 가진 존재론적 성격을 탐색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론이 다소 도식적으로 적용됐고 선행연구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 용두사미 결론이라는 점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이만영의 ‘도시의 묵시록, 지옥에서의 글쓰기-김사과론’은 패기만만하다. 선행 작가와 연장선상에서 텍스트를 위치 지으려는 균형감각도 있고, 비평의 체계에 대한 열정도 있으며, 정치와 문학의 통섭이라는 최근 화두를 끌어안으려는 문제의식도 있다. 그런데 결론이 해당 텍스트에 내재된 것이었는지가 끝내 의문으로 남았다. 비평가의 자의식이 텍스트 ‘바깥’을 호명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주길 바란다.

    ‘지나가는 밤, 구애의 시간-편혜영, ’밤이 지나간다‘’는 편혜영의 최근작을 ‘구애’라는 키워드로 읽은 글이다. 무엇보다 천편일률의 패각(貝殼)이 없다는 점이 좋았다. 많은 글이 딱딱하고 국적불명인 유사철학 언어를 흉내 내는 요즘, 당선자의 글쓰기는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편한 호흡으로 써내려간 이 글에는 에세이와 비평이 사이좋게 동거한다. 자신의 사유를 감정에 양보 않는 균형감각도 있다. 이 편안함에 촘촘함이 더해지면 빼어난 비평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 박진아

    박진아

    1985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당선 소식을 듣고 아폴리네르가 쓴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에 일곱 사람 이상의 독자를 바라지 않지만, 그 사람이 중국의 황후, 미국의 흑인 복서 같이 서로 다른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그런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고 썼습니다. 바람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제가 상상했던 것은 알 수 없는 얼굴을 일일이 마음속으로 그리며 시를 쓰는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는 못해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정성스럽게, 자신이 납득할만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한동안 주변 사람들을 많이 괴롭히면서 지내왔습니다. 지금도 민폐만 끼치고 있는 분들에게 고마움과 죄송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먼저 이화여대 국문과의 모든 선생님, 특히 김미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공부로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면피를 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징징대는 제게 비빌 구석을 마련해 주었던 친구들인 강아, 굽언니, 오성, 렬, 곰돌과 백기자에게 박둥둥이 마음에서 감사를 드립니다. 버릇없는 저를 동생처럼 챙겨주셨던 총통님, 소륜엄마, 선경언니와 예원언니, 귀엽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혜린, 혜란, 진송, 예솔, 지현이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애써 좋게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좋은 글로 많은 상상을 하게 해주신 편혜영 작가님, 어릴 때부터 불평 없이 저를 돌봐 준 현아와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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