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진호의 영화〈봄날은 간다〉는 사랑에 관한 담론, 그 중에서도 사랑의 상처와 치유에 관한 담론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상처와 치유'에 관한 지점으로 약간만 시선을 돌리면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담론이 된다.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치유는 곧 기억과 망각에 다름 아니고 영화는 끊임없이 기억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진호의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사랑이 시간으로, 시간이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랑과 시간의 이동은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 아닌 서로에게 끊임없이 스며드는 삼투압 현상과 같은 것이고 영화는 단지 외형적으로만 시간을 덮어 쓴 사랑의 담론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사랑이 드러나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하고, 시간이 감지되지 않고서는 사랑이 드러날 수 없다. 때문에 허진호는 독특한 방식―시간으로 쓴 사랑이야기 혹은 사랑으로 쓴 시간이야기―으로 사랑과 동시에 시간을 성찰한다. 하지만 사랑과 동시에 시간을 성찰하는 무수한 담론이 존재하는 가운데 그의 담론이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성찰이 영화라는 장르에 고유한 미학적 형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봄날은 간다〉는 단순히 영상미라고 불리어지는 서정성의 차원에서 잘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이후로 밝혀지겠지만〈봄날은 간다〉는 영화라는 매체만이 포착/창출해 낼 수 있는 고유한 이미지를 통해서 사랑과 시간의 담론을 만들어 낸다.
2.
살갗이 벗겨진 corch: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
(롤랑 바르뜨,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 여자 주인공 은수가 읇조리는 노래 가사가 대변하듯이 영화〈봄날은 간다〉는 내러티브면에서 젊은 연인의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멜로 영화다. 그러나〈봄날은 간다〉에는 관객들이 일반적으로 멜로 영화에서 기대하는 '영화적인 재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랑의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엮는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극적인 만남도, 자극적인 사랑의 순간도 없다. 게다가 이별의 과정에서는 '친절한 설명'도 빠져 있다. 이처럼 영화는 관객의 기대지평에서 한 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리고 너스레를 떨 듯이 사랑의 순간에 라면을 끓여 주고, 연인의 등을 긁어주고, 운전을 가르쳐 주고, 이별의 순간에 창가에 앉아 트로트를 부르고, 연인의 차를 긁는다. 사랑의 의미들이 실려있지 않을 것 같은 소소(小小)한 순간들의 연속.
〈봄날은 간다〉는 이처럼 일상에 던져진 사랑의 모습을 관찰한다. 영화는 사랑의 기념비적인 사건들 보다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에 충실하며 사랑이란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들 사이의 순간들 ― 과정이며 지속이라고 말한다.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대다수의 사랑에 관한 담론이 사랑에서 시작(만남)과 끝(헤어짐)의 우연성과 비극성만을 부각시키면서 사랑에 대한 허위 의식(?)을 독자 혹은 관객에서 심어준다면〈봄날은 간다〉는 사랑에서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것은 수많은 순간들 중의 하나 ― 그것도 매우 예외적인 순간인 것임을, 사랑의 본질이란 시작과 끝 사이의 무수히 작은 순간들의 지속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영화〈봄날은 간다〉는 이러한 일상적인 순간들의 지속에서 사랑의 언어, 혹은 상실의 언어를 읽어 낸다.
그런데〈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상실의 언어는 음성으로 실현되기 이전의 언어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그 안에 사랑이 존재하듯이, 사랑은 명명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복잡한 감정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영화〈봄날은 간다〉는 일상의 힘을 빌어 이러한 감정들 전체를 담아내려고 한다. 무수한 사랑의 담론을 통해서 형식화되고 각질화된 사랑에서 껍데기를 제거한 후의 무정형의, '날 것'으로서의 사랑, 일상이라는 혼합물 속에 섞여 있는 사랑이라는 그 '모호한 욕망'의 덩어리를 통째로 관객에게 선사한다. 영화 속에서 은수와 상우의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닌, 상우가 은수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강릉까지 달려가고, 늦은 밤 누워서 히죽히죽 웃는 곳에 있다. 그리고 이별은 은수가 짐을 싸놓고 홀로 웅크리고 있고, 창가에 앉아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그 곳에 있다. 영화는 거기 그렇게 오래 전부터 사랑이 끓고 있었다고 말한다.
3.
그러나〈봄날은 간다〉는 이러한 일상적인 모습들에 사랑이 녹아 있다는 전제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일상적인 순간들이 사랑의 언어로 비등하는 순간들을 잡아낸다. 허진호의 재능이자 영화〈봄날은 간다〉의 특별함은 일상이라는 혼합물 속에서 숨겨져 있는 사랑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내밀한 순간들―사랑의 '에쎈스'를 뽑아내고 정제하는데서 발휘된다. 무성 영화에 가까운, 상우와 은수의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계속되는 소리 녹음 장면들은 일상적인 몸짓이 얼마나 정밀(情密)한 사랑의 감정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며, 상우가 은수와 헤어진 후, 쭈그리고 앉아 흔들리는 핸드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정적인 장면은 상실의 슬픔, 두려움이 눈물이나 울음보다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에쎈스'의 추출은 시간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롱 테이크로 촬영된 이러한 장면들은 '반 박자'쯤 느리게 연출(주1)되었는데 그로 인해 드러내는 것은 시간이다. '반 박자'의 차이로 발생하는 시간의 느린 흐름은 일상적인 순간이 사랑과 상실의 감정들로 전환되면서 발생하게 되는 시간의 물리적인 변화―사랑의 닮고 달은 상투어, '그때는 시간이 멈춘 듯 했지'라는 사랑에 빠진 이들이 겪게 되는 시간의 '진공'상태―를 성공적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영화〈봄날은 간다〉는 주인공들의 감정이 농밀해지는 순간에 시간의 객관적인 흐름을 거부하면서 시간의 비균질적이며 주관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봄날은 간다〉는 지극히 '영화적인' 사랑에 관한 담론―영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쟁은 발레리가 소설을 폄하하면서 예를 든 유명한 어구-후작 부인은 다섯 시에 차를 마셨다-를 인용하면서 소설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기록적인 측면이 소설의 창작 가능성을 제한한다면 영화작가는 소설가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위치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화 작가는 후작 부인을 직접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현의 직접성은 결국 영화는 영화의 최소 단위인 하나의 샷에서조차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 그렇지만 영화의 본질은 재현의 직접성에 있는 것이 아닌 재현의 연속성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화에 있어 재현의 연속성은 어느 시점에서 소설의 기록성을 넘어서 시의 추상성/상징성에 다가선다. 들뢰즈가 현대 영화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간-이미지(image-temps)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설명하듯이 영화의 질적 변화는 영화사 초창기 영화의 유기적인 전체(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계량화된 시간이 운동에 종속된 상황, 즉 운동-이미지(image-mouvement)를 탈피하고 역으로 운동이 시간에 종속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여기서 운동이 시간에 종속된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영화가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즉, 운동들을 엮기 위해서 시간을 재단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시간의 드러냄을 통해서 운동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드러냄'의 과정에 시간―주관적이며 비균질적이고, 역동적이며 생성 중인 시간이 있다. 결국 현대 영화의 특질은 운동에서 시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 시간 위에서 운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봄날은 간다〉가 사랑의 담론인 동시에 시간의 담론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의 실체는 위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시간을 통해서 사유된다. '반 박자'의 차이를 통해서 사랑은 그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들뢰즈의 논리를 따르자면〈봄날은 간다〉와 다른 멜로 영화와의 차이는 현대 영화와 그 이전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차이와 유사하다 (내러티브, 즉 운동을 지향하는 대다수의 멜로 영화에 비해〈봄날은 간다〉는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장소를 지향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사랑의 에쎈스가 발휘되는 부분은 영화 전체에 걸쳐 매우 적은 부분이라는 것이다.〈봄날은 간다〉가 단지 영화의 부분적인 순간에만 시간의 논리에 기대 있다면 영화는 잘 만들어진 멜로 영화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봄날은 간다〉는 특정한 순간들만이 시간의 논리에 힘을 빌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전체가 시간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사랑의 담론을 넘어서고 있다.
4 or 3'
일상은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 더 큰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시작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中)
〈봄날은 간다〉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일상에 던져진 사랑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사랑의 일상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이란 매우 낯익은 개념이다. 언제부턴가 일상에 특권적인 의미가 부여되면서, '일상성'의 문제는 모든 담론에 있어 기본 어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봄날은 간다〉도 역시 이 일상성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일상성이란 무엇인가? 일상성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상은 삶에 있어서 곧 지속을 의미한다. 부분들로 나뉘어질 수 없는 연속체로서 추상(抽象)할 수 없는―즉, 뽑아 낼 수 없는 무정형의 덩어리. 여기서 일상이 나뉘어 질 수 없고, 추출될 수 없다는 것은 일상이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시간 개념―즉 지속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우리의 내면적인 삶의 실재는 단지 검증 가능한 현상들의 집합이 아니고, 지속이며 흐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입장은 시간이 균질하지 않고 계량화될 수도 없으며, 시간은 존재 외부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존재 내에서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에서 일상에서 관찰된 사랑의 총체적인 모습은 상우와 은수의 사랑이 완성되고 와해되는 과정(흐름)이다. 상우와 은수의 일상적인 행위들은 이러한 사랑의 과정들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데 여기서 그들의 일상적인 언어와 몸짓은 매순간 '이미 끝나버린 것'이 아닌 '무언가가 끊임없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영화 속에서 그들의 일상적인 행위가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향해 지속되는 과정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봄날은 간다〉를 '검증 가능한 현상'들에 집중에서 바라본다면 영화는 관객에게 아무것도 전달해 주지 않는다. 상우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은 단지 지루한 롱 테이크일 뿐이며, 알몸의 상우가 은수의 등을 긁어주는 것은 싱거운 '베드씬'일 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일상적인 행위들이 사랑과 상실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지속이라는 시간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동시에〈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의 에쎈스가 추출될 수 있었던 것, 반 박자의 차이가 사랑의 날카로움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비균질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장면들이다. 이처럼 영화는 베르그송적인 시간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시간의 지배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영화는 넌센스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시간은 모두 사랑의 시간들로만 환원되는가?
영화는 사랑이 지속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삶이라는 더 큰 지속에 사랑을 위치시킨다.〈봄날은 간다〉는 상우와 은수만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없는 분산적인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다. 사랑의 설레임과 아픔을 겪는 주인공 옆에서 아버지는 노래방 기기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고모는 화투를 친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꾸만 역(驛)으로 할아버지를 기다리러 가신다. 이처럼 상우에게는 가족이, 은수의 아파트와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이 사는 오래된 한옥이 있다. 영화는 사랑의 시간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사랑의 시간 그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긴 삶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상우와 은수는 사랑의 시간 보다 더 깊은 삶의 지속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이 과정이라면 사랑 또한 삶의 한 과정인 것이다. 〈봄날은 간다〉가 전반적으로 멜로 영화의 색채를 띠면서도 매순간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삶이라는 거대한 지속이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봄날은 간다〉는 멜로 영화인 동시에 상우라는 한 남자의 가족사적인 영화가 되고 성장기 영화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영화를 지배하는 지속이라는 시간의 성격은 무엇인가? 현재의 끊임없는 연속인가, 아니면 과거의 한없는 축적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가오는 미래의 쉼없는 준비과정인가? 영화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가?
5.
영화〈봄날은 간다〉는 과거 지향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상우가 사는 오래된 한옥에서 보여지는 명백한 퇴락의 이미지와 은수가 사는 강릉 변두리의 아파트 단지가 보여주는 '촌스러움'-촌스러움은 곧 과거의 흔적이 아직 벗겨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은 영화의 공간을 추억으로 채색한다. 또한 상우와 은수가 함께하는 '자연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은 잊혀져 가는 소리를 찾아내서 틀어주면서 과거에 묻힐 뻔한 소리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상우와 상우의 아버지는 '뽕짝'-흘러간 노래에 능숙하다. 이처럼 영화의 곳곳에는 과거를 추억하는 요소들이 꼼지락대며 관객을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에 젖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화의 과거 지향적인 면은 인물들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상우의 직업은 자연의 소리를 담아내는 것이지만 그것은 곧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다. 롱 테이크로 촬영된 영화 속의 녹음 장면들에서 보여지는 지극히 정적인 순간들은 상우의 녹음 테이프에 감기는 것이 소리인 동시에 시간임을 암시한다. 재생된 녹음 테이프에서 들리는 것은 대밭의 '쏴-'하는 바람 소리인 동시에 녹음 테이프에 진공 포장된, 그 때 그 시간인 것이다. 이는 상우가 산사에서 눈이 떨어지는 소리를 녹음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는 진정 눈 떨어지는 소리를 기록하려던 것인가? 은수와 함께 하는 그 밤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상우라는 인물은 직업적으로 시간을 잡아내는 동시에 태연스럽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과거 혹은 현재의 영속성에 대한 희구를 품고 있다. 그리고 상우의 할머니가 있다. 젊은 시절 사별한 남편을 잊지 못하고 가족들의 방심을 틈타 쉴새없이 기차역으로 달려가는 할머니에게 집에서 기차역까지의 길은 단순한 보도가 아닌 과거로 열려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끝에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가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기차역으로 총총 사라지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는 상우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거라는 시간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주술사들의 뒷모습을 보게된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는 존재들과 사물들로 인해 영화 속에서 시간은 자꾸만 앞으로 흐르지만 영화적인 공간은 과거를 향하게 된다. 결국 영화는 과거의 축적된 시간들이 현재를 미래로 밀어내고 있는 형국이다. 이처럼 영화〈봄날은 간다〉의 시간은 완연히 과거 지향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6.
지속은 전진하면서 팽창하고 미래를 파먹는 과거의 연속적 진보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순간부터 한없이 그 과거는 스스로 보존되고 있다.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中)
그러나 베르그송의 관점에 따르면 시간의 본질은 지속이고 지속은 곧 기억이다. 현재는 끊임없이 매순간 과거와 미래로 갈라지는데 과거로 나아가는 것이 추억이라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지각이다. 하지만 지각의 순간은 다시 근접 과거로 변하게 되면서 시간은 끊임없이 과거화되면서 쌓여가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영화〈봄날은 간다〉에서 접하게 되는 시간은 과거 지향적인 시간이 아닌 시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이미지로 가득한 영화적 공간이 밀리듯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영화가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 속 과거의 이미지와 시간의 문제는 할머니의 존재를 통해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시간이 지속이며 기억이라면, 기억을 위해선 신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 신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기억이 된다. 베르그송의 저서〈물질과 기억〉의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물질은, 존재는 곧 기억인 것이다. 따라서 실체는 지속이며 기억이고, 존재는 기억에 의해 끊임없이 팽창한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의 존재는 즉각적으로 기억으로 환원된다. 치매에 걸린 그녀는 자신의 늙은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치매에 수반되는 기억 상실이 그녀에게서 일정 순간의 과거를 삭제시킨 것이다. 이에 할머니는 자신의 젊은 시절에서 고정된 채, 젊은 시절의 자신만을 기억하고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이다. 곧 그녀의 잘려진 기억은 그녀를 젊은 시절로 되돌린 것이다. 기억(삭제된 과거)은 곧 물질(젊은 시절로 돌아간 할머니)인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는 할머니는 늙지 않고 기억의 마지막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과거는 현재와 절연된 채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기억)가 지속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화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역으로 달려가고 상우가 녹음을 하는 것은 과거의 순간을 현재에서 소생시키려는 의지이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의지적인 노력과 함께 끊임없이 현재를 움직이는 작동 기제로서 과거도 존재한다. 은수는 손가락이 베었을 때 무심코 머리위로 손을 들고 흔든다. 그리고 상우를 만난다. 기억의 힘으로 은수는 상우를 기억해 내고, 그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 되찾아 지듯이 과거는 현재의 어떤 순간들에 응답하며 현재로 귀환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현재화의 과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을 담아 낼 수 있는 것이다.
7.
그러나 단지 과거의 지속적인 현재화로서 시간의 흐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이지만 여기서 기억의 재생산이 없다면 시간은 과거의 시점에서 중단될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현재라는 시점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현재는 과거가 귀환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시간이 현재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면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화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의 두 방향으로 갈려지면서 나타나고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즉 현재는 지각되는 순간 나타나고(present) 지나간다(passed). 이로 인해 영화는 무언가가 계속 통과하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과거의 시간의 현재로 귀환하는 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난다면, 현재의 계속적인 갈라짐은 영화의 내적인 형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흡이 긴 롱테이크와 미디엄 샷, 롱 샷으로 구성된 장면들은 피사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현재라는 순간이 나타나고 지나가는 순간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재는 끊임없이 갈라지기 때문에 카메라는 쉽게 다른 샷으로 넘어갈 수 없다. 즉, 영화는 가령 행위의 극적인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 시간을 자르고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가 생성되기 위해 의미가 다가오는 순간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상우가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강릉으로 달려와 은수의 집 앞 도로에서 멈출 때, 카메라는 둘을 반응샷으로 찍지 않고 멀치 감치 떨어져서 둘을 잡아낸다. 둘이 서로를 알아보기 이전부터 카메라는 그들을 응시하면서 그들이 알아보는 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가 호흡을 놓쳐 어정쩡하게 되어버린 씬들이 몇 개 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현재는, 사랑은 지속으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이처럼 일상이라는 무수한 의미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순간들 ―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자신들의 모습을 바꿔가면서 생성되는 시간 속에서 사랑을 관객과 공유한다. 하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사랑의 언어가 아닌 언어 이전의 그들이 경험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총체이며 사랑 이전에 그들이 겪음직 했던 삶의 부단함과 충만함일 것이다.
(주)
1.여기서 반 박자 쯤 느리게 연출되었다는 것은 고속 촬영으로 이러한 장면들이 촬영되었다는 것이 아닌 영화의 내적인 시간에서 봤을 때 이러한 씬들이 다른 씬들 보다 심리적으로 느린 호흡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2.가령, 아침과 점심 사이의 '일상'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또한 매순간 변덕이 죽 끊는 듯한 '일상'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분리해 설명할 수 있는가?
3.가령, 내가 넘어지면서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가정했을 때, 이미 넘어진다고 지각하는 순간 나는 넘어진 것이며 넘어진 순간의 아픔이 지나간 감각으로서 지속되어 남아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재현
1974년 서울 출생
1999년 서강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현재 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꽃섬〉― 사실과 환상의 기묘한 판타지
송일곤의 영화〈꽃섬〉은 감독 스스로가 밝히듯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동화책을 펼치면 그림이 먼저 들어오듯이 영화도 화면이 먼저 눈에 와 박힌다. 눈이 시리다. 디지털카메라 때문일까―스케치화 같은 느낌이지만 풍부한 색감이 실려 있다. 마지막의 들려 올라가는 배는 순간적으로 들라크루와를 연상시킬 만큼 회화적이다. 그리고 동화책을 넘길 때 기분 좋게 들리는 '사악'하는 소리처럼 영화 속을 흐르는 비올라와 첼로의 음색과 유진의 노래는 무겁지만 어떤 숭고함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동화책 속에 있는 아름다운 그림을 좋아라하고 따라가기에 동화의 내용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간통과, 설암, 유산―작품 속의 주인공 옥남, 유진, 혜나를 이어주는 이 불행한 단어들과 모든 슬픔과 불행을 잊게 해준다는〈꽃섬〉이라는 영화 제목은 이 영화가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때문에 영화는 이미 출발지와 도착지 정해져 있는 조금은 '맥빠진' 여행과 같다. 하지만 송일곤은 맥빠진 여행을 기묘한 판타지의 세계로 만든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적 기법을 사용해 사실적인 화면들을 담아낸다. 세 인물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응시하면서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를 포착한다. 심지어 얼음 밑에 물 흘러가는 소리, 바람 소리도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영화의 디테일은 매우 사실적인데 이러한 디테일의 사실성은 내러티브의 동화적인 성격과 충돌한다. 남해로 가다 산 속에 정차해 버린 관광버스, 마지막 순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유진, 되살아난 엄마. 그리고 여기에 인물들이 가세한다. 그녀들이 꽃섬에 가는 동안 만나는 여러 인물들―관광버스 운전기사 형제, 시체를 싣고 가는 트럭 운전수, '샌프란시스코 에그 샌드위치'라는 게이 밴드, 천사친구―은 충분히 사실적인 인물들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은 모두 너무 의미심장하고 또 그에 걸맞게 너무나 교훈적인 혹은 감동적인 말들을 내뱉는다. 또한 1인 2역으로 등장하는 옥남의 남편인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에그 샌드위치'의 게이 뮤지션은 작품의 환상성을 극대화 한다.
이러한 디테일의 사실성과 내러티브의 환상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영화 〈꽃섬〉은 상이한 두 가지 힘을 발산한다. 하나는 사실성에 환상성이 포개지면서 발생하는 영화의 관념성과 표현성이다. 다소 넘친다 싶은 감도 없지 않지만 영화는 녹색 날개를 펄럭이는 혜나나 거룻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유진의 모습을 통해 숭고함이나 용서, 체념의 관념적인 언어들을 화면에 담아낸다. 판타지만으로는 공허해 질 수밖에 없는 관념적이나 추상적인 것들이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혜나나 유진의 사실적인 모습들과 포개짐으로서 표현성을 획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환상성이 사실성을 감싸 안으면서 생기는 화해, 치유의 힘이다. 상처받은 세 영혼이 여행을 떠났을 때 그들이 겪는 사건들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환상적인 힘은 세 영혼에게 치유의 길을 열어준다. 옥남과 유진, 혜나가 그들과 동일한 인물들을 만났을 때 가능한 것은 치유보다는 상처일 것이다 (영화의 출발이 보여주듯이 현실은 상처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세 여인은 '불가능한 여행'을 통해서 치유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꽃섬은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폐허의 섬이라기 보다는 이들 세 여인이 만나게 되는 사건들과 인물들이 만들어 낸 환상적 공간에 붙여지는 이름일 것이다. 송일곤의 묘한 판타지 〈꽃섬〉은 이처럼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환상 위에 현실을 혹은 현실 위에 환상을 포개어 놓으면서 숭고함과 위로의 말을 '그'만의 언어로 관객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꽃섬'으로 보낸다.
이재현
1974년 서울 출생
1999년 서강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현재 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강한섭(영화평론가·서울예대 교수)
작년에 가작으로 만족하여 금년에는 웬만하면 당선작을 내리라 작정하고 응모작들이 담겨진 봉투를 힘차게 열어 보았다. 접수 순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눈에 띄는 작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역순으로 검토해 보았다.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는 응모작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어 금년부터 새로 추가된 영화 단평들을 살펴보았다. 역시 기존 평론계에 '여기 보아라!'하며 자랑스럽게 소개할 무서운 신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사자는 한국의 영화평론가가 멋있는 생각을 해야 한국의 영화감독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게 된다고 항상 주장한다. 신이 창조한 것을 제외하면 세상의 만물은 인간의 거침없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과 기술이 아니라 영화계를 지배하는 담론이 영화를 만든다. '지금 한국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나?'를 결정하는 사람이 평론가다. 그래서 평론가는 논리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학자보다 지위가 높게 마련인 자유로운 예술가보다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을 나누고 연결시켜 마침내 역사적 의미를 수여하기 때문이다.
금년 응모자들은 대체로 안정적인 대학교수직을 희망하는 것 같다. 새로운 문제의식과 도전적인 논리로 기존 평론계를 뒤흔들 야망은 찾기 어려웠고 그 대신 이미 인정받은 이론과 방법론으로 영화를 분석하는 작업에 만족하고 있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를 상대적 시간론으로 평한 이재현과 영화 '소름'을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한 전종혁을 두고 마지막까지 고심했다.
치밀한 분석과 논리적인 글솜씨는 이재현이 우세했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비평가적 자질은 전종혁이 앞섰다. 그러나 전종혁의 작품은 그 자체로 완성적인 평론이라기보다는 대학원 기말 리포트 같았다. 게다가 불필요한 인용과 도시와 공포에 대한 과대해석이 문맥을 자주 끊어 놓았다.
이에 비해 이재현은 시종 분석 대상이 된 영화 그 자체를 놓치지 않는 집요함과 안정된 논리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좋은 평론이라기보다는 우수한 박사 논문 같았다. 그래서 주저하다가 이재현에게 마음을 주기로 했다. 그의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주지 못하고 반만 올려주는 아쉬움을 좋은 작품으로 해소해주길 기대한다.
이재현
1974년 서울 출생
1999년 서강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현재 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당선 전화를 받고 나서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李箱의 글귀를 떠올리고 있었다―'사람이 秘密이 없다는 것은 財産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당선 전화가 순식간에 나의 비밀을 날려버린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게 있어서 글쓰기란 일종의 '작고 확실한 행복'과 같은 것이었는데 적어도 이번 경우에는 덩치가 너무 커버렸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일인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기를 쓰고 썼는데 막상 남에게 보여지고 나서 가난함과 허전함을 느낀다니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색약 환자―환자가 맞나?―에게 세상은 참으로 답답한 것이다. 적색과 녹색 혹은 청색과 녹색의 차이를 미묘한 차이라고 느끼는 것이 그들을 다르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이 보는 세상의 빛깔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그 빛깔일까 하는 궁금함과 진정한 색깔을 보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같은 시선 속에 존재하는 다른 세계들. 하지만 그 때 누군가 당신이 보는 색깔이 본래 색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혹은 좀 지나치지만 당신은 보다 민감하게 색을 감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정말 유쾌한 상상이다 (적어도 나와 같은 적록 색약에겐). 그리고 나의 비밀은 이러한 유쾌한 상상을 위해서 사라진 것이다.
다른 세계들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준 것 같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다른 세계는 이 세계 전체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끊임없이 여기에서 거기를 꿈꾸게 하면서 '전체이거나 부재하는 다름'에 대해 매력적으로 이야기한다.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다. 나의 삶에 다양하게 걸쳐있는 많은 사람들 (물론 그들은 내가 자신들의 삶에 걸쳐있다고 생각하겠지만)―교수님들, 친구들, 선배, 후배. 친척. 그리고 무엇보다 초라한 글을 가능케 해준 영화감독님들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마지막으로 긴 세월을 같이 한 나의 가족과 뚜리에게 깊이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