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할머니의 시간

by  하인혜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할머니의
    오래된 경대 서랍 안에는
    잃어버린 것들이 담겨 있다
    아이들하고
    장난치다 떨어뜨린 단추,
    바쁜 골목길
    발걸음에 채였던 녹슨 옷핀,
    재깍거리는 소리 그친
    낡은 손목 시계 하나

    할머니는
    어디선가 잃어버린
    내 단추의 자리를 찾아
    옷깃을 여미어 주신다
    녹슨 옷핀을 꺼내
    동생의 앞가슴에 이름표도
    달아 주신다

    이제는
    멈추어버린
    시계 속의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
    경대의 거울 속에 비친
    할머니의 흰머리는
    알고 있을까






    키와 몸무게

    내 키가
    쑥쑥 자라는 건
    키재기의 눈금이 알려 주지만
    내 생각의 키가
    자라나는 걸
    잘 알 수가 없다

    내 몸무게가
    나날이 불어나는 건
    체중계의 눈금이 가리켜 주지만
    내 마음이
    넓어지는 걸
    좀체로 알 수가 없다


    나무의 문 앞에 서서

    나무의 문 앞에 서서
    나는 배추벌레처럼
    온 몸으로
    귀를 대고
    나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숨을 죽이고
    듣습니다

    나무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아무 말없이
    잎새의 손을 팔랑거리며
    잎맥 사이에 넣어둔
    초록 열쇠를 건네줍니다

    단단히 잠긴
    둥치의 껍질에
    가만히 열쇠를 대자,
    톱날같은 바람이
    동그란 생각의 열매를
    토…옥 떨구어줍니다

    나는
    따뜻한 땅 속에
    생각의 열매를 묻어 두고,
    나무의 문을
    닫았습니다


    시골집은 누가 지켰나

    추석도 지난 늦가을 어느날,
    참기름과 청국장을 한 보따리 싸들고
    우리집에 오신 할머니
    할머니가 안 계신 시골집을 누가 지켰을까?

    노래 하던 매미도 허물만 남기고 떠났고
    뒤뜰 빈 항아리엔 가을 하늘빛에 젖은 감잎새만 동동…
    그 해 겨울,
    앞마당 수도관은 할머니 따슨 손길
    기다리다 지쳐 꽁꽁 언 가슴이 그만 터져 버렸대.
    꽃바람이 불자,
    봄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 아저씨가
    금이간 담장 끝자락에 민들레꽃 봉투에 담긴 씨앗을
    넣어주곤 했는데…
    여름 날,
    하수구에 들낙거리던 시궁쥐들이
    세수비누 조각을 비스켓처럼 갉아먹으며
    할머니가 흘려 보내주던 밥알을 기다렸지
    주린 배를 안고 하염없이 누워 있는데…
    어느 날,
    녹슨 대문이 삐걱 열리며
    키 작은 할머니가 오시지 않았겠어?
    민들레 갓털은 담장을 넘어 배고픈 쥐에게,
    쥐는 구슬같은 눈을 반짝이며 앞마당 수도관을 따라
    그리고 뒤뜰 감나무의 연둣빛 잎새는
    할머니 발걸음 소리를 듣고
    뒤 귀를 팔랑거리며 기뻐했대

    할머니는
    그 해, 시골 빈 집을
    누가 지키고 살았는지
    앞 마당에서 뒤뜰까지
    종종걸음으로 돌아보셨던 거야


    내가 부르면

    "아빠."
    하고 부르면
    아빠는 책장을 넘기며
    안경 너머로
    "무슨 일이야?"
    물어봅니다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는 등 돌리고 서서
    그릇을 닦으며
    "왜 그러니?"
    대답합니다

    "할머니."
    하고 부르면
    할머니는 하시던 일 멈추고
    두 팔 벌려
    "오…오…냐!"
    안아줍니다
    하인혜

    하인혜

    1959년 충남 논산 출생

    2000년 대전 우송공업대학 문예창착과 졸업

    현재 독서 및 글쓰기 개인교습

  • 유경환(동시 작가) , 노경실(동화 작가)

    '신춘문예용 원고가 있다 라는' 말을 들어 봤지만, 응모원고의 무게가 이에 답하는 듯하다.

    문학에 대한 경건치 못함, 작가의 길을 왜곡되게 생각하는 교만, 그리고 시대 앞에서의 혼란과 자신에 대한 부정직성…. 이런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엄숙하다 싶을 만큼 치열한 글쓰기의 모습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중량감으로 다가왔다.

    동화 부문에서는 정연철씨의 <국화빵 사랑>(정연철)이외에 당선작이라고 소리 높일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이 작품은 좋은 작품들의 공통적인 미덕을 갖추었다. 탄탄한 구성과 군더더기가 없는데도 건조하지 않고 녹녹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문장. 전혀 억지스럽지 않게 독자의 공감을 받아내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여느 기성작가보다 돋보였다. 가난한 집안의 힘없는 부모의 아들, 게다가 겨울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따끈한 국화빵을 살짝 떼어 삐쳐 나온 단팥과 함께 아버지 입 속에 넣었다"라는 마지막 문장처럼, 마음 한구석에 하얀 설탕과는 다른 질리지 않는 달콤함, 그러나 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서러움의 눈물이 섞여진 짭짤함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덕목이다.

    하지만 이와 맞겨룬 하인혜씨의 동시 작품의 어깨가 조금 더 높은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씨가 응모한 11편 중 5편은 '동시가 다룰 수 있으며, 또 다뤄서 마땅한 소재'를 설득력 있게 형상화한 점에서 작가로서의 솜씨가 돋보였다. 또 당선작은 이번 동아일보 신춘문예가 기준의 동시 분야와 동화 분야를 '아동문학'으로 합치면서, '아동'문학이자 아동'문학'으로서 격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 취지에도 부응했다.

    <내가 부르면> 같은 작품에서는 동시로서의 압축미가 돋보일 뿐 아니라, <할머니의 시간>이나 <시골집은 누가 지켰나> 같은 작품은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한 속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심사위원은 이 작품이 아동문학의 지위를 높이는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는 결론에 쉽게 동의했다.

    하씨가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제3세대의 선두 주자가 되리란 기대를 거는 까닭은 당선작 면면이 충분하게 증거하리라 믿는다.
  • 하인혜

    하인혜

    1959년 충남 논산 출생

    2000년 대전 우송공업대학 문예창착과 졸업

    현재 독서 및 글쓰기 개인교습

    나를 가르치고도 나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 아이는 엄마에게 제 마음을 송두리채 주고도 무럭무럭 자랐다. 키도 컸고 손과 발도 제법 튼실해졌다. 물론 입가의 웃음도 목소리도 커다래졌다. 세상 속에서 나를 엄마라고 잊지 않고 불러주는 호칭이 송구스러웠던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아이 곁에서 동시를 읽곤 했다. 아이는 어른인 내게 함께 가자고 그 조그맣고 따슨 손을 내밀어 나의 차가운 손을 녹여 주었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내 꿍꿍이 속셈을 풀어 그 단순한 마음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어느새 나는 가슴 속에 불씨 하나 은밀히 감추어 두고 수시로 풀무질을 해대곤 했다. 헛된 열정이 아닌가 불안에 떨면서.

    참 좋은 동시를 읽으면서 행복했던 순간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그리도 써야 한다는 것에 완고했는지, 아이 앞에서 속죄하는 심정이 된다. 그 딱딱한 어둠의 창을 아이는 말간 눈빛으로 열어 주었다. 이 나이 먹도록 사방 모르는 것에 둘러싸여 그 어둠에 익숙해지려고 주춤거리곤 하는데, 내게 맞는 조붓한 길 하나 동싯 떠오른 것 같다. 이젠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그 길 다져가며 걷겠노라 고개를 주억거린다. 늦었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고 더욱 천천히, 조심스럽게. 많이 자란 아이 곁에서 한층 작아진 나의 낮은 키로 세상의 어린 것들을 바라 보며.

    애초에 똑똑함과는 거리가 먼 나를 잘 안다고는 했지만, 그래서 종종 헤매고 더듬거려도 용서받았던 많은 기억 사이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얼굴들이 선연히 떠오른다. 그 감사할 모습이 너무 많아 깊은 숨을 몰아 내쉰다. 이제껏 딸의 허물을 주으며 나의 뒤에 서 계신 어머니, 눈 씻고 보아도 내세울 모습이 없는 며느리를 보듬어 주시는 시어머니, 그리고 냉철하지만 따듯한 가슴으로 나의 작품을 읽어주는 남편, 주위 가족들. 많은 선생님들, 특히 데보라 수녀님의 기도, 감사하다.

    훌쩍 지나온 세월의 강가에 굳건히 서 있는 돌다리, 이 모두가 그곳에 새겨진 이름들이다. 아울러 심사위원 선생님의 격려에, 지금은 좋은 작품을 쓰겠노라는 다짐밖에 드릴 게 없어 나는 가만히 고개 숙인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