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

by  나웅권

  • 작품전문
  • 줄거리
  • 심사평
  • 당선소감
  • 나오는 사람들-

    강수미(16-37세) 시인(현) 정신분열증 환자(92년)
    배용기(25 - 46세) 회사원(현) 알콜 중독 환자(92년)
    강수용(10대 후반) 수미의 오빠
    이중사(20대 후반) 용기의 고참
    문일병(20대 초반) 용기의 부하
    정진배(40대 초반) 알콜 중독 환자.
    한재희(20대 중반) 정신 분열증 환자
    진선영(30대 초반) 정신 분열증 환자
    심재권(20대 후반) 정신 분열증 환자
    임민희(30대 초반) 용기의 아내
    그 외 다수.


    씬1. 타이틀백

    (어두운 화면 위로,
    나지막이 읊조리는 듯한.......)

    수미: "(NA)그해 겨울 나의 영혼은 내 육신을 떠나 있었다. 나는 상처투성이의 꺼풀을 뒤집어 쓴 뼈만 앙상한 짐승이었다. 돌처럼 굳은 혀로 희망을 노래하려고 했었던 그해 겨울, 나는 절망을 흔적처럼 끌고 다니던 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등뒤에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에서 희망의 낱말을 보았다. 어쩌면 절망의 다른 이름은 희망이 아니었을까?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했었던 그해 겨울, 병실의 창살 너머로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던 그 날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NA, 서서히 잦아들고,
    화면 어둡다.......
    CA, 천천히 뒤로 빠지면,
    지하철의 출입문 차창임을 알 수 있다
    차창에 비추인 고개 숙인 사내의 모습
    그 위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지하터널의 어둠
    메인 타이틀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

    뜨고
    길게 F.O.......)

    씬2. 택시 안(출근 무렵)

    (F.I
    출근길의 바쁜 일상이 차창 밖으로 스쳐지난다
    그 위로 자막
    '1992년 겨울'
    뜨고
    쾽한 눈으로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수미
    송여사,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미의 손 꼭 잡고 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무심히 창 밖만 보는 수미
    왼쪽 눈 밑에 흉터가 선명하다)

    송여사 : "(수미 손 어루만지며)거그는 손 발에 족쇄도 채워놓지 않고 귀신 쫓는다고 안수기도 함시롱 때리지도 않는 디야. 에미가 무식혀서 인간 백정들을 믿고 우리 귀헌 딸을 그런 곳에 보냈으니 참말로 기퉁이 맥혀서 말이 안나온다. 지금 가는 거그는 본당 주임 신부님이 추천한 곳잉께 믿어도 될겨. 그라고 수미야 이번에는 꼭 나서야한다. 다 에미가 죄가 많아서 그런 것잉께 너는 그저 치료만 잘 받으면 되야 알것제."

    (흘낏 백미러로 수미 쳐다보는 택시기사
    송여사 한숨 쉬며 수미 안아준다
    무표정한 수미의 얼굴)

    씬3. 용기의 병실

    (커튼이 드리워져 어둡다
    아침 햇살에 투사되는 커튼의 기괴한 무늬위로,
    탱크의 엔진소리와 중화기의 사격소리 겹쳐진다
    낡은 철침대 위에 잠들어있는 용기
    용기 악몽을 꾸는 듯 식은 땀을 흘리며 뒤척이는데,)

    씬4. 악몽

    (전남 도청 안이다
    창 밖에서 들려 오는 탱크의 엔진 소리와 중화기의 사격 소리
    M16소총을 움켜쥔 용기,
    긴장한 채 복도를 수색하고 있다
    막다른 복도의 끝에 있는 문으로 조심스레 다가가는 용기
    문을 왈칵 열어 젖히고 사격 자세를 취하면,
    비좁은 창고 안에 떨며 서 있는 앳된 소년
    겁에 질린 수용의 얼굴이다!
    수용의 목에서 반짝이는 십자가 팬던트
    안도하는 용기 총을 거두려는데,
    수용의 손안에 보이는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
    용기 고함을 지르면서 M16소총을 자동으로 갈기는데)

    씬5. 용기의 병실(현실/아침)

    (에코되며 들리는 M16소총의 자동사격음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키는 용기
    용기 한숨 뱉으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 닦는다
    악몽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흔드는 용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용기의 눈빛이 날카로운데,
    용기의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가 새겨진 은빛 팬던트
    용기 팬던트 옷 속에 집어넣고 나가면, )

    씬6. 휴게실

    (작은 신경정신과 병원의 폐쇄 병동 안에 마련된 소박한 휴게실
    식탁 겸용인 낡은 탁자와 소파, TV가 전부인 단출한 모습
    낡은 소파에 멍청히 앉아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들 너머,
    통유리창 안쪽에서 간호사들이 병동 안을 감시하고 있다
    휴게실 바닥에 퍼질러앉아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는 재권)

    재권: "(열창하는)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무표정하고 심드렁한 환자들, 통유리창 저편에서 웃으며 바라보는 간호사들
    문열고 나오는 용기, 재권에게 다가간다
    벌떡 일어나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재권)

    재권: "민중 기만! 민주 압살! 군부 독재 타도하자!"

    (재권의 뒤통수 후려치는 용기 )

    용기: "비가 오려나? 이 미친 새끼가 식전부터 지랄이야!"
    재권: "(용기 눈초리보고 움찔하는) ..."
    용기: "저기 구석에 가서 찌그러져 있어 미친 새끼야!"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휴게실 구석으로 가는 재권
    용기 , 다른 환자들을 쓱 훑어본다)

    용기: "(느물거리는)다들 아침은 잡쉈나?"

    (순간 긴장하는 환자들)

    용기: "난 아직 식사 전인데, 어쩐다지?"
    진배 "(손톱 깎으며)이봐 배중사 그런 걸 뭐 하러 물어 봐? 그냥 미친년 놈들. 병실에 들어가서 꼬불쳐 둔 간식 찾아 먹으면 되지"
    용기: "(야비한 미소)그럴까?"

    (돌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병실 문을 여는 용기
    코 싸메 쥐고 인상 찌푸린다)

    용기: "아이구 이 얄궂은 냄새!"
    진배 "(보며) 배중사 몰랐어? 이 미친놈들 먹는 약이 정력제잖어 그러니까 밤마다 손장난하느라고 날밤을 새우고 지랄들이지 흐흐."

    씬7. 정신병원 앞 거리

    (총총히 걸음을 재촉하거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출근길의 분주한 변두리 거리 모습이다
    병원 앞에 멈추는 택시 한 대, 택시에서 내리는 송여사와 수미
    송여사, 수미 부축한다.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는 수미)

    씬8. 휴게실

    (빵을 우물거리며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는용기
    택시에서 내리는 수미와 송여사가 보인다
    송여사의 부축을 받는 수미,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는데
    순간, 커튼 뒤로 숨는 용기 )

    조대리: "(다가와 보며)뭘 그렇게 놀라세요? (하다가) 아니 배중사님 또 다른 환자분 간식 드시는 거예요?"
    용기: "(보며 태연한 척) 조대리
    (*통상적으로 정신 병원에서 남자 간호사는 '대리'라는 직함으로 총칭된다)
    언제 왔어? 근데 지금 들어오는 저 여자 뭘 거 같아?"
    조대리: "(의아한)네?"
    용기: "미친년? 아니면 우울증? 그것도 아니면 알콜?"
    조대리: "(피식 웃으며)그런데 신경 쓰지 마시고 다음부터 또 다른 병실 들락거리시면...(하는데)"
    용기: "미친놈들처럼 묶어 놓겠다?"
    조대리: "아시면 됐어요. (돌아서 환자들에게) 자, 조금 있으면 진료 과장님 회진있습니다 준비들 하세요."

    (돌아서 휴게실 나가려는 조대리
    용기 ,조대리 슬며시 끌고 휴게실 구석으로 간다)

    조대리: "(귀찮은 듯)왜 이러세요?"
    용기: "(목소리 낮춰)강아지 떨어졌어. 팔팔로 한 갑만 구해줘."

    (조대리 알았다는 듯 용기에게 은밀한 눈빛 건낸다)

    조대리: "(짐짓 들으라는 듯)아이 알았어요. 제가 사무장님께 말씀드려서 찢어진 장판 갈아드릴게요. (돌아서 환자들에게) 회진 준비들하고 계세요 (나간다)"

    씬9. 진찰실

    (환자용 의자에 앉아 있는 수미,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박원장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박원장 그런 수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박원장: "(송여사에게)그 동안 어떤 시설에 있었습니까?"
    송여사 : "경기도 이천에 있는 기도원에 오 년 동안 있었지라."
    박원장: "그럼 그 동안 정신과적인 치료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나요?
    송여사 : "발병하고 처음 일년 동안은 광주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는디 차도가 없어서..."
    박원장: "언제부터 병적인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나요?"
    송여사 : "십 년 넘었어라. 여고 일 학년 때니께."
    박원장: "잠깐만 나가 계시죠. 일단 환자하고 면담부터 해야겠군요."

    씬10. 대기실

    (진찰실에서 나오는 송여사,
    문을 막 닫으려는 순간
    진찰실에서 터져 나오는 수미의 광기 어린 목소리)

    수미: "(소리)이 더러운 짐승! 네 놈도 내가 피 흘리는걸 보고 싶겠지. 옷을 찢고 내 몸에 침을 바르고 즐기고 싶겠지? 하지만 아니야. 이젠 내가 먼저 네 놈들을 죽이겠어!!"

    (뒤이어 들리는 박원장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

    박원장: "(소리)밖에 아무도 없나! 신대리 좀 불러. 신대리!"

    (송여사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데, 조제실 안에 있던 신대리 진찰실로 뛰어든다)

    씬11. 휴게실

    (무언가 중얼거리며 서성이고 있는 재권
    거울 앞에서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남환자1
    굳게 닫쳤던 출입문이 열리고,
    신대리에게 팔이 꺾인 채 끌려들어오는 산발한 수미
    발광하는 수미를 애써 외면하는 환자들
    소파에 앉아 귀를 후비던 용기
    용기: , 수미보고 비웃음 날리다, 문득 수미의 얼굴 다시 한번 쳐다보는데,
    진배, 수미보고 일그러진 미소 지으며 일어선다)

    진배: "(다가와서 보며)딱 보아하니 미친년이구만. (비아냥거리는) 이봐 아가씨 뭣 땜에 머리가 훼까닥했어? 어떤 놈씨들이 아가씨 냄비에 숟가락이라도 담갔었나?"

    (수미, 진배 노려보다 얼굴에 침을 뱉는다)

    진배: "이런 미친년이!"

    (진배 손들어 때리려 하는데)

    신대리: "그만 하세요. 지금 발작하는 환자를 자꾸 자극하면 어떡합니까?"

    (신대리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수미를 끌고 가면,
    소파에 앉아 있는 용기 와 눈이 마주치는 진배
    진배, 용기보고 의미심장한 미소 던진다)

    씬12. 수미의 병실

    (침대에 사지가 묶여 있는 수미
    김간호사 수미의 팔뚝에 진정제를 주사한다
    지켜보는 방간호사)

    방간호: "이제 조금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을 거예요. 잠 오면 자도 되구요."

    (방간호사와 김간호사 주사기 정리해 나가면
    병실에 홀로 남은 수미,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미소 떠오르는데)

    씬13. 간호사실(밤)

    (불이 꺼져 있는 휴게실
    병실문 유리창 너머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취침등 불빛
    통유리창 너머로 휴게실을 돌며 병실문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신대리의 모습이 보인다
    휴게실을 가르는 신대리의 랜턴 불빛
    신대리 랜턴 끄고 간호사실 문열고 들어온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김간호사 흔들어 깨우는 신대리 )

    신대리: "김간호사 졸지마.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내 방으로 연락하고."
    김간호: "(잠결에)네, 알았어요."

    (간호사실 나가는신대리
    다시 졸기 시작하는 김간호사)

    씬14. 휴게실

    (어둡다
    환하게 불이 켜진 간호사실의 유리 너머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김간호사
    모든 것이 정막하기만한데,
    용기의 병실 문이 살짝 열린다
    고개를 내미는 진배)

    진배: "(작은 소리로)배중사, 김간호사 잔다. 작전 개시!"

    (문을 열고 나오는 진배와 용기
    허리를 낮추고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두 사람)

    씬15. 수미의 병실

    (문이 살짝 열리고
    까치발로 들어오는 용기 와 진배,
    수미의 침대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사지가 묶인 채 깊은 잠에 빠진 수미,
    수미 꿈을 꾸는 듯 뒤척이는데)

    진배: "(침 꼴깍 삼키고)이봐 배중사, 이 계집애 처녀일까 아닐까?"
    용기: "그거야 해봐야 알지"
    진배: "정신병원에 이 재미로 들어온다니까. 약기운으로 세상 모르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빤스가 흥건히 젖어 있을 거야 흐흐."

    (천천히 수미의 환자복 상의 단추를 푸는 진배,
    조심스럽게 손을 옷 속으로 넣는다)

    진배: "(만지며)어흐, 이 물컹한 감촉! 배중사도 한 번 만져 봐."

    (뒤척이는 수미, 숨결이 고조된다)

    진배: "(수미 보며)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도 좋다 이거지."

    (용기 , 수미의 얼굴 쓰다듬다 멈칫한다
    수미의 왼쪽 눈 밑에 선명한 흉터 자국
    용기 , 진배의 손잡고 제지하는데
    순간 눈 번쩍 뜨는 수미)

    씬16. 간호사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김간호사
    유리 저편의 어둠 속에서 들려 오는 수미의 비명
    김간호사 잠결에 고개 들고)

    김간호: "(비몽사몽이다)이게 무슨 소리지? .... (하다가 퍼뜩 잠 깨며) 어머 이거 비명 소리 아냐! (급히 수화기 들고) 신대리님 여기 병동인데요 빨리 좀 올라 오세요. 병실에 문제가 생겼나봐요!"


    씬17. 수미의 병실

    (수미 위에 올라타 수미의 입을 틀어막는 진배
    수미 사지가 묶인 상태에서 격렬하게 저항한다
    굳은 듯 어둠 속에 서있는 용기 )

    진배: "(용기 보며)배중사 어떻게 좀 해봐."

    (수미, 입을 막은 진배의 손을 물어뜯는다)

    진배: "(비명)아악, 이런 미친년이!"

    (부들부들 용기 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하는데
    병실 문이 벌컥 열리고)

    신대리: "(버럭)지금 뭐 하는 짓들입니까?!"

    씬18. 휴게실(아침)

    (환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썰렁한 휴게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조대리와 신대리 ,
    병동 안을 감시하고 있다)

    씬19. 원장실

    (소파에 마주앉아 있는 박원장, 진료과장 그리고 방간호사와 사무장,
    모두 심각한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다)

    박원장: "사무장 이제 어떡하는 게 좋겠나?"
    사무장: "일단은 덮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방간호: "덮어두다니요? 지금 병동의 여자 환자들은 모두 불안에 떨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사무장: "(방간호사에게)이것 보세요. 일차적인 책임은 환자 통제를 소흘히 한 간호사들에게 있습니다."
    진료과: "저도 동감입니다. 어차피 이번 사건은 남녀 환자의 구별이 없는 병동 상황 때문에 생긴 사건이고 또 외부로 알려져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박원장: "(생각하다)그러는 게 좋겠군. 일단 덮는 방향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 다음부터는 알콜리즘(*Alcoholism;알콜중독증) 환자들의 신고식 전통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지."

    씬20. 수미의 병실

    (침대에 묶여있는 수미
    문 열리고 들어오는 재희와 선영
    수미의 안색을 살피는 재희)

    재희: "(앉으며)어젯밤의 그 일... 나도 당했어요. 입원 첫날 자고 일어나 보니까 속옷이 다 젖었더라구. (쓴웃음) 기분 나쁘겠지만 어쩌겠어요. 다 팔자려니 생각해야지."

    (품안에서 요구르트병 꺼내는 선영)

    선영: "이거 먹어요. 침대에 묶어놓으면 제일 많이 생각나는 게 먹는 거에요"

    (선영 , 수미에게 요구르트 먹이는데
    문 열리며 들어오는 조대리)

    조대리: "(짜증스런)여기서 뭣들 하는 거예요? 강수미씨는 지금 안정이 필요하니까 어서 나가요."

    (재희와 선영 , 조대리에게 떼밀려 나가면
    수미의 혈압을 채크하는 조대리
    수미, 조대리의 팔뚝에 무성한 체모를 바라보는데,
    왁자한 여고 교실의 소음이 깔리며)

    씬21. 교실(회상)

    (작문 시간이다
    깔깔대며 웃는 여고 일 학년들의 밝은 모습
    나오는 웃음 애써 참는 젊은 작문 교사(남)
    그의 걷어올린 소매 아래 무성한 체모
    작문 교사, 짐짓 엄한 표정으로 교탁 두드린다)

    교사: "그럼 지난 시간에 내준 시 창작 숙제 중에 제일로 잘 쓴 시를 한 번 들어보도록 허자. (수미 쳐다보며) 강수미 나와서 낭송혀 봐."

    (귀밑까지 빨갛게 상기된 수미
    원고지 들고 나온다)

    교사: "아, 조용. 어쩌면 수미가 이 다음에 유명한 시인이 될지도 모르니께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도록 허자 (수미에게) 시작혀 어여."
    수미: "(떨리는 목소리) 꿈은 꿈으로 끝나야 하리라
    천둥치는 계절의 시작을 알리며
    후두둑 나팔꽃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어두운 날들의 짙은 한숨 속에
    네 지난 꿈들이 부서져 나오니
    ..............

    (수미 자작시 낭송하는데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시위대의 함성 소리,
    그리고, '퉁퉁' 최루탄 발사음과 '척척' 울리는 군화발 소리
    창 밖으로 거리를 내다보고 술렁이는 학생들
    그 위로 교내 방송 소리)


    교내방송: "(소리)수업 중인 선생님들께 알려드리것습니다. 긴급 교무 회의가 있사오니 수업을 중지하시고 즉시 교무실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교사: "(보며)아이구 이게 뭔 일이다냐? 시국이 왜 이런 거여. (학생들 보고) 너무 겁먹지들 말어 설마 우덜한테꺼정 총을 겨누기야 허겄냐?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니께 자습혀고 있어라 잉."

    (작문 교사 황급히 나가면
    학생들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는데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미)

    씬22. 여고 근처의 거리

    (길가에 멈춰선 군용 트럭 위에
    무릎 꿇린 채 웅크리고 있는 연행되어온 시위대
    팔을 걷어붙인 공수부대원1
    미친 듯이 진압봉을 휘두르며 구타하고 있다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

    공수1 : "이 개새끼들 누구 허락 받고 데모 하랬어? 지금 나라가 어떤 시국인데, 이 썩을 빨갱이 새끼들아!"

    (그 아래, 깨진 병조각과 돌멩이가 널린 차도 위에
    속옷 바람으로 올챙이 포복을 하고 있는 피투성이의 시위대들
    낄낄거리며 즐기는 듯한 공수부대원들)

    공수2 : "데모했던 새끼들은 모두 다 조져버려야되"
    이중사 "(걷어차며)그것 밖에 못해. 이 개 같은 새끼들! 아까 데모할 때는 뭣 빠지게 하던 새끼들이 어디서 요령 피우고 있어! 되질려고 용쓰는구만 씨팔 새끼들!"

    (포복하고 있는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걷어차는 이중사
    구경하는 시민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거리의 풍경을 외면한 채 도망치듯 걷고 있는 수미
    트럭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공수부대원 한 명
    고개를 들면, 용기다!
    수미와 눈이 마주치는 용기
    수미 겁먹고 뛰어가려는데 이중사 달려와 수미 앞을 가로막는다
    수미의 팔을 붙잡는 이중사)

    수미: "(떨며 어쩔 줄 모르는).........."

    (수미 도움을 청하러 고개를 돌리면
    외면하고 자리를 뜨는 용기 )

    씬23. 수미의 병실(현재)

    (사지가 묶인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수미
    무표정한 수미의 얼굴에서)

    씬24. 정신 병원 전경(아침)

    (먹장구름이 드리운 어두운 하늘 아래,
    소박한 변두리 거리에 위치한 낡고 추레한 정신병원의 외관이 보인다
    하나 둘씩 문을 여는 1층의 가게들
    그 모습 위로 들려 오는 TV의 아침 뉴스 소리)

    TV : "(소리)대통령 선거가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최근 저희 KBC와 한국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28.7%가 김영삼 후보를 19.2%가 김대중 후보를 그리고 .... "

    씬25. 휴게실

    (멍하니 TV를 응시하고 있는 무표정한 환자들
    시큰둥한 용기, 생각에 잠겨 습관처럼 귀 후비고 있다
    계속되는,)

    TV : "7.7%가 정주영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 노태우 대통령의 민자당 탈당으로 인한 여권의 위기의식 고조와 이를 이용하려는 김대중 후보 진영의 선거전이 이전투구의 진흙탕 싸움으로 변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대선에서는 10% 안팎의 득표율로 당락이 결정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진배: "(비웃는)제길, 지랄들 하는구먼. (환자들 보며) 야 미친놈들, 너희들은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면서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냐? (용기 눈치보며) 안 그래 배중사?"

    (퍼뜩 깨어나는용기 ,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일어서는데
    재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재권: "(핏대 세우며)군부 파쇼 타도하여 민중 해방 쟁취하자!"

    (재권에게 다가가는 용기 ,
    용기 손 치켜들며 재권 때리려 한다
    재권겁먹어 움추러드는데, 비웃음 날리며 재권 머리 쓰다듬는 용기 )

    용기: "(비아냥)그래 혼자 타도 많이 해라. 응?"

    (돌아서는 용기 표정이 어둡다
    짐짓 휘파람 불며 병실로 들어가 버리는 용기 )

    씬26. 정신 병원 앞 거리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한산한 거리
    보따리를 들고 걸어오는 민희)

    씬27. 용기의 병실

    (낡은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진배
    용기, 기보를 보며 바둑알 놓고 있다
    문 열리며,)

    신대리: "배용기씨 보호자 면회."
    용기: "(짜증스런)제길 아예 출근부를 찍네..."

    (용기 귀찮은 표정으로 일어서면)

    씬28. 면회실

    (병동 밖에 마련된 비좁은 공간
    민희 보따리의 음식 풀어놓고 있다
    들어오는 용기 )

    민희 : "(반색하며)여보!" (어정쩡하게 일어서는데)
    용기: "(앉으며 퉁명스런)앉어!"

    (용기 , 뚝뚝한 표정으로 탁자 위의 음식 집어먹는다)

    민희 : "(물 따라주며)여보 천천히 드세요. 체하겠어요."
    용기: "(먹으며)왜 자꾸 와. 귀찮게."
    민희 : "사표 수리 됬데요. 회사에서 난리예요. 뭣 땜에 그만 두냐고."

    (우적우적 먹기만 하는 용기
    민희 , 그런 용기 눈치 살피다가)

    민희 : "(조심스레) .... 여보...원장님 만나뵜어요. 당신..... 주치의 면담 안 했다면서 요?"
    용기: "(버럭)니기미, 하기 싫으니까 안 했지! 너 또 그 말하려고 왔어?!"

    (용기의 고함에 찔끔하는 민희 ,
    용기 의 매서운 눈초리에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민희 : "(훌쩍이며)제발 정신 좀 차려요 여보. 언제까지 정신병원 들락거리며 살거에요. 나도 이제 지쳤어요."
    용기: "(짜증스런)지쳤으면 안 오면 될 거 아냐?!"
    민희 : "이러는 거 지겹지도 않아요? 우리도 자식 낳고 돈도 벌고 그렇게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용기: "씨끄러!! 한 번 알콜 중독은 영원한 중독이야. 그리고 유산 많이 해서 애기 못 난다며 무슨 자식 타령이야."
    민희 : "(발악하듯)저 임신 사 개월이래요! 엊그제 병원 갔었어요. 의사 선생님도 기적이라셨어요."

    (용기 , 순간 멍해진다)

    씬29. 용기의 병실

    (창살이 쳐진 창문을 열고,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는 진배
    문 열리면,)

    용기: "(들어오며)제길 미치겠구만. 퇴원은 안 시켜주고 니미널!"
    진배: "(담배 끄고)마누라 면회 왔다면서 왜 그래?"
    용기: "(앉으며)강아지나 하나 주쇼."

    (진배, 장판 들추고 비닐에 말아 놓은 담배 꺼낸다)

    진배: "(담배 건내며)뭐래? 이젠 알콜중독하고는 못 살겠데?
    용기: "(피식 웃으며)임신 사 개월째랩디다."
    진배: "(잠시 생각하다)그래? 그럼 다행인데."
    용기: "(보며 짜증스런)뭐가 다행이야. 없는 살림에 새끼까지 까질러 놓게 생겼는데"
    진배: "마누라 말야. 임신했다는 얘기는 아직도 미련이 남았다는 말이야. 그런 얘기 안 하고 애를 그냥 지워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용기: "(보는)......."
    진배: "그러구 새살림 차리면 어쩔 거야? 아직 젊고 딸린 자식도 없는데."

    (용기, 말없이 담배 피우며 생각에 잠기는데
    그 위로,)

    민희 : "(소리)여보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봐요."

    (용기 신경질적으로 머리 긁적이는데)

    씬30. 면담실 안

    (낡은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다
    소파에 앉아 차트 살펴보고 있는 박원장
    용기 문열고 들어온다)

    박원장: "어서 와요. (소파 가리키며) 그리 앉아요."

    (용기 꾸벅 인사하고 앉으면)

    박원장: "(미소)우리 오랜만이죠?"
    용기: "(짐짓 쑥스러운)아, 예..."
    박원장: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난 주치의지만 배용기씨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보호자 말로는 대학 다닐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던데, 언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나요?"
    용기: "(주저하며)...... 그게 .... 저....
    박원장: "?...... (바라본다)"

    (용기, 목이 타는 듯 탁자에 놓인 물 컵을 들어 마신다
    점점 긴장해 가는 용기 )

    용기: "......... 군대 있을 때부터........ 저 특전사에서 하사관으로 전역했습니다...... 그리고......."

    (용기 고개 들어 창 밖 내다보면
    앙상한 가로수 위로,
    얼음장같은 겨울 하늘
    시위대의 함성 소리 겹쳐지며)

    씬31. 전남대 정문 앞(회상)

    (백 여명의 학생들이 다리 위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정문 앞에 버티고 선 단독군장 차림의 공수부대원들
    그 속에 긴장한 채 진압봉 움켜쥔용기의 모습이 보인다
    점점 늘어나는 시위대,
    '계엄 해제'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무전기 들고 지시 받는 중대장,
    메가폰 들고 다리 앞으로 나간다)

    중대장 : "전방의 학생들은 주목하시오! 현 계엄 상황 아래서 시위는 불법입니다. 즉시 해산하고 집으로 귀가하기 바랍니다."

    (술렁이는 시위대
    점점 더 큰소리로 노래와 구호를 외친다
    돌아서 정문 앞으로 걸어오는 중대장)

    중대장 : "(혼잣말)씨팔 미치겠구만. (이중사에게) 해산에 불응하면 진압하라는 명령이다. 시작해!
    이중사 : "(앞으로 나서며)전원 돌격 앞으로!!"

    (악에 받친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공수부대원들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진압봉을 휘두른다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시위대
    용기 , 시위대의 허벅지를 겨냥해 진압봉을 휘두른다
    골목으로 도망치는 시위대를 추격하는 공수부대원들
    용기도 그 중의 한 명을 뒤쫓는다)

    씬32. 전남대 앞 막다른 골목

    (머리에 피를 흘리며 도망쳐 뛰어오는 시위대1,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자 당황하는 시위대1
    뒤쫓아 달려오는 용기 , 한동안 시위대1을 바라본다)

    시위대1 : "(빌며)잘못했구만이라. 한번만 봐주쇼 잉."

    (용기 옆으로 비켜서며 시위대1에게 가라고 손짓을 한다
    시위대1, 용기 의 눈치 살피며 슬금슬금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이중사 : "(소리/버럭)야 이 씹새끼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중사 달려와 시위대1의 허벅지를 총검으로 찌른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시위대1을 무참하게 구타하는 이중사
    이중사 축 늘어진 시위대1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온다
    용기 앞에 멈추는 이중사)

    이중사 : "(윽박지르는)이런 개새끼! 가방끈 너 이따 저녁에 보자!!"

    (시위대1이 끌려나간 자리에 흥건한 핏물
    용기 손에서 진압봉을 떨어뜨린다
    그 모습 위로 골목 밖에서 들려 오는 사이렌과 비명 소리)

    씬33. 숙영지 일각(밤)

    (주먹 쥐고 맨땅에 '엎드려뻗쳐' 하고 있는 용기
    이중사 진압봉으로 용기 의 엉덩이 구타하고 있다
    '퍽 퍽' 용기 의 엉덩이를 파고드는 진압봉 소리
    용기 이를 악물고 참아 내는데)

    씬34. 광주 거리 일각

    (거리 저편에 모여 있는 시위대
    방석망이 장착된 철모에 단독군장 차림의 공수부대원들,
    착검한 M16소총을 등에 맨 채 도열해 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육중한 진압봉
    검게 그을린 굳은 표정의 면면을 잡아 나가는데,
    핏발선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용기
    그 곁에서 떨리는 듯 뒤를 돌아보는 문일병)

    용기: "(나지막이)문일병 돌아보지 마라!"
    문일병 : "배하사님 헌병들이 우리를 조준하고 있습니다."
    용기: "조용히 못하나!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자대에서 같이 어리삐리하게 굴면 넌 국립묘지로 직행이다!"
    문일병 : "왜 우리를 조준합니까? 시위하는 놈들을 조준해야죠. 서로 같은 편인데..."
    용기: "짱구 돌리지 말고 잘 들어. 살아서 이곳을 떠나려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라. 우리는 그저 명령에 복종만 하면 된다 알겠나?!"

    (문일병 굳은 표정으로 끄덕이는데
    함성과 함께 우수수 비오듯 쏟아지는 돌멩이
    돌멩이에 맞아도 미동조차 않는 공수부대원들
    '퉁 퉁' 최루탄 발사기의 발사음 소리와 함께)

    스피커 : "(소리)돌격 앞으로!!"

    (악에 받친 함성 지르며 돌격하는 공수부대원들
    도망치는 시위대를 뒤쫓아 뛰어가면
    그들의 등을 겨냥해 총을 겨누고 있는 헌병 완장의 계엄군들
    그리고, 헌병의 소총 가늠자 속의 용기 의 뒷모습)

    씬35. 간호사실 (현재)

    (고개 숙인 채 병동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
    박원장 차트 들고 면담실에서 나온다
    약병 정리하고 있던 방간호사)

    방간호: "(보며)어떠셨어요? 입원 한 달만에 첫 면담인데."
    박원장: "P.T.S.D(*Past Traumatic Stress Disorder;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 극도의 재난을 격은 후 나타나는 불안 장애)로 알콜리즘이 촉발된 거 같더군. 잘 감시해요."

    씬36. 휴게실

    (멍하니 앉아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들
    진배, 벨트가 떨어져 나간 러닝머신에 매달려 있다
    굳은 표정으로 들어오는 용기 )

    진배: "(보고)배중사 왜 그래? 면담이 별로였어?

    (용기 , 말없이 소파에 털썩 앉는다
    용기 의 표정보고 긴장하는 환자들
    수미, 그런 용기 외면하는데
    용기 에게 다가가는 진배)

    진배: "(용기 눈치 살피다)...... ! (환자들에게) 미친놈 미친년들 주목! 여기 우리 병동의 실세인 배용기 중사가 기분이 묵사발인 거 같다. 그래서, 여러분이 재롱 잔치를 벌여주어야겠어. 이의 없지? (재희 가리키며)거기 미친년 노래 한 곡 해봐라."

    (재권: 벌떡 일어나 노래 부르기 시작한다)

    재권: "(큰 소리로)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진배: "(재권: 윽박지르는)이 자식이 누가 너 보러 하랬어? 시끄러 임마!"

    (재권: 볼멘 소리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병실로 들어가면,)

    재희: "(우물쭈물)저 노래 못해요."
    진배: "어서 못해! (하다가 수미 흘낏 보고) 배중사 그 날 밤 어땠어? (수미 눈짓으로 가리키며) 그 때 찐하게 못했었는데 여기서 질펀하게 한판 벌여볼까? 흐흐.."

    (굳은 표정의 용기 , 짐짓 웃어보지만 표정은 일그러지고
    제풀에 신이 난 진배)

    진배: "(수미에게)야, 거기 새로 들어온 미친년. 니가 한 번 해봐라. 노래하기 싫으면 발가벗고 춤이라도 추던지 흐흐."

    (표정이 굳어지는 수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하나 둘 자리를 뜨는 환자들
    수미, 일어나 병실로 가려는데)

    진배: "(수미 붙잡으며)어디 가시나 응? (하며 수미 엉덩이 만진다)
    수미: "(진배 노려보며)짐승 같은 새끼"
    진배: "(열 받은)뭐야?! 이런 미친년이!"

    (수미의 뺨 때리는 진배
    수미, 순간 고함지르며 진배에게 달려든다
    서로 뒤엉켜 바닥을 뒹구는 두 사람
    간호사들 허겁지겁 뛰어들어오고,
    용기 , 슬그머니 자리 피한다)

    씬37. 정신 병원 전경 (아침)

    (출근 무렵이다. 주차장에 들어오는 박원장의 승용차
    박원장, 차에서 내려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씬38. 원장실

    (박원장, 양복 상의 벗고 가운 걸치는데,
    노크 소리)

    박원장: "(단추 꿰며)들어와요"

    (방간호사 들어온다)

    박원장: "(보며)무슨 일 있나? 월요일 식전부터 찾아오고."
    방간호: "(조심스레)저... 원장님 강수미씨가 식사와 투약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박원장: "(본다) !...."

    씬39. 정신병원 계단

    (계단을 빠르게 올라오는 박원장과 방간호사)

    박원장: "언제부터 거부하고 있나?"
    방간호: "지난주 토요일부터니까 사흘쨉니다."
    박원장: "(짜증스런)집으로 연락하지 뭐했어?"
    방간호: "학회일 때문에 나가셨다고..."

    (박원장과 방간호사 병동의 철문 앞에 멈춘다
    철문 옆의 인터폰 누르는 방간호사)

    인터폰 : "(소리)누구십니까?"
    방간호: "네 원장님 오셨습니다."

    (철컥 철문이 열리면 급히 들어가는 박원장과 방간호사)

    씬40. 수미의 병실

    (침대 옆에 매달린 링거병
    튜브를 타고 떨어지는 링거액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수미
    문 열리고 들어오는 박원장과 방간호사
    박원장 수미의 상태 살핀다)

    박원장: "비.피(*B.P,Blood Pressure;혈압)는?"
    방간호: "110에 80 입니다."
    박원장: "(수미에게)강수미씨 왜 식사 거부했죠? 어디 불편한데라도 있어요?"

    (수미 무표정하게 천장만 바라본다)

    박원장: "(방간호사에게) 투약 거부한지 사흘째라고? 그럼 할로페리돌(*Haloperidol;강력정신안정제) 5밀리 인젝션(*Injection;주사)하고 상태를 지켜보도록 하지. (돌아서 나가며) 병동에 무슨 일 있나?"
    방간호: "예 그게... 환자끼리 다툼이 좀....."

    (나가는 두 사람
    병실에 홀로 남은 수미
    수미 지그시 눈감는다)

    씬41. 수미의 집 마당 (회상/밤)

    (낡은 한옥의 소박한 마당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불을 환하게 밝힌 마루
    유리문 너머에 걱정스러운 송여사와 수용 앉아있다)

    씬42. 수미의 집 마루

    (8시를 넘어가는 시계 바늘
    낡은 교자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신형 타자기
    TV에서는 일일 연속극이 방송되고 있다
    수용, 신경이 쓰이는지 TV 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 실내
    정적을 깨뜨리며 시계의 초침소리가 흐른다)

    수용 : "(타지기 보며)앗다 미치겄구마 잉. 학교 파한지가 언젠디 여적꺼정 안 들어오는 것이여. 지가 몽매에도 소원하던 타자기 사다놨는디."
    송여사 : "(심란하다)아무일 없어야 하는디.... 동네 사람들이 그라는디 군인들이 처녀를 발개벗겨서 끌고...."
    수용 : "(벌컥)거 재수퉁머리 없는 말은 하덜 마쇼 엄니. 말이 씨가 된께."

    (하는데,
    요란한 전화벨 소리
    수용, 재빨리 수화기 든다)

    수용 : "여보쇼? 잉? 누구냐?! (사이) 나여 수용이 오빠 (사이) 그려? 잉 (사이) 그라고 ..... (심각하다) 참말이여!! (사이) 알았다. 알았응께 울덜 말고 전화끓어 (사이) 그려 수미 괜찮을겨."

    (수화기 내려놓는 수용,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선다
    송여사 :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송여사 : "(떨리는 목소리)수용아 설마....."
    수용 : "(짐짓 큰 소리로 안심시키는)별일이야 있것어라. 세상이 흉혀서 그런 끔찍한 소문이 돌지... 군인들이 뭣땜시 수미를 끌고 갔겄소.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지지배를."

    (마루의 유리문 열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수용
    송여사 : 따라 나간다)

    송여사 : "(수용 따라가며)별일 없것제 잉......"

    씬43. 수미의 집 마당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가는 수용,
    툇돌 위의 송여사 :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문 앞에서 멈추는 수용)

    수용 : "(돌아서며)수미 친구 말로는 무신 문학 써클인가에서 합평회가 있어서 거그 갔을 것이라는디. 하여튼 이노무 지지배 내가 언릉 가서 잡아올팅께 엄닌 너무 걱정 마시쇼. (짐짓 미소)"

    (돌아서 대문 여는 수용의 표정이 어둡다)

    씬44. 수미의 집 대문 앞

    (어둠 속에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수미의 모습
    수미의 찢겨진 치마 아래로 다리 사이에 피가 엉겨 있다
    문 열고 나오는 굳은 표정의 수용,
    문 앞의 수미에게 걸려 넘어질 뻔 한다)

    수용 : "(일어서며)... ? ... (다가가 보고) ...! 수미야!! 수미야 어떻게 된겨?!"

    (대문 안에서 들려오는 송여사의 목소리)

    송여사 : "(소리)수미 왔다냐? (걱정스런) 왜 그려 수미한테 뭔 일 있는겨?!"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송여사
    수용 송여사 : 만류한다)

    수용 : "(진정시키려)엄니 진정하시랑께요. 수미 암시랑토 안어라. 그냥..."
    송여사 : "(뿌리치며)뭐여 이렇크롬 실신한 아그를 보고도 암시랑토 안어야?!"

    (쓰러진 수미 안아올리는 송여사,
    치마 속에 손 넣어 본다
    뻘건 피가 뭍어 나오는 송여사의 손!)

    송여사 : "(경악... 소리내어 우는)아이구 참말이여. 그거이 참말이여! 군인들이 여자를 끌고 갔다더니.... 아이구 인두껍을 쓴 짐승덜. 이제 열여섯인 아그를 ....! 즈그 누이동상 겉은 아그를 아이고!! (통곡한다)"

    씬45. 수미의 병실 (현재)

    (침대에 누워있는 수미의 얼굴 위로
    송여사의 통곡소리 겹쳐진다
    무표정한 수미의 얼굴)

    씬46. 정신병원 전경 (오전)

    (겨울비가 추적이고 있다
    고개를 떨군 채 총총이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송여사)

    씬47. 대기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중얼거리며 기도하고있는 외래 환자(남)
    그 곁에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외래 환자의 보호자들
    송여사 : 질린 표정으로 외래 환자 바라보고 있다
    그 위로 들려 오는)

    윤간호 : "(소리)강수미씨 보호자분 들어오세요"

    씬48. 진찰실

    (차트를 보고있는 박원장
    그 앞에 걱정스런 표정으로 앉아있는 송여사)

    박원장: "(차트 덮고)정신분열증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권총이론이 있습니다. 발병인자라는 총알을 가지고 있던 환자가 어느 날 충격적인 스트레스라는 격발 장치가 작동해서 총알, 즉 발병인자가 발사되어 병이 발병한다는 이론입니다."
    송여사 : "(근심어린 표정)......."
    박원장: "강수미씨가 사일 째 식사와 투약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환자 면담이나 보호자 면담에서도 특이한 과거력이 없었는데, 강수미씨가 남자 환자들에게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곤 합니다."

    (송여사 : 창 밖 보며 손수건 만지작거린다)

    박원장: "(조심스레)혹시...... 제게 말씀 안 하신 거 있으십니까?"
    송여사 : "(주저하며).........윤간을 당했지라..... 군인들한테...... 광주사태 때였어라."

    씬49. 휴게실

    (굳게 닫쳤던 출입문이 열리고,
    박원장의 안내 받으며 병동 안으로 들어오는 송여사
    무표정한 환자들 속에,
    송여사를 훑어보는 용기 의 날카로운 눈빛,
    그러나, 이내 외면하는 용기 )

    씬50. 수미의 병실

    (들어오는 송여사와 박원장
    송여사, 링거 바늘 꽂고 있는 수미보고)

    송여사 : "(울음 터뜨리며)아이구 이것아 언제꺼정 이럴 것이여. 인잔 떨쳐버릴 때도 됬잖여. 느그 오빠 수용이 광주사태 때 실종되 불고 에미한테 남은 건 너 밖에 없어야. 니가 인자 수용이 몫까지 살아줘야 할 거 아녀. 이것아!"

    (침대 난간 붙잡고 오열하는 송여사
    박원장 송여사 : 부축하는데)

    씬51. 수미의 병실 창문 밖

    (추적이는 빗방울들이 창가의 나무 잎사귀에 맺혀있다
    창문 너머에 울고 있는 송여사
    침대에 누워 바라보는 수미
    뒷짐지고 서서 지켜보는 박원장
    병실 안의 모습이 정물처럼 굳어져 가면,
    CA, 천천히 뒤로 빠지면서)

    씬52. 간호사실

    (유리 너머로 병동 안의 평화스런 일상이 보이고,
    방간호사 약병 분류하고 있고,
    김간호사 차트 정리하고 있다)

    김간호: "(차트 넘기다) 어머 강수미 환자 퍼스널 히스토리(Personal History;개인력)에 윤간이 있네요."

    (면담실에서 나오던 진배, 멈춰 서서 귀기울이는데)

    방간호: "광주사태 때 군인들한테 당했데요."
    김간호: "(혼잣말) 어머 안 됬다."
    방간호: "(진배 발견하고) 정진배씨 거기서 뭐하세요?"
    진배: "(당황하며) 아, 아니에요. 문 좀 열어 줘요."

    (방간호사 열쇠 꺼내 들고 출입문으로 가면)

    씬53. 용기의 병실

    (활짝 열려진 창문
    용기 벽에 기대어 앉아 담배 피우고 있다
    들어오는 진배)

    진배: "(앉으며)이봐 배중사 윤간이 뭐야?"
    "(피식 웃으며)남자 여럿이서 여자 한 명 건드리는 거, 그것도 모르슈?"
    진배: "(놀라며)그으래? 그 미친년 처녀가 아니었잖아."
    용기: "그년이 누군데?"
    진배: "새로 들어온 미친년 있잖아. 그년이 광주사태 때 군바리들한테 윤간을 당했다는구만. 그게 그년 파쓰날 히스토릭이래."

    (순간 표정이 굳어지는 용기 ,
    이상한 듯 쳐다보는 진배)

    씬54. 원장실 (밤)

    (탁자 위에 잔뜩 쌓인 차트
    박원장, 차트 보며 진료과장 그리고 방간호사와 이야기 나누고 있다)

    박원장: "(차트 넘기며)배용기 환자 잘 지내나? 그 사람 요즘도 S.P.R(Schizophrenia;정신분열증) 환자들 괴롭히고 그러진 않나?"
    방간호: "요즘 좀 경직되고 우울해 보일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진 않고 있습니다."
    진료과: "P.T.S.D라면 디프레션(Depression;우울증)에 의한 알콜리즘이 의심됩니다."
    박원장: "그럴 수도 있지 일단 항우울제 투여는 고려해 보도록 하고 강수미 환자 식사 거부한지 며칠 째지?"
    방간호: "오일짼데요."
    진료과: "원장님 E.C.T(*Electro Convulsive Therapy;전기충격요법)를 생각해보시는 게 어떨지......"
    박원장: "글쎄 S.P.R 환자가 E.C.T에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일 단 이번 주말까지 지켜보도록 하지."
    진료과: "예."
    박원장: "그 다음이 한재희 환잔데, 어떤가?"
    진료과: "비교적 잘지내고 있습니다. 현재 디루젼(*Delusion;망상)이나 어쿠스마(*Acousma;환청) 등의 특이 증상은 없습니다."
    박원장: "그리고.... 심재권: 환자 상태는 어느 정돈가? 요즘도 구호 외치고 운동권 노래 부르고 그러나?"
    진료과: "큐러빌리티(*Curability;치료 가능성)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박원장: "(방간호사 보고)보호자들은 뭐라고 그러던가?"
    방간호: "장기 입원을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원이나 수용시설보다 좋다고 완치 여부에 관계없이 입원시키고 싶답니다."
    진료과: "(혼잣말하듯)아들 한 명 내다 버렸다는 뜻이군."
    박원장: "(차트 덮으며)오늘은 이만 끝내지. 두 사람이 계속 수고 좀 해줘요.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병동회식 한번 하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료과장과 방간호사)

    씬55. 휴게실

    (창살이 쳐진 창문 너머에,
    명멸하는 거리의 불빛들
    낡은 TV 앞에 모여 앉아 쇼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환자들
    용기 , 창가에 서서 병원 앞 주차장 내려다보고 있다
    진료과장과 사무장의 배웅을 받으며 퇴근하는 박원장이 보이는데,
    용기 , 외면하고 병실로 걸어간다)

    진배: "(보고)배중사 어디가? 이리 와서 테레비 보지 않구."
    용기: "(심드렁)생각 없시다."

    (진배, 이상한 듯 쳐다보다 보는데,
    잽싸게 채널 바꾸는 재권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고개 돌리는 진배)

    진배: "(황당)어, 뭐야?! 이런 미친놈들이. 야 이것들아 대가리가 훼까닥 한 것들이 뉴스는 봐서 뭐할 거야?!"

    (진배, 신경질적으로 채널 바꾸는데)

    씬56. 수미의 병실

    (탈진한 듯 가늘게 호흡하고 있는 수미
    선영과 재희 그 곁에 앉아 있다
    수미에게 말 걸고 있는 선영)

    선영: "내 이름은 선영이에요. 진선영. 정신분열증은 약만 규칙적으로 먹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살 수 있어요."
    재희: "(선영 보며)이 언니는 두 번째 입원이에요. 시아버지 초상에 사흘 날밤을 새워서 재발 했데요. 그 전에는 정상적으로 약 먹고 잘살았었는데."
    선영: "어서 식사도 하고 약도 먹고 해야죠. (침대의 이름표 보며) 안 그래요 수미씨? 이런 곳에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재희: "(수미 얼굴 보다가)어머! 왼쪽 눈 밑에 흉터가 있네. 언제 다쳤어요? 많이 아팠겠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수미, 신음 소리를 내며 뒤척인다)

    선영: "다리가 힘 빠지고 아플 거예요. 내가 주물러 줄게요."

    (선영, 수미의 다리 주무르는데,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재희, 쳐다보면,
    병실문 유리 너머에서,
    황급히 사라지는 용기 의 머리)

    재희: "(갸우뚱)누구지? (하다가 선영 보고) 선영 언니 이혼 얘기 나왔다면서 어떻게 됬어요?"
    선영: "(표정 어두워지며)갈라서야겠지. 남편이 사기 결혼이라고 난리를 치는데 (한숨) 어차피 정신분열병 있다는 거 얘기 안 하고 결혼한 내 잘못이 큰데 어쩌겠어...."

    씬57. 용기 의 병실

    (들어오는 용기 ,
    장판을 들추고 감추어 놓은 담배 꺼낸다
    창문 열고 담배 피워 무는 용기
    용기 , 한숨처럼 길게 담배 연기 내뱉는데,)

    씬58. 지하실 입구 (회상)

    (이중사에게 멱살 잡혀 끌려오는 용기
    이중사, 용기 의 어깨를 진압봉으로 구타한다
    쓰러지는 용기
    지하실에서 들려 오는 수미의 비명 소리
    용기 , 고개 들면)

    이중사 : "(윽박지르는)야 이 개새끼야, 아까 처럼 모른 척 하면 되지 왜 나서서 지랄이야 어차피 여기서 되질지도 모르는 목숨, 여고생 좀 건드려 보자는데 그게 대수야!?"
    (계속되는 수미의 비명 소리
    용기 , 눈을 질끈 감는데)

    이중사 : "중대장 대대장도 다 알고 있어. 군법회부 좋아하시네. 너 이 새끼 한번만 더 아가리 놀리면 씩스?b>씬막?확 갈겨버리는 수가 있어!"

    (이중사, M16의 장전손잡이 잡아당긴다)

    씬59. 용기 의 병실 (현재)

    ('철컥' M16의 장전 소리 증폭되어 들린다
    용기 , 굳은 표정으로 창살 움켜쥐며,)

    용기: "(나지막이)제길....!"

    씬60. 휴게실 (아침)

    (창살 너머로 보이는 잿빛 하늘
    줄을 서서 김간호사에게 혈압을 채크하고 있는 환자들
    모두 무표정한 얼굴들이다
    출입문 열고 들어오는 방간호사)

    방간호: "김간호사 전기치료실에 좀 가봐요. 혈압 채크는 내가 할테니까."
    김간호: "(보며)거긴 왜요?"
    방간호: "가서 조대리: 하고 청소 좀 해요. 최근에 사용을 안해서 먼지가 잔뜩 쌓였더라구."
    김간호: "(일어서며)누가 전기치료 받아요?"
    방간호: "강수미씨 E.C.T할 거에요."

    (표정이 어두워지는 용기 ,
    수미의 병실을 쳐다본다)

    씬61. 전기치료실

    (어둡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조대리와 김간호사
    전기 스위치 올려지면,
    중앙에 놓인 침대 너머에,
    전기 자극을 주는 전극이 연결된 치료기가 보인다
    창문도 없는 다소 기괴하기까지한 실내의 모습)

    씬62. 원장실

    (수미의 차트 살펴보고 있는 박원장
    차트 넘기다 그림 한 장을 들어본다
    어두운 배경 안에 강간당하는 소녀가 그려진 그림
    박원장 심각한 표정으로 보는데
    들어오는 방간호사)

    방간호: "부르셨어요?"
    박원장: "준비는 잘 되가나?"
    방간호: "예, 진료 과장님이 아침부터 준비하고 계십니다."
    박원장: "근데 이 그림, 이거 강수미 환자 H.T.P(*House-Tree-Person;투사적 그림 검사중 하나) 검사 한 거 맞나?"
    방간호: "예, 제가 깜박하고 병동의 캐비넷에 보관했었습니다."

    (박원장, 그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는데
    문 열리며,)

    신대리: "진료 과장님이 준비 다 됐다고 그러십니다."
    박원장: "(일어서며)그래요. 그럼 강수미 환자 데려오지."

    (나가는 박원장)

    씬63. 전기치료실

    (마취된 채 침대 위에 묶여 있는 수미,
    머리에 전기 자극을 주는 전극이 연결되어 있다
    그 주변에 둘러서 있는 박원장을 비롯한 의료진들)

    박원장: "(진료 과장에게) 아트로핀(*Atropine;항콜린성 작용제, 신경 충동효과를 차단 길항하는 작용제) 인젝션했나?"
    진료과: "예, 30분전에 0.5밀리 인젝션 했습니다."
    박원장: "그럼 70볼트부터 시작하지."

    (전기충격기를 조작하는 박원장
    '위잉-칙' 전기치료기의 소리
    감긴 수미의 눈까풀이 파르르 경련한다)

    박원장: "(상태 본 후 갸우뚱)약했나? 좀 높여볼까."

    (전기충격기를 조작하는 박원장
    수미, 자는 듯 평온한 얼굴과는 달리 손끝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CA, 천천히 침대 아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씬64. 몽타즈

    (어두운 화면 위로,
    전기치료기의 소리와 함께 단속되며 나타나는 흑백 사진들
    *학교 앞 거리 -수미 손 붙잡고 강제로 끌고 가는 이중사
    -외면하던 용기 , 뒤돌아보는 수미 불길한 듯 보는
    -시민들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지하실 안 -공수부대원들에게 둘러 싸인 겁에 질린 수미
    -바지 버클을 끌르는 이중사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충혈된 눈동자들
    -이중사 수미 강간하는데
    *학교 앞 거리 -용기 수미가 끌려갔던 방향으로 뛰어가는
    등, 수미가 당했던 끔찍한 강간의 장면들이 보여진다)

    씬65. 수미의 병실

    (문열고 들어오는 방간호사
    그 뒤를, 신대리 수미 업고 들어온다
    침대에 수미를 눕히는 신대리
    방간호사, 수미에게 이불 덮어준다)

    방간호: "(신대리 에게)이제 그만 나가죠?"
    신대리: "(땀 닦으며 혼잣말)전기 치료가 잘 됬으면 좋겠는데...."

    (두 사람 나가면,
    병실에 홀로 남은 수미
    마취상태로 깊은 잠에 빠져있다)
    (DIS)
    씬66. 수미의 병실(환상)

    (창문 너머에 가득한 어둠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수미 곁에,
    열 일곱 앳된 소년의 모습으로 앉아있는 수용
    수용, 살며시 수미의 손을 잡는다)

    수용 : "(차분히 부르는)수미야."

    (수미 살포시 눈뜨며)

    수미: "(미소)오빠......."
    수용 : "많이 아팠제?"
    수미: "아녀 마취해서 아프지 않았어."
    수용 : "미안허다 나 땜시...."

    (수용의 창백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수미: "울지 말어 오빠."
    수용 : "내가 너를 지켜주었어야 했는디."
    수미: "(보며) 오빠 있는 곳 많이 춥제?"

    (고개를 젓는 수용,
    수미의 손을 꼭 움켜쥔다)

    수용 : "수미야 살아야 헌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하는겨. 이 깊은 절망을 이겨내고 끝꺼정 살아 남는 게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여 알겄제?"

    (수미 고개 끄덕인다
    손 맞잡은 채 서로를 마주보는 수미와 수용)
    (DIS)

    씬67. 수미의 병실 (오전/현실)

    (잠들어 있는 수미,
    잠에서 깨어 일어난다
    병실 안을 둘러보다 맞은편 벽에 시선이 멈추는 수미
    빛 바랜 병실 벽 위에,
    누군가 또박또박 써놓은 글귀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 가는 것이다!'
    수미 한동안 벽에 쓰여진 글귀 바라본다)

    씬68. 간호사실

    (유리 너머로,
    수미의 병실에서 나오는 김간호사 보인다
    간호사실을 향해 뛰어오는 김간호사
    출입문 열리고,)

    김간호: "(들어오며 호들갑) 방 간호사님, 강수미씨가 식사하겠데요."
    방간호: "(일어서며)어머 그래요? 어서 미음 준비시키고, 원장님께도 알려요."

    (김간호사 수화기 드는데)

    씬69. 수미의 병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수미
    김간호사 수미에게 미음 떠먹이고 있다
    방간호사 흐뭇한 표정으로 보다가,)

    방간호: "(김간호사에게)천천히 먹여요. 김간호사."
    김간호: "(웃으며)예, 걱정마세요. 근데 강수미씨 이렇게 잘먹는 걸 그 동안 왜 굶었어요?"

    (김간호사에게 나무라는 눈짓 보내는 방간호사
    수미 희미하게 웃는데,)

    씬70. 정신 병원 앞 거리 (아침

    (신문 가판대에 꽂혀있는 조간신문들,
    온통 임박한 대통령선거 기사로 가득하다
    CA, 가판대에서 나와 병원건물 비추면)

    씬71. 휴게실

    (한쪽 구석에 놓인 식탁 겸용의 탁자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환자들
    신대리 와 김간호사 뒷짐지고 바라보고 있다
    수미의 병실문 열리고,
    힘겨운 듯 그러나 결연히 걸어나오는 수미
    김간호사, 수미보고 달려가 부축한다)

    김간호: "강수미씨 왜 나와요? 어디 아파요?"
    수미: "(힘들지만 또박또박)저 밥 먹고 싶어요."

    (김간호사 놀란 듯 신대리 바라보는데)

    씬72. 원장실 (저녁)

    (박원장과 마주보며 앉아있는 진료과장과 방간호사
    세 사람 사이에 놓인 차트더미)

    박원장: "강수미 환자 상태는 어느 정도인가?"
    방간호: "이틀 전부터 식사 시작했는데, 체력은 아직 힘에 부치는 것 같습니다".
    박원장: "(진료과장 보며)치료 상황은?"
    진료과: "E.C.T후부터 디루젼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박원장: "(끄덕이며)몸 상태가 회복되는 데로 면담해야겠군. 언제가 좋을까?"
    방간호: "토요일쯤이면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것 같은데요."
    박원장: "그럼 이번주 토요일로 날짜를 잡기로 하고, 면담은 진료과장이 하도록 하지 (일어서며) 이것으로 끝내지."

    (일어서는 박원장
    진료과장과 방간호사 인사하고 나간다)

    씬73. 수미의 병실 (오전)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수미,
    얼굴에 핏기가 도는 것이 기력을 회복한 모습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수미에게 말을 걸고 있는 재희
    선영은 수미의 다리 주물러 주고 있다)

    재희: "전기치료 할 때 아팠어요?"

    (수미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 젖는다)

    재희: "난 여태까지 세 번 입원했지만 전기치료는 받은 적이 없어요.
    선영: "전기 치료는 약이 안 듣는 사람들에게만 하는 거래."
    수미: "(보며 미소)......"
    재희: "(보며)아유 말 좀 해요. 답답해 죽겠네."

    (수미 간지르는 재희
    조용히 미소지으며 옆으로 피해 앉는 수미)

    수미: "그만해요."
    재희: "이제야 말하네"

    (선영과 재희 마주보며 웃는데,
    들어오는 조대리)

    조대리: "강수미씨 진료과장님 면담 있어요. (수미 상태 보며) 걸을 수 있겠어요?"

    (수미 고개 끄떡이며 침대에서 내려온다)

    씬74. 면담실

    (진료과장 앞에 앉아 있는 수미
    수미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다
    면담실 안에 흐르는 침묵)

    진료과 "(조심스럽게)나 알고 있어요. 광주사태때 있었던 일... 수미씨 어머니께서 다 이야기 하셨어요."
    수미: "(고개 들고 보며)........"
    진료과: "걱정 말아요. 나하고 원장님 외엔 아무도 모르는 얘기니까."

    (안도하는 수미
    진료과장, 수미의 표정 살피다가)

    진료과: "그래요 우리 그 얘긴 그만하기로 하고, 다른 얘기 해볼까요? 수미씨 오빠 얘기는 어때요? 오빠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수미: "(주저하다)...... 실종 됬어요. 광주사태 때....."
    진료과: "(아차 싶은)!........"

    (진료과장 당황해 수미 보면
    수미 창 밖으로 시선 돌리는)

    씬75. 수미의 집 대문 앞 (회상/아침)

    (낡은 한옥의 소박하지만 고풍스런 대문
    그 너머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

    송여사 : "(소리) 수용아! 가긴 어딜 간다구 그래 쌌냐?"
    수용 : "(소리) 복수할 거여요. 수미를 저러크롬 만들어놓은 공수 새끼덜, 내 손으로 찾아내서 죽여버린당께요"
    송여사 : "(소리) 너 미쳤냐? 그 짐승보다 못한 놈들을 니가 무슨 수로 죽인다냐?"
    수용 : "(소리) 죽일 수 있어라. 지도 교련시간에 총 쏘는 법 배웠당께요 이거 놓으시쇼!"

    (대문 벌컥 열리고
    뛰쳐나오는 수용, 골목을 내달린다
    송여사, 뒤쫓아 나오지만,
    멀어져 가는 수용의 뒷모습)

    송여사 : "(부르는) 수용아! 이눔아!"

    (송여사, 끝내 쓰러져 울음 터뜨린다)

    씬76. 전남도청 안 (새벽)

    (여러 가지 벽보와 구호들이 어지러운 사무실 안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화기의 사격음과 탱크의 엔진소리
    M1소총을 든 수용, 시민군 1과 창문 밑에 웅크리고 있다.
    십자가가 새겨진 은빛 팬던트를 만지작거리는 수용)

    시민군 : 1 "(수용 보며)뭔디 그렇게 만저싸?"
    수용 : "(팬던트 보며)여동생이 작년 성탄절날 준 건디. 본당 신부님 축성도 받았어라.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학력고사볼 적에..... "

    (순간 멈칫 하며 입 다무는 수용)

    시민군 : 1 "자네 고등학생이제?"
    수용 : "(고개 숙이며) 아닌디요."
    시민군 : 1 "(창문 너머 보며) 아직 도청 앞까진 않왔응께."

    (주머니에서 수류탄 꺼내는 시민군 1)

    시민군 : 1 "(수류탄 건네며) 이거 가지고 어여 집에 가. 행운의 목걸이 했응께 죽진 않을겨"
    수용 : "(보며 굳은)......."
    시민군 : 1 "호신용이여. 집에 가다 공수새끼덜 만나불면 집어던지고 냅다 튀어부러. 무신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겄는디. 자넨 여기 있어봤자 거추장스럽기만혀. 살아남아서 대학도 뎅기고 박사도 따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혀야 할 거 아녀. 싸게 가!"

    (수용, 수류탄 바라보는데)

    씬77. 전남도청 안 복도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수용
    계단 아래서 뛰어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놀란 수용, 복도 끝의 창고로 뛰어든다)

    씬78. 전남도청 창고 안

    (푸른 새벽의 기운으로 가득 찬 작은 창문
    점점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수용,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가 새겨진 은빛 팬던트 꺼내 입 마춘다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리는 수용,
    그러나 눈빛만은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발자국 소리 문 앞에서 멈추면
    수용, 떨리는 손으로 수류탄의 안전핀 뽑는다
    문이 벌컥 열리고,
    M16소총을 겨누는 공수부대원
    새벽 푸른빛 아래 서서히 드러나는 얼굴,
    긴장한 용기 의 얼굴이다!
    총구를 거두려는 용기 ,
    수용의 손안에 있는 수류탄에 시선이 멈춘다
    고함지르며 수용에게 M16소총을 난사하는 용기 )

    씬79. 간호사실 (현재)

    (면담실에서 나오는 수미
    진료과장 뒤따라 나온다
    병동을 나가는 진료과장
    출입문 앞에 서있는 수미
    김간호사 가서 문열어준다)

    씬80. 휴게실

    (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감질나는 햇살
    정신분열증 환자들만 앉아 해바라기하고 있다
    병동 안으로 들어오는 수미)

    선영: "(수미보고)수미씨 면담 끝났어요? 여기 앉아요."

    (재희 곁에 앉는 수미)

    재희: "재미없죠? 주치의 면담 하는 거 난 제일 싫어해요. 꼭 없던 정신병이 생기는 거 같다니까. 수미씨 안 그래요?"
    수미: "(미소).... 근데 오늘은 휴게실이 조용하네요."

    (용기 의 병실 흘낏 보는 선영)

    선영: "(소리 낮춰)그 주정뱅이들 오늘은 조용하죠? 배중사는 낮잠자구, 정진배 그 늙은 인간은 간검사 하러 종합병원 갔어요."

    (고개 끄덕이는 수미, 자리에서 일어선다
    수미 병실로 가려는데,)

    재희: "어디 가요? 조금 있으면 테레비 할텐데. 오늘 토요일이잖아요."

    씬81. 수미의 병실

    (들어오는 수미, 침대에 걸터앉는다
    수미, 벽에 쓰여진 글귀 바라보는데,)

    씬82. 정신 병원 앞 주차장 (아침)

    (낡은 앰블런스의 뒷문이 열리고,
    병동회식에 쓰일 음식을 내리는 조대리와 신대리
    음식이 담긴 상자를 들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씬83. 수미의 병실

    (긴 생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수미,
    많이 안정된 모습이다
    수미, 침대 위의 이불과 커버 정리하는데,
    들어오는 재희와 선영)

    재희: "(즐거운)수미씨 오늘 저녁에 병동회식 있데요."
    수미: "(보며)그게 뭔데요."
    재희: "한 달에 한번씩 휴게실에서 즐겁게 먹고 노는 거예요. 그거 없으면 이 생활 지겨워서 못해요."
    수미: "(미소)저는 거기 안 끼면 안되나요?"
    선영: "아니 왜요? .... (하다가) 알았어요. 그 주정뱅이들 보기 싫어서 그렇죠? 이따가 우리가 먹을 거 싸가지고 올게요."

    (재희와 선영 문열고 나가면,
    침대에 걸터앉는 수미, 평온한 얼굴이다)

    씬84. 휴게실 (저녁)

    (탁자 위에 음식 차리고 있는 김간호사와 환자들
    진배 어슬렁거리며 음식 집어먹고 있다
    방간호사 그런 진배 보고)

    방간호: "정진배씨 도와주지 않을 거면 병실에 들어가 계세요."
    진배: "(비굴한 웃음)헤헤, 근데 술은 없나요?"
    방간호: "(기막히다, 단호하게)없으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김간호: "방간호사님, 준비 다 됬어요."
    방간호: "(둘러보고)그럼 다들 모이라고 그러구, 원장님하고 진료과장님께도 올라오시라고 연락드려요."
    김간호: "네. (환자들에게) 자 모이세요."

    (모여드는 환자들
    진배, 둘러보다가)

    진배: "어라 배중사가 없네."

    (진배, 용기 의 병실로 가면)

    씬85. 용기 의 병실

    (용기 , 창가에 서서 담배 피우고 있다
    진배 들어오다 보고,)

    진배: "배중사 뭐해? 오늘 병동회식 있는 거 몰라? 그리구 담배 좀 눈치껏 피워, 들키면 어쩔려구 그래."
    용기: "(비웃으며)별 걱정을 다하네. 내가 언제 담배 피우다 걸리는 거 봤수?"
    진배: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나가자구. 진정한 실세인 배중사가 병동회식에 빠져서야 되나 안 그래?"

    (진배, 용기 손잡아 끌면
    용기 못이기는 척 따라나간다)

    씬86. 휴게실 창문 밖

    (창살이 쳐진 창문 너머에서,
    병동회식이 한창이다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폐쇄병동
    박원장 일어서서 노래 부르고 있다
    손뼉치며 박자 맞추는 환자들의 모습)

    씬87. 휴게실

    (노래 끝마치는 박원장
    박수소리와 휘파람소리 어지럽다
    일어나서 사회 보는 진배)

    진배: "(숟가락 들고)에, 원장선생님의 노래였습니다. 다음 순서는 공수특전부대 하사관으로서 멸공전선의 불침번이었던 배용기 중사의 노래가 있겠습니다. 박수!"

    (박수치는 환자들
    용기 , 쑥스러운 듯 피식 웃는다)

    진배: "(눈짓하며)어서 일어나 배중사. 분위기 깨지 말고."

    씬88. 수미의 병실

    (수미와 재희, 선영 마주앉아 음식 먹고 있다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웃음과 박수소리)

    재희: "(웃으며)원장선생님 노래 되게 못하시죠?"
    선영: "(재희 보며)그래도 오늘은 양호하신 거야. 지난번에는 선구자를 부르셔서 분위기를 완전히 깨셨잖아."

    (수미 말없이 미소 짓는데,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용기 의 목소리)

    용기: "(소리/헛기침)험, 저는 군 생활을 오래한 죄로 아는 노래가 군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를 노래가 특전 부대가 밖에...."
    진배: "(소리)아아, 서론이 너무 길다. 중사 배용기 노래 일발 장전!"

    ('와' 터지는 웃음소리
    수미와 재희, 선영도 귀기울이며 웃는다)

    용기: "(소리)노래 일발 장전!"
    환자들 "(소리)발사!"
    용기: "(소리/노래 부른다)보아라 장한 모습 검은 베레모. 무쇠 같은 우리와 누가 맞서랴. 하늘로 뛰어올라 구름을 찬다. 검은 베레 가는 곳에 ......"

    (들려오는 용기 의 군가 소리
    킥킥대며 즐거워하는 재희
    선영도 빙그레 미소짓고 있다
    순간 긴장하는 수미,
    서서히 경직되어 가는 어두운 수미의 얼굴에서,)

    씬89. 휴게실

    (군가 부르고 있는 용기
    흥겨운 표정으로 손뼉치고 있는 환자들
    박원장과 간호사들도 즐거운 표정이다
    음식 먹다 말고 용기 노려보는 재권
    계속되는,)

    용기: ".... 자유가 있다. 삼천리 금수강산 길이 지킨다. 안 되면 되게 하라 특전부대 용사들. 아 아 검은 베레......"

    (순간, 탁자를 뒤집어엎는 재권,
    괴성을 지르며 용기 에게 달려든다)

    재권: "이 독재의 개새끼! 죽인다!!"

    (용기 에게 달려들다 남자 간호사들에게 붙잡히는 재권
    발버둥치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재권: "(구호 외치는)광주 학살 진상 규명! 책임자를 처벌하라!!"

    (병실로 끌려 들어가는 재권
    난장판이 된 휴게실
    썰렁하고 살풍경해진 분위기
    의사와 간호사의 눈치만 살피는 환자들)

    박원장: "(굳은 표정으로 일어서며)오늘은 이만 끝내도록 하지."

    (박원장 헛기침하고 나간다
    뒤따르는 진료과장)

    진배: "(김샜다)제에미 미친놈 하나 때문에 완전히 똥 되버렸네."

    (하고, 용기 쳐다보면,
    심각한 표정으로 장대처럼 서있는 용기 )

    씬90. 수미의 병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굳은 표정으로 창가에 서있는 수미,
    창 밖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그 위로 용기 가 부르는 군가 소리 깔리며)

    용기: "(소리)보아라 장한 모습 특전 부대 용사들....."
    수미: "(나지막이)짐승 같은 놈 ...... 틀림없어 ..... 죽여버리겠어!...."

    (네온이 명멸하는 유리창에 비친 수미의 광기 어린 얼굴에서)

    씬91. 휴게실 (아침)

    (한 손에 물 컵을 들고 늘어서 있는 환자들
    김간호사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있다
    약 먹은 환자들의 입안을 검사하는 신대리
    소파에 앉아있는 굳은 표정의 용기 ,
    그리고, 비웃는 듯한 얼굴의 진배)

    진배: "김간호사님 그 약 정력제 맞죠? 그거 나도 하나 줘요."
    김간호: "(쌀쌀맞은)할일 없으시면 병실 청소나 하세요. (수미에게) 다음 강수미씨."

    (약을 받아먹는 수미,
    신대리 앞으로 가서 입 벌린다)

    신대리: "(입 안 보고)됐습니다."

    (수미 태연하게 화장실로 들어간다
    일어나 창가로 가는 용기
    용기 무표정한 얼굴로 창 밖 내다보면,
    이발가방을 든 초로의 이발사가 보인다
    정신병원 안으로 들어오는 이발사)

    씬92. 화장실

    (수미 들어와 문 걸어 잠근다
    입 속에 손가락 넣어 억지로 토하는 수미
    토해낸 음식물이 변기에 가득하다
    음식물 헤집어 알약 찾아내는 수미
    수미의 광기 어린 눈빛)

    씬93. 휴게실

    (휴게실 중앙에 놓인 의자
    그 곁의 탁자 위에,
    이발도구를 정리하고 있는 이발사
    탁자 위에 놓인 시퍼렇게 빛나는 이발 가위
    소파에 홀로 앉아있는 수미,
    햇빛에 번득이는 이발 가위를 보고 눈빛이 빛난다
    들어오는 방간호사)

    방간호: "(큰소리로)자, 이발시간이에요. 남자 환자들 휴게실로 나오세요."

    (하나 둘씩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 환자들
    그 속에,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진배와 용기
    진배, 이발사 주위로 몰려드는 남자 환자들을 떼민다)

    진배: "이런 싸가지 없는 미친 새끼들이. 야 이 미친놈들아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어서 저리 못 가! (용기 에게) 배중사 어서 이리 와서 앉아."

    (용기 , 헛기침하며 의자에 앉는다)

    방간호: "(기막혀)이것 보세요 정진배씨... (하는데,)
    진배: "(비굴한)한번만 봐줘요. 배중사가 먼저 깍는다고 지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헤헤."

    (어이없는 방간호사 나가면
    이발사, 용기 에게 흰 보자기 둘러씌운다
    머리만 내놓고 보자기에 쌓인 용기 눈감으면
    이발사 가위 들고 머리 깎기 시작한다)
    (DIS)

    (시간 경과.
    소파에 멀거니 앉아있는 남자 환자들
    그 속의 수미 기회만 엿보고 있다
    머리 깎기 끝내고 이발 가위 내려놓는 이발사
    햇빛에 반사되는 시퍼런 이발 가위
    수미, 긴장한 채 주시한다
    보자기 벗겨내고 용기 의 목에 붙은 머리카락 털어 내는 이발사)

    이발사 "(용기 에게)다 깎았어요. 들어가서 머리 감으세요."

    (이발사 보자기의 머리카락 터는데,
    용기 자리에서 일어선다
    순간, 벼락 같이 외마디 고함 지르며 달려는 수미
    탁자 위의 이발 가위 들어,
    용기 의 목을 향해 내려치는 수미
    용기의 휘둥그레진 놀란 눈
    허공에 번쩍 들린 이발 가위 든 수미의 손에서)
    (STOP MOTION)

    씬94. 용기의 병실 (밤)

    (벽에 기대어 앉은 굳은 표정의 용기
    오른손에 감겨 있는 핏물이 베어 나오는 붕대
    그 곁에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는 진배)

    진배: "(기막히다)햐, 그 미친년.. (하다가) 정말 이건 배중사가 특공무술 연마하지 않았으면 그냥 골로 가는...."

    (굳게 다문 용기 의 입
    용기 심각한 표정으로 붕대에 감긴 오른손 본다
    진배, 용기 눈치 살피는데
    문 열고 들어오는 신대리 )

    진배: "(일어나며)이봐 신대리 , 가서 원장 나오라구 그래. 나 원장한테 할 말 있어."
    신대리: "(비웃는)이거 왜 이래요. 이 병원이 정진배씨 거예요? 그리구 원장님이 정진배씨 친구예요? 원장 나오라니 어디서 말을 막 해요!?"

    (신대리 , 열 받은 진배 무시하고 용기에게 간다
    허리 굽혀 용기의 상처 살펴보는 신대리 )

    신대리: "(짐짓 친절한)어때요 좀 아프죠? 마취가 풀리면 더 아플 거예요. 정신병원에선 이런 일 가끔 벌어져요. (나지막이 협박조로) 보호자한테 연락해서 법적으로 하려면 맘대로 해. 하지만 강수미 환자 신고식 사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거 잊지 말구."

    (용기 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신대리 나가면,
    진배, 궁금한 눈으로 용기바라본다
    스르르 눈 감고 생각에 잠기는 용기 )

    씬95. 지하실 (회상)

    (끔찍한 윤간이 끝난 직후다
    지하실 구석에 쓰러져 있는 수미,
    초점 없는 눈동자로 멍하니 지하실 바닥만 보고있다
    그 주변에, 벽에 대고 오줌을 갈기거나,
    낄낄거리며 앉아 담배를 피우는 공수부대원들
    용기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온다
    일어나 부대원들 둘러보는 이중사)

    이중사 : "(일그러진 미소) 어땠나? 즐거웠나?!"
    일동 "옛!!"
    이중사 : "만족스러웠다면 좋다!! 전원 부대가 부르며 숙영지로 철수!"

    (일어서는 부대원들
    '씬.88'의 군가 흥얼거리며 지하실을 나간다)

    부대원들 "보아라 장한 모습 검은 베레모. 무쇠 같은 우리와 누가 맞서랴......."

    (용기 지하실 한 편에 비켜 서있는데
    이중사, 용기 발견한다)

    이중사 : "(비웃는)어이 배하사, 너도 하려구? 근데 어쩌냐 저년이 뻗어버렸으니 (용기 국부 툭 치며) 너 총기 수입은 제대로 했냐?"

    (이중사 군가 흥얼거리며 나가면,
    용기 달려가 수미 안아 올린다
    멍한 시선의 수미 거의 실신 직전이다
    찢기고 벗겨진 수미의 교복 여며주는 용기
    용기, 멍들고 터진 수미의 얼굴 바라보면
    왼쪽 눈 밑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수미의 얼굴
    눈 밑의 상처 흐르는 피를 닦아주는 용기,
    수미 안은 채 고개 숙인다)

    씬96. 용기의 병실 창문 밖 (현재/새벽)

    (용기 창가에 서서 망연히 창 밖 바라보고 있다
    문득,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가 새져진 은빛 팬던트 꺼낸다
    팬던트 뚜껑 열고 한동안 바라보던 용기
    탄식처럼 긴 한숨 뱉는다
    팬던트 손에 꼭 움켜쥐는 용기)

    씬97. 정신 병원 전경 (아침)

    (먹장구름이 잔뜩 드리운 흐린 하늘 아래,
    정신병원의 우중충한 모습
    그 위로 들려오는,)

    김간호: "(소리/다급한)방간호사님!"

    씬98. 수미의 병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수미,
    입술 주위가 씰룩되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김간호사
    뛰어들어오는 방간호사)

    방간호: "(헐떡이며)뭐예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김간호: "(가리키며)저, 저기 강수미씨 얼굴이...."
    방간호: "(수미 보며)얼굴이 어떤데... (하다가,) 김간호사 겨우 이거 때문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어요?"
    김간호: "입술 주변 근육이 제멋대로...."
    방간호: "김간호사 정신병원 근무 처음이라고 그랬죠?
    김간호: "(의아) 예?"
    방간호: "(대수롭지 않은 듯) 지연성 운동장애(*Tradive Dyskinesia;비정상적이고 불규칙적이며 반복적인 근육의 이상 경련)예요. 약물 부작용이니까 원장님께 연락 드리면 되요."

    (방간호사 나가면,
    씰룩대며 경련하는 수미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

    씬99. 휴게실

    (소파에 앉아 있는 환자들
    그 속의 재희와 선영 걱정스럽다
    수미의 병실에서 나오는 방간호사)

    재희: "(일어서며)저, 방간호사님 강수미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방간호: "아니에요. 걱정할 거 없어요. (둘러보며) 오늘 알콜리즘 환자들 다 어디 갔지?"

    (하는데,
    휴게실로 들어오는 조대리)

    방간호: "(조대리에게) 배용기 환자 간 기능 검사 준비 됬어요?"
    조대리: "예, 지금 옷 입고 나갈 겁니다."
    방간호: "점심 식사 전에 끝내도록 하세요."

    (나가는 방간호사
    용기의 병실로 가는 조대리)

    조대리: "(문열며)배중사님 옷 다 입으셨어요?"

    씬100. 종합병원 전경 (오전)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차량과 사람들로 분주하다
    종합 병원 현관 앞에 멈추는 정신 병원 앰블런스)

    씬101. 종합 병원 임상병리실

    (오전이라 한가한 모습이다
    책상 위에 팔 올려놓고 앉아 있는 용기,
    오른쪽 손등에 이발 가위에 베인 봉합수술 자국이 징그럽다
    지나가는 여자 간호사와 눈인사 나누는 조대리:
    용기 물끄러미 바라본다
    주사기 가져와 피 뽑는 임상병리사
    용기 얼굴 찡그리는데,)

    씬102. 달리는 앰블런스 안

    (뒷자리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운전 중인 신대리 와 조수석의 조대리
    커튼 들추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거리 풍경 바라보는 용기
    교차로에 서있는 전경들의 살벌한 모습
    용기 표정이 굳어져 가는데,)

    조대리: "(돌아보며) 배중사님 좋으시겠어요. 간경화 초기에서 지방간으로 호전됬으니."
    "(퍼뜩 정신들며) 응? 으응....."

    (하는데, 급정거하는 앰블런스
    앞 차창 너머로 골목에서 뛰쳐나오는 20여명의 시위대가 보인다
    차도를 점거하고 기습시위를 펼치는 시위대
    시위대, 달려와 연행하려는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인다
    무참하게 진압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연행하는 전경들
    그 중 한 여학생이 피를 흘리며 긴 생머리채를 전경에게 붙잡힌 채 끌려간다
    커튼 움켜쥐며 이 악무는 용기)

    용기: "(긴장한 듯)저.... 조대리. 나 담배 한 개피만 줘...."

    (조대리 이상한 듯 쳐다보다 담배 건네면,
    용기 떨리는 손으로 받아 피운다)

    신대리: "(담배 피워 물며)아유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세상이야. 이번 대선에서는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야지 저런 꼴을 안보지. 제길!"

    (신대리 시위에 동참이라도 하듯 크락숀 눌러대면,
    여기 저기서 메아리처럼 번져 가는 크락숀 소리.)

    씬103. 정신병원 앞 거리

    (달려와 멈추는 앰블런스
    조대리: 앰블런스에서 내려서 뒷문 연다
    굳은 표정으로 내리는 용기)

    신대리: "(차에 탄 채)조대리 나 카센타에 좀 들렸다 갈테니까 먼저 들어가."
    조대리: "알았어요."

    (신대리 앰블런스 출발시키면,)

    조대리: "(용기 보며)잠깐, 담배 좀 살게요. 괜찮죠?"
    용기: "맘대로 해. 나도 바깥 공기 좀 더 마시자구."

    (조대리, 용기데리고 정신병원 건물 1층의 슈퍼마켓으로 들어간다)

    씬104. 슈퍼마켓 안

    (변두리의 옹색한 구멍가게
    조대리, 용기 팔 붙잡고 들어온다
    딱한 듯 바라보는 주인 여자)

    주인 "(조대리 보며)미친 사람이야? 멀쩡하게 생겼는데."
    조대리: "(미소)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구요. 팔팔이나 한 갑 주세요."

    (주인 : 담배 건네면,
    조대리: 주머니에서 돈 꺼내다 동전, 바닥에 떨어뜨린다)

    주인 : "아유 조심해야지."

    (동전 줍는 조대리와 주인 여자
    용기 진열장의 팩소주 보고 눈빛이 빛난다
    눈치 살피다 잽싸게 품속에 팩소주 감추는 용기)

    씬105. 휴게실 (심야)

    (불이 꺼져 어두운 휴게실 안
    창 너머에서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소리만 들릴 뿐,
    고즈넉하다)

    씬106. 용기의 병실

    (붉은 취침등 불빛이 어슴프레한 병실 안
    진배, 코를 골며 잠들어 있다
    일어나 앉는 용기,
    용기 팩소주 꺼내들고 망설인다
    결심한 듯 이빨로 팩소주 물어뜯는 용기,
    팩소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신다
    부들부들 떨리는 용기의 손,
    순간, 용기의 눈동자가 뒤집힌다
    '우르릉 꽝' 뇌성벽력 소리 깔리며,)

    씬107. 묘지 (환상)

    (밤이다
    천둥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묘지

    뗏장이 벗겨진 나지막한 봉분들 사이에,
    얼룩무늬 군복차림의 용기 서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와 용기를 에워싸는 사람들
    단속되는 번개 불빛에 드러나는 모습,
    피투성이의 시민군 들이다!
    경악하는용기,
    주위를 둘러보지만 빈손이다
    신음 같은 흐느낌이 터져 나오며,
    한 소년이 앞으로 나와 M1소총을 겨눈다
    용기, 쳐다보면
    온몸에 총탄 자국이 있는 피투성이의 수용이다!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라하는 용기 ,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 팬던트 풀어 수용에게 주려한다
    그러나.... '탕' M1소총의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되고
    용기 외마디 비명 지르는데,
    화면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

    씬108. 휴게실 (현실)

    (용기 의 병실 문이 벌컥 열리고
    팩소주 손에 든 용기 뛰쳐나온다
    용기 의 광기어린 눈동자
    비틀대며 휴게실 안을 서성이는 용기 )

    용기: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내 잘못이 아냐..... 넌 수류탄을 들고 있었어..... 널 쏘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어..... 난 죽기 싫었어!!......."

    (출입문을 열고 뛰어들어오는 조대리와 김간호사)

    조대리: "배중사님 왜 이래요? 그 소주 어디서 났어요?"

    (조대리 조심스럽게 용기 에게 다가가는데)

    용기: "(광기 어린 웃음) 우하하하!....."

    (풀썩하고 쓰러지는 용기)

    씬109. 용기의 병실 (오전)

    (창문 너머의 앙상한 겨울 나무
    침대 위에 의식을 잃은 용기 누워있다
    용기의 곁에서 혈압 채크하고 있는 방간호사
    들어오는 박원장과 조대리)

    박원장: "(방간호사에게)하이드레이션(*Hydration ;수분 공급, 수액 투여)했나?"
    방간호: "예"
    박원장: "(신경질적인)병동에 술이 반입된 것도 그렇고, 또 술 먹고 쇽 상태가 된 것도 그렇고, 도대체 요즘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서로 눈치만 보는 방간호사와 조대리
    조대리 고개 떨군다)

    방간호: "(조심스럽게).....저, 조대리가 술 끓는 한약을 먹였답니다. 환자 모르게....."
    박원장: "(화난 목소리) 내 처방 없이 투약을 했어? 뭔지도 모르는 약을! (조대리보며) 자네 간호사 맞나?!"
    조대리: "(기어들어 가는 소리) 보호자가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해서 그만..."

    씬110. 휴게실

    (병동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썰렁하다
    홀로 소파에 앉아있는 수미
    성난 표정으로 용기 병실에서 나오는 박원장,
    따라나오는 방간호사에게,)

    박원장: "오늘 저녁에 간호사 전원 원장실로 모이도록 해!"

    (박원장 나가면,
    수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씬111. 용기 의 병실

    (텅 빈 병실,
    의식 잃고 침대에 누워있는 용기,
    눈까풀이 파르르 경련하는데,
    '드르륵' 캐리버50의 사격 소리 깔리며)

    씬112. 광주 외곽 국도 (회상)

    (노을이 붉게 물든 지평선,
    국도 변 논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
    M113 APC가 선두에 선 10여대의 군용 트럭 콘보이 행렬이 질주해 온다
    좌우로 회전하며 캐리버50을 난사하는 APC의 기관총 포탑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농부들
    멀리 민가의 담장에까지 총탄이 날아가 먼지가 풀썩이며 일어난다)

    씬113. 달리는 군용 트럭 안

    (총구를 차 밖으로 향해 내놓고 경계 중인 공수부대원들
    이중사, 도망치는 농부들을 향해 사격을 하고 있다
    '탕' 총소리와 함께 농부 한 명이 고꾸라진다)

    이중사 : "(환호성) 맞았다! (돌아보며 중대원들에게) 봤지? 빨갱이 새끼들은 이렇게 잡는 거다 알겠나?!"

    (일그러진 미소 짓는 이중사,
    다시 총을 겨눈다
    고개 돌려 흘낏 보는 용기
    용기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데
    문일병, 주머니에서 수첩 꺼낸다)

    문일병 : "배하사님 제가 여자친구 사진 보여드렸던가요?"

    (용기에게 사진 보여주는 문일병)

    용기: "(보며 미소)이쁜데."
    문일병 : "(웃으며)그렇죠? 제대하면 결혼할 거 ...."

    (하는데,
    '피 - 슉' 3.5인치 로켓포의 사격음)

    용기: "(반사적으로) 매복이다!!!"

    씬114. 광주 외곽 국도

    (수풀이 우거진 능선에서 날아오는 3.5인치 로켓탄의 하얀 비행운
    정확하게 APC의 중심부를 타격하는 로켓탄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으며 기관총좌에 앉아 있던 기관총 사수가 공 중으로 날아오른다.
    뒤이어 홀수 번째 군용 트럭을 향해 연속적으로 날아드는 로켓탄
    순식간에 콘보이 대열이 흐트러지고 불바다가 되는 국도
    능선에서 날아드는 총탄이 국도에 빗발친다.)

    씬115. 광주 외곽 국도 일각 (용기의 군용 트럭이 있는)

    ('쾅' 로켓탄에 피탄 되는 군용 트럭,
    본네트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좌우로 비척이다 길가 도랑에 처박히는 군용 트럭
    트럭을 향해 빗발치는 총탄
    짐칸에서 뛰어내려 대응 사격하는 공수부대원들
    이중사, 신들린 사람처럼 M16소총을 쏘아댄다
    도랑 아래 웅크린 문일병
    용기 , 허리 낮춰 운전석 쪽으로 다가간다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는 피범벅이 된 운전병과 중대장
    용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중사 : "(용기 에게 고함치는) 배하사 뭐하나 사격 않고!? (문일병 걷어차며) 문일병 이 새끼 너 죽고 싶어?!"

    (콩 볶는 듯한 총소리와 빗발치는 총탄
    용기 , 그제서야 방아쇠를 당기는데
    문일병, 엉금엉금 기어서 트럭 위로 올라가려 한다)

    용기: "(붙잡으며)문일병! 너 미쳤어?!"
    문일병 : "(울먹이며)사, 사진이...."
    용기: "(들리지 않는다)뭐?!"

    (순간 용기 의 눈앞에서 작열하는 총탄)

    용기: "이런 제길!"

    (용기 , M16소총 자동으로 갈기는데
    트럭 위로 기어오르는 문일병,
    짐칸에 떨어져있는 여자친구의 사진 집어들면
    '타타탕' 문일병을 향해 쏟아지는 총탄
    문일병, 여러 발의 총탄 맞고 트럭 밖으로 떨어진다)

    이중사 : "(벌떡 일어나며)야, 이 빨갱이 새끼들아 받아라!!"

    (M16소총 난사하는 이중사
    '쾅' 트럭 너머에서 작열하는 M203의 유탄
    치솟는 화염과 함께 뒤로 넘어가는 이중사
    불길에 휩싸이는 군용 트럭
    용기 , 날아드는 총탄을 피해 몸을 낮추고 대열의 앞쪽으로 뛰어간다
    CA, 용기 를 따라가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처참한 전투의 현장
    하체가 달아나 버린 무전병 옆에서 미친 듯이 무전기 잡고 소리지르는 오 른팔이 잘려 나간 지휘관
    온몸에 불이 붙어 비틀대는 병사
    배가 터져 허연 창자가 삐져 나온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병사
    날아드는 총탄 속에서 피를 흘리며 부상병을 치료하는 위생병
    여기 저기 엎드려 미친 듯이 사격하는 공수부대원들
    구멍이 뻥 뚫린 APC 속에서 불타고 있는 탑승원들의 모습과 비명 그리고 총성들
    용기 , 이성 잃고 일어서서 M16소총 자동으로 난사하는데,
    순간, '피웅' 소리와 함께 용기 의 철모가 획 돌아간다
    풀썩 쓰러지는 용기 )
    (DIS)

    씬116. 광주 외과 국도

    (전투가 종료 된 상황
    여기 저기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국도의 모습
    헬리콥터가 부상자와 사망자를 실어 나르고 있다
    불타버린 트럭 옆에 쓰러져 있는 용기
    발치에서 나뒹구는 총탄이 스친 자국이 선명한 철모
    위생병 다가와 용기 의 뺨 때린다)

    위생병 : "이봐요 정신 좀 차려요! 이봐요!"

    (정신 차리는 용기
    멍하고 흐린 시선으로 위생병 쳐다보면,)

    위생병 : "운이 좋았어요 (철모 들어 보이며) 이 놈 아니었으면 국립묘지로 헬기 타고 가는 건데."

    (용기 의 이마에 붕대 감아 주는 위생병)

    위생병 : "(혼잣말)에이 31사단 보병학교 등신 같은 새끼들! 폭도하고 계엄군도 구별 못하나? 아군끼리 이게 뭐야!"

    (용기 문득 고개 들어보면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 아름답기만 한 해넘이의 모습!
    주르륵 용기 의 볼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

    씬117. 용기 의 병실 (밤/현재)

    (침대 위에 누워있는 용기 ,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창가에 서서 담배 피우고 있던 진배,
    다가와 용기 얼굴 본다)

    진배: "(쥐어박는 시늉)에라 이 병신아 그렇게 술 마실 거면 정신병원에는 뭣하러 입원했냐? "

    (진배 '훅' 하고 허공에 담배연기 뱉는데
    문 벌컥 열리며,
    들어오는 신대리 )

    신대리: "(보고 열 받는)이게 뭐야? 담배연기 아냐?! 병동 안에서는 금연인 거 몰라요? 그리고 그 담배는 어디서 났어요?!"
    진배: "(당황한)어, 신대리 그게 아니라...."

    (신대리 , 진배 손에서 담배 빼앗아 나가면
    진배, 울상이 되어 뒤따라나간다
    텅 빈 병실에 홀로 남은 잠든 용기
    식은 땀을 흘리며 주먹을 불끈 쥐는데)

    씬118. 정신 병원 전경 (아침)

    (날선 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
    민희 , 병원 현관에서 고개 숙인 채 나온다
    눈물 찍으며 총총히 멀어져 가는 민희 )

    씬119. 용기 의 병실

    (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벽에 길게 드리운 사선의 창살 그림자
    맞은편 벽에 기대어 앉은 용기 건너편의 창살 그림자를 멍하니 보고 있다
    용기 의 시점에서; 벽에 드리운 창살의 그림자, 천천히 꿈틀대다 문득 커다란 십자가의 실루엣으로 변하는데
    덮칠 듯 터져 나오는 수류탄의 폭발음과 간헐적인 사격 소리 그리고 욕 설과 고함 소리)

    씬120. 전남도청 복도 (회상)

    (창문 너머의 새벽 푸른빛이 처연하다
    수류탄이 터져 박살이 난 창고 문짝
    좀 떨어져 엎드려 고개 처박고 있는 용기 ,
    철모 살짝 올리고 창고 안 본다
    입구에 흥건한 핏물
    그리고, 부릅 뜬 수용의 눈
    경악하는 용기 그 모습 외면하며 서둘러 일어선다
    용기 바닥의 M16 소총 집으려는데,
    십자가 팬던트가 걸려있는 잘려진 수용의 손이 보인다)

    용기: "(기겁하며)헉......"

    (용기 벽에 기댄 채 고개 돌리고 있는데)

    공수3 : "(소리)야 이거 팬던트 목걸이 아냐?!"

    (공수3 십자가 팬던트 집어 용기 의 목에 걸어준다)

    공수3 : "(용기 어깨 툭 치며)잘 챙겨둬. 다 기념품이니까 응?(일그러진 미소)"

    (용기 떨리는 손으로 팬던트 들어보는데,
    고개 숙인채 끌려나오는 시민군 들
    공수3 개머리판으로 시민군 들 구타한다)

    공수3 : "(걷어차며)고개 숙여!! 고개 숙여!!! 이 씨팔 새끼들아!!"

    (끌려가는 시민군 들 바라보던 용기 비틀대며 계단을 내려간다)

    씬121. 전남도청 주차장

    (도청 진압 작전이 상황 종료된 상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불탄 자동차의 잔해들
    박살이 난 유리 창문과 그 파편들
    벽에 흉측스런 총탄 자국들
    전투화 줄에 엮인 채 줄줄이 끌려 나오는 고개를 숙인 시민군 들의 모습

    바닥에 엎드려 있는 시민군 들을 짓밟고 다니는 공수부대원들
    적국의 패잔병을 다루듯 시민군 들에게 가해지는 구타와 욕설
    벽보와 구호로 얼룩진 도청 현관에서 힘없이 걸어나오는 용기
    목에 걸린 십자가 팬던트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철모를 벗어 들고 총은 땅바닥에 질질 끌고 오는 넋이 나간 듯 보이는 용기 )

    공수4: "(소리/고함치는) 이 개새끼가 되질려고 환장을 했나?!"

    (용기 , 고개 돌리면
    무릎을 꿇은 시민군 2의 머리에 M16 소총을 겨누고 있는 공수부대원4)

    공수4: "(이성 잃은) 야 이 씹새끼야! 빤스 속에 수류탄 감추고 있으면 내가 니 방 울인줄 알 거 같아?! 이런 개새끼!"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시민군 2를 구타하는 공수부대원4
    비명도 못 지르고 고스란히 맞기만 하던 시민군 2 축 늘어지면
    쓰러진 시민군 2의 시신에 한쪽 발을 올려놓는 공수부대원4)

    공수4: "(아무렇지 않게) 사진이나 한 장 박을까. (돌아서 용기 보며) 야 배하사 너 카메라 없냐?"

    (시민군 2의 머리에서 주르르 흘러나오는 검불은 핏물)

    용기: "(경악)!!........."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용기 식은 땀을 흘리며 서있다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떨려 오다 결국에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용기
    공수부대원5 다가와 용기 의 어깨 툭 친다)

    공수5: "야 가방끈 학질이라도 걸렸냐? 왜 이렇게 떨어? 나가자 대대장님이 집합하라는 명령이다."

    씬122. 전남도청 정문 앞

    (썰렁한 유령의 도시 같은 시가지를 질주하는 APC
    도청 정문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긴장한 눈빛의 초병
    그 앞에 3열 횡대로 정렬해 있는 용기 의 대대
    대대장 일장 훈시 중이다)

    대대장: ".... 제군들은 이번 작전의 선봉에 서서 조국을 위해 용맹스럽게 임무를 완수했다. 이번 작전은 아군 피해 없는 아주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자대로 복귀하면 이에 상응하는 포상과 훈장 추서가 있을 것이다. 제군들 수고했다. 이상!"
    선임하사: "(나오며) 대장님께 경롓!"
    일동: "(경례하며) 멸공!!"

    (대대장 경례받고 들어가면, 선임하사 대열의 앞에 가서 선다)

    선임하사: "대대장님 훈시 다들 들었지? 이번 작전에서 선봉에 선 것은 여단에서 우리 대대뿐이다. 자대로 복귀하면 일계급 특진과 포상휴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나는 너희들이 몸 성히 상황이 종료된 게 기쁘다."

    (대열 속의 용기 , 혼란스런 표정으로 목에 걸린 팬던트 만진다)

    선임하사: "전방에 공수 깡다구 1분간 발사!"

    (악에 받힌 함성 지르는 공수부대원들)

    선임하사: "(용기 보고) 이봐 가방끈 뭐하나?! 정신 못 차리지!!"

    (용기 , 문득 수류탄 움켜쥐는데,)

    선임하사: "(일동 보며) 반동 준비!!"

    ('악' 소리와 함께 일제히 주먹 쥔 손을 올리는 공수부대원들)

    선임하사: "반동시작!! 반동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반동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특전부대가. 군가 시작 핫나 둘 셋 넷!"
    일동: "(목이 터져라 부르는) 보아라 장한 모습 검은 베레모. 무쇠 같은 우리와 누 가 맞서랴. 하늘로 뛰어올라 구름을 찬다......."

    (용기 수류탄 움켜쥔 손에 힘이 간다
    광기로 번득이는 용기 의 눈빛
    그러나, ........ 힘없이 내려오는 용기 의 손 .....
    용기 울컥 치밀어 오른다
    신음도 울부짖음도 비명도 아닌 잠기고 쉰 목소리로)

    용기: "(끓어오르는)끄ㅡ으ㅡ으ㅡ으........"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대열 속의 용기
    용기 끝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씬123. 용기 의 병실 안 (현재)

    (창 밖의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용기 ,
    방바닥 들춰 담배꽁초 찾아낸다
    콜록이며 담배꽁초 피워 무는 용기
    용기 창가로 가 창문 열고 담배 깊이 빨아들인다
    한숨처럼 담배 연기 뱉는 용기 ,
    문득 오른 손등에 난 봉합 자국 쓰다듬는데,)

    씬124. 원장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편지 봉투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박원장
    탁자 너머의 진료과장과 사무장 그리고 방간호사
    모두 굳은 표정이다)

    방간호: "지난번에 왔을 때 병원비를 안내고 그냥 갔다면서요?"
    박원장: "(끄덕이며)사무장 생각은 어떤가?"
    사무장: "퇴원시켜야지 별도리가 없습니다. 원장님 저희 병원은 자선기관이 아닙니다."
    진료과: "퇴원을 해도 며칠 여유를 두고 해야 됩니다. 배용기 환자 이제 겨우 쇽 상태에서 회복되었잖습니까."
    방간호: "보호자가 행방불명되어서 갈 곳도 없는 것 같던데요"
    박원장: "(한숨쉬며)난감하군."

    씬125. 휴게실

    (용기 의 부재가 다른 환자들에게 활기를 주는 듯,
    표정이 밝은 정신분열증 환자들
    문열고 힘없이 나오는 용기
    순간 긴장하는 환자들
    진배, 벨트가 떨어져나간 러닝머신에 매달려 있다가,)

    진배: (보고 짐짓 반색하며) 어, 배중사 나와서 걸어다녀도 되? 좀 누워있지 않구... (환자들에게)야, 이 미친 새끼들 저리 못 비켜!"

    (소파에 앉아있는 환자들 밀어내는 진배,
    달려가 용기 부축한다
    빈자리에 용기 앉히는 진배
    용기 , 말없이 앉아 휴게실 둘러본다)

    용기: "(힘없는) 그 여자는......"
    진배: "누구?"

    (하는데,
    출입문 열고 들어오는 조대리
    조대리, 용기 에게 다가와 편지봉투 내민다)

    용기: "(보고)?....."
    조대리: "(굳은 표정)보호자가 며칠 전에 남기고 간 거예요. 읽어보세요."

    (용기 , 편지 꺼내 읽으면)

    민희 : "(소리)용기 씨, 오랜만에 당신 이름을 불러보네요. 우리 대학 다닐 때 이후로 처음인 거 같아요. 기억나세요? 은행나무 잎이 노랗던 가을 캠퍼스의 길들이...."

    씬126. 여관방 (회상)

    (소주를 병째 들이키고 있는 얼룩무늬 군복의 용기
    민희 걱정스런 표정으로 만류하는데
    용기 갑자기 민희 얼굴 때린다
    쓰러진 민희 풀린 눈으로 바라보던 용기 , 민희 덮치는데)

    민희 : "(소리)용기 씨는 언제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했었죠. 그래서 특전사에 지원했었어요. 하지만 1년 뒤에 다시 만난 용기 씨는 너무도 무섭게 변해있었죠. 그리고 우리의 불행이 시작되었어요."

    씬127. 신혼방

    (만삭의 민희 아기옷 보며 미소 짓고 있다
    문 벌컥 열리고,
    중사 계급장을 단 흐트러진 군복의 만취한 용기 들어온다
    다짜고짜 민희의 배를 걷어차는 용기 ,
    고통스러운 듯 바닥을 뒹구는 민희 를 구타한다)

    민희 : "(소리)나는 용기씨의 절망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용기 씨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병적이 되어 갔죠. 내가 임신할 때마다 때려서 세 번이나 유산을 하게 만들기도 했어요."

    씬128. 달리는 시외버스 안 (현재)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는 민희
    민희 울음을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문다)

    민희 : "(소리)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나요? ........ 오늘 당신이 다시 술을 입에 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제는 그 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말았군요. 이렇게 가버리는 저를 미워해 주세요."

    씬129. 휴게실

    (편지 다 읽고 말없이 허공 쳐다보는 용기
    편지지 접는 용기 의 손이 떨린다
    긴장하는 환자들
    진배, 궁금한 표정으로 용기 보는데)

    조대리: "다 읽으셨으면, 그만 옷하고 짐 정리하시죠."

    씬130. 수미의 병실

    (선영 , 수미의 머리 빗겨주고 있다
    수미의 긴 생머리 빗어 뒤로 단정히 묶어주는 선영
    선영 , 수미에게 거울 보여준다)

    선영: "(보며 혼잣말)이쁘게 잘 됐네. (수미 옆에 앉으며) 배중사 그 인간 왜 알콜 중독이 됬는지 모르죠?"
    수미: "(보며)......?"
    선영: "군대 있을 때 광주 사태에 계엄군으로 갔었데요. 그 다음부터...."

    (수미 표정이 굳어지는데,
    문 열고 들어오며 호들갑 떠는 재희)

    재희: "(즐거운)수미씨, 그 인간이 떠난데요. 강제 퇴원당한데요."
    선영: "(보며)누가 퇴원하는데 그렇게 난리니?"
    재희: "배중사요. 그 인간 보호자가 병원비도 안 내고 도망갔데지 뭐예요. 그 인간 천벌 받는 거예요. 안 그래요?"
    수미: "(보며 굳어지는).....!"
    재희: "안 좋아요? 그러지 말구 우리 나가서 그 인간 쫓겨나는 거 구경해요."

    (수미 손 잡아끌고 나가는 재희
    선영 따라나간다)

    씬131. 휴게실

    (출입문 근처에 모여있는 환자들
    문 앞에 서있는 용기
    진배, 보따리 들고 용기 배웅한다)

    진배: "(보따리 건내며) 잘 살아야되 배중사. 재수씨 분명히 돌아올 거야. 꼭 행복 해야되, 남 보란 듯이 술도 끊고 알았지?....."

    (수미, 재희에게 이끌려 병실에서 나온다
    굳은 표정의 수미 손 꼭 잡는 선영
    용기 와 눈이 마주치는 수미
    용기 , 수미의 시선 피한다
    조대리, 출입문 열면,
    고개 숙인 채 병동을 나가는 용기 )

    씬132. 정신 병원 앞 거리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병원에서 나오는 어깨 늘어뜨린 용기
    용기 고개 숙인 채 멀어져간다)

    씬133. 수미의 병실

    (창가에 서있는 수미, 창 밖 내다보는데
    들어오는 조대리)

    조대리: "(다가오며)배중사님이 떠나기 전에 강수미씨한테 그 동안 미안했었다고, 앞으로 팽생 동안 고통스러울 거라고 전해달라고 그러시데요."

    (조대리: 주머니에서 은빛 십자가 팬던트 꺼낸다
    창가에서 돌아서는 수미)

    조대리: "(팬던트 건네며) 그리고 이거 ..... 전해주라고 그러셨는데 .... 군에 있을 때 누가 준 거래요. 자기는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다면서."

    (수미에게 십자가 팬던트 건네는 조대리
    조대리, 나가면
    수미 팬던트 들어 본다
    수류탄의 폭발로 뚜껑이 찌그러져 있는 팬던트)

    수미: "......?......"

    (수미 팬던트 뚜껑 열어보면
    여고시절의 수미의 사진과 중년의 송여사의 사진이 들어있는 팬던트)

    수미: "!!!!......."

    (수미, 울컥 치미는데,
    창문 너머로 하나 둘씩 떨어지는 눈송이가 보인다
    문열고 뛰어들어오는 재희)

    재희: "(호들갑)수미씨 눈와요 첫눈!"

    (창문 너머로 소담스럽게 떨어지는 눈송이
    팬던트 바라보는 수미,
    문 앞에 서서 즐거운 듯 활짝 웃던 재희 의아한 듯 수미 보면
    수미, 돌아서 창 밖을 내다본다
    주르르 수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씬134. 정신 병원 앞 거리

    (온 세상을 하얗게 덮으며 내리는 눈송이
    하얗게 채색된 변두리의 소박한 거리 모습,
    그 위로,)

    수미: "(NA)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던 그날 그가 멀어져 갔던 거리에서 나는 흔적처럼 얼룩진 눈물 자욱을 보았다. 어쩌면 그 역시 내 것 만큼의 아름다운 상처를 마음의 한 귀퉁이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겨울날 그는 자신의 상처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야무진 희망의 씨앗 하나를 세상에 떨어뜨리고 떠났던 것 같다."

    씬135. 지하철 안

    (지하 터널의 어둠이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차창
    그 위에 비추인 고개 숙인 남자의 모습
    CA, 천천히 뒤로 빠지면,
    서서히 드러나는 남자의 얼굴
    책을 읽고 있는 용기 의 모습이다
    양복 정장에 서류가방을 어깨에 멘 전형적인 샐러리맨 차림의 용기
    그러나, 책을 펼쳐든 용기 의 오른 손등에 선명한 봉합자국 흉터
    자막
    '2001년 가을'
    뜨고
    계속되는,)

    수미: "(NA)자신도 고통스런 절망의 끄트머리에 서있었으면서 끝 모를 추락의 어둠 속에서 나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먼저 내밀었었던 남자, 그날 그가 건냈던 선물은 절망에 길들여진 나를 밝게 비춰 주었고 비로소 길었던 내 절망은 끝이 났다. 그 동안 긴 세월이 흘렀고 나는 시인이 되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도 가끔씩 생목처럼 치밀어 오르는 그날의 기억들..... 이제 그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진정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한숨 내쉬며 책을 덮는 용기
    '시인 강수미 고백록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
    이라는 제목과 미소 짓고 있는 수미의 얼굴이 담겨있는 책의 표지
    용기 한 동안 들여다보는데
    휴대폰 벨 소리
    용기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 꺼낸다)

    용기: "(휴대폰 받는) 네, 배용깁니다 (사이) 당신이야? 응? (사이) 지금 퇴근해서 단주모임에 가는 중이야 (사이) 철이는 공부 하나? (사이) 허허 그 녀석 제법인데 (사이) 알았어 너무 걱정마. 끊는다."

    (휴대폰 끊는 용기 ,
    문득 휴대폰 폴립 바라보면
    활짝 웃고 있는 민희와 어린 아들의 얼굴이 찍힌 스티커 사진
    용기 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CA,지하철 차창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길게 F.O.......)

    씬136. 에필로그 (흑백)

    (화면 천천히 F.I 되면,
    '씬65'의 전기 충격 치료가 끝난 직후,
    92년 겨울의 정신병원 수미의 병실이다
    문열고 들어오는 방간호사
    그 뒤를 신대리 수미 업고 들어온다
    침대에 수미를 눕히는 신대리
    방간호사 수미에게 담요 덮어준다)

    방간호: "(신대리에게)이제 그만 나가죠?"
    신대리: "(땀 닦으며 혼잣말)전기 치료가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두 사람 나가면
    병실에 홀로 남은 수미
    마취상태로 깊은 잠에 빠져있다
    DIS
    창문 너머에 가득한 어둠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수미
    병실 문 살며시 열고 들어오는 용기 ,
    조심스럽게 수미의 침대 곁으로 다가간다
    침대 곁에 앉아 수미의 손 살며시 잡는 용기 )

    용기: "(나지막이 혼잣말하듯) 수미씨......."

    (수미 눈 떠보지만
    마취의 기운으로 흐릿한 수미의 눈동자
    꿈을 꾸듯 몽롱한 시선으로 용기 바라보는 수미)

    수미: "(미소) 오빠 ......."

    (순간 멈칫하며 당황하는 용기 ,
    그러나, 수미의 눈가에 촉촉한 물기 보고 손을 꼭 잡는다)

    용기: "많이 아팠죠?"
    수미: "아녀 마취해서 아프지 않았어."
    용기 "미안해요 나 때문에......"

    (용기 울컥 치민다
    터지려는 울음을 꾹 참는 용기
    용기 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수미: "울지 말어 오빠."
    용기: "그때 내가 지켜주었어야 했는데...."
    수미: "오빠 있는 곳 많이 춥제?"

    (용기 고개 저으며 눈물 닦는다
    수미의 손 꼭 잡는 용기 )

    용기: "수미씨 살아야 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 해요. 이 깊은 절망을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남는 게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에요."

    (용기 수미 바라보면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버린 수미
    용기 수미의 얼굴 보며 한숨 내쉰다
    일어나 나가려던 용기 , 문득 주머니에서 때가 뭍은 싸인펜 꺼낸다
    맞은편 벽에 또박또박 글귀를 적어나가는 용기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 가는 것이다!'

    휴게실 철문 여는 소리와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황급히 병실을 나가는 용기

    DIS

    오전이다
    수미 잠 깨어 일어난다
    병실 안을 둘러보다 맞은편 벽에 시선이 멈추는 수미
    빛 바랜 낡은 벽지 위에 용기 가 써놓은 글귀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한동안 글귀 바라보는 수미
    CA, 천천히 글귀 잡으면 화면에 가득 찬 글귀
    그 위로 앤드 마크 뜨며.........)

    - 끝 -
    나웅권

    나웅권

    1969년 경기 부천 출생

    1988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97년 영상작가교육원 기초과정 수료

  • 1992년 겨울.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서울 변두리의 작은 정신병원에 정신분열증 환자 수미가 입원한다. 병실 안에서 배중사로 통하는 용기는 그날 저녁 수미를 성추행 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만다. 용기의 성추행 사건은 병원 측에 의해 은폐되고 수미는 난폭한 환자로 간주된다.

    며칠 후, 용기의 아내 민희가 면회를 온다. 민희는 용기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고 용기는 어렵게 뒤늦은 주치의 면담에 응한다. 병원장과의 면담에서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되었었다고 고백하는 용기.

    한편 수미는 자신을 비웃는 남자 환자와 시비 끝에 싸우고 만다. 다음날부터 식사와 투약을 거부하는 수미. 며칠 후 수미의 어머니 송여사가 병원을 찾아오고, 보호자 면담에서 수미가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들에게 윤간을 당했었다고 털어놓는다. 그 사실은 용기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용기는 광주항쟁 당시 중대원들이 여고생을 윤간한 사건을 떠올린다.

    한편 약물에 반응이 없는 수미에게 전기 충격 요법이 실시되고 수미는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광주항쟁 당시 실종되었던 오빠를 보는 환상을 경험한다. 다음날부터 식사를 시작하는 수미. 진료과장과의 면담이후 차츰 안정되어 가던 수미는 환자들의 병동회식이 있던 날 밤 용기가 부르는 군가 소리를 듣고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용기가 자신을 윤간한 계엄군 중 하나라는 망상에 빠져 의료진 몰래 약을 토하는 수미. 복수의 순간을 기다리던 수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병원에 자원봉사 이발사가 찾아온 것, 수미는 광기에 휩싸여 이발사가 자리를 뜨는 순간 용기에게 이발 가위를 휘두르고 용기는 손등에 상처를 입는다. 다시 한번 광주항쟁의 끔찍했던 만행을 떠올리는 용기.

    그러던 어느 날 간 검사를 위해 종합병원에 다녀오던 용기는 간호사의 눈을 피해 거리의 구멍가게에서 팩소주를 훔친다. 그날 저녁 몰래 소주를 마시던 용기는 쇼크로 혼수 상태에 빠지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간의 오인 전투로 산화해간 전우들을 회상한다.

    며칠 후 쇼크에서 회복된 용기에게 민희의 편지가 배달된다. 용기를 포기하려는 민희는 편지 한 통만을 남기고 종적을 감춘다. 병원에서 강제 퇴원 당하고 마는 용기. 수미는 떠나는 용기를 보며 쾌감과 안쓰러움이 교차한다. 그리고 간호사의 입을 통해 '평생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용기의 마지막 말을 전해 듣는다. 용기가 떠난 거리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수미.

    그렇게 용기가 떠난 병원 앞 거리에 소담스런 첫눈이 흩날리는데......
    나웅권

    나웅권

    1969년 경기 부천 출생

    1988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97년 영상작가교육원 기초과정 수료

  • 김홍준(영화감독·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조교수)

    우선 80 여 편의 응모작을 훑은 다음 처음 받았던 인상은 작년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금년의 응모작은 대체로 고른 수준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시나리오가 나름대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모양새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 지니고 있었다 고나 할까, 적어도 시나리오라는 장르를 만만히 보고 '무작정' 덤벼드는 일이 없어질 만큼 저변이 튼튼해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 한편으로, 기존 영화의 답습이나 모방, 또는 이른바 '팔리는' 시나리오를 지향한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이 심사의 목표는 한 편의 뛰어난 시나리오, 또는 한 사람의 유망한 작가를 찾는 것이겠지만, 예심에서는 그러한 목표보다는, 일정한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맞는 장점을 지닌 작품들을 일단 끌어안아 본다는 기분으로 심사에 임했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전제로 하고 기준들을 밝히자면 독창성, 진정성, 다양성이라는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다. 독창성은 얼마나 자기 목소리를 꾸밈없이 내고 있느냐는 뜻일 것이며, 진정성이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시나리오에 담아내고 있는지를, 그리고 다양성은 이러한 시나리오가 지금, 여기에서의 한국영화의 맥락에서 다양성의 일부분으로서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헤아림이다.

    그렇게 해서 추린 작품이 여섯 편이었는데, 이 작품들 모두가 더 다듬어서 영화로 만들었을 때 위의 조건들을 어느 정도 골고루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군계일학'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었고, 고민 끝에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는데 만족하기로 했다.

    80년 5월 광주의 상처를 지닌 남녀가 서로의 인연을 알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역시, 알지 못한 채 서로를 구원한다는 이야기. 이쯤에서 이미 더 이상 이 글을 읽을 흥미를 잃을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진부함, 상투성, 시대착오… 등의 단어가 아른거릴 것이다. 시납시스를 읽어 내려가던 나 또한 그러했으니까.

    그렇지만 시나리오를 다 읽은 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한 '혐의'를 철회하였다. 그것은 지뢰밭과도 같은 소재와 등장인물의 미로를 작가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더듬어 가는데 성공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진부함과 상투성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했더라도, 영화라는 장르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새로운 느낌으로 마무리지은 것은 작지 않은 성취라고 생각한다. 정신병원 생활과 5월 광주의 상황을 묘사한 부분에서 꼼꼼하게 다리 품을 판 취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 시나리오의 힘은 많은 부분 그쪽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전망의 제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처받은 삶이 복원되는 과정이 좀더 섬세하게 그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치명적인 결함은 아닐지라도, 어색한 제목과 후일담 형식의 에필로그에는 수긍할 수 없었음 또한 밝힌다.
  • 나웅권

    나웅권

    1969년 경기 부천 출생

    1988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97년 영상작가교육원 기초과정 수료

    무던히도 내게 상처를 많이 주었던 작품이다. 확신을 가지고 초고를 탈고했을 때,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선되리라는 믿음을 무참히 짓밟았던 낙선의 순간들, 그때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재고에 삼고 그리고 사고….

    반나절에 한 갑이 넘는 담배를 피우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작품을 수정해 가면서 나는 어느덧 시나리오 속의 주인공들과 하나가 되어 갔다. 그들의 절망에 나의 지난 아픔을 입히고 그들이 화해하고 희망의 푸른빛을 볼 때 나도 함께 웃으며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에게도 절망의 다른 이름이 희망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오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당선 연락을 받고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다시 읽어보니 덜렁대며 서두르다 미처 보지 못한 단점과 실수들이 눈에 들어와 얼굴이 달아오른다. 습작시절의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기쁨에 겨워 춤이라도 추어야 할텐데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상의 반복 속에서 원고를 쓰다보니 부족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제일 걱정인 것이 정신병원 부분인데 '영화적 상상력으로 작품을 풍성하게 만들라'며 격려해주셨던 어느 정신과 선생님의 말씀만 믿고 무명습작의 용감무쌍한 무지로 써내려 갔음을 밝혀둔다. 혹시라도 관련 계통의 분들이 보시고 진노하지 않으시기를 바랄 뿐이다.

    부족하고 미흡한 작품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성직의 다름 아님을 일깨워 주셨던 영상작가교육원 이진모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낙선할 때마다 벌어졌던 내 심술을 묵묵히 참아주었던 가족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다시 한번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고 죽는 그날까지 오직 이 한길만을 갈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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