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게 달라진 건 없는 듯하다, 홍상수의 네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의 경우.
2. <생활의 발견>은 전작들 중에서도 특히, <오! 수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오! 수정>이, 기억의 문제를 통해 일상의 파열과 주체의 균열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 리얼리티의 지층을 탐구하는 고고학적 시선은, '모방'의 문제로 옮겨간다.
3. 홍상수는 <오! 수정>이후, 모더니즘적 진지함 대신 그로테스크한 유희를 택한 듯하다, 가볍고 경쾌하게 잔인해지는. 영화는 여전히, '유럽 모더니즘' 영화의 외양, 그러니까 로드 무비적 설정이라든가 우연에 대한 관심, 이야기성의 약화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것은 어떤, 포스트모던적 공허다.
4. 스타일의 일관성은 이번에도, 변함 없이, 관철된다 : 고정 숏의 통일성 속에서, 게으르게 목을 돌리는 듯한 패닝 숏, 높이 자체를 바라보는 듯한 부감 숏, 무심하기 짝이 없는 롱 숏. 에피소드2에서, 경수가 성우와 함께 오솔길을 올라가는 씬은, 영화전체 스타일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창문처럼 떠 있고, 시계권으로 들어온 인물들을 따라 미풍에 흔들린 듯, 패닝하지만 결코, 그들을 끝까지 쫓아가진 않는다. 카메라가 포착한 건, 대상의 흔적이거나 인물이 아닌 것과의 차이였고, 카메라를 움직인 건 '바람 같은 것'이었다, 결코, 목표물을 쫓는 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인간의 눈과 달리 취사선택하지 않는 카메라는, 시선의 초점을 분산시키는 화면을, 창출한다. 그래서, 반미학적 무기화면에 '미학적으로' 재현되는 건, 일상의 고엔트로피 상태, 그 자체다.
5. 중심부재의 미쟝센, 확산된 내러티브가 일으키는 효과는, 우리를 질서에 대한 강박증 환자로 만든다. 우리는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영화가 진행되는 방향을 따라 가면서도 수시로, 그 반대방향으로, 역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처럼 둔한 사람은 영화를 두 번 봐야, 동시대성의 구조가 두 여자의 편지에서 같은 문장을 기술하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나처럼 둔한 사람은 두 번을 봐도, 춘천 오리배에서 만난 인간이 선영의 남편인지 아닌지는 절대로, 모른다. 내러티브로 환원 불가능한 잉여들, 그리고 맥거핀들로 인해, 우리는 망각과 불필요한 기억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그 결과, 의미는 계속 '미끄러지고', '엎질러진다'.
6. <생활의 발견>에서, 모방의 차원은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 문장(:말)에서, 몸(:행동), 세계(:설화, 내러티브)로. 그런데, 당나라 때의 내러티브가 21세기 경주에서 반복된다는 것은, 이 영화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홍상수는 역사를 공간화하면서 기원의 문제를 괄호치고, 패턴들의 모방, 조합만 반복되는 세계를 암시한다. 에피소드7의 '세존보살'은, 모방의 전단계를 재연하는, '살아있는 구조'다 ; 몸에 칼댈 일이 있다는 식의 상투적인 신화소들이 조합되면서, 경수라는 신화, 경수라는 텍스트가 구성된다. 무당의 말, 무당의 행동, 무당의 내러티브는,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7. 모방의 모티프가 전경화 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적 장치'를 통해서다. 영화는 일곱 개의 에피소드로 분절되고,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서브타이틀 자막이 붙어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의 분절은 대단히, 자의적이다. 그 인위적 특이점들 때문에, 기억의 착란, 관심대상의 혼란, 시간의 비균질적 흐름과 같은 효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아무래도, '경수가 회전문의 뱀을 떠올리다'란 문장을 삽입하기 위해 선택된, 형식으로 보인다. 그 문장이 결정적으로 플래시 백 효과를 일으키면서, 마지막 순간, 테마를 전경화하는 것이다. 이건 역으로, 플롯 상에서 테마가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외삽이 필요했다고 하는, 반증일 수도 있다.
8. 지라르에 의하면, 욕망은 언제나 중개된, 모방된 욕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자신의 독창성을 주장할 때, 지라르는 그것을, '낭만적 거짓'이라 불렀다, '소설적 진실'에 대비하여. <생활의 발견>은 그런, 낭만적 거짓의 태도에 메스를, 갖다 댄다. 그러나, 차이를 지우는 모방이 폭력적인 아노미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지라르적 숙명으로 나아가는 대신, 선험적인 모방의 구조에 천착하면서, 주체 자체를 문제삼는다. 그 결과, 희극적 비극이 탄생한다.
9. <생활의 발견>의 라스트 씬 : 약간 낮은 카메라에 포착된 대문은, 통과할 수 없는 문, 문이 아닌 벽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지배하는 건 반복되는 내러티브다. 이 벽이 문이 되려면, 회전문 내러티브가 아닌 새로운 내러티브가 필요한데, 그건 불가능하다, 새로운 에피스테메가 주어지지 않는 한. 경수는 결국, 뱀의 패러디가 된다. 그는 회전문 내러티브적 주체가 됨으로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서사적 차원으로 통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모방되는 삶을 통해 존재론적 안정감을 획득하고, 반복되는 패턴을 통해 정체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구조의 감옥에 감금된다. 패러디로서의 주체, 그것은 결국, 주체성으로부터 소외된 주체, 파열된 주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안은 없다. 경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서고, 빗줄기가 쇠창살처럼 내려꽂힐 뿐이다.
0. 혹은, 10.
그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조하형
본명 조윤형
1970년 부산 출생
1996년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중퇴
조하형
본명 조윤형
1970년 부산 출생
1996년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중퇴
감기 몸살로 몸이 결딴나 있는데, 세계 저편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그 전화 때문에 지금, '희한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다. 뭐라고, 쓸 것인가. 머릿속이 반은 녹아버린 것 같은데 뭐라고, 쓸 것인가. 이런 장르의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쓴 글은 사실 니체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출발했고, 거기서 끝났다.
"상처 내부에도 치유력은 있는 법…… 다음의 격언은 오랫동안 내 좌우명이었는데, 나는 이 격언의 출처를 식자적 호기심에는 알려주지 않았다 :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솟는다." ('우상의 황혼', 서문 중에서) 나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내 글이 선택될 확률은, 전국에서 나 혼자 투고했을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쓰고 싶은 대로 썼다, 오직, 뭔가를 간절히 쓰고 싶었기 때문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도, 있는 법이므로. 그러고 나서, 뭔가를 썼다는 사실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심한 감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세계 저편까지 몸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기쁨이었고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했다.
나도, 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에 관해 떠들기는, 쉽다. 정말로 어려운 건,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건, 이거다 :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에 관한 것이,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에 접근하는 것, 극한까지.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