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비틀즈의 다섯번째 멤버

by  김나정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 멍멍아, 머엉멍아 "

    예닐곱 살 아이가 동무를 불러내 듯 사내의 목소리는 한껏 다정했다. 그러나 개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사내는 어기적어기적 개집 쪽으로 더 바짝 다가갔다. 나무판자를 스치는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줄 끝을 더 바짝 잡아당기자 개집 속에 웅크린 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사내는 욕설과 함께 두 팔을 개집 안에 밀어 넣었다.

    사내의 비명 소리는 요란했으나 늙은 개의 이빨은 사내의 팔에 박히지 못하고 상채기만 냈을 뿐이다.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 배어 나오는 피를 본 사내는 소녀에게 당장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냉면 그릇에 담긴 뜨거운 물을 개집 안으로 끼얹자 개는 신음소리를 내며 개집 밖으로 튀어나왔다. 부글부글했던 털이 몸통에 흠뻑 달라붙자, 개는 형편없이 작아 보였다. 사내는 낑낑거리며 개집 앞을 빙빙 돌고 있는 개를 잡아 자루 안에 쑤셔 넣었다. 자루 밖으로, 온몸을 뒤틀어대는 개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대문이 닫히고 점점 개 짖는 소리가 멀어졌다. 소녀는 냉면 그릇이 뒤집어져 놓여 있는 개집 앞에 주어 앉는다. 이제 텅 빈 개집 안에는 개털이 군데군데 묻은 낡은 담요와 찌그러진 알루미늄 밥그릇만 남아 있다.

    비닐봉지를 뒤집자 감자 몇 알이 굴러 나왔다. 소녀는 과도를 치마에 문질러 닦고 감자에 난 싹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싹이 도려내진 자리에 감자의 하얗고 물기 많은 속살이 드러났다. 연두 빛 감자 싹은 신문지 위로 떨어지고 그 밑으로 얼굴이 검은 여자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사진 위로 떨어진 감자 껍질을 걷어내고 소녀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뒤에 무너진 집이 있다. 지붕은 날아갔는지 무너져 내렸는지 보이지 않고, 벽 한 장과 큰 창틀만 달랑 남아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왼쪽 뺨과 턱에는 피 같은 것이 묻어 있다. 여자의 품에 안긴 아이는 정수리만 보여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진 아래 분명히 무언가 쓰여 있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녀는 여자와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도리가 없다.

    사진 찍히는 순간 무슨 말을 했는지 여자의 입은 크게 벌어져 있다. 흑백 사진 속 여자의 입안은 컴컴했다. 소녀는 들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여자의 입 속을 들여다보았다. 흙덩이가 사진 위로 점점이 떨어졌다. 감자는 깎여 나가고 동그랗게 말린 감자 껍질 밑으로 여자와 아이의 모습은 사라져갔다.

    이빨이 부실한 개는 삶은 감자를 으깨주면 알루미늄 그릇에 광이 날 정도로 싹싹 핥아먹곤 했다. 개천가에서 금수장 사내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친구들은 자루 속의 개를 각목으로 후려쳤을 것이다. 자루에 핏자국이 배어들고, 개의 신음 소리는 점점 잦아 들어가고, 개천가로 산책을 나온 부모들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안간힘을 쓸 것이다.

    천장 쪽에서 틉틉 소리가 들려왔다. 깍은 감자를 봉지에 넣던 소녀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방 한 마리가 천장에 달린 등에 제 몸을 부딪치고 있다. 나방의 날개 짓에 따라 방안을 비추는 불빛이 어지러워졌다.

    날개 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장님이 돼.

    주인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마당에 떨어진 나방을 신발로 문질러댔었다. 사내가 발을 떼어내자 뭉개진 나방의 잔해가 드러났다. 제 몸에서 나온 진물 위에 누운 나방은 찢겨진 한 쪽 날개를 간혹 펄럭댔다. 사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소녀는 마당에 놓인 돌을 가져다 나방 위에 올려놓았었다. 나방의 날개가루가 들어가면 눈이 멀어. 소녀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잠에서 덜 깬 소녀는 시계부터 올려다보았다. 새벽 3시. 창문이 한번 더 떨렸다. 현관방에 달린 작은 창문을 밀자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여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일행이 있냐는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창문 밖으로 숙박부와 볼펜을 내밀었다.

    여자가 내민 지폐를 금고에 넣고, 소녀는 물병과 수건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촉수가 낮은 등이 켜진 복도로 나섰다. 더듬더듬 소녀의 뒤를 따라가는 여자의 발소리에 물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묻어났다.

    복도에 줄 지어 서 있던 난 화분 하나가 엎질러졌다. 여자는 기타 케이스를 든 채 소녀와 난 화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붉은 양탄자 위에 가벼운 돌들이 흩어져 있고, 난의 길쭉한 이파리들은 화분 밑에 삐져나와 있다. 이층 복도에 줄지어 선 난초들은 물을 주어도 잎 끝부터 말라 비틀어졌다. 플라스틱 화분을 세우고 돌들을 쓸어 담는 여자를 내버려 두고 소녀는 이층 끝 방의 문을 열었다.

    손님을 받지 않은 2층 끝 방의 문을 열자 퀘퀘한 냄새가 밀려나왔다. 어느 구석에서 죽은 쥐가 썩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내가 놓은 쥐약을 먹은 쥐들은 여인숙 구석구석에서 몰래 죽어갔다. 쓰레받기로 몇 번이나 쓸어 담아 버려도, 쥐들은 끈덕지게 피를 토하며 어디선가 기어 나왔다.

    방으로 들어온 여자는 들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침대 위에 놓고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자 방안으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푸른 모기장이 쳐진 창 밖으로 공장과 배의 굴뚝 끝에 달린 붉은 등이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창 밖을 내다본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허리선까지 내려와 있다.

    탁자 위에 생수병과 타월이 놓인 쟁반을 올려놓자, 여자는 소녀에게 난초 값을 묻더니,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빼내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는 받은 지폐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자 복도 밖까지 흘러나왔던 여자의 긴 그림자는 잘려나갔다.

    현관방으로 돌아온 소녀는 낡은 장롱 문을 열고 이불 밑에 파묻혀 있는 스타킹 상자를 꺼냈다. 외항선 선원들이 준 이국의 동전들이 몸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주위를 힐끗거리며 소녀는 상자 안의 지폐를 세 본다. 지폐의 끝에 침이 묻어났다. 앞장부터 세보고 뒷장부터 다시 세보고,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하며 오천 원을 더했다 빼본다.

    골목길을 빠져나가 큰 길 정류장에서 162번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면 여객 터미널이다. 편도행 티켓 가격은 11만원이다. 대합실 매점에서 선물을 사고, 안개가 끼지 않기를 바라며 자판기에서 따뜻한 밀크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셔도 좋을 것이다.

    불을 끄고 눈을 감자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기타 소리는 소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고 누운 소녀의 몸이 천천히 방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배에서 내리면 머리를 길게 기르고, 누군가와 사랑을 할 것이다. 그래, 그에게 기타를 쳐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특산물도 없는 이 항구 도시는 언젠가 영영 잊혀질 것이다.

    사내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에서 소주병과 더불어 쓰러져 있을 것이고 오후 나 되어야 여인숙으로 돌아올 것이다. 칫솔질을 하자 구역질이 났다. 소녀는 방안으로 기어 들어와 찐 감자를 입에 우겨 넣었다. 감자를 씹으며 소녀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랐다.

    벽에는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해변에 누워 있는 달력이 걸려 있다. 손에 알록달록한 우산이 꽂힌 컵이 쥐고 비키니 차림의 여자는 달력 밖의 누군가를 향해 한 달 내내 미소를 지을 것이다. 감자덩이가 목구멍을 넘어갔다. 달력 속 여자의 웃는 얼굴 위에는 모기 한 마리가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다. 죽은 모기의 다리들이 낱낱이 떨어져 나와 여자의 얼굴에 붙어 있다. 모기의 몸 밖으로 튀어나온 핏방울은 이제 검붉게 변해 있다.

    맨 정신의 사내는 절대 소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술에 취한 그는 키득거리며 소녀를 범했다. 세 달 전부터 생리가 나오지 않는다. 배는 점점 불러올 것이고 사내는 금고에서 꺼낸 돈을 주머니에 꾸겨 넣고 소녀를 시장 골목에 있는 돌팔이 의사에게 데려갈 것이다. 끄집어낸 태아는 한 개 당 20만원에 한약방으로 팔려나간다고 했다.

    소녀는 컵을 든 채 달력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머리를 풀어헤친 반나의 여자들이 한 명 씩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눈이 내리고 다시 봄이 온다. 바다 건너 도시에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아이의 엄마에게는 아이의 운명이 적힌 노란 종이를 준다. 소녀는 배를 가만히 쓸어 내려보았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에 귀를 갖다 대자, 큰 배가 멀리로 떠나는지 긴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에서 204호 열쇠를 골라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벽에 걸린 여자의 원피스 자락을 흔들고 있다. 물걸레와 빗자루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녀는 침대 옆 탁자로 다가갔다. 휴지통은 텅 비어 있다. 전등 아래 놓인 지갑이 보였다. 복도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을 삼키며 지갑을 열었다. 소녀는 재빨리 오천원 짜리 한 장과 만 원짜리 한 장을 끄집어 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여전히 복도 쪽은 고요했다. 소녀는 지갑을 이리저리 뒤져본다. 신용 카드 두 장과 주민 등록증이 꽂혀 있었다. 소녀가 주민 등록증을 빼내자 그 뒤에 꽂혀 있던 종이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문지에서 오려낸 사진이었다. 오래낸 지 꽤 오래되었는지 종이 조각의 네 귀퉁이는 나달나달해져 있다. 소녀는 슬쩍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피아노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피아노는 검은 색이고, 소녀의 땋아 내린 머리카락 끝에는 터무니없이 큰 리본이 달려 있다. 어둠 속에서 본 여자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너무 늙었거나 주민등록증이 없는 여자들만 여인숙을 들락거렸다. 주민등록증 사진 속의 여자는 단발머리다. 소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주민등록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갑에 신문지 조각을 밀어 넣고 소녀는 침대 위에 놓인 기타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자줏빛 비로드로 안감을 댄 케이스 속에 짙은 밤색의 기타가 누워 있다. 소녀는 침대 위에 안장 검지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튕겨 보았다. 가볍고도 텁텁한 소리가 났다.

    목욕을 하다가 나왔는지 여자는 알몸이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졌다. 여자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배에는 길게 흉터 자국이 나 있고, 소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서둘러 기타 케이스의 뚜껑을 덮다가 소녀의 손이 뚜껑 사이에 끼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소녀는 피 맺힌 손가락을 입 속에 넣었다. 여자는 소녀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 들여다보았다. 괜찮으냐고 묻는 여자의 목소리는 감기에 걸렸는지 약간 쉬어 있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소녀의 치마 위로 점점이 적셨다.

    소녀는 입을 틀어막더니 여자가 나온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습기를 먹어 뒤틀어진 나무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변기 뚜껑이 열고 소녀는 먹은 것을 게워냈다. 시큼한 냄새가 났다. 변기 속에 허옇게 거품이 일어난 감자 덩어리가 떠올랐다. 배를 그러잡은 채 물 고리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덜컥덜컥 소리만 났다. 소녀는 욕조에서 물을 퍼 변기 속에 들이부었다. 여자는 목욕을 하다가 잠이 든 모양이다. 욕조 안의 물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다. 물을 몇 번이나 들이부어도 토사물은 흩어지기만 하고, 정화조 속으로 끌려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옷을 걸치고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여자는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으냐고 묻자 소녀는 머뭇거렸다. 지갑은 전등 아래 얌전히 놓여 있다. 소녀는 손등으로 입가의 물기를 문질렀다.

    여자의 시선이 소녀의 아래 배에 잠시 멈췄다. 여자는 다시 한번 소녀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소녀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여자에게 비키라는 시늉을 하며 시트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탁자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소녀의 나이를 물었다. 소녀는 걷어낸 시트를 뭉쳐 복도 쪽으로 던졌다. 하루 더 묵을 거냐고 묻자 여자는 그렇다고 했다. 숙박비는 선불이라고 하자 여자는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내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현관방으로 들어간 소녀는 주머니에서 꺼낸 돈과 주민등록증을 스타킹 상자 속에 넣었다. 상자 안에는 모두 세 개의 주민 등록증이 들어있다. 마흔 두 살, 서른여덟 살, 서른 두 살의 여자들이 여인숙에서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다. 살집이 많고 눈썹이 옅은 여자, 쌍꺼풀이 없고 살결이 흰 여자, 두툼한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바른 긴 파마머리 여자. 소녀는 다시 한번 스물아홉 살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여자는 실제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였다. 소녀는 거울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사진 속의 여자처럼 입을 꾹 악물어 보았다.

    저는 1974년 항구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지요. 하지만 이런 제 처지를 비관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돌봐주어야 할 아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식당일은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취미는 기타입니다. 한때 피아노를 치기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지요.

    발가락 사이로 비누방울이 부풀어 올랐다. 소녀는 물에 젖은 시트를 밟아댔다. 여자의 빠진 머리카락이 한두 가닥씩 엉겨 물 위로 떠올랐다.

    " 손님은 나 혼자니 " 여자는 개집 앞의 판판한 돌 위에 앉아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여자의 발아래에 기타 케이스가 놓여져 있다. 소녀는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다시 빨래를 밞아대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런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주민등록증, 필요하니 " 소녀는 가만히 빨래통 속에 서 있다. 여자는 양말을 벗어 돌 위에 올려놓더니 빨래 통 속으로 들어왔다. 빨래를 밟는 여자의 발등위로 나무뿌리처럼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 필요하면 가져 " 몇 명의 사람들이 철책에 몸을 걸치고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다. 갈매기 몇 마리가 철책 근처를 낮게 날아다녔다. 갈매기는 새우깡이 바다에 떨어지기도 전에 잽싸게 낚아채갔다.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새우깡을 주워들고 바다를 향해 던졌다. 여자는 입을 꼭 다문 채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날이 흐려서 바다 건너의 섬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난간 앞에 앉아 기타 케이스를 열었다. 소녀가 여자 곁에 쪼그리고 앉고, 몇 명의 사람들이 여자 앞에 모여들었다. 여자는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사랑하는 클레멘타인. 늙은 애비 홀로 두고 "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여자의 노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 소리가 efeff들려왔고, 서 있던 여자 한 명이 기타 케이스에 동전을 던져 넣고 남자의 팔을 끼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갔다. 기타를 치던 여자는 일어나 동전을 주워들고 몰려 선 사람들을 헤치고 나갔다. 돌아온 여자는 동전을 소녀에게 주고 기타 케이스를 덮었다. 몰려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소녀는 여자의 뒤를 따라가며 주머니 안의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밤새 술을 마셨는지 사내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마당에는 그의 친구 몇이 소주병을 들고 서 있다. 사내는 안주거리를 준비하라고 말한 후 친구들과 1층 끝 방으로 향했다. 현관방 앞에 어제 사내가 메고 나갔던 자루가 놓여 있다. 텅 빈 자루에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다.

    부엌으로 들어온 소녀는 냉동실을 열어 동태를 꺼냈다. 누런 종이에 쌓인 동태 두 마리의 몸은 서로 엉겨 붙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소녀는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냄비에 물을 붓고 종이를 대충 뜯어낸 후 동태를 통 채로 담가 놓았다. 물 속에서 누런 종이 조각이 수초처럼 흔들거렸다. 소녀는 야채 칸에서 무와 쑥갓을 꺼냈다.

    몸이 떨어져 나간 동태의 살은 흐물흐물하고 한번 냉동되었던 눈알은 충혈되어 있다. 식칼로 동태의 몸을 동강내자 나무 도마위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소녀는 식칼을 세워 지느러미를 발라내고, 물 속에 살덩어리를 던져 넣었다.

    동태찌개 냄비를 내려놓은 소녀에게 사내의 친구들은 앉아 광이나 팔라고 했다. 쟁반을 든 소녀는 사내 쪽을 바라본다. 주인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는 화투패만 들여다 보고 있다. 구멍가게 이씨는 제 옆자리를 내주며 " 그럼, 그럼 용돈 벌이라도 해야지. 니네 주인 아저씨가 어디 용돈이나 제대로 주겠냐." 능청을 뗀다.

    패를 떼던 주인 사내는 카 센타 황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하긴 주워다 밥 먹여 주고 재워주는 게 어디야." 소녀는 냄비에 동태찌게를 담아 이층으로 향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여자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몇 번 더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문 안에서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뱃고동 소리에 가려 확실하지 않았다. 소녀는 냄비에 든 동태찌게를 들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여자의 자기 이름이 '황은경'이라고 했다. 여자는 바다 건너 섬에 부모가 산다고 했다. 여인숙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여자는 소녀에게 비틀즈 이야기를 해주었다.

    " 비틀즈는 원래 멤버가 다섯 명이었어. 비틀즈가 누구냐고 ? 영국의 유명한 그룹이야. 정말 모르니? " 여자는 무릎을 두드리며 소녀에게 노래 한 소절을 들려주었다. 승객은 소녀와 여자 밖에 없었다.

    " 그 다섯 번 째 멤버는 비틀즈가 유명해지기 바로 전에 죽었어. 사랑 때문에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확실히 밝혀진 건 아무 것도 없어. 여하간 중요한 것은 그가 무명으로 자기가 나고 자란 바닷가 도시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거야 " 방으로 돌아온 소녀는 밥과 동태찌게를 먹으며 TV를 보았다. 화면 속의 벤치에 앉아 있는 여자와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포개진다. 천천히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진지하게 그들은 입을 맞추고 있다. 무릎 위에 놓인 여자의 손이 가만히 움직인다.

    매주 수요일, 목요일 밤 10시에 하는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소녀는 언젠가 그 사실을 눈치 챈 여자가 어떻게 할지가 궁금했다. 남자의 뺨을 때릴까, 치밀하게 계획을 짜 남자에게 복수를 할까. 아니면 기차를 타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릴까. 소녀는 입안에 든 가시를 쟁반에 뱉어 놓았다.

    한 사내가 중국에서 오는 보따리 상을 만나러 여객 터미널에 간다. -보따리 상에게 뭔가 받기로 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 넘도록 상대방은 나타나지 않는다. 누가 버리고 간 스포츠 신문의 낱말 풀이까지 다 채워놓고 사내가 하릴없이 앉아 있는데, 맨발에 거지꼴을 한 여자아이가 사내 쪽으로 다가와 발을 치우라는 몸짓을 한다. ( 얼굴이 검고 비쩍 마른 여자 아이를 캐스팅해야 할 것이다.) 쭈삣거리던 사내는 엉거주춤 두 다리를 옆으로 거두고, 여자아이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더니 의자 밑에 손을 넣고 더듬거린다. 몸을 일으킨 여자아이의 손에는 먼지와 머리카락이 묻어 있는 사탕이 쥐어져 있다. 사내는 여자아이가 그 사탕을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무심코 여자아이의 손을 탁 쳐서 사탕을 떨어지게 한다. 여자아이는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며 사내에게 달려들고, 사내가 걸치고 있던 남방에서 단추가 떨어져 나간다. 대합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여자아이와 사내를 쳐다본다. 당황한 사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여인숙까지 끌고 오게 된다.

    당황한 사내는 왜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여인숙으로 데려오게 되었을까. 소녀는 냄비에 남은 국물을 밥공기에 부었다. 밥알이 붉게 물들었다. 여인숙에는 해야 할 허드렛일이 많다.

    소녀는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살은 많이 쪘다. 사내는 정말 기분 나쁠 때 외에는 소녀를 때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가끔은 길 건너 슈퍼에서 사온 군것질 거리를 줄 때도 있다. 소녀는 텅 빈 밥그릇과 냄비를 구석에 밀어놓고는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벽에 걸린 달력 속의 여자가 소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내년 봄에 태어날 것이다.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사내의 목소리에 소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소주가 모자란다고 했다. 사내는 담요 밑에 깔린 지폐 한 장 꺼내 소녀에게 내민다. 거스름돈은 가져도 돼. 술에 취한 사내의 눈가는 붉었다.

    소녀가 문을 닫자, 방안의 사내 중 한 명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사내가 건네준 만 원짜리를 주머니에 넣고, 복도로 나섰다. 붉은 양탄자가 깔린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죽은 난 화분이 복도에 줄 지어 있다. 복도를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소녀는 현관 바로 앞에 있는 101호로 끌려 들어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문이 닫혔다. 소녀의 입을 틀어막는 남자의 손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남자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엎드리게 한 후 다짜고짜 소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방안은 어둡고 간간히 저편 어디선가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피박에 광박이야 씨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러 오고, 소녀가 얼굴을 박고 있는 이불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이불의 뻣뻣한 천위에 함부로 문질러지는 소녀의 뺨이 점점 붉어졌다. 남자가 지퍼를 올렸다. 담배 불똥이 튀어 군데군데 타들어 간 자국이 난 이불 위에 엎드려 있다. 침대 옆 탁자에 지폐 몇 장을 놓고는 남자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천장이 낮다. 눈을 감고 들 때마다 천장은 점점 소녀 쪽으로 내려앉았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의 웃음소리도 그 속에 섞여 있다. 소녀는 손을 내밀어 전등 옆에 놓여진 지폐를 그러쥐었다. 구겨진 지폐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감은 소녀의 눈 속으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잠이 오기 시작했다. 소주는 사다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새벽녘까지 화투를 치던 사내들은 해장이라도 하러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소녀는 방안에 함부로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한데 모아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동태의 가시가 흩어져 있다. 소녀는 찌게 국물로 붉게 물든 생선 가시를 한데 모아 놓는다. 재떨이는 담배꽁초와 누군가 뱉어놓은 가래침으로 가득 차 있다. 끈끈한 가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 웃음 소리, 벽에 달라붙은 가래 덩어리는 천천히 미끄러져 내리고, 담배꽁초는 소녀의 발아래 흩어졌다. 장롱에서 스타킹 상자를 꺼낸 소녀는 지폐를 고무줄로 묶어 가방 속에 넣고 여자의 주민등록증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옷 몇 벌을 가방 속에 구겨 넣고 손금고를 여니 안에는 204호 여자가 낸 숙박료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소녀는 가방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렸지만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204호 문을 열었다.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반쯤 비워진 약병이 넘어져 있고 그 앞에 몇 개의 주홍색 알약이 흩어져 있다.

    화장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소녀는 귀를 문에 바짝 대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늦은 목욕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소녀는 화장실 앞에 서서 어제 말한 대로 정말 기타를 가져도 좋으냐고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여자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침대 위에 놓인 기타 케이스의 뚜껑은 열려 있다. 기타 줄에는 글씨가 씌어진 종이 몇 장이 끼워져 있다. 내용은 길었으나 글자를 모르는 소녀는 일단 종이를 빼내 주머니에 넣고 기타 케이스를 들고 일어섰다.

    204호를 나온 소녀는 죽은 난초가 놓인 복도를 지난다. 알루미늄 그릇이 놓인 텅 빈 개집 앞을 지난다. 골목 끝에는 금수장의 노란 입간판이 서 있다. 술 취한 사내의 발길질에 의해 입간판은 반 쯤 찌그러져 있다.

    아이는 내년 봄에 태어날 것이다. 아이가 자라나 물으면 소녀는 네 아버지는 바다 건너 도시에서 기타를 치던 사람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우리는 더 없이 사랑했으나 아이들에게는 말해줄 수 없는 비극적인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노라고.
    김나정

    김나정

    1974년 서울 출생

    1998년 상명여대 교육학과 졸업

    2000년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현재 프리랜서 작가 겸 주부

  • 박완서(소설가) 김화영(문학평론가)

    예심을 거친 9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 '사이다 무덤' '손톱' '통근버스' 등 4편을 관심 깊게 읽었다. 전체적으로 일정한 수준을 갖춘 작품들의 수가 늘어난 느낌이지만 반면에 이 것이다 싶을 만큼 한눈에 우뚝 솟아나 보이는 작품은 없었다.

    '통근버스'는 흥미로운 소재를 선택한 편이나 짜임새가 너무 평면적이다. '사이다 무덤'은 서술능력에 안정감이 있고 정황묘사도 인상적이다. '도시와 시골의 경계지점'에 놓인 간이터미널의 분위기, 쌀알을 세며 기다리는 소녀의 심리, '사이다무덤' 달고도 날카로운 이미지를 살려내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학대하는 계모'의 주제가 낡은데다가 그 비중도 과장된 면이 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당선을 다툰 작품은 '손톱'이었다. 탄탄하고 신선한 문장과 정확한 묘사, 정서를 조절하는 능력과 균형감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날카로운 것과 부드러운 것의 강렬한 대조, 목욕시키는 장면 등의 오래 남는 인상은 이 작가의 역량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현실성이 부족하거나 부적절한 정황설정(수갑, 극한적 인상의 감옥, 벽에 걸린 가방, 뜯어낸 쪽마루 등)이 당선작으로 정하는데 끝내 방해가 되었다.

    당선작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는 서술의 흐름과 톤을 세심하게 조절하면서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전체 속에 적절하게 배열 혹은 반복하여 일정한 분위기와 정서를 산출하는 능력에 있어서 탁월하다. 여인숙, 자루 안에 담긴 개, 핏자국이 묻은 텅 빈 자루, 술, 화투, 폭행 등으로 표상 되는 '사내'의 공격적 세계와 여자, 사진, 기타, 드레스, 피아노, 비틀즈, 그리고 노래를 관통하는 연약함, 추억, 탈출의 꿈을 상호대비 시키면서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특산물도 없는 항구도시'속에 담아낸 아름다운 소품이다. 신문지에 찍힌 사진, 화분 속의 죽은 난초, 텅 빈 개 집, 찌그러진 입 간판, 동태의 충혈된 눈 같은 대상들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시선의 고요함 - 거기서 솟아나는 암시력에 이 작품의 힘이 있다. 치열한 작가정신의 수업은 정작 이제부터다.
  • 김나정

    김나정

    1974년 서울 출생

    1998년 상명여대 교육학과 졸업

    2000년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현재 프리랜서 작가 겸 주부

    "현세에 못 되면 다음 생에서라도 소설가로 환생하지 뭐" 라고 술김에 얘기한 적도 있었지만 앞으로의 생이 막막했다. 파를 다듬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한때 문학 소녀였던 여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버텨 가는지 궁금했다.

    이미 죽은 내가 문지방에 서서 잠든 남편과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꿈을 꾸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남편의 발과 자그마한 아이의 발. 방안은 따뜻하고 아이와 남편은 평화스럽게 잠들어 있다. 내가 없어도 아이는 자라고, 남편은 늙어갈 것이다. 안심되었지만 쓸쓸하였다. 현명한 아내도 좋은 엄마도 그렇다고 다른 무엇도 못 되는 나의 자리는 이 세상에는 없을 것만 같았다.

    태몽을 꾸었고 이제 나의 자궁 속으로 아이가 하나 더 들어왔다. 소중히 품어 눈 밝은 아이를 낳고 싶다. 아이 둘 키우기가 만만치 않겠지만 그 아이들과 새롭게 세상의 말을 배워보고 싶다. 그리하여 결코 도통할 수 없고, 쉽게 절망할 수도 없는 엄마로서의 소설을 쓰겠다.

    크리스마스 때면 청계천으로 데려가 양껏 책을 고르게 했던 아버지, 나 때문에 맘고생 심했던 어머니, 엄벙덤벙 며느리 대신 진하를 돌봐주신 어머님, 죽음 앞에 겸허해지라는 교훈을 주신 아버님, 끊임없이 날 일으켜 세워 준 소설 친구들, 본인보다 더 기뻐해주신 박기동 스승님, 멋지다! 김혜순 선생님, 제 소설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내 침대의 좌청룡 우백호 김정호, 김진하 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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