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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동일한 시선

by  전소영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
  • 1장 기(起) 기억의 형성

    (무대는 아파트 현관)
    경비실 안에는 쉰여덟 먹은 내가 있다, 그러니까 경비원은 쉰 여덟 살인 미래의 나다. 그 앞을 지나가는 남자, 현재의 나다.

    경비: 어이, 거기! 어디 가?
    나: 집이요.
    경비: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 아저씨가 처음 오셨나보네.

    현재의 나는 경비원이 '미래의 나'일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한다.

    경비: (인터폰 연결하며) 몇호야?
    나: 401호요.
    경비: 아무도 안 받는데.
    나: (그냥 가려는데) 나보구 어쩌라구요?
    경비: 일단 여기 적어.
    나: 우리 집 가는데 출입증을 써요?
    경비: 말 많네, 얼른 적어.

    나, 출입사항 적다가 경비실 안에 있는 카메라 비슷한 직사각형 장비에 눈길이 간다.
    경비원은 경비실 밖, 주차한 누군가와 실랑이.
    그 틈에 카메라 비슷한 직사각형 장비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나.

    경비: 거기! 차 빼, 얼른! 글쎄, 외부차량은 안된다니까. 잠깐만 고갤 돌려도 슬쩍 주찰하고 내빼네... 솜틀집 트럭은 또 언제 세웠어? 상습범이라니까, 저 노무 솜틀집 트럭.

    경비원 고개 돌리다가, 카메라 비슷한 그 장비를 들고있는 나를 보고 기함 한다.

    나: (셔터 부분 누르려) 카메라 기종 특이하네요... 김-치-?
    경비: 그거 못 내려 놔! 당장 내려 놓란 말야!
    나: (기세에 눌려) 그냥 구경만 한 건데...
    경비: (얼른 챙겨서 안에 넣고) 왜 남에 걸 마음대로 들고 그래! 이건 카메라 아냐!
    나: (궁시렁) 카메라 맞구만...
    경비: ('나' 즉 현재의 내가, 미래의 자신(경비원)을 알아보는지 여부, 확인 위해, 출입사항 보는 척) 이름이 권기현이라... 이봐, 권기현군. 날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나: (대꾸 안하고 나머지 사항 적는)
    경비: 아무 느낌도 안 든단 말이지?
    나: 저요, 변태 아닙니다. 같은 남자한테 무슨 느낌, 생각이 듭니까?
    경비: (기가 막혀, 허허 웃는) 생각, 느낌이란 형이상학적인 단어를 어떻게 성적인 걸로 연 결하나, 젊은 사람들은 다 그러나.
    나: 웃으시네요? 이 대목에서 정상적인 반응은요, 화를 내는 겁니다, 아까처럼 고함도 치구요. 근데 웃으시네... (다 적고 가는) 정상은 아니라구 보입니다만.
    경비: 저... 저런 버르장머리없는 놈!
    (그러다가 '나'와 본인이 동일인임을 자각) 쯧쯧... 마누란 저딴 놈 어디가 좋다구?

    2장 승(承) 승강기 고장


    (무대는 계단으로 바뀐다)
    엘리베이터 문 위에는 고장이라는 종이 써 붙여있다.
    나: 또 고장이야? 누가 그랬지, 인생은 계단 밟듯 차근차근 오르는 거라구...
    그 놈두 아마 변태 일 거야.
    (승강기 문을 발로 뻥 차는) 계단은 말이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만 밟는 거야.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나.
    관객들이 보기엔 제자리 걷기 동작을 하고 있는 나다.
    나: 누가 알아? 이렇게 열심히 한 칸 한 칸 계단을 오르고 있지만...
    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지.
    무대 뒤, 층수를 표시하는 전광판에 불이 들어온다.
    제자리 걷기가 실은 계단을 오르는 동작임을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역할.
    전광판의 숫자, 하나씩 올라간다. 1, 2, 3, 4.
    4층이란 표시... 현관문 앞에 선 나, 주머니를 뒤지는데.
    나: 오늘 왜 이래? 십 년 넘게 산 동네에서 출입통제씩이나 받고, 엘리베이터 고장나고, 열쇠까지 없고... 간만에 비디오 빌려온 날만, 꼭 열쇠가 없다니까.
    다시 제자리 걷기를 하는 나.
    전광판의 숫자는 5, 6, 6, 6, 6, 6.
    제자리 걷기를 하다가 뒷걸음질을 쳐본다.
    전광판의 숫자 줄어든다. 5, 4, 3, 2.
    걸음을 앞으로 옮기면 숫자 올라가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마치 스텝이라도 밟듯.
    트로트 음악 깔리며, 얄궂은 조명까지 박자 맞춰 번쩍 번쩍.
    장난스럽게 음악에 맞춰 스텝 밟는 나.
    전광판 위의 숫자도, 8, 7, 7, 6, 6, 5, 5, 4, 5, 6..... 춤을 춘다.
    나: 인생도 내 맘대로 되돌리고 건너뛰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나?
    음악이 사라진다.
    제자리 걷기를 하는 나, 전광판의 숫자는 이제 올라가기만 한다.
    12에서 멈추는 전광판.
    나: 다 왔네... 옛날에 지은 아파트라 다행이지... 이십 삼십층 짜리면...
    옥상으로 통하는 녹슨 철문 요란하게 열리는 소리. (암전)

    3장 전(轉)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하루

    (무대는 아파트 옥상)
    석양 적당히 배경으로 깔린다, 극적인 순간이란 설정에 도움되도록.
    실은 석양은 없어도 된다. 아니, 있는 편이 낫겠다.
    뭐든 없는 것 보단 있는 편이 항상 낫다.
    덕분에 조명이 변덕스럽게 나갔다 들어온 무대 위, 아파트 옥상.
    철문 열리고, 옥상 밖으로 나온 나.
    메고있던 가방에서 캔맥주 하나 꺼낸다.
    난간에 기대서 맥주 마시는 나.
    나: 괜찮네, 비디오나 때리며 마시는 거 보단. (한숨) 세월도 참... 곧 졸업이라...

    이때, 요란한 폭발음!
    놀라서 보면, 옥상 철문에서 '서른 여덟의 나' 들어온다.
    (이후, '서른 여덟의 나'를 '나3'으로 생략하겠다)

    나3: 양복 다 그슬렸네. 칫... 타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어디 결함이 있는 거야? 불꽃은 펑펑 튀구... 드러워서 출세하든지 해야지.
    누군 내 나이에 벌써 상무라는데.

    나3은 나를 보더니 씨익 웃으며 다가온다.
    나를 중심에 두고 뱅뱅 돌며, 신기한 듯 위 아래로 훑어보는 나3.

    나3: 권기현? 권기현 맞아?
    나: 그렇습니다만.
    나3: 나두 젊을 땐 그런 대로 괜찮았구만? (맥주캔 보며) 맥주가 좋아?
    나: (뭐야?) 나3: 10년 후엔 몸 생각해서 와인만 마실껄.
    나: 초면에 왜 반말입니까.
    나3: 난 10년 후 너니까.
    나: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는) 왜 자꾸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봅니까, 기분 나쁘게.
    확실하게 말하지만... 난요, 같은 남자한테 관심 없습니다.
    나3: 언제였더라, 학교 끝나고 집에 들어가려는데 열쇠가 없었어. 그래서 여길 올라왔는데, 기분 괜찮아졌거든.
    나: (피하며) ...오늘 왜 이래.
    나3: 안 믿네... 뭐 대충 반응이 이럴 꺼라구들 예상은 했지만.
    (다이어리를 꺼낸다, 읽는다, 국어책 읽는 그 톤으로) 언제부터인가? 인생이 지금보단 덜 복잡했던 십대 때부터지. 허나 그 때도 그 나름으로 무척 힘들었지.
    난 힘들 때면 항상 옥상에 오른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조금은 객관적이 되니 까... 나에 대해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렇다고 해결이 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옥상에 오르는 정도로 해결될 문제라면 애초에 고민하질 않지... 다만, 내 문제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은 나아지니까.

    나, 생각난 듯 자신의 가방을 뒤져보면 거기엔 그것과 똑같은 다이어리가 있다.

    나3: (씨익) 내 꺼 맞지? 근데 도대체 뭘 고민했다는 거지, 내가? 전혀 생각이 안 나.
    나: 어떤 시인이 그랬죠, 기억도 안 나는 절망이라고.
    (나3의 다이어리 뺏어 읽는) 이건 내가 어제 쓴 거랑 똑같은데...
    나3: 시? 내가 시도 읽었었나? 헛... 나두 별꼴이네.
    나: (나3 다이어리, 다음 장 넘겨보면) 뭐야, 이건 내일 쓴 거, 이건 다음 달.
    (무척 실망, 다이어리 읽는) 아직도 은정이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못했다...
    결국 다음 달에도 말을 못했군. 도대체 언제까지 질질 끌려 다닐 거냐구.
    나3: 적어도 애 둘 낳을 때까지는.
    나: 애 둘.
    나3: 너 은정이랑 결혼해.

    멈칫하는 나.
    나는 아까 나3이 그랬던 것처럼, 나3을 중심에 두고 빙빙 돌며 위아래로 훑어본다.

    나: 도대체 누구신데 그렇게 재수 없는 말을 합니까.
    나3: 난 십 년 후에 너라니까. (하며 권기현이란 이름이 박혀있는 명함 건넨다) 이제 졸업이겠네?
    나: (명함 본다) 미래전자 대리 권기현...

    명함 한번 보고, 나3 한번 보는, 스물 여덟 현재의 '나'... 표정 환해진다.

    나: 진짜 나 맞나보네... 내가 그 어렵다는 취업문을 통과했단 말이죠?
    (하다가) 근데 아직도 대리라구? 낼 모레면 마흔인데... 그게 말이 되요?
    나3: 말 돼. 그러니까 내가 여길 왔지.
    앞으로 십 년 후에 우리 회사에서 극비리에 개발 중인, 타임머신 시제품 성능을 점검 하러 온 거야. 타임머신은 안에 세워뒀지.
    나: H.G. 웰즈가 쓴 저 유명한 SF고전, 그 타임머신 말입니까.
    (나3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럼 미래의 나는... 인간 모르모트...잖아.
    나3: 인간 모르모트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막하나? 안 그래도 기분 나빠 죽갔는데...
    누군 모르모트 되구 싶어서 된 줄 알아? 이건 타임머신 안 탈 거면 사표 쓰라는 분 위기니 하는 수 없이 목숨걸고 왔지! 말이 타임머신이지, 못 돌아가면 어쩌라구.
    은정이는 또 뭐라는 줄 알아? 마침 들어놓은 생명보험 두 개나 있다구 걱정 말고 가 라는 데 그게 어디 사지로 떠나는 남편한테 할 소리야.
    그 여편네랑 절대로 결혼하지 말란 충고하려구 여기 온 거야.
    나: 은정이가 좀 답답은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3: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더니, 덕환이 그놈... 인간도 아냐.
    대학 동기에 입사 동기란 놈이 날 이런 사지로 내몰아? 살아 돌아올지 어쩔지도 모 르는데? 너 덕환이 알지.
    나: 덕환이... 알죠.
    나3: 그 놈은 요번에 상무 됐는데... 난... 어이구 드러운 세상.
    나: 덕환이가? 걔가 미래전자 상무라구요? 그 놈, 강의는 안 들어오구 맨날 동아리방에 처박혀 살다 겨우 졸업한 놈이.
    나3: 그 놈이, 그때 타임머신을 연구 중이었다는 거 아니냐. 그때 연구한 시간 터널 시뮬 레이션 인지 뭔지 하는 핵심 기술 때매... 드러워서...
    누구는 앉아서 척 하니 싸인이나 하구, 누군 성능 검사하러 목숨 걸고 여까지 오구.
    그래서 말인데... (품에서 꺼낸 파일뭉치 슬쩍 건넨다) 넣어둬.
    나: 이게 뭐예요.
    나3: 향후 10년 동안의 주식시장 동향.
    요대로만 해, 무조건 대박이야.
    나: (멍하니) 내가, 증권도 하나요?
    나3: 이건 규칙에 어긋나지만... 체... 규칙은 무슨 놈에 규칙.
    시간여행에 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려면 적어도 십년은 넘게 걸려.
    그 사이에 한몫 잡아야지... 아직은 불법도 뭐도 아니니까 넣어둬.
    나: (멍하니) 애는 둘씩이나 되구.
    나3: 말도 더럽게 안 들어, 맨날 애들이랑 싸우는데 지쳤어.
    나: (멍하니) 은정이한테 코꿰서 결국 결혼까지 하구.
    나3: 은정이는 더 심해, 반찬 하나를 해도 전부 애들 입맛에만 맞추니...
    내가 덕환이 녀석처럼 상무가 됐더라도 그럴까.
    (시계 보며) 가봐야겠네... 적어도 일박은 해야, 뭘 바꾸던지 할텐데... 덕환이 놈이 내 가 과거로 가서 지 출셋길 가로챌까봐 딱 오 분만에 돌아오게 타이머 맞춰 났거든.
    이봐! 사라는 종목으로 제때 딱딱 사고, 제때 딱딱 파는 거 잊지마.
    거기에 너와 나의, 아니지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는 거야, 알았어?
    나: 나한테 해 줄 말 또 없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든가 그런?
    나3: 은정이랑 당장 헤어져.
    나: 은정이 얘기 말구요.
    나3: 글쎄? (시계 보며) 늦었어. 만나서 반가왔어.
    나: 과거 자신한테 할 말이 겨우 큰돈 번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와이프 욕밖에 없나.
    나3: 사라는 대로 사고 팔라는 대로만 팔면, (만세하고) 난 부자다.
    나: 내 말은 듣지도 않네.
    나3: 덕환이 이놈아! 출세는 못했어도 돈은 내가 더 많아, 이놈아.

    옥상문 열고 들어가는 나3.
    문 앞에서 요란한 폭발음과 빛, 새어나오고.

    나: 거 되게 요란하네... 타임머신인지, 뭔지.

    난간에 기대어, 주식시장동향을 적은 뭉치를 펴본다.

    나: (파일뭉치 보며) 그 얼빵한 놈 말이 사실이라면 내 손엔 보물지도가 있는 건가.

    나의 옆으로 스윽 다가오는 '마흔 여덟의 나', 나4.
    나는 그가 다가오는 걸 모른다.
    (이하, '마흔 여덟의 나'를 '나4'로 한다.)
    나4: 권기현 맞지.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 고개 돌려보면 나란히 서있는 나4.

    나: 누구세요... 또.
    나4: 나는 이 십 년 후의 자넬세. 그러니까... 나란 말이지.
    나: 이 십 년 후? 그럼 마흔 여덟? 당신도 타임머신을 타고 온.
    나4: 이젠 이해가 좀 빠르군. 명함을 주고 싶지만 없네.
    나: ...내 모습이 갈수록 더 어색해 지네요.
    나4: ...나도 니가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야.

    잠시 서로를 자세히 뜯어보는 나, 나4.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한숨을 푹 쉰다.
    아마도 한사람은 이 십 년 후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해서.
    다른 한사람은 돌아갈 수 없는 젊음이 그리워서.

    나: 이 십 년 후엔 다들 그렇게 옷차림엔 신경 안 쓰나봅니다.
    어째 행색이... 대박났으면, 옷도 좀 좋은 거 사 입지.
    나4: (착잡하다) 나: 애들은 잘 크나요.
    나4: 응.
    나: 딸인가요 아들인가요...애들이.
    나4: 그것도 안 가르쳐 줬었나, 십 년 전의 내가.
    나: 쌓인 게 많은지, 불평 불만만 잔뜩 쏟아놓고 갔죠.
    나4: 저런.
    나: 이번 타임머신은 폭발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아까 껀 되게 요란하던데.
    나4: 그땐 시제품이었니까.
    나: 타임머신은 잘 팔리나요.
    나4: 당국에서 허가가 안 나서 못 팔게 됐어.
    출시일까지 다 잡아놓구 광고비 엄청나게 때려부었는데 결국 폐기하게됐지... 덕분에 적자만 눈덩이처럼 쌓이고.
    (버럭) 덕환이 놈만 짜르지 왜 죄 없는 나까지 짜르냐구.
    나: 그럼... 아까 명함이 없다는 건.
    (하다가 반색하며) 덕환이 놈도 짤렸어요.
    나4: 좋아할 거 없어, 그 놈은 모아둔 돈이라도 있지.
    나: 누가 좋아했다고 그래요... 아, 그런가 부다 했지.
    나4: (픽) 귀신을 속이지.
    나: 이 십 년 전에 날 알아, 댁이.
    나4: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어떻게 자기자신을 속이려들어.
    니가 그 모양이니까, 내가 오늘날 이 꼴인 거야.
    나: 남에 탓하듯 그러네.
    나4: 너랑 나랑은 달라... 달라도 한참 다르지.
    나: 이건 무슨 싸이코드라마도 아니고.
    나4: 그거 나 주게.
    나: 뭐요? (나4의 시선 따라가면, 주식시장동향 파일뭉치) 이거 말입니까.
    나4: 덕분에 쪽박 찼지.
    나: 대박아니구.
    나4: 일단 그걸 나한테 주고 나머지 얘기를 하자구.

    나4는 파일뭉치 집으려고 손을 뻗지만.

    나: 그럴 순 없지. 그러니까 재 방문의 목적이 이 파일 뭉치군요... 아까 그 얼빵한 서른여 덟이 좋은 기회를 못 살렸나본데... 이젠 알았으니 안전한 방향으로 재테크 하면.
    나4: (말 자르며 버럭) 그렇지가 않아, 당장 내놔.
    나: 말도 안 되는 소릴... 이건 절대 못 줘, 애도 둘이라며? 사교육비 장난 아니게 들텐데.
    나4: 내가 폐인 된 거... 그건 다 너 때문이야.
    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4: 서른 여덟 먹은 내가 부정한 방법을 쓸 때 막아야 했는데, 넌 얼씨구나 그걸 넙죽 받 았잖아. 열심히 살아볼 생각은 안하고, 이딴 거로 횡재할 궁리나 하니까 내가 오늘날 이 꼴이 된 거야, 알아.
    그거 줘... 안 그래도 머리 속 복잡하거든, 너랑 말다툼할 마음의 여유 없어.
    나: 어디 차근차근 이유를 말해봐...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나4: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그 잘난 보물지도 덕분에 난 가족과 헤어져 살아.
    나: 아깐 애들 잘 큰다며.
    나4: 지 엄마한테 가서 잘 큰다구.
    나: 예스! 은정이랑 드디어 헤어진 건가.
    나4: 임마, 어디서 남에 와이프 이름을 함부로 불러.
    나: 내 와이프기도 해.
    나4: 함부로 은정이 이름 입에 올리지마. 끝까지 날 믿어주고 내 옆에 남은 사람, 은정이 밖에 없어... 그리구 걔 내가 보냈어... 빚 때문에 서류상으로만 이혼처리하고 말이야.
    니깐 게 뭘 알아? 인생에서 소중한 건 돈이 아냐.... 가족이라구.
    헛된 욕심만 안 부렸으면, 우리 가족 적어도 흩어지진 않고 평범하게 잘 살았어.
    자, 이유를 말했으니까 그거 줘.
    나: 그게 어떻게 이 파일 때문이야.
    뭐든 걸 파일 탓으로 돌리려는 한심한 너 때문이지.
    결국 너처럼 한심한 미래로부터 날 지킬 유일한 희망은 이 파일뿐이군.
    나4: (주먹을 날리는) 니가 가족이 뭔 지 알아.
    나: 나이 먹더니 성질만 더러워졌나? 자기자신도 설득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화가 치밀 어 같이 주먹질) 나4: (필사적) 난, 나 따윈 어떻게 되든 좋아... 우리 식구들만 잘 되면.


    나와 나의 난투극이 벌어진다.
    스물 여덟의 나와 마흔 여덟의 나의.
    멋진 결투는 아니다.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며 되는대로 주먹질, 발길질.
    싸움의 모양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흉해진다.

    나1: (소리) 누굴 이기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네.

    옥상 철문 앞, 삐딱한 십대 소년... 두 사람이 싸우는 데로 온다.
    그 소릴 못들은 두 사람의 나, 흉한 난투극 계속이고.

    나1: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라던가... 딱 이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네.
    까봤자 내 다리, 꺾어봤자 내 팔인데... 쯧쯧...

    나1을 돌아보는 나와 나4.
    (이하, '열 여덟의 나'를 '나1'이라고 생략한다.)

    나4: 너 이 녀석! 여긴 어떻게 왔어? 하라는 공부는 안하구.
    나: 누구지? 혹시 넌, 오십대의 나? (입 딱 벌어지며) 그땐 회춘도 가능한가? 미래에도 기대할 건 있었네.
    나4: (비웃는) 회춘 좋아하네. 쟨, 니 아들이야.
    나: 내 아들.
    나1: 난 댁 아들이 아닌데. (둘러보며) 여기랑 똑같은 옥상에 올라오는데 누가 서있더라구. 어떤 아저씬데... 자기가 나라구 박박 우기는 거야,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나.
    그래서 내가 그랬지. 진짜 나라면 타임머신 한번만 태워달라고.


    나와 나4, 마주보다가 합창 '그럼 너도 권기현?'

    나1: 이쪽 저쪽 다 권기현 맞지? 둘이, 붕어빵 찍어놓은 거처럼 똑같네.
    나: (나4 얼굴 보며) 내가 이따위로 생겼다구.
    나4: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나1: 가관이군. 찬란한 미래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자기들끼리 한심하게 치고 받는 미래의 나라니.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란 건 알겠지만.
    (나와 나4를 보며) 나도... 내가 싫어지네... 점점.
    나4: 거 우리 아들놈하고 똑같이 생겼네... 말 삐딱하게 하는 것도 똑같고... 몇살인가.
    나1: 열여덟.
    나4: 아들놈하고 나이도 똑같네.
    나: 애가 둘이랬지, 그럼 다른 하나는? 딸인가 아들인가.
    나4: 파일뭉치를 주면... 가르쳐 줄 수도 있지.
    나: 한심하게 자식을 두고 흥정을 하다니... 이건 절대 못 줘.

    나1, 난간 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본다.

    나1: 동네 많이 변했네. 공터 하나 없이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들, 빌딩들... 삭막하네.
    나/나4: 조심해.
    나4: 이 녀석, 위험하잖아.
    나: 야, 안 내려와.
    나1: 미래엔, 결국 잔소리나 하는 저런 꼰대들이 되나...
    나: 거기서 당장 내려와.
    나1: (내려다보며) 비디오 가겐 그대로구, 옆에 오락실은 없어졌네.
    (장난기 있는 미소) 만약 내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십대인 나1, 장난하듯이 난간 밖으로 몸을 기울이면.

    나/나4: 어! 어! 어.
    나1: (웃는) 겁도 나겠지? 내가 없으면 당신들도 없는 거니까...
    나4: (좋게좋게) 얘, 내려와라.
    나: (버럭) 임마! 그러다 떨어져 죽으면 어쩌려구.
    나1: 더 살아봤자 거기 두 사람이 싸우는 암담한 미래밖엔 없잖아.
    나: (버럭)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야! 이건 완전히 싸이코 드라마라니까.
    나4: (슬쩍) 주식시장동향 파일뭉치나 줘.
    나: 못 준다니까.

    나1, 담배를 꺼내 불붙인다.

    나4: 임마, 어린 놈이 무슨 담배야.
    나: 또 열 받네... 새파랗게 어린 게 담배 꼬나물고 있는 걸 눈앞에서 두고 보려니.
    나1: 내가 옥상에 올라온 이유가 뭔데.
    나: 머리 속이 복잡해서, 생각 좀 하려고 왔잖아.
    나4: 맞아, 나도 그렇게 기억이 나? 다이어리에도 분명히 그렇게 적혀있구.
    나1: (비웃으며) 왜 과거는 항상 미화되는 거지.
    옥상에 올라오는 이유는 고민이니 뭐니가 아냐... 다만 담배 피러 온 거지.
    어느 날인지 집에 왔는데 열쇠가 없었거든.
    나: 그래, 거기 까진 맞아.
    나1: 여길 올라와 보니까... 담배 피기 딱이더만... 따로 문 열 필요도, 혼낼 어른도 없구.
    일본이 왜 과거를 미화하려는지 이해가 갈려 그러네. 일단, 폼 나거든.
    나4: 미화할 생각은 없었어... 다만, 진짜 그랬던 거 같고... 가물가물하네.
    나: (착잡한) 그게 미화의 다음 단계지. 거짓말도 자꾸 하다보면, 그 다음엔 거짓말 한 당사자도 그걸 기정사실로 착각하는 거... 쟤 말 맞아.

    현재의 '나' 딴 생각하는 틈에, 파일뭉치를 뺏으려하는 나4.

    나: (얼른 치우며) 자꾸 치사하게 왜 이러나.
    나4: 그딴 걸로 거저 돈 번 순간부터, 다신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해. 인생 망치는 거지.
    폐인이 뭐 별건 줄 아나.
    나1: (담배연기 후 날리며) ...맞는 말이구.
    나4: 처음엔 좋았어, 10년 동안은 내 세상이었지, 근데 말이야, 그 다음부터가 문제더군.
    파일뭉치엔 없는, 그 다음 년도부터 벌어놓은 돈을 날리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이야.
    나: 그런 걱정은 나한테 맡겨... 확인된 리스크는 더 이상 리스크가 아니니까.
    그 점 충분히 염두에 두고 착실히 살면 되는 거야.
    나1: ...그것도 또 맞는 말이구.
    나4: (버럭) 넌 뭐하는 놈이야? 이랬다 저랬다.
    나: 자, 자, 그럼 이 문제를 민주주의에 입각해서, 다수결로 결정하자구. 어때.
    나4: 좋아.
    나1: 나두 껴주는 거야.
    나: 물론. 그럼 먼저 파일뭉치를 없애자는 사람 손들어봐.

    나4, 손 번쩍 든다.
    나1, 손 안 든다. 나, 당연히 손 안 든다.

    나: 한 명? 좋아, 그럼 그대로 두자는 사람 손 들어봐.

    나4, 손 안 든다.
    나1, 손든다.
    나, 신이 나서 손든다.

    나: 자, 보물지도는 길이길이 남겨두는 쪽으로 결정 났어.
    나4: 말도 안돼.
    나: 결과에 승복해.
    나4: (라이터를 켜, 파일뭉치에 불붙이는) 이딴 재수없는 귀신단지는 태워버려야 돼.
    나: 뭐 하는 거야.

    나4가 파일뭉치에 불을 붙이자, 얼른 뺏어 들고 나1에게 던지는 '나'.
    불붙은 파일뭉치, 빙글빙글 날아오는데.
    세 사람이, 그러니까 한 사람인 세 사람의 시선, 날아가는 파일을 따라가는.
    세 사람의 눈에는 불붙은 파일뭉치가 파랑새로 보인다.

    어느 덧 무대 위의 파일은, 붉은 빛의 궤적을 남기며 날아가는 파랑새로 바뀐다.
    파랑새, 우아하게 공중을 선회한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풍요로움이 보장된 안락한 미래가.
    한사람인 세 사람의 시선은 그 파랑새를 따라간다.

    나: 뭐가 잘못됐지? 내 눈엔 파랑새로 보여.
    나1: 내 눈에도 그래.
    나4: 곱다... 저 파랑샐 식구들이랑 함께 봤으면 좋은 건데.

    붉은 빛을 뿌리며 천천히 선회하는 파랑새.
    홀린 듯 바라보는 모두.

    덕분에, 경비원이 살금살금 뒤에서 다가오는 걸 눈치챈 이는 없다.
    경비원, 카메라 비슷한 직사각형의 장비를 들고 있다.
    (1장에서 경비원과 내가 시비 붙었던, 바로 그 카메라 비슷한 장비) 파랑새의 선회에 넋을 잃은 세 사람을 카메라로 담 듯 셔터 누르면.
    펑! 구식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요란하게 터지는 불꽃, 혹은 광선.

    나1, 파일뭉치를 잡으려 손을 뻗다가, 걸터앉았던 난간 밖으로 몸이 기울어진다.
    나4, 몸을 날려 잡지만...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1은 아래로 추락하고.
    저 멀리로 날아가는 파랑새. (암전)

    4장 결(結) 결.자.해.지.

    (무대는 다시 옥상, 하지만 이미 해는 지고 한밤중) 어둠 속에서 길게 흔들리는 손전등 불빛.
    경비원이 들고 있는 손전등 불빛 끝에, 누워있는 현재의 내가 보인다.
    맥주캔을 쥐고 잠이 든 나.

    경비: 이런... 여기서 뭐하는 거야? (발끝으로 툭툭 치며) 나: (부스스 눈뜨면) 경비: (손전등 불빛을 얼굴에 비추며) 이게 누구야, 아까 그 권기현 맞지.
    멀쩡한 사람을 변태로 몰던 그 예의 없던 놈.
    나: (둘러보며) 어디죠.
    경비: 옥상.
    나: (아차) 그 애는 어떻게 됐습니까.
    경비: 무슨 애.
    나: 난간에서 추락한 애요. 달려가서 그 애를 잡았어야 했는데...
    파일뭉치가 뭔지... 그거만 넋 놓고 보다가...
    경비: 잠이 덜 깬 건가, 술이 덜 깬 건가.
    내가 쭉 지키고 있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걱정 마, 그런 일없었으니까.
    나: 십 년 전의 내가 죽었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없지... 그러니까...
    경비: 정신차려! 이러고 자다간 딱 얼어죽어, 요즘 날씨엔.
    옥상문을 잠그던지 해야지... 못된 놈들이 와서 술판이나 벌이고, 본드나 불고.
    나: (일어나며) 믿으실 지 모르겠지만...
    오늘 난 한 생애를 다 산 거 같습니다.
    아차.... 내 자식 중 하나가 딸인지 아들인지 못 물어봤네.
    경비: 그런 거까지 미리 다 알면, 세상 무슨 재미로 사나 이 사람아.
    나: 되게 궁금했는데... 꿈이지만 너무 생생하네.
    경비: 얼른 일어나, 옥상문 잠그게... 또 옥상에 올라와서 술 먹고 자면 그 땐 가만 안 둬.
    나: 저도 올라오기 싫습니다, 이젠.

    나, 옥상 철문 열고 나간다.
    경비, 손전등 불빛으로 옥상문을 비추며 현재의 '나', 없는 것 재차 확인.

    경비: 저런 얼띤 놈한테 파일뭉치 줬으면 큰일 날 뻔했지... 안 그래.

    옥상 구석을 비춘 손전등 불빛 속의 나4... 입엔 재갈 물려있고 손발도 묶여있는.

    경비: (풀며) 미안하게 됐네만 어쩌겠어, 비밀은 지켜야하고 시간은 없고.
    나4: (입의 재갈 풀면) 아우...뒷골... 당신 누구야.
    (경비를 훑어보다가) 당신은... 나 맞지.
    경비: 난 십년 후의 자네야... 쉰 여덟에 자네 얼굴은 이렇네.
    나4: 아까 그 어린애는.
    경비: 무사해... 주차 단속하느라 내가 타이밍이 조금 늦었어.
    그 전에 올라가서 사태를 막으려 했는데 말이야, 벌써 일은 벌어졌더라구.
    다행히 녀석이 추락하기 전에 이걸 쐈지.
    (1장과 3장에서 보여진 카메라 비슷한 직사각형의 장비) 나4: 그건.
    경비: 맞아.. 의료용 마취장비지... 사진 찍듯 셔터만 누르면 마취되는 신제품이야.
    기존에 가스 마취제 보다 부작용이 훨씬 적다구 광고하던데.
    나4: (툴툴대며) 부작용이 적긴... 이렇게 뒷골이 웅한데.
    경비: 하마터면, 나도 이거에 뻗을 뻔했지... 그러고 보니 카메라 비슷하게도 보이는군.
    십대 애는 마취된 그 상태로 과거로 돌려보냈어, 덕분에 이 상황 모두 꿈인 줄 알지.
    나4: 녀석이 떨어지는 거 보구 누가 신고 안 했나.
    경비: 누가 남에 일에 관심이나 갖나.
    나4: 내가 온 시대엔 시간여행을 불법으로 막는 추센데, 거긴 어떤가.
    경비: 마찬가지야. 이제 시간여행은, 통일 전에 일반서민들이 서울서 평양 가는 거 만큼이 나 어렵네.
    나4: (놀라서) 통일 전에 서울서 평양 가는 정도로.
    경비: 무척 어렵지... 난 시간관리국에서 통보 해줘서, 그쪽 허가를 받고 여기 온 거네.
    나4: 시간관리국? 그런 게 다 생겼나.
    경비: 인위적인 시간여행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왜곡되는 사건이 감지될 때, 그 왜곡을 최 소화하는 게, 시간관리국에서 하는 일이지.
    나4: 가만, 당신은 십 년 후의 난데, 그 십대애가 오늘 죽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존재했나.
    시간의 흐름은 한 방향이잖아... 아담이나 이브가 없었다면 우리도 없는 거와 똑같은 그런 경운데... 어떻게 당신이 아니 내가 오늘부터 십 년을 더 살수 있었지.
    경비: 그게 말이야, 운명이란 게 있긴 있나 보네.
    난 내가 이쪽 과거에 개입한 덕에, 내가 여직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아까 녀석이 추락하기 전에 아래에 안전장치를 해뒀는데... 녀석은 내가 설치한 장치 위로 떨어지질 않았어. 옆에 불법 주차한 트럭 위에 떨어졌네...
    솜틀집 트럭 위로... 솜틀집 트럭이 상습적으로 불법주차를 하거든, 덕분에 살았지만.
    나4: 어쨌든 우리 모두는 살 운명이었단 소리군.
    경비: 내가 여길 오지 않았더라도 어떻든 우린 살았단 얘기지... 근데 그 십대 애 말이야... 오늘 일이 충격으로 남아서, 앞으로 두고두고 정체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게 돼.
    나4: 그 다이어리에 적힌 고민이란 건 진짜네.
    경비: 그래, 십대 이십대에 겪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정체가 그건 가봐.
    나4: 그 파일 뭉치는.
    경비: 물론 없앴지. (나가며) 자, 그럼 가야지.
    나4: 알다가도 모를게 나란 사람이더군... 모두 딴 사람 같았어, 똑같은 한사람인데 말이지.
    경비: 그러니까 사람이지... 변하니까.

    쉰 여덟의 나인 경비원과 나4, 나가고.
    달빛 아래, 어디선가 날아와 모두가 떠난 옥상 위를 선회하는 파랑새에서. (암전)
    전소영

    전소영

    1969년 서울 출생

    1993년 성심여대 회계학과 졸업

    2001년 영화진흥위원회 극영화시나리오 공모 우수작 당선

  • 시놉시스

    제 목 : 다섯 가지 동일한 시선

    작 의 : 한 인물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변해 가는 과정을 그려보았다.

    본문요약 : (등장인물은 모두 '나'다.)

    1장 기(起) 기억의 형성
    나는 아파트 현관에서 경비원의 제지를 받는다, 거긴 10년도 넘게 살아온 곳인데 말이다.
    실은 경비원은 삼 십 년 후의 '나'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자신을 알아보는지 확인한 것.
    물론 미래는 아직 내 기억 속에 없다.

    2장 승(承) 승강기 고장
    느닷없이 복잡했던 출입절차 후, 엘리베이터 앞에 서지만 고장, 계단을 오르는 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암시한 듯.
    누가 그랬다, 인생은 계단 밟듯 차근차근 오르는 거라고... 단, 엘리베이터가 고장났을 때만.

    3장 전(轉)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하루
    스물 여덟의 '나'는 옥상에 올라온다, 열쇠도 없고 머리도 복잡해서... 곧 졸업이기에.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등장한 서른 여덟의 '나'. 개발 중인 타임머신 시제품을 성능 점검하러, 하는 수 없이 목숨 걸고 온 것, 자신이 결국 모르모트일 뿐이란 자조.
    미래의 나는, 앞으로 '10년간의 주식시장동향' 파일뭉치를 건네고 돌아간다.
    보물지도나 다름없는 파일뭉치를 펴보는데, 다가오는 마흔 여덟의 '나'. 재 방문의 목적은, 헛된 욕심 때문에 도리어 인생을 망쳤다며 파일을 돌려달란 것. 모처럼의 횡재를 놓치기 싫은 나와 옥신각신, 결국 나와 나의 난투극... 과연 나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일까.
    이 싸움을 한심하게 지켜보는 한 소년... 그는 열 여덟의 나.
    웬 아저씨가 와서 미래의 자신이라기에 사실이라면 타임머신을 한 번만 태워달라고 해서 왔는데, 자신끼리 싸우는 암담한 미래만 있다고.
    결국 문제의 파일뭉치를 그대로 갖느냐 마느냐는 다수결로 정하기로.
    현재의 나와 십대의 나는 횡재를 기회로 활용하자는 쪽으로 손들어 결국 그대로 두기로.
    헛된 욕심만 아니었으면, 적어도 평범한 행복은 가능했을 거라는 마흔 여덟의 나는 결정을 무시하고 파일뭉치를 태우려 한다. 놀란 현재의 내가 불붙은 파일뭉치를 빼앗아 던지면.
    붉은 빛의 궤적을 남기며 우아하게 공중을 선회하는 파랑새.
    세 명의 '나'의 눈에는 불붙은 파일이 파랑새로 보인 거다.
    풍요로움이 보장된 안락한 미래 말이다.
    난간에 걸터앉았던 십대의 나는 파일뭉치를 잡으려다 그만 추락하고.

    4장 결(結) 결.자.해.지.
    한밤중. 옥상에서 잠이 든 나는, 흔들어 깨우는 경비원의 호통에 잠을 깬다.
    덕분에 현재의 '나'는 모든 일을 악몽쯤으로 믿고 돌아간다.
    한편 추락한 '십대의 나'는 목숨을 구했단다. 위험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던 건, 인위적으로 시간의 흐름이 왜곡된 경우 이를 통제하는 '시간관리국'의 활약인 줄 알았지만... 아니다!.
    그건 불법 주차한 솜틀집 트럭 위로 추락한 덕분... 모두를 구한 건, 실은 운명이란 얘기다.
    참고로 타임머신에 관한 법률이 정비되면, 시간여행을 한다는 건 마치 통일 전 일반서민들이 서울에서 평양 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된단다.
    덕분에 모두는, 원점으로 돌아간 평범해진 각자의 현재로 향하고.
    모두 떠난 옥상 위엔 어디서 나타났는지, 달빛 아래를 선회하는 파랑새에서 엔딩.

    희곡 공모 (본문 16쪽)
    등장인물은 모두 '나'다.
    스물 여덟의 나는 현재의 나- 나
    서른 여덟의 나- 나3
    마흔 여덟의 나- 나4
    열 여덟의 나- 나1
    경비원은 쉰 여덟의 나
    직업은 연령별로 다르다. 외모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가족이다 싶지만, 막상 등장인물 본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해야 상대가 미래의 자신인지 안다.
    마치 암호로 아군 적군 여부를 확인하듯.
    여기서 권기현이란 남자의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닌, 등장인물들 사이 암호인 셈.
    전소영

    전소영

    1969년 서울 출생

    1993년 성심여대 회계학과 졸업

    2001년 영화진흥위원회 극영화시나리오 공모 우수작 당선

  • 윤호진(단국대 연극영화과 교수)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전소영씨의 '다섯가지 동일한 시선'을 뽑았다. 어느 날 28살 짜리 현재의 '나'가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만나면서 겪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누구나 내면에서 스스로 겪을 법한 갈등과 선택의 상황들을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빌어 재미있게 풀어냈다.

    신선한 아이디어 외에도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연극적인 코드가 다분히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무대에 형상화시켰을 때 배우나 관객 모두 즐길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동했다. 상식이겠지만, 희곡 집필에 대전제는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장르와 차별되는 어떤 연극적 특징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마지막까지 낙점을 주저하게 만든 작품은 송유억 씨의 '가족사진'이었다. 매끄럽고 차분한 전개 속에 여운을 남기는 미덕이 있었으나 평이한 줄거리가 싱싱한 맛을 반감시켰다. 북 잠수함 침투 사건을 다룬 '고래', 병동에 기거하는 노인들의 회한을 담은 '너는 피고지고 나는 살고죽고' 등도 역시 신선함이 떨어지는 작품들이다. 그 밖의 여러 응모작에서 작법의 기본 기는 보이나 극적 진행의 단순함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70여편의 응모작들은 거개가 약간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나 극적 설득력이 부족해 덧없는 해프닝으로 끝나거나,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스토리가 조합된 미완의 작품들이었다.

    이번 당선작은 흡족한 작품은 아니었다. 전후 구조상의 문제로 무대에 형상화했을 때 관객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구석이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무대에 올리게되면 다시 한 번 신중히 검토해서 작품의 장점을 더 잘 살려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신춘문예의 화두는 여전히 '새로움과 신선함'이다. 응모작을 읽으면서 많은 예비 작가들의 속내를 읽으며 즐겁기는 했으나 중년의 연극인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작품을 찾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극장에서 많은 공연을 체험하면서 희곡만이 가진 특성을 찾아내는데 정진해주었길 바란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희곡 역시 쓰는 이의 그릇 만큼만 반영할 수 있다.
  • 전소영

    전소영

    1969년 서울 출생

    1993년 성심여대 회계학과 졸업

    2001년 영화진흥위원회 극영화시나리오 공모 우수작 당선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그건, 어느 유명한 작가가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다만 그 문장을 노란색 포스트 잍에 그대로 옮겨 적은 후, 모니터 위 한가운데에 붙여놓았을 뿐이다. 학창 시절, 액자에 끼워져 교실 정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그것도 항상을 걸려있었건만 지금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급훈 정도로만 여겼었다, 처음엔.

    창문을 요만큼만 열어놓아도 바람에 마구 날리는 포스트 잍이 못 미더워서 투명 테이프로 덧붙여 양쪽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옆의 투명테이프를 손톱으로 긁다가 만 흔적이 있다, 너무 부담스러워 떼어버리려고 하다가 그만둔 것이 수 차례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실행에 옮기기는 거의 불가능한 방학 생활계획표를 동그란 원 안에 빼곡하게 그려 넣은 다음, 내가 그린 원 안의 계획들에 스스로 질려 버린 그 느낌이었다. 글을 쓸 때마다 이 문장과 마주해야한다는 건, 적어도 나에게는 그만큼이나 버겁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희망하고, 항상 절망하기에. 게다가 매일매일 쓰지 못한다. 그래서다.

    허나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글을 쓴다는 게 가능할까? 선뜻 '답은 이거다'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글을 써야겠다는 동문서답 뿐.

    모르긴 해도 당사자인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도 설마 처음부터 그렇듯 도인처럼 글을 썼겠는가하고, 스스로를 추슬러 가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당선소감이 아니라, 각서나 반성문이라도 쓰는가 싶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 또 감사드리며. 힘겹게 지켜봐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동생에게 고마운 마음 뿐 이다. 나보다 더 기뻐하시는 아버지께 많이 죄송할 따름...그리고 멀리 가있는 친구에게도.

    언제 마지막으로 교회에 갔었는지도 아득한 '교인'이지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글쓰겠다는 나를 많이 걱정하셨던, 실은 그래서 더욱 기뻐하실, 보고 싶은 그리운 어머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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