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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나쁜 남자'  

by  조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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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의 원래 제목은 '운명'이었다, 감독은 말한다, 애먼 여대생 하나를 창녀로 만들어 놓고.

    표면상으로만 보면, <나쁜 남자>의 스토리는 미친, 새로운, 사랑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이건 확실히, 위험한 드라마다. 여기에는 우선, 존 파울즈, <콜렉터 The Collector> 내러티브가 있고,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 모티프가 있다 : 포획된 '미란다'는 무력함의 극단에서 오히려, 인질범에 대한 감정의 비약을 겪게되고 그것을, 사랑으로 혼동한다……. 여기에는 또한, 전복된 멜로 드라마의 모티프도 있다 : 사랑하기엔 너무 먼, 높은 상대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를 단련시키는 이야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극, 그것을 뒤집기. 사랑하기엔 너무 먼, 높은 상대를, 거기까지 가기는 너무 힘드니까 그냥, 자기 수준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잔혹극. 그런 관점에서만 본다면, 김기덕의 영화를 위해 필요한 단어들의 목록은, 별로, 바뀌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충돌, 어떤 어긋남이, 있다. 텍스트의 심층에서 발산되는 톤이, 텍스트의 위장된 표면과 배치되는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에는 사실,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특유의, 에너지가 존재한다. <나쁜 남자>에서도 역시, 그 '어두운 힘'은 화면 밑에서, 옆에서, 위에서 꿈틀, 꿈틀거린다, 꿈틀. 그리하여, 인신매매범과 창녀라는 소재의 덫에 걸린 사람들조차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기묘한 흔들림의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신파라 부르든 숭고라 부르든.

    그래서, 나는 좀 다른 길로, 가보지 않았던 길로, 가보기로 했다. 그것은 아마도, 과잉해석의 실험실에서 파토스의 몫을 추출하는 걸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믿는다 : '텍스트를 분석한다는 건 결국, 메타 텍스트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 주기 바란다. 우린 이제 막 스타트 라인에 섰고, 아직, 발목도 안 풀었다. 우선, '도구'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 상처, 그것은 김기덕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라이트 모티프다. 김기덕의 시선은 다소 강박적인, 해부학자의 시선에 가깝다. 끼노 글라즈[Kino-eye], 그것은 현미경이 된다, 상처 부위에만 고정된. 상처 속의 카오스를 확대하는, 그런.

    김기덕은 언제나, '사회-몸'의 상처에 천착한다. <악어>의 가상공간에서, <수취인 불명>의 기지촌에 이르기까지. <섬>의 추상공간에서, <나쁜 남자>의 사창가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나는 지금 거꾸로 접근했다. 사실은, 상처 입은 인간들이 바로, '사회-몸'의 상처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몸'의 상처는 맥락에 따라,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계의 실패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구더기처럼 뒤엉켜 있는 장소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상처는 이중적이다. 그 속에는, 상반된 현실적 두 극이 잠재태로, 존재하고 있다 : 소멸과 생성. 상처 속에는, 두 종류의 흐름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엔트로피의 흐름을 따라, 상처는 뼈를 부식시키고 살을 녹이며 붕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엔트로피의 흐름을 따라, 상처는 뼈를 접합시키고 새살로 돋아나며 진화할 수도, 있다. 전자를, '드롭아웃(drop-out:낙오자)의 흐름'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그리고 후자를, '아웃사이더(outsider:탈주자)의 흐름'이라 부를 것이다.

    타자를 등질화하는 동일자의 시선은, 결코, 드롭아웃과 아웃사이더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확실히, 같은 곳에 뒤섞여 있다, 세계의 주변부에, 듬성듬성 무리 지어 살고 있다. 그러나 드롭아웃과 아웃사이더는, 같은 곳에서도 전혀 다른 풍경을 본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별과 별 사이의 거리보다도 멀다.

    한편, '관객'으로서의 우리에게 김기덕이 드러내는 상처는, '바깥'을 예감하게 만든다. 창(窓)과 문(門)은, 벽에 뚫린 상처다. 길[道]은, 대지에 새겨진 상처다. 우리는 상처를 통해 볼 수 있으며, 상처를 통해 나갈 수 있고, 상처를 통해 움직일 수도 있다.

    1. 내러티브의 순환구조와 평면성
    <나쁜 남자>는 처음부터, 관객을 압도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창녀촌 깡패두목 '한기'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대생, '선화'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면서, 일은 벌어지고 만다. 그 즉시, 귀신 잡는 해병대원들이 한기를 제압한다. 부감 숏 : 구경꾼들까지 합세해 한기를 에워싸고, 짓누른다. 출구가, 없다. 이런 심리적 설정 숏은, 전작 <수취인 불명>의 초반부에도, 새겨져 있다.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교차편집 화면이 흐르고 나면, '개눈'의 오토바이에 실려 가는 혼혈아가 보인다. 오토바이 뒷좌석, 개장 속에 갇힌 '창국'의 시점 숏 : 전경화된 쇠창살 너머로, 황폐한 풍경이 달린다. 김기덕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갇혀 있다. 이것은, 강요된 것이다. 창국의, 피부색. 한기의 목을 가르는, 칼자국. 신체에 각인된 과거의 흔적은 우선, 세계와 자아가 만나는 살 위에서 견고한, 벽이 된다.

    출구 없는 세계의 이미지는, 순환적 내러티브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선화는 창녀 자리로 몰락했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만 다시, 창녀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전작, <수취인 불명>의 경우에도, 순환적 구성은 두드러진다. '지흠'과 양아치들의 입장이 전도되고, 외눈박이는 눈을 고치지만 다시 외눈박이로 돌아가며, 개들을 도살하던 개눈은 개떼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런 개 같은 경우들은, 원형으로 닫히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상처 수준에서, 끔찍한 등가성을 실현한다. <나쁜 남자>에 오면, 포획자와 피획자가 전도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선화를 창녀로 만든 뒤, 한기는 일면투시거울 저편에서 그녀를 관찰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관음증의 쾌락대신, 대못이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동안 끝까지 눈을 뜨고 있어야 하는 그런, 고통이 있다. 피획자의 절망이 고스란히, 일면투시거울의 흐름을 따라 포획자에게, 전가된다.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누가, 누구를, 사로잡고 있는지 애매해진다. 한기야말로 선화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일면투시거울 저편에, 감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출구는 없다, 서로를 망그러뜨리면서 함께 몰락하는 것 외에는.

    그런데, <나쁜 남자>의 내러티브 자체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기 패거리나 선화 모두 머리가 대단히 나쁘지 않다면 불가능한, 포획 시나리오의 가공할 만한 '상투성'. 폭행죄로 잡혀온 '정태'가 같은 감옥에서 한기와 만나게 된다는 식의, 가공할 만한 '작위성'. 칼을 맞고 의식을 잃었던 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생해 셔츠나 사러간다는 식의, 가공할 만한 '비개연성'. 그러나, 감독은 그런 모순들이 의도된 것이라고 미리,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김기덕은 그러니까, 상투성이나 작위성, 비개연성을 제거하기 위해 내러티브의 엔트로피를 증대시키는 고전적인 방식대신,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그 결과, 내러티브는 기묘하게, '평면화'되었다. 가령, 한기가 자청해서 감옥으로 간 뒤 사형장으로 끌려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라. 여기서, 입체적인 현실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반원근법'적이다. 현실감을 줄 수 있는 세부를 잘라내고 급박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허술함은, 오히려, 리얼리티의 심급들을 평면화시키는 미학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나쁜 남자>의 오프닝 시퀀스에는, 그로테스크한 인물 설정 숏이 있다 : 바로크풍 벤치에 나란히 앉게 된, 선화와 한기의 풀 숏. 정면 카메라는 이 장면을 마치, 동물도감의 사진처럼 만들어버린다, 실제보다 생생하게 묘사되어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이 타블로 이미지를 한 장의 사진으로 가정한다면, 일종의 푼크툼(punctum)으로 작동하는 것은 그 지독한, 평면성이다. 그들은 사실, '입체적으로' 보면 결코, 한 의자에 수평적으로 앉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감독은, 그들을 동등하게 배치하기 위해, 모든 곳이 중심일 수 있는 평면적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원근법의 위계적 공간 대신.

    평면성은, <나쁜 남자>를 이중으로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사진' 이미지의 평면성이고, 그것은 또한, 내러티브 차원으로 전이된 평면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감독이 견지하고 있는, 반리얼리즘적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이 평면성은 당연히, 초기 영화들의 평면성과는 맥락이 다르다. 이것은, 브루넬레스키의 원근투영법 이후, 혹은 알베르티의 '회화론' 이후, 그리고 카메라에 의한 기계복제 이후, 현대 회화가 감행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평면성이다. 그렇게 구축된 세계를, 김기덕은 '반추상의 세계'라고 직접, 명명한 바 있다. (;반추상이란 용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오히려, 혼동을 불러일으킬 확률이 높다. 그러나, 감독의 용어를 존중하기로 한다.) 2. 反사실주의적, 半추상적 세계
    김기덕은 현실을 모사하는 게 아니라, 창조하려 한다, 응시하는 대신, 구성하려 한다. 질료를 가공해 낯설게 만들고, 사진적 모방과 회화적 상상 사이에서, '시적 리얼리티'를 구축하려 하는 것이다. <파란 대문>에 이어 <나쁜 남자>에서도 반복되는 오브제, '에곤 실레'는, 감독 자신이 서 있는 영토를, 암시하는 듯하다. 에곤 실레는, 초기 표현주의 계보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지만, 공시적으로 보면, 표현주의와 상징주의의 경계에서 작업했다고 볼 수 있다. 감독은 아마도, 형태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의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라는 극단으로 가기 전의 상징주의가 겹치는 점이지대를, 선호하는 듯하다.

    반추상적 세계를 창조하려는 의지는, 사소한 소도구에도 서명을 남긴다. 접는 방식에 따라, 광고지가 송곳이 되고, 자르는 방식에 따라, 유리는 기사들의 창이 되는 식으로. 사물의 물성을 전이시키는 기발한 상상력은, 김기덕의 영화들에서 표현주의적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쁜 남자>를 반추상적 세계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사진'이라는 팬터지일 것이다.

    영화 중반. 선화가 창녀촌에서 탈출을 시도하면서,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환상의 여인'이 나타나 선화에게, 웃옷을 덮어준다 : 선화의 이중체, 혹은 도플 갱어. 그러나 선화는, 비현실적으로 차분하다. 도망치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주술에 걸린 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선화를 다시 붙잡은 한기는 즉시 돌아가지 않고, '새장여인숙'이 있는, 바닷가를 찾는다. 그곳에, 선화를 앞질러간 분신이 먼저, 도착해 있다. 선화는 거기서, 자신의 다른 자아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걸, 본다. 사진은, 분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묻혀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선화는 창녀촌으로 돌아와, 사진조각들을 짜맞춰본다 :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 그러나, 얼굴이 없는.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의 노에마(noema)는 '그것이-이미-존재했음'이다. 사진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직 그리고 분명히, 존재했던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증작용 그 자체'이다. 그런데 김기덕은, 그 부동의 과거를 미래로 전치 시키면서, 팬터지의 세계, 반추상적 세계를 창조한다. 선화가 주운 사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기억이면서 동시에, 이미 일어나버린 예언이다. 이 사진 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 이 기묘한 세계는 한편, 물의 이미지를 통해 은유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나쁜 남자>에는, 선화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는, 결코 노골적이지 않게 연출된 장면들이, 있다. 가령, 창녀들이 모여 앉아 파를 다듬는 장면이, 있다. 한쪽 구석에 있던 선화 역시, 쑥스러운 듯 미적거리면서, 일을 거들려고 끼여드는 모습이 롱 숏으로 잡힌다. 그리고 또 하나, 창녀촌에 비가 내릴 때, 창녀들이 화분을 처마 밖으로 내놓는 장면이, 있다. 선화 역시, 심도 화면 깊은 곳에 숨어서, 화분을 내놓는다. 이 장면에서 물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의 이미지다. 선화의 분신이 자살한 바다는 거대한 무덤이지만, 그 죽음의 물이 하늘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릴 때, 삶의 물은 '사회-몸'의 상처에도 공평하게 내려서, 꽃들을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봉합이다. 사진은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추동력이 되지만, 그것은 내러티브로 환원되며 사후적으로, 발견되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연출 시 가장 어려워지는 부분은, 선화의 심리묘사가 될 것이다. 선화는 사진 속의 포즈에 몸을 일치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두 감정 사이에 있는 심연을, 가로질러 가야만 한다. 사진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곳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에 사진이 존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내러티브의 평면성에 관한 논의와 반추상적 리얼리티에 대한 요구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내러티브의 허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들 중 일부는, 반추상화를 사실주의 회화의 틀로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여성의 본질이 창녀 역할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식의 해석이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평면성이, 비록 세련된 표현성을 획득하진 못했다 해도, 그런 모순들을 하나의 미학적 시도로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설정된 문제틀인 반면, 반추상적 리얼리티의 문제는 확실히, 치밀하지 못한 내러티브와 관련된다.

    한기에 대한 선화의 감정이 흔들리는 걸 알리는 첫 번째 시퀀스는, 따로 도려낸 듯, 강조되어 있다 : 만취한 한기가 선화의 손을 꼭 쥔 채 쓰러져, 잠드는 장면. 그 이후 선화의 감정은, 한기의 절망적이지만 치열한 삶이 노출되는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격투 씬들 사이로 삽입되는 선화의 클로즈업 숏만으로는, 감정이 숙성되는 '시간'을 보여주지 못한다. 선화를 위해, 숏을 좀 더 할당하거나 그 지속시간을 조정하는 식의, 배려가 필요했다. 다만, 공백을 메워주는 건,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다. 적어도 그 점에 관한 한, <나쁜 남자>는 성공한 영화다.

    그런데, '평면적 반추상화'의 세계는 순환구조의 폐쇄성을 더욱, 강화하기만 한다. 김기덕이 구축한 세계는, 수직적 차원이 배제된 수평적 공간이다, 닫혀 있고 막혀 있으며, 고인 채로 썩어 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은 어딘 가로, 절망적인 세계 너머 어딘 가로,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는, 시원으로의 회귀나 초월에의 욕망 같은 것이, 없다.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오늘-여기'에서 견딘다, 싸운다, 그리고 붕괴된다. 잔혹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3. 잔혹성의 스펙트럼
    아르토는, 장 폴랑에게 보내는 두 번 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나는 이 잔혹성이라는 말을 삶의 욕망, 우주의 엄밀함, 돌이킬 수 없는 필연성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물론, 아르토적 잔혹성은 맥락이 다르다. 그가 말하는 '페스트' 같은 연극이란, 거칠게 말해, 배우와 관객이 혼연일체가 되는 격렬한, 제의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니체가 지적하는 바, 에우리피데스 이후 몰락하기 전의, '음악'으로서의 그리스비극이 가졌던 특징과 유사해 보인다. 그리고, 아르토가 말하는 '잔혹한 치유'란, '진정한 자아의 원초적 의식으로의 이행'을 의미하고, 잔혹성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목적은, 정념의 정화를 넘어 잠재의식의 힘을 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들뢰즈/가타리와 관련해서 보면, 아르토는 '탈지층화'의 극단을 꿈꾼 자였고, 그가 회귀하려 했던 원초적 카오스란 바로, '강렬도=0'의 '기관 없는 신체'였다.

    }} <나쁜 남자>는, 잔혹한 영화다. 김기덕의 영화들 중 가장, 잔혹한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우선, '우주적 잔혹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전경화 되어 있다 : '사진'으로 상징되는, 운명. 그것은, 내러티브의 전제가 되는 잔혹성이다. 그것은 마치, 신탁처럼, 온다. 그래서, <나쁜 남자>의 서브 텍스트로 작동하는 것을, 그리스 비극적 모티프로 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사회-몸'의 상처 역시, 우주적 잔혹성의 흔적일 수 있다, 그때. 그 어떤 출구도 없이 견뎌야만 하는 자에게, 잔혹성은 삶의 본질이며, 잔혹해지는 것만이 유일한, 삶에 대해 정직해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기덕 영화의 잔혹성은 여전히 모호하다, 혹은 왜곡되어 있다. 낯선 잔혹성을 낯선 그대로 포착하는 대신, 이미 익숙한 엽기나 악취미로 환원해버리는 시선들 때문에. 낯선 잔혹성의 차원에 부가된 '어두운 힘'을, 마니교적인 선악의 지평 위에서만 사유하려 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김기덕 영화의 잔혹성, 그 낯선 파토스의 몫은 언제나, 비난 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기덕 영화의 잔혹성이 스펙터클로서의 충격이나 변태적 쾌락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건,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드롭아웃과 아웃사이더를 가르던 때의 시선, 그 미분학적 시선으로 잔혹성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 파토스의 몫을 제대로 요구하기 위해서.

    김기덕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잔혹한 표현 이면에 있는 것을, '야생성'이라 불렀다. 잔혹성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야생성, 그것은, 무엇인가? 잔혹성의 스펙트럼 어디에, 그것은, 존재하는가? 여기,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변형되는 몸이, 있다. 이 문명화된 몸에서, 야생성이 드러나는 곳은, 어디일까? 문명화된 '사회-몸'에서, 야생성이 발현되는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처 부위일 것이다. 몸의 물질성을 드러내며 몸의 극한을 예감하게 하는, 상처. 오직 상처만이, 문명에 의해 포획된 비자연적 영토에서 자연성을,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생성, 그 낯선 잔혹성의 '어두운 힘'이란 바로, 상처 속에 있는 힘이다, '드롭아웃의 흐름'을 따라 도태될 수도 있고, '아웃사이더의 흐름'을 따라 진화할 수도 있는. 그 동안, 김기덕 영화의 야생성이 주로, 붕괴되는 쪽으로만 흐른 것이 사실이지만, 야생성의 본질 자체는, 양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기덕의 잔혹성은 바로, 상처를 통해, 상처에 관해 말하려는 자의 잔혹성이며, 이것은, 선악의 지평 위에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어두운 힘'을 옮겨 놓는다, 니체적 지평, 좋음(Gut)과 나쁨(B se)의 지평으로.

    '진정한 자유는 모두 어둡다', 아르토의 말이다.

    4. 운명애 ; 숙명론에 반대하여
    야생성, 그 낯선 잔혹성의 '어두운 힘'은, '드롭아웃의 흐름'을 탈수도 있고 '아웃사이더의 흐름'을 탈수도 있다. 그래서 불온하다, 어떤 식으로든, '사회-몸'을 바꿔 놓기 때문에.

    선화는 먼저, '드롭아웃의 흐름'을 탄다, 팬터지 속에서. 새장여인숙이 있는 바닷가에서, 그녀는 한 번, 죽었다. 그녀는 사진으로 표상 되는 자신의 운명을 보았고, 그 우주적 잔혹성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을 찢어 모래 속에 묻고, 바다 속으로 걸어들어 갔던 것이다. 자살, 그것은 운명을 거부하고 삶을 저주하며 자신을 부정하는, '나쁜(b se)' 잔혹성의 극단적인 형식이다. 그러면, '좋은(gut)' 잔혹성이란, 어떤 건가? '어두운 힘'은 어떻게, '아웃사이더의 흐름'을 따라 흐를 수 있는가? 운명에 투항하는 것, 체념하며 연명하는 것, 그것만이 구원인가? 수감된 한기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태는 선화를 풀어준다. 그러나, 선화는 더 이상, 떠나려 하지 않는다. 너무 멀리 왔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살아낼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선화는 오직,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인수하려는 것뿐이다. 이 장면의 미쟝센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화면 상단부를 가로지르는 고가철로로,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오른 쪽에서 왼 쪽으로. 시선의 일반적인 동선을 거스르는 기차는, 아마도, 되돌아오는 듯하다. 기차는 언제나 자기만의, 정해진 궤도를 가지고 있다.

    한기가 출소할 때까지, 선화의 히스테리 상태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조우한다, 창이면서 벽이었던 거울을 깨뜨려, 문으로 만들면서. 처음부터 문이었던 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곧, 이별의 시간이 온다, 한기는 선화를 처음 만났던 벤치에 남겨 둔 채, 돌아선다. 그 이후, 두 사람의 기이한 행적이 평행편집으로, 제시된다. 그날 밤, 한기는 명수의 칼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나, 나쁜 남자는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질기기까지 하다. 절대로, 안 죽는다. 행인 숏이나 응급실 숏 하나만 있어도 되는데, 감독은 무리를 해서라도, 한기 혼자 일어서게 만들었다. 구원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날 밤, 선화는 더 기막힌, 이야기를 엮어간다. 거리를 헤매다가, 새장여인숙이 있는 바다 쪽으로 가는 듯한 트럭기사에게, 몸을 파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제의적이다. 선화는 지금, 잔혹성의 또 다른 극단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예정된 바닷가로 나간다, 기꺼이.

    선화와 한기가 바닷가에서 만나는 장면은, 몽환적이다. 사진이미지가 드디어, 현실에서 재현된다. 여기에는, 밀도가 있다 ;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이 사진이미지로, 수렴된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누락된다면, '사진'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환멸과 치욕과 슬픔도, 이 순간을 구성하는 씨줄, 날줄이 된다.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순간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거꾸로, 이 순간을 긍정할 수 있다면, 온몸에 피칠을 하고 배꼽에 꼬리를 단 채 자궁 밖으로 대가리를 처내밀던 때, 그 이후의 일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일까지도 모두, 긍정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선화가 도달한 자리를 명명할 수 있다 : 아모르 파티(amor fati) '숙명론의 몸'도, 사진 속의 포즈를 취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몸은, '이미 주어진 것'을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부정하고 싶은 '이물질'로서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저, 고통을 견디기만 하는 몸이다, 흐름들 사이에서 진동하며 만성의 상처로서 머물지만 결국, 느리지만 확실히, '드롭아웃의 흐름'을 타는 몸이다. 그러나 '운명애의 몸'은, 확장하는 몸, 변신하는 몸이다, 운명을 '내장'의 일부로 받아들여 새로운 자신으로, 생성하는 몸이다.

    아모르 파티, 그것은, '이미 주어진 것'에 삶을 맞추는 게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으로부터 삶을 변양시키는 기술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강한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자기 구원의 기술이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자기 두 발로 걸어오는 울트라 마초가, 강해 보이는가? 여자는 그보다도 훨씬, 강하다. 훨씬, 잔혹하다. 아모르 파티, 그것은, 우주적 잔혹성에 대항하는 한 개체의 위대한 잔혹성이기도 한 것이다, 우주적 잔혹성을 오히려 의욕하는.

    그러나, 가장 위안이 될 만한 장면에서도 롱 테이크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감독은 프리즈 숏에 이어 페이드 아웃하는 대신, 프레임을 하얀빛으로 가득, 채운다. 블랙홀 끝에 있다는 어떤, 출구 같은. 부활과 재생의 어떤, 화이트홀 같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괴천만한 이야기가, 바로 이어진다. 창녀와 기둥서방이, 신종 이동매춘업을 시작한 것이다.

    5. 역설[paradoxa]의 세계
    <나쁜 남자>의 마지막 시퀀스 : 그 트럭으로, 그들은 배추 장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 트럭으로, 그들은 떡볶이나 오뎅을 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하다. 여자는 여전히 몸을 팔고, 남자는 창녀촌 깡패나 하는 짓을, 계속한다. 그래서 이것은, 원을 그리며 닫히는 순환적 내러티브로, 보인다. 여자와 남자가 다시, 출구 없는 일상 속으로 다시, 갇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했다.

    김기덕이 구축하는 세계는 언제나, 초월적인 것이 침략해올 수 없는 수평적, 세계다. 그는 철저하게, 유토피아적 지평이 존재하지 않는 내재성의 영토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움직인다. 그래도 만일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오늘-여기'에서 일뿐이다. 그래도 만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오늘-여기'에서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화와 한기가 다시, 초시간적 팬터지의 영역에서 박제가 되는 대신 다시, 생활세계로 내려오는 건 당연하다. 그러면, 사진 이미지를 관통하며 시작된 '아웃사이더의 흐름'은, '오늘-여기'에서 어떻게 이어지는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 <나쁜 남자>의 에필로그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메타포다, '아웃사이더의 흐름'의 궤적을 '반추상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은 이 마지막 시퀀스에, 가스펠 송을 충돌시킨다, 신 없이 구원에 도달하려는 자들을 위해서. 여기 사용된 버전은 까롤라 앨범의 타이틀 곡(:blott en dag)인데, 노르웨이의 위대한 건반주자, 이베르 클라이베가 편곡하고 직접, 연주까지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하여, 북구의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아우라가, 역설적인 아우라가 프레임 밖으로 넘쳐흐른다.

    상처가 치유되는 흐름으로서의 '아웃사이더의 흐름'은, 그 궤적은, 뒤로 흐르면서 앞으로도 흐른다. 예를 들면, 쉽다.

    엽기적인 예 : 한기처럼, 대가리를 깨보거나 창자를 뒤틀어보거나 옆구리에 칼구멍을 내보면 쉽게, 그러나 좀 아프게, 깨달을 수 있다. 상처는, 당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상처가 낫는다면 그건, 상처가 거꾸로 가면서 앞으로도 가기 때문이다. 상처가 복원된다는 것, 그건, 상처가 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고,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 그건, 상처가 아직 오지 않은 새살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 되돌아가면서 동시에 나아가기.

    선화와 한기는 예전 상태로 되돌아갔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상태로 나아갔다. 그들은 '사회-몸'의 극한, 몸이면서도 몸이 아닌 상처들이다. 그들이 '아웃사이더의 흐름'을 탈 때, 그들은 안에 있으면서도 바깥을 끌어들인다 : 상흔으로서의 새살. 치유되는 상처는 몸 위에 재영토화 되면서 동시에, 탈영토화 한다. 여기에는 힘의 분포, '강렬도'의 분포가 변해버린, '변이의 선'이 존재한다. 전혀 다른, '분자'들이 생성한다. 창녀의 문턱을 넘어버린, 창녀 아닌 창녀가 있고, 깡패의 문턱을 넘어버린, 깡패 아닌 깡패가 있다. '돌연변이들',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하면, '탈영토화의 첨단들'.

    영화 초반. 선화에 관한 스케치에는, 냉소적인 뉘앙스가 있다. 결국, 세계의 소모품으로서 적당히, 살아버릴 것 같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대신, '가치를 대체하는 기호들'에만 매달릴 것 같은. 거대한 고통도 없지만, '최후의 깊이'에 도달할 일도 없을 것 같은.

    차라리, 상처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저항일 수 있다, 한 사회의 지배적 코드를 절개하는. 탈주란 어떤 면에서, 거칠게 말해, 상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선화와 한기가 타고 있는 트럭,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붉은 상처로 남았다가 다시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는 트럭은, 객사에 이를 유랑민들을 실어 나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흐름들 간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상처는 붕괴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러나 치유되는 상처는, 자기를 바꾸면서 동시에 '사회-몸'을 바꿀 것이다, 그 상흔을 통해.

    <나쁜 남자>의 마지막 시퀀스는, <악어>때만큼이나 강렬하고, 서늘하게 아름답다. 여자는 트럭 속에서 몸을 팔고, 남자는 공허한 눈빛으로 담배를 태운다. 이윽고, 일을 끝낸 여자가 나타나 남자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아무도, 말이 없다. 그저, 담배를 나눠 피우며, 지쳐 쓰러져 있는 바다를 응시할 뿐이다. 이러면, 된 것이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중요한 것은 오직, 매순간, 새살로 돋아나는 것.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는 것. 비록, 그것이 창녀의 삶처럼 보이든 말든. 비록, 그것이 깡패의 삶처럼 보이든 말든. 그러면, 된 것이다. 생의 고단함을 담배연기로 날려보내고, 전 우주의 무게로 쏟아지는 허무를 견디면서, 유목민들은 다시 길을 떠난다. "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나의 삶이 삶의 참모습으로 흐를 때"
    (-옥타비오 파스의 시, '휴식' 중에서)
    조하형

    조하형

    본명 조윤형

    1970년 부산 출생

    1996년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중퇴

  • 강한섭(서울예술대학 교수, 영화평론가)

    응모작은 모두 22편. 그중 무려 9편이 이창동 감독론이나 그의 최신작 [오아시스]에 대한 작품론이었다. 그래서 우선 그 9편을 끄집어내 읽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폭력, 순수의 파괴 그리고 카프카적인 변신을 주제로 감독론을 펼치는가하면 심지어는 오아시스 그림의 양탄자가 왜 바닥에 깔리지 않고 벽에 결려있는지를 논하는 응모작도 눈에 띄었다. "야, 영화를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해석과 이를 글로 풀어내는 표현력이 조화를 이룬 비평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비(非) 이창동 계열의 응모작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와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을 다룬 응모작이 각기 3편씩이고 나머지 7편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 비주류의 작품세계를 고독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여기서 일단 다음의 3편에 주목하게 되었다. OOO 씨의 '로드무비:불연속적 단층을 찾아가다'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다룬 방혜진씨의 '모순을 넘어선 축제의 장' 그리고 [나쁜 남자]를 중심으로 한 조하형씨의 '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로드무비...'는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모더니즘적인 영화 스타일을 세련되게 해석한 평론이었다. 그러나 [로드무비]라는 개별 영화 텍스트 비평과 함께 '로드무비'라는 소장르 비평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방혜진씨의 평론은 영화에 대한 따듯한 애정과 차분한 논리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작품을 작품으로 보지 않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흥행과 연관시키는 작금의 비평 흐름에 비켜서서 영화를 궁극적으로 작가주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미덕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지나치게 개인 영화감독의 창작물로 해석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에 비해 조하형씨의 응모작은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화려한 문장력이 단번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글이었다.

    너무 화려하면 처음에는 쏠리던 마음이 변하기도 쉽다. 그래서 일부러 정을 떼고 수일을 쉬고 다시 3편을 읽었다. 상처의 모티브를 가지고 김기덕의 영화를 해석한 조하형씨의 평론은 자칫 관념의 논리로 원래 비평의 대상이 된 작품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만한 분석과 문장력이 당당한 자신감 속에서 표현된 응모작도 드물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정했다.
  • 조하형

    조하형

    본명 조윤형

    1970년 부산 출생

    1996년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중퇴

    감기 몸살로 몸이 결딴나 있는데, 세계 저편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그 전화 때문에 지금, '희한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다. 뭐라고, 쓸 것인가. 머릿속이 반은 녹아버린 것 같은데 뭐라고, 쓸 것인가. 이런 장르의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쓴 글은 사실 니체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출발했고, 거기서 끝났다.

    "상처 내부에도 치유력은 있는 법…… 다음의 격언은 오랫동안 내 좌우명이었는데, 나는 이 격언의 출처를 식자적 호기심에는 알려주지 않았다 :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솟는다." ('우상의 황혼', 서문 중에서) 나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내 글이 선택될 확률은, 전국에서 나 혼자 투고했을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쓰고 싶은 대로 썼다, 오직, 뭔가를 간절히 쓰고 싶었기 때문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도, 있는 법이므로. 그러고 나서, 뭔가를 썼다는 사실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심한 감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세계 저편까지 몸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기쁨이었고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했다.

    나도, 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에 관해 떠들기는, 쉽다. 정말로 어려운 건,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건, 이거다 :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에 관한 것이,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에 접근하는 것, 극한까지.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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