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새로운 생명의 판타지아', 장건재의 '한여름의 판타지아'

by  서은주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단선적인 현실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무한한 시간의 틈을 열어 보이는 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시간은 흑백 필름의 무덤이다. 작가는 특유의 감각으로 주인 없는 그 무덤들의 목소리를 듣는 이다. 아마도 그것은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년)에서 장년의 겐지가 간직하고 있는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이고, 공무원이 된 유스케가 잃어버렸던 배우의 절실한 꿈을 되찾아주는 일일 것이다. 이때 첫사랑 요시코가 ‘왜 이제 왔어! 계속 기다렸는데’라 하는 간절함에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은 영화 속 김태훈의 영화(2부 ‘벚꽃우물’)를 넘어 영화 밖 장건재의‘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완성하게 하는 추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김태훈이 과거의 목소리를 불러내고 현란한 불꽃놀이를 상상하는 영화 안은 곧 장건재가 오래된 도시인 고조를 관찰하고 기록하려는 영화 밖과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그렇게 영화 안과 밖은 묘하게 일렁인다.

    그렇다면 장건재는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람, 곧 영매다. 영화 속 주인 없는 무덤들처럼 아득한 시간 속으로 묻혀버린 과거의 소중한 기억과 잠재적인 꿈들을 위무하고 또 통역해주는 존재. 장건재는 그러한 방식으로 오래된 고조의 소멸된 과거의 시간을 들추어 오늘의 시간으로 접합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바로 영화라는 ‘환타지아’의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인 김태훈과 유스케, 그리고 혜정은 장건재와 함께 비로소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 이 영화에 제작자로 참여한 가와세 나오미가 오랫동안 영화적으로 천착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이를테면 ‘하네즈’(2011년 개봉)를 통해 발굴 중인 아스카 땅의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자신의 터전에 묻혀있는 과거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계속된 영화적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공간인 고조, 바로 그 오랜 도시에서 다시 장건재가 과거 속 무의식의 함성을 읽어보려 한다. 그것은 마치 가와세 나오미처럼 ‘써지지 않는 것을 읽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스케와 혜정의 여행 중 로맨스를 담은 2부(‘벚꽃 우물’) 영화는 고조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김태훈)과 배우(박미정)의 다큐멘터리인 1부(‘첫사랑 요시코’)의 영화적 시간의 틈을 열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2부는 1부의 세계를 틈입한 하나의 흔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불꽃놀이이고, 판타지아다. 사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의 인연이 그렇지 않은가. 또 그렇게 바람 같고 먼지같이 금세 소멸해버릴지 모르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숙명이지 않는가. 흑백화면인 1부에 대해 2부 영화에 다채로운 색을 입힌 것도 바로 그 순간의 아련한 명멸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활짝 피었다가 순간적으로 떨어지는 ‘벚꽃’처럼 말이다. 남녀 간 사랑의 감정이란 것도 불꽃놀이처럼, 벚꽃처럼 환하게 빛나가도 갑자기 어느 순간 하염없이 사라지는 일회성의 사건에 불과하다.

    영화는 그러한 순간적 사건을 붙잡으려 한다. 사실 그러한 방식만이 새로운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장건재가 느끼기에 메마른 고목과 같은 도시, 고조는 다시 새로 태어나고 싶어 한다. 2부 영화(‘벚꽃 우물’)가 다시 1부의 배경이 되는 고조의 오랜 전설인 ‘벚꽃 우물’의 기억에 가 닿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생명, 즉 새로운 생성에 대한 꿈을 담은 ‘벚꽃 우물’이라는 전설은 바로 현재 고조시를 사는 사람들의 염원이기도 하다. ‘주리 카페’라는 곳을 사십년 째 한결같이 찾는 한 손님의 염원처럼 젊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없는 고조는 지금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흡입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1부에서 고조의 산업적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언급된 ‘말린 감’이라는 소재가 2부에서 유스케와 혜정을 교감하게 해주는 매개물이 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게다가 유스케는 현실(1부) 속 고조 사람들의 못 다 이룬 기억과 꿈을 체현하는 인물로 드러난다. 1부에서 배우가 되고 싶었고 몸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유스케가 2부에서는 바로 감 말리는 일을 몸으로 직접해내는 배우로 그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영화 상 그는 1부의 중년 겐지의 아들인 양, 혹은 어느 할머니의 손자 같기도 한 인물로 2부에 묘사되어 있다.

    그렇게 이 영화의 1부와 2부는 서로가 서로를 접합하고 또 호흡한다. 그리하여 한 편의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수축과 팽창을 하는 하나의 생명이 되었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장건재는 고조에 현재의 젊음을 수혈하고 싶었던 것이다. ‘벚꽃 우물’ 전설의 할머니처럼 다시 영화를 통해 고조의 기억과 꿈의 샘물을 길어다주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고조처럼 하나의 생명이 된 것이다. 영화를 통해 현실의 시간 틈으로 잠재적 기억을 열어 보이려 하는 것이다. 장건재라는 영매를 통해 이 영화는, 그리고 고조는 다시 새로운 생명의 판타지아를 꿈꾼다. 작가는 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서은주

    서은주

    1974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박사과정 재학

  • 김시무 영화평론가

    신춘문예 당선작을 뽑는 일은 TV프로그램 ‘복면가왕’과 비슷하다. 계급장 다 떼고 목소리만으로 승부하는 ‘복면가왕’처럼 응모작의 학력, 인맥을 몽땅 괄호 안에 넣고 선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장력과 작품에 대한 이해력, 독창적인 해석력이 기준이 됐다. 윤종빈 감독의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악역인 조윤을 의적 홍길동의 뒤집힌 버전으로 해석한 ‘망할 세상에서 만난 예기치 못한 운명’은 독창적이었다. 샘 멘데스 감독의 ‘007 스펙터’를 이 시리즈물의 전체 맥락에서 분석한 ‘살을 내주고 뼈를 가진 영화’은 전문성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데이미언 차젤레 감독의 ‘위플래쉬’를 새롭게 해석한 ‘위플래쉬, 플랫처가 아닌 앤드류를 중심으로’도 독창적이었다.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를 매체적 존재론이라는 특이한 방법론으로 해석한 ‘동시대의 매체적 존재론을 다시 쓰다’도 특색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들은 문장력의 매력이 부족했다.

    세 기준을 충족시킨 평론은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대한 관객 주체적 비평 ‘날마다 새롭고 언제나 그립다’였다. 무엇보다 이 글은 잘 읽힌다. 평자는 전편과 후편으로 구성돼 반복과 차이를 드러내는 홍상수의 작품에 대해, 그런 구성이 관객 주체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낳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 서은주

    서은주

    1974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박사과정 재학

    3개월 만의 낮잠이었다. 그 좋아하던 은행잎이 어떻게 물들어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많이 지쳐 있었다. 500년은 잔 것 같다. 일어나니 당선을 알리는 휴대폰 문자가, 떨어진 은행잎이 내게 온 것처럼 노랗게 떠 있었다.

    그동안 난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내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즉 내 ‘아버지들’은 떨어진 은행잎처럼 나를 홀연히 떠나 버렸다. 조금만 더 가르쳐주시고 가지. 아버지가 없는 나는 언제나 혼자서 그들을 공부했다. 헛발을 디뎌 넘어지기 일쑤였고, 넘어져도 혼자서 울음을 삼켜야 했다. 10여 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간신히 그들 곁에 닿을 수 있었다. 두 편의 글은 그 ‘틈’에서 외로이 썼다.

    가을부터 들뢰즈를 읽었다. 우체국에서 원고를 부칠 때까지만 해도 들뢰즈를 읽으려고 화요일마다 설쳤던 그 아침 댓바람들이 글을 쓰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선이 되고 다시 글을 읽어보니 그 안에는 영화공부 하느라 애썼던 10년의 과거가 새겨져 있었다. 오롯한 내 것이란 없었다. 공부를 한다는 건, 글을 쓴다는 건 진정 나를 떠나가는 연습이어야겠다. 내가 작아져서 얻을 수 있는 ‘틈’만이 나를 채울 수 있는 것임을 새로 만난 아버지들이, 그 은행잎이 가르치고 있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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