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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하는 토피아(topia), 복권되는 생활-이현승의 '생활이라는 생각'과 고두현의 '달의 뒷면을 보다'

by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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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기율들

    여기 신분증 하나가 있다. 이 신분증에는 우리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고,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시간적 기호(생년월일)와 공간적 점유(주소)가 표기되어 있다. 우리는 신분증 하나로 현실의 거의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심지어 신분증은 우리 없이도 우리의 일을 처리해낸다. 신분증의 위력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가상 세계에서도 유효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본인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신분증에게 양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안다. 기꺼이 우리는 신분증에게 우리를 의탁하고 스스로 은폐되고자 한다. 신분증이 활보하는 거리에서 우리는 익명의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 형용모순의 생활이 이천년대 시적 담론의 중요한 기율처럼 활보하는 것도 더 이상 특별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그 거리에서 유기체적 생활을 대체해버린 이미지(신분증)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중이다. 절정의 포즈(pause)를 통해 우리는 생활을 이미지(신분증)로 위조했고, 이 명백한 이미지가 우리의 생활을 판단, 결정하도록 방기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본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양산하는, 원본 없는 삶을 통과하는 중이다. 우리는 스스로 유령이 되어 백수, 청춘, 실업, 폭력, 불구, 장애, 질환, 병증, 이혼, 성소수자 등에 관한 시적 담론에서 구체적 맥락을 은폐시켜버렸다. 그것들은 비정규직처럼 시에서 시로 흘러 다닌다. 이 시에서 복무하다가 의무복무 기간이 만료되면 또 다른 시를 찾아 시적 계약서를 작성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유동성으로 우리의 감각은 현혹되고, 생활의 진경(眞境)은 조타수를 잃고 현란해진다. 어리둥절해서 우리는 환시와 환청의 세계에 자주 노출된다. 어느덧 “이미지야말로 건강한 생활”이라는 아포리아적 선언에 우리는 기꺼이 심장을 내어줄 태세다. 이 새로운 현상이 일견 낯선 미학적 발견으로 추인되면서 부재하는 존재의 이미지가 정치적 위상을 확보했다는 증언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그렇다. 시가 시?공간 속에서 생활의 구체적 적층을 통해 구성된다는 오랜 관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시가 역사 앞에서 쉽게 휘발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을 간절하게 믿고 싶어진다. 이 지점에서, 시는 원본으로서의 생활을 회복하고 그것의 내밀한 충동과 심미적 작동 방식을 복귀시켜야 한다는, 낡은 수첩 한 귀퉁이에 흘려 쓴 오랜 다짐을 들추어볼 필요가 있다. 벤야민이 말했지 않은가. 복제된 이미지는 아우라를 붕괴시킨다고. 아우라의 복원, 그것은 생활 원본을 복권시키는 일이다. 아우라의 복원은 2000년대 시의 불가해성과 반향 없는 울림으로부터, 그리고 노출 과잉의 이미지 왜곡으로부터 서정시의 권리를 복권시키는 작업이다. 복제 불가능한 아우라야말로 시가 존재하는 제1원리라고 우리는 믿어왔지 않은가.

    시적 발화의 차원에서 고두현과 이현승의 최근 시집은 생활의 원본을 미적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얼핏 두 시인의 시적 정향점이 상이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생활의 저의와 그 이면에 놓인 비의를 탐침하고, 그것의 굴곡을 입체적으로 감각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시인의 시적 항로는 좌표적 동일성을 확보하고 있다. 괜찮은 서정시가 생활의 폐허를 실감하고, 그러한 경험의 고유성에 아우라 즉, 생명을 부여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두 시인이 발화하고 있는 생활 항체로서의 시는 그 값을 충분히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이현승의 경우: 발굴하는 피부 호흡의 정치성

    이현승에게 생활은 ‘피부’에서 감각되고 ‘생각’을 통해 명확해진다. 구체적 질료인 피부 감각과 그것들을 취사선택한 추상으로서의 사유가 조응할 때, 우리는 존재론적 고통의 윤리를 활성화할 수 있으며, 인간이란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을 갖고 있다는 진술은 입증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현승의 시에서 생활의 고통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비정함을 때때로 환기하게 되며, 그 비의의 잠재적 폭력에 손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뇌관을 장착한 채 떠도는 풍문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심정으로, 순간순간 통과해가는 생활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이현승은 생활의 뇌관을 해체하고자 시도하지도 않고 생활로부터 달아나지도 않는다. 그는 폭발의 순간에 그 폭발을 온몸으로 껴안음으로써 차라리 스스로 폐허가 되는 생활을 선택한다.


    피와 땀으로 이룬 모든 것을

    세월은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빼앗아버린다.


    내버리다시피 판 주식을 사서 대박 난 사람처럼

    불행은 감당할 수 없는 바로 그 자리를 비집고

    재앙은 불평등에 그 본성이 있다.


    누군가 지금 그에게 가벼운 안부라도 묻는다면

    바늘로 된 비를 맞듯 그는

    땅에 붙들리게 될 것이다.

    화산재를 잔뜩 뒤집어쓴 얼굴로.

    —‘심문’ 부분


    ‘재앙은 불평등에 그 본성’을 두고 있다는 윤리적 인식은 생활의 비정함을 충분히 폭로한다. ‘피와 땀’으로 점철된 생활은 간단없이 탈취당하고, 그 폐허의 자리에는 이율배반적인 ‘불행’이 들어선다. 불행이 이율배반인 이유는 그것이 상대성을 지닌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버리다시피 판 주식을 사서 대박 난 사람’이 구축하는 구조는 제로(0)를 중심으로 음수(-)의 존재와 양수(+)의 존재가 대칭적으로 양립하지 않는 데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생활은 균형의 긴장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소멸이 행복이나 행운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암묵적 동의에서 비롯되었다. 생활의 중심이 두 존재 세계의 어느 지점에 놓이더라도 ‘불행’은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생활의 게임에 참가한 우리가 ‘불행’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이 극도의 무기력이 인간 본성이라고 말한 사람은 하이데거였다. 그는 인간이 세상을 향해 ‘내던져진’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이 자의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잘못을 저지르기도 전에 미리 벌을 받는’(‘자기공명조영술’) 것과 다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패란 얼마나 안온한 집인가’(‘다단계’)라는 자기기만적 해명의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땅에 붙들리듯” 최저의 순간을 저인망처럼 훑어나가는 가운데 매번 아슬아슬한 뇌관을 운명적으로 건드릴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한다. 당연히 생활의 뇌관은 폭발하고, 그 폭발의 결과로 우리는 ‘화산재를 잔뜩 뒤집어쓴 얼굴’이 된다. 그 얼굴이, 이를테면 세상에 ‘내던져진’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불행’한 표정일 것이다.

    생활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바늘로 된 비”를 직접 감각하는 피부로부터 발생한다. 그런데 피부는 놀랍게도 온통 예외 없는 통점들로 가득 차 있다. 이 통점들은 생활을 호흡하면서 피부 저변에 놓인 살과 핏줄과 그리고 한층 궁극에 이르러서는 잠재적으로 충동하는 욕망들까지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현승에게 피부 호흡으로 감각되는 생활의 작동 방식은, 이를테면 ‘고통보다, 통증보다 분명한 고독이 있을까/ 짙푸르게 자라나는 풀숲을 볼 때마다/ 털이 자라나는 집중된 느낌, 두렵다.’(‘누가 이 구불구불한 생에 주석을 달 수 있단 말인가’)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고통’이나 ‘통증’에 대한 피부 감각으로부터 그 구체적 질감이 휘발된 사유로서의 ‘고독’에 이르는 여정이기도 하다. 이 여정은 ‘털이 자라나는 집중된 느낌’을 사유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두렵다’는 윤리적 인식을 승인한다. 이 승인의 주체는, 그러나 생활하는 주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이다. 이현승이 피부 호흡을 통해 환기하고자 하는 생활은 “교수대 위 목 꺾인 사람이 지린 오줌 같은/ 어쩔 수 없는 육체.”(?덩어리?)라는 구체적 질감을 감각한 후, 그 감각을 “결국은 생각이 없어지는 방식으로”(?부끄러움을 찾아서2?) 부조해 낸 것들이라는 점에서, 생각인은 생활인의 “피와 오줌이 정수된 형태이며 망명의 은유”(?봉급생활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피와 오줌’이라는 구체적 질감으로서의 생활은 ‘정수’라는 일종의 균질화 과정을 거침으로써 삶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활의 피부 호흡이 사라진 사본으로서의 이미지란 생활이 망명해버린 ‘은유’라는 이현승의 인식적 기율을 목도할 수 있다.

    원질로서의 ‘생활’과 매질로서의 ‘생각’이라는 은유도식은 이현승 시의 미적 구도 앞자리에 놓여 있다. 그럼으로써 ‘생활’의 감각적 세목과 구체적 질감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각’이 서정시의 반성적 동일성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점을 실증할 수 있고, 최종적으로 이현승은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은/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뜨거운 사람들2’)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은 피부 호흡을 통한 감각일 테지만, 사실 그마저도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다. ‘확실’이라는 감각적 구체와 ‘확신’이라는 반성적 생각의 상호구축이 성립할 때, 우리는 이현승 시가 갈파하고 있는 것처럼 서정시의 구체적 생활을 복권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발화들이 복권된 생활의 실례에 속할 것이다.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네./ 나는 또 잠수정 생각,/ 이대로 잠수한다면 아마도 물이 새겠지./ 속절없이 채워져 가라앉겠지.

    —‘양말’ 부분


    밤마다 이가 자라는 쥐처럼/ 손끝이 가렵다./ 가려워서 부끄럽다.

    —‘일생일대의 상상’ 부분


    여기 통증은 조금 안다는 사람들은 다 모였는데/봉인된 저 상자는 누가 무엇으로 열었는가./하긴 아픈 사람만 봐도 같이 아픈 곳이 천국일 테지.

    —‘천국의 아이들2-이영광 형께’ 부분


    생활을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즉물적 반응을 교환하는 일은 아니다. 생활은 생각을 증폭시키고 생각은 생활에 실감을 준다. ‘구멍 난 양말’은 생활의 구체적 실제로 작동하며, 이것이 상상적 증폭을 통해 ‘잠수정’으로 실현되면서 우리의 생활을 “속절없”는 것으로 소환한다. 그러므로 ‘속절없음’이란 ‘구멍 난 양말’이 증폭된 구체적 실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려움’에서 ‘부끄러움’으로 증폭되는 일도 그렇고, ‘통증’을 통해 ‘천국’을 상상하는 경우도 피부 호흡을 통해 감각하는 구체적 실감을 부조해내는 방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현승 시에서 생활의 실감은 아직 정치적이지 못하다. 이 발언은 이현승 시가 서정시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울림의 농도를 충분히 머금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정시의 본령에 자기 동일성이 놓여 있다는 데 다른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 같은 동의는 서정시가 자칫 자기 고립적 동일성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동일성’이라는 말이 지닌 배타적 속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서정시가 적어도 허공을 향한 중얼거림이 아니라고 한다면, ‘동일성’은 타자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지평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은밀한 욕망이 정치성일 것이다.

    이현승 시는 공교롭게도 이 정치성의 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사유(思惟)의 사유화(私有化)에 있다. 생각하는 일이 사적인 영역임에 틀림없다고 해서 정치적 변방성이 서정시에 충실하게 복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현승은 ‘한때, 그리고 여전히 정치적 콘크리트를 꿈꾸는 자들,/기꺼이 한 몸 시멘트가 되고자 했던 자들의 음성처럼 목쉰 소리.’를 향해 ‘당신하고는 말이 안 통해를 통과’(‘칸나는 붉다’)해버린다. 정치적 변방성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이현승은 ‘당신하고는 말’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통과’는 구체적 생활이 피부 감각에서 촉발하여 반성적 생각에 이르기까지의 순차적 궤적을 형성한다. 이 궤적은, 이현승의 어법을 따르자면, ‘누구에게나 순간이동’인 ‘통과’이며 ‘불시착한 나의 삶’(‘웰컴 투 맥도널드’)의 중요한 증거로 제출된다.


    맹렬하게 가속도를 더하던 빗줄기들은

    빙점을 통과하면서 가벼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생각난 문장처럼 눈발은 성기고

    검은 저녁의 재가 석양을 뒤덮자

    순식간에 북적이는 거리가 만들어졌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들이 갑작스러운 눈발에

    하나같이 낭패감으로 허둥대는 길에서

    나는 큰아이가 다니는 병원의 소아과 선생을 지나쳤다.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넣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그녀는 잔뜩 앞으로 쏠린 채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눈’ 부분


    생활은 유물론적 시?공간의 지점을 ‘통과’해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생활은 매 순간 그 종착점을 알지 못하고 달려간다. 그런데 알다시피 ‘통과’의 순간에는 단연코 예측하지 못할 우연성이 작동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은 예상되는 변곡점들을 순순히 ‘통과’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빗줄기들’이 ‘빙점’을 통과하는 찰나에 질적 전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이현승 시에서 생활은 변곡점의 순간마다 ‘속도’를 상실하고 ‘무게’를 획득한다. 생활에서 ‘속도’란 자폐적인 이미지의 질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속도’가 ‘무게’로 치환됨으로써 우리는 생활의 구체적 질감을 비로소 회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연히 만난 ‘소아과 선생’이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넣’고는 그 ‘무게’에 짓눌려 “잔뜩 앞으로 쏠린 채 걸어가”는 것은 틀림없는 생활이다. 우리는 그러한 생활을 ‘터널과 터널 사이 구간의 운전자’(‘인정도 사정도 없이’)가 되어 끊임없이 ‘통과’한다. ‘통과’ 중인 우리는 ‘위험과 안도 사이에서 여전히 모험 중인 사람들,/ 떨어질 높이를 안은 채 두렵고 즐거운 사람들’(‘롤러코스터’)로서, 롤러코스터의 ‘속도’를 언제라도 추락의 ‘무게’로 되돌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현승 시는 이 같은 사람들의 생활을 피부로 호흡하면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기 위한 시추공을 곳곳에 박아놓고 있다. 이 탐색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지점으로.’(‘사라진 얼굴들’), 다시 말해 무한 복제되는 사본의 위력 앞에서 그 정치성을 잃어버린 원본의 생활로 돌아갈 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이현승 시에서 그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별’(‘통행료’)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생활은 ‘원래부터 누군가에게 증강현실’(‘평균적인 삶-증강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적 발화의 내밀한 욕망을 생활로 복권시키는 일은, 적어도 이현승의 경우에는 원본으로서의 구체적 질감을 증폭시키는 일이 되며,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이현승 시의 격조는 그러한 증폭의 폭발력을 통해 서정의 섬세한 비의적 감각을 실감으로 폭로하는 ‘통과’의 순간에 있다고 할 것이다.


    3. 고두현의 경우: 복기하는 생활의 에피파니

    고두현에게 생활은 원본을 다시 살아가는 일이다. 그가 ‘처음 아닌 길 어디 있던가’(‘초행’)라고 묻는 일은, 그러므로 그 길을 다시 한 번 가보고자 하는 내심의 발화이다. 한 번 살아서는 도저히 간파할 수 없는 생활의 비의를 그는 기억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다시 살아내고자 한다. 이러한 생활에의 기획이 의도하는 바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처음 간신히) 살아본 생활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냄으로써 서정시의 긍지는 ‘간신히’와 ‘제대로’의 자기 동일성의 자장 안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이를 위해 고두현은 살아본 생활을 ‘복기’하는 것으로 자신의 시적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생활을 되짚어 가는 일은, 그러나 고두현에게 원본을 사본화 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반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 생활을 산다는 일은 다시 사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도 나처럼 한때는 누구 손에서

    땀에 젖은 숫자를 세며 마음 졸이고

    또 한때는 그리운 사람의 음성 타고

    전화박스에서 몸을 떨기도 했겠지.


    앞서 간 사람들 숱하게 밟고 간 흙바닥에

    풀 죽어 묻혀 있던 너를 보는 순간

    얼마를 기다렸을까.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키 큰 나무 올려다볼 때마다

    손금 사이로 나직나직 말을 건네는 너.

    오, 우리에게도 등불처럼 두 손 오므리고

    함께 노숙의 밤을 밝히던 그런 시절이 있었네.

    —‘동전을 줍다’ 전문


    고두현의 경우 이현승의 피부 호흡과는 다른 방식의 생명 감각을 보여준다. 이현승이 외부 세계의 첨예한 감각을 수용하고 그것을 시적 감수성의 상상력으로 치환시킴으로써 폭발력 있는 서정을 구축하고 있다면, 고두현은 일종의 뇌호흡을 통해 폭발된 감각을 되새김하고 그 새김의 무늬를 생활의 의장(意匠)으로 착종해낸다. 고두현이 시인의 말 형식으로 시집 앞머리에 배치한 ‘10년 만이다. 오래 벼렸더니/ 둥글어졌다.// 사는 일/ 사랑하는 일/ 군말 버리니/ 홀가분하다.’는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서정시의 본질이 시간에 대한 경험 형식을 반영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군말 버리’기까지 투여된 ‘10년’이라는 시간성은 고두현 시를 지배하는 기율이 되기 때문이다.

    ‘동전을 줍다’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고두현에게 시간성은 ‘한때는’이라는 회고적 시선을 통해 확보된다. 고두현은 시간의 저편(과거)을 시간의 이편(현재)에서 끊임없이 새김질해가면서 ‘그런 시절’을 호흡한다. 반성적 사유 형식으로 제출되는 뇌호흡은 시적 대상을 구체적 감각으로 발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잔상을 보호하고 시간 저편의 잔상을 시간 이편에서 새롭게 발견해낸다. 이러한 존재론적 갱신은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시간 저편을 복기해냄으로써 이편의 시간성은 뇌호흡의 절정, 다시 말해 에피파니적 전율의 순간에 도달한다. 고두현은 이 순간의 정서적 폭발을 이런 식으로 오래 전율한다. “새로 생긴 파독전시관서 앳된 처녀 여권 사진과/ 고국에 보낸 송금 영수증, 월급 명세서/ 손때 묻은 흑백 영상 보고 나면 눈물 쏟게 되지요”(‘독일마을에 가거든-바래길 연가·화전별곡집’)

    고두현이 에피파니적 순간을 즐겨 구조화한다는 사실은 그가 시적 감수성으로서의 생활을 대하는 태도와 연계된다. 그가 ‘필사(筆寫)란 누군가를 마음에 새겨 넣는 일/그 속으로 가장 깊어 들어가는 것’(‘너를 새기다-바래길 연가·앵강다숲길’)이라고 진술할 때, ‘필사’는 곧 ‘생활’의 다른 이름이다. 그에게 생활은 ‘누군가를 마음에 새겨 넣는 일’이자 ‘그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는’ 일이다. 이 과정은 고두현에게 생활을 다시 사는 일이고, 다시 사는 생활의 호흡법은 당연히 되새김으로서의 뇌호흡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원본으로서의 생활을 새롭게 ‘필사’함으로써 고두현은 적층된 서정의 시간성을 최대치로 증폭시킬 수 있으며, 바로 그 찰나를 되새김질로 복기함으로써 고두현은 생활의 비의를 한 꺼풀씩 벗겨낼 수 있게 된다. 이 벗겨냄의 순간이 고두현의 시에는 장관을 이룬다.

    ‘이제는/ 잔가시 골라 건넬/ 어머니도 없구나.’(‘혼자 먹는 저녁’), ‘내 몸 중 가장/ 겸손하고/ 거룩한 흉터.’(‘거룩한 상처’), ‘보드라운 이불 밑으로 반쯤 비어져 나온/ 저 성스러운 발의 맨 얼굴’(‘뒤꿈치’), ‘왜 그때는 몰랐을까// 내가 그토록 가닿고 싶었던/ 바다 건너 땅 끝에서/ 여태까지 가장/ 오래 바라본 곳이/바로 여기였다는 걸.’(‘집 우(宇), 집 주(宙)’) 등 고두현이 발견해 낸 생활의 비의는 다양하다. 이러한 인지적 발견의 충격이 고두현 시의 한 켜를 형성한다. 그러나 고두현 시의 진경은 그러한 발견에 이르는 노정의 간결함과 에피파니적 순간의 명징함에 있다. 이러한 염결성은 생활을 복기하는 형식으로는 최선이다. 그의 표현대로 복기란 생활에서 ‘군말 버리기’ 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방법은 다음 시에서 그 내용과 형식을 이룬다.


    풍천에 닿기 전까지

    온몸이 투명할 것

    심장만 바알갛고

    나머지는 보이지 말 것


    풍천에 닿을 때까지

    몸 비우고

    마음 비우고

    눈만 맑게 헹굴 것


    담수를 만나는 순간

    무엇보다

    염도를 낮출 것

    소금기를 전부 뺄 것.

    —‘다시 풍천(楓川)을 위하여-댓잎장어’ 전문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어름을 풍천(楓川)이라고 이르니, 장어에게 그곳은 생활의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장어는 담수에서 부화하여 소금기 가득한 해수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다 알을 낳기 위해 담수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풍천은 장어가 담수어에서 해수어로 혹은 해수어에서 담수어로 존재론적 갱신을 이루는 공간이다. ‘양지 바른 나뭇가지/ 참새 떼/ 쪼르륵// 바닷가 성벽 위/ 갈매기 떼/ 끼루룩// 햇살 눅을 때까지/ 줄지어/ 앉아// 딱 제 몸만큼 유지하는/ 저 그림자의/ 간격.”(’절묘한 사이‘ 전문)을 확보해내는 공간이 풍천인 것이다. 그곳에서 고두현은 ’난생/ 처음 편지할 때/ 썼다가 지운,”(‘자기 앞의 생’) 저편의 생활을 새롭게 복기하기 시작한다.

    이때 고두현이 복기하는 생활은 대부분 ‘잠깐 스친 네 눈빛’(‘입춘대설’)이거나 ‘이 짧은 진동 하나’(‘문자 메시지’) 혹은 ‘누군가 일순간에/ 베어 버’(‘별을 위한 연가’)린 것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되어 있는 순간들이다. 장어가 해수에서 담수로 혹은 그 역으로 이행해갈 때 ‘풍천’을 ‘통과’하는 그 정점의 생활을 복기함으로써 고두현은 담수어에서 해수어의 (살아본) 생활을 혹은 그 역으로서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복원해낸다. 여기서 우리는 고두현이 복기하는 생활의 방법적 기율이 자기 갱신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그 실증을 다음 시를 통해 확보하게 된다.


    닿는 건

    순간이지만


    머무는 건

    오래인


    저 다리미 속

    잉걸불.

    —‘첫눈’ 전문


    복기 대상으로서의 생활은 ‘순간’적으로 우리를 스치듯 ‘닿’고 사라져버렸지만, 그것들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생활에 ‘오래’ 머무는 감각적 충격을 남겼다. ‘순간-오래’의 간격 구도를 통해 고두현은 그러한 생활의 비의를 절묘하게 간파해낸다. ‘순간’과 ‘오래’의 시간적 간극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저 “잉걸불”은, 그것이 환기하는 다양한 상징 구도 속에서 인간 존재를 새롭게 갱신해낸다. 풍천을 통해 기수와 담수를 통합해낸 것처럼, 그리고 ‘순간’과 ‘오래’의 충돌을 통해 ‘잉걸불’을 발화해낸 것처럼, 고두현은 (처음 간신히) 살아본 생활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냄으로써 인간 존재의 ‘저 은밀한 눈길’(‘달빛, 창, 은행나무’)로부터 단숨에 ‘오, 은하의 물결에서 막 솟아오르는/ 너의 눈부신 뒷모습’(‘달의 뒷면을 보다-바래길 연가·섬노래길’)을 포착해낸다. 그 “눈부신” 생활이 ‘천년을 하루같이/하루를 천년같이.’(‘천년을 하루같이-물건방조어부림1’) 사는 영속적 시간성을 획득하는 건,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4. 토피아(topia)로 돌아오기

    고두현이 복기하고자 하는 구도가 생활의 영속적인 자기 갱신에 있다는 사실은, 이현승이 감각적 실제를 ‘통과’해가는 생활과 다르지 않다. 이현승이 생활의 최전선에서 몸소 피부 호흡으로 생활을 돌파해내는 역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고두현은 ‘통과’한 생활을 추수하여 그것들에게 생명의 영속성을 부여해낸다. 이러한 ‘통과’와 ‘갱신’의 시 쓰기가 생활 원본과의 감응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신분증을 다시 들여다보자. 갱신되지 못한 신분증에는 우리 존재를 증명하는 ‘지금 여기’가 부재한다. 부재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지금 여기’가 토피아(topia)였다고 우리는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권력을 승인 받은 신분증은 U- 혹은 Dys-의 세계에서 우리의 생활을 소진시키는 데 골몰해 왔다. 이천년대 시들에서 상상력의 피로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유토피아의 환상과 디스토피아의 몽상을 직조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버둥거려도 발이 땅에 닿지 않’(이현승, ‘사라진 얼굴들’)는 U- 혹은 Dys-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생활이 결코 “물 밑에서 혼자 몸 뒤트는/강심의 뿌리”(고두현, ‘하룻밤에 아홉 강을 건너다’)에 닿을 수 없다. 이 명명백백한 진리 앞에 원본 아닌 세계를 최선으로 살아가는 일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망각의 윤리가 혹은 아우라의 붕괴가 2000년대 우리 생활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동시대의 이면을 응시하는 우리의 눈에 자꾸만 남루한 생활의 원본이 아른거린다. 지금 우리는 “보드라운 이불 밑으로 반쯤 비어져 나온/ 저 성스러운 발의 맨 얼굴”(고두현, ‘뒤꿈치’)을 목도하듯, 가상(u-/dys-)의 층위에 포위된 실재(topia)를 목격하고 있다. 실재는 쉽게 진력이 나고 회복이 더디며 아무리 살아도 연습이 되지 않는데, 그렇기 때문에 실재는 비밀스러운 숨구멍들로 가득한데, 가끔은 질식의 순간들이 도래하여 희미해지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실재가 아주 파기되는 경우는 드문데…, 그렇다면 이 막무가내로 살아지는 “맨 얼굴”의 생활을 한몫에 잡아챌 종족은 어디에 있는가. 아울러 신분증 혹은 이미지에 양도했던 생활의 채권을 누가 회수해 줄 것인가.

    그 종족은 시인들이라고, ‘맨 얼굴’의 투명한 생활을 우리에게 돌려줄 수 있는 사람들도 우리시대 시인들이라고 목청을 돋우어 선언해주어야 하겠다. 토피아에서 생활의 실재를 발굴해내는 이현승의 상상력이 그렇고, 발굴된 생활을 원본으로 복원해내는 고두현의 윤리가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소진하는 이미지의 복제가 아니라, 적층된 시간을 닦아대며 생활의 굴곡에서 삶의 비의를 캐내고 있는 두 시인의 고고학적 호흡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문신

    문신

    1973년 여수 출생

    전북대 대학원 어문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 권성우·권혁웅 문학평론가

    문학작품과 비평의 관계는 선행텍스트와 부가텍스트의 관계가 아니다. 둘의 관계를 하나의 작품과 다른 하나의 작품 사이의 관계로 봐야 한다. 둘의 공통성은 선행텍스트를 추수한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신비주의의 영역이다. 비평의 자의식이란 이 신비주의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세 편을 주로 논의했다. ‘살아 있는 언어들의 밤’은 언어를 해부대 위의 몸처럼 다루는 이준규 시의 한 특징을 선명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언어=시’라는 전제가 글의 끝에서도 재진술될 뿐이었다. ‘수많은 갈라테이아들의 향연’은 갈라테이아라는 신화적 인물을 통해서 이수명의 작시법(作詩法)을 살펴본 글이다. 생명 없는 텍스트가 어떻게 피와 살을 가진 형상을 낳는가를 보여주는 멋진 비유다. 그런데 정작 이수명 시의 고유한 특징에 관해서는 해명된 것이 없었다.

    ‘발굴하는 토피아, 복권되는 생활’은 ‘지금, 이곳’이라는 세계의 세계성과 ‘생활’이라는 삶의 실감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현승과 고두현의 시를 해명하고 있다. 섬세하고 안정된 문장과 견결한 세계에 대한 비평적 믿음이 결합된 평론이다. 무엇보다도 대상으로 삼은 시편들의 장점을 부조해내는 역량이 뛰어났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문신

    문신

    1973년 여수 출생

    전북대 대학원 어문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지금보다 심장의 온도가 0.3도쯤 높았던 무렵에는 시를 쓰고자 안달했었습니다. 시를 읽고 생각하고 쓰는 동안 이번 생이 제법 윤택하구나, 여겼습니다. 시들해지는 순간도 있어서, 시집을 펼쳐놓고 고개 갸웃해지기도 했지요. 그런 날에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사유가 갈피를 접어놓은 시편들 속으로 스미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오래 팽개쳐두었다가 못내 미안해 다시 펼쳐들면, 한참을 고개 끄덕이다가 부끄러움으로 낯이 붉어졌습니다. 그 얼룩의 기미가 시 읽기의 무성의함 탓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 비평은 잘못 읽어낸 것보다는 잘 읽지 못했던 시들에 대한 참회록이어야 합니다. 숱하게 읽어왔지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시들에게 바치는 가장 나중의 글로 제 비평을 설계하고자 합니다.

    ‘성실하게 읽어내기’는 전정구 교수님께서 늘 강조하셨죠. 새기겠습니다. 읽고 쓸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눌변에 귀 기울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는 야무진 비평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삐딱하게 읽고 엉뚱하지 않게 쓰겠습니다. 쓰다가 까무러치는 순간이 오면, 눈 부릅뜨고 갈피와 갈피를 헤쳐 진저리치도록 시를 읽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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