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관객이어야 하는가 :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나타난 윤리의 초과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일어났던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 프리모 레비
1. 악의 평범성으로 압축되는 섬세한 미장센의 향연
오프닝에서 타이틀과 함께 떠오른 검은 화면과 기괴한 소리는 약 3분 동안 지속된다. 타이틀은 페이드아웃 되고, 알 수 없는 섬뜩한 소리만 남는다. 관객은 암전 상태로 오로지 청각에 집중하면서 사운드를 유추해야 하는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크리스티앙 메츠는 관객들이 영화를 왜 보는지에 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메츠는 그 이유를 동일시와 관음증과 나르시시즘과 페티시즘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카메라와 동일시하면서 타인을 관찰하는 관음증과 전지적 주체라는 나르시시즘, 결핍의 작용인 페티시즘이 영화를 보는 쾌락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이 오프닝에서는 관객들이 영화를 왜 보는지에 관한 관습을 배반한다. 암전 속에서 흐르는 음향만으로 관객은 극장의 어두움과 스크린의 가득 찬 검은 이미지와 움직일 수 없는 부동성에 의해 쾌락이 아닌 긴장 속에 놓이게 된다.
오프닝의 검은 화면과 기괴한 음향은 마주보기로 엔딩에서도 적용된다. 루돌프 회스가 어두운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검은 화면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뮤트 후 섬뜩한 소리가 한동안 이어진다.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더라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섬뜩한 소리의 정체를 내내 유추하면서 엔딩까지 왔는데, 다시 암전된 화면을 마주보면서 그 소리의 진원지를 감각하고 상상하는 데 남은 힘을 소비하게 된다. 더구나 오프닝은 서사가 시작되기 전의 긴장에 가깝다면, 엔딩은 서사의 결말을 보여주고 난 후의 캄캄함이기에 강렬한 공포에 가깝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는 섬세한 미장센의 향연이다.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섬세하게 조형화된 이 영화는 무엇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가로지르는 담장을 기준으로 안과 밖, 내화면과 외화면을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든다. 담장 안의 회스 부부의 세계에는 안정과 평화가 있고, 새소리와 아이들 소리가 있다. 담장 밖의 수용소에는 공포와 죽음이 있고,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있다. 카메라는 담장 밖을 결코 비추지 않지만, 아우슈비츠라는 상징적 지명이 관객에게 선험적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공포심을 선사한다.
카메라는 보여주지 않기에 관객의 상상은 더욱 압도적으로 커진다. 담장 안의 이미지는 명징하지만 담장 밖의 이미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담장 안의 사운드 역시 명료하지만 담장 밖의 사운드는 희미하게 들려서 이중적이다. 관객은 담장 안의 이미지를 집중하려고 해도 담장 밖의 굴뚝에 검붉은 연기가 나는 모습이나 초소에 서 있는 경비병의 모습을 의식하게 된다. 또한 인물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소음처럼 번지는 총소리와 울음소리, 고함지르는 소리와 소각장이 운행하는 앰비언스에 귀기울이게 된다. 타자의 고통스러운 삶은 파편처럼 흔적으로만 드러난다.
타인의 고통은 표상이 불가능하다는 듯, 감독은 사건으로서의 증언을 피해자에게 맡기지 않는다. 그저 관조적 관찰자처럼 끌려가는 희생자의 실루엣, 잿더미로 변해 강가로 떠내려오는 유골의 단편적 흔적으로, 그저 터져나오는 사운드인 중얼거림과 침묵, 한숨과 입김으로, 울부짖는 소리와 비명소리만 간간이 드러낸다. 관객은 보이지 않는 이미지 너머를 상상하고, 들리지 않는 사운드 너머를 상상하며 긴장과 공포심을 극대화하게 된다.
내화면의 이미지와 외화면의 사운드가 괴리를 일으키는 긴장감은 영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소환한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일치하지 않는 이 불쾌한 긴장감은 세 가지 층위로 나뉜다. 첫째, 이미지와 사운드가 서로 다른 시간에 전환될 때(J컷과 L컷) 둘째, 이미지 가운데 외화면의 사운드를 전반적 소음으로 들려줄 때 셋째, 카메라의 위치를 의도적으로 돌려서 보이지 않는 이미지에 관해 들려줄 때다.
카메라는 회스의 구두를 챙겨서 씻고 있는 하인과 술을 준비하고 구두를 가져오는 하녀를 따라가지만, 사운드는 하인과 하녀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사운드는 캐나다와 헬가 이야기를 나누는 헤비히트와 이웃의 대화에 집중됨으로써(J컷과 L컷) 유대인으로 보이는 하인과 하녀의 이미지는 관객에게서 곧 배제된다. 이와 같은 장면은 영화 곳곳에 드러나는데 회스 집에서 일하는 하인과 하녀의 이미지는 언뜻 지나가 탈각되고, 사운드는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
또한 수용소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옷을 나눠준 후, 헤비히트는 방안에서 모피코트를 입어보며 립스틱을 바른다. 이 장면에서 외화면의 사운드는 총소리와 비명소리, 개 짖는 소리와 울음소리로 침입한다.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고 불린다며 웃는 헤비히트 뒤로 총소리와 개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러한 외화면의 사운드는 영화의 전체 이미지를 압도할 정도로(헤비히트의 엄마가 견디지 못하고 아침 일찍 떠날 정도로) 끊임없이 지속된다.
CCTV처럼 관찰자적 태도를 유지하던 카메라는 영화 안에서 몇 안 되는 트래킹숏을 하는데, 정원을 소개할 때 헤비히트와 그녀의 엄마는 수용소 담장을 따라 걷는다. 헤비히트는 정원의 식물과 풀장과 자신이 일구어 온 텃밭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관객이 집중하게 되는 이미지는 담장 밖의 수용소 풍경이다. 반대로 “저게 수용소 벽이니?”라고 묻는 엄마와 헤비히트를 촬영한 숏에서 카메라는 담장 밖 수용소를 등지고 서서 두 인물만을 촬영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내용은 오묘하게 비틀린다.
영화는 화이트아웃, 레드아웃, 블랙아웃의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와 외화면에서 유입되는 강력한 사운드를 절합한다. 영화의 초반에서 클로즈업된 루돌프 회스의 얼굴 뒤로 기차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외화면에서는 기차가 도착하는 소리, 누군가를 때리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하다. 검은 연기와 회스의 얼굴은 옅어지고 화면은 화이트아웃된다. 흰 화면 위로 고통에 흐느끼는 소리는 한동안 지속된다. 영화의 중반에서 헤비히트와 그녀 엄마의 산책 후 카메라는 희고, 노랗고, 주황빛과 빨간 꽃들을 클로즈업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빨간 꽃은 옅어지고 화면은 레드아웃된다. 빨간 화면 위로 아기 우는 소리와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한동안 지속되다가 완전히 뮤트된다. 영화는 이미지가 없는 이미지의 상태로, 화이트아웃되고 레드아웃되고 블랙아웃된 정지 이미지의 상태로, 기괴하고 고통에 가득 찬 음향을 접속시킨다.
아이러니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괴리 사이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악의 평범성으로 요약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이란 특별한 사람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평범한 개인들의 맹목적인 순응과 비판적 사고의 부재에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프리모 레비는 “나는 수용소에 있을 때 단 하나의 괴물도 보지 못했다. 대신 나는 독일에 파시즘, 나치즘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우리 같은 사람들을 보았다.”(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아렌트의 서술을 뒷받침한다.
헤비히트는 엄마가 아침 일찍 떠난 것을 발견하고 화가 나서 하녀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너 따위 아무도 모르게 재로 만들 수 있어”라고 말하며 식사를 이어간다. 루돌프 역시 파티장에서 “가스로 몰살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지” 생각한다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자세히 보진 않았다고 말한다. 회스의 큰 아들은 동생을 온실에 가두며, 쉭쉭 소리를 내기도 한다. 순환소각시설에 관해 설명하는 사람은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고”라며 사람을 가장 효율적으로 단기간에 대량으로 소각하는 과정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한다.
관객은 악의 끔찍함에 소름끼쳐 하면서도 악의 평범성 개념에는 너무 쉽게 동의해 버린다. 우리 역시 일상에서 평범하게 악을 행하는 자라고 자인하며 악의 평범성에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영화는 어떤 관객에게는 섬세한 미장센에서 오는 충만함을, 어떤 관객에게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교훈을 배설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어떤 관객에게는 그 어떠한 감동도, 성찰도,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관객은 누구여야 하는가.
2. 유령처럼 떠도는 일상 속 홀로코스트
세계는 온통 전쟁 중이다. 코로나라는 보이지 않는 질병과 싸우던 세계는 이제 물리적인 전쟁에 대대적으로 접어들었다. 미얀마는 내전 중이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넘어 레바논, 이란과 대치 중이다. 언론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무력 충돌을 보도하기 바쁘다. 재난서사가 넘쳐나는 지금, 그 중심에 이 영화가 있다. 2024년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과 음향상을 받은 이유는 섬세한 미장센의 미학 덕분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역사적 기억의 중요성과 교차되는 현재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수상소감에서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rather look what we do now.”(그들이 그 때 무엇을 했는지 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라)고 이스라엘-가자지구 전쟁을 언급함으로써 화제에 올랐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
세상에는 수많은 재난서사가 있다. 이 중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던 아우슈비츠 이야기는 단연 손에 꼽힌다. <소피의 선택>(1982), <쉰들러 리스트>(1993), <인생은 아름다워>(1997),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2008>, <사울의 아들>(2016)의 궤적을 잇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는 피해자와 시선을 맞추는 대부분의 영화와 달리 가해자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카메라의 눈을 맞춘다. 영화는 미학적으로 섬세하게 조형화된다. 이 미장센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작진은 집안과 방안 곳곳에 의도적으로 CCTV 형식인 초소형 카메라 열 대 이상과 마이크 오십 대 이상을 두고 인물을 관찰한다. 이는 세계를 관조적으로 관찰하면서 이미지를 배열하는 태도다. 감시하고 관찰한 이미지로 봉합한 이 영화는 세계에 관객을 함께 참여시키지는 않는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참상을 이미 충분히 체화한 관객에게만, 비슷한 문화자본을 점유한 관객에게만 그 공포를 극대화할 뿐이다. 보이는 이미지 너머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들리는 사운드 너머 들리지 않는 사운드를 상상하고 감각화할 때, 독특한 학습의 문화자본을 경유함으로써만, 그제서야 관객은 영화에 참여하게 된다.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잠재적인 홀로코스트 상황에 늘 노출되어 있는 나라는 억압과 차별과 혐오에 기민하다. 아직도 여전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이를 국민적 계몽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는 독일, 폴란드, 프랑스 같은 나라들도 있고,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미구에 닥칠 유사 홀로코스트에 맞서 시민사회가 다시 신발끈을 조이고 있는 미국 역시 홀로코스트의 유령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 긴장이 시민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사회라면 이 영화가 가진 섬세한 미장센은 충분히 승인되는 미학적 태도다.
독일은 역사적 반성을 반복적으로 이어온 나라다. 독일 곳곳에 있는 슈톨퍼슈타인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로 희생자들이 살아온 집이나 일터 앞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명판을 말한다. 슈톨퍼슈타인을 기획한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으로 일상적인 공간에서 역사적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기억문화의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또한 베를린 도심 한 가운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매우 상징적이다. 희생자를 추모하며 만든 콘크리트 사각기둥 2711개는 제각기 크기와 높낮이가 다른 회색빛으로, 마치 관 모양처럼 놓여있어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메모리얼의 지하 입구에는 프리모 레비의 말이 선언된다. “일어났던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다.”(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말은 역사적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과거의 비극이 현재에도 반복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처럼 독일과 미국 같이 홀로코스트의 공포에 관한 잠재성 자체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사회에서는,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섬세한 미장센이 홀로코스트를 대하는 매우 아름다운 예술적인 태도일 수 있다.
문제는 한국사회이다. 실체는 없이 형식과 태도만 남은 이 섬세한 미장센의 향연 가운데 놓인 한국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무엇이고 어떻게 소비되는 것일까? 우리 역시 신자유주의 이후 지독히도 악이 평범화되어 있는 도가니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실체를 지워 형식만 남아 블랙홀처럼 우리의 일상적 안락함을 빨아들이려는 저 기괴하고도 공포스러운 미장센의 향연을 즐길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제주 4․3과 광주 5․18은 물론이고 더 멀리 관동대지진 조선인 집단학살과 노근리의 기억조차 꽁꽁 싸매어 현재화하지 않으려고 바락바락 애쓰고 있는 우리에게 말이다.
3. 양각화된 이해관계 속 음각화된 희망
영화란 이미지를 잘라서 이어붙인 것이다. 카메라는 명료한 물질을 찍는다. 명료한 물질을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상해서 인화하고 이어붙이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와 애매모호함을 드러낸다. 이미지를 잘라서 이어붙인 것이기에 빈틈이 있고, 구멍이 있다. 이 구멍 사이로 의미가 발생하고 애매모호함이 생성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대부분 흩어지는 의미의 고정점을 찾는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고정점을 찾기에는 너무 자명하다. 영화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영화다움의 특성을 다분히 활용한다. 양각화된(positive) 영상은 음각화된(negative) 필름을 거쳐야만 재생된다. 영화화된 양각화는 음각화된 필름 없이는 재생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음각화된 장면은 두 번 나온다. 이는 회스의 둘째 딸인 잉에가 등장할 때만 연결된다. 첫 번째 장면은 루돌프 회스가 몽유병으로 보이는 잉에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설탕을 나눠 줘요.”라고 말하는 장면 후다. 기괴한 음향과 더불어 시작된 음각화된 화면은 한 소녀가 몰래 사과를 숨겨 놓는 장면이다. 두 번째 장면 역시 루돌프 회스가 창고에 잠들어 있는 잉에를 안아들자, “땀냄새”라고 말하는 장면 후다. 섬뜩한 음향과 더불어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를 읽어주는 루돌프 회스의 목소리 뒤로 음각화된 화면은 아우슈비츠 노역장으로 보이는 곳에 소녀가 과일을 숨겨두는 모습이다. 여기저기 과일을 숨겨두던 소녀는 한 노역자가 놓아둔 악보를 발견하기도 한다. 경비병들을 피해 소녀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The zone of interest’의 원래 의미는 ‘수용소를 중심으로 한 관심구역’을 뜻한다고 한다. 이를 이해관계 영역으로 해석해도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해관계 영역이 있다. 루돌프 회스에게 이해관계 영역은 딱 가족까지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에게 이해관계 영역은 대부분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가족 정도일 것이다. 현대의 빠른 속도사회에서 각자도생이라는 생존주의, 무관심과 이기주의는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희생자들이 먹으라고 몰래 과일을 숨겨 놓는 천사와 같은 이 존재는 그 이해영역을 자기 가족의 경계를 넘어 누군지 알지 못하는 희생자에게까지 넓힌다. 감독에 의하면 이 소녀는 실제 인물인 알렉산드라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이야기는 영화 안에서 음각화되어 있다. 홀로코스트를 당하고 있는 희생자들과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 가해자들의 사이에 살고 있는 이 소녀는 자기가 수확했던 사과를 어딘가에 숨겨놓고 필요한 누군가 찾아서 먹으라고 내어 놓는다. 이런 소녀가 존재할 때, 이런 소녀를 기억할 때 역사는 진보한다. 우리의 ‘The zone of interest’는 얼마나 좁아져 있는가.
소녀는 환대를 실천하는 존재다. 소녀는 타자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양식을 내어준다. 환대는 주는 것이고,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다. 소녀의 환대는 레비나스의 언어로 ‘자신의 입에서 빵을 꺼내어 자기는 굶주리면서 타인의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다. 타자를 선대함은 구체적으로 비움을 수반한다. 금식으로 타인을 먹이는 일이다. 레비나스는 자신과 자신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이기심을 꾸짖고, 타자를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주변을 돌아보고 우리의 ‘The zone of interest’를 넓히라는 이야기다.
소녀 이야기는 양각화로 서사화되지 않는다. 소녀 이야기는 양각화되지 않고 음각화되어 준비된다. 세상은 이해관계 영역만큼만 사랑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양각이라면 세상에 흘러가는 것은 이해관계 안에서 흘러간다.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승자독식의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이 꼭 그렇게 설명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음각화를 거쳐 양각화에 이른다. 선이 악을 이긴다는 희망은 먼저 음각화로 준비된 후에야 비로소 영화로 양각화된다.
4.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을 통해 본 회스의 구역질
영화의 마지막에서 회스는 두 번 구역질을 한다. 회스의 시선이 닿는 복도 끝, 검은 화면에 동그란 흰 구멍이 있다. 흰 구멍은 이내 현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문으로 변한다.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수용소를 청소하고, 희생자의 잔해가 전시된 박물관을 쓸고 닦는다. 진공청소기음이 뮤트되고, 화면이 전환되면서 복도 끝을 바라보던 회스의 시선으로 돌아온다. 과거의 픽션으로 흘러가던 영화는 갑자기 현재의 논픽션을 교차편집한다. 회스의 구역질은 무엇을 의미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교차편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평론가들은 이 장면에서 회스의 구역질은 몸이 반응한 인간의 무력함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악의 편에 서 있다는 영혼의 신호가 신체적 반응으로 새어나온 듯”(김소미), “자신의 의식과 달리 자기 육체가 반응하는 구토 행위에 당황”(김영진), “가해자의 무의식이 뱉어낸 육체적, 정신적 반응”(남다은), “학살행위로 인한 죄책감의 발로”(이동진)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한 회스의 시선에 과연 표정이 있었을까.
비판적 사유 없이 맹목적 순응만 하던 가해자가 일말의 양심 앞에 갑자기 몸이 떨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내면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관조적으로 세계를 담으려고 했던 감독의 일관된 의도라면 회스의 표정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지향하려고 했던 중립지대를 지키려면, 회스는 인물이 아닌 장치로써 차라리 활용되어야 한다. 회스의 얼굴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기에 관객은 스스로가 그 마음을 투사해서 회스를 해석하게 된다. 많은 이들은 회스의 표정에서 일말의 양심을, 구역질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길 원한 것 같다. 그러나 회스의 구역질은 그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두 시공간적 지대를 연결하고 봉합하는 장치로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편집된 순간, 관객은 이 중립지대의 카메라를 통해 현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와 유대인의 잔해가 남겨진 전시관을 바라본다. 외화면에서만 작동하던 이미지들의 잔해, 상상 너머로 고통받고 있었던 타자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관객은 충격을 경험한다. 엄숙한 장면의 논픽션은 영화에서 픽션의 의도적인 감동을 준다. 크리스티앙 메츠는 ‘모든 영화는 픽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배열된 이미지의 합이다. 감독은 치밀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합을 맞추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장소를 영화 속으로 소환한다.
기념비는 민족과 같은 집단적 기억, 확장된 기억공동체에 대한 기념비로서 역할을 한다. 박물관에서 시간은 공간이 된다. 기억의 공간이 형성되어 그 공간 안에서 기억은 재구성되고 재현되며 계승된다. 기념비와 전시관과 박물관은 역사적 기억을 공간화한다. 감독이 현재 수용소와 전시관을 굳이 소환한 이유는 폭력적 잔해의 공간을 영화적 감각으로 일깨우기 위해서다. 끊임없이 망각을 권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기억을 공동으로 보존하고, 유지하고, 관리할 것인가. 기억투쟁은 여기저기서 계속되고 있다.
5. 다시, 누가 관객이어야 하는가―오로지 현재만 남은 이 땅에서
이제 정리해 보자. 영화는 악의 평범성으로 압축되는 섬세한 미장센의 향연이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재현의 윤리에 감독은 집요하도록 중립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피해자의 시선도, 가해자의 시선도 아니다. 그저 관찰자로 관조적 태도를 유지하며 세계에 관객을 참여시키지 않는다. 이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에서 새로운 시선의 장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홀로코스트를 유령이 아닌 실체로 부여잡으려 애쓰는 나라의 관객들이라면 이러한 미학적 태도는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될 법하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그 실체를 감각화해서 수용하기는 몹시 어렵다.
미장센의 향연 후 남는 것은 실체가 아닌 태도에 대한 윤리의 초과다. 이 고급스러운 향연은 홀로코스트로 상징되는 민족국가의 내재적 모순을 성찰할 수 있을 때 가능하고, 이 성찰을 시민사회의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곳에서라면 매우 아름다운 미학으로 수용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희생자들과 동일시하기보다는 우리에게 내재된 가해자와의 유사성을 보는 시도’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감독이 기획한 대로 악의 평범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감독은 기계적인 눈으로, 관조적 관찰자로서의 자세로 이미지와 사운드를 선택하고 배열한다. 동요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 기획은 엇갈린 평을 받는다.
대부분의 호평 가운데 남다은 평론가는 이 영화가 구현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닌 ‘악의 평면성’이며, 가해자의 서사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서사 자체를 무력화하는 태도는 비겁하다고 비판한다.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단란한 가정과 함께 일상생활 가운데 루돌프 회스가 전출하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아내 헤트비히는 그대로 남고 싶어한다. 다행히 전출은 취소되고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에 남게 된다. 서사의 갈등은 얇게 흐르고, 이미지와 사운드는 계산적으로 합이 맞다. 관객은 서사에 연루되지 않은 채, 세계를 부동자세로 지켜본다.
감독의 카메라는 지나치게 정합적이다. 카메라는 부동의 시선으로 반듯한 윤리를 강조한다. 직소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다. 감독은 철저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싶어 한다. 즉 사건을 재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 윤리의 정합성은 도대체 누구의 시선이며 어떤 시선이어야 하는가. 재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사건이 정합적으로 표현될수록 윤리는 인위적으로 초과되고 사건에는 잉여가 생긴다. 홀로코스트를 재현한다면 <사울의 아들>(라즐로 네메스, 2016)에서의 사울의 시선이 더 정직하다. 초점을 잃은 아웃포커싱 사이로 가해자와 희생자의 실루엣이 비칠 때, 사울의 트라우마는 관객에게 전이된다. 사울은 관객을 세계에 참여시킨다.
선악을 결정하려면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의식과 타자 의식,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사회에 주체의식,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개인이 얼마나 있는가. 자율적인 의사결정권으로 일상 속의 악에 위험을 감지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는가. 역사의식이 소멸하고 오로지 현재만 남은 이 땅에서 이 영화는 어떤 의의가 있는가. 미학적으로 공교하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실체는 보이지 않고 태도의 윤리만 보인다.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귀중한 일이다. 서구사회는 하고 있으나 한국사회에서는 못 이루고 있는 것이 있다. 과거청산과 진실규명이다. 홀로코스트의 실체를 마주보는 일이다. 일제강점기와 각 시대의 꼭지점마다 과거청산과 진실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은 여전히 역사를 왜곡하며 그들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한다. 한일관계를 경색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군함도에 이어 사도광산까지 역사왜곡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역사의식이 공동화(空洞化)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자신의 역사를 잊어버린 것이다. 역사는 ‘나는 누구인가’를 너머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 일이다. 우리의 역사를 잊어버리는 행위는 결국 우리 자신을 정의하게 된다.
역사의식이 공동화된 데에는 천민자본주의도 한 몫 한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경제 발전만 외치며 현재만 오롯이 주목한다. 과거와 미래를 아울러 살펴보는 성찰이 없다. 이는 자본의 논리, 시장의 논리로 역사의식을 소멸시키면서 소비자만을 생산하는 천민자본주의와 연결된다. 경제성장을 위해 역사와 공동체의 가치는 파괴되며 현재에 이루어지는 소비 지상주의와 성공 결과주의만이 양산되는 실정이다.
다시, 누가 관객이어야 하는가. 오로지 현재만 남은 이 땅에서 이 영화는 어떻게 해석되는가. 감각화되지 않는 무의미인가. 배설되는 카타르시스인가. 성찰과 실천인가. 무감각을 넘어서 ‘악의 평범성’을 넘어서 ‘악의 평면성’을 넘어서 대리만족에서 끝내는 카타르시스를 넘어서 경험과 성찰과 실천까지 도달하려면, 역사인식과 공동체의식이 회복되어야 한다. 공동체 속에 연대와 책임을 실천하는 주체의식으로 서야 한다. 역사의식이 증발되고 적극적인 관객이 소멸되고 있는 세태 속에서 심미적인 감동을 경험하고 성찰하고 실천할 관객은 언제쯤 태어날 수 있을까. 현재가 과거와 소통하면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역사적 실체를 마주보려는 노력이 있을 때 온전한 해석과 감상이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문은혜
1974년 부산 출생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성대 국어국문학과 석사 및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