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밸리의 육교를 건너는 동안 ― 장류진 소설1)의 희극성 조망하기
1. 영웅의 후예, 희극
처절한 비극이 인간을 영웅으로 만든다면, 우리 시대에는 영웅도 비극도 없을 것이다. 비극의 소재들이야 넘쳐난다지만 이것들은 비극적 진실의 실마리가 되지 못한 채 과장된 희극의 배경이 될 뿐이다. 희극에는 영웅이 없다. 희극을 연기하는 사람들은 앞을 향해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슬랩스틱 코미디언이 되어버린다. 블랙 코미디에서 배우들은 왕을 골탕 먹일 수는 있어 도, 왕을 처단하지는 못한다. 이 무대의 설정값은 영웅적인 희생을 불허한다. 비극적인 시대에 사람들의 삶과 문학이 희극이 되어버리는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류진의 소설은 그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작중 인물들은 노동을 위태롭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낙오되지 않고 무한경쟁의 논리를 승인한 채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예를 들면,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판교 테크노밸리 회사원들이 온갖 부조리한 처우와 비효율적인 직장 문화에도 금방 적응하며 “오늘은 월급날이니까”(p63)라는 말로 현실의 불안함을 달래는 식이다. 이렇듯 장류진의 소설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공감을 일으키는 일상적 배경, 유머러스하게 서술되는 갈등과 사건, 누구 하나 죽지 않는 산뜻한 결말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는 대중적인 인기의 비결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장류진 소설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대중들의 호응에 비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자본주의의 부당한 시스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할 뿐,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와 대결할 생각이 없는 현실 추수주의 문학이라는 것이다.2) 하지만 그러한 비평적 진단은 어떤 시대적 조건이 장류진식 ‘희극’을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소 무심하게 느껴진다. 미국의 비평가 로런 벌랜트는 잔인한 낙관3)에서 이에 관해 통찰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적 위기를 직면한 사람들은 더 나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는 답보상태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위기란 이미 삶의 일부이자 조건이다. 그렇다면 장류진 소설의 인물들은 어떠할까?
이들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전보다 크게 성장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의 상태를 이어간다. 일각의 비판처럼 신자유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덧없어 보일지 몰라도, 불행을 견디는 이들의 이야기가 유머로 승화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유머는 불행에 빠진 자기 자신을 감싸 안는 태도와 관련 있다.4) 장류진 소설의 진정한 미덕은 단지 경험적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여 독자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현실적인 세계를 웃음으로 과장하여 우리가 마주한 위기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희극성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희극은 이 시대에 가장 유력한 영웅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2. 신자유주의라는 무대 장치
장류진의 작중 인물들은 거대한 구조와 싸우기는커녕, 자본주의 체제 바깥은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적 기업가 주체성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다. 이는 소설이 능력주의와 결합한 중산층의 도덕 경제를 보편적 에토스로 승인한다고 비판받는 지점이다. 그러나 만약 이 인물들이 ‘트루먼’이라고 생각하면 애틋하기 그지없다. 세계의 전부라고 믿어왔던 것이 사실은 잘 지어진 세트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작가도, 독자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류진은 현실처럼 보이도록 그럴싸하게 잘 지은 소설 속 세트장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무대 장치의 골조를 가끔 노출하며, 인물들이 사는 세계가 무대 위의 연출된 쇼임을 암시한다. 그런데도 끝내 세계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인물들은 가히 희극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펀펀 페스티벌」에서 이러한 희극성은 잘 나타난다. 소설은 주인공이 과거에 대기업 합숙면접 과정에서 겪은 일을 무대 위로 올린다. 합숙면접 과정 중 가장 의아한 것은 ‘펀펀 페스티벌’이라는 조별 공연 과제다. 이것은 “끼와 개성, 창의성을 펼쳐라”(p78)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지만, 기업이 찾는 인재의 역량과 관련해서 도무지 어떤 항목을 평가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이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지원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점수화되는 면접 방식에 적응한 모습을 보인다. 밴드 공연을 준비하며 조원들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율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 혹은 어디선가 지켜봐 주길 원하는 등 자신을 취업 시장의 상품으로 훈육하고 전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며(“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CCTV 달린 거…… 다들 알고 계시죠?”p70) 각자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경쟁한다.
본 무대에 오른 주인공은 면접관의 눈에 띄기 위해 과장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나는 스탠드에 꽂혀 있던 마이크를 뽑아들고 무대 앞쪽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리고 반복되는 후렴구를 부르면서 골반을 좌우로 한번씩 튕겼다.”p81) 결과적으로 많은 관객의 함성을 자아냈으나 면접에서는 불합격하고 만다. 주인공은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를 체득하고 있지만, 체현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반면, “육층의 인간 탑을 쌓았던 3조”(p85)는 조원 모두가 합격한다. 주인공은“꼭대기 층에 올라간 애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애들이었는지를 떠올려봤다. 몸집이 작은 애였나? 날씬하고 가벼운 애였나?”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리 생각해봐도 걔네는 그냥, 그런 데 올라가는 애들”(p86)이라는 단순한 사실로 결론지으며 인과적 설명을 포기한다. 이렇듯 소설은 인물들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할수록 우스꽝스러워지는 역설적 상황을 보여주며, 능력주의의 허상을 유머러스하게 꼬집는다.
Fun Fun 페스티벌―꿈을 향한 크리에이티브 대축제! … 나는 누가 현수막을 내리고 있는 것인지, 어디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온 건 때마침 켜진 조명기구의 하얀 빛뿐이었다. 그 강렬함에 이내 눈을 질끈 감아버려야만 했다. 현수막을 매단 끈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두컴컴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위쪽을 향해 묻고 싶었다. 이거 정말 축제가 맞아? 누구를 위한 Fun이야? 여기서 Fun을 가져가는 사람은 누구지? 재미를 보는 사람은 대체 누구야?
(「펀펀 페스티벌」, p78-9)
주인공이 ‘펀펀 페스티벌’의 무대 바깥의 무언가를 감지하는 장면은 중요하다. 그것은 어두컴컴해서 끝을 알 수 없는 무대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하얗고 강한 빛이다. 이 빛은 ‘트루먼쇼’의 세트장 하늘에서 떨어진 조명처럼, 주인공이 현재 상황을 의심스럽게 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는 메타적으로, ‘펀펀 페스티벌’도, 합숙면접 과정도, 소설 .펀펀 페스티벌. 그 자체도 누군가가 연출하고 재미를 보는 연극무대, 즉 신자유주의적 시대의 희극과 같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때 “재미를 보는 사람”(p79)이란 중의적이다. 장류진식 희극의 관객, 독자들이 작중인물을 놀림거리로 삼아 웃고 있을 때, 더 큰 구조로서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과 훈육을 부추겨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이득을 보고 있다.
「라이딩크루」 또한 그 형식에 있어 장류진식 희극의 메타적 관람을 도모한다. 소설의 도입부에서는 내화와 구분되는 외화가 먼저 시작된다. 외화에는 창밖으로 무언가를 내다보며 웃고 있는 세 명의 여자가 있다. 이 세 명의 여자들은 독자들이 이들의 시선을 통과하여 내화를 멀찍이서 ‘관람’하게 만드는 관객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정체는 내화에서 밝혀진다.
내화는 자전거 동호회에서 벌어지는 남성들 간의 갈등이 주된 내용이다. 주인공-서술자 ‘나’는 라이딩크루의 장이며, 남성크루들 사이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여성크루들에게는 환심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크루에 새로 들어온 ‘최도헌’은 그런 ‘나’의 입지를 위협한다. 최도헌은 드라마 협찬 가구를 만드는 목수에,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심지어 여자들에게 스스럼없이 애교를 부릴 줄 아는 남자였다. ‘나’는 그를 이기고 싶은 마음에 험난한 라이딩 코스를 제안한다. 승부에서 밀리자 마음이 급해진 ‘나’는 그의 자전거 바퀴로 돌멩이를 던져버린다. 이때 최도헌은 넘어지지만, 자전거의 바퀴는 넘어진 채로 계속 돌아간다. 자전거 바퀴에 모터가 달려 있던 것이다. 두 남자 사이에는 때아닌 공정 시비가 붙는다. ‘나’는 최도헌이 바퀴에 모터를 달고 라이딩을 한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맞서 최도헌은 어릴 때 다리를 다쳐 모터 없이는 애초에 자전거를 탈 수가 없으니, 모터를 달아야 비로소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다고 반박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못하고 분노하지만, 최도헌의 말을 들어보면 주인공도 만만치 않게 ‘장비 빨’을 세우고 있다.(“그러는 크루장님은 그 비싼 자전거로 기어 낮추고 케이던스 열라게 높여서 열심히 돌리시던데요. 그럼 그건 공정한 거 같나요?”p214)
이는 최근 한국의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 신화가 사회적 약자의 기회를 빼앗는 근거로 전유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최도헌은 장애인인 동시에 성적으로 매력적인 남성으로 묘사된다. 이때 최도헌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성적으로 덜 매력적인 남성들에게 불공정 감각을 안긴다. ‘능력’으로 공정하게 승부 보지 않고, ‘몸’ 그 자체가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도헌의 약자성은 능력주의와 젠더의 기묘한 연동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한다. 소설이 최도헌과 주인공의 관계 변화를 통해 누가 여성/약자의 몸을 ‘자산으로서의 몸’으로 간주하느냐를 예리하게 짚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 최도헌과 처음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던 상황을 보자. 최도헌의 메시지에는 모든 문장의 종결어미가 마치 혀 짧은 소리를 내듯 ‘-해여’로 끝이 난다. 또, “헤헤”(p182), “허엉”(p183) 같은 의성어를 쓰기도 한다. 심지어 최도헌의 프로필 사진에는 허리가 잘록하고 머리가 긴 사람의 뒷모습, 즉 최도헌의 뒷모습이 있었다. 이러한 최도헌의 외모와 말투에 ‘나’는 최도헌을 여자로 오해하고 성적으로 흥분하기까지 한다. 주인공이 내면화하고 있는 이성애 규범적 편견이 작동한 것이다. 하지만 최도헌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최도헌을 향한 섹슈얼리티를 모두 철회한다. 최도헌이 남성이기에, ‘나’에게 있어서 ‘자산으로서의 몸’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알파메일’로서의 최도헌은, 오히려 ‘나’와 능력을 겨루어야 하는 라이벌일 뿐 약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최도헌의 약자성은 ‘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역차별’의 근거가 된다. 이는 흔히 남성들이 ‘타고난’ 성별로 인해 복지혜택을 보는 여성들에게 ‘역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논리와 같다. 남성 신체의 특질은 타고난 ‘능력’으로 연결 지어 감추는 반면, 여성/약자의 몸에 따르는 돈과 혜택은 불공정하게 취득한 자산이라는 식으로 능력주의는 성별화되어 있는 것이다.5)
최도헌도 이 싸움에 가담하기는 마찬가지다. 둘은 (마치 상품처럼 걸린) 여성크루원 ‘안이슬’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공정하게 조건 초기화하고 제로에서부터 시작”(p221)해서 승부를 보기로 하고 팬티까지 벗어 던진다.(“뭐예요? 쿨팬티 입으신 거예요? 저는순면이라 불리한데요. 팬티도 서로 벗으시죠. 공정하게.”p222) 소설은 두 남자가 나체로 서울시 공유 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달리는 기상천외한 장면으로 끝이 난다. 앞서 외화에서 세 명의 여자가 창밖으로 내다보던 것은 바로 이 광경이다. 이 무대를 멀찍이서 곱씹어 보자. 비로소 이 서사는 한국사회의 젠더갈등과 능력주의 신화, 전도된 공정 감각에 대한 풍자적 알레고리로서 정점을 찍는다.
3. (해피)엔딩: 환상을 사는 사람들
이렇게 장류진 소설 속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은 풍자극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 세트장 안에 영영 남겨지는 걸까? 이들도 트루먼처럼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언젠간 찾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소설 텍스트 안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이들은 세트장을 나가는 길보다, 이 세계관을 유지하는 보상―월급, 소비, 선물, 일확천금 등―에 더 관심이 많다. 물론 보상받을 기회는 적고,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계속 빼앗기면서 살지만, 드물게 찾아오는 행복은 이들의 불행한 삶을 그럭저럭 견디게끔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가 희극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소설의 인물들에게 왜 저항하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것은, 왜 희극에 영웅이 없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 질문을 바꿔보자. 왜 비극적 소재가 희극의 배경이 되는 것인지, 왜 인물들은 사회구조에 저항하지 않는 것인지, 사람들은 무엇을 통해 현재를 감당하는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희극의 역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달까지 가자」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람들의 결핍과 욕망, 그리고 환상을 잘 보여준다. 소설은 회사 입사 동기로 연을 맺은 세 사람(서술자-은상과 다해 언니, 그리고 지송)이 ‘이더리움’이라는 실제 가상화폐에 투자하여 마침내 수억의 돈을 벌게 되는 모험담이다. 이 서사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기재해가며 이더리움의 실제 등락 타임라인을 따라 전개되는데, 이는 경험적 세계에 근거하여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지점이다. 이더리움의 가격 곡선이 상승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이 노동과 소비, 삶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씩 변화한다. 마침내 이더리움의 ‘떡상’에 힘입어 인물들은 억 단위의 돈을 갖게 되며, 소설 또한 결말을 맞이한다. 근대소설 속 인물이 대개 투자/도박에 실패하고 패가망신하여 독자에게 교훈을 남기는 것에 견주어보면, 이 이야기의 해피엔딩은 확실히 독특하다. 투자/도박 행위가 삶에 쾌감을 주는 행운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러한 서사는 가상화폐 투기 광풍의 위험성을 은폐하고 신자유주의적 투기 주체들의 욕망을 자연화한다고 비판6)받는다. 그러나 소설은 이러한 비판이 성립할 만큼 ‘현실적’이지 않다. 자세히 보면, 경제학적으로 타당하고 인과적인 투자 가이드라인에 대한 묘사는 없다. 인물들의 코인 투자 과정에 어떠한 합리적이고 치밀한 계산도 없으며 그저 운만 따를 뿐이다. 심지어 이들은 의사결정의 근거를 코인 및 주식 동향이나 세계 경제 정세에 두기는커녕, 무당의 점괘에 맡긴다. ‘연월도사’로부터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시베리아 북서풍을 타고 아주 멀리 간다’라는 추상적인 점괘를 듣고서는 곧장 이더리움의 개발자가 러시아 사람이니까, 이더리움을 가지고 ‘존버’하면 ‘달까지 간다’(투자자들의 은어 ‘to the moon’)는 희망으로 번역해서 믿기로 한다. 이 세계에서 인물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운과 우연, 불확실성에 달려있다.
물론, 이러한 운이 완전히 똑같은 확률로 모두에게 적용될 거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그리고 이 착각과 환상을 소설이 만들어내고 있다면, 이는 암호화폐가 서민에게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계급 도약의 사다리라는 식의 과장된 낙관론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일견 문제적이다. 하지만 금융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은 단순하지 않다. 암호화폐는 기회의 평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제 투자시장이 거대자본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교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렇기에 ‘흙수저 청년 여성 3인방’7)이 코인으로 떼돈을 번다는 설정은 양윤의의 해석대로 현실의 대리 충족을 위해 구현된 환영, 즉 “판타스마(fantasma)”의 이야기다.8) 지나치게 환상충족적인 이 서사는 오히려 일종의 농담 같기도 하다.
환상은 상징계의 결핍을 구성하는 동시에 은폐하며 현실(The Reality)을 안정화한다. 그렇다면 소설이 농담 같은 환상, 환상 같은 농담으로 견디고자 하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작중 인물들은 말도 안 되게 희박한 확률의 운을 메시아의 구원처럼 기다리며 어떠한 삶을 유예하고 있는가? 주인공 은상은 코인으로 억 단위의 돈을 벌고도 이전처럼 회사에 출근하여 노동하는 삶을 이어간다. 은상은 코인 투자로 단지 ‘돈’ 그 자체를 번 것이 아니라, 삶다운 삶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은상이 생각하는 삶다운 삶의 조건이란, 이전까지 은상의 삶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원룸 생활을 전전하며 더 나은 주거환경을 꿈꾼다. 그러나 회사에 다닌 지 꽤 되었음에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저축으로 모이는 돈은 없다. 이대로라면 ‘내 집 마련’은커녕, 멀끔한 투룸 전셋집으로도 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불행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취업률의 증가 폭이 점차 줄어드는 시대에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 다행스럽게 여기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불행 중 다행 상태의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을 거라는 전망이다. 더 나은 미래도, 더 나빠졌을 때 구제해줄 안전망도 없다.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이 증대된 하루하루가 눈앞에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공동체가 마주한 진정한 위기다. 꿈이 실현되는 해피엔딩, 그 이면에는 이런 희극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현재가 있다.
「달까지 가자」의 경우, 코인 투자 성공이라는 해피엔딩의 서사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답보상태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면,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는 부당한 일을 당해도 유희와 농담으로 버티고 견뎌내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한다. 소설에서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중심인물은 세 명이다. 먼저,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 스타트업 ‘우동마켓’의 직원인 서술자 ‘안나’와 동료 ‘케빈’이 있다. 회사의 조직문화는 겉으로만 수평적 관계를 지향할 뿐,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다. 영어 이름을 부르자는 규칙은 허울만 있고,(“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p37) 매일 아침 시행하는 스크럼은 대표의 지루한 조회가 되어 업무 시간을 잡아먹는다. 안나는 이런 일상적인 부조리함에 적응해서 지내면서도, 케빈과의 마찰에는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앱의 버그를 개발자 케빈에게 피드백한 뒤, 버그를 잡느라 예민해진 케빈의 히스테리를 다 받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안나는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스린다. 혹은 ‘리니지’라는 RPG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다분히 부르주아적 취미 기호로 보이는 클래식과 리니지의 조화는 생뚱맞은 듯하지만, 사실 자본주의의 소비상품이라는 점에서 같은 층위에 놓인다. 안나는 반복되는 일로 지친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상품 소비로 해소한다. 이때 안나가 듣는 클래식의 제목이 하필 “.환상소품집, Op.3―멜로디.”(p44)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안나는 단순히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잠깐 잊게 만드는 환상을 사는 것이다. 이는 개발자 케빈도 마찬가지다. 그가 예민한 까닭은 애플리케이션의 버그를 잡기 위해 코딩 언어 수정에만 내내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그를 잡는 일만 반복하는 건 그로서는 달갑지 않다. 두 명분의 일을 혼자 하는 탓도 있지만, 그는 코딩 업무를 통한 창의성 발휘와 자아실현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케빈은 일 대신 레고를 사 모으는 취미로나마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찾는다.
‘거북이알’은 우동마켓의 단골 이용자다. 그는 부당한 일을 참아내는 데에 가장 도가 튼 인물이다. ‘유비카드’사의 공연기획팀 차장이었던 거북이알의 사정은 이러하다. 유비카드사의 회장은 클래식 애호가로서의 자신을 과시하는 인스타그래머이자 인플루언서인데,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루보프 스미느로바”(p44, 속칭 ‘루바’, 작중 언급되는 가상의 피아니스트) 내한공연을 성사시키기로 마음먹고 거북이알에게 섭외 임무를 준다. 유능한 거북이알은 루바 섭외에 성공하지만, 후에 이를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한 일은 귀책 사유가 된다. 회장이 루바의 공연 소식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누구보다 먼저 게시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황당무계한 이유로 거북이알은 승진도 취소당한 채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난다. 게다가 일 년간 월급을 모조리 포인트로 받는 부당한 징계까지 받는다. 포인트로 월급이 입금된 첫날, 모멸감에 울컥했지만 이내 이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p51)을 깨닫는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애초에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돈이란 현금이 아니라 금융자산의 형태로 물리적 실체 없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거북이알은 포인트를 사용해 직원 할인가로 물건을 싸게 산 다음 우동마켓 거래를 통해 포인트를 현금화하기로 한다. 이 또한 번거로운 일이지만, 업무 시간에 물건을 사고 점심시간이나 외근을 나갈 때 물건을 파는 등 개인 시간을 최소한으로 쓰는 것에 만족한다. 거북이알은 초연하고 유쾌한 태도로 대기업의 횡포에도 꿋꿋이 버틴다. 어째서 이들의 불행은 분노로 이어지지 않는 것일까? 15년간 회사에 다닌 거북이알의 비결은 노동하는 자아와 진정한 자아를 분리하는 것에 있다. 거북이알의 진정한 자아는 일보다 반려 거북이들을 돌보는 데에서 더욱 행복을 느낀다. 거북이 세 마리의 이름은 각각 외제 차의 이름에서 따온 “람보”, “마쎄”, “페라”(p57)다. 이는 거북이알의 세속적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가 노동하는 자아와 분리한 ‘진정한’ 자아란 결국 소비하는 자아다. 거북이와 ‘명품카’라는 잠깐의 즐거움과 미래의 행복이 현재의 불행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에서 소외된 자기를 위해 상품 소비에 의존할수록, 임금 노동의 부조리가 일상적으로 관리되어버리는 신자유주의적 역설에 빠지게 된다. 거북이알은 이렇게 말한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p50)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뼛속까지 내면화한 사람만의 소극적인 저항이다.
안나는 거북이알과 ‘상품 거래’를 명목으로 만나, 위의 사정을 전부 듣게 된다. 이들은 직장인의 애환을 공유하고 대화의 어떤 대목에서는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찰나의 웃음은 마치 금방 휘발되는 상품 소비의 쾌락처럼 이들의 지난한 노동 인생을 잠깐이나마 중지시키고 이들 사이에 미약한 연결 감각을 제공한다. 안나가 팀장에게 ‘캡슐커피 머신’을 건네는 장면과, 케빈에게 ‘레고’를 선물하며 화해를 요청하는 대목에서도 이러한 감각은 드러난다. 상품을 주고받는 거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교환, 예를 들면 노동력을 팔고 월급을 받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안나는 홍콩행 비행기 표를 결제하며 월급날이니까 이 정도 소비와 쾌락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또 한 차례 안나의 삶은 유예된다. 산뜻하고 포근한 결말은 인물들의 비극을 지연시키고 영웅됨을 좌절시킨다. 이것이 바로 장류진식 희극의 역설이며,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이다.
4. 희극의 조망 효과
우리는 길을 건너기 위해 함께 육교에 올랐다. 그런데 계단을 다 올라가고 나서 어딘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육교가 길 건너편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 다시 우리가 있던 쪽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육교가 도로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도로와 평행하게 놓여 있었다. 거북이알이 내게 물었다.
“이상하네. 이걸 육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설계를 잘못한 것 같은데요.”
“이렇게 하면 육교 아래쪽에 그늘이 생기니까 비나 햇볕을 피하라고 만들어놓은 건 아닐까요.”
“직장인들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만 있으니까 잠깐이라도 운동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조형물일 수도 있어요. 법으로 정해두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만든 것 같은 성의없는 조형물이 건물마다 하나씩 있으니까.”
“어떡할까요?”
“다시 내려가야죠, 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기 있으니까 되게 잘 보이긴 하네요.”
(「일의 기쁨과 슬픔」 p54-5, 강조는 인용자.)
「일의 기쁨과 슬픔」이 묘사하는 판교 테크노밸리 육교9)의 모습은 영 수상하다. 이 육교는 도로를 가로지르지 않고 도로와 평행하게 놓여 있어, 건너편으로 갈 수 없게 설계된 구조물이다. 사람들은 이미 세워져 있는 이 구조물을 마음대로 없애거나 옮길 수도 없다. 그저 육교를 따라 오르내릴 뿐이다. 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존재하는 듯한 육교는 본래의 제 쓸모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물들의 말마따나 잠시 비나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직장인들이 잠깐 운동할 구실도 만들어준다.
이 허무맹랑한 육교의 모습은 마치 장류진식 희극의 상징과도 같다. 희극의 인물들은 비극의 영웅들처럼 공동체를 이끌고 길 건너편의 목적지를 향해 가지 못한다. 육교라는 무대에 올라와도 같은 편의 도로로 다시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희극은 잠깐의 고난을 견디게 해줄 뿐이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는 육교일지라도 도로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거북이알은 육교에 올라섰을 때 비로소 무언가가 잘 보인다고 말한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판교 테크노밸리의 전경이지만, 이는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세트장의 일부와도 같다. 육교에 오르면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넓은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장류진식 희극은 이러한 ‘조망 효과’를 꾀한다. 물론 우주에서 지구를 한눈에 보고 돌아온 우주여행사들이 겪는 변화에 비하면, 육교 위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일어나는 조망 효과는 미미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횡포에 자본의 교환 논리로 응수한 거북이알의 소극적 저항은 이 수상한 육교에 잠깐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가는 정도의 작은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과연 아무 행위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육교에 올랐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을까? 행위는 벌어졌고, 육교 위에서는 그전에 보지 못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장류진의 소시민적 인물들은 나름대로 행위를 하고 있다.
따라서 장류진 소설을 적극적으로 읽는 하나의 방법은 소설 텍스트가 어떤 시대적 풍경을 조망하느냐를 꼼꼼히 살피는 것이다. 우리는 왜 체제에 저항하지 못하는지, 우리의 자아실현은 왜자꾸 소비자본주의에 포섭되고 마는지, 자본주의 체제를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게끔 만드는 구조는 무엇인지. 장류진의 문학은 분명 이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 장류진의 소설이 따뜻하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듯한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섣불리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어리석고 바보 같으면서도 어딘가 애처로운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람들을 웃음으로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1) 이 글은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에 수록된 「일의 기쁨과 슬픔」과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창비, 2021), 소설집 「연수」(창비, 2023)에 수록된 「펀펀 페스티벌」, 「라이딩크루」를 논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2) 양재훈, 「반박귀진의 하수들과 철없는 바틀비들」, 「작가들」 72호, 2020.03, pp.169-185; 신성환, 「2010년대 후반 한국형 회사원 소설에 나타난 청년 의식 연구-김세희와 장류진 소설을 중심으로」, 「어문총론」 83호, 2020, pp.155-188; 오혜진,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한국 여성문학·퀴어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4.
3) 로런 벌랜트, 박미선·윤조원 옮김, 「잔인한 낙관」, 후마니타스, 2024.
4)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유머」,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린책들, 2003.
5) 김주희, 「능력주의와 젠더갈등―자산 불공정 감각과 ‘여성-불로소득자’ 담론을 중심으로」, 『여성학연구』 제33권 제1호, 2023, pp.35-74.
6) 서희원, 「달의 몰락―장류진 「달까지 가자」 다시 읽기」, 「현대문학」 801호, 2021, pp.272-295.
7) 전청림,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여성 청년의 소비, 노동 그리고 사랑」, 「자음과모음」 55호, 2022, pp.374-386.
8) 양윤의, 「투케와 판타스마: 김금희,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창비, 2021), 장류진, 「달까지 가자」(창비, 2021)」, 「문학과 사회」 135호, 2021, pp.245-265.
9) 이는 판교 테크노밸리에 실존하는 조형물이다. 스브스뉴스가 ‘판교의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이에 관해 취재한 결과, 이는 육교가 아니라 조망 기능을 갖춘 전망대로 판명이 난다. SBS뉴스(스브스뉴스), “대피소? 전망대? ‘판교 육교’ 미스터리”, 김대석, 2015.11.26.
정의정
1997년 제주 출생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