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야 합니다. 한 사내가 다짐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그’는 일체의 폭력에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 비정성시에서 그의 유일한 벗은 백구 한 마리. 그러나 살아남기 위하여 세상의 부조리와 타협했을 때, 백구 혹은 그의 초자아는 주검으로 거리를 뒹군다. 그날 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지난 밤 꿈에 그들이 내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기를 바랬으나 끝내 유명을 달리한 친구, 탈북 청년 전승철. 박정범 감독의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는 고 전승철에 대한 헌정 영화이자, 어느새 ‘민둥산(無山)’이 되어버린 함경도 무산을 떠나 새로이 ‘무성한 산(茂山)’을 찾아왔지만 다시금 ‘무산(無産)’자로 전락해 버린 어느 청년에 관한 비망록이다. 감독은 고인과의 약속과 추억을 ‘돌아보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토로한다. ‘돌아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reflexió’는 성찰을 뜻하는 단어 ‘reflection’의 어원이자, 오늘날 현대예술 담론의 주요 테제인 ‘자기 반영성(Self-Reflexivity)’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영화는 매우 다면적인 층위의 자기 반영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산 자와 죽은 자, 고 전승철과 배우 전승철(로 분한 박정범), 무산자 전승철과 잡종견 백구, 자유 대한의 슬로건과 새터민 주민번호 125의 굴레, 이데아를 노래하는 교회와 찬송가가 유행가로 전락한 퇴폐 노래방, 시급 4천원의 비정규직 임금제와 16만원짜리 나이키 잠바 혹은 ‘10억은 기본’ 운운하는 TV 방송, 정지된 카메라와 질주하는 카메라 등 컨텍스트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무수한 대립항들이 상호 반영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일련의 화두들은 1%의 유산계급과 99%의 무산계급이라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궁극적으로는 전승철이라는 개체와 분단 한국이라는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횡단하고 있다.
영화학자 로버트 스탬은 “자기 반영성과 리얼리즘이 의기투합한 형태의 영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현실에 대한 성찰과 그 형형한 재현이 담긴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견해다. 박정범이 그 강령을 수행하는 방식은 엄혹하다. 영화 속에서나마 전승철로 살며, 그의 언어로 말하고, 그의 피부를 덧입고, 그의 사유로 행동한다. “승철의 고통스런 눈빛과 신음소리를 고스란히 담고 싶다”며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맞는 식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프다. 심리적으로도 아프지만, 물리적으로도 몹시 아프다. “그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영화를 완성했다”는 그 몰아적 몰입과 대속의 결의는 미증유의 자기 반영성을 발화시킨다. 이러한 측면은 촬영에서도 드러난다. 시종일관 피사체를 쫓는 핸드 헬드 카메라는 말 없는 청년 전승철을 대신하여 그의 숨가쁜 내면을 마치 호흡하듯 현시한다. 이는 수전 손택이 역설한 ‘현실 속으로 깊이 삼투하는 카메라’, 혹은 시네마 베리테가 강조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성찰하는 카메라’와도 깊이 연루되어 있다.
전승철의 반영성은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다. 열린 결말과 닫힌 결말, 그 사이에서 우리는 내내 번민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가 개체를 넘어 계급과 역사에까지 깊숙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은 후자를 택했다. 마치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처럼,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은 채 수난과 죽음은 선형적으로 진행된다. 이제, 살아남아야 한다고 절치부심했던 사내는 죽음을 연습한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이 아닌 초자아의 죽음이다. 영혼을 거세하고 유령으로 살아남기로 결심한 것이다. 세상 끝까지 내몰린 그가 철거촌에 버려진 장롱에 백구와 함께 몸을 누일 때, 그것은 이미 자아의 입관식에 다름 아니다. 이 무산의 도시를 부표처럼 떠돌던 그에게 백구는 아련한 푼크툼이요, 거울이자 초자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탈북자 브로커의 검은 돈을 가로채고 세상에 편입하자마자 목도하게 된 광경은 아스팔트 위에 널부러진 백구의 시체, 즉 그의 자소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다. 무산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산에서의 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책무를 복기해야 할 시간.
김정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졸업(영상학)
연세대 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과정 수료
전찬일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단평이 요구하는 기본적 덕목들을 충분히 갖춘 글은 전체 응모작들 가운데 단 한 편도 없었다.두세 편의 후보작은 물론 최종 당선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작 아닌 당선작을 낸 건, 그 가능성과 잠재력 때문이다. 단?장평 두 범주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자웅을 겨룬 건 두 명이다. 단평 ‘비트냐, 펑크냐-<써니>(2011)에 관하여’와 장평 ‘개들의 예감-<황해>(2010), <무산일기>(2010), <풍산개>(2011)에 관하여’의 엄준석과, 단평 ‘살아남의 자의 슬픔, 죽은 자의 비문(秘文)-<무산일기>의 자기반영성’과 장평 ‘욕망의 모호한 대상, 혹은 욕망의 모호한 시간-<북촌방향>의 이시성(異時性)과 이소성(異所性)’의 김정(본명 김혜란)이었다.
이들의 단평들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장평에서 빛을 발한다. 엄준석이 ‘확산적’ ‘거시적’이라면, 김정은 ‘집중적’ ‘미시적’이다. 엄준석은 ‘개와 카메라의 여정’을 통해 국민국가가 직면해 있는 다양한 위기를 배회하는, 일종의 ‘유기견’의 생태학적 보고로 분석한다. 다만 논리 전개의 정교함에 비해 문장의 완결성이 떨어진다.
김정의 글은 기표인 비주얼과 사운드 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북촌방향’의 시공간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는 건 아쉬움을 넘어 유감이다. 하지만 ‘북촌방향’과 홍상수 영화 세계 전반에 대한 분석과 종합이 그 어느 글보다 심층적이며 풍요롭다. 상호텍스트적으로 이처럼 풍성한 글을 언제 만났나 싶을 정도다. 미술과 사진, 영화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펼치는 논지는 융합적 글쓰기의 한 전범으로서 손색없다.
김정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졸업(영상학)
연세대 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과정 수료
글을 쓸 때면, 복기하는 두 가지 잠언.
피로 써라.
짜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글을 쓴 대가로 은화 몇 닢을 받은 이후, 심장에 새겨둔 말이다. 정말이지 피로 쓰지 않으면 단 한 줄도 제대로 쓸 수 없다. 내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 줌의 지식으로는 온전히 양피지를 채울 수도, 당신과 깊은 공명을 이룰 수도 없다. 잉크로 삼아야 할 것은 오직 나의 피. 그러나 아직 나의 피는 묽다.
시네크리튀르
영화(Ciné)와 글쓰기(Écriture)의 합성어. 이 용어는 창작과 비평이 수레의 앞뒤 바퀴처럼 공생하는 것임을 각인시켜 주었다. 내 서툰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창작, 이제 숨 고르며 첫 발을 내딛는 비평. 나는 비평이 창작의 등가물(等價物)이어야 함을 익히 알고 있다. 치열하고 사려 깊은 글, 영화에 대한 연서이자 노동과 성찰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감사드린다.
존경해 왔던 전찬일 선생님께 내 미욱한 글이 읽혀질 수 있었음을. 동아일보의 전언 덕분에 겨울의 심장을 통과할 수 있었음을. 꿈의 음화(陰?)인 현실, 현실의 음화인 꿈. 그 두 세계를 봉합하는 영화를 통해 스쳐간 모든 이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