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금루곡

by  전호성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
  • S#1. 고려 개경, 박성기 악대 대청

    꽃이 만발한 봄날. 넓은 대청 중앙에서 연비가 가야금을 타고 있다.

    연비, 갓 스물, 옅은 갈색 피부, 시원스런 이목구비, 이국적인 얼굴,

    고려인과 회회인(回回人아랍계열)의 혼혈이다.

    이제 막 어린티를 벗고 성년의 꼴 갖추어 가는 외모,

    결기가 배인 중성적인 인상이다. 선이 고운 미소년을 떠올리게도 한다.

    쓰고 있는 두건의 이마 언저리가 땀으로 젖어 있다.

    코끝에 땀방울 맺히고, 땀에 젖은 귀밑머리는 뺨에 달라붙어 있다.

    연주에 전력을 다하고 있음이 역력히 느껴진다.

    연비의 정면에 오십대 중반의 박성기가 눈을 감은 채 연주를 듣고 있고,

    장범을 비롯한 제자들이 연비의 좌우로 열을 지어 앉아 듣고 있다.

    박성기의 곁에 앉은 그의 딸 미월, 장범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장범, 스물 초입의 청년, 투박하지만 시원스러워 보이는 인상이다.

    미월, 살짝 처진 눈매가 선해 보이는 인상, 스물이 채 안 되어 보인다.

    연주 막바지. 연비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가야금을 뜯는다.

    마침내 연주가 마무리 된다.

    박성기, 연주가 끝나고도 한동안 눈을 뜨지 않는다.



    박성기:(눈을 뜨며) 범아, 네가 듣기에 어떠하냐?

    장 범:소리에 힘찬 기운이 실려 있으나 기교가 그 기운을 다스리지 못 하여,

    즐거워야 할 가락이 여유를 잃고 앞으로 나아가기 바쁩니다.



    연비의 표정, 싸늘하게 굳는다. 뭇 제자들, 스승과 연비의 기색을 살핀다.

    미월, 걱정스런 얼굴로 연비를 본다.



    박성기:연유가 무엇이냐?

    장 범:음률을 타지 못 하고 끌고 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잠시 사이) 노력이 과한 탓입니다.



    연비, 고개를 들고 장범을 노려본다.



    박성기:(연비에게) 범이의 말이 어떠하냐?

    연 비:제 기교가 서툴러 가락의 묘를 살리지 못 함은 저 또한 알고 있으나,

    오히려 노력이 과한 탓이라 함은 무슨 말인지……

    박성기:(장범에게) 네가 탄금해 보아라.



    장범, 대청 중앙으로 나아가 연비로부터 가야금을 건네어 받는다.

    엇갈려 지나치는 장범과 연비, 짧은 순간 눈이 마주친다.

    연비, 제자들 사이로 가 앉는다.

    장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연주를 시작한다.

    연비와는 달리 연주하는 자세가 여유롭고 즐거워 보인다.

    미월, 장범의 탄주하는 모습을 보며 수줍게 웃음 짓는다.

    듣고 있는 제자들 사이에서 조심스러운 경탄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연비의 얼굴에 절망스런 빛이 점점 짙어진다. 미월, 연비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S#2. 박성기 악대 대청



    홀로 앉아 있는 연비, 분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가야금을 노려보고 있다.

    장범, 걸어와 대청 앞에 선다.



    장 범:(장난기 어린) 혼자 넋 놓고 앉아 뭐하니?

    연 비:……

    장 범:봄날은 길지 않아. 더구나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도 흔치 않다.

    한 잔 안 할 수 없잖니. 다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

    연 비:(비꼬는) 네 타고난 바가 끝을 가늠할 수 없음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지. (분노하는) 내 소리가 서툰 것이 오히려 노력이 과한 탓이라?

    비웃는 거냐? 그래, 나 같은 범재의 소리 따위 힘을 기울이나 마나

    거기서 거기라는 게지. 네놈의 재주보다 오만함이 더 놀랍구나.



    장범, 연비의 반응에 당황하지만 곧 미소를 되찾는다.



    장 범:스승께서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제자들 중 왜 하필 나를 지적하시어

    너의 음률을 평하라 하셨겠니?

    연 비:(자조적인) 천재의 소리를 듣고 주제를 깨달으라 하심이지.

    장 범:말했잖아. 봄날은 길지 않다. 너, 꽃이 저리 화사하게 피었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 술에 취해 즐거워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은 하니?

    아니, 그런 적에 있기는 한 거냐?

    하늘의 기교를 얻는다 해도 희로애락을 담지 못 하면 다 헛것이야.

    연 비:(발끈해서) 네가 사나흘이면 익히는 것을 나는 석 달 열흘, 손가락 끝이 짓무르도록 줄을 뜯고 비벼도 될까 말까란 말이다. 모자란 인간, 음률만 다루기에도 하루가 짧아. (격해지는) 꽃구경에 술타령? 내 비록, 타고난 근기가 시원찮아 배움이 더디지만 네 놈에게 이런 모욕까지 당할 이유는 없다.

    장 범:(꽃과 연비를 번갈아 보며) 딱하구나. (한숨 쉬듯) 꽃이 아깝다, 아까워.



    장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뒤돌아 간다.

    연비, 눈길을 돌려 나무마다 만개한 꽃을 쳐다본다.



    S#3. 박성기 악대 뒤뜰



    무희 수련생들, 악공의 반주에 맞추어 춤 연습 중이다.

    미월, 기둥 뒤에 숨어 무희들의 춤 연습을 부러운 듯 바라본다.

    자희, 무희들 사이를 다니며 춤사위를 살핀다. 자희, 강한 인상의 삼십대 중반 쯤, 한창 때는 지났으나 아직 미색이 지지 않은 얼굴이다.



    자 희:(찌르는 듯한 목소리) 너.



    순간 반주 소리가 멎고, 수련생들, 긴장한 얼굴로 춤동작을 멈춘다.

    지적 받은 무희, 사색이 된다.



    자 희:(매섭게) 보리밟기 하는 줄 알아? 이리저리 나대며 뛰어다니면

    다 춤이냐? 소리 못하는 년, 춤마저 안 되면 아랫입이나 팔며

    사는 수밖에 없어.



    자희, 숨어서 보고 있는 미월을 발견하곤 눈썹을 치켜세운다.

    미월, 움찔하며 기둥 뒤로 숨는다.

    자희, 다시 춤 연습을 진행 시키려다 말고 불쾌한 낯빛이 된다.



    자 희:그런데 연비는? (불쾌한 듯) 또 안 나온 거야?



    S#5. 박성기 악대 악기고



    갖가지 악기가 보관되어 있는 실내.

    연비, 가야금을 뜯다가 소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다른 가야금으로 바꾸어 타본다.

    역시 소리가 마음에 안 드는 연비, 다른 가야금으로 바꿔보지만 마찬가지.

    연비, 신경질적으로 줄을 뜯다가 줄을 긁어버리고 가야금을 던지듯 밀어낸다.

    제 분에 못 이겨 어쩔 줄을 모른다.



    S#6. 군기방 앞, 거리 (늦은 오후)



    오가는 사람들. 몇몇 집에선 벌써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있다.

    홀로 걷는 장범, 군기방 입구에 멈춰 선다.



    S#7. 황궁/군기방 - 회상



    # 황궁 위봉루

    꽃나무 가득한 황궁.

    황제와 황후 앞에서 예닐곱 살쯤의 여자아이(어린 연비)가 가야금을 타고 있다.

    황제, 몸이 불편한 듯, 안색이 핏기 없이 파리하다.

    신료들과 어린 귀족 자제들, 황제의 좌우에 앉아 어린 연비의 연주를 듣고 있다.

    고사리 같은 손이 놀랍도록 빠르게 열두 줄 사이를 오간다.

    경탄해마지 않는 황제와 황후, 신료들.

    신기한 듯 바라보는 귀족 자제들 중 한 아이(최루백)가 온 신경을 기울여 연비에게 집중한다. 사십대 초반의 박성기, 한쪽 구석에 앉아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군기방

    활 만드는 공장(工匠)들, 바쁘게 돌아간다.

    예닐곱 살쯤의 사내아이(어린 장범)가 구석에서 활줄을 퉁기며 놀고 있다.



    황궁과 공방이 번갈아 보여진다. 연비의 가야금 소리와 장범의 활 줄 퉁기는 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합주라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황궁 위봉루

    연비의 가야금 소리, 점점 숨 가쁘게 달리다 ‘좌앙’ 하고 멈춘다.

    가야금 소리 멈춤과 동시에 ‘딱’하는 소리.



    #군기방

    장범의 머리에 닿아있는 활대.

    장범 부, 활대로 장범의 머리를 내리친 자세로 멈춰 서 있다.

    장범, 많이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린다.



    장범부:(귀엽다는 듯) 이놈아, 화살대 다듬으랬더니 또 장난질이냐?



    장범, 원망스런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당기고 있던 활줄을 ‘핑’ 놓는다.



    S#8. 박성기 악대 입구 (해질녘)



    ‘쉬이익’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

    화살, 박성기 악대 대문 앞에 떨어진다.

    대문 너머로부터 애절한 음률의 가야금 소리가 들려온다.

    화살을 주우러 달려온 어린 장범, 집 안쪽에서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에 반해

    넋을 잃고 듣는다. 화살은 안중에도 없다.



    S#9. 군기방 (늦은 오후) - 현재



    장범 부, 사십대 중반쯤, 마무리 된 활에 줄을 걸고 당겨본다.

    장범, 공방으로 들어서며 고개 숙인다. 장범 부, 장범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장 범:평안하세요?

    장범부:……

    장 범:(무안스런) 아버지……

    장범부:(말을 끊으며) 네 놈 인사 받을 일 없다.

    장 범:……

    장범부:(활줄을 당기며) 가야고 줄 따위를 잡은 날부터 네놈은 나와 인연이

    끊긴 거라 했지? (단호하게) 가.

    장 범:어찌 활 만드는 일만이 가치 있다 하세요?

    활과 살은 사람을 상하게 하지만 악공의 음률은……

    장범부:(말 끊으며) 술자리 흥이나 돋우는 악공 나부랭이의 천한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라.

    장 범:(자조적인) 나라 안에 귀족 아닌 다음에야 천 것 아닌 이가 있답니까?



    장범 부의 팔에 불끈 힘줄이 돋고, 팽팽히 당겨진 활줄이 끊어진다.

    장범 부, 줄 끊어진 활대를 장범에게 내던진다.

    장범, 날아온 활대에 맞고 이마를 감싼다.



    장범부:(소리 지르는) 내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활을 만드시던 자리다.

    전쟁터에서 오랑캐를 무찌르던 장수들의 명궁이 만들어진 자리란 말이다.



    장범, 고개를 들면, 두건에 피가 스며 번진다.



    장범부:기생 년들 춤 반주에 절은 상판 두 번 다시 내밀지 마라.

    다시 오면 그땐 활대가 아니라 화살이 날아갈 것이다.

    장 범:(웃으며) 또 올게요.



    장범, 뒤돌아 나간다. 돌아서는 장범의 얼굴이 씁쓸하고 우울하다.



    S#10. 기루 (저녁)



    복층으로 된 기루, 꽤 고급스러워 보인다. 창밖으로 아직 해가 남아 있는 하늘이 보인다. 거리에 색색의 화려한 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아래층 한 구석에 자리한 장범, 간단한 안주 한 접시만 놓고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위층을 보면, 장범 또래의 귀족 자제들이 크게 한 상 받아놓고 기녀들과 왁자하게 떠들며 마시고 있다. 기루 주인, 자식뻘의 젊은 귀족들에게 비굴한 태도로 굽실거린다. 장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위층을 쳐다본다.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최루백)와 눈이 마주친다. 장범과 최루백, 서로 눈길을 피하지 않고 노려본다.

    기루 주인, 장범에게 다가온다.



    주 인:처먹었으면 술값을 해야지?



    S#11. (동)기루 이 층 (저녁)



    젊은 귀족들 앞에 앉은 장범, 가야금을 탈 준비를 한다.

    젊은 귀족들, 관심 없다는 듯 기녀들만 집적거린다.

    교태부리는 기녀들, 색기 담은 눈으로 장범을 흘낏거린다.

    최루백만이 장범을 유심히 쳐다본다.

    장범, 가야금을 타기 시작하면, 최루백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친다.

    느리고 애잔한 곡조가 술청 안에 퍼지고, 떠들던 손님들이 가야금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기녀들, 음률에 취해 황홀한 표정으로 장범을 바라본다.

    젊은 귀족들, 기녀들의 반응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귀족자제1:에잇, 집어치워라. 청승맞은 곡조, 흥겨운 술판 다 깨진다.



    최루백을 제외한 젊은 귀족들, 맞장구치며 장범을 욕한다.

    장범, 눈 꼬리를 무섭게 치켜 올리며 귀족들을 노려본다.



    귀족자제2 :저 놈, 저 눈깔 좀 봐라, 저거. 천한 것이 어디서 감히……



    음식 접시 날아와 맞으며 장범의 옷을 더럽힌다. 장범, 연주를 멈추고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가야금을 들어 술상 위로 내던진다.

    ‘와장창’



    S#12. 거리 (저녁)



    길바닥에 내던져져 자빠지는 장범, 터지고 부은 얼굴이다. 자조적으로 웃어댄다.

    넘어진 장범의 눈에 여인들의 장식품을 늘어놓은 진열대가 보인다.

    장범, 슬슬 기어가 참빗 머리장식 하나를 집어 들고 히죽 웃는다.



    S#13. 마당 (저녁)



    연비, 무희들에게 잡혀 끌려온다. 빠져 나오려 몸부림 쳐보지만 힘이 달린다.

    무희들, 자희 앞에 연비를 끌고 와 꿇어앉힌다.

    남자 악공의 차림새를 한 연비, 자희를 매섭게 노려본다.

    자희, 연비 앞으로 걸어오더니 연비의 뺨을 후려갈긴다.

    연비, 기죽지 않고 자희를 노려본다. 자희, 연비의 다른 쪽 뺨을 때린다.

    연비, 고개를 꼿꼿하게 들며 더욱 사납게 자희를 노려본다.

    자희, 화나기보다 어이없다.



    자 희:춤 연습에 자꾸 빠지는 이유가 무어냐? (옷차림을 보며) 이 꼴은 또 뭐고.

    연 비:악공이 창기들의 춤 연습에 나갈 일이 무엇이오?

    혹, 반주가 필요해서 이러는 거라면 내 한번 생각해 보지.



    자희, 일그러진 얼굴로 거칠게 연비의 두건을 벗기며 머리채를 잡아챈다.

    연비의 풍성한 머리가 흩뜨려져 흘러내린다.

    도발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여인의 자태다.

    연비, 머리가 풀린 채 독한 눈빛으로 자희를 노려본다.

    표독스럽지만 고혹적이다.



    S#14. 박성기 악대, 장범의 방 (밤)



    장범, 거나하게 취해 방으로 들어서더니 가야금을 잡고 뜯기 시작한다.

    신들린 듯한 탄주.

    음률을 타는 장범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다가 서서히 독기가 서린다.

    점점 격렬해지는 가야금 소리.



    S#15. 장범의 방 앞 (밤)



    창호지 문에 가야금을 타는 장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장범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산발한 여인의 뒷모습.

    정면을 보면, 연비가 엉망이 된 얼굴로 울고 있다.



    자 희:(V.O.) 어미가 창기이면 딸년도 창기인 것이 이 나라 법이다. 스승께서

    방자한 너를 너그러이 여기시어 지금껏 감싸 주셨으나 내 더는 보아 넘길 수가 없다. 한 번 더 어쭙잖게 악공 흉내 내며 춤 연습에 빠져만 봐라.

    남은 평생 바닥을 기며 살게 해주마.



    미월, 다가와 연비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연 비:(애끓는) 저렇게, 내 저렇게 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

    목숨이라도 내어놓겠어.



    미월, 이를 악 문 채 흐느끼는 연비를 꼭 안아준다.

    연비, 더욱 서럽게 울며 손을 얹고 있던 꽃나무 가지를 움켜쥔다.



    S#14. 욕실 (동트기 직전)



    벗은 몸의 연비, 진정이 된 듯 무릎을 감싸 안고 말없이 앉아있다.

    미월, 연비의 몸에 천천히 물을 부으며 씻겨준다.

    미월이 연비의 얼굴에 난 상처에 가만가만 물을 묻히며 닦아주면,

    연비, 상처가 따가운 듯 가끔 얼굴을 찡그린다.

    연비, 편안하게 웃으며 미월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연 비:내가 사내라면 너를 내 짝으로 삼을 것이야.



    미월, 다시 상처를 닦아준다.



    연 비:(웃으며) 다음 생에는 부부의 연으로 만나볼까?



    미월,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연 비:싫으냐?



    미월, 고개를 젓는다.



    연 비:(볼을 잡아당기며) 싫어, 좋아? 따로 마음에 품은 놈이라도 있는 게냐?

    미 월: (그저 웃기만)······

    연 비:(정색하며) 창기들 춤판에 자꾸 기웃거리지 마라.

    그 사나운 퇴기도 퇴기지만 스승님께서 싫어하시잖니.



    미월, 씁쓸하게 웃는다. 연비, 안타까운 표정으로 미월을 바라본다.



    연 비:(안타깝고 미안한) 네 목소리…… 참으로 고왔는데……



    미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짓지만 그늘진 웃음이다.



    S#15. 장범의 방



    (E) 가야금 소리

    옷 입은 채로 쓰러져 잠든 장범,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난다.



    장 범:(방문을 열며 혼잣말) 이것아, 밥이나 먹은 다음에 하지……



    S#16. 대청



    사방 활짝 핀 꽃들이 화사하기 그지없다. 연비, 온 힘을 기울여 가야금을 타고 있다. 전날의 악공 복장과 다르게 여인의 차림새다. 얼굴 군데군데 생채기가 남아있지만 말끔해 보인다. 청초한 모습이 아름답다. 장범, 다가와 취한 듯한 표정으로 연비를 쳐다본다. 연비, 기척을 느끼고 탄주를 멈춘다.



    장 범:집중이 그리 쉽게 깨져서야 쓰나. 몰입하여 탄주할 때는 목을 잡아

    흔들어도 몰라야지.

    연 비:(고개 숙인 채) 어찌하면 돼?

    장 범:무얼?

    연 비:어찌하면 깃털처럼 가볍게 타면서도 벽을 뚫는 육중함을 음률에

    담을 수 있니?

    장 범:내 음률이 그러하니?

    연 비:(인정하기 싫은 듯) 그래.

    장 범:(연비의 강한 눈길을 받으며) 모른다.

    연 비:(허를 찔린 듯한 표정)······

    장 범:그저 무릎 위에 가야고를 놓고 손 가는대로 맡길 뿐, 어떤 소리를

    어떻게 내야지 하는 생각 따위 하지 않아. 그렇게 소리가 흘러나오고

    음률을 따라 흘러 다니다보면 이미 몇 시진이 지나 있고……



    연비, 절망 섞인 한숨을 내쉰다.



    장 범:왜 그리 스스로를 괴롭히니? 자고 깨면 가버리는 게 한 세상이고,

    눈 한 번 깜빡이면 사라지는 게 청춘이다. 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만큼만 담고 살면 되잖아.

    연 비:내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소리다?

    장 범:너도 보통은 더 된다. 그 정도에 이른 것만도 놀랍지. 몇 년 더 정진하면 악부에도 들 터이고.

    연 비:교방에 들어 창기가 되겠지.



    장범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연 비:너라면 관현방 악공이 된다고 득음의 욕심을 버릴 수 있어?

    장 범:버릴 수만 있다면야 내겐 더없는 복이지.

    연 비:(격분하는) 닿지도 못 할 곳에 손 뻗으며 버둥거리는 내 꼴이

    우스워 지껄이는 소리냐?

    장 범:(애정이 담긴 미소) 날 어떻게 보든 나는…… 네가 좋다.

    연 비:(비꼬는) 남보다 뛰어난 자는 얼마나 좋으냐. 너그러울 수 있으니.

    장 범:(안타까운) 연비야……



    연비, 장범을 쏘아본다. 장범, 품 안에서 무언가 꺼낸다.

    참빗 머리장식이다.

    장범, 연비에게 다가간다. 연비, 살짝 긴장하며 장범을 쏘아본다.

    장범이 손을 내밀면, 연비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뺀다.



    장 범:가만 있어 봐라. 안 잡아먹는다.



    장범, 연비의 머리에 참빗 머리장식을 꽂아준다. 연비, 장범을 쏘아본다.



    장 범:(안쓰럽게) 좋아한다고 해서……꼭 재주가 있는 건 아니다.

    그깟 음률이 뭐라고 이리도……



    연비, 격노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장범, 돌아서는 연비를 거세게 잡아끌어 입을 맞춘다.

    연비, 장범을 밀어내려 하지만 장범의 완력을 이기지 못한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연비, 장범의 뺨을 갈기고 참빗 머리장식을 뽑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연비와 장범, 마주 서서 서로를 쏘아본다.

    연비, 몸을 홱 돌려 가버린다. 장범, 한숨 쉬듯 피식 웃고는 자리를 뜬다.

    참빗 머리장식만 대청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S#17. 박성기의 처소



    자희와 박성기, 마주 앉아 있다.



    자 희:(싸늘한 표정) 계속 저대로 두실 겁니까?

    박성기:(무표정한)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자 희:진정 그 아이를 아끼어 이러십니까?

    박성기:……

    자 희:공연히 헛된 꿈을 키워 앞날을 망가뜨리……

    박성기:(말 끊으며) 연희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자희,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박성기를 쳐다본다.



    S#18. 박성기 악대, 대청



    미월, 대청 바닥 위에 떨어진 참빗 머리장식을 쳐다보며 서 있다.



    S#19. 박성기 악대 뒷마당



    붉은 꽃잎 하나, 화단 바닥에 내려앉는다.

    연비, 화단 앞에 앉아 붉은 꽃송이를 보다가 유난히 붉은 꽃잎 하나를 따낸다.



    <플래시백>

    연비를 거세게 잡아끌어 입을 맞추는 장범.



    다시 현재>

    꽃잎을 입술로 문다.



    S#20. 박성기 악대 대청 - 회상 (해질녘)



    여덟 살 정도의 어린 장범과 연비가 가야금을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아 있다.

    장범, 서툰 자세로 가야금 줄을 퉁긴다.

    단순하지만 애잔한 가락이다.

    연비, 장범에게 다가가 상냥하게 웃으며 자세를 바로 잡아준다.



    연 비:그저 손가락으로만 퉁기는 게 아니야. 허리의 힘이 받쳐주어야지.



    연비, 줄을 퉁긴 손 모양을 유지하며 팔을 부드럽게 위로 올린다.



    연 비:퉁기고 나서는 소리의 여음을 따라 이렇게.



    장범, 연비의 얼굴을 쳐다보다 연비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눈길을 피한다.

    연비, 웃으며 자기 자리로 가 가야금을 잡는다.

    방금 전, 장범이 타던 악곡을 연주한다.



    연 비:(연주를 하다 말고) 아주 오래된 악곡이란다. 뒤에 오는 가락은 잊혀져

    전하질 않아. 언젠가 가락을 만들어 붙여 온전한 곡을 만들어 볼 거야.

    범이 네게 제일 먼저 들려줄게. 자, 다시 해봐.



    장범, 연비가 했던 대로 따라해 줄을 퉁긴다.

    연비, 장범에게 다가가 가야금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

    눈을 감고 손을 통해 소리의 울림을 느낀다.



    연 비:(사랑스러운 미소로) 좋구나.



    S#21. 박성기 악대 뒷마당 - 현재



    연비, 붉은 꽃잎을 물고 있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다가 도리질 치며 입술을

    닦아낸다.

    (E) 경쾌한 가야금 소리



    S#22. 장범의 처소 툇마루



    전 씬에서 이어지는 가야금 소리. 미월, 꿈꾸는 듯한 표정이다.

    장범, 미월의 맞은편에서 여유롭게 가야금을 타고 있다.

    장범을 바라보는 미월,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연비, 기둥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장범을 보다가 쭈뼛거리며 다가간다.

    미월, 다가오는 연비를 보더니 얼굴에 웃음이 가신다.

    장범, 고개 돌려 연비를 보고 밝게 웃는다.



    장 범:왔니? 올라와 앉아라.

    연 비:(차갑게) 누가 널 보러 왔다했느냐? (시선 돌리며) 미월아.



    미월, ‘뭐?’하는 표정으로 연비를 본다.

    연비,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린다.



    장 범:뭐?

    연 비:시끄럽다. 몰입하여 탄주할 때는 목을 잡아 흔들어도 몰라야지.

    장 범:(뚱한 표정) 몰입 안 했다.



    연비, 얄밉다는 듯 장범을 한 번 노려보곤 몸을 홱 돌려 가버린다.

    돌아서 걷는 연비, 화난 얼굴로 뭔가를 바닥에 던진다.

    붉은 꽃잎이 연비의 손을 떠나 팔랑거리며 떨어진다.

    장범, 애정 가득한 눈길로 연비를 바라본다.

    미월, 장범의 표정을 보고 낯빛이 어두워진다.



    S#23. 박성기 악대 마당



    미월, 홀로 앉아 떨어지는 흰 꽃잎들을 넋 놓고 쳐다본다.

    우울하고 쓸쓸해 보인다.

    박성기, 멀찍이 서서 미월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미월의 가녀린 어깨선이 더없이 외로워 보인다.

    미월을 바라보는 박성기, 얼굴에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가득 묻어난다.

    하얀 꽃잎 한 장, 미월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가 바람에 날려 떨어진다.

    박성기, 미월의 등 뒤로 다가 어깨에 손을 얹는다.

    돌아보는 미월, 박성기에게 웃어 보이지만 여전히 슬퍼 보인다.



    S#24. 연회장



    귀족들, 연회 상 앞에 둘러앉아 있다.

    무희들, 연회장 중안에서 악공들의 반주에 맞추어 춤추고 있다.

    구석에 서서 연회를 보고 있는 박성기, 초조해 보인다.

    수련악공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박성기 앞에 선다.


    박성기:(초조한) 왔느냐?

    수련악공:(난감한) 그게, 아직……

    박성기:자희 차례는?

    수련악공:다, 다음입니다.

    박성기:(몹시 화난 듯 말이 없다가) 연비에게 준비하라 이르거라.

    수련악공:예.



    수련악공이 물러가고 잠시 후, 장범이 술이 거나한 얼굴로 나타난다.

    장범, 비틀거리며 걸어와 박성기에게 허리를 굽힌다.

    박성기, 싸늘하게 노려본다.



    박성기:(화를 억누르며) 연회가 오늘인 줄 몰랐느냐?

    장 범:(비위 좋게 웃으며) 꽃이 곱다하여 열리는 연회라기에

    저도 한 잔 했습니다.

    박성기:대악서령이 나오는 자리인 줄도 알고 있느냐?

    장 범:종7품 하급 관리가 말석에 자리 한들 뭐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박성기:(화가 뻗쳐) 네 이……



    수련악공, 달려온다.



    수련악공:호선무가 끝나갑니다.

    박성기:(장범을 노려보며) 준비하거라.



    S#25. 연회장



    가야금을 앞에 놓고 앉은 장범, 흐느적거리는 꼴이 영 불안하다.

    연회석에 앉은 귀족들, 역시 장범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연회상 말석의 최루백, 장범을 쏘아보다 고관들의 눈치를 살핀다.

    자희, 못미더운 눈초리로 장범을 보며 서 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줄 위에 손을 얹는 장범, 반주를 시작한다.

    맑고 깊은 소리가 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자희, 가야금 소리에 맞추어 창을 시작한다.

    참담한 표정의 연비, 입술을 깨물며 연주하는 장범을 노려본다.

    최루백, 연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S#26. 박성기 악대, 대청 (밤)



    박성기와 마주앉은 연비, 격앙된 얼굴이다.



    연 비:저의 탄주가 술 취한 범이의 것에도 못 미칩니까?



    박성기, 대답 않고 연비를 응시한다.



    연 비:정녕 그러합니까?

    박성기:……

    연 비:그러합니까?

    박성기:……

    연 비:제가 회회인(回回人)의 피를 받았다하여 이방인으로 여겨 이러십니까?

    박성기:……

    연 비:아니면…… 어릴 적 미월이의 일 때문에……

    박성기:(말을 끊는) 무릇…… 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정이 마음 가운데서 움직이어 소리로 나타나는 것을 음이라 한다.

    네 마음이 노기를 띠고 초조함으로 가득한데 어찌 바른 음률을 내어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느냐?

    연 비:그러하면 취한 음률은 듣는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기만 할 터,

    어찌 범이를 대(臺)에 올리셨습니까?

    박성기:네가 들은 음률이 취하여 어지러웠느냐?

    연 비:(말문이 막히는) ……

    박성기:일렁이며 타올라도 뜨겁지 않으면 불이 아니다.



    연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다.

    장범, 방 안으로 들어서다가 연비에게 부딪쳐 휘청한다.

    뛰쳐나가는 연비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꽤 취해있다.

    박성기, 장범을 무섭게 노려본다.



    박성기 :오늘과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장 범:너무하셨습니다. 연비가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S#27. 대청/강가 (밤)



    #강가

    빠르고 격렬한 가야금 소리가 밤하늘을 울린다.



    #대청

    박성기, 장범을 노려본다.

    장범, 도발적인 눈빛으로 박성기를 마주본다.



    #강가

    미친 듯이 가야금을 뜯는 연비, 울고 있다.



    #대청



    박성기:어차피 창기가 될 아이다.



    장범, 부르르 떨며 주먹을 움켜쥔다.



    박성기:나라 법이 그러한 줄 몰랐느냐?

    장 범:(화를 억누르며) 누가 정한 법입니까?



    #강가

    더욱 격렬히 가야금 줄을 뜯는 연비.



    #대청



    장 범:세상이 천히 여기는 음률, 술판의 흥이나 돋우는 가야고,

    누가 탄들 무슨 상관입니까?

    박성기:덧없는 악다구니로 타고난 재주를 허물지 마라. 관현방에서 널 찾는다.



    #강가

    점점 더 거칠고 빠르게 달려가는 가야금 소리.



    #대청



    장 범:(격앙된) 관현방 악공으로 십 수 년을 지내고, 악사 자리에 올라

    받는 녹이 고작 미(米) 2과 8석입니다. 밤낮없이 줄을 비비고 뜯어

    득음을 하고 명인이 되면 뭘 합니까?



    #강가

    격렬하기 그지없는 가야금 소리.

    줄을 뜯는 연비의 손놀림, 거칠다 못해 광포하기까지 하다.



    #대청



    장 범:차라리 재주를 타고 나지 않았더라면, 그 빌어먹을 어린 날,

    가야고 소리에 혹하지 않았더라면, 아비의 직을 이어 공장(工匠)이나

    되었겠지요. 생각 없이 한 세상 살다 갔겠지요. 내 새끼가,

    그 새끼의 새끼가 지은 죄도 없이 천대 받아가며 살아갈 세상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절규하는) 대체 음률 따위가 다 뭡니까?

    박성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닥쳐라.



    #강가

    ‘땡’ 줄이 끊긴다. 연비의 울부짖는 소리, 밤하늘을 찢는다.



    S#28. 거리



    밤사이 얼굴이 반쪽이 된 연비, 옷 여기저기에 흙이 묻고 풀이 붙어 있다.

    연비의 맞은편에서 장범이 걸어온다.

    대장간 옆을 지나던 연비, 장범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몸을 감춘다.

    거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장터 왈패들, 패싸움을 벌이며 주위 노점과 상점들을 엉망으로 만든다.

    장범, 걸어오다 왈패들 싸움에 휩쓸려 대장간 안쪽으로 쓰러진다.

    몸 일부가 대장간 안쪽에 걸친 형국이다.

    소란 통에 쌓여있던 나무며 쇠틀 등이 쏟아져 내려 장범의 팔을 누른다.

    문 안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연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낫을 발견한다.

    연비, 장범의 손을 뚫어지게 보다 그 옆에 놓인 낫으로 시선을 옮긴다.

    심하게 동요하는 연비, 몸을 낮추어 낫을 움켜쥔다.

    순간, 장범과 연비의 눈이 마주친다.

    연비, 내리 찍으려는 듯 낫을 높이 치켜든다.



    S#29. 관현방



    신입 악공들과 창기들, 열 지어 서있다.

    대악사가 호명하면 신입 악공들이 한 명씩 차례로 앞으로 나온다.

    최루백, 악공들에게 사령패를 나누어 준다.



    대악사:장범. (대답 없고) 장범.



    최루백, 나무라는 눈빛으로 중년의 대악사를 쳐다본다.

    대악사, 다소 비굴하게 웃어 보인다.

    왜소한 몸집에 듬성듬성 난 수염, 영 볼품없는 외모이다.

    장범, 팔을 부여잡고 들어온다. 머리며, 옷이며, 꼴이 엉망이다.

    최루백, 장범에게 말없이 사령패를 건넨다.

    장범, 패를 받다가 최루백을 알아보곤 멈칫한다.

    장범과 최루백, 사령패 양끝을 쥔 채 눈길을 주고받는다.

    최루백, 사령패에서 손을 떼고, 장범, 고개 숙이며 받는다.



    최루백:(장범 옆을 지나치며) 술 좋아하느냐?

    장 범:(뜬금없다 듯) 예?

    최루백:(싸늘하게) 취한 음률이 풍류 넘치긴 하지만 여기서 그랬다간

    그 잘난 손모가지 제자리에 붙어있기 어려울 줄 알아라.



    최루백, 자리를 뜬다. 아무 말 않고 허리를 굽히는 장범, 냉소적인 웃음을 흘린다.



    장 범:(혼잣말) 손모가지가 날아가면 술잔은 무엇으로 들꼬?



    대악사,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장범을 쳐다본다.



    S#30. 대청/대장간



    #대청

    연비, 가야금을 앞에 놓고 앉아 있다. 참담한 표정으로 가야금을 내려다본다.



    #대장간-회상

    연비, 낫을 치켜든 채 장범을 노려보고 있다.

    장범, 허탈한 표정으로 연비를 쳐다본다.



    장 범:이 손을 버리면 널 얻을 수 있는 거냐?



    심하게 동요하는 연비, 울기라도 할 듯 눈동자와 입가가 떨린다.



    #대청

    연비, 기억을 떨치려는 듯 머리를 흔든다.

    가야금 줄 위에 손을 얹고 애무하듯 어루만진다.



    S#31. 가야금 공방 안



    가야금의 재료가 될 나무판들이 쌓여 있다.

    공장들, 각기 자기 맡은 일을 하며 바쁘게 움직인다.

    나무를 깎는 이, 알맞게 나무판을 휘는 이, 줄을 고르며 소리를 확인 하는 이 등등.

    연비, 공방 안으로 들어온다.

    일하던 공장들, 연비의 이국적이고 도발적인 자태에 일손을 멈추고 쳐다본다.

    연비, 나이 지긋한 악기장에게 다가간다.



    연 비:다 되었소?

    악기장:글쎄, 다 되긴 했다만……



    악기장, 일어나 벽에 기대어 있는 가야금 들고 온다.

    보통 가야금에 비해 폭이 넓고, 일반 12줄 가야금보다 6줄이 더 많은

    18줄 가야금이다.



    악기장:내 악기장 삼십 년에 열여덟 줄짜리 가야고 만들기는 처음이다.



    연비, 잠시 가야금을 살펴보더니 자리 잡고 앉아 18줄 가야금을 타본다.

    12줄 가야금보다 훨씬 더 현란한 소리가 울려 나온다.

    공방 안의 사람들, 감탄어린 눈으로 연비의 탄주에 귀 기울인다.



    S#32. 가야금 공방 입구



    대악사, 공방 안으로 들어서려다 걸음을 멈추고,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S#33. 가야금 공방 안



    악기장, 누군가를 본 듯, 갑자기 입구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연비, 연주를 멈춘다.

    공방 안으로 들어서는 관현방 대악사, 공장과 연비 앞으로 다가온다.



    대악사:(18줄 가야금을 보며) 무엇이냐, 이건?

    악기장:그것이……

    연 비:내 것이오.



    대악사, 말없이 18줄 가야금과 연비를 번갈아 쳐다본다.



    대악사:창기냐?

    연 비:(발끈하는) 아니오.

    악기장:(송구한) 말본새가 그게 뭐냐, 이것아. 관현방 대악사님이시다.



    연비, 흠칫한다.

    대악사, 아무 말 없이 연비를 쏘아본다.



    S#34. 박성기 악대, 대청



    연비, 18줄 가야금을 타고 있고, 박성기, 미월, 자희, 제자들이 듣고 있다.

    미월과 제자들, 현란한 소리에 홀려 듣지만, 박성기와 자희, 무감동한 표정이다.



    S#35. 가야금 공방 안



    연비, 대악사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본다.



    대악사:재주가 좋구나.



    연비의 얼굴에 뿌듯한 빛이 떠오른다.



    대악사:눈과 귀를 속이는 재주가 너 만한 이도 드물 것이다.



    연비의 얼굴이 일순 굳어진다.



    대악사:(악기장에게) 새로이 주문한 가야고는?

    악기장:수 일 내로 관현방에 전할 것입……

    연 비:(날카로운) 무슨 뜻이오?

    대악사:(무시하고 악기장에게) 시일을 맞춘다고 마무리를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악기장:(연비에게 눈짓으로 경고하며) 예.



    대악사, 대꾸 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 공방 안의 공장들, 예를 갖추어 인사한다.



    연 비:무슨 말이냐 묻지 않소?



    대악사, 무시하고 걸음을 옮긴다.



    연 비:(소리치는) 누가 눈과 귀를 속인단 말이냐?



    공장들, 기겁하고, 대악사, 걸음을 멈춘다.

    공방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대악사, 다시 걸음을 옮긴다. 연비, 달려가 대악사의 앞길을 막고 노려본다.



    대악사:(말없이 쳐다보다가) 네가 진정으로 가야고를 다루고자 한다면

    월명(月鳴)에 이르기를 궁극으로 삼아야 한다.

    연 비:무슨 말이오?

    대악사:(부질없다는 듯 웃으며) 아니다.



    대악사, 연비 곁을 지나쳐 걸어 나간다.

    연비, 따지려는 듯 쫓아 나가는데, 악기장이 팔을 붙잡는다.

    연비가 뿌리치려 하지만, 악기장, 놓지 않고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연비를 노려본다. 연비, 팔을 붙잡힌 채 대악사의 뒷모습을 쏘아본다.



    S#36. 박성기 악대, 대청



    연주를 마친 연비, 가야금에서 손을 떼고 박성기를 쳐다본다.

    박성기, 여전히 말이 없다.

    미월, 제자들, 숨죽이고 박성기의 말을 기다린다.



    박성기:(자희에게) 다음 지방 연회에 데리고 가거라.



    연비, 긴장이 풀리며 표정이 다소 밝아진다.



    박성기:(일어서며) 연회에서 탄주하게 하되, 음률을 아는 예인들 앞에서는

    삼가야 한다.

    연 비:(의문과 분노) 대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어째서

    음률을 아는 예인들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입니까?

    박성기:……

    연 비:어째서입니까?

    박성기:우륵 선생께서 쟁(箏)으로부터 영감을 얻으시고, 일 년 열두 달을

    본 따 십이 현금을 전하신 이래 가야고는 항시 열두 줄이었다.

    연 비:(도전적인) 그래서요? 틀에 갇혀 옛것만 답습한다면 어찌 새로운 것이

    나올 것입니까?

    박성기:틀에 갇힌 것은 바로 너다.

    연 비:(이해할 수 없는) 대체 무슨……?



    박성기, 대꾸 없이 대청 아래로 내려간다.



    연 비:월명(月鳴)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박성기,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연비를 쳐다본다.



    연 비:(간절한) 무엇입니까?

    박성기:네가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박성기, 자리를 뜬다.



    S#37. 관현방 입구



    연비, 입구를 노려보며 꼼짝 않고 서 있다.

    문이 열리고 대악사가 걸어 나온다.

    연비, 대악사에게 다가가 앞을 가로막는다.

    대악사, 연비의 당돌한 눈빛을 말없이 받다가 소리 내어 웃는다.



    S#38. 박성기의 처소



    장범과 박성기, 마주 앉아있다. 장범의 표정이 어둡다.



    박성기:내 딸이어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미월이가 비록 말은 못하나 심성이 곱고 영민하다.

    장 범:……

    박성기:너에게 악대를 잇게 할 것이다.

    장 범:……



    <플래시백>

    치켜든 낫을 힘껏 내리치는 연비. 장범의 손목 바로 옆에 떨어져 꽂히는 낫.



    다시 현재>

    장범, 원망과 절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는다.



    박성기:거래라 해도 좋다.

    장 범:……

    박성기:취하겠느냐?



    장범, 감은 눈을 뜨지 않는다.



    S#39. 박성기 악대, 연비의 방(밤)



    홀로 앉아 있는 연비, 분하고 절망스런 표정이다.



    대악사:(V.O.) 가야고 줄의 수를 늘여 음역을 넓히고, 소리에 현란함과 화려함을

    입히려 한 이가 네가 처음은 아니다. 열일곱, 열여덟, 더 나아가

    스물한 줄을 걸었던 이들도 있었다.



    연비, 18줄 가야금을 손가락으로 훑어 소리내어본다.

    각기 다른 음역의 소리가 한꺼번에 울린다.



    대악사:(V.O.) 가야고가 열두 줄인 것은 고려의 정악과 속악, 아니 그 이전 대의음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야고는 열두 줄일 때, 그 속성과 깊이가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개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연비, 가야금 줄을 움켜쥔다.



    대악사:(V.O.) 진원에 다다르지 않은 네 소리를 현란함으로 덮으려 해도

    음률을 아는 이들의 귀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야.



    연비, 아랫입술을 피가 맺히도록 깨문다.



    대악사:(V.O.) 그걸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느냐. 어차피 악공이 아니라면

    닿지도 못할 것 때문에 속 썩을 것도 없다.



    연비, 움켜쥔 가야금을 쥐어뜯다가 문 밖의 인기척을 느낀다.

    문밖으로부터 장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 범:연비야.

    연 비:……



    연비, 문을 열려다가 멈춘다.



    대악사:(V.O.) 아무나 득음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득음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연비, 절망적인 표정으로 문고리에서 손을 뗀다.



    장 범:연비야.



    연비의 눈가에 물기가 맺힌다.

    장범이 바깥쪽에서 문을 열려하자, 연비, 문고리를 틀어쥐고 당긴다.



    장 범:연비야.

    연 비:가거라.

    장 범:연비야.

    연 비: (흐느끼며 소리치는) 제발, 제발 가란 말이다. 제발.

    장 범:(애끓는) 연비야, 내가 손목을 끊으면 되겠느냐? 그러면 되는 것이냐?



    연비, 충격 받은 듯 아무 말 못한다.



    장 범:네가 진정 미운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손이 아니냐.

    연 비: (위악적인) 어찌 그 손모가지뿐이냐. 너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타고난 재능 하나 믿고 음률을 우습게 여기는 네놈이나, 거기에 놀아나는

    꼬라지들 역겨워서 봐줄 수가 없단 말이다.

    장 범:(안타까운) 연비야······

    연 비: (악쓰는)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네놈의 상판만 봐도 구역질이 나.


    정적. 시간이 흐르고 밖에서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다.

    연비, 문을 열어보지만 아무도 없다.


    S#40. 박성기 악대, 마당



    악공과 창기들, 문을 나서고, 미월, 멀찍이 서 배웅한다.

    연비, 멀리 뒤쪽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장범을 발견한다.

    일행, 짐을 챙기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 희:(재촉하는) 빨리 움직이지 못 하니? 한 달 내내 돌아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연 비:안 갈 테요.

    자 희:(표정 사납게 변하며) 네 맘대로 안 가?

    어디 한 번 더 그 따위로 지껄여 보아라.



    자희, 연비의 팔을 거칠게 잡아끈다. 일행, 움직이기 시작한다.

    연비, 장범이 서 있던 쪽을 돌아보지만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연비, 갑자기 안쪽 옷소매를 찢어내더니 새끼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낸다.

    바닥에 엎드려 찢어낸 천 조각에 피로 무언가 그린다.



    자 희:뭐 하는 짓이냐?



    연비, 미월에게 달려가 천 조각을 쥐어준다.



    자 희:미월아. 범이에게 전해다오. (간곡히) 꼭.



    미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연비, 당부하는 눈빛으로 미월을 돌아보며 일행에게 돌아간다. 미월이 접힌 천을 펼쳐보면 핏물로 그린 그림이다.

    단순한 선 몇 개로 급히 그린 그림이지만 참빗 머리장식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미월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S#41. 지방 연회장



    무희들의 춤이 끝나간다.

    연비, 다음 차례인 듯 18줄 가야금을 세워놓고 대기 중이다.

    생각에 빠져 있는 표정이 불안해 보인다.

    춤이 끝나고 무희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연비, 여전히 생각에 빠져있다. 자희, 연비의 어깨를 친다.

    정신이 든 연비, 자희를 노려보다가 연회장 중앙으로 나가 자리 잡는다.

    연비가 탄주를 시작하면 현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희, 안타까운 낯빛으로 연비를 바라본다.



    S#42. 강가 (해질녘)



    미월, 연비가 전해 달라 부탁한 천 조각을 들고 있다.

    천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눈매가 독해진다.

    미월, 천 조각을 둘로 찢어버린다.



    S#43. 군기방 (해질녘)



    장범 부, 활의 곡선을 살피다가 들어서는 장범을 보고 표정 험악해진다.



    장범부: 다시 오면 화살이 날아갈 거라 했다.



    장범, 대꾸 없이 장범 부 옆에 앉아 화살대를 다듬고 화살촉을 끼운다.



    장범부: (화가 치밀어) 네놈이 가슴팍에 화살이 꽂혀야……

    장 범: (허망하게 웃으며) 꽂아주시겠어요?

    (화살을 쳐다보며) 이거면 약이 될 것도 같은데.



    장범 부, 멈칫하며 장범을 쳐다본다. 장범, 웃고 있지만 슬퍼 보인다.



    S#44. 박성기 악대 마당



    장범과 미월의 혼인식이 벌어지고 있다.

    양팔을 부축 받으며 나오는 신부 미월, 수줍고도 설레는 빛이 얼굴에 드러난다.

    박성기, 감회 어린 표정으로 미월을 바라본다.

    장범, 신랑답지 않게 쓸쓸해 보인다.

    자희,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담한 표정이다.

    장범, 하객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놀란다.

    장범 부, 사람들 틈에 섞여 장범을 바라보고 있다.

    눈이 마주친 장범과 장범 부,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

    장범,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이를 꽉 문다.

    미월, 살짝 눈을 들어 장범의 표정을 살피고는 우울해진다.



    S#45. 박성기 악대 대청



    머리를 산발한 채 가야금을 타는 연비의 뒷모습이 보인다.

    축 처진 어깨와 흐느적거리는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다.

    지나치는 악공과 창기들,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비를 흘낏거린다.

    자희, 대청 아래 서서 연비를 보고 있다.



    <시간경과>



    땅거미가 진다. 연비, 여전히 실성한 듯 가야금만 타고 있다.

    텅 빈 마당에서 자희만이 연비를 보고 있다.

    금을 타는 연비의 손가락 끝이 다 터져 피가 흐른다.

    자희, 대청으로 올라간다.



    자 희:(어깨를 잡아 돌리며) 네가 이런다고……



    말을 멈추는 자희, 질린 표정이다.

    연비, 초점 없이 퀭한 눈, 핏기 없는 얼굴, 갈라진 입술, 섬뜩한 모습이다.



    자 희:뱀 보듯 역겨워하던 놈 아니냐? 네가 아쉬울 게 무어야?



    연비, 고개 들어 자희를 노려본다.

    갑자기 소름 끼치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 가야금을 들고 휘두른다.

    자희, 가야금 모서리에 옷이 찢겨나간다. 얻어맞으면서도 꼼짝 않는다.

    연비, 사나운 표정으로 자희를 할퀴고 쥐어뜯는다.

    자희, 연비 하는 대로 당하고 있다가 연비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친다.



    자 희:네 그 독하고 더러운 고집으로 자초한 일 아니냐?

    싫은 것도 싫다, 좋은 것도 싫다. 누가 널 좋다하여 곁에 머물겠느냐?



    연비, 소리 지르며 일어나 자희에게 덤빈다. 자희, 연비를 붙잡아 매몰차게 내친다.

    연비, 다시 일어나 덤빈다.



    자 희:(연비를 밀어내며) 위험하다 말렸었지.



    연비, 그악스럽게 달려든다.



    자 희:기어이 고집 부려 활 가지고 장난질하다 미월이 목구멍에 화살 꽂은 년이 너 아니냐.



    연비, 갑자기 얼어붙은 듯 멈춘다.



    자 희:미월이한테 빚 갚은 셈 쳐.



    아무 말 못하고 서 있는 연비, 마치 시체 같은 몰골이다.



    자 희:차라리 그런 고집을 끝까지 세워. 퍼렇게 날을 세워 더 독하게 살아

    견디란 말이다, 이년아.



    연비, 무너지듯 엎어지며 울음을 쏟아낸다. 자희, 연비를 안쓰럽게 내려다본다.



    S#46. 신방(밤)



    장범, 미월의 예복을 하나씩 벗겨내고 있다.

    미월, 부끄러워 떨면서도 장범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다.

    장범, 아무 감흥 없는 표정으로 기계적으로 옷을 벗겨낸다. 등잔불, 꺼진다.



    S#47. 대청(밤)



    희미한 달빛. 연비, 홀로 앉아 있다. 축 늘어진 꼴이 마치 부서진 인형 같다.

    연비, 천천히 고개 돌린다. 부서지고 줄 끊어진 가야금이 눈에 들어온다.



    박성기:(V.O.) 네 마음이 노기를 띠고 초조함으로 가득한데 어찌 바른 음률을

    내어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느냐?

    대악사:(V.O.) 눈과 귀를 속이는 재주가 너 만한 이도 드물 것이다.



    연비, 하늘을 올려다본다. 희미한 달빛, 그마저도 구름에 가려진다.



    박성기:(V.O.) 일렁이며 타올라도 뜨겁지 않으면 불이 아니다.

    대악사:(V.O.) 진원에 다다르지 않은, 네 소리를 현란함으로 덮으려 해도

    음률을 아는 이들의 귀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야.



    연비, 주위를 둘러본다. 적막하고 캄캄하다.



    자 희:(V.O.) 어미가 창기이면 딸년도 창기인 것이 이 나라 법이다.

    대악사:(V.O.) 아무나 득음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득음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박성기:(V.O.) 네가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연비,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자조적인 웃음, 처연하다.



    S#48. 박성기 악대 마당



    무희들, 춤 연습 중이다.

    자희 무희들의 춤동작을 고쳐주다가, 손을 멈추고 한곳을 응시한다.

    무희 옷차림으로 걸어오는 여인이 보인다. 연비다.

    무희들, 동작을 멈추고 연비를 쳐다본다. 연비, 말없이 무희들 틈에 가서 선다.

    무희들, 자희의 눈치를 살핀다.

    자희가 눈짓하면 다시 반주가 울리고 무희들, 춤추기 시작한다.

    무희들 틈에 섞여 춤추는 연비의 춤사위가 돋보인다.



    S#49. 관현방



    가야금을 무릎에 얹고 앉은 신입 악공들, 눈 감은 채 줄을 한 번 퉁기고 소리에

    집중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지루한 기색들이 역력하다.

    대악사, 죽비를 들고 악공들 사이를 걸어 다닌다.

    장범, 다른 악공들처럼 줄을 퉁기고 있다.

    대악사, 죽비로 손바닥을 ‘딱’하고 내리친다.

    악공들, 줄 퉁기기를 멈춘다. 대악사, 가소롭다는 듯 살짝 웃는다.



    대악사:수도 개경의 열 두 악대,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의 수십 개 악대에서

    한다하는 악공들을 뽑아……



    대악사, 죽비로 손바닥을 내리친다. 악공들, 줄을 퉁긴다.



    대악사:다시 거르고 걸러 선발한 고려 최고의 악공들을 앉혀놓고……

    (악공들을 훑어보고는) 줄이나 퉁기게 하고 청음이나 시키고 있자니 송구하기 짝이 없소이다.



    악공들, 어리둥절해 한다. 대악사, 악공 중 한 명의 어깨를 죽비로 내려친다.

    악공, 깜짝 놀라며 허리를 편다.



    대악사:(큰 소리로) 탄(彈)



    악공, 얼결에 줄을 퉁긴다.



    대악사:(과장되게) 훌륭하오. (다른 악공의 어깨를 치며) 탄(彈)



    악공, 줄을 퉁긴다.



    대악사: (과장되게) 오, 훌륭하시오.



    대악사, 장범과 눈이 마주친다. 팔을 뻗어 죽비로 장범을 가리킨다.


    대악사: (힘이 실린 목소리) 탄(彈)



    장범, 숨을 가다듬고 줄을 퉁긴다. 앞의 둘에 비해 훨씬 묵직한 울림이다.

    대악사의 자리 다탁 위에 놓인 찻물에 작은 파동이 일고, 대들보 한구석에 쳐진 거미줄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대악사의 얼굴에 ‘이거 봐라?’ 하는 미소가 스친다.



    대악사:기운생동하고 현의 울림이 갖는 관통력이 대단하오.

    허나…… 가야고 소리일 뿐이오.

    장 범:(웃긴다는 듯) 그럼, 가야고에서 비파 소리가 울리겠습니까?

    대악사:그렇소.



    ‘무슨 소리?’ 하는 표정의 장범과 악공들.



    대악사:두 줄 해금이 열두 줄 가야고의 소리를 내고,

    현금의 울림이 비파의 음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장 범:……?

    대악사:(일갈하는) 진정한 소리에 이르면 악기의 구분은 이미 없는 것이다.

    귓가의 울림에 홀려 마음을 놓치지 말라. 알량한 재주를 지니고

    우쭐해하는 네 놈들 꼬라지, 보고 있기 역겹구나.



    장범과 악공들, 한 대 맞은 듯한 표정들이다.



    대악사:이 나라의 국호가 무엇이냐? 높고 아름다움. 네놈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좇아야할 소리 역시 그러하다. 이곳은 고려 악부의 관현방이다.

    저자거리의 너절한 음률이나 퉁기려거든 기방에나 가 자빠져.

    (날카롭고 절도 있는) 탄(彈)



    긴장한 악공들, 일제히 줄을 튕긴다.



    S#50. 몽타쥬 (관현방/사찰/거리)



    (E) 현란한 가야금 소리.

    -연습에 몰입해 있는 장범과 악공들.

    -푸른 나뭇잎들이 시들어 낙엽으로 변해간다.



    대악사:(V.O.) 그저 소리를 떨기만 한다고 농현이 아니다.



    -마주치는 연비와 장범.

    -가야금 줄을 떠는 장범의 손.



    대악사:(V.O.) 소리를 끌어 내리는 퇴성, 소리를 밀어 올리는 추성을 적절히 운용하면 같은 악곡이라도 맛이 달라진다.



    -서로 모른 척 지나치는 연비와 장범.

    -무희들 틈에 섞여 춤추는 연비.

    -가야금 줄을 현란하게 긁는 장범.



    대악사:(V.O.) 정작 탄금을 하는 것은 손이 아니다. 몸은 그저 소리가 흐르는 통로일 뿐이야.



    -단체로 염불을 외는 승려들.

    -제단과 연등을 만들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미친 듯이 회전하며 춤추는 연비.

    -몰입하여 탄주하는 장범.



    대악사:(V.O.) 손이 곧 현이고 금이 곧 몸이다. 어느 것이 금이고 몸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탄주하는 자와 악기의 구분은 이미 없는 것이다.



    -마지막 동작을 마치고 춤사위를 멈추는 연비.

    -연주를 마치고 여운에 빠져있는 장범.



    S#51. 황궁 위봉루 앞 광장 (밤)



    갖가지 연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궁.

    광장 두 곳에 연꽃 형상의 채색 무대가 높게 설치되어 있다.

    사선 악부가 흥을 돋우며 앞서고 그 뒤로 용, 봉황, 코끼리, 말, 수레, 배 등의

    가장 행렬이 화려하게 이어진다.



    S#52. (동)황궁 위봉루 앞 광장 (밤)



    황제와 황후, 신료들, 무대를 향해 앉아 있다. 누대 아래 말석에 최루백이 보인다. 무대 위에서 광대의 곡예가 펼쳐지고 있다. 감탄하며 보는 황제와 신료들.

    검푸른 빛이 감도는 황제의 얼굴, 병색이 짙다. 곡예가 끝나고 박수가 터진다.

    광대들, 무대 뒤, 대기 장소로 들어온다. 장범, 악공들 틈에서 악기를 살피고 있다.

    무희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미월,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둥’ 하고 울리는 북소리에 어수선하던 좌중 조용해진다.

    조용한 악곡이 울리기 시작하면,

    흰옷 차림의 무희들이 느린 율동과 함께 움직이며 무대로 나온다.

    열 지은 무희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붉은 의상의 무희가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옷 입은 무희의 춤사위, 우아하면서도 색정적이다.

    사람들, 넋을 잃고 바라본다.

    붉은 옷의 무희를 가까이 보면, 연비다.

    장범, 무희가 연비임을 알아보고 놀란다.

    연비를 보는 최루백, 욕정과 소유욕에 타는 눈빛이다.

    대악사 역시 연비를 알아보고 시선을 집중한다.



    S#53. 황궁 위봉루 앞 광장 (밤)



    악공들, 무대 뒤에서 연비의 움직임을 넋 놓고 쳐다본다.

    장범의 얼굴이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진다.

    미월, 부러움과 질투 어린 표정으로 연비를 보다가,

    슬픔과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장범을 본다.

    춤추는 연비의 시선, 위봉루를 향한다.

    가야금 타는 여자아이(어린 연비)만 없을 뿐,

    황제, 황후, 신료들의 배치는 어린 연비가 가야금 타던 때와 똑같다.

    연비의 춤사위 점점 빨라지며 격한 회전 동작으로 이어진다.

    황제 앞 빈자리에 가야금을 타는 어린 연비의 환영이 살짝 나타났다 사라진다.

    춤추는 연비, 회한에 젖은 얼굴로 어린 시절 가야금을 타던 자리를 바라본다.



    S#54. 무대 뒤 (밤)



    무대에서 내려오는 연비, 나란히 서있는 장범과 미월을 애써 외면한다.

    장범, 연비와 눈을 맞추려 하지만, 연비, 일부러 모른 척 한다.

    장범, 연비, 미월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최루백, 어두운 표정으로 박성기에게 다가온다.



    최루백:(연비를 눈으로 가리키며) 어른들께서 이 아이를 보고자 하시네.



    연비, 표정이 굳는다. 장범, 눈을 치켜뜨고 최루백을 노려본다.



    자 희:어찌할 테냐?

    장 범:가지 마라.

    자 희:창기로 살자면 오늘이 아니라도 어차피 겪을 일이다.

    장 범:가지 마라.

    최루백:물러가 있거라.



    장범, 버티고 서있다. 미월, 자희, 박성기, 긴장한다.



    박성기:(초조한) 범아.

    최루백:죽고 싶은 게냐?

    연 비:가지요.



    장범, 연비를 노려본다.

    미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장범과 연비를 번갈아 본다.

    최루백, 연비와 장범과 미월 사이의 긴장감을 느낀 듯 셋을 살펴본다.



    최루백: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좋다.

    연 비:갈 것입니다.

    장 범:(격앙된) 연비야.

    연 비:윗분들 기다리시는데 이리 지체해도 되오이까?

    장 범:연……

    연 비:(말 자르며) 닥쳐라. 나는 춤추고 노래하는 창기다.

    금(琴)을 타는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



    최루백, 표정이 굳으며 앞서 걸으면, 연비가 그 뒤를 따른다.

    미월, 애써 입만 벌릴 뿐 말소리는 내지 못하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최루백을

    쳐다본다. 미월이 연비의 옷자락을 붙잡지만, 연비, 매몰차게 미월을 쳐낸다.



    연 비:(싸늘하게) 보았지? 춤추는 거 하나도 부러워 할 것 없다.



    미월, 연비의 독한 눈빛에 질려 더 붙잡지 못한다. 박성기, 표정이 어둡다.

    자희, 담담하게 지켜본다. 장범, 이를 사려 물고 부르르 떤다.



    S#55. 연회장 (밤)



    거하게 차려진 술상을 두고 귀족들, 둘러 앉아 있다.

    귀족들 사이사이에 기녀들이 앉아 시중들고 있다.

    연비, 상석의 귀족 옆자리에 앉아 있다. 술상 끝자리에 최루백이 보인다.



    귀 족1:(연비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대악서령, 이런 아이가 어찌 이제껏

    개인 악대에 머물고 있었던가?

    최루백:(못마땅한 표정) 곧 교방으로 불러야지요.

    귀 족1:악부보다 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떠하냐?

    연 비:……

    귀 족2:(음흉하게 웃으며) 오늘밤 네가 머물 곳이 정해진 듯하구나.

    연 비:출가하지 않은 신도들이 하루만이라도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며 승려처럼 경건하게 살아보자는 취지로 열리는 법회가 팔관회 아니옵니까?



    좌중의 분위기, 일순 싸늘해진다.


    귀 족2:천한 년이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주둥이질이냐.

    최루백:(당황하여)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물정 모르고 하는 소리옵니다.

    귀 족1:호오, 아마도 네가 따로이 마음을 준 정인이 있는 게로구나? 그러하냐?

    연 비:……

    귀 족1:나도 젊은 날, 연모하는 이로 인해 가슴앓이 한 적이 있다.

    네 은애하는 바가 지극하여 내 마음을 움직인다면 곱게 보내주지

    못 할 것도 없다.

    연 비:(잠시 말이 없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온 숨을 걸고 맹세하노니 정녕 그대를 잊지는 못 하리라.

    내 어리석어 어린 날 쌓은 정을 잊고 그대 건넨 참빗 내던졌네.

    화류에 발 담근 오늘, 내 맘 내가 알았으니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 시절을 돌려 그대와 함께 금(琴)을 탈 수 있다면,

    (목이 메는) 앉은 자리, 자갈 위 가시밭이라도 달게 여길 것입……


    좌중의 분위기 가라앉는다. 최루백, 싸늘하게 굳는다.



    S#56. 박성기 악대 입구 (밤)



    마차가 도착하고, 연비가 내린다. 연비, 안으로 들어가려다 장범을 발견하고 멈춘다.

    연비와 장범, 원망과 슬픔 어린 눈으로 서로를 쳐다본다.

    연비, 장범을 외면하고 들어가 버린다.



    S#57. 최루백의 처소 (밤)



    최루백, 불도 켜지 않은 방에 홀로 앉아 있다.



    S#58. 장범의 집, 방 안 (밤)



    등잔불 켜진 방, 검소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살림살이.

    홀로 앉아 있는 미월, 망부석이라도 된 듯 움직임이 없다.

    표정 없이 굳어 있는 미월의 얼굴, 곱지만 섬뜩하다.



    S#59. 군기방



    공장들, 바쁘게 움직인다. 장범 부, 새로 만든 활에 촉이 없는 화살을 재어 당긴다.

    젊은 관리가 아전들을 이끌고 군기방으로 들어온다.

    공장들 당황해 일어나지만 장범 부, 일에 열중하여 관리가 들어온 것도 모른다.

    공장 하나가 장범 부의 어깨를 치는 통에 몸을 돌리던 장범 부,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친다. 화살이 날아가 관리의 어깨에 맞고 떨어진다.

    혼비백산한 관리, 비명을 지르다가 화살에 촉이 없는 것을 알고 멈춘다.

    관리의 얼굴, 수치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장범 부, 당황스럽다.



    관 리:(부르르 떨며) 이놈이, 네 무슨 속셈으로 나를 해하려 하느냐?

    장범부:해하다니요? 소인은 그저……



    관리, 홧김에 되는대로 활과 화살을 집어 억지로 시위를 당기더니

    장범 부를 겨눈다. 관리, 힘에 겨운지, 활시위를 잡고 있는 손이 떨린다.



    장범부:(앞으로 나서며) 그건 아직 덜 된 것이라 지금 당기면 안 됩니다.



    괸리, 앞으로 급히 나서는 장범 부의 서슬에 활시위를 놓친다.

    화살 날아가 장범 부의 가슴에 꽂힌다.

    장범 부, 가슴에 박힌 화살을 보며 눈을 홉뜬다.

    관리, 놀라 사색이 된다.



    S#60. 의원 (저녁)



    대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장범이 중년의 의원을 끌고 나온다.



    의 원:이놈아, 내가 상하면 네 아비 앞에 가나마나야.

    장 범:서두르시오. 사람 목숨이 경각이요.



    귀족 댁 집사쯤으로 보이는 사내, 다가와 의원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의 원:(허리를 굽히며)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시오?

    집 사:서둘러라.

    의 원:무, 무슨……

    집 사:공자께서 체기가 있으시다.

    의 원:중한 환자가 있소.

    집 사:네 목보다 중하냐?



    의원, 움찔한다. 장범, 집사를 죽일 듯 노려보다 의원을 막무가내로 잡아당긴다.



    의 원:(몸을 뒤로 당겨 버티며) 상처 부위가 어디라 했나?

    장 범:(심장 언저리에 손을 대며) 이쯤 되오.

    의 원:(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어렵네.

    장 범:(잡아끌며) 가시오.

    의 원:죽어가는 목숨 좀 더 잇자고 산 사람이 죽을 순 없네.



    의원, 장범에게서 손을 빼고 집사를 따라간다.

    장범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진다.



    S#61. 강가



    상복 차림의 장범, 풀린 눈으로 흐르는 강물만 쳐다본다.

    연비가 장범 곁에 다가와 앉는다.



    장 범:악공이 되지 않고 활을 만들었으면, 그날 내가 쏜 화살이 그 자리에 떨어지지 않았으면, 가야고 소리에 홀려 악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연 비:살 수 있었겠니? 나도 이리 힘이 드는데 천재(天才)를 타고난 네가 살 수 있었겠니?

    장 범:(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왜 못 살아. 내가 하찮은 악공 따위가 아니라 악부의 관리였어도 네가 날 내쳤겠느냐? 내가 악공이 아니라 만군을 이끄는 장수였어도 내 아비가 그리 개죽음했겠느냔 말이다.

    연 비:(날카롭게) 누가 널 내쳤니?



    장범, 연비를 무섭게 노려보다 가버린다.



    S#62. 방 안 (저녁)



    최루백, 홀로 술상을 앞에 놓고 앉아 있다. 문이 열리고 연비가 들어온다.



    연 비: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최루백:교방에 들라하는 악부의 첩지를 받지 못 하였느냐?

    연 비:받았습니다.

    최루백:받았다?

    연 비:창기가 천하다 하나 노비는 아닙니다. 있을 자리를 정할 처지는 됩니다.

    최루백:어린 시절, 어느 봄날, 외숙을 따라 황궁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두 줄 가야금을 타던 계집아이가 참 고왔었구나.



    <플래시백>

    S#7의 장면.

    황궁 위봉루에서 가야금을 타는 연비.

    여자 아이보다 몇 살 위로 보이는 귀족 자제(어린 최루백), 연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다시 현재>



    최루백:참빗은 나도 줄 수 있다.

    연 비:하나로 족합니다.



    최루백, 돌연 술상을 밀치고 연비를 덮친다.

    연비, 저항하지만 힘에 부친다. 연비의 어깨 맨살이 드러난다.



    최루백:(연비를 누르며) 네 아끼는 이들이 다쳐도 좋으냐?



    연비, 순간, 멈칫한다. 최루백, 강한 눈빛으로 연비를 내려다본다.

    연비, 갑자기 촛대를 잡아 최루백의 이마를 찌른다.

    최루백, 소리 지르며 물러나고, 연비, 일어나 뛰쳐나간다.

    최루백, 이마를 만져 손에 묻어난 피를 보고 쓰게 웃는다.



    S#63. 악부, 최루백의 집무실



    최루백과 마주 앉은 박성기, 몹시 흥분해 있다. 최루백, 이마에 상처가 뚜렷하다.



    박성기:대체 뭡니까? 언제부터 악부에서 시정의 악대에 간섭하며 좌지우지

    했습니까?

    최루백:악부 차원의 일이 아니다. 예부에서도 주시하고 있다.

    개경에만 열두 개, 지방의 악대까지 합하면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악대들이 난립하여 풍기를 문란케 하고 있으니……

    박성기:(격해져서) 문란이라니요?

    최루백:나라에서 음률과 가무를 장려함은 예악정책의 일환으로, 백성들 간의

    조화와 화합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악대간의

    경쟁이 심해지고 난잡한 소리와 백희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박성기:구차한 핑계입니다. 나라의 기강이 어지럽다면 그것이 어찌

    우리 탓입니까? 조정이……

    최루백:(언성을 높여) 닥쳐라. 천한 악공 따위가 조정의 일을 논하느냐?



    박성기, 눈을 가늘게 뜨고 최루백을 쳐다본다.



    박성기:예부의 높으신 분들께서 소소한 악대 따위, 있는 줄이나 아시겠습니까? 진정 원하시는 게 뭡니까?



    S#64. 악부


    지나가던 장범, 최루백을 보고 고개 숙인다.



    최루백:어제 연회에는 왜 빠졌느냐?

    장 범:상중인지라……

    최루백:농부가 상을 당하였다하여 작물을 거두지 않을 것이냐?

    음률을 타는 것이 네 일이다.

    장 범:……

    최루백:네 아비를 해친 관리는 아무런 추달도 받지 않았지. 억울하냐?



    장범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최루백:위로 오르고 싶으냐?



    장범, 간절한 열망과 분노가 뒤섞인 눈빛과 표정이다.



    최루백:고려악의 주류가 속악이긴 하나 종묘제례를 담당하는 아악이야말로 음률의 정수다.

    장 범:……

    최루백:아악이란 것이 고고하고 난해하기 짝이 없어, 나라 안에 제대로 익힌 자를 찾기 어렵다. 송나라에서 의관과 악기만을 전해온 탓에 그 용처를

    어떻게 전습할지 제대로 알 도리가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

    그 본음에 다다른 자가 고려에는 아직 없다.

    장 범:……

    최루백:몇 달 후 승지가 직접 악공들을 이끌고 송나라로 떠난다.

    송에서 아악을 사사할 것이다.

    장 범:……

    최루백:따라갈 생각이 있느냐?

    장 범:……

    최루백:대답이 없음은 너도 알 건 안다는 뜻. 드러내지 않아도 네가 야심있는 놈이란 것쯤 진즉에 눈치 챘다. 악공으로 십 수 년을 보낸 끝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무엇이냐? (미소를 흘리며) 대악사냐?



    순간, 장범의 눈이 번뜩인다.



    S#65. 관현방



    대악사, 장범을 비웃듯 쳐다본다.



    대악사:우아하고 고고하다? 그래서 어떻단 말이냐? 딱딱한 곡조는 감흥을

    주지 못하고, 음률을 업으로 삼는 악공들조차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침체를 면치 못 하지. 종묘제례를 위한 고상한 음악? 달리 말하면,

    아악이란 결국 죽은 자를 위한 음률이다. 산 자의 음률을 버리고

    사자(死者)를 위해 연주하겠다? (비웃는) 좋을 대로 해 봐라.

    미친놈, 네가 출세 눈이 멀어 귀까지 먹었구나.



    S#66. 악부



    최루백:드물긴 하나 악공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자가 무산계를 수여받고

    전시과를 받은 예도 있다. 네가 이 나라의 아악을 정립해 낸다면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말란 법도 없다.

    장 범:(자존심 상하지만) 어찌하면 됩니까?

    최루백:네 아낙이 곱더구나.



    장범,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어 최루백의 멱살을 잡는다.



    최루백:(가소롭다는 듯) 기루에서 술상이나 엎던 객기 따위로 네가 무얼

    할 수 있느냐?



    최루백, 장범의 손을 뿌리치고 가버린다. 움켜쥔 장범의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S#67. 장범의 집, 방 안



    거울 앞에 앉은 미월, 곱게 단장하고 있다. 아랫입술에 붉은 연지가 발라진다.



    박성기:(V.O.) 악대를 살리고 너와 범이도 사는 길이다.



    윗입술에도 연지가 발라진다. 미월의 표정이 독하게 변한다.



    S#68. 박성기 악대 대청 (늦은 오후)



    연비, 느리게 춤추고 있다.

    인기척을 느낀 연비가 돌아보면, 미월이 서 있다. 곱게 단장한 모습이 아름답다.

    미월, 연비에게 다가 온다. 연비, 의아스러운 듯 미월을 쳐다본다.

    미월, 품속에서 무언가 꺼낸다.



    (장범이 연비의 머리에 꽂아주었던) 참빗 머리장식이다.



    미월, 참빗 머리장식을 연비의 머리에 가만히 꽂아준다.

    의아해 하는 연비에게 웃어 보이는 미월, 처연하다.

    연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월을 본다.

    미월, 뒤돌아 걸어간다.



    S#69. 박성기 악대 대청 (해질녘)



    연비, 가야금 줄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빠져있다.



    최루백:(V.O.) 네 아끼는 이들이 다쳐도 좋으냐?



    연비,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급히 일어나 달려 나간다



    S#70. 최루백의 집 앞 (해질녘)



    미월, 대문 앞에 서있다.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누군가 미월의 팔을 잡는다.

    미월, 돌아보면 연비다. 연비, 미월을 쳐다보다 몸을 돌려 대문으로 향한다.

    미월, 연비를 붙잡는다. 연비, 돌아서 미월의 뺨에 손을 얹는다.

    (S#14, 욕실에서 미월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연비를 떠올리게 하는)

    연비, 천천히 미월의 얼굴을 비빈다. 미월 얼굴의 화장이 엉망으로 뭉개진다.

    연비, 머리에 꽂힌 참빗을 만져 보고는 문을 두드린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문이 열리고, 연비가 안으로 들어간다.

    닫히는 대문 너머로 걸어가는 연비의 뒷모습이 처연하고 아름답다.

    미월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쿵’하고 닫히는 문. 미월, 문 앞에 망연히 서 있다.



    S#71. 장범의 집 (해질녘)



    미월, 망가진 얼굴 화장 그대로 들어선다.

    장범, 들어서는 미월을 본다. 미월, 장범을 보고 기겁한다.



    장 범:너 이 꼴이 무슨…… (뭔가 깨달은 듯) 너 설마……



    장범, 손을 뻗어 미월을 만지려다 만다.

    미월,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젓지만, 장범이 살기를 뿜으며 뛰쳐나간다.

    미월,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S#72. 최루백의 집 앞 (밤)



    장범, 미친 듯이 달려온다.

    장범이 들이닥치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연비가 나온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서로 놀라 아무 말 못한다.



    연 비:미월이한텐 아무 일 없었다.

    장 범:(애끓는) 너, 어찌 이리 나를······

    연 비:(애써 웃으며) 난 괜찮다. 어차피 기녀인 것을. 저 안으로 뛰어들 생각은 아예 말아라. 그랬다간 내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말 것이니.



    장범, 연비를 와락 껴안는다.



    연 비:(한숨을 내뱉듯) 네게 한 번 안기기가 이렇게도 힘들구나.



    장범, 연비를 더욱 힘주어 안는다.



    S#73. 박성기의 처소



    박성기와 마주보고 앉은 여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박성기:일러준 대로 했느냐?



    박성기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 미월이다.



    박성기:연비가 따라오더냐?



    미월, 자괴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박성기, 안도한 듯 숨을 내쉬며 웃음 짓는다.



    S#74. 관현방



    대악사, 장범에게 첩지를 건넨다. 장범, 마지못해 받는다.

    장범을 쳐다보는 악공들의 표정이 곱지 않다.



    대악사:대악서 악사라. 네 재주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이나,

    아악을 담당하는 대악서든 속악을 관장하는 관현방이든 이제껏 네 나이에 악사 자리에 오른 이는 없었다.



    장범, 참담한 얼굴로 말없이 듣고만 있다.



    대악사: (비꼬는) 하잘 것 없는 나 따위의 소견으론 가늠조차 안 되는구나.



    대악사,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차고 나가버린다.

    악공들, 대악사를 따라 차례로 자리를 뜬다.

    모멸감에 치를 떠는 장범, 관자놀이에 핏줄이 일어선다.



    S#75. 악부, 최루백의 방



    장 범:(분노에 못 이겨) 악사 시켜 달라 한 적 없습니다.

    최루백:악공보다야 악사가 낫지 않으냐. 그리고 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장범, 부르르 떨며 최루백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최루백:내 숨통을 끊어놓기라도 할 눈빛이로구나.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아라.

    손 놓고 가만 있을 테니.



    장범,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는다.

    최루백, 비웃음 가득한 눈길로 장범을 쏘아본다.



    최루백:네 아낙에, 네 장인에, 장인의 악대에.

    네 아비가 죽었다 해서 챙겨야 할 식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장 범:(폭발할 지경이지만 노려보기만) ······

    최루백:사내란 그런 것이다. 딱 제가 지닌 힘만큼만 화낼 수 있고 탐할 수 있는

    것이다. 안 그러냐?



    장범, 분노와 모멸감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최루백:송으로 가 아악을 사사하거라. 가야고 통이나 파먹고 사는 네가

    한줌의 힘이라도 얻을 수 있는 방편은 그거 하나다.



    장범, 이를 사려 물고 돌아선다.



    최루백:그리고······ 또 한 번 내 앞에서 그따위로 눈을 치떴다간 다시는 햇빛을 못 볼 줄 알아라.



    S#76. 박성기 악대, 마당 (해질녘)



    연비, 마당에 홀로 서있다. 자희, 연비 곁에 와 선다.



    자 희:후회되니?

    연 비:세상에 나와 가장 잘 한 짓 같습니다.

    자 희:미월이가 원망스럽지 않니?

    연 비:저로 인해 목소리를 잃은 아이입니다. 제가 원망을 들으면 들었지,

    어찌 그 아이를 원망하겠습니까?

    자 희:금은 왜 타지 않니?

    연 비:……

    자 희:이젠 괜찮다. 헛된 꿈으로 스스로를 해치지 않으니 즐기면서 탄주하거라.

    연 비: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를 보고나니 금을 뜯을 수가 없습니다.

    자 희:그런 것이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연 비:시기심에 눈이 가려 제 모자란 탓을 애꿎은 이에게 돌렸습니다.

    (애잔한) 함께 자라면서 제게 한 번도 안 좋은 낯을 보인 적이

    없었답니다. 늘 잘 대해 주었지요. 그런 이의 손가락을 낫으로 내리쳐

    마디마디 잘라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진즉에 깨달았다면 그리 독사 같은 맘을 품을 일도 없었는데……

    자 희:난 그저 춤이 좋았다. 뭇 사내들의 눈이 내 몸을 핥아대고, 연회상 앞에서 취객들의 더듬는 손에 몸을 내맡겨야 했어도 춤추는 순간만은 더없이

    좋았다. 어미가 창기라 나 역시 자연 악적에 올랐으나 춤만은 좋았다.

    연비 네가 처음 가야고를 만진 건 그저 그 소리가 좋았음이지?

    금을 타든, 춤을 추든 그래야 하는 것인데.

    연 비:월명(月鳴)이란 게 무엇입니까?



    자희, 난감한 눈빛으로 연비를 쳐다본다.



    연 비:무엇을 이르는 말입니까?

    자 희:(잠시 침묵) 달의 울림을 말한다.

    연 비:…… ?

    자 희:음률의 진정한 이치를 깨달을 때 얻을 수 있는 소리다.



    연비, 자희의 말을 몰입해 듣는다.



    자 희:그 경지에 달하면 현과 몸이 일체가 되고 현을 울리지 않아도 우주와

    교통해 달의 울림까지 들을 수 있다고 전한다. 범인의 재주와 노력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소리 아니겠니.



    연비, 자희와 함께 노을을 바라본다.



    S#77. 박성기 악대, 대청 (해질녘)



    연비, 앞에 놓인 가야금을 쳐다본다.

    숨을 고르던 연비, 조심스레 가야금 줄에 손을 얹는다.

    망설임 끝에 줄을 뜯으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떼고 만다.



    S#78. 장범의 집, 방 안 (저녁)



    미월, 장범 앞에 소담스럽게 차린 밥상을 놓고 장범이 수저를 들기를 기다린다.

    소박하지만 정성껏 차린 밥상이다.

    미월, 장범이 한술 뜨자 이것저것 찬을 챙겨준다.

    장범의 표정 없는 얼굴, 쓸쓸함이 짙게 배어나온다.

    미월의 얼굴에 우울한 빛이 스치지만, 곧 표정을 밝게 한다.

    장범, 미월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밥만 먹는다.



    S#79. 연회장



    연비의 춤이 막 끝난다. 좌중, 경탄의 박수를 보낸다.

    대를 내려오는 연비, 무대 뒤 장막 안으로 들어선다.

    빈 장막 안에 최루백이 기다리고 있다.



    연 비:(시선도 주지 않으며) 무슨 일이십니까?

    최루백:몰라 묻느냐?

    연 비:몰라 묻습니다.

    최루백:오늘밤 오너라.

    연 비:(표독스럽게) 하룻저녁 품었다 하여 날 손아귀에 넣은 줄 아시오?

    최루백:(당황/분노) 뭐라?

    연 비:말했듯, 나는 사노비도 관비도 아니요. 비열한 술수에 당해 구정물을

    몸에 묻혔지만 두 번은 어림없소.



    최루백, 몸 돌려 나가는 연비를 잡아 거칠게 돌려세운다.



    최루백:네 년은 창기다. 그것도 회회(回回) 놈의 피가 섞인, 천하디 천한 창기.

    네 년의 살갗과 눈깔이 무슨 빛인지 똑바로 보아라.

    연 비:(모멸감에 떨다가) 귀한 족속이라 귀족인줄 알았더니 그 속은 천하기가 양수척보다 더 하구나.



    최루백, 연비의 목을 틀어쥔다.

    연비, 전혀 동요 없이 최루백을 똑바로 쳐다본다.

    최루백, 손에 점점 힘을 가하다가 거칠게 연비를 밀어낸다.

    연비, 흐트러진 머리를 수습하며 고개를 든다.



    최루백:날 못 받아들이겠다? 좋다. 똑똑히 들어라. 내가 가질 수 없으면 딴 놈도 널 얻지 못한다. 평생 내 주위에서 괴로워하며 살게 할 것이다.



    연비, 한쪽 구석에서 단검을 집어 칼집에서 뽑아든다.

    긴장하는 최루백.

    연비, 칼을 돌려 잡아 최루백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고 찌르라는 듯,

    독기 서린 눈으로 최루백을 쏘아본다.

    최루백, 질린 얼굴로 연비를 본다. 연비, 장막 밖으로 나간다.

    최루백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진다.



    S#80. 장범의 집 (저녁)



    미월, 문으로 들어서는 장범을 웃으며 맞는다.

    장범, 무심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미월이 장범의 손을 잡는다.

    장범, 귀찮다는 듯 미월을 보면, 미월이 장범의 손을 자기 배 위에 갖다 댄다.

    의아해 하던 장범, 표정이 서서히 굳어진다.

    미월, 맞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장범, 웃어보려 애쓰지만, 얼굴에 절망감이 드리운다.



    S#81. 악부, 최루백의 집무실



    최루백 앞에 선 박성기, 몹시 분노한 표정이다.



    최루백:이미 결정된 일이다. 반년 안에 양운의 악대와 합치든지,아니면

    악대를 파하거라.

    박성기:원하는 것을 얻으면 악대는 가만 놔두기로 했잖습니까?

    최루백:네 멋대로 착각한 것이지. 나는 그런 약속 한 적이 없다.

    박성기:(뒤통수 맞은 표정) 그런……

    최루백:(노려보며) 그리고…… 난 원하는 것을 얻지도 못했다.

    박성기:무슨 소리, 연비를 취하여 품은 이가 누굽니까?

    최루백:고작 그깟 것을 얻고자 했다면 진즉에 힘으로 눌렀다.

    박성기:(격앙된) 무슨 일이 있어도 악대는……

    최루백:(위협적으로 말을 끊으며) 물러가라.



    박성기,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치뜨며 돌아선다.

    문을 열고 나가던 박성기, 들어서는 장범과 마주친다.

    순간, 박성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장범,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 숙여 인사한다. 박성기, 안도하며 자리를 뜬다.

    장범, 최루백 앞에 제례단자를 놓고 돌아선다.



    최루백:송으로 가는 사신단에 네 이름을 올렸으니, 그리 알거라.

    장 범: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최루백:주제넘은 소리. 악부의 결정에 한낱 악공 따위가 토를 다느냐.

    장 범:(끓어오르는)······

    최루백:연비 때문이냐?

    장 범:연비 때문입니까?

    최루백:뭐라?

    장 범:연비와 떼어놓으려고 저를 송으로 못 보내 안달이십니까?

    최루백:죽어 다시 태어나기 전엔 네 차례까지 닿지 않는다. 미련 끊고 떠나거라.

    장 범:제가 없어도 연비를 얻지는 못 하십니다.

    최루백:(불끈하는)······

    장 범:귀족관리께서 한낱 악공 따위를 시기 질투하시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최루백:(이를 가는) 주둥이를 찢어주랴?

    장 범:찢으시면 찢기는 수밖에요. 나으리의 꼴이 더욱 우스워질 것이니

    참 볼만하겠습니다.

    최루백:(격분해 덤벼들려다가 누르고) 식솔들에게 속아 놀아나는 놈이 제 꼴이 어떤지도 모르고 지껄이는구나.

    장 범:무슨 소리요?

    최루백:창기나 악공이나 소리에 미친 것들은 독하기가 살모사보다 더하지.



    S#81. 장범의 집, 방 안



    박성기, 장범과 마주 앉아 있다. 장범 곁에 자리한 미월, 임신한 배가 불룩하다.

    장범의 표정, 싸늘하다.



    박성기:관현방에서……

    장 범:들었습니다.

    박성기:들었다? 그래, 어쩌면 좋겠느냐?

    장 범:나라에서 내린 결정, 따를 밖에요.

    박성기:뭐라? 그것이 네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냐?

    장차 네가 이끌어가야 할 악대 아니냐?

    장 범:연비와 떠날 것입니다.



    미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박성기:뭐라?

    장 범:연비와 떠난다 했습니다.

    박성기:코 흘리던 시절부터 음률을 가르치고, 딸까지 주어 악대를 잇게 한

    은혜를 이따위로 갚는 것이냐?

    장 범:거래라 하셨습니다.

    박성기:(분에 못 이겨) 뭐? 네 이……



    장범, 일어나 나간다. 박성기, 흥분하여 따라 일어서다 휘청한다.



    박성기:네가 독사 새끼라는 걸 내 일찍이 알아 차렸어야 했다.

    네놈이 결코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장범, 박성기의 악다구니를 뒤로 하고 방문을 연다.

    미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장범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장 범:(표정 없이) 난 이제 사람이 무섭다.



    장범, 미월의 손을 떼어 내고 뒤돌아 나간다. 미월, 사색이 되어 파르르 떤다.



    S#82. 박성기 악대 마당



    장범, 달려 들어와 다짜고짜 연비의 손목을 잡아끈다.



    연 비:(영문을 모르겠는) 범아.

    장 범:가자.

    연 비:어딜?

    장 범:어디든 멀리.

    연 비:범아.

    장 범:내 다시는 이 손을 놓지 않을 테다. 내 손목이 끊길지언정 너를 놓지는

    않을 테다.



    연비, 활짝 웃지만 눈가는 붉어진다.



    연 비:어찌 이러니?

    장 범:싫으냐?

    연 비:미월이가……

    장 범:(말을 끊으며) 싫으냐?



    연비,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젓는다.

    연비를 잡아끄는 장범 앞을 미월이 들어와 가로막는다.

    장범, 무시하고 연비와 함께 나가려한다.

    미월, 필사적으로 장범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배에 갖다 댄다.

    장범, 미월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다. 미월, 칼을 꺼내든다.



    연 비:(놀라 외치는) 미월아.



    장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연비를 잡아끈다.

    미월, 칼을 들어 자기의 배를 찌르려 한다.

    비명 지르는 연비, 한쪽 손을 뻗어 미월의 손목을 잡는다.

    장범의 얼굴에 경악과 절망이 함께 드러난다.

    연비가 막긴 했지만 미월의 배에 칼이 얕게 꽂혀있다.

    미월, 칼을 쥔 채로 서서 장범을 쏘아본다.

    연비, 장범을 보며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연비를 보는 미월, 미움과 죄스러움과 서러움에 눈물이 고인다.



    연 비:(애정과 슬픔 가득한 눈빛) 이걸로 되었다. 이것으로……



    연비, 잡힌 손을 천천히 빼낸다.

    미칠 것 같은 장범, 허망하게 빠져나가는 연비의 손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S#83. 종묘



    장범, 축을 세 번 쳐서 음악의 시작을 알린다.

    (축 : 나무 궤짝처럼 되었는데, 위편 중앙에 구멍을 내고, 나무로 만든 축퇴를 꽂아 밑바닥을 내려치는 악기)

    제례악이 연주 된다. 느리게 흐르는 아악곡.

    넋이 나간 표정의 장범, 마치 시체가 서있는 것 같다.



    S#84. 황궁, 위봉루 앞 광장



    연회가 벌어지는 광장 중앙에 무희들, 춤추고 있다.

    무희들 중앙에 연비가 보인다. 장범, 관현방 악공들의 자리 뒤로 지나간다.

    애써 연비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한다.

    춤추는 연비, 지나가는 장범을 발견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린다.

    최루백, 질투 어린 시선으로 연비를 쳐다본다.



    S#85. 황궁 (밤)



    맥을 잡고 있는 어의의 손.

    황제, 병석에 누워있다.

    어의, 온 신경을 기울여 맥을 느낀다. 황후와 신료들, 어의의 말을 기다린다.

    어의의 표정이 어둡다.



    S#86. 장범의 집, 마당 (저녁)



    상복을 입은 장범이 들어온다. 굳은 얼굴이 산 사람 같지 않다.

    만삭이 된 미월, 역시 상복을 입고 있다.

    미월, 힘겹게 몸을 움직여 장범을 맞이하지만, 장범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미월, 갑자기 통증이 온 듯, 휘청하며 중심을 잃고 기둥을 잡는다.

    장범, 본 척도 안 한다. 미월, 서럽고 원망스런 눈빛으로 장범을 쳐다본다.

    장범, 미월의 시선을 느끼고는 미월을 무섭게 노려본다.



    장 범:왜? 무얼 바라느냐? 부축이라도 해주랴? 너처럼 독한 것이

    남의 손길 따위 필요할 턱이 없잖느냐?



    미월, 망연하게 장범을 쳐다본다.



    장 범:그런 눈으로 보지마라. 가증스럽다. 남들은 그럴 것이다.

    불쌍한 것, 저 착한 것이 얼마나 서러울까.

    말도 못 하는 저것의 속이 얼마나 썩었을까.



    미월, 장범의 격한 태도에 어쩔 줄을 모른다.



    장 범:(격해지는) 새끼 든 배에 칼을 꽂는 년, 그런데도 죽지 않고 꿈틀대는,

    뱃속의 핏덩이. 독한 기운이 집 안에 가득 차서 숨조차 못 쉬겠다.

    독한 년의 새끼는 또 얼마나 독할 것이냐. 독기를 뿜어대며

    기어 나올 네 새끼,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미월, 서럽고 기가 막혀 눈물이 고인다. 장범, 거칠게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미월,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며 억지로 눈물을 삼킨다.



    S#87. 악부



    송으로 떠날 사신단이 준비를 마치고 도열해 있다.

    최루백, 사신단 일행을 살피며 장범을 찾아다닌다. 잔뜩 화가 나 있다.



    S#88. 장범의 집



    최루백, 미월와 박성기를 다그치고 있다.



    최루백:일각 후에 송으로 떠나야 할 놈이 없다?

    제 놈 집에도 없다면 어딜 갔단 말이냐?

    박성기:술에 절어 산달이 된 제 마누라 팽개쳐둔 채 며칠씩 집을 비우는 놈을

    내가 숨길 이유가 뭐요?

    최루백:사신단이 곧 떠난다. 못 찾아내면 네 놈부터 물고를 낼 것이다.

    박성기:(발끈하는) 바라는 바이올시다. 평생을 쏟아 이룬 악대도 흩어진 마당에 더 살 이유도 없소. 죽여준다면 되려 고맙지.



    장범이 들어선다. 몹시 상한 얼굴에 취한 상태다. 한 손에 술병이 들려있다.



    장 범:날 찾아 무엇 하게?

    최루백:(위협적인) 송으로 떠나거라. 가서 돌아오지 말아라.

    이후로 다시 이곳에 상판을 보였다간 목이 떨어질 것이다.

    장 범:쳐주시오. 목도 치고 손모가지도 쳐주시오.

    최루백:새끼 밴 네 아낙이 다쳐야 말을 들을 테냐?



    장범, 코웃음 친다.



    최루백:이리 버티면 곧 기어 나올 새끼도 온전치 못 할 것이다.



    장범의 눈에 핏발이 선다.



    최루백:네 고집 때문에 연비가 다칠 수도 있다.



    장범, 관자놀이 핏줄이 튀어나오고 입술까지 파르르 떨린다.



    최루백:네 아비처럼 심장에 살이라도 박아주랴?



    장범, 악에 받쳐 소리 지른다.

    술병을 기둥에 쳐 깨뜨리더니 최루백에게 달려들어 목을 찌른다.

    최루백, 눈을 홉뜨고 목에 박힌 사기 파편을 쥔 채 뒷걸음질 친다.

    기둥에 등을 기대고 버티던 최루백, 무너지듯 천천히 쓰러진다.

    미월과 박성기, 경악한다.

    장범, 자신이 저지른 짓을 믿을 수 없는 듯 하얗게 질려 있다.

    최루백, 초점 풀린 눈으로 장범을 쳐다보다 꽃이 만개한 나무로 눈길을 돌린다.

    꽃잎을 쳐다보는 최루백의 눈빛이 한없이 슬프다.


    최루백:(마지막 숨을 넘기며) 참…… 곱구나.



    미월, 덜덜 떨며 서있다.

    최루백의 시신을 쳐다보던 박성기, 장범의 피 묻은 겉옷을 벗기고 자기 옷을 벗어 장범에게 입힌다.



    박성기:(장범의 옷을 입으며) 가거라. 어서 사신단을 따라가.



    장범, 얼이 빠져 가만 선 채로 고개를 젓는다.

    박성기, 장범의 뺨을 후려친다.



    박성기:(소리치는) 새끼고 마누라고 다 같이 죽이자는 게냐?



    미월, 급히 안으로 들어가 챙겨 놓은 봇짐을 들고 나온다.

    장범, 이무 말 못 하고 고개만 젓는다.

    미월, 봇짐을 안기며 장범을 떠민다.

    박성기, 시체의 목에 흐르는 피를 자기 손에 묻힌다.



    박성기:어서 가거라. 넌 아무 것도 못 봤다. 어서 가. (소리치는) 어서.



    넋이 나간 장범, 박성기에게 떠밀려 걸음을 뗀다.

    미월, 장범의 모습을 눈에 각인하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본다.

    박성기에게 떠밀려 나가는 장범, 배에 손을 얹고 있는 미월을 보다가 뒤돌아

    뛰어간다.



    S#89. 거리



    박성기, 포박 당한 채 군사들에게 끌려가고 있다. 손과 옷에 피가 묻어있다.

    마주 걸어오던 연비, 박성기를 발견하고 달려온다.



    연 비:(박성기에게) 무슨 일입니까? (군사들에게) 무슨 일이오?



    군사들, 연비를 밀어내고 박성기를 끌고 간다.



    박성기:(간곡한) 미월이한테…… 빨리.



    연비, 정신이 아득해진다.



    S#90. 장범의 집/들길



    #장범의 집

    연비, 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미월, 하혈하며 신음하고 있다.



    연 비:(기겁하여) 미월아. 미월아.



    핏기 없는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미월, 연비의 옷자락을 잡는다.



    연 비:(겁에 질려 울먹이는) 그래, 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들길

    줄지어 길을 따라 움직이는 사신단 일행.

    하얗게 질린 장범, 맨 뒤에서 일행을 따라 걷고 있다.

    장범,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장범의 집

    연비, 미월에게 천으로 만 나뭇가지를 물린다.



    #들길

    동료 악공들, 장범을 돌아보고, ‘뭐 해?’ 하는 표정.

    장범, 갑자기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되짚어 달려간다.

    동료 악공들, 장범을 불러댄다. 말 위의 승지, 뒤돌아본다.



    승 지:(황당한) 뭐, 뭐냐? 저 놈.



    #장범의 집

    미월, 고통에 찬 소리를 내지른다.

    연비, 벌벌 떨며 아이를 받아내려 애쓴다.



    연 비:(심하게 떨며) 괜찮아, 괜찮아.



    미월, 비명소리 높아진다.



    S#91. 장범의 집, 방 안 (저녁)



    문이 열리고, 장범이 뛰어 들어온다.

    눈 감고 누워 있는 미월, 움직임이 없다. 이불 위에 피가 흥건하다.

    미월 곁에 축 처진 연비가 강보에 쌓인 핏덩이를 안고 있다.

    한참을 운 듯, 눈이 부어 있다.

    자희, 미월 곁에 앉아 있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일어나 나간다.

    연비, 풀린 눈으로 장범을 쳐다본다.

    장범, 불안한 눈길로 미월을 쳐다보다 연비에게 시선을 옮긴다.

    연비, 고개를 가로 젓는다. 장범, 파르르 떨다가 무릎을 꺾고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연비가 장범에게 아기를 건네고, 장범, 받아 안는다.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핏덩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숨을 겨우 할딱거린다.



    연 비:의원이 다녀갔다. 난산 끝에 나오긴 했는데 살 수 있을지는……



    장범, 아기를 쳐다보다가 연비에게 다시 건네고 벽에 놓인 가야금을 가져와 앉는다.



    연 비:(긴장하여) 어쩌려고?



    장범, 정신이 나간 듯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가야금을 뜯기 시작한다. 연비, 손을 뻗어 가야금 줄을 잡는다.



    연 비: 국상 중이다.

    장 범:(넋이 나간 듯) 말 못 하는 아낙은 자기 버린 사내의 새끼를 낳다 숨이 끊겼고, 그 아비는 관리에게 칼부림 했다는 누명을 썼으니…… 며칠 내로

    목이 떨어지겠지. (고개 들어 허공을 둘러보며) 어쩌면 억울한 넋이

    이곳을 떠돌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연비, 슬픔 가득한 눈으로 장범을 바라본다.



    장 범:(아기를 보며) 그래, 아비란 것이 그리 저주를 퍼부어댔으니……

    네가 온전할 수 있었겠느냐?

    연 비:(안타까운) 범아……

    장 범:(실성한 듯한) 떠돌고 있을 넋에게, 숨이 점점 잦아드는 저 핏덩이한테

    가야고 음률이라도 들려주어야 편히 갈 수 있지 않겠니?



    연비, 마지못해 가야금에서 손을 뗀다.

    장범이 가야금을 타고, 애절한 음률이 퍼져 나간다.

    자희, 놀라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지만 곧 말없이 문을 닫는다.



    S#92. 감옥



    박성기, 옥졸에게 밀려 걸어온다. 온몸이 터지고 부어 있다.

    옥졸, 옥문을 열어 박성기를 처넣고 돌아간다.

    박성기, 힘겹게 고개 들다가 옆 칸을 보고 놀란다.

    칸막이 너머로 시체처럼 벽에 기대 앉아 있는 장범이 보인다.



    박성기:(절망적인) 어찌된 일이냐?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장범, 넋이 나가 박성기의 말을 듣지 못한다.



    박성기:(소리치는) 범아.



    장범, 겨우 알아듣고 돌아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박성기:(불안한) 미월이는?



    장범, 박성기를 차마 마주보지 못 하고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박성기, 절망스런 표정으로 주저앉는다. 두 사람, 한동안 말이 없다.



    박성기:(힘겹게 입을 떼는) 우리 인연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만,

    연비와 너는 내게 기쁨이고 자랑이었다.



    죽은 듯 찌그러져 있던 장범, 고개를 든다.



    박성기:그래, 나도 사람이니 미월이의 목소리를 잃게 한 연비가 미웠고,

    연비만 바라보는 네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너희들이 가야고보다 키가 작았던 시절부터 음률과 소리를 가르친 이가 나다.



    장범, 미칠 것 같은 심정을 가누지 못 해 어쩔 줄을 모른다.



    박성기: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때론 앞서나가고, 숨 쉬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음률에 매진하는 제자를 가르치는 복은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닌 것을…… 내 옹졸하여 육친의 정을 먼저 살핀 탓에 너와 연비와 미월이 모두를 망치고 말았으니…… 차마 용서하란 말을 내뱉기도 부끄럽다.



    장범, 감정이 북받쳐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문다.

    박성기, 온몸의 진이 모조리 빠져 나간 듯 벽에 등을 기댄다.



    박성기:(한숨을 내쉬듯) 보고 싶구나.



    옥졸의 발걸음 소리 들린다.

    박성기, 급히 일어나 칸막이 사이로 목을 내밀고 장범에게 말한다.



    박성기:(장범에게만 들리게) 모두 내가 한 것이다, 내가. 알겠지?



    옥졸, 문을 열고 장범을 끌어낸다.



    박성기:(안타까운) 나가거든 연비에게 전하거라. 내가……

    옥 졸:(소리치는) 시끄럽다.



    옥졸의 호통에 묻혀 박성기의 마지막 말이 들리지 않는다.

    끌려가는 장범, 박성기를 자꾸 돌아본다.



    S#93. 순군 취조실



    취조관이 장범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취조관:국상 중에 금(琴)을 울렸다. 할 말 있느냐?



    장범, 고개를 젓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힘이 전혀 남지 않은 사람 같다.



    취조관:현장에서 잡혔으니 할 말이 뭐 있겠느냐?

    손과 귀, 어느 쪽을 내놓겠느냐?



    장범, 고개를 든다. 형리, 무언가 들고 들어온다.



    취조관:다시는 금을 타지 못하도록 손목을 잘라야 하겠으나, 재주가 아까우니

    네가 원하면 손대신 청력을 거두겠다.



    장범, 숨이 멎는 듯하다. 형리, 들고 들어온 것을 내려놓는다.

    장범이 쳐다보면 날이 선 작두와 날카로운 송곳이다.



    취조관:손이냐, 귀냐?

    장 범:목이오.



    취조관, 말없이 장범을 노려본다.



    장 범:대악서령을 죽인 것은 내 장인이······



    옥졸이 급하게 달려온다.



    옥 졸:나으리, 박성기 그 악공 놈이 죽었습니다.



    장범, 충격에 말을 못 잇는다.



    S#94. 감옥



    벽을 보고 앉아 있는 박성기의 뒷모습. 부르르 떠는 목에 힘줄이 돋아 있다.

    정면을 보면, 이를 악문 박성기의 입가에 피가 흐른다.

    고통을 이기려는 듯 애를 끊는 소리가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온다.



    S#95. 순군 취조실



    취조관:뭐라?

    옥 졸:혀를 물어 스스로 숨을 끊었습니다.



    장범,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간 것처럼 곧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취조관, 길게 한숨을 내쉰다.



    취조관:(장범을 보며) 손이냐, 귀냐?



    장범, 넋이 빠진 듯 아무 말 못한다.



    취조관:(잠시 말없이 쳐다보다가) 작두로 목을 자르는 건 무리지. 끌어내라.



    형리들, 장범을 잡아 일으킨다. 장범, 몸부림치며 저항한다.



    장 범:차라리 죽고 말겠다. (절규하는) 목을 쳐, 목을 치란 말이다.



    형리들, 장범을 꿇어앉히고 오른손을 작두날 아래로 넣는다.

    그악스럽게 몸을 뒤틀던 장범, 돌연 저항을 멈춘다.



    장 범:잠깐만, 손목을 자르든, 청력을 거두든 좋을 대로 하시오.

    마지막, 마지막 청 하나만 들어 주시오.



    취조관, 장범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S#96. 감옥



    장범, 옥 안에 단정히 앉아 있다. 옥 바깥쪽에는 연비가 앉아 있다.



    장 범:보고 싶다 하셨다.



    연비, 눈가가 떨린다.



    장 범:네게 전해 달라며 마지막 말을 남기셨지만, 내 미처 듣지를 못 했다.



    연비, 다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장 범:용서해 달라 말······

    연비:(말 끊으며) 범아.

    장 범:······?

    연비:우리 같이 금이나 한번 타보련?



    장범, 의아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고개 끄덕인다.



    S#97. (동)감옥



    연비:시작할까?



    장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연비와 장범, 마치 앞에 가야금이 있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자세를 취한다.

    장범과 연비, 가상의 가야금을 두고 합주를 시작한다.

    장범, 한 음을 울린다.

    소리의 여운이 사라질 듯한 순간, 연비가 답하듯 한 음 울린다.

    장범이 하나의 가락을 울리면, 뒤이어 연비가 금을 탄다.

    서로 주고받듯, 느린 가락을 울리면서 간간히 서로의 가락이 중첩되고,

    때로는 쫓고 쫓으며 음률을 만들어간다.

    마치 남녀가 서로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고 그윽한 소리다.

    장범과 연비의 탄주에 서서히 속도가 붙는다.

    어루만지는 듯한 소리에서 서로 엉기고 감기는 듯한 소리로,

    서로의 탄주가 화음을 이루며 교차하며 섞인다.

    두 사람, 점점 더 연주에 몰입해 들어간다.

    줄 위의 손놀림 더욱 빨라지고, 소리는 격한 사랑을 나누듯

    절정으로 치달아간다.

    장범과 연비, 고통과 환희가 함께 담긴 표정으로 금을 탄다.

    가파르게 치솟는 가락이 거센 물살처럼 흐르며 폭발하듯 몰아친다.

    장범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퍼붓던 가야금 소리, 소나기 그치듯 잦아든다.

    현의 울림이 멎고, 여음마저 사라진다.

    완전한 정적.

    두 사람 모두 눈을 감은 채, 정적 속에 머물러 있다.

    장범과 연비, 천천히 눈을 뜨고 서로를 말없이 바라본다.



    S#98. 순군 취조실



    무릎을 꿇고 앉은 장범, 동요가 없다.

    장범 앞에 날이 선 작두와 날카로운 송곳이 놓여 있다.

    취조관, 장범의 선택을 기다리는 듯, 말없이 장범을 쳐다본다.

    장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S#99. 언덕 (동틀 무렵)



    연비, 실성한 듯 소리치며 언덕을 오른다.



    연 비:범아. 범아.



    언덕 위에 올라 멀리 바라본다. 걸어가는 장범의 뒷모습이 조그맣게 보인다.



    연 비:(애끓게 소리치는) 범아. 범아.



    장범의 모습, 점점 작아져 점처럼 보인다. 연비, 주저앉아 서럽게 흐느낀다.



    한동안 울고 난 연비, 무언가 느낀 듯,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본다.

    갑자기 주위의 모든 빛이 사라지더니, 검은 하늘에 달만이 밝게 빛난다.

    (E) 희미한 가야금 소리

    연비, 귀 기울여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더 자세히 들으려는 듯

    눈을 감는다.



    대악사:(V.O.) 네가 진정으로 가야고를 다루고자 한다면 월명(月鳴)에 이르기를 궁극으로 삼아야 한다.



    가야금 소리가 주변의 온갖 소리들과 하나로 어우러지더니 하나의 신비한 음으로 모아진다.



    자 희:(V.O.) 그 경지에 달하면 현과 몸이 일체가 되고 현을 울리지 않아도

    우주와 교통해 달의 울림까지 들을 수 있다고 전한다.



    무아지경에 빠진 듯 몰입해 있던 연비, 눈을 뜬다.



    연 비:(읊조리듯) 월명(月鳴)?



    S#100. 박성기 악대 마당



    꽃이 만개한 봄날. 무희들, 반주에 맞추어 춤 연습 중이다.

    한 여인이 무희들 사이를 돌며 춤사위를 고쳐주고 있다.

    삼십대가 된 연비다.

    사십 중반이 된 자희, 한쪽 구석에 앉아 연비와 무희들을 보며 앉아있다.



    연 비:보리밟기 하듯 나대서는 춤이 안 된다. 온몸으로 음률을 타고 움직여야지.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기둥 뒤에 숨어서 무희들의 춤을 훔쳐본다. 연비,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눈썹을 치켜뜬다.

    여자아이, 기둥 뒤로 몸을 감춘다. 자희, 웃는다.



    S#101. 거리



    연비, 길을 걷다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급히 달려간다.

    멀찍이 보이는, 남루한 행색의 행인, 언뜻 보기에 장범 같다.

    연비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려 하지만 사람들 틈에 섞여 찾을 수가 없다.



    S#102. 기루 (저녁)



    손님들과 기녀들, 술상을 둘러싸고 어울려 놀고 있다.

    한 악공이 구석에 앉아 가야금을 타고 있다.

    악공의 얼굴을 가까이 보면, 삼십대가 된 장범이다.

    고생을 많이 한 듯 신산한 세월의 흔적이 주름마다 배어있지만,

    현세를 초탈한 듯한 여유로움이 드러나는 풍모다.



    S#103. 거리 (저녁)



    색색의 등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한다.

    연비, 거리 이곳저곳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장범을 찾아다닌다.

    연비, 거리를 헤매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인다.

    아련하게 가야금 소리가 들려온다.

    어릴 적, 연비가 장범에게 가르쳐주던 가락이다.



    S#104. 기루 (저녁)



    가야금 소리가 흐른다. 기녀가 잔에 술을 따른다.

    주름지고 메마른 손이 잔을 집어 든다.

    술을 마시는 노인, 관현방 대악사다.

    대악사, 많이 늙었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여전하다.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악사, 옛일을 떠올리듯 눈을 감는다.

    대악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린다.



    대악사(혼잣말) 돌아온 게냐?



    S#105. 기루 (동틀 무렵)



    가야금을 등에 맨 장범, 주인으로부터 돈 몇 푼을 건네받는다.

    장범, 기루를 나서다 멈춰 선다.

    연비가 기루 문 앞에 서있다.



    S#106. 박성기 악대, 대청 (이른 아침)



    나무마다 꽃이 만발하다. 장범과 연비 가야금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연 비:어찌 살았니?



    장범, 가만히 웃는다.



    연 비:악대를 다시 꾸렸단다.



    장범, 웃기만 한다.



    연 비:아이는 살아 있다. 잘 자랐지. 걱정마라. 창기가 되게 하지는 않을 테니.

    장 범:(잠시 사이를 두고) 기억나니?

    연 비:……

    장 범:처음 봤던 날.



    연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S#107. 박성기 악대, 대문 앞 - 회상



    대문 너머로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

    대문 앞에 떨어지는 화살.

    어린 장범, 화살을 주우려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에 넋을 빼앗긴다.

    장범, 가야금 소리가 멈춘 후에도 취한 듯 멍하니 서있다.

    문이 열리고, 어린 연비가 나온다. 연비, 호기심어린 얼굴로 장범을 쳐다본다.

    장범, 연비와 눈이 마주치자 얼어붙은 듯 꼼짝을 못한다.

    연비, 대문 앞에 떨어져 있는 화살을 발견한다.

    연비가 화살을 집어서 장범에게 건네면, 장범, 그때서야 정신이 든 듯 손 내밀어

    화살을 받는다. 연비, 화살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장범이 당황하면, 연비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는다.



    S#108. 박성기 악대, 대청 - 현재



    연비, 엷은 웃음을 머금고 가야금을 타기 시작한다.

    어린 연비가 어린 장범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며 타던 가락이다.

    단순하지만 애잔한 가락이 공간을 감싼다.

    가야금을 타는 연비의 몸짓과 손놀림이 가볍고 여유로워 보인다.



    연 비:이 악곡 기억나니? 온전한 곡이 만들어지면 제일 먼저

    너한테 들려준다 했었지?



    가야금을 타는 연비와 말없이 쳐다보는 장범,

    어린 연비와 어린 장범의 모습과 겹쳐진다.



    정적.

    장범의 시선. 장범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연비의 시선. 가야금 소리 다시 들린다.



    연비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볼을 타고 흐르다 떨어지는 눈물방울, 떨리는 가야금 줄 위에 떨어져 튀긴다.

    장범, 연비 곁으로 다가간다.

    가야금 위에 가만히 손을 얹고 진동을 느껴본다.



    장 범:(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좋구나.



    연주가 끝난다.

    연비, 장범을 마주보고 미소 짓는다.

    장범, 아무 말 없이 연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연 비:범아.



    듣지 못하는 장범, 그대로 떠나려는 듯 마당으로 내려간다.



    연 비:(따라 내려가며) 범아.



    장범, 맞은편을 보고 걸음을 멈춘다.

    여자아이(무희들의 춤을 훔쳐보던 아이)가 대청을 향해 걸어온다.

    심하진 않지만 다리를 절며 걷는다.

    장범, 다가오는 여자아이를 보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여자아이의 머리에 (장범이 연비에게 꽂아 주었던)참빗 머리장식이 꽂혀있다.



    서로 쳐다보는 장범과 여자아이.

    여자아이, 경계하는 태도로 장범을 본다.

    장범, ‘설마’하며 고개 돌려 연비를 본다.

    연비,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장범의 얼굴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스친다.

    장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던 장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정범의 울음소리, 간장을 끊어내는 듯하다.

    바라보는 연비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장범, 눈 깜박이면 놓칠세라 아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웃는다.

    서러운 울음이 섞인 안도의 웃음이다. 울다가, 소리 내어 웃다가, 또 울다가……

    여자아이, 장범의 행동에 겁먹은 듯 뒷걸음질 치지만, 한편으로 호기심이 동하는지 물끄러미 장범을 쳐다본다.



    여자아이:(연비의 손을 잡으며) 이 이는 누구입니까?



    연비, 흐르는 눈물을 닦고 사방에 만개한 꽃들을 잠시 바라본다.

    예전, 연비가 장범을 뿌리치던 날처럼 화사한 풍경이다.

    연비, 여자아이를 보며 밝게 웃는다.

    화사하면서도 완숙한, 하얀 목련 같은 웃음이다.



    연 비:꽃이 참 곱구나. 함께 금이나 한번 타보련?



    맑은 아침, 활짝 핀 꽃이 아름답다.
    전호성

    전호성

    1969년 서울 출생

    캐나다 에밀리카 예술디자인대 졸업(커뮤니케이션 디자인전공)

    동국대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 시놉시스

    갖지 못 한 내 처지를 한탄하고, 내게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한다.
    원망이 낳은 미움과 욕심은 본래 가고자 하던 곳조차 잊게 만들어, 스스로를 베고 남을 찌르는 칼이 되고 만다.
    뒤늦게라도 눈을 뜬 자, 제자리로 돌아오지만,이미 잃어 사라진 것들을 어떻게 되찾겠는가?
    다만, 아직 남아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면 소중히 여겨 곱게 보듬을 일이다.

    창작의도

    고려시대 예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이 격한 경쟁과 애증을 거치며 예술적 깨달음 얻어가는 과정을 그리고자 한다.

    등장인물

    연 비(20)
    장범의 음악적 재능을 시기해 자신의 진심을 미처 깨닫지 못 한다.

    장 범(21)
    음률에 반해 스스로 악공의 길을 선택했지만 무력한 악공의 처지에 절망한다.

    미 월(19)
    박성기의 벙어리 딸로 장범을 사랑하지만 드러내지 못하고 홀로 아파한다.

    최루백(25)
    악부의 관리로 연비를 뜻대로 못하자 비열하게 변해간다.

    박성기(54)
    개경 박성기 악대의 수장으로 자신의 악대를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자 희(33)
    박성기 악대에서 창기 교육을 맡고 있는 퇴기로 억세고 강하지만 숨은 정이 깊다.

    대악사(57)
    관현방을 이끄는 속악의 명인이다.

    그 외
    장범 부, 악공들, 무희들, 악기장, 귀족들

    줄거리

    활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장범은 어린 시절, 자기가 쏜 화살을 찾다가 듣게 된 가야금 소리에 반해 스스로 악공의 길로 들어선다. 창기의 딸인 연비는 스승 박성기 밑에서 장범과 함께 음률을 익히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의 평범한 재능을 뛰어넘는다. 연비는 음률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자 갖은 애를 쓰지만, 결국 장범의 타고난 천재를 넘어설 수 없음에 좌절하고 악공이 아닌 창기가 되어야 할 자신의 태생에 절망한다. 장범은 놀라운 천재성으로 약관 이전에 그 실력을 인정받지만 천대 받는 악공의 처지에 강한 회의를 느껴 음률을 소홀히 한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장범에게 유일한 위안은 연비다. 그러나 시기심에 눈이 먼 연비는 장범의 진심과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 하고 다가서는 장범을 밀어낸다. 박성기의 벙어리 딸 미월은 연비만 바라보는 장범을 지켜보며 남모르게 가슴앓이 한다.

    장범이 국가음악기관인 관현방의 부름을 받자, 박성기는 장범에게 딸 미월과 혼인하여 자신의 악대를 이어가라 권한다. 장범은 연비에게 거부당했다 여기고 박성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연비는 장범의 손가락을 자르려는 유혹에 사로잡힐 만큼 장범의 재능을 시기하지만, 장범과 미월이 맺어지고 난 후, 장범의 깊은 사랑을 깨닫는다. 연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가야금을 버리고 스스로를 내던지듯 창기의 길로 들어선다. 악부의 관리 최루백은 연비에게 집착하며 연비를 소유하려 한다. 최루백은 자신의 악대를 지키려는 박성기를 이용해 연비를 취할 계략을 꾸미고, 이들의 욕망과 애증이 얽히는 가운데 모두의 운명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미월, 박성기, 최루백은 비참한 죽음을 맞고, 장범은 손목과 청력,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폭주하는 욕망으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고서야 후회하는 연비와 장범, 뒤늦게야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지만……
    전호성

    전호성

    1969년 서울 출생

    캐나다 에밀리카 예술디자인대 졸업(커뮤니케이션 디자인전공)

    동국대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 차승재 한국영화제작가협회장, 이정향 영화감독

    전체적으로 지난해보다 응모작의 질이 좋았다는 느낌이지만 본심에 오른 13편 가운데 수준 차는 심했다. 당선 후보로 집중적으로 검토한 작품은 ‘피어싱’ ‘달봉이 장례식’ ‘푸른 노을’ ‘금루곡’ 이었다.

    ‘피어싱’은 ‘팜 파탈 여고생’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소재지만 전체적으로 구성력과 필력이 현격히 떨어졌다. 좀더 글 쓰는 연습이 필요해 보인다.

    ‘달봉이 장례식’은 한 장수마을에 들어간 젊은 장례업자의 얘기를 유쾌한 필치로 그렸고 ‘모든 부모는 자식 때문에 산다’는 메시지도 좋다. 구성도 뜻도 좋지만 너무 전형적인 느낌이다. 독특한 개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감점을 받았다. ‘피어싱’과 함께 가장 상업 영화 냄새가 짙게 나는 작품이었다.

    ‘푸른 노을’은 한 절 앞에서 사진관을 하는 노인이 수취인 불명의 사진 5장을 전하러 길을 떠나는 얘기로, 상업 영화에서 잘 볼 수 없는 주제라 눈길이 갔다. 글쓰기가 안정감이 있고, 의미도 좋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구성의 탄탄함이 사려져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차석이 있다면 줄 수 있을 정도로 막판까지 당선작과 경쟁했다.

    당선작으로 꼽은 ‘금루곡’은 흥미진진해 한 호흡으로 읽었다. 전체적으로 고르게 수준이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글쓰기나 구성력, 인물에 대한 표현의 깊이 등이 안정적이어서 영양분이 고루고루 들어있는 음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건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키우는 전개가 있어야 하는데 안에서 타는 듯했다. 스케일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 전호성

    전호성

    1969년 서울 출생

    캐나다 에밀리카 예술디자인대 졸업(커뮤니케이션 디자인전공)

    동국대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기대를 접으려던 즈음 날아든 소식은 입고 싶어 하면서 보기만 했던 옷과도 같았습니다. 새로 입은 옷 하얀 깃에 얼룩이라도 묻을까 조심스럽지만 그마저도 기분 좋은 설렘입니다. 뜻밖의 선물에 가당찮게 우쭐하려는 어깨를 눌러 내립니다. 당일특급으로 원고 보내던 날, 우편 접수하던 여직원에겐 살짝 굳은 표정이 읽혔을지 모릅니다. 어디 두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 우편영수증을 찾아야겠습니다. 어설픈 첫 습작을 쓸 때 들고 다녔던, 이제는 수명을 다한 노트북 사이에 끼워놓고 가끔씩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는 설계도와도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설계도의 그림대로 건축물이 올라가듯, 지면에 고정되어 있는 4만 7000여 개의 글자들이 빛을 타고 움직이고 공기를 통해 울려나오는 날을 상상해 봅니다. 막연한 기대에는 초조함이 따르지 않아 좋습니다.

    새로 쓰는 글이 그 이전 것보다는 늘 조금이라도 깊어지고 나아진 결과물이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 뜻을 존중해주신 부모님께, 나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좋은 인연을 맺은 친구들에게, 분수 모르고 건방 떠는 제자를 포용해주신 선생님들께 다할 수 없는 감사를 짧은 글에 실어 전합니다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