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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설

by  신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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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경

    조준 (애인, 캐릭터, 아빠를 같이 연기한다)

    청소부

    사회자



    1장
    암전된 상태에서 또각또각, 여성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밝아지면, 화장실이 다. 3개의 칸막이와 그 옆으로 거울과 세면대뿐인 조촐한 무대. 으레 모든 화장실이 그러하듯 ‘윙-윙’대는 (공간 자체가 가지는) 소음이 무대를 조용하게 감싸고 있다.

    은경은 굽 높은 검은 힐을 신고 겨드랑이엔 조그마한 파우치를 끼고,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등장한다. 들어오자마자 칸막이로 들어간다. 이윽고는 입에 손가락을 넣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다. 방금 먹었던 음식을 전부 게워내는 것이다. ‘우웩 우웩’ 소리가 무대를 울린다.

    게워내기 작업을 마친 은경은 거울 앞에 선다. 휴지로 입을 닦는다. 파우치를 열어서 조그마한 칫솔과 치약을 꺼내 양치질을 한다. 그리고 립스틱을 다시 바른다. 상체를 살짝 기울여 거울에 바짝 붙어 립스틱을 바르는 은경의 어깨너머로 조준 등장. 은경, 짧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조준: 오랜만이네요, 교수님.

    은경: (안도의 한숨 쉬고, 신경질적으로) 뭐야! 여긴 여자 화장실이에요.

    조준: 성형을 너무 하셨다~ 몰라 뵙겠어요.

    은경: 뭐라구요?

    조준: 방금 칸막이 안에서 뭐한거에요? 베스트셀러 여자 작가의 몸매 유지비결인가요?

    은경: 다짜고짜 여자화장실에 쳐들어와서, 무슨 짓이에요, 이게!

    조준: (천식흡입요법기구인 ‘포타-넵 네블라이저’를 코로 쑤셔 넣고 버튼을 누른다. 바람이 슉-하고 조준의 코로 들어간다) 제 이야기 돌려주세요.

    은경: (의아스럽고)

    조준: 교수님의 이번 신작장편소설, 제 이야기를 표절 하셨더라구요?

    은경: (약간의 코웃음을 치며) 전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는 걸요.

    조준: 제가 왜 교수님을 교수님이라고 부르겠어요?

    은경: (뭔가 이상하고)

    조준: 교수님 얼굴 바꾸기 전, 교수님 필명 쓰기 전, 교수님 신분세탁 하기 전, 교수님 책 프로필에는 적혀있지 않는 과거. 대학 시간강사 시절.

    은경: !

    조준: ‘글 쓰는 자의 자세’라는 교양 수업을 하신 적 있죠? 저 그 수업 들었었잖아요.

    은경: (당황하며) 그래서 어쩌라구요.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조준: 그거랑 이거랑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죠. 전 그 수업에서 제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발제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발제 내용은 (사이) 뭐 말 안 해도 아시잖아요. 교수님 이번 신작 소설이 딱 그 얘긴데.

    은경: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요! 그 소설은…

    조준: (말 자르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교수님이 하고 계시잖아요. 교수님…….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 남의 이야기 뺏어놓고. 뭐? 신작장편소설 낭독 디너쇼? 저 안에 있는 문학평론가들, 문단 관계자들, 대학 교수들, 독자들.. (다시 천식기구로 바람을 흡입한다) 저 사람들이 교수님이 표절한 사실, 알고나 있어요?

    은경: (조금씩 떨기 시작한다) 어디서 표절이란 단어를 함부로 쓰고 있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아? 작가 인생에서 표절 꼬리표 달고 나면, 그 작가 끝이야. 나한테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괜한 시비 걸지 말구 진짜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조준: 진짜 내가 원하는 거, 내 이야기를 돌려받는 거.


    그 때 커다란 쓰레기통이 놓여있는 카트를 질질 끌며 청소부가 등장한다. 푸른색계열의 작업복을 입고 있고 얼굴은 마스크와 모자로 가려져있다.

    은경, 청소부의 등장에 조금 긴장한다. 반면 조준은 당당하다.

    청소부는 은경을 힐끔 노려보고는 첫 번째 칸막이로 들어간다. 쓰레기로 가득 찬 휴지통을, 끌고 왔던 카트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 넣는다. 깨끗하게 비운 휴지통을 다시 제자리에 둔다. 괜히 변기 물을 내려 본다. 그리고는 물 내려가는 소리가 잦아들기 전에 재빠르고 조심스럽게, 벽면에 장기매매 스티커를 붙인다. 두 번째, 세 번째 칸막이에도 같은 작업을 한다.

    청소부, 요란하게 작업을 하고 있으면 은경이 조심스럽게 조준에게 소리친다.


    은경: (청소부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난 오로지 새로운 것만을 썼다구.

    조준: (큰소리로)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 없다는 거, 작가가 그걸 부정하면 어떡해요?

    은경: (조준이 큰소리로 말하자, 더욱 소리 죽여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 없다는 그 말. 그거 다, 남 몰래 찔끔 찔끔 티 안 나게 표절한 인간들이 자기 합리화하려고 지어낸 말이야.

    조준: (긴 사이) 그냥, 제 이야기가 부러웠다고 말하세요.

    은경: 뭐?

    조준: 그냥 제 이야기가, 가져다 쓰고 싶을 만큼 부러웠다고 말하시면 깔끔하잖아요. 본래 인간은 좀 더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위해 쉬운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랬다,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을, 뭐하러 징글징글한 변명을 늘어놔?


    청소부, 작업을 다 끝냈는지 카트를 질질 끌며 퇴장하려다가 은경을 보고는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린다.


    청소부: 이봐, 아가씨.

    은경: (청소부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조준이 무슨 돌발행동을 벌일 지 신경이 곤두 서있다) 왜요.

    청소부: 자기가 저기 토해놨어?

    은경: 네.

    청소부: 그럼 물을 내려야 할 거 아냐. 변기 커버만 덮어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은경: 미안해요.


    조준, 또 다시 천식기구로 바람을 흡입한다.


    청소부: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만 할 거야?

    은경: (그제야 청소부를 바라보며) 네?

    청소부: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만, 하면, 다냐고.

    은경: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왜 나와요?

    청소부: 커버만 덮어놓는다고 그 냄새가 어디가? 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잖아, 지금.

    은경: 그건 방금 미안하다 했잖아요. 근데,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만 하면 다냐는 건 무슨 말이냐고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세요.

    청소부: 말 그대로야. 그런 말 많이들 하잖아?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모가 났어?

    은경: (폭발해서) 대체 왜이래? (호흡 거칠어지고) 응? 왜 자꾸 누가 불쑥 불쑥 튀어 나와서 자꾸 사람 신경을 긁어? 아저씨는 또 뭐에요? 화장실 청소부면 들어와서 휴지통 비우고 바닥 걸레질하고 조용히 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나, 화장실 청소부가 나한테 말거는 거 첨 봐.

    조준: (지켜보고만 있다가 안 되겠는지) 그만하죠?

    청소부: (보고) 누구?


    어색한 침묵 흐른다.



    은경: (당황하다가) 애인이에요.

    청소부: 애인?

    은경: 헤어진.

    청소부: 어이구, 요즘 젊은 양반들은 여기까지 와서…


    라고 비아냥대며, 카트를 끌고 퇴장하는 청소부.

    은경은 청소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를 노려본다.



    조준: 애인?


    긴 사이.


    은경: 어떻게 지냈어?

    애인: …

    은경: 뭐하고 지내?

    애인: 하루아침에 연락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이 내 안부가 궁금해요?

    은경: 그래도, 잘 살고 있었나보네.

    애인: 하루하루가 시궁창이었어요.

    은경: 왜? 너랑 나랑 무슨 대단한 관계였다고.

    애인: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은경: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어떻게 지냈냐고.

    애인: 자서전 대필하고 있어요.

    은경: 자서전? 누구 자서전?

    애인: 알아서 뭐하게요.

    은경: 그래. 내가 알아서 뭐하겠니.

    애인: (마지못해) 의뢰받은 게 있어서요.


    사이.


    애인: 교수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은경: 보다시피.


    사이.


    애인: 교수님은 왜 절 사랑했어요?

    은경: …

    애인: 교수님은 왜 절 만났어요?

    은경: 아빨 닮아서.

    애인: 그게 다에요?

    은경: 응.

    애인: (노려보고) 그 얘길 왜 이제 와서 해주는 거 에요?

    은경: 내 아빠도 짝눈이었어. 오른쪽 눈에만 쌍꺼풀이 있는.

    애인: (비아냥대며) 아버지한테도 왼쪽 눈에 키스해줬나 봐요?

    은경: 나랑 살 부딪혀가며 지내는 남자애가, 내 아빨 닮았다는 사실이 기괴했어. 그래서 네 왼쪽 눈에 키스해서 일부러 쌍꺼풀을 지게 한 거야. 그럼 그냥, 쌍꺼풀 있는 남자애일 뿐이니까.

    애인: 그럼 날 떠난 이유는요?

    은경: 매일같이 왼쪽 눈에 키스해 줄 수 없으니까.


    애인, 갑자기 은경을 안는다.

    은경, 소스라치게 놀라며 애인을 뿌리친다.

    은경이 애인을 뿌리치는 바람에, 애인이 쥐고 있던 천식기구가 바닥에 떨어진다.


    은경: 왜 이래?

    애인: 우리 하나였잖아요.

    은경: (비웃고) 치기였어.

    애인: 재밌는 장난질이었고?

    은경: 쌈마이 연애 소설 같았고.

    애인: (빈정대며) 그거 교수님이 잘 쓰는 거잖아요.

    은경: 그만 가. 들어가야 돼.

    애인: (호흡 불안정해지면서) 내 이야기 내놓으라고요.

    은경: 뭔 이야기를 자꾸 내놓으래? 난 네 이야기 가져다 쓴 적 없어.

    애인: 그거, 내가 이번에 쓸 자서전에도 들어가는 내용이에요.

    은경: 그러니까 누구 자서전을 쓰냐고.

    애인: 표절시비 나게 해줘요?

    은경: 나 협박하는 거야?


    그 때 애인의 호흡이 가차 없이 빨라진다.

    애인은 떨리는 손으로 천식기구를 찾는다.

    애인,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기구는 없다.

    그 때,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기구를 발견하는 애인. 하지만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애인,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고꾸라진다. 엉금엉금 기어가서 기구를 향해 손을 뻗어본다. 닿을락 말락 한다.

    은경, 무의식적으로 기구를 구두 끝으로 ‘툭’ 차서 저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애인, 은경을 노려본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으면서도 매섭게 은경을 노려본다.

    이윽고 은경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세면대 밑에 웅크리고 들어가 앉아 조준의 억지로 시선을 피해본다.


    애인: 제발, 저거 좀 내 손에… 그러고 있지 말고…


    은경,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다. 애인, 눈을 부릅뜬 채 은경을 노려본다. 눈물이 가득 맺혀있다. 은경,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다. 기구를 주워서 애인의 코에 바람을 넣는다. 하지만 응급처치가 너무 늦어버린 탓인지 효과가 없다.

    은경의 품에 안겨서 경련을 일으키는 애인

    은경, 뭔가 생각난 듯 자신의 파우치를 열어 뒤진다. 검은 비닐봉지가 나온다.

    은경: (봉지를 애인의 얼굴에 씌우며) 야, 야! 정신 차려. 숨을 쉬어봐. 쉼 호흡을 해봐.


    애인의 쉼 호흡에 맞춰 검은 봉지가 일그러졌다 부풀어졌다 한다.

    하지만 소용이 없는지 애인의 호흡은 다시 거칠게 불안정해진다.


    은경: 천천히… 천천히.


    봉지에 덮인 애인이 뭐라고 웅얼웅얼 거린다.


    은경: 뭐?

    애인: (검은 봉지에 덥힌 채 힘겹게 심호흡을 하며) 내놔, 내꺼.


    순간 정적이 흐르고, 조용히 봉지를 조이는 은경.

    ‘윙-윙’대는 조용한 화장실의 소음이 길게 들린다.

    조준의 팔과 다리가 허공에서 허우적댄다.

    짤막한 신음소리가 들리고, 무대 암전된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발자국 소리 들린다.






    2장
    무대 밝아지면, 숲이다.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앙상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가지만 무수하게 뻗어있다. 나무 주위로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있다. 그 앞으로는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길목이 나있다. 멀리서 자갈에 자동차 타이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소리 점차 옅어진다. 이윽고 문 여닫는 소리도 들려온다. 잠시 후 은경이, 오른쪽 길목에서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등장한다. 후줄근한 차림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다.

    은경, 나무를 지나 별장으로 가려다가 잠깐 멈춰 선다. 트렁크를 길목 중앙에 세워두고 나무로 다가가서 괜스레 만져본다.



    은경: 뭔 나무가, 죽은 주제에 이렇게 커?


    은경,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낸다. 버튼을 누른 채 한 모금을 훅 빨아들인다.


    은경: (내뿜으며, 나무에게) 생명의 숨결이라고 생각해.


    그 때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오른쪽 길목에서 조준 등장한다. 뻐끔뻐끔 전자담배를 피고 있는 은경에게 다가간다.


    조준: 천식 있는 사람이 담배를 펴대고 앉았네.

    은경: (무신경하게) 넌 왜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니.

    조준: 그게 내 천성인 걸 어떡해요.

    은경: 그래, 그게 네 본질이지.

    조준: 교수님 내가 생각한 거 이상으로 양심 없는 사람이더라. 어떻게 ‘작가의 말’에 날 언급 안할 수가 있어요?

    은경: (연기 뿜으며) 뭐라고 언급해야 되는데? 무턱대고 갑자기 찾아서 표절이라 빡빡 우기는 옛 제자, 조준에게 감사의 말 전한다. 이렇게?

    조준: (배를 쓰다듬으며) 배고파.

    은경: 너 같은 애도 배가 고프니?

    조준: 나라고 배가 왜 안고파? 나도 사람인데. 들어가서 밥 먹어요, 우리.

    은경: 너 왜 계속 내 꽁무니 쫓아다니며 달라붙어 있는 거야?

    조준: 교수님이 내 이야기 훔쳐갔으니까.

    은경: 그렇게 당당하면 소송 걸라니까? 왜 딱 붙어서 귀찮게 굴어?

    조준: 교수님도 사람이라면,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게 있을 거잖아요.

    은경: 그게 아니라 정확한 증거가 없으니까 그런 거겠지.

    조준: 교수님도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고, 내가 뭔 짓 할지 불안하니까 잡아놓는 거겠지. 자서전 후딱 완성해서, 표절판정 나게 해버릴까 보다.

    은경: (담배 연기 내뿜으며)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난 이미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상태다.

    조준: 나 있잖아요, 그 말 진짜 싫어해요!

    은경: 이게, 이젠 별 걸로 꼬투릴 잡네.

    조준: 아니, 자기가 거기에 딱 달라붙어서 전전긍긍하면서 뭘 지나가리라래?

    은경: 내가 딱 달라붙어있냐, 네가 달라붙어있는 거지.

    조준: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며) 교수님이, 나, 못 가게, 잡고, 있는, 거예요.

    은경: (담배 연기 내뿜으며) …말을 말자.


    은경, 전자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길목에 두었던 트렁크를 가지러 이동하려는데, 문득 나무 밑에 피어있는 꽃을 보게 된다.


    은경: (쪼그리고 앉아서) 와, 꽃! 이름 뭔 줄 알아?

    조준: (같이 쪼그리고 앉는다) 파리지옥이잖아요, 이거.

    은경: 이게? 내가 상상하던 이미지랑 너무 다른데? 왜 이렇게 예뻐?

    조준: 뭐가 예뻐요. 우악스럽게 주둥아리만 딱 벌리고 있는데.

    은경: 꽃말이 뭐야?

    조준: 이런 거에도 꽃말이 있어요?

    은경: 꽃이니까 있겠지, 꽃말.

    조준: 나중에 생각나면 찾아보지 뭐. 근데 이거 시들시들하니 다 죽어가는 것 같은데요?

    은경: (갑자기 표정이 굳어져서는) 왜 이 숲은 기분 나쁘게, 죽은 것들과 곧 죽을 것들과 죽일 것들로만 가득 차있는 거야.

    조준: 항상 그랬어요.

    은경: 안 이랬어. 네가 뭘 알아, 이 숲을… 전과는 달라.

    조준: 이거 봐요.


    조준, 자기 옆쪽 바닥에 있는 분홍빛깔의 꽃을 손가락으로 톡-하고 건드려 본다.

    잎사귀와 꽃이 잔뜩 오므라든다.


    은경:(가만히 보며) 와- 살아있네.


    조준, 일어서며


    조준: 아, 배고프다니까요? 가요.

    은경: (쪼그리고 있다가 아예 엉덩이를 땅에 대고 자리를 잡는다) 안 가.

    조준: 그러시던가.


    하고는, 나무에 뛰어올라 굵은 나뭇가지에 걸쳐 앉는다.


    은경: (보고) 먼저 가 있으라는 소리잖아!

    조준: 쓴 소릴 달게 듣는 버릇이 있어서.

    은경: 거 봐, 네가 달라붙어있는 거지.


    은경, 갑자기 헛구역질을 한다.

    조준, 깜짝 놀라 나무에서 내려와 은경을 살핀다.


    조준: 왜 그래요?!

    은경: (마른 침을 닦으며) 몰라. (호흡 거칠어지고)


    은경,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전자 담배와 천식기구다.

    조준, 기구와 전자 담배를 뺏어간다.


    조준: 천식에 담배는 독약인거 몰라요?


    하고는, 기구를 은경의 코에 가져다 대준다. 조준, 버튼을 누른다.

    바람이 은경의 코로 슉-하고 들어간다. 은경, 크게 쉼 호흡을 한다.

    반대쪽 콧구멍에도 기구를 넣어주는 조준. 버튼을 누르려는데,


    은경: (기구에 코가 막혀 코맹맹이 소리로) 네가 처음 찾아왔을 때 무서웠어.

    조준: 작가라면…아니, 사람이라면 그래야 맞는 거죠.

    은경: (사이, 여전히 코맹맹이 소리) 얘가 내 모든 것을 앗아가면 어쩌나, 두려웠어.

    조준: (버튼 누른다. 바람 슉- 들어간다) ……

    은경: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어떻게 만든 행복인데.

    조준: (자기 코에도 바람을 흡입하고, 기구는 다시 은경의 주머니에 넣는다) 그런데?

    은경: 그런데 너 때문에 그 모든 걸 잃긴 죽기보다 싫었어.

    조준: (웃으며) 그래서 그 때 숨 멎어 죽어가는 날 보고도, 기구를 발로 차버렸고?

    은경: (같이 픽 웃으며) 까만 봉지 뒤집어 씌어 줬잖아.

    조준: (웃고) 그러고 나서 바로 목 졸랐잖아.

    은경: 그런데도 넌 이렇게 계속 나한테 달라붙어있지.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뻔뻔하게.


    그 때 청소부, 갈색 차림의 작업복을 입고 빗자루 질을 하며 등장한다.

    오른손에는 커다란 검정색 비닐 봉투를 들고 있다.

    낙엽을 쓸어 담으며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다. 흥얼거리며 작업하다가, 은경을 물끄러미 본다. 그러더니 깜짝 놀라서는


    청소부: 민지 아이가?

    은경: 저요?

    청소부: 민지 맞재? 아이고야, 몇 년 만이고 이게.

    은경: 처음 뵙는데요.

    청소부: 뭔 소리고. 얼굴이 마이 바뀌긴 했다만…

    은경: 죄송합니다.


    하고 가려는데


    청소부:용두동에 세탁소 집 딸내미 아이가? 맞재! 그래, 아버지는 잘 계시고?

    은경: 아니라니까요? 처음 뵙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청소부: 아이긴 뭐가 아이고. 그 짝눈 김복철이네 딸네 아이라?

    은경: (신경질적으로, 빽 소리 지르며) 아버님!

    조준: 그만하세요.

    청소부: (사이) 누구? 애인인가?


    어색한 침묵


    은경: 캐릭터에요.

    청소부: 잉? 뭐?

    은경: 캐릭터요. 제가 만든, 캐릭터.

    청소부: 그게 뭐라?

    은경: 제가 얘고. 얘가 저에요. 캐릭터. 작가의 분신, 페르소나.

    청소부: 난 그런 어려운 거 모르겠다. 쓸~복철이 딸내미 맞는데…


    한다. 커다란 검은 봉투에 낙엽들이 가득하다. 청소부 퇴장.

    긴 사이.



    캐릭터: 날 왜 이렇게 만들어 놨어요?

    은경: 뭐?

    캐릭터: 왜 이렇게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마초로 만들어 놓았냐고요.

    은경: 맞춰봐.

    캐릭터: 분명 마촌데, 이런 마초는 첨 봐. 마초면 뭔가 권위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하고 근육도 있고. 검은 양복도 입을 줄 알고. 여자도 꼬시고, 불 같이 사랑할 줄도 알고. 차갑게 버릴 줄도 알고. 뭐 이래야 재밌잖아요. 그래야 나도 사는 맛이 나지.

    은경: 쉽게 죽일 수 있어야 했어.

    캐릭터: 뭐? 왜요? 그럴 거면 왜 만들어 놔?

    은경: 죄책감 없이 쉽게 죽이는 게 가능하도록. 미안한 감정이 안 들게끔.

    캐릭터: 그럼, 인생 얼마 안남은 시한부로 만들지. 왜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만들었어요?

    은경: 그냥, 누군가를 닮아야 할 것 같았어. 반드시.

    캐릭터: 누구…?

    은경: 기억이 안나.

    캐릭터: 더듬어 봐요. 나의 원형이 누군지 알고 싶어.

    은경: 누가 내게 오른손으로 밥 먹으라고 조용하게 호통 쳤어. 속삭이듯이. 나는 왼손으로 밥 먹는 게 더 편한데, 그렇게 하면 옆 사람과 숟가락이 자꾸 부딪히니까. 그래서 오른손으로 밥 먹으랬어. 그러면서 자기는 밥 먹을 동안 계속 숟가락을 떨었어. 국물이 다 튈 정도로.

    캐릭터: 그게 죽일만한 이유가 되나?

    은경: 모든 걸 속삭이며 말했어. 재채기도 속삭이듯, 하품도 소리 내어 한 적 없어. 그러면서, 월드컵 때 우리나라가 골 넣을 때는 듣도 보도 못한 괴성을 질러댔어. 그러면서! 네셔널 지오그래피에 나오는 물을 뿜는 고래를 보고는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어. 참을 수 없었어.


    하고는 은경, 갑자기 캐릭터의 목을 조인다.

    캐릭터, 컥컥…숨 막혀 한다.


    캐릭터: (목이 메여 서는) 왜…왜 이래요.

    은경: 그러니까 넌 죽어야 돼.

    캐릭터: (컥컥대지만 웃으며) 이게 문제라니까! 왜 작가들은 멀쩡한 캐릭터를 자꾸 죽이려 들어?

    은경: 죽어야지 멋진 캐릭터야, 넌. 그래야 기억에도 오래 남을 거고.

    캐릭터: 착각 하지 마요. 날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은경: 죽어! 자살이라도 하란 말이야, 징글징글한 새끼야!

    캐릭터: (목소리가 나가서는) 헤~싫어요. 더 모질고 질기게 붙어 있을 거야.


    은경, 조르고 있었던 손을 서서히 놓는다.

    캐릭터, 목을 움켜쥐고 컥컥 거리며 기침한다.


    은경: 그 비린내 나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조준: (웃고) 네가 나고, 내가 너라면서요. 캐릭터가 어떻게 알아요, 작가가 알지.

    은경: 네가 언젠가에 썼던 내 글에 나온 남자 캐릭터와 똑같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조준: 이상할 것까지야 있나?

    은경: 그냥… 불편하면서도 묘해. 구역질이 날 것 같으면서도 안아보고 싶어.

    조준: (웃으며) 그 남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참 부럽다.

    은경: (사이) 내가 남자였으면, 그 사람을 안아보고 싶은 감정은 들지 않았겠지?

    조준: 어째서?

    은경: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그 사람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을 가졌으면. 부셔버릴 수 있는 남자의 힘을 가졌더라면…

    조준: 그랬다면?

    은경: 그래서 자아분열 주제인 네깟 게, 여자가 아닌 남자로 내 앞에 나타난 걸지도.

    조준: (웃고) 네깟 게?

    은경: (사이) 준아, 조준.

    조준: 그렇게 부르지 마요, 이상하니까. 나는 그냥 캐릭터일 뿐이야. 아 그리고 자기고백 같은 것도 하지 마요. 처음 내가 불쑥 찾아갔을 때처럼 훈계나 하려들고…

    은경: (말 자르며) 지금 내가 너한테 입 맞추고 싶으면, 이거 나르시시즘인거야? 네가 나고, 내가 너니까?

    조준: (웃으며) 다른 말로 자위라고 하죠.


    은경과 조준 입 맞춘다.

    서로의 허리와 목에 손이 뒤엉키고, 마치 하나가 된 것 같다.

    그 때 은경이 조준의 혀를 콱 깨문다. 조준, 괴성을 지른다. 피가 똑똑 흐른다.


    조준: (제대로 발음도 못하며) 뭐하는 짓이에요!

    은경: 안 죽네.

    조준: (피 계속 나고) 뭐요?

    은경: 그 왜, ‘콱 혀나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하는 말이 있잖아. 혹시 죽을까 해서 해봤는데, 다 헛말인가 봐.

    조준: (울컥해서) 김은경!

    은경: 배고프다고 했지? 밥 해줄게, 가자.

    조준: 피 나잖아요!

    은경: 빨아먹어. 트렁크 네가 갖고 와.


    하고는 먼저 왼쪽 길목으로 퇴장하는 은경.

    조준, 씩씩 거리면서도 순순히 트렁크를 끌고 같은 길목으로 퇴장한다.

    파리지옥의 입이 열려 있다가 갑자기 닫힌다.

    방금 전 조준이 건드려서 오므라들었던 꽃은 다시 서서히 피어나는 것이 보인다.

    암전.





    3장
    여전히 암전상태. 갑자기 알람소리가 들려온다.

    무대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하지만 조명은 들어오질 않는다.

    계속 알람소리 울리고. 아직 잠에서 덜 깬 은경의 피곤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딘가에 걸려 부딪히는 소리도 들린다. 자꾸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 들린다.

    알람소리 여전히 울린다.


    은경: 준아, 조준!


    대답 없고. 계속 어딘가에 부딪히고, 넘어지는 소리. 요란하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 캄캄한 무대.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관객은 오로지 무대에서 나는 소리와 대사로만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

    알람소리 계속 울린다.


    은경: 조준!

    조준: 네.

    은경: (조준의 음성에 반가운 듯 톤이 높아진다) 어디 있어? 아무 것도 안 보여.

    조준: 저도 그래요.

    은경: 왜 이래?

    조준: 모르겠어요. 불이 나갔나 봐.

    은경: (무대 바닥을 더듬는지 손으로 탁탁 대는 소리가 들리며) 너 어디쯤 있는 거야? 내가 그리 로 갈게.

    조준: 오지 마세요. 의자랑 가구 같은 데 걸려서 넘어지면 다쳐요.

    은경: 상관없어. 같이 붙어있자.

    조준: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요.

    은경: (뭔가를 잡아든 것 같은 인기척 들리고. 쇠로 된 버튼을 찰칵-하고 누르는 소리 들려 온다. 알람소리가 멈춘다) 헤집다 보면 네가 손에 잡히겠지.

    조준: 그만 둬요. 나 뭔가 공중에 떠있는 것 같으니까.

    은경: 떠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조준: 몰라요. 그냥 느낌이 그래요.

    은경: 일단 내가 그리로 갈게. 주위에 되는대로 만져보거나 발로 차봐.

    조준: 아무것도 없어요.

    은경: (조금 짜증이 나고) 그러니까 손으로 자세하게 만져 봐봐. 가구 특유의 문양 같은게 있잖아. 그런 걸 느껴보라고.

    조준: ……

    은경: (급박해져서) 뭐가 만져져? 응?

    조준: ……

    은경: 준아! 대답 좀 해봐! 어디에 있는 거야?

    조준: (거친 호흡으로) 질문 좀 그만해요.

    은경: 뭐?

    조준:교수님이 자꾸 질문만 하니까 제가 뭘 할 수가 없잖아요.

    은경:알았어. 그럼 집중해서 만져보고 바로 말해줘.


    대답 없는 조준. 무대에 적막이 흐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은경의 거친 호흡소리가 들려온다. 점점 가빠지고. 잠시 뒤,


    은경: 아직 멀었어?


    대답 없고.


    은경: 만져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으면 손으로 바닥을 쳐서 소리를 내봐. 내가 그거 듣고 따라가 볼 테니까.


    대답 없고.


    은경: (폭발해서) 야! 대답 좀 하라고! 너는 별 필요도 없을 때 불쑥불쑥 나타나서 들러리처럼 붙어있더니 정작 필요할 때는 왜 소리죽여 꼼짝도 안하고 있는 거야. 같이 붙어 있어야 한결 나을 거 아냐. 왜 이럴 때만 없는 거냐고!


    조준의 대답 대신, 뭔가 의자 같은 것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은경: (흠칫 놀라고) 거기 있어?


    더듬더듬 무대 바닥에 은경의 손바닥이 거칠게 닿는 소리가 쿵쿵- 들려온다.

    삐그덕 소리 계속 들려오고.

    어딘가에 자꾸 부딪혀 생기는 둔탁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은경: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의 목소리로) 아무것도 안보여. 어느 하나 눈에 들어오질 않잖아. 촛불 같은 것도 없고. 라이터도 없어. (뭔가 생각나고) 그래! 전자 담배! 전자 담배 불빛! 준아, 전에 전자 담배 네가 가져갔지? 그거 어디에 뒀어?


    긴 정적. 삐그덕 소리만 들려온다.


    은경: 이 개새끼야! 미친 새끼가 죽으라고 할 때는 안 죽고 있다가 이제 와서 죽은 거야, 뭐야?! 대답을 하라고 빌어먹을 개새끼야!

    조준: 어…죄송해요.


    사이


    은경:(막상 조준의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났는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뭐하고 있다가 이제야 대답을 하는 거야…

    조준: 아, 깜빡 졸았나 봐요.

    은경: (호흡 점점 가빠진다) 전자 담배 네가 가지고 갔었잖아. 그거 주머니에 있어?

    조준: 아뇨. 없어요.

    은경: (맥 빠지고) 그거… 어디다 뒀어?

    조준: 일단 그거보다 교수님 주머니에 기구 넣어 뒀었으니까 흡입부터 하세요.


    은경, 주머니 뒤척이는 소리 작게 들리고. 이윽고 바람 소리가 들린다.

    매우 거칠게 들렸던 은경의 호흡이 서서히 편안하게 잦아든다.


    은경: 너도 아까 호흡 불안정 하던데. 의자 소리 나는 쪽으로 기구 던질 테니까,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듣고 찾아가. 알겠지?

    조준: 난 괜찮아요. 전에 교수님 만나고 나서부터 비닐 봉투 계속 가지고 다녀요.

    은경: (피식 웃음 나오고) 뭐야. 너 목 졸랐던 그 비닐 봉투를 여태?

    조준: (따라 웃고) 응.

    은경: 귀엽네.

    조준: 아무래도 불이 다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가, 날이 밝을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턱대고 헤집고 다니다가는 무릎이 성하지가 않겠어요.

    은경: 그러자…

    조준: (사이) 뭘 그렇게 무서워해요.

    은경: 너무 깜깜하잖아.

    조준: 그냥 눈 감고 잔다고 생각해요. 그거랑 뭐가 달라.

    은경: 그거랑은 달라. 눈을 감았을 때의 어둠은 뭔가 붉은 빛이 도는 어둠이야. 종종 흰 색의 점들이 무수히 보이기도 하고. 가끔 엄청나게 거대한 밝음이 어둠을 강타하고 지나가기도 해.

    조준: (웃으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은경: 눈 감고 있어?

    조준: 네.

    은경: 근데 지금 이 어둠은 말 그대로 그냥…그냥, 어둠이야. 아무것도 없어.


    조준, 대답 없다.


    은경: 준아? 준?


    대답 없고.


    은경: 많이 졸려? 조금만 참자.


    대답 없고.

    은경, 히스테리가 폭발하고 울부짖으면서 몸부림친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무대지만, 은경의 히스테리가 소리를 통해 느껴진다.


    아빠: (조준의 목소리다) 그만.

    은경: (울음을 멈춘다)

    아빠: 아빠랑 보리쌀 놀이 하자.

    은경: (어린아이처럼) 그게 뭔데요?

    아빠: (상냥하게, 속삭이듯이) 은경이가, 손바닥을 이렇게 펴고 있으면~그 안으로 아빠가 주먹을 “보리, 보리”하면서 넣었다 뺐다~할 거야. 그런데 아빠가 “쌀!”하고 주먹을 넣었다 빼는 걸 잡으면 은경이가 이기는 거야. 어때, 쉽지?

    은경: 응.

    아빠: 자, 한다? 보리, 보리, 보리, 보리, 보리


    무대에서 주먹과 손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아빠: (갑작스럽게) 쌀! 으헤헤. 못 잡았네? 다시 한다! 보리, 보리, 보리, 보~리, 보오리,보리, 보리, 보리, 보~~리,

    은경: 나 손 아파.

    아빠: 보리, 보리, 보리, 보리.

    은경: 나 아프다구.

    아빠: (갑작스럽게) 쌀! 또 못 잡았네, 딸? 자~다시. 보리, 보리, 보리, 보오오리,

    은경: (다시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와서, 절규하며) 아프다고 개자식아! 손바닥이 너무 아프다고! 내가 아프다고 몇 번을 말했어? 아프다는데 왜 계속 보리보리보리보리보리보리를 하고 있는 거야, 미친놈아! 그리고 이렇게 컴컴한데, 쌀을 그렇게 빨리 빼버리면 어쩌라는 거야, 돌은 새끼야!

    아빠: 아빠한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어? 아빠 요새 교회도 다녀.

    은경: 뭣? 교회? 하!

    아빠: 보리 보리 보리 보리 보리 보리


    하는데, 은경의 헛구역질 소리가 들려온다.


    조준: (사이, 놀라서는) 괜찮아요?

    은경: (훌쩍이는 소리 들린다)


    긴 사이


    은경: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란 걸 들키고 싶지 않았어.

    조준: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이야기였어요. 시시껄렁한 칙릿 말고, 이제 교수님 이야기해요.

    은경: 최대한 길게…안 들키고 버티고 싶었어.

    조준: 그게 작가 입에서 나올 소리에요?

    은경: (울부짖으며, 소리친다) 그만 못해? 넌 왜 한 번도 내 편을 들지 않아? 대체, 왜?

    조준: (사이) 혹시 교수님 지금 눈 감고 있어요?

    은경: (여전히 훌쩍이는 소리) 응… 뜨고 있으면 너무 깜깜해서. 너도 감고 있다 길래.

    조준: 안돼요.

    은경: 뭐가?

    조준: 감지 마요.

    은경: 왜. 눈 뜨면 나 혼자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조준: 교수님 연극 좋아해요?

    은경: 응.

    조준: 그럼 1막이 끝나고 2막으로 넘어가기 전, 잠깐의 암전 상태라고 생각하세요. 다음 막을 준비하는 아주 깜깜한 어둠이라 생각하고 눈 떠요.

    은경: 싫어.

    조준: 저도 같이 뜰게요.


    사이. 삐그덕 대는 소리 들린다.


    조준: 눈 뜨면 저 죽어 드릴게요.

    은경: (웃으며) 진짜지?

    조준: (따라 웃으며) 네. 자서전도 다 썼거든요.


    사이. 삐그덕 대는 소리 들린다.


    은경: 떴어.


    정적.


    은경: 뭔가 아까보다 아주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아. 어둠에 적응이 돼서 그런가?
    흐릿하게 가구의 형체도 보이는 것 같아.


    그 때, 형광등이 빠른 속도로 깜빡 거리고 이내 조명이 환하게 들어온다.

    은경, 빛이 너무 밝아 손으로 눈을 가려본다.

    삐그덕 대는 소리 계속 들린다. 눈에서 손을 떼는 은경.

    무대를 살핀다. 한 순간 정적.



    무대 오른쪽 가장자리에 기둥이 놓여있고, 거기에 몸이 축 늘어진 조준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얼굴에는 검은 비닐 봉투를 덮어쓴 채로. 밧줄에 목을 메달아 자살한 것이다. (실제로는 바닥에 발을 대고 몸 만 좌우로 흔든다. 마치 바람에 이끌려 흔들리게 보이는 것처럼)



    은경, 뭐라 말도 못하고 ‘어…으…어…’하는 소리만 나온다.

    허겁지겁 달려가서 줄을 풀고 바닥에 조준을 눕힌다.

    그리고 봉투를 뜯어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조준의 얼굴이 보인다.



    그 때 청소부 등장한다.

    주머니에서 분필을 꺼내, 조준의 몸 테두리를 선으로 이어 긋는다. 그리고는말없이 시체를 질질 끌고 퇴장. 조준의 품속에서 책 하나 툭 떨어진다.



    은경. 멍하니 앉아있다. 눈을 부릅뜬 채. 책을 들어 가슴팍에 품는다.

    그리고는 분필로 그려진 공간 안에 자신의 몸을 눕혀본다.

    사이즈가 꼬옥 맞는다.



    암전




    에필로그


    무대 밝아지면, ‘김은경 작가의 신작장편소설, <자전소설> 낭독디너쇼’라고 적힌플랜카드가 팻말로 세워져있다.

    은경, 무대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있다. 테이블 위로 수많은 책이 놓여있다.


    사회자: 이번 순서는 작가님의 친필 싸인이 적혀있는 <자전소설> 전달식이 있겠습니다. (웃으며) 친필 싸인은 책 맨 첫 장에 적혀있습니다.


    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한다.



    이 때, 아래의 두 가지 지문에서 선택한다.

    * 1. 관객들이 전부 무대 위로 올라와 책을 하나씩 건네받는다.

    * 2. 사회자가 직접 관객들에게 책을 하나씩 건넨다.

    관객들, 책을 받는다. 키가 비슷한 남자와 여자 둘이서 입을 맞추고 있는 그림이 표지다.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남자와 여자 옆으로 <자전소설>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관객들, 책의 맨 첫 페이지를 펴본다.




    “파리지옥의 꽃말, 영원불변.

    이 책을

    또 다른 영원불변의 나, 조준에게 바치며”



    라고 적혀있다.





    은경, 조용히 무대에서 퇴장.





    암전되지 않은 채 그대로

    끝.
    신비원

    신비원

    1991년 경북 김천 출생

    서울예대 극작과 1학년

  • 박근형 극작가 연출가, 김명화 극작가 연극평론가

    세상이 어둡다. 올해 희곡분야 지원작은 대부분 전망 없는 세상에 대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소시민적 일상의 삶을 그린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런 세상살이에 대한 알레고리나 탈현실의 판타지도 제법 많았다. 작품들의 전체 수준은 나쁘지 않았지만 120여 편의 후보작들이 비슷한 주제의식이나 패턴화된 스타일을 공유해, 모범답안에서 벗어난 문제작을 찾기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당선작인 ‘자전소설’은 여타의 작품과 구별되는 반짝이는 감각과 신선함이 돋보였다. 작가의 창작행위를 극화한 이 작품은 현실과 허구의 삼투과정을 감각적으로 구축했고, 관념적인 내용임에도 계속해서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끔 만드는 밀도와 매력이 있었다. 작품이 가진 문학적 섬세함이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연극적 언어로 전환될 수 있을지 심사과정에서 다소의 논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율 과정은 본질적 결함이라기보다는 희곡작가라면 누구나 배우고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 ‘자전소설’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희곡작가로 등단한 뒤 문자와 무대의 간극을 좁히는 그 맵고 쓴 과정들을, 잘 견디고 또 훌쩍 뛰어넘기 바란다.

    그 외 후보작으로 1990년대 운동권과 현재 취업난에 직면한 20대 청춘의 우울한 자화상을 재치 있는 일상 속에 표현한 ‘프로작, 언니’가 주목받았고, ‘아이돌’과 ‘열어주세요’도 아직은 거칠지만 눈여겨볼 연극성을 가진 작품으로 함께 거론됐다.
  • 신비원

    신비원

    1991년 경북 김천 출생

    서울예대 극작과 1학년

    왜요? 대체 왜요? 저 어떡해요?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기자님에게 다짜고짜 던진 제 첫 대사였습니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거든요. 과분할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초조합니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데, 이걸 어찌하나 싶습니다. 잠깐 반짝였다가 소리 소문 없이 지는 별똥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암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여도, 왠지 굳건히 이겨낼 자신이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살던 제게, 길을 열어주신 조광화 교수님과 이강백 교수님,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며칠 전 원수의 죽음보다 너의 소식이 더 충격적이다’라고 단 한 줄로 놀라움의 크기를 표현해 준 백통령. ‘넌 이제 노이로제 걸릴 일만 남았어’라고 악담해준 연모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라고 말이 씨가 되게 해준 오 모군. 컴퓨터 잃어버리게 해준 하 모군. 손 잡아준 과순, 안아주던 런던게이, 그래도 난 네 글 재미없다고 말해준 흑인3, 잡스, 유스마일, 정화랑, 빡재, 근이, 허텅, 미취학 아동, 서레기 등 격앙된 목소리로 축하 전화해준 사랑하는 동기 선배님들. 일방적으로 연락 끊어버린 내게 근근이 생존소식을 전해주는, 대단한 인격을 소유한 옛 친구들. 그리고 온 몸이 만신창이임에도 불구하고 얼싸안고 기뻐해준 친구까지도.

    감사합니다’라는 단 한마디로 허세 섞인 짤막한 당선소감을 쓰고 싶었지만, 태생적으로 그런 인간은 못 되나 봅니다. 가족들. 이제 어디 가서, 나랑 피 섞였다는 거 쪽팔리지 않게 해줄게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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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