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숲의 정적

by  김영옥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눈이 쌓인 숲 속은 안온했다. 편백나무와 소나무가 뼈다귀처럼 박혀 있을 뿐 보이는 전부가 눈이었다. 삼일 째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익숙하고 질이 난 것을 차츰차츰 생경하게 하며 땅을 덮고, 길을 덮고, 숲을 덮었다. 눈은 더럽고 지저분한 것도 다 덮었다. 마치 거대한 붓으로 흰색을 칠해버린 듯이 온 천지는 깨끗하고, 간결하고, 단조로웠다. 나무십자가 앞에 서 있던 기정은 걸음을 옮겨 묘지 옆으로 갔다. 흰 페인트칠을 한 나무십자가는 서너 살배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만 한 크기였다. 숲에서 누군가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은 숲속을 다시 넓혀놓았으나 눈 벽이라도 생긴 듯 아늑하고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산짐승이 나타나 자신을 물어뜯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무섭게 고요한 이 공간에서 쉬어가야 기정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사흘 전부터 오고 싶었으나 몰드작업이 끝난 오늘에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은 기정은 손을 펴 두툼한 눈으로 덮인 묘지를 쓰다듬었다. 나무십자가 아래의 왼편은 길쭉하고 네모진 검은 대리석 묘지였고, 오른편은 역시 평토장인 대리석 묘지 하나가 더 있어야 짝이 맞을 아직은 맨땅이었다. 잘 있었어? 차가운 눈과 매끄러운 대리석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새를 들고 오는 줄 알았는데 카메라네요, 라고 중년부인이 여객선 뱃머리 쪽으로 오는 그와 기정에게 말했다. 커다란 바위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동박새나 황조롱이가 자기네 아파트에서 부리를 내밀고 있는 광경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뱃머리 쪽이 붐볐다. 편편한 바위에는 바다사자들이 햇볕을 쬐고 있었다. 기정은 카메라에 동박새와 황조롱이와 바다사자와 그를 가두었다. 풍랑이 거세다고 선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방송이 이어졌다. 돌아서는 기정에게 한 여자가 카메라를 건넸다. 기정은 할 수 없이 그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카메라를 받았다. 침통한 그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여자와 해군 애인이 팔짱을 끼었다. 해군의 흰 모자와 세라복의 흰 선과 흰 바지가 눈을 부시게 했으나 뭔가 쫓기는 마음이어서 그냥 셔터를 눌렀다. 등 뒤에서 물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배 난간에 달라붙어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는 맹수의 아가리 같이 곤두선 물이 그를 삼켜버린 뒤였다. 기정은 사물이 온통 하얗게만 보여 눈을 마구 비비다 쓰러졌다.

    잘 있어, 또 올게. 손이 닿아 드러난 대리석에 깨끗한 눈을 쓸어다 덮은 뒤 기정은 일어섰다. 묘지 왼편에서 소나무 줄기를 타던 청설모가 멈칫거리더니 까만 눈으로 기정을 바라보았다. 몸집보다 더 큰 붓털 같은 꼬리는 청설모를 모형처럼 보이게 했다. 때론 가짜라도 필요하잖아, 라는 게 모형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안녕, 하고 기정은 손을 흔들었다. 손짓이 두려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 청설모는 쏜살같이 우듬지로 숨어버렸다. 소나무가 눈을 한 무더기 떨어뜨렸다. 기정은 숲을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을 완전하게 모르지만 몸에 맡겨 놓으면 되었다. 일 년여 전, 처음 몇 번은 비탈길에서 발이 미끄러져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곧 몸이 익숙해지면서 방향감각을 익혀나갔다. 발소리조차 눈에 묻혀버리고, 침 삼키는 소리조차 귀에 생생하게 닿는 숲속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신께 다가가는 세 가지는 세상과의 단절, 혼자만의 생활, 내면의 고독이라더니 숲속에, 눈 속에 계속 있으면 정말 신께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빛이 숲속을 투명하게 하고, 기정을 툭 건드렸다. 기정은 잠시 서 있었다. 무엇인가가 휙 허공을 차고 푸드득, 올라갔다. 기정은 놀라 움찔거렸다. 꿩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꿩이 앉았던 동그란 낙엽더미 위에는 어른 주먹만 한 돌멩이 두 개가 있었다. 손을 대보면 따뜻할 것 같았다. 꿩이 품고 있었던 것일까. 돌멩이를 새끼라고 여긴 걸까. 에잇, 그럴 리가 있나. 기정은 도리질을 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줄기가 두 개인 쌍소나무가 많이 보였다. 갈라진 두 줄기는 신기하게도 굵기가 똑같고 모양도 똑같았다. 기정의 머리 위로 꿩이 거푸 잽싸게 날아올랐다. 몸을 모로 세워서 바윗돌 사이를 빠져나오자 숲길이 좀 편편해졌다.

    숲 아래로 뻗은 샛길이 끝나자 길이 넓어지면서 오른편에는 성당건물과 공무원연수원 건물이, 왼편에는 석유저장소가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석유를 실은 둥그런 수송차량들이 지나다녔다. 서둘러야 했다.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았다. 대로변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뒷자리에 앉자 점퍼 호주머니에 든 손수건을 꺼내 번들거리는 점퍼와 축축한 바짓가랑이를 대강 닦았다. 숲은 제작소와는 걸어서 이십분 거리에 있었다. 택시를 타면 칠 분 가량 걸렸다. 뭔 놈의 눈이 내리 사흘로 내리나 몰라, 오십 년만의 폭설이라더니 줄기차게도 퍼부어대는구먼. 운전사가 투덜대는 소리에 모자를 벗고 머리를 매만지던 기정은 차창 밖을 보았다. 높이 치솟아 있으나 격자 형태로 정리된 건물들 옆으로 잿빛 눈이 생뚱한 물건처럼 쌓여 있었다. 차가 엉킨 대로변에서는 노란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양손에 깃발을 들고 수신호를 보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아니라 자동로봇이었다. 노란 제설차가 지나가며 염화칼슘을 뿌렸고, 한쪽에서는 인부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눈은 땅을 덮고 더러운 것을 감추는데 인간은 그걸 다시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팀장이 기정의 등산화를 힐끗 내려다보며 점심시간이 너무 긴 것 아니냐며 타박했다. 기정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완이 학원에 좀 다녀올게.”

    “완이가 무슨 사고라도 쳤나요?”

    “방학 동안 토킹클래스 학원에 보내놨더니 시험시간에도 빨간색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런 모양이야. 그 꼴을 못 본 놈 하나가 크레이지 백이라면서 가방을 창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나봐. 완이가 그놈을 물어뜯고, 패고, 묵사발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팀장은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서 가보세요.”

    팀장이 나가고 나자 기정은 흰 가운으로 갈아입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실물크기의 사람모형이나 인형이 기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매번 그랬다. 필요 없는 살이나 구질구질한 것은 싹 제거하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대로 만드는데도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낯설고 섬뜩해서 몇 분간은 진저리쳤다.

    “늦었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얼굴과 손 두 짝이 없는 성인남자의 몸뚱이에 붓으로 색을 칠하고 있던 미스 오가 물었다. 알몸의 성인남자는 아직 완전하게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한 눈에도 부드럽고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한쪽 작업대 위에는 오전에 기정이 떠 놓은 성인남자의 얼굴과 손 두 짝의 밀랍몰드가 굳어가고 있었다. 팀장은 자료사진을 보며 뼈대 위에 점토를 붙이고, 얼굴과 손을 모델링했다. 거의 실제모델과 닮아 있는 얼굴원형은 팀장의 정교하고 세밀한 손끝에서 나왔다. 기정은 모델링이 끝난 얼굴과 손을 밀랍몰드로 떴다. 몰드만 떠놓으면 반은 완성된 거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벌꿀 집 성분인 밀랍은 강화플라스틱이나 실리콘보다 상온에서 쉽게 잘라지고 형태를 만들기가 쉽고 어떤 착색제와도 잘 섞였다. 우리나라의 배우들이 초상권 침해라며 치우게 할 정도로 밀랍인형은 사람에 가까웠다.

    “어디 아무도 모를 곳에 애인이라도 숨겨놓은 거 아냐?”

    미스 오는 노랗게 염색한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 머리를 까딱일 때마다 국화 덤불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스를 뿌려 세운 것일 테지만 감지 않아 떡덩이가 진 것 같았다. 사십이 가까운데도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실밥이 터진 짧은 청반바지에 레깅스를 입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기정은 사흘 전쯤에 그려놓은 지오의 정면도안과 측면도안을 들여다보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밀랍을 벗겨내고 원형뽑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지오를 만들어볼 셈이다. 지오는 키가 170센티이고, 스물다섯 살의 남자이다. 주문 제작이 아니라 기정의 작품이었다. 일거리가 없을 때 틈틈이 만든 모형이나 인형이 다섯 점이었다. 이번에 만들 지오와 두어 점 더 만들어 내년쯤에 전시회를 열어볼 계획이었다. 팀장의 이름을 딴 ‘성재범 제작소’는 밀랍인형과 인물모형과 더미와 인형을 만드는 곳이었다. 팀장의 이름 때문에 끊이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는 편이기는 해도 주문은 극히 제한적이라 팀장과 기정은 자신의 작품을 해나가면서 제작소를 꾸려나갔다. 팀장이 만든 진흙모델 중에서 자동차는 꽤 알려졌다. 이번에는 꼭 여체같이 생긴 커다란 신발과 기마문화에 감명 받아 말대가리를 만들었는데 사실은 둘 다 자동차였다. 발표를 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기정은 한스 벨머의 인형을 좋아했다. 한쪽 다리가 없는데다 무서운 가면을 쓰고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는 인형은 기정을 들쑤셔놓았다. 인형은 주관적인 현실에 가까웠지만 팔이 붙어야 할 곳에 다리 두 짝이 붙어 있거나 몸통에 젖가슴만 붙어 있는 한스 벨머의 작품은 창작의 쾌감과 창작 욕구를 느끼게 했다. 일본의 요츠야 시몬이 한스 벨머의 인형을 발전시켜 구체관절인형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기정은 퇴근 후에 따로 구체관절인형 만드는 법을 배웠다.

    기정은 완성된 정면도안과 측면도안에 머리, 몸통, 팔, 다리 부분으로 나누어 표시를 했다. 도안에 미농지를 대고 5mm 안쪽에 빨간 선을 그렸다. 미농지에 그린 부위별 도안을 가위로 잘랐다. 아이소핑크 덩어리 위에 자른 도안을 부위별로 얹고 그대로 따라 그려주었다. 톱으로 모양을 따라 잘랐다. 조각칼로 파내어 형체를 잡아냈다. 머리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구 모양으로 깎았다. 정면도의 머리, 몸통, 우측 팔, 우측 다리 4개와 측면도 4개의 심재를 만들었다. 분홍색 몸통이나 팔 다리는 정육점에 걸린 뿔그스름한 고깃덩어리 같았다. 사람의 몸도 결국은 고깃덩어리라고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영혼이나 정신을 뺐을 때이다. 기정은 가끔 자신과 꼭 같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무게를 재어보고 싶었다. 53Kg에서 밀랍인형의 무게를 뺀 나머지를 영혼이나 정신의 무게라고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심재에 테이프를 친친 바르고 나자 뻣뻣한 양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자연스럽게, 탄탄하게 건조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루미늄 와이어를 잘라 뭔가를 살짝 움켜쥔 듯한 손과 걷고 있는 듯한 발 심재를 만들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팀장은 바로 퇴근하겠다며 기정에게도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큰일은 없었다고만 했다. 미스 오는 매운탕 거리를 사가지고 애인 작업실에 가야한다며 서둘러 퇴근을 했다.

    33번 버스는 삼십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버스정류소는 눈 때문에 연착인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기정은 한 정거장 더 걷기로 했다. 눈은 그쳤다. 눈 위로 상점가의 노랗고 빨간 불빛이 번들거려도 여전히 눈은 하얄 뿐이었다. 추위가 언제쯤 끝나고, 눈이 언제쯤 멈출지 몰랐다. 가구 가게가 밀집해 있는 내리막길을 지나니 다리였다. 사흘째 폭설이 내리고 있고, 칼바람이 불어도 강은 얼지 않았다. 좀체 도심의 강은 얼지 않았다. 기정은 언 강이 보고 싶었다. 얼음을 부수는 쇄빙선도 보고 싶었다. 강에는 화물선 한 척도 지나가지 않았다. 강은 정지된 듯 보였다. 갈수록 부츠가 눈 더미에 푹푹 빠졌다. 한순간 몸이 휘청거려 다리난간을 붙들었다. 부츠 앞코가 물고 있는 눈을 난간에 탁탁 털어도 발톱으로 난간을 움켜쥐고 있는 갈매기 두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정이가 발톱을 뽑으려고 들어도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날씨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을 때 간혹 V자를 끌고 수면 위를 종종거리던 오리들도 보이지 않았다. 기정은 머플러를 끌어당겨 입을 막고는 발길을 돌렸다.

    당장 오늘 저녁에 먹을 찬거리도 없었지만 슈퍼 앞을 그냥 지나쳤다.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들도 전부 눈을 싣고 있었다. 눈으로 만든 모형자동차 전시 중인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자동차가 아니라 신발이나 비행기나 배일 수도 있겠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데 1503호의 아주머니가 탔다. 눈을 맞았는지 머리카락과 그레이 밍크코트가 엘리베이터 불빛에 간간이 반짝거렸다. 아주머니는 기정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거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각을 맞춘 거울 모서리에 아주머니는 스무 개쯤으로 불어나 있었다. 밍크코트 때문인지 등을 웅크린 고독한 늑대들 같았다.

    “요즈음 잘 안 보이시는 거 같아요.”

    기정 쪽을 돌아보는 아주머니의 시선이 아직도 거울 한곳에 있는 듯 낯설고 멀어보였다. 키가 작고, 몸집도 작아 소녀 같은 아주머니는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주름이 꽤 많았다. 나이는 육십 중반쯤으로 보였다. 몽롱하고 폐쇄적이고 쿠마리처럼 초경도 하지 않은 채 늙어버린 여자 같았다.

    “나야 항상 집에 있지. 아, 얼마 전에는 북해도에 다녀왔어.”
    “거기도 눈이 많이 오죠?”
    “천지가 눈뿐이지. 차 마시러 와.”
    “네, 그럴게요.”

    집에 들어온 기정은 서둘러 보일러를 틀었다. 거실에 훈기가 들 때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커피를 타 소파에 앉았다. 벽에 눈길이 닿았다. 벽지는 은은한 녹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면 보석무늬가 일정하게 박혀 있었다. 불빛을 받으면 비단벌레처럼도 보였다. 어머니의 수의에 비단벌레를 달아주고 싶었다. 구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집으로 이사 오면서 직접 벽지를 골랐고, 갖고 싶었던 돌침대나 자개농을 들여놓았으나 삼 년도 살지 못하고 관광차 전복 사고로 작년 겨울에 세상을 떴다. 그때도 눈이 많이 내렸다. 31평이나 되는 집이 벅차 원룸으로 옮겨간다간다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며 그대로 살았다. 한쪽 벽면은 장미꽃이 사선으로 배열된 벽지였다. 위쪽에서 내려다보면 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기정은 사선보다 직선 쪽을 보았다. 장미꽃이 훨씬 많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텔레비전 위의 벽에는 칠층이나 되는 건물을 하나의 나선형으로 쌓아올린 구겐하임미술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미술관 앞에 서 있는 기정의 왼쪽과 그의 찢어진 청바지가 빛을 튕기며 번득였다.

    모마미술관에서 100호가 넘는 대형 화판에 먹으로 찍은 점 세 개밖에 없는 그림을 삼십분 이상이나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을 때 기정은 한국인이냐고 묻고, 왜 그 그림 앞에 삼십분이나 서 있었냐고 물었다. 그는 그저 그림을 바라만 보았을 뿐이고, 삼십분이나 서 있은 줄은 몰랐다고 했으며, 점 세 개가 수없이 다르게 보였다고 했다. 구겐하임미술관 건물은 소라고둥으로도, 엎어놓은 컵케이크로도, 먼지기둥으로도 보였다. 그 건물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무릎이 터진 청바지가 낯설지 않아 기정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까 모마에서 마주친 그 남자였다. 구겐하임미술관의 나선형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기정은 몇 번 남자와 엇갈리기도 하고 마주치기도 했다. 꼭 둘이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칠층까지 오른 뒤 난간에 서서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보았다. 길은 나선형으로 꼬여 있었다. 남자도 반대편에서 기정과 똑같은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정은 그와 함께 돌아왔다.

    인터폰이 울렸다. 막 일어서서 샤워를 하려던 기정은 인터폰을 받았다.

    “놀러와, 내가 줄 것도 있고.”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만 나는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가려던 마음을 고쳐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맨 꼭대기 층인 1503호는 기정의 집과 똑 같은 31평에 구조도 똑 같았지만 훨씬 넓어보였다. 벽지나 소파나 커튼이 흰색이었고, 별다른 장식장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거실을 여러 번 둘러보고 나서였다. 가까이 가서 보아도 흰 커튼에는 무늬조차 없었다. 흰색이 깨끗하기보다는 텅 비어 무섭기까지 하다는 걸 느낀 건 처음이었다. 넓은 것이 무섭다는 것도. 흰 것이 무서워 아무 것이나 그려대고 걸레자국이라도 남기는 것일까. 베란다 밖으로 강이 내려다보이는 것은 똑 같았다.

    베란다 창 앞에서 기정은 아주머니와 함께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가가 눈으로 덮여 있어 더욱더 강은 넓어보였다. 강 건너편의 공원을 덮고 있는 눈도 도톰했다. 미끄럼 타는 사람들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을 경사진 공터는 어둑어둑해져 가는 풍경 속에서 더욱 희고 넓게 보였다.

    “북해도에 가보았어?”

    기정은 고개를 저었다.

    “거긴 정말 눈이 많이 오지. 지금 오는 눈보다 세 배쯤 많이 오고, 두께도 세 배쯤 두텁다고 생각하면 돼.”
    아주머니는 흐린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향해 손을 뻗는 시늉을 했다. 기정도 따라했다.

    “북해도의 눈 속에서 나는 세상과 단절했고, 또 세상과 화해했어.”
    아주머니의 지적인 말투에 기정은 속으로 놀랐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남편이 죽었어.”
    기정은 수키와에 붙어 자라는 콩란과 암키와에 붙어 자라는 풍란을 내려다보았다. 베란다에는 그것 외에는 없었다.

    “공군 장교였는데 경비행기 시범비행 도중에 골짜기로 바로 추락사했어. 믿을 수가 없었어. 한 일 년은 어떻게 지냈는지 몰라. 그러다가 북해도에 갔어. 북해도로 들어갈수록 점점 세상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것 같았어.”

    눈이 베란다 창 주위를 맴돌거나 안으로 들어오려고 베란다 창을 툭툭 때렸다.

    “눈이 퍼붓는데, 보이는 것은 전부 눈뿐이었는데 전혀 현실 같지가 않았어. 이대로 눈에 갇혀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가 다음날에 도야호수로 가던 길에 정말 눈뿐인 세상을 보았어. 계곡이 전부 눈뿐이었어. 모든 게 눈으로만 이루어진 듯했어. 그 계곡에 내렸지. 눈 속에 오랫동안 서 있었어. 눈이 점점 나를 덮어가더라고. 그때 난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눈 속에 묻어버렸어. 눈으로 덮어버렸지. 모든 것을 덮어버렸어. 남편과 결혼한 사실조차도. 처음 만나 연애하면서 테이트 하고, 그 좋은 시절만 쏙 빼놓고 다른 건 다 눈 속에 묻어버렸어. 그렇게 되니까 남편은, 도로 애인이 되었어.”

    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애인과 함께 북해도에서 돌아왔어. 그리고는 함께 살았어. 그런데 그런 애인은 오 년 이상 사귀기가 힘들지. 또 고비가 찾아왔어. 그래서 아들을 입양했어. 입양하기 전에 북해도로 갔어. 그 계곡의 눈 속에서 내가 아들을 낳았지.”

    기정은 무심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두 얼굴은 포개질 듯 말 듯 했다.

    “아들이 내게는 애인이었어. 피아노학원에도 같이 가고, 태권도장에도 같이 가고, 어디든 같이 갔지. 아들이 아니라 인형놀이를 하는 거 같았어.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도 그때뿐이었어. 걔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니까 내 하루 일과가 마트에 가서 먹을거리를 잔뜩 사 배달을 시키고, 걔가 올 때를 맞추어 음식을 만드는 게 전부였어. 걔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내 곁에 붙잡아두었어. 귀가시간도 일곱 시로 정해놓고. 밤에는 걔를 불러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어. 정말 세헤라자데였지. 그런데 그런 아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 언제나 다른 사람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굴었지. 그러더니 내가 그렇게 말려도 기어코 미국지사로 나가버렸어. 일 년에 한두 번쯤 연락이 오더니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연락도 없어. 나도 하지 않았고. 그게 속 편하니까. 그런데 연락이 왔는데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별다른 말은 없고, 미국여자라는 말과 사냥을 배우고 있다고만 했어. 내가 왜 사냥을 배우냐고 물었더니, 뉴저지에 통나무집을 마련했는데 숲속이라 밤에 멧돼지나 곰이 습격해올지도 몰라 그렇다고 했어.”

    아주머니의 긴 속눈썹이 약간 떨렸으나 얼굴은 이미 아들을 버려버린 듯 냉담했다.

    “오늘이 아들 결혼식이야. 결혼식에는 꼭 참석해달라고 했는데, 내가 안 갔어.”

    “…어디 다녀오셨어요?”

    “갈 데가 없어서 하루 왼 종일 여기저기 쏘다니다 왔어.”

    기정은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주 상가에서 빵을 사오는데 분수대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커피숍에 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했으나 일이 밀려서 집에 가야 된다고 했다. 그때도 아주머니에게는 혼자 감당하기 힘든 나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기정은 미안했다.

    “사실 그 애가 미국지사로 나갔을 때 또 북해도로 갔었어. 흰 눈밭 속에 서서 아들을 입양했던 일을 다 묻어버렸어. 아들을 입양한 적이 없다고. 입양한 사실을, 함께 살았던 사실을 눈으로 다 지워버리고, 다 덮어버렸지. 그러니까 편해졌어. 지금은 아주 편해.”

    아주머니는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난 저 강만은 무서워.”

    아주머니는 매일 베란다 창에 서서 강만 내려다보았다. 창 안에서 바라보는 강은 움직이지 않고 푸르기만 했고, 끝없이 넓기만 했다. 베란다 안에, 강 속에 갇힌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사교적이지 못해서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활달하고 사교적이고 집에 잘 붙어 있지 못하던 기정의 어머니조차 모르는 것으로 봐서 지독하게 폐쇄적이었다. 아주머니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이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아주머니에게는 몇 십 년이 그냥 달력 한 장이었다.

    “아, 내가 차도 주지 않았네.”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갔다. 기정도 거실로 따라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때가 타지 않아 새것처럼 보였다. 아주머니는 튤립이 그려진 겐조 찻잔에 말차와 알록달록한 색깔의 화과자를 내왔다. 해마다 겨울이면 북해도에 갔다 오는 모양이었다. 북해도의 눈을 보러가야 하는 이유가 어떻게 일 년에 한 번 뿐일까 싶었다. 아마 수십 번도 더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말차를 먹어 입술에 녹색거품이 살짝 묻은 아주머니는 잠깐, 이라고 하며 일어서 안방으로 가더니 무엇인가를 들고 나왔다. 수줍은 표정으로 선물이라며 기정에게 건넸다. 기정은 예의를 차리고 싶어 풀어보아도 되냐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그러라고 했다. 나무상자 속에 든 것은 오르골이었다.

    “오타루의 오르골 공방에서 샀는데, 아가씨에게 주고 싶어졌어.”

    기정은 채로 오르골을 탁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뱅글뱅글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숨어 있는 것처럼 여자남자 혼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고맙다는 말에 아주머니가 말했다.

    “내가 이담에 무얼 부탁하면 들어줘.”

    아주머니의 얼굴이 검고 탁하게 번들거렸다. 기정은 어둡고 무섭고 축축하고 차가운 동굴 속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사람모형의 텅 빈 속이나 박제되어가는 동물의 텅 빈 속을 보고 만 기분이었다.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나 손을 덥석 물고 늘어져 함께 봉합해 버릴 것 같은.

    “겁나는데요.”







    택시에서 내린 기정은 성당건물과 공무원연수원 건물 앞과 석유저장소 앞을 지나 샛길로 접어들었다. 샛길 양편에 있는 버드나무, 플라타너스 우듬지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세 번째 버드나무에는 새집이 비쭉 드러나 있었다. 흰색으로 새로 도색을 한 듯한 새집에는 새가 보이지 않았다. 어미 새는 먹이 찾으러 갔을 것이다. 샛길 끝으로 보이는 숲도 너무 하얘서 멀고 신비로워보였다. 샛길이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입구 같았다. 구레나룻을 기른 외국남자와 파카를 입은 청년이 샛길을 걸어 내려왔다. 깔끔한 스포츠형 머리 때문인지 파르스름한 뒤통수 때문인지 외국남자는 사제복이나 군복이 어울릴 것 같았다. 동시통역인 청년의 말소리는 영어방송을 틀어놓은 것처럼 깊고 넓게 울렸다. 예닐곱 살쯤 된 사내아이가 플라타너스 꼭대기를 향해 탕탕, 총을 발사하며 지나갔다. 외국남자가 구레나룻을 씰룩이며 끌끌 웃었다. 기정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요즈음 장난감 총은 정말 진짜 같아 맞으면 얼굴에 피멍이 들고, 눈이 실명까지 갈 수 있으니 어린아이가 총을 들고 아파트 밖으로 나오면 무조건 압수하겠다는 공고가 엘리베이터 벽에도 붙어 있었다. 사내아이는 어깨에 총을 얹고 숲 쪽으로 갔다. 사내아이도 눈 오는 날 토끼나 꿩을 사냥하고 싶은 기운이 발동한 걸까. 기정은 숲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도 확실히 모르지만 자신의 방향감각만 믿고 몸에 맡겨 놓으면 되었다. 공기는 축축하고, 상쾌했다. 눈 내리는 숲속은 한 가지 색뿐이라서 더 넓어보였다. 그래도 넓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서 있는 고독감 같은 걸 느낄 필요도 없었다. 눈 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만 보면 되었다. 잠깐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손을 뻗어 숲 앞면 역할을 하던 커다란 바위를 대리석 묘지를 쓰다듬듯 쓰다듬었다. 차갑지만 튼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세상과는 동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북해도로 들어갈수록 점점 세상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는 아주머니의 말이 이해되었다. 등 뒤에서 흩날리는 눈이 자신을 뒤에서부터 지워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좋을 것 같았다. 숲으로 깊이 들어가자 풍경은 더욱더 신비로워졌고, 성스러운 감정이 차올랐다.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 비밀스러운 것이나 모르는 게 더 나은 것이나 침묵이 더 나은 것을 알게 하거나 엿보게 할 것 같았다. 신께 한 발짝 더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짐승이 나타나 자신을 물어뜯고 피투성이로 만들어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가까이서 늑대가 눈 오는 하늘을 향해 주둥이를 쳐들고 울부짖어도 전혀 놀랄 것 같지 않았다. 소나무의 흑갈색 껍질은 눈 속에서 더욱더 투박해보였다. 기정은 손바닥으로 껍질을 쓸면서 소나무들을 지켜보았다. 소나무 사이로 여우가 폴짝폴짝 뛰어올 것 같았다. 곧 기정은 여우는 어미라서 먹이를 구하러 좀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올라갈수록 눈이 내리고 있는 하늘과 눈을 받아내고 있는 땅이 하나로 엉켜들었다. 이대로 저 속으로 실종되어버리고 싶었다. 안개가 수평선을 뭉개버리는 호수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것처럼. 그래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흰 페인트칠을 한 나무십자가는 더욱 희게 보였다. 눈이 살짝 부셨다. 기정은 나무십자가 앞에서 눈을 맞았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걱정도 불안도 없이 빈항아리처럼 깨끗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뚜껑이 없이 풀숲에 버려진 빈항아리에는 잡풀이든 쓰레기든 담겼다. 자신의 마음은 언제나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빈항아리인 것이 못마땅해 기정은 눈을 떴다.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을 뻗어 눈 무더기를 쓸고, 검은 대리석을 쓰다듬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잘 있었어? 검은 대리석에 기정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자기 눈이 꼭 타인의 눈처럼 기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정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몰랐는데 묘지 옆과 뒤에 기정의 발자국이 아닌 크고 투박한 발자국이 여러 군데 찍혀 있었다. 멧토끼 발자국은 아니었다. 멧돼지 발자국은 더더욱 아니었다. 누가 다녀간 것만 같았다. 누가 왔다 간 걸까. 눈썹이 꿈틀, 하던 기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개가 커다란 검은 새 한 마리가 높게 떠서 뱅뱅 정지비행 중이었다. 오랫동안 올려다보니까 축소된, 쪼그라든 패러글라이더처럼 보였다. 산 하나를 넘을 때마다 이대로 끝까지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무서워.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는 그때부터 기정을 떠날 준비를 했는지도 몰랐다.

    염색한 것이 아니라 진짜 여우 목도리를 두르고 약속장소에 나온 그의 어머니는 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와 절대로 결혼시킬 수 없다고 했다. 막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에게는 결혼이 이른 편이었으나 기정에게는 또래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우리 애를 잘 봐줘서 고마워요. 우리 애도 누나가 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초년생이라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잘 좀 가르쳐주세요. 기정은 유리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생각했다. 내가 닥종이인형 작가처럼 독일에 가서 살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아홉 살이나 차이지는 사람과 사는 것은 힘들 거야. 유리컵에 불안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을 기정은 외면했다. 그를 피해 기정은 도시외곽에 살던 어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밤이 되면 섬세하고 따뜻한 그가 생각났다. 섹스 때도 그만큼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남자를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친구들과 새로 생긴 해저터널을 보러가고 없었고, 기정은 감기몸살을 앓았다. 천장의 당초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렸다. 그가 보고 싶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축축한 몸을 껴안아야 살 것 같았다. 견딜 수가 없어 집 밖으로 나온 기정은 대추나무 밑에서 자신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 밤에 안은 그의 몸은 바다사자 등보다 더 축축하게 미끈거렸다. 다시 결혼 승낙을 받으려고 갔지만 그의 어머니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닫힌 문 앞에서 기정은 저 문을 열지 못할 거라는 걸 예감했다. 그는 그냥 함께 살자고 했다. 기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술만 취하면, 비만 내리면 전화를 걸어 어디 숨지만 말아달라고 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가 땅으로 처박혀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쳐 수술을 받게 되자 그의 어머니가 기정을 찾아왔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굴 구원하겠다는 거야? 기정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그가 썼을까 생각해보았다. 왜 구원이라는 말을 썼을까. 정말 내가 반대하는 게 단순히 나이뿐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돌쩌귀가 어긋나 닫히지 않던 문이 딱 닫히는 기분이었다. 닫힌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을 만큼 기정은 순수하지도, 어리지도 않았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눈이 흩어지는 소리에 기정은 퍼뜩 옆을 돌아보았다. 편백나무 가지를 타고 오르던 청설모가 동작을 딱 멈춘 채 기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안녕, 하고 기정은 손을 흔들었다. 까만 눈동자로 기정을 빤히 바라보던 청설모는 순식간에 우듬지로 올라가 눈을 후드득 떨어뜨렸다. 네 집은 어디니? 설마 집도 없이 먹이만 구하러 다니는 것은 아니지? 기정은 다시 손을 뻗어 검은 대리석 묘지를 쓰다듬었다. 차가운 감촉에 잠깐 선득 놀라 몸을 떨었다. 거칠게 찍혀 있는 발자국이 또다시 눈을 파고들었다. 기정은 일어섰다. 쌀가루를 백 자루도 넘게 들이부은 것처럼 두툼하게 쌓여 있는 눈을 모종삽처럼 두 손으로 퍼 발자국 위에 덮었다. 두 군데의 발자국을 덮고 나자 손이 몹시 시렸다. 그래도 눈을 퍼 계속 발자국을 덮었다. 그 위로도 눈이 내렸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커피를 마시던 팀장이 미간에 쇠갈고리 두 개를 짙게 만들며 물었다. “이기정 씨, 점심시간이 너무 긴 거 알아? 정말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의혹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표정을 팀장은 감추지 못했다. 사무실에까지 시너냄새가 났다.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숲에서 묻혀온 공기 때문에 시너냄새가 강하게 와 닿는 모양이었다.

    “그냥 산책 좀 하고 왔어요.”

    “숨겨놓은 애인 만나러 간 것은 아니고?”

    마지막 한 방울의 커피를 쭉 들이켠 미스 오가 입을 다시며 말했다. 팀장의 눈을 외면하며 기정은 가운으로 갈아입고 제작실로 들어갔다. 갓 태어난 밀랍인형이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기정을 반겼다. 은은한 살빛으로 채색한 얼굴에 인조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심어주고, 인조안구를 박아 넣고, 인조손톱을 박아 넣고, 인조눈썹을 심어주고, 밀랍으로 뜬 치아까지 박아 넣었더니 거의 대기업 창업주인 박경준이었다. 회사 창립기념 때 기념관 안에 전시할 거라고 했다. 기정은 박경준 가까이 다가갔다. 주름과 땀구멍과 수염자국까지 있는 얼굴은 너무 실제 같아 섬뜩하고 오싹했다. 모형이나 인형한테서 원하는 게 사실은 이 섬뜩하고 오싹한 분위기였다. 미스 오가 들어와 몸뚱이뿐인 박경준에게 검은색 양복을 입혔다. 미스 오가 박경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꼭 살로메나 내 손에 잘려나간 세례 요한 머리통 같지 않니?”

    이십 대에 연극무대에 섰다는 미스 오다운 말이었다.

    “그래 넌 남자 목도 자를 수 있을 거야.”

    미스 오가 몸을 흔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기정은 박경준의 두 손을 가져 와 바닥에 고정시켰다. 손 역시 얼굴 표정만큼 정밀하고 정교하게 나타내 전시효과를 높여야했다. 얼굴보다 손이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얼굴보다는 손에서 밀랍인형이라는 것이 탄로 날 확률이 높았다. 밀랍인형이나 인물모형은 실제 사람과 닮을수록 호감도가 높아졌다. 실제에 가깝게, 가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거의 비슷하게는 만들어도 똑 같이는 만들 수 없었다. 이 한계 때문에 사람들의 호감도는 차츰차츰 떨어져 바닥까지 가기 마련이었다. 인형에 열광하다가도 금세 싫증을 내고 버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노랑, 빨강, 주황, 상아색, 갈색 물감을 섞어 농도를 맞추었다. 파렛트에 분홍빛이 은은하게 도는 살색을 떠냈다. 붓으로 오른손에 여러 겹의 색을 칠해 살빛을 냈다. 푸른 힘줄과 주름을 강조했다. 사람 손처럼 보이려는 트릭이었다. 왼손까지 채색하고 나자 기정은 주저 없이 붓을 통에 집어던졌다. 양손을 번갈아가며 뻣뻣한 목덜미와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미스 오가 입혀놓은 양복에 얼굴과 손을 조립하면 박경준은 완성된다. 지오에게 살을 붙여줄까 망설였다. 밀랍인형에 매달리느라 심재만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점토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팀장이 퇴근을 하자고 했다. 남아서 계속 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팀장의 어디 가서 한 잔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제작소 건물 앞에서 미스 오와 헤어지고 나니까 길에서 빵빵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팀장의 검은색 무쏘가 서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푸르죽죽한 강이나 홍게 다리를 연상시키는 아치형 교각이나 공룡처럼 버티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기정을 견딜 수 없게 했다. 지금까지도 간간이 떨어지는 눈도 지겨웠다. 갑자기 새둥지처럼 헝클어져 있는 팀장의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호버백 밑에다 감추었다. 어디선가 닭이 울었다. 요사이는 닭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닭이 거푸 울었다. 기정은 주위를 살폈다. 짚으로 만든 둥지 속에 똬리를 튼 검은 닭이 흰 닭과 노랑 병아리를 등에 업고 있는 장식품이 운전대 앞쪽에 놓여 있었다. 팀장이 멋쩍어하며 남원 광한루에서 오천 원 주고 산 것이라고 했다. 기정은 손을 뻗어 둥지 밑에 있는 까만 스위치를 올렸다. 닭이 목청껏 꼬끼오, 울었다.

    술집 입구의 왼쪽 벽면에는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워홀의 사진전 안내 포스터였다. 워홀은 주황색 틀에 갇힌 스무 명의 마릴린 먼로를 만들어냈다. 초록 카펫이 깔린 술집 안은 초록인공초가 무성한 수족관 같았다. 구석 쪽의 테이블에는 중년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Without You가 흘렀다. 칵테일로 입술을 축인 뒤 기정은 물었다.

    “완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 “다시는 빨간색 가방을 들고 가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친구랑 싸우지도 않겠다고 다짐을 받으려고 하루저녁 내내 닦달을 해도 안돼, 정말 막무가내야. 때릴 수도 없고.”

    “이제 5학년인데 너무 집착이 강한 거 같아요.”

    “그 녀석은 빨간색 가방만 들고 다니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어. 아무리 말리고, 때려도 소용없어.”

    “완이 엄마에게는 소식이 없나요.”
    “완이는 모르고 있지만 스포츠용품점을 차려준 남자랑 함께 사나봐.”
    “완이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그래요.”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을 거야.”

    완이 엄마는 집에 있기 갑갑하다며 보험회사에 다녔다.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완이를 돌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했으나 완이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돈으로 피자나 통닭이나 콜라만 시켜 먹어 어린이 비만에 걸렸다. 점점 입술이 새빨개지고, 점점 치마길이가 짧아져가던 완이 엄마는 영업수준을 높여야만 실적도 높일 수 있다며 밤늦게까지 골프를 배우러 다녔다. 이번 달에는 1등으로 실적으로 올렸다며 옷과 핸드백과 구두를 잔뜩 사들고 온 보름 후쯤 흰색 에쿠스를 탄 남자를 따라가 버렸다. 팀장이 술을 퍼마시고 새벽에 들어와 보니 완이는 빨간색 가방을 꼭 끌어안고서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완이 엄마가 들고 다니던, 책보다 조금 큰 반달모양의 가죽 숄더백이었다. 완이는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빨간색 가방을 옆에 두었다. 학교에 갈 때도 빨간색 가방을 가지고 가서 아이들한테 놀림을 받았다. 빨간색 가방을 들려 보내지 말라는 선생님 전화를 받은 날 팀장은 완이를 가죽혁대로 때렸다. 짐승도 지 새끼는 안 버리는데. 네 엄마는 짐승보다 못해. 그러니 기다리지 마. 한 번만 더 가방을 들고 다니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그래도 완이는 빨간색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녔다. 가방을 놔두고 학교에 가면 엄마가 와서 가방만 가지고 갈지 모른다고 고집을 부렸다. 가방을 장롱에 넣고 문을 잠가버리자 완이는 컵을 깨거나 돌멩이로 유리 같은 걸 깼다. 가죽혁대로 종아리를 때리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라고만 외쳤다. 뭐가 아닌지 물어도 계속 아니야, 라고만 했다. 완이 마음이 팀장님 마음이죠? 라고 기정은 물었다. 팀장은 얼른 말했다. 난 그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해. 에쿠스가 유조차와 정면충돌해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즉사했다고 생각해. 자꾸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어떨 땐 내가 죽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해.

    팀장은 낮에 어디를 갔었느냐고 물어도 되겠냐고 했다. 기정은 눈이 보고 싶었다고만 했다.

    “눈 속에 뭐가 있는데? 눈을 보면 좀 달라져?”
    “눈 속에서 세상과 단절했고, 눈 속에서 세상과 화해했어요. 제 말이 아니라 우리 위층 아주머니 말이에요.”

    “아주머니가 그런 말을 해?”
    “나이가 육십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분위기는 소녀 같아요. 늙은 소녀예요.”

    “늙은 소녀?”

    팀장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선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기정을 안심시켰다.

    “완이가 학교에서 토끼를 한 마리 얻어 와 베란다에서 키우고 있어.”
    “토끼를요?”
    “아래층이나 위층에서 냄새난다고 할까봐 간이 조마조마한데, 완이가 마음을 쏟고 있으니까 내버려 둬.”
    “토끼가 예쁘겠네요.”

    “일요일에 별일 없으면 보러 와.”

    “알았어요.”

    팀장은 칵테일을 한 잔 더 시켰다. 그의 얼굴이 우울해보였다. 기정은 칵테일로 입술을 축이며 술집을 둘러보았다.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지 넓고 기학적인 느낌을 주는 술집은 휑했다. 중년남자는 얼굴을 왼쪽으로 처박은 채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술잔을 집어든 손이 밀랍으로 만든 박경준의 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기정은 모든 사람을 자신이 만든 모형인물과 비교했다. 중년남자는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중간 쪽의 테이블에는 여자 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화려해 보이지만 허기진 얼굴로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내뿜는 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손짓이 꼭 자신의 작품인 메리와 모아 같았다. 검정실크드레스를 입고 반쯤 드러누워 있는 메리는 마음에 맞는 남자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다리 한 짝을 치켜들고 가랑이를 벌릴 것처럼 자세가 불량했으나 얼굴은 몹시 허기져보였다. 마치 나뭇가지에 붙은 제왕나비처럼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공허했다. 모아 역시 가슴골이 드러나는 흰 셔츠에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고 끝이 찢어진 흰 반바지를 입고 있는데 무척 발랄하고 섹시해보이지만 한 구석을 바라보는 듯한 눈은 공허하고 슬퍼보였다. 중년남자가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쓰며 일어섰다.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중년남자가 누군지 생각났다. 대학총장과 고위공직을 지낸 분인데 수입쇠고기 문제로 관직에서 물러나 지금은 집에서 칩거 중이었다.

    “뭘 그렇게 골똘하게 봐, 아는 사람이야?”
    “아니에요.”

    팀장이 담뱃갑을 끌어당겨 담배를 빼어 물었다. 내뿜는 연기 사이로 기정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다 덮지 못한 욕망 한 줄기가 눈 끝에 남아 있었다. 선하고 부드러운 얼굴은 언제나 기정을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했다. 추울 때는 기대고 싶을 만큼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정은 나가자고 했다. 팀장은 나가기 싫어 떼쓰는 아이 같은 몸짓으로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며 일어섰다.

    복도에 된장찌개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생선 구운 냄새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살아서 저녁밥을 짓지 않는 사람을 예민하게 건드리는 냄새였다. 기정은 빠르게 철제현관문을 열었다. 캄캄한 거실로 들어서자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아무도 몰래 불안해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곧장 퇴근하지 않고 중간에 사람을 만나면 더 그랬다.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어두운 게 무서워도 막상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무섭지 않았다. 왜 무서워했는지 의아해질 정도였다. 위층에서 발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그 소리에 왠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기정은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안방 맞은편인 자신의 방으로 갔다. 안방은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어머니가 쓰던 그대로 두었다. 침대 위에 올라앉아 인체 간의 비례에 관한 책을 읽었다. 글을 읽다보면 완벽한 인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아름다운 인체는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창작이겠지만. 인체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은 거의 상상의 산물일지도 몰랐다. 기정은 책에서 눈을 떼고 건너편의 아파트 베란다를 보았다. 불이 꺼진 데가 많았다. 10층인가 9층쯤에 베란다에 재두루미 한 마리가 서 있는 실루엣이 떠 있었다. 그 앞에서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두루미가 아니라 나무로 된 목이 긴 편지함이나 화분대 같은 것인데 마치 남자와 재두루미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정은 베란다로 나가 한쪽만 걷어놓은 블라인드를 내렸다. 베개 위에 몸을 눕혔다. 삶이 미지에 쌓여 있고,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설렘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감정이 싹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쓸쓸하게 자각했다. 이제는 불리한 일에 덧칠하는 기교만 늘어났다는 것도. 기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은 캄캄했다. 잠속까지는 고통이나 불안이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

    일요일인데도 거리는 소란스럽고 자동차도 많았다. 완이가 읽을 책을 사가지고 대형서점을 나왔다.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복잡한 거리를 겨우 빠져나왔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기정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늘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쓸쓸함이 지나가고 나면 그는 묘지에 누워 있잖아,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기정은 공휴일과 명절날에는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아파트에서 혼자 지냈다.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섞이거나 사람들이 사는 것을 지켜보게 되면 더욱 더 외로웠다. 혼자일 때는 외로운 줄을 몰랐다.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없이 오직 자신만 존재하면 외로움조차 둔중해졌다. 대로변으로 나왔는데도 또다시 신호등에 걸렸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먹구름이 끼어 있던 하늘에서 눈발이 떨어졌다. 기정은 눈을 맞으며 걸었다. 아직 눈밭이 생기기도 전에 팀장의 아파트에 당도했다. 찻길에 면해 있는 한 동뿐인 아파트였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팀장의 얼굴에 기쁨이 퍼지는 것을 기정은 놓치지 않았다. 기정은 거실로 들어가면서 완이를 찾았다. 완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느냐고 눈으로 묻자 팀장은 뾰족한 턱으로 베란다 쪽을 가리켰다. 베란다 문을 열자 비릿하면서도 텁텁한 냄새가 났다. 완이는 철망으로 만든 토끼장에 긴 풀대를 넣고는 토끼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토끼는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흰 털실 같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듯 두 눈 주위는 까맸다. 한쪽 귀도 까맸다. 한쪽 귀는 흰색 그대로였다. 꼭 한쪽 도색을 까먹은 듯했다. 축축하게 젖은 까만 코가 움찔움찔 움직이자 완이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토끼의 코가 움찔움찔 하는 이유가 뭘까요?”

    아, 그건 동화인데. 기정은 그 동화를 읽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 걸. 어디서 난 거니?”

    “학원 끝나면 나는요, 학교에 가거든요. 우리 학교는 유치원하고 붙어 있는데요. 거기 야외실습장에, 염소도 있어요. 토끼는 두 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죽었어요. 내가 매일 가서 보니까 실습장 아저씨가 가져다 키우려면 키워보라고 했어요. 우리 선생님이 나주라고 했대요.”

    “그런데 집 꼴이 너무 말이 아니다. 난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팀장은 집이 깨끗하게 정돈되지 않은 게 기정에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내 친구는 미국너구리도 집에서 키워요. 집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탈이지만요. 우리 끼염이도 미국너구리 저리가라 하는 야성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풀어놓지 않고 토끼장 안에 가둬놓고 키우는 거예요. 조금 더 길을 들이면 이 베란다에서만은 풀어놓고 키울 거예요. 근데 아줌마는 누구예요?”

    그제야 완이는 까만 청설모 눈 같은 눈으로 기정을 올려다보았다. 늦게나마 관심을 가져주니까 기뻤다.

    “아빠와 함께 일하는 사람.”

    “아, 알았어요. 사람만 한 인형을 만드는 사람.”

    “그래, 맞아.”

    완이가 나오려고 발광을 하는 토끼를 꺼내놓았다. 토끼는 베란다를 헤젓고 다녔다. 몇 개 되지 않는 화분의 잎사귀를 뜯어먹었다. 거실로 와 코를 움찔거리며 소파를 뜯어먹었다. 가죽소파인 게 다행이었다. 기정은 실내를 둘러보았다. 25평의 실내에는 커피 잔향이나 음식냄새가 감돌고, 벽에는 그림 액자가 군데군데 걸려 있었다. 비디오, 텔레비전, 전축, 소파 등 필요한 가재도구들도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기정에게는 한데 같은 느낌뿐이었다. 기정은 소파 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들고 완이에게로 갔다. 완이는 토끼를 잡아다 토끼장에 가두고 있었다.

    “아줌마가 책 사왔는데, 읽어봐. 해리포터 시리즈야.”

    “어, 난 책 읽는 거 안 좋아하는데요. 전에 아빠가 사다준 만화로 보는 한국사 열권도 하나도 안 보고 그대로 있는 걸요.”

    직립한 토끼가 발톱으로 철망을 긁어대자 완이가 철망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토끼를 잡고 앉혔다.

    “야, 허리 디스크 걸려.”

    기정은 책을 들고 들어와 도로 나무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저 녀석은 책 읽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 그래도 내가 꼭 읽힐게.”

    팀장은 주방에서 꽃게 다리를 자르고 있었다. 기정이 뭐 할 거냐고 묻자 꽃게탕을 할 거라고 했다. 기정은 냉장고문을 열었다. 냉장실에는 생수병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냉동실에는 핫도그와 햇반과 피자와 진빵이 아무렇게나 쑤셔 박혀 있었다. 식탁 위에 노란 마트 봉지가 팽개쳐져 있었는데 그 속에 야채와 대파가 있었다. 팀장은 아무것도 없지, 라며 칼로 꽃게의 다리를 탁탁 내려쳤다. 별로 어색하지 않아 내버려두고 기정은 파를 다듬었다.

    팀장은 꽃게의 살을 발라 기정의 밥 위와 완이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기정은 팀장에게도 먹으라고 했다. 팀장은 숟가락으로 국물만 후딱 떠먹고 다시 가위로 살을 발랐다. 말려도 될 것 같지 않아 내버려두었다. 꽃게탕은 간이 맞고, 국물이 시원했다. 밥을 후딱 먹어치운 완이는 또다시 베란다로 나가 풀대로 토끼의 까만 코를 간질였다. 둥그렇게 웅크린 자그마한 등으로 고집과 외로움이 흘렀다.

    팀장과 기정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던 팀장이 기정에게 발이 참 작고 예쁘다고 했다. 이대로 셋이 살아도 될 텐데, 라는 생각을 하던 기정은 속으로 움찔했다. 살빛 스타킹만 신은 기정의 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팀장의 눈이 불온하게 반짝였다. 기정은 발을 움츠렸다. 섹스 때면 발부터 만지고 쓰다듬고 발가락을 빨던 그가 떠올랐다. 기정은 밝은 소리로 얼른 말했다.

    “전족은 아니에요.”

    중국풍의 옷을 입은 여자가 두 발을 앞으로 내밀고 앉아 있는, 가운데에서 댕강 잘린 발이 서로 반대로 붙어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전족의 아픔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사실 전족은 시집가 남자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라고 어머니가 시킨 것이다. 전족시킨 발은 커나가지 못하고 갇혀 삼각형으로 꼬부라졌다. 기정의 발은 삼각형으로 꼬부라지지는 않았으나 꼭 갇혀 큰 것처럼 작고 약했다.

    “언제 이 발을 만져볼 수 있을까.”

    건물 밖으로 나와 십분 쯤 걷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대기업 기념관 안에 박경준을 설치해주고 나오자 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방송국에서 드라마 찍는 일을 하는 후배인데 만나잔다고 했다. 기정에게는 직행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곧 비는 보도를 흥건하게 적셨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걸음 쳐 건물 밑이나 안으로 들어가고, 서둘러 택시나 버스를 타버려 거리는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건널목을 건너려고 하는데 신호등 색깔이 바뀌지 않았다. 기정은 보도블록 위를 걸어갔다. 머리카락이 젖고, 옷이 젖고, 신발이 젖었지만 그냥 걸었다. 자동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흙탕물을 튀기며 지나갔다. 기정은 미술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건너편의 백화점 건물이나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나 사물의 윤곽이 흐릿했다. 나중에는 미술관 앞의 가로수 두 그루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가와 당분간 휴관한다고 했다. 그래도 미적거리는 기정에게 눈으로 빨리 나가라고 했다. 기정은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가기 싫었으나 가까운 버스정류소를 향해 걸어갔다.

    젖은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뜨거운 생강차를 한 잔 마셨다. 베란다에 쳐놓은 블라인드가 창에 부딪치며 여러 가닥으로 갈라졌다. 아직까지도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찻잔을 유리탁자 위에 내려놓던 기정은 오른쪽 모서리 쪽에 놓인 오르골을 보았다. 채를 들어 오르골을 딱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핑그르르 돌자 치마 속에 남자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성남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아주머니에게서 한 번 더 인터폰이 왔었다. 올라오라고 했는데 일이 밀렸다며 다음번에 가겠다고 했다. 새벽이나 늦은 밤에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로 아주머니가 계속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저녁밥이라도 얻어먹을까.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망설이던 기정은 눈 딱 감고 인터폰을 눌렀다. 귀찮아할지도 모른다는 망설임보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따뜻한 것에 파묻히고 싶은 감정이 더 컸다. 없나보다, 돌아서려는데 아주머니가 네? 하고 말했다. 기정은 올라가도 되냐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승낙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의 센서불빛을 받아 아주머니와 기정의 그림자가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 길게 뻗쳤다. 탁탁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베란다의 블라인드 그림자가 거실까지 여러 가닥으로 누워 있었다. 베란다 가까이 다가간 기정의 몸도 여러 가닥으로 쪼개졌다. 베란다의 유리문 한 짝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방충망까지 열려 있었다. 밖은 바로 검고 빈 공간이었다. 아주머니가 거실의 전기스위치를 올렸다. 아주머니의 얼굴이 반쪽이었다. 눈은 인형처럼 움푹 들어가고, 입술에는 허연 껍질이 돋아 있었다. “어디 아프세요?”
    “그냥 좀 좋지 않아. 퇴근하고 오는 길이야?”

    “서울에 갔다가 비를 쫄딱 맞았지 뭐예요. 겨울비는 지독해요. 눈 맞는 거랑 비교가 안돼요.”

    기정은 일부러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에게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한참 후에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와인이나 한 잔 하자.”

    아주머니는 와인과 치즈와 아몬드를 내왔다. 와인을 마시던 아주머니가 베란다에 가서 강을 보며 마실까, 하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열려 있는 유리문을 닫았다.

    어두운데다 비가 내리고 있는 강은 표면에 흰 도색을 한 것처럼 반질거렸다. 파랗고 노랗고 빨간 불기둥이 어른거리는 쪽은 강 속에 또 하나의 나라가 있는 것 같았다. 와인을 쭉 들이켜고 나서 아주머니가 말했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 도와줘.”
    “뭘 말이죠?”
    “내가 베란다 창을 보고 있을 때 그냥 손을 뻗어 나를 밀어버려.”
    “무슨,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부탁이야.”

    기정은 퍼뜩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지나치게 달뜨고, 지나치게 진지했다.

    “저 그만 가볼게요.”
    기정은 몸을 돌렸다.

    “이리와 봐.”
    아주머니는 기정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갔다. 불빛에 드러난 안방은 휑했다. 흰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침대가 있을 뿐이었다.

    “왜 장롱이 없어요?”
    “내가 없애버렸어. 일을 간단하게 하고 싶어서.”

    기정은 얼어버렸다. 아주머니는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여러 개의 종이상자 중 맨 위의 것을 내려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기정에게 건넸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선혜림. 그것은 유서였다. 그런 종이를 몇 장 더 꺼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유서는 다섯 장이 넘었다. 아주머니는 약을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늘 치사량이 넘지 않았지. 약을 먹고, 깨어나고 하는 것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어.”

    기정은 아주머니가 무섭지는 않았다. 자신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많았다. 숲으로 가기 전까지는. 그를 묘지에 묻기 전까지는.

    “도와 줘. 다른 모든 것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놓을게. 아가씨에게는 전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거야. 다 계획이 짜여 있어.”
    기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아 겁났다. 재산까지 한몫 떼어주겠다는 소리라도 할까봐 겁났다.

    “저, 그만 가볼게요. 그리고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하시는 게 아니에요.”
    “아무한테나 하는 거 아니야.”

    텅 빈 사람모형 속 같은 눈으로 아주머니는 기정을 바라보았다. 이분은 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일까. 기정은 비밀이 들킨 것만 같았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더 이상은 혼자 이렇게 살 수가 없어.”

    아주머니는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기정은 안방에서 뛰쳐나왔다. 아주머니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비상계단으로 내려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유리탁자 위에 놓인 오르골을 딱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빙그르르 춤을 추자 여성남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이중창, 이중주?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나를 지목한 것일까. 아주머니가 기정에게 말을 건 것은 정확하지는 않아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였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빨간 불이 들어온 15 밑에 14를 누르자 아주머니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뻑뻑한 목소리로 14층에 사냐며 물었고, 두어 번 마주친 뒤부터는 다정하게 반말로 차를 함께 마시자거나 장바구니에 든 사과나 바나나를 혼자 먹기에는 많다며 반을 떼 주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알아보았던 것일까. 기정의 비밀과 기정의 외로움과 기정의 고독까지도. 기정은 베란다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걷고 강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냥 블라인드 앞에 서 있었다. 벌어진 블라인드 가닥이 몸을 사선으로 쪼갰다. 블라인드 그림자는 기정의 몸에서 갖가지 무늬를 만들며 놀았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누웠다. 손을 뻗어 협탁의 맨 위 서랍을 열었다. 콩주머니와 검은 안대를 꺼냈다. 안대를 쓰고, 콩주머니를 이마 위에 올려놓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한 말만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 손을 뻗어 나를 그냥 밀어버려.

    제작실로 들어서자마자 기정은 석분점토라돌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지오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볼 셈이었다. 망치로 때려 점토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때릴수록 점토는 고분고분해졌다. 밀대로 밀어 납작해진 점토를 직사각형의 나무틀 안에다 넣었다. 나무틀을 기준으로 얇게 밀어준 다음 물 묻힌 솔로 대각선을 그었다. 점토로 몸통 심재를 꼼꼼하게 감싸 맞물렸다. 헤라로 편편하게 골랐다. 헤라만 잘 써도 사포질이 쉬웠다. 너덜너덜하게 남은 부분은 가위로 잘랐다. 마를 동안 밀대로 점토를 다시 밀었다. 머리, 팔, 다리를 점토로 감쌌다. 마른 몸통에 칼집을 냈다. 나중에 몸통을 틀어지지 않게 잘 빼내어야 했다. 머리는 목이 통과되는 구멍으로 심재를 파낼 것이어서 따로 칼집을 넣지 않았다. 팀장의 작품인 로봇형의 레진피겨에 계속 사포질을 하던 미스 오가 점심시간에 어디 가지 말고 함께 공원에 가자고 했다. 손과 발을 점토로 감싸고, 목과 어깨 등속에 들어갈 13개의 동글동글한 관절구를 만들고 나니까 점심시간이었다.

    미스 오는 지갑을 챙겨들고 빨리 나가자고 했다. 제작소 옆 골목의 베트남 쌀국수집에서 쌀국수를 먹고,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두 잔을 사서 가까운 꽁지공원으로 갔다. 추웠으나 모처럼 햇빛이 투명하고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공원 한쪽에서는 초육(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애 셋이서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김연아 열풍으로 요즈음 웬만한 여자애들은 다 스케이트를 탄다고 했는데 여자애 셋도 얼음 위를 얼음새처럼 날아다녔다. 농구대 앞에서는 한 청년이 계속 농구공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농구공은 말 안 듣는 아이처럼 농구주머니를 자꾸만 벗어났다. 커피를 두어 모금 연달아 빨던 미스 오가 말했다.

    “어젯밤 그 놈하고 함께 있었어.”

    “작업실에?”
    미스 오의 애인은 조각가였다. 작품은 거의 다 젖통과 허벅지와 엉덩이가 큰 여자들이었다.

    “새벽에 날 막 흔들어 깨우는 거야. 난 불이라도 난 줄 알았어. 그런데,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자기가 일을 해야 하니까. 빨리 나가달라는 거야.”

    기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커피만 먹었다.

    “넌 우리가 섹스도 하는 사이라고 생각하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남녀가 한 작업실에서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그 놈은 여관도 아니고, 공원도 아니고, 제 작업실에서 상체만 애무해. 상체도 다 벗기지 않아. 꼭 반만 벗겨.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성도 자기가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는 거야? 그 놈은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온갖 짓을 다해도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자기 마누라한테 가. 아주 철저해.”

    미스 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보기 흉했다.

    “그걸 알면서 왜 만나?”

    피로와 함께 짜증이 이는데도 기정은 아무 말이나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내 몸이 그 유희 감각을 원해. 나는 수요일에 그곳에 가는데, 화요일쯤 되면 내 몸이 벌써 그 감각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어.”

    “그럼 된 거 아냐?”

    미스 오의 양 입가에 지렁이만 한 주름이 어색하게 꿈틀거렸다.
    “미안해. 그래도 아무도 없는 거보다는 낫지 않아. 아무도 없는 것만큼 무서운 거는 없는 거 같아. 우리 위층 아주머니는 정말 주위에 아무도 없어. 너무 고독한 거야. 어제는 나보고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때 베란다에서 자기를 밀어버리래.”
    “그래? 그 정도야?”

    “사랑한다면 그냥 옆에 붙들어놓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도 그 정도라도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다면 된 거 아니야, 기정은 팀장을 떠올렸다. 팀장을 향한 마음의 무게는 미스 오만큼은 아닌 것도 같고, 아니 미스 오보다 훨씬 무게가 더 나가는 것도 같았다. 기정은 헷갈리는 마음을,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는 저울의 눈금을 살펴보지 않기로 했다. 영혼이나 정신의 무게는 몇 g이나 나갈지 그걸 궁금해 하기로 했다.

    제작실로 들어서자마자 기정은 꾸덕꾸덕 마른 머리를 들고 와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4B연필을 들고 머리의 앞면을 삼등분으로 갈랐다. 이마와 눈과 코와 입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제 지오의 이미지도 다 완성되었다. 지오는 코가 오뚝하고, 이마가 넓으며, 입술이 얇고, 하관이 빤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 청년이다. 머리모양은 짧은 스포츠형이고, 색깔은 짙은 검정색이다. 지오가 태어난 배경과 성장과정까지 기획한다면 더욱더 좋은 인형이 될 것이다. 지오의 이미지대로 점토로 살을 붙여나갔다. 코와 입술 부분에는 점토를 두툼하게 붙인 뒤 조각칼로 파내어 모양을 만들었다. 머리 위를 네모로 잘라 두 쪽으로 분리했다. 안쪽 눈 부분에 물을 칠하고 동글한 연마석으로 살살 파냈다. 그 구멍에 홍채를 띤 안구를 박아 넣었다. 지오에게도 생일이 있고, 직업이 있어야 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을 하고, 여자 친구도 사귀고, 기억도 있고, 추억도 있고, 내적독백을 기록한 일기도 있어야 했다. 집도 있어야 했다. 지오에게도 역할을 주어야 했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인터폰 소리에 기정은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열 시였다. 잠을 못자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기정은 약간 짜증을 내며 인터폰을 받았다. 토요일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집에 누워만 있었다. 오른팔과 어깨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목뼈가 틀어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현미경으로 피를 검사했더니 피가 혼자서 돌아다니지 않고 한 덩어리씩 뭉쳐서 돌아다녔다. 꾸준히 약을 먹어야하고, 어깨와 팔과 목을 많이 쓰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토요일에는 원래 출근을 하지 않지만 제작실에 나가 지오를 더 만들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꼼짝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팔과 어깨는 밤이 되면 더 아팠다. 자다가도 몇 번씩 깨어났다. 인터폰을 한 사람은 위층 아주머니였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올라와.”

    “이제 막 깨어났어요.”
    저번의 그 일이 생각나 기정은 가지 않으려고 했다.

    “와서 케이크에 불 좀 켜줘. 오늘이 내 생일이야.”

    기정은 1503호로 갔다. 소파 앞의 탁자 위에 생크림 케이크만 놓여 있었다. 미역국도 끓이지 않고, 생선도 굽지 않고, 달랑 케이크뿐이었다. 케이크의 흰 프로스팅이 눈 같았다. 커피를 끓이던 아주머니가 기정에게 케이크에 불을 붙여달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커피 두 잔을 끓여내 오고, 접시와 포크를 내오자 기정은 큰 초 여섯 개와 작은 초 여섯 개를 꽂아 불을 붙였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이라도 사 오는 건데요.”

    아주머니는 웃으며 입술을 새부리처럼 오므려 불을 휙 껐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미국의 아들한테서는 연락이 없냐고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케이크를 잘라 기정 앞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눈을 내리깐 옆얼굴은 새침하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접근 불가능한 바리게이트를 쳐놓은 것 같은 단절감이 흘렀다. 수줍음 많고 고집불통이고 자기 내면에 빠져버린 늙은 소녀. 커피까지 마시고 나자 아주머니는 또 베란다로 나갔다. 기정은 겁이 났다. 아주머니는 모처럼 날씨가 따뜻하고 물빛도 새파랗다며 와 보라고 했다. 기정은 주춤주춤 베란다로 나갔다. 눈도 비도 내리지 않고, 햇빛이 천지사방에 골고루 내리쬐었다.

    “물빛이 너무 좋다. 난 매일 배를 타고 바다나 강을 항해중인 것 같아.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흰 햇빛과 흰 물빛뿐인 것 같아. 내게 주어진 것은 자유뿐이야.”

    기정은 수긍했다. 기정도 너무 큰, 너무 방만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기정이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강에도, 공원에도 햇빛으로 넘쳐났다. 강에도, 공원에도 사람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넓은 강과 넓은 공터뿐이었다.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으나 따로 있는 것 같이 서로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넓은 강과 넓은 공터를 오랫동안 보고 있자 갑자기 무한대로 커지는 것 같았다. 햇빛이 강과 공터의 윤곽을 없애버렸는지 전혀 공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정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해봐, 해봐, 못할 것도 없지 않아. 너 역시 이대로 나가면 저 아주머니처럼 될 거야. 네게 누가 있어. 아무도 없잖아. 너의 이십년 후의 모습이 바로 아주머니야. 너도 누군가에게 부탁할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할 때 죽여 달라고. 혼자서는 죽지도 못한다고. 그냥 이십년 후의 너를 미리 없애버린다고 생각하고 밀어버려. 한순간이야, 한순간. 찰나만 지나면 아주머니는 곧 편안해질 거야. 그러면 고독에 떨 필요도 없는 거야. 고독에 떨고 있는 것만큼 추해보이는 것도 없잖아. 아주머니, 추하잖아. 그리고 말이야,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혼자인 거야. 혼자인 것에서 벗어나게 해줘. 밀어, 밀어버리라니까.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벽이 없는 내 운명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아.”

    그래, 벽이 없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어. 벽이 없으면 어디가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거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알 수 있는 건 너무 넓다는 그것 하나뿐이야. 아주 무서운 일이지. 기정은 아주머니의 등에 두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손을 덜덜 떨면서 아주머니의 등을 와락 밀었다.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니. 기정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원룸에 혼자 살 때 치와와를 키운 적이 있었다. 그때도 햇빛이 녹색의 침대보를 풀밭처럼 만들었는데 그 풀밭 위로 느릿느릿 걸어오는 치와와의 몸짓이 너무도 권태로워보였다.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는 치와와의 목을 졸라 권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치와와 목으로 손을 뻗다가 진저리치며 손을 감추었다. 그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기정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반쯤 접혀진 아주머니는 베란다 난간 밖으로 꼬꾸라져 숨을 헉헉 내쉬었다. 기정은 놀라 일어섰다. 얼른 아주머니를 떼 내고, 유리문을 닫고, 고리를 잠갔다. 블라인드도 줄을 세게 당겨 내렸다. 넓은 강도, 넓은 공터도, 무한대로 커나가게 하던 햇빛도 모두 없어졌다. 얼이 빠져 있는 아주머니를 부축해와 소파에 앉히면서 기정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뇌와 몸뚱이와는 별개의 물건 같았다. 기정은 말했다.

    “저 그만 내려갈게요. 이제 다, 다시는 절 찾지 마세요.”
    “아니야, 나 혼자 못 있어.”

    아주머니가 손을 뻗어 기정의 팔을 꽉 잡았다. 정지스위치라도 먹은 것처럼 기정은 아주머니에게 잡힌 팔만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지금 서로 자신의 괴물 같은 자유를 마주 보고 있는 걸까. 이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서로 언제쯤 알게 될까. 기정은 아주머니의 손을 떼어놓았다.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시라고요.”

    기정은 달음박질쳐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현관문을 잠갔다. 문 앞에 주저앉았다. 빨래처럼 휙 날아가 버릴 거 같던 아주머니.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주머니는 분명히 자살하고 말테지. 왜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거지. 두렵고 무섭기는 해도. 기정은 덜덜 떨며 소파로 와서 누웠다. 눈을 감았다. 아주머니의 등이 시커멓게 떠올랐다. 등을 밀던 자신이 만든 인형의 손 같던 두 손도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가 걸쇠를 걸고, 보조 문고리도 잠갔다. 오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밖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귀가 커졌다. 아주머니가 두 손으로 철제현관문을 마구 칠 것만 같았다. 죽여 달라가 아니라 살려달라고. 소파에 앉아 있던 기정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밀어버려, 가 아니라 붙들어줘, 라는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동굴 속에서 앉은 그대로 미라가 된 여자가 떠올랐다. 미라가 나뭇가지를 이어붙인 것 같은 손으로 기정의 발목을 덥석 움켜쥐며 날 내버려두지 마, 라고 소리치는 순간 기정은 퍼뜩 얼굴을 쳐들었다. 오후가 되자 팀장한테 전화를 하고 말았다.

    술을 마시기에도 밥을 먹기에도 어중간한 시각이라 그런지 레스토랑은 휑하고 약간 을씨년스러웠다. 팀장은 둥근 바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기정은 팀장에게 다가가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팀장이 순순히 기정의 뒤를 따랐다.

    “완이랑 토끼는 잘 있어요?”

    “토끼가 요즈음 먹이를 잘 먹지 않지만 잘 있는 편이야.”

    팀장은 함박 스테이크와 와인을 시켰다. 함박 스테이크는 손도 대지 않고 와인만 마시는 기정에게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기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팀장은 열심히 썬 스테이크 접시를 기정의 것과 바꾸며 먹어두라고 했다. 기정은 또다시 와인을 잔에 또르르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정은 또다시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팀장이 와인병을 빼앗았다.

    “난 입도 안 댔는데 비싼 와인을 혼자 다 마실 거야.”
    “제가 이 손으로 오늘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요?”

    팀장이 미간에 쇠갈고리 주름을 잡고, 콧등에 아코디언 주름을 잡으며 기정의 얼굴을 살피고, 기정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위층 아주머니를 베란다에서 밀어버리려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늘 자살만 생각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내게 부탁했거든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때 그냥 밀어달라고.”

    “그런다고 그런 부탁을 들어줘?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아주머니가 이십년 후의 내 모습 같았어요.”

    “…”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었어요. 추했어요.”

    팀장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 나서 낮게 말했다.

    “그건 네가 너무 심각하고 생각이 많고, 또 고독해서야.”

    팀장이 손을 뻗어 기정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팀장의 앞섶에 얼굴에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기정은 얼른 말했다.

    “난 고독하지 않아요. 너무 자유로울 뿐이에요.”

    기정은 채색을 끝내고 줄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머리, 몸통, 팔, 다리, 손, 발 앞으로 가 무광코팅제를 분사했다. 거리 조절을 잘 해야 했다. 마를 동안 텐션 줄을 챙겼다. 마르자 관절구를 붙여 S자 고리를 단 발목과 다리 부분을 텐션 줄로 연결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 머리와 목을 연결했다. 관절이 반씩 떨어져 있는 게 기정은 늘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텐션 줄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포즈를 취할 수도 있는 것을 최고로 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점심시간에는 미스 오와 함께 샌드위치를 사들고 꽁지공원으로 갔다. 공원 한쪽에서는 노란색 패러글라이더가 글라이딩 중이었다. 얼음이 녹고 있기 때문인지 얼음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우적우적 씹으며 카푸치노가 담긴 컵에 꽂힌 빨대를 쭉쭉 빨고 난 뒤 미스 오가 말했다.

    “나 이제 그 놈 안 만나.”
    기정도 팀장처럼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아 보이며 눈으로 왜냐고 물었다.

    “집에 갔는데 갑자기 작업실에 가고 싶은 거야. 전화 안 하고 가면 질색을 하는데, 그냥 갔어. 왜 그러고 싶을 때가 있잖아. 두어 번 노크를 했는데 반응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어. 그런데, 큰 브론즈 뒤에서 그 새끼랑 어떤 년이 엉켜 있는 거야. 그 년이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밀랍인형이 엉켜 있는 줄 알았을 거야.”

    “엉켜 있어? 수직으로? 수평으로?”
    기정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우적우적 씹었다. 모르는 일도 아니었잖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성도 자기가 딱 필요한 만큼만 쓰는 놈이잖아.”

    “정 떨어지는 놈이야.”

    “그래, 정 떨어지는 놈이지. 내가 철제문을 발로 차 닫고 나오니까 그제야 그 새끼가 막 달려내려 오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어, 오늘 밤 나랑 섹스할 수 있냐고.”

    흥분했는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미스 오의 얼굴은 잘 익은 검붉은 포도송이 같았다. 손으로 따서 짓이겨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기정은 얼른 말했다.

    “뭐래?”

    미스 오는 입안에 있던 샌드위치를 바닥에 뱉어냈다.

    “산더미만 한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않게 얼굴까지 붉히면서 그게, 뭐, 그게, 이러는데. 그때 년이 내려온 거야. 년이 뭐냐고 따지듯이 묻더라. 그러니까 순식간에 코끼리 낯바닥으로 변하면서 오필녀 씨, 저번의 그 작품 참 좋았어요, 다음에도 작품 가져와 보세요, 이러는 거 있지.”

    미스 오는 턱을 치켜들고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잇몸과 이를 드러내고 백지처럼 웃었다. 정말 오필리아 같았다. 오필리아로 불러주지 않아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끝났어.”

    미스 오는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애벌레처럼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면서 동그랗게 말려 허공으로 이동 중이던 패러글라이더가 확 퍼지면서 버터플라이로 변했다. 기정은 일어섰다.

    “다른 상대를 찾으려면 귀찮은데. 그래도 하나는 있어야 돼. 그지?”

    미스 오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기정은 그냥 걸었다. 뒤따라오던 미스 오는 가까운 곳에서 랩 음악이 들려오자 엉덩이를 이쪽저쪽 씰룩이며 춤을 추었다. 레깅스 입은 다리로 이단 옆차기도 했다. 노란 국화덤불이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미스 오를 신기하다는 듯 지켜보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패러글라이더는 공원을 벗어나 있었다.

    작업실에서 스컬퍼로 로봇의 원형을 만들어가고 있던 팀장이 어디 갔다 오냐고 물었다. 그의 이번 작품은 호랑거미와 타란튤라 이미지인 로봇이었다. 봄에 작품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기정은 미스 오와 꽁지공원에 다녀왔다고 답하고 지오 앞으로 갔다. 지오의 머리카락을 붙여나갔다. 미스 오는 한 칸씩을 남겨놓고 노란색 도료를 칠해놓은 레진피겨의 몸통에 검정색 도료로 채색을 했다. 호랑거미 로봇이었다. 지오의 얼굴을 분장했다. 볼은 매끈하고, 입술은 약간 분홍기가 돌았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황변차단제를 발랐다. 무광코팅제만 뿌려놓으면 변색하기 쉬웠다. 기정은 집으로 가 거실로 들어서면 천장부터 올려다보며 위층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불안했다. 올라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새벽과 저녁에 두어 차례 안방 쪽의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기는 했다. 세상에서 혼자인 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있을까. 혼자가 싫어 밖으로 나와 싸돌아다녔으나 집에 오면 또 혼자라는 걸, 밖에서도 역시 혼자였다는 걸 깨닫는 것만큼 숨을 틀어쥐는 것이 있을까. 아주머니는 혼자 있으면 안 되었다. 아주머니가 원하는 것은 혼자 있지 않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기정의 손길이 빨라졌다.

    미스 오와 팀장은 퇴근했으나 기정은 남아서 지오에게 옷을 입혔다. 지오는 스트라이프 양복에, 스카이블루 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맸다. 오른쪽 팔꿈치에는 베이지색 바바리를 걸쳤다. 코가 오리주둥이처럼 생긴 더클링 슈즈도 신었다. 드디어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인 지오가 태어났다. 기정은 잘 생긴 젊은 남자를 마주했을 때처럼, 아니 그를 미술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지오를 안고 사무실로 나오던 기정은 놀랐다. 불도 켜지 않은 채 팀장이 자신의 자리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 나를 기다렸던 것일까.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기정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응, 다 완성한 거야? 집으로 옮기려고?”
    “아니에요, 우리 위층 아주머니에게 드리려고요.”
    “….”
    “그래야, 저번의 일이 사죄될 것 같아요. 아주머니도 지오를 굉장히 좋아할 것 같아요. 진짜 아들처럼 받아들일 것 같아요.”

    “그래, 내가 태워다 줄까?”
    “아니, 택시 타면 돼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미스 오와 함께 삼십대 여자 밀랍인형을 직접 가져다 준 적이 있었다. 큰 느티나무가 있는 골목의 맨 끝인 지하작업실로 가져오라고 했다. 느티나무는 그러나 양 갈래로 갈라지는 중간지점인 큰길에 딱 서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양쪽 골목을 헤매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저게 뭐지, 저게 뭐지, 라며 하고, 어머, 인형인가 봐, 진짜 사람 같다, 라며 호들갑을 떨어 곤란하고 성가셨다.

    “그럼, 집까지 태워주실래요?”

    약간 실망에 젖어 있고, 약간 의기소침해보이던 팀장이 입 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그 얼굴을 만지면 손이 따뜻해질 것 같았다.

    지오 때문에 뒷좌석에 앉은 기정은 닭이 왜 울지 않느냐고 물었다. 팀장이 손을 뻗어 스위치를 올리자 닭이 목청껏 꼬끼오, 울었다. 요즈음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운다며 팀장과 기정은 웃었다. 팀장은 엘리베이터 안까지 지오를 들여다 주고 돌아섰다. 함께 올라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했으나 팀장은 완이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해.”
    팀장은 손을 흔들었다. 팀장은 기정의 마음을 다 읽고 있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도망치고 말 거라는 걸. 그렇지만 10Cm쯤 거리를 두고서는 언제든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팀장은 10Cm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기정은 곧바로 15층에서 내려 초인종을 눌렀다. 지오를 본 아주머니는 놀라 이게 뭐냐고 거푸 물었다. 기정은 곧장 지오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이게 인형이야, 하고 물었다.

    “네, 거의 자동인형이랄 수 있어요. 이름은 지오이고, 스물다섯 살이에요. 대학을 졸업했고, 출생지는 여기 K시예요. 제 작품이에요.”

    기정은 아주머니에게 지오가 태어난 배경을 들려주었다. 인형을 제작해 가는 사람들 이야기도 했다. 아이를 입양하는 것보다 낫다면서 목욕, 성형까지 가능한 예쁜 여자 아이를 제작해가기도 하고. 앞으로는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이나 잡는 애인과는 헤어지고 밀랍인형이나 자동인형을 사귀는 사람들도 늘어날 거라고.

    “이제 아들로 삼으세요.”
    아주머니는 신기한 듯이 지오를 짯짯이 훑어보았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차줄까?”

    “말차 먹고 싶어요.”

    말차하고 화과자를 내오던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런 인형 굉장히 비싸다고 하던데, 얼마야?”

    “주문 제작 받은 거도 아니고, 팔려고 만든 것도 아니에요. 제 작품이에요. 그냥 받아주세요.”

    아주머니는 미안해하는 기정을 알아보고 있었다. 입술에 묻은 녹색거품을 혀로 핥으며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오가 태어난 배경이라든가. 지오의 내면을 기록한 일기장 같은 것도 있으면 아주 좋을 거예요.”
    “내면을 기록한 일기장? 그거, 나보고 쓰라는 거야?”

    “네, 스물다섯 살이면 대학을 졸업했고, 회사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요즈음은 취직이 어려우니까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고요.”

    “딱 보니까, 얘도 외향적은 아니야, 자기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은 앤데, 뭐.”
    “그게 느껴져요? 난 참 발랄하고 쾌활하고 걱정거리 없는 청년으로 만들었는데. 여자 친구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는 청년인데.”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누구나 자기 몫의 걱정으로 살아가는 거지.”
    자기 몫의 걱정? 기정은 아주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혼자라는 건 똑바른 사고까지 삼켜버리고 맥을 못 추게 하는 걸까. 기정의 무구한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아주머니는 일어나 지오가 팔에 걸치고 있는 바바리를 만졌다.

    “이 바바리는 왜?”
    “사람처럼 보이려는 일종의 트릭이죠.”

    아주머니와 기정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있어 오늘 밤 잠이 올까 몰라.”

    “그래도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럴까?”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이 안 오면, 지오의 내면기록을 써보세요.”

    “내면기록? 그래, 알았어, 내가 한 번 써보지.”
    기정은 아주머니와 지오에게 차례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오늘 저녁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박경준 밀랍인형 뒤로는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일감이 없으면 팀장보다 기정이 초조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작품을 만들 분위기도 아니라 재료정리에 들어갔다. 지오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작품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스 오는 사무실에서도 랩 음악을 틀어놓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춤을 추었다. 노란 국화덤불이 움직이는 것 같아 어쨌든 분위기는 환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애인 작업실에 다시 간다고 했다. 그날 본 것은 싹 까먹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외로움이라는 물건이 1g이라도 더 얹힌 쪽이 관계에서 지는 거니까 미스 오의 시소가 땅 쪽으로 기울었는지도 몰랐다. 아주머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기정은 집에 가면 인터폰이 울리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지오가 있으니까, 하고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집에 가면 자신의 자유가 더 방만해진 것을 느꼈다. 정말 벽이 느껴지지 않아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그 동안 아주머니와 꽤 가까워졌고, 미지근하기는 해도 아주머니에게서 온기를 느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퇴근을 하고서 소파에 올라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아주머니였다. 저녁을 먹고 올라가겠다고 하니까 곧장 올라오라고 했다. 기정은 1503호로 갔다. 지오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 청년은 섬뜩하도록 낯선 표정과 만질만질한 눈으로 기정을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체리가 얹힌 흰 케이크와 수첩보다는 크고 대학노트보다는 작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기정은 손가락으로 케이크에 꽂힌 초를 셌다. 스물다섯 살에 해당하는 초가 꽂혀 있었다.

    “오늘이 지오 생일이에요? 미리 말씀하셨으면 지오 옷이라도 지어오는 건데요.”

    기정은 지나치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탁자 위에 와인과 오징어포와 아몬드를 놓고 나서 초에 불을 붙였다. 기정은 지오를 탁자 앞에 앉혔다. 지오와 아주머니가 함께 촛불을 껐다. 세 조각으로 자른 케이크를 접시에 떠 주었다. 기정이 케이크를 먹고 나자 아주머니가 노트를 내밀었다.

    “지오의 내면기록이야. 읽어볼래?”

    기정은 얼른 노트를 받았다. 황급히 펼쳐 읽었다.

    이상훈: 25세. A대학 전자공학과 졸업. 전자회사 입사. 혈액형, A형. 성격, 무척 내성적. 아버지: 딱풀공장과 필름공장을 말아먹고 또다시 제본기공장을 차림. 자기 사업 외에는 이 세상에 직업이 없다고 생각함. 아내가 유방암수술을 했는데도 일본의 주부들은 밤에 파트타임으로 일할 정도로 독립적이고 부지런하다면서 계속 일하게 함. 엄마: 손님이 싫어할까봐 모자 대신 단발머리 가발을 쓰고 재래시장에서 ‘훈이네 건어물’ 가게를 운영. 입 대신 눈으로 말하는 편.

    기정은 아주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아주머니가 배시시 웃었다.

    “그냥 잠 안 올 때 끼적거려 본 거야.”

    “완전 창작인데요.”

    세 바닥을 후딱 다 읽고 난 기정은 물었다.

    “아주머니 전공이 뭐예요?”

    “영문학.”

    기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지금 지오의 직업은 뭐예요?”

    “물론 하루 종일 자기 방에서 내면기록을 하고, 공부를 하지. 신발 밑창에 앵무조개 나선형 무늬를 넣어 곧 특허를 받을 거야.”

    “아주머니는 일체 방해하지 않고요.”

    “아니, 애인은 없어야 되고, 날 혼자 내버려두면 안돼.”

    “여자 친구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요.”

    “없어도 돼.”

    “있어야 될 거요.”

    기정이 조금 끼어들어 윤색하고, 아주머니와 둘이 타협하기도 해서 창작해 낸 내면기록을 정리하면 이랬다.

    전자회사에 들어간 상훈은 두 달쯤 지나자 자신은 조직적이거나 얽매인 생활을 못 견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퇴근하는 버스 속에서는 늘 해가 지고 있는 서쪽으로 가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가방에 늘 넣고 다니던 사표를 발작적으로 과장에게 내밀고 회사를 뛰쳐나온 것은 일 년 육 개월 뒤였다. 그동안 아버지와 자신과 싸워가면서 회사생활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상훈을 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히키코모리로 몰아붙이며 매일 야구방망이로 방문을 쾅쾅 내리쳤다. 상훈은 정말 잘 하는 것,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상훈은 내면을 기록해나갔다.

    1, 방안에서, 마당에서 나선형 무늬를 찾는 놀이에 집중했다. 기하학적 무늬 속에서 나선형 무늬를 찾은 일은 쉬웠다. 찾자고 마음먹으면 나선형 무늬는 널려 있었다.

    2, 소금호수에 만든 나선형 방파제를 보았다. 그걸 거꾸로 보니까 정말 달팽이 같았다. 피보나치수열(꽃과 나비만 봐도)을 생각하면 모든 게 질서 속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생활을 질서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3. 마당에 라일락꽃이 피었다. 보라색이 많은 계절에 자살 율이 높다고 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내면의 기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앵무조개의 나선형 무늬로 된 운동화 밑창이나 등산용 파카를 만들고 싶었다. 졸업 전에 아쿠아리움에서 앵무조개를 본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옆으로 더 이상 확장이 안 되니까 밑으로 빙빙 파고 들어가 껍데기 끝면에 생긴 나선형무늬에 끌려들어갔다. 그가 스케치북에 나선형 무늬를 그리고 있을 때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밥은 왜 차려놓는데! 엄마의 가발을 벗겨 바닥에 집어던지며 아버지는 소리쳤다. 엄마를 괴롭히는 것으로 아버지는 상훈에게 분풀이를 했다. 맨머리를 두 손바닥으로 감싸 안으며 돌아보는 엄마의 눈시울이 젖은 것을 상훈은 보았다. 왜 엄마를 괴롭히세요, 차라리 절 때리세요. 아버지의 눈이 뒤집혔다. 뭐라고, 제 밥벌이도 못하는 개새끼가 뭐라는 거야. 상훈은 거푸 악을 썼다. 밥벌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제가 잘 할 수 있고,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요. 감정 조절이 제때 안 되는 아버지는 식칼을 빼들었다. 이게 어디서 소리를 질러? 이제 애비도 눈에 안 보이냐? 아버지는 식칼로 상훈을 찔렀다. 안돼, 상훈아, 피해. 엄마가 식칼을 손으로 그러쥔 것이 아버지가 찌른 것보다 빨랐다. 피를 뚝뚝 흘리던 엄마가 119 구급대에 실려 가고 나자 상훈은 책상다리에 머리를 짓찧었다. 자신의 삶에 치욕을 느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묻던 아버지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내면 된다고! 그러자 모든 의식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물고기 떼처럼 죽음 쪽으로 몰려갔다.

    바다 건너편은 야산이었고, 그 아래로는 삼각형 모양의 갯바위가 뻗어 있었다. 접근을 금지한다는 위험표지가 꽂혀 있었다. 파도가 철썩거렸다. 와, 와, 어서 오라니까! 농구화를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한순간만 지나면 곧 편안해진다니까!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갯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를 보았다. 상훈은 어느새 갯바위 위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해풍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심하게 쳤다. 일어서던 남자의 바바리 자락과 양복바지 자락이 마구 펄럭였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남자가 갯바위 아래로 쭈르르 미끄러졌다. 갯바위의 날카로운 끄트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남자의 손도 달려온 파도가 꿀꺽 삼켜버렸다.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영과 개헤엄으로 고래처럼 무거워진 남자를 끌어냈다. 남자에게 인공호흡을 시키던 상훈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는 죽어 있었다. 죽으면 이렇게 초라한 물건이 되는 구나. 이런 물건은 찾아가지도, 주워가지도 않을 거야. 상훈은 죽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변하지 않은 채로는.

    상훈은 구둣발로 남자를 밀어버렸다. 남자는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가까운 대리점으로 가 남자의 물 먹은 휴대전화를 살렸다. 통화기록부터 살폈다. 어머니와의 통화가 거의 전부였다. 버튼을 눌렀다. 지오니? 거기가 어디니? 잘못 된 건 없지? 꼭 미국까지 갈 필요가 있니? 제발 돌아와라. 응? 남자의 어머니는 울먹였다. 바닷가에 있는데 좀 데리러 오면 안 되겠냐고 상훈은 차분하게 말했다. 삼십분 쯤 지나자 여자가 머플러를 펄럭이며 모래밭을 걸어왔다. 상훈은 더듬거리며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엄마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갯바위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상훈은 여자 뒤에 무르춤하게 서 있었다. 눈물을 훔친 여자는 상훈에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장례는 잘 치러줄 수 있는 사람인지 물었다. 아마, 그럴 거예요, 라고 상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자신이 벗어놓은 농구화를 힐끗 보며 말했다. 농구화로 눌러놓은 유서도 그대로였다. 여자는 담배 한 갑을 다 피웠다. 저녁이 되자 여자는 지오야, 집으로 돌아가자, 라고 했다. 상훈은 놀라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눈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지오야, 엄마가 잘못했다. 집에 가자. 여자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31평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지오의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나자 여자가 북해도의 눈을 보러가자고 했다. 눈 덮인 계곡에 들어서자 여자가 말했다. 난 아들을 입양하기 전에 이곳으로 와서 흰 눈 속에서 내가 아들을 낳았어. 그리고 오늘 난 이 자리에서 아들을 입양한 사실을 지워버렸어. 난 오늘 또 이 흰 눈 속에서 아들을 낳았어. 여자가 지오를 돌아보았다. 지오도 눈뿐인 계곡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정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팀장이었다. 아주머니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야? 완이 토끼가 죽어버렸어.”

    “그래요? 완이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말도 안하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
    “또 걱정이네요.”
    “그 녀석을 어떻게 해야 될지 정말 모르겠어.”

    “제가 지금은 갈 수가 없어요. 내일 갈게요.”

    팀장은 기정과 함께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는지 망설이다 전화를 끊었다.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기정은 덜컥 겁이 나 얼른 베란다 쪽을 보았다. 블라인드가 딱딱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 계세요?”

    눈과 함께 시작되었던 겨울이 가고 삼월이 되었다. 삼월이라고 해도 날은 풀리지 않고 가끔 눈도 내렸다. 꽃샘추위도 심했다. 일감이 들어왔다. 팀장의 후배가 의뢰한 텔레비전의 범죄 스릴러물에 사용될 전신더미 한 구였다. 피부건조 병을 앓고 있어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웬만한 집무를 해결하는 남자가 있는데 언제부턴가 집안에 자신과 꼭 닮은 남자가 나타나 괴롭힌다. 남자는 매일 한 번씩 자신과 꼭 닮은 남자를 예리한 단도로 찌르고, 스무 군데쯤 찔리자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시체를 불에 태워 없앤다. 남자배우가 K시까지 올 수 없다하여 팀장과 기정이 드라마 촬영장소까지 갔다. 촬영이 끝난 남자배우의 얼굴을 팀장이 카메라로 수십 장 찍었고, 남자배우의 형체를 실리콘으로 그대로 본떴다. 석고로 외형 틀을 만들어 작업실로 가져왔다. 외형 틀을 반으로 분리하여 그 안에 실리콘을 부었다. 틀을 비틀어 떼어내 더미를 빼냈다. 팀장이 얼굴사진과 비교해가며 세밀화 작업에 들어갔다.

    며칠째 내내 흐리기만 하던 하늘에서 기어이 눈발이 떨어졌다. 나와, 점심이나 함께 먹게. 기정은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어디 갈 데가 있다고 했다. 또 눈 보러 가느냐고 팀장은 물었고, 잘 다녀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팀장은 토요일인데도 작업 중이었다. 기정은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잔디밭 위를 말티즈가 뛰어다녔다. 눈밭에 찍힌 말티즈의 발자국이 앙증스러웠다. 눈이 오면 개들이 좋아서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개들이 발이 시려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라고 한다. 말티즈가 잔디밭 울타리 구실을 하는 피라칸사스의 빨간 열매에 코를 가져다댔다. 주인인 듯한 여자가 그거 못 먹는 거야, 라고 소리쳤다. 코를 뗀 말티즈가 갑자기 으르렁거렸다. 기정이 살펴보니 가시나무 가지로 도망쳐 올라간 고양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덩치가 커도 고양이는 개를 이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파트 정문에서 택시를 타고 간 기정은 사거리에서 내렸다. 눈은 점점 굵어지고, 눈밭은 점점 두꺼워졌다. 노란제복을 입은 자동로봇이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석유를 실은 수송차량들이 석유저장소 앞을 느리게 지나다녔다. 성당 안의 잔디밭에도 눈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본당의 지붕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예수의 어깨도 눈 더미로 도톰했다. 공무원연수원의 빈 광장에도 눈이 소도록하게 쌓여 있었다. 그곳의 화단에도 피라칸사스의 빨간 열매가 선명했다. 샛길에 들어선 기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샛길을 차근차근 덮어와 등 뒤에서 자신을 지워버릴 것 같았다. 샛길 끝으로 보이는 숲 한 자락을 보자 뜬금없이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싫고 나쁜 예감이었다. 나쁜 예감일수록 적중률은 100%에 가까웠다.

    눈은 멎었다. 숲을 오르던 기정은 숨이 차올라 소나무에 기대 잠시 숨을 골랐다. 소나무의 투박한 껍질이 잠시 등에 닿았다. 버팀목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느낌이었다. 내 버팀목은 묘지에 누운 그인가, 기정의 입술이 약간 뒤틀렸다. 몇 발짝 더 올라가자 풀밭에 베어놓은 소나무 토막들이 보였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토막들은 곧 나무꾼이 지고 내려갈 것처럼 보였다. 저 나무를 가져다 무엇인가 만들고 싶어졌다. 사람의 형상을 하나 빚고 싶었다. 자신을 지켜줄 손이 튼튼한 남자를 만들고 싶어졌다. 숨이 가지런히 골라지자 기정은 다시 걸어 올라갔다. 앞면 역할을 하던 커다란 바위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거칠고 딱딱한 느낌이었으나 그것만이 아닌 성스러운 감정이 어김없이 차올랐다. 숲 안으로 깊이 들어가자 눈 벽에 갇힌 것처럼 조용하고 편안했다. 마음을 놓아도 되었다. 그렇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늑대가 나타나 자신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눈 덮인 숲속은 깊고, 넓었다. 아주머니는 지오와 잘 지내는지 요즈음은 기정을 찾지 않았다. 지오의 내면기록을 본 그날 아주머니는 욕실에 있다고 소리쳤다.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욕실 문을 열었다. 좋은 사람과 마음 놓고 통화하라고 욕실에서 샤워를 좀 했다고 하는 아주머니의 알몸을 보고 말았다. 상아빛에 가까운 피부와 군살하나 붙지 않은 매끈한 몸매도 그렇지만 남자를 겪지 않아 아직도 선홍빛인 작은 젖꼭지에 기정은 살짝 충격을 받았다. 66살에도 원형 그대로인 젖꼭지를 가지고 있다니. 그 젖꼭지에 팥죽색을 넓게 칠해 주고 싶었다. 오르막길을 막 빠져나오자 눈밭 속으로 발이 푹 빠졌다. 돌멩이를 밟았는데 그만 비틀거렸다. 얼른 소나무 줄기를 붙들었다. 상수리나무 줄기를 타고 오르던 청설모가 몸뚱이를 움츠리며 기정과 눈을 마주쳤다. 안녕, 하고 기정은 손을 흔들었다. 청설모는 쏜살같이 위로 올라가버렸다. 나뭇가지에 있던 눈이 풀썩풀썩 떨어졌다. 다시 올라갔다. 무엇인가가 허공으로 푸르르 날아올랐다. 기정은 놀라 그곳을 보았다. 꿩이 소나무 사이의 희고 푸른 공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저번의 그 놈일까. 꿩이 앉았던 낙엽더미 속을 살펴보았다. 어른 주먹만 한 돌멩이 두 개를 꿩이 품고 있은 듯했다. 손을 대면 따뜻할 것 같았다. 저 꿩은 왜 새끼가 부화하지 않을까하는 의심도 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동물인가. 위로 올라갈수록 줄기가 두 개인 쌍소나무가 많이 보였다. 갈라진 두 줄기는 신기하게도 굵기가 똑같고 모양도 똑같았다. 한 나무에 줄기가 두 개인 것이 쌍둥이처럼 보이지 않고 암소나무 수소나무가 얼크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숲이 뒤흔들렸다. 풀 더미가 흔들리고, 눈이 확 흩어졌다. 놀라 기정은 사방을 휙휙 돌아보았다. 털이 잿빛인 멧토끼가 소나무 사이로 지그재그로 폴짝폴짝 뛰어가고 있었다. 기정은 저 멧토끼를 잡고 싶었다. 잡아다 완이에게 주고 싶었다. 귀가 엄청 밝은 멧토끼는 기정의 기척에 잠시 옆을 돌아보는 듯도 했으나 순식간에 더 잽싸게 달아나버렸다. 커다란 귀 안쪽에 잎맥처럼 져 있던 붉은 핏줄이 잠시 기정의 눈에 남았다.

    일요일 날 완이와 팀장은 죽은 토끼를 아파트 뒤의 야산에 묻어주었다. 팀장은 이참에 빨간 가방도 묻어주자고 완이를 어르고 꼬드겼으나 완이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 야산에서 한 오십대쯤 된 여자가 제법 도도록한 흙더미 앞에서 소주를 홀짝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는 십오 년을 끌어안고 산 개가 죽자 야산에 묻어주고는 비가 오거나 마음이 울적하면 개 무덤을 찾는다고 했다. 완이에게도 자주 토끼 무덤에 오라고 했다. 그 여자 당부 때문인지 완이는 두 번쯤 토끼 무덤에 가더니 산에 가면 무섭고 외롭다면서 발길을 끊었다. 그러더니 다시 빨간 가방을 들고 다녔다. 팀장이 미국너구리를 사다줄까, 하고 물으면 이제 생명이 있는 것은 싫다고 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자기를 떠나버린다고 했다. 팀장은 빨간 가방에 더 집착하는 게 너무 보기 싫다고 했다. 완이가 잠을 잘 때 가방을 잘라버리려고 가위를 들었다가도 도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지었다.

    숲을 반쯤 올라온 기정은 소나무 사이로 나무십자가를 찾았다. 흰 페인트칠을 한 나무십자가가 이정표처럼 기정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무십자가 앞에 서자 헝클어져 있던 것들이 가지런하게 모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을 뻗어 검은 대리석을 쓰다듬었다. 눈과 대리석의 차가움이 그대로 손끝에 전해졌다. 잘 있었어, 춥지는 않지. 기정은 팔을 뻗어 묘지를 힘껏 끌어안았다. 묘지는 맞춤 맞게 품에 안겼다. 이제 눈은 안 와. 진달래꽃이 피면 다시 올게. 거칠고 둔탁한 발소리에 기정은 상체를 들고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언제가 샛길에서 본 외국남자와 청년이 무슨 말인가 열심히 나누며 묘지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석공처럼 보이는 중년사내도 뒤따라왔다. 위쪽이나 옆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나무십자가가 있는 묘지로 왔다. 기정은 묘지 옆에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외국남자는 기정에게 눈으로 누구냐고 묻고는 지휘봉으로 묘지 옆의 빈 땅에 직사각형을 그리며 뭐라고 했다. 다시 힐끗 기정을 본 외국남자가 청년에게 뭐라고 했다. 통역가인 청년이 기정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네? 여긴 제 애인 묘지예요.”

    청년은 지도를 보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외국남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청년이 외국남자에게 뭐라고 하자 외국남자도 지도를 들여다보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제 애인 묘지인데요.”

    외국남자와 청년은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묘지를 잘못 아는 것 아닌가요?”

    “아니에요.”

    기정은 소리쳤다.

    “이 묘지에는 선교사인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가 잠들어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오신 선교사님의 유해도 이쪽으로 옮기고 다시 단장할 것입니다.”

    청년의 말이 끝나자 외국남자는 기정의 눈앞에 지도를 펼쳐 보이더니 동그라미를 쳐놓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석공처럼 보이는 중년사내가 찌그러진 눈두덩을 씰룩대며 기정을 불쾌하게 바라보았다. 기정은 돌아섰다.

    기정은 숲을 내려왔다. 눈 위에서 종종거리던 청설모가 동작을 멈추고 모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때론 가짜라도 필요하잖아. 기정은 안녕, 이라고 손을 흔들지 않았다. 저 청설모는 나를 혹 하나의 나무로 여기는 걸까. 청설모는 잽싸게 기정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풀 더미가 갈라지더니 꿩이 후닥닥 날아올랐다. 꿩이 앉았던 자리에는 따뜻할 것 같은 돌멩이 두 개가 놓여 있을 것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품어도 새끼는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지. 기정은 돌멩이를 새끼라고 품고 있는 꿩이나 자신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뭇가지를 하나 꺾었다. 눈이 확 쏟아졌다. 꿩을 향해 나뭇가지를 던졌다. 나뭇가지는 기정의 코앞에 떨어졌다. 일 년 전 그날도 눈이 내렸고, 온 천지는 눈으로 덮여있었다. 어머니를 보내고 혼자 남겨진 기정은 견딜 수 없어 숲으로 갔다. 눈 쌓인 숲속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기정은 아무 곳으로나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추락사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숨은 벽이 나타나 자신을 꿀꺽 삼켜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빙산을 오르는 사람은 눈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욕구와도 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나무십자가가 이정표처럼, 표식처럼 시선을 잡아끌었다. 기정은 나무십자가를 향해 다가갔다. 나무십자가 아래에는 검은 대리석 묘지가 있었는데 묘비도 없고 그 옆은 맨땅이었다. 버려진 묘지라기보다 완성이 덜 된 묘지였다. 대리석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까 돌과 황토뿐인 산이나 다 타버린 잿더미나 버려진 폐허를 볼 때처럼 두려움이 물러가고 긴장이 풀어지면서 마음이 없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즐거운 묘지라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 뒤로 숲을 올랐고, 나무십자가를 찾았고, 묘지 옆에 앉았다. 너무 조용하고 편안한 것이 두려워 대리석 묘지를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은 것은 한 달 후쯤이었다. 잘 있었어, 춥지는 않지. 그 말에 기정은 놀랐다. 그러나 그를 묘지에 묻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소파 위에서 개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가끔 신음소리를 내지르던 기정은 눈을 떴다. 거실은 껌껌했으나 밖에는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지 투명하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밤새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에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었다. 유리탁자 위에는 빈 와인병과 오르골이 놓여 있었다. 유리탁자 앞으로 기어가 채를 들어 오르골을 탁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빙그르르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여성남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일어나 커튼을 걷고 베란다로 나갔다. 블라인드를 걷자 햇살이 확 밀려들어왔다.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은 희게, 투명하게 빛났다. 흰 도색을 한 것처럼 반질거리는 곳도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 넓어보였다. 자신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앞에 있다면 또다시 두 손으로 밀어버릴지도 몰랐다. 기정은 겁이 났다. 목이 말랐다. 거실로 들어와 냉장고에서 생수 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갑자기 밖이 시끄러웠다. 기정은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무슨 일일까. 이상한 전율이 몸을 예리하게 훑고 지나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덜덜 떨고 있는 손을 낯설게 내려다보았다.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내밀고 밖을 보았다. 너무 희어서 눈이 부신 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몸을 더 깊숙이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떤 예감이 몸을 짝 쪼개듯 한 줄기로 지나갔다.

    화단에 한 여인이 스토로브잣나무 줄기를 반으로 부러뜨린 채 엎어져 있었다. 여인의 몸뚱이는 눈 덮인 화단을 짓뭉개놓았다. 몸뚱이 밑은 거칠게 파헤쳐져 있었다. 여인의 맨발 끝에 있는 피라칸사스의 붉은 열매가 지나치게 붉었다. 반쪽만 드러난 얼굴을 들여다본 기정은 풀썩 무너졌다. 누가, 누가 밀었을까. 새파랗게 질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정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왜 아가씨 아는 사람이야?”
    “혹 어머니이셔?”

    “남편하고 싸웠나? 아님 몹쓸 병이라도 걸렸었나?”

    “이 아파트에서 벌써 세 번째야.”

    “15층에 혼자 사는 사모님이야. 생전 경로당에도 오지 않고 사람들하고도 친하지 않더니. 여기 사는 노인들과는 수준차이가 나서 못 논다고 하더니.”
    “경애 엄마,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저 사모님은 아직 칠십도 안됐는데 경로당에는 왜 가?”

    “경로당은 칠십 넘어야 가야 되는 법이라도 있어.”

    경비는 무전기로 계속 무슨 말인가를 했다. 앰뷸런스 차가 달려왔다. 아주머니를 실은 앰뷸런스가 떠나고 나자 기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갔다. 닫혀 있을 거지만 손이 문을 힘껏 당겼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누군가 있을 것 같아 기정은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란다로 나갔다. 지오가 뒷목에 칼이라도 맞은 것처럼 암키와와 수키와를 뭉개고 엎어져 있었다. 소파 앞의 탁자에는 새로 쓴 유서가 놓여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선혜림. 기정은 거실바닥에 털버덕 주저앉았다. 아주머니는 지오랑 벌이는 인형놀이에 싫증을 느끼자 주저 없이 뛰어내렸다. 아주머니는 죽을 때도 이기적이었다. 기정은 베란다로 나가 지오의 텐션 줄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지오를 안고 나와 비상계단을 내려왔다. 집으로 들어오자 지오를 입구에 내려놓고 싱크대를 뒤져 소주병을 찾아냈다. 단숨에 한 병을 마시고 쓰러졌다.

    여기가 어딜까. 기정은 깜깜한 어둠 속에 내팽개쳐 있는 몸뚱어리를 낯설게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어딘지 모를 때만큼 막막하고 서럽고 두려운 것도 없었다. 둘레둘레 사방을 살폈다. 소파 위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딱따구리가 쪼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 두 손으로 머리통을 조였다. 엉금엉금 기어가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가 나오는 채널에 맞추어놓고 유리탁자로 다시 엉금엉금 기어왔다. 채를 들어 오르골을 딱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빙그르르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여성남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듣기 싫었다. 그래도 채는 마구 오르골을 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채가 오르골 여자 코 위에서 멈추었다.

    오늘 오전 열한 시 경에 명문대 출신의 상류층 할머니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십오 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기정은 벌떡 일어섰다.

    “난 아주머니와 말을 한 적도 없어.”

    기정은 지오에게로 갔다. 지오의 텐션 줄을 끌었다.

    “난 어떡해야 돼? 이제 묘지에 누워 있지 말고, 나랑 살래?”
    김영옥

    김영옥

    1965 경남 사천 출생

    경상대 농화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신라문학대상 소설 부문 수상

  • 조남현 문학평론가, 구효서 소설가

    본선 진출작 여섯 편 중 세 편을 눈여겨 보았다. 떠난 애인의 아이를 키우며 미혼모로 살아가는 ‘거미집’의 화자는, 내연의 연인과 동반자살한 아버지를 기억한다. 남편의 외도로 애정 없이 사는, 어머니의 운명을 닮은 위층 여자를 알게 된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삶은 불행과 갈등으로 미만해 있을 뿐이지만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는 성찰의 씨앗이라는 점을 환기한다. 하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소설 스스로 마련한 저 확연한 도식은 어떤가. 화자를 조명디자이너로 하여 존재 간의 관계를 거미집에 비유해 가는 멋진 환치가 끝내 무색해지고 만다.

    내심 ‘이거다!’하며 읽을 만큼 ‘커버걸’의 흡입력은 대단하다. 문장이며 진행 솜씨가 단단한 데다 매력적으로 차갑기까지 하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다만 시작 후 3분의 1까지만 그러하다. 아내의 죽음 뒤로는 모든 게 혼미하다. 아내의 미스터리한 죽음으로 결과된 화자의 현재 혹은 현실이, 현재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숲의 정적’에서는 이웃의 외로운 여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투신한다. 그녀가 얻으려 했던 건 외롭지 않은 생활, 즉 진짜 삶이다.

    구체관절인형을 만드는 내력, 눈 내리는 날 숲에 올라 무덤을 찾는 사정, 엄마에게 버림 받은 완이가 눈에 밟히는 까닭들이, 결코 쉽지 않으나 명쾌한 대답에 이르는 절묘한 서사를 이룬다. 오래 고치며 공들인 흔적이 나쁘지 않으나 당선되었으니 많이 쓰기 바란다. 기본기를 다지고 지키느라 머뭇거려 왔다면 이제 훌훌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길.
  • 김영옥

    김영옥

    1965 경남 사천 출생

    경상대 농화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신라문학대상 소설 부문 수상

    어릴 때 저는 시골 할머니 집으로 가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산과 저수지와 들판과 꽃과 나무가 있었으니까요. 성인이 되어 생이 힘들어질 때, 그 때 본 자연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거짓말처럼 제가 극단으로 치닫지 못하게 붙잡는 것도 자연이었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지만 잘 되지 않아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마지막에 꼭 떠오른 것도 자연이었습니다. 그걸 소설로 써보고 싶은 욕구를 끝내 버릴 수 없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소설을 쓰게 되었지만 문학의 길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이 길이 정말 내 길일까, 돌아설 용기가 없어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제 삶을 믿고, 제 자신을 믿고 그냥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제게 누군가 등불을 밝혀주는 것 같습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겠습니다.

    새 글을 썼다고 하면 좋아하고 최선을 다해 읽어주는 동생 숙이, 늘 제 작품을 읽어주고 문학이야기를 하는 홍영숙 씨,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준 정아 씨, 제게 행운을 가져다 준 14라는 숫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소설을 쓰겠다는 저를 유일하게 이해해주셨던 엄마가 계셔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부족한 작품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시고 저의 어깨를 두드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동아일보사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