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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모호한 대상, 혹은 욕망의 모호한 시간-<북촌방향>의 이시성(異時性)과 이소성(異所性)

by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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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선소감
  • 어느 욕망의 시공간. 그 구역으로 들어서면 시공간의 질서는 교란된다.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죽은 시간, 미궁처럼 맴도는 닫힌 공간. 욕망이 뒤엉킨 기억의 화석들이 도처에서 출몰한다. 욕망은 대상 간의 차이를 모호하게 하며, 시공간의 흐름을 흔들어 놓는다. 그 욕망의 모호한 대상, 혹은 욕망의 모호한 시간. 시공간의 궤도를 일탈해 버린 이들은 하릴없이 세계의 표면 위를 부유한다. 욕망의 반복, 반복의 욕망이라는 저 카르마 속으로.


    홍상수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 <북촌방향>은 욕망이 해체시킨 시간과 공간에 대해 사유하는 영화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일관되게 관통해 온 테마들—일상성과 표면성, 해체와 일탈, 욕망과 스노비즘 등—과 함께, 시간성과 공간성에 대한 실험과 탐색이 더해졌다. 영화 속 성준에게는 욕망의 공간인 북촌. 그곳은 낯선 과거와 오래된 미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혼재된 곳이다. 동시에 ‘근대화, 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일제히 올라탔던 이곳 동시대인들의 혼재향(混在鄕, Heterotopia)이기도 하다. 본 소고를 통하여, ‘홍상수라는 신화 혹은 관습’의 대안은 무엇인지, 시공간의 좌표가 파열된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실존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I. 구역(Zone)


    <북촌방향 The Day He Arrives>이라는 타이틀은 이중적인 함의를 지닌다. 국문 제목은 공간성을, 영문 제목은 시간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 속성은 영화의 전편을 횡ㆍ종단하고 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교차하는 제목에 걸맞게, 영화는 시간을 지시하는 ‘그가 북촌에 도착한 날’의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해서, 공간을 의미하는 ‘북촌방향 안내도 앞에 선 그’의 클로징 시퀀스로 막을 내린다. 이와 유사한 선례는 알랭 레네와 알랭 로브그리예의 <지난 해 마리앵바드에서>(19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목 자체에 시간개념인 ‘지난 해’와 공간개념인 ‘마리앵바드’가 공존하는 이 영화도 시공간성의 관습적인 질서를 파기시켰다. 가령 동일한 이미지가 각기 다른 시간대에 반복적으로 보여지거나, 하나의 시퀀스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임 아웃된 인물이 갑자기 생경한 장소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병치 불가능한 장면들을 접합시킴으로써 일상적인 인과관계를 와해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이 일탈하여 기이한 지점에서 조우하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조건반사처럼, 어느 장소에만 가면 우리를 잠식하는 기억이나 욕망이 있듯이. 그러한 체험들은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낯선 두려움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이 기묘한 감정을 언캐니(Uncanny)라는 용어로 함축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공간이란 우리의 정신 기제(Psychic Apparatus)가 투사된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특정 지표로 코드화된 공간을, 우리는 ‘구역’이라고 부른다. 영화 속 북촌도 욕망과 기억의 구역으로서 기능한다. 주인공 성준(유준상)의 “영호 형만 만나고 갈 거다. 얌전하고 조용하며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할 거다”라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이 제한된 장소에 머무는 동안 불가상성의 만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함께 일했던 여배우, 영화과 학생들, 옛 애인 경진, 평론가 선배 영호, 영호의 후배 보람, 전직 배우 중원, 술집 여주인 예전을 비롯하여, 한때 함께 영화작업을 했던 이들이 집중적으로 출몰한다. 예컨대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1979)에서 ‘구원이 이뤄지는 한정적 장소’를 ‘구역(Zone)’이라고 명명했던 것처럼, 성준에게는 북촌이라는 장소가 무의식에 내재된 욕망을 촉발시키는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이 증류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순환되는 성준의 북촌은 ‘닫힌 공간’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 든 여인(고현정)의 사각 프레임에 갇혀버린 그의 난망한 표정은 어떤 구역, 즉 욕망의 폐쇄회로에 영원히 갇혀버릴 자신의 운명과 직면한 것에 다름 아니다.


    II. 죽은 시간, 닫힌 공간


    기억은 시간을 측량하는 관행적 규칙에 따라 카테고리화된다. 그러나 결코 모든 시간의 밀도와 질량이 같을 수는 없다. 체감온도가 있듯이, 무수한 체감시간이 있다. 수리적 연산체계에 의해 일괄적으로 기억을 분류하는 일이 다반사이나, 개체가 느끼는 시간의 스펙트럼은 그 개체의 수 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베르그송은 전통적인 시간개념을 부정하고, 공간 속에 무한히 병치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해 논파했다. 우리가 현재라고 지칭하는 시간은 기실 과거의 한 흔적이며, 미래의 또 다른 체험이라는 것이다.


    <북촌방향>은 시공간성에 대한 형식 실험이 두드러진 영화이다. 영화사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에 관한 실험들—시공간성의 해체, 강박적 반복, 파편적 내러티브 등—은 이미 장대한 역사와 계보를 지니고 있다.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 등은 그 대표적인 선례이다. 특히 루이스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는 시간적인 관습을 뒤엎고 내러티브의 연속성을 파열시켰다는 점에서 <북촌방향>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홍상수도 역시 전통적인 시간개념을 전복시키고 있다. 따라서 북촌에서의 시간은 비선형적으로 진행되며, 영화의 환영성은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효과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들—반복, 1인 2역, 흑백화면, 공간의 폐쇄성,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이 영화 전편을 통해 치밀하게 전개된다. 상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성을 소거시킨 흑백화면은 낮과 밤, 어제와 오늘의 경계조차 모호하게 한다. 필름의 색온도는 시간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인데, 사물의 고유색이 탈색된 모노톤의 화면은 시간성을 제거하고 우연성을 극대화시킨다. 둘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시간의 함축과 확장에 깊이 관여한다. 술집 <소설>을 여러 번 방문하지만, 그때마다 들려오는 성준의 내레이션은 이러하다. “오늘 소설이라는 데를 갔다.” 즉,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그의 내레이션에는 시제를 예측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없다. 셋째. 경진과 예전의 1인 2역(김보경) 연기는 시공간의 체계를 미궁에 빠뜨린다. 또한 성준이 예전을 만날 때면 출몰하는 경진의 보이스 오버는 아예 존재마저 모호하게 만든다. 넷째. 반복은 고유의 시공간성을 붕퇴시킨다. 특정 장소의 방문과 특정인과의 만남이 반복적으로 진행되는데, 역시 그 모든 사건에는 시제가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사건의 연대기란 존재할 수 없다. 다섯째. 공간의 폐쇄성은 시간성의 일탈을 가속시킨다. 영화 속 공간은 (성준이 단 한 번 찾아간 경진의 도곡동 집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북촌으로 제한된다. 아울러 특정 골목, 건물, 표지판 등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기표들도 시공간의 질서를 역류시킨다.


    이처럼 디제시스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일련의 실험들은 일찍이 안토니오니가 명명한 ‘죽은 시간(Temps Mort)’을 소환한다. 그가 죽은 시간─내러티브의 흐름을 파열시키는 불필요한 시퀀스들─을 전복적으로 사용하여 독보적인 영화문법을 구축했듯이, <북촌방향>에서의 해체된 시간성은 반복의 미학을 효율적으로 발화시킨다. 한편 이 영화는 마치 북촌이라는 거대한 세트에서 촬영된 느낌이 드는데, 이는 북촌을 ‘구역’ 혹은 ‘닫힌 공간’으로 기능하게 한다. 히치콕이 세트 촬영을 고집했던 이유가 현장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서였다면, 홍상수가 북촌이라는 공간을 세트처럼 통제한 시도는 시간성의 해체를 최대한 용이하게 한다.


    III. 욕망의 반복, 반복의 욕망


    북촌 체류기간 내내, 성준의 체감시간은 혼미하기 짝이 없다. 그의 욕망이 일상으로부터 탈골된 시간들을 반복시키기 때문이다. 경진, 예전, 보람을 향한 성준의 욕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며, 그 욕망과 반복은 재차 겹쳐지거나 변주된다. 북촌이라는 구역에 들어서자마자 방류된 그의 욕망은 어느새 헤어진 애인 경진에게로 향하고, 이후 그 욕망은 예전과 보람을 오가며 끊임없이 반복된다. 심지어 그 반복들이 중복되어 ‘반복의 반복’이라는 기괴한 상황까지 벌어진다. 앞서 기술한, 성준과 예전과의 밀회 때면 등장하는 경진의 보이스 오버 등이 그 예이다. 욕망은 반복되고, 반복은 욕망한다.


    ‘반복’에 관한 무수한 담론들이 있다. 그 사유들은 반복의 긍정성과 부정성 사이에서 양분되는데, <북촌방향>에서의 반복은 후자인 라캉의 해석에 가닿는다. 그는 “사랑도 존재도 완벽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결핍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결핍이 생긴 자리가 바로 욕망이 발생하는 장소라는 것. 욕망은 상징계에 속하기 때문에 타자와 직접 연결될 수 없고, 따라서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를 부유하며 반복적으로 출몰할 수 밖에 없다. 욕망이란 언어로도 규정이 어렵고, 의식에 의해서도 도달할 수 없는, 현실에 부재하는 존재를 전제한다. 욕망의 충족을 향한 갈망과 그 실현 불가능성은 ‘욕망의 반복’을 실존의 조건으로 삼는다. 실재의 충족을 향한 욕망의 반복이 욕망의 필연성을 드러낸다면, 늘 같은 자리를 맴돌며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실재는 반복의 근원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논거는 유령처럼 불가사의한 존재, 경진과 예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즉 쌍생아 같은 그녀들의 모습은,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성준의 욕망이 반복되며 낳은 ‘부재하는 존재’이다. 그런가하면, 북촌이라는 장소도 욕망이 반복되는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과거 몽유도원도의 배경지였던 북촌은 성준의 욕망이 반복되는 몽유적 공간으로서 재연된다.


    이처럼 <북촌방향>은 ‘욕망의 반복’과 ‘반복의 욕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홍상수가 일관되게 다뤄온 ‘욕망’이라는 테마가 새로운 형식적 전환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밀실을 전전해 온 그 욕망들이 북촌이라는 확장된 공간으로 이전했을 뿐, 여전히 ‘닫힌 공간’에 고여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이 영화에 담긴 반복의 미학이 ‘열린 공간’을 향해 출구를 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페터 한트케는 저서 <반복>을 통해, 반복이 긍정성을 향해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반복은 혁신의 동의어일 수 있다. 서술이여, 반복하라. 스스로를 혁신시켜라.”


    IV. 욕망의 모호한 대상, 욕망의 모호한 시간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오늘 우연히 네 사람을 만났어요.”라는 보람의 전언처럼, 이상하게도 성준은 ‘북촌이라는 구역’에 입성한 이후로 불가해한 만남과 욕망의 포로가 된다. ‘얌전하고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하겠다’던 다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그의 욕망은 옛 애인 경진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그 욕망은 이내 그녀를 닮은 예전에게로 전사되고, 다시금 보람에게도 겹쳐진다. 성준이 예전과 밀어를 나눌 때면, 경진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이러한 기시감(Déjà vu)과 착란의 상황이 끝없이 반복되고, 반복이 거듭될수록 시간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진다. 그런데 모호해지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대상, 즉 존재 자체가 모호해진다.


    <북촌방향>은 여러가지 측면—1인 2역, 시간성의 실험, 우연의 메커니즘, 줌의 사용 등—에서,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언어를 복기하고 있다. (홍상수는 평소 브뉘엘의 팬임을 밝혀 왔다.) 경진과 예전의 1인 2역 설정도 관습적인 시간개념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시도는 전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극장전>을 비롯하여,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을 환기시킨다. 이 영화들은 남성들로 하여금 대상을 모호하게 한 주요 기제가 ‘욕망’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히로인 콘치타 역에 두 명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인물의 정체성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와같은 실험은 환영적 내러티브를 파괴하고, 영화 속 인물과의 습관적 동일시에 길들여져 온 관객의 안일함을 깨뜨린다. 그녀는 단지 환영일 뿐 내러티브를 위해 기능하는 요소이며, 남성의 욕망이 빚어낸 추상적 정념의 이마고라고, 브뉘엘은 역설한다. 즉, 콘치타는 욕망에 홀린 사내 마티외의 병적인 상태가 만들어 낸 피조물인 셈이다. 성준도, 마티외도, 모두 시간과 욕망의 포로다.


    모호함은 우연성과도 연계된다. 우연한 만남이 반복될수록 성준의 기억은 혼돈에 빠진다. 브뉘엘의 <자유의 환영>(1974)을 통해 시도된 ‘우연성의 강조와 인과론적 필연성의 소거’가 이 영화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이에 관해 홍상수는 “나는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상황에 따라, 사람의 욕망에 따라, 변질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보드웰, 홍상수를 만나다>, 씨네 21, 2002.) 그의 말대로, 시간과 대상에 대한 모호한 기억은 욕망이 만들어낸 상황에 따라 변질된다. 성준은 “이유 없는 일들이 모여 우리 삶을 이루는 것”이라며 우연성에 관한 장광설을 편다. 그러나 그가 북촌에서 체험한 우연들에는 분명 이유가 존재한다. 부연컨대, 그 우연과 반복의 기저에는 욕망이 드리워져 있다.


    IV. 비디제시스적, 탈내러티브적 장치들


    주류 영화는 환영성(幻影性)을 중시한다. 즉, 허구를 실재처럼 보이게 하는 핍진성에 주력한다. 따라서 선형적인 시간성과 매끄러운 디제시스의 구현을 중시할 수 밖에 없다.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 거대 통합체(Grande Syntagmatique)’는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완전한 환영, 그 거대 통합체의 구현을 위해 이음새가 표시나지 않는 유려한 전환으로 시공간의 연속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관습적인 제작에 전복의 단초를 제시해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다. 다다의 창시자인 그는 신문기사를 오려 봉지에 넣고 이를 무작위로 조합하여 시를 쓰는 우발성의 기법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러한 자동기술법(Automatic Writing)에 의한 즉흥적 제작방식은 다다이스트 필름 메이커들과 고다르의 초기 영화를 거쳐, 홍상수에게도 암묵적으로 이어졌다. 사전 시나리오 및 콘티 없이 촬영하는 그 특유의 작업방식은 물론, 영화의 관습적 디제시스와 내러티브를 파괴하는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다. 앞서 서술한 몇가지 장치들—반복, 1인 2역, 보이스 오버, 시공간성의 해체 등—은 허구와 서사, 즉 디제시스와 내러티브를 효율적으로 붕괴시킨다.


    이와같은 비디제시스적ㆍ탈내러티브적 장치에 추가해야 할 요소가 있다면, 줌의 잦은 사용을 들 수 있다. 그 면면은 트래킹 쇼트 대신 빈번한 줌으로 소외효과를 증폭시킨, 브뉘엘의 <자유의 환영>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사실 갑작스런 줌의 사용은 금기에 가까운 초보적인 기법이다. 이미지의 환영성을 손상시키고, 관객과 내러티브 간에 간극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극장전>, <하하하>, <옥희의 영화>에 이어 지속하고 있는 줌의 운용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반미학적이다. 이와 더불어 그의 자필 타이포그래피로 이뤄진 크레딧도 비디제시스화 작업에 일부 관여한다. 결국 이 모든 장치들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일체의 상황을 낯설게 하는 소격효과를 가져온다. 안토니오니의 ‘죽은 시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비디제시스와 탈내러티브의 공정을 거친 그의 영화는, 서사 구조를 낱낱이 드러냄으로써 탈신비화를 수반한다. 디제시스의 지류로부터 일탈하고 해체된 시니피앙들. 그 무수한 기표들은 마침내 거대한 파토스가 되어 북촌이라는 기이한 시공간을 부유한다. 어느 새벽녘, 성준 일행이 <소설>을 나와 택시를 기다릴 때 흩날리던 그 눈발처럼.


    V. 표면의 범람, 진피(眞皮)의 부재: ‘피상성’을 ‘피상적’으로 다루는 홍상수의 오류


    “내면에서 나오는 힘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형식에 매료된다.” 자크 데리다


    홍상수의 전작을 관통하는 테제로서 일상성과 피상성(표면성)을 들 수 있다. 이는 그가 평소 존경하는 감독들이라고 밝혀왔던 오즈 야스지로, 로베르 브레송, 에릭 로메르 등의 영화로부터 수혈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다만 “형식과 내용은 분리되지 않으며, ‘형식’이 내용을 유도하기도 한다”며 형식에 방점을 찍은 최근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상기 작가들로부터도 내용보다는 주로 형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영화 속 인물과 사물에는 내면과 기의가 부재한다. 표면과 기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인물과 사물의 피상성은 <북촌방향>에서도 예외 없이 보여진다. 성준을 둘러싼 인물들 간의 욕망이 들끓지만, 결코 그 욕망의 층위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욕망의 외피만이 보여진다. 짧은 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욕망은 경진-예전-보람을 전전하지만, 그 격렬한 욕망의 기저는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홍상수는 여러 매체를 통해 ‘표면’에 대한 관심을 견지해 왔다. “일상의 표면에 관심이 있다. 그 표면들을 정밀하게 보여주고 쌓아가다 보면, 그 집적물은 삶의 본질 이상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감독 인터뷰>, 아드리앙 공보(Adrian Gombeaud), 2003.) “사람에게 본질이 있어서 어떤 모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어떤 행동들이 계속됨으로써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낯선 여름, 삼류 소설가가 치정극에 빠진 날>, KINO. 1996. 4월호.)


    ‘표면의 미학’은 비단 홍상수 뿐만이 아니라, 금세기 인문ㆍ예술ㆍ미디어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대두된 화두이다. 그 대표적 담론인 빌렘 플루서의 <피상성 예찬 Oberflächlichkeit>을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세계는 전면을 지닌 ‘표면(die Oberflächliche)’이며, 이제 피상성은 가치 없는 가상이 아닌, 새로운 존재 찾기와 존재 바라보기의 방법이다”라고 강조했다. 즉, 그가 지칭한 표면은 존재의 모색을 위한 방편이다. 그런가하면 오즈가 일상성에, 브레송은 배우 연기의 표면성에 천착해 왔다는 점에서, 홍상수가 주력해 온 ‘표면’의 연원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선배 감독들로부터 단지 일상성과 표면성의 형식적 요소만을 수렴한 듯 하다. 가령 오즈와 홍상수가 일상성을 다뤄왔지만, 오즈는 일상 너머의 초월로, 홍상수는 일상 속 욕망의 밀실로 향한다. 전자는 열려 있고, 후자는 닫혀 있다. 그런가하면 브레송과 홍상수가 배우보다는 모델의 개념을 선호한 반(反)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브레송의 배우들은 지극히 영적인 것을 드러낸 반면에, 홍상수의 배우들은 그의 무대에 올려진 마리오네트처럼 여겨진다. 요컨대, ‘오즈와 브레송의 표면’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텅 빈 ‘영도(零度)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의 피상성은 초월의 지점으로 향한다. 그러나 ‘홍상수의 표면’은 플루서, 오즈, 브레송의 그것과는 심대한 간극이 있다. 그리고 그 간극은 그의 영화를 치명적인 한계에 봉착케 할 우려가 있다. 표면은 단지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의 내밀한 층위가 함축된 진피(眞皮)일 수 있어야 한다. 피상성을 제대로 다루려면, 표면 밑에 드리워진 층위들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피상성’에 ‘피상적’으로 골몰, 함몰하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불편하다. 그가 담아낸 현실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세계가 현실적이지 않아서 불편하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그가 그린 일상의 지리멸렬함이 아니라, 진피가 부재한 일상의 표면이다. 일상을 논하지만 ‘현실’에 이르지 못하며, 욕망을 말하지만 ‘육체성’에 이르지 못한다. 처음 그의 영화가 주목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기존 영화의 관습을 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영화도 관습이 되어버린 부분이 있다. 해체와 일탈, 비루한 일상과 욕망의 카니발, 먹물과 속물의 경계를 흐리는 스노비즘 등을 참신하게 다뤘던 그의 미덕들이 언제부터인가 답보상태에 그치고 있다. 그가 ‘형식’ 혹은 ‘영화를 위한 영화’에 몰두하는 동안, ‘내용’은 자조적인 농담의 세계에 멈춰 서 있다. 우리는 그가 형식 결정론의 폐해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형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형식만으로는 결코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제 7의 예술인 영화에서 내용을 방기한 채, 형식 실험에 집중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메츠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진정한 해체 영화는 ‘욕망의 이전’을 요구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쾌락이 장난감을 부수는 쾌락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해체 작업은 소중하며 지속되어야 하지만, 영화는 해체를 넘어 비착취적인 동일시와 자기 비판적인 이야기 전개로 나아가야만 한다.”


    VI. 이시성(異時性)과 이소성(異所性), 헤테로크로니와 헤테로토피아


    <북촌방향>에는 인왕산 전경이 단 한 번 등장한다. 무심히 지나가는 이 인서트 쇼트는 실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북촌을 둘러싼 인왕산은 바로 몽유도원도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몽유의 공간,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테제가 아닌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는 안평대군이 꾼 무릉도원 소요(逍遙)의 꿈을 화가 안견이 재연한 그림이다. 특히 이 작품은 꿈과 현실이 공존하는 혼재향을 담아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북촌은 급속도로 재개발되었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정경을 잊지 못해 지었던 무계정사 주변에는 이제 카페와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북촌은 성준에게 뿐만이 아니라, 근대화의 열차에 일제히 올라탔던 이곳 도시인들에게도 몽유와 욕망의 구역인 셈이다. 전격적인 도시개발은 선형적으로 흘러왔던 북촌의 시공간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기억과 망각, 전통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어지러이 혼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준이 북촌에서 겪었던 기억과 시공간에 대한 착란 증세는 기실 근대화를 겪은 우리 모두의 병력인지도 모른다.


    미셸 푸코는 근대화라는 유토피아로 인해 새로이 교배된 혼종의 시간과 공간을 각기 헤테로크로니(Heterochrony, 異時性)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異所性)라고 명명했다. 그는 <말과 사물>의 서문을 통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헤테로토피아는 혼란스럽다. 익숙한 신화를 해체시킨다. … 언어를 침식하고, 이도 저도 명명할 수 없게 하며 … 문장을 구성하는 통사법을 붕괴시킨다.” 그의 사유는 <북촌방향>의 비디제시스적 시공간을 거듭 소환해 낸다. 북촌은 근대화와 탈근대화가 혼재된 대표적인 헤테로토피아이자, 헤테로크로니이기 때문이다. 폭압적인 근대화 과정은 절연된 공간의 파편들을 양산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곳은 현실 가운데 있으면서도 현실의 초월을 말하는 곳이기도 하고,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모든 것들과 모순된 장소이기도 하며, 일상과 가까우면서도 일상으로부터 일탈된 곳이다. 하여 낯선 과거와 오래된 미래가 어지러이 충돌한다. 과거와 미래, 낯익음과 낯설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의 불연속면에는 언캐니한 시공간성이 편재한다.


    “지금, 여기. 존재한다. (Adsum. Hic et Nunc.)” 너 어디 있느냐, 라는 신의 물음에 아담이 답했다는 그 잠언. 깨어 있어야만 인지할 수 있는 그 현존의 시공간. 이렇듯 시간과 공간은 존재를 규정한다. 단, 실존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의 좌표가 치열하게 교차하는 지점에서만 이뤄진다. 영화의 종착역에서, 시공간의 나침반은 거듭 몽유의 북촌방향을 가리킨다. 성준의 북촌, 어쩌면 미망(迷妄)의 세계. 욕망이 해체시킨 시공간의 천체를 떠도는 그는 온전히 실존할 수 없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 부재하는 존재로서 표류할 뿐이다.
    김정

    김정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졸업(영상학)

    연세대 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과정 수료

  • 전찬일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단평이 요구하는 기본적 덕목들을 충분히 갖춘 글은 전체 응모작들 가운데 단 한 편도 없었다.두세 편의 후보작은 물론 최종 당선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작 아닌 당선작을 낸 건, 그 가능성과 잠재력 때문이다. 단?장평 두 범주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자웅을 겨룬 건 두 명이다. 단평 ‘비트냐, 펑크냐-<써니>(2011)에 관하여’와 장평 ‘개들의 예감-<황해>(2010), <무산일기>(2010), <풍산개>(2011)에 관하여’의 엄준석과, 단평 ‘살아남의 자의 슬픔, 죽은 자의 비문(秘文)-<무산일기>의 자기반영성’과 장평 ‘욕망의 모호한 대상, 혹은 욕망의 모호한 시간-<북촌방향>의 이시성(異時性)과 이소성(異所性)’의 김정(본명 김혜란)이었다.

    이들의 단평들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장평에서 빛을 발한다. 엄준석이 ‘확산적’ ‘거시적’이라면, 김정은 ‘집중적’ ‘미시적’이다. 엄준석은 ‘개와 카메라의 여정’을 통해 국민국가가 직면해 있는 다양한 위기를 배회하는, 일종의 ‘유기견’의 생태학적 보고로 분석한다. 다만 논리 전개의 정교함에 비해 문장의 완결성이 떨어진다.

    김정의 글은 기표인 비주얼과 사운드 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북촌방향’의 시공간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는 건 아쉬움을 넘어 유감이다. 하지만 ‘북촌방향’과 홍상수 영화 세계 전반에 대한 분석과 종합이 그 어느 글보다 심층적이며 풍요롭다. 상호텍스트적으로 이처럼 풍성한 글을 언제 만났나 싶을 정도다. 미술과 사진, 영화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펼치는 논지는 융합적 글쓰기의 한 전범으로서 손색없다.
  • 김정

    김정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졸업(영상학)

    연세대 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과정 수료

    글을 쓸 때면, 복기하는 두 가지 잠언.
    피로 써라.

    짜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글을 쓴 대가로 은화 몇 닢을 받은 이후, 심장에 새겨둔 말이다. 정말이지 피로 쓰지 않으면 단 한 줄도 제대로 쓸 수 없다. 내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 줌의 지식으로는 온전히 양피지를 채울 수도, 당신과 깊은 공명을 이룰 수도 없다. 잉크로 삼아야 할 것은 오직 나의 피. 그러나 아직 나의 피는 묽다.

    시네크리튀르
    영화(Ciné)와 글쓰기(Écriture)의 합성어. 이 용어는 창작과 비평이 수레의 앞뒤 바퀴처럼 공생하는 것임을 각인시켜 주었다. 내 서툰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창작, 이제 숨 고르며 첫 발을 내딛는 비평. 나는 비평이 창작의 등가물(等價物)이어야 함을 익히 알고 있다. 치열하고 사려 깊은 글, 영화에 대한 연서이자 노동과 성찰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감사드린다.
    존경해 왔던 전찬일 선생님께 내 미욱한 글이 읽혀질 수 있었음을. 동아일보의 전언 덕분에 겨울의 심장을 통과할 수 있었음을. 꿈의 음화(陰?)인 현실, 현실의 음화인 꿈. 그 두 세계를 봉합하는 영화를 통해 스쳐간 모든 이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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