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물의 기억

by  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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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1

    남자2

    남자의 아버지

    남자의 여자친구 - 영주



    무대는 1층과 2층으로 나뉜다. 2층 무대는 방으로 꾸며져 있고, 1층 무대는 텅 비어있다. 1층 무대 바닥은 영상이 상영되는 화면으로 이용된다. 무대 바닥이 화면이기 때문에 무대에 서있는 연기자가 영상 안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 (이하 1층 무대 바닥을 ‘화면’이라고 지칭한다.)

    1층과 2층은 비스듬한 경사로로 연결되어 있다. 2층 방 왼편에는 샤워기가 달린 욕조가 놓여 있고, 욕조 위에는 선반이, 그 옆에는 나무 의자가 있다. 2층 중앙에는 전신 거울이 있는데 실제 거울은 아니다. 거울 옆 작은 탁자 위에는 거품비누, 면도기, 수건이 놓여있다. 방 오른편으로는 침대 크기 정도의 직육면체 단이 있다. 극 중에서 침대와 소파 등으로 쓰인다.


    하얀 와이셔츠와 잿빛 양복바지 차림의 남자1이 느릿느릿 방으로 들어온다. 남자1은 속옷만 남겨놓고 옷을 모두 벗어 의자에 걸쳐 놓은 뒤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전신 거울로 걸어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본다. (거울은 관객들을 향해 있다. 거울에서는 남자1과 똑같은 속옷 차림의 남자2가 남자1의 그림자를 연기한다. 두 사람은 실제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사람과 인영(人影)처럼 동시에 움직인다.)

    남자1이 손바닥으로 거울을 닦아낸다. 남자2도 같은 동작을 한다. 남자1과 남자2는 서로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잠시 후 남자1과 남자2는 테이블에서 면도기를 들고 면도를 시작한다. (전기면도기가 아닌 면도칼 면도기이다.) 하얗게 거품을 내서 얼굴에 칠하고 면도기로 조심스럽게 밀어낸 뒤 수건으로 닦아낸다. 그리고 남자1은 돌아서서 욕조를 향해 걸어가지만 남자2는 그대로 거울 속에 남아 남자1을 관찰한다. 남자1은 면도기에서 면도칼을 꺼내 욕조 바로 위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뒤 속옷을 마저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욕조 안에 들어간다. 남자1이 움직일 때마다 욕조 안의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남자1은 얼굴을 관객들에게 향한 상태로 욕조 안에 앉는다. 남자1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자 남자2가 천천히 거울 밖으로 걸어 나와 남자1이 의자에 벗어놓았던 옷을 입는다. 찬찬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남자2는 관객들을 향해 말을 시작한다.



    남자2 : 나는 물을 좋아합니다.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서 하루 종일 머무는 게 내 유일한 낙입니다. 지금도 나는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욕조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남자2는 욕조로 걸어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손끝을 적신다.


    남자2 :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은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도 질리지를 않아요. 그것은 흡족함을 넘어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합니다. 거리마다 자동차가 넘쳐나고, 하늘 끝까지 유리 빌딩들이 솟아오르고, 대형 마트에는 먹을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이 욕조 하나에 가득 찬 물보다 더 풍요로운 걸 나는 본적이 없습니다. 마치 모든 걸 다 보상받는 기분이에요.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인간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했던 기술이 있었던가요? 인간에게 있어 수도 시설이란 영원한 첨단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남자2는 1층 무대 앞으로 나온다.


    남자2 :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물을 좋아했습니다. 아니, 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주변에 물이 없으면 극심한 불안감에 견디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늘 갈증에 시달렸고 적어도 하루에 서너 번씩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가 있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남자1 : 넌 물속에서 사는 생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실수로 사람으로 태어난 모양이구나.

    남자2 : 처음에는 싱겁게 농담을 하던 부모님도 내가 어항에 담긴 물을 남김없이 마셔버리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온갖 검사를 다 해보아도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남자1 : 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남자2 :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남자1 : 어린 시절에 특정 물체에 애착을 보이는 건 흔한 일입니다. 이 아이에게는 그 상대가 손수건이나 인형이 아니라 물인 모양이네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철이 들면서 점차 사라질 겁니다. 걱정 마세요.

    남자2 : 하지만 지금까지 그 증상은 조금도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아직 나는 철이 들지 못한 걸까요?


    남자2가 더운 듯 옷깃을 벌린다.


    남자2 : 이 안도 점점 더워지고 있네요. 바깥 온도는 이미 30도를 훌쩍 넘었을 겁니다. 뜨겁고 건조한 열기가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안으로 밀려들어 옵니다.


    남자1이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구역질을 한다. 남자2가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지켜본다.


    남자2 : 도대체 이 열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저 멀리 있는 태양만으로는 가능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가까운 곳, 근처 어딘가, 그래요, 이건 분명 바로 여기, 지구 속에 꽉 차있다는 용암 때문일 겁니다. 얇은 땅껍질 바로 밑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끝없이 타오르고 있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는 거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관객들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갈증을 느끼는 자가 오직 나 하나 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 아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에요. 악착같이 견디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고통과 인내에 그들은 놀랍도록 무심합니다. 그저 견뎌야 하기 때문에, 견딜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견디는 데 이골이 났기 때문에 견뎌내고 있는 거예요. 아주 오래전, 아가미를 버리고 땅 위로 올라왔던 최초의 위대한 물고기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 오기와 고집은 그때부터 유전되어 내려온 습성입니다. 그 최초의 선조 물고기는 자손들에게 엄청난 저주를 내린 셈이죠.


    화면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물고기가 나타나 남자2 옆을 휘감듯이 헤엄치며 지나간다. 침묵. 영상이 사라진다.


    남자1 : 또 물에 들어가 있니. 정말 못 말리겠구나.

    남자2 : 엄마는 욕조에 들어가 있는 나를 자주 타박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엄마도 어렸을 때부터 물을 좋아했다는 걸 나중에 외할머니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내내 수영 선수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어릴 적 사진에는 유난히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많습니다. 그 중 레이스가 달린 파란색 수영복 차림에 흰색 수영모자를 손에 들고 있는 소녀의 사진을 나는 가장 좋아합니다. 이마와 볼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소녀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채 물 속 어딘가를 무심코 바라보고 있습니다. (침묵. 잠시 상념에 잠긴다.) 내가 6살 때, 엄마는 내게 수영을 가르쳐 주려고 한 여름 내내 애쓴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수영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냥 물속에 조용히 잠겨 있는 편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헤엄쳐서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면 뭘 하나요. 저곳도 이곳도 물이기는 마찬가지인데요.

    남자1 : 유별나게 물을 좋아하길래 수영을 잘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구나.

    남자2 : 나는 엄마를 실망시킨 것 같아 눈물이 찔끔 나왔습니다.

    남자1 : 괜찮아. 지금부터 배우면 되니까. 자, 엄마가 하는 걸 보고 따라해 봐.


    화면에는 물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남자2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손을 흔들던 여자는 남자2로부터 멀리 헤엄쳐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남자2 : 엄마는 갈색으로 빛나는 긴 두 다리를 멋지게 뻗으며 헤엄쳐 나갔습니다. 엄마를 따라 하얀 물거품이 꼬리처럼 길게 이어졌습니다.

    남자1 : 너도 이리로 와. 어렵지 않아.


    침묵. 영상이 사라진다.


    남자2 : 이것이 건강했던 엄마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입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엄마는 죽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2년 가까이 앓아 누워있었고, 결국 엄마가 죽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엄마가 숨을 거두던 날은 푹푹 찌던 8월의 정오였습니다.


    검은 정장 차림의 아버지가 하얀 천에 둘둘 말린 사람을 두 팔에 안고 들어와 2층 무대에 있는 단 위에 올려놓는다. 남자2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본다. 잠시 침묵. 아버지가 남자2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이끈다. 두 사람은 하얀 천에 둘둘 말린 사람 곁에 서서 그것을 내려다본다.


    남자2 : 엄마가 죽는 순간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야릇했습니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눈에 띌만한 점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서늘한 바람이 속눈썹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서른여섯 살의 인생이, 2년간의 투병 생활이, 할딱이던 숨소리가, 찡그리던 코끝이, 그렇게 단 몇 초 사이에 스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자1 : 8월 23일 11시 47분, 운명하셨습니다.

    남자2 : 그 순간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 달려갔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하얀 천에 둘둘 말린 사람을 안고 무대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잠시 후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작은 나무 상자를 품에 안고 돌아온다.


    남자2 : 이 상자 안에 엄마가 들어있다는 걸 알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상자가 지나치게 작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침묵) 유골은 유언대로 엄마 고향에 있는 호수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엄마가 어린 시절 즐겨 찾곤 했다는 호수였습니다. 멱을 감고, 수영도 하고, 나무 그늘 밑에서 낮잠을 자곤 했답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깊고 넓은 호수였습니다.


    아버지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다. 남자2는 한 걸음 뒤에서 아버지를 뒤따른다. 두 사람은 1층과 2층 무대를 잇는 경사로 중간에 선다.


    남자2 : 아버지와 나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습니다. 사방은 조용했고, 호수는 거대한 거울처럼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이리저리 뒤집어도 말이 될 정도였어요. 나는 거울 속에 꼼짝없이 갇힌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남자1 : 많은 사람들이 거울 속에서 익사한다.

    남자2 : 어느 책에서인가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말이에요, 그렇죠?


    아버지가 나무 상자를 연다. 실제로는 텅 비어있다.


    남자2 : 상자 속에는 하얀색 가루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너무나 하얀색이었습니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엄마가 이토록 고운 가루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별안간 발작과도 같은 갈증이 내 가슴을 내리쳤습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눈과 혀가 부풀어 오르고 숨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배에는 마실 물이라곤 조금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손에 상자를 들고 말없이 호수 너머의 집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 이제 엄마를 보내 줘야겠다.

    남자2 : 어디로?

    아버지 : 저 시원한 물속으로. 불 속은 너무 뜨거웠을 테니까.

    아버지는 하얀 장갑을 낀 손끝으로 가상의 가루를 집어서 공중에 뿌린다.


    아버지 : 자, 너도 아빠처럼 해 봐.


    하지만 남자2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계속 가루를 집어 주변에 뿌린다.


    남자2 : 가루는 호수 위에 점점이 내려앉더니 나룻배 주위로 하얀 마블링 무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역겨웠고 내 갈증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아버지가 뿌리는 그 텁텁한 가루가 내 입 속으로 한 움큼씩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대로 엉엉 울고 싶었지만 눈물을 만들어낼 물기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하얀 가루는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몸에서는 얼마나 많은 가루가 만들어 지던지.


    남자1이 욕조에서 물을 첨벙거린다.


    남자2 : 나는 그대로 호수에 뛰어들었습니다.


    남자2가 경사로에서 1층 무대로 뛰어내린다. 화면이 일렁이며 물 속 영상이 비친다. 남자2는 영상 한가운데 서있다.


    남자2 : 세상이 온통 새파래지더니 나는 어느새 깊고 차가운 물속에 있었습니다. 그 출렁이는 고요. 세상 바깥으로 멀리 튕겨져 나온 것 같아 나는 안심이 됐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렸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물속이 이토록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으니까요. 메마르고 거칠고 소란스러운 바깥세상이 참으로 부당하고 한심하게 여겨졌습니다. 이곳은 얼마나 완전한지. 이대로 푸른 물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을 수 있다면……. 하지만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화면의 물 속 영상이 어두워진다.


    남자2 : 새까만 어둠이 발밑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끝도 바닥도 기약도 없는 영원한 어둠이었습니다. 물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을 겁니다. 허둥지둥 고개를 들어 보니 머리 위로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햇빛, 갖가지 그림자들이 뒤섞여 어지러운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남자1을 향해) 아,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2층 무대에 있는 남자1과 1층 무대에 있는 남자2의 눈이 마주친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남자2 : 괴상하게도 그것은 내 얼굴이었습니다. 건너편 세상의 내가 나룻배에 기대앉아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찡그리고, 쩔쩔매고, 아둔하고, 뻔하디 뻔한 얼굴. 어째서 저 사람이 나라는 거지? 왜 내가 저기에 있는 거지? 나는 그 무엇도 원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 무언가 내 발을 움켜잡고 아래로 끌어 내리는 바람에 나는 번쩍 눈을 떴습니다. 엄마일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 볼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름이 끼쳐서 그것을 떨쳐내려고 발버둥을 치며 머리 위로 힘껏 손을 뻗었습니다.


    남자2가 남자1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남자1은 그런 남자2를 묵묵히 내려다본다. 그 때 아버지가 뛰어들어 남자2를 화면 밖으로 끌고 나온다. 영상이 사라진다. 아버지가 남자2의 뺨을 힘껏 때린다. 남자2는 바닥에 쓰러진다.


    남자2 : (어린애처럼 칭얼대며) 아빠, 잘못했어요. 난 그냥 목이 말랐던 것뿐이에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나무 상자를 들고 천천히 퇴장한다. 혼자 남은 남자2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착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남자2 : 그 뒤, 물에 집착했던 내 버릇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됐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남자1 : 학교생활에 충실했습니다.

    남자2 : 친구들과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어요.

    남자1 : 책을 읽으면 두 장으로 요약했습니다.

    남자2 : 노숙자가 다가오면 숨을 참았습니다.

    남자1 : 6개 회사에 입사원서를 냈습니다.

    남자2 : 무례한 사람에게는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남자1 : 건강보험을 2개 들었습니다.

    남자2 : 신용카드는 3개를 만들었구요.

    남자1 : 1년 후의 계획에 대해서 떠들고

    남자2 : 실수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척 했습니다.

    남자1 : 거저 주어지는 건 없더군요.

    남자2 : 시간은 늘 부족해요.

    남자1 : 무슨 일이든 더 잘해야 합니다.

    남자2 : 제대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뻔히 보이는 잘 닦여진 길이 있어서 한발한발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좀 고단하기는 해도 어리둥절하거나 헤맬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마음은 편했습니다. 변한 내 모습에 아버지도 무척 기뻐했기 때문에 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를 지나 취직할 때까지 내 인생은 별 문제없이 흘러갔습니다.


    남자2는 2층 욕조로 다가가 의자에 앉는다. 남자1은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들어간다. 남자2가 그런 남자1을 바라본다.


    남자2 : 이렇게 물속에 있을 때면 내 위에는 까마득한 고요가, 내 아래에는 흔들리는 지탱이 있습니다. 평화라는 게 이 세상에 실제로 있다면 아마도 이것일 겁니다.


    침묵. 남자1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남자2 : 하지만 얼마 못가 나는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맙니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라는 데 어째서 물속에서 단 1분도 견디기 힘든 걸까요. 70%가 물이라면 나머지 30%는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그 30%만 없으면 나도 물이 될 수 있는 걸까요?


    남자1이 물속에서 성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선정적이진 않다. 오히려 나른하고 무기력하기까지 하다. 남자2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다. 잠시 후, 남자1은 싱거운 절정을 맞는다.


    남자2 : 보통은 섹스를 불에 비유하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데로 떠오르면 떠오르는 데로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결국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리고 마니까요. 하지만 사랑은 물과는 다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좀 더 탁하고 농도가 짙지요. 마치 젤리처럼, 깊이 가라앉지도 위로 떠오르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중간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라면 그것도 좋다고 믿게 되는 거죠.


    그 때 영주가 쟁반에 차 두 잔을 받쳐 들고 천천히 무대를 가로질러 지나간다. 남자2는 조금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영주는 2층 단 위에 단정하게 걸터앉아 쟁반을 옆에 내려놓는다.


    남자2 : 영주는 내가 사랑했던 여자였습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일 겁니다. 그러고 보니 영주를 떠올리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우린 처음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은 아니었습니다. 거의 공통점이 없었고 어떤 차이점은 첨예하기까지 했습니다.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던 것 같습니다. 사귄지 반년 만에 헤어질 위기도 있었지만,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남자1이 욕조 위에 달린 샤워기를 튼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온 물이 남자1 위로 떨어진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잔잔한 빗소리 같다.


    남자2 : 우리는 둘 다 비 내리는 날을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식성에서부터 영화 취향까지 낱낱이 달랐던 우리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이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는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한강변이나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나는 비가 오는 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영주는 한가한 삶에 대해 예찬했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침묵에 잠길 때면 영주의 노랫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습니다. 그 때의 그 흥얼거림과 우산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남자2가 샤워기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영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라기보다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느낌이다.


    영주 :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 일부러 그랬는지 잊어버렸는지 가방 안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헤어지려고 할 때 그제서야 내게 주려고 쓴 편질 꺼냈네 집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펴 보니 예쁜 종이 위에 써내려간 글씨 한 줄 한 줄 또 한 줄 새기면서 나의 거짓 없는 마음을 띄웠네


    영주가 노래를 멈춘다. 남자1이 샤워기를 끈다.


    남자2 : (조금 활기차게) 그것은 생기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제법 많이 웃었고 확고한 의욕도 있었습니다. 힘을 내서 ‘무언가’를 극복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에 부풀기도 했습니다. 모든 게 좋아 보였습니다. 나쁠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영주와 만난 지 2년이 지났을 때, 나는 영주의 부모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가벼운 저녁식사 자리처럼 가장하고 있었지만 실은 영주의 부모님과 정식으로 선을 보는 자리였습니다. 나는 긴장한 나머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고지를 바로 눈앞에 둔 기분이었습니다. 저것만 넘어가면 그 뒤로는 내리막길을 굴러 떨어지는 바위처럼 인생은 저절로 나아가겠죠.


    남자1이 큰 소리로 코를 푼다. 남자2는 1층 무대 앞으로 나온다.


    남자2 :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자 나는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습니다. 몸을 깨끗이 씻고, 이발소에 가서 이발과 면도를 하고, 새로 산 양복을 차려입었습니다.


    남자2는 바지 뒤춤에서 넥타이를 꺼내 목에 맨다.


    남자2 : 당연한 얘기지만 영주의 부모님께 잘 보여서 영주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충분히 영주를 책임질 수 있는 남자라는 걸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멋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대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습니다.


    남자2는 초조하게 무대를 서성거린다.


    남자2 : 하지만 영주의 부모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영주의 집안이 넉넉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으리으리했습니다.


    화면에 미로와도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빽빽하게 펼쳐진다. 남자2가 그 화면 속을 천천히 가로지른다.


    남자2 :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본 것은 방파제처럼 집을 둘러싸고 있는 높고 반들반들한 담장이었습니다. 높이가 5m 남짓 될법한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 담 위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뿐이었습니다. 담 쌓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정서를 감안하더라도 이건 지나치게 의기양양했습니다. 나는 경외심에 가득 차서 몇 번이나 벽을 만져보았습니다.


    남자2는 관객을 등진 채 가상의 벽을 만져보는 것처럼 한 손을 앞으로 내민다.


    남자2 : 막연히 꿈꿔왔던 나의 미래도 이런 것이었을까요? 나는 막다른 길에 다다른 9살 어린아이처럼 막막했습니다.


    영주가 1층 무대로 다가와 남자2가 앞으로 내밀고 있던 손을 잡는다. 영상이 사라진다. 영주는 남자2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이끈다. 두 사람은 2층 무대에 있는 단 위에 나란히 앉는다.


    남자2 : 영주의 부모님은 친절하고 또 당당했습니다. 나는 그게 동시에 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얼떨떨했습니다. 나는 거울처럼 최대한 그들을 똑같이 흉내 내려고 애썼습니다.


    영주가 남자2에게 찻잔을 건넨다. 그리고 자신도 찻잔을 들고 한 모금씩 마신다.


    남자2 : 벽 전체가 통유리로 돼있는 거실에서는 오후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무심코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그대로 숨을 멈췄습니다. 창문 밖에서 새파란 물이 사방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얀 물보라가 높은 파도를 일으키며 유리창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집을 통째로 휩쓸어 버릴 듯한 기세에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남자2가 눈을 감는다. 화면에 직사각형의 파란색 물 영상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남자2가 눈을 뜬다.


    남자2 : 눈을 떴을 때 나는 그게 수영장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성인 두 세 사람이 물장구치기에 충분한 크기였습니다. 기울어진 오후의 햇빛이 수면에 넘실거리는 푸른 비늘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빛깔에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해졌습니다. 내장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꿈틀거리며 속을 메스껍게 했습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남자1 : 우리 딸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남자2 : 말씀 낮추십시오. 그게 저도 편합니다.

    남자1 : 그래요? 그럼 그럴까?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다지?

    남자2 : 네, 자산관리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남자1 : 그래, 성실히 일하면 전망이 나쁘지 않지. 몇 년 다니다가 자기 사업을 할 수도 있는 거고. 어쨌거나 평생 월급쟁이로 썩으려는 건 아니겠지? 젊은 사람이 야망을 가져야지. 그건 그렇고 요새는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은가?

    남자2 : 1분기에 중국 주식 시장이 하락세로 돌아선 뒤에는 중동 건설 쪽이 괜찮았는데, 지금은 전쟁 문제로 시끄러워서 추이를 좀 지켜보시는 게…….

    남자1 : 당신은 지금 왜 그런 걸 물어봐요?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사람한테.

    영주 : 맞아요, 아빠. 너무하세요.

    남자1 : 아니, 딸 남자친구 덕 좀 보는 게 어때서 그래? 뭐,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나?

    남자2 : 마포에 살고 있습니다.

    남자1 : 어머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지.

    남자2 : 네.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남자1 : 그래도 이렇게 잘 컸으니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시겠어.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신다고?

    남자2 : 한수기업의 철강공장 주임으로 계십니다.

    남자1 : 그래, 힘든 일을 하시는구만.

    남자2 : 네, 그래도 건강하십니다. (관객을 향해) 입으로는 꼬박꼬박 멀쩡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대화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차를 마시는 척하면서 끊임없이 수영장을 흘긋거렸습니다. 한 번 쳐다볼 때마다 물이 조금씩 집안으로 넘쳐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창틀을 적시고, 거실 바닥을 적시고, 카펫을 적시고, 발목을 적시고, 가슴을 적시고, 급기야 바로 코앞에서…….

    남자1 :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에요?

    남자2 : 네?

    남자1 : 어차피 얘는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으니, 뭐 우리가 조건을 더 따져봐야 뭘 하겠어요. 젊은 사람이니 앞으로 노력해서 차근차근 쌓아 가면 되는 거고, 우리도 모른 척하진 않을 거고……. 그래서 우린 되도록 빨리 했으면 하는데. 무엇보다 영주 얘가 시집가겠다고 아주 성화에요.

    영주 : 엄마, 제가 언제요.

    남자1 : 되도록 빨리가 뭐야. 나이가 넘치는데 아예 이번 해가 가기 전에 치러버려야지.

    영주 : 아버지, 이 사람 당황하겠어요. 그렇게 밀어붙이시면 어떡해요.

    남자1 : 뭐 어때서 그래. 2년이나 사귀었으면 그만 자리를 잡아야지. 아이도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가져야 할 거 아니냐. 더 이상 미적거리지 말고 해치워버리자.

    남자2 : 별안간 극심한 갈증이 나를 덮쳤습니다. 이제껏 바로 내 어깨 뒤에 숨어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는 황급히 찻잔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차는 다 마셔버리고 없었습니다. 등 뒤에서 진땀이 흐르고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를 더 줄 생각은 않고 자기들끼리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에 대해서 말입니다.

    남자1 : 그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자네도 빨리 결혼하고 싶겠지?


    영주가 미소를 지으며 남자2를 바라본다. 남자2도 영주를 바라본다.


    남자2 : 아, 드디어 충실하고 단단한 행복이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손을 뻗어 쥐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혀를 빼물고 헐떡이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구토가 치밀어 오르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그저 이 열기를, 이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영주 : 왜 대답이 없어? (장난기 있게) 혹시 나하고 결혼하기 싫은 거야?

    남자2 : 나는 진심으로 영주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영주를 품에 꼭 껴안고 영주를 제게 주십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다 함께 와르르 마음껏 웃어재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 몸의 피부가 타들어가고 눈은 충혈 되다 못해 튀어나오는 듯 했습니다. 바짝 마른 목젖이 모래주머니처럼 부풀어 올라 기도를 막았습니다. 사방에서 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영주 : 왜 그래?


    영주가 조심스럽게 남자2의 손을 잡는다.


    남자2 : 어떻게 이걸 영주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한들 이해해 줄까요? 나는 영주의 손을 떨치고 일어나 정원으로 향하는 문으로 걸어갔습니다.


    남자2가 1층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온다.


    남자2 :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모두들 멍하니 보고만 있었습니다. 나는 발코니를 가로질러 수영장 가장자리에 서서 물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남자2는 네모난 물 영상 가장자리 끝에 서서 화면을 내려다본다. 파란 물 영상 위에 그의 검은 그림자가 비친다.


    남자2 : 매끈한 물표면 위에 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쳐보였습니다. 양복을 빼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긴 말끔한 모양새였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깨에는 뾰족하게 힘이 들어가 있고 눈은 얼이 빠진데다 이마에는 고단한 주름이 가득했습니다.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로, 그래도 안간힘을 쓰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1 : 많은 사람들이 거울 속에서 익사한다.

    남자2 : 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오히려 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깊이도 온도도 없는 평면의 거울에서 말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물이 자신을 감추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물 위에 비친 그림자에 홀려 자꾸 옆으로 미끄러집니다. 바로 그 뒤에 깊고 시원한 물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고 맙니다. 그들은 온 세상을 헤매고 다녔지만 그곳에 닿을 수 없었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을 가로막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멀리 떠날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저 앞으로 한 발 내딛기만 하면 됩니다. 딱 한 발.


    남자2가 물 영상 속으로 뛰어든다. 영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친다.


    영주 : 그만-.


    무대 전체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욕조 속에 있는 남자1에게만 조명이 비친다. 남자2와 영주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잠시 침묵.


    남자1 : 어느새 해가 지는 모양입니다. 나는 세상이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바라봅니다. 해가 졌는데도 아직 공기는 후덥지근합니다. 오늘도 열대야라고 하니 밤새도록 이렇게 덥겠지요. 나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봅니다. 몸이 온통 자글자글한 주름투성이네요.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밝은 곳에서 보면 꽤나 흉측할 겁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나는 물에 불어 흐물흐물 해진 내 몸이 좋습니다.


    아버지가 2층 무대로 나온다. 작업복 차림이다.


    아버지 : 하루 종일 물속에 있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구나. 잠깐씩 나왔다가 들어가라.

    남자1 : 영주와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직장도 그만둔 채 하루 종일 욕조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내게 아버지는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참견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장을 1년만 쉬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 : 그래,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좀 쉬어 봐라.

    남자1 :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다되도록 여전히 이러고 있는걸 아셨다면 어릴 때 그 호수에서처럼 또 호되게 따귀를 때리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 나는 또다시 딛고 일어나 다음 20년도 그럭저럭 열심히 살아가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0개월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가 1층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다.


    남자1 : 그날 밤, 나는 욕조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공장에 야근하러 가시고 집에는 나 혼자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루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물과 고요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집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며 나를 방해했습니다. (시끄러운 벨소리가 울린다.)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게 걸려온 전화도 아닐 테니까요. (벨소리가 끊기더니 다시 울린다.) 그런데 전화가 끊기자마자 곧바로 또 울려댔습니다. 나는 한 번 더 무시했습니다. (벨소리가 끊겼다가 또 다시 울린다. 남자1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오른다.) 세 번째로 울리기 시작했을 때는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자1 : 여보세요?

    공장관계자 (아버지가 말함) : (다급하게) 김주임님 아들인가?

    남자1 : 네, 그런데요.

    공장관계자 (아버지가 말함) : 빨리, 빨리 아버지 공장으로 와야겠어.

    남자1 : 무슨 일인데요?

    공장관계자 (아버지가 말함) : 공장에 불이 났어.

    남자1 : 불이요? 아버지는요?

    공장관계자 (아버지가 말함) : 아무래도 공장 안에서 못나온 것 같아.

    남자1 : 그 뒤 어떻게 옷을 입고 어떻게 택시를 타고 어떻게 공장까지 갔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장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그 거대한 화염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거대한 화염이 나타나 아버지를 뒤덮는다. 아버지는 우두커니 서서 관객들을 바라본다.


    남자1 : 밤하늘 끝까지 치솟은 검붉은 불길이 공장 지대 전체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새까만 연기와 재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불꽃을 튀기는 뜨거운 열기에 머리카락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습니다. 지구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그 맹렬한 불덩어리가 지상 밖으로 터져 나온 게 분명했습니다. 이대로 온 세상을 태워 버릴 만큼 광포한 기세였습니다. 소방차 수십 대가 달라붙어 호스로 물을 뿌려대고 있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불의 승리였습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버지가 무릎을 꿇는다.


    남자1 : 그 때 구조대원들이 사람들을 들것에 실어 나오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뒹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새까맣고 흉측한 몰골들이었으니까요. 나는 한사람 한사람 자세히 들여다 본 뒤에야 왼쪽 얼굴과 왼쪽 팔이 녹아 문드러진 채, 타다 만 숯 조각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하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양쪽 귀가 눌어붙었기 때문입니다.


    영상이 사라진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2층 무대에 있는 욕조 옆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는다.


    남자1 : 아버지는 병원에 실려간지 이틀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는 아무리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새까만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였습니다.

    아버지 : 무섭구나. (침묵) 미안하다.

    남자1 :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무엇이 미안한지 결국 물어 보지 못했습니다. 약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다는 걸까?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는 걸까? 혼자 남겨둬서 미안하다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이 세상에 낳아준 것 자체가 미안하다는 걸까?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 때처럼 평화롭지는 않았습니다. 신음과 몸부림 끝에 극심한 발작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진 뒤에는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례를 마친 뒤, 불에 타 죽은 아버지는 한 번 더 화장터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이 아버지의 유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유골 가루는 멀리 동해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엄마가 뿌려졌던 호수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몇 년 전 모래와 자갈로 깨끗하게 메워지고 그 위에는 관청과 공원, 극장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나도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고, 배에는 마실 물이 충분히 있었고, 무엇보다 나를 물에서 끌어올려줄 아버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남자1 : 그렇게 혼자 빈 집으로 돌아 온지 어느새 10개월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먹을 것을 사러 나갈 때 외에는 거의 집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물이 가득한 욕조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습니다. 나는 딱히 외로울 것도 고민도 없이 유유자적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욕조 안에 앉아 해가 뜨고 지는 걸 수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 시간동안 나의 삶은 물에 담가 놓은 수채화처럼 퇴색되어갔습니다.


    남자1은 두 손을 앞으로 올리고 고개를 숙여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남자1 : 이제 나에게는 멀건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아쉽지는 않습니다. 누구의 삶이나 퇴색되어 가기는 마찬가지니까요. 다만 사람들은 그 위에 덧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베껴 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삶이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삶은 그저 거울에 비친 내 자신과 마주보면서 네가 누구냐고 반복해서 묻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답은 메아리처럼 질문을 끝없이 반사할 뿐이고, 그렇게 사람들은 거울에 파묻혀 익사해 갑니다.


    침묵. 무대가 더 어두워진다.


    남자1 : 한밤중의 욕실은 꼭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동굴 속 같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물이 있을 뿐입니다. 그거면 완벽합니다. 왜 그 옛날의 선조 물고기가 이 완벽한 물을 떠나 뜨겁고, 건조하고, 먼지투성이인 궁핍의 땅으로 올라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아주 조금씩, 그러나 결정적으로 오류가 쌓여간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구분하고, 창조하고, 선택하고, 궁리하고, 고뇌하고, 번민하는, 자극적이지만 영 쓸모없는 결함들로 뒤덮여버린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진화란 완벽에서 불완벽으로의 이행인걸까요. 그런데 어쩌다 나는 그런 야심찬 추락에서 빠져나와 이렇게 어중간하게 표류하게 되었을까요. 마치 ‘장님 물고기’ 같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 물고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원래 지상에서 서식했던 이 물고기는 아주 오래 전 동굴 속 지하수로 흘러들어가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 물고기의 특이한 점은 기능이 더해지는 쪽으로가 아니라 퇴보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겁니다. 눈은 함몰되어 사라지고 몸은 색소 결핍으로 투명해 졌습니다. 부레도 퇴화하여 지느러미를 움직이지 않으면 물속으로 가라앉고 맙니다. 물속에서 머물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 남겨두고 모두 놓아버린 겁니다. 어째서 이 물고기의 조상은 춥고 어두운 동굴로 내려왔던 걸까요. 왜 기회와 주장이 넘치는 땅위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최초로 동굴로 내려왔던 그 물고기가 바로 오래 전 바다를 떠나 땅으로 올라왔던 그 선조 물고기인지도 모릅니다. 흙먼지와 바위틈을 기어 온 땅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갈증과 자책과 실망 속에서 동굴로 뛰어들었던 겁니다.


    남자1이 물속에 완전히 머리를 집어넣는다. 오랫동안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 때 거울 속에서 남자2가 나타난다. 처음처럼 다시 속옷차림이다. 남자1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온다.


    남자2 : 이렇게 하루 종일 물에 들어가 있어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요? 이것이 내 평생의 질문이자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야, 나는 겨우 그 대답을 알 것 같습니다. 내 몸에는 70%의 물 외에 30%의 다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30%가 나와 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그 30%를 포함하고 있는 한 나는 끝내 불순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30%를 제거할 순 없을까요? 그렇게 나도 완전한 물이 될 수는 없는 걸까요?


    남자1이 두 손으로 물을 들어 올려 움켜 쥐려한다. 하지만 물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만다. 남자2가 그 모습을 지켜본다.


    남자1 : 가벼운 것들은 / 물 위에 뜬다 / 물이 떠받든다 / 속을 비운 것도 / 물 위에 뜬다 / 물이 떠받든다

    남자2 : 문득 어렸을 때 읽었던 시 한편이 생각납니다. 시 속에 나오는 ‘가벼운 것’이 바로 그 30%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30% 때문에 나는 다시 물 위로, 태양이 작열하는 메마른 대지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시를 조금 바꾸어 봅니다.

    남자1 : 무거운 것들은 / 물속에 가라앉는다 / 물이 감싸 안는다 / 속이 꽉 찬 것도 / 물속에 가라앉는다 / 물이 감싸 안는다


    남자1은 아까 면도기를 놓았던 자리를 더듬어 면도칼을 집어 든다.


    남자1 : 꼭 오늘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제 했어도, 오늘 해도, 내일이라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남자1은 면도칼로 단호하게 왼쪽 손목을 베어낸다. 남자2가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남자1 : (왼손을 조금 더 높이, 두 손목을 모아 앞으로 내밀며) 어둠 속에서 휘두른 탓에 생각보다 더 깊이 베었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피가 솟구쳐 오릅니다. 뜨거운 피가 어둠을 타고 몸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렇게 내 몸의 이물질도 함께 빠져나갑니다. (눈을 감으며 양팔을 앞쪽으로 벌린다.) 90%....... 80%....... 75%....... 72%....... 70%....... 아, 어둠이 꼭대기에서부터 무너져 내립니다. 숨소리가 까마득히 멀어집니다. 발바닥이 거꾸러집니다. 그만 정신을 잃을 것 같습니다. 이게 끝인 걸까요?


    남자1이 몸에 경련을 일으킨다. 버둥거리려 하지만 몸이 점점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남자1은 사방에 물을 튀기며 허우적거리다가 물속으로 축 늘어진다. 더 이상 움직임이 없다. 차갑고 긴 침묵. 남자2가 거울 밖으로 나와 1층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다. 남자2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위로하는 듯 부드럽다.


    남자2 : 피가 모두 빠져 나간 손목에서부터 다시 서늘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물은 핏줄기를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갑니다. 심장에서 폐로, 폐에서 간으로, 간에서 뇌로, 뇌에서 피부로, 피부에서 머리카락으로, 머리카락에서 손톱으로……. 구석구석 물이 스며듭니다. 다시 머리가 맑아집니다. 평생 이토록 머리가 맑았던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들립니다. 더 이상 갈증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며 양팔을 앞쪽으로 벌린다.) 75%....... 80%....... 90%....... 95%....... 99%........ 마침내 나는 물로 가득 찹니다. 아니, 나는 물이 됩니다.


    화면은 물 속 영상으로 가득 찬다. 화면이 확장되어 관객석까지 영상이 비춰도 좋다. 무대는 어둠 속에 잠기고, 화면과 남자2만 남는다. 남자2는 눈을 뜨고 허공 위를 바라본다. 말투는 여전히 느리고 차분하다.


    남자2 : 나는 지금 깊은 물속으로 빠져듭니다. 가늠할 수 없이 차갑고 어두운 물속입니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내 자신처럼 편안하기만 합니다. 내 입에는 미소가 떠오릅니다. 물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 웃음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아, 지구 속이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하다고 했던 사람들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지구 속은 이렇게 끝없이 넓고 영원히 깊은 물로 가득 차있으니까요. 나는 지금 지구 한가운데로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남자2가 얘기하는 동안 무대는 점점 어두워진다. 암전


    (끝)



    * [많은 사람들이 거울 속에서 익사했다.] - 라몽 고메즈 드 라 세르나의 책 <우스꽝스러운 사람 귀스타브>에 나오는 구절. 이 글에서는 ‘익사했다’라는 과거형을‘익사한다.’라는 현재형으로 바꾸었습니다.


    * 희곡 안에 나온 ‘무거운 것들은...’로 시작하는 시는 박방희 시인의 [물]입니다.



    [물의 기억] 줄거리

    ‘남자1’이 욕실로 들어와 옷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선다. 거울에서는 ‘남자1’의 그림자인 ‘남자2’가 나타난다. ‘남자1’과 ‘남자2’는 마주보며 같은 동작으로 면도를 한다. 면도를 마친 ‘남자1’이 욕조로 들어가 물속에 몸을 담그자, ‘남자2’가 거울에서 나와 ‘남자1’이 벗어놓은 옷을 차려입고 얘기를 시작한다. ‘남자1’과 ‘남자2’는 번갈아가며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남자1’과 ‘남자2’는 결국 동일 인물이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남자’라고 통칭한다.)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물을 좋아했다. 단순히 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하루 종일 욕조에 머물면서 많은 양의 물을 마셔대곤 했다. 걱정이 된 그의 부모님은 그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뾰족한 치료법은 없었다. 그저 크면서 나아질 거라는 의사의 모호한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남자’가 9살 때 ‘남자’의 어머니는 병고 끝에 숨을 거두었다. ‘남자’와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유언대로 화장한 유골 가루를 호수에 뿌렸다. 유골 가루가 호수로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남자’에게 극심한 갈증을 불러일으켰고, 견디다 못한 ‘남자’는 호수로 뛰어들었다. 호수 속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반대로 끝없는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호수 밑바닥은 그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아버지가 호수로 뛰어들어 그를 구해주었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뺨을 얻어맞은 ‘남자’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했다.

    그 후 ‘남자’에게서는 물을 좋아하던 습성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는 순탄하게 성장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도 취직했다. 여자 친구인 영주와의 행복한 미래도 꿈꾸게 되었다. 모든 것이 좋아보였다. 영주와 연애를 한지 2년이 되었을 때 ‘남자’는 영주의 부모님에게 초대를 받았다. ‘남자’는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지만 풍족하고 자신만만한 영주 부모님과 대면하자 과연 자신이 원하던 삶이 이런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영주 부모님도, 영주도, 모두 자신만의 얘기를 떠들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랜 세월동안 잊고 있었던 갈증이 다시 ‘남자’를 덮쳤다. ‘남자’는 참아보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는 결국 영주의 집 정원에 있던 수영장으로 뛰어들었고 영주와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다.

    영주와 헤어진 후 몇 달 동안, 남자는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인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집에 혼자 있던 ‘남자’에게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불이 난 공장에서 아버지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남자’는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공장에 도착했다. 거대한 화염이 공장을 뒤덮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힘 앞에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그 때 구조대원들이 심각한 화상을 입은 아버지를 구조해 냈다. 아버지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틀 뒤에 숨을 거두었다.

    혼자 남은 ‘남자’는 집 밖에는 나가지 않은 채 물을 가득 채운 욕조 안에서 하루 종일 머문다. 물속에서 그는 최초로 지상으로 올라왔던 고대 물고기를 떠올린다. 왜 그 ‘선조물고기’가 시원하고 풍요로운 물속을 떠나 메마른 먼지투성이의 지상으로 올라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선조물고기’가 자손들에게 물려준 삶의 활력, 야망, 의지가 왜 자신에게는 결여되었는지 의문이다. 남자는 자신이 마치 ‘장님물고기’ 같다고 생각한다. 눈과 부레 등 기능이 퇴화하는 쪽으로 역행하며 살아온 ‘장님물고기’와 자신이 비슷하게 여겨진다.

    ‘남자’는 지상의 더위와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물과 하나가 돼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라는 데 나머지 30%만 없으면 자신도 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면도칼을 꺼내 자신의 왼쪽 손목을 긋는다. 솟구쳐 흐르는 피와 함께 그의 30%의 불순물도 함께 빠져나간다. 그리고 불순물이 빠져나간 빈자리로 물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마침내 그는 100%의 물이 된다. ‘남자’는 끝없이 깊은 영원한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박선

    박선

    1977년 서울 출생

    세종대 서양화과 졸업

  • 김철리 연출가·배삼식 극작가

    올해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대체로 수준이 높았다. 희곡이 지녀야 할 기본적 형식을 탄탄히 갖춘 작품들이 많았다. 작품의 완성도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자신이 대면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모두 치열하고 진지했다. 귀한 재능, 아까운 작품들이 제법 있었다. 희곡 한 편이 완성되는 과정은 길고 지난하다. 귀한 씨앗들이니 쉽게 버리지 마시기를. 오래 보듬어 잎도 보고 꽃도 보고 열매도 보시길 바란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한 작품들은 김하울의 ‘숨쉰 채 발견되다’, 정민지의 ‘아이들’, 박세일의 ‘잉어’, 박선의 ‘물의 기억’ 등이다. ‘숨쉰 채 발견되다’와 ‘잉어’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좋았다. 강렬한 극적 에너지가 돋보였지만 그만큼이나 인물과 상황 설정에 있어 작위가 두드러진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아이들’은 무정형의 비사실적 세계를 형상을 통해 구체화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벼리지 못한 듯해 아쉬웠다.

    좋은 작품은 우리를 매혹한다. 매혹 앞에서는 군말이 필요없다. 심사위원들에게는 ‘물의 기억’이 그러했다. 이 이야기는 아름답고 견고하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고 그것을 풀어놓은 솜씨 또한 뛰어나다. 문학성과 함께 무대에 대한 이해, 연극적 상상력을 갖추었다. 귀한 재능이며 드문 목소리다. 심사위원들은 반가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올해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 박선

    박선

    1977년 서울 출생

    세종대 서양화과 졸업

    그동안 혼자만의 글을 쓰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객관적인 기준이 절실히 필요했었는데 이렇게 생각지 못하게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긍정적인 평가와 용기를 얻게 되어 기쁘고 영광입니다. 특히 제 스스로 훈련이 부족했던 희곡 부문에서 당선되어 기쁨보다도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앞으로 이보다 더 좋은 글을 쓰라는 뜻으로 알고 깊이 새기겠습니다. 부족한 희곡을 좋게 보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관계자분들, 동아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됐다고 해서 당장 작가로서의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아마도 어제와 다름없는 내일이 되겠지만, 문학에 대해 그리고 제 자신의 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미 문학적 자산이 넘쳐나고, 과학 기술이 매시간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우주 시대가 열리고, 인공 지능의 실용화를 앞두고 있는 현대에 과연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됩니다. 결국 문학 스스로가 이 시대를 관통해서 소비될 수 있는 길을 꾸준히 모색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독자 없는 글쓰기라는 자기모순을 넘어서서 세상과 맞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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