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의류수거함

by  김범렬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재활용 의류수거함 뱃구레가 홀쭉하다.
    보름달 풍선처럼 제 깜냥 부푸는 변방
    푹 꺼진 분화구 속에 적막 하늘 담고 있다.

    잠 못 든 한 사내가 그 옆에 누워있다.
    이웃한 박주가리 덩굴손 감아올리고
    첫 대면 어색한 동거에 치열한 자리다툼.

    몇 끼나 걸렀을까? 덩치 큰 하마 같이
    버려지는 헌옷가지 한 입에 삼켜버릴
    장벽을 허무는 바람, 아린 속 어루만진다.

    느꺼웠던 지난날 주머니처럼 까집어보다
    하릴없는 남루에 먼지만 뒤집어쓴
    저 와불 벌떡 일어나 주린 배를 채운다.
    김범렬

    김범렬

    1961년 경기 여주 출생

  • 이근배·이우걸 시조 시인

    동아신춘의 전통에 부끄럽지 않게 질과 양 면에서 풍성한 한해라 생각되었다. 도전적이고 젊고 의욕적인 신인을 찾아내어 우리 시조시단의 지평을 넓히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생각이었다.

    적지 않은 수준급의 작품 속에서 처음 가려낸 것이 백윤석의 ‘황진이2015’, 정미경의 ‘목인(木印)’, 박화남의 ‘정석(丁石)을 읽다’, 김범렬의 ‘의류수거함’이었다. 요즘 시조들이 현대라는 의미에 너무 비중을 두어 시어들이 거칠어지고 또 수다스러워지고 있는데 비해 ‘황진이2015’의 경우 오히려 고전적인 단정함이 눈에 띄었다. ‘목인(木印)’의 경우 나무속에 새겨지는 이름의 소중한 의미를 정감 있게 노래하고 있었다. ‘정석(丁石)을 읽다’는 단수 속에 응결해낸 다산의 생애가 역동적이고 운치 있게 보였다. ‘의류수거함’에는 신산한 우리시대의 삶이 다양한 이미지로 그려져 있었다.

    다시 몇 번의 숙독과 의견 교환 끝에 ‘정석(丁石)을 읽다’와 ‘의류수거함’이 남게 되었다. 정갈한 고전미가 그만의 개성으로까지는 읽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식의 깊이가 너무 얕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앞의 두 작품을 제외시켰다.

    남은 두 작품은 확연한 개성으로 비교되어서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다산의 생애를 단장으로 그려낸 ‘정석(丁石)을 읽다’는 운치도 있고 비유도 그럴듯했고 시조의 본령이 단수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뽑고 싶은 매력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단수를 당선작으로 내세웠을 때의 부담이 적지 않음 또한 사실이고 문화유적, 유물 혹은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빈번히 취하고 있는 최근의 시류도 꺼림칙했다. 오늘이 있고 오늘의 생활이 있는 시조가 더 절실하지 않을까 하는 의미에서 최종적으로 ‘의류수거함’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어둠을 그려내는 분장 없는 이미지가 있고 주제를 이끌어가는 역동적인 패기가 있다.

    이 시인이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 알 수 없지만 포즈보다는 가식 없는 삶의 현장에서 채굴되는 언어로 시조의 영역을 넓혀 가리라는 기대를 하며 대성을 빈다.
  • 김범렬

    김범렬

    1961년 경기 여주 출생

    겁도 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아침부터 당선통보 전화를 기다렸다.

    겉으론 태연한 척 했으나 속으론 이루 말할 수 없는 초초감이 엄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렵기까지 한 순간.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신춘문예 당선통보였다. 순간 지나간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기자의 질문에 울먹이며 대답했지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당황했고, 한편 기쁨이 북받쳐 엉엉 울었다. 신춘문예 최종 결선에 오르기만 7년, 참으로 머나먼 길을 돌아 돌아왔기에 더할 나위 없이 기쁘기만 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직장에서 돌아와 밤 9시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운동을 한다기보다 머릿속에서 시조를 쓰고, 또 썼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하며 퇴고를 거듭했다. 시조를 쓰다보면 잘 안될 때가 많다. 그러다 문득 어떤 사물을 보고 소재와 서사(敍事)를 떠올리곤 한다. 어느덧 10년 넘게 반복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집 앞 재활용 의류수거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박주가리 덩굴 한 그루가 전봇대를 타고 올라와 마침내 의류수거함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치열한 자리다툼을 하는 우리네 삶처럼, 지금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다 같이 잘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주위엔 배고픈 사람들이 많다. 긍정의 힘을 믿고 굶주리며 사는 이웃이 어디 한두 사람뿐이겠는가. 나의 시조 짓기 또한 그랬다. 감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지만 해낼 수 있다는 각오와 실천으로 오늘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저의 부족한 작품을 간택해주신 심사위원께 큰절을 올린다. 아울러 동아일보사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 드린다. 알고 보면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의 어떤 ‘작은 싹수’ 같은 것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어주신 윤금초 교수님,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주신 문우 여러분이 계셨기에 오늘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늘 제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주)경동 명예회장께도 감사드린다.

    늘 곁에서 내조해주는 아내와 잘 성장한 아들딸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고향집을 홀로 지키시는 어머니, 8년 전부터 중증치매를 앓고 계시는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우리 정형시를 열심히 쓸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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