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뉴질랜드야?”
처음 내가 뉴질랜드에 갈 계획을 밝혔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공기가 좋아서.”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순히 물러섰다.
“그렇지. 공기 하난 끝내주지.”하고,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여행하기 좋은 곳이니까.”라거나, “나도 <반지의 제왕> 재밌게 봤어.” 따위의, 자기만의 해석을 곁들여 이해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는 집요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직 나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기에게만은 털어놔도 되지 않느냐는 듯, 은밀하게 거리를 좁혀오면서 다시 물었다.
“공기가 좋은 곳이 거기만은 아니잖아. 왜 하필 뉴질랜드야?”
뭔가 다른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똑같은 질문의 반복이다. 그들은 은연중에 내가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도 파해법(破解法)은 존재한다. 같은 일을 여러 번 겪다보니 알게 됐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는 그 대답을 들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대답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진실성이 아니라, 질문자의 의도를 기민하게 파악하는 능력이다.
“부상 때문이야.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을지도 몰라. 의사가 유리어깨라면서, 언제 부서져도 이상할 게 없다고 했어. 긴 휴식이 필요하대. 야구를 할 수 없는 곳, 야구와 관계된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는 장소가 필요해. 하루 종일 숨만 쉬면 되는 곳 말야. 그래서 공기가 그토록 중요한 거야.”
그쯤 되면 남은 사람들도 맞장구를 친 뒤, 만족감이 담긴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직장으로, 애인 곁으로 떠나갔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렇다면 역시 뉴질랜드지.”
물론 뉴질랜드에서도 사람들은 야구를 한다. 남극에도 야구를 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세상 어디를 가도 야구를 떠올리지 않을 방도는 없다. 죽은 잔디도, 낮은 하늘도, 사과나무와 지구의 중력까지도 모두 야구를 떠올리게 만들기는 충분하다.
하지만 내게 질문을 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런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바라던 대답을 들었고, 그것만으로 그들에겐 충분했던 것이다.
2
뉴질랜드에는 2년째 살고 있는 여자친구가 있다. 우리는 주말에 한 번씩 인터넷 메신저로 대화를 나눈다. 처음엔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 붙들고 있던 것이, 이제는 짧은 안부를 묻는 정도로 단순해졌다.
대화의 끝에 그녀는 “언제 와?”하고 묻고, 나는 “곧 갈게.”라고 대답한다. 그게 언제냐고 따져 묻던 게 일상이던 그녀는 이제는 지쳤는지 “잘 자.”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나도 “잘 자.”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녀는 “사랑해.”라고 말하고 메신저에서 퇴장한다.
가끔 나는 맥주를 마시며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을 읽어보기도 한다. 그러면 이미 ‘그쪽에’ 그녀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그녀의 생활로 돌아가 버린 것이고, 나는 내 생활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마우스를 클릭해 메신저 창을 닫고, 컴퓨터를 끈다. 스탠드의 불빛을 조절한 뒤, 침대로 가서 잠이 든다.
그녀가 뉴질랜드로 떠난다는 얘기를 하러 왔을 때, 나는 내 인생 최악의 해를 보내고 있었다.
국내 유수의 프로리그 스카우트들이 지켜보는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결승전에서 3과 3분의 2이닝 동안 8피안타 2피홈런 4사사구 8실점을 기록한 뒤, 감독의 욕을 실컷 얻어먹으며 마운드에서 질질 끌려나왔다. 의사는 어깨부상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상하체의 밸런스가 깨진 탓이고 결국은 뒤틀린 거골하관절(距骨下關節)이 화근이라고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복잡하게 들리지만 정리하자면 긴 재활훈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찾아왔을 때도 나는 재활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완쾌해 마운드에 서고 싶었기 때문에 재활센터에서 살다시피 하던 시기였다. 조금만 어깨를 움직여도 통증이 심했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젊고 패기가 넘쳤다. 중고등학교 때 감독과 코치가 나를 무리하게 등판시킨 탓이라고 주위에선 나보다 더 열을 올렸지만 정작 나에게 그들에 대한 미움 같은 건 없었다. 어깨는 금방 돌아올 것이고, 잃어버린 기회도 금세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승리하면 배울 수 있다. 하지만 패배하면 모두 배울 수 있다.
내 락커에는 월드시리즈에 3번 등판해 3번 모두 완봉승을 거둔 뉴욕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이 말한 명언이 붙어 있었다.
물론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가 봐. 누가 찾아왔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스트레칭에 열중하고 있을 때, 재활센터에서 알게 된 역도선수가 와서 알려주었다. 건물 밖에 날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거였다. 역도선수는 그렇게 예쁜 여자와는 처음 말해보는 거라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에게, 형은 기준이 낮아서 예쁜 여자를 많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라고 위로해주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였다. 그녀는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등나무 벤치에 앉아 구두 끝으로 열심히 낙엽을 그러모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여기 있을 줄 알았어.”
그녀는 마치 준비운동이라도 하듯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 뉴질랜드에 가려고.”
“그래?”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야 그게.”
“뭐가 뭐야.”
“왜 가냐고 안 물어봐?”
그녀는 따지듯 물었다.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어깨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가볍게 돌려도 역시 통증이 느껴진다. 뼈와 뼈 사이에 뭉툭한 나무 조각이 틀어박혀 제멋대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럼 이유도 없을까봐? 어깨 좀 가만 놔 둬. 사람이 말할 땐 집중 좀 해.”
“집중하고 있어. 어깨는 어깨일 뿐이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고 있다고.”
“사람이 말할 땐 눈을 마주쳐야지.”
“눈이고 어깨고 간에, 진심으로 듣고 있다니까?”
“난 듣는 자세를 말하는 거야. 진심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녀가 소리를 빽 질러서 나는 한 발 물러섰다. 팔을 내려놓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 됐어?”
“미안해.”
그녀는 조용히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그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에 번진 눈물을 닦아 주었다.
“무슨 일인데?”
나는 머쓱해져서 물었다.
“별 일 아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필요해서 가려는 거 아냐?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하는 게 당연한 거지.”
“나 사실 고백할 게 있어.”
그녀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사실 나이를 속였어. 나…… 스무 살이야.”
나이와 뉴질랜드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몰라 잠시 당황했지만, 일단은 현재의 화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행이네. 분위기 잡기에 난 뭐 결혼이라도 한다는 얘긴 줄 알았지.”
“미쳤어? 내가 오빠를 놔두고 가긴 어딜 가.”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거야?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이?”
“오빠랑 처음 만났을 때 난 미성년자였어!”
“아!”
나는 뭔가 깨달은 듯 감탄사를 뱉어내긴 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클럽은 어떻게 들어간 거야?”
“위조신분증이야. 친구가 알려줬어. 칼로 도려내고 사진을 붙인 뒤에 냉동실에 넣어두면…….”
“아……. 대단한데.”
“어쨌든 미안해.”
“미안하긴, 고맙지. 한 살이라도 더 어려줘서.”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변태.”라고 비난한 뒤, “당연히 고마워해야지.”하고 뿌듯한 얼굴이 돼서 말했다.
시답잖은 고백으로 에너지를 다 써버린 그녀는 무척 지쳐버린 듯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늦은 시간이라 음식점은 대부분 문을 닫은 뒤였다. 호프집에 가서 안주를 잔뜩 시키고, 그녀가 마실 맥주도 주문했다.
“오빠는 안 마셔?”
“어깨 때문에.”
“그건 언제 낫는 거야?”
“알 수 없지. 노력하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지도.”
그녀는 맥주를 홀짝이면서,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자꾸만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소시지를 잔뜩 먹었다. 그녀가 맥주를 한 모금, 내가 소시지를 하나, 그렇게 술과 안주는 조화롭게 착실히 줄어들어갔다.
“그래서 얼마나 있으려는 건데?”
마침내 싹 비워버린 접시로부터 허리를 편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물었다.
“4년.”
“4년? 그건 너무 긴데.”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4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봤다. 훈련, 시합, 합숙, 시합, 전지훈련, 그리고 시합, 그리고 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지옥처럼 긴 시간이다.
“길지, 그치? 불안하지 않아?”
“내 말이 그 말이야.”
“하지만 방법이 있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혼인 신고를 하는 거야.”
난 그녀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술이 들어간 뒤의 그녀는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구나. 그런 방법이 있었어.”
“어떻게 생각해?”
그녀의 눈은 기대감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넌 나를 속였어. 난 졸지에 미성년자를 유혹한 범법자가 되었다고. 그런 여자와 혼인신고를 한다고? 그건 고민을 좀 해봐야겠는데.”
“오빠, 나 지금 진지해.”
“취한 건 아니고?”
나는 그녀가 뒤늦게라도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하던 대답 대신 어색하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우리 어차피 결혼할 거잖아.”
“아마 그렇게 되겠지.”
“아마라니, 그럼 안 할 거라는 거야?”
“해야지.”
“그럼 하자. 혼인신고.”
“언제?”
“당장.”
“지금은 밤이야. 밤에는 법원도 쉬지.”
“내일 문 열면 하면 되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오빠야말로 이상해. 어차피 우리는 결혼을 할 거고, 그럼 혼인신고도 하게 될 거잖아. 어차피 하게 될 거 먼저 하고 나중에 하는 게 뭐가 달라?”
그녀는 거기에 우리의 미래라도 그려져 있다는 듯, 자신의 손바닥을 박자에 맞춰 짚어가며 말했다.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하고, 느리지만 누가 들어도 조리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내 뜻을 전달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지. 평생을 함께 살아갈 수도 있고, 같은 날에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 모든 게 우리 뜻대로 안 될 수도 있어. 늘 재수가 좋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서서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두통의 원인이 어깨에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팔을 빙빙 돌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야구야.”
방점을 찍듯 마지막 한 마디를 단호하게 내뱉고 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했던 말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그 말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결연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올 거야?”
한참 나를 지켜보던 그녀가 물었다.
“뉴질랜드에 올 거지?”
“그래.”
“언제?”
“곧.”
“곧? 그게 언제야.”
“되는 대로 빨리.”
“약속해.”
“약속할게.”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혼인신고보다는 훨씬 나은 제안이었으므로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안 오기만 해봐. 난 어리고 예쁘단 말야. 남자들이 가만 두겠어?”
“그러니 난 어떻겠어. 이렇게 건장하고…… 건장한 남자를 두고 간다고?”
“그러니까 혼인신고를 하자는 거야. 여자가 수작을 걸어오면 반지를 보여주는 거지. 나 임자 있어요, 하고.”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런 거 없어도 난 안 흔들릴 자신이 있는데?”
“오빤 겁쟁이야.”
그녀는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옳은지도 모르지만, 어찌됐든 이 정도로 대화가 마무리되는 게 나로서는 다행스러웠다.
그녀를 집까지 태워주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불편하면서도 안심이 됐다. 그녀가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무서웠다. 집 앞에 와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일주일 뒤야.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돼서 더는 못 만날 거야.”
“그래? 마지막 날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안 돼. 그때는 더 바쁘지.”
“그럼 오늘만이라도 좀 더 같이 있을까?”
“안 돼. 엄마가 기다리셔.”
“그래, 그럼 들어가.”
하지만 그녀는 차문을 잡고 나를 바라보며 잠시 그대로 있었다. 무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잊은 듯이, 혹은 하려고 했던 말을 잊은 듯이. 그게 무엇인지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차문을 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쪽으로 걸어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그녀는 메신저로 왜 그 날 자신을 그냥 보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날 밤 나와 함께 있길 바랐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날 자신이 나에게 매몰차게 했던 말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유일한 것은 내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내가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 주자, 그녀는 자신이 원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다.
“정말 모르겠어?”
나는 메신저 창에 뜬 그녀의 메시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정말이지 그녀가 원했던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게 잘못이 있다는 양 말하는 이유도 알 수가 없다.
그런 불완전한 대화의 끝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 그녀는 “언제 와?”하고 묻는다. 나는 여느 때처럼 “곧 갈게.”라고 대답하고,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끝으로 메신저를 떠난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을 정독한다. 그리곤 마우스를 클릭해 메신저 창을 닫고, 컴퓨터를 끈다. 스탠드의 불빛을 조절한 뒤, 침대로 가서 잠이 든다.
3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면서 동체를 심하게 떨었고, 그 바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풍경을 적시는 가는 비였다. 남아 있는 약기운 탓인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격납고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 비행기들이며 빗물에 거뭇하게 젖어드는 아스팔트, 오클랜드 국제공항이라고 써진 오래된 간판, 여행엽서에서나 보곤 했던 열대성 나무들과 숨을 쉬듯 이따금 몸을 뒤척이는 잔디, 그 위로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떠다니는 먹구름까지…….
기내방송은 들리지 않는 영어로 뭔가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었고, 그제야 나는 한국을 떠나왔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채 완성하지 못한 입국신고서를 꺼내 빈 칸을 마저 채웠다.
Occupation: STUDENT
Purpose Of Visit: TRAVEL
How long do you intend to stay in New Zealand?: 2 MONTHS
내가 기재한 꽤 많은 것들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학생도 아니었고, 이곳에서 얼마나 머무르게 될 지는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이렇게 쓰는 게 별 탈 없이 입국하는 방법이라고 여행책자에 나와 있었을 뿐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 찾을 수하물이 없었기 때문에 곧장 세관으로 갔다. 세관심사는 까다로웠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짐을 꺼내 풀어헤치고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받았다.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쉽게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공항 안내 팸플릿을 읽었다. 형편없는 내 영어실력으로는 읽어낼 수 있는 문장이 많지 않았다. 팸플릿에 적힌 내용 중 5% 정도만을 불완전하게 이해했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였다. 문장이 되지 않고 흩어진 단어들은 내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그런데도 오래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그 의미가 활자로부터 떠오를 것처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앞선 사람이 두엇쯤 남자 쓸모없어진 팸플릿을 복도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큼 짐이 적은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이상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깨에 멘 백팩 안에는 세면도구와 티셔츠, 청바지, 면세점에서 산 말보로 4보루(그녀에게 부탁받은), 여행책자, 비행기에서 챙겨온 기내용 슬리퍼가 전부였다.
30분이 넘게 줄이 줄어들길 기다렸지만, 정작 내 차례가 오자 심사관은 내 전신을 위아래로 슥 훑고는 썩은 귤을 보기라도 한 듯 그대로 통과시켰다.
입국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서른 명쯤 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공항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동양인이기도 했지만,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발꿈치를 들고는 끊임없이 통통 튀어 오르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여기! 여기!”
그녀는 가까이서 내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늙었어?”
“그럴 리가.”
“아냐, 늙었어. 눈가에 주름 생긴 거 봐.”
“그랬겠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넌 하나도 안 변했다.”
내 말에 그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외모가 아니라 성격을 지적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착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안 추워?”
“한국은 여름이야. 한여름이라고.”
“아, 그렇지. 하긴, 나도 처음엔 그랬어. 여긴 계절이 한국과는 반대니까.”
가방에서 스웨터를 꺼내 입는 동안 그녀는 참지 못하고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기분이 되게 이상해.”
“뭐가?”
“어색할 줄 알았는데 하나도 어색하질 않아. 어제 만났던 것처럼.”
“그러게.”
“보고 싶었어. 오빠는?”
“나도 그랬어.”
공항에서 나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옆구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땀냄새가 밸 거라고 말하며 밀어내도 소용없었다.
“난 괜찮은데 왜. 혹시 나한테서 땀 냄새 나? 그래서 그래?”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됐어. 오빠 냄새는 좋기만 한데 뭘. 이게 얼마만이야.”
공항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거셌다. 그새 빗발도 굵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입고 있던 더블 롱코트를 벗어 우리 머리 위에 들어 올리고, 내 허리를 안은 뒤 주차장 쪽으로 이끌었다.
당연히 버스를 탈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 승용차가 있었다. 연식이 오래돼 보이는 빨간색 코롤라였다. 그녀가 면허를 땄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였다.
“렌트한 게 아니고?”
“중고야. 일부러 말 안 했어. 놀래켜줄려고.”
“많이 놀랐어. 면허는 언제 딴 거야?”
“얼마 안 됐어. 여기는 워낙 넓어서 차 없이는 살기 어려워. 일단 타. 가면서 얘기 해.”
그러면서 그녀는 구두를 벗어 뒷좌석에 던져놓았다. 맨발로 운전해야 발바닥의 감도가 좋아져서 운전이 잘된다는 거였다.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맨발이 되었는데도 차는 덜컹거리며 출발을 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 한 번,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때 한 번씩, 덜컹덜컹 차는 나아갔다.
중고차는 이름까지 있었다. 헨리였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헨리는 참 착한 아이’였다. 초보운전자를 주인으로 둔 덕에 여기저기 까이고 생채기가 나면서도 한 번도 말썽을 부리거나 꾀를 부리지 않았다. 주인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였다.
“헨리가 없을 땐 버스를 탔어. 버스정류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자전거를 매어 두고 버스를 타. 그러면 목적지까지 가. 하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버스가 목적지로 정해둔 곳까지야. 버스 노선도가 내가 갈 수 있는 최종적인 국경선인 거야. 왜 먼 타국 땅까지 와서 갇혀 있어야 돼?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
“화가 났구나.”
“응. 그러다 헨리를 만났어.”
“잘 됐네.”
“운이 좋았어. 난 원래 운이 좋잖아.”
그녀가 우쭐대며 말했다.
공항 근처를 빠져나오자 헨리는 금세 해안가를 낀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전 솜씨를 뽐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조수석에 앉은 나로서는 조마조마했다. 옆으로 붙는 차를 겁내면서도 속력은 결코 줄이지 않는 운전이었다. 성격대로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건 주행차선이 한국과는 반대로 되어 있는 뉴질랜드 도로였다. 운전석도 반대였다. 즉 주행차선은 왼쪽이고 운전대는 오른쪽에 있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발가락에 쥐까지 나고 말았다.
“여긴 한국하고 많이 달라.”
“그래 보인다.”
“그래도 난 빨리 적응한 편이야. 영어도 금방 배웠어.”
“난 좀 늦을 거야. 원래 나 뭐든 배우는 게 늦거든. 철도 늦게 들고. 뭐든지 늦지.”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가끔 내 자신이 공룡처럼 느껴졌다. 몸은 크지만 뇌는 작다. 겉모습에 잘 속는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거대하지만, 조금만 약삭빠른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어수룩할 수 없다.
누구나 단번에 이해하는 걸 나는 몇 번씩이나 되풀이 생각해 보고, 또 설명을 들어야만 겨우 깨달았다. 그것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로 써 봐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인류가 몇 번 더 진화를 거듭한 뒤에도 나는 여전히 공룡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녀조차 자기가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모른다. 똑똑한 사람들은 의외로 잘 속는다.
“아냐. 나도 빨리 배웠는데 뭘. 일상적인 대화는 3개월도 안 걸렸어. 중학교 영단어 실력이면 무난해.”
“공부를 끊은 게 딱 그때야.”
“아냐. 오빠는 다 잘하니까 금방 배울 거야.”
“다 늙어서 뭘 잘 할 수 있겠어?”
“그건 그래.”
그녀는 점심을 먹고 가자며 와이테마타(Waitemata)항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차를 세웠다. 2층 창가 자리를 잡았다. 내려다보면 해안선을 따라 수십 척의 요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멋진 광경이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새하얀 요트들은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를 따라 천천히 넘실댔다.
갈매기들은 젖은 몸을 말릴만한 장소를 찾으려는 듯 분주하게 회색 하늘을 날아다녔다. 낡은 외투를 입은 한 노인이 우산을 받쳐 들고 갈매기들을 향해 기다란 과자를 든 손을 뻗고 있었지만, 갈매기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허공을 선회했다.
나는 메뉴판을 받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덮었다. 대부분 모르는 영어였고, 안다 해도 어떤 요리인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내 것까지 주문을 했다. 막힘없는 영어였다. 피쉬 앤 칩스와 화이트 와인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가격대비 만족도가 높은 훌륭한 요리 선택이었다.
“어때? 고급요리까지는 아니어도,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거든.”
“감자튀김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벌써부터 이 나라가 좋아지려고 하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여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꼭 와보고 싶었어. 사랑하는 사람이랑.”
“여기 말고도 가고 싶은 데가 더 있어?”
“응. 다 가 보자. 나랑 같이.”
“그래. 리스트 뽑아 놔.”
“약속.”
“그래, 약속.”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사소한 일들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NZMA라는 매니지먼트 전문 사립학교에서 Hospitality를 전공하고 있었다. 2달 뒤 National Culinary Fare가 열릴 것이고, 요즘은 거기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올 즈음부터 그녀의 일과가 빡빡해진 것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레스토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기 때문에 집에 오면 남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 시간을 쪼개서 과제를 하고, 대회 연습을 하고, 영어 공부를 한다. 앞으로는 그 시간조차 쪼개 나와 놀아줘야 한다.
“오빠는 어떻게 지냈어? 아픈 데는?”
“건강해. 넌?”
“내가 아픈 거 봤어? 너무 건강해서 문제지. 내가 정말로 아플 때는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줄 것 같아.”
“그러게. 걱정 되네.”
“오빠야말로 어때? 어깨 말야.”
“공만 던지지 않으면 문제없대. 그러니까 문제없을 거야.”
“야구 다시 하고 싶지 않아?”
“다 늙어서 무슨 야구야.”
“미안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훌쩍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몸 어딘가에 있는 스위치를 실수로 건드린 것만 같은, 너무나 갑작스런 눈물이었다.
원래 어떤 여자든 눈물을 흘리면 무척 곤란하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경우엔 특히 더했다.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에 울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대체 어디가 문제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멈췄고, 웨이터를 부르더니 커피를 달라고 부탁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면서.
“오빠, 다 먹었지?”
“응.”
“난 오빠가 오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
“모든 걸 다 잊었다고 생각했어.”
“온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러고는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왔잖아.”
“응. 맞아. 고마워.”
그녀는 내게 손을 달라고 했다. 테이블 위에서 내 두 손을 꼭 잡고, 레스토랑을 나갈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 탓에 남은 커피를 마실 수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운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내 손을 내어준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4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는 공항에서 1시간 넘게 떨어진 시골에 있었다. 방값이 싼 곳을 알아보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내가 운전하겠다고 나섰으나 막무가내였다. 오늘까지는 내가 손님이라는 거였다.
긴 운전이었지만 그녀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빅뱅의 신곡을 틀어놓고 따라 부르다가, 곡과 곡 사이에 기분 좋다는 말을 마흔 번쯤 반복했다.
창밖으로는 들판과 둔덕의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낮은 울타리와 오두막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낮은 울타리와 오두막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낮고 단조로운 서너 마디 멜로디의 무한한 반복으로 이루어진 기나긴 자장가를 듣는 것 같았다.
처음엔 여유롭게 풀을 뜯어먹는 비에 젖은 양떼를 보고 감탄했지만, 12번씩이나 똑같은 광경을 보자 심드렁해졌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뭘 하고 놀아?”
“What a beautiful sky!”
“응?”
“여긴 모든 게 멀리 떨어져 있거든. 도시도, 영화관도, 마트도……. 그러니까 연인끼리 손잡고 나와서 하늘을 보면서 감탄하는 거야. 그게 제일 재밌는 놀이인 셈이야. 어떻게 생각해?”
“멋지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냐. 무조건 멋진 거야. 분명해.”
“지루할 수도 있잖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하긴, 연인이 없으면 하늘을 같이 볼 사람도 없을 테니까.”
17번째 양떼들을 마지막으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차는 집 앞에 주차를 하는 중이었다. 사위가 어두워 헤드라이트 불빛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까지 굵어져 시야가 가리자 그녀는 무척 괴로워하면서 전진 후진을 반복했다. 나는 딜레마에 빠진 그녀를 내리게 하고, 대신 주차를 해 주었다.
차에서 내릴 때 보니 벽에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과연 헨리의 오른쪽 범퍼도 도색이 벗겨져 있었다.
“벌써 몇 번 해먹은 모양인데?”
“응. 여기 주차공간이 너무 좁아서.”
“주차는 원래 어려워.”
“그러니까 말야. 오빠가 오니까 벌써 편해졌어.”
그녀는 2층짜리 단독주택의 1층 원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문이 따로 없는 게 신기했다.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유리문을 현관문처럼 열고 닫으며 안팎으로 출입했다.
방은 옅은 핑크색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8평 남짓 되는 작은 원룸에 침대와 화장대가 붙어 있고, 반대쪽에 화장실과 싱크대가 있는 단순한 구조였다.
그녀는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켜고, 그 옆에 차키를 놓아두었다.
어디선가 토끼 한 마리가 튀어 나오더니 먼발치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처음엔 키우는 토끼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문이 열린 틈을 타서 들어왔나, 했을 뿐이다. 하지만 비를 맞은 행색이 아니었다.
“로키야, 일루와. 엄마 보고 싶었어?”
그녀가 토끼를 불렀다. 이름 탓인지, 아니면 엄마의 과분한 사랑을 받은 탓인지 녀석은 엄청난 거구를 자랑했다. 로키는 낯선 남자를 보고 경계심을 드러내며 뒤로 슬금슬금 후퇴하더니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아예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밑으로 손을 몇 번 뻗어보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돌아섰다.
“포기, 포기. 오빠 감기 걸리겠다. 옷 벗어.”
그녀는 내게 오더니 젖은 점퍼와 티셔츠를 벗겨냈다. 엄마가 아이를 다루듯이 천천히 옷을 벗겼다. 나도 지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코트와 젖은 티셔츠를 벗겼다. 그녀가 내 청바지를 벗기면 나도 보복하듯 그녀의 면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우리는 별 수 없이 알몸이 되어 서로를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사위가 어둡고 조용했다. 빗소리와 초침 소리, 그리고 서로의 숨소리만 분명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서로의 체온에 집중했다.
침대 아래에서 나온 로키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당황스러운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씻어야지.”
“근데 나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게 있어. 말해도 돼?”
“뭔데?”
“오빠랑 자고 싶어.”
“어렵지 않은 부탁이야.”
우리는 씻지도 않은 채로 몸을 섞었다. 애무는 짧고, 행위는 격렬했다. 처음 그녀와 잤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섹스였다. 그때도 비가 내렸고, 우리는 땀냄새를 풍기며 서로의 젖은 몸을 핥았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숫기 없는 육중한 토끼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별다를 것 없는 똑같은 행동이 오래도록 지속되자, 녀석도 어느 쯤에는 흥미를 잃은 듯 침대 아래로 다시 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몹시 지쳐서 침대 위에 시계추처럼 늘어져 있는 내게, 그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오빠, 담배 끊었어?”
“아니.”
“난 끊었어.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어. 난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난 변했어.”
“그래?”
“나이가 들었으니까.”
“잘했어.”
나는 그녀를 칭찬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한 대 피워도 될까?”
“응. 괜찮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에서 튀어나가 민첩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그녀는 선반에서 재떨이로 쓸 만한 적당한 크기의 물컵을, 나는 가방에서 말보로와 라이터를 꺼내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뒤, 허공을 향해 길게 뿜어냈다.
“나도 한 모금 주면 안 돼?”
내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얼마나 끊었던 거야?”
“1년.”
“역시 근성이 있어. 그 정도면 보상을 받아야지.”
나는 내가 피우던 담배를 그녀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녀는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는 곧바로 기침을 했다.
“어지러워. 왜 이런 걸 여자친구한테 주는 거야?”
“달라고 한 건 너야.”
“달라고 하면 뭐든 주는 거야? 폭탄이라도?”
“그게 뭔지에 달려 있지만, 이 정도라면 괜찮지. 함께 하는 건 좋은 거니까.”
그녀는 두 번째 모금부터는 익숙하게 빨아들였다.
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담배를 피웠다.
“What a beautiful smoke!”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신음하듯 말했다.
“세 보루는 팔고, 한 보루는 우리가 피우자.”
그녀가 제안했고, 나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 생각해 보더니 말을 바꿨다.
“두 보루 두 보루로 할까?”
“그것도 괜찮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자.”
“그래.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그 정도에서 우리는 논의를 마무리 짓고, 남은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데 열중했다.
“오빠,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나?”
그녀가 담배를 들지 않은 손을 내 겨드랑이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녀의 손이 무척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그럼. 기억하고말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천하에 몹쓸 선생 같으니라고.”
그녀가 눈을 흘기며 선수를 쳤다.
“꽃뱀 같은 년.”
나도 지지 않고 응수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남은 담배를 피웠다.
5
생애 첫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날 그녀를 만났다.
모든 게 티끌 한 점 없이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 날이 그랬다. 완벽한 컨디션이라고 느꼈고, 완벽한 투구를 했다. 타선이 오래도록 침묵했지만 상대팀도 마찬가지였기에 불안하지 않았다. 투수전으로 간다면 절대 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때고 원하는 곳에 찔러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평소라면 실수를 거듭했을 변화구도 기가 막히게 제구가 됐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고, 내가 할 일은 그 미래를 확인하는 것뿐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7회 초 2아웃에 터진 3번 타자의 적시타로 1점을 리드했고, 그 1점이 승리점이 되었다.
하계리그를 앞두고 대학 간에 벌어진 친선시합이었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은 선수가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야구역사에는 기록되지 않겠지만, 오늘 게임을 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내 이름을 잊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당시의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젊었기 때문이다.
그 날 저녁 선후배들과 강남의 클럽에서 자축했다. 2시간 동안 16병의 맥주를 비워냈는데도 정신은 갓 꺼낸 티슈처럼 말짱했다. 앞으로도 200병은 족히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럴 경우 화장실에 지금보다 더 자주 들락날락거려야 한다는 사실이 겁날 뿐이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어떻게 하면 춤추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고 가장 빠른 경로로 화장실에 도달해 볼 일을 볼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한 격론을 벌였다.
혀가 꼬인 4번 타자의 공격적인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선생님! 저예요! 저 모르시겠어요?”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흔치 않은 일이긴 해도 겪어본 경험이 아예 없지도 않았다.
몇 주 전만 해도 길거리에서 한 여자가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무척 반가운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몰랐다. 알고 보니 우리는 2주 동안 연애하고 4번씩이나 잠자리를 한 사이였다. 나는 왜냐고 물었다.
“왜라니? 무슨 소리야?”
“왜 우리가 잠을 잤지?”
“미친 새끼.”
그녀는 내게 침을 뱉듯 말하고는 떠나갔다. 그러자 나는 더욱 더 왜 우리가 4번씩이나 잠자리를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얘기의 요지는, 이런 일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좀 이상했다. 보통은 오빠라고 부르는 게 정상이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기엔 아무래도 억울한 나이니까.
취한 여자가 아닐까 싶어 자세히 살펴봤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멀쩡해 보였다.
“응, 그래. 잘 지냈어?”
나는 선생님처럼 근엄한 투를 섞어 아는 체를 했다.
“네. 이게 몇 년 만이에요!”
“뭐라고?”
“여기 너무 시끄러워요.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나가서 얘기해요!”
“나가자고?”
그녀는 목돈이라도 받아내러 온 듯이 다짜고짜 내 옷을 잡아당겼다. 그렇게 날 일으켜 세우고는, 이번에는 손목을 잡아끌었다.
슬슬 동료들과의 농담이 지겨워지던 차였으므로 바람이나 쐴 겸 밖으로 나갔다. 그 날은 기분이 몹시 좋았기 때문에 고슴도치가 말을 걸어와도 신나게 따라나섰을 것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거리에는 언제부턴가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클럽 입구 쪽의 처마에는 클러버들이 어깨를 웅크리고 사사오오 모여서 마약중독자들이 마약을 나누듯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은 편의점에서 산 똑같은 검은 우산을 펼쳐들고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웅덩이와 마약중독자들을 피해 바쁘게 걸어 다녔다.
“우리 저기로 가요.”
그녀는 입고 있던 조끼를 벗더니 내 머리 위에 턱 얹고는,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휘감아서는 거리 반대편에 있는 횟집의 처마 밑으로 끌고 갔다. 몸이 밀착되자 그녀에게 배어 있는 머스크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우리는 아둔하게 생긴 물고기들이 우아하게 헤엄치고 있는 수족관들 사이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선생님, 정말 절 기억하세요?”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한 채, 또 한 편으로는 기대감을 품은 미소를 띠며 내게 물었다.
“당연하지.”
“근데 왜 모르는 것처럼 망설였어요?”
“처음엔 몰랐어, 너무 예뻐져서. 혹시 성형했니?”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 말을 칭찬으로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농담으로 던진 말이 정곡을 찔러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짧은 가죽 스커트를 입고 어른스럽게 화장을 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귀엽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체구는 콜라병처럼 서구적인 데가 있었다. 혼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욕망을 꾹 삼켰다.
어쨌든 나는 그녀를 몰랐다. 클럽은 어두웠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밖으로 나오니 분명해졌다. 그녀는 확실히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너무 신기하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만나다니.”
“많이 보고 싶었는데, 다시 만나게 된 장소가…….”
“클럽은 좀 그렇긴 하지. 그럼 다시 시작하지 뭐. 이 정도 장소라면 적당하겠지?”
마침 횟집 주인이 안쪽에서 눈치를 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보란 듯이 그녀를 가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광어회와 소주를 시켜놓고 대화를 시작했다. 주로 이야기하는 쪽은 그녀였다. 나는 간단한 대답과 질문을 적절히 섞어가면서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실토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나와 착각한 남자는 그녀와 6살 차이가 나는 교회오빠였다. 그녀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그는 한 달 간 중등부 교사로서 그녀의 반을 맡았다. 그녀는 그를 짝사랑했지만 한 마디도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녀는 어렸고, 어린 그녀에게 그는 너무 어른처럼 보였다. 그 어른은 반 아이들에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고된 여정을 함께 한 신실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가 시종일관 떠올린 것은 이해할 수 없게도 그들의 ‘근친혼 관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브라함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한 채 몇 년을 지내다가 운 좋게도 강남의 한 지하클럽에서 그와 재회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근데 선생님, 운동하세요?”
그녀는 보기보다 술이 약했다. 소주 반병에 얼큰하게 취해버렸고, 취하자 행동이 과감해졌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내 팔뚝을 만지작거리면서 감탄하더니, 자리까지 옮겨서 허벅지의 탄력도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야구를 시작했어.”
“야구요? 그거 재미있어요?”
그녀는 ‘야구’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듣는다는 듯이 물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야구는 이 세상의 유일한 스포츠라고.”
“그렇구나. 확실히 몸이 달라졌어요. 뭔가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섹시해졌달까?”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네가 변한 것처럼.”
“전 어떻게 변했어요?”
“음. 성숙해졌다고 할까? 여자가 됐다고 할까?”
그녀는 갑자기 뭔가 확인할 게 있는 것처럼 내 얼굴 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뜬금없는 타이밍이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키스했다.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키스도,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도. 모든 것의 시작은 그녀였으니까, 나는 죄가 없다, 그렇게 합리화했다.
언제나 그날 밤을 생각하면 바닥에 던져놓은 우리들의 젖은 옷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그 옷들 때문에 방안에는 비와 땀냄새가 가득했고, 나는 그것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것은 야구선수의 겨드랑이에나 어울릴법한 냄새였다. 나는 그녀의 아브라함이고 싶었고, 신성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로맨틱한 밤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내 품에서 눈을 뜬 그녀는 나에게 “내 사랑하는 아브라함.”이라고 말하는 대신 “아저씬 이름이 뭐예요?”하고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너무 창피한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저도 미친년이죠.”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물컵에 물을 따라 한 잔을 나에게 건네주고 자기도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작은 쪽문을 열어 바람과 빗소리가 들어오게 했다.
바람은 차가웠고, 빗소리는 시원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는 성냥을 이용해 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원래 여자를 취하게 만드는 게 수법인가보죠?”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 그러지 않으면 속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빨리 취할 줄은 몰랐지. 계산 밖이었어.”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곤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왜 날 속였어요?”하고 물었다.
“먼저 오해한 쪽은 그쪽이야. 굳이 피해자를 따지자면 그건 내가 맞지.”
“중간에 사실을 말할 수도 있었잖아요.”
“언제가 중간인지 알 수가 없었어.”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언제가 끝이 될 줄은 아무도 모르니까. 끝을 모른다면 중간도 알 수가 없죠.”
“이해해줘서 고마워.”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녀는 내 옆구리살을 꼬집으며 말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진심이야.”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요.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대답에, 그거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었어요?”
“그건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원래 즉흥적인 타입인가보죠?”
“살면서 생각이 깊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
“들켜서 아쉬워요?”
“응. 아저씨보다는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게 좋으니까.”
그녀는 내 대답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더니, 결론을 내린 듯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요. 어쨌든 지금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제가 아는 선생님은 굉장히 스마트했거든요.”
“나도 그래.”
“아저씨가 스마트한 사람이었다면 제가 눈치를 못 챘겠지요.”
“그건 그래.”
그녀는 배가 고프다며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도 배가 고팠다. 하지만 성급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우선 침대 위에서 오늘의 계획을 짰다. 그녀는 항상 행동하기 전에 계획을 세운다고 했다. 그리고 삶이 그 계획과 맞아떨어져가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예를 들어 그녀는 금요일 밤이 되면 클럽에 가서 5시까지 논다. 아무리 멋진 남자가 치근덕대도 개의치 않고 춤만 춘다. 그녀는 춤을 추는 걸 좋아하고, 춤을 추기 위한 목적으로 클럽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느린 음악이 나오면 잠시 쉬었다가, 비트가 빨라지면 다시 스테이지로 나간다. 다만 사람이 많은 스테이지의 중심으로는 가지 않는다. 그곳은 춤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충분히 팔과 다리를 휘두를 수 있는 만큼의 공간, 누구와의 접촉도 없이 무아지경에 빠져들 수 있는 만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녀는 정확히 5시가 되면 클럽을 나와 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아이팟으로 콜드플레이(coldplay)를 들으며 잠이 든다.
그렇게 그녀가 1년 동안 지켜왔던 계획이 어긋난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그 말은 바꿔 말하자면 지금까지 그만큼 계획을 잘 지켜왔다는 뜻이라고 그녀는 역설했다.
아무튼 침대 위에서 완성된 계획에 따르면 우리는 놀부네 부대찌개를 먹으러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씨티극장에 가서 조조영화를 볼 것이다(어떤 영화라도 관계없지만 그녀가 싫어하는 호러영화는 피한다). 그녀가 아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라즈베리 빙수를 먹으며 영화에 대해 토론한 뒤, 삼청동의 분위기 좋은 카페로 옮겨 커피와 케익을 먹으며 다음 계획을 짠다.
“급조한 것치곤 깔끔하고, 완성도가 있어요.”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좀 심심하지 않아? 계획까지 세운 것치고는.”
“보편적인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도 적고요.”
그녀는 이런 일에는 전문이라는 듯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모텔 주인이 1시가 넘었다며 방을 비워주길 요구했다.
“계획을 다시 짜야겠어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늦은 줄 몰랐어요.”
그녀는 여유 있던 좀 전과 달리 다급하게 말했다.
“조조영화는 물 건너 갔어요.”
“우선 옷부터 입고.”
나는 침대에서 엉거주춤 기어 나오며 대답했다.
“계획에 맞춰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까요. 계획이 어긋나니까 질 나쁜 아저씨나 만나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잖아요.”
“누가 할 소릴. 뻔한 수법으로 남자나 꾀어내는 주제에.”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젖은 옷에서는 견딜 수 없는 쉰내가 풍겼고, 우리는 그 꼴로 시내를 돌아다닐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모두 없었던 일로 해요.”
“그러는 게 좋겠어.”
우리는 씻지도 못하고 모텔을 빠져나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서로에게 숨기려는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1주일 뒤였다. 의외였다. 그녀가 나를 쉰내 나는 아저씨쯤으로만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화는 기숙사로 걸려왔다.
“뭐해요?”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궁금했다. 나는 전화번호를 준 기억이 없었다. 우리는 이름조차 나누지 않았다.
“어떻게 날 찾아냈어?”
“알고 싶었으니까요.”
그녀는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 뒤로 지하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지만, 소리는 너무 작고 불분명했다.
“개인정보 유출, 사생활 침해, 이런 건 남의 얘긴 줄로만 알았지.”
“그래서 기분 나빠요?”
“아니, 실은 그 반대야.”
“알려고만 한다면 아는 건 어렵지 않아요. 중요한 건 얼마나 알고 싶어하느냐죠.”
“그거 참 우쭐해지는데. 그만큼 날 알고 싶었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기분이 나쁜 쪽은 저라구요. 아저씨는 저만큼 절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정말 그런 걸까, 생각해 봤다. 실은 나도 그녀가 그리웠다. 1주일 내내 그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내가 그녀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인 거라고 체념하자 모든 게 쉬워졌다.
“노력하지 않는 타입이군요. 보나마나 성실하지도 않은 타입이겠죠? 연애관계도 마찬가지일 거구요.”
“내 야구를 본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걸.”
“좋아요. 한 번 확인해 보죠.”
그녀는 자기 할 말을 마치고는 전화를 끊었다.
놀랍게도 오후 훈련을 하고 있을 때 벤치에 그녀가 나타났다. 코치와 무언가 얘기를 나누더니, 선수들 옆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는 라이브 피칭 연습을 하고 있는 후배와 자리를 바꿨다.
“있는 힘껏 쳐 봐.”
그녀에게 들릴만한 큰 소리로 타자에게 호기롭게 소리를 쳤다.
“괜찮겠습니까?”
타자가 물었다. 녀석은 마음먹고 던진 내 공을 한 번도 제대로 때려내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은 좋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할 수 있으면.”
나는 최선을 다해 공을 던졌고, 연습장 담벼락을 때리는 좌중간 안타를 맞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후에도 제구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후배는 날을 잡은 듯 신을 내며 배트를 휘둘러댔다.
“진심이야?”
배터리가 다가와서 물었다.
“엉망진창이구만. 왜 이렇게 흔들려?”
“그러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녀가 이 모든 일의 화근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벤치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응원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계속해서 타자에게 얻어맞아야만 했다.
나중에 그녀는 나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인터넷으로 대학야구 경기를 찾아봤다. 어렵지 않게 내가 나오는 영상과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과 학과도 기사에는 상세히 적혀 있었다.
조교실에 전화를 걸어 야구 전문지 기자라며 전화번호를 요구했다. 이런 일이 잦은 탓에 조교실에서는 내 전화번호를 아무런 의심 없이 알려주었다.
“뭐야, 생각보다 너무 쉽잖아?”
나는 맥이 빠져서 말했다.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런 거죠.”
그녀는 말했다.
“실은 저도 그렇게 쉬울 줄은 몰랐거든요.”
7
눈을 떴지만 아직 어두웠고, 그래서 안심하고 계속 잠을 잤다. 다시 잠에서 깬 것은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그제야 옆에 그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벌거벗은 채로 이불을 걷고 나왔다. 방 안의 공기가 금속처럼 차가웠다. 전화를 받아보니 그녀였다.
“아직도 자?”
“응. 언제 나갔어? 이렇게나 어두운데.”
“무슨 소리야, 지금이 몇 신데.”
그 말을 듣고서야 커튼 때문에 방이 어둡다는 걸 깨달았다. 벽시계를 보니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
“배고파.”
“밥은 냉장고에 있어. 렌지에 돌려 먹으면 될 거야.”
“응.”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들어갈게. 저녁엔 같이 쇼핑하자. 먹을 게 떨어졌어.”
“그래. 좋은 생각이야.”
“오빠가 집에 있으니까 좋다.”
“나도 집에 있으니까 좋네.”
“보고 싶어.”
“나도.”
“밥 먹고 더 자.”
“응. 일어날게.”
전화를 끊은 뒤, 가방에서 새 티셔츠와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리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햇살에 눈이 적응되길 기다리며 담배를 물었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몹시 불었고, 담뱃불이 자꾸 꺼져서 고생을 해야 했다.
집은 낮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아래쪽 길을 따라 예순 네 걸음을 걷자 도로가 나타났다. 도로를 중심으로 사방이 끝없는 들판이었다. 저 멀리 양떼가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양떼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도로를 가로지르고, 나무로 얼기설기 이어진 울타리를 넘어 들판을 계속 걸었다. 하지만 중간도 못 가서 포기하고 돌아왔다. 첫째로 배가 너무 고팠고, 둘째로 양떼는 보기보다 멀리 있었다. 다시 울타리를 넘고, 도로를 가로 지른 뒤, 언덕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운동부족 때문인지 숨이 차서 집 앞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방안으로 들어온 나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볶음밥을 꺼내 렌지에 넣고 돌렸다. 그 순간 침대 아래쪽에서 뭔가 꿈틀대는 걸 발견했다. 나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로키였다.
“뭘 먹고 있는 거야?”
나는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겁에 질려 소리쳤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로키가 먹고 있던 것은 전화선이었다. 왜 전화선 같은 걸 먹고 있는지, 그게 맛이 있긴 한 건지, 다른 토끼들도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서 토끼 사료를 꺼내 바닥에 뿌려보았지만 반응이 시큰둥했다. 나는 바닥에 뿌린 사료를 다시 그러모아 지퍼백에 옮겨 넣고, 걸레를 물에 적셔 바닥을 닦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로키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열심히 전화선을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로키 옆에 전기히터를 틀어 놓고 바닥에 앉아 볶음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밖의 나무들은 좌우로 흔들리고, 낮게 깔린 회색 구름은 멀리 머물러 있었으며, 방 안에는 중생대(中生代)에 만들어졌을 것 같은 무수한 먼지들이 떠다녔다. 그리고 로키는 여전히 전화선을 갉아먹고 있었다.
언젠가 전화선은 완전히 끊어질 것이고, 그러면 나는 여기에 고립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 줄을 모를 것이다. 로키는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모르는 채 새로운 전선줄을 찾아 열심히 갉아먹고 있겠지.
“그건 나로서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구제불능이야.”
그녀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테이프로 모든 전선줄을 감아보기도 했어.”
“테이프를 먹었겠지. 오히려 쾌재를 불렀을지도 몰라.”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해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말했다.
“맞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이빨이 가려워서 그런 거래. 그래서 문이나 침대 모서리를 갉아먹는 거야. 하지만 전선줄은 왜 갉아먹는 걸까? 그건 부드럽잖아.”
“애매하긴 하지. 부드럽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고, 단단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로키는 단단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이대로는 안 돼. 나 원래 전기를 아끼려고 스탠드만 쓰거든? 어느 날인가 이유 없이 스탠드가 나간 적이 있어. 귀신이라도 있나, 하는 생각에 너무 놀랐지. 알고 보니 로키가 전선줄을 갉아먹은 거야. 밤새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어야 했어.”
“하지만 어떻게 로키는 감전이 안 되는 거지?”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그녀는 오싹한 기분을 느낀 듯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계가 있나봐.”
“혹시 모르니까 전선줄을 몇 개 사놔야 할 것 같아. 벌써 위태위태한 것들이 많이 보였어.”
나는 제안했고, 그녀도 동의했다. 우리는 카트에 전선줄을 담았다. 이로써 카트에는 계란 한 판과 베이컨, 냉동야채, 망고, 딸기 아이스크림, 스파게티 면과 토마토 소스, 미트볼, 커피포트와 전선줄 두 가닥이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카드로 계산을 했다. 우리는 두 개의 종이봉지에 물건을 나눠담고 서로 하나씩 사이좋게 들었다.
돌아오는 차는 내가 운전했다. 뉴질랜드 교통에 빨리 적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을 하려고 해도 기묘한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어느 순간 보니 내가 운전하는 차가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 차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원래의 차선으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까맣게 모르는 채 영수증을 체크하고 있었다. 한참 머릿속으로 뭔가를 계산하던 그녀는 “흐음.”하고 알 수 없는 신음소리를 흘리더니 내게 가진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다.
“비행기 티켓 살 돈을 제외하면,”하고 나는 절망적으로 대답했다. “200만 원 정도 될까?”
“빠듯하네. 아껴 써야겠어.”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나한테 여유가 좀 있으니까.”
그녀는 자신에게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에게 거기에 대해서까지 묻지는 않았다. 묻지 않아도 서로의 사정이야 뻔했으니까.
“오늘은 뭘 했어?”
“거의 잠을 잤지.”
나는 오늘 한 일들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외에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오빠는 그동안 바쁘게 살았으니까, 휴식을 좀 취해도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불안하지 않아?”
“오빠는 불안해?”
“난 더 이상 야구를 하지 못할 거야. 야구 빼곤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야구를 잘 해서 오빠를 사랑하는 게 아냐.”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빠가 교통사고가 나서 불구가 돼도 난 오빠를 사랑할 거야.”
“그건 좀 심한데.”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말하자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도 생각은 좀 해볼 거 같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정말 거기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니야. 다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야. 그건 변할 수가 없어.”
첫 번째 주말이 되자 우리는 사과 샌드위치를 싸서 무리와이 비치(Muriwai Beach)로 피크닉을 갔다. 그녀의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 리스트’ 3번 항목이었다.
바람에 몸이 휘청할 정도인데도 네댓 명의 사람들이 파도를 타며 서핑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검은 모래사장을 돌아다니면서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댔다. 언덕에 올라 거대한 바위와 그 사이로 부서지는 파도를 감상한 뒤 또 사진을 찍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바위 위를 장악한 가닛(Gannet)들도 사진기에 담았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켜놓고, 찍은 사진들을 감상했다.
“난 사실 한국이 더 좋아.”
그녀는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바닷가는 한국에 없으니까.”
“그럼 한국이 좋은 이유는 뭐야?”
내가 물었다.
“한국에선 한국말을 쓰니까.”
그녀는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영어로는 내 생각을 다 전달할 수가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렇지 않아?”
그리고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사랑해.”
하고 말했다.
“어때? 이런 말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겠어?”
“할 수 없지. 어떤 언어로도.”
나는 그보다 더 훌륭할 수 없는 예시에 감탄해서 말했다.
“그럼 한국엔 언제 돌아갈 생각이야?”
내가 물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녀는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왜냐고 물어볼 거야?”
그녀는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했다.
“부탁인데 묻지 말아줘.”
우리는 때마침 지나가던 키위 부부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답례로 그들을 찍어주고, 메일로 파일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키위 부부가 찍은 사진 속의 우리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어둡고 그마저 역광인 탓에 우리는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이 우리라는 사실은 언제까지나 우리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사진은 더 특별한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8
3번째 주말이 오기 전, 로키는 결국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사두었던 전화선의 규격이 달라서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어로 된 영어책을 공부하며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던 나는 답답해져서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1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마트까지는 차로 30분이 걸렸다. 버스를 잘못 탈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걸어서 마트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차로 다녀왔을 때의 길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원래 길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오후 3시였고, 늦어도 6시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시간 정도 지나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차에서 봤던 풍경과는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였고, 어쩌면 기온이나 바람의 세기 따위가 달라진 탓인지도 몰랐다. 나는 더 걸어보기로 했다. 영어로 된 표지판이 달린 교차로가 나오고, 나는 내 직감에 따라 선택을 내렸다. 그렇게 몇 번의 선택을 거듭하는 동안 나는 목적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도로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았고, 이따금 보이던 인가도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간혹 등장하는 표지판에는 읽을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지명과 거기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찾아와 그런 표지판의 글씨마저 조금씩 삼켜버렸다. 얼마나 걸어왔는지, 또 몇 시나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갈 즈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줄기 하나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명확해졌고, 나는 그것을 향해 무작정 손을 내밀었다. 트럭은 서서히 속력을 멈추더니 내 옆에 멈추어 섰다. 중년의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내게 무언가를 물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트니 타운이니 하는 단어들을 발음했지만 그 역시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폴리스 스테이션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타라는 시늉을 했다.
채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인가가 밀집해 있는 마을이 나왔고, 그곳의 경찰서 앞에서 그는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는 뭐라고 짧게 말하고 떠나갔다. 조심해라, 잘 가라, 대충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경찰서 안에 들어선 나는 더욱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했다. 그들에게 내 사정을 설명할 방법도 없었고, 나는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의 주소와 전화번호마저 몰랐다. 전화번호를 안다고 해도 문제였다. 로키가 전화선을 갉아먹은 탓에 집전화는 무용지물이었다. 경찰과 나는 온갖 손짓과 몸짓을 동원해 의사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우리가 확인한 것은 이렇게 해서는 우리 사이에 아무런 진전도 없을 거라는 분명한 사실뿐이었다. 보다 못한 경찰관 한 명이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고, 나는 거기에 국적과 여권 이름, 주민번호,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셈이었다.
경찰서 로비에 있는 벤치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웅크리고 추위에 떨다 보니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였다. 밤에 한숨도 못잔 듯 매우 수척해 보였다.
경찰서에서 나올 때에야 비로소 나와 대화했던 경찰은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고, 안개가 자욱했다. 차 안에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야가 흐리다며 몇 번 불평을 한 것이 전부였다. 집에 도착해서야 그녀는 옷을 벗으며 “경찰서에 가서 실종 신고를 냈어. 오빠를 찾을 때까지 경찰서에 있었어.”하고 말했다.
그녀는 옷을 다 벗고는, 침대 속으로 들어가 등을 돌리고 누웠다.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오빠는 나한테 도움이 안 돼.”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오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 오빤 날 도와줄 수 없어.”
그리고는 몸을 움직여 내 팔을 풀어냈다. 그녀는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뒤척였고, 바깥에서 부는 바람 소리에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비로소 잠이 들 수 있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파자마를 걸치고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아침 먹자. 얼른 일어나.”
방안에는 스파게티 소스 냄새가 가득했다. 내가 옷을 주워 입고 욕실에 가서 씻는 동안 그녀는 면을 삶았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넘어가고 있었다.
“학교는?”
내가 묻자, 그녀는 신난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은 안 갈려고. 오빠하고 놀 거야.”
그녀는 테이블 위에 미트볼 스파게티 두 접시를 올려놓았다. 우리는 피에 굶주린 전사처럼 스파게티에 달려들었다. 둘 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전투가 끝났을 때 접시에는 소스 한 점 남아있지 않았다.
“오빠, 괜찮아?”
허기를 채운 뒤, 그녀가 물었다.
“응. 훌륭했어.”
“아니, 어제 말이야.”
“응. 너는?”
“내가 어제 이상한 말 했지?”
“틀린 말은 없었어. 그래서 더 아프긴 했지.”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말했다.
“집에 와 보니 오빠가 없었어. 너무 무서웠어. 당연히 있어야 되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녀는 접시를 싱크대로 옮겨 씻기 시작했다. 나는 행주로 테이블을 닦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다 잊어야 돼. 술을 마셨거든. 좀 취했었어.”
그녀는 말했다.
“술은 끊었다면서?”
“어젠 너무 무서웠으니까. 날 그렇게 만든 건 오빠고, 그러니까 오빠 잘못이야.”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딜 갈 생각이야?”
“시티에 카지노가 있어. 아직 한 번도 안 가봤어. 우리 가서 돈 좀 벌어보자. 어때?”
“카지노라……. 할 줄 아는 게임은 있어?”
“아니. 오빠는?”
“나도 없는데. 고스톱이라면 타짜 수준이지만.”
우리는 인터넷으로 카지노에서 할 수 있는 게임들을 찾아봤다. 간단한 룰을 가진 게임이 필요했다. 그녀는 슬롯머신이, 나는 블랙잭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침대에 마주보고 앉아 카드를 꺼내놓고 블랙잭의 룰과 용어, 진행방식을 익혔다. 확률이니 카드 카운팅이니 하는 건 무시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운밖에 없었다.
카지노까지 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설레는 듯 보였다.
“초심자의 행운이란 게 있대. 그런데다 나 원래 운이 좋잖아?”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서 행운의 징조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예컨대 오늘은 날씨가 간만에 화창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과 럭키 세븐 모양으로 떼를 지어 날아가는 갈매기……. 게다가 우리 앞에 끼어든 저 차의 번호판에는 ‘LEO’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레오? 그게 무슨 의미야?”
그녀는 놀라서 소리쳤다.
“뉴욕 타임즈 기자인 레오 두로처 말이야. 그는 이런 명언을 남겼어. 내일 경기를 위해서 투수를 아낄 필요는 없다.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오. 멋지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뒤,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일종의 암시지. 돈 잃을 걱정에 지금 이 순간의 베팅을 주저하지 말라는 거야.”
나는 그녀의 사기 진작을 위해 재빨리 말을 만들어냈다.
“그래, 우리는 현재를 사는 거야!”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바로 그 말이야.”
나는 맞장구쳤다.
스카이 카지노 입구에 들어서자 온갖 종류의 기계와 테이블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불빛이 번쩍였고, 기계음이 치솟았으며, 탄식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10달러를 코인으로 바꿨고, 각자 원하는 슬롯머신 앞에 앉았다. 코인이 든 통은 10분도 되지 않아 바닥이 났다.
“자본금이 부족하니까 레버를 자신감 있게 당길 배짱이 안 생기는 거야.”
나는 신중하게 우리의 패배 요인을 분석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기계 선택도 잘 해야 돼. 내가 볼 땐 사람들이 많이 따간 기계는 피해야 해. 많이 터졌기 때문에 다시 터질 확률이 줄어들었겠지.”
“오, 똑똑한데?”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적은 금액으로 오래 버티는 것도 좋겠어. 10센트로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내는 거지.”
“똑똑해. 똑똑해.”
우리는 20달러를 코인으로 바꾸어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내 슬롯머신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옆 사람들이 내 쪽을 주시했고, 뒤로 다가와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건너편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그녀도 어느새 이쪽으로 넘어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슬롯머신이 코인을 쏟아냈고, 내가 통을 늦게 받친 탓에 일부가 바닥으로 쏟아지기까지 했다.
한 노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무언가를 묻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대신해 그와 대화했다.
“얼마나 걸었냐고 묻기에 10센트라고 대답해줬어.”
“그러니까 뭐래?”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놓쳤대. 자기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화를 내시는 거 같았어.”
하지만 우리는 그 기회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서로 충분한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얼마나 딴 거야?”
그녀가 물었지만 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 통 두 개에 가득 찬 코인의 개수는 어림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환전소에서 1250달러를 받아들고서야 그 노인이 그토록 애석해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 하면 더 벌 수 있을 같아.”
나는 심장이 거칠게 뛰는 걸 느끼며 말했다.
“그래서 그만 해야 될 거 같아.”
“오빠 말이 맞아.”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어느새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나는 1250달러를 전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오빠는 천재야.”
그녀는 내 볼에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운이 도와준 것뿐이었다. 다시는 오늘 같은 행운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다.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허락했을 때뿐이니까.
“우리 술 한 잔 할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절대 취하지 않을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초코케익과 샴페인을 샀다. 그녀는 자기 얼굴에 리본을 묶고는, 뒤늦은 환영파티를 해주겠다고 했다.
“소원을 말 해.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겠어.”
“끝내주는 섹스.”
우리는 초코케익과 샴페인을 깨끗이 비우고, 끝내주는 섹스를 했다.
“행복하다.”
그녀는 말했다.
“돈도 있고, 집도 있고, 남자친구도 있고, 끝내주는 섹스도 했어. 부족한 게 아무 것도 없어.”
우리는 벌거벗은 채 서로를 안고서는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 거야.”
그녀는 아무리 말해도 모자란다는 듯이,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9
5번째 주말이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기분이 우울하다며 팜 스프링스(Palm Springs)로 가기로 한 계획을 취소했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내게 떠날 거냐고 물었고, 나는 언젠가는 그래야 할 거라고 했다.
“어깨가 나으면?”
“아니, 어깨와는 상관이 없어. 야구는 진작에 끝났으니까.”
나는 이불 속으로 깊이 몸을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 뒤에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거친 바람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바람이 빗물과 함께 방안으로 들이쳐 내 뺨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그녀가 없었다. 몸을 일으키고 보니 창이 반쯤 열려 있고, 커튼은 방 안쪽으로 미친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질 뻔했다. 열린 창틈으로 튀어온 빗물 때문에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 잠시 멈춰 서서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릿속은 멍하기만 했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오더니, 한 남자가 나타나 창을 거칠게 두드리며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는 노란 머리의 동양인이었다. 그는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그는 자신의 이름이 헨리라고 대답했다. 헨리는 다급하게 무슨 말인가를 전하려 했고, 그 말 중간 중간에는 그녀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그녀를 아느냐고 나는 물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친구라고 하고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내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를 따라갔다. 그가 멈춘 곳은 언덕 아래의 도로였다. 거기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실크 파자마 한 장만을 걸친 차림이었다. 게다가 비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몸은 실루엣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헨리는 내게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한 말을 모두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몇 마디만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전화했다. 차에 뛰어들었다. 경찰을 불렀다.
그때 저 멀리서 경찰차의 경고등 불빛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는 도로에 뛰어들어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차가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섰을 때, 헨리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경찰에게, “Hospital, please."라고 되풀이 말했다.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확인시킨 뒤에야 그들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그들은 점퍼를 벗어 그녀에게 입힌 뒤 뒷좌석에 싣고, 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뒤에서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냈고, 간간이 뭐라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병원은 30분 거리에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그녀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경찰은 내게 몇 가지를 물으러 왔지만 우리의 대화는 번번이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최대한 정확히 말하려고 애썼고, 그러는 동안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응급실에서 링겔을 맞은 그녀는 1시간 정도 지나자 깨어났다. 그리고는 1인실로 옮겨져 한 여의사와 긴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그 안에서 몇 번이나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대화는 문밖으로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복도의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마침내 상담이 끝나고, 비틀대며 걸어 나오는 그녀를 경찰과 내가 양쪽에서 부축해 경찰차에 태웠다. 경찰은 우리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경찰은 떠나면서 내게 그녀를 쉬게 하라고 말했다.
집에 온 그녀는 피곤하다며 파자마를 벗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덮어주며 보니 허벅지와 팔뚝에 멍 자국이 선명했다. 파자마는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나는 걸레를 짜서 바닥의 빗물을 닦고, 바람에 쓰러진 물건들을 정리했다.
나는 그녀가 깨어 있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안의 정리를 모두 마친 뒤, 스탠드를 끄고 침대에 가서 누웠다.
들판을 뒤흔드는 거센 바람 소리 때문인지, 그 날은 잠이 드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잠에서 깬 그녀는 전날의 일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잡아뗐다. 술에 취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나는 헨리에 대해 물었다.
“오빠가 오기 전에 알고 지낸 친구야. 그냥 친구.”
귀찮다는 듯 대답하고는,
“오빠 때문에 나는 친했던 친구들하고도 멀어졌어.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까지 내가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해?”
하고 화를 냈다.
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의심이 사실로 밝혀지길 바라지 않았다. 만약 꼭 그래야 한다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이후 우리 사이의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밥을 먹고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도 누구도 농담하지 않고, 누구도 웃지 않았다.
정확히 일주일 뒤, 병원에서 온 편지가 우체통에 들어 있었다. 편지를 열어보기 전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망설였던 이유는 그것이 그녀의 편지여서가 아니었다.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 망상이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편지를 열어보고야 말았다.
심리상담의가 그녀에게 권하는 조언이 두 페이지에 걸쳐 쓰여 있었다. 나는 영영사전을 찾아가며 편지를 독해했다. 나는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내가 의심한 그대로였다.
그 날 병원에서 그녀는 심리상담의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뉴질랜드에 오기 전 만났던 중국인 헨리와 1년이 넘게 동거했다. 내가 뉴질랜드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이별하자고 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와 헤어진 이후에도 그녀는 그를 잊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보살펴준 헨리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날 자신이 왜 헨리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또 자신이 왜 차에 뛰어들었는지도. 심리상담의는 그녀에게 과거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울증 초기 증세가 있으며, 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상담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미에 덧붙이고 있었다.
그 날 저녁, 그녀가 돌아오자 나는 그녀 앞에 편지를 꺼내놓았다. 그녀는 말없이 편지를 읽고, 나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이건 개인적인 편지야. 이걸 왜 오빠가 열어봤어?”
그녀의 태도가 너무 뻔뻔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화를 참기 위해 한참동안 숨을 골라야만 했다.
“모두 사실이야?”
내가 묻자,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거기에 다 써 있잖아. 읽어봤다면서.”
“너한테 직접 얘기를 들을게. 네가 말하는 대로 믿을 테니까, 한 번 설명해 봐.”
그녀는 내게서 눈을 돌리고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뉴질랜드에 처음 왔을 때 나한테는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이 유일하게 나를 도와준 사람이야. 집을 구해준 것도, 차를 구해준 것도, 학교를 알아봐준 것도. 도움이 필요할 땐 항상 그 사람이 옆에 있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차분했다.
“오빠가 올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2년 동안 내 곁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오빠야.”
“무섭다. 난 네가 누군지 모르겠어.”
나는 탄식하듯 말했다.
“그래. 원래 나 이런 애야. 무서워? 그럼 헤어지면 되잖아. 그게 오빠가 원하는 거 아냐?”
“전화로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그 새끼하고 살고 있었다는 거지? 바로 여기서, 그 새끼 옆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어.”
“그래, 맞아.”
“내가 또 모르는 게 있다면 지금 다 얘기해. 더 이상 날 병신으로 만들지 말고.”
나는 모욕감에 떨며 말했다.
“오빠는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그럼 지금 얘기해. 다 들어줄게. 오늘까지는 기꺼이 병신이 될 테니까.”
“오빠는 모든 걸 꼭 말로 해야 돼?”
“말하지 않으면? 편지로 할까?”
“비꼬지 마.”
“비꼬는 게 싫어? 너야말로 지금까지 날 가지고 놀았잖아?”
그녀는 갑자기 “제발 그만 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곧 이불을 제치더니, 맹렬하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오빤 내가 무슨 일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지? 우리 집엔 돈이 없어. 열아홉 살짜리가 돈을 버는 방법이 뭐였겠어? 그런 것까지 다 일일이 얘길 해야 돼? 그 모든 걸 다 듣고 싶어? 오빠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대학생이 되고 싶었어. 나도 모르겠어. 왜 내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살았는지, 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는지, 무슨 말을 하면서 살았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도, 나도 알고 싶어. 나도 모르겠어.”
그녀는 발작하듯 한바탕 쏟아내고 나서는, 몸을 떨며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늘은 제발 그만해. 미칠 것 같아. 그만해줘, 제발.”이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해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더 이상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끝내야 될 때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서른 번도 넘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우리 사이의 싸움에서 도망치는 간편한 방식이었다.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던지, 싫으면 헤어져.”
하지만 다음 날이면 그녀는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했어? 내가 미쳤나봐. 미안해. 그건 사실이 아냐. 만약 내가 헤어지자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니까 절대로 믿지 마. 그건 내가 아냐.”
“네가 아니면 그럼 그건 누가 한 말이야?”
“그건 몰라. 하지만 그건 내가 아냐.”
“똑같은 질문을 또 해서 미안한데, 그럼 대체 누가 한 말이야?”
“그건 몰라. 근데 나는 아냐.”
그러고 나서 그녀는 꼭 이렇게 덧붙였다.
“약속해.”
“무슨 약속을 해?”
“내가 만약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다면 그냥 무시해 버리기로. 약속해.”
그러면 나는 마지못해 약속을 했다.
내가 약속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항상 사랑한다고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건 오빠밖에 없어. 그건 절대로 변함이 없어. 약속할게.”
10
그녀는 National Culinary Fare에 참가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준비했다. 식기류와 와인잔, 냅킨, 유니폼 등을 챙겨 박스에 차곡차곡 넣었다.
“정말 오지 않을 거야?”
그녀는 한 번 더 확인했다.
“다녀와. 가서 잘 하고.”
나는 대답했다.
“상을 타면 오빠한테 제일 먼저 축하받고 싶었어.”
“상을 타서 돌아오면 축하해줄게.”
박스를 옮겨 싣고, 주차된 차를 빼주었다. 그녀가 떠날 때는 손을 흔들며 배웅해줬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떠날 때도 가지고 갈 것이 많지 않았다. 여권이니 비행기 티켓 같은 것들을 한군데 모아놓고, 뉴질랜드에서 산 외투와 속옷도 챙겨서 가방 속에 개어놓았다.
로키에게 사료를 주고 낡은 전선줄들을 새 것으로 갈았다. 빨래 바구니에 있는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 뒤,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보는 뉴질랜드의 풍광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빗방울이 뺨을 간질이고 있었다. 나는 젖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쳐서 빗물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울타리를 넘어 들판을 걷기 시작했다.
지평선이 보이자, 거기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바람이 불고, 풀이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오래도록 걸었으나,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시 힘을 내 멀어진 지평선까지 걷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울타리도, 도로도, 집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똑같은 들판과 언덕이었고, 사방이 지평선이었다. 몸을 움직이게 할 정도로 세찬 바람이 땅을 훑자, 거대한 물결이 지나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그녀는 7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케익과 상장을 들고 있었다.
“일찍 왔지? 사람들이 축하해준다는 걸 뿌리치고 왔어.”
“잘 했어. 무슨 상이야?”
“2등. 이거 봐. 2등도 굉장히 잘 한 거야.”
그녀는 상장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녀가 케익을 꺼내는 동안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온 현장의 사진들을 감상했다.
“유니폼이 잘 어울리네.”
“직접 와서 보면 더 좋았을 걸.”
그녀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우리는 케익을 잘랐다.
“나, 내일 떠날 거야.”
내가 말했다.
“그래? 비행기 티켓은?”
“예매해뒀어.”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줄게.”
그녀는 말했다.
“한국에 가면 뭘 할 생각이야?”
“뭐든. 가서 생각해 봐야지.”
“오빠는 뭘 하든 잘 할 거야. 그건 내가 보증할 수 있어.”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National Culinary Fare에서 상을 받았던 서비스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유니폼까지 갈아입고 와서는 테이블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냅킨을 반듯하게 접어 올려두고 접시도 깨끗하게 닦아서 정확한 자리에 위치시켰다. 와인 잔과 포크, 스푼도 신경을 써서 놓아두었다.
“대충 해도 나는 몰라.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가만있어. 완벽한 세팅을 보여줄 테니까.”
그녀는 케익을 반듯하게 잘라 접시에 놓아주었고, 와인잔에 와인도 깔끔하게 따랐다. 나는 케익을 한 입 먹고, 와인을 마셨다. 케익의 맛도 그대로고 와인도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멋진 거 같아.”
그녀는 내 말에 웃었다.
“오빠가 야구할 때도 그랬어. 난 아직도 야구 룰은 모르거든. 그래도 오빠는 멋있었어.”
“고마워.”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주앉아 말없이 케익을 먹었다.
“내가 사랑했던 건 오빠야.”
한참 후에,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오빠가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그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사랑해. 진심이야.”
“알겠어. 생각해볼게.”
“나 소원이 있는데 말해도 돼?”
“응.”
“키스하고 싶어.”
“그래.”
그녀는 내게 다가와서 키스했다. 그것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나도, 그리고 그녀 역시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가 변했고, 그것은 영원히 변해버렸다.
“소원 하나 더 말해도 돼?”
“응.”
“옆에서 자고 싶어.”
“그래.”
나는 말했다. 우리는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저녁이 되자 비가 굵어지고, 바람도 몹시 불었다. 그녀는 내 옆에 잠들어 있었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그녀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번번이 그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생각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녀를 떠나지 않아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려 했지만, 역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핸드폰 충전선을 갉아먹고 있던 로키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다시 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녀석이 날 얼마나 한심하게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어깨를 감싸 안고 잠이 들었다.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 고래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 같은 그 엄청난 마찰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방안으로 비바람이 들이치고 있었다. 사정없이 펄럭이는 커튼을 본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깨서 옆을 살폈다.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았지만 어디서도 대답은 없었다.
넘어진 스탠드를 일으켜 세우고 불을 켰다. 방안은 난장판이었다. 모든 물건들이 쓰러져 뒤엉켜 있고, 빗물에 젖어 있었다. 바람이 창을 두 손으로 잡고 뒤흔드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침착하게 주변을 살피며 언덕을 내려갔다. 도로에도 그녀는 없었다. 짙은 어둠과 엄청난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혹시 몰라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역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허둥대며 선반에서 랜턴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빛을 비추면서 사방을 샅샅이 살폈다.
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풀밭에 거뭇한 형체가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파자마 한 쪽에서 붉은 물이 새어나왔다. 허벅지 쪽을 살펴보니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상처로부터 핏물이 새고, 빗물과 섞여 잔디밭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를 안아들고 언덕을 올라갔다. 차의 뒷좌석에 그녀를 옮겨놓고, 집에서 수건과 차키를 챙겼다. 그녀의 다리를 지혈한 뒤, 재빨리 시동을 걸어 차를 뺐다.
건물 벽 어딘가에 차의 한쪽이 부딪히며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개의치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언덕을 내려왔다. 차의 한쪽 바퀴가 웅덩이를 밟고 덜컹이며 도로로 접어들었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병원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가 사위에서 차를 때렸다. 와이퍼는 최선을 다해 빗물을 지워냈지만,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유리창에 눈을 가까이 대고서야 겨우 앞을 식별할 수 있었다. 차선이 지워진 도로에서 차는 끊임없이 중앙선을 넘나들었다. 차가 도로를 벗어날 뻔한 위기가 몇 번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빗길에서 미끄러지고, 다시 균형을 잡고, 또다시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아무리 달려도 어둠속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차에서 뿜어내는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다.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표지판이 스쳐지나갔지만 내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었다. 알 수 없는 지명과 그 알 수 없는 공간까지의 머나먼 거리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공포심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차의 속력을 높였다.
뒤에서 그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들어? 여기가 어디야?”
나는 물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룸미러에 비친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단지 간간이 입 밖으로 고통의 증거인 거친 숨을 뱉을 뿐이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어디로 가야 돼?”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처지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계기판의 주유등이 점멸했다. 기름이 부족했다. 앞으로 몇 킬로나 더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왜 그런 거야?”
그녀로부터는 대답이 없었다. 주위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는 너무나 넓은 땅이었다. 어디를 봐도 들판뿐인,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나라였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주유등은 더욱 바쁘게 점멸했다.
나는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맥박이 분명히 전해져왔다.
“다 왔어. 좀만 참아.”
나는 거짓말로 계속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차는 여전히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불빛은 볼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멈추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전민석
1980년 경기 안양 출생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졸업
2001년 경장편 소설 ‘모텔 선샤인’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