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리모콘

by  이진경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등장인물

    남편 ㅣ 32세
    아내 ㅣ 29세
    손님 ㅣ 65세
    어머니 ㅣ 73세
    식당아줌마 ㅣ 57세

    시공간
    서너 평 남짓한 복사집, 어느 일요일 저녁.

    ***

    복사집 안. 큰 복사기 두 대와 작은 복사기 한 대가 있다. 큰 복사기 중 한 대는 돌아가고 있고, 나머지 한 대는 고장이 난 듯 흉물스럽게 해체되어 있다. 드라이버를 들고 고장 난 복사기를 들여다보며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남편.

    남편 : (통화) 지금 오셔야 된다니까요. 일요일인 줄은 알죠. 그러니까,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시험기간인데, 좀 봐주십쇼. 웬만하면 제가 어떻게 고쳐보겠는데, 이게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건지... 네? 양수리요? 지금 양수리시라구요? 아... 죄송합니다. 저도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책상 위, 가게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벨 소리와 복사기 소리가 뒤섞여, 핸드폰 너머 상대방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남편, 자연히 목소리가 커진다.

    남편 : (통화) 한 대로는, 오늘 밤 꼬박 새워도 다 못 맞추니까 그럽니다. 형편 괜찮아지면, 요새 걸로 김사장님한테 꼭 한 대 구입할 테니까, 이번만 좀 어떻게... 네? 몇 시요?

    전화벨, 끈질기게 울린다.

    남편 : (통화) 자, 잠시만요.

    남편, 핸드폰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전화기를 든다.

    남편 : (통화) 네, 한솔문화삽니다. 어? 어 지금 좀 바뻐. 지금 일 때문에 통화중이니까 나 중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왜? 아이 또 왜 그래. 네가 좀 이해를 해주면 되잖아. 잠깐, 지금 통화중이니까... (툭 끊기는 전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남편,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댄다.

    남편 : (통화) 죄송합니다. 그러면 몇 시에나 가능하시겠어요?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조 금만 더 빨리는 안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네, 그러면 최대한 빨 리... 네. 김사장님만 믿겠습니다. 네. 네.

    전화 끊는다.

    남편 : 거 새끼, 되게 떽떽거리네.

    주위를 둘러본다. 산더미같이 쌓인 일거리들. 한숨 쉰다. 고장 난 복사기 안을 들여다본다. 안쪽에 대고 입으로 세게 불어 댄다. 묵은 먼지들이 일어난다. 기침을 해대는 남편.

    남편 : 죽갔네.

    부엌에서 물 한 컵을 들고 와 벌컥벌컥 마신다.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남편 : (통화) 무슨 전화를 그렇게 끊어? 어머니가 너한테 뭐랬는데? 교회, 그거 눈 딱 감고 가주면 되잖아. 노인네 소원이라는데 그냥 좀... 무슨 편을 들어, 내가. 아니, 노인네 살면 얼마나 사시겠어.

    돌아가던 복사기, 멈춘다. 살펴보니, 용지가 없다. A4용지 박스를 뜯기 시작하는 남편. A4용지를 한 데 뭉쳐, 고르게 정리한다.

    남편 : (통화)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하자는 거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뭘 그렇게 참았는데? 아니, 그러니까, 흥분하지 말고. (버럭) 대체 어머니가 뭐라고 했는데!

    A4용지에 손가락을 베는 남편. 꽤 아픈 모양이다. 피가 나는지, 손가락을 빤다.

    남편 : (통화) 울어? 아, 왜 울어. 미안해.

    손님, 들어선다. 뚱뚱한 체격을 지녔다. 남편, 아내와 통화하느라, 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손님,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땀을 닦는다.

    남편 : (통화) 안 그럴게. 기분 풀어. 지금 어디야? 울지 좀 말고. 내가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잘 얘기할 테니까, 이번엔 네가 조금만 참아줘. 알았어, 먼저 들어가 있어. 일찍 들어갈게. 응, 알았어. 그래.

    핸드폰을 끊는 남편.

    손님 : 어머니 모시고 사시나 보네.

    남편 : (그제 서야 손님을 본다.) 예? 아... 예.

    손님 : 기특한 일인데. 거, 힘들지. 내가 아는 사람도 결혼한 지 딱 한 달 만에 이혼하드만. 결혼한 지는?

    남편 : 한 달이요.

    손님 : 저런, 딱 고비네.

    남편 : (불편하다.) 예.

    손님 : 중간에서 잘 해야지, 거 잘못했다간... 어머님 연세가?

    남편 : 일흔이 넘으셨어요.

    손님 : 아이고, 늦둥이시구만.

    남편 : 무슨 일로?

    손님 : 아...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찾는다.)

    남편 : 지금 안 됩니다.

    손님 : ?

    남편 : 다른 데 가셔서 하세요.

    A4용지를 용지함에 넣자 복사기 다시 돌아간다.

    손님 : (품에서 꺼낸 종이를 내밀며) 이거 한 장인데.

    남편 : 저 위로 올라가면 복사집 많습니다.

    손님, 뭐라고 말을 하려 하는데, 남편,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남편 : 어디다 뒀지?

    책상 위에서 드라이버를 발견한다. 드라이버로 고장 난 복사기의 다른 쪽 나사를 푼다.

    핸드폰 울리는 소리.

    남편 : (통화) 예... 네? 그게 왜 안 켜져요? 잘 눌러 보세요. 안 돼요? 어떤 리모콘 들고 계신 거예요? 맨날 쓰는 거 맞아요? 그런데 왜 그게... 네? 아니 그러니까, 우리집에 리모콘이 세 개잖아요. 두 개요? 두 개밖에 없다구요? 하나가 어디 갔지?

    나사 하나가 구른다. 남편, 나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복사기 밑을 보니, 거기 들어 가 있다.

    몸을 바짝 엎드려 나사를 집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남편 : (통화) 전원 버튼을 잘 눌러 보세요. 어머니가 맨날 티비 끄고 키는 거요. 하셨어요? 하셨어요? 안 돼요? 왜 그러지?

    마침내 나사를 집는 데 성공한다. 손님, 안 가고 서 있다. 인상 구겨지는 남편.

    남편 : (통화) 아들, 지금 바쁘거든요? 은경이 금방 들어가요. 걔한테 해달라고 하세요. 끊습니다. (핸드폰 끊는다. 손님에게) 나가셔서, 조금만 올라가면 왼쪽 편에 복사집 많습 니다. (손님, 대꾸 없자 문을 열어주며) 안녕히 가세요.

    손님, 나간다. 남편, 나사를 마저 풀고 판을 뜯어내 옆으로 비스듬히 세운다. 안을 들여다보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알 길이 없다. 시계를 본다.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한다.

    남편 : (통화) 한솔인데요, 아니 음식 시킨 지가 언젠데... 저도 바쁘거든요? 빨리 갖다 주세요.

    전화를 끊는다.

    남편 : 먹고살기 팍팍하다.

    널찍한 책상에 서서, 제본할 종이들을 정리한다.

    손님, 다시 들어선다.

    남편 : ?

    손님 : 고혈압이 있어서.

    남편 : 네?

    손님 : 내가 고혈압이 있어서, 더는 못 올라가요. 그냥 해주쇼, 웬만하면.

    사이.

    남편 : 웬만하면, 해 드리죠. 웬만하지 않아서 문제지.

    손님, 근처 종이뭉치 위에 앉는다.

    남편 : 거기 그렇게 앉으시면...

    손님 : 숨이 차서.

    남편 : (재빨리 컴퓨터 앞의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앉으세요.

    손님, 의자로 옮겨 앉아 장갑을 벗는다. 손이 두툼해서 장갑을 벗는 것조차 일처럼 보인다.

    이번엔 목도리를 벗기 시작하는데, 목도리가 길어 벗는 데 한참이 걸린다.

    남편 : 제가 지금 여력이 없어요. 받아놓은 물량 처리하는 것도 버겁습니다.

    손님, 뭔가 골똘히 생각한다.

    남편 : 죄송하게 됐습니다.

    손님, 무언가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남편 : 한 30미터만 올라가면...

    손님 :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물 있소?

    남편 : 네?

    손님 : 혈압약을 먹어야 해서.

    쓴웃음을 짓는 남편. 부엌 쪽으로 이어진 문으로 나가, 물 한 컵을 들고 와서 손님에게 건넨다.

    손님,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다.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굼뜨다.

    손님 : 젊었을 땐 약이라곤 모르고 살았는데, 이게 늙으니까, 약이 주식이 됐지 뭐요.

    손님, 웃는다. 남편,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손님 : 삼식이가 집을 나갔소.

    남편 : 네?

    손님 : 식구라곤 그 녀석 하나뿐인데.

    남편 : (제본을 계속하며 건성으로) 아, 그러세요.

    손님 : 그래서 이렇게 찾아 나선 거요.

    남편 : 파출소에 신고를 하셔야지.

    손님 : 벌써 했지. 근데, 소식이 없네.

    남편 : 집에서 기다려보세요. 날도 추운데, 어떻게 찾으시려고.

    손님, 대답이 없다. 남편, 제본을 멈추고 손님을 본다.

    손님,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여다보고 있다.

    손님 : (눈물이 그렁그렁 하다.) 몸도 성치 않은 애가...

    남편 : 아드님이 어디 불편한 데라도?

    손님 : 아들이 아니라, 키우는 개요.

    남편 : (비웃음) 아, 예...

    핸드폰 울린다.

    남편 : (통화) 예... 네? 아니, 지금 꼭 보셔야 돼요? 도대체 뭘 보시려고? 하늘아래 우리 둘이? 그게 뭔데요? 후... 몇 시에 하는데요? (시계를 본다.) 십 분 남았네. 기다려 보 세요, 은경이 곧 들어간다니까요.

    아내, 들어선다.

    아내 : 춥다.

    남편 : (통화) 그러니까 어머니...

    아내 : (화들짝) 어머니?

    남편, 아내를 발견한다.

    남편 : (통화) 아... 지금 은경이가...

    아내, 남편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는다.

    남편 : (통화) 아니요. 그러니까... 어... 은경이가 늦을 지도 모르는데...

    아내, 남편 옆으로 와 통화 내용을 유심히 듣는다.

    남편 : (통화) 제대로 키신 거에요? 아니, 맨날 잘 하시다가, 왜 그러세요? 어떤 리모콘 들고 계시는데요? 잘 해보세요. 전원 버튼 누르신 거 맞아요? 그게 안 켜질 리가 있나... 아이 참... 왜 화는 내고 그러세요? 아니, 은경이 얘기는 왜 또... (아내의 눈치를 본다.)

    아내 : (발끈, 작은 소리로) 나? 왜? 뭐?

    남편 : (통화) 재방송 보시면 되잖아요. 아니요, 아뇨, 제가 지금 바쁘 다니까요. 그래서 그래 요. 어차피 전화로 설명해도 못 알아들으세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제가 왜 어머닐 무시합니까. 어머니, 아니, 어머니... 여보세요? (끊어졌다.) 밧데리가... (아내에게) 충전기 좀 찾아봐.

    아내 : 어딨는데?

    남편 : 어딨는지 모르니까 찾으란 거잖아.

    아내 : 왜 나한테 짜증이야?

    냉랭한 분위기.

    사이.

    손님 : (일어서서 남편에게 간다.) 이것 좀.

    남편 : ?

    손님 : (종이를 들이밀며) 100장만 얼른 해주쇼.

    남편 : 아니, 제가 지금... 안된다고 했잖아요.

    손님 : 좀 해 주쇼. 금방 하지 않소?

    남편 : 금방이나 마나...

    아내 : 충전기 어딨냐고?

    남편 : 부엌에 가봐.

    부엌 쪽으로 나가는 아내.

    손님 : 사정이 급해서 그러니까, 좀 해 주쇼. 오늘 다 붙여야 하는데.

    남편 : 안된다니까 왜 자꾸 그러세요, 아저씨.

    아내 : (부엌에서) 안 보여. 여기다 둔 거 맞아?

    남편 : (부엌을 향해) 잘 찾아 봐.

    아내 : (부엌에서) 오빠가 와서 찾아 봐. 안 보인다니까.

    남편 : 아이 참.

    부엌 쪽으로 나가는 남편. 식당 아줌마(이하 ‘식당’)가 쟁반에 음식을 들고 들어선다.

    식당, 제본한 책들 위에 쟁반을 아무렇게나 놓는다.

    식당 : 오천 원입니다.

    손님 : 오천 원.

    식당 : 오천 원이라구요.

    손님 : 아, 내가 주인이 아닌데.

    식당 : 어디 계신데요?

    손님 : 누가요?

    식당 : 주인이요.

    손님 : 아, 저기.. (부엌을 가리킨다.)

    식당 : (부엌을 향해 소리친다.) 밥 왔어요.

    남편, 나온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쟁반을 본다.

    남편 : 아니, 이걸 여기다 두면...

    쟁반을 들어, 책상 위에 놓는다.

    남편 :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내주며) 꼭 이렇게 늦더라구요, 거기는?

    식당 : 잔돈 없는데.

    남편 : (지갑 안을 보다가 부엌을 향해) 은경아, 잔돈 가진 거 없어?

    아내 : (부엌 쪽에서) 이천 원 밖에 없는데?

    손님 : (주머니를 뒤져 오천 원짜리를 찾아낸다.) 여기...

    남편 : 아니, 괜찮습니다.

    식당 : (손님의 손에서 오천 원을 낚아채며) 다 드시면, 신문에 잘 싸서 좀 내놓으세요.

    식당, 나간다.

    남편, 손님을 본다. 손님, 종이를 들고 남편을 본다.

    사이.

    남편 : 주세요.

    손님, 종이를 내민다.

    아내 : (부엌에서 나오며) 없어. 그러게 물건 좀 제자리에 놔 둬 버릇해.

    가게 전화벨 울린다.

    남편 : (아내에게 종이를 내밀며) 이거나 좀 해 줘. 100장.

    아내, 종이를 받아 작은 복사기로 가, 복사기 버튼을 누른다.

    남편 : (통화) 네, 한솔문화사.. 아니, 제가 끊은 게 아니라요. 밧데리가 다 돼서.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손님 : (복사기에서 나오는 종이 한 장을 들어 보며) 이거, 너무 흐리게 나오는데... 우리 삼 식이 얼굴이 제대로 안 나오잖소.

    아내 : 네? (복사기 중지 버튼을 누른다.)

    남편 : (통화) 아직이요? 아니 그게 왜 안 됩니까? 이해를 못하겠네. 전원 버튼 누르신 거 맞 죠? 근데 그게 왜 안 될까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대로 누르셨어요? 천천히 좀 말 씀하세요, 흥분하지 마시고. 지금 그러셨잖아요. 짜증내는 게 아니라, 자꾸 답답한 소 릴 하시니까... 후...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러면 잘 들어보세요. 지금 리모콘이 두 개라고 하셨죠? 그게 어떤 리모콘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저... 두 개가 크기가 같아 요? 크기요. 그러니까... 길이요. 기장. 아, 그래요? 그러면 작은 거는 놔두세요. 그건 비디오 리모콘이니까 필요없는 거에요. 네, 그거 하나만 들어 보세요. 거기 전원 버튼 있죠? 그거 눌러 보세요.

    아내 : (남편에게 와, 속삭인다.) 토너가 없나 봐.

    남편 : (통화) 됐어요? 아니 그게 왜... 지금 티비 모드로 안 돼 있나 본데... 아... 이걸 어떻 게 설명하지? 음... (핸드폰을 손으로 막고 아내에게) 아직 남아 있을 텐데. (통화) 그 러면... 전원 버튼 위에 흰색 버튼 보이세요? 흰색이요. 네, 흰색. 흰색 버튼이 없어 요? 있을 텐데... 네? 회색이요? 네, 그거요. 거기 뭐라고 써 있어요? 그럼, 돋보기 쓰 고 보세요. 네네, 안 끊어요.

    토너 통을 빼서, 좌우로 흔드는 아내. 토너가 흘러 아내의 손과 옷에 토너 가루가 쏟아진다.

    울상이 되는 아내. 손님, 근처 휴지를 찾아 아내에게 갖다 준다.

    아내, 휴지로 손을 닦고 부엌으로 간다.

    아내의 모습을 보며 얼굴 일그러지는 남편. 손님, 토너 통을 든다.

    남편 :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못마땅한 말투로) 그냥 놔두세요.

    손님, 휴지로 토너 통을 닦는다. 남편, 전화기를 잠시 내려놓는다. 사내로부터 토너 통을 빼앗아 휴지로 닦고 작은 복사기에 넣는다. 버튼을 누른다. 작은 복사기, 다시 돌아간다.

    손님 : (복사기에서 나오는 종이를 확인하며, 만족한 듯) 이제 됐네.

    남편 : (전화기를 다시 귀에 댄다. 사이. 통화) 네? 못 찾으셨어요? 어디다 두셨는데요?

    부엌에서 나오는 아내. 토너 묻은 곳을 물로 비벼 빨았는지, 엷은 얼룩이 져 있는 외투.

    남편 : (통화) 그게 어디 가겠어요? 어머니가 어디다 잘 두셨겠죠. 잘 찾아보세요.

    아내 : (작은 소리로) 왜?

    남편 : (전화기를 막고, 아내에게) 돋보기를 못 찾으시네.

    아내 : 성경책 사이에 껴 놓으신 거 아니야?

    남편 : (통화) 어머니? 어머니? 아이 나 참.. (아내에게) 계속 찾고 계신가 봐. 먼저 들어가면 안돼?

    아내 : (정색) 싫어. 같이 들어 갈 거야.

    남편 : (아내에게) 어머니가 괴물이라도 되냐? (통화) 아니요, 어머니한테 한 소리가 아니 라... 찾으셨어요? 혹시 성경책 사이에 껴 놓으신 거 아니에요? 거기 한번 보세요. (사 이. 통화) 찾으셨어요? 그 보세요. 평소에 물건 좀 제자리에 놔 둬 버릇하셔야지. (아 내, 피식 웃는다.) 읽어 보세요. 회색 버튼에 뭐라고 써 있어요? 거기에 분명 티비 모 드가 있거든요. 예? 영어요? 아... 그렇지... 어... 그럼... 한글로 돼 있는 걸 읽어 보세 요. 예, 회색 버튼 중에요. 네? 투... 뭐요? 투너? 아, 튜너요? 네, 그거는 빼구요. 딴 거는? 딴 거 읽어 보시라구요. 외부? 아, 외부입력이요?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써 있 는데요? 외부기기요? 아... 그게 뭐지? 아무튼 그것도 빼세요. 아까 뺀 거랑, 그거랑은 누르시면 안 되구요. 나머지 영어로 써 있는 게 몇 개죠? 지금 티비 모드를 찾아야 하는데... 하아... (한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른다.)

    복사를 끝낸 아내, 손님에게 복사물을 넘겨준다.

    돈을 지불하고, 목도리와 장갑을 예의 그 속도로 착용하고 나가는 손님.

    아내 : (쟁반에 얹어 있는 신문지를 젖히며) 음식 다 식겠네.

    남편 : (통화) 삼 분 남았다구요? 아니, 그러니까... 재방송 보시면 되잖아요. 아니, 왜 또 그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다 끝난 얘기잖아요. 그거 중고라 별로 안 비싸요. 제가 평소 에 사치하는 사람도 아니고, 큰 맘 먹고 그거 하나 샀는데... 아시면서 그러세요. 십일 조 얘기는 왜 지금... 제 사정 아시잖아요. 나중에 형편 봐서 천천히.. 하나님도 그 정 돈 이해하실 거에요. 아뇨, 아들 오늘 좀 늦어요.

    아내 : (혼잣말로) 그놈의 아들 소리는...

    남편 : (아내 쪽을 힐끔 본다.) 은경이도 아마 늦을 텐데... 걔도 요즘 힘들어요. 일요일 하루 쉬는 건데, 좀 봐주세요. 교회는 천천히 가도 되잖아요.

    아내, 컴퓨터 앞에 가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남편 : (통화) 어머니... 어머니... 역정 좀 내지 마시고... 네? 켜졌어요? 뭐 누르신 건데요? 아무튼 이제 됐죠? 끊을께요. (전화기 끊는다.)

    아내 : (컴퓨터 화면을 보며) 또 내 욕 하셔?

    남편 : (음식에 싸여 있는 랩을 뜯으며, 딴청 부린다.) 저녁 먹었어?

    아내 :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실까.

    남편 : 같이 먹자.

    아내, 대꾸 없다.

    남편 : 뭐해?

    아내 : 하늘아래 우리 둘이.

    남편 : 어?

    아내 : 드라마.

    남편 : 그 놈의 드라마, 뭐 볼 게 있다고. 너나 엄마나... 하여튼 여자들이란.

    아내 : 신경 끄고 먹기나 해. (스피커를 버튼을 눌렀다 껐다 하며) 소리가 안 나와.

    남편 : 고친다는 게, 깜빡했네.

    아내 : 깜빡깜빡... 누구 아들 아니랄까봐.

    남편, 뭐라고 하려다 그만 둔다. 국물을 한 술 떠서 입에 넣는다.

    남편 : 다 식었네. 제기랄.

    남편, 아내를 본다. 아내에게 다가가 컴퓨터 모니터를 책상 쪽으로 돌린다.

    아내 : ?

    남편 : 같이 먹자. 먹으면서 봐.

    못이기는 척 일어나 책상 쪽으로 가 앉는다. 남편, 부엌에서 수저 하나를 더 들고 온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아내에게 내민다.

    아내 : 내가 알아서 먹어.

    남편, 손을 내민 채, 그대로 있는다. 사이. 아내, 받아먹는다.

    둘, 말없이 밥을 먹는다.

    아내 : 오랜만이다.

    남편 : 뭐가?

    아내 : 이렇게 둘이서 밥 먹는 거.

    남편 : 미안하다.

    아내 : (대꾸하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본다.) 소리가 안 나오니까, 재미없다.

    남편 : 조금만 이해해 줘. 어머니가 악의로 그러시는 건 아니잖아.

    아내 : (그릇을 빤히 보며, 뭔가를 건져 낸다.)

    남편 : 뭐야?

    아내 : 털.

    남편 : 에이, 밥맛 떨어지게 스리.

    아내 : (털을 빤히 보며) 고만 먹자.

    남편 : 왜?

    아내 : 보통 털이 아니야.

    남편 : 엉?

    아내 : 꼬부라진 각도를 봐봐. 겨드랑이 털인데?

    남편 : 아니 그 털이 왜 여기에?

    아내 : 모르지. 미스테린데? (웃는다.)

    남편 : 웃음이 나와?

    아내 : 어.

    어이없는 남편, 따라 웃는다. 손님, 들이 닥친다.

    손님 : (안절부절) 이거 어쩌나.

    남편 : 또 무슨 일입니까.

    손님 : (남편에게 종이를 내보이며) 여기, 여기가 잘못 됐소.

    남편 : ?

    손님 : 여기 봐요, 오른 쪽 다리라고 돼 있잖아.

    남편 : 그게 왜요?

    손님 : 우리 삼식이는 왼쪽 다리를 저는데... 아, 내가 이렇다니까.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젊었을 땐 안 그랬는데, 이거 점점 바보가 돼 가려나. 미안한데, 이것 좀 고쳐야겠소.

    남편 : 아니 그건...

    손님 : 미안해요.

    남편 : 그게 뭐 중요하다고 그러세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다리 저는 건 마찬가진데.

    아내 : 해 드려.

    남편 : (짜증) 그래서요? 저더러 어떡하라구요?

    손님 : 이것 좀 고치는 데 도와주쇼. 명륜동 일대를 다 붙이려면 시간이 모자라서...

    남편 : 나 참...

    아내, 전화기가 제대로 끊겨 있지 않은 걸 발견한다.

    아내 : 칠칠치 못하게... 전화기 잘못 놓여 있잖아. (전화기를 바로 놓는다.)

    손님 : 풀 있소? 내가 종이를 잘라서 여기에 붙일 테니, 글씨만 좀 써 줘요.

    손님, 길고 긴 목도리를 다시 벗기 시작한다. 복창 터지는 남편. 가게 전화벨 울린다.

    남편 : (아내에게) 받아 봐.

    아내 : 어머니면 어떡해.

    남편 : (전화를 받는다. 통화) 네? 아뇨, 전화기가 잘못 놓여 있었어요. 아니, 어머니... 예? 키셨다면서요? 네? 지지직거린다구요? 뭐 누르신 건데요? 아이 참... 외부입력을 눌렀나? 아무거나 막 누르시면 어떡해요!

    손님 : (아내에게) 풀하고 가위 있으면 좀.

    남편 :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통화) 이미 시작됐잖아요. 나중에 보세요. 아니요, 그게 지금 설명해도 안 된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들으세요! (사이.) 우세요? 아이 참...

    아내 : (남편에게) 풀, 어딨어?

    남편 : (버럭) 지금, 그게 문제야!

    뭐라고 대꾸하려다 참는 아내. 쟁반 위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풀과 가위를 기어이 찾아내는 손님, 종이를 잘라 복사물에 일일이 붙이기 시작한다.

    남편 : (통화) 그깟 드라마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후... 죄송해요. 네? 아니, 여긴 티비가 없잖아요.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아내.

    남편 : (통화) 잠깐만요, 컴퓨터로 볼 수 있긴 한데...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통화) 누구요? 태식이?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통화) 소리가 안 나와서, 누가 누군지... (들어서는 아내에게) 태식이가 누구야?

    아내, 대답 없이 외투를 입는다.

    남편 : 태식이가 누구냐고?

    아내, 남편을 노려본다. 사이. 모니터로 다가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남편 : (모니터를 바라보며, 통화) 우는데요? 태식이가요. 어떻게 알아요, 왜 우는지. 누가 죽었나? 아뇨, 태식이가 죽은 게 아니라... 태식이는 멀쩡해요. 주인공이 죽는 법 봤어요? 걱정 마세요, 안 죽어요.

    아내, 외투를 입고 나가려고 한다. 남편, 아내를 잡는다. 뿌리치는 아내. 작은 실랑이.

    남편 : (통화) 손님이 와서요, 다시 할께요. (전화 끊는다.) 왜 그래?

    아내, 남편을 노려본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

    남편 : (뭐라 말하려다가 참는다.) 같이 들어가.

    아내 : (중얼거린다.) 들어가기도 싫어.

    남편 : 뭐?

    아내 : 들어가기 싫다구, 그 따위 집구석!

    남편 : 말 다했어?

    아내 : (울먹이며) 내가 호구야? 난 속도 없는 줄 알아? 다 내 탓이지? 어? 오빠, 뭐야? 뭔데 소리 질러? 어머니도 그래. 호시탐탐 내가 뭘 잘못 하는 지만 지켜본다고. 지금이 몇 시니, 우리 아들 굶겨 죽이겠네, 이게 걸레니 행주니, 다시 삶아라, 바닥이 이게 뭐야, 깨끗이 좀 닦아라, 주일인데 어딜 나가, 교회 안가고... 결혼하고 나서부터, 난 없어. 뭘 그렇게 참았냐구? 어? 뭘 참았냐구!

    손님, 아내와 남편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남편 : 나더러 어떡하라구? 늙은 어머니한테 화라도 내란 소리야? 네가 좀 참으면...

    아내 : 참아? 왜 맨날 나만 참아? 나는 참기만 하는 사람이야? 오빠가 더 나빠. 오빠 눈에 내가 보이기는 해? 오빠는 어머니 아들이지, 내 남편 아니야. 이럴 거면, 결혼은 왜 했어?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사신다고? 난? 난, 누구 보고 살아야 하는데!

    털썩 주저앉아 울음 터트리는 아내. 안절부절 못 하는 남편.

    손님, 휴지를 아내에게 건네고 다시 자기 일에 집중한다.

    아내 : (울음을 멈추고) 산부인과 다녀왔어.

    남편 : 뭐?

    아내 : 요 며칠 하혈을 하길래, 가봤더니, 자궁에 혹이 생겼대.

    남편 : 아니, 어떻게...

    아내 : 별거 아니야. 스트레스 받으면 그럴 수 있대. 간단하게 떼냈으니까, 괜찮을 거래.

    남편, 아내를 일으켜 세우고 의자에 앉힌다. 얼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망설인다.

    남편 : 괜찮아?

    아내 : 물 좀.

    남편, 부엌으로 간다. 울리는 전화벨. 아내, 전화를 바라본다. 부엌에서 나온 남편, 아내에게 물을 건네고, 전화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사이. 전화선을 뽑는 남편. 아내, 그런 남편을 바라본다.

    사이.

    전화선을 다시 연결하는 아내. 전화벨, 다시 울린다.

    아내 : 받어.

    사이.

    남편 : 됐어.

    아내 : 받으라고.

    남편 : 지금, 이게 중요해? 그깟 드라마가 뭐라고.

    아내 : 중요해, 어머니한텐. 받어, 마음 안 좋잖아. 나도, 안 좋아.

    사이. 전화를 받는 남편.

    남편 : (통화) 네. 후... 지금 외부입력을 누르셔서, 다른 모드로 간 거거든요? 그러니까 모드는... 아니, 이 말은 신경쓰지 마시구요. 비디오 모드로 갔나본데... 채널을 누르면 빠 져 나올 겁니다. 채널이요. 아니, 그건 볼륨이구요.

    아내 : (남편에게 속삭이며) 딴 거 틀 때 누르는 거.

    남편 : (통화) 어머니가 딴 거 트실 때, 누르는 거요. 네, 그거요. 그거 눌러 보세요. 됐어요? 됐죠? (기쁜 표정) 잘 하셨어요.

    아내와 남편, 눈빛이 마주 친다. 사이. 아내, 펜을 들고 손님이 하는 일을 돕는다.

    남편 : (통화) 그러니까요, 아무거나 막 누르지 마시고, 아들이 말씀드린 대로만 해 보세요. 지금 화면이 까맣죠? 네, 그럼 다시요. 잘 들으세요. 어머니, 우리 집에 리모콘이 세 개잖아요. 제가 며칠 전에 산 게 홈씨어터라고.. 그, 영화보는 거요. 그거랑, 비디오랑, 티비가 있잖아요. 티비 보다가 비디오 보고 싶으면, 먼저 중간에 눌러야 하는 버튼이 있어요. 중간 중간 눌러줘야, 그게 바뀌는 거거든요. 이해하세요? 어머니? 어머니, 듣고 계세요? 예? 조심하세요.

    아내, 남편 쪽을 힐끗 본다.

    남편 : (통화) 예, 어머니. 다치셨어요? 다 탔어요? 그러게, 가스불 조심 좀 하시라니까. 요즘 왜 자꾸 그러세요? 몇 번쨉니까? 잘못 하다 정말 큰일 나겠어요. 아니, 왜 또 은경이를 걸고 넘어지세요? 그게 지금 걔 탓입니까? 은경이도 애쓰고 있잖아요. 안쓰럽지도 않으세요? 아니요, 놀러간 게 아니라, 병원에...

    아내 : (속삭인다.) 하지마. 남편 : (참는다. 통화) 어머니, 제발 그러지 좀 마세요. 뭐가 그리 못마땅하세요? 그러면 속이 편하세요? 편이 어딨어요, 어린앱니까?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제발, 아들 좀 괴롭히지 마시라구요! 아뇨,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손님 : (혼잣말로) 노인네한테 그러면 쓰나.

    남편 : (손님에게, 버럭) 근데 이 아저씨가 정말...

    남편, 전화기를 내팽개친다. 아내, 일어나 말린다. 남편, 분이 삭히지 않는 듯, 자신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버린다. 손님 : 내 아까부터 보니까, 젊은 사람이 못쓰겠구먼.

    남편 : 저한테 억하심정 있습니까? 왜 사사건건 시빕니까! 개새끼 없어진 게 제 탓입니까?

    아내 : (말리며) 왜 그래. 그러지 마.

    손님 : (흥분) 개새끼라니? 개새끼라니?

    남편 : 나가세요.

    손님 : 개새끼라니? 어린 사람이 늙은이한테 말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남편 : 나가라구요. 말 안 들려요?

    손님 : 자네는 평생 안 늙을 줄 아나보지?

    남편 : 곱게 늙습니다, 적어도.

    손님 : 살아 봐. 작전대로 되나.

    남편 : 아니요, 아무리 막 살아도, 아저씨만큼 절망적이진 않을 겁니다.

    손님 : (아내에게) 바깥양반, 혓바닥 조심 좀 시켜야겠어.

    아내 : (남편에게) 그만 좀 해.

    남편 : (악에 받쳐 비아냥대며) 혼자 산다고 했죠? 그렇게 답답하게 구는데, 마누라든 자식이든 어디 당해냈겠습니까? 안 봐도 비디옵니다. 개새끼까지 싫다고 가출을 했으니 말 다 했지.

    할 말을 잃는 손님. 사이. 복사물들을 챙긴다. 남편, 고장 난 복사기를 발로 찬다.

    남편 : 씨발, 이 새끼는 언제 오는 거야!

    아내 : (손님에게) 죄송합니다.

    손님, 황급히 나간다. 아내, 떨어진 전화기를 주워 제대로 끊는다. 사이.

    거칠게 전화기를 들어 전화하는 남편.

    남편 : (통화) 어머니, 지금 다른 모드로 가 있는 거거든요? 그걸 티비 모드로 바꿔야 합니다. 네? 아니요, 해 보세요. 해 보시라구요! 아니, 포기하지 마시고. 될 겁니다. (사이.) 꼭 봐야 된다니깐! 해 보세요, 그러니까. 아니, 얼마나 지났다고. (시계를 본다.) 아직 반 넘게 남았잖아요.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셔야지요. 아니요, 아니요, 끊지 마세요. 끊으시면 이제 저 어머니 아들 안합니다. 그러니까, 해 보시라구요. 할 수 있어요, 어머니.
    회색버튼부터 다시요. 찾아보세요. 아까 찾으신 거요. 아니, 어머니! 그러면, 저 는 뭐가 됩니까? 이제까지 삽질한 겁니까? 네? (사이.) 아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허구헌 날, 좁아터진 데서 복사기나 돌리는 아들, 생각이나 해 보셨냐구요! 그렇게 괴롭히셔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지금까지 제가 뭘 맘대로 해본 적 있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네? (울먹인다.) 저도 답답합니다. 이러고 있는 저도, 답답하다구요.

    아내, 남편을 본다.

    남편 : (통화) 집에 가면 숨이 막혀요. 차라리 여기서 자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요새 같으면 딱 죽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세요? 네? 말씀 좀 해보시라니까요!

    아내 : (남편에게서 전화기를 뺏는다. 통화) 여보세요? 예, 어머니. 저, 은경이요. 예, 근처 왔다가 들렸어요, 잠깐. 예, 지금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예... (듣는다. 한참을 듣는다.) 예... 어머님이 이해하세요. 이이가 힘들어서 그럴 거에요. 요즘에 일이 많잖아요.

    부엌으로 나가버리는 남편.

    아내 : (통화) 마음 푸세요, 어머니. 아참, 드라마는 보시고 계세요? 하늘아래... 예, 그거요. 네? 티비 가요? 왜 그럴까? 어머니, 그러면 성경책 좀 펴보실래요? 네, 지금요. 한번 펴 보세요. 예...

    부엌에서 얼굴을 씻고 나오는 남편.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 채로, 아내를 본다.

    아내 : 누가복음 아시죠? 거기 보세요. 누가복음, 맨 첫 글자 좀 보세요. 보고 계세요? 네, 그럼 ‘누’ 자에서, 위에 니은을 빼보세요. 아니, 그러니까... 그러면, 손가락으로 니은 만 가려보세요. 밑에 남은 글자 보이시죠? 자 그러면요.. 리모콘에, 회색 버튼들 있죠? 거기에 그 글자랑 모양이 같은 걸 찾아보세요. 천천히 찾으세요. 찾으셨어요? 네 네, 맞을 거에요. 그거 눌러 보세요. 하셨어요? 됐어요? 됐죠? (환호) 야호!

    남편 : (덩달아 흥분) 뭐야? 됐어?

    아내 : (환한 표정으로) 어, 됐대!

    아이처럼 손을 맞잡고 좋아하는 남편과 아내.

    아내 : (통화) 장하세요! 잘 하셨어요. 네, 네. 일찍 갈께요. 네? 이이랑요? 그래도 돼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너무 늦지 않을께요. 네, 어머니, 드라마 재밌게 보세요. (끊는다.)

    남편 : ?

    아내 : 흐흐, 둘이 저녁 먹고 실컷 놀다 들어오래.

    좋아하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포옹한다.

    사이.

    남편 : 맥 빠진다.

    아내 : 뭐가?

    남편 : 너무나 쉽게 설명해 버렸잖아. 어떻게 그렇게 어머닐 잘 알아?

    아내 : (피식 웃으며) 우리는, 여자잖아. 드라마 따위에 목숨 거는.

    남편 : (포옹을 풀며) 삐졌어?

    아내 : (웃는다. 사이.) 나도, 어머니가 악의로 그러는 거, 아닌 거 알아. 다만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야.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냥 놔둬보려고. 그 러니까 오빠도 마음 편히 가져. 남편한테 불평도 못해, 나는? 내가 불평하면, 그냥 들어만 주면 돼. 뭘 해달라는 게 아니라, 들어만 달라고. 그거면 돼. 어머니도, 나도...

    사이.

    남편 : 이제 뭐 할까? 영화라도 볼까?

    아내 : (제본할 종이더미를 가리키며) 얘네들은 어떡하구.

    남편 : (잠시 고민한다.) 남자, 가오가 있지! 가자, 가자. (잠바를 챙겨 입으며) 뭐 먹을까?

    아내 : 털만 안 들어 있으면 뭐든지.

    둘, 웃는다. 사이. 돌아가던 복사기 멈춘다. 남편, 황급히 복사기 쪽으로 가서 살핀다.

    아내, 그런 남편을 물끄러미 본다. 사이. 눈 마주치는 둘.

    사이. 남편, 민망한 듯 웃어 보인다.

    아내 : 다음에 잡아.

    남편 : 뭘?

    아내 : 가오.

    아내, 외투를 벗고 일을 할 태세로 손목을 걷어 부친다.

    남편 : (미안한 표정으로) 모처럼의 데이튼데...

    아내 : 까짓 거 여기서 하지 뭐, 데이트.

    아내, 제본기기로 제본을 하기 시작한다. 남편, 아내를 보며 머뭇거린다.

    아내 : (남편에게) 나만 부려먹을 생각이야?

    남편, 잠바를 벗고 복사기의 이곳저곳을 연다.

    남편 : 쉬지 않고 돌리니까, 열을 단단히 받았군. 좀 식혀야겠어.

    복사기의 이곳저곳을 열어, 열을 식힌다. 주위의 종이를 들어 복사기에 대고 부채질을 한다. 사이.

    아내 : (제본을 계속 하며) 오빠도, 식혀줘야 하는데.

    남편 : ?

    아내 : 오빠야 말로 한 번도 쉬지 못했잖아, 결혼하고 쭉.

    남편 : (멋쩍은 미소 짓는다.)

    아내 : 미안해, 내 얘기만 해서.

    아내, 눈물을 흘리는 지 고개 숙인 채 제본만 계속한다. 둘, 말이 없다. 사이.

    남편 : (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발견한다.) 어? (목도리를 든다.)

    아내 : (목도리를 보며) 아까 그 할아버지가 놓고 간 모양이네.

    남편, 목도리를 들어 툭툭 먼지를 턴다. 목도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사이.

    남편 : 오늘 잡자.

    아내 : 뭘?

    남편 : (미소를 머금고) 가오.

    아내 : (피식 웃으며) 어떡하게?

    남편 : (잠바를 챙겨 입으며) 어디라고 했지?

    아내 : 뭐가?

    남편 : 전단, 어디에 붙인다고 했지?

    아내 : 아... 명륜동.

    남편 : (아내의 외투를 집어 아내에게 건네며) 가자, 명륜동!

    아내 : (잠깐 생각하더니 씨익 웃는다.) 걸리지?

    남편 : (말없이 고개 끄덕인다.)

    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사이. 아내, 외투를 입는다.

    아내 : 가자, 삼식이 찾으러.

    남편 : 삼식아, 형이 간다.

    마주보고 웃는 부부. 사이. 손을 맞잡고 뛰어나가는 둘.

    해체된 복사기 두 대가 입을 벌린 채 있다. 사이.

    가게 전화벨 울린다. 끈질기게.

    조명, 어두워진다.

    막.
    이진경

    이진경

    1977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졸업

    중앙대 연극반 영죽무대 활동

    현 ‘극공작소 마방진’ 작가

  • 한태숙(연출가) 박근형(연출가)

    2008년 신춘문예 희곡부문 응모작은 95편이었다. 연극 현장은 위축되어 있는데 희곡작가가 되려는 열의는 뜨겁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반가웠다.
    본심에 오른 네 작품 중 최미롱의 ‘개구리 죽이기’는 삶의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고 있다. 불온하고 불안한 인물 이야기를 부조리극 형식으로 긴장감 있게 펼쳐놓은 솜씨가 대단한데, 관념이 관념으로 그친 아쉬움이 있다.

    조인숙의 ‘밴드래기 아기’는 곰보 신랑과 바보 홍순의 사랑과 진실을 진부하지 않게 다룬 세련미와 극의 서정성이 돋보였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정서를 침착하게 시적으로 풀어낸 강점이 있지만, 극적 전환점이 약했다.

    김혜정의 ‘심인들에게서 온 편지’는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겨룬 작품이다. 신라시대 무왕의 고분군을 무대로 주 인물들이 고분에 잔디를 입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설정 자체가 독특하고 작가의 치밀한 무대 파악력이며 주제를 이끌어가는 능력을 높이 살 만하지만, 망각 바이러스의 장치나 아이의 존재가 모호해 당선을 놓쳤다.

    당선작 이진경의 ‘리모콘’은 특별하거나 시의성이 있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아니다. 복사가게를 하며 사는 소시민의 가정사와 가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박하게 엮어냈는데 작가의 겸손한 시선이 돋보이고 재밌는 상황묘사며 탄탄한 구성이 좋았다. 인물들 성격이 살아있어 싱싱한 활어 같은 맛이 느껴졌다.
  • 이진경

    이진경

    1977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졸업

    중앙대 연극반 영죽무대 활동

    현 ‘극공작소 마방진’ 작가

    당선소감용 미사여구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간의 남의 소감들을 슬쩍 훔쳐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습니다. 제가 이렇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은 당시의 소감,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소감, 그 날 밤의 소감, 자는 중의 소감, 다음 날 아침의 소감, 그리고 지금의 소감. 시시때때 변하니 난처할 따름입니다.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가는 지하철 안. 꾸벅꾸벅 졸다가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계속 놓치고 있었습니다. 잠결에 받은 전화로, 횡설수설 끝에 꿈이 아니라는 사실만 겨우 확인했습니다. 아울러, 집이 아닌 곳에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사회성 점수 52점, 동양에서는 낮다고 할 만한 점수는 아니며, 내재된 분노와 공격성이 보이며. 뱃속에서부터 심리상담가였을 게 분명한 참한 언니의 입 모양을 물끄러미 보다 보니, 슬슬 실감이 났습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불쑥. 저, 신춘문예 당선됐대요, 흐흐흐. 반사회성 점수가 53점으로 올라갔을지, 모를 일입니다.

    당선이라고 말해도 굳이 “당첨 축하한다”며 상금이 얼마냐고 묻는 못 말리는 엄마와, 피와 같은 자매들, 덴젤 워싱턴보다 훨씬 멋진 내 남편 경민. 사랑합니다.

    저에게. 저마다의 우주를 보여준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기쁜데도 마냥 웃음이 안 나오는 나름의 이유가 분명 있겠지요.

    건강한 작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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