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날려, 훅

by  정수진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화장실 냄새가 다 거기서 거기지, 라고 말하지 마. 니가 그 화장실에서 나는 악취를 맡아봤다면 그렇게 말 못할걸. 이건 심한 정도가 아니라니까. 어디 화장실? 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른 건 몰라도 화장실만큼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지 상상이 가는 건물들 있잖아. 그 날 면접을 보러 간 건물이 그랬어. 5층짜리에 엘리베이터도 없는 우중충한 회색 건물인데, 뭐랄까, 마치 시원스럽게 쭉쭉 뻗은 요즘 애들과는 달리, 국사책에서나 보던 좀 오래된 옛날 사람들의 골격을 닮았다고나 할까. 어딘지 안쓰럽게 골골대고, 우스꽝스럽게 짜리몽땅해가지고 내세울 거라곤 징그러운 나이뿐인, 아주 꼬질꼬질하고 꼬장꼬장한 노인네 같은 분위기.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사무실은 5층이었어. 그 좁은 계단 폭을 오르려니 저절로 요조숙녀 자세가 나오는 거 있지. 그래도 면접이랍시고 그간 옷장에 처박아 둔 프릴 스커트에 8센티미터의 아찔한 스틸레토 힐까지 꺼내 신고 왔는데, 이거 예정에 없던 계단 등반으로 완전 스타일 구기게 됐지 뭐야. 2층쯤부터 서서히 발이 아파오더니 뒤꿈치가 빨갛게 벗겨지질 않나, 간만에 한 화장은 땀범벅이 된데다 치맛자락은 자꾸 들러붙질 않나,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거야. 높은 굽에 몇 번 휘청거려서 낡은 계단 손잡이를 움켜쥐고 한 칸 한 칸 어기적어기적 오르노라니, 문득 다음부턴 아르바이트 모집공고를 볼 때 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하는 건물인지 아닌지 부터 조목조목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그래 맞아. 5층까지 헉헉대며 올라가는 동안, 나는 면접을 대충 마친 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검색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구. 물론 얼굴도 모르는 사장한텐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면 그 쪽에서도 5층짜리 계단을 핑계로 흔치 않은 취업 자리를 미련 없이 포기하는 근성 없는 알바생은 썩 달가워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왜 아니겠어? 지원자가 남아 돌 텐데. 뭐 일에 비해 그리 적은 월급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간신히 5층에 도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사무실을 찾으려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면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신호가 오는 거야. 알지? 내 오랜 지병인 과민성 대장증후군. 그 녀석이 하필 그렇게 들이 닥칠 게 뭐라니? 신경질이 나긴 했지만 일단 장비 점검부터 들어갔어. 시간상 5층 계단을 내려가 바로 앞 편의점에서 질 좋은 티슈를 풍족하게 준비하긴 역부족이었고, 그나마 핸드백 안에 길거리에서 나눠 준 개업 홍보용 티슈가 몇 장 남았다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했지. 나는 일단 복도 끝에 보이는 남녀공용화장실로 향했어. 알아, 그런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화장실에 대한 기대 따윈 없었어. 기대는 무슨. 그 건물 안에서 비데달린 대리석 화장실을 찾아 헤맬 멍청이가 어딨겠냐구? 이미 각오한 바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기대치를 그렇게 낮추었음에도……, 이건 좀 심했다니까. 차라리 시골길 풀숲 안이 낫지. 거긴 공기라도 맑을 거 아니니. 우웁, 말을 말아야지,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구역질난다니까. 그래, 처음엔 너무 급한 나머지 화장실을 천천히 훑어볼 겨를은 없었어. 뱃속이 막 꾸르륵대기 시작하니까 나름 긴장하고 당황했는지 그나마 화장이 번진 얼굴에 아예 땀이 줄줄 흐르더라고. 그게 얼마나 공들인 메이크업이었는데. 나중에 세면대 거울로 확인하기 전까진 그 정도일줄 몰랐다니까. 아이라인은 번지고 볼터치는 얼룩져서 퍼프를 꾹꾹 눌러도 소용이 없었어. 니가 봤으면 분명 한마디 했을 거야. 왜 아니겠어? 넌 유난히 그런 지적을 즐기곤 하니까. 아니긴 뭘 아냐. 하긴 뭐, 그 순간 삐에로가 되든 너구리가 되든 그깟 번진화장이 대수겠어? 난 부리나케 그 건물 5층 화장실 첫 째 칸으로 입성했지. 들어서자마자 핸드백부터 거추장스러워진 난 우선 물건 거는 고리부터 찾았어.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맥없이 너덜거리더군. 하지만 그 정도로 다음 칸을 건너가기엔 뱃속 신호가 꽤 급박 했던 거야. 대충 핸드백을 어깨에 둘러매는데 자꾸 흘러내려서 그냥 목에 걸어버렸지. 찰랑대는 핸드백 끈을 목에 건 채 엉거주춤 한 자세로 치마를 올리고 팬티를 내리고 엉덩이를 겸손하게 낮추며 쪼그려 앉기까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어. 뱃속은 이미 전투태세인지라 자칫 힘 조절에 실패했다간……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지. 난 입을 벌리고 이를 악물었어. 코로 숨쉬긴 싫었거든. 그리고 쪼그려 앉자마자 화장실에서 해야 할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했지. 힐을 신은 발끝이 저리도록, 앉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도록, 땀범벅인 얼굴이 시뻘개 지도록, 최선을 다해 아랫배에 힘을 줬어. 당연히 화장실엔 원치 않는 민망한 효과음이, 변기통엔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그래, 그래, 알았어. 깔끔한 척은. 하여간 마지막 단계를 위해 난 핸드백을 열고 얼마 안 남은 티슈를 꺼냈지. 그야말로 공짜로 준 티가 팍팍 나는 티슈, 티슈란 고운 이름으로 불리기엔 다소 거친 재생의 과정을 거쳐 더욱 거친, 그 뻣뻣한 감촉의 휴지들을 몽땅 뽑아 들었어. 보기보다 얄팍해서 몇 장 겹쳐봤자 겨우 험한 꼴 면할 수준이더군. 몇 장의 재생 휴지를 신중하게 접어 쓰고 돌려쓴 뒤 뿌듯한 마음으로 막 팬티를 올리려다, 나도 모르게 휴우, 입으로 숨쉬길 깜박한 거야. 긴장이 풀린 게지. 우웩, 나는 코로 흡입한 공기를 거의 동시에 입으로 뱉어내야 했어. 후웁, 악취도 그런 악취가 없다니까. 단순히 인간의 배설물이 품고 있는 특유의 냄새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뭔가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며 보다 진화된 형태의 악취, 라고 하면 좀 이해가 될까? 뭐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군. 알았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뭘 원해? 파스타? 난 상관없어. 파스타든 뭐든. 그 때 생각 하니 갑자기 입맛이 싹 달아나는걸 뭐.

    어쨌거나 내가 말하려던 건 그 화장실의 분위기야. 빛이 들어 올 창문이라곤 없고 복도도 어두컴컴해서 작은 형광등이 하나 켜져 있는데 그마저도 자꾸 껌뻑대더라고. 세면대는 잔뜩 녹이 슬었고 음식물 찌꺼기들이 들러붙었는지 오물 자국투성인데다 잘 돌아가지도 않는 수도꼭지엔 물발도 쫄쫄쫄. 축축한 바닥을 보니 타일 틈새로 시커먼 물이 고여 몇 번 안신은 내 힐을 딛고 서있기 조차 꺼림칙했다니까. 게다가 휴지통 근처를 기어 다니는 이름 모를 자잘한 벌레들이며 배수구 근처에 미처 물에 내려가지 못한 시커먼 머리카락 뭉치며, 어찌나 섬뜩하든지. 으, 정말이지 이 세상에 낱개보다 여러 개가 뭉쳐있을 때 그 그로테스크한 위력이 극대화되는 걸로 치자면 난 단연코 벌레와 머리카락을 꼽겠어. 그 긴 더듬이를 저으며 내 힐 위로 기어오르는데,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시커멓게 엉겨 붙은 긴 머리카락들은 어떻고. 아니 대체 누가 그 더러운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나간 걸까. 순간 미끌미끌하고 냄새나는 축축한 타일 바닥에 맨 발로 서서 음식물 찌꺼기가 배어있는 녹슨 세면대에 저 길고 검은 머리칼을 집어넣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거야. 아무래도 그간 쓸데없이 사다코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싶었지. 하지만 상상은 거기서 멈추질 않았어. 더러운 타일바닥의 머리카락, 벌레들이 꼬이는 휴지통 속 썩은 시체, 머리가 잘린 피투성이 좀비들, 우워어어, 귀를 찢는 비명 소리, 그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마우스를 움직이는 거지. 녀석들의 몸통을 차례로 명중시키고 휴지통을 뒤져 아이템을 획득하고 새로운 스킬과 무기로 남은 좀비들까지 모두 처치하고 나면 이 악취 나는 화장실 스테이지는 가볍게 클리어, 캐릭터는 가뿐히 레벨 업!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그래, 심각했지. 온라인게임에 미쳐 살았으니까. 인정해. 할 일이라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보내고 좀비들을 격파하는 것 뿐 이었으니까. 썩 보람된 일은 아니지. 그 끔찍한 좀비들을 하루에 수천 명씩 죽여줬는데도 누구하나 고마워하지 않더군. 더군다나 매일 그것들을 죽이다보면 눈가엔 짙은 다크써클, 온몸은 뻐근하게 이곳 저 곳 쑤시는 데다 시선은 멍, 걸음걸이는 휘청휘청, 그야말로 영락없이 좀비 꼴을 닮아가는 거야. 살아있는 시체 말이야. 안타까운 악순환이었지.

    눈치 챘겠지만 당시 난 여러모로 고립되어 있었어. 돈도, 남자도, 일도, 사람들도, 어쩜 끊길 땐 모조리 다 딱 끊겨버린다니? 오죽하면 너한테 그런 부탁까지 다 했겠어? 지금 생각하면 니가 오히려 잘 거절해준 거야. 난 제 정신이 아니었거든.

    그렇게 게임 캐릭터를 레벨 업 하는 낙으로 하루를 마감한 뒤, 머리와 어깨가 쑤셔와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정 벽지를 노려보는 일만 반복했었지. 아니 어느 순간 벽지 무늬 세는 일에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더라니까. 아직도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그 지긋지긋한 마름모꼴들이 생생해. 라면국물이 튄 벌건 자국까지도. 정말이지 끔찍한 무늬야. 그래, 상황만 따지자면 누구보다 다급했지. 인정해. 5층이 아닌 10층이라도 걸어 올라가서 면접을 보고 합격통보를 받아낸 후 일정한 수입을 얻어내야 할 형편이었단 거. 물론 좀 더 재밌고 편한데다 돈도 많이 주는 알바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나 같은 한심한 휴학생에게 그런 일을 시켜 줄 사장님은 없다고 봐야지. 당장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사무직 알바야 좀 지루하긴 해도 나처럼 예민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 대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적은 편이니까, 그런대로 내 시간도 있고 말이야. 그럼, 할 만하지.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리 나쁜 조건도 아니었다구. 의외로 경쟁률이 꽤 될지 몰라. 혹시 알아? 낡은 회색 건물을 닮은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사장님으로부터 꼬박꼬박 미스 리, 라고 불리게 될지. 뭐 어때, 적어도 지금보단 안전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일주일에 5일정도 미스 리로 사는 거, 나쁘지 않아 보였어. 방바닥에서 벽지무늬 헤는 밤을 보내느니 5층 계단 오르는 아침을 맞는 게 건강에도 좋고 생활에도 유익하고, 안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그만 자리 옮기자. 메뉴는? 아, 파스타 먹고 싶다고 했지. 그래도 꼬리곰탕 같은 게 더 나을 텐데.

    사실 본격적으로 너한테 할 얘긴 이제부터라고. 밥 먹기 전 화장실 얘기 꺼내게 된 건 유감이지만 말이야. 여기, 주문요! 자, 자, 그러니까 면접 시작 5분 전, 화장실의 지독한 악취에도 불구하고 난 금이 간 세면대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바쁘게 재점검에 들어갔어. 왜는, 사장의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뭐 내자랑은 아니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작정하고 꾸미는 날엔 남자들이 침 좀 흘리잖아. 야, 물은 왜 뿜어! 알았으니 진정하고 들어봐. 번진 아이라인을 다시 그리고, 마스카라를 덧칠하고, 반짝이는 립글로스를 다시 발라주고, 땀으로 얼룩진 볼 화장을 조심조심 고치고, 들러붙는 스커트자락은 물을 좀 묻혀서 가능한 바짝 올려 입고, 하이힐과 벗겨진 뒤꿈치 사이에 사무실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구겨 살짝 집어넣어주고, 또 뭘 했더라, 그래, 하늘거리는 쉬폰 블라우스를 좀 더 타이트한 실루엣으로 만들기 위해 가슴 쪽 리본 끈을 풀었다 다시 매고, 단추를 끼웠다 풀고 하면서, 그야말로 알차게 남은 5분을 활용하고 난 뒤, 드디어 운명처럼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어. 두두둥, 바로 이런 효과음이 필요한 순간이었지.

    “주문하시겠습니까?”

    이런, 타이밍하곤. 넌 뭐? 봉골레? 난 카르보나라. 다른 건? 내가 쏜다니까. 말했지, 나 이제 돈 많다고. 좋아, 그럼 이따 더 시켜. 저기요, 우선 이거랑 이거 먼저 주세요. 어디까지 했지? 아, 그래, 약속 된 면접 시간, 나는 사무실 문을 빠끔히 열고 쭈뼛쭈뼛 들어섰어. 보기보다 낯가림이 좀 심하잖니. 누군가 바로 돌아봐 줄줄 알았지만 두 명의 직원 모두 하나같이 컴퓨터 모니터만을 전투적으로 노려 볼 뿐이었어. 사무실 안 공기는 조용하고 눅눅하며 꽉 막혀있었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상과 파티션들은 무척 지루해보였고. 휑한 벽면에는 고장 난 플라스틱 벽시계가 뜬금없는 시간에 멈춰있었어. 내가 둘 중 그나마 또랑또랑해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 저기요, 면접 보러 왔는데요, 라고 하자, 그는 으악, 깜짝이야, 라고 소리치더니 잠깐만요, 하곤 마우스를 쉴 새 없이 움직인 후, 조용히 일어나 사장실은 이쪽입니다, 라며 왼쪽 끝의 유리문을 가리키더군. 모니터엔 전사 복장의 게임 캐릭터가 괴물좀비들과 한창 피 터지는 전투 중이었어. 아무렴, 쉽게 한 눈 팔 수 없는 순간이지. 더군다나 그 정도 고랩 유저라면, 이해해. 아니 모두들 전투적으로 모니터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난 진심으로 이해 한다구. 아마 그들은 스피커 소리를 죽여 놓은 채 자신이 피 흘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방바닥에 누워 마름모꼴 벽지무늬를 세는 데 몰입했던 것처럼 말이야. 난 피 터지는 전투에 몰입한 채 마우스만 딸깍대던 무표정한 직원들을 쳐다보면서 어쨌거나 자포자기에 날 잡아 잡수, 보단 이런 전투적인 사무실 분위기가 더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됐어.

    사장실, 이라고 할 것까지 없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예상과는 달리 마흔 중반 쯤 돼 보이는 인상 좋은 남자가 통화를 마무리 지으며 막 수화기를 내려놓는 중이었어. 입사 지원자에게 신뢰를 줄만한 적절한 첫 장면이었지. 책상위엔 그에게 메일로 접수 된 지원서 뭉치가 쌓여 있는 것 같았어. 사장은 쉽게 내 이력서를 찾아내더군. 지원자들 간의 면접시간이 철저히 나누어져 있나보다, 했지. 이쪽으로 앉으시죠, 인상 좋은 사장은 그날따라 무료했던 게 분명해. 도대체가 별 쓸데없는 걸 꼬치꼬치 캐묻는데 나중엔 내 이력이 오죽 한심하면 그냥 심심풀이로 면접을 보는 걸까, 싶더라니까. 아르바이트경력, 문서작성능력, 교통편, 학교, 전공, 학점, 휴학사유, 졸업 후 진로 따윈 궁금해 하지도 않고, 백수 경력, 현재재정상태, 교우관계, 관상, 체력, 100미터 달리기 기록, 평균취침시간, 알레르기유무, 애인유무, 를 따진 뒤 회사 창립 배경, 고객우선의 경영모토, 분기별 수익현황, 사무실 이전 계획, 사원들의 다양한 경력과 프로필, 등을 거쳐 다시 애인유무, 이별 사유, 마지막 데이트, 휴일 여가활동, 취미, 가장 선호하는 게임, 종류별 게임 경력, 요즘 플레이하는 게임, 최장 플레이 시간, 캐릭터의 종류, 레벨, 소유하고 있는 레어 아이템, 마지막으로 미니홈피주소, 에 이를 때쯤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해 하품을 하고 말았어. 일종의 두뇌 조건반사지. 그동안 지겹게 겪어 온 주선자와 상종 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소개팅과 전혀 다를 게 없었거든. 다만 사장은 소개팅에 나온 녀석들보다는 수다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었어. 꼼꼼한 정보를 요구하면서도 질문은 간단했고 내가 답변하는 동안 끼어들거나 자기 경험 따윌 들먹이지도 않았어. 그는 내 대답에 아주 가끔씩 동의를, 가끔씩 한숨을, 대부분 침묵을, 일관하며 말을 아끼는 편이었지. 시종일관 흐트러짐 없는 진지한 자세였어. 뿐만 아니라 면접 내내 내 가슴과 엉덩이, 다리와 허벅지에 고요히 머물러있는 눈빛 역시 전혀 흐트러짐 없는 일관된 시선이었지. 나는 사장실이 유리문임을 기억하곤 뒤를 흘깃 쳐다봤지만 이미 연두색 블라인드가 촘촘히 내려와 있는 광경에 과연, 하고 생각했어. 이해해. 사장이란 한 발 앞서 늘 주도면밀해야하니까.

    그럼,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사장은 팔이 아프도록 긴 악수를 하더니 복도를 지나 계단 앞 까지 날 배웅 했어. 반 층쯤 내려왔을 때 문득 못 다한 신호가 또 밀어닥쳤지. 꾸르륵, 꾸르륵, 다시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가려고 뒤를 돌자마자 아직도 안가고 서 있던 사장이 당황한 표정을 보이더군. 뭐 하세요, 정말 그렇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오히려 이유를 대답하고 있는 건 나였어. 저, 화장실 가려고요, 아마 몸을 살짝 비튼 채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야 하는 내 하이힐이 몹시 아슬아슬 해 보였나보지. 쓸데없는 노파심은.

    “주문하신 파스타 나왔습니다. 봉골레, 어느 쪽이세요?”

    저 쪽요, 맛있어 보이네. 일단 한 입……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화장실로 한달음에 뛰어 들어가 반복되는 작업을 허둥지둥 마치고나니 그제서 뻣뻣한 휴지 한 장 없음을 깨달은 거지. 난 과감히 소리쳤어. 사장님! 여기 휴지요! 역시나 주도면밀한 사장은 어느 틈에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와 화장실 문 위로 조용히 내려주었어. 그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 같았지. 그래, 비웃어라. 니가 그 심정을 어떻게 알겠니? 뭐? 이게 끝이냐고? 설마, 이게 끝이겠니? 성격한번 급하셔. 지난번 헤어숍에서도 제대로 얘기 못하고 헤어져서 얼마나 서운했는데, 오늘은 내 얘기 다 듣고 가야 된다구. 자, 불편하면 여기 쿠션에 팔을 좀 기대시고.

    면접합격통보를 받고 내일부터 출근하게 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하고 뭔가 믿는 구석이 생긴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 물론 그 이유가 하늘에서 내려 온 두루마리 휴지 때문이라고 한다면 넌 날 한심하다고 하겠지. 알아. 한심한 생각.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 근데 왠지 그 사무실은 나를 그렇게 구원해줄 것만 같았어.

    우중충한 회색 건물을 빠져나오자 햇살이 눈부시더군. 연이어 쪼그리고 앉아 아랫배에 힘준 탓인지 온몸에 힘도 없고 몹시 어지럽기까지 했어. 화장실 악취 탓인지 머리도 띵하고 말이야. 난 큰길로 나와 버스 정류장 벤치에 걸터앉았어. 벗겨진 뒤꿈치에서 피가 나와 제법 쓰라렸어. 바람은 신선한 봄바람, 공기가 달랐지. 그제야 거리가 온통 벚꽃과 목련으로 가득하단 걸 알아챌 수 있었어. 까르르, 옆자리에 앉은 여고생들의 넘어가는 웃음소린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옥타브였지. 걸어오는 남녀커플은 두 손에 구름 같은 솜사탕을 들고 오는 바람에 반달모양의 눈웃음밖에 안 보였어. 쇼핑백을 한 가득 든 모델 같은 여자는 바로 앞 건널목에 주차된 매끈한 스포츠카로 폴짝, 올라탔고, 건널목정면의 통유리 카페엔 커피를 홀짝대며 최신형 노트북을 두드리는 뿔테안경의 긴 손가락이 몹시도 바빠 보였지.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런웨이를 행진하듯 거침없이 걸어갔어. 아무도 돌부리에 걸리거나 높은 굽에 삐끗대거나 흐물흐물 휘청대진 않았어. 찾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의 구두엔 뭔가 다른 바코드라도 입력 된 걸까. 길바닥마저도 너그럽게 인식하는 그런 바코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두운 지하 던전에서 좀비들과 싸우기엔 너무 화사한 봄날 오후였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벽지무늬를 헤아리기엔 너무 낯 뜨거운 햇빛이었어. 나는 핸드백을 뒤적여 휴대폰을 찾았어. 휴대폰에선 지독한 화장실 냄새가 났지.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메시지를 쓰다가 지우다가, 벨소리를 바꿨다가 진동으로 다시 바꿨다가, 이래저래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몇 시나 되었나, 몇 시쯤에 들어가야 적당하나, 액정화면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 순간이었지. 두두둥, 그래, 사장의 전화였어. 내일부터 출근하시죠. 그의 말투는 간결 했지만 내겐 간절하게 들려오더군. 마치 내가 없으면, 날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 할 것 같다는 고백처럼.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두터운 지원서 뭉치를 제치고 당첨된 것 치곤 어쩐지 좀 시시하기까지 한 걸, 순식간에 여유만만해진 나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지. 하지만 튕길 필요까진 없었어. 지난번에도 공연히 재다가 소식 끊긴 적 있었거든. 멍청하게도 가끔 면접과 소개팅을 구별 못 하는 게 탈이라니까. 아무튼 괜한 도도함은 접기로 했지. 그 전화야말로 벽지 무늬를 세던 천정을 뚫고 내려 온 든든한 동아줄임을 부정 할 순 없었으니까. 난 동아줄을 꼭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줬지. 사장님, 고마워요! 낼 봬요! 너무 유치하다고? 니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대개의 감정은 거창하게 포장될 뿐이야. 포장을 벗긴 감정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거든. 알고 보면 모든 결정은 한없이 유치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미미한 감정의 흐름. 그러나 결코 억누를 수 없게 쿡쿡 통증을 유발하는 충동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넌 잘 모를 거야.

    어디선가 긴 바람이 불어왔어. 바람이 지나가자 곧 기다리던 버스가 스르르 도착하더군. 바로 코앞에서 버스 문이 열리는데 왠지 코끝이 찡해 오더라고. 그래 또 유치하다 해도 좋아. 이제 세상은 날 향해 문을 활짝 열어주는구나, 그래, 그렇게 모든 게 척척 풀리는구나, 뒤꿈치에선 피가 흘렀지만 발걸음은 가뿐했어. 정말이지 인간의 감정이란, 신기하지 않니?

    여기 피클 좀 더 주세요. 배고프다더니 어째 잘 못 먹네. 속이 별로 안 좋아? 내가 화장실 얘길 너무 오래 했나? 하지만 이제부턴 니 취향에 맞는 흥미진진한 얘기니까 걱정 마.

    첫 출근, 너무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남들 다 하는 출근, 이란 걸 하게 되니까 무뎌진 온 몸의 세포가 흥분하기 시작하는 거야. 국사책에 나올법한 그 우중충하고 낡은 건물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건물로 보였고, 엘리베이터 없이 오르는 5층 계단은 직원들의 근력발달을 돕는 훌륭한 운동기구로 느껴졌으며 사무실의 고즈넉한 분위기 역시 업무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고, 누가 들어 오건말건 말없이 게임에 몰입 중인 직원들은 내가 파티사냥으로 한 판 붙어 주면 금방 엄지를 치켜들고 찬사의 말을 쏟아낼 것 같았지.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는 내게 사장은 자잘한 얕은 주름을 지으며 웃더니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다는 인사치레부터 건넸어. 그리곤 모두 주목, 훈련조교 같은 목소리로 달랑 두 명뿐인 직원들을 향해 진지하게 내 소개를 시작했지. 그제야 나를 똑바로 쳐다보게 된 두 명의 직원들도 설렁설렁 통성명을 마치더군. 물론 워낙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모니터에 집중하는 바람에 도대체 그게 본명인지, 게임 아이디인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지만. 청바지에 스트라이프 셔츠가 경쾌해 보이는 서른 초반쯤의 남자는 이반 씨, 빛바랜 양복을 츄리닝처럼 소화하고 있는 마흔 중반의, 아니 가끔은 환갑처럼 보이기도 하는 후줄근한 아저씨는 언데드. 그러니까 반 씨와 언데드 아저씨, 난 이들과 직장동료가 된 거였지. 그래, 동료를 가져 본지도 오랜만이었어. 모두 제자리로, 다시 훈련조교 같은 사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도 어디로든 해산해야 할 것 같아 쭈뼛 쭈뼛 서성거리고 있었지.

    사장은 날 유리문 안으로 부르더군.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어. 커피 심부름이나 문서 작성, 복사 따위의 일은 기대도 말라고. 사무직 알바잖아요? 내 반문이 무색하게 그는 싱긋 웃고는 간단한 계약서니 읽어보고 질문하라며 내 앞에 몇 장의 종이를 들이밀었지. 빽빽하게 들어 찬 글자만 봐도 머리 아픈데 갑이니 을이니 뭔 소린지 모르겠더군. 그런데 몇 줄 읽다보니 뭐야, 이건, 하며 코웃음 치게 되는 거야. 몇 줄 더 읽으니 웬걸, 이거 계약서야, 소설이야, 싶다가, 조금 더 지나선, 혹시 날 시험해보려는 면접의 연장인가, 란 생각까지. 아니, 아니, 이건 아니지. 뭔가 이상한 사이코 회사가 틀림없어, 난 점점 의심스러워졌어. 그리고 결국 마지막 줄에 을, 이라 불리는 내 서명난이 보이자, 난 이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사장은 내 표정을 찬찬히 살폈어.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 그 와중에도 난 사장의 예상과 달리 제법 영리한 신입사원임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곧바로 아는 척 대답했지. 그러니까 고객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복수를 돕는 거군요, 빙고! 사장은 어울리지 않게 발랄한 호응을 하더니 멋쩍은 듯 머리칼을 쓸어 올렸어. 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 그 목표물이란 걸 프로그램화 한 후 온라인 게임에 투입한다, 고 하는 데 이거 무슨 전체관람가의 판타지영화시나리오냐고, 이걸 나더러 믿으라는 건데, 혹시 내가 중학교쯤 휴학인걸로 보이냐고, 아님 여기가 말로만 듣던 취업사기단의 온상지냐고. 기가 막혀, 나 참. 사장은 기껏해야 그런 상식적인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 젠장, 그렇다면 이건 게임을 빙자한 청부복수 쯤 되는 게 아니냐고, 사무직 알바 채용은 사기였냐고, 아니 뭔가 더 그럴듯한 사기였다면 덜 억울할 지경이라고, 난 거의 몇 분간 혼자 열을 내며 소리를 질러댔지. 이 미친 회사에 동참할 수 없고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서명 할 수 없으니 이만 관두겠다고, 아니 그전에 일단 이 불법 영업행위를 경찰에 고발해야겠다고, 각종 일간지와 주간지, 방송사의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비롯해, 노동부나 근로복지 공단, 중소기업진흥청, 한국 소비자 연맹, 문화관광부, 한국 게임 산업 진흥원, 저작권위원회, 인터넷 취업포탈 사이트, 취업 정보공유 카페 날아라 백수, 건전한 e스포츠 만들기 위원회, 등등 내가 아는 모든 시민단체, 아니 어느 게시판이든 들어가 이런 사이코 회사를 조심하라는 글을 줄줄이 올리겠다고, 이 땅의 순진한 취업준비생들을 등쳐먹는 당신 같은 인간들 때문에 뭔가 해보려는 그들의 마지막 피와 땀이 어쩌구, 저쩌구, 여기까지 온 차비와 통신비, 그러니까 이 허위 공고에 대한 면접비 환불이나 준비 해두라고 블라블라블라, 그렇게 얼마쯤 열변을 토했을까. 내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자 사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어. 혹시 누군가 죽도록 미워 본 적 있나? 죽일 힘도 용기도 없지만, 아니 꼭 죽일 필요까진 없지만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사장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설명을 계속했지. 그저 나 자신의 안정을 위해 그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말끔히 떨쳐버리고 싶은 적, 없었냐는 거지. 증오의 대상이 날 굳이 눈치 채지 않아도 좋은, 편안하고 산뜻한 방법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진행 되는, 손에 피 한 방울 묻지 않는 우아한 복수 말이야. 죄책감은 필요 없어. 기껏해야 지푸라기 인형에 바늘을 찔러대는 부두교의 저주 수준과 다를 바 없으니까. 말하자면 간편하고 배부른 인스턴트식 복수, 조용하고 내성적인 소심한 복수라고나 할까. 사장이 뭘 설득하고 싶은지는 알겠더군. 하긴 그런 인간이 왜 없겠어. 살의를 느끼지만 살인할 수 없고 살의까진 아니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되는 보기 싫은 인간들, 널렸지. 하지만 이건 아니지. 난 선뜻 계약에 동의할 순 없었어. 우선 계약서에 적힌 그 우스운 시스템이 믿기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지원한 일은 엄연한 사무직 알바지, 복수 담당도우미가 아니었으니까. 사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설득방향을 바꾸기로 한 것 같았어. 재밌고 편한데다 돈도 많이 주는 일을 원하지 않나? 나는 냉큼 에이. 그런 일이 어딨어요, 라고 말할 뻔했어. 다행히 사장이 먼저 덧붙이더군.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하긴 모든 일엔 양면성이 존재하는 법.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 회사모토는 고객우선이고 그건 곧 의뢰인 위주로 생각한다는 얘기, 의뢰인이 단 몇 분의 플레이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면 이는 처방전 없는 진정한 심리치료일터. 그래봤자 가상현실 속 복수이고, 상대방은 알 턱도 없고, 괴로워하던 당사자만 마음 편안해지고 정신건강 회복하고 삶에 활기 좀 얻는다면 그게 그리 큰 문제 될 거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합법도 아니지만 불법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어떤 흔적도 증거도 남지 않는데다 아직 어디에도 보급되지 않은 특수 스캐닝 장비에 관한 관련법 따위도 없으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뭐 도덕적으로 목표 대상자에게 양심의 가책정도는 느낄 수 있겠지만 그건 고객 상담을 거친다면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을 거란 걸 보장하지. 아마 한 인간으로 인해 의뢰인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대상자에 대한 의뢰인의 적의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될 거야. 생각해봐, 눈에 가시 같은 인간 때문에 하루하루가 괴로운 나의 고통을 과연 누가 대신해줄 수 있겠어? 우리 회사의 이 획기적인 시스템이야말로 결코 사회나 국가가 해주지 못하는 개인의 평화와 안정, 나아가 인류의 정신건강을 위한 최첨단 복지 시설과 다름 아님을, 곧 깨닫게 될 거라고.

    복지시설? 복수시설이겠지. 나는 사장의 말이 끝나자 속으로 웅얼댔어. 정말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그렇더라도 어째……사장은 설명을 마친 후 서랍에서 붉은 인주를 꺼내 올려놓았어. 그는 이 일에 무궁한 긍지와 자부심, 심지어 어떤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 누구도 눈치 못 챌 소심한 복수라, 아니, 뭐 이런 말, 도, 안, 되, 는……나는 말도 안 되는 걸 짚어주려고 내동댕이친 계약서를 천천히 다시 넘겨보았지. 사장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로젝트 당 성과급에 관해 얘기했어.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지. 저, 정말요? 기대 이상이었어. 아니 솔직히 내 처지엔 꿈도 못 꿀 액수였지. 고객우선, 고객우선, 단지 고객의 고통을 덜어주고 돈을 받는 서비스업일 뿐이라고, 난 냉철해지기로 마음먹었어. 해보다가 관둬도 늦지 않다 생각했지. 계약서를 다시 넘기던 나는 결국 마지막 장에 사뿐히 서명을 마치고 지장까지 찍어줬어. 그래, 마침내 고객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그들이 의뢰한 목표물을 처치해주기로 결심한 거야. 물론 게임 속에서. 마치 히어로가 된 기분으로 두 어깨가 묵직해진 채 사장실을 나오자, 새 직장 동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날 맞아줬지. 반 씨는 폭신한 마우스 패드를, 언데드는 전자파 방지용 선인장을, 각각 내 품에 안겨주며 너도 공범자가 된 걸 축하해, 란 표정을 짓더군. 어제보다 한결 다정하게 말이야. 하긴 비밀을 공유한 이들은 피를 나눈 이들보다 더 돈독한 법이니까.

    이반씨, 오늘 신규 고객 상담은 신입이랑 같이 진행하도록. 사장은 자리에 앉으려는 날 지목 했어. 반씨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더군. 나는 일단 반씨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해 고객이 편한 시간과 장소를 잡아야했지. 그게 첫 출근 날 내게 떨어진 첫 업무였어.

    통화 연결 음은 의외였어. 중학생이나 좋아서 따라 부를 아이돌 그룹의 시끄러운 랩이었지. 알아듣기 힘든 빠른 랩이 계속 되는 동안 내 심장박동도 빨라지더군. 여보세요? 목소리는 남자였어. 아니 정확히는 남자 얘였어. 학원 보충이 끝나는 밤 10시쯤, 자기 동네 편의점 근처가 좋겠다고 하는 데요, 그러자 반씨는 오케이, 이따 저녁 먹고 출발하면 되겠네, 저녁은 뭘 먹을까? 뭐 좋아해? 나 참, 점심때도 되기 전에 저녁 메뉴를 고르라니.

    하품 나는 오후까지 난 유명 쇼핑몰들을 뒤지며 다음 달에 살 수 있는 물건들을 고르고 또 골랐지. 그러다 지쳐 창을 내리며 고스톱을 치고 그러다 지쳐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어나 클릭해대며 이 곳 저 곳 무료하게 인터넷을 서핑 중이었어. 맞은편의 언데드는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대고 입을 헤 벌린 채 부스스한 머리를 연신 벅벅 긁어대고 있었어. 워낙 말수가 없어 혹시 말을 붙여도 말을 못하면 어쩌나 싶어 말 붙이기가 겁이 나는 사람이었지. 파티션을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손거울을 꺼내 보다가, 간간히 화장실이나 다녀오는 정도로 남은 오후를 대충 때우는 중이었어. 그러나 반씨는 심각한 표정이었어. 스캐닝한 목표물의 DNA와 영혼을 게임 캐릭터 안에 주입시키는 중요한 작업 중이니 잠시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하더군. 난 그런 그가 조금 우습게 보였어. 내겐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업무로밖에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세상에, DNA와 영혼이라니. 내가 계약서에 동의했다고 해서 저걸 다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해.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하진 않거든. 그래, 어차피 내 믿음 따위 없어도 잘 굴러갈 사이코 회사잖아. 그러니 적당히 믿는 척해주고 돈이나 제대로 챙기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원래부터 난 인간들의 흐리멍텅한 언어보단 명확한 숫자를 더 신뢰하는 편이었어. 내 방 천정을 메우고 있는 가로 36개, 세로 27개의 징그러운 마름모꼴들, 지하철 5호선과 시내버스 145번 버스를 타야 9시까지 도착하는 회사, 몇 명의 좀비를 죽여서 얼마나 레벨을 높였는지 정확히 표시해주는 게임화면, 몇 분간 얼마의 사용료가 나왔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PC방의 요금 창, 그리고 내 계좌로 입금될 보기만 해도 배부른 일곱 자리 숫자.

    저녁을 대충 때우고 낡은 소형차 뒷좌석에 방송국 ENG 카메라처럼 생겨먹은 이상한 기계를 싣자마자 반씨와 나는 신규 고객과의 약속한 장소로 출발했어. 반씨는 운전을 하면서 조금씩 흔들릴 때 마다 뒷좌석에 실은 기계가 어떻게 될까 꽤나 노심초사하는 눈치더군. 알고 보면 이 업무의 핵심이 되는, 그러니까 이 회사의 밥줄이 되는, 저 인간들과 날 먹여 살리는 기특한 기계임은 틀림없으니까. 하지만 난 도무지 그 투박하고 촌스러운 외관에 정이 가질 않았어. 그래도 명색이 최첨단 기계란 게 무슨 80년대 B급영화에나 쓰일 구닥다리 소품 같았다니깐. 아마 니가 봤다면 촌스럽다고 대놓고 비웃었을걸. 진짜야. 넌 워낙에 촌스러운 거 보면 못 견뎌 하잖아. 아니긴 또 뭘 아니야. 저번에 너 헤어숍 따라갔을 때, 기억 안나? 왜 다들 니 머릿결 좋다고 칭찬하고 그랬잖아, 그 때 나보고 너도 머릿결 관리 좀 하라면서, 꼭 무슨 80년대 가수 같다고 놀린 게 누군데. 진짜지 그럼. 쟤 촌스러운 머리 어떻게 좀 해달라고 헤어디자이너랑 둘이 막 웃어놓고는. 어이구, 미안한 건 아셔? 지금 이 머리? 얼마 전에 거기 가서 했지. 괜찮아? 다행이네, 비싸게 주고 한 건데. 잠깐만, 근데 이 얘기가 왜 나왔지? 미안, 미안, 또 샜다. 여기 메뉴판요! 다른 거 뭐 더 시켜. 너 맛있는 저녁 사주려고 했단 말이야. 잘 먹어야 건강해지지. 아픈 데도 빨리 낫고.

    무슨 학교 학생인 게 중요해요? 편의점에서 만난 우리의 첫 고객은 얼굴가득 여드름으로 뒤덮인 깡마른 남자애였어. 첨엔 죽어도 그냥 학생이거든요, 라더니 내가 녀석이 뛰어나오던 학원 간판을 가리키자 부정하지 않더군. 특목고 대비 전문, 세상에 중학생일 줄이야. 중 학생인 게 중요해요? 상관없어, 다만 니가 입금하기엔 선금 액수가 좀 많지 않나 놀랐을 뿐이야. 어, 반말이시네. 고객우선이라더니, 쳇. 녀석은 중학생임을 꼬치꼬치 밝혀낸 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물론 나도 부모 잘 만나 풍족한 용돈을 이런 데다 써가며 벌써부터 누군가에게 저주나 퍼부으려는 어린 녀석의 심보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 반씨는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여드름 중학생의 비위를 살살 맞췄어. 이 누나가 게임 실력이 보통이 아니거든. 니가 플레이 할 목표물을 잘 찾아내서 너에게 넘겨줄 거야, 자, 그럼 목표물에 대해 얘기해볼까? 혹시 형이 반말하는 것도 기분 나빠? 그럼 안 하고, 여드름은 의외로 고분고분해지더라. 그리곤 목표물 얘기가 나오자 왠지 좀 겁먹은 얼굴로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어.

    그 자식은 우리학교 짱이고요. 맨 날 애들 패요. 맨 날. 이빨 나가고 코뼈 나가고 갈비 나가고. 암튼 완전 개새끼에요. 그 자식한테 존나 맞고 나면 여드름 다 터져요. 이거랑 이거 이건 다 그 자식 때문에, 스트레스, 스트레스. 암튼 전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학기 초부터 신청했을 텐데. 솔직히 처 죽이고 싶은데, 소년원 이런데 가긴 싫고, 엄마는 특목고 가라, 가라 하는데 사실 제 점수론 어림없고. 진짜 가고 싶은 건…… 전학이요. 아주 먼데로. 그 자식 때문에 성적 떨어진 게 얼만데. 내신 완전 안습, 안습. 암튼 그 새끼 죽어야 되요. 우리 학교 애들 중 그 자식한테 당한 애들은 존나 많은데, 또 존나 얻어터질까봐……이거 신청자 쓸 때도 다 지 이름 안 쓰려고, 치사한 새끼들! 제가 몇 명 애들 같이 돈 모아서 이거 신청한 거거든요. 아, 씨발! 아까도 서로 여기 안 나간다고 하다가 제가 게임 져서 나온 거 에요. 대표로. 아이디 나오면 다 돌아가면서 플레이하려고요. 존나 잔인하게. 아, 그 자식요? 그럼 낼 학교로 오세요. 3학년 8반 15번 3분단 뒤에서 둘째 줄. 아, 셋째 줄인가? 잠깐, 잠깐만요, 친구한테 물어보면 되니까……문자 보냈어요. 아, 둘째 줄인지 셋째 줄인지 존나 헷갈리네. 정확히 알려드릴게요. 엉뚱한 자식이 좀비 되면 난감하니까. 쫌만 기다려요. 아, 근데 이 새끼는 왜 또 문자를 씹고 지랄?

    잠깐, 잠깐, 영혼 스캐닝은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작업이야. 주위에 소음이나 사람들 기운이 너무 많으면 나중에 프로그램화 할 때 골치 아픈 버그가 생길지도 모른다구, 학교 말고, 목표물이 나타날만한, 좀 더 조용한 장소는 없나? 반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녀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지. 순간 쿡, 하고 웃음이 났어. 영혼 스캐닝 같은 소리 하네, 버그는 개뿔.

    학교폭력에 관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음성변조와 모자이크로 처리된 피해 학생과 같은 사연을 특목고 대비반 학생답지 않게 조리 없이 떠들던 중딩 고객과 헤어진 다음날, 난 녀석이 알려 준 그 조용한 장소로 곧장 출근했어. 반씨는 그 투박한 고철기계를 애지중지 옆에 끼고 날 기다리고 있었지. 여기에서 1, 2학년 삥 뜯는 짓거리를 하는 거군, 반씨가 중얼거렸어. 그놈의 영혼을 스캐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 고철덩어리를 녀석의 머리통에 갖다 대나요? 아님 가슴팍에 갖다 대나요? 반씨는 낄낄 거렸지. 이봐, 신입, 어쨌거나 돈이 꽤 급했나보군, 난 뜨끔했어. 이걸 믿고 안 믿고는 자유야. 그리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어. 차라리 안 믿는 게 더 속편할지도 모르고.

    저기 와요! 난 고개를 수그리고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겼어. 여드름이 첨부해 준 사진파일에 의하면 가무잡잡하고 찢어진 눈을 한 저 키 큰 놈이 틀림없었어. 난 다소 긴장했지. 반씨는 영혼스캐닝인지 뭔지를 맡았지만 나에겐 다른 임무가 있었거든. 아무래도 젊은 여자가 접근하는 게 목표물의 경계심을 늦출 거라나. 접근하는 이유? 게임 속 목표물의 외형을 재현하기위한 DNA 샘플 때문이라지 아마. 그래, 목표물의 머리카락을 뽑아오는 게 나의 주된 업무이자 다음 작업을 위한 중요한 퀘스트였지. 근데 너무 불공평하지 않니? 영혼 스캐닝인지 뭔지는 왠지 날로 먹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하여튼 아무리 중딩이라지만 만만치 않은 성질머리에 소문난 파이터인 키 큰 놈에게 다가가 대뜸 까치발을 들고 머리카락을 뽑아오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 놈에게 막 얻어맞으려던 1학년들조차 어디서 굴러온 미친 여자냐, 는 식으로 날 쳐다보더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설픈 훈계로 어른 흉내 내며 다가는 것보다 미친 여자 행세가 훨씬 더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됐지. 누나랑 사귈래? 으, 말도 마, 생각하기도 싫다구. 누군가 휴대폰 카메라까지 꺼내드는 바람에 더 이상 끌지 못하고 냅다 뛰었지. 놈의 머리카락 한 줌을 손에 쥐고, 야, 이 씨발년아, 놈의 목이 멘 욕지거릴 뒤로 한 채.

    반씨는 신입치고 제법이라며 사장 앞에서 날 추켜세웠어.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중학생의 머리카락을 뽑아들고 튀는 일이 신입치고 제법인 업무능력으로 평가된다는 게 어째 좀 떨떠름하긴 했지. 나는 여드름에게 플레이어를 위한 난이도, 사용무기, 사운드, 목표물의 복장 등 몇 가지 게임옵션의 선택 사항을 문의했어. 녀석은 다른 건 필요 없고 목표물을 오직 주먹으로 처치하고 싶다더군. 어쩐지 주먹으로 많이 맞아 본 듯한 결연한 말투였어. 반씨는 곧바로 작업에 몰입해야했지. 나는 흰 장갑을 끼고 핀셋으로 놈의 머리카락을 집어 들어 한 올 한 올 소중히 비닐 팩에 담아 넣었어. 이건 뭐, CSI 수사대라도 된 기분이었지. 의외로 스릴도 있고 잔재미도 있는 하루였어. 반씨가 알려준 대로 나는 고철 기계의 후드를 열어 작은 유리홈을 잘 닦은 후 머리카락을 담은 비닐 팩을 끼워 넣었어. 고철 기계를 USB포트로 컴퓨터와 연결시키고 나자 반씨는 수고했다며 담배 한 대를 꺼냈지. 무슨 담배인진 몰라도 묘한 냄새를 피우더군.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내내 반씨의 담배연기가 끊이지 않는 걸보니 여드름을 위한 좀비 캐릭터 제작은 만만치 않은 일인 듯했어. 그래, 좀비였어. 회사가 만들어내는 게임 속 괴물은 모두 좀비였지. 아무래도 목표물과 가장 흡사한 게임캐릭터여야 고객의 만족을 얻어낼 수 있다더군. 요상하고 기괴한 다른 몬스터도 시도는 했었지만 영 실감이 안 난다며 퇴짜 맞기 일쑤였다나? 하긴 나중에 완성된 화면을 보니 십분 이해가 되더라고. 일상 속에서 꼬박꼬박 날 괴롭히던 그 뻔뻔한 인간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흉한 좀비 꼴로 나타났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고객에게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훌륭한 서비스였지. 그리고 생각해봐. 괴물과 인간보다는 괴물 같은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 훨씬 더 리얼한 거라고. 훨씬 더 실감나게 승부욕을 자극한다는 거지. 닭싸움이든 소싸움이든 개싸움이든, 같은 종이어야 피 튀기게 싸우는 거거든. 소 닭 보듯 하거나 닭 쫓다 지붕이나 쳐다보는 개 꼴이라면, 이거 경기가 시시해지거든. 안 그래?

    K-321 고객님 접속 중입니다. 반씨가 막 출근하는 언데드에게 소리치자, 그는 자다 덜 깬 모양새로 말없이 컴퓨터 전원을 켰지. 여드름 그 자식이잖아, 아직 목표물 투입 시간 전인데, 성격 한번 급하긴, 반씨는 투덜대며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더니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고는 완성된 목표물 좀비 캐릭터를 보여줬어. 어때? 그 키 큰 놈과 좀 닮아 보여?

    세상에! 나는 입을 헤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지. 좀 닮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더군. 무서우리만치 완벽한 복제였어. 그것도 아주 끔찍한 좀비로. 이거 대단 한데요! 난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지. 헐리웃 최고의 CG팀 못지않았어. 이게 그 발음하기도 민망해지는 영혼 스캐닝의 결과인가? 영혼이라니, 그런 구닥다리 단어를 붙이기엔 아까웠어. 반씨가 다시 보이더군. 난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 없었지. 머리카락 한 올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이야.

    처음에 사장이 재미도 있고 돈도 많이 주는 일을 운운할 때만 해도 별 기대 없었거든. 나야 사이코 회사의 꿍꿍이엔 관심 없고 오로지 근거 없이 두둑한 수당에만 관심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은 점점 재미있어졌어. 스릴과 흥분도 있고 보람과 만족도 있었지. 새로운 의뢰인을 만나고 그가 꼰질러 준 목표물을 뒤쫓는 모험, 목표물을 미행해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뽑았을 때의 그 희열, 첫 플레이때 게임 속에서 의뢰인과 그의 철천지원수를 만나게 해주는 감격, 의뢰인의 복받치는 플레이를 관전하며 들이켜는 맥주 한 캔, 지루할 틈이 없었지. 몇 주가 지나자 왜 모두들 게임 중인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됐어. 사장이 가진 자부심과 사명감이 뭔지도 조금은 알 수 있게 됐고 말이야. 색다른 경험이었지. 한 때 갖가지 게임을 섭렵했던 나로선 솔직히 의외기도 했고. 사실 반씨와 언데드가 만들어낸 이 온라인 게임은 목표물 캐릭터 외엔 배경이나 사운드, 스토리 전개 면에서 상당히 고리타분한 스타일이었으니까. 아마 요즘 초딩에겐 공짜로 줘도 안 할 걸.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광고 하나 없이 순전히 지하 경로를 통해서, 그러니까 누군가의 소개나 입소문을 통해 신청하고 입금한 후 상담을 거쳐 게임시디와 아이디를 배송 받은 유저들만 이미 수백 명을 넘어섰다는 거, 그들 모두 단 한명의 영구탈퇴도 없이 매일 꾸준히 접속해서 일정시간 플레이를 즐기고 있다는 거, 분명 엄청난 중독성을 가졌단 얘기지. 품질은 별로라도 묘하게 맛이 있어 자꾸 손이 가는 불량식품처럼 말이야. 이 낡은 게임에 왜 그렇게 고객유저들의 접속이 끊이지 않는 걸까. 뭐 그건 좀 있다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여드름은 전사복장을 갖추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드넓은 벌판에 서있었어. 난 어딜 헤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여드름의 목표물 좀비를 찾아내야했지. 다행히 다른 좀비들과 떼 지어 다니지 않아서 빨리 발견할 수 있었어. A23구역의 폐교에서 발견 된 놈은 찢어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느릿느릿 걷고 있었어. 소환해, 반씨의 말에 마우스를 클릭하자 목표물 좀비는 폐교에서 빠져나와 여드름과 맞짱 뜨게 될 벌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타났어. 흰 눈이 드문드문 날리는 새벽녘 벌판이었어. 좀비들은 그 시간을 좋아하지. 즐겜! 메시지 창에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난 순수한 관객이 되었어. 여드름 전사는 주먹을 무기로 쓰는 만큼 육중해 보이는 커다란 덩치더군. 목표물 좀비가 멋모르고 먼저 달려들었지. 여드름 전사는 오른쪽 주먹으로 좀비의 얼굴을 가격했어. 우워어어어, 비명은 실제 목표물의 목소리와 비슷한 음색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어. 과장되지 않은 효과음은 기계를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바로 앞에서 내가 아는 이들의 싸움을 보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지. 어쩜, 일그러지는 표정까지도 완벽했어. 여드름 전사는 자신이 첫 번째로 날린 훅이 믿기지 않는지 잠깐 주춤하는 듯했어. 근사한 훅이었지. 칼이나 총 같은 다른 무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이야. 복수의 칼을 가는 조잡한 짓보다는 주먹 한 방을 제대로 쳐주는 게 훨씬 더 시원스러운, 백퍼센트의 완승을 거둔 기분이라고나 할까.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나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훅은 이미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지. 아마도 모니터에 모여 집중하고 있던 중학생들은 여드름의 통쾌한 한방에 PC방이 떠나가라 환호했을 거야. 서로 마우스를 뺏으려 난리법석일지도 모르지. 환희의 복수는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어. 몇 명이 돌아가면서 하는지 어쩌는지 플레이어의 움직임은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더군. 목표물 좀비는 거의 탈진 상태, 이제 곧 플레이어와 목표물 좀비 사이의 방어 및 공격 행위들이 수치화 되어 현재 목표물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알려주는 순서만을 남겨 놓고 있었지. 이 정도면 조만간 어린 놈 하나 보내겠는걸, 반씨는 고개를 내저으며 서둘러 난이도 조절에 들어갔어. 분노에 찬 중딩들의 복수가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여드름 전사는 탄력을 받았는지 점점 능숙해졌어. 팔을 구부리고 유연하게 허리를 회전시켜 훅, 훅, 훅, 목표물 좀비의 얼굴을 강타, 또 강타, 쉴 틈 없이 날렸지. 이게 이렇게 통쾌한 건 줄은 몰랐는데요, 다른 무기가 시시해지겠어요, 혼자 모니터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해하는 중, 언데드가 물끄러미 날 쳐다보더군. 설마 입을 열리라곤 생각 못했어.

    암, 통쾌한 무기지. 그러나 훅을 날려야 하는 순간은 아주 눈 깜짝 할 사이야. 대부분 그 한방을 날리지 못하고 슬금슬금 내빼고는 뒤돌아서 온갖 욕설을 내뱉기 일쑤지. 잘했어, 이정도면 충분해, 이정도가 교양인의 매너지, 더 얽혀봐야 좋을 거 없어, 욕이라도 내뱉으니 이 얼마나 시원한가, 씨발! 그렇게 포기하는 거야. 훅의 기회는 길지 않아.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걸 제대로 활용하는 인간은 매우 드물지. 반드시 권투레슨을 받을 필요도 없고 지독한 관장에게 쌔빠지는 훈련을 받을 필요도 없어. 훅은 기술이 아닌 본능이야. 우리 몸 안에 이미 내재 된 본능이지. 배설하는 기술 따위 따로 배운 적 있나? 그저 타이밍만 잘 맞추면 되는 거라구. 순간을 망설이다 애꿎은 지 빤쓰에 지리지 말고 신호가 올 때 냅다 싸질러 버리란 거야. 아주 상쾌해지지. 쌓인 숙변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라구.

    언데드의 목소리를 이렇게 오래 들은 적은 없었어. 침을 튀겨가며 일장연설을 하는데, 마치 왕년의 챔피언이 멋모르는 신참을 앞에 놓고 과거 화려했던 전적을 회상하는 조금은 서글픈 모양새 같았지. 훅이란, 그런 거군.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남몰래 주먹을 꼭 쥐어봤어. 언데드의 얘길 들으니 나도 누군가가 떠오르더군. 망설임 없이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내 본능을 살살 일깨우는 누군가가 말이야.

    고철기계를 조심스레 건네주며 반 씨는 고객 건이 끝 날 때마다 매우 꼼꼼히 청소해줘야 한다고 했지. 그래야 다음 목표물 스캐닝 때 그 놈의 버그가 생길 염려가 없다고 말이야. 유리홈은 반드시 흐르는 물에 씻어야하고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남김없이 배수구에 쏟아버려야 한댔어. 까다롭긴. 난 두 팔로 고철기계를 안고 화장실문을 발로 박찼지. 생각보다 꽤 무겁더군. 시커먼 고철을 화장실 세면대에 올려놓고 반 씨가 설명한대로 말끔히 이 곳 저 곳을 닦아냈어. 그래, 그 때까지도 그 곳의 악취와 머리카락뭉치, 이름 모를 벌레들이 저 투박스러운 기계와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지. 깨끗이 닦았어? 그럼 서늘한 그늘에서 건조할 것, 반씨는 구석에 놓인 캐비닛에 넣어 두라고 하더군. 곰팡이 냄새 나는 캐비닛 안이 서늘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이봐, 신입, 배수구가 막혀서 악취가 더 심해졌을 거야. 화장실 문은 되도록 열어두라고. 머리카락 뭉치에서 나는 악취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까. 왜긴? 그것들은 누군가로부터 지독한 저주를 받은 영혼들이라고. 저주받은 영혼들은 자신의 존재를 냄새로 피워내지. 그 냄새는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어. 잡생각이 많아지면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럼증이 생기기도 한다구. 그러니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참, 벌레가 지난달보다 두 배가량 늘었더군. 벌레 퇴치 업체? 모르는 소리, 그걸로 없어지는 놈들이 아니야. 스캐닝 과정에서 생겨나 프로그램 속에 침투하지 못한 버그들이 숨어 있다가 기계 청소 중에 밖으로 빠져 나오면서 그만 진짜 벌레가 되고 만 거지. 그래서 기계 청소가 중요하단 거야. 물론 저것들이 저렇게 커지기 전에 흐르는 물에 휩쓸려 배수구로 떠내려 가버린다면 별 문제 되지 않지만 오래 청소를 안 하면 벌레들이 갈수록 커지거든. 수챗구멍으론 떠내려가지도 않게 된다니까. 아무튼 다음번 사무실 이전 때는 화장실의 배수구와 환기구를 중점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사장의 말씀이 있었으니, 어때? 좀 더 버틸 수 있지? 뭐 설마 벌레들이 사무실까지 바글거리겠어? 반씨는 호기롭게 말하면서도 인상을 구기며 어깨를 흠칫 움츠렸어. 문득 면접날 그 악취 나는 화장실에서 내 발등 위로 기어오르던 긴 더듬이의 벌레가 떠올랐지. 프로그램 속에 들어가 버그가 되지 못한 채 화장실 타일바닥을 헤매야하는 비운의 벌레들, 주인 잘 못 만나 본의 아니게 저주받은 영혼의 악취를 풍겨야하는 머리카락 뭉치들, 어쩐지 반씨가 어깨를 움츠리는 게 이해되기도 하더군.

    여드름의 공격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해졌지. 관전이 조금은 심드렁해질 무렵, 새로운 고객과의 미팅이 잡혔어. 출동해, 사장은 나와 언데드를 지목하며 말했지. 악의 무리를 소탕하려는 우주 사령관처럼 말이야. 악의 무리는 커녕 벌레 소탕도 못하는 마당에 출동은 얼어 죽을.

    언데드는 느릿느릿 낡은 소형차 뒷좌석에 고철기계를 실었어. 면허 없냐? 내가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있단 거야, 없단 거야? 짜증을 내더라고. 난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 아직 없는데요. 한숨을 쉬는 그의 입에서 점심때 먹은 김치찌개 냄새가 났어. 난 조심스레 조수석으로 들어가 안전벨트를 맸고 그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츄리닝 같은 양복 주머니를 이곳저곳 뒤져 선글라스를 꺼내 쓰곤 시동을 걸었지. 언데드의 운전은 한마디로 말해 모든 게 귀찮은 운전, 마지못해 차를 끌고 나오긴 했지만 뭐 언젠간 도착할 테지, 의 운전패턴이라고나 할까. 마치 유유히 강을 건너는 뱃사공이 세월아 내월아, 노 젓듯 핸들을 잡더라니까. 약속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어찌나 규정 속도를 지켜 대는지, 뒤차는 빵빵대고 속은 답답하고, 아주 죽는 줄 알았다구. 몇 년 전 운전면허 필기시험 59점에 빛나는 내 억울한 점수가 진정 후회되는 순간이었지.

    약속시간 15분을 경과하자 예상대로 고객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어. 눈가의 깊은 주름으로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여자는 자신을 웨딩플래너라고 소개하더군.

    늦으셨네요. 뭐 굳이 이렇게 만나 뵐 것 까진 없는 데, 회사 방침이라시니. 아무튼 여기 사진 가져왔어요. 이 남자에요. 맞아요, 남자친구였었죠. 두 분도 남의 연애사 일일이 듣기 피곤하실 테고, 저도 처음 뵙는 분들께 구구절절 설명 드리려니 좀 그렇군요. 그냥 이 게임에 흥미를 느꼈고 어떤 건지 직접 한 번 플레이 해보고 싶었다는 정도만 말씀드릴게요. 그러다 제가 심리적 만족을 얻는다면 계속 진행하는 거고 듣던 것과 달리 시시하다면 그냥 관두면 되는 거고요. 아, 그래요? 장담하시는군요. 어쨌든 그렇게 장담하시니, 기대해보죠. 그리고 몇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우선, 이 친구 주변은 늘 북적 거려요. 목표물, 글쎄 이 말이 딱히 입에 붙진 않는군요. 어쨌든 그 목표물을 캡쳐 하신다고 했나요? 아, 스캐닝요? 아무튼 그러려면 주위가 조용하고 사람이 없을수록 좋다고 하시던데, 이 친구는 그런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되요.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 때문에 얼굴 볼 틈이 없었거든요. 아마도 기회를 포착하시려면 같이 움직이시면서 고생 좀 하실 것 같네요. 또 하나는, 그러니까 이 친구의 캐릭터를 제작하실 때 꼭 좀 염두 해주실 게 있는데요. 엉덩이 위쪽에 새겨진 나와 이 친구의 이니셜 문신을 빼놓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복장도 거기에 맞춰 주시고요. 어쨌든 전 그게 있어야 실감이 날 것 같거든요. 소개해주신 분의 말에 따르면 이 게임의 생명은 실감, 이라더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에 제가 이 친구 캐릭터를 가지고 노는 게 지겨워진다면 중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가 가능한 지도 알고 싶어요. 제가 좀 참을성이 없고 금방 질리는 편이거든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더 궁금하신 거 있나요? 없으시면 먼저 실례 좀 해야 될 것 같네요. 저도 고객 상담이 잡혀 있어서 말이죠.

    웨딩플래너 고객은 서른 중반의 미혼 여자였어.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란 작자는 나이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났을 거고, 그에 대한 분노를 안으로 다스리다 못해 밖으로 표출할 곳을 찾던 중 우리의 최첨단 복지시설까지 굴러온 걸 거야. 남자친구에 대한 집착과 미련에 매일 밤 질질 짜면서도 겉으로는 쿨한 여자로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이라니, 안쓰럽지만 너무 티 나더군. 직업적 영향에서 오는 논리에 대한 강박으로 저런 말투와 행동을 보이곤 있지만 실제는 그와 딴판으로 마음이 여리고 감정적인 편이라 플레이 도중 남자친구보다는 남자친구와 바람난 상대 여자 쪽으로 목표물을 바꿀 우려가 다분해 보였어. 언데드도 이런 내 분석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 했지. 원래 마음 약한 플레이어들이 곧잘 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군.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최소 3개월 안에 다시 복귀할 확률은 99퍼센트에 이른다나. 그건 목표물의 존재가 어차피 고객의 일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거나 감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 잊었다가도 다시 보면 스트레스가 되고, 어느 정도 플레이로 시들해졌다가도 다시 적의로 부글거리게 되는 현실과 맞닥뜨리기 일쑤고, 그러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예전의 통쾌했던 해소법을 찾아 재신청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하지만 단순히 마음 약한 플레이어들보다 더 갈팡질팡하는 골칫거리는 웨딩플래너처럼 소위 남녀문제일 경우라는데, 언데드는 개인적으로 이런 부류의 고객들을 가장 귀찮아한다고 했어. 증오인지 애정인지도 구분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것들 말이야. 그런 플레이어와 목표물을 위해 다른 게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떠냐며 사장에게 기획안을 낸 적도 있다더군. 스테이지는 분위기 좋은 카페, 놀이공원, 클럽, 레스토랑을 거쳐 죽이는 모텔까지, 그리고 두 캐릭터를 소환해서 주구장창 응원하는 거지. 데이트 코스는 지들끼리 사연이 있는 장소와 배경음악을 옵션으로 설정해주고. 얼마간 그렇게 게임 안에서 지들끼리 회포를 푸는 거야. 그간 얼굴보고 말 못한 열띤 대화든, 사이버 머니 팍팍 쓰는 열띤 데이트든, 현실에서 못 해본 열띤 섹스든, 못 할 게 뭐있냐고. 착실히 사랑을 쌓아 레벨 업이 될 때마다 영혼 스캐닝으로 만들어진 상대 캐릭터의 식었던 마음도 차츰 뜨거워지고, 실제 목표물의 영혼도 서서히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거지. 목표물의 호르몬 수치, 바이오리듬을 고려하고 긍정적인 기억을 유도하여 정확한 타이밍에 공지창이 뜨면 고객은 그 순간 전화 한통만 날려주면 끝.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훅이라나. 언데드 답지 않게 청순하더군. 기획안? 물론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지. 사장이 그러더라나. 임마, 그런 걸 다 해본 여자랑 왜 또 하고 자빠졌냐?

    웨딩플래너의 목표물을 만나기 위해 언데드와 나는 그녀가 가르쳐 준 남자친구의 아파트 앞에서 암담한 잠복에 들어갔지. 어디로 갈지도 일정치 않고, 누굴 만날지도 알 수 없는데다, 야근과 밤샘이 잦아서, 한마디로 말해 워낙 불규칙한 변수가 많은 목표물이다 보니, 뭐든 귀찮은 언데드에겐 이리저리 목표물을 따라다니기보단 그저 한 곳만 파는 잠복작전이 손쉬웠을 거야. 그래도 언데드는 이번 건이 제법 재미있을 거라더군. 왜요? 그는 영혼 스캐닝과 DNA 샘플로는 문신이나 피어싱, 반영구화장이나 성형 같은 후천적인 외적 변화를 담아낼 수 없다고 설명했어. 고로 고객의 간곡한 부탁인 캐릭터의 문신 재현을 위해 직접 목표물의 엉덩이를 관찰하지 않을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라나? 언데드는 낄낄 대더니 나보단 니가 더 의욕적일 것 같군, 요령껏 잘 찍어놔, 라며 반짝이는 디카를 건넸어. 나보고 웨딩플래너의 남자친구 엉덩이를 까고 사진을 박아 오란 건데, 그래, 업무치곤 제대로 독하지. 이건 엄연히 변태 영업행위 아닌가요? 언데드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아끼는 디카니까 잘 다루라고 한마디 하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갈수록 태산이었지.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잠복이란 생각보다 지루했어. 슬슬 배가 고파진 난 꽤 먼 편의점에서부터 양 손에 뜨거운 컵라면을 들고 와 겨우 유리창을 두드렸지. 졸고 있던 언데드는 컵라면을 받아들며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더군. 잠복용 식사메뉴를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로만 생각하는 건, 너무 고리타분하지 않냐? 구제불능 언데드. 난 잠복의 로망은 컵라면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대뜸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럼 뭐 드시고 싶으세요, 라고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지. 꼭 간편할 필요 있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오늘은 곱창이나 생선구이 정식 같은 게 딱 인데 말이지. 그럼 드시고 오세요, 아직 나타날 것 같진 않으니까. 반쯤은 비꼬는 말이었건만 설마. 그는 그럼 갔다 올까, 되도록 빨리 올게, 라며 냉큼 일어서더군. 정말이지 선배의 포용력은 커녕 기본적인 파트너쉽 따위도 찾아 볼 수 없는 인간이라고. 얼마 후 기가 막힌 생선구이 집을 찾았다는 언데드의 전화를 받고 불어터진 그의 컵라면을 몇 젓가락 떠 넣다가 확 신경질이 나버렸을 즈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

    그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는 목표물이 츄리닝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퇴근시간도 안 된 이른 오후, 떡하니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거야. 다시 봐도 또 봐도 사진과 동일했어. 다른 게 있다면 웬 어린 여자 얘를 바짝 옆에 끼고 있다는 거. 고철기계, 고철기계 어딨지? 아니, 엉덩이, 엉덩이, 아니, 아니, 일단, 머리카락, 머리카락부터, 때 아닌 등장인물에 난 당황했지. 반씨나 언데드만이 다루는 스캐너 사용법은 아직 배울 단계가 아니었고, 여기서 놓치면 내일 아침까지 언데드와 비비적대며 또 지겹게 목표물을 기다려야 하니, 그렇다고 무작정 저 고철 덩어리를 들고 목표물에게 다가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젠장, 언데드, 생선 가시나 목에 걸려라.

    지금 설치 중이에요, 웨딩플래너는 배송된 게임시디를 받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전화했더군. 난 배송상태와 게임옵션에 관한 사항을 확인한 뒤 그녀에게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줘야 했어. 고객님의 이니셜과 남자친구, 아니 목표물의 이니셜 사이에 놓인 하트 문신은 목표물의 엉덩이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말끔히 제거되었더군요. 따라서 그 부분의 실감나는 영상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플레이 시기가 다소 늦춰지더라도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저희는 최선을 다해 문양을 재현해드릴 수 있으니, 비슷한 도안을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확인 하는 대로 다시 제작에 들어갈…… 여기까지 말하자 그녀는 잠깐요, 하고 내 말을 끊었어. 긴장되는 순간이었지. 실은 언데드와 내기를 했거든. 후후후, 그래요? 지웠다고요? 웨딩플래너는 어이없다는 듯 되묻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어. 문신은 필요 없어요. 빙고! 그럼 그렇지. 내기엔 내가 이겼다구.

    음,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다시피 언데드가 생선살이나 발라 먹으며 노닥거릴 무렵, 난 예상치 못한 목표물의 출현에 빠르게 대처해야 했어. 목표물의 옆에 붙어있는 어린 여자는 웨딩플래너에겐 좀 안된 말이지만, 같은 여자가 봐도 반짝 반짝 빛이 나더군. 당연히 목표물은 희희낙락이었지. 그 광경이 어찌나 심금을 울리던지 말이야. 말했잖아. 중대한 결정이란 알고 보면 이런 유치한 감정의 충동질에서 시작된다는 거. 순간 떠오른 웨딩플래너의 깊은 주름은 왜 그리 안쓰럽게 느껴지던지. 난 디지털 카메라를 목에 걸고 마치 불륜 현장을 덮치는 마누라마냥 달려 나갔어. 당신, 내 이름이 새겨진 엉덩이 문신이나 지우고 이러는 거야? 맞아. 부끄럽지만 또 그 작전이야. 미친 인간의 기습은 사람 혼 빼놓는 데 그만이거든. 당황해서 점점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목표물도 완전히 뻔뻔한 상습범은 아닌 거 같더라고. 난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 까지 가보자 싶어 목표물의 다리를 붙들고 앉았지. 서서히 악다구니 난 마누라 연기에 몰입해갔다고나 할까. 벗어봐, 벗어 보라구, 아직 있는 거야? 지워버린 거야? 아파트 주위로는 몇 명의 아줌마들이 모이기 시작했어. 목표물은 이 여자가 미쳤나, 하더니 다리를 빼내려 안간힘을 써댔지. 이제 그만 하고 머리끄덩이 몇 번 잡으며 끝내야지 싶던 차에 난 그만 연기의 절정에 이르고 말았어. 보여줘, 보여줘, 이년한테 우리 문신 보여주란 말이야! 그래, 나도 깜짝 놀랐어. 츄리닝 바지가 그렇게 손쉽게 무릎까지 내려올 줄 미처 몰랐다니까. 엉덩이? 뭐, 그런대로 괜찮았어. 다만 문신은 보이지 않았지. 깨끗했어. 아줌마들은 소리를 질러대며 점점 가까이 모여들었지. 그 정도면 동네 망신용으로도 나쁘지 않은 퍼포먼스 아니니? 난 언데드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지. 그럼, 자랑스러울만하지. 그 만능 고철기계도 할 수 없는 걸 해낸 거니까.

    내 얘길 듣고 난 언데드는 과연 사장 말대로군, 하며 고갤 끄덕였어. 무슨 말이요? 만난 지 몇 분 만에 화장실에서 휴지 갖다 달라 소리치는 여자 직원은 난생 처음이라지, 아마? 민망하게도 내가 사장의 면접을 통과한 건 화장실에서의 그 과감하고 처절한 절규 때문이라는군. 정말 취향 한 번 독특하셔. 머리카락은? 나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비닐 팩에 담아 조심스레 언데드에게 넘겨줬지. 수고했어. 회사로 들어가는 언데드에게 난 고철기계를 가리키며 영혼스캐닝은요? 라고 물었지. 이런, 아직도 몰라서야, 머리카락이 있어야 스캐닝을 시작하는 거잖아. 머리카락에선 DNA 샘플만 얻는 게 아니라구. 설마, 처음 듣는 소린 아니겠지? 머리카락엔 그 인간의 영혼이 깃들여져있다는 거. 삼손의 엄청난 힘도 다 머리카락에서 나온 거잖아. 답답하긴. 그럼 여태까지 머리카락 말고 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지? 난 그렇담 저 고철 기계를 왜 낑낑대며 들고 다니는 거냐고 물었지. 이거 신입교육 제대로 안 시켰구만, 뭐든 가장 신선할 때, 써먹어야하는 거 모르나? 프레쉬한 영혼을 추출하려면 되도록 조용한 장소에서 머리카락을 채취하고 그 즉시 기계에 넣어 바로 작동 스위치를 눌러놔야 해. 그래야 캐릭터의 생생한 질감이 살아나거든. 역시 그런 거였어, 반씨고 언데드고 그 고철기계고 모두 날로 먹는 느낌이다 싶더니. 어쩐지 미친년 행세하며 남의 머리카락이나 쥐어 뽑고 줄행랑 쳐야하는 내 꼴이 좀 억울해졌지. 아무래도 일반인은 엄두 못 낼 머리카락 채취 알바에 대해 사장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연봉협상을 해봐야 할까봐.

    참, 웨딩플래너와의 통화얘길 하다 말았지. 그녀는 문신은 필요 없으니 목표물캐릭터를 하나 더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더군. 얼마든지요. 그래, 결국 내 예상이 적중했어. 언데드에게 가뿐히 만원을 낚아챈 나는 추가비용에 관해 설명해줬지. 캐릭터? 누구겠니? 그래, 맞아. 그 어린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끄는 건 일도 아니었다구. 아마 그 때 난 불륜현장을 덮치는 마누라 놀이에 흠뻑 몰입했었나봐. 막판에 두 인간의 머리카락을 양 손에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데, 이거 제법 뿌듯한 거야. 악당들을 물리치고 본부로 귀환하는 히어로들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목표물과 어린 여자에 관한 나의 간단한 상황설명에 흥분한 웨딩플래너는 더 추악한 괴물 캐릭터가 있냐고 묻더군. 다른 형태의 몹은 실감이 잘 안 나실걸요. 그러자 그녀는 이를 악 무는 게 느껴지는 말투로 조용히, 또박또박 말했어. 좋아요, 그 년도 좀비로 만들어줘요. 대신 아주 흉측한 걸로.

    재미있어 보이니? 맞아. 아직 신입이긴 하지만 갈수록 이 일이 점점 마음에 들긴 해. 니 말대로 재미도 있고 돈도 많이 주고 출동이 없는 날엔 비교적 한가한 편이거든. 어떤 날은 느긋이 쇼핑할 정도로 여유롭다니까. 참, 이 구두 어때? 어디서긴. 그 헤어숍 옆에 있는 백화점에서 샀지. 저번에 나 정신 못 차리고 너한테 되지도 않는 부탁 하러갔을 때 말이야. 웬 비는 그렇게 처량 맞게 내리는지, 생각나? 암튼 그 때 니가 여기 구두를 신고 있더라고. 솔직히 그런 게 눈에 들어올 상황은 아니었는데, 내 흙 묻은 운동화가 하도 질척거려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걱정 마, 컬러도 디자인도 약간 다르다구. 그래, 자랑 좀 하고 싶어서 그런다, 왜. 가만있자, 디저트는 뭘로 할래? 커피? 녹차? 그래, 이제 부턴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좀 더 은밀한 얘길 해보자고. 여기요!

    여드름 중딩의 공격적인 플레이는 거의 몇 주간 계속 되었어. 사실 첫 플레이때는 대부분 고객들의 분노수치가 가장 최고조에 이를 때이고 이 새로운 게임에 대한 기대치 역시 높은 시기라 괜히 복잡한 퀘스트로 레벨 업부터 시작하라고 이리저리 돌리면 그냥 돌아버리거든. 그래서 대개 보스 몹 격인 목표물 좀비를 고객의 눈앞에 데려다주고, 시원한 선방을 날리게 해서 게임의 흥미를 돋우는 거지. 하지만 그 이후부턴 열심히 다른 몹들을 방어하고 물리치며 각 스테이지마다 새로운 퀘스트를 수행야만 레벨 업 할 수 있다구. 레벨이 높아져야 목표물 좀비를 스스로 쉽게 찾아낼 능력이 생기고 그것과 싸워서 승리하는 기쁨을 좀 더 리얼하게 느낄 수 있는 거든.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레벨 업될 수록 목표물좀비는 더욱 다양한 액션을 취할 수 있게 돼. 이를테면 평소에 목표물이 잘 쓰던 말투나 표정, 행동습관 같은 걸 흉내 낸다거나 플레이어의 약점을 살살 자극해서 약을 올리는 대화를 하거나 혹은 플레이어가 레벨에 따른 아이템과 스킬을 획득했을 때 화들짝 놀라 도망가거나 비굴하게 굽실대며 쩔쩔매거나 하는 등의 액션을 통해 고객을 더욱 게임에 몰입하게 만드는 거지. 확실히 고랩 단계일수록 이런 실감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더라고. 정말 그 목표물과 대결하고 있는 느낌이라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레벨에 도달하면, 뭐 개인차는 있겠지만, 좀 시들해지는 때가 찾아와. 반씨는 그걸 복수심의 슬럼프, 라고 하더군. 아무리 목표물을 향한 복수와 증오로 무장된 고객일지라도 그 수치를 오랜 기간 최고조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야. 어쩌면 이게 인간의 치명적 단점이지. 그럼에도 다들 이 단점을 인간적, 이라고 하잖니. 우습게도 말이야. 그런 면에서 우리의 중딩 고객은 이 단점을 과감히 극복하고 비인간적, 이 되는 선택을 한 셈이야. 그 결과 사고가 일어난 거지만. 걔네들처럼 다수가 플레이어가 된다든가 일부 극소수지만 폐인처럼 몰두하는 무서운 마니아들은 간혹 사고를 내기도 한다는군. 무슨 사고냐 하면……바로 목표물을 죽이는 거야.

    쉿, 그래, 그건 반씨 잘못은 아니었어. 반씨는 초반부터 난이도 조절을 해가며 그 키 큰 목표물좀비가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게끔 노력 했었다구. 말했었나? 고객 유저들이 이 별 것 아닌 게임에 금방 싫증내지 않고 꾸준히 접속하는 진짜 이유 말이야. 그건 바로 현실 속 목표물이 고객유저의 플레이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 때문인데……뭔 소리냐고? 대충 눈치 챌 만도 한데, 아직 감 못 잡았나보군. 그러니까 고객들이 적지 않은 액수를 아깝지 않게 갖다 바치며 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는 거지. 바로 게임 안에서 공격을 받은 목표물좀비에 그치지 않고, 게임 밖에서 갖가지 자잘한 고통에 시달리는 목표물을 보는 재미 때문이야. 그래, 맨 정신으론 가장 믿기지 않는 부분이면서, 보면 볼수록 가장 경이로운 부분이지. 자잘한 고통? 뭐 다양해. 우리가 특별히 설정 할 수 없는 일종의 랜덤 시스템이지. 목표물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걸맞게, 목표물좀비가 공격받은 부위에 따라서, 혹은 고객의 특정 저주가 우연히 먹히는 경우도 있고 말이야. 예를 들어 얼마 전 김모 대리가 목표물로 선정한 같은 부서의 팀장 같은 경우는 김모 대리가 초반 스테이지를 격파하고 간 다음 날, 가벼운 두통과 피로를 호소하며 내내 맥을 못 췄대. 신이 난 김모 대리가 연이어 며칠 밤을 새며 플레이한 결과는? 팀장은 쓰지도 않은 부분에 근육통을 겪으며 파스를 붙이고 나타났고 며칠 째 밤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을 겪은 탓에 회의 때도 시종일관 좀비처럼 멍한 표정이었다는군. 그리곤 결국 이주쯤 지나자, 우리의 목표물 팀장은 스트레스성 위염과 몸살감기로 입사 이래 최초의 결근을 하기에 이르렀지. 김모 대리는 요즘 살맛난다며 사용 후기를 보내왔어. 뭐 이 정도는 약과야. 여자 선배의 지독한 공주병에 지친 Y양은 한 달간의 플레이 결과 그 선배에게 지독한 피부질환과 스트레스성 비만을 야기 시키는 데 성공했더군. 물론 고객 상담 결과 전적으로 Y양의 편을 들기엔 그녀가 지나치게 외모 콤플렉스에 빠진 상태란 걸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우리가 의사도 아니고, 판사도 아니니 어쩌겠어? 그저 고객이 일러바치는 목표물이 훅을 날려줘야 할 악당이려니 믿을 수밖에. 하여간 가벼운 감기몸살부터 기억나지 않는 몸의 상처나 자국들, 수면장애, 악몽, 이명, 구토, 멀미, 탈모, 시력저하, 무기력증, 소화불량, 가려움증, 두드러기, 알레르기성 비염, 충치, 오십견, 디스크, 탈골 및 골절에 이르기까지, 혹은 멀쩡히 걷다 발목 삐기, 졸려서 자려는데 딸꾹질 멈추지 않기, 잘 알던 것들이 갑자기 기억에서 사라지기,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기, 가위에 눌려 꼼짝달싹 못하기, 손톱에 가시 박히기 등등 여러 가지 원인 불명의 정체모를 갖가지 질환들을 겪고 있는 목표물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 이상 이란 거지.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만 몇 번 갸웃대곤 편리한 결론을 내리지. 별거 아니니 곧 나아지겠지. 세월 이길 장사 없다더니. 나이는 못 속인대두. 요즘 무리하긴 했어, 아무래도 일 좀 줄이든가 해야지 원. 그래, 몽땅 다 헛다리 짚은 거야! 원인모를 통증에 시달리면서 아무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영혼이 두드려 맞고 있단 걸 깨닫지 못하는 거라고. 다들 어쩜 그리 무신경하다니? 아무도 자신의 증상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잖아. 왜 알아달라고 쿡쿡 찔러대는 통증에게 귀 기울이지 못하지? 왜 스스로가 시달리는 진짜 이유를 알아채지 못하는 거야? 왜 누군가 낄낄대며 자신의 영혼에 살의에 찬 훅을 날리리라곤 감히 상상도 못하는 거냐고?

    좋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무서운 게임이라고? 모르는 소리, 의뢰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게 안전한 복수가 또 있을까? 니가 고객입장이라면 생각이 달라질 걸. 물론 때에 따라 소심한 복수가 가끔, 아주 가끔 그 도를 지나치기도 하지. 아까 말한 사고 말이야. 가끔 그렇게 목표물이 죽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나봐. 매우 드믄 케이스라지. 여드름 전사의 경우 일단 감정조절이 어려운 중학생이었고, 여럿이 돌아가며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체력이나 정신적 데미지에 대한 분노가 일정하게,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어. 그만큼 사고에 대한 위험 가능성도 높았던 거지. 맞아. 여드름이 죽어야 되는 새끼, 라고 말한 그 키 큰 놈은 끝내 죽어버렸어. 장시간 동안 끊임없이 공격을 받은 놈의 영혼은, 뭐랄까, 심하게 너덜너덜해졌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저주 받은 영혼인 거지. 그러나 만랩에 도달한 여드름 전사는 아직도 배가고플 따름이었어. 성에 안차고 분이 풀리지 않는 거야. 계속되는 클릭, 클릭, 그 순간 마우스는 끔찍한 살인무기가 되는 셈이지. 반씨 말에 따르면 그런 과도한 플레이 이후 대부분의 목표물은 돌연사나 사고사로 죽음에 이른다더군. 좀 섬뜩하지?

    “주문하신 녹차 나왔습니다.”

    앗, 뜨거. 그러게 니 말대로 무슨 싸구려 공포 영화 같긴 하다. 안전장치? 물론 있지. 아직 보진 못했지만 만랩 플레이어에게 어느 단계가 되면 경고창이 뜬다는데. Warning! 목표물 사망위험, 계속 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뭐 대강 이런 식으로. 반씨는 이런 무성의한 경고 창은 너무 시시해서 별다른 환기효과도 없을 거라고 여러 번 사장에게 건의했었대. 극도의 분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플레이어의 마음을 돌릴만한 결정적인 안전장치 개발이 시급하다나? 이를테면 클로즈업된 목표물의 커다란 눈에 맺히는 진심어린 눈물이나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구하는 액션, 혹은 목표물의 죽음이 과연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하는가, 라는 자기 성찰적 질문, 지금 예, 를 누르시면 당신은 곧바로 살인자가 되십니다, 계속 진행 할까요? 따위의 협박성 짙은 멘트 따위.

    하긴 우리의 중딩 고객들이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 없지. 결국 학교 짱이라는 키 큰 놈은 늘 오르내리던 학교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어이없이 즉사하고 말았어. 여드름의 두서없는 메일에 의하면 놈은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모든 짜증을 주먹질로 풀었고 회복을 위한 며칠간의 칩거를 제외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돈을 뺏고 주먹질을 해댔으며, 나중에는 극도의 시력저하로 인해 누가 누군지 구분도 못하고 아무나 개패 듯 패곤 했다는군. 녀석들로선 최선의 결정이었다지만 우리로선 이런 사고가 늘 꺼림칙하지. 걱정 마. 단지 심정적인 꺼림칙함일 뿐이지,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습해야 할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라구. 그러고 보면 폭력적인 게임 탓에 순수한 아이들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 간다는 뉴스보도 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야. 애들은 순수한 게 아니라 그저 순수한 폭력성을 가진 거 뿐이라구. 생각해봐. 옛날부터 애들이야말로 모든 잔인한 게임의 오랜 유저였다니까. 그나마 컴퓨터 게임정도면 다행이게? 무서운 중딩들.

    하여간 놈의 학교 측에선 이래저래 진땀 빼며 수습하느라 난리도 아니었겠지. 학생들은 놈의 개죽음으로 온갖 괴담이나 지어내며 떠들고 다닐 테고. 그러나 여드름 전사와 그 일당들만은 놈의 죽음에 관해 침묵할 수밖에 없을 거야. 놈을 이겼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건 이미 글렀으니까. 난 쓰러진 놈의 캐릭터 앞에서 예의상 간단히 키보드를 두드렸지. 명복을. 다음 날 회의에선 되도록 골치 아픈 미성년 고객의 신청은 받지 말자는 의견이 오갔어. 글쎄, 골치 아픈 사고가 반드시 미성년이기 때문인지, 미성년이 아니면 골치 아픈 사고는 없는 건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모두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 비밀이란 건 서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작되는 거더군. 여드름 일당들 역시 그랬을 거야. 모르긴 해도 이제 누구보다 비밀다운 비밀을 공유한 친구들이 되었으니, 아마 평생 지겹도록 돈독히 지내야 하겠지. 쯧쯧.

    며칠 전 회식 날이었어. 꽃 등심 파티. 놀랄 것까지야. 요즘 신바람 난 사장 덕에 회식 메뉴는 나날이 업그레이드거든. 사장은 얼마 전 회식에서 나의 입사 이후 영혼 스캐닝 작업이 한결 수월해지고 버그가 현저히 줄었으며 그로인해 캐릭터 제작도 보다 정확해졌다고, 칭찬해주더군. 더불어 매출도 늘고 있어 이대로라면 두세 달 안에 화장실의 환기구와 배수구 시설이 괜찮은 쾌적한 건물로 사무실을 이전 할 수 있다고 말이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 반씨는 그 자잘한 벌레들이 화장실 타일바닥을 건너 사무실로 기어들어와 책상 밑이나 캐비닛 속, 급기야 컴퓨터 키보드 사이를 횡단하는 걸 목격한지라, 요즘 부쩍 예민해 있었거든. 사장은 건배를 권하고는 소심한 목소리로 영혼스캐닝 만세, 라고 외쳤어. 그리곤 내가 하루빨리 스캐닝 장비의 사용법과 좀비캐릭터 제작과정을 익힐 수 있도록 반씨와 언데드에게 철저한 교육을 지시했지. 다음 날부터 난 본격적으로 그 고철기계와 친해질 수 있었어. 생각보다 어렵진 않더라고. 시커먼 고철 기계는 그 외형과는 달리 내부구조가 제법 복잡하고 정교했어. 무슨 선들이 그리 많은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지. 반씨가 제품설명서라고 건네 준 건 사장이 직접 그리고 써넣은 종이 쪼가리더군. 1단계, 머리카락 샘플을 비닐 팩에 넣는다. 2단계, 기계의 후드를 열어 비닐 팩을 유리홈에 끼운다. 3단계, 작동 스위치를 미리 눌러 신선한 샘플상태를 유지한다. 4단계, 후드를 닫고 좌측의 배출구 뚜껑을 열어놓는다. 5단계, USB포트로 컴퓨터와 연결, 작업진행 창이 뜨면 배출구의 연기 상태를 확인한다. 끝. 가만, 연기는 뭐죠? 머리카락 주인의 영혼이지. 반씨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어. 담배 연기가 아니었네요, 고철기계의 구멍에서 가습기처럼 솔솔 피어오르는 김의 정체가 결국 저주받은 영혼이었다니. 저주받은 영혼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습해진 사무실 천정은 곰팡이로 가득했어. 악취? 말도 마. 그나마 후각의 적응력이 빨라 금방 둔해졌으니 망정이지. 언데드는 코를 막고 있는 내게 너스레를 떨었어. 그 정도 냄새 갖고 뭘 그리 호들갑은. 겨울이면 영혼들 덕분에 실내가 건조하지 않다니까. 습도조절용으로 딱 이거든. 난 정말 고마운 영혼이군요, 라고 대꾸하려다 투박하고 볼품없는 고철기계에 문득 시선이 멈췄지. 대체 이 기계는 어디서 난거에요? 반씨는 제품보증 딱지라도 찾아보라고 했어. 메이드 인 재팬? 메이드 인 차이나? 글쎄, 어디서 만든 거야? 이리저리 고철을 살피고 있던 날 보더니 반씨가 키득거렸지.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너무 캐묻지 말라고. 출생의 비밀을 가진 녀석에게 그런 질문은 실례니까. 가끔은 말이야. 누군가의 저주를 받은 영혼이 하도 자주 들락거려서인지 이 녀석의 차가운 몸체를 만질 때 은근히 섬뜩해지기도 한다구.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내저었지.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러니까 녀석에게 너무 스트레스 주지 말자고. 이래봬도 고장 한 번 안 난 성실한 녀석이거든, 반씨는 우연히 데려다 기른 아이가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준 게 고맙다는 듯 그 투박한 녀석을 살살 쓰다듬기까지 했어. 아무렴 어때,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지. 귀하신 고철의 감정을 건드려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여튼 그 비밀 많은 고철과 친해지면서 나는 좀비캐릭터 제작도 손수 해낼 수 있게 되었어. 게다가 사장의 말대로 특별히 성수기, 비수기를 타지 않으면서 꾸준히 매출이 늘어나, 모두들 조금은 들뜬 분위기였지. 당연히 특별 성과급도 짭짤했고. 하루하루 우리의 출동은 잦아졌으며 어둠의 경로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는 유저들은 점점 더 늘어났어. 난 머리카락 날치기와 영혼 스캐닝에 도사가 되어갔지. 뭐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백수로 돌아가거나 업종을 전환해 볼 생각 따윈 전혀 안 들더군. 슬슬 프로의식이 생겨나면서, 성취욕이 마구 솟구치면서, 뭐 나도 남들 못지않은 내 명함 한 장 정도는 넣어갖고 다니고픈 작은 바람 외엔 특별히 딴 생각할 틈이 없었지. 우리 일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글쎄, 한국표준 직업분류표에 의하면……어디보자, 언데드는 너스레를 떨며 몇 가지를 추천해줬어. 일반 사무 종사자는 아닐 테고, 기타기계 기술자? 사회 서비스 관련 전문가? 아니다, 치료 전문가 쪽은 어때? 잘 모르겠으면 통계청 통계과로 문의 해보라는데? 어쨌든 넌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니까, 서비스업 종사자 중에서 찾아보든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가장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아냈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인터넷으로 바로 명함을 주문했어. 그럼, 필요하지. 요즘 고객 상담이 얼마나 많은데. 아참, 너도 한 장 줄게. 어때? 특히 금박으로 된 이 부분. 게. 임. 치. 료. 전. 문. 가. 난 이 직종명이 무척 마음에 들어. 음악치료, 미술치료처럼 머지않아 곧 각광 받게 될 거야. 음악치료 같은 건 아직 우리나라에서나 생소하지 선진국에선 이미 일반화 된 치료잖니.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이런 치료전문가 쯤은 먼저 생겨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물론 단순한 인간들은 게임중독자를 치료하는 신경정신과 의사나 레크레이션을 통한 놀이 치료 같은 걸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 귀찮아도 당분간은 별도의 설명이 좀 필요할거야. 어차피 앞으론 이런 걸 찾게 될 인간들이 더 늘어날 전망이라니까. 하긴 병들지 않고 세상사는 게 어디 보통일이니?

    반짝이는 새 명함 돌리던 날, 사장은 날보고 혀를 내두르더군. 이런 얘가 사무 보조직 지원이 웬 말이냐면서. 난 비닐 팩에 담긴 무수한 머리카락 샘플에 고객 이름을 쓴 라벨을 하나하나 붙이며 큰소리로 웃었지. 부끄럽지만 그런 웃음은 꽤 오랜만이었어. 밀린 숙변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랄까. 변비냐고? 무슨 소리.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훅을 날린다면 아주 상쾌해질 거라는 언데드의 말이 뭔지, 드디어 실감했다니까. 뭐 이런 기분이 뭔지 모르는 인간들이 많다는 건 회사 입장에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 타이밍을 놓치고 괴로워하는 인간들이야말로 우리의 고객들이니까. 넌 어때? 타이밍을 놓치고 괴로워 해 본 적 없어? 목표물로 만들어 한 방 먹이고 싶은 인간들은? 하긴, 한 방 먹이려면 일단 그 팔부터 나아야겠다. 그게 뭐니, 기브스까지 해가지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잘 먹긴 뭘. 원래 꼬리곰탕 같은 거 사주려고 그랬는데. 그나저나 계단에서 어떻게 넘어졌길래 팔이 다 부러져? 재수가 없으니 매일 다니던 계단에서도 굴러 떨어지는구나. 이제부턴 항상 조심, 조심, 알지? 주위 잘 살피면서. 그리고 참, 니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도 조심 좀 하고. 함부로 빠지지 않게, 누군가 주워가지 않게 말이야. 특히 헤어숍 같은 데선 더더욱. 말했잖아. 머리카락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부디 몸조심해라, 친구. <끝>
    정수진

    정수진

    1974년 서울 출생

    명지대 국문과 졸업

    KBS 교양국 등에서 다큐멘터리 구성작가로 활동

  • 조남현(문학평론가) 이승우(소설가)
    (예심 김동식 한강)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 중 고려할 만한 작품은 세 편이었다. 모두 문장을 다루는 솜씨나 이야기의 틀을 짜는 능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러 있어 미더움을 주었다.
    ‘호모 콜렉터스’(송진영)는 경쾌하고 발랄한 문장으로 사물에 사로잡힌 인간의 삶을 희화화하고 있다. 문제는 경쾌함과 발랄함이 종종 가벼움과 통속으로 미끄러져 내려 읽는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는 것이다. ‘암살’(김유철)은 제주 4·3사건을 수사극 형식에 담아낸 작품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긴장감이 잘 유지되고 있으며 메시지도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적 장면 처리기법의 활용이 지나치고 투서자의 정체를 얼버무리는 등 마무리가 미흡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날려, 훅’(정수진)은 게임치료 전문가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교묘하게 지워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교묘하다고 하는 것은, 가상 세계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가상 세계가 엄연한 현실의 일부로 편입해 들어왔음을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전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점, 중편소설로서는 비교적 평이한 전개와 약간 짧은 분량이 걸렸지만 천연덕스러운 입심과 유연한 서술, 정교한 구조 등 장점이 더 눈에 들어왔다.

    심사위원들은 ‘날려, 훅’이 가진 소설적 매력에 조금 더 끌렸고, 쉽게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아깝게 제외된 두 편의 응모자에게 아쉬움을,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 정수진

    정수진

    1974년 서울 출생

    명지대 국문과 졸업

    KBS 교양국 등에서 다큐멘터리 구성작가로 활동

    말들은 목구멍 어딘가에서 시원스레 넘어오지 못했다. 그것들은 목을 짓누르며 애꿎은 마른기침만 뱉어내게 했는데 이런 증상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괜찮은가?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해대도 입 밖으로 쏟아지지 않는 말들을 가지고 있진 않은가? 이런 증상을 겪고 있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굽은 등짝을 툭, 툭, 두드려주고 싶다. 막힌 목이 뚫릴 만큼만 딱.

    물론 주제넘은 바람이다. 당신은 뭐 하는 짓이냐고 면박을 줄지도 모르고 등짝에 멍이 든 채 날 노려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이 증상은 서로의 등짝을 두드려줘야 호전되는 것이므로.

    이쯤에서 감히 고백한다. 누군가의 목구멍에 걸린 말들을 위해, 등짝 몇 번 두드려 줄 힘은 될 만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초짜의 장래희망치곤 시건방지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이 매운 손바닥으로 잔뜩 겁먹은 내 등짝을 세게 두드려줬으면 좋겠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 것 같다.

    어정쩡하고 무모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는 깊은 감사를, 답답함 속에서도 명랑한 응원을 보내주신 부모님께는 고맙고도 죄송스럽단 말씀을, 눈인사만으로도 힘이 되어준 동생에겐 오랜만에 활짝 웃는 누나의 표정을, 함부로 부르기엔 송구스러운, 혹은 쑥스럽지만 마구 부르고 싶은 고마운 이름들에겐 긴 말을 줄인 큰 인사부터 꾸벅 전한다. 뭔가를 전할 수 있어 다행스런 새해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