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그 자신으로 향하는 것이다.
사라짐이라는 그 본질로 향하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1. 윤리를 넘어서는 윤리,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
어쩌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오늘날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겨냥하는 유력한 가설이고 견고한 이미지이다. 밝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허름한 국밥집 주인의 은근한 미소,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물의 ‘인간적인’ 프로필……. 그렇다. 이것들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주조된 2000년대 대한민국의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희망’의 이미지들은 광고에 이용되고, 온정의 스토리로 변환되며, 무엇보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에 의해 유용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된다. ‘자수성가’, ‘꿈꾸는 젊음’, ‘노력의 대가’ 등 초과적인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시대다. 더불어 ‘긍정적인 인간’이라는 사고의 마인드맵까지 덤으로 제공되고 있다. 심지어 ‘긍정적인 인간’은 수명마저 길다고 한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가령 절망에 대해서라면? 전지구적으로 빈발하는 재난과 전쟁, 예기치 못한 사고들에 대해 우리는 진실로 ‘절망’할 수 있는가? 결코 상대적인 의미가 될 수 없는 ‘희망’ 혹은 ‘절망’이라는 기표에 우리는 얼마만큼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얼마 전 두 아이의 엄마가 자신의 아이들을 껴안고 아파트 18층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그 며칠 전에는 추위를 피해 쓰레기통 안에 들어가 목탄을 태워 몸을 녹이던 떠돌이 아이 다섯 명이 일산화가스에 중독돼 모두 사망했다. 또 얼마 전에는 전기가 끊겨 촛불로나마 온기를 얻으려 했던 할머니와 손자가 화재로 사망했다. 비근한 예는 많다. 그 모든 사건을 일일이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 어려울 뿐.
오이겐 핑크가 지적하듯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죽음이 ‘사망’으로 표현되는 경우, 그것은 ‘타인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아마 이방인일 수도 있는 누군가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런 타인의 죽음은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전술했던 사건들 속에는 어떤 괄호가 숨어 있다. 두 아이의 엄마는 타국에서 시집 와 가정불화에 시달리던 (베트남) 여성이고, 떠돌이 아이 다섯이 사망한 사건은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위의 사건들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고 해도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체납 때문에 공급이 중단된 전기를 대신해 밤새 촛불을 켜 몸을 녹이려 했던, 가난한 할머니와 손자의 화재사건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일이다. 앞의 두 사건과 뭔가 다르게 느껴지는가. 다르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그것은 ‘타인의 죽음’일 수밖에 없으니.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묻는다면? 그렇게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묻는다면? 그리고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묻는다면?
이 허망한 물음에 대한 소설의 응답으로 혹자는 소설의 행간과 작가의 이력에서 ‘정치성’을 읽어냈고, 혹자는 ‘윤리’의 가능성을 모색했으며, 긍정적인 ‘코뮤니타스’와 조용한 ‘혁명’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선언했다. 혹자는 「백의 그림자」에 대해 무언가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의무감을 느꼈다고 호소했으며, 행여나 있을 오독으로부터 소설을 지켜내고 싶었음을 고백했다. 소설을 전위에 둔 거대한 예언들 속에서 나는 두렵고 또 두려웠다. 만약 황정은 소설 속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처럼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면 어쩔 것인가. 애써 점착, 점착, 하다가 점차 희박한 것이 되어 흩어지는 무위(無爲)라면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은 진정 오독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다수의 평자들의 지적대로 황정은의 근작들은 ‘윤리적’이다. 그렇게 읽혀지고 있다. 이러한 독해 속에서 주요하게 강조되고 있는 윤리와 인간 권리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그러나 이러한 주제들이 점차 “부자들의 만족에 찬 이기주의, 위력의 행사, 현대적 광고에 부합”하며 사실상 서구적 근대의 주체의 죽음, 윤리와 책임의 실종을 가리킨다는 동시대 사상가들의 언급과 교묘하게 궤를 달리한다. 윤리와 인간, 죽음이란 주제들이 포스트모던, 유목민 등으로 변주되어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하나의 현상을 비판적으로 갈파했던 대목들을 염두에 둔다면, 집요하도록 윤리와 문학의 본질을 읽어내는 것은 절반의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이제 와 다시금 본질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팍팍하고 곤궁한 현실적 맥락이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이러한 독해가 순정하고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윤리와 사랑의 본질을 초과하거나 혹은 미달할 수밖에 없음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 윤리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것은 윤리로부터 벗어난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그것은 사랑을 벗어난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과연 그것을 손쉽게 명명되는 희망과 절망의 기표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오히려 황정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뭐를 불린 적이 없다고?
이름.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사과라고 불러도 좋아.
사과.
두리안이라도 상관없어.
(…중략…)
m은 생각에 잠겼다가 거의 다 사라져가는 두리안을 향해 말했다.
두리안.
응.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건 나쁜 걸까.
그렇지 않아. 두리안이 말했다. 그대로도 좋아.
그건 그거대로 좋아. 왜냐하면…….
두리안의 목소리도 이제 너무 흐릿해서,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았다.
2.언어의 저편 ― 보통과 객관 이 경우 결국
아득한 먼 훗날 언어와 문학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 때때로 나는 상상하고 의심한다. 보르헤스는 그의 인상적인 단편 ?지친 자의 유토피아?에서 훗날의 세계 혹은 어떤 미래인간과의 조우를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다양한 언어로 인한 전쟁 이후 세계 언어는 라틴어로 되돌아갔고, 모든 쓸모없고 자질구레한 것들―재산, 유산, 소유, 도시, 국가, 달력, 역사―은 사라졌다. 심지어 미래인에게는 이름조차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그저 ‘어떤 사람’이라고만 불릴 뿐이다. 미래인은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우리 사실이라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맙시다. 아무도 더 이상 사실이라는 것에 중요성을 느끼지 않으니까요.” 지난 과거에 대한 미래인의 술회처럼 오늘날 인쇄된 사진과 글자는 실제 사물보다 훨씬 사실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단지 인쇄매체를 통해 공표된 것만이 진실”한 것이었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진으로 찍혀져야 한다”는 개념만이 유일무이했던 미래인의 과거는 언어 표상과 이미지 없이는 존재 자체를 담보 받지 못하는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역상이다. 미래인은 언어를 일종의 인용체계 정도로만 인식하며, 언어를 신뢰하지 않는다. 과거는 오직 비가(悲歌)를 짓기 위해서만 소용된다. 보르헤스의 인용을 따라 새삼 덧붙이자면 ‘유토피아’란 ‘그런 곳은 없다’는 뜻의 그리스조어이다.
황정은 소설 속의 세계가 그런 ‘없음’의 ‘유토피아’와 미래인의 과거에 한 발씩을 담그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황정은의 소설에서 언어는 그리 유용하지 않은 존재이다. 의미론적 맥락에서 그러하다. 소설은 응당 언어로 기술되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녀의 소설 속에서 언어는 의미의 확장이나 보편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일무이한 특수성, 덧붙이자면 그 특수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특수함으로, 조심스럽게 사용된다. 다수의 평자들이 강조하며 언급했던 ‘가마’에 대한 통찰이 그러하다. “가마는 그냥 가마라고 생각했지 거기에 모양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은교 씨와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에 대해 질문하는 무재 씨의 대화는 흥미로운 동시에 진부하다. 언어학자들이 보았을 때 대단히 새삼스러운 대화일 수 있는 이러한 장면은, 그러나 “가마의 처지”에 대한 입장이 개진되며 기묘한 울림을 준다. 요컨대 가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이라는 것이다. (「백의 그림자」34∼38쪽) 그것은 꼭 ‘가마’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황정은의 소설은 무언가로 명명되는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중략…)
돌아가신 지가 오래라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라고 말해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백의 그림자」 113∼115쪽)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 사라짐을 앞둔 존재라고 해서 함부로 명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 그것이 지녀왔던 역사와 기억들은 손쉽게 배제되고 편집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언어(langage)는 곧 권력(pouvoir)이다. 모든 쓸모없는 것들이 사라졌던 「지친 자의 유토피아」에서 모든 권력, 그리고 언어는 무상함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그곳은 ‘없는 세계’이다. 오직 없음으로서만 완전해질 수 있는 어떤 세계. 모리스 블랑쇼는 이름 붙인다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말하는 자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이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름 붙여진 것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그것을 하나의 이름이라는 편리한 방식으로 소유하는 폭력적 행위이다. 이름 붙인다는 행위만으로도 인간은 모든 생명존재와 고독한 신들까지도 곤혹스럽게 만드는 기괴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그는 통찰한다. 엄밀히 말하면 황정은 소설 속의 세계는 중간지대이다. 세심하게 연마되고 조율된 언어가 활용되는 동시에 배제되고, 그 객관에 대하여 끊임없이 되물어진다. 그러나 결국 그 세계는 언어로 조형될 수밖에 없는 세계, 이미 언어에 인해 탄생된 세계이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세계는 언어로 거칠게 축약되고 파악되지만, 그 상태와 현상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는 수단 역시 언어일 수밖에 없다.
보통. 보통. 보통. 저기, 무도씨, 보통이라면 무엇을 기준으로 보통이라는 거야. 나무늘보나 달팽이가 있잖아, 느리잖아, 하지만 걔네들의 입장에선 이 세계가 얼마나 빠른가, 생각하면 아득해지지 않아? 그러니까 걔네들의 입장에서도 보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일까? 그러니까 어느 정도라는 거야. 무도씨, 예를 들어 한 달에 공식적인 평균으로 98.1명이 테러로 죽는다는 어느 도시에서 지난 5월엔 98.0명이 죽었다면 그것은 보통, 이라는 걸까, 뭐가 보통이라는 걸까. (…중략…)
거기다 무도씨, 나이를 먹으면 발바닥 속의 쿠션이 닳아서 뒤꿈치가 아픈 경우가 보통이라는데, 결국은 사는 것이 그런 것, 그렇게 사는 것이라며 납득하는 것이 보통일까, 그러다 알고 보니 암이었다는 식으로 문득 세상에서 사라지고, 그런 경우가 보통이라는 걸까. (…중략…)
선생님이 말하는 객관이란 ‘어느 정도’의 객관이라는 걸까, 사람들이 ‘객관’이라고 생각하는 객관은 누구의 입장에서 객관이라는 걸까,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 객관이 보통 정도의 객관이라는 걸까, 무도씨, 무도씨는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있어? (「오뚝이와 지빠귀」 205∼208쪽)
여러분의 입장으로 보자면 한 직장에 몇 년이고 묶여 있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서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적성을 실험해보고 자기계발이 힘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습니다. 선진국에서는 훨씬 전부터 이러한 시스템으로 노동시장을 유동성있게 운용해가고 있습니다. 그게 대세이고 시장에 알맞습니다. 유동성, 말입니다. 위기를 기회 삼읍시다. 회사는 유연하고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디디의 우산」 171쪽)
이러한 언술에 전제되는 것은 ‘입장’이다. 나무늘보나 달팽이의 입장, 선생님의 입장, 도시의 입장, 개미의 입장, 계약직 노동자의 입장……. 그것들의 특수성은 때로 ‘경우’에 따라 하나로 통합되기도 하고 분류되기도 한다. 다만 편리와 편의를 위해서이지만, 황정은 소설 속에서 그것은 언제나 가능한 ‘폭력’이다. ?디디의 우산? 속 회사 관계자는 노동자들의 계약조건을 변경하면서, 그들의 ‘입장’과 ‘자유’를 충분히 고려했다는 듯한 취지의 일장연설을 펼친다. 그의 언사는 노골적인 동시에 속이 텅 빈 것이다. 노동자들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언변의 부당함과 모순에 대하여 항의하지 못한다. 그들은 권력(pouvoir) 없는 자들이며, 따라서 이름붙일 언어를 빼앗긴 자들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경우’, ‘보통’은 어느 정도의 ‘보통’이고, ‘보통’ 정도의 ‘객관’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를 회의하는 반복으로 수렴될 뿐이다. 무상한 그 반복 속에서 무심히도 삶은 끝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안다. 오직 그뿐이다. 그뿐이고, 또한 그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뿐일까?
3. 죽은 자가 남긴 것 ― 당신의 죽음 이후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시공을 분별치 않는 재난들이 있었고, 우발적 사고들이 있었으며, 시대를 망연하게 만드는 자살과 타살 들이 난무했다. 그런 죽음들이 있었다. 자연사(自然死)는 어쩌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가령 당신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 ‘호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처럼, 그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도무지 호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죽음을 두고 호상이라고 말하는 장례식에 다녀온 적이 있다. 죽음을 맞은 사람은 수년간 손가락도 발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가 육인용 병실에서 질식해 죽은 사람이었다.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그의 죽음을 두고 호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살아서 누린 나이가 팔십팔세나 되었으므로 마땅히 호상이라고 말하고
의 의미란 결국 죽은 사람의 처
낙하하다 63쪽)
낙하하다 에서 호상을 회상하는 자는 그 자신이 죽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삼 년째 혹은 삼십 년째 낙하하고 있는 ‘목소리’이다. 그는 외롭고 두려운 것이 관성이 되어,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려운 상태에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자이다. 차라리 충돌을 기다리지만 그것은 아득하기만 한 일이다. 그는 어쩌면 죽은 자이고, 죽음 뒤 사라지지 못한 자이며, 간절히 사라짐을 기다리고 있는 자이다.
완전히 죽지 못하는 생명의 이미지는 황정은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등 뒤에서 열리, 불사(不死)의 몸이 서서히 부스러지며 타인의 죽음을 기다린다(대니 드비토모자오뚝이와 지빠귀 )가 존재하는 시간은 사실 영원의 시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죽음, 완전한 소멸의 삶은 부정되고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비루하고 죽음은 비참하다. 온전히 살아갈 수 없고 오롯이 죽을 수도 없는 세계. 그 반복의 굴레가 황정은의 소설과 그 인물들을 ‘허망’하게 만든다. 그들은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채, 소멸을 꿈꿀 수밖에 없다. 오직 점점 희박해질 뿐이다.
잘 모르겠어. 아주 전부터 그랬어. 희로애락이 희박해.
희박하다고?
희박해. 그밖의 다른 감정도. 그건 그러
27쪽)
아무래도 나는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사라진다기보다는 너무 광범위하게 번지고 퍼져서, 끝내는 돌이킬 수 없이 묽고 무심한 상태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나는 아직
대니 드비토 54쪽)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가혹하게 느끼는 것은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다. “이생에 살면서 겪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내가 죽을 때는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왕 죽는 거, 유령으로 남거나 다시 태어나 사는 일 없이,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이다. “그건 너무 덧없다”는 유라 씨의 말에 유도 씨는 “덧없는 그저 바랄 뿐이었다. 유도 씨가 무엇으로도 남지 않기를.”(대니 드비토 57쪽)
그렇다면 삶은 어떤가. 그들에게 삶은 가혹하지 않은 어떤 것인가. 그러나 삶 역시 죽음 이후와 다르지 않다. 이래저래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고양이도 아는 사실이다. 고양이는 말한다.
좋을 것”(묘씨생 115쪽)이라고. 그러나 고양이의 일생 역시 인간과는 무관치 못한 것이라서 고양이 또한 완전한 죽음을 꿈꿀 뿐이다.
일생을 마친 뒤에도 일생이란 가능성이 남으니 좋을까.
목숨에 관한 가능성뿐이라면 어떨까.
이 몸에게는 나쁜 일뿐이었다.
나쁜 일뿐이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겠다.
나쁜 일뿐이었다.
나쁘고 나쁘고 나쁠 뿐이라서 나쁨에 대한 기준이랄 것도 애매하고 무감각해졌다. (…중략…)
다시 산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또 한 번의 일생을 두려워하고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이 그들의 손에 달렸으니 목숨조차도 내 것 같지 않은 이런 세상은 두 번도 성가시다. 일생일사로 기품있게 살아가는 다른 짐승들과는 다르게 눈물 흘린다. 다시 일생이 어떨 것인가 내일
비천하게 걱정하고 있다. (묘씨생 125∼129쪽)
반복되고 회귀하는 일생 속에서 시간은 영원적인 것이 된다. 죽음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영속되
피아에서 4세기를 넘게 살아온 미래인에게 관철되고 있는 태도인 모든 것에 대한 무의미와 욕망의 상실은 오직 종말이 상상되지 않는 세계에서만 타진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죽음’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불가능성, 없음(無)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황정은의 소설 속에서 시간은 의미 있는 합치를 이룩하는 카이로스(kairos)적 시간이라기보다 오히려 선형적으로 흘러가면서 종말을 향하는 크로노스(chronos)적 시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삼켜버렸던,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운명에 대한 상징인 크로노스는 그러나 근대 이래의 문학의 운명과는 다른 궤도 속에 놓인 존재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황정은의 소설에는 어떤 전일성 또한 없다. 시작과 종말 사이에 놓인 단순한 시간성(chronicity)은 오직 공허함으로만 남겨진다. 과거와 미래는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그저 시간은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소멸한다. 이 ‘공허한’ 가능성의 소설에서, 우리는 그 없음(無)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마뜨료슈까는요, 라고 무재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백의 그림자」 141쪽)
차라리, 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이참에, 라고 생각하며 눈을 뜨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백의 그림자」 90쪽)
그것은 ‘가마’나 ‘슬럼’ 같은 명명의 폭력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차라리, 완전히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될 수 있다면.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 도래한다면. 이것을 ‘위로’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기존의 논의에 대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나는 그것을 황정은 소설의 없음(無)에 함몰될 유의미한 잔여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이 그토록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해 회의하고 머뭇거리며 결코 확신하지 못하는 황정은의 세계 안에서 나는 쓸쓸한 유토피아―그 없음을 읽는다.
4. 피를 흘리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백의 그림자」에는 그림자가 일어섰던 특수한 사례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오무사의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며, 유곤 씨의 가족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때로 당사자의 입을 통해 직접 발화되거나, 나지막한 대화를 통해 전달된다. 그중 은교 씨가 연속성 있게 듣는 이야기는 ‘소년 무재 이야기’이다. 그것은 무재 씨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건 무재 씨의 이야기인가요?” 묻는 은교 씨의 질문에 무재 씨는 “무재의 얘기죠”라고 답한다. “무재 씨 본인의 이야기?”라는 질문에 무재 씨는 다시 “무재의 이야기라니까요”라고 대답한다. 말장난 같은 이러한 대화는 그러나 의미심장하다. 오카 마리는 타자에 의한 표상의 폭력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사건은 결코 언어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재현된 현실 외부에는 반드시 누락된 사건의 잉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사건의 기억은 타자에 의해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역설한다.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그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이다. 앞서 나는 어떤 영원성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유라 씨의 죽음 이후 유곤 씨의 남겨짐(?대니 드비토?)처럼 산 자는 또한 죽음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연인의 죽음 이후 그 자신을 유폐시킨 채 오직 장을 향해 갔던(「뼈 도둑」) 조의 행적처럼, 그것은 입과 언어를 지닌 산 자에 의한 기록일 수밖에 없다.
모르겠어. 왠지 나는 지금 이렇고 저런 기억과 감정들의 덩어리라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말(言)과 말(言)과 말(言)과, 말(言). 나는 지금 꽤 많은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야.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살았으니까. 말을 건네지도 말을 건네받지도 못하면서 내가 누구에게 대답하는 일도 없이 누군가 내게 대답하는 일도 없이. (「문」 20∼21쪽)
머리를 빗으면서, 구두를 신으면서, 면도기를 물에 헹구면서, 복자의 물그릇에 물을 채우면서, 유도 씨는 무심히 내 이름을 말했다. 그렇다고 딱히 나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감상도 염원도 없이 그저, 유라,가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그저 말(言)로, 아무 바랄 것도, 기댈 것도 없는, 두 음절의 말로서, 유도 씨의 입버릇이 되었다.
유라.
응.
유라.
응. (「대니 드비토」 39∼40쪽)
말(言)로 존재했다. 두리안도, 유라 씨도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닫는다. 그 이상은 불가능했고, 또한 무의미한 것이었다. 황정은의 소설에서 언어는 존재의 상상과 인지를 가능케 하는 어떤 마술이 된다. 그것은 단순한 ‘특수성의 환상’만은 아니다.
「백의 그림자」의 무재 씨는 노래를 알지만 목이 메서 그것을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콩밭 매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74쪽) 때문에 콩밭, 에서 그는 목이 멘다. 동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새벽에 떠나는데 강아지만 같이 갔다고 하고, 발자국만 남았다고 하고.”(92쪽) 언어는 무재 씨로 하여금 노랫말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상하게 한다. 타인의 ‘입장’, 그 ‘경우’로 그를 이끌어버린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노랫말에 불과할 구절들 때문에 그는 자꾸 목이 메서 노래를 하지 못한다. 사건이 선행하고 그것이 언어로 표상되는 것이라기보다, 언어가 선행하고 그것이 현실로 전이되어 확장되는 형국이다. 은교 씨에 의해 설명된 “말의 이미지 사전”이란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그 맞은편에 오무사가 있었다. 천구백칠십 년대 이후로 손을 본 적이 없는 듯 낡고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전구를 판매하는 가게였으나 가게를 밝히는 전구라고는 벽에 걸린 노랗고 푸른 알전구 다발뿐이었다.
빽빽하다.
라는 말의 이미지 사전을 만든다면 아마도 그런 광경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빽빽하다.
라고 생각한 뒤엔 아무런 말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눈앞이 빽빽했다. (「백의 그림자」 102쪽)
오무사의 풍경 뒤에는 “빽빽하다”라는 말이 자리잡고, “그야말로 빽빽하다”라고 생각한 뒤엔 “아무런 말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눈앞이 빽빽”해진다. 그야말로 딱 떨어지는 ‘말’과 ‘이미지’의 사전이다. 모든 언어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고 등가성 또한 자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현대의 환상, 표상의 폭력, 언어사전의 교만함에 거의 빚을 지고 있지 않은 ‘말의 이미지 사전’이다. 이런 사전이라면 “피를 흘리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야행20쪽」) 싸우는 사람들의 말(言)을 멈추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매일매일매일매일, 전화로 여러가지 어두운 일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요, 매일매일매일매일, 절어버린다고나 할까, 기운을 좀 내보세요, 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요, 자네는 내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네, 이런 식이니까, 그러면 애초에 전화는 왜 하셨을까, 제 입장에서는요, 내가 저 형님한테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나한테 들이대는 게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중략…)
제수씨, 사람이 보통이 아니네요.
보통이지요.
보통입니까.
이 정도면 보통이지요. (…중략…)
삼촌이 지금 우리를 쫓아내는 거예요?
더 얘기 나눠봤자 입장이 이렇게 다른데, 좋을 게 있겠습니까. (「 야행」 30쪽)
‘입장’의 간극은 너무나 커다랗고, ‘보통’의 이미지는 갈기갈기 찢겨진다. 그들의 언어는 서로 결코 이해되거나 합치될 수 없다. 「지친 자의 유토피아」에서 미래인은 세계의 서로 다른 언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음을, 그리고 결국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었지만 다시 여러 개로 나뉜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임을 고백한 바 있다. 이 고백을, 하나의 언어이지만 누구도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 다른 의미들을 편리하게 덧씌우게 된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다면 어떨까. 예컨대「묘씨생」의 노인에게 덧씌워진 ‘불쾌’의 의미처럼 말이다. “바닥이나 계단이나 어쨌거나 사람들의 발 높이에 놓인 접시에서 음식을 건져 먹고 사는 이 노인을 두고 상인들은 불가사의한, 자기에게도 그런 인생이 가능하다고 말하기가 불가능한, 성가시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이 없는데도 불쾌한, 이유를 모르게 불쾌해서 더 불쾌한, 불쾌 자체라고 수군거렸다.”(113쪽) 명쾌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쾌’라 명명하고, 이유를 모르게 불쾌해서 더 불쾌한 상황으로, 노인은 “불쾌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명명은 노인에게 ‘불쾌’란 언어를 덧씌우는 주박이고 형틀이 된다. 그러나 역으로 사람들은 노인을 ‘불쾌’라 부를 수 없다. 물건을 던지거나 발로 차내며 다가가 노인의 어깨를 잡고 강하게 밀치는 사내는 “인간아”라고 노인을 부른다. 고양이의 눈에 그들은 모두 인간이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을 향해 “때릴 수도 없고 인간”, “이걸”, “때릴 수도 없고”(118쪽) 라며 폭언을 퍼붓는다. 날것의 저주들 속에서 결국 노인은 얼마 못가 죽음을 맞이하고, 고양이는 다시 찾아올 일생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또한 사라질 것이다. 반복되는 불사(不死)의 일생과 점차로 희박해지는 원령들의 부스러짐 속에서 모든 것은 온전한 소멸을 향해 갈 것이다. 어쩌면 오직 남는 것은 오롯이 순정한 어떤 기록뿐일 것이고, 우리는 그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뼈 도둑」183쪽) 기록자의 예언대로 우리는 부르고 싶은 대로 그를 부를 것이다. “그 남자, 그 기록, 그 새끼, 그 물건, 그것, 나는 즉 그”(183쪽)라고 이야기하는 존재에 대하여, 그 스러짐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상상할 것이다. 기록자의 궤적을 따라 우리는 “갈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205쪽)고 고백하는 단호한 삶의 기록을 향해 한발 한발 전진해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에 관한 꿈”, 오직 그로 인해 완전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그 꿈속을 걷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조는 완전한 꿈의 기록 속으로 사라지고(「뼈 도둑」), 무재 씨와 은교 씨는 소설의 처음에서처럼 다시 길을 잃었다(「백의 그림자」). 뼈처럼 느껴지는 메마르고 차가운 손을 잡은 채 언젠가 그들은 길을 찾을 것이고, 언제고 다시 길을 잃을 것이다. 시간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주앉아 따끈한 밥을 먹고 때때로 노래를 부르는 것뿐이다. 진실로 이것은 길을 잃은 것인가. 무재 씨의 말처럼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되어버리는 일인가. 모리스 블랑쇼는 말한다. 글쓰기에 침묵은 필수적이라고. 우리들이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글쓰기가 그 가능성과 필연성을 찾아내는 곳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나는 다시 처음의 없음(無)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다.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희망’에 가닿지 못하고, ‘절망’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절망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던 어떤 사라짐의 기록들을 위해서.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임세화
1984년 대전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대학원 국어국문과 석사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