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당부

by  이동은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1. 어느 빌라 앞 / 오후

    교복을 입은 남학생(종욱, 16세)이 다세대빌라 입구 우편함 앞을 기웃거리고 있다.
    우편물을 빼서 수신인을 확인하다가 빌라에서 누군가 내려오자 얼른 우편물을 다시 넣는다.

    #2. 공부방 / 오후

    청주시내, 작은 보습학원 규모의 '공부방' 안.
    한쪽에서 중2학생(나영)를 혼내고 있는 효진(32세, 여)의 날선 목소리가 들린다.

    효진 너 저번에도 선생님이 분명히 얘기 했지. 근데 오늘 또 그러면 어떡해? 이게 무슨 태도야 너!
    효진, 자신의 폰 진동이 울리지만 무시하고 말을 계속 잇는다.

    효진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데?
    나영 ...
    효진 말해봐. 인상만 쓰지 말고.
    나영 ...
    효진 응?
    나영 (한숨만 내쉬는)
    효진 너 지금 시위하자는 거야?

    효진의 잔소리가 이어지는데, 안에서 문이 열리고 미란(32세, 여)이 전화 왔다는 손짓을 보낸다.

    #3. 공부방 (상담실) / 오후

    칸막이로 나눈 좁은 방 안. 구석에 문제집 등이 가득 꽂혀있는 책상이 있고, 그 앞에서 효진이 고개를 숙인 채 통화를 하고 있다.
    수화기로 들리는 효진모(명자, 60)의 음성.

    명자(통화)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아무래도 위암인 것 같다. 의사가 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하는데, 이제 다 끝인 갑다.
    효진(통화) (머리를 긁는) 얼마 전에 검진 다 받았는데 무슨 암이야? 어디 병원 갔는데?
    명자(통화) 니는 엄마가 아프다는데, 그런 말이 나오나.
    효진(통화) (뒷목을 주무르는) 알았어. 확인해볼게.
    명자(통화) 뭘 확인한다고 하노. 딸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엄마를 알기를 우습게 알고.

    효진, 문 사이 창으로 공부방에 들어오는 학생을 보고는,

    효진 엄마, 나 지금 바쁘거든. 수업해야 돼. 이따 전화할게.

    #4. 동네 편의점 / 오후

    계산대에 삼각김밥과 캔 음료를 내미는 종욱.

    점원 (바코드를 찍고는) 1800원입니다.
    종욱 콜라는 공짜 아니에요?
    점원 (슬쩍 보더니) 그 행사는 밑에 고추장불고기만 해당 되는데. 이건 공짜 아냐.

    종욱, 잠시 망설이더니 캔을 다시 놔두고 온다.

    점원 (다시 바코드를 찍고) 900원.

    오백원짜리 두 개를 건네고 잔돈을 받는데 휴대폰 문자 알림 소리가 들린다.

    문자(주미) "담임 완전 난리 났어ㅋㅋ지금 어디야?"

    CUT TO
    종욱, 편의점 앞 의자에서 삼각김밥을 먹으며 문자를 확인 하고 있다.

    문자(주미) "뭐하는뎅?ㅠㅠ"

    "그냥 놈"이라고 답문자를 보낸다.

    #5. 공부방 / 저녁

    공부방 입구, 효진이 복사기 앞에서 끙끙대고 있다.
    학생들이 떠들며 교실을 나오고, 뒤따라 나오는 미란. 임신을 해서 배가 불룩하다.
    학생 한명이 미란에게 장난치듯 깍듯이 90도 배꼽인사를 건넨다.

    미란 지랄하네.

    가방을 메고 장난을 치며 나가는 아이들.

    미란 (효진을 보며) 왜, 또 복사기가 지랄이야?
    효진 종이도 안 걸렸는데... 뭐가 문제지. 또 서비스 불러야 되나.
    미란 중고가 그렇지 뭐. 야, 이번에 이사할 때 하나 사. 요즘 작은 거 많잖아, 차라리 복합기 그런 걸로 사자.
    효진 아깝잖아. (투덜대는) 에이, 공짜로 잘 썼는데...너는 그리고 지랄이 뭐냐? 애들한테 지랄 이런 말 좀 쓰지 마. 선생이...
    미란 어때. 지랄하니까 지랄한다고 하지.
    효진 안 그래도 애들 욕 듣는 것도 피곤한데... 더구나 너 아기까지 가진 애가... (포기하듯) 됐다.
    미란 (별걸 다 그런다는 듯)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효진 만사가 귀찮아. 몸도 무겁고.
    미란 어디 아픈 거 아냐? 애가 아주 피곤하단 말을 요즘 입에 달고 사네. 맨날 그렇다 말만 하지 말고, 나 약 지어 먹은 데서 보약 한재 지어 먹어봐.
    효진 됐어. 무슨 보약이야.
    미란 고집은. 혼자 있을수록 네 몸 네가 챙겨야지.

    #6. 골목길 / 밤

    주택가도로. 통화를 하며 걷고 있는 효진.

    효진(통화) 뭐하는 중이야? 출근? 맞다, 거기 아침이지. 잘 지내지? ... 아니, 뭐 그냥. 너, 엄마한테 자주 전화 좀 드리고 해. ... (엄마한테 네가) 나랑 같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잖아. ... 아무리 멀리 살아도 아들은 아들이지. ... 알아, 나도 아는데....

    효진의 집 앞 도로 한쪽에 경찰차가 정차돼있고, 사건이 났는지 무전기 소리도 들린다.
    효진, 통화를 하며 경계하듯 슬쩍 쳐다보고는 집으로 향한다.

    #7. 효진 집 (현관, 부엌, 방) / 밤

    -현관
    방금 벗은 듯 보이는 효진의 구두. 그 옆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남자 구두.

    -부엌 겸 거실
    효진 싱크대 앞에 서서 밀린 설거지를 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지친 얼굴로 이내 설거지를 시작하는 그녀.
    거실에서는 TV 소리가 흘러나온다.

    #8. 어느 빌라 앞 / 밤

    종욱, 낮에 방문한 빌라 골목(#1.의)에서 기웃거리고 있다.
    3층에 불 켜진 창을 확인하고는 빌라로 들어서는 그.

    #9. 효진 집 / 밤

    옷을 갈아입고 있는 효진.
    현관 쪽에서 누군가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멈칫한다.
    입력한 번호가 틀린지 경고음이 들리고, 다시 반복해서 번호를 누르는 소리.

    효진 (조심스럽게) 누구세요!
    남자(소리) 문 열어!
    효진 (놀라 소리를 지르듯) 누구세요!
    남자(소리) (술에 취한) 에이, 문 열라니까!

    얼어붙은 듯 서있는 효진.
    이때 위층에서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이웃 여자의 목소리.

    여자(소리) 으이구, 이 인간아. 이젠 집도 못 찾아 오냐! 죄송해요, 4층이에요.

    효진, 여자소리에 비로소 안심을 한다.

    #10. 어느 빌라 안 / 밤

    문 앞에 서있는 종욱. 안쪽에서 여자(30대) 소리가 들린다.

    여자(소리) 열쇠 없어?
    현관문을 확 열어젖히는 여자.

    여자 금방 왔네.(종욱을 보더니 놀라며) 누구세요?
    종욱 혹시... 여기 오연화씨 집 아녜요?
    여자 아닌데요.

    잠시 둘 사이 정적. 여자가 황급히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키를 잠그는 소리.
    밖에 우두커니 서있는 종욱.

    #11. 효진의 차 안 / 낮

    -산부인과 앞 도로
    미란, 효진의 경차 문을 열려고 하지만 잠겨있는지 문을 톡톡 두드린다.
    효진이 팔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어준다.

    미란 세상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냐, 예약을 했는데도 한참 걸렸네. 출산율이 낮네 어쩌네 하는 말 다 뻥 아냐? 이렇게 애 밴 아줌마가 많은데.

    -차 안
    운전 중인 효진. 미란의 초음파 태아 사진을 보고는 다시 미란에게 건넨다.

    효진 어쩜 많이 자랐네.
    미란 (심드렁하게) 아직 외계인이지 뭐.
    효진 애 듣는데 엄마가 할 소리다.
    미란 지구인 되려면 아직 멀었어.
    효진 얘는. 니 배가 화성이냐? 너 같은 애가 나중에 애를 어떻게 키울지. 기대된다.
    미란 난 우리 애라고 예뻐하고 그런 거 없이 키울 거야.
    효진 하긴 너 같이 애 싫어하는 사람이 엄마 되면 더 잘 키운다더라. 애한테 더 죽고 못살고.
    미란 난 학원 애들도 그렇고 크든 작든 애들은 다 싫은데, 내 애는 다를까.
    효진 야, 다르지 그건. 당연히 내 새끼잖아.
    미란 내 아이라고 갑자기 애 좋아하는 것도 웃기지 않냐. 암튼 요 녀석 하는 거 봐서. (웃음) 참 걔 엄마, 전화 왔어. 나영이.
    효진 그래? 뭐래?
    미란 (효진의 눈치를 살피며) 수학은 안하겠대. 나영이 걔가 지 엄마한테 안하겠다고 했나봐.
    효진 참 나. 혼 한번 냈다고... 어이없어. 과학은 너한테 계속 듣고? 딴 말은 안하디?
    미란 응. 혹시나 싶어서 내가 사과하고 그랬는데, 그 아줌마 보통이 아니더라.
    효진 아니 그만둘 거면 다 하지 말지. 뭐야, 약 올리는 거도 아니고.
    미란 이해해라. 걔 부모님 이혼하고, 애도 여러 가지로 힘든가봐.
    효진 그 엄마가 그런 얘기도 해?
    미란 아니, 나영이가 전에 나한테 상담했거든.
    효진 걔가 직접? (뭔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듯 미란을 쳐다보는)
    미란 우리가 학교 선생도 아닌데 애한테 이래라 저래라 너무 애 쓰지 마. 우리 어차피 걔한테 돈 받는 학원 선생이야. 누구 말마따나 학생이 아니라 고객이라잖아, 딱 거기까지야.

    #12. OO은행 / 낮

    종욱, ATM 기기 앞에서 잔액을 확인 중이다. 잔고 1만 몇백원만 있는 통장.
    망설이며 휴대폰을 켜자마자 주미의 밀린 문자가 계속 도착한다.

    문자(주미) "아 오늘 나도 학교 째고 싶다. 같이 나가." "???""문자 그만 씹어.""주글래!!""진짜 어딘뎅? 몬 일 있어? 연락 줘.""ㅠㅠ"

    그냥 휴대폰을 닫는 종욱. ATM 기기에서 1만원만 빼고 나온다.

    #13. 정우의 카페 / 저녁

    효진 ... 요즘 애들 참 웃기죠? 걔가 지 엄마한테 그랬대요. 내가 자길 귀찮게 한다고. 예전에는 저도 애들이랑 진짜 잘 지냈거든요? 수업 태도 불량해도 터치도 안하고 그랬는데, 아무리 학원샘이라도 사실 애들한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겠더라고요.
    아담한 카페. 정우(30대 남)가 효진 앞에서 펜을 들고 그녀의 투정 섞인 이야기를 듣고 있다.

    효진 난 더 어이가 없는 게, 내 친구는 애들 무시하고 사람 취급도 안하는데. 오히려 애들이 걜 좋아하더라고요.
    정우 (웃으며) 그 일이 요즘 젤 짜증나는 일인가 봐요?
    효진 그것도 그렇고. 요즘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지친달까, 밥맛도 없고. 그런데 살은 더 쪘다니까요.

    효진의 휴대폰 진동소리. 발신자를 확인 하는 그녀.

    정우 효진씨 정도면 날씬해요. 전화 받아요.
    효진 (휴대폰을 보곤 안 받는) 아녜요.오늘 언니는 어디 갔나 봐요?
    정우 아, 네. 누난 뭐 좀 사러 나갔어요.
    효진 (혼잣말처럼) 아, 나도 학원 관두고 이런 작은 카페나 했으면 좋겠다.
    정우 효진씨 무기력하고 그런 것들이 내가 볼 때는 외로움이 일정 기간 동안 쌓여서, 뭐랄까 자존감을...

    CUT TO
    카페 화장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효진.

    효진 엄마! 의사가 직접 그랬다니까. 큰일 아니래. 만성위염이라잖아. 약 잘 먹고, 스트레스 조심하면 된대. 괜히 그러지 좀 마. ... 전에도 큰 일 난 거처럼 해놓고, 다 별 일 아니었잖아.

    CUT TO
    효진, 카페 입구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효진 언니 오면 보고 가려고 했는데, 언니한테 피곤해서 먼저 간다고 얘기 잘해주세요.정우 그래요.
    효진 어휴, 춥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가, 왜 이렇게 추위를 타는지 모르겠어요.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오늘 커피도 공짜로 주시고.
    정우 아뇨, 내가 고맙죠. 나도 공부니까요.
    효진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좀 낫네요. 나중에 돈 내고 정우씨한테 진짜 심리 상담한번 받아야겠다.
    정우 이제 배우는 중인데요, 뭐. 아직 한참 멀었죠. 효진씨 이번 주말엔 뭐해요?
    효진 별 거 없는데. 맨날 자요.
    정우 (웃음) 자니까 피곤하죠. 토요일 영화나 볼래요? 우리.
    효진 영화요? 극장 간 지도 오래됐네.

    #14. 버스정류장 / 저녁

    버스정류장 옆 벤치.
    한 남자(20대초)가 꼼꼼히 종욱의 PMP를 살펴보고 있다.
    옆에 앉은 종욱, 긴장한 얼굴이다.

    거래남 8에 하죠. 여기 기스도 많이 있고...
    종욱 8만원이요? 안돼요. 10만원에 올려놓은 건데
    거래남 이거 요즘 카페에 A급도 8만원에 거래되고 있어요.
    종욱 그 가격엔 안돼요. 아,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거래남 (놔두고 일어선다)
    종욱 아저씨! (포기한 듯) 그냥 주세요.

    다시 앉아서 지갑을 꺼내는 남자.

    #15. 상가 건물 / 낮

    신축 상가 건물을 나서고 있는 효진과 부동산 여사장(40대).

    사장 어때, 깔끔하니 괜찮지? 학교들도 다 근처라 장소도 딱 좋고.
    효진 여기 월세가 얼마라고요?
    사장 아까 말했잖아. 팔십. 원래 백은 받아야 되는 자리인데, 주인이 깔끔한 거 하면 싸게 해줄지도 몰라. (주인이) 학원 한다고 하면 좋아할 걸?
    효진 너무 비싸다.
    사장 자기야 안 비싸, 여기. 바로 위층에 지금 세를 얼마 받는데 그래.
    효진 평수가 커서 그런가. 이렇게 클 필요 없는데. 회원 수도 작아서. 학원이 아니라, 공부방이라서요.
    사장 크면 좋지 뭐 그래. 그래야 애들도 더 많이 받고.

    효진의 휴대폰 벨소리.

    효진 여보세요.
    사장 (손짓으로 마무리 지으며) 주말 지나기 전에 연락 줘요. 금방 나갈 거 같으니까.
    효진 네...(통화) 아, 네 안녕하셨어요. (불편한 기색) 네, 네. ... 네? 여기 청주로요? 아, 오늘 수업 끝나면 저녁 늦게나 되는데. ... 8시반 쯤이요. ... 아, 네...

    #16. 공부방 앞 거리 / 밤

    한 남자(경택, 30대 후반)가 건물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효진, 바쁜 걸음으로 건물 밖으로 나오다가 경택을 발견.

    효진 (머뭇거리며) 안녕하세요.
    경택 (전라도 억양) 어이, 오랜만입니다.
    효진 한참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수업이 길어져서...
    경택 아녜요. (건물 쪽을 보며) 이런 데도 학원 하면 장난 아니죠? 그래도 사교육이 좋긴 좋아요, 불황도 없고.
    효진 학원도 아니고 조그만 공부방인데요, 뭘. (경계하며 숨기듯) 친구가 원장이고 전 도와주는 수준이에요.
    경택 음, 밥 먹어야죠? 이 동네엔 뭐가 맛있으려나.

    효진이 망설이는 사이, 벌써 도로 쪽 자신의 승합차로 가는 경택.

    #17. 식당 / 밤

    대형 갈비식당 2층. 넓은 홀과 달리 내부는 썰렁하다.
    코너 자리에 앉은 효진과 경택.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고기를 놔두고 간다.
    불판 옆에 놓여있는 붉은 고기 접시.
    효진이 어색하게 집게를 들어 고기를 불판 위에 올려놓는다.

    경택 (불판 쪽에 손을 갖다 대며) 아직요. 좀 있다가 올리셔야 하는데. 그럼 눌러 붙어서.불이 너무 약하네. (젓가락으로 얼른 고기를 다시 접시에 올려놓는) 이모!
    효진 (조심스럽게 집게를 내려놓는) ...

    CUT TO

    경택 형이 그때 나보고 넌 제발 건강도 챙기고 즐기며 살아라 어쩌네 그렇게 잔소리를 하더니만, 자기가 먼저 참... (짧은 한숨)

    효진, 경택의 얘기와는 상관없이 불판 위의 고기를 굽는데 열중이다.
    가위로 고기를 자르는데 가위질이 서툴다.

    경택 좀 더 있어요. 익어야 잘리지. 형수님, 혼자 산다고 고기 안 드시나보다. 하긴 형님 있을 땐 몰라도 혼자 있으면 요런 데 잘 안 오게 되지. (능글맞은 웃음)
    효진 ... (집게와 가위를 내려놓는)
    경택 여기 고기가 (힘들게 가위로 자르며) 좀 거시기 허네, 사람이 없는 이유가 있어. 요샌 요런 고기 갖다 놓고는 장사 못하는데.
    효진 저... 근데 하실 말씀이 있다고.
    경택 ... 한잔 하실래요? 맥주 드시죠?
    효진 차 가지고 오셨잖아요.
    경택 대리 부르죠, 뭐. 서울까지. (웃음) 딱 한잔만 먹으면 돼요. 이모!

    능숙하게 혼자 알아서 고기를 잘 먹는 경택.
    하지만 효진은 거의 먹지 않는다.

    #18. 시내버스 안 / 밤

    효진, 좌석버스 창가자리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있다.
    멍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다가 버스 벨을 누른다.
    잠시 후 버스 뒷문이 열리고,

    기사(소리) 안 내려요?
    효진 ?
    기사 아줌마, 아까 벨 눌렀잖아요.
    효진 아... (내가 벨을 왜 눌렀을까 하는 표정) 아니에요. 죄송해요.

    백미러로 보이는 기사의 뚱한 얼굴.
    창밖을 보며 피곤한 얼굴로 생각에 빠진 효진.

    경택(소리) 그쪽서 연락이 왔어요. 종욱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던 외할머니가 치매가 걸려서 요양원에 있나보더라고.

    #19. 몽타쥬 - 효진 집, 종욱 외갓집 / 밤

    경택(소리) (계속) 형님 살아 계실 때야 외할머니가 이왕 거기서 계속 맡아줬지만, 지금은 이제 그럴 수도 없고... 애는 엄마가 키우는 게 맞지 않나... 얘기가 그렇게 (결론이) 났어요. 아닌 말로 종욱이 고아는 아니잖아요.

    -효진의 집
    효진,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입구에 주저앉는다.
    현관에 있는 (남자)구두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 잠시 후 현관 센서등이 저절로 꺼진다.

    -종욱 외갓집
    종욱, 집에 들어와 냉장고에서 김치 통을 꺼내 김치만 한쪽 맨입으로 먹는다.
    할머니 방에 드러누워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종욱.

    #20. 효진의 차 안 (고속도로 위) / 낮

    효진, 운전 도중 하품을 하며 어딘가 전화를 시도 중. 신호음만 가고 받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효진의 차.

    #21. 종욱 외갓집 / 낮

    지방 소도시(정읍시) 외곽 작은 연립주택.
    1층 한 현관 앞에 주미(16세, 여)가 벨을 누르며 인기척을 살핀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바깥에서 효진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효진(통화) ... 네. 종욱도 통화가 안 되고, 집에 아무도 없어요. ... 주소는 맞아요, 알려준 대로 내비 찍고 왔어요. (통화를 하다가 현관 앞에 있는 주미를 보는) 네, 네.
    CUT TO
    연립주택을 나오는 주미.

    효진 얘 잠시만,
    주미 (효진을 쳐다보는) ?
    효진 혹시 이 집 살아?
    주미 친구 집인데요. 왜요?
    효진 종욱이 친구?
    주미 누구세요?
    효진 응? ... 친척인데, 너 종욱이 지금 어딨는지 아니?
    주미 몰라요, 어딨는지. 내 문자도 완전 다 씹고. (혼잣말처럼) 에이, 다 늙어서 가출이 뭐야.
    효진 가출? ... 혹시 너 나중에 종욱이랑 만나면 나한테 연락 좀 줄래? (휴대폰을 꺼내어 번호를 찍어 주미에게 보여주는) 이 번호거든.
    주미 (머뭇거리다 휴대폰에 효진의 번호를 찍는)
    효진 나, 종욱이... 이모야. 꼭 연락 줘.
    주미 (어리둥절한) 네.

    #22. 반찬가게 / 낮

    대전 시내 주택가 상가 내 반찬가게. 정희(38, 여)가 안에서 반찬 팩을 포장 중이다.

    효진 (가게에 들어오며) 언니!
    정희 어머, 이게 누구야.
    효진 지나다 들렸어. 엄마는?
    정희 이모, 요 앞 체험관 가셨어. 이여사님 토욜마다 가잖아. (웃음)
    효진 (가게 안, 작은 탁자에 앉는) 그래서 전화를 안 받는구나. 내가 안 받으면 그렇게 난리치면서.
    정희 뭐 좀 마실래?
    효진 아니, 그냥 물 한잔 줘요.
    정희 식혜 줄까? (효진을 보며) 어쩐 일이야, 진짜.
    효진 (진열대에 있는 반찬을 이쑤시개로 먹어보는) 볼일이 있어 어디 갔다가 지나다 들렀어요.
    정희 배고파? 밥 먹을래?
    효진 아니, 먹고 왔어. 맛이나 보려고. (가게를 둘러보며) 언니 여기는 가게 세 어떻게 해?
    정희 응?
    효진 여기는 세 별로 안 비싸지?
    정희 어, 여긴 크게 부담은 없어. 주인이 우리 교회 장로님이라서. 이모랑도 잘 알고. (식혜를 따라서 주는)
    효진 좋겠다, 잘됐네. 장사는 잘 되지?
    정희 그럭저럭. 넌, 어떻게 잘 지내? 참 학원 이사 할 거라면서?
    효진 어? 응. 생각 중인데... 이래저래 피곤하네.
    정희 그래, 얼굴이 좀 안좋네. (휴대폰이 울리는) 어, 이모 전화다. (통화) 이모! 효진이 왔어요.

    #23. 명자 집 (부엌, 방, 현관) / 저녁

    -부엌
    효진이 국을 끓이고 있고 옆에서 엄마의 수다가 이어진다.
    효진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묵묵히 듣는 중.

    명자 ... 그래서 그 집 아들내미가 이혼을 했는데, 진짜 내가 봐도 그 며느리가 너무 했더라. 지가 뭐가 잘한 게 있다고... (효진이 두부 써는 걸 보며) 국을 끓이는데 두부를 그렇게 썰면 우야노.
    효진 왜? (그냥 두부를 넣는)
    명자 국에는 두부가 작게 들어가야지. 납작하이 그게 찌개도 아니고. 쯧.
    효진 엄마, 나도 생각이 있어. 국이든 찌개든 두부가 무슨 상관이야.
    명자 야가 갑자기 왠 짜증이고? 원,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네.

    -방
    명자와 효진, 별다른 얘기 없이 TV를 보며 저녁을 먹고 있다. TV에선 '사랑의 리퀘스트'같은 (독거노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다.

    명자 갸는 잘 있나?
    효진 누구?
    명자 누구긴, 백서방 아들내미. 저기 정읍서 산다고 안했나.
    효진 갑자기 왜?
    명자 우째 잘사나 싶어서. 저거 외할매랑 산다 했재?
    효진 ... 잘 있겠지. 어렸을 때부터 거기서 사는데 뭐.
    명자 몇 살이라고 했노? 외할매도 나이가 많을 긴데? 에휴, 얼마나 기가 찰고. 죽은 딸 외손자 거두고 사니...
    효진 엄마가 왜 그런 걱정을 해.
    명자 (눈치를 보는)
    효진 엄마, 돈 좀 있어?
    명자 내가 돈이 어딨노? 정희한테 받는 돈 얼마나 한다고. 근데 돈은 와(왜)?
    효진 아냐, 됐어. 알았어. ... 엄마, 정희 언니한테 내 얘기 좀 하지 마.
    명자 왜? 나 갸한테 니 얘기도 아무 것도 안했다. 니 결혼하고 그렇게 된 거 정희 갸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다 가족 아니가.
    효진 몰라. 가뜩이나 엄마, 언니랑 같이 있는 거도 미안하고 그런데.
    명자 니가 왜 미안해하노. 정희야 좋지 뭐, 내가 반찬 다 가르쳐주지, 장사해주지. 내가 정희보고 그랬다, 닌 결혼하지 말고 돈 많이 벌어서, 혼자 재밌게 살라고. 니도 백서방이랑 결혼만 안했어도, 쯧. 결혼 안한다고 그러더니만 애 있는 남자 만나가지고, 으이구...
    효진 엄만 안 지겨워? 그 얘긴 좀 이제 그만해.
    명자 딴 집처럼 시집가라고 노래 부른 것도 아니고, 니는 능력 있으니 엄마처럼 후회 말고 천천히 해라 그리 했는데도.
    효진 엄마, 엄마는 왜 내가 하는 일에 모두 못마땅한 거야?
    명자 누가 못마땅하다드나?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니가 덜컥 일찍 생기지 않았어도 그래 안 살았다. 내가 뭐랬노? 응, 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효진 앞에서 끝 모를 한탄을 이어가는 명자.
    효진은 지쳐서 그냥 멍하니 고개를 돌려 TV를 보고 있다.

    -현관

    명자 자고 가라. 낼 일요일인데.
    효진 됐어, 정리 할 것도 많고.
    명자 정희한테 반찬 좀 가져오라고 했는데 그거 갖고 가지. 야는 왜 이리 늦노.
    효진 요즘 집에서 밥도 잘 안 먹어.
    명자 조만간 내가 집에 갈 때 갖고 가꾸마.
    효진 됐어. 나, 갈게.

    #24. 동네 길 / 낮

    -주미네 집 앞
    종욱, 땅을 쳐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주미가 개(보리)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온다.

    -슈퍼 앞
    보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종욱.

    주미 (슈퍼를 나오다) 야, 보리! 어째 너 나보다 종욱을 더 좋아한다? (종욱에게) 누가 보면 니가 아빠인줄 알겠다.

    -동네천변 길
    종욱이 익숙하게 보리를 산책시키며 주미와 나란히 걷는 중.
    주미, 묶음 포장된 야쿠르트에 차례로 빨대를 꽂아 마시며

    주미 캬...
    종욱 (걱정하듯) 또 술 마셨냐?
    주미 (고개를 끄덕이는) 행자랑 치킨 먹다가. 목만 축이자는 게 쩝.넌 어디 갔었냐?
    종욱 ...
    주미 아주 얌전한 고양이가... 응, 그 뭐냐? 암튼 학교는 안 올 거야? 이제 방학이잖아.
    종욱 ...
    주미 애냐? 가출하고 그러게.
    종욱 가출 아니라니까.
    주미 (째려보는) 너 없어지니까 찾는 사람 나밖에 없지?참, 너희 이모가 너 찾아 왔더라.
    종욱 이모?
    주미 어제 너희 집 갔을 때 이모라면서 너 보면 연락달래.
    종욱 (나) 이모 없어.
    주미 그렇게 집에 (식구) 아무도 없으면서 무슨 가출이야? 가출 선배로 말하는 건데, 그냥 수업은 째도 잠은 집에서 자. (돈을 건네는) 자. 이거 밖에 없어, 나도.
    종욱 (돈을 받는) 꼭 갚을게.
    주미 어디 쓰는지 말 안 해줘? 이유나 알자.
    종욱 ... 누구 좀 찾느라고.
    주미 누구?
    종욱 (머뭇거리는)

    #25. 효진 집 / 낮

    환한 대낮. 효진, 휴대폰 벨이 울리는지도 모른 채 계속 잔다.
    한참 만에 비몽사몽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 효진.

    효진(통화) 네, 정우씨. ... 아, 맞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자다가. ... 아뇨, 아뇨. 일어났어요. 네? 지금요? 아, 안되는데. 담에 봐요. ... 미안해요, 어제 약속도 옮겨놓고... 네.

    다시 쓰러지듯 눕는 효진.

    #26. 공부방 / 낮

    한 초등학생이 문제집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
    문제가 전혀 안 풀리는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아이.
    효진은 역시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아이 선생님.
    효진 ?
    아이 있잖아요... 이상해요.
    효진 왜?
    아이 내가요, 옛날엔 안 그랬거든요.
    효진 응.
    아이 근데요, 이걸 풀고 있으니 막 속이 울렁거려요.
    효진 ... 그래, 하지 마. (숨을 내쉬며) 다 잘먹고 잘살려고 하는 짓인데 이거 풀면서 속이 미식거리면 안되지. 풀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해.
    아이 (잠시 고민하다가) 선생님.
    효진 왜?
    아이 (눈치를 보며) 저 지금 포기하는 거예요?
    효진 (멍한 표정) 아니야. 진짜 하지 마. 괜찮아. (책을 덮는)

    #27. 공부방 / 저녁

    -공부방 화장실
    화장실 안 세면대. 아픈 기색의 효진, 호흡을 고르며 저린 팔을 주무르고 있다.
    교복을 입은 나영이 화장실을 들어오려다가 그녀와 마주치더니 그냥 나가버린다.

    -공부방 입구.
    교재를 정리 중인 미란한테 인사하며 나가는 나영, 들어오던 효진을 보지만 모르는 척 나간다.
    효진, 어이없다는 표정.

    화이트보드를 지우고 있는 미란.
    효진이 다가와서 털썩 앉는다.

    효진 나 학원 정리할까봐.
    미란 딴 곳 알아본다더니. 왜 마땅한 데 없어?
    효진 그냥... 이제 회원 수도 더 이상 안 늘고 오히려 주는데다가. 너도 곧 아기 낳고 그래야 하니까 이참에...
    미란 내 핑계는. 난 괜찮아.
    효진 이 일도 나랑 안 맞는 거 같고. 이제 곧 애들 방학이잖아. 여기도 빼줘야 하니까 지금이 나은 거 같아.
    미란 어째 임신한 나보다 니가 더 우울증인거 같냐.
    효진 ...
    미란 그래, 좀 쉬어. 너도 지쳤나보다. 힘이라면 남아돌던 애가 기운이 없네.너 아직도... 오빠 일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효진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 뭘.
    미란 난 또. 참, 혹시 너 걔 키우기로 한 거야?
    효진 (정색하며) 아니.
    미란 그럼 어떻게 하기로 했어? 걔네 외할머니 요양원 비용이다 뭐다 해서 그 쪽 집 빼야 된다며.
    효진 몰라, 저 쪽서 알아서 하겠지. ... 그 애 작은아버지한테 얘기해야지. 나도 키울 상황이 아니라고.
    미란 그래, 확실히 얘기해.

    #28. 동네 치킨집 / 밤

    정우, 치킨에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효진이 들어와 정우 옆에 앉는다.

    정우 아니, 왜 이렇게 바빠요? 효진씨 상담 아니면 만나기 진짜 힘든 사람이구나.
    효진 일들이 좀 있어서...
    정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효진 별 일 아녜요.
    정우 (이거) 오늘 상담 아닌데... (멋 적은 웃음) 혹시 저녁은요? 맥주 한잔 하실래요.
    효진 그냥 이거 먹죠 뭐. (정우가 벨을 눌러 정우가 맥주한잔을 시키는)근데 혼자서 이러고 먹고 있었어요? (외외라는 듯) 웃기다.
    정우 왜요? 전 만날 커피 마시는 줄 알았어요?
    효진 (어이없어 피식 웃는)
    아줌마 어머, 선생님.

    맥주를 갖다 준 아줌마가 효진을 보고 아는 척을 한다.

    아줌마 저, 지남이 엄마에요. 그때 학원에서 뵀는데.
    효진 (어색한) 아, 네 안녕하세요.
    아줌마 이렇게 우리 가게에서 뵐 줄은 몰랐네. (웃음)
    효진 아, 네.
    아줌마 (효진과 정우를 번갈아보고는) 필요한 거 있음 말씀주세요.

    CUT TO
    맥주를 들이키는 효진.

    정우 치킨도 좀 먹어요. 효진씨, 진짜 무슨 일 있구나.
    효진 그냥 입맛이 없네요.
    정우 그게 다 마음이 문제에요. 몸 안 좋고 피곤하고 그런 거 다. 효진 ... 정우씨는 하는 일 재밌어요?
    정우 커피 볶는 거요? 별로요, 그냥 누나 일 돕는 거죠.
    효진 공부하는 거요.
    정우 아, (웃음) 원래 이쪽 공부 크게 관심 없었어요. 내가 공부랑도 거리가 멀고. 지금이야 하다 보니 재밌어서도 하고 있지만.
    효진 왜? 정우씨랑 잘 어울리는데.
    정우 커피 볶고 내리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런 남자는 속도 깊고 뭔가 있어 보이나 봐요. 나도 첨엔 그 폼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효진 (웃음) 뭐야, 순 폼이었네. 엉터리였구나. 상담 그만 해야겠다.
    정우 (웃음) 네, 관둬요. ... 나한테 상담 받지 말고, 연애나 하죠 우리. 이것도 공짜로 해줄게요.
    효진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후 맥주를 들이키는) 연애가 공짜인줄 아세요? 마음은 공짜가 아니에요.
    정우 나도 공짜 아니었는데. 원래 상담자 역할 하는 사람은 내담자랑 서로 감정 생기고 좋아하면 안돼요.
    효진 (당황하는 표정)

    #29. 공부방 / 낮

    공부방을 들어오는 상가 관리인(50대, 남).
    미란, 컵을 들고 냉온수기 앞을 지나다가 관리인을 본다.

    관리 오늘은 여기도 한가하시네. 저기 계단 밑에 애들 낙서 아직도 안 지우셨어, 응?
    미란 (심드렁) 어차피 재건축하잖아요.
    관리 보기 민망해서 그렇지. 원장은 안 계신가? (서류를 들어 보이며) 이거 동의서 받아야 하는데.
    미란 아, 효진이 지금 어디 멀리 갔는데.
    관리 연락 한번 해보슈. 급한 건데.

    CUT TO
    상담실 안에서 통화중인 미란.

    미란(통화) ... 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 뭐 전학? 중학교 졸업은 거기서 하라고 그러지. ... 가출 했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 전학하면 그런 애들은 더 삐뚤어진다.... 너, 착한 척하지 말고 무조건 NO라고 말해. ... 그래, 그래 잘 마무리 하고. 응.

    #30. 중학교 (교무실, 화장실) / 낮

    효진의 차가 정읍 시내 한 중학교 운동장에 선다.

    교무실로 들어서는 효진.
    교무실 안쪽에 종욱과 경택, 그리고 담임이 앉아있다.

    경택 아, 형수님 저기 오네.

    효진, 한눈에 (성장한) 종욱을 알아본다.

    CUT TO
    담임이 전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효진은 가만히 듣고 있다.
    그 옆에 종욱, 테이블 위만 멍하니 보고 있다.

    경택 너 임마, 이제 청주가면 착실히 공부 잘해. (효진을 한번 보고는) 속 썩이지 말고.

    -화장실
    효진, 세면대에 손을 씻고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안으로 한 남자(경수, 40. 효진의 전 남편)와 눈이 마주친다.
    뒤를 돌아보자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

    화장실을 나온 효진,
    교무실 구석에 혼자 등을 구부린 채 앉아있는 종욱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31. 효진 집 / 밤

    불 꺼진 집에 들어오는 효진. 안쪽 작은방 문을 열어 본다. 창고처럼 옷가지랑 박스 등이 잔뜩 쌓여있다.
    효진, 현관에 늘 놓여있는 (남자)구두를 바라본다.

    #32. 과거 (효진 회상) - 효진 집 / 오후

    효진 오빠 뭐해?

    방 한구석에서 동그랗게 등을 구부리고 발톱을 깎고 있는 경수(30대 후반).

    효진 오빠는 꼭 그렇게 발톱을 깎더라. 뭔가 숨기는 사람처럼.
    경수 (뒤돌아보며 그냥 웃는)
    효진 고양이 같애.

    CUT TO
    효진의 발톱을 깎아주고 있는 경수.

    효진 아야, 조심해.

    - 현관 (#31.의)
    효진, 남편의 구두를 신발장 안에 넣는다.

    #33. 청주 버스터미널 / 오후

    북적이는 대합실. 종욱, 휴대폰 벨이 울리는지도 모른채 혼자 꾸벅꾸벅 졸고 있다.
    효진, 휴대폰을 든 채 두리번거리다가 졸고 있는 종욱을 발견하고 다가간다.

    #34. 효진의 차 안 / 오후

    효진 차 막혀서 늦을 줄 알았는데, 금방 왔네.
    효진, 조수석에 앉은 종욱에게 말을 건네지만 종욱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고 있다.

    효진 짐은 보낸 게 다야? 택배로 온 거 보니까 얼마 없던데.
    종욱 ... 네.
    효진 거기 친구들이랑 헤어져서 서운하지. 방학이고 그래서 친구들한테 작별 인사도 다 못했겠다야. 저녁은, 어디서 먹고 갈래?
    종욱 ...

    #35. 효진 집 / 저녁

    부엌 식탁. 먹던 김치와 반찬통 채 그대로 올려있는 평범한 저녁 식탁.

    효진 특별히 못 먹는 거 있어?
    종욱 없어요.
    효진 다행이네. 중학교는 얼마 안다녀도 되니까, 교복은 중고로 사자. 괜찮지?
    종욱 네.

    효진 휴대폰 벨소리. 효진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는다.

    효진(통화) 응, 엄마. 왜? 수요일? (종욱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니, 됐어... 반찬 다 있어. 괜찮아...

    #36. 공부방 / 낮

    미란과 효진, 작은 테이블에서 배달 분식을 먹고 있는 중.

    미란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진짜 누가 양자리 아니랄까봐. 앞으로 어떡하려고.
    효진 어찌 되겠지. 지금 중학생 애들도 (내가) 가르치잖아.
    미란 그거랑 다르지. 앞으로 평생 걔랑 살 거야? 이제 니가 다 책임 져야 돼.
    효진 한 스물 되면 독립시키지 뭐.
    미란 참 쉽게도 말한다. 만사가 다 귀찮다 어쩐다, 안 맡겠다고 하더니. 너 참 대책 없다.
    효진 그날 종욱 보는데 걔 모습에서 오빠가 보이더라. 오빠랑 종욱 첨 봤을 때가 걔 오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많이 컸더라구. 예전엔 몰랐는데 오빠랑 많이 닮은 거 있지.
    미란 친척들 중에 누가 걔를 맡을지 물어보면 당연히 네가 정답이지만, 반대로 누가 그 아이를 양육해서는 안 되는가 따져보면 그 것 역시 너야. (그리고) 애 키울 돈은? 이제 학원도 닫으면 어쩌려고. 너 혼자 어떻게 키워? (고개를 흔들며) 난 모르겠다. 암튼 너 대단해.
    효진 그동안 학원에서 있으라고 할까? 공부도 가르치고...
    미란 얼씨구.
    효진 너도 걔 공부 좀 봐줄래?
    미란 됐어. 난 여기 마무리되면 몇 명 애들 공부 계속 봐달라고 해서, 우리집서 애들 봐주려고.
    효진 집에서?
    미란 그이 뭐 맨날 야근이다 잠복이다 해서 집에 아무도 없잖아. 출산 전까지는 하는 데까지 해보려고. 미리 기저귀 값 벌어놔야지.
    효진 (심드렁) 그래?

    #37. 효진 집 (거실, 작은방) / 밤

    불이 꺼진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종욱.
    효진이 집으로 들어오며 불을 켠다.
    종욱, 효진이 들어오자 의식하며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된다.

    효진 밥은 먹었어?
    종욱 네.
    효진 뭐?
    종욱 라면...

    효진, 냉장고 앞에서 물을 마시다가 싱크대에 쌓아둔 그릇에 눈이 간다.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바로 설거지를 시작한다.
    종욱, 설거지 소리가 들리자 불편한지 TV를 끄고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효진 티비 봐.
    종욱 (들어가며) 다 봤어요.

    -작은방
    팔을 개고 누워 멍하니 있는 종욱.
    효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놀라서 일어난다.

    효진 뭐... 해?
    종욱 그냥 있는데요...
    효진 (말을 할까 말까 머뭇거리다가) 우리 얘기 좀 하자.

    CUT TO
    거실에 앉아 얘기를 하는 두 사람.

    효진 이제 우리 같이 사는 거야. 같이 살려면 규칙이 있어야 해. 각자.일단 우리 몇 가지 좀 정하자. 나 없을 땐 니가 먹은 건 니가 설거지 좀 했으면 하거든.
    종욱 아, 그거... 티비 다 보고 하려고 했는데.
    효진 그래, 다음부터 그렇게 하고. 외할머니랑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제부터 너 보호자야. 알겠지?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나도 너 존중해줄 테니까, 너도 나 따라줄래?
    종욱 (바닥을 보며) ...
    효진 대답 좀 해라야.
    종욱 네.
    효진 그래. 너도 불편한 거나 필요한 거 있음 말하고. 보자, 또 얘기할 거 없나. 참, 현관문 비밀번호는 3674거든. 앞뒤로 별표 누르고.

    #38. 효진 집 (화장실) / 새벽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로 가는 효진.
    변기에 앉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일어선다.
    올려져있는 변기커버. 짧게 한숨을 내쉬고 변기커버를 내리고 다시 앉는다.

    #39. 효진 집 (거실, 작은방) / 오전

    -거실
    효진, PC가 놓여있는 상 앞에 앉아서 끙끙대고 있다.

    -작은방
    효진이 방문을 확 열어젖히자 누워 있다 깜짝 놀라는 종욱.

    효진 저기 컴퓨터 너 혹시...
    종욱 (정색) 저 컴퓨터 손 안댔어요.
    효진 그게 아니라, 컴퓨터가 이상한데, 한번 봐 줄래?

    CUT TO
    PC상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종욱.

    효진 고장난 거야?
    종욱 윈도우 다시 까세요.
    효진 (불안) 다 지워지는 거 아냐?
    종욱 그거만 다시 깔면 돼요.
    효진 그래? 그럼 니가 고칠 수 있는 거야?
    종욱 윈도우 CD 있어요?
    효진 응? 뭐?
    종욱 (한숨) 이거 컴퓨터 살 때 받은 CD나 그런 거...

    이때 현관 벨소리,

    효진 누구세요?
    명자(소리) 효진아, 내다.
    효진 (놀라며 현관으로 가는) 엄마!

    CUT TO
    명자, 부엌에서 가져온 반찬을 옮겨 담고 있다.
    냉장고 안 오래된 반찬을 꺼내며 잔소리를 이어가는 그녀.

    명자 아이고 이봐라. 이거 다 쉬어빠졌다. 이게 언제 준건데 아직도 있노.
    효진 그러니까, 반찬 다 있다고 했잖아. 왜 왔어.
    명자 내가 못 올 데 왔나. 집에서 밥도 안 해먹는가보네. 아이고.아침은?
    효진 아까 먹었어.
    명자 딱 보니 밥도 안 해먹은 얼굴이네, 이따 이거에다가 요거 넣고 끓여서 밥 해 묵자.
    효진 어휴, 밥은 무슨. 밥 생각 없어요.
    명자 니 밥도 안 해 먹재?
    효진 밥 해먹어, 엄마. 맨날 그놈의 밥, 밥.

    거실 한쪽에 쪼그려 앉아 PC에 윈도우를 설치 중인 종욱의 모습.

    명자 (종욱을 향해 눈짓을 주며) 쟈 혹시 갸 아니가?
    효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명자 (놀라) 쟈가 왜 여기 있노?
    효진 (한숨) 이따가 얘기할게.
    명자 (잠시 생각하다 언성을 높이며) 니 진짜! 야갸 진짜 큰일 날 애네.
    효진 왜 또 그래.

    종욱이 불편한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가 곧바로 집 밖으로 나간다.
    집 안에서 들려오는 효진과 엄마의 말다툼 소리.

    명자 니 미쳤나? 그러면 우짜노. 이게 진짜로!
    효진 왜? 내가 뭐 못할 짓 했어? 알아서 할테니까 걱정 마.
    명자 머리 검은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거 아이다. 효진 ...
    명자 이놈의 가시나가, 니 왜 엄마한테 아무 말도 안했노?
    효진 내 일이니까.
    명자 내 일?
    효진 엄마한테 무슨 얘기를 해? 항상 나만 다 틀렸고, 부족하고, 뭘 모른다고 하잖아. 엄마한테는 모든 일이 다 잘 되고 있다고만 얘기해야 돼. 왠줄 알아? 다른 딸들처럼 엄마한테 조금이라도 걱정거리 말하면 엄마는 그 때부터 그러게 내가 뭐랬냐, 이러면서 날 비난부터 하니까.
    명자 니 다른 건 모르겠고, 진짜 백서방 애랑 사는 건 아니다. 애도 저래 다 큰 애를 갖다가, 쯧쯧. 앞으로 니 인생을 생각해라. 응? 니 인생 다 포기하고 걔 뒤치다꺼리 하고 살기가?
    효진 왜? 엄마처럼 사는데.
    명자 ?
    효진 늘 나 때문에 포기한 게 한둘이 아니라며 노래 불렀잖아. 그 엄마에 그 딸이지 뭐. 나도 엄마처럼 살면 안 돼?
    명자 이게 말이라고! 그래, 내봐라. 내처럼 살고 싶나, 응? 닌 나처럼 되지 말라고...
    효진 (말을 자르며) 엄마, 엄마는 내가 생겨서 아빠랑 그렇게 산 게 아니라 엄만 엄마 능력이 거기까지였어. 나만 아니었으면 엄마 꿈 이뤘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그나마 아빠 같은 사람 만나 이렇게 잘 산거라고.
    명자 아이고, 내가 오늘 잘 못 왔네. 오늘따라 이상하게 올 때서부터 기분이 뭔가 안 좋다 했디만... 나, 간다.

    명자, 충격을 받았는지 주섬주섬 챙기며 집을 나간다.
    식탁에 털썩 주저앉는 효진. 엄마가 놔두고 간 휴대폰이 눈에 들어온다.

    #40. 효진 집 근처 / 낮

    종욱, 주택가 쌈지 놀이터 벤치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앉아있다.

    효진(소리) 엄마! 그렇게 갈 거야?

    골목길 쪽 티격태격하는 모녀를 보는 종욱의 시선.
    화가 난 명자가 앞서 가고 효진이 뒤를 따른다.

    #41. 효진 집 / 저녁

    PC상 앞에 앉아있는 효진. 종욱에게 문자를 보낸 뒤 마우스로 이것저것을 클릭해보면서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는 중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욱.

    효진 왔어? (모니터를 계속 보면서) 넌 문자에 답 좀 해.
    종욱 .... 네.
    효진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온 거야?
    종욱 그냥 이 주위에.
    효진 (모니터를 가리키며) 근데 이거 왜 이런 거야? 이상해졌어.
    종욱 (힐끗 보며) 업글했어요.
    효진 업그레이드? 더 불편해졌다야. 여기 이건 설정 어떻게 바꿔?
    종욱 (아무 말 없이 옆에 가서 그냥 시범)
    효진 뭐가 이렇게 어려워졌어?
    종욱 원래 그래요.
    효진 에휴, 적응해야겠네.

    CUT TO
    저녁 식탁. 오랜만에 반찬 종류가 제법 많다.
    밥을 먹고 있는 두 사람. 거실에 TV소리가 들리지만 정작 보지는 않는다.

    효진 낮엔 우리 학원에 있을래? 집에서 공부하기 좀 그렇잖아.
    종욱 ...
    효진 불편하면 도서관 같은 데 가도 되고. 여기서 뒤쪽으로 큰 길 따라가면 도서관 있거든. 거기 가서 공부하든지.
    종욱 네.
    효진 너 원래 그렇게 말이 없니? 편하게 대해.
    종욱 ... 저, 돈 좀 빌려주세요.
    효진 응? 얼마나? 그저께 용돈 줬잖아.
    종욱 ...
    효진 일단 써보고 부족하면 얘기 해. 맞춰 나가자.
    종욱 차비 때문에요.
    효진 ?
    종욱 할머니 보고 오려고요.
    효진 외할머니 요양원? ... 언제?
    종욱 내일이요.
    효진 혼자? 그냥 주말에 같이... (종욱을 살피는) 그래, 다녀와.

    #42. 정우의 카페 / 낮

    카페로 들어오는 효진.

    효진 언니!
    지원 어, 효진아. 웬일이야.
    효진 웬일은. 커피 마시러 왔어요.
    지원 안 그래도 요즘 너 뜸해서 뭔 일 있나 했지.

    CUT TO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받는 효진.

    지원 ... 잘 생각했어. 이제 일 쉬면서 천천히 한번 생각해봐.
    효진 모르겠어요. ... 정우씨는 어디 갔나 봐요?
    지원 어제 술 마셔서 오후에나 나오려는지. 쩝, 걘 팔자 좋지 뭐.
    효진 그럼 가볼게요, 언니.
    지원 벌써 가게?

    #43. 공부방 / 저녁

    공부방 출입문을 잠그는 효진.
    상가를 나오다가 상가 관리인과 마주친다.

    관리 오늘은 일찍 가시네.
    효진 아, 네. 방학이라.
    관리 2층 거기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진 문단속 확실히 해요. 이럴 때 도둑이 더 잘 들어. 요, 요기 양품점도 엊그제 왔다 가셨대.
    효진 저흰 가지고 갈 것도 없어요. (상가 앞에 있는 정우를 발견하는) 어, 정우씨.

    상가 앞에서 정우가 효진을 기다리고 있다.

    #44. 일식당 / 저녁

    일식 식당 겸 주점. 정우와 효진 앞 테이블에 맥주 한 병이 놓여있다.
    곧이어 음식을 놓고 가는 종업원.

    정우 어디에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요? 애인이라도 생겼나, 어서 먹어요.
    효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아, 아니요.
    정우 아까 가게 왔으면 연락하지 그랬어요.
    효진 (무심한) 그냥 커피 마시러 갔어요.
    정우 에이, 거짓말 마요. 나보러 왔죠?
    효진 (정우를 쳐다보며) 은근 뻔뻔하시구나.
    정우 맞잖아요.
    효진 커피도 마시고 싶고, 이것저것 얘기도 하고 싶고 해서 갔어요.남자친구 안 해줘도 상담은 계속 해도 되죠?
    정우 안되는데.
    효진 뭔가 그냥 털어놓고 싶을 때 있잖아요. 대상이 누구든 간에.
    정우 아무한테나?
    효진 아무에게는 아닌데, 또 누군가는 부담스럽고...
    정우 효진씨, 원하는 게 뭐에요?
    효진 네?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일도 그렇고. 저 뭘 하죠?
    정우 (웃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효진 요리를 해볼까... (그럼) 한식조리사 자격증부터 따야하나.
    정우 요리 잘해요?
    효진 아뇨, 별로. 엄마가 사촌언니랑 반찬가게 하는데, 엄마 데리고 같이 한번 해볼까. 아니다, 한식은 별로인데. 샤브샤브 같은 거 이런 게 조리도 간단하고 쉽지 않나?어때요?
    정우 쉬운 게 어딨어요. (심드렁) 뭐 한번 해보세요.
    효진 그 반응은 뭐에요?
    정우 아니, 왜 그러세요. 해보라는데.
    효진 상담이 아니니까, 사람이 다르네.
    정우 그러니까, 남자 친구 하라니까요.

    CUT TO
    식당에서 계산하고 나오는 정우.

    정우 2차 가야죠.
    효진 늦었는데, 저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집에 일도 좀 있고.
    정우 그럼 효진씨 집에 가서 2차?
    효진 (불편한) 담에 봐요. 그럼 갈게요.

    #45. 효진 집 / 밤, 아침

    -밤
    불 꺼진 집에 불을 켜고 들어오는 효진.
    작은방을 들여다보지만 아무도 없다. 걱정스런 얼굴로 종욱에게 문자를 보내는 그녀.

    -이튿날 아침
    효진, 현관에 놓인 신발을 확인하지만 어젯밤 그대로다.
    아무도 없는 작은방.

    #46. 쇼핑몰 / 낮

    유아복 코너에 있는 미란과 효진.

    효진 (휴대폰을 끊으며) 아, 얜 왜 연락을 안 받는 거야.
    미란 걔 아예 집 나간 거 아니야?가출 전적이 있다면서.
    효진 그때 그거야, 학교를 안간 거지. 가출 아니야. 그리고 지 물건 그대로 두고 갔어.
    미란 뭐 가출 하면 짐 다 싸들고 나가냐. 신경 꺼. 어디 잠시 바람이나 쐬고 들어오겠지 뭐. 다 큰 남자애를 뭘 걱정 하냐. (아기 옷을 보며) 아, 난 언제 요런 작은 애를 그렇게 다 키우냐.
    효진 (자조 섞인) 난 이런 거 없이 애 엄마가 됐네.

    #47. 다세대 주택 / 오후

    시골 외곽, 오래된 다세대 주택 복도.
    조금 열린 문 틈 사이로 한 아줌마가 밖에 있는 종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줌마에게 사진 등을 보여주는 종욱.
    주미가 계단 아래 난간에서 기다리고 있다.

    CUT TO
    다세대 주택을 나오는 종욱과 주미.

    주미 뭐래?
    종욱 앞 집 아줌마가 그러는데, 여행 갔대. 담 주 말이나 온다는데?
    주미 ... 여기 아니야. 니 엄마 여기 안살아.
    종욱 맞아.
    주미 이 집 주인 이름도 모르면서.
    종욱 주소는 맞다니까.
    주미 야, 주소는... 됐다, 됐어. 발 달린 사람이 어디든 안가냐.
    종욱 이사 왔다는 데가 여기라니까.

    #48. 지방 국도변 / 해질 무렵

    도로변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주미와 종욱.

    주미 나 다리 아파.
    종욱 아씨, 여긴 왜 이렇게 버스가 안 오냐.
    주미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종욱 미안. 조금만 더 가면 버스정류장 나올 거야. 좀 만 참자. 응?
    주미 아, 목도 마르고. 나 완전 춥고 배고파. 괜히 왔어, 잉. 나 요구르트 먹고 싶어.

    #49. 시골 모텔, 여관 / 밤

    -모텔 프론트에 서있는 종욱.

    사장 (아래 위를 훑어보며) 학생이지? 미성년자는 안 돼.

    밖에서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는 주미. 종욱, 낙담한 얼굴로 모텔을 나온다.

    -다른 장급 여관.
    밖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는 주미.
    종욱이 문을 열고 나온다.

    종욱 된대. 들어가자.

    주미, 지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종욱과 함께 여관으로 들어간다.

    #50. 효진 집 / 밤

    거실에서 경택과 통화 중인 효진.

    효진(통화) (떨리는 목소리) 전 그냥 늦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떡하죠. 거긴 정말 안 갔대요?
    경택(통화) 요양원에 전화해 보니까 안 왔대요. 아니, 애 혼자 그 먼데를 보내면 어떡해요. 거기가 어딘줄 알고. 차타고 가기도 힘든 덴데.
    효진(통화) 죄송해요.
    경택(통화) 어디 집히는 데 없어요?
    효진(통화) 모르겠어요. 돈도 얼마 안줬는데.
    경택(통화) 돈도 없으면서 이 자식은 어디 간 거야.

    좁은 거실을 오가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그녀.
    종욱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응답이 들릴 뿐이다.

    #51. 동네 파출소 / 밤

    경찰 ... 그건 실종신고를 말하는 거구요. 가출신고는요, 말 그대로 신고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가 나서서 찾아준다기보다 단속 같은 거 하다 발견되면 찾는 경우가 다에요. 일단 이름이랑 나이 등 말씀해주세요.
    효진 김효진, 서른 두살이요.
    경찰 (효진을 쳐다보는) 본인 말고, 가출자 이름이요.
    효진 아, 이름은 백종욱고요, 나이는 중3이니까... 열여섯 쯤 됐어요.
    경찰 생년월일을 말씀해주세요.
    효진 그게... (모른다)
    경찰 신고자 분이랑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효진 (망설이는)
    경찰 직계 가족이세요?
    효진 (어렵게) 아들인데요,

    - 파출소 앞 거리

    효진(통화) 응, 방금 가출신고 했어. ... 어, 그렇지 뭐. 미란아 그래서 말인데 너희 신랑한테 좀 말해줄 수 있어?... 아무래도 그냥 접수만 하는 것 같더라고. ...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 한번 알아봐 줄래? 부탁할게, 응.

    #52. 시골 도로 / 낮

    -시골 작은 슈퍼 앞
    주미가 간이의자에 앉아 야쿠르트를 빨대로 마시며 등본 같은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주미 '무단전출 직권말소'... 직권말소가 뭐야?
    종욱 몰라.
    주미 말소... 이런 거는, 없다는 거 아냐? 죽었나?그냥 포기하자, 응? 만나봐야 뭐 할 건데. 같이 살 거야?
    종욱 (귀찮은 표정) 조용히 좀 해줄래?

    -시골 읍내 도로를 걷고 있는 둘.

    주미 그 젊은 아줌마 너한테 잘해줘?
    종욱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빠 애인이지 뭐.
    주미 아빠랑 결혼 했으니까 니 엄마잖아. ... 그 아줌마 몇 살이야?
    종욱 아, 진짜!
    주미 (삐죽거리는)
    종욱 빨리 돈이나 벌어서 나오고 싶다.

    이때 주미의 휴대폰 문자 알림 소리.

    주미 (문자를 확인하며) 나와서 뭐하게. 뭐해서 돈 벌려고?
    종욱 (혼잣말처럼) 배달하다가 돈 좀 모으고 그러다 나중에 식당 차려서 근근이 먹고 살면 되지.
    주미 정신 차려.
    종욱 근근이 먹고 사는 게 내 꿈이야.
    주미 (휴대폰 문자를 연신 주고받으며) 아, 배터리...
    종욱 (주미 휴대폰을 보며) 누구야?
    주미 아는 오빠.
    종욱 오빠?
    주미 있어. 제일고.
    종욱 (휴대폰을 훔쳐보려고 하는)
    주미 뭘 봐. 에이씨, 배터리 나갔네.

    괜히 돌을 걷어차는 종욱.

    종욱 너 돈 없냐? 있음 빌려줘.
    주미 당근 없지. 집에 전화해서 달래 봐.
    종욱 됐어.
    주미 돌아갈 차비는 어떡하려고! 넌 무슨 애가 대책도 없이 그러냐?(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 야, 비 온다. 에이씨.

    #53. 시골 교회 / 낮 (비)

    작은 시골 교회 예배당 안.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고, 종욱이 긴 의자에 누워서 쿨쿨 정신없이 자고 있다.
    잠든 종욱 몰래 그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는 주미.

    #54. 효진 집 / 낮

    미란과 전화 통화 중인 효진.

    효진(통화) 어떻게 좀 알아봤어? 뭐래?
    미란(통화) 응 말해봤는데, 그게... 뭐라더라, 14세미만이나 여자는 바로 실종처리 돼서 추적하고 그렇게 처리 가능한데... 남자애니까 일단 좀 기다려보는 게 어떨까 하더라고. 요즘은 그런 애들이 워낙 많대. 연락은 (없어)?
    효진(통화) 문자도 보내고 다 했는데, 꺼놨는지 안 받아.
    미란(통화) 뭐 말하고 나간 거니까 걱정 마. 무슨 일이야 있겠냐?
    효진(통화) 내가 걔한테 넘 불편하게 했나. 맘에 걸려.
    미란(통화) 뭐라고 했는데?
    효진(통화) 아니, 나도 걔랑 하루 종일 있으려니까 좀 불편하더라구. 그래서 어디 좀 나가서 공부할 데 알아보라고 얘기했는데... (중간에 통화중 대기음) 미란아, 잠시만!

    효진, 통화중 대기음을 듣고 발신자를 확인하는데. 종욱이다.

    효진(통화) 야, 너 어디야!
    주미(통화) 여보세요?
    효진(통화) 누구세요?
    주미(통화) 저, 종욱 친군데요...

    #55. 시골 농협 / 오후

    ATM 기기에서 돈을 인출하는 주미.
    뒤로 종욱이 바깥을 보며 서있다.

    #56. 효진 집 (거실, 방, 화장실) / 밤 (비)

    현관문 앞에 서있는 효진.
    종욱이 어색해하며 들어온다.

    효진 너, 어디 갔다 왔어?
    종욱 ...
    효진 지금까지 어디 있다가 온 거야?말해봐. 인상만 쓰지 말고.
    종욱 ...
    효진 응?
    종욱 (한숨만 내쉬는)
    효진 너 지금 시위하자는 거야?
    종욱 친구 만나고 왔어요.
    효진 내가 친구 만나러 간다면 안 보내줘? 왜 거짓말을 해?
    종욱 ... 죄송해요.
    효진 너 앞으로, 어디 갈 때 어디 가는지 꼭 말하고 가. 경찰에 신고까지 했잖아. 문자도 아무리 늦어도 꼭 답변 하고. 알겠지?
    종욱 ...
    효진 대답 좀 해라, 기다리다 숨 넘어 가겠다.
    종욱 네.
    효진 (종욱을 훑어보며) 씻어.

    -효진의 방
    효진,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한다. 창밖 빗소리에 뒤척이다가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작은방
    불 꺼진 좁은 방안에 눈을 뜬 채로 누워있는 종욱.

    -화장실
    효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변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혈을 했는지 변기에 피가 떨어져있고, 그녀의 손에 있는 피로 물든 휴지.

    #57. 병원 / 낮

    -산부인과 병원 대기실
    임산부들 사이에 걱정스런 얼굴로 앉아있는 효진.

    -다른 병원 내과 진찰실

    의사 ... (웃음) 갱년기는 아녜요. 나이가 몇인데. 갑상선기능저하증이네요. 산부인과서 이상이 없었던 건 갑상선 문제라서 그래요.갑상선 그게 고장 나면 그렇게 생리주기도 불규칙해지고 과다하게 하기도 합니다.늘 피로하고 짜증에, 잘 붓고 추위 타고 그러죠? 그거 다 저하증 증세거든요,
    효진 그럼 수술 같은 걸... 해야 하나요?
    의사 저하증은 약만 잘 챙겨먹으면 되고요. 일단 약 처방해드릴게요. 걱정 마시고 병원 계속 오세요.

    #58. 공원 / 저녁

    정우와 효진, 시내 무심천 산책로를 걷고 있다.

    정우 (혼자 즐거운)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 중에 한 남자 말투가 진짜 버터발음이에요. 그거 알죠? 외국인이 우리말 하는 느낌. 난 무슨 유학 갔다 온 티 내나 했는데 알고 보니 입양됐다가 지금은 여기서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효진 (무표정) 네...
    정우 왜 한국 와서 사나 몰라. 그냥 좋은 미국서 살지. 난 어릴 때 TV에서 잘 사는 나라 입양된 사람들 보면 부러웠어요. 효진씬 그런 거 없었어요?
    효진 입양아가 부러웠다고요?
    정우 차라리 나도 저런 나라에 부잣집에 입양이라도 됐으면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경쟁하며안 살텐데, 좋겠다 그런 거? 그래서 난 왜 엄마 찾아 여기 오는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 나 같으면 모른 척 잘 살 덴데.
    효진 그들도 어려움이 많았겠죠, 거기서. 누구나 자기가 태어난 나라나 엄마에 대해선 궁금해하니까요.
    정우 모국이나 엄마가 그렇게 중요한가.

    강아지와 산책 중인 한 여자가 앞서 가는 강아지에게 "엄마랑 같이 가야지!" 부르며 지나간다.

    정우 봐요. 강아지보고도 내 새끼, 엄마라고 하잖아요. (웃음)
    효진 (조금 불편한 기색)
    정우 효진씨, 피곤해요?
    효진 ...
    정우 무슨 문제 있어요?
    효진 문제라면 많죠, 저.
    정우 말해 봐요.
    효진 됐어요.
    정우 (혼잣말처럼) 효진씨 문제라면 내가 잘 아는데.
    효진 (기분이 나쁜) 뭐가 문젠데요?
    정우 (농담처럼) 효진씨는 자기 문제가 뭔지 모르는 게 문제에요.
    효진 상담 몇 번 하고 심리 수업 몇 번 들었다고 사람 그렇게 함부로 아는 척, 평가 하지 마세요.
    정우 아니,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알았어요. 미안해요.
    효진 나에 대해서 잘 알아요? 몇 번 얘기 나누니까 사람 다 아는 것 같죠?
    정우 잘 몰라요. 그러니까 앞으로 한번 알아가자고요.
    효진 저 결혼 했어요. 남편도 있었고, 아이도 있어요. 몰랐죠? 이런 게 진짜에요.
    정우 ... 왜 다 얘기 안했어요?
    효진 (당신한테) 다 얘기해야 돼요?
    정우 그런 게 아니라, 상담할 때 왜 다 솔직히 얘기 안했냐고요. (상담이) 장난이었어요?
    효진 언제는 상담이 아니라면서요!

    화가 난 효진이, 멍하니 서있는 정우를 두고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효진 그때 그랬죠? 마음이 다 문제라고.저는요, 마음이 원인이 아니라 몸이 아팠어요. 알겠어요?

    #59. 몽타쥬 - 공부방 , 효진 집(거실, 작은방) / 오후, 저녁

    -공부방 (오후)
    효진, 공부방에 마지막 남은 짐을 챙겨다가 자신의 차에다가 옮겨 싣는다.
    텅 빈 공부방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그녀.

    -작은방(저녁)
    종욱이 탁상 달력을 보며 날짜를 세다가 어느 한 날짜에 표시를 한다.

    #60. 미란 집 / 낮

    -거실
    미란이 나영과 다른 학생에게 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
    미란이 수업 마무리를 하자, 책을 덮고 가방을 챙기는 학생들.
    현관 벨소리. 힘들게 일어서서 문을 열어주는 미란.

    미란 아이고 이젠 요거 움직이는 것도 힘드네.
    효진 (들어오며) 요 앞에 공사는 아직도 안 끝났네. 너 시끄럽겠다야. (아이들을 보며 혼잣말) 수업 늦게 마쳤나봐.
    미란 얘 말도 마, 그 공사 때문에 내가 창문도 못 열고 진짜....
    미란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 아이들.
    나영이 나가다가 효진을 보더니 모른 척 지나간다.

    효진 야, 나영 오랜만이다. 인사 좀 하지?
    나영 (고개만 짧게 꾸벅거리는)

    CUT TO
    미란, 배를 어루만지며 거실 쇼파에 기대어 있고, 그 앞 탁자에서 과일을 깎고 있는 효진.

    미란 걘 그 뒤에 별 일 없고?
    효진 응 뭐. 잘 모르겠어. 말을 해야 알지. 어찌 보면 요즘 애 같지도 않고.
    미란 뭐가?
    효진 수업 듣던 애들이랑 비교해보면 좀 달라, 애가.
    미란 다르긴 뭐 달라. 아들 키우는 엄마들 얘기 들어 보니까 남자애들은 복잡할거 하나 없다더라, 맛있는 거 해주고 배만 안고프게 해주면 땡이래.
    효진 (내가) 맛있는 걸 안 해줘서 그런가.
    미란 (웃음) 맛있는 거 좀 해줘라, 집 안 나가게.
    효진 어찌된 게 애가 말이 별로 없어.
    미란 그 나이 때 남자 애들이 그래. 자기 엄마한테도 말 잘 안 해.
    효진 여자친구랑 여행 갔다고는 하는데, 괜히 나한테 반항심에 나간건지. 보니까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미란 여자친구? 너한테 전화했다던 그 여자애? 걘 그래도 착하네.
    효진 차비 달라고 전화한 거지 뭐. 똑같아, 걔도.
    미란 (웃음) 암튼 사랑이 참 대단하다. 어린 애들이...넌 그 대학원 다닌다는 카페 총각이랑 어떻게 됐어?
    효진 누구? 정우씨? 끝냈지, 뭐.
    미란 왜, 잘해보지.
    효진 (내가) 지금 그럴 처지니. 내 얘기 다 했더니 도망갔어. (잠시 후 혼잣말처럼) 내가 도망친 걸 수도 있고.

    #61. 효진 집 / 밤

    컵에 물을 따라 약을 먹고 있는 효진.
    종욱이 냉장고를 열어본다.

    효진 왜, 배고파?
    종욱 아뇨.

    냉장고를 열어보다가 잠시 머쓱해진 종욱.

    효진 걔는 여자친구야?
    종욱 누구요?
    효진 얼마 전에 만나고 온 애.
    종욱 아... 아니에요.
    효진 둘이 여행 갔어?
    종욱 아, 몰라요.
    효진 이름이 뭔데?
    종욱 아... (당황하는)
    효진 (종욱이 부끄러워하는 줄 아는) 앞으로 걔 만날 땐 솔직히 얘기해. 뭐 어떠냐, 여자친구.
    종욱 (귀찮지만 마지못해) 네...
    효진 (피식 웃는) 좋겠다, 넌.
    종욱 아...

    #62. 피자가게 / 낮

    작은 동네 피자가게 안. 주인(남, 40대 후반)이 종욱과 마주 앉아있다.

    주인 고등학생이라고?
    종욱 ... 네. 고2요.
    주인 그럼 이제 고3 되는 거야?
    종욱 (거짓말이라 긴장) 네? 네.
    주인 배달은 해본 적 있어?
    종욱 아뇨.
    주인 스쿠터도 그럼 탈 줄 모르겠네?
    종욱 스쿠터는 잘 타요.

    종욱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주인.

    #63. 네일샵 / 낮

    작은 네일샵 한쪽에 앉아있는 효진과 송사장(여, 40대초).
    테이블위에 보험관련 책자 등이 있고, 뒤쪽으로 네일을 받고 있는 손님.

    송사장 백사장님이랑 인연도 있고, 암튼 내가 효진씨는 각별하잖아. 그래서 따로 이렇게 추천하는 거야.다음 달부터 보험료 또 오르는 거 알지, 지금이 딱 좋은 기회거든.
    효진 (얘기를 듣기 보다는 네일샵을 두리번거리는)
    송사장 이번에 암까지 실비 싹 다 되는 거 하나 들어놔. 혼자 있을수록 건강 챙겨야지.
    효진 (잠시 들여다보다가) 제가 요즘 갑상선약을 먹고 있어서요. 죄송해요. 그이 일 때 도움 많이 받았는데...
    송사장 그래? 저런... 근데 그거 상관없어. 자기, 일단 보자... (가입서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덮는)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자기 진작에 들걸 그랬다. 병원비 많이 들지?
    효진 다 건강보험 되는데요, 뭘.
    송사장 그래도 그게 아니지, 쯧쯧. 미리 이런 거 했어봐, 이번에도 돈 타 먹을 수 있잖아. (스스로 말실수했다고 느꼈는지) 아, 아무튼 들어놓았음 좋잖아.
    효진 (의외로 쿨하게 반응하는) 하긴 그래야 다들 먹고 사는 거죠. 보험회사도. (가게를 둘러보는) 여긴 언제부터 하셨어요?
    송사장 아는 언니가 가게 하나 싸게 나왔다기에 권리금도 없고 해서 만만하게 하나 했어. 효진씨도 한번 하고 갈래? 손이 그게 뭐야. 서비스로 해줄게. 잠깐만. (뒤로 돌아 직원을 쳐다보는)

    #64. 거리 / 낮

    전단지 알바를 뛰고 있는 종욱.
    상가건물 곳곳에 전단지를 붙이고, 가게 입구에 전단지를 밀어 놓고 가는 중이다.

    #65. 네일샵 / 낮

    효진이 직원에게 네일을 받고 있고, 송사장이 옆에 앉아 손을 같이 들여다보는 중이다.

    송사장 아휴 뭉툭하니 손이 참 부지런하게 생겼네.
    효진 (어색한 웃음) 여기는 차리는 데 얼마나 드셨어요?
    송사장 왜 관심 있어? 네일샵 차리게?
    효진 아뇨. 그냥...
    송사장 (속삭이듯) 차라리 당신, 나랑 설계사 일 한번 해볼래?
    효진 네?
    송사장 일단 와서 한번 교육 받아보고 관심 있음 해봐. 요즘은 이일도 아무나 하는 거 아냐. 시험도 보고, 나름 다 공부해. 재무 교육이니까 어차피 나중에 다 도움 되잖아. 응?
    효진 글쎄요.

    효진 고민하다가 밖에서 전단지를 놔두고 가는 종욱을 본다.
    송사장의 말이 이어지고, 효진은 바깥을 향해 시선.

    -네일샵 밖
    전단지를 각 가게 입구에 뿌리고 가는 종욱.

    #66. 효진 집 / 저녁

    효진, 거실 식탁에서 자신의 화려한 손톱을 보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리무버를 꺼내어 지우는 효진.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종욱.

    효진 늦었네? (종욱을 살피는) 독서실은 어때?
    종욱 네, 괜찮아요.
    효진 그래?

    종욱,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효진 저녁, 나가서 먹을래?

    #67. 피자집 / 저녁

    효진이 피자를 잘라 종욱 앞 접시에 덜어준다.

    효진 먹어.
    종욱 (묵묵히 피자를 먹는)
    효진 종욱은 뭐 잘해?
    종욱 ?
    효진 잘하는 과목이나 그런 거 없어? 아님 다른 거라도. 그림이나 축구 그런 거 있잖아.
    종욱 잘하는 거 없어요.
    효진 그래도 지금까지 상 한번 받은 적 없어?
    종욱 ... 딱 하나.
    효진 뭘로?
    종욱 어릴 때 방학 만들기 숙제로요.
    효진 그래? 미술 같은 거 잘하는 구나. 대단한데?
    종욱 별거 아녔어요. 할머니 농사짓고 남는 콩으로 그림 붙여서 냈어요.
    효진 정말? 할머니가 좋아했겠다.
    종욱 별로. 할머니는 제가 엄마가 없어서 학교서 상준 거라고 하셨어요.
    효진 ... 외할머니 한번 나중에 같이 뵈러 가자.
    종욱 ...
    효진 뭐 필요한 건 없어? 용돈은 안 부족해?
    종욱 (심드렁) 네.
    효진 정말?
    종욱 네.
    효진 (한참동안 종욱을 보는) 그래.

    말없이 피자를 먹고 있는 두 사람.

    #68. 몽타쥬 - 빌라, 교육장 / 낮

    - 빌라 / 낮
    종욱이 빌라 내에 전단지를 붙이며 알바를 하는 모습.

    - 보험회사 교육장 / 낮
    효진, 끝자리에 앉아 보험설계 교육을 듣고 있다.
    강의는 열심히 듣지 않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보는 중이다.

    #69. 효진 집 / 아침

    종욱이 봉투에서 돈(알바비로 받은)을 꺼내 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들고 방을 나간다.

    효진 (방에서 나오다) 이렇게 아침 일찍 어디 가?
    종욱 ... 독서실이요.
    효진 지금? 아침도 안 먹고?
    종욱 가다 먹으면... (아차!) 돼요.
    효진 (뭐지? 하는) 그래, 갔다 와.
    종욱 (급히 나간다)
    효진 야, 너.
    종욱 (돌아보는)
    효진 ... 아냐. 가 봐.

    꾸벅하고는 나가는 종욱. 찜찜하기는 효진도 마찬가지다.

    #70. 시외버스 안 / 낮

    종욱,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가고 있다.
    메시지 알림 소리에 주미가 보낸 사진과 문자를 확인한다.

    문자(주미) "(바다사진과 함께) 겨울바다!! 완죤 좋아!"

    "치, 애들이랑 잘 놀아..." 라고 장난 섞인 문자를 보내는 종욱.

    #71. 효진 집 / 낮

    작은방을 청소하다가 문득 뭔가 의심스러운지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하는 효진.

    #72. 바닷가 / 낮

    해변,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주미. 곁에서 주미의 친구들로 보이는 남녀아이들이 떠들며 장난치고 있다.

    주미 (잘 안들리는지) 여보세여. (아이들에게) 야, 좀 조용히 해봐. ... 아, 아뇨. 모르는데요. ... 네? 아씨... 말하지 말랬는데. ... 그게, 전 잘 모르겠는데요, 종욱이 자기 엄마 찾는다고. 말소인가 뭔가 그 엄마 있던데... ... 네, 엄마요. 엄마 찾으러 다닌다고 했어요.

    #73. 다세대 주택 / 오후

    오래된 다세대 주택 계단. (#47.의)
    종욱이 망설이다가 어느 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문을 열고 나오는 한 아줌마.
    멀리서 대화하는 둘의 모습. 아줌마가 모른다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들어간다.
    낙담한 얼굴의 종욱.

    #74. 효진 집 (효진방, 작은방) / 밤

    효진, 경수와 함께 찍은 사진 액자를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다.

    효진 (혼잣말) 오빠...

    집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욱.

    효진 (종욱을 보고는) 늦었네?
    종욱 (힘없이 고개를 꾸벅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효진 밥은?
    종욱 먹었어요.
    효진 야, 백종욱
    종욱 (피곤한 얼굴로 돌아보는)
    효진 내일 외할머니 요양병원에 같이 가자. 응?
    종욱 !

    #75. 효진의 차 안 / 낮

    조수석 창 쪽을 향해 몸을 틀어있는 종욱.

    효진 물 좀 줄래?
    종욱 (생수병을 건네는)
    효진 (약을 꺼내 약을 먹고는) 어제 너 어디 갔다 왔어?
    종욱 (한숨) ...
    효진 ... 너, '엄마' 찾으러 갔다면서?
    종욱 ! ...
    효진 누구 엄마?
    종욱 엄마요.
    효진 ?
    종욱 우리 엄마요.
    효진 엄마 돌아가셨잖아. 너 낳고.
    종욱 (말을 씹고 그냥 창밖을 보는)

    #76. 요양병원 (병실, 원무실, 입구) / 낮

    -병실
    종욱, 외할머니 옆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함께 TV를 보고 있다.
    요양보호사가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가져와 식판을 앞에 둔다.

    보호사 할머니, 식사 나왔어요. (종욱을 보고는) 손자 왔나보네? 할머니, 손주도 오셔서 좋으시겠네.

    무표정한 외할머니의 표정. 종욱을 그냥 멍하니 보고 있다.

    보호사 손자도 몰라보네. 저번에 손자 보고 싶다고 하셔놓고는.
    -원무실

    직원 (직원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박덕순 할머님 가족이요? 글쎄요, 저희는 보호자로 할아버지 한 분 계시는 걸로 아는데. 보자... (파일을 찾더니) 아, 여기 있다. 맞네요. 성함은 박순철. 순창에 사시는 분인데 남동생이라고 되어있네요. 이 어르신이 여기 비용이랑 해주고 계세요.
    효진 네... 다른 가족은 없으세요? 자식이나.
    직원 저희야 잘 모르죠. 그 할머님 딸 하나 있었는데 오래전에 죽었다고 하던데. 자식이 있었으면 면회도 왔을 텐데 아무도 안 왔어요. 하긴 여기 계신 어르신들 자식들 있어도 똑같지만.
    효진 네...

    -입구 로비

    입구 로비 의자에 종욱과 함께 앉아있는 외할머니.

    효진 (할머니에게 다가가) 할머니, 저희 갈게요. 건강히 잘 계세요.(종욱에게) 가자.
    종욱 저, 화장실 좀. (자리를 비우는 종욱)

    외할머니 (한참동안 효진을 들여다보더니) 색시... 고마워.
    효진 ?
    외할머니 우리 종욱, 잘 부탁혀.

    효진,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데
    "색시" 하고 그녀를 부르는 할머니.

    효진 네?
    외할머니 이거... (속주머니에서 쌈짓돈을 꺼내어서 효진의 손에 쥐어주는)
    효진 아휴, 할머니, 이러지 마세요.
    외할머니 가다가 우리 종욱이랑 맛있는 거 사먹어.
    효진 할머니, 괜찮아요. 그냥 마음만 받을게요.
    외할머니 응? 만원만?

    만원짜리 한 장을 효진에게 쥐어 주는 할머니.
    효진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만원을 받는다. 효진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할머니.
    종욱, 화장실을 나오며 그 모습을 지켜본다.

    #77. 효진의 차 안 / 저녁

    종욱, 운전 중인 효진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다.

    효진 외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셔?
    종욱 ...
    효진 자?
    종욱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다리를 흔든다) ...
    효진 있잖아, 병원에 물어보니까 할머니 딸이 없대. 너, 엄마 얘기 진짜 확실한 거야?
    종욱 네, 엄마 있어요.
    효진 돌아가셨다며. (혼잣말) 오빠가 그랬는데...
    종욱 (여전히 눈을 감고) 아빠가 얘기 안 해줬나 보죠.

    당황스런 얼굴로 종욱을 쳐다보는 효진.

    #78. 과거 (약 2년 전) - 장례식장 / 낮, 밤

    - 장례식장 복도 / 낮
    고개를 숙이고 걸어오는 효진에게 다가오는 경택

    경택 맞다, 저기 형님 영정사진이요. 혹시 쓸 만한 거 있어요? 명함사진 같은 거라도 주면 근처 사진관에서 확대해...
    효진 아까 (장례식장 측에) 드렸어요.
    경택 (머쓱한) 아, 그랬어요? 난 또... 그래도 차분하게 할 건 다 하셨네.

    -장례식장 원무과 / 낮

    효진, 원무과 직원과 창구에서 얘기중이다.

    효진 여기 사체검안서랑 검사필증이요. 서류는 이제 다 된 거죠?
    직원 네, 입관시각은 아마 10시 반쯤 될 거 같은데 저희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효진 상복이나 그런 건 어떻게?
    직원 계시면 담당하는 분이 가서 직접 절차랑 말씀드릴 거예요.
    효진 잔금은 언제 납부하면 되죠?
    직원 발인 전에 언제든 하시면 됩니다. (효진을 보며) 가족이세요?
    효진 네. 부인인데요.
    직원 경황이 없으실 텐데... 다른 궁금한 사항 있으면 저희 지도사랑 도우미 분들 계시니까 여쭤보세요.

    -장례식장 안 / 밤
    썰렁한 장례식장 한 쪽에 멍하니 앉아있는 효진.

    #79. 정우의 카페 / 오후

    정우 내가 여태껏 쭉 살아오면서 남한테 차마 말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이나 생각, 다들 그런 거 있잖아요. 그걸 한번 지금 떠올려보세요.

    정우와 함께 여자 4명(2,30대 이상)이 앉아 이야기 중이다.

    여자1 꼭 경험했던 거요?
    정우 아니요, 모두 다요. 상상이나 꿈, 공상 그런 것도요. 이런 걸 타인한테 말하면 내가 형편없이 보일거야 생각되어지는 경험이나 그런 거 없어요?
    여자1 남들이 들으면 날 혐오할 거 같은 그런 생각 말이죠? 그런 거 하나쯤 있지 않나.
    여자2 어휴, 있죠. 너무 많은데.
    정우 그럼 지금 생각나는 거 한 가지씩 서로 말해 보세요.
    여자2 (웃으며) 싫어요.

    다들 생각만 해도 민망하다며 손사래를 친다.
    카페 문 여는 소리.

    지원 (다른 일을 하는 중) 어서오세요.
    효진 언니, 안녕.
    지원 오랜만이다. 너 왜 이렇게 요즘 뜸했어?
    효진 미안해요, 언니. 나 아메리카노 한잔만.
    지원 따뜻한 거?
    효진 네.
    지원 바빠? 안 바쁘면 맛있는 원두 들어온 거 있는데 내가 드립으로 내려줄까?
    효진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지원 알았어, 잠시만.

    주문대 앞에서 커피를 기다리는 효진.
    카페 한쪽에서 이야기 중인 정우 쪽으로 시선이 이동.
    효진, 여자들과 서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 하는 정우 모습을 바라본다.
    정우가 사람들과 말하다가 잠깐 효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는 그녀.

    #80. 미란 집 / 오후

    효진, 한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미란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빵 봉투를 툭 떨어뜨린다.

    효진 야, 이런 건 니네 신랑한테나 시켜. 내가 니 남편이냐? 먹고 싶은 거 있음 사다 바치게.
    미란 야, 우리 그이는 얼굴도 못 본지 한 달째다. 잘난 빵 하나 사주면서 생색은. 왜 이렇게 오늘따라 그 집 단팥빵이 먹고 싶냐.

    CUT TO

    미란 (빵을 먹으며) 뭐야, 너한테 울 아기 태어나면 보험하나 들어주려고 했는데. 그새 그만둔 거야?
    효진 시작을 했어야 관두지. 나랑 안 맞는 거 같더라고. 사람 대하는 거.
    미란 아직 여유가 있나 보네. (너) 이제 딸린 애도 있잖아.
    효진 여기저기 일은 알아보고 있는데, 참 애매해. 여러 가지로.
    미란 젊은 애들도 어려운데, 어디 쉽겠냐? 애 있다고 이력서 같은데 절대 쓰지 마. 물어보기 전까진.
    효진 근데 나 (그거)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돼?
    미란 차라리 돌싱이라고 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애 있는 아줌만 진짜 할 일 없다니까. 근데 너 다시 애들 (가르칠) 생각 없어? 나 가르치는 애 엄마가 너 묻더라. 요즘 뭐하냐고. 생각 있음 과외라도 해 봐.
    효진 누구?
    미란 그때 걔 있잖아, 지남이라고. 엄마 치킨집 하고.
    효진 ... 아, 걔.
    미란 암튼 잘 알아보고 해. 지난번처럼 너 그렇게 혼자되고 급하게 뭐에 홀린 거 마냥 공부방 차리더니 갑작스럽게 그만두지 말고... 그 애도 갑자기 떠맡더니, 진짜... 아휴.
    효진 걔 보다 다른 것 때문에 더 골치야.
    미란 왜? 니 아들 또 집 나갔냐? 걔도 너랑 하는 게 닮은 데가 있는 거 같다. 애가 즉흥적인 거 보면.
    효진 ... 엄마가 있다고 하네.
    미란 무슨 엄마?
    효진 지 엄마 찾는다고 돌아 다녔나봐.
    미란 죽었다며.
    효진 모르겠어. 너 언제 한번 너희 신랑한테 부탁해서 알아봐줄래? 경찰은 조회 같은 거 해볼 수 있잖아?
    미란 이 인간 얼굴을 봐야 부탁이든 뭐든 하지. 말은 해볼게. 근데 엄마가 있다고 쳐도 찾아서 뭐하게? 막말로 그 엄마가 이제 와서 애 키운다고 하겠냐?
    효진 그냥... 오빠에 대해서 궁금해서.

    #81. 효진 집 / 아침

    눈이 내린 동네 골목길. 아침 해가 눈부시다.
    방안에서 아직 자고 있는 종욱. 베개 옆에 놔둔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 소리.
    종욱 휴대폰 소리에 눈을 떠 문자를 확인한다.

    문자(주미) "자냐? 나 어떡하지 큰일났음ㅋ;"

    종욱, 문자를 보고는 그냥 엎드린다.
    곧 다시 일어나 답문자를 보내는 그.

    #82. 영화관 / 아침

    -상영관 안
    영화를 보는 중인 효진. 객석에 사람이 거의 없다.

    -영화관 출구

    효진 (전화통화를 하며 나오는) 영화 봤어. 응? 혼자. 같이 보긴 혼자 봤다니까. ... 집에 있기도 답답해서. 응? ... 그래? 잠시만.아니, 그냥 주소를 문자로 찍어줄래? 고마워. 신랑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 그래, 너도. 애기 운다, 어서 끊어. 응.

    #83. 효진 집 (거실) / 낮

    식탁 위에 스티로폼 상자와 그 옆에 반찬통들.
    여러가지 반찬과 떡국 떡이 담긴 봉지.

    효진(통화) 응, 받았어. 엄마 뭘 이렇게 많이 보냈어.
    명자(통화) 둘이 있으니까 그 정도는 돼야지. 이것저것 해서 보냈다.
    효진(통화) 고마워, 엄마.
    명자(통화) 야는 고맙다는 말 하지마라. 남 같다 아이가.
    효진(통화) 엄만, 고맙다고 해도 그래.

    종욱, 세탁기에서 빨래 조금을 빼서 자기 방으로 가져간다.
    통화를 하면서 슬쩍 종욱을 보는 효진.

    명자(통화) 근데 니 진짜, 그래 살끼가?
    효진(통화) 아휴, 우리 엄마 또 시작이시네.
    명자(통화) 내가 니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온다. 니 아직 안 늦었대이. 니가 그렇게 다 큰 아를 갖다가....
    효진(통화) 언제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며.
    명자(통화) 결혼만 하지 말랬지, 머스마는 좀 만나멘시롱 살라고!
    효진(통화) (이제는 완전 적응이 된 듯) 엄마, 우리 새해엔 사이좋게 지내요, 응?
    명자(통화) 아이고, 모르겠다.
    효진 (전화를 끊으며) 하여간 공짜는 없다니까.

    #84. 효진 집 (작은방), 주미 방 / 낮

    방안 옷걸이에 걸려있는 종욱의 속옷 빨래.
    종욱, 누워서 주미와 통화 중.

    주미(통화) 아, 난 왜 태몽 같은 거도 없었지?
    종욱(통화) 지금 태몽 얘기가 나와? 누구냐니까, 진짜?
    주미(통화) 넌 아니거든. 괜히 오바하지 마.
    종욱(통화) 그럼 누군데?
    주미(통화) (심드렁) 죽었어.
    종욱(통화) 아, 말 돌리지 말고! 그 때 제일고 다닌 다는 그 놈 아냐?
    주미(통화) 몰라, 얘기도 꺼내지마. 걔 죽을 거야. 요즘 매일 빨간 펜으로 이름 쓰며 저주 하고 있으니까.
    종욱(통화) (기가 찬 듯) 너 혹시... 그 거 안하고 했냐?
    주미(통화) 했다니까. 나도 그게 미스터리야.
    종욱(통화) 그래서 너 이제 어떡할 거야?
    주미(통화) 있잖아, 내가 성모마리아 같은 거 아닐까. 예수님도 그렇게 태어났다며.

    방문을 확 여는 효진.
    종욱, 누워 있다가 놀란다.

    효진 (열고나자 생각이 난 듯) 아, 맞다... 노크. 미안.밥 없는데 뭐 시켜 먹을래?
    종욱 예.
    효진 (방에 걸린 빨래를 보는) 근데 너, 빨래는 왜 니가 해?
    종욱 왜요? 내꺼 내가 빠는데.
    효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참는) 뭐 시켜 먹을 건데?
    종욱 아무 거나요.

    #85. 시외버스 안 / 낮

    꾸벅꾸벅 정신없이 졸고 있는 주미.
    빨대가 꽂힌 빈 야쿠르트 통을 들고 있다가 손에 힘이 풀리는지 떨어뜨린다.
    그녀 옆 빈자리에 제법 큰 가방과 짐들.

    #86. 미란 집 / 낮

    효진, 미란의 아기얼굴을 들여다보고 함께 웃다.

    효진 애기가 내가 엄만줄 아나봐. 완전 좋아해.
    미란 (웃으며 다가오는) 그럼 니가 가서 좀 키워라.
    효진 그럴까?
    미란 갓난애지만 보통이 아니야. 지 아빠 닮아서 그런가. (아기를 보며 웃음) 아휴, 언제 다 키우냐. 넌 니 아들한테 지 엄마 찾았다고 얘기해줬어?
    효진 아니, 아직. 요즘 좀 안 좋아.
    미란 왜?
    효진 걘 지껀 지가 다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그러더라. 남같이.
    미란 착하네. 철들었구만.
    효진 그게 아니라. 괜히 내가 못된 거 같잖아.
    미란 어차피 너 새엄마잖아. 못된 새엄마.
    효진 (흘겨보는) 진짜 아닌 게 아니라... 걔가 날 새엄마처럼 보니까 나도 점점 그렇게 대하게 되는 거 있지.
    미란 니가 먼저 걔 엄마 한번 만나봐. 그쪽 사정 괜찮으면 키우라고 하고. ... 아니다. 야, 걔가 지 엄마만나면 자기 엄마한테 간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효진 (걔도) 만나봐야 알지. 그리고 이제 와서 어느 누가 자기애라고 키운다고 나서겠냐.
    미란 텄다, 텄어. 찾아도 골치네.

    #87. 도너츠 가게 / 낮

    -청주터미널 안 도너츠 전문점

    종욱 (도넛을 건네며) 진짜 안 먹어?
    주미 (손을 저으며) NO.
    종욱 그 거면 많이 먹어야 되잖아.
    주미 (사이다를 마시며) 이상하게 난 입덧은 안하는데 사이다랑 요구르트만 먹혀. (하품) 아, 또 졸려. 진짜 잠이 쏟아진다? 자도 자도 졸린 거 있지.
    종욱 (주미의 몸을 보면서) 근데 너 확실하냐? 별로 티 안나.
    주미 내가 원래 한 몸매 하잖아. (웃음) 그래도 약간 나오긴 나왔어 똥배처럼. 나, 배에 신기하게 막 털 났다. 보여줄까?
    종욱 됐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주미 (배를 만지면서) 여기서 잘 보관했다가 필요한 사람한테 줄 거야. 나보다 열라 백만 배 (아기가) 필요한 사람들 있잖아.
    종욱 너야말로 진짜 대책 없다. 애기가 무슨 물건이냐?
    주미 야, 나처럼 착한 사람이 어딨다고, 쯧!난 진짜 돈도 안보고, 애기 가장 사랑해줄 수 있는 좋은 사람한테 줄 거야.
    휴대폰이 울리자 전화를 받는 주미.

    주미(통화) 아, 여보세요. 넹, 가고 있는 중이에요. 음... 한 4시쯤 도착할 거 같은데...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아뇨, 그럴 필요 없는데. 아, 네.

    #88. 터미널 입구 계단 / 오후

    주미의 짐을 가지고 내려가는 종욱.
    뒤따라 내려오던 주미가 종욱의 머리를 툭 친다.
    종욱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주미를 때리려는 시늉. 장난을 치는 둘.

    주미 갈게.
    종욱 이모 마중 나온 데까지 들어다 줄게.
    주미 (당황) 아냐, 괜찮아. 내가 들고 갈게.
    종욱 이제 그럼 이모네 집에서 계속 있는 거야?
    주미 (어색한 웃음) 어. (배를 두드리는) 뭐 설마 쫓아내겠냐. 그러면 확!
    종욱 (어이없는 표정)
    둘 사이 잠시 정적.

    주미 야, 나 한번만 안아주라.

    머뭇거리다가 어정쩡하게 주미를 안아주는 종욱.
    주미의 휴대폰 벨소리.

    주미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아, 간다니까... 이모가 걱정 엄청 되나 보네. (종욱에게) 야, 심심하면 연락할게.

    주미, 손을 흔들고는 터벅터벅 주차장 쪽으로 간다.
    종욱, 그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89. 중고차센터 / 낮

    효진의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중개인.
    조수석에 효진이 놔둔 차량용 액세서리들.

    중개인 차는 깨끗하게 쓰셨네. 안에 점검은 또 해봐야겠지만, 일단 이정도면 저희가 한 280까지 해드릴 수 있어요.
    효진 (놀라서) 그것 밖에 안돼요?
    중개인 연식이 얼마인데, 잘해드린 거예요. 보면 알겠지만 이거 판매가 요즘 300 가요.
    효진 (고민하는) 그것 밖에 안하는구나.
    중개인 어떻게? 오늘 바로 매매하실래요? (앞서가며) 일단 추운데 사무실로 가셔서...
    효진 (뭐가 생각난 듯) 저, 한 2주 뒤에 하면 안돼요?
    중개인 왜요? 팔려면 하루라도 빨리 파시지, 값 쳐줄 때. 중고차라는 게 해 바뀌면 가격이 또 빨리 내려가요. (혼잣말처럼) 아닌 말로 더 타다 뭔 일 날수도 있고.

    #90. 지방국도 위 (차 안, 휴게소) / 낮, 해질 무렵

    -낮, 효진의 차 안
    조수석에 흔들리는 차량용 액세서리.

    효진(소리) 왜 그래?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종욱, 심드렁하게 조수석에 앉아있다.

    효진 너 엄마 보고 싶다고 했잖아.
    종욱 근데 아줌마는 왜 가는데요?
    효진 (너도) 주소 봤지? 너 혼자 거기 어떻게 가냐. 너 또 가다가 다른데 샐지 누가 알고.
    종욱 (입을 삐죽거리는)
    효진 걱정 마. 나도 (니 엄마) 궁금하긴 한데 너 데려다만 주는 거야.
    종욱 (영 심란한 표정)

    -해질 무렵, 휴게소 주차장
    차문을 열고 타는 효진.

    효진 (감자구이와 찐빵을 종욱에게 건네는) 안 먹을래?
    종욱 (별 생각이 없다)
    효진 한참 멀었는데 먹어 둬.
    종욱 (찐빵만 하나 빼는)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효진. 안내를 다시 시작하는 내비게이션 소리.

    -지방 국도 커브 길을 올라가는 효진의 차.

    #91. 산속 길 위 / 저녁 (눈)

    내비게이션(소리) "목적지 인근에 도착하였으므로 안내를 종료합니다."
    효진 여기가 맞나? 주소는 맞게 온 것 같은데...

    효진, 고개를 내밀어 앞을 살피며 운전 중이다.
    내비게이션에는 더 이상 오르는 길 없이, 멀리 절(卍)표시만 하나 있고 근처가 휑하다.

    눈이 내리는 길을 천천히 오르는 효진의 차.
    길 끝에 불 켜진 구멍가게를 발견 하는 효진.

    #92. 구멍가게 / 저녁
    오래된 가게 안. 효진, 대충 과자 몇 개랑 음료수를 사서 주인 할머니 앞에 놔둔다.
    할머니가 눈이 잘 안 보이는지 멀찍이 보며 하나씩 계산 중.

    효진 (쪽지를 보여주며) 저 혹시 여기로 가려면 쭉 가면 되나요?
    할머니 응? (종이가 잘 안 보이는지 멀찍이 두고 한참 들여다본다) 절에 가게?
    효진 거기가 절이에요?
    할머니 요 위에 절에 천도재 지내러 온 거 아냐? 애기 천도재 지내주는 절.
    효진 절에 가려는 건 아니고... 혹시 여기 근처에 오연화씨라는 분 사는지 아세요?
    할머니 이름만 들어서는 모르는데... 누구지. (이름을 혼자 되뇌는)

    -인서트 (효진의 차 안)
    그 시각, 혼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종욱.

    -가게 안

    할머니 (생각하다) 혹시 저기 위에 점보는 그 아줌만가? 오씨라고 하는 거 같던데.
    효진 어디 사시는 데요?
    할머니 여기 쭉 가다가 보면 위에 절 나오기 전에 작은 집 있어. 지금 있을지 모르겠네. 저녁이라 점 봐줄라나. 기도 하러 산에 갔을 수도 있을 텐데.

    #93. 효진의 차 안 / 저녁 (눈)

    어둑해진 눈길 위를 엉금엉금 기듯 올라가는 효진의 차.

    효진 (밖을 보며) 저기 인거 같다. 다 왔네. (종욱을 보며) 안내려?
    종욱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그냥 고개를 숙인 채 있는)

    혼자 차에서 내리는 효진.

    #94. 연화 집 마당 / 저녁 (눈)

    효진, 대문 앞에 작은 깃발이 꽂혀있는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간다.

    효진 계세요?

    작은 전등 하나는 켜있는데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다.
    마루에 걸터앉아 손을 비비며 기다리는 효진.

    연화 누구세요?

    어둠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쳐다보는 효진.
    연화(41세)가 작은 바구니를 들고 효진을 보고 있다.

    효진 아, 안녕하세요. 저... 청주에서 왔는데요.
    연화 오늘은 점 안 봐요.
    효진 그게 아니라 종욱 엄마... 아니, 혹시 백경수씨 아세요?
    연화 ... ?

    -인서트 (효진의 차 안)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보고 있는 종욱.
    입김을 불어 창에다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쓴다.

    #95. 연화 집 안 / 저녁

    어두운 방 안. 바닥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효진.

    연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럼, 그때가 언제에요?
    효진 그 해 가을에 사고 났으니까... 벌써 올해 3년째 됐네요.
    연화 3년 전이라. (짧게 한숨)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어. 꿈에 한동안 그 사람이랑, 차가 몇 번 보이고 해서 기도한 적 있거든요. 왠지 느낌이 이상했는데... 에휴, (하늘이) 무심하다. 젊은 나이에. 좋은 사람이었는데.
    효진 저도 안 믿기더라고요. (오빠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그렇게 된 거지만, 너무 미안하고... 마지막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게 너무 후회돼요.
    연화 그때로 돌아가도 똑 같을 거예요. 다들 열심히 산거니까. 아이는 몇 살이에요?
    효진 올해 이제 고등학교 가요.
    연화 많이 컸겠다... 고등학생이면. 그 아이 꼬맹이 때 봤으니. ... 그이가 많이 도와줬지만 내가 좀 많이 아팠어요. 그땐 신병인지도 모르고.나중에 알았을 땐 짐이 되기 싫었어요.... 산송장 같았으니까. 살고 싶었어요. 죽고 싶다는 말 보다 더 절망적인 말이 뭔지 알아요? 살고 싶다에요... 그땐 정말 살고 싶었어요.
    효진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치는 듯 잠시 있다가) 저기... 종욱이가, 많이 보고 싶어 해요. 지금 밖에 차에 있는데.
    연화 같이 사는 동안 많이 이뻐해줬어요. 엄마, 엄마 이러는데... 집 나올 때도 애가 많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새 정 들었다고.
    효진 저... 저기, 부탁이 있는데...
    연화 ?
    효진 종욱이한테 엄마라고 해주시면 안돼요?
    연화 ... 자기 엄마 죽은 지 몰라요?
    효진 아주머니를 엄마로 알고 있는 거 같아요. 어릴 적 같이 있던 때를 기억하는지.
    연화 그래도 그게.... 진짜 엄마는 없는데 어떻게.
    효진 아이가 아빠도 사고로 잃고, 키워주시던 할머니도 요양원가고... 좀 외로운가 봐요. (아주머니가) 엄마라고 해도 종욱이 여기서 같이 있겠다고 하진 않을 거예요. 그런 건 걱정 마세요.
    연화 ...

    #96. 효진의 차 안 / 밤 (눈)

    효진, 종욱이 있는 조수석 창문을 두드린다.
    종욱이 쳐다보자 손짓('안 들어 가봐?')을 하는 효진.
    종욱, 그냥 무시하고 앞을 본다.
    효진이 운전석 쪽으로 돌아와 차문을 열고 앉는다.

    효진 아, 춥다. 집보다 차 안이 더 따뜻하네. (종욱을 보며)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엄마 만나봐.
    종욱 ...
    효진 야, 너 뭐야. 안 그럼 (나) 그냥 간다.
    종욱 진짜 (엄마) 있어요?
    효진 들어 가봐. 인사라도 해야지.
    종욱 후...
    효진 혼자 그렇게 찾아다니더니 맘 바뀌었냐?
    종욱 (잠시 고민하다) 안에 화장실 있죠? (문을 열고 내리며) 에이씨, 오줌마려 죽겠네.

    혼자서 차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효진.

    CUT TO
    종욱이 잠시 후 금방 차안으로 들어온다.

    효진 왜 이렇게 금방 와? (엄마) 만나봤어?
    종욱 가요. 이제 내려가요.
    효진 너 진짜 화장실만 갔다 온 거야?

    효진이 집 쪽을 보니 연화가 문 앞까지 나와 차를 향해 서있다.
    차에서 내려 연화와 짧게 대화와 인사를 나누고 다시 돌아온다.
    여전히 등을 웅크리고 돌아서 앉아있는 종욱.

    #97. 산길 위 / 밤 (눈)

    헤드라이트를 켜고 눈이 쌓인 눈길을 천천히 내려오는 효진의 차.
    차 안. 갑자기 뭔가 덜컹하며 눈길에 빠진 느낌.

    효진, 내려서 앞 차 바퀴를 본다. 뒤따라 나와 같이 보는 종욱.

    효진 아, 어떡해. (휴대폰을 보더니 전파도 잡히지 않아 다시 집어넣는다)
    종욱 뒤에서 밀어 볼까요?

    CUT TO
    (차를 두고) 눈길 위를 걷고 있는 효진과 종욱.

    효진 아, 춥다. 어쩜 여긴 민박집 이런 것도 하나 없냐.
    종욱 ...

    #98. 민박집 / 밤 (눈)

    주인남 (오래된 작은 방문을 열며) 이 방에서 쉬세요. 얼른 불 넣어드릴게.
    효진 (추위에 많이 떤 목소리) 고맙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효진과 종욱.

    CUT TO
    눈이 계속 내리는 밤.
    창밖의 눈 빛 때문인지 방안이 그리 어둡지 않다.

    효진, 목에 둔 베개를 뺐다가 다시 넣었다가 영 불편한지 뒤척인다.
    등을 돌리고 멀찍이 누워있는 종욱.

    효진 자니?
    종욱 ... 아뇨.
    효진 엄마랑 얘기 했어?
    종욱 ... 엄마 아닌 거 알아요.
    효진 그 아줌마가 그래?
    종욱 아닌 거 알고 있었어요.
    효진 그럼 왜 찾으러 다녔어.
    종욱 ...
    효진 엄마도 아니잖아.
    종욱 왜 버리고 갔는지 물으려고요. ... 엄마가 아니라서 버린 거냐고.
    효진 (덤덤히) 그래서 물어봤어? 왜 그랬대?
    종욱 안 물어봤어요.
    효진 왜?
    종욱 (그 아줌마 보니까) 불쌍해서요.
    효진 아줌마... 많이 힘들었었나봐. 그 아줌마는 도망친 거야. 널 버린 게 아니라.
    종욱 됐어요. 엄마도 아니면서.
    효진 근데 너, 엄마가 뭔데? 널 낳아 준 사람? 너 만든 사람?그게 중요하니?
    종욱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줌마는 엄마가 있잖아요.
    효진 그래, 난 엄마 있고, 나 니 엄마도 아냐. 우리 엄마? 나 울 엄마한테 원치 않았는데 태어났다고 맨날 그 소리 듣고 자랐어.엄마 없는 기분? 나 몰라. 그 아줌마 니 엄마 아냐. 아니 네 엄마라고 해도 이제 어릴 때 니가 아니듯이 그 사람도 더 이상 네 엄마 아냐. 야, 애처럼 그게 뭐냐?
    종욱 엄마 없다고 징징대는 거 아니에요.
    효진 넌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엄마한테 떠났어. 배처럼. 엄마는 저쪽 항구에 있다고.
    종욱 ... 책이요. 새학기 때 내 책이다 하고 받았는데... 누군가 낙서를 잔뜩 해놓은 책 받은 기분 알아요?(울먹이는) 낙서가 너무도 많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앞 장은 다 찢겨 나가서 읽을 수도 없는 책. 그 책이 나에요.
    효진 그래... 그래도, 니 책이잖아. 어쩔 수는 없겠지만 니 책이야. 네 거라고. 너한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책.
    종욱 ... 아줌마는 몰라요.
    효진 (귀찮은) 그래, 나 몰라!그리고 너 아줌마 아줌마라고 하지 마.
    종욱 ...
    효진 그냥 이모라고 부르든가. 엄마라고 듣긴 나도 그러니까, 엄마 친구라고 생각하고 이모라고 불러.

    #99. 아파트 (서영 집) / 낮

    주미, 거실 쇼파에 앉아 주방 쪽을 보며 신나게 이야기 중이다.
    주방에서는 서영(30대, 여)이 과일을 쥬스를 만들고 있다.

    주미 ... 진짜 웃기죠? 근데 전 여자애들이 더 어이없어요. 지난번 체육대회 때 반대표로 계주 할 때도 있잖아요, 걔들이...
    서영 (쥬스를 가지고 오며) 달리기도 잘하나 봐?
    주미 네, 저 완전 잘 달려요. (양팔 휘저으며 달리는 시늉)
    서영 멋지다, 운동도 잘하고.
    주미 수학 포기해서 그렇지, 옛날에는 저 반에서 5등 안에 들었어요. 그 뭐지? 아이큐도 높다고, 샘이 맨날 넌 머리가 좋은데 노력을 안 한다고 그랬거든요.
    서영 (웃음) 이거 좀 마셔봐.
    주미 (쥬스를 마시더니 인상을 좀 찡그리는)
    서영 왜? 이것도 못 먹겠어?
    주미 맛이 좀...
    서영 일부러 영양되라고 쥬스에 호두랑 이것저것 갈아 넣었는데. 너 좋아하는 요플레도 들어갔는데 별루야?어떡하니. 밥도 통 못 먹고. 잘 먹어야 할 땐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주미 음... 햄버거요. 그거 있잖아요, 새우버거.
    서영 햄버거? 패스트푸드는 아기한테도 그렇고 몸에 안 좋잖아.직접 고기 사서 다져서 해줄까?
    주미 아뇨, 아뇨. (냄새 나서 싫을 거 같은데...) 괜찮아요.
    서영 맞다, 그래도 이건 꼭 챙겨먹어야지. (약통서 한 알을 꺼내 건네주는) 자,
    주미 (씹어 먹는) 으.. 철봉 맛나요.

    #100. OO 아파트 (현관문, 출구) / 낮

    효진, 현관문 앞에 통계조사원 아이디카드를 목에 걸고 펜과 종이를 든채 서있다.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다가 벨 아래에 쪽지 ("아기가 자고 있어요. 벨을 누르지 마세요")
    를 보고 망설인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효진.

    여자 (소리) 누구세요?
    효진 (속삭이듯) 안녕하세요, 통계조사원입니다.
    여자 (문을 살짝 열어보는)
    효진 시에서 고용통계조사차 방문했는데요, 일전에 우편으로 알려드린 대로 표본가구 조사 대상에...

    CUT TO
    효진이 들고 있는 조사지를 함께 들여다보고 있는 여성(30대중반)

    효진 세대주분 성함이 안영희님 맞으시죠? 본인이세요?
    여자 네.
    효진 본인 맞으시고요, 응답자 분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죠?
    여자 칠십구년 이월 이십이일이요...

    - 아파트 출구
    통화를 하면서 아파트를 나오는 효진.

    효진(통화) 벌써 도착했어? 엄마한테는 너 다섯 시쯤 온다고 그랬는데. ... 그래? 공항서 버스타고 바로 올 거야?... 응, 그럼 도착하면 여섯시쯤 되겠네? ... 아니. 나도 그때쯤 끝나. ... 응, 집이랑 병원 가까워. 그래 이따 봐. 나도 가서 연락할게, 응.

    #101. 병원 (입원실, 휴게실) / 저녁

    -입원실

    명자 니는 뭐하러 이런 걸 다 사왔노. 아이고, 향 좋다. 요건 나중에 집에 가서 써야겠다.

    명자, 병상에 앉아 아들(성민, 28세)이 가져다 준 화장품과 건강식품 등 선물을 뜯어보고 있는 명자.

    명자 카나다서 아들이 왔는데, 이래 내가 누워있어서 우야노. 맛있는 거 해주야 될긴데.(옆에 탁상달력을 보며) 니 언제 간다고 했노?
    성민 25일 오후에.
    명자 그렇게 일찍 가나? 와, 온 김에 더 있다가 안가고.
    성민 그 담날에 가게 문 열어서 가봐야 돼. 레스토랑 공사 때문에 잠시 휴가 받은 거라서.
    명자 아이고. 니가 멀리서 젤로 고생이데이. 성민아, 그냥 니 한국서 호텔 같은 데서 일하면 안 되나.
    효진 걱정 마, 엄마. 성민이 있는 데가 밴쿠버서도 알아주는 데래. 우리나라 보다 거기가 훨씬 살기 좋아.
    명자 거서 좋은 아가씨 있음 하나 잡아 놔라. 내는 노랑머리도 괜찮다이.
    성민 엄만...
    명자 외국은 결혼도 다들 일찍 하잖아. 니도 이제 그 나이면 해야지.
    성민 결혼은 생각 없어요.
    효진 놔둬, 얘가 알아서 하겠지. 엄마는 왜 나보고는 (결혼) 하지 말라고 해놓고, 성민이한테는 막 일찍 가라고 해?
    명자 아들이랑 딸이랑 같나. (혼잣말처럼) 니도 나중에 애 낳아봐라.참, 갸는 별 일 없고?
    효진 별 일은 뭐가 있겠어.

    - 휴게실
    성민,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고는 효진 옆으로 가 건네준다.

    효진 너는?
    성민 난 됐어, 비행기에서 많이 마셔서. 엄마는 진짜 괜찮은 거지?
    효진 응, 다행히 병원 일찍 와서 지금은 괜찮아. 첨엔 난 또 감기 갖고 엄살인줄 알았는데 폐렴이더라구. 연세 들면 폐렴을 조심해야 한대. 앞으로는 폐렴 백신도 맞고 그래야할까 봐.
    성민 퇴원은 언제래?
    효진 의사가 경과 보고 말해주겠지.... 너 다시 회사 다닐 생각 없어? 너 정도면... 너무 아깝잖아.
    성민 별로.
    효진 그럼 넌 여기 와서 살 생각은 아예 없는 거야?요리는 여기서라도 할 수 있잖아. 여기 돌아오면 거기 경력도 알아주고 좋을 텐데.
    성민 (혼잣말하듯) 사람들은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만 보지, 내 행복은 별로 관심이 없더라.난 거기가 편해, 누나.
    효진 너 그 먼데서 아무도 없이 혼자잖아. 나중에 엄마도 엄마고. 그리고 우리도 있는데 언제까지나 엄마, 조카랑 같이 살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성민 ...
    효진 아, 모르겠다. 내가 오랜만에 널 만나서 붙잡고 뭐하냐.

    #102. 병원 입구 / 저녁

    효진, 병원 입구에 미리 내려 와있고, 성민이 가방을 들고 곧 내려온다.

    효진 짐이 이것뿐이야?
    성민 응, 잠시 있다 가는 건데 뭐.... 누난 그 아이랑 같이 지내는 거야?
    효진 응? ... 어. 그렇게 됐어. 아, 너 우리 집에 와서 자도 돼. 걱정 마.
    성민 아냐, 난 친구도 만나고 그러려고. 신경 쓰지 마.
    효진 그래... 하긴 니가 불편하긴 하겠다.
    성민 중학생이라고 그랬나?
    효진 이제 고1.
    성민 어때, 같이 사는 거?
    효진 별거 없어.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세탁기 돌리던 거, 지금은 두번씩 돌리게 되는, 그 정도?(대수롭지 않게) 괜찮아.
    성민 (웃음) 나한테 그럼 걔, 조카인가.
    효진 그치 삼촌이지.
    성민 삼촌이라... (어색한 웃음)

    #103. 아파트 (서영 집) / 오후

    주미, 현관 쪽으로 조심히 나가려고 한다.

    서영 어디 가?
    주미 (들켰다) 아, 저 그냥 밖에 산책 좀 할까 해서. 안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원래 많이 움직여야 좋대요.
    서영 같이 갈까?
    주미 혼자 갔다 올게요. 아줌마... 저랑 같이 다니면 좀 그렇잖아요?
    서영 (잠시 생각 중) 그래, 그럼. (현관문 렌즈로 잠시 밖을 보고는) 금방 올 거지? 조심히 갔다 와.
    주미 (경례하듯 이마에 손을 대며) 넵.

    #104. 아파트 (현관, 엘리베이터) / 오후

    현관을 열고 나오는 효진.

    효진 어머님, 나오지 마세요.
    지남모 (봉투를 넣어주면서) 선생님 이번 달 과외비요. 저... 그리고 수고비로 적지만 조금 더 넣었어요.
    효진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지남모 지남이 성적도 오르고 해서... 가게 때문에 애 신경도 못쓰는데 암튼 여러모로 고마워요.
    효진 제가 뭘.

    -엘리베이터 안.
    효진이 봉투를 살짝 열어서 금액을 보고 있다. 다행이라는 듯 뿌듯한 미소.
    엘리베이터 벨소리가 들리고, 주미가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서로를 몰라보고,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내려가는 두 사람.


    #105. 몽타쥬 - 슈퍼마켓, 놀이터, 버스정류장 / 오후

    -슈퍼마켓 계산대
    주미, 5개들이 묶음 야쿠르트 병을 내민다.
    모은 동전을 꺼내어 계산을 하는 그녀.

    -아파트 놀이터.
    주미,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야쿠르트에 빨대를 꽂아 차례로 마시고 있다.
    심심한 듯 앉아서 두리번거리다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종욱에게) 문자를 보낸다.

    -버스정류장 자판기 앞.
    효진이 자판기에서 종이컵을 꺼낸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커피를 홀짝이는 효진의 모습. 표정이 밝다.

    #106. 식당 / 저녁

    불판 위에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
    효진이 고기를 자르며 익은 고기를 골라 종욱 앞에 놔둔다.

    효진 타기 전에 얼른 먹어.
    종욱 (고기를 맛있게 먹는)
    효진 맛있네, 근데 양이 좀 작다. 우리 한 1인분 더 시킬까?
    종욱 (고개를 끄덕이는)
    효진 (종업원을 부르며) 저기요!

    CUT TO

    효진 너 독서실만 가도 되겠어? 얘기 들어보니까 자격증 같은 거도 따로 학원을 다녀야된다고 그러더라. 필요하면 얘기해. 부담 갖지 말고.
    종욱 네, 괜찮아요.
    효진 ... 넌 나중에 뭐 하고 싶어?
    종욱 (잠시 생각하다가) 가게 같은 거 하나 차리려고요.
    효진 (웃음) 무슨 가게? 돈 많이 벌어야겠다, 너.
    종욱 대단한 거 아닌데. 근근이 먹고 살 정도면 돼요.
    효진 (웃음) 뭐야, 시시하게. 남자 애가 고작 꿈이 근근이 사는 거야?
    종욱 할머니가 망하지만 않으면 근근이라도 먹고 사는 게 장땡이라 했어요.
    효진 가만히 보니까 웃긴 데가 있다, 너. (피식 웃는)가끔가다 엉뚱한 소리 하는 건 아빠랑 똑같네.

    고기를 먹던 종욱, 잠시 멈칫하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먹는데 열중한다.
    그런 종욱을 잠시 바라보다가 같이 고기를 먹는 효진.

    #107. 서영 차 안 / 낮

    차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며 누군가를 찾는 주미.

    주미 앗, 저기 있다. 아줌마 저기요.

    길가에 서있는 종욱(교복 입은) 앞에 서는 서영의 차.
    주미, 창문을 열어서 종욱을 부른다.
    차에 올라 주미 옆에 앉는 종욱.

    주미 인사해, 이모야.
    종욱 (어색한) 안녕하세요.
    서영 (함께 어색) 어... (유심히 쳐다보는)

    CUT TO

    주미 나 이제 배 많이 나왔지. 얘 발길질도 한다? 어떤 땐 자다가 얘가 차서 막 깨.
    종욱 진짜?
    주미 봐봐,
    종욱 (들여다보는)
    주미 배 모양 어때? 병원 가니까 아줌마들이 둥실둥실한 배는 아들이고 앞으로만 볼록 솟으면 딸이래.
    종욱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주미 너 산부인과 첨이지? 너 나 덕분에 다 가본다? 친구 잘 둔줄 알아.
    종욱 가봤어.
    주미 응? 언제? 너도 사고 쳤냐?
    종욱 ... 태어났을 때.

    룸미러로 종욱을 유심히 보는 서영.

    #108. 산부인과 / 낮

    초음파실에서 태아의 상태를 보고 있는 여의사.
    종욱과 서영, 누워있는 주미 옆에서 이를 보고 있다.

    의사 양수 상태도 좋고, 다 정상이네요. 건강하네요. 여기 심장 뛰는 거 보이시죠?
    서영 어쩜... 저 손가락 좀 봐.
    의사 발차기도 하네요. 손도 뻗고...
    서영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의사 알려주면 안 되는 건데.
    주미 (누운 채로) 저기요, 말 안 해줘도 돼요.
    의사 (웃음) 보자... 오늘은 탯줄로 가려서 잘 안보이네요. 담에 오면 알려줄게요.

    넋을 잃고 스크린 속 초음파 태아를 보고 있는 종욱.
    태아가 손을 뻗는 모습, 나란히 모은 발바닥.

    #109. 아파트 (서영 집) / 오후

    -작은방
    종욱, 초음파 사진과 주미의 배를 번갈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다.

    주미 그렇게 신기하냐?
    종욱 어.
    주미 너 담에도 같이 갈래? 나 혼자 여기서 열라 심심해. (회전의자를 빙빙 돌리며) 저 이모, 모차르트 음악만 틀어줘. 먹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 먹고.
    종욱 왜, 뭐 먹고 싶은데?
    주미 맥주! 아, 맥주마시고 싶다. 까스활명수도.
    종욱 (째려보는)
    주미 (오버하듯) 아, 불쌍한 내 신세. 물이나 마셔야지. 야, 나 물 좀.

    - 주방
    서영, 음식을 데우면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서영(통화) 사진 보낸 거 봤지? 우리 아기 넘 예쁘지? ... 응, 다 정상이고 건강하대. 참 자기, 울 애기 태명 한번 생각해봐. ... 몰라, 아직 성별은 안 알려주더라. 난 딸이었음 좋겠는데.
    종욱 (뒤에서 쭈삣거리는) 저기 물 좀...
    서영(통화) (못 듣고 계속 통화 중) ... 아니, 저 방에 그 친구랑 있어. ... 애 아빠는 아니고 그냥 여기 친구 같아. 응.... 이모라고 했지 뭐, 걘 모르는 눈치던데? 알았어, 걱정 마. ... 응, 그래? 걔가 좋아하려나, 모르겠네. 못 먹을 수도 있잖아. 다 우리 아기 위한 거라고 막막 먹여야겠다. (웃음) 암튼 다행이다. 자기, 어머님이랑 식구들한테 입단속 잘하고.

    -작은방
    종욱, 굳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온다.

    주미 야, 나 가슴도 커졌다? 임신하니까 가슴은 커져서 완전 좋아. 브라 큰 거 사달라고 해야겠다. (돌아보며) 물은?
    종욱 ...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현관
    신발을 신고 나가는 종욱.

    주미 (따라 나오며) 야!아줌마, 잠시만 저 나갔다가 올게요.

    #110. 아파트 비상계단 / 해질 무렵

    주미 누군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니가 내 맘을 아냐고.
    종욱 (한숨) 그래도 그게 아니지. 애를 남한테 그렇게 주는 게 아니지.
    주미 그럼 내가 키워? 어떻게? 고아원 보내? 어쩔 수 없잖아.
    종욱 너도 아기 봤잖아... 너 이러면 나중에 평생 후회해.
    주미 아니, 난 그런 거 없어.
    종욱 ....
    주미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그래. 내 뱃속에 든 아기고 내 인생이야.(계단에 주저앉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종욱 왜 울어...
    주미 (울먹이며) 니가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잖아. 내가 그렇게 나빠? 내가 왜 나빠? 나 안 나빠.
    종욱 그래 너 안 나빠. 미안해. 일어나.

    둘 사이 잠시 정적. 비상계단 창문을 내다보는 종욱.

    종욱 아 씨. 우리 어떻게 해야 되냐?
    주미 고마워.
    종욱 ?
    주미 우리라고 해줘서.

    #111. 효진 집 / 낮, 저녁

    -낮
    거실 바닥에서 총각김치를 담그는 중인 효진.

    효진 (레시피 종이를 보면서) 아, 맞다. 깜빡했네! ... 어떡하지. (휴대폰으로 정희에게 전화) 언니, 찹쌀풀 어떻게 만들어? ... 그런 거 없는데. 응? 밥으로? 오, 밥 갈아서 넣으면 되는구나. 땡큐.

    효진, 양념한 김치를 통에다가 옮겨 담는다.
    통 가장자리에 묻은 양념을 닦으려고 티슈를 찾지만, 다 떨어진 티슈통.
    작은방으로 가서 종욱 책상 위 티슈를 가지고 오는 효진.
    뭔가 본 듯한 그녀, 다시 가서 확인한다.
    책상 위 한 구석에 있는 사진. 주미의 아기 초음파 사진이다.

    -저녁
    굳은 표정의 종욱 얼굴 위로 효진의 목소리.

    효진(소리) 이게 뭐야?

    아무 말 없는 종욱.

    효진 너 진짜! 얘가 정말 큰일 날 애네.
    종욱 !
    효진 너 미쳤니? 이러면 어떡해.
    종욱 왜요? 내가 뭐 못할 짓 했어요?
    효진 (어이없는)
    종욱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효진 혹시 그때 걔야? 너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했어?
    종욱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데요? 항상 나만 보면 쟤 무슨 사고 안치나 그렇게 쳐다보잖아요.
    효진 됐고, 어떻게 할 거야?
    종욱 뭘요? 상관하지 마세요. 내 일이에요.
    효진 내 일?
    종욱 당신한테 키워달라고 안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라고요.
    효진 당신? 너 지금 나한테 그게 할 소리야?

    #112. 미란 집 / 낮

    미란, 효진이 싸온 작은 김치 통을 열어본다.

    미란 (색깔은) 그럴 듯한데? (맛을 보며) 음, 좀 짜긴 한데 괜찮다. 익으면 맛있겠네. 웬일이야, 김치도 다 담그고.
    효진 엄마가 병원에 있는데다가, 그냥 이래저래 한번 조금 해봤어. (심드렁) 그냥 너도 맛이나 보라고. 나, 커피 한잔만 주라.
    미란 우리 집에 믹스커피 밖에 없는데. 너 그런 거 안마시잖아.
    효진 요즘 나 돈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카페 끊은 지 오래됐거든.
    미란 진짜 우리 효진이 완전 살림꾼 아줌마 다 됐네.

    CUT TO

    미란 (종욱) 능력도 좋네. 누군 그렇게 계획했는데도 어렵게 되더니만.
    효진 휴.
    미란 난 이제 우리 애 똥기저귀 치우는데, 넌 벌써 할머니 되는 거야? (웃음) 축하해.
    효진 (커피를 마시며) 놀리지 마. 나 심각해.
    미란 걔 순진하게 생겨서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하다 얘.
    효진 조용하다 싶더니 또... 아이고 머리야.
    미란 아니 근데 걔는 언제 만나서 사고 친 거야?
    효진 말도 잘 안하는데, 나가서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내가 어찌 아냐.
    미란 이 바보야, 그런 것도 다 따지고 물어봤어야지. 애 엄마는 누군데?
    효진 몰라, 그 때 걔 같애. 중학교 친구.
    미란 그럼 걔부터 만나서 얘기 해봐. 막말로 누구 앤지 어떻게 아냐? 그 여자 애 좀 노는 애라며. 요즘 애들이 좀 영악하냐, 괜히 순진한 애한테 덤탱이 씌우는 애들 많아.

    #113. 아파트 (서영 집) / 낮

    주미 아, 파우더 냄새... 좋다.

    거실에서 서영이 사온 아기 용품과 물건들을 꺼내보는 주미.

    주미 (아기 신발을 꺼내보며) 너무 귀여워.
    서영 신발은 쓸 일 없다고 다들 사지마라던데 사 봤어. 예쁘지?아, 이건 전용 마사지 크림인데, 배에다가 발라 봐. 살 트는 거 방지해준대.
    주미 우와, (크림통을 보더니) 헉 이게 팔만원이나 해요? 되게 비싸다...
    서영 (뒤로 돌아 새로 산 CD 음악을 트는 중) 응? 세일이라 샀어.
    주미 그건 뭐에요?
    서영 (미소) 자연 음악인데 아기 뇌파를 안정시켜 준대.
    주미 아줌마... 그냥 신나는 음악 들으면 안돼요? 저번에 B1A4 듣는데 얘도 완전 좋아하던데.
    서영 그게 뭐야?
    주미 아줌마 아이돌 하나도 모르는구나. 걔네 (음악) 완전 좋아요. 들어볼래요?

    주미, 휴대폰에서 음악을 찾아 재생시키고는 손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서영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그녀.
    주미 흥겹게 계속 리듬을 타는데,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주미(통화) (헐떡이며) 여보세여, 네. 아, 안녕하세여! ... 아, 예.

    #114. 아파트 단지 앞 / 오후

    종욱이 가방을 매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선다.
    아파트동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종욱.
    보안 출입문 입구가 잠겨져있어 어찌할 바 몰라 망설인다.
    잠시 후 다른 사람이 들어가자 재빨리 뒤따라 들어가는 종욱.

    #115. 아파트 (서영 집) / 오후

    종욱, 벨을 누른다.

    종욱 안녕하세요, 저... 그 때... 주미 친구인데요.

    서영, 당황스런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온다. 그녀를 마주하는 종욱.
    서영 뒤로 집안에 주미가 지나다가 종욱을 보고는,

    주미 어, 종욱이다. 너 여기 웬일이야?

    #116. 롯데리아 / 오후

    주미 아, 우리 보리 보고 싶다. (형형색색의 꿈틀이 젤리를 먹으며) 이 아줌마는 맨날 유기농, 유기농. 어느 땐 내가 무슨 농장이 된 거 같아.

    주미 앞에 놓여있는 빈 햄버거 봉지.

    종욱 생각해 봤어?
    주미 있잖아, 아줌마랑 아저씨 좋은 사람들이야. 내가 대충 둘러대길 망정이지, 아줌마 아까 니 말 듣고 멘붕될 뻔 했어. 백종욱, 너 여전히 진짜 대책 없다.
    종욱 아씨, 생각해봤냐고.
    주미 (젤리를 열심히 뜯어먹으면서) 불쌍해. 있어보니까. 저 아줌마 안됐어.
    종욱 아기가 더 불쌍해.
    주미 야, 니 말대로 우리가 키우면 애기가 더 불쌍해지거든! 준비 안 된 우리들 보다 훨 나아.
    종욱 나, 집에도 얘기했어. 내가 키울 거라고. 내가 애 아빠라고 했어.
    주미 또 저 왕고집, 못말려. 나 아줌마한테, 아니 너희 엄마한테 얘기했어. 너 애기 아빠 아니라고.
    종욱 뭐야, 진짜?
    주미 아까 전화 왔길래 찬찬히 설명해줬지, 울 아기는 예수님처럼 나 혼자 임신한 거라고.
    종욱 아, 왜 그랬어. (고개를 푹 숙이는) 너 솔직히 얘기해. 진짜 나 아냐?
    주미 (대충 얼버무리며) 몰라, 아니거든.
    종욱 그래, 그게 중요하냐. 키우는 사람이 아빠지. 나도 책임이 있어.

    종욱의 울리는 휴대폰. 효진이다. 무시하고 안 받는 종욱.

    주미 너 그 아줌마, 엄마라고 불러?
    종욱 ... 아니.
    주미 그럼 뭐라 불러?
    종욱 그냥... 잘 안 불러.
    주미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종욱 뭐가?

    #117. 효진 집 근처 / 저녁

    주택가 쌈지 놀이터(#40.의) 그네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는 종욱.

    주미(소리) 너 그 아줌마 엄마로 생각 안하잖아. 너 그 아줌마랑 왜 살아?
    종욱(소리) 갈 데가 없잖아. 어른들이 나 빼고 자기들끼리 다 결정한 거야.
    주미(소리) 난 솔직히 애기가 지금 말만 한다면 물어보고 싶어. 누구랑 살고 싶냐고. 집으로 들어가던 효진이 그 앞을 지나다 종욱을 본다.

    CUT TO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효진 근데 넌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니가 걔 아빠도 아니라면서.
    종욱 ... 그게 뭐 중요한가.
    효진 니가 아빠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넌 지금 걔 보호자가 될 수 없잖아.
    종욱 그렇다고 어떻게 애를 그렇게 줘요?
    효진 그래, 누가 아길 책임질지 물어보면 너희가 우선일 수 있지만, 반대로 현실적으로 누가 그 아이를 키워서는 안 되나 따져보면 그 것 역시 너희야.

    종욱 ... 왜 (아줌마는) 저랑 같이 사세요?
    효진 글쎄다... 살아 보니까 뭔가를 선택하는 건 포기한다는 거 같아. 그 선택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거. 니가 아기를 책임지든 아니든, 둘 다 뭔가를 포기해야 돼.

    생각에 잠긴 종욱의 얼굴.

    #118. 효진 집 / 오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명자. 짐을 들고 뒤따라 들어오는 효진.

    효진 엄마 괜찮아? 왜 추운데 집까지 온다고. 정희 언니 올 때까지 그냥 거기 있자니까. 그러다가 또 감기라도 걸리면...
    명자 니가 차만 안 팔고 놔뒀어도 요럴 때 딱 써먹었을 긴데. 내가 뭐랬노. 집이 썰렁하네.
    효진 춥지? 보일러 금방 킬게.
    명자 (냉장고로 다가가 열어보는) 우째, 뭘 해묵고 사나?
    효진 울 엄마 또 검열 나오셨네. 오늘은 그냥 쉬어 엄마.따뜻한 유자차라도 줄까?

    CUT TO
    차를 마시는 명자와 효진.

    명자 니 약은 잘 먹고 있나?
    효진 응? 무슨 약?
    명자 갑상선약.
    효진 어떻게 알았어?
    명자 내가 모르는 게 어딨노. 엄마는 니 눈빛만 봐도 다 안다.
    효진 먹고 있어. 별 거 아니래. 그냥 비타민처럼 계속 먹으면 된 대.
    명자 거 봐라, 다 내가 잘 챙기 먹어라 할 때 내 말 잘 들었으면 그런 것도 없을 긴데. ... 좀 있으면 벌써 백서방 기일이네. 니 제사는 어째(어떻게) 지내고 있나?
    효진 ...
    명자 불쌍한 사람... 별달시리 남은 가족도 없는데, 꼭 챙기주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욱.
    종욱, 명자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명자 (방으로 들어가는 종욱에게) 니 잠깐만. 이름이 종욱이라고?
    종욱 ... 네.
    효진 (어색한지 휴대폰을 꺼내 보며) 정희 언니는 출발했다더니 차가 많이 밀리나.
    명자 (종욱에게) 자주 못 보는데... 잠시만 있어봐라, (지폐를 몇 장 꺼내어서 주는) 필요한 데 써라. 퍼뜩.

    종욱, 어리둥절한 채로 명자가 주는 돈을 받는다.

    #119. 차 안 / 저녁

    운전 중인 정희.

    정희 (뒤를 보며) 이모, 피곤하실 텐데 가는 동안 좀 거기 누우세요.
    명자 아이다, 괜찮다.
    정희 아까 인사하던 걔가 효진이, 그 앤가 봐요? 잘 생겼더라.
    명자 인물은 괜찮재?
    정희 (고개를 끄덕이며) 착하게 생겼던데요.
    명자 (창 밖을 보는) 효진이 쟈만 생각하면... (한숨) 그래도 저래 (효진이) 혼자 사는 기 보다 둘이 있는 게 안 낫지 싶다. (내가 이번에) 진짜 죽을 상 아파 보이까... 저것도 나중에 누구라도 옆에 있으면 마 쪼매라도 챙기주지 않겠나 싶은 게...... 으이구 차라리, 딸내미를 놔두고 가지.
    정희 (웃음) 대신 든든하잖아요.
    명자 다 지 복이지 뭐. 얼른 옆에 남자가 생기야 될 낀데... 모르겠다, 마 저래라도 있는 것도 자기 복이다.

    명자의 시선. 차 창 밖 지나가는 풍경들.

    #120. 케이크 전문점 / 오후

    -효진, 진열대에서 케이크를 보면서 고르고 있다.

    -계산대

    점원 초는 몇 개 넣어 드릴까요?
    효진 아, 그게... (생각하다) 이제 마흔 살인데...

    #121. 서영의 차 안 / 오후

    주미, 차 뒷좌석에서 휴대폰을 움켜잡은 채로 진통으로 신음을 지르고 있다.

    서영 (운전 중 뒤돌아보며) 괜찮니? 숨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 해봐. 아, 119를 부를 걸 그랬나.

    #122. 시내버스 안 / 오후

    효진, 케이크 상자와 설렁탕이라고 적힌 종이가방을 들고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조는 중.
    졸다가 깬 효진. 옆 자리에서 누군가 아는 척을 하는데, 정우다.
    효진, 깜짝 놀라서 말없이 눈인사를 건넨다.

    정우 요즘 바쁜가 봐요? 누나가 (효진씨) 궁금해 해요.
    효진 네, 조금.
    정우 저 담 주에 여행가요.
    효진 (그걸 왜 말하지? 반응) 네?
    정우 그러니까 이제 불편해 말고, 와서 편하게 커피 마셔요.
    효진 그쪽 때문에 안 간 거 아녜요.
    정우 그럼, 왜?
    효진 (쿨하게) 돈 없어서 안 갔어요.
    정우 아, 네. (약간 당황하다가 이내 웃는)
    효진 (따라 피식 웃는)

    #123. 산부인과 / 오후

    병원 대기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편안하게 앉아있는 주미.
    누군가를 보고는 손짓을 하는 그녀. 급하게 뛰어서 들어오는 종욱이다.

    주미 이상하지? 신기하게 병원만 오면 진통이 멈춘다니까.
    종욱 (못 말린다는 표정) 야, 뭐야.
    주미 미안. 아깐 진짜 애나오는 줄 알았다구.
    종욱 그럼 언제 나온대?
    주미 몰라, 아줌마가 그러는데 일주일 만에 낳는 사람도 있고, 한 달 걸리는 사람도 있고 다르대.

    #124. 효진 집 (현관, 거실) / 저녁 (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욱.

    효진 (설거지를 하다가 종욱을 보고) 비 다 맞았네? 우산 없음 연락하지.
    종욱 괜찮아요.
    효진 씻고 와, 잠시 아빠 그거 하고 밥 먹자.

    식탁에 놓인 케이크를 보는 종욱의 시선.

    CUT TO
    거실 한쪽, 아담한 상에 경수의 사진 액자와 초코케이크가 놓여있다.
    효진, 케이크를 앞에 두고 초를 꽂을까 말까 망설인다.
    전자레인지 종료 벨소리가 들리고 종욱이 설렁탕 데운 것을 가지고 온다.

    효진 뜨겁지? 조심해.
    종욱 (상에 그릇을 놔두면서) 케이크는 왜...?
    효진 오빠가 초코케이크 좋아했거든.
    종욱 아빠가요?
    효진 웃기지? 아이처럼 좋아했어. 뭘 해야 할 지 몰라서 그냥 좋아하는 거 놔뒀어. 내가 요리도 잘 못하긴 하지만.
    종욱 설렁탕도 좋아했어요?
    효진 옛날 생각이 나서. 이 집에서 오빠가 설렁탕 사줬거든. ... 아기 가졌었는데, 자연유산 됐어. 그 때 병원 나와서 오빠가 몸보신해야 한다고 데리고 갔었는데...
    종욱 (그럼 이제) 다 된 거예요?
    효진 응. (웃음) 촛불이라도 켜놓을까?

    촛불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효진 제사네, 제사. ... 실은 처음으로 오빠 기일 챙겨. 그동안 일부러 안 지냈거든. 진짜 떠나보내는 거 같아서. 뭐랄까 그러면 오빠가 정말 죽은 거 같았어. 장례식 때도 난 눈물이 안 나더라. 남들이 나보고 수근 거렸어. 안 운다고. 기억나? 그 때 너 보니까 너도 안 우는 거야. 너야 어리니까 그랬겠지만, 너 보니 왠지 안심이 되더라. 우습지? 나중에 화장할 때도 울지 않는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더라.
    종욱 왜 안 울었어요?
    효진 지금도 난 니 아빠 생각하면 눈물이 안나. 미안해서. 내가 울면 미안해서.
    종욱 (다 녹는 촛불을 보며) 불 꺼요?
    효진 그래.
    종욱 (초를 치우는)
    효진 제사 별 거 없네. 앞으로 이제 이렇게 우리 둘 지내자.

    #125. 입원실 / 오후

    병상에 누워있는 주미 옆에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종욱.

    종욱 나 학교에서 오늘 주민등록증발급 받았다.
    주미 너네는 학교에 와서 해주나 보네. 어디 봐.
    종욱 싫어, 안보여 줄 거야.
    주미 치, 아직 어린 게. 난 벌써 받았거든요. ... 너, 애기 봤어?
    종욱 응. 진짜 못생겼더라. 너 닮았어.
    주미 다행이네. 니가 훔쳐 갈까봐 걱정 했는데.
    종욱 데려가려고 했는데 못생겨서 안 키울 거야.
    주미 (종욱 머리를 때리려는)
    종욱 (막으면서 같이 때리려는 시늉) 야, 오늘은 내가 봐준다.
    주미 (점점 심각해지는 얼굴) 그렇게 못생겼어?
    종욱 농담이야, 나도 아직 못 봤어. 실은 너 보러 온 거야. 근데 너 (아기) 진짜 안 볼 거야?
    주미 응. 안 볼래. (한숨) 못 보겠어. (표정이 어두워지는)
    종욱 그래도 엄마잖아. 이제 못 봐도 괜찮아?
    주미 (잠깐 한숨을 쉰 뒤)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해 봤는데,우리 그냥 아기를 주는 게 아니라... 아기한테 좋은 가족을 선물해주는 거잖아.괜찮아.

    #126. 시내버스 안 / 오후

    차가 막혀 정차해 있는 버스 안.
    효진, 앉아 있다가 문득 창밖을 내다본다.
    인도 쪽, 초봄 햇살 아래 친구들이랑 짓궂게 장난을 치면서 웃으며 걸어가는 나영.
    차창 밖의 그녀들을 보고 있던 효진,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는다.

    #127. 병원 (복도, 신생아실 앞) / 오후

    -복도
    가방을 매고 걸어 나오던 종욱, 갑자기 복도를 되돌아간다.

    -신생아실 앞
    신생아실 창 앞에 서영 부부가 있고, 창 안쪽에서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부부를 향해 서있다.
    아기 모습에 푹 빠져 있는 부부 곁으로 종욱이 (시선은 아기에게 고정된 채) 서서히 다가선다.
    종욱, 아기 얼굴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서서히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다.

    간호사가 아기를 데리고 가자, 그제야 서영과 종욱, 서로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종욱,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간다.

    #128. 효진 집 근처 / 해질 무렵

    집을 향해 걷고 있는 종욱.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효진의 뒷모습. 양 손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종욱, 효진에게 다가가 한 손에 든 짐을 빼앗아 든다.
    티격태격 사이 좋아 보이는 둘의 모습.

    엔딩곡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 The Hollies>의 커버곡)이 흐르며, 엔딩타이틀.

    <끝>
    이동은

    이동은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 이정향 영화감독

    예년에 비해 본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은 나아졌으나 최종심에서 우열을 가릴만한 작품들은 없었다. 이견 없이, 고민 없이, 두 심사위원이 채 의자에 앉기도 전에 '당부'로 의견 일치를 봤다. 나머지 작품들은 수준이 비슷하였기에 심사평을 위한 후보작을 고르는 게 더 어려웠음을 밝힌다.

    당선작인 '당부'는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면서도 필요한 말은 다 전달하고 있는 느낌을 주며, 맞춤법도 정성을 기울여 거듭 점검한 세심함이 드러난다. 주인공이 처한 입장과 양아들의 처지가 연결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상대를 치유하는 설정이 긍정적이고 매력 있다. 제목이 내용을 거듭 생각하게 만들며,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주제가 몇 배 더 크게 다가온다. 다만 작중 인물인 '오연화'가 주인공의 남편과 무슨 관계인지 모호하다. 그녀의 존재를 알고 나서 주인공이 겪어야할 혼란이나 고민이 있을 법한데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골드 Miss'는 무리 없이 흘러가지만 상투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진 않다. 사랑 이야기지만 전형적인 미남미녀가 등장하지 않는 점도 신선하다. 꽃님 모녀의 대사도 맛깔스럽다. 하지만, 꽃님은 강현우가 자신의 거짓말을 알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어쩌자고 라디오 방송에 실명으로 자신의 사연을 낱낱이 써서 보냈을까?

    '생각하는 방'은 애매모호함이 장점이면서도 단점으로 작용했으며, '홈 스위트 홈'은 공포극으로 자극적인 흥미를 주나 여러 군데 개연성 부족으로 많은 의문을 남긴다. '나의 인디언'은 주인공 여성이 재력이 없었다면 이런 사랑이 가능했을까 싶은 의심을 사기에 좋은 주제가 빛을 잃는다. 당선자를 비롯해 본심 진출자들의 건투를 빈다.
  • 이동은

    이동은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지난 한 해 동안 '상처'를 주제로 두 작품을 썼습니다. <당부>는 그 두 번째 작품입니다. 작품을 마무리 하고,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는 한 영화의 장소 헌팅차 강원도를 찾았습니다. 눈이 쌓인 어느 어둑한 산길을 지나면서 <당부> 속 주인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지나갔을 눈길이 아마도 이런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당선 소식 연락을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작품 속 인물들이 어디에선가 실제 살고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강하게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인물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는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이 외롭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들에게 가졌던 미안함을 이제 조금은 덜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익숙한 요즘입니다. 고단하고 힘든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그럴수록 외롭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의 이야기'만큼 '당신의 이야기'가 소중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함께 이야기 하면서 위로받고 한걸음씩 살아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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