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이교도

by  고송석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1.


    동네사람들은 그를 이교도라 불렀다. 성이 이인 점은 틀림이 없지만 이름은 불확실했다. 간간이 양명학이니, 현학수니, 고상학이니 하는 이름을 듣고는 헛웃음을 짓고만 적은 있지만 설마 이 성에 ‘교도’라는 이름이 붙기까지야 하겠는가 생각했다.

    동네사람들은 누구나 늘 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비난하거나 의심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교도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어딨어?이교도처럼 인사불성인 사람도 있을까요? 이교도처럼 여자 친구 한명 없이 사는 꼬락서니 하고는 쯧쯧이교도는 뚜렷하게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네이교도 하는 짓이 어딘가 수상쩍지 않아요? 이처럼 이교도는 동네 사람들 입에 즐겨 오르내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부정적인 인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으니만치 그런 그를 사람들이 ‘이교도’란 이름으로 불러준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내가 그 비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교도라는 이름의 작자를 처음 만난 것은 재작년 봄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중소기업에서 대대적인 인원 감축을 단행했는데, 그 여파가 내가 속한 홍보부로 가장 크게 밀어닥쳤다. 홍보부는 이름만 남기고 다른 부서에서 겸함으로써 몇 명만 다른 부서로 이전하고 나머지는 전원 퇴직당하고 말았다. 나 역시 홍보부에서 감원 대상이 됨에 따라 대리 직함을 끝으로 회사에서 떠밀려 나와야 했다. 나는 당장 살던 집의 전세 보증금을 빼서 방값이 비교적 싼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내가 간신히 둥지를 튼 곳은 반 지하 월세방이었다. 다행히 아직 홀몸이어서 따로 벌이를 하지 않아도 당분간 취직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통장에 들어있는 퇴직금을 까먹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반 지하 월세방에는 방이 세 개가 있었다. 그 중 한 방에 이교도가 진작에 들어와 살고 있었으며 내가 이사 오고 난 후 다른 방에도 남자 대학생이 새로 들어왔다. 이교도는 철문 쪽에 그리고 대학생은 안쪽의 세면장 쪽에 나는 이교도 방의 옆이자 대학생 방의 맞은편에 방을 차지했다. 내 방이 안방이었으므로 월세가 다른 방에 비해 몇 만원은 더 많았다. 예전에 비하면 방값 지출이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서 당분간 그대로 살기로 했다. 전에 원룸에 혼자 살다가 세 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월세방으로 이사 오면서 혹시 불편한 점이나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음이 판명됐다. 한 달여 지나가도록 수인사조차 안 하고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시피 했고 어쩌다 계단 위로 올라가다가 마주쳐도 서로 무덤덤한 표정을 지울 뿐이었다.

    이로써 세 명이 한 공간에 살았지만 원룸에 사는 것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세면장에서 세 명이 자주 부딪힐 수 있었지만 서로 상대방의 이용 시간대를 배려해줌으로써 부딪히는 일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특히나 전공이 불분명한 대학생은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꺼려했다. 간혹 세면장에 가려고 그와 내가 동시에 방문을 열 경우 그쪽에서 슬그머니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먼저 세면장에 들어가 있을 경우 어김없이 문을 닫아걸었던 것도 그 대학생이었다. 이에 반해 이교도는 간간이 좁은 거실에서 나와 부딪히는 일이 있었지만 그쪽에서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대신에 내가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이교도는 세면장 문을 살그머니 열어두어 안쪽에서 세면하는 소리가 밖으로 들리도록 하는 쪽이었다. 나는 문을 열어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보고, 삼분의 일 가량 열린 세면장 문 안쪽에서 수돗물 소리가 들려오면 이내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세 명이 한곳에서 살았지만 서로 거의 완벽하게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생활이 이어지면서, 나는 이교도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키워나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주인아줌마가 이씨라고 하다가 이내 이교도 총각이라고 바꿔 부른 게 기억에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그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곳은 또 있었다. 내가 아침저녁을 해결하는 골목 앞의 분식점 아주머니도 이교도라는 이름을 불렀다. 물론, 그 앞에서 대놓고 하는 게 아니라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막 분식점에 도착했을 때 그가 음식 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고 내가 자리를 잡으려니 가게 아주머니와 아르바이트 여대생이 서로 소곤거렸다.

    이교도가 오늘도 김치찌개를 드셨나? 자리도 맨날 저쪽 지정석이구.

    오늘도 어김없이 이쑤시개를 물고 가잖아요?

    그 둘이 서로 숙덕이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인사를 해도 듣는 시늉도 안 해요.

    전 인사를 하면 잘만 받아주던데요. 그 하회탈 같은 표정의 웃음 있잖아요?

    이교도가 여대생은 좋아하고 아줌마는 싫은가 보네.

    한번은 점심시간에 분식점에 들어오는 이교도를 보았다. 그때 나는 미리 한쪽 구석에 옹색하게 자리를 잡고 볶음밥을 먹고 있었다. 대개의 식당이 그렇듯이 점심 시간대에는 식당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기 마련이고 이 때문에 식당 측에서는 손님에게 일일이 자리를 지정해주기도 한다. 한명의 손님일 경우 가장 구석의 비좁은 식탁을 지정해줌으로써 많은 손님을 확보하려고 애쓴다. 이 작은 분식점도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된 분식점의 아줌마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교도보고 티브이 바로 앞의 일인용 식탁을 지정해 주었다. 내가 듣기에 그것은 ‘권고’가 아니라 거의 ‘지정’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런데, 이교도는 들은 척도 않고는 티브이가 대각선 방향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 쪽의 4인용 식탁에 턱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티브이에 고정시켜둔 채로 나지막하게 ?김치찌개 주세요.? 했다.

    곧이어 손님들이 왁자지껄하게 몰려들어왔다. 주택가라서 그런지 평상복을 입은 사무직 쪽의 여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여사원 서너 명에 한두 명의 남자 간부가 끼어들어오곤 했다. 그렇게 들어온 손님들은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삼천오백원에서 사천 원짜리 식사를 했다. 유독 이교도는 그들 틈바구니에서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 저 혼자 네 명분의 식탁을 독차지하고서 황제처럼 느긋하게 식사를 하니, 분식점 아줌마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다행히 식당의 자리는 다 차지가 않았다. 나는 급히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아줌마가 내뱉는 말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이기적인 사람……. 괜히 이교도겠어?

    그때 처음으로 나는 이교도라는 인간의 한 면모가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식점 아줌마의 선언과도 같은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그에 관련된 많은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증거는 그 이전에도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때에는 그것들이 그냥 그 자체로 따로 따로 떼어진 것으로 여겨졌을 뿐이었는데, 분식점 아줌마의 선언적인 말 이후로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완결된 의미를 띠게 시작했다. 가령, 세면대에 너저분하게 비누거품에 엉킨 머리카락을 묻혀놓는다든지, 샤워 후에 타일 바닥과 나무문에 온통 물로 범벅이 되게 한다든지, 냉장고의 식수통에 입을 댄 채로 물을 마신다든지, 신발 두 켤레를 동시에 현관 입구에 벗어놓음으로써 항상 그 공간을 비좁게 만든다든지, 새벽까지 라디오를 틀어놓아 그 울림이 내 달콤함 잠을 깨워놓는다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의미로 집약되었다.

    이교도는 이기적이구나.

    결정적으로 주인아줌마가 내뱉는 말이 그 증거에 힘을 실어주었다. 어느 날인가 주인아줌마는 이교도가 남긴 흔적 하나하나를 예로 들면서, ?이교도 총각 너무 이기적이야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자기 혼자만 사는 것도 아니구.? 하는 말을 했다. 물론 이교도가 외출 중이고 아직 내가 방안의 이불 속에서 옴찔거릴 때였다. 그러면서 아줌마는 거실과 냉장고 세면장을 청소했다. 엄격히 말해 이곳은 월세 방이기 때문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은 자기 방만 청소하면 끝이다. 게다가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다달이 세탁비로 몇 만원을 더 얹어 방값을 지불하기 때문에, 아줌마는 삼사일에 한 번씩 세탁한 옷을 바가지에 넣어 방문 앞에 놓아준다. 이로 인해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청소는 당연히 아줌마가 하는 것으로 인식해버렸다. 며칠 전에 세면대가 막힐 때도 주인아줌마가 동네 종합 수리점 주인을 데려와 수리를 해주었다. 그런데도 유독 이교도에 대한 푸념과 비난만은 그치지 않았다.

    이기적이니까 여태 여자 하나 못 사귀었지. 쯧쯧.



    2.


    총각은 인사성도 바르고 온순해서 여자도 잘 따르겠어. 이교도 총각은 웃어른을 봐도 인사도 안하고 세면장도 청소 한번 안하는데, 총각은 안 그렇잖우? 총각 같은 사람만 세 들었으면 좋겠어. 나도 편해서 좋구 말이야. 정말 이교도는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지 모르겠어. 월세만 꼬박꼬박 안줬어봐라 내가 그냥 살게 놔두는지……. 저런 사람하고는 상대를 하지 말아요, 총각.

    아줌마가 연달아 내뱉는 말을 무심코 듣다가 번뜩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아주머니! 이교도라는 사람의 이름이 따로 없습니까? 왜 본래 이름을 놔두고 이교도라고 하세요? 이교도가 본명인가요?

    막 세탁할 옷을 바구니에 꾸역꾸역 비집어 넣던 아줌마가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이름을 알려줘야지. 그냥 이씨라고 부르라고 해서 이씨 이씨 하다가 요 앞의 분식점에서 이교도라고 하기에 나도 이교도라고 따라 부르게 됐지. 거긴 이교도의 단골집이잖아.

    그 말을 듣고 나니, 단골집에서 그의 본명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줌마가 부르는 대로 그의 본명이 이교도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흔히 하숙집에서 여러 명이 모르는 사이로 지낸다 해도 집으로 배달되는 각종 우편물을 보면 상대방의 이름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달이 지나도록 나는 그에게 배달되는 우편물에서 그의 이름을 알아 낼 수 없었다. 보험료 납부고지서나 휴대폰 사용내역서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우연히 내가 세든 방 103호의 우편함에 수취인 이름으로 ‘Mr. Lee’라고 적혀 있는 우편물을 보긴 했다. 남자 대학생의 성이 분명히 최이니까 그 우편물의 주인은 이교도임이 틀림없었다. 그때 말고는 우편함에서 그에게 배달된 우편물을 볼 수 없었으니, 어쩌면 그가 우편물이 배달되는 족족 먼저 수거해간 것이거나 아니면 애초에 우편물이 단 한통도 배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교도의 본명에 대한 의문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었지만, 그 즈음 내 생활이 하도 단순하고 무료하게 반복되다보니 심상치 않게 내 마음 한 귀퉁이를 잡아 늘어졌다. 아홉시 전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하고 골목 앞 분식점에서 아침을 들고 인근 도서관에 가서 자리를 잡는 게 반복되는 일과였다. 구석 진 자리를 잡아 놓고 토익공부에서 시작해 시사 상식 등을 공부해나갔다. 이 정도의 준비를 해두면 웬만한 회사 시험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다만, 치열한 경쟁률과 늘어가는 나이가 문제였다. 점심시간을 전후해서는 정기 간행물실에 들러 여러 종류의 신문을 모조리 훑어 내렸다. 그리곤 열시 가까이에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서 티브이를 보다가 자는 것이 그 즈음의 내 일상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어느새 익숙해지면서 잔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교도의 본명에 대한 의문이 마치 갈증처럼 강렬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체 본명이 뭐지? 왜 그것을 안 밝히는 걸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근 한 달여 살다보니 호기심은 집요한 의혹으로 뒤바뀌어졌다. 결정적으로 내가 그의 이름에 대한 의문에 집착하게 된 것은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려대는 늦은 저녁이나 새벽에 연달아 귀가하던 이십대 초반의 여성들이 둔기에 맞아 절명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사건의 현장에서 일 킬로미터 반경에 내가 사는 벽돌집 빌라가 속해있었다. 경찰은 피의자가 정신질환을 앓는 독신 남성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합동 수사본부가 인근 원룸 지역을 집중적으로 탐문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으슥한 골목 귀퉁이마다 형사가 잠복근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경찰은 주변 중국집을 상대로 남자 혼자 사는 곳 중에 의심이 가는 곳에 음식을 배달한 적이 있는지를 탐문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연일 요란하게 방송되는 그 사건 뉴스를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보고 있는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내가 머리를 기댄 벽 너머에 살고 있는 미지의 남자, 아니 이교도라는 자에게 의심이 갔다. 하지만 심각하게 그 문제를 고려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교도가 생각나면 혹시나 하는 의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는 분식집에서 아침을 들다가 가게 주인아줌마에게 여쭤보았다.

    이교도란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그랬더니, 김밥을 말던 아줌마가 눈을 한번 찡긋거리고는 말했다.

    내가 언제 이교도 이름을 안다고 했어? 사람들이 이교도라고 하니까 나도 이교도라고 부르는 거지. 가만 총각이 사는 빌라 주인아줌마가 그랬던가…….

    그때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이 까르르 웃으면서 주방 앞에서 카운터로 사슴처럼 뛰어나왔다.

    아줌마, 그거 아줌마가 붙인 거 아니었어요?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 이름이 이교도겠어요?

    김밥을 다 말고 옆의 김밥 위에 올려놓은 아줌마가 앉은 채로 의자를 돌렸다.

    가만 내가 언제 그런 이름을 붙였니? 내가 언제. 나도 누군가에게서 들은 건데. 분명히 이교도라고 들었어. 빨간 벽돌집 빌라 아줌마가 여기 와서 그 총각 이름을 이교도라고 한 게 아니었나? 아무튼 나도 누군가 그렇게 부르기에 나도 따라 부른 거야. 이교도라고.

    나는 볶음밥에서 작은 당근 한 토막을 포크로 꺼내 요리조리 돌려보다가 쿡쿡 찔러댔다. 포크를 내려놓고 나서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연쇄 살인 사건 현장이 나오고 있었다. 경찰은 피의자가 정신질환자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인근 지역의 정신질환자에 대한 소재 파악에 나섰다는 것이다. 나는 마치 형사가 된 양 머릿속으로 살인 사건과 이교도와의 연관성을 추측해 나갔다. 그리곤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나왔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니 아줌마가 불러 세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교도 이름 있잖아, 세탁소 아줌마가 부른 것 같아.

    곧바로 세탁소에 들러보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총각 자기가 이씨라고만 알려줬어. 근데 동네 아줌마들이 이교도라고 부르기에 나도 그렇게 알고 있지.

    이교도라 불리는 사내의 이름은 불확실한 것이었다. 다만 그 사내는 언제부터인가 이교도로 불리고 있었다. 내가 사는 빌라에서도, 분식집에서도, 세탁소에서도, 동네 종합 수리점에서도, 농협할인매장에서도 그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어찌된 이유에서 그 사내가 이교도라 불리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교도야말로 그 사내의 이름으로 참 그럴싸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 사내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온 적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빌라 아줌마하고 매달 말에 정기적으로 만나서 월세를 지불하는 일도 그에겐 찾아볼 수 없었다. 매달 그의 통장에서 월세가 주인아줌마 통장으로 이체가 되기 때문이었다. 유독 이점만큼은 이교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주인아줌마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없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내가 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이교도는 쓰윽 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신하고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말없음과 연관이 되는지, 그의 방에는 티브이가 없는 듯했다. 아침저녁으로 벽 너머에서 전해오는 소리는 라디오 방송이거나 오디오 음악이었다.

    언젠가 내가 봄 감기에 걸려 하루 종일 방에 드러누워 지낸 적이 있었다. 활동하기에 불편할 정도로 심하게 앓은 것은 아니었지만 감기를 핑계 삼아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그간 기업체 홍보부나 광고회사 몇 곳에 온라인으로 이력서를 넣어보았지만 단 한군데에서도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가 없었다. 약국에 들러 종합감기약을 사 먹고 도서관으로 가는 도중에 집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몸 전체에 나른함이 퍼져 오르면서 갑자기 메스꺼움이 일어났다. 뾰족한 대책 없이 토익과 시사상식에만 파묻혀지는 내 신세가 갑자기 불쾌해졌다. 그리곤 다시 집으로 돌아와 푹 곯아떨어졌다.

    점심시간을 지날 때쯤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전 시간에 침대에 드러누워 있기는 일요일이나 국경일 말고는 처음이었다. 눈을 멀뚱멀뚱 뜨면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소리들이 파충류처럼 꿈틀대는 듯했다. 가장 뚜렷하게 내 가슴팍으로 내려 꽂혀오는 것은 물방울 소리였다. 세면대의 구부러진 배수관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였다. 막힌 세면대에서 미처 다 빠져나가지 않은 물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얼마 전에 누군가가 세면장에 있었을 것이다. 배수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덮으면서 고양이 한 마리의 울음이 흘러왔다. 반 지하 빌라의 창가 주위를 맴돌면서 간간히 울음을 토하던 고양이는 담장 너머로 훌쩍 뛰어넘는 소리를 남기고는 사라졌다.

    다시 물방울 소리가 내 미간에 뚝뚝 점을 찍는데, 돌연 여자의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통을 꿰뚫는 짜릿함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왔다. 여자는 짜릿함에 흠뻑 젖어 가느다랗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대학생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여자의 신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여자와 남자 대학생이 소곤소곤 주고받는 음성이 잠깐 들리고 나서는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숨을 죽인 채로 귀에 집중을 해보았다. 더 이상 남자 대학생의 방에서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들렸다. 잠깐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곤 벽 너머에서 치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원불교 방송이 들려 나왔다. 벽 너머로 간간이 들려오던 방송이었다. 대종사께서 말씀하시길.……. 이런 말이 반복되어 나오곤 했다. 조금 뒤엔 라디오 방송 대신 음악이 들려왔다. 뉴에이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음악이었다. 한 20여 분 그 음악이 흐르고 나서,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세면장에서 수돗물 소리가 들렸다. 다시 방문이 열리고, 음악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연달아 방문이 열고 닫히고, 철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각에 이교도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항상 이교도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내가 아침에 나갈 때 보면 이교도의 검정 단화나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저녁에도 이교도의 신발들이 있을 때가 있지만 대개는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교도의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방송과 음악은 몇 부류로 요약할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 들려나오는 방송은 거의 원불교 방송이었다. 조금 세심히 신경을 써서 들어보면 간혹 기독교 방송도 흘러나왔다. 음악은 국악이나 뉴에이지 쪽이었다. 국악도 그렇지만 뉴에이지 역시 내가 들어본 음악은 거의 없었다. 다만 느낌으로 볼 때 분명 그것은 뉴에이지로 묶일 수 있으리라는 단정을 내릴 수 있었다. 기업체 홍보부에서 몇 년간 근무하면서 잡다하게 섭렵한 내 교양을 전제로 할 때 분명히 그렇다. 시크리트 가든이나 유키 구라모토, 엔야 정도의 대중적인 뉴에이지 음악은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귀에 익은 음악은 자주 듣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해금이나 가야금 대금 등을 반주로 사용하는 퓨전 뉴에이지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만한 정도면 이교도가 뉴에이지 음악에 상당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교도의 신원 불명확성과 말없음은 그가 자주 듣는 원불교 방송, 국악 그리고 뉴에이지 음악과 하나로 잘 묶여지는 듯했다. 근 한 달여 간 한 집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몽롱한 아이덴티티와 그의 방에서 울려나오는 신비로운 소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조화로움의 정체며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설마, 인근 지역에서 발생하는 연쇄 살인범의 정신 착란 상태가 그것인지, 아니면 빌라 아줌마가 비아냥거리듯이 이기적이고 유아독존적인 심리 상태가 그것인지, 아니면 세상하고는 담을 쌓고 자기만의 내면세계를 고집하는 정신 상태가 그것인지, 그 어느 것에도 확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이 같은 이교도에 대한 호기심은 어찌 보면 정신적 소모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약화되기는커녕 더 거센 물살로 솟구쳐 나왔다. 나도 모르게 세면장에서 그의 물건과 그가 남긴 흔적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하는 습성이 생겨났다. 비누의 경우는 특정 제품만을 고수하지 않는 듯했다. 다이알 비누에서 오이 비누, 인삼 비누 등을 볼 수 있었다. 치약의 경우는 아예 뚜껑을 열어두고 사용하고 있었는데, 꼼꼼하게 치약을 눌러서 짜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듬성듬성 치약을 짜내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이교도의 성격이 치밀하지 못한 측면이 있는 듯싶었다. 또한 세면대에 머리카락이 보통 사람 이상으로 많이 묻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탈모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면장에서 이교도가 보관하는 물건이나 이교도가 남긴 흔적만으로는 그가 이기적이라는 데에 확증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사용하고 난 세면대가 남보다 더 더럽혀진 것은 탈모 탓에 있지 이기적인 성품 탓에 있는 것은 아니지 싶었다. 나는 간혹 세면을 하고 나서 깨끗이 세면대를 헹구어주기도 하고 시간이 나면 세면장을 샤워기로 대충 청소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배려의 차원에서 한 것이지 의무의 차원에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해도 좋고 말아도 좋은 일이었다. 더욱이 남자 대학생도 세면대는 물론 세면장을 청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그는 단단하게 뿌리박고 있는 싱싱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이교도와 뚜렷하게 구별 지었다. 때문에 우리 셋 중에서 이교도만이 세면장을 더럽히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돌변한 것 같았다. 순전히, 빌라 아줌마의 시선에 따르면 말이다.



    3.


    총각, 아직 안 나갔어?

    연달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만 다소곳했을 뿐 그 이후에는 쿵쿵거렸다. 눈을 떠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오늘처럼 휴일에는 느지막하게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가는 여유를 부리곤 했다. 이렇게 주인아줌마가 요란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때가 간혹 있었다. 내가 방세를 지불할 날짜를 단 하루만 지나면 어김없이 아줌마가 이른 아침에 찾아와 방문을 두드려대곤 했다. 가만, 방세는 엊그제께 낸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내가 착각하는 건가……. 나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방문을 열었다. 파마머리의 아줌마가 짙은 색 루주를 바른 입술을 실쭉거리고 있었다.

    방세는 내지 않았나요?

    조금 신경질이 나긴 했지만 아줌마에게 싫은 표정내지 않고 물어보았다.

    아휴, 방세 말구. 방세는 내가 그저께 받았잖우 총각두.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녀? 그게 아니라 있잖우. 옆방의 이교도 말이야. 오늘 내가 세탁한 옷을 가져다 놓으려고 하다가 꺼림칙한 게 있어서 물어 보려구 그래.

    순간, 나는 옆방에 이교도가 없느냐고 눈짓으로 물어보았다.

    없으니까 내가 묻는 거지 걱정두. 전부터 물어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총각이 안 나가고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야.

    아줌마는 바가지에서 옷 한 벌을 꺼냈다.

    이거 이상한 옷 아니유? 바깥양반한테 물어보니까 태권도복 같은 건 아니라고 하던데. 이게 대체 어디에 쓰는 옷으로 보여요?

    나는 눈곱을 떼어내며 그 옷을 건네받았다. 흰 색에 검정색 띠가 둘러져 있어서 언뜻 보기에 태권도복 같아 보였다.

    혹시,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입는 옷 아니야?

    엉뚱하게 웬 사이비 종교 집단을 들먹거리세요?

    왜 있잖아. 저 윗동네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거. 뉴스에서 보니까 정신병자일 가능성이 높다 잖아.

    뭐라고요?

    그 사이에 인근 동네에서 또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역시 비 오는 날이었는데,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 골목길에서 귀가하던 여성이 둔기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피해 여성은 경찰의 예측대로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현장을 감식한 경찰에 따르면 범인은 여자의 소지품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으며, 또한 강간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찰은 살인 사건 현장을 지나던 목격자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밤길에 여자 혼자 다니는 것을 삼가라고 주의를 주고 있었는데, 범인이 강도나 강간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봐서 정신질환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설마, 이교도를 정신질환자로 보시는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니구……. 어제 뉴스를 보니까 범인을 제보하면 5천만 원을 준다고 하던데…….아휴, 빨리 범인이 잡혀야지. 동네 집값이 내려가잖아. 지금 빌라에도 방이 두 개나 비었어. 어떻게 그런 흉측한 살인 사건이 근처에서 발생했는지 몰라.?

    그러게요. 빨리 잡혀야 할 텐데.

    근데 이 옷 어떻게 생각해? 전에 우리 집에 대순천리회를 믿는다는 사람이 살았는데 밤낮으로 향을 피우면서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에 내쫒아 버린 적이 있어. 내가 꼭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구 그런 마귀를 믿는 사람들은 불길해서 우리 집에 세 들어 살지 못하게 하려고 그래.

    주인아줌마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밤을 새고 간단한 요기를 하러 편의점이나 분식점을 가려고 집을 나설 때보면 이른 새벽에 성경책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회는 집에서 50미터 정도 걸어서 가면 도착하는 곳에 있었다. 나는 집에서 나갈 때나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반드시 교회를 지나쳐야 했는데, 귀에 익은 찬송가를 들을 수 있었다. 갈보리 숲에서……예수가……. 초등학교 때 따라 불렀던 찬송가의 한 소절이 들려왔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무술을 할 때 입는 옷 같기도 하고 종교 의식 때 입는 옷 같기도 한데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네요.

    총각이 모르면 알 사람이 있겠어? 대학생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야.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그래, 한번 알아봐줘 총각. 그리고 나갈 때 거실에 불도 끄고, 보일러 불도 꺼줘요.

    쿵, 하고 철문이 닫히면서 또각또각 계단을 밝고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아줌마가 나가자 나는 다시 한 번 그 옷을 살펴보았다. 좀 전에 보았던 오른쪽 가슴 부위의 마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삼태극의 문양 위에 仙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었다. 선이라……순간적으로 어떤 장면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자 방으로 돌아와 박스 한 개를 열어보았다. 작년까지 내가 다니던 회사의 홍보부에서 제작했던 사보 한권을 꺼내 들었다. 100페이지 남짓 되는 칼라판 사보는 회사 내에서는 물론 회사 외부에도 홍보 책자를 겸해 만들어 배부하고 있었다. 재작년 상반기에는 ‘건강’을 특집 기획으로 다루었었다. 회사의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기에 건강에 비중을 두고 현장 취재 중심으로 한 기사가 매달 나갔었다. 서너 권을 뒤진 끝에 간신히 눈에 익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은 모 심신수련원을 취재한 것이었다. 원장인 듯한 사람이 무술 동작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내가 입은 옷의 가슴팍에 있는 仙이라는 글자가 좀 전에 본 이교도의 것하고 똑같았다. 다만 옷의 색깔만 달랐다. 이교도의 것은 흰색이지만 이 사내의 것은 황금색이었다.

    인터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원장의 말은 이러했다.


    배달선도는 한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단체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심신수련단체가 10여 개 난립해 있지만 대부분은 중국의 기공이나 인도의 요가의 아류에 불과하지요. 혹여 우리 전통의 것이라고 해도 오래 전에 중국에서 넘어온 것이거나 불교적인 것이 전부에요. 우리 도는 산중에서 수 천 년 동안 비전되어오다가 얼마 전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우리 도야말로 고조선 때부터 우리 조상들이 수행하던 심신 수련법입니다. 이제야 우리 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후천개벽을 앞두고 우리 도가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후천 개벽의 세상에는 심신수련을 한 사람만이 살아남아 신선으로 영생불사하여…….


    끝부분으로 갈수록 사이비종교 분위기를 드러냈다. 인터뷰 끝의 박스 기사를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말기 암 환자를 살리는 배달선도


    S종합병원에서 말기 암 환자로 사형 선고를 받은 J씨. 한 달간 이곳에서 기 치료를 받고 완치 판정을 받다. 이 같은 사례는 서양 의학계에서 보고한 바대로 명상의 치유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현재 J씨를 포함해 병원에서 치료 불가를 판정한 각종 난치병을 완치한 환자가 수십 명에 달해…….




    그 기사를 보고나니,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토막 지식이 머릿속에서 일목요연하게 조합이 되었다. 작년 말에 보았던 뉴스가 기억이 났다. 배달선도의 도주라는 사람이 세금 포탈과 여성 사범들에 대한 성폭행 등의 죄목으로 지명 수배되었다는 보도가 생생히 되살아났다. 도주는 실질적으로 교주처럼 행세를 하면서 경전 편찬 작업을 진행해왔다고 밝혀졌다. 세상에는 심신수련단체로만 알려졌지만 배달선도는 실질적으로 종교 단체나 다름없었다. 마침 내부에서 발생한 강간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단체의 비리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배달선도의 국내 조직은 와해되었고, 도주는 외국으로 종적을 감추었다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교도가 배달선도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의 사람일까? 그래서 이교도라는 이름이 붙은 걸까? 말 그대로, 異敎徒일까?

    도로 책을 박스 안에 넣고 박스 뚜껑을 닫으려는 순간, 지하 계단으로 누군가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히 비스듬히 열린 방문을 굳게 닫아 방문에 등을 기대어 숨을 죽였다. 곧이어 철컥 열쇠를 걸고 철문을 여는 소리가 울려왔다. 신발을 벗자마자 곧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이교도가 틀림없었다. 철문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 이교도가 들어가 살고 있었다. 작은 바가지가 마룻바닥 위로 툭 던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탁한 옷을 들고 간 것이었다. 그리곤 방문이 다시 쿵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항상 그렇듯이 이교도의 방에서는 이교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간간이 그가 내는 기침소리나 옹알거리는 듯한 이상한 소리 말고는 예외 없이 원불교 방송이었다. 방송에서는 흘러간 노래를 선곡해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 음악 소리에 용기를 얻어 평소처럼 세면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샤워를 하고나서 속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곤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나서 가방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바람이 완연한 봄 날씨임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이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분식점에 들러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내가 통유리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자마자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이 생긋하고 아는 척을 했다. 나는 겉으로 좋은 표정을 짓지 않고 티브이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이 식탁 쪽으로 바짝 다가와 식탁에 기대어서는 ?무엇을 드실래요??하고 물었다. 나는 제육볶음을 시켰다. 그러자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발랄하게 뒤로 묶은 머리를 휙 날리며 주방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은 근처 고시원에 살면서 이곳에서 생활비를 번다고 했다. 뺨에 여드름이 돋은 것이나 화장기가 없는 것이 시골에서 상경해 고학하는 여학생 같아 보였지만, 입가에 웃음기가 마를 날이 없어 노총각의 가슴을 설레게 해주곤 했다.

    나는 옆 식탁 위에 있던 어제 신문을 펼쳐 들었다. 평소의 점심시간 같으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이 몰려왔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손님이 나 말고는 단 두 명밖에 없었다. 이런 날은 가게 아줌마가 나에게 손짓으로 특정 좌석을 지정해주지 않아서 좋았다. 이교도가 식사하기에 딱 알맞은 때인 것 같았다. 돈을 지불하고 자기가 원하는 메뉴를 골라서, 자기가 택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게 뭐가 잘못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식당에는 평소 이 시간대에 보기 힘든 손님들이 있었다. 한 명은 외형상으로는 아줌마인데 목소리는 아이 같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덩치 큰 여자. 그녀는 항상 돈가스를 시켜 놓고 접시에 칼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고기를 잘라 먹곤 했다. 다른 한 명은 빨간 모자를 쓴 추리닝 남자. 그는 동네 피시방에서 자주 보았던 사람인데, 아주 거기서 살다시피 하면서 게임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나서 지하철을 지나 클럽들이 밀집해 있는 방향에 있는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은 일요일인데도 이미 자리가 다 찼다.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로비에 있는 비좁은 대기실에서 책을 펼쳐 보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있는 참고열람실로 향했다. 참고 열람실에는 나처럼 열람실 좌석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임시로 가방을 캐비닛에 맡겨두고 책을 펼쳐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론 독서 자체를 위해 찾아와서 책을 붙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도서관 참고열람실을 한번도 찾지 않았었다. 간혹 자료를 구하러 도서관을 방문할 때도 정기열람실만을 찾았다. 빈 좌석에 자릴 잡았다. 그리곤 서가를 기웃거리면서 소설책 한권을 골라 가지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몇 년 전에 베스트셀러로 한창 인기를 누렸던 외국 소설이었다.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나는 다시 이교도의 인물에 대한 궁금증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세 들어 사는 주인 집 아줌마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걸까? 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교도는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꺼려하는 건 아닐까? 혹시, 지명수배를 받고 쫒기고 있는 몸이 아닐까? 만약, 배달선도와 관련을 맺는다면 정신적으로 비정상적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4.


    여전히 경찰은 연쇄 살인범에 대한 단서를 전혀 얻어내지 못한 채 첫 사건 발생일로부터 네 달을 넘기고 있었다. 티브이에서는 연일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특집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중심으로 해서 경찰은 남자 독신자의 집을 대상으로 가가호호 탐문 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범인은 머리털 하나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임으로써 경찰 수사를 혼선에 빠뜨렸다. 그간 경찰이 기대했던 살인 사건 현장 목격자의 제보도 없었다. 경찰은 늦은 시간에 여성 혼자 귀가하는 것을 절대 삼가라는 경고 말고는 해줄 것이 없었다. 점차 동네에는 활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던 노래방이나 바, 단란 주점은 9시 전후로 모두 문을 닫았다. 또한 상가나 식당에도 사람 발길이 뜸해짐에 따라 10시를 넘기는 일이 없어졌다. 낮에도 동네에서는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모이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저 두세 명이 골목 앞에 모여서 수군수군 대다가는 뿔뿔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동네는 세를 내놓은 집이 많아서 그런지 대부분 토박이들끼리 모였다 하면 ‘뜨내기’에 대한 불만과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언젠가 빌라로 들어오는 골목 앞에서 빌라 주인아줌마와 분식점 아줌마 그리고 세탁소 아줌마, 이렇게 세 명이 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성토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일찍 들어와 추리닝 차림으로 운동을 하러 밖으로 나서는 길이었다.

    글쎄, 뜨내기들 조심해야 한다구. 예전 같지 않게 요즘 젊은것들은 뭣하나 믿을 수가 없어요. 빌라 짓기 전에 하숙을 칠 때는 학생들이 착하고 인사성도 밝았는데. 근데 빌라를 짓고 세를 내놓고 보니까 명절 때 인사하는 것은 고사하고 계단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안 해요. 아주 내가 아는 척을 하고 굽실거려야한다니까. 그 이교도라는 총각 있잖우??

    그러자 옆에 있던 아줌마들이 갑자기 경직된 표정을 짓더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허리 굽히기를 하고 있었다.

    이……교……도는 왜요?

    왜긴 왜야? 연쇄 살인 사건 범인이 안 잡히니까 그렇지. 분식점 아줌마 이교도가 새벽에 자주 어딘가에 갔다가 들어오는 거 보지 못했수?

    네?

    내가 새벽잠이 없어서 그런데 새벽에 마당 철문이 철컹 열리는 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항상 이교도가 어딘가로 나가더라구.

    빌라 주인아줌마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짓을 해가면서 말을 이어갔다. 분식점 아줌마가 입을 열었다.

    우리 분식점이 24시 운영을 하기는 해도 전 새벽에는 일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주방 아줌마 얘기로는 새벽에 자주 들러 김밥을 사가긴 한다던데.

    그럼, 그렇지.

    세탁소집 아줌마도 한 수 거들었다.

    우리 집 바깥양반도 말했어요.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한강둔치에 나갈 때 이교도가 집으로 돌아오는 걸 종종 보았다고요. 몽유병 환자처럼 비칠비칠 걸어서 집을 돌아오더라는 거예요.

    경찰은 뭣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깟 살인범 한 명을 못 잡고 있으니……. 나라면 벌써 잡아냈겠다. 동네 뜨내기들 중에 범인이 있을 게 뻔하지. 안 그래? 이교도는 직장에 다니지 않는 것 같고 또 그 나이 되도록 사귀는 여자도 한명 없어 보이구. 얼굴은 반반하게 생겨 가지고…….

    그리고 셋이서 화음을 맞추듯이 한번에 까르르르 웃음을 토해냈다. 웃느라고 구부렸던 고개를 펴던 빌라 주인아줌마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그러자 갑자기 웃음을 그쳤다. 그리곤 셋이서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고는 자신들의 거처로 쪼르르 달음질쳤다.

    나는 목을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며 319회를 돌리면서 그네들이 하는 소리를 모조리 엿들었다. 점차 어스름이 내리면서 분식점과 종합 수리점, 세탁소 그리고 과일 가게, 사진관들의 전등이 하나하나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전에 몇 번 다녔던 코스를 따라 아무런 생각 없이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지금 내가 가는 길은 지하철역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따라서 번화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3~4층의 건물이 들어선 2차선 아스팔트에는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가 도열해있었다. 얼마 전에 구청 직원이 사다리차를 몰고 와 싹둑싹둑 두툼한 가지를 모조리 잘라버려서 나무들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나는 평소대로 한 30미터 되는 아스팔트를 걸어 4차선 아스팔트가 나오는 데까지 갔다. 그리곤 반대로 돌아오면서 제법 힘껏 팔을 휘두르고 또 보폭도 크게 해서 걸어보았다. 한 70미터를 그렇게 걷다가 다시 원래대로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대신할 빵과 음료수를 사려고 농협 할인 매장에 들렀다. 매장 카운터에는 뚱뚱한 점원이 빠르게 손을 놀리며 계산을 하고 있었다. 동네에서 유일한 이 할인 매장에는 길 건너의 동네에서도 찾아오는 듯했다. 한두 명의 추리닝 차림의 여대생이나, 파자마 차림의 신혼부부들이 물건을 한보따리 사들고 골목 길 건너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다. 여기도 연쇄살인 사건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젊은 여자들은 보기 힘들고 대부분 중년 아주머니들이었다. 나는 저민 땅콩이 박혀있는 기다란 식빵을 들고 음료수 진열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구석진 곳에 있는 음료수 진열대로 들어서자 낯익은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교도였다. 이교도는 작은 박스 형태의 물건을 꺼내들고는 돌아서면서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 그대로였다. 나이에 비해 구김살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에서는 환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물론 매장의 높은 도수의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기는 했지만, 원체 얼굴빛이 좋아보였다. 옆머리가 살짝 벗겨지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나보다 어려 보였을 것이다. 동안이기 때문이었다. 행동거지에서 느껴지는 품으로 봐서는 내 나이 또래가 확실해 보였다. 순간적으로 눈빛이 떨리긴 했지만 곧이어 그는 나를 알아보는 듯, 쓰윽 웃음을 짓고는 내 옆으로 지나갔다. 나는 오렌즈 주스 한통을 들고 좀 전의 이교도가 꺼내 든 물건이 진열된 곳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차가 놓여있었다. 녹차를 비롯해 현미차, 석류차, 생강차, 대추차, 구기자차 등등 갖가지 차들이 있었다. 나는 급히 카운터로 갔다. 하지만 이미 그는 계산을 마치고 문밖을 나서고 있었다. 이교도는 호리호리한 몸만큼이나 가벼운 걸음걸이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티브이를 켰다. 소리가 방안 전체를 울렸다. 정상치보다 볼륨을 키워야 옆방의 소리를 차단할 수 있었다. 퀴즈 프로 속에서는 낯익은 탤런트들이 억지웃음을 자아내고 있었고, 아줌마들로 이루어진 방청객들이 사전에 각본을 짜기라고 한 듯이 실컷 웃음을 터뜨렸다. 채널을 돌렸다. 이번에는 뉴스에서 연쇄살인사건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하고 있었다. 여 기자는 사건 현장의 정황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외국의 다큐멘터리 채널로 돌렸다. 해외 오지에 대한 탐방 프로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서부의 광활한 사막이 펼쳐졌다. 다큐멘터리는 아나사지 인들이 남긴 천장이 터진 건물 내부를 오래 비추어주었다. 천장의 작은 통로로 자연 채광이 되는 내부에는 은은하게 빛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신성한 분위기가 절로 조성되었다. 티베트나 인도, 중국의 오지 쪽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봐오기는 했지만, 미국 서부 사막에서 그 같은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나사지는 참으로 진기했다. 벽에 머리를 기대던 나는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서 주스를 컵에 따라 마셨다. 시원하게 주스가 목 줄기를 타서 위로 내려가는 느낌에 정신이 바짝 드는 것 같았다. 나는 식빵을 한 조각 떼 내어 씹다가 벽 너머가 궁금해졌다. 티브이 볼륨을 최대한 줄여서 이교도가 있는 방 쪽의 벽에 붙여놓은 침대에 누웠다. 눈은 티브이에, 귀는 이교도의 방에 집중을 했다.

    벽 너머에서는 원불교 방송이 들려나오고 있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항상 듣던 비슷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나왔지만 그 이상의 말뜻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늦은 시간이 되면서 벽 너머에서 엔야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 협주곡 등 익숙한 음악이 들려왔다. 원불교 라디오 방송의 고전음악 프로인 듯싶었다. 곧이어 첼로의 현 울림이 벽을 타고 와 내가 누워있는 방안 가득 잔잔히 울려 퍼졌다. 나는 최대한 옆방에 주의를 기울여 보고자 자리에서 일어나 티브이를 끄고, 형광등을 껐다. 반 지하 방의 유리창은 흐릿하게 바깥을 비추었고, 방문 맨 아래 틈에서는 마룻바닥의 빛줄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며 잠자는 것처럼 했다. 고양이 두 마리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교미의 순간인 듯 서로 할퀴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고통을 주면서 교미의 짜릿함을 얻는 것 같았다. 곧이어 잠잠해졌다. 나는 다시 귀에 집중을 하고 벽 가까이에 대보았다.

    분명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방바닥이 쿵쿵 울리기도 했다. 국악이 고즈넉이 울려왔다. 대금 소리가 들려왔는데 상영산이었다. 상영산이 끝나자 가야금 해금 각종 국악기들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악이 급하면 급할수록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쿵쿵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더했고, 음악이 잦아지면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중간 중간에 길게 토하는 호흡 소리도 들려왔다. 이교도는 방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분명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류의 음악은 들으면서 가만히 좌정하기에 알맞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특별히 국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페라, 무용, 연극, 연주회 등 각종 공연에 걸쳐 골고루 식견을 넓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국악이 제일 다가서기 어려운 음악 같았다. 다른 것에 비해 접할 기회도 적었고 또 막상 기회가 닿아 국악 공연에 갔다하면 하품만을 하다가 오곤 했다. 계속해서 시디가 반복되는 지 같은 음악이 연이어 들려왔고, 나는 서서히 졸음에 빠져 들어갔다.

    잠결에 철문이 쿵 닫히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계단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벽 너머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리창을 가는 빗방울이 두들기고 있었다. 눈을 떠서야 비가 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이 시각에 밖에 나가는 걸까? 나는 누운 채로 유리창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빌라 앞에 세워진 전봇대의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가로등이 흔들릴 때마다 유리창의 불빛도 휘청거렸다. 나는 살며시 이불을 걷어 부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의 형광등을 켰다. 철문 앞에 신발 놓는 곳을 보니, 이교도의 운동화가 없었다. 검정 단화는 보였다. 나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면서 현관 쪽으로 가 신발장 문을 열어보았다. 역시 이교도의 운동화는 보이지 않았다



    5.



    새벽에 이교도의 운동화가 없어진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후에야, 그동안 새벽에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새벽잠을 깨웠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나흘에 한번 정도 새벽에 누군가가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는데 그때만하더라도 그가 대학생일 수도 있고, 이교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맞은편 204호실 사람일 수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제 일로 새벽에 나가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교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내 추정에 강한 힘을 불러 넣어준 것은 날이 밝은 후에 또다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이 일어난 새벽에도 부슬부슬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사건은 내가 사는 빌라에서 걸어서 10여 분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에 있는 공원 앞길에서 일어났다. 피해 여성은 뒷머리를 쇠망치로 여러 차례 잔혹하게 두들겨 맞아 검붉은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유품을 감식한 결과 강도나 강간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으며, 피해 여성을 유흥업소 종사자로 추정하고 있었다. 여성의 나이는 스물 셋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깨어나자마자 튼 티브이에서 방송되는 뉴스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내 뒷머리도 띵하게 울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신속하게 세면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분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으로 오는 도중에 골목 모퉁이를 지나칠 때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검문하는 경찰을 볼 수 있었다. 손에 든 무전기에서는 연신 치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죄지은 사람처럼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채 타박타박 걸어갔다. 그네들 중에 가장 젊은 새내기로 보이는 경찰 관 한 명이 금테 안경 너머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나는 침을 꼴깍 넘기면서 그들이 안 보일 때까지 최대한 공손한 걸음걸이를 했다. 도서관에 와서도 내내 가슴이 쿵쿵거렸다. 이어폰을 끼고 토익 테이프를 들었지만 정신이 영 딴 곳에 가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방금 전에 본 살인 사건 현장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그곳은 보름에 한번 정도 주말을 이용해 내가 들르던 곳이었다. 연립주택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공원에는 제법 근사한 공중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운동 차 동네 주변을 돌고 있던 내가 변의를 느끼게 될 경우 일부러 참아 그곳으로 가서 해결하곤 했다. 그 공원 앞 푸른 색 보도블록 위에 흰 가운에 덮인 여자가 누워있었다. 주변에 서성거리는 경찰 십여 명이 없었다면, 그 여성은 얌전히 누워 잠자고 있는 것 같았다. 누운 여자의 머리 쪽에 펼쳐진 푸른색 보도블록은 까무잡잡하게 변색이 되어있었다.

    점심시간에 지하 매점에서 김치 덮밥을 먹고 나서 가방을 들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도서관 인근 골목길에는 수십 그루의 벚나무가 흰 꽃잎을 휘날리고 있었다. 골목 맞은편에서 연인인 듯한 두 명의 남녀가 서로 허벅지와 가슴을 밀착한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불러낼 여자 한명 없다니, 내가 이때까지 뭣하고 살았나 하는 한탄이 들었다. 나처럼 키도 작은 데다 뿔테 안경을 낀 사내가 흔치 않은 것만큼이나 나를 좋아할 여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나는 실직 상태였다. 회사를 다녔던 작년까지, 단 한번의 사랑과 그 실연 이후로 죽 ‘엔조이’ 상대만을 찾아다녔다. 욕망을 풀려고만 하면 상대 여성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주었다. 회사 술자리로 늦게 귀가할 때나 적적한 주말 저녁이면 단 한통의 전화만으로 늘씬한 20대 초반의 여성을 내가 사는 원룸으로 불러낼 수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욕망이 일어날 때면 언제 어디서고 젊은 여성을 불러 여성의 질 안으로 내 성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곤 십여 분 뒤 나는 제 정신으로 돌아오곤 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회사 생활에 혹사당하던 나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던 것이 ‘엔조이’였다.

    나는 골목길로만 옮겨 다니며 내가 사는 집에서 먼 쪽으로 걸어 나갔다. 화창한 날씨 탓에 연인들이 골목길마다 한두 쌍씩 달라붙은 채 지나가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교미를 즐기듯, 연인들은 서로의 몸을 매만지며 웃음을 토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골목길을 꺾어 지난 끝에 대로가 나왔다. 고층 빌딩이 도열해 있는 보도블록을 따라 마냥 걸어가노라니,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핸드폰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매끄러운 윤기가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하이힐을 또각 거리며 나를 스쳐서 반대 반향으로 걸어갔다. 대체, 이런 복장을 한 여성이 이곳에서 근무할 수 있는 회사는 어떤 곳일까? 고층 빌딩 틈바구니에서 7~8층 정도 되어 보이는 빌딩이 보였다. 그 빌딩 앞을 지나면서 빌딩의 각 층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커피숍, 치과, 안과, 피부과, 성형외과, 여성헬스, 천도선원, 한의원, 공인회계사 사무실로 이어졌다.

    언젠가 새벽에 내가 인근 대학교 운동장에 가서 달리기를 하고 오는 도중에 이 건물에서 이교도가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위아래로 회색 운동복을 입은 이교도는 등을 보이면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새벽 운동은 내가 게을러서 잘 하지 않지만 어쩌다 와인을 통째로 한 병 마시고 잔 날 새벽에는 눈이 저절로 떠져서, 귀신에 홀린 듯이 추리닝 차림으로 대학교 운동장까지 와서 반드시 달리기를 했다. 그날도 달리기를 끝내고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약 30여 미터를 거리에 두고 집까지 그를 따라왔는데, 이교도는 뒤에서 내가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것을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모르는 것인지 별다른 반응 하나 없이 줄곧 걸어가기만 했다. 나는 그의 뒤를 한 20여 분 간 따라오면서 그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의 걸음은 아주 특이했다. 완전한 일자 걸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팔자걸음도 아닌 이상한 걸음새였다. 그러면서도 완만한 리듬을 타기라도 하는 듯이 두 팔은 가볍게 앞뒤로 흔들거렸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거리는 푸르스름한 안개에 휘감겨있었는데, 그는 마치 무중력 상태에 놓여있는 것처럼 사뿐히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7층에서 내렸다. 바닥에는 비닐 장판을 깔아 놓았고,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는 여러 켤레의 신발이 한쪽 구석에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미닫이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정중앙에는 통나무 탁자가 놓여있었고, 그 주변에는 방석이 놓여있었다. 탁자 위에는 아기 주먹만한 다기와 김을 모락모락 내는 주전자가 보였다. 전통 한옥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한 듯했다. 거실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나 있는 문의 한복판에는 팔각형의 창이 보였다.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아한 멋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한쪽 벽면 위에는 ‘天道 仙院’이란 글귀가 넣어진 액자가 가로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작은 문을 드르륵 열면서 젊은 여자가 나왔다. 단발머리에 키 큰 여자였다. 여자는 이교도의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떤 곳인가 보려고 왔습니다.

    네. 혹시 아시는 분에게 소개받아서 오신 건가요?

    아뇨. 전에 한번 봐두었는데 오늘 시간이 나서 와본 거예요.

    그러시군요. 여기 앉으세요.

    여자는 탁자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아서 나에게 차를 권했다. 차를 다기에 따르는 품이 무척 다소곳했다. 젊은 여자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내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곳은 심신수련을 하는 곳입니다. 단전호흡이라고 들어보셨죠?

    네.

    여기서는 단전호흡을 통해 신체 단련은 물론 정신 수양을 꾀하고 있습니다.

    사무적인 말투였다. 수 십 번 아니, 수 백 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는지 무덤덤한 말투였다.

    배달선도라고 아세요?

    내가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어 하면서 어떻게 배달선도를 아세요? 반문했다.

    이쪽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가 보군요. 배달 선도하고 우리 천도 선원은 다른 거예요. 뿌리는 같은데 성격이나 운영하는 게 판이하게 달라요. 배달 선도는 교주라는 사람이 있고 그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거 잘 아시죠? 교주가 탈세 혐의로 외국으로 도피해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천도선원에는 교주 같은 종교적인 지도자는 없어요. 천도 선원은 배달 선도에서 활동하던 사범들이 대거 탈퇴해서 새로 만든 거에요. 이전에 있던 다른 단체와 통합해서 만든 것이죠. 우리 선원은 전국의 지부장들이 돌아가면서 원장을 맡기 때문에 애초에 비리 같은 건 생길 수 없어요.

    그렇군요.

    젊은 여자는 자신은 이곳에서 현재 사범 실습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실습을 마치고 나서 일정한 수련 테스트와 필기시험에 통과되면 정식 사범이 된다는 것이었다.

    사범이 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되나보죠?

    그럼요. 단전호흡하는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엄격하게 사범교육을 시키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문제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죠.

    젊은 여자는 오랜만에 말 상대를 만났는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범이 되려면 초급 한의학, 주역, 기공 이론 등의 과목 필기시험에 반드시 통과해야 해요.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실거에요.

    여자는 처음 본 남자에게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의 말 대부분을 흘려들으면서 녹차를 마셨다. 뜨거움이 느껴져 이내 다기를 내려놓았다. 여자 말이 다시 귀에 들어 왔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연쇄 살인범은 여자를 어떻게 죽였을까 궁금해졌다. 이렇게 정면에서 말을 걸어 안심을 시킨 후에 갑자기 뒷머리를 쇠망치로 후려쳤을까? 아니면, 여자의 뒤를 모르게 따라와서 으슥한 곳에서 그 짓을 저지른 걸까? 나는 머릿속으로 내 손에 들려있는 망치로 앞의 젊은 여자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상상을 했다. 살인욕구가 무의식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나는 내 속에 숨어있던 살의에 스스로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런 내 모습을 의아하게 여겼던지, 젊은 여자는 동공을 크게 벌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움츠렸다.

    이러실 게 아니라 한번 수련을 받아 보시지요. 하루는 무료로 특별 수련을 받을 수 있게 하거든요.

    젊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다음에 와서 수련을 받을 게요. 약속이 있어서.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젊은 여자는 나에게 명함 한 개를 건네주었다.

    빌딩 밖에 나오니 포근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내 목덜미를 간질였다. 무려 세 시간 만이었다. 살인범도 쇠망치를 휘두르고 나면 이런 해방감을 맛보는 걸까? 나는 봄바람의 애무를 즐기며 빌딩 몇 개를 지나가다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아직 자정이 되기까지 7시간가량 남았다.

    나는 주변을 배회하다가 빌딩 지하에 있는 피시방으로 들어갔다. 게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피시방은 처음이었다. 동네에는 내가 아는 곳만 모두 세 곳이 있었다. 이 피시방은 대로변에 있어서 낯익은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칸막이가 된 좌석에 가 앉아,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십여 개의 메일은 모두 스팸 메일이었다. 나는 메일함을 닫고 자주 찾는 포털 사이트를 클릭했다. 사이트 중간쯤에 일간지 메뉴를 클릭하자 수십 개의 신문사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부터 차례로 S신문사, D신문사, J신문사가 배열되어있었다. 가장 왼쪽 것을 클릭했다. 연쇄 살인 사건 기사가 메인 화면 상단에 올려져있었다. 경찰은 오늘 새벽에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현장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발견했다. 주변의 보도블록에서 운동화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 발자국이 범인의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었다. 또한 이번에도 여성의 뒤통수가 쇠망치로 보이는 물건에 여러 차례 무차별 가격당한 흔적을 보이고 있었다. 경찰은 피해자의 함몰 상처를 살펴볼 때 범인은 왼손잡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피해 여성의 뒤통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격당한 흔적을 포착했다는 것이다. 이번 피해 여성 역시 아무런 도난 흔적이나 강간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경찰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3~40대 가량의 독신 남성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6.



    그 사건을 끝으로 두 달 넘게 연쇄 살인 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여전히 경찰의 단속은 지속되고 있었지만 전에 비해 그 강도가 현저히 느슨해지는 듯했다. 예전에는 골목 모퉁이에 서 있는 경찰들을 지나치려고 할 때면, 바짝 긴장을 해야 했는데 이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경찰관들은 저희들끼리 수군덕거리기도 하고, 또 지나가는 여자의 궁둥이를 바라보기도 했다. 나 역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이교도에 대한 의혹이 차츰 시들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살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자 괜한 사람을 오해하지 않았나 하는 부끄럼마저 일었다. 새벽에, 설사 비가 내린다 해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게다가 회사에 나가는 것도 아니라면 간편한 운동화를 신고 나가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간단한 요기를 하러 나갈 수도 있고, 피시방에 들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인의 집을 찾아가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티브이에서도 전만큼 요란하게 연쇄살인사건 뉴스가 방송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나마 연쇄살인사건 수사가 답보 상태라는 뉴스를 내보거나, 다시 안정을 되찾은 서울 M구 D동의 현장을 취재하는 뉴스를 방영하는 것에 불과했다. 뉴스를 보면서 나는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나 자신을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티브이를 집 앞에 갖다 버렸다. 원래 채널이 두 개 밖에 안 나오던 고물이기도 했는데, 그것을 수리점에 맡길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티브이를 대신할 만한 것을 찾았던 것이다. 그 동안 벽을 통해 몰래 듣던 라디오 방송과 음악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수개월 동안 벽 너머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내 귀는 아주 미세한 소리까지도 분별할 수 있었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통해 현재 이교도의 심리나 감정 상태까지 엿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한참 곯아떨어져 있을 새벽이면, 목탁 소리를 시작으로 밀물과 썰물이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밝고 환한 뉴에이지 풍의 음악이 흘렀다.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 머리가 홀가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이교도는 명상을 하지 않나 여겨졌다. 명상이 끝날 즈음 그의 감정은 최고치로 고양이 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내 경험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몇 시간에 걸쳐 산을 탄 끝에 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의 기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녁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전통 악기를 사용하는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다. 유명한 대금 연주자의 ‘산행’에서부터, 근래 국악계에 꽤 알려져 있는 타악기 연주단 ‘공명’의 음악도 들려왔다. 저녁에 이교도는 내면의식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방에서 따로 오디오를 틀지 않아도 벽 너머로부터 얼마든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거북했던 음악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기분을 맞추어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되었다. 한참 정적으로 휘감긴 내 방의 책상에 앉아 이 책 저 책을 건성으로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나 음악이 있는데 그것은 어김없이 벽 너머에서 몰래 들었던 것이었다. 울적해질 때, 쓸데없는 공상으로 의기양양해질 때, 안 좋은 기억으로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를 때가 불규칙적으로 찾아오는데 그럴 때마다 벽 너머에서는 내 기분을 맞추어주는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내가 시디를 넣어 오디오라도 튼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교도에 대한 과대한 의심은 은근한 호감으로 바뀌어 갔다. 빌라 103호실의 거실과 세면장 그리고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손에 잡을 듯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빌라 주인아줌마가 말하는 것처럼 그는 이기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연쇄 살인범의 결정적인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기적이라거나, 연쇄살인범과의 연관성을 배재할 수 없다는 풍문이 떠돌 뿐이었다. 빌라 주인아줌마와 분식점 아줌마, 세탁소집 아줌마의 입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다. 빌라 철문 앞에서, 골목 앞에서 서로 수군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어왔다. 이교도가 그들의 입방아에 놀아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눈에 띄는 그의 외모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균 이상의 키에 머리는 장발이었고 또 피부는 흰 데다가 항상 말없이 웃고 다니는 이상야릇한 사내였다. 그런 그가 동네 아줌마의 시선에 걸려들어, 이러쿵저러쿵 비난이나 푸념을 듣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애초에 나처럼 작달막하고 검정 안경을 낀 사내는 그네들의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그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다니는 것이 그네들로 하여금 부아가 나게 했을 것이다. 아줌마에게도 여자로서의 감정은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텐데, 그것을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어서 그네들은 이교도를 한 목소리로 성토하는 게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때때로 여자들의 싫어함은 좋아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니까.

    내 생각에 이교도는 소탈하면서도 내면지향적인 쪽 같았다. 억지로 꾸미거나 남을 의식하는 행동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지 않거나, 냉장고의 식수 병에 입을 대어 마시거나, 인사를 하지 않거나, 새벽까지 라디오를 틀어놓는 것이 그 예이다. 허나 이것이 동네 아줌마의 말처럼 ‘이기심’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자세히 관찰해 본 바로는 신발을 무려 세 켤레나 현관에 놓는 경우는 대학생이지 이교도는 아니었다. 이교도는 두 켤레 정도 현관문에 놓기는 했지만, 계속 그런 것은 아니었다. 냉장고의 석수 병에 입을 대는 경우도 그는 자기만 사용하는 고정된 병에 표식을 해두었다. 물론 아줌마는 모를 테지만 그는 그것만을 전용하는 듯했다. 냉장고에는 식수 6개를 넣어두는데, 그 가운데 정확히 두개. 그리고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그가 신발을 아무렇게 현관문에 벗어두는 것처럼 평소 그는 무엇엔가 골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이 가지 않는 듯했다. 나도 카드 빚 문제로 신경이 곤두섰을 때, 옆에서 누가 인사를 해와도 말 한 마디 귀에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새벽까지 라디오를 틀어놓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저 자신만의 생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왕왕 세게 틀어놓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방에서 저 혼자 듣고 즐기는 것을 내가 가타부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벽 하나를 두고 두 개의 방이 붙어 있는 것이 문제였다. 마침 이웃 동네에 연쇄살인 사건이 터지자, 아줌마들은 이교도에 대한 입방아거리로 곧장 그것을 끌어들인 것이다. 내연의 관계를 밝히는 드라마에 익숙한 그네들의 머리에서 살인범과 이교도의 연관성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는 그렇게 큰 사건이 주변에서 터지면 나라도 당장 평소에 이상하게 행동했던 동네 사람을 떠올리고 그에게 사정없이 심문을 할 것이다. 물론 머릿속으로 말이다. 그러나 처음엔 흥미와 흥분 속에서 의심이 생기지만 시간이 흐르면 저도 모르게 이웃에 대한 괜한 의심을 거두어들이고, 한심한 자신을 탓하게 된다.

    어느새 동네는 저녁이 되면 다시 활기가 돌아 새벽까지 가게 불이 꺼지지 않았고, 몇몇 여성은 대담하게 혼자 집으로 저녁 늦게 귀가하기도 했다. 나는 티브이 없는 방에서 벽 너머로 들려오는 음악에만 귀 기울이면서 잠을 청했고 또 잠에서 깨어나면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낮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토익 공부에 할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벽 너머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저녁에도,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명치가 탁 막히는 듯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저녁에 일찍 귀가해 방안의 책상에 앉아 토익 테이프를 귀에 꽂아 듣다가 한 30분 뒤에 때내어 버렸다. 그리곤 밖을 흐릿하게 비추는 창문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홀연 괴괴한 정적이 귀를 압박해 들어왔다. 문을 열고 현관 쪽으로 나가보니 이교도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걸까?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로 봐서는 주인 아줌마였다. 철문이 열리면서, 주인아줌마가 세탁한 옷을 넣은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총각, 일찍 들어왔네. 여기 속옷하구 양말. 전에 총각이 잃어버렸다는 팬티는 못 찾겠어. 아마 104호에서 살다가 이사 간 총각이 잘못 알고 가지고 간 것 같애.

    주인아줌마는 빨랫감을 한꺼번에 모아서 빨래를 하기에 번번이 양말이나 속옷을 바꿔오기도 하고, 혹 빠뜨리기도 했다.

    내가 다른 걸로 사다줄게.

    아니, 그러실 거까지 없습니다.

    주인아줌마는 내게 속옷을 건네주고 나서, 대학생 방문 앞에도 세탁한 옷을 넣은 바가지를 갖다 놓았다.

    총각, 이교도 요즘 안 보이던데. 총각은 못 봤수?

    저도 못 봤어요.

    주인아줌마가 이교도의 방문을 쿵쿵 손으로 두드렸다.

    총각.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인아줌마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 가운데 한 개를 끄집어냈다.

    총각, 이럴게 아니라 이교도 방안에 들어가 보는 게 어때? 혹시 총각 팬티가 이 방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유.

    그건 그러네요.?

    잠시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재차 동의를 구하고 자시고도 할 것 없이 주인아줌마는 철컥 방문 손잡이에 열쇠를 끼어 넣었다. 그리곤 방문을 활짝 열었다. 방안에는 눈에 띄는 가구가 없었다. 창문 쪽에 옷걸이와 세 개의 공간이 수직으로 이어진 선반과 대충 개켜놓은 이불이 전부였다. 라디오를 겸한 오디오는 선반 중간에 놓여 있었다. 내 방 쪽의 벽 앞에는 밥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엽전 꾸러미와 황금빛 추 그리고 몇 권의 책이 놓여있었다. 내 방에 비해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가구가 없다보니 방안이 널찍하게 느껴졌다.

    주인아줌마는 선반 위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곳에 있나 봐요?

    나는 몇 걸음 걸어가 살펴보았다. 솔직히 내키는 일이 아니라서 형식적으로 아줌마의 지시를 따르는 척했다.

    여기엔 없는데요.

    그래? 그럼 104호에 살던 총각이 잘못 알고 가져간 게 틀림없어.

    아줌마는 선반 위며, 옷걸이 뒤 이불 쪽에도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나는 내 방 쪽의 벽을 향했다. 벽면에는 한자가 쓰인 이상經 처음 보는 글귀였다. 옆으로 돌아보니, 방문에는 흑백 포스터가 붙여있었다. 한국 춤의 한 장면이었다. 승무에서 막, 한손으로 장삼을 흩한 액자가 걸려있었다. 제목쯤으로 보이는 큰 글자만 읽어보았다. 天……符……뿌리고 고개를 땅으로 향한 자세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한쪽 버선발이 슬쩍 들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삼이 허공에 기운차게 죽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공연 소개 글을 보니, 영가무도(詠歌舞蹈)의 이선주 교수의 승무였다.

    역시 뭔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 같애. 무당 집에 들어온 기분이 드네. 총각 안 그래?

    전 그렇지 않은데요. 그냥 좀 특이한 사람일 거 같아요.

    총각은 이교도가 뭐하는 작자 같애?

    제가 뭘 알겠어요.

    그래두 총각이 옆방이니까 잘 알겠지. 이상한 소리가 나지는 않았어?

    아니요, 절대. 그냥 음악을 많이 듣는 것 같더라구요.

    전에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대순천리회 사람은 밤낮으로 향을 피우던데 이교도는 그런 것은 안 같고. 대체 뭐하는 사람인 지 통 알 수 없네.

    나는 전에 찾아갔던 천도선원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아직 이교도가 천도선원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 알 수 없었다. 주인아줌마는 ?방은 깨끗하게 사용하고 있네. , 하면서 방문 쪽으로 갔다. 그리곤 주인아줌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방문을 닫고 나와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온 후 혹시 이교도 방안에 발자국이나 남기지 않았을지 걱정을 했다. 내 방 위에 이교도의 방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내 방에는 침대와 반신 거울, 옷걸이, 책상, 책꽂이, 선반, 라면박스 서너 개가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이라곤 티브이를 놓았던 선반과 침대 사이에 불과했다. 티브이가 있던 자리에는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집으로 오는 도중에 산 모조 어항이 있었다. 어항에는 플라스틱 물고기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아래위로 움직이고 또 뱅글뱅글 돌았다. 어항 밑에서는 공기방울들이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캄캄한 방에서도 어항은 저 혼자 환하게 불빛을 냈다.




    7.


    깊이 곯아떨어져 있던 나는 새벽에 슬며시 눈을 떴다. 반 지하 유리창에 빌라 집 앞의 가로등이 흔들리는 모습이 흐릿하게 비추어졌다. 유리창으로 빗방울이 사선을 긋고 있었다. 내 눈으로 그 모습이 어슴푸레하게 들어왔다. 그리곤 벽 너머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밀물 썰물이 내 얼굴 위로 흘러왔다가 다시 수평선으로 흘러갔다. 어느 해변의 모래사장에 나는 누워있었다. 밀물과 썰물은 마치 나의 지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들숨과 날숨처럼 밀물과 썰물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손 팔 다리의 감각이 사라졌다. 나는 이대로 해변 모래사장 그 자체가 된 것은 아닌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나는 밀물과 썰물 그 자체가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던 나는 어느새 호흡을 그치고 있었다. 나는 숨을 내쉬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나 숨이 멈추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몸 안에서는 진한 감로 향이 퍼졌다. 나는 그 은은한 향에 마냥 도취되어 완전히 숨을 그치고 말았다. 동 터오는 것처럼 정신이 환해지다가 차츰 안개에 휩싸이듯이 망연해졌다. 그러다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일요일 오전이었다. 나는 지난 새벽의 일을 기억해내고는 벽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이교도가 돌아왔구나.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방문을 열고 거실에 나갔다. 현관에는 이교도의 검정 단화와 운동화가 놓여있었다. 발끝으로 걸어 이교도의 방문 옆으로 귀를 기울여보았다. 치직 라디오가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원불교 방송이 이어졌다. 열시에서 정오까지 진행되는 라디오 프로였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서 수건을 들고 세면장으로 갔다. 여느 날처럼 세면을 마친 나는 가방을 들고 집밖을 나섰다. 빌라 앞마당의 화단과 담장 쪽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간밤에 비가 내린 것이다. 골목 밖으로 나와 오른 쪽으로 돌아 분식점에 들어갔다. 주인아줌마와 주방 아줌마 둘이서 숙덕거리고 있었다. 손님은 빨간 모자를 쓴 남자와 아줌마처럼 생긴 젊은 여자뿐이었다. 아줌마들은 새벽에 또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징어덮밥을 주문한 후 시선을 티브이에 고정했다. 이번에는 원룸 촌에서 발생했다. 새벽에 귀가 하던 20대 초반의 여성이 원룸 현관에서 변을 당했다. 화면에 나오는 원룸 건물이 낯설지 않았다. 이곳에서 20여 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원룸이었다. 나는 오징어 덮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로비에는 언제나처럼 대기자들로 넘쳐났다. 열람실 좌석이 다 차서 참고 열람실로 들어갔다. 토익 책과 테이프를 손에 들고 구석 자리로 가 앉았다. 토익 테이프를 귀에 꽂았지만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색대로 향했다. 검색대에서는 도서 검색은 물론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어제 이교도의 방에서 보았던 액자 속의 이상한 글귀를 떠올렸다. 天....符....經 인터넷 검색 칸에 한글을 넣어보았다. 예상 밖에 천부경의 글귀를 가지고 있는 자료들이 화면에 많이 떴다. 천부경 글귀는 사이트는 물론 책 소개, 카페 게시판, 신문 기사, 논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서 떴다. 사이트 하나를 클릭했다. 메인 화면에 민족 종교라는 사이트 소개가 보였다. 메뉴 몇 개를 클릭해 보니, 천부경(天符經)이라 쓰인 메뉴가 떴다. 클릭했다. 백두산을 배경으로 국악이 배경음으로 깔렸고, 곧이어 하단에서 글귀가 떠올랐다.


    一 始 無 始 一 析 三 極 無

    盡 本 天 一 一 地 一 二 人

    一 三 一 積 十 鉅 無 ? 化

    三 天 二 三 地 二 三 人 二

    三 大 三 合 六 生 七 八 九

    運 三 四 成 環 五 七 一 妙

    衍 萬 往 萬 來 用 變 不 動

    本 本 心 本 太 陽 昻 明 人

    中 天 地 一 一 終 無 終 一



    이교도의 방에서 보았던 것처럼 박스 형태로 배열된 글귀였다. 글자 사이에는 틈이 없었다. 맨 앞줄과 옆줄의 글자 수를 세어 그 수를 서로 곱해 보니 81자였다. 곧이어 화면에 천부경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천부경은 한민족의 경전이다. 이 경전에는 우주의 원리가 들어있다. 중국의 주역도 천부경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천부경은 계연수가 묘향산의 한 바윗돌에서 발견한 후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천부경을 반복해서 음송하면 천리를 꿰뚫을 수 있다. 천부경에는 우리 민족이 문명의 전환기를 주도한다는 이치가 담겨있다. 남성의 시대와 물질의 시대가 다하면 여성의 시대와 영성의 시대가 도래하고…….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말들이 이어졌다. 천부경이라는 한 장의 문서가 이렇게 엄청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지자 검색대에서 떨어져 나와 서가를 배회했다. 서가 옆의 통유리로 맑은 하늘이 비추었다. 새벽에 비를 쏟고 난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나는 책을 가방에 넣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집에 와보니, 여전히 이교도의 신발 두 켤래가 보였다. 내 방으로 들어간 나는 불안하게 왔다 갔다 했다. 어떻게든 오늘은 이교도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 했다. 방문이나 철문이 열리는 순간, 밖으로 나와 그와 마주치기로 했다. 잠을 자는지 벽 너머는 잠잠했다. 그 적요를 뚫고 건너 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음성이 나직하게 들렸다. 대학생의 애인은 자신의 신발을 항상 신발장 안에 넣었다. 여자가 들어왔는지는 여자가 내는 소리로 판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방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안심이 된 그네들은 큰 소리로 킥킥거렸다. 여자가 아프다는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무엇인가를 빼라는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화를 내는 듯 했다. 여러 차례 그런 끝에 여자의 목소리는 잠잠해졌다. 그리곤 여자의 교성이 낮게 울려 퍼졌다. 여자는 그런 일에 능숙하지 않은 듯했다. 여자는 서툴게 교성을 내뱉었다. 얼마 뒤 여자는 세면장에 들른 후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계단 위로 올라가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 뒤를 남자 대학생이 바짝 쫓아올라갔다.

    옆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그 순간에 나는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세면장 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의 손에는 전기 포트가 들려있었다. 이교도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희디 흰 얼굴이었고, 이마와 입술, 눈꼬리 어디에도 주름을 엿볼 수 없었다. 이교도는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이교도는 대꾸 없이 눈빛으로 인사말을 대신했다.

    저……묻고 싶은 게…… 내가 단전호흡에 관심이 많은데 그것에 대해 여쭈어 보려고.…….

    그러자 이교도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단전호흡하고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거세지도,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요번에 바구니에서 단전 호흡하는 옷을 보았거든요. 오른 쪽 가슴에 선이라고 쓰인 흰 색 옷은 단전 호흡할 때 입는 거 맞죠? 우연히 티브이에서 보았어요. 천도 선원이라고 한 것 같은데.

    별걸 다 관심을 가지시는군요.

    이교도는 그런 쪽의 대화를 피하려고 하는 듯했다.

    맞기는 한데, 별로 드릴 말씀이 없군요. 단전호흡이라면 방금 말씀하신 데 찾아가시면 될 것 같군요.

    이교도는 단호했다. 그리곤 나를 지나쳐서 세면장으로 걸어갔다. 나는 돌아서서, ?방에서도 항상 명상음악을 듣는 것 같던데 아닌가요? 하고 말했다. 사내는 돌아섰다.

    물을 뜨러 나왔는데 잠시 만요.

    이교도는 문을 연 채로 수돗물을 전기 포트에 받아 넣었다. 그리곤 이교도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선채로 죽 둘러본 방 내부는 어제 본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교도는 커피포트의 전선을 벽의 콘센트에 꽂아놓고는 밥상 밑에서 박스 하나를 꺼냈다. 작은 컵과 차 박스가 들어있었다. 이교도는 컵과 차 박스를 꺼냈다. 그리곤 컵 하나를 내 앞에 놓고 하나는 자신의 앞에 놓았다. 차 박스 옆면에는 생강의 모습이 보였다.

    요즘 안 보이던데 어디 다녀 오신건가요?

    그러자 이교도는 눈빛을 생글거리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빌라 주인아주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안 보인다고.

    그랬군요.

    이교도는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의 무릎 위로 바짝 끌어 올려놓고 허리를 더욱 꼿꼿이 폈다. 반가부좌였다. 오랜 시간 연마한 동작인 듯 아주 자연스러웠다.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나도 덩달아 허리를 폈지만 오히려 불편했다. 편안한 자세로 내버려두었다.

    시골에 다녀왔어요.

    이교도는 커피포트에서 뜨거운 물을 컵에 부어놓고 차 한 봉을 건네주었다. 나는 길쭉한 봉투 끝을 잘라 컵에 차를 부었다. 독특한 생강향이 코끝에 전해왔다. 마늘이나 녹차, 인삼 향하고 다른 독특한 생강만의 향이었다. 이교도는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침묵을 지킬 것 같았다. 나는 여러 가지 질문 거리를 생각해내었다. 주로 듣는 음악은 어떤 건가요? 언제부터 단전호흡을 하셨나요? 고향은 어디세요?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참 방이 깨끗하네요. 내 방은 청소를 잘 안 해서 바닥에 먼지가 많은데.

    그러자 이교도가 입을 열었다.

    그냥 아침저녁으로 걸레질을 하는 것뿐이에요. 자주 청소를 하는 편은 아니에요.

    나는 생강차 맛을 음미했다. 사내는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무심코 그가 왼손으로 컵을 든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연쇄살인범이 외손잡이라는 뉴스가 머릿속을 스치자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애써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말을 걸어보았다. 여전히 이교도는 내가 묻는 것에만 떠듬떠듬 답변해주고 나서는 하회탈의 웃음을 지었다.

    혹시, 무용 좋아하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무용이요?

    그가 관심어린 눈빛을 보였다.

    저기 이선주 교수의 영가무도를 보셨습니까?

    이교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무용을 잘 모르거든요. 내가 전에 회사 홍보부에 있을 때 문화면을 맡아서 많은 공연을 보러 다녔는데, 한번 이선주 교수의 춤을 본 적은 있어요. 그게 영가무도였는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시군요.

    이교도는 말을 이었다.

    영가무도라는 게 말 그대로 소리를 내면서 추는 춤이에요. 영가무도는 조선 말기에 김일부 선생에 의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고 해요. ‘음아어이우’ 이렇게 소리를 내면 저절로 단전호흡이 되면서 몸에 진동이 일어나는데 그 기운을 계속 살려나가면 춤이 터져 나온다고 해요.

    이교도는 평소 자신의 관심사였는지 영가무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도중에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천부경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에 인터넷으로 본 것과 글자 하나하나가 흡사했다. 그리곤 시선을 내려 밥상 위에 두었다. 밥상 위에는 엽전 꾸러미와 책 세권이 놓여있었다. 맨 위의 책을 자세히 보니 周易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건 엽전 아닌가요? 그랬더니, 이교도가 맞다고 했다. 그가 엽전 꾸러미를 내게 건네주었다. 엽전에는 팔궤가 그려져 있었다.

    어디에 쓰는 건가요? 이교도는 마법 도구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마법이라고요? 그랬더니, 그는 농담이라고 했다.

    이걸로 옛날 사람들은 운을 점쳤어요. 이걸 미신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 그걸 믿거든요.

    어떻게 이걸로 점을 친단 말입니까? 점이 맞는다고 보세요?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니까 믿거나 말거나이겠지요. 쉽게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나뭇가지나 동으로 된 철사로 땅 아래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내는 것처럼 엽전이나 혹은 카드로 천기와 지기를 파악해 낼 수 있는 거예요. 물론 보통 사람은 불가능하겠지만 몇몇 기감이 뛰어난 사람들 그러니까 무당 체질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도구를 사용해 다가오는 운수를 맞출 수 있는 거예요. 몇몇 동물들이 천재지변을 자각하는 초능력을 갖고 있듯이, 사람에게도 그런 감각이 있거든요. 그게 문명화되면서 거의 다 사라져버린 거지요. 그런 능력을 무당이나 종교계의 몇몇 사람만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에요. 사실 그런 능력은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는 건데…….

    그럼 저한테도. 하하.

    이교도와 한 시간 남짓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점점 그를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물론 그에게 대놓고 본명이 무엇인지를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자신은 원불교 방송을 자주 듣는데, 원불교 신자는 아니라고 했다. 그쪽에서 나오는 음악들이 자신의 ‘주파수’와 잘 맞아서 즐겨듣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은 물론 모든 물질에는 ‘파동’이 있는데 다른 물건과의 파동과 잘 어울릴 경우에 ‘공명현상’이 생긴다고 했다. 이것을 사람들이 교감이라거나 공감대라고 말한다고 했다. ‘공명 현상’을 통해 높은 수련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불치병을 치유하기도 하고, 보다 높은 영적인 각성에 이르기도 한다고 했다. 이처럼 그 자신은 아주 당연시 여기며 말을 했지만 나는 그가 내뱉는 말의 논리가 엉성하게 여겨졌다. 단전호흡이야 서구에서도 요가니 명상이니 하면서, 의료적인 효과를 인정하고 있고 또 대중적으로 널리 각광을 받기 때문에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신비주의적인 사고로 일관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는 당연시했다. 영가무도며, 점술, 명상의 초능력, 공명 현상, 이 모두 허황된 이야기로 들렸다.

    나는 그날 이후로 도서관에는 나가지 않았다. 내 방안에서 일찍 찾아온 장마를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새벽에 이교도를 비밀리 추적하기로 했다. 장마의 빗발이 거세지면서 유리창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고, 창가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벽지를 타고 번지고 있었다. 유리창 밖은 마치 도랑이라도 된 것처럼 콸콸 많은 양의 물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당에는 하수구가 있었지만 그리로 빠져나가는 물의 양보다 몇 배나 많은 빗물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유리창 밖은 마치 거대한 어항이 된 듯했다. 흐릿하게 빗물로 얼룩진 유리창은 모조 어항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선반 위에 놓은 모조 어항 속에는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물고기들이 춤추고 있었다. 지금 굵은 빗발이 쏟아지는 유리창 밖에도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을 듯했다. 빗발은 쉼 없이 내리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그쳤고, 그러다가 전열을 재정비한 양 빗발은 좀 전보다 더 매섭게 뿌려댔다.



    8.


    빗줄기가 유리창을 토닥거리는 소리를 뚫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소스라치며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엷은 잠을 자던 나는 반사적으로 그 소리에 잠이 깨었다. 조금 후 철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 거실의 불을 켰다. 이교도의 운동화가 보이지 않았다. 철문 옆의 원통형 철제 우산함에는 우산이 두 개밖에 없었다. 나는 신발을 꿰차는 것과 함께 우산함에서 내 우산을 꺼내들었다. 철문을 열고 빌라 현관 앞으로 나왔다. 마당에 그득하던 빗물은 다 잦아들었지만 가늘게 빗방울이 계속 흩뿌리고 있었다. 우산을 펼쳐든 채로 골목으로 나왔다. 이교도가 막 오른쪽 길로 꺾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쪽으로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골목에는 낮게 고양이 울음이 흘렀다. 건물 모퉁이에 서서 살짝 고개만 내밀고 그의 뒤를 엿보았다. 그가 분식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불과 20여 미터도 안 되는 거리라서 나는 가만히 귀만 열어 두었다. 내가 바짝 다가선 건물 옆에는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앞에 나타났다. 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내는 목소리에서 정감이 뚝뚝 묻어났다. 경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내 앞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벽 모퉁이에 자신의 몸을 비벼댔다. 나는 발로 툭툭 땅을 쳐대면서 내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고양이는 저 혼자 즐기는지 연신 자신의 얼굴과 옆구리를 건물 기둥에 아플 정도로 비벼댔다. 속에서 매스꺼움이 일어났다. 그때, 큰길 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고양이가 큰길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이교도였다. 발자국 소리가 내가 선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건물 옆구리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은 어두컴컴하게 코팅처리가 되어있었다.

    이교도는 내가 들어선 현관 문 앞에 와서 우산을 접은 후 검은 봉지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고양이에게 주었다. 김밥이었다. 이교도가 김밥에서 단무지를 꺼내 손끝으로 들고 대롱대롱 흔들자, 고양이가 몸을 일으켜 낚아챘다. 고양이는 바닥에 떨어진 단무지를 아삭아삭 소리를 내면서 잘라먹었다. 고양이는 그것을 다 잘라먹기도 전에 이교도의 발쪽으로 다가가 자신의 몸을 문질러댔다. 애교가 배인 울음이 들려왔다. 이교도는 허리를 굽혀 고양이의 목과 등줄기를 어루만져주었다. 고양이는 이교도의 손을 깨무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이교도는 은박지를 바닥에 펼쳐 그 위에 김밥을 놓았다. 그리곤 우산을 펼쳐 들고 큰길로 걸어갔다. 최대한 숨을 죽이며 그가 향하는 곳으로 귀를 기울여보았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고양이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김밥 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나는 조용히 우산을 펼쳐 들고 이교도의 뒤를 따라 나섰다. 이교도는 약 200미터 정도 앞에서 걷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빗방울이 떨어져서 발자국 소리를 쉽게 알아챌 수 없을 터였다. 계속해서 거리를 두면서 나는 그를 뒤따라갔다. 이교도는 중력감이 거의 안 느껴지는 가벼운 걸음을 하고 있었다.

    주택가 몇 블록을 돌고 돈 끝에 이교도는 인근 놀이터에 도착했다. 나는 전화박스에 몸을 숨겼다. 이교도는 놀이터 앞에서 멈추어 우산을 접었다. 그곳은 몇 달 전에 한 여성이 피살되었던 장소였다. 산책을 하면서 한달에 한두 번 정도 찾던 곳이었지만 사건이 일어난 후 전혀 찾지 않았었다. 정확히 시신이 눕혀졌던 곳에 이교도는 서 있었다. 이교도 앞에 푸른 색 보도블록 위로 흰색 가운으로 덥힌 시신이 겹쳐졌다. 티브이에서 보았던 장면과 이교도가 묘하게 겹쳐졌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분문기로 뿌려진 물방울처럼 희뿌옇게 대기 중으로 퍼지고 있었다. 이교도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에서 소주를 꺼내어 종이컵에 부은 후 보도블록 위에 놓았다. 그리곤 두 손을 합장한 후 맨 바닥 위에서 큰절을 드렸다. 절을 마친 후에도 이교도는 선 채로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그리곤 외투를 벗었다. 전에 보았던 仙이라는 글자가 쓰인 흰색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흰색이 아직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듯 했다. 합장을 마친 이교도는 맨 바닥에 앉았다. 그리곤 서서히 두 팔을 들어 올려 날개 짓처럼 퍼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송 위에서 막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는 학이 연상되었다. 이교도는 굴신의 자세에서 두 팔로 훨훨 날개 짓하면서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도약하기도 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한참을 허공에 머물다가는 땅으로 내려왔다. 느릿느릿 춤사위를 펼쳐가던 이교도는 무릎 밑에서 가슴 부위로 두 손을 끌어 모아 훅 허공으로 떨쳐냈다. 흡사 살풀이에서 수건자락을 머리위로 흩뿌리는 장면 같았다. 피살된 여성의 원한을 풀어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교도는 느릿느릿 춤을 추다가 합장을 하고 절을 올리는 것으로 춤을 끝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물기 탓일까? 내 코는 고향 바다를 기억해내었다. 고향 앞 바다에서 어릴 적에 보았던 굿 장면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화선지에 돌돌 만 밥을 거세게 몰아쳐오는 파도 위로 던지고 나서는 동네 무당과 더불어 어머니 외할머니 그리고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가족들이 손바닥을 비비면서 허리를 굽신거렸다. 동네에 살던 무당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춤을 추었다. 제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다가 빙글빙글 돌면서 잘도 춤을 추어나갔다. 언젠가 동네 정미소 앞의 돌부리에 넘어진 일로, 몇 달째 내가 동공이 풀린 채 미열에 시달리자 어머니는 무당 할머니를 모셔와 넋을 빌게 했다. 내가 넘어진 곳에서 무당 할머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부비셨다. 무당 할머니가 내 머리 위로 물을 뿌릴 때 감은 눈을 슬쩍 떠보니, 주변은 온통 벌판만이 끝없이 펼쳐졌다. 머리 위로 따가운 햇살이 내리쪼이는 벌판 한 가운데에 나 혼자만 있었다. 너무 놀란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캄캄해진 감은 눈 속으로도 황막한 벌판이 펼쳐졌다.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울어버렸다. 한참을 울던 나는 기절을 하고 말았다. 깨어난 후 나는 원래의 혈색을 되찾았고, 일주일은 굶은 것처럼 허기가 졌다.

    이교도는 다시 우산을 펼쳐들고 어디론가 걸어 나갔다. 나는 전화박스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골목 모퉁이를 도는 순간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가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후드득 아스팔트 위에 빗발이 떨어졌다. 내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이교도는 다시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이교도를 쫒아갔다. 이교도는 주택가의 골목길을 따라 걸어갔다. 집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눈에 익은 주택가 골목을 여러 차례 꺾어 돌자, 처음 보는 집들이 나타났다. 화강암으로 외벽을 단장한 건물들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수십 년 전쯤엔 최고급의 건물로 지어졌을 법해지만 지금은 퇴락해 있었다. 그 중 3층 건물은 눈에 익었다. 아래층만 내부를 고쳐 시계점과 빵집, 세탁소가 들어있었다. 그 위로는 오래된 화강암 외벽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고 창문들도 옛날식이었다. 그 건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돌아서자 건물 옆에 붙은 커다란 문이 보였다. 굳게 닫힌 채 사용하지 않는 문이었다. 아래층에서부터 위쪽으로 건물 외벽에는 작은 창문이 많이 달려있었다. 창문에는 손바닥 두 개 정도의 유리창이 대여섯 개 끼워져 있었다. 창문을 보니 내가 고향에서 초등학교 때에 다니던 교회 건물이 떠올랐다. 교회 창문에 걸터앉기도 하고 그리로 신발을 들고 들어가기도 했다. 다시 이교도는 화강암 건물이 들어선 골목의 끄트머리에서 꺾어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리곤 몇 차례 골목 모퉁이를 돌자 차 한대도 드나들기 힘들만큼 비좁은 골목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 십여 미터가 지나지 않아 골목이 휘어지곤 했다. 시멘트 바닥을 보고 단 한 가닥의 길을 걸었다. 빗발도 더 거세게 우산을 두들겨댔다. 바지와 신발이 젖어 들어갔다. 가느다랗게 내 입에서 새어나오던 입김도 거센 빗줄기가 삼켜버렸다. 긴긴 골목길이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보통의 골목길이 나타났다. 차 두 대가 지날 갈 수 있을 만한 아스팔트 포장도로였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이교도는 몇 차례 골목 모퉁이를 꺾어 들어갔다. 나는 달리다시피 하여 그 뒤를 쫒았다. 이교도가 걸어가는 모습이 빗줄기 너머로 흐릿하게 보였다. 그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걸어 가다보니, 동네가 낯익게 여겨졌다. 가까이 다가가니 좀 전의 3층 화강암 건물이 보였다. 맨 아래층에 시계점, 빵집, 세탁소가 있는 건물이었다.

    이교도는 그 건물 앞을 지나 좀 전처럼 건물 옆의 골목으로 빠져 들어갔다. 나는 무심코 그 뒤를 따라갔다. 이교도는 좀 전에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을 몇 차례 돌자 좀 전의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비좁은 골목이 내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골목 양 옆으로 이어지는 집은 비슷비슷했다. 슬래브 지붕으로 된 집들이 이어졌다. 촘촘하게 담을 맞댄 집들은 하나의 거대한 건물처럼 여겨졌다. 달리듯이 한참을 뛰어가자 눈앞에 보통의 골목길이 나타났다. 빗줄기가 힘차게 아스팔트 위를 두들겨댔다. 몸 전체가 젖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우산을 들었지만 가슴팍을 제외하고는 하체와 등이 흠뻑 젖어 들어갔다. 전신에 으슬으슬 한기가 감돌았다. 혼곤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이교도의 뒤를 쫒았다. 여전히 이교도는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것도 잠시, 내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면 얼른 달려가 그의 뒷모습을 시야에 붙들어 놓았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발걸음을 늦추어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이교도를 쫒고 있으려니 또다시 고향의 교회 건물 비슷한 화강암 건물이 나타났다. 이번엔 등줄기로 냉기가 흘렀다. 흐릿해지던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또다시 몇 차례 골목길을 꺾어 돌자 좁고 긴 골목길이 이어졌다. 그 좁다란 골목 끝에 다시 보통의 골목길이 나타났고 곧이어 고향의 교회 같은 화강암 건물이 나타났다. 그 화강암 건물 옆을 지나 골목길을 몇 차례 꺾어 돌아가면 다시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나타났다. 비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던 나는 두려움에 치아를 탁탁 부딪쳤다.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있는 힘껏 눈을 감고 뛰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보통의 골목길 나타났고 곧이어 고향의 교회 건물과 비슷한 화강암 건물이 나타났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이교도를 향해 달려갔다. 이교도는 걷기만 하는 데도 나와의 거리가 단축되지 않았다. 아무리 힘껏 달려가도 이교도와의 거리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내팽개쳤다. 굵은 빗줄기가 머리와 얼굴 전체로 따갑게 때렸다. 이내 몸 전체가 젖어들었다. 앞에 걸어가는 이교도의 뒷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나타났다. 나는 그리로 이를 악물고 빗줄기를 뚫고 달려 나갔다. 그러자 다시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두 다리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사방에서 공포가 엄습해 왔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비틀 비틀 걷다가 다시 힘을 내 뛰어갔다. 갑자기 머리가 무엇인가에 부딪혀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몇 번 씩 정전된 듯이 주위가 캄캄해지다가 다시 불이 오기를 반복한 끝에 정신이 들었다. 빗물이 흐르는 바닥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미간을 만진 손에서 붉은 피가 묻어났다. 소스라쳐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달렸다. 곧이어 보통의 골목길이 나타났고 저 멀리 이교도가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오로지 이교도를 붙잡으려고 힘차게 뒤쫓아 갔지만 그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또다시 고향의 교회 비슷한 화강암 건물을 지나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이어졌다. 그러길 십여 차례 반복 되었다. 오로지 나는 두려움 때문에 뛰었다. 점차 몸의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온 내 머리 속으로 보통의 아스팔트 골목길이 흐릿하게 스쳐지나갔다. 고향의 교회 같은 화강암으로 된 건물의 시계점과 빵집, 세탁소가 나타났다. 나는 그 상점 중의 하나 앞에서 쓰러졌다.

    오후에 잠을 깼을 때 나는 방안에 누워있었다.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으슬으슬 냉기가 온몸에 감돌았다. 미간 부위가 따끔해서 손을 갖다 댔더니 손에 피가 묻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반신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니 미간이 깊게 패여 있었다. 새벽에 이교도를 따라나섰던 것이 떠올랐다. 방문을 열고 거실에 나왔다. 철문 앞에 젖은 내 신발이 보였다. 이교도의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신발장을 열어보았지만 그곳에서도 이교도의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작정 이교도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스르르 방문이 열렸고, 방안에는 예전의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선반과 선반의 오디오, 옷걸이, 이불 등이 보이지 않았다. 내 방 쪽의 벽에 걸어 놓은 천부경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일이 생긴 며칠 후 연쇄살인범이 붙잡혔다. 나는 분식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티브이에서 방송되는 그 뉴스를 볼 수 있었다. 빨간 모자를 쓴 30중반의 남자가 체격이 좋은 형사들에 의해 호송되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이혼 경력이 있는 게임 중독자였다. 현실과 가상을 구별할 수 없는 정신 상태라고 했다. 그가 한 여성을 뒤쫓아 가 막 살인을 하려는 순간, 잠복근무 하던 형사들이 그를 붙잡았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분식점 주인아줌마가 낯익다고 했다. 전에 자기네 분식점에서 본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여대생도 아줌마의 추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말, 우리 분식집에서 본 것 같아요. 저 위쪽 길 건너 원룸에서 살았다고 하니까 우리 분식점 앞을 지나다녔을 거 아네요?

    그래, 우리 분식점에 들렀던 게 분명해.

    아줌마와 여드름투성이 여대생이 서로 숙덕였다.

    이교도도 이사 갔고, 연쇄살인범도 잡혀있으니 분식점에도 손님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정말요, 저도 밤늦게 고시원에 들어갈 때마다 가슴 졸였는데 이젠 안심이에요.

    나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성큼 다가온 여름 하늘은 고향 바다처럼 한껏 푸르렀다.
    고송석

    고송석

    1968년 제주 출생

    홍익대 국어국문과 졸업

    홍익대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수료

    199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시 데뷔

    1999년-2001년 이문열 소설가의 ‘부악문원’에서 숙생 생활

    시집 ‘피카소 거리의 풍경’ 등 도서 출간

  • 조남현 문학평론가, 구효서 소설가

    여섯 편을 읽었다. 서사력이 문제였다. 최근 종종 논란이 되고 있는 서사력 문제가 신춘문예 응모작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났다. 서사력은 말 그대로 힘[力]이어서 권력화 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서사력 무력화 전략이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은 서사력 무용론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서사력 미흡이 무력화 전략으로 간주되거나 미화될 수 없다.

    <형식주의자>는 자동기술법도 의식의 흐름 기법도 아니면서 그것처럼 보이게 썼다. 치기가 패기로 읽히려면 어떤 게 더 필요할까 고민하길 바란다. <아름답고 비정한 나의 이웃들>은 시점이 불안하고 내레이션이 수다로 흐른 흠이 보인다. 비정하기만 하고 아름답지 않아서 그 좋은 입심이 그만 빛을 내지 못했다. 서사력이 돋보이는 <발신자 표시제한>은 안타깝게도 흔한 방식의 내용전개 때문에 서사력에서 얻은 점수를 깎아먹고 말았다.

    뭉크의 ‘사춘기’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감성의 <소파 위의 개>는 기대작이었으나 개 사육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과 무기력의 대비가 지나쳤다. <‘신의 희작’에 관한 3개의 주석>은 발상과 형식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다름아닌 그 발상과 형식이 소박한 오마주적 결말과 서사 조형능력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게 유감스러웠다. 지금까지 거론한 작품이 선정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한 편의 당선작만을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교도>는 서사의 강점을 발휘했다. 푹 빠져들 만큼 인물에 대한 천착이 남달랐다. 세속적 성공에 초연하다 하여 루저나 예비범법자 취급을 하는 세태를 꼬집는 방식에 새로울 건 없었다. 정진해야할 숙제로 남긴다.
  • 고송석

    고송석

    1968년 제주 출생

    홍익대 국어국문과 졸업

    홍익대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수료

    199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시 데뷔

    1999년-2001년 이문열 소설가의 ‘부악문원’에서 숙생 생활

    시집 ‘피카소 거리의 풍경’ 등 도서 출간

    십년 넘게 나는 필명으로 살아왔다.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글을 쓰면서 시로 데뷔할 때의 본명을 잃어버렸다. 대신 필명이 십년 넘게 나를 벌어 먹여 주었고, 그 사이에 나는 고향도 부모도 형제도 문우도 다 잃어버렸다. 언젠가부터 희망, 기쁨과 더불어 절망, 슬픔에도 무감각해진 채로 단지 매일같이 글을 써댔다. 소설류도 쓰고 비소설류도 쓰고 그랬다.

    그래서일까? 동아일보 당선 통보 전화는 우주 저 너머에서 보내오는 파장만 같았다. 꿈만 같고 어제 같고 또 몽상만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믿기지 않은 그 전화에 나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찰싹 뺨을 때려보았다. 하도 오래 나는 무감각하게 살아 온 탓이라 본다.

    지나보니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나에겐 부처이자 예수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난 특정 종교를 믿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바로, 지금, 여기가 극락정토이자 천당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니 내 옷깃을 스쳐간 분 모두 부처이자 예수이다.

    오늘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다. 먼저, 이문열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번 생에선 갈림길을 걸어가게 될 줄 알았던 선생님과 기사회생하듯이 인연이 닿게 되었다. 또한, 졸고를 좋게 봐주신 조남현 평론가님과 구효서 소설가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 그리고 내가 지쳐 쓰러지려고 할 때 우연히 조우해 나에게 ‘빛’을 주신 정광호 학회장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 외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다시, 예전처럼 홀로 쓰고 또 쓰는 일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조금 욕심을 부려볼까 한다. 능력이 닿는 대로, 삶의 의미와 영성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는 소설을 꾸준히 써볼 작정이다. 눈부시게 희디흰 계절이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