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이윤근 (22세. 일병)
김성욱 (23세. 병장)
한상수 (20세. 이병)
소대장 (25세. 여자)
중대장 (31세. 남자)
강선구 (21세. 상병)
박재열 (22세. 상병)
행정보급관 (51세. 남자)
1.
새벽 2시. 어느 육군부대 8중대 막사의 복도. 1, 2, 3소대의 생활관이 순서대로 보이고 소대 생활관과 부대 행정실 사이의 복도에 불침번 두 명이 앉는 책상과 의자 둘이 있다. 한쪽 의자는 비어있고 다른 쪽 의자에는 이등병 한상수가 앉아 있다. 장병의 불침번 및 위병소 근무 교대 시간마다 해당 병사들을 깨워야 하므 로 책상에는 손전등이 놓여있다. 같이 불침번 근무하는 일병 이윤근은 어디론가 가고 없다. 소대 생활관 쪽 복도에서 욕설이 들리면서 극이 시작한다.
이윤근 : (큰 소리로) 그래! 한번 해보자!
2소대 생활관에서 일병 이윤근이 나와 행정실 쪽으로 뛰어간다.
이윤근 : (행정실로 들어가면서)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김성욱 등장
김성욱 : 야! 이윤근! (앉아 있는 한상수에게) 야, 저 새끼 잡아!
한상수 :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얼떨결에 일어난다)
그러나 행정실로 들어가는 이윤근
김성욱 : (바로 태도가 바뀐다) 유, 윤근아 내가 잘못했어.
한상수 : (눈치를 보다가) 김성욱 병장님, 이미 들어갔는데요.
김성욱 : (한숨을 푹 쉰다)
행정실 안에서 들리는 이윤근의 목소리
이윤근 : (절규하듯) 소대장님! 진짜 죽을 것 같아 못살겠습니다!
(긴사이)
한상수 : (긴장한 목소리로) 김성욱 병장님, 제가 혼자 불침번 볼까요?
김성욱 : (한상수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어떡하지….
행정실 문이 열리고 소대장이 나온다.
소대장 : 야! 김성욱.
김성욱 : (체념한 듯) 예.
소대장 : 들어와!
김성욱 : 알겠습니다.
소대장과 함께 행정실로 들어가는 김성욱.
2.
중대장실. 중대장이 담배를 피며 앉아 있다. 책상에는 이윤근이 쓴 진술서가 놓 여 있다.
중대장 : (근심 많은 표정으로) 장기(복무)는 날아갔고…. 염병할 놈의 군대.
노크소리
중대장 : 누구냐?
이윤근 : (긴장한 목소리) 일병 이윤근입니다.
중대장 : 들어와!
이윤근 들어간다.
이윤근 : (경례하며) 단결!
중대장 : 단결 못한다. (진술서를 들고) 여기 써져 있는 것이 사실이냐?
이윤근 : (고개를 숙이고) 예.
중대장 : 왜 말 안 했어? 나 짤리라고!
이윤근 : (고개를 숙인 상태로) 견디려고 했습니다.
중대장 : (큰소리로) 견디려면 새끼야, 죽을 때까지 견뎌야지. 왜! 참고 지랄이야.
이윤근 : (침묵)
중대장 : (담배를 끈다) 아니다, 아니야. 잘했어, 잘했다. 나가봐!
이윤근 : (경례한다) 단결!
이윤근 퇴장한다.
중대장 : (전화를 건다) 소대장! 그 세 놈 불러… 아니다. 김성욱부터 불러.
소대장 : (목소리만) 예!
중대장 : (전화 끊는다) 대대장님께 뭐라고 말씀드리지? 아 골 때리네.
노크소리
중대장 : 누구냐?
김성욱 : 병장 김성욱입니다.
중대장 : (큰소리로) 들어와!
김성욱 들어온다.
김성욱 : 단결!
중대장 : (진술서 들고) 사실이야?
김성욱 : 그게….
중대장 : 사실이냐고 새끼야?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야. 이 멍청한 놈아.
김성욱 : 형식적으로는 사실인데….
중대장 : 그래? (비아냥거리며) 비형식적으로는 사실이 아닌 게 있어?
김성욱 : 일병 이윤근이 정말 절묘하게 우릴 화나게 했습니다.
중대장 : 하극상이라도 했다는 거냐?
김성욱 : 그런 뚜렷한 행동은 없었지만 비슷한….
중대장 : 시발! 증거라도 있어야 니들을 카바해 줄 거 아니야? 이거 그대로 상부에 보고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김성욱 :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
중대장 : 하극상 비슷한 거? 그래, 말해봐.
김성욱 : 예를 들자면 어제 사건 있지 않습니까?
중대장 : 아, 그 네가 이윤근에게 빨래 짬 시킨 거. 그게 정당하냐?
김성욱 : (망설이다) 사실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많이 시켰습니다.
중대장 : 그래. 그게 이유야?
김성욱 : 아닙니다. 그건 제가 잘못한 게 맞는데 상황이 이랬습니다. (문 쪽을 바라 보며) 야! 이윤근!
상황 재현. 조명이 바뀌어 이윤근 등장.
이윤근 : 예, 일병 이윤근!
김성욱 : 빨래는 다 됐냐?
이윤근 : 좀 있으면 다 될 것 같습니다.
김성욱 : 알았다 가 봐. 불침번 왜 없냐고 소대장이 뭐라 하겠다.
이윤근 퇴장
중대장 : 그래서?
김성욱 : 근데 이놈의 빨래가 한 시간이 넘어도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직접 세탁실에 가서 확인하니 수도 밸브가 잠겨 있고 세탁기가 안돌아 가는데 이 녀석이 그냥 세제랑 빨래만 놓고 간 겁니다.
중대장 : 그래서 화나서 그 자식을 때렸다?
김성욱 : 아니 때릴 생각은 없고 그냥 겁만 줄려고 했는데. (다시 재현) 야 이윤근!
이윤근 등장
이윤근 : 일병 이윤근!
김성욱 : 야, 지금 나 엿 먹이는 거냐? 넌 수도 밸브 잠긴 상태에서 빨래 하니?
이윤근 : (뻔뻔하게) 몰랐습니다.
김성욱 : 뭐?
이윤근 : 몰랐습니다.
김성욱 :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다시 한 번 말해봐.
이윤근 : (더욱 당당하게) 몰랐다고 했습니다.
김성욱 : (흥분해서 주먹을 쥐고) 이런 개새끼가!
중대장 : 그만!
김성욱 : 아… 예.
이윤근, 씨익 웃으며 퇴장한다.
김성욱 : 저 웃음을 보시면 이윤근이 어떤 녀석인가 알 수 있습니다.
중대장 : (비웃으며) 그러니까 일부로 맞으려고 상황을 만들었다. 이거냐?
김성욱 : 예. 세탁실 짬 시킨 것은 제 잘못이지만 이렇게 까지 상황을 만든 건 이윤 근 그 자식의 계획입니다.
중대장 : 아까 보니까 완전 겁먹었던데?
김성욱 : 그 자식 이상한 놈입니다. 어떨 때는 겁쟁이였다가 또 어떨 때는 이자식이 미쳤나? 할 정도로 뻔뻔합니다.
중대장 : 하극상이라도 있나 알아보려 했더니 고작 낸 다는 게 그거냐?
김성욱 : 일부로 화나게 하는 것도 하극상이지 않습니까?
중대장 : 이 멍청한 놈아! 네가 말하는 그게 결국 내무부조리 중에 나온 거잖아. 그 상황에 대들었다고 해도 정당방위가 될 판에 네 심증을 제외하면 하극상 조차도 없잖아.
김성욱 : (침묵)
중대장 : 지금 다른 병사들 반응이 어떤지 알아? 그렇게 괴롭히고 팼는데 그동안 잘도 참았네 하는 동정론이 대부분이야.
김성욱 : (고개를 푹 숙이고) 저는 어제 빼면 때린 적 없습니다. 강선구랑 박재열이 대부분 때렸습니다. 전역도 얼마 안 남았는데 왜 사고를 치겠습니까?
중대장 : 방관한 너는 뭐고? 참 대단한 최고 고참 이시네. 결국 한다는 게 후임들 파는 거냐?
김성욱 : (침묵)
중대장 : 다른 새끼들이 주로 이윤근 구타한 건 사실이지?
김성욱 : 예.
중대장 : 알았다. 나가봐.
김성욱 : 예.
퇴장하려다 다시 돌아서며
김성욱 : 저기 중대장님.
중대장 : 왜?
김성욱 : 강선구랑 박재열에게 제가 말했다는 거 이야기 안 해주셨으면…. 저 그럼 말년에 진짜 매장당합니다.
중대장 : 멍청한 새끼, 알았어. 가봐.
김성욱 퇴장
중대장 : (전화한다) 강선구 오라 그래.
소대장 : (목소리만) 예!
강선구 등장
강선구 : (경례하며) 상병 강선구.
중대장 : 앉아.
강성구 : (힘없는 소리로) 예.
중대장 옆 자리에 앉는다.
중대장 : 왜 온지 알지?
강선구 : 예. 알고 있습니다.
중대장 : (은근히 떠 보듯이) 보니까 김성욱은 평소 방관하고 박재열이랑 팀까지 먹 고 팼더구먼.
강선구 : 김성욱 병장이 그럽니까? 저랑 박재열이 다 팼다고? 김성욱 병장이 거의 다 시켜서 한 게 대부분입니다.
중대장 : (씨익 웃으며) 아 그런 거였어?
강선구 : (혼잣말로) 우리는 한 몸이니까 커버 쳐주니 할 때는 언제고, 비겁한 새끼.
중대장 : (큰 소리로) 이 새끼가 어디서 말을 함부로 해.
강선구 : (황급히) 죄송합니다!
중대장 : (웃으며) 그래도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
강선구 : 군기를 잡아야 하는데 자기는 이제 전역이 얼마 안 남아 좀 그렇다고 너 희들이 하라고 대놓고 그랬습니다. 사실 군기니 뭐니 죄다 헛소리고 그냥 괴롭히는 거 보는 게 재미있는 겁니다.
중대장 : 그래도 네 선임 아니냐? 앞으로는 조심해라. 하극상으로 징계가 가중되기 싫으면 말이지.
강선구 : (고개를 숙이며) 예. 알겠습니다.
중대장 : 아 맞다. 이윤근이 은근히 너희에게 하극상 비슷한 걸 한 적이 있다는데?
강선구 : 사실 딱히 들어나는 행동은 없었는데… 다르게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게 많습니다.
중대장 : 소름끼치는 거?
강선구 : 뭐랄까…. 마치 다 그 상황을 유도한 거 같은….
중대장 : (신경질 내며) 무슨 소리야 제대로 설명해봐.
강선구 : 한 달 전 일입니다. 그때 제가 주말에 이윤근 한테 족발을 전화 주문해서 위병소에 배달 오면 받아오라고 시켰습니다.
중대장 : 그때 나한테 걸려서 너희들 전체 징계 먹은 일 말이지?
강선구 : 예. 그건 솔직히 할 말이 없지만 당시 저희는 중대장님에게 안 걸리기 위 해서 이윤근에게 막사 뒤편으로 돌아가서 창문으로 족발을 달라고 했습 니다. 근데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윤근이가 대놓고 막사 안으로 들어 오고, 중대장님 실 쪽으로 당당히 가는 겁니다. 마치 중대장님에게 이것 좀 보라는 듯이 말입니다.
중대장 : 윤근이는 말귀를 잘 못 알아 들었다는데?
강선구 : 그래서 제가 막사 뒤편으로 그 녀석을 끌고 갔습니다.
상황 재현. 조명이 바뀐다.
강선구 : (벌떡 일어서서) 야! 이윤근.
이윤근 겁먹은 표정으로 등장한다.
강선구 : (이윤근 멱살을 잡고) 이 시발 놈아. 우리 걸리라고 작정하고 그랬지?
이윤근 :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합니다. 정말 몰라서.
강선구 : 너 지금 나 고졸이고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지? 대학 잘 다니다 나 같은 무식한 어린새끼한테 명령 받으니까 열 받으니까 그런 거잖아.
이윤근 : (벌벌 떨며) 절대 아닙니다. 그, 근데…(겁먹은 표정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자신 만만한 얼굴로 강선구를 노려본다) 고졸이라는 건 신경도 안 쓰는데 왜 과민 반응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선구 : (황당한 표정으로) 뭐?
이윤근 : (비웃으며)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 괴롭힐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공부 를 해서 지위를 올리면 되지 않습니까?
강선구는 이윤근의 복부를 발로 차고 뺨을 갈긴 뒤 양손으로 이윤근의 양 팔뚝을 세게 잡는다.
강선구 : 이, 이 자식이! (순간 당황한 표정)
중대장 : (강선구를 보며) 왜 그래?
강선구 : (중대장에게) 그때 놀랐습니다. 이 자식 팔뚝 근육이 장난이 아닌 겁니다.
이윤근은 힘으로 강선구의 양손을 가볍게 뿌리친다.
이윤근 : (강선구를 노려보면서 비웃는다)
강선구 : 그 표정을 중대장님도 봤어야 합니다. '맘만 먹으면 너 같은 건 언제든지 박살낼 수 있어' 라는 그 표정….
이윤근 : (미소를 지으며 강선구에게) 그만 하시죠.
이윤근은 퇴장하고 강선구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중대장 : 평소 윤근이의 행동거지를 봐선 전혀 공감이 안 가는데.
강선구 : (다급하게) 무서운 자식입니다! 진짜 중대장님도 겪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중대장 : 근데 말이야. 이윤근이 그런 행동을 보인 건 결국 네가 내무부조리를 시킬 때 한 거잖아? 그리고 그 행동 자체도 딱히 하극상도 아니고.
강선구 :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것도 그 녀석이 노린 게 아닐까 합니다. 솔직히 이상 하지 않습니까? 대학도 명문 다니고 학과도 경제학과 인데 멀쩡한 놈이 기본적인 말귀도 이해 못하고…. 사단장님의 정신교육이나 군 역사 시간 에는 그렇게 똑똑한 놈이 말입니다.
중대장 : 뭐 그럴 수도….
강선구 : 때린 건 잘못했지만 이 점도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중대장 : (고개를 저으며) 힘들 것 같다. 아까 성욱이 빨래 건도 그렇고 결국 상황 자체가 내무부조리를 시키다가 이행을 못한 거잖아. 그리고 네가 말한 이 윤근의 돌발 행동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당사자가 그게 아니라고 하면 그만인 경우라서 말이지.
강선구 : (풀이 죽어) 그렇긴 합니다.
중대장 : 그리고 무엇보다… 그 상황에 너랑 이윤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게 문 제지. 알겠다. 가봐라. 나중에 다시 부르마.
강선구 : (경례하며) 단결!
강선구 퇴장
중대장 : (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에 빠져있는 표정) 김성욱도 그렇고…. 진짜 뭔가 있긴 있나? (다시 전화를 건다) 박재열 불러와.
소대장 : (목소리만) 예!
박재열 등장
박재열 : (앞의 두 명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부르셨습니까?
중대장 : 앉아.
박재열 : 예.
중대장 : 왜 그랬냐?
박재열 : (시원시원하게 말한다) 처음에는 장난이었다가 나중에는 저희가 너무 심했 습니다.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할 말 없습니다.
중대장 : 인정하는 게 빠르네.
박재열 : 잘못한 만큼 징계 받겠습니다.
중대장 :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잘 나와야 영창이고 재수 없으면 그 이상도 나올 수 있다는 거 알지?
박재열 : 예.
중대장 : 그래. 어쩔 수가 없네. 나도 웬만하면 좋게좋게 끝내고 싶은데 말이다.
박재열 : 죄지었으면 그만큼 벌 받아야죠.
중대장 : (조소를 머금으며) 다른 놈들은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해서 문제였는데 넌 되레 너무 시원시원해서 문제다. (한숨을 쉬며) 근데 말이다….
박재열 : 예.
중대장 : 진술서를 읽어보니 너희들 왠지 이윤근을 괴롭힌 거 말이야. 뭐랄까…. 그 녀석이 정말 미워서 그런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안 그래?
박재열 : (뜸을 들이다가) 솔직히 어느 정도 맞습니다.
중대장 : 어디가 그렇게 미웠냐?
박재열 : 딱히 그 녀석이 저희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합리화 시킬 생각 은 없지만 저희도 이등병 때 다 그랬듯이 어느 정도 굴리다가 일병 쯤 되 면 풀어 줄 생각이었죠. 근데….
중대장 : 근데?
박재열 :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저희 말을 듣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 다고 저희와 같이 놀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깊이 생각에 빠진 표정) 아니 그거 이상으로 뭐랄까… 아예, 저희랑 선을 그으려고 했다고 할까요?
중대장 : 선을 그어?
박재열 : 예. 주말에 티비 보며 과자 먹을 때 있지 않습니까? 과자 사오라고 시키면 사오긴 해도 절대 자기분량은 안사오고 같이 먹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병사들끼리 쉬는 시간에 축구를 하거나 놀 때도 윤근이는 혼자 생활관에 남아 자격증 공부나 책읽기로 시간을 보냅니다.
중대장 : 그게 나쁜거냐?
박재열 : 나쁜 건 아닙니다. 일도 중간은 하고 쉬는 시간에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는 거니까요. 그렇게 자기관리 하니까 군 생활 중에 국가공인자격증도 딸 수 있는 거겠죠. 언젠가 윤근이가 즐겨보는 역사책을 장난삼아 뺏고 '너도 좀 같이 놀자' 이랬더니 저에게 보낸 그 눈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중대장 : (담배를 꺼내면서) 눈빛? 그게 뭔데?
박재열 :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황해하는 것도 아닌 뭔가… 차갑고 싸 늘한 눈빛… 마치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명이 바뀌고 이윤근이 등장한다.
이윤근 : (박재열을 하찮게 바라보며) 나는 너같이 남는 시간 허송세월로 보내서 인생 낭비하는 그런 인간은 되고 싶지 않거든. 이 한심한 놈아….
박재열 : (화를 겨우 억누르는 어조로) 그만해…!
이윤근은 박재열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윤근 : 그렇게 허송세월 보내다 전역해서 세상 한탄이나 해. 왜 이 세상은 날 안 받아 줄까 하고 욕이나 하고 말이야. 알았어!
박재열 : (이윤근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한다) 닥쳐!
맞고 쓰러지는 이윤근. 쓰러진 상태에서도 박재열을 비웃는다. 중대장은 이러한 상황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이윤근 퇴장한다.
중대장 : 죄다 네 상상이잖아.
박재열 : 예. 모두 심증뿐입니다. 그 녀석은 물증 같은 건 절대 남기지 않죠.
중대장 : (진술서를 보면서) 폭력 내용은 전부 사실이고 딱히 하극상으로 보이는 행 동은 없다. 이게 팩트야. 널 변호할 요소가 그다지 없어.
박재열 : 벌 받겠습니다. 잘못한 건 부정할 생각 없습니다.
중대장 : 그래. 나가봐라.
박재열 : (경례하며) 단결!
박재열 퇴장
중대장 : (혼잣말로) 물증은 없고 그저 심증만 있고 거기다 내용 자체를 가해자들도 다 인정한다…. 이게 전부 이윤근의 계획? (담배를 핀다) 아, 골치 아프네. (전화를 건다) 소대장! 보급관님이랑 같이 들어와!
소대장 : (목소리만) 예!
행정보급관, 소대장 문을 열고 차례로 등장한다.
소대장 : 단결!
중대장 : (대충 경례를 받는다)
행보관 : (중대장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여유로운 목소리로) 고생이 많습니다.
중대장 : 죽겠습니다. (소대장에게) 거기 앉아.
소대장 자리에 앉는다.
중대장 : (두 명에게) 진술서는 다 봤지요?
행보관 : (고개를 끄덕이며) 별거는 아닌데 때린 강도랑 횟수가 좀 많아서….
소대장 : (힘 빠진 목소리로) 면목 없습니다. 제가 잘 관리했어야 했는데.
중대장 : 지금 면목이 어쩌고 하면 무슨 소용이야? 어떻게 해결 하냐가 문제지.
소대장 : 일단 세 명의 내무부조리는 확실하니 대대장님께 보고 드리고 사단에 연 락해야 될 것 같습니다. 확실하게 징계해야 더 이상 이런 일이 생기지 않 을 겁니다.
소대장의 말에 중대장과 행정보급관이 어이없어 웃는다.
행보관 : (웃으며 소대장에게) 젊은 장교라서 그런지 순진하시네요. 이게 그대로 보고 되면 새로 온지 얼마 안 되신 대대장님은 얼마나 난감하며 사단장님의 귀 까지 들어가면 대대장 망신당하고 우리 병사들 사기가 얼마나 떨어지겠어 요. 거기다 이 문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소대장님입니다.
소대장 : 그래도….
중대장 : (말을 자른다) 답답한 사람아! 사건을 숨긴다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그렇게 썩었겠어? 모두를 위해 좋은 방향으로 다듬어서 올리자는 거지!
소대장 :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침묵)
행보관 : (중대장에게) 진술서에 있는 사건의 큰 틀은 일단 사실입니다. 세 명이 무 슨 꿍꿍이가 있다고 했는데 솔직히 물증은 없다는 게 관건이죠.
중대장 :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보급관님이십니다.
행보관 : 사실 윤근이 녀석 너무 기본적인 것에 긴장하고 벌벌 떨 땐 좀 의아하긴 해요. 대학도 좋고 멀쩡한 놈이 말이죠.
중대장 : 그럼 혹시 싫어하는 세 놈 쫒아내기 위한 연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대장 :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행보관 : (중대장에게) 연기였다면 가장 친했던 녀석에게 빈틈을 보일 수도 있겠죠.
중대장 : 제일 친한 녀석이라…. 아! 맞다. (소대장에게) 한상수 불러와!
소대장 : 예.
소대장 퇴장한다.
행보관 : (고개를 끄덕이며) 한상수가 윤근이랑 제일 친하죠. 대학도 같은 후배에 서 로 죽도 잘 맞고 말입니다. 어차피 길게 끌어봐야 안 좋은 소문만 무성해 지니 상수 놈 말을 참고하고 정리합시다.
문 두드리는 소리
소대장 : (문 밖에서) 한상수 데리고 왔습니다.
중대장 : 들어와.
소대장, 한상수와 함께 들어온다.
한상수 : (경례하며) 단결!
중대장 : (고개를 끄떡이며) 그래 자리에 앉아라.
한상수 : 예.
소대장과 한상수 자리에 앉는다.
행보관 : (자상한 목소리) 상수야.
한상수 : (긴장한 목소리) 예.
행보관 : 평소 윤근이는 어떤 선임이었어?
한상수 : (잠시 침묵) 착한 선임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부대 와서 아무것도 모를 때 이것저것 챙겨주고 제가 실수하거나 잘못한 게 있어도 대부분 자기 책 임으로 돌릴 정도로 착했습니다.
중대장 : 그런 거 말고 윤근이가 선임들에게 개기거나 그런 건 없어?
소대장 : (맞장구치며) 하극상은 아니더라도 건방지게 말했다든가 이런 거 말이야.
한상수 : 그 세 명에게 괴롭힘 당하는 건 많이 봤는데 그런 거는 못 봤습니다.
행보관 : 윤근이를 탓하는 게 아니란다. 우리가 피해자를 왜 탓해. 다만 사건 경위 를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야. 세 명이 이윤근만 집중적으로 괴롭힌 건 나름 미워하는 이유가 있어서 일 거 아니겠어?
한상수 : (긴장했지만 단호하게) 평소 정신교육 때 발표 자주하는 거랑 그걸로 포상 휴가 나갈 때 이윤근 일병이 나댄다고 싫어하긴 했습니다. 근데 개인적 으론 솔직히 자기들 휴가 못나가니 질투 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중대장 : 그것 뿐 이야?
한상수 : 예. 사실 선임들에게 하극상을 하거나 잘못 한 건….
행보관 : (말을 자르며) 수고했어. 가 봐라.
한상수 : 예.
한상수 퇴장
중대장 : 뭐야! 결국, 그 세 놈들 열등감 폭발에 그런 거잖아.
소대장 : (난감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행보관 : (웃으면서) 두 분 다 젊으셔서…. 이런 일은 이렇게 해결하면 됩니다.
중대장 : 어떻게 말입니까?
행보관 : 일단 자잘한 거 다 보고하면 시끄러워지니 세 녀석의 가장 큰 대표적인 내무부조리 하나씩만 골라 윤근이에게 잘 말해서 진술하게 합시다. 그리 고 나쁜 짓만 보고하면 세 명에게 피해도 크고 그 놈들 고생할 테니 소대 생활 분위기와 잘 섞이지 않았던 윤근이의 평소 성격에 답답함을 느끼다 이렇게 번진 거라고 마무리하면 되죠. 어차피 세 명은 징계 받고 다른 부 대로 전출 가니 윤근이에게도 좋고, 큰 징계를 피할 수 있으니 세 놈에게 도 좋고, 우리도 이렇게 보고되는 쪽이 쓴 소리를 덜 들을 겁니다. 이러 면 팩트에서 벗어나는 게 없으니 좋은 게 좋은 거죠.
중대장 : (나름 감탄하여) 역시 경험은 무시 못 하네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 습니다.
행보관 : (손목시계를 보고 일어난다) 점심시간 한참 지났습니다. 다 먹자고 하는 일 인데 식사나 하죠.
중대장 : (일어나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소대장 : (말없이 일어난다)
모두 퇴장하려 문 밖으로 향한다.
중대장 : (나가면서) 보급관님, 자녀들 대학 등록금은 해결 되셨습니까?
행보관 : (한숨 쉬며) 또 올랐더군요. 학자금 대출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중대장 : (역시 한숨을 쉬며) 군대 일이라도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참 사는 게 뭔지.
행보관 : (웃으며) 그러게 말입니다.
소대장 : (이해 안 되는 표정으로 혼잣말) 그게…그런가…?
모두 퇴장.
3.
2소대의 생활관. 이윤근이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다.
이윤근 : (여유롭게 휘파람을 분다)
한상수 등장
한상수 : 이윤근 일병님!
이윤근 : (웃으며 자상하게) 그래. 말은 잘했어?
한상수 : 예….
이윤근 : (한상수에게 손짓하며) 수고했어. 와서 앉아.
한상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는다.
한상수 : 아마 세 명은 최소 영창에 다른 곳으로 전출이겠죠?
이윤근 : 최소가 아니라 그게 확정일 거야.
한상수 : (의아하게) 확정이라니요?
이윤근 : (웃으며) 진술서에 나온 사건 그대로 다 올라가면 그 세 명 징계가 무한정 으로 커질 테고 그럼 그거 관리 못한 간부님들도 골치 아프지. 아마 조금 있다 날 불러서 가볍게 다듬어 다시 보고하라고 권유할 거야.
한상수 : 역시 똑똑하시네요. (사이) 그렇게 다시 쓰실 겁니까?
이윤근 : (상반신을 일으킨다) 그럼.
한상수 : 그래도 이윤근 일병님이 그동안 당한 게 얼마인데 그렇게 하면 너무….
이윤근 : (갑자기 화를 내며) 뭐라고!
한상수 : (놀라며) 이윤근 일병님!
이윤근 : (다시 정상적인 태도로 부드럽게) 아니다. 넌 진짜 모른다, 진짜 몰라.
한상수 : 모른다니요?
이윤근 : 이게 제일 좋은 거고 나도 원하는 거야. 너무 궁지로 몰면 사람들은 어떻 게든 살려고 하거든.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더 상황이 안 좋아 질 수도 있지. 지금 솔직히 내가 손해 본 게 있어?
한상수 : (고개를 끄덕이며) 저기…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윤근 : 뭔데?
한상수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윤근 일병님이 여러 사람들 보는 앞에서 혹은 단 둘이서 그 세 명을 화나게 해서 괴롭힘 당하는 걸 유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윤근 : (웃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상수 : 같이 생활하면서 이윤근 일병님이 그런 간단한 일을 이해 못해서 실수할 만큼 얼 타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윤근 일병님의 엄청난 힘을 보면 그 세 명이 때린다고 호락호락 맞을 사람도 아닙니다.
이윤근 : 그래서?
한상수 : 설사 계획된 거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싶습니다. 이윤근 일병 님의 진심이 무엇인지…. 전 이윤근 일병님 편이지 않습니까?
이윤근 : (다시 화를 내며)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야 새끼야! 네가 내 편이라고!
이윤근, 미친 듯이 일어나 한상수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침대에 눕힌다.
한상수 : (억센 팔 힘과 살기에 겁먹은 목소리) 이윤근 일병님….
이윤근 : (비웃으며) 내 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 이익에 맞는 편이겠지. 나 다 알고 있어 새끼야.
한상수 : 다, 다 안다니요?
이윤근 : 삼 개월 전 우리 소대 최고참이던 노희얼, 그 자식 네가 고발한 거.
한상수 : (다급하게) 절대 아닙니다.
이윤근 : 취조 받고 혼자 있을 때 중대장님 서랍에 있는 진술서 다 봤어. 개새끼야!
한상수 : (침묵)
이윤근 : 그 세 명이 나를 직접적으로 괴롭힌 시점이 그때부터 인 거 너도 잘 알잖 아? 그놈들과 친했던 노희얼 병장이 고발당했고 누가 고발 했나 혈안이 되었을 때. 가장 유력한 게 갈굼 많이 받은 나랑 너였으니까. 그리고 넌 중대장님에게만 비밀리에 고발하고 그 세 명에겐 마치 내가 고발한 것처 럼 말해서 살아남은 거 내가 모를 줄 같아? 진술서 보니까 너랑 나랑 같 이 노희얼 욕했는데 너 욕한 건 하나도 안 쓰고 나 욕한 것만 있더라. 그 세 명에게도 똑같이 말했겠지?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한상수 : (떨면서) 죄송합니다. 그땐 진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윤근 : 그래서 내 군 생활은 그동안 지옥이었다. 사격할 때 널 싸 죽이고 그냥 인생 말아먹을까 생각도 했어. 근데 그 지랄하면 내 인생이 너무 아깝지.
한상수 : 그때 그들이 절 세탁실로 끌고 가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어요.
조명이 바뀌고 그 세 명이 등장. 이윤근에게 제압당한 한상수에게 다가간다.
강선구 : 야! 솔직히 말해. 너냐? 아님 이윤근 그 새끼냐?
박재열 : 아님 둘 다냐?
김성욱 : 이윤근 이랑 평소 무슨 이야기 했어? 솔직히 말해라! 지옥가기 싫으면.
한상수 : (세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윤근 일병님이라면 저 상황에 어떻게 하겠 습니까?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그 후 전 계속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래서 오늘 진술할 때 이윤근 일병님이… 시킨 대로 말한 겁니다.
강선구, 박재열, 김성욱 세 명은 한상수를 비웃으며 퇴장한다. 그 뒤 이윤근은 한상수를 풀어준다.
이윤근 : 나도 알아. 그러니까 가만있는 거야. 너도 너의 이해관계에 충실했을 뿐이 지. 그 뒤 느낀 게 뭔지 알아? 착한 것도 나쁜 것도 비열한 것도 정당한 것도 이해관계에 따라 그때그때 바뀌는 거야. 절대적으로 착한 새끼니 나 쁜 새끼니 그런 거 없어.
한상수 : (침묵)
이윤근 퇴장하려는데
한상수 : 이윤근 일병님….
이윤근 : 왜?
한상수 : 딱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윤근 : 뭔데?
한상수 : 그럼 세 달 동안 전부가 계획적인 거였습니까?
이윤근 : 왜, 그걸로 나 약점 잡게?
한상수 : 그건 아니고… 그냥 알고 싶습니다.
이윤근 : 간부님들도 관심 없는 진실을 왜 네가 알고 싶어 하는데? (웃으며) 나도 솔직히 모르겠다. 계획이었는지 아닌지.
이윤근 퇴장. 한상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4.
시간이 흘러 전역모를 쓴 이윤근이 군부대 정문에서 나온다.
이윤근 :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휘파람을 분다)
걸어가면서 군모를 벗고 군복을 하나하나씩 벗자 양복에 머리도 깔끔하게 기른 사회인 이윤근으로 변한다. 잠시 서서 부대 정문을 뒤돌아보고 소리 없이 웃으며 퇴장한다.
막.
박근형 극작가 연출가, 김명화 극작가 연극평론가
다채로운 시도는 있었으나, 눈에 띄는 수작은 드물었다. 그 중 우리가 주목한 작품은 <일병 이윤근> <미친 존재감> 두 편이다.
당선작인 최준호의 <일병 이윤근>은 한국 사회의 모순과 폭력성이 화약고처럼 집약된 군대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일상을 나열하거나 크게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조직의 모순을 깔끔하게 추출하는 작가의 관찰력이나 군더더기 없는 극작술이 돋보였다. 결말의 영악함과 현실 수긍의 논리가 곤혹스럽긴 했지만, 우리는 이것이 전망 없는 구조 속에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솔직한 자화상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오승수의 <미친 존재감>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자살한 청소년의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와 그에 대한 죄의식으로 할머니를 찾아오는 소년의 친구가 하룻밤 동안 대화를 나누는 언어 중심의 작품이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진실과 화해를 찾아가는 구조와 서정미가 좋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절제력이 부족했고 대사의 잉여나 방만한 설정은 공연을 염두에 두었을 때 무리수로 읽혔다. 작가가 문자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한다면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은 무얼 하겠는가, 연극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사유를 부탁드린다.
올해 또 하나의 특징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성장소설의 붐이 희곡에서도 예견되는데, 그런 점에서 청소년 문제를 다룬 <바람직한 청소년>은 캐릭터의 진정성이나 문제의식이 좋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희곡이라기보다는 시나리오에 가까웠다. 그 외, 깔끔한 글 솜씨였지만 캐릭터의 설득력이 부족한 <닳고 닮아서>도 함께 거론되었다.
당선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쓰는 이 글이 전화를 받았을 때의 황홀감을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 아니 억만 분의 1이라도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선 소감조차도 바르르 떨리고 있는 마당에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지….
사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내가 희곡, 아니 글을 쓴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집 근처의 강동고등학교를 자퇴. 그 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라 불안감을 분출하는 통로로 역사‧철학 등 인문 서적을 읽으며 머릿속에 오만가지 잡생각에 동네를 홀로 돌아다니며 의미 없이 걸었던 시간.
스무 살이 되어서야 이런 것들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대학에 갔고, 그곳에서조차 내가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 홍대 사거리에서 처음 본 연극이란 장르는 내 안의 무언가를 홀려 무조건 희곡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직도 그게 왜 그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연극과 영화를 보고 학생들과 토론을 하고 공연을 제작하며 밤을 새우고 자취방에 돌아와서는 연극‧영화 관련 서적을 읽고 쓰는 걸로 다시 날이 밝고,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느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재미란 것을 느낀 순간 지난 이십여 년간 있었던 나의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시간이 오히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소재가 되었고, 연극이란 것에 티끌만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썼던 희곡들이 지금의 당선전화를 들려준 것 같습니다.
희곡의 텍스트를 보고 감동하게 해준 이강백 교수님, 희곡 쓰는 법을 알려준 윤조병 교수님, 연극을 만든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한 것인지를 알려준 오태석 교수님, 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저의 꿈같은 첫 당선이었던 원광대문학상의 심사위원 신귀백님과 이상복 교수님, 늘 함께하며 응원해주시는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신경 쓰지 않고 술 먹으러 가자며 전화하는 내 진짜 친구들… 그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내 열등감, 패배감, 부끄럽고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라는 아름다운 것들에게 감사합니다.
당선전화는 내가 연극에 평생 바칠 수 있는 반석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이 반석으로 연극판에 평생 구를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건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