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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을 통해서만 사랑은 자라난다 - 윤가은의 '우리들'

by  김세나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언제였는지 아득하기 만한 잔상들이 떠오른다. 같은 집 방향이면 등굣길에 들러 같이 학교에 가고 돌아오던 그때. 하교 길 마주하는 주위의 대상들은 모두가 호기심과 관심의 세상이던 그 시절. 헤어지기 아쉬워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나의 집에 돌아가지 않고 눈치 없이 그 집 밥을 같이 하던 그때가 말이다. 윤가은의 ‘우리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겪고 있는 결핍과 애정에 대한 상관관계를 따뜻하면서도 본질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랑과 애정의 감정은 과연 결핍된 아이들의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을까?

    외톨이처럼 학교생활을 보내는 ‘선’은 ‘보라’의 무리들과 친해지고 싶지만 좀처럼 끼어 들 수 없는 상태다. 선이가 보라의 생일파티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녀는 잘못된 주소가 적힌 초대장을 일부러 주면서 간접적으로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보인다. 왜 나는 그 무리에 낄 수 없는 것인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해결해야만 숙제로 남는다. 그렇게 시작되는 방학 일에 해답처럼 ‘지아’가 왔다. 새롭게 누군가와 사귄다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조심스럽다. 상대에게 꼭 맞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공유하는 추억이 쌓여갈수록 서로는 서로에게 길들여지게 된다.

    ‘우리들’은 선과 지아가 단둘이 ‘비밀’을 공유할 만큼 가까워지는 순간 깨져버리는 장면을 그려낸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비밀은 공유되고 하나 이상을 가질 수도 있다. 스스로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비밀을 만들고 타인에게 발설하는 순간의 내밀함은 그 얼마나 은밀하고 부끄러운 감정이던가. 가까워지게 되면서 지아는 선에게 부모님의 이혼 사실을 고백한다. 선이도 이때 그에 응답하듯이 내밀한 비밀 하나를 마련해 내줄만 한데 ‘같이 바다 보러 가자’는 말로 함께 하고 싶은 일을 발설하고 있다. 이는 왜일까? 아마도 선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지아와는 다른 식으로 묶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일이 성인들보다 아이들이 더 힘들 수 있다는 전제는 ‘아이들’을 끌고 가는 묵직한 울림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의 규정은 어린 소녀들에게는 민감하면서도 온 세상의 문제로 다가오게 된다. 보라의 생일 파티에 선물을 사지 못하고 직접 팔찌를 만들어가거나, 영어학원에 같이 다니자는 지아의 부탁에 어려운 집안 사정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선이의 모습은 매사 자신 없고 솔직한 태도를 갖지 못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지아 역시도 부모님의 이혼 사실에 주눅이 들긴 매한가지다. 선이가 엄마와 다정하게 스킨십하며 응석부리는 모습에서 지아는 다 갖고 있어도 단 하나 갖지 못하는 보물처럼 느끼며 질투한다. 서로는 각자 결핍을 느끼는 부분들이 있다. 스스로를 한정짓게 되는 결핍은 상대방에게 비춰질 것으로 인식한 스스로가 만들어낸 부분들이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먼저 판단하여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멀어지게 되면 상실감이 배가되어 폭로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선은 보라와 가까워지면서 멀어진 지아가 보라로부터 멀어지는 장면을 포착해낸다. 홀로 울고 있는 보라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를 한다고 지아의 가정사를 전달한 것은 어떤 마음에서였을까? 아마 선은 보라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지아의 가정사를 밝히며 둘만의 비밀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얘기 하지 말아주’라는 제 1원칙을 보라가 먼저 깨기 때문에 당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나한테 얘기 했느냐’는 보라의 말에 선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비밀, 그것이 내 것이 아닐지라도 상대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공유해야 한다는 선이의 의식은 어느새 지아에게 길들여진 모습은 아니었을까. 학급 친구들 앞에서 서로의 가정사가 폭로전으로 난타되는 장면은 비밀로 주고받은 내밀한 고백의 내용만을 다루고 있지 않게 된다. 단 둘만의 추억과 시간들은 이제 스스로가 상대의 결핍들을 파악했던 악몽의 시간들이 되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친구를 갖는 일이 이렇게 치사하고도 혈투가 일어나는 일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가장 내밀하고도 수치스러운 부분이 공유된 관계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받아야 할 일이다. ‘때리면 나도 때리고 또 때리면 나도 또 때리는’ 사이는 과연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동생 윤의 우문현답을 통해 선은 그 해답을 찾는다. 더불어 결핍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다시 가까워지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선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좋지 않은 부자로 느껴진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도 직접 대면 못하다가 임종 이후에야 ‘어떤 화해’가 이뤄진 것처럼 선이는 느낀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 ‘다시’의 관계가 생성될 수 없음을 선이는 어렴풋하게 느낀 건 아닐까.

    사랑은 언제나 곳곳에서 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결핍을 치유해주지는 못한다. 보듬고 덮으려 하면 할수록 울화처럼 튀어 올라 상대에게 생채기를 남길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질문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오직 결핍된 자만이, 사랑을 키울 수 있다고.
    김세나

    김세나

    1985년 전북 군산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 수료

  • 김시무 영화평론가

    응모작 중 ‘곡성’을 다룬 비평이 가장 많았다. ‘부산행’과 ‘아가씨’를 다룬 글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비평적 관점도 다양했다. ‘아가씨’를 근대성의 관점에서 분석한 글은 박찬욱의 영화 스타일을 ‘오페라’에 비유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한정된 지면에 너무 많은 예시를 끌어들여 초점이 빗나가고 말았다. ‘부산행’을 다룬 글 중 ‘동일성의 자기복제와 현대성의 파국’이라는 화두로 논의를 전개한 글은 좀비영화의 현황을 상세하게 분석해 주목할 만했다. 하지만 논문 식의 전개방식이 아쉬움을 남겼다.

    ‘곡성’은 영화 자체가 열린 구조여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염세주의라는 테마로 해당 작품을 분석한 글은 ‘곡성’이 기존 장르영화의 관습을 한참 벗어났는데도 관객을 사로잡은 이유를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 단정적인 문장이 흠이랄까. ‘곡성’을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글도 두 편 있었다. 그중 ‘오인된 세계와 본능의 주체’라는 화두로 논의를 전개한 글을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글은 극중 주인공이 파멸하는 것은 외부의 불가해한 힘(악마)이 아니라 주체의 본능에서 비롯된 절대적 확신(즉 맹신) 때문이었음을 치밀하고 차분한 논리로 입증하고 있다. 문장도 안정적이다. 문장력은 좋은 평론가의 필수요소다.
  • 김세나

    김세나

    1985년 전북 군산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 수료

    5년 동안 매주 서울과 군산을 이동했다. 학교에 일이 있을 때는 한 주에 두세 번도 왕복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며 지칠 때마다 마음을 다잡곤 하지만, 5년이란 시간은 내게 타성을 만들어 이제는 허약한 정신상태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스스로를 진단하곤 한다. 길 위에서 흘려보내고 잃어버린 다짐들은 어디 즈음 있을까. 언제인가부터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아예 약속을 하지 않으려 타협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타성에 젖은 나를 질책이라도 하는 듯, 당선 소식이 들려왔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않겠는가. 이제라도 부랴부랴 잃어버렸던 다짐과 약속을 찾아보고 살펴봐주어야겠다. 그 뿐이랴. 새로운 다짐을, 새로운 약속을, 새로운 각오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만들 준비가 되었다. 자, 다시 서울행 버스를 탈 준비를 하자.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해 본 경험이 없다. 감사할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뻣뻣한 내 표현 능력 탓일 것이다. 제멋대로 결단하고 항상 일방 통보만 해오던 딸을 묵묵히 믿어주시고 지켜봐주시는 부모님께 이 자릴 빌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무덤에 들어갈 때 혹 홀로 남게 될까봐 걱정되어 나 죽거든 같이 묻고 싶은 나의 물밥, 남편 유명길에게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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