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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대한 감수성, '지금-여기'와 '바깥'의 관계론: 이장욱 소설 읽기

by  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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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소설과 삶에 대한, 하나의 아포리즘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당연하게도 그는 그 무렵 신춘문예에 매년 소설을 투고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작가 지망생이었던 셈인데, “이 응모자는 소설이 인생을 닮으려 하면 할수록 인생과 멀어진다는 점을 유념하라”는 이상한 평을 받고 그 평을 쓴 원로 작가에게 항의 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그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평을 듣느니 소설을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했는데, 원로 작가는 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게 듣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그렇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우리 모두의 정귀보’ p150)


    인생을 닮으려 할수록 인생과 멀어진다니. 소설을 때려치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니. 이것은 원로 작가의 현학적 말놀음인가? 혹은 재능 없는 지망생에 대한 조롱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미학적 견해의 표현인가?

    한 가지 추론의 실마리는 원로 작가가 미메시스(mimesis)를 신뢰하지 않는 자라는 데에 있다. 그에게 언어는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될 수 없으므로 삶이 되려는 문학 역시 삶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그의 아포리즘은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 인생을 닮으려 하면, 인생은 소설로부터 도망친다.’ 왜? 인생은 언제나 개별적인 것이지, 다른 무언가를 닮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인생과 가까워지는 방안은 반대로 어떤 인생도 닮지 않으려는 움직임, 그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아마도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가 거꾸로 기린을 상상케 하듯… 인생이 아닌 모든 것을 향해 힘껏 이탈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바깥’이 오히려 ‘지금-여기’에 있는 인생의 실루엣을 상상케 할 테니까. 그러니 이 아포리즘은 아이러니에 대한 것인데,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앞에서 힘을 잃어버린다. 아이러니의 언어는 그 대상이 아니라, 언어화되지 않은 다른 무엇을 위해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장욱 소설에 쏟아진 평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 같은 답을 반복하고 있었다. 익명적 비존재의 영역(권희철), 전통적 원근법을 해체한 입체파적 시선(김형중), 불면의 밤, 도래하는 죽음(레비나스)… 이장욱의 소설을 명명하는 저 숱한 이름들은 근대적 코기토의 영역 ‘바깥’(블랑쇼)의 얼굴들이다. 이러한 평언들은 이장욱 문학의 궤적을 따라온 이들에겐 낯선 것이 아니다. 그 기시감의 연원은 이장욱이 2000년대 시 담론의 한가운데 참여했던 주효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서정적 권위와의 대결을 프레임으로 한 ‘미래파 담론’은 기념비적 격랑이었고, 그 안에서 이장욱의 시는 코기토의 이탈?서정적 원근법의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다른 서정’으로 이야기되었다. 그의 비평적 자아 역시 동시대 신예시인들을 유사한 어법으로 논했다. 그러니 이장욱이 소설을 내놓았을 때, 시에 대한 평언들과 동일한 어법을 따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장욱 소설을 여전히 그가 시의 영역에서부터 지속해온 작업(백지은)의 일환 혹은 연장선으로 파악하고,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는 일은 문제다. 왜냐하면 이장욱이 소설에 도입하는 ‘바깥’의 얼굴들은 앞서 이야기했던 아포리즘과 동일한 아이러니 위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장욱이 끊임없이 ‘바깥’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망연한 아이러니의 착란에 빠지고 마는데, 이는 단순히 분석되지도 의미화되지도 않는 영역에 대한 당혹감만은 아니다. 바깥의 영역을 탐색한다는 것은 거꾸로 바깥의 안쪽, 그러니까 ‘지금-여기’라는 영역의 경계를 살피는 일과 같다. 바깥outside이란 말 자체가 안(inside)과의 경계(side_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계가 무엇인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구분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쪽과 저쪽이 만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가 끌고 들어오는 ‘바깥’의 얼굴들은 형이상과 관념의 세계에서 부유하지 않고, 끊임없이 구체적 삶의 질감이 만져지는 ‘지금-여기’의 영역과 접촉한다. 그러니 이장욱에게 ‘안’과 ‘바깥’은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충돌하면서도 공존함으로써 경계선을 그려나가는 관계의 문제이다. 그가 ‘바깥’이라고 쓸 때, 언어는 ‘바깥’ 그 자체를 지시하지 않고 ‘지금-여기’라는 안쪽과 그와의 경계를 향해 미끄러진다. 이장욱 소설을 읽을 때 빠지게 되는 아이러니하고 아득한 체험은 바로 그 미끄러짐에 대한 현기증인 셈이다. 이장욱은 어느 한쪽에 전권을 부여하지 않는 균형적 감수성(칸트) 위에서 양자가 만나는 지점을 민감하게 매만진다.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관계다. 이장욱의 시와 소설의 결정적 차이, 변별의 근원지 말이다. 시는 사유와 언어의 힘을 연료로 지평선 너머 이야기될 수 없는 세계를 탐색할 수 있지만, 소설은 육체와 질감의 세계이니까…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이야기가 되어야 하니까.


    2


    이장욱 소설의 ‘바깥’들은 말하자면 타자들일 텐데, 그것들은 때로는 사건으로 때로는 인격체로 또 어떤 경우에는 의미로 나타나는 등 여러 층위로 번져나가기 때문에 단순히 ‘타자’라는 말로 한꺼번에 뭉뚱그려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보자.

    먼저, 사건(событие)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бытие)들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함께(co) 참여하여 새로운 행동과 인식을 만들어내도록 구속하는 것,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관계를 구성하는 현장이다. 요컨대 사건은 이미 그 자체가 타자적이며 공동적인 것(바흐친)인데, 이장욱이 ‘바깥’의 얼굴을 끌어들여 올 때 만들어지는 사건은 어떤 모습일까. 가령, 이런 두통은 어떤가?


    여자의 두통은 만성적이었지만, 나흘 전의 그 화요일 저녁에 찾아온 두통은 특별했다.

    (…)

    …화요일 저녁의 그 순간에 한 여자의 두통이 시작되자, 그들 모두는 문득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 뭔가가 등을 툭 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니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뒤를 돌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pp15-17)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토요일 아침의 이 모든 풍경들은, 한 여자의 두통에서 비롯되었다”(p15)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여자의 두통과 모두가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일은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한 타자적 사건이다. 두 사건이 하나의 문장에 의해 접촉되어 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여자의 두통이 모두가 뒤를 돌아보는 사건의 원인인 것처럼 읽히지만, 그러나 이 문장들은 여자의 ‘특별한 두통’이 인과 ‘바깥’의 사건임을 드러내기 위한 문장이 아니다. 뒤를 돌아본 이유는 곧바로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기 때문일 수도, ‘뭔가가 등을 툭 치는 느낌’ 때문일 수도 혹은 ‘아무런 이유 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향해 열리게 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여자의 두통으로부터 비롯되었느냐, 아니냐에 사실 이장욱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다시 같은 문장으로 돌아오는 소설의 말미를 보자.


    글쎄.

    확실히 이 모든 것은 한 여자의 두통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윌리엄 윌슨 콤플렉스라는 이상한 질병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로또 복권이나 홈쇼핑에서 시작되었다고 누군가 주장한다 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이 모든 것은 한 마리의 치와와나 한 마리의 비글 때문이거나, 휘휘 허공을 휘젓는 왼쪽 팔의 흔적 때문이거나, 갈라파고스라는 알 수 없는 섬의 자이언트거북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쎄.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p.213)


    ‘이 모든 풍경들은, 한 여자의 두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언술을 보완하기 위해 여섯 개의 시선이 소설의 입방체를 형성하는데(김형중), 인과는 명확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모호해진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한 여자의 두통’일 수도, ‘윌리엄 윌슨 콤플렉스’일 수도, ‘로또 복권’ 이나 한 마리의 ‘치와와’나 ‘비글’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 이 ‘…지도 모른다.’는 형태의 문장들은 판단을 유보하고, 인과를 원심적으로 열어젖힌다. 제시된 요소들은 구체적인 인과의 용의목록이 아니라 무엇이든 그 ‘진리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는 개방적 장의 표상이자 수평적 가능태들이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으로서, 연관과 무관의 경계선상에 잠재되어있다.

    이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러지 말라는 법이 도대체 없지 않은가?”(p196)하는 물음에서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토요일 아침의 지하철 승강장이나 지중해의 파라솔을 흔드는 바람의 각도나 대통령 수행비서의 권총 같은 것들이, 갑자기 우리 삶으로”(p196) 들어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갑자기 개입해오는 이질적이고 비일상적인 것들, 그러니까 ‘고착된 중심에 예외적 상태를 기입하는 것’들. 그들을 곧 타자라 명명할 수 있을진대, 이때 사건은 타자와 조우하는 순간이며 ‘삶’은 그러한 사건의 연속-그 경계선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삶이 있고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있어서 삶이 있는 것이다.


    3


    ‘바깥’의 얼굴이 인격체로 나타나는 일련의 소설들은 ‘나’라는 내부와 ‘타인’이라는 외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타인과 나의 만남이라는 경계선으로서의 삶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보여준다. 물론 이장욱 소설에서 타자적 인물들은 단순한 타인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진리는 ‘나’의 진리와 병합이 불가능한 고유한 것이어서 양자는 서로 타협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 균열은 결단코 양립할 수 없는 지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의 옮고 그름이 아니라 ‘지금-여기’ 공존하는 동안 펼쳐지는 상호 대화의 양상이다.

    가령 ‘변희봉’에서 만기가 “내가 을마 전에, 밴, 히봉 선생을 만났다 아이가.”(p48)하고 입을 뗄 때, 변희봉이 있는 만기의 세계와 변희봉이 없는 나의 세계 중 어느 것이 진짜인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만남의 자리’ 그곳이 소설의 시작점인 이상, ‘왜’?‘어떻게’와 같은 질문은 별반 소득이 없다. 이장욱의 세계는 ‘그러지 말라는 법이 도대체 없’는 세계가 아니던가? 온갖 다른 것들과 충돌하고, 빠지고, 돌아 나오는 모든 ‘바깥’의 사건으로 충만한 열린 세계. 다만 그 무한한 우주적 세계에서 특정한 무언가를 만난다는 일은 거꾸로, 그 자체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쪼매 다른 세상으로 빠지들어간 기 아인가”(p69)라는 중얼거림대로 만기는 자신이 존재하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세계에 불시착한 이방인이다. 철저한 소수자요 타자인 그는 극단 막내에게도, 전처에게도, 직장 동료들에게도 이해받기는커녕 말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다. 만기가 아는 세계와는 달리, 이 세계는 변희봉의 자리를 장항선과 김인문이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 만기를 미친놈 취급하거나 회피한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소설의 현재, 즉 지금 ‘나’와 만기가 함께 앉아있는 포장마차이다. 이곳은 만기가 이 세계 가운데서 미약하게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발화할 수 있는 유일한 시공간이자 세계의 안과 밖이 만나는 경계이다. 이장욱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경계적 균형감을 유지한다. ‘나’는 만기와 함께하는 지금 이 자리를 지키면서도 야구중계에 한눈을 파는가하면, 만기의 이해 불가능한 말들에 “우짜라고?”(p49)라거나 “먼 소리고?”(p59)하는 식으로 쏘아 붙인다. 한편 만기 역시 ‘나’의 면박과 딴청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꿋꿋이 이어나가는데, 이러한 두 인물의 태도는 어떤 이해와 공감이라는 낭만적 지평에 다다르려는 노력이 아니다. 단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 충실하는 것이다. 여기엔 아름다운 공감의 미덕이라고는 없지만, ‘지금-여기’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즉 공동적 관계에 놓이는 것. 그것은 비단 자기 혼자만을 위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각자가 마주 앉은 ‘바깥’의 존재에 대하여 개별적인 내부로서 충실하고, 자신을 내부라고 믿는 저 외부에 대하여 충실히 ‘바깥’이 되어주기. 이것은 각자 고유한 목소리들이 관계 맺으면서 공존하는 삶에 대한 은유가 아닌가.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문득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점퍼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 썼다. 내가 외쳤다.

    -뭐 하노. 뛰자.

    우리는 동대문운동장역을 향해 힘껏 달렸다.

    (‘변희봉’ p77)


    유보와 회의로 가득한 이장욱의 언어 가운데서, 이런 문장들은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다. 따뜻하지만 한낱 온정만은 아닌, 온 존재를 내던지는 진중한 무게를… 여전히 함께인 채로 힘껏 달리기. 그것은 만기의 요구에 대한 ‘나’의 응답이자 공동의 사건과 다르지 않다. ‘나’-주체와 만기-타자는 서로의 사이에 놓인 깊은 균열에도 불구하고 함께 달린다. 존재를 인정받지도 호명되지도 못한 채 세계의 변두리에서 주춤거리는 만기를, 화자는 균열 따위가 대수냐는 듯 ‘뭐 하노’라는 외침으로 불러낸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변희봉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 발 딛은 우리에겐 만기가 아닌 ‘나’가 타자라는 점이다. 헌데 소설을 통과해 나온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타자가 아닌 ‘책임’의 주체로서의 ‘나’이다. 이것은 착란일까? 아니, 오히려 만기가 저 세계에서 타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타당한 결과이다. ‘책임’이라는 것은 나와 구별되는 타자의 자리를 필요로 하는 바, 필연적으로 공동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여기’ 공존한다는 책임을 수행할 때, 거기에는 주체가 타자를 끌어안을 뿐만 아니라 타자가 주체를 끌어안는다는 양면성이 숨어있는 것이다. ‘바깥’이 내부를 전제할 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처럼, 내부는 ‘바깥’을 전제할 때라야 성립된다.

    서로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장욱의 소설이 삶과 닮기 위하여 ‘바깥’을 도입하는 이유, 혹은 ‘바깥’을 도입함으로써 삶과 닮아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근원이다. ‘인생을 닮으려 하면 할수록 인생과 멀어진다’는 소설에 대한 아포리즘은 이제 삶의 영역으로, 이렇게 확장시킬 수 있다. 나를 아는 길은 내 안에 없다… 오로지 ‘바깥’의 시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시선은 모든 방향을 둘러볼 수 있지만, 결코 자신의 뒤통수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거울 없이는.

    거울은 실질적으로 현전하는 타자 없이도 ‘타자의 시선’을 만들어낸다. 「어느 날 욕실에서」는 1인칭 고백체와 거울 모티프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작품이다. 1인칭 화자가 액자 바깥을, ‘하마’라는 별명의 사내가 액자 내부에서 고백을 맡고 있는데 양자의 화법이 매우 흡사한 탓에 두 인물은 마치 한 사람인 듯 보인다. 예컨대 화자가 “아, 아닙니다. 저는 다만, 공중목욕탕이라는 곳이 신기해서, 이렇게 신기한 곳은 또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인가 싶어서…”(p255)라고 말할 때, “죄송합니다. 제가 또 엉뚱한 말을 하고 있군요. 어쩐지 그쪽이라면, 제 말을 들어주실 것 같아서…”(p254)라고 말하는 사내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이들은 발화의 기회를 온전히 소유하는 고백체 안에 있는데도 끊임없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반응을 곁눈질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반응이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신경쓰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이 고백하면서 신경 쓰고 바라보는 것은 타인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 즉 거울이 아닌가?


    엘리베이터 옆에 붙어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에 몸집이 커다란 남자가 보였습니다. 그는 어두컴컴한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저 하마 같은 사내는 제 집의 시체를 피해서 도망을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를 마주 바라보고 서 있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다. 너는 왜 그렇게 크고 거뭇한 것이냐? 어째서 피부가 점점 두꺼워져가는 것이냐? 아아, 바늘로 찔러도 전혀 아프지 않을 것 같구나.

    (…) 게다가 이 집에 사는 자는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사내다. 몸무게가 98킬로그램이나 되는 거구인 데다 혼자 산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사라졌는데 사내는 실종신고도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자주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조용해졌다. 무엇보다도, 전과자가 아닌가.

    아, 전과자라는 건, 그건, 별 게 아닙니다. 예전에 일한 회사에서 사소한 폭행 사건을 일으켰을 뿐입니다.

    (‘어느 날 욕실에서’p248)



    이는 명백히 거울을 보는 행위로 가능해지는 시선이다. 사내는 욕실에서 낯선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곤 집에서 도망쳐 나온다. 그 와중에 엘리베이터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을 ‘하마 같’다거나 ‘바늘로 찔러도 전혀 아프지 않을 것 같’다거나 ‘의심스러운 사내’로 칭하는 식으로 대상화한다. 거울 앞에 서자 거울 속에 서 있는 ‘나’와 그를 바라보는 ‘나’가 분리된다. ‘무엇보다도, 전과자가 아닌가’하는 판단과 ‘아, 전과자라는 건, 그건, 별 게 아닙니다’라는 변명 역시 서로 상충하면서 분리된 두 시선의 변별을 보여준다.

    사실 이 소설은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거울이 나타나도록 고안되어 있다. 두 인물이 각자 소유한 욕실은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는 장소이고, 새벽의 공중목욕탕은 둘만이 맨 몸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유사거울이다. 물이 채워진 욕조나 각종 탕들도 거울의 계열체이다. 액자는 어떠한가? 액자를 기준으로 바깥과 내부의 화자는 거울을 기준으로 한 물(物)과 상(像)에 대응된다. 이 거울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되풀이하건대, 우리는 자신의 뒤통수는 물론 자기 전체를 비추기 위해선 반드시 나 ‘바깥’의 반사면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홀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바깥’을 상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4


    이장욱 소설에 반복되는 죽음이라는 테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에 죽음은 빈번하다. “죽음만이 삶을 전체적으로 되비치는 거울이다,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는 삶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다”거나(‘곡란’p186) “죽음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신비이자, 무한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라는(‘우리 모두의 정귀보’ p172) 식의 아포리즘들은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과 동일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지 않은가?

    전통적으로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선사되는 종결로 이해되어 왔다. 우리는 이 압도적인 절대적 타자를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외면하며, 삶과 실존에 이끌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니, 원칙적으로 ‘나의 죽음’은 자신의 사건이 될 수 없다. 나는 나의 죽음 후에 있을 수 있는 세계를 생각할 수는 있으나, 나의 내부로부터 그것을 체험할 수는 없으며, 내가 죽었다는 사실, 내가 부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정서적으로 채색되는 그 세계를 체험할 수는 없다(바흐친). 잠정적으로 완결된 총체에 대해서만 그러한 접근이 허용되는데, 여기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줄 타자 즉 ‘바깥’의 자리가 요구된다. 죽음의 가치는 나의 부재(죽음)가 타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그로 인해 세계를 채색하게 되는 타자들의 정서적?의지적 톤들의 관계 속에서 매겨진다. 바흐친을 따라, 이장욱에게 죽음은 삶의 필연적 구성요소인 동시에, 바로 그 삶을 의미화하는 매개이다. 그러니 죽음은 삶의 거울이며, 무한한 의미의 발생을 일으킨다 해도 무리는 아닐 터.


    아픈가?

    아프겠지.

    아플 거야.

    그래도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구. 이런 순간에는 시간이 한꺼번에 흐르는 법이니까.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게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네. 어떤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긴 시간을 한꺼번에 떠올리지. 답답한 시간의 질서를 초월하는 거야.

    (‘칠레의 세계’ p185)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 자신의 온 삶이 스쳐지나간다는 ‘주마등’조차도 죽어가고 있는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칼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는 자를 끌어안고 그의 일생을 되짚어 들려주는 이 타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타자화 된 자신, 즉 ‘삶을 되비치는 거울’ 그 자체. 그러니 이장욱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대단히 독특한 것이다. 사자(死者)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묘사하거나, 거기에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죽음은 오로지 사자에 대한 타자들의 애도와 기억에 의해 의미화되는 것이다. 헌데 서사의 담지자(擔持者)는 다름 아닌 사자 자신이다.


    예약되어 있는 여행은 취소하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탑승수속을 밟았다. 내가 당신의 귀에 대고 내내 속삭인 덕분이다. 같이 가는 거야. 같이 가는 거야. 이건 나를 위한 여행이니까. 나는 당신의 생각 속에서 열심히 반복했다.

    (‘기차 방귀 카타콤’ p149)


    일종의 유령화자라 할 만한 그들은 기존의 유령들과는 다르다. 이장욱 소설의 유령은 인간적 질서나 한계를 벗어나 자유를 얻은 존재이긴 하지만, 자기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재조명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타자의 눈을 필요로 한다. 가령 ‘기차 방귀 카타콤’의 화자는 남편의 여행에 동행하면서, 그의 안에 들어가 생각을 ‘불어넣는’ 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남편이 다른 생각을 하거나 충격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유령화자가 스며들 자리가 없어지는 순간 화자는 “거의 희미해져버린다”(p160). 즉 유령화자의 목소리는 남편의 사고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건 남편의 내면에 화자가 놓여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령화자는 인간적 한계를 벗어난 존재이긴 하지만, 타자라는 자기의 ‘바깥’을 매개할 때에만 그 존재가 증명될 수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보자. 그렇다면 거꾸로, 남편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령의 목소리란 사실 남편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유령이 ‘같이 가는 거야. 이건 나를 위한 여행이니까.’라고 쓸 때, 동시에 남편이 ‘같이 가는 거야. 이건 아내를 위한 여행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유령이 “당신에게 따진다. 당신은 여전히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고. 당신은 그 이후에도 이전의 생활을 계속했다고”(p151) 따질 때, 동시에 남편은 ‘내게 따진다. 나는 여전히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고. 나는 그 이후에도 이전의 생활을 계속했다고’ 아내의 비난을 고스란히 따라 자책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는 죽었다. 그녀의 삶은 종결되었고, 남은 자는 그 죽음을 감당하고 있다… 이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무수한 삶의 순간엔 끊임없이 그 죽음이 불현 듯, 불현 듯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까, 비록 아내는 죽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아내의 유령과 함께 살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장욱 소설의 ‘바깥’은 아이러니, 언제나 그 이상을 지시한다. ‘칠레의 세계’의 화자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의 인격적 표현이었다면, ‘기차 방귀 카타콤’의 화자는 계속되는 대화 속에 남아 있으며, 그 속에서 청취되고 대답을 얻고 새로이 의미화 되는 중인 아내의 ‘말’에 대한 인격적 표현이다. 남편에게 있어 아내의 ‘죽음과 삶’은 결코 단순한 유기체적 죽음이나 완결된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고 늘 재맥락화되고 재의미화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다시 앞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죽음은 삶을 되비치는 거울이 될 수 있는가? 죽음은 무한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 될 수 있는가? 죽음은 이장욱이 끊임없이 자문하는 ‘바깥’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다. 첫 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에서부터 근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이 테마를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들여다보려 하는가는 자명해 보인다…

    …지금-여기에서 이어지고 있는 삶, 그 자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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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다시,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에 타자와 함께함으로써 살아지는 것… 타인의 출생과 희로애락 그리고 죽음을, 때론 이름 붙일 수도 감지할 수도 없는 타자들을 겪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내 것인 삶은 없되 모두와 함께 한 흔적이니, ‘언제나 홀로이면서 모두인 우리’는 그래서 외롭되 외롭지 않다. 가령, 정귀보처럼 말이다.

    무명화가였던 정귀보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초청받으며 일약 주목을 받지만, 곧바로 의문의 사고로 실종되고 만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그렇게 수수께끼가 된 정귀보의 삶을 들여다 보려는 어느 평전 작가 ‘나’의 사적인 기록이다. 공식적 기록들에서 정귀보의 삶은 놀랍도록 단조롭고 평범해서 도무지 말할 게 없는 것이어서, 평단은 그의 부재에 온갖 요란한 수사를 부여하고 언론은 그 평가만을 앵무새처럼 실어 나를 뿐이다. 도저히 확인 가능한 사실이 부족하기에, ‘나’는 정귀보의 실종 사고 목격자나 그의 옛 애인들의 입에 의지한다. 도무지 말할 거리가 없던 정귀보의 삶은 그 주변인의 회술에서 비로소 “눈앞에 없을 때에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차올랐지만, 정작 그와 함께 있으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p152)는 사람, “캐시미어 모포로 몸을 감싼 듯 편안한 감정”(p163)을 주는 사람으로 색깔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나’에게는 난제다. 비로소 수집된 정귀보의 흔적들은 출처도 진위도 확인할 수 없고 다분히 주관적인 것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객관적인 공식적 기록 체계를 통해 그것들을 규합해야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해서 이렇게 저렇게 정리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평전이 아니라 차라리 연보만으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게 낫지 않겠는가?”(p180) 하는 고민은 타당하다. 비공식적 여담으로 재구성한 정귀보는 각각의 주변인이 불완전하게 알고 있는, 정확하게는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을 누더기처럼 이어 붙인 ‘정귀보의 형상’에 가까울 것이니까.

    그러나, 그런 불완전한 말들의 누더기가 아니라면 정귀보의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가? 정귀보의 절대적 부재 앞에서 불완전하게나마 우리가 정귀보에 대해 상상하고 말할 수 있는 건, 그에 대한 온갖 말들의 뒤얽힘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나’는 정귀보가 죽기 전날 밤 홀로 술을 마셨다는 주점에 앉아서 ‘이 글’(‘우리 모두의 정귀보’)을 이렇게 마친다.


    단지 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은 깨닫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정귀보의 인생에 대한 기나긴 글의 첫 문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문장이 없는… 짧고 건조한… 첫 문장 말이다. 첫 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이 나오고, 두 번째 문장에서 세 번째 문장이 이어지고, 세 번째 문장에서 또 다른 문장이 태어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거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오는 정귀보를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해변에서 놀고 있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말이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 p181)


    정귀보. 그는 하나의 인물인 동시에, ‘바깥’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하고 시시콜콜한 담론들과 함께 접합되면서 이어지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은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쓴다. 정귀보의 삶을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겠으나, ‘마지막 문장’ 즉 종결이 없는 목소리들의 끊임없는 호명과 이야기 속에서 정귀보는 걸어 나올 것이라고… 이때 그가 ‘우리 모두의’ 것임은, 공식적 체계의 차갑고 공허한 문장들로 구성된 허상이 아니라 정귀보를 호명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연대한 개별적 목소리들 ‘모두’가 공동적으로 불러낸 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이장욱의 저 숱한 ‘바깥’의 얼굴들은 단순히 미지의 영역에 대한 “집착이 아니며, 호기심이나 의무감은 더더욱”(p177)아닐 것이다. 오히려 ‘지금-여기’ 현존하는 영역에 접촉해 공동의 경계를 형성함으로써, 닮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인생에 대해 말하기 위한 “영원한 탐구열”(p178)의 아이러니 그 자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니, 오히려 너무 당연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도. 이장욱은 분명히 말한다. 언제나 미지의 바깥과 맞닿으며 이어지는 삶의 신비를 잊은 우리에게, 아득하고 망연한 아포리즘으로. “세상은, 책이 아니다. 삶과 사랑 역시 그러하다”고…
    김녕

    김녕

    1989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예정

  • 김영찬·신수정 문학평론가

    지금 이곳에서 비평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왜 비평을 써야 하는가? 비평의 시작과 끝은 이 물음과의 싸움이다. 이런 물음을 절박하게 끌어안은 응모작은 찾기 어려웠다. 많은 글이 최근 유행하는 서구이론에 작품을 끼워 맞추거나 소박한 해설에 머물고 있다는 점도 아쉬웠다.

    ‘영혼의 서정, 건너가는 육체와 끌려오는 몸-김이듬과 신용목의 시를 중심으로’는 ‘육체’라는 키워드로 김이듬과 신용목의 시를 묶어 다루었다. 그러나 서로 먼 거리에 있는 두 시인의 시세계를 한데 엮기에 ‘육체’라는 키워드는 헐거웠고 논리는 평이했다.

    ‘경계에 대한 감수성, ‘지금-여기’와 바깥의 관계론-이장욱 소설 읽기’는 안과 바깥의 상호 의존이라는 흥미로운 문제 설정을 경유해 이장욱 소설의 의미에 접근하는 논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다른 응모작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이 글이 훌쩍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서구이론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 텍스트의 결을 잘 드러내면서도 넘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 필자의 장점을 믿어보기로 했다. 비평이라는 속수무책의 험로에 들어선 것을 위로하며, 당선을 축하한다.
  • 김녕

    김녕

    1989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예정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가지고 있다. 74억 명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는 74억 가지의 인생이 있을 것이다. 늦은 밤 귀가하는 버스에 앉아 그 무수한 삶에 대해 상상한다. 글을 쓰겠다고 어설피 덤벼대는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매번 백지를 앞에 두고 고통 받는 삶은 어떤 의미인지, 무수한 말들 가운데 한낱 하나일 뿐인 내 글을 쓰고 지우고 매만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한다.

    그리고 매번, 조금 우울하고 외로워진다.

    그러나 때때로, 읽고 쓰는 가운데서 예기치 않게 위안을 받는다.

    사랑하는 부모님, 동생들, 다섯 해 동안 지도해주신 모교의 선생님들 감사드립니다. 글 앞에 나태하거나 비겁하지 않겠습니다. 선영 선배, 지혜, 근범 형, 성주, 재림, 현민, 고마워. 앞으로도 소설 많이 읽고 쓰자. 은정 선배, 앞으로도 잘 따라 읽고 쓰겠습니다. 학부 시절 무지렁이 전과생 데려다 같이 공부해준 인영 누나, 해나, 보배, 예솔 누나, 하섭 형 모두 고마워. 학부에서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한 선후배, 친구들 모두들, 여러분 덕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게 기회와 책임을 지워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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