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자리를 탈주하는 리얼리티,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by  이현재

  • 작품전문
  • 단평
  • 심사평
  • 당선소감
  • 올 한해 개봉한 수많은 영화 중, 개봉 전부터 논란을 일으키며 이른바 '문제작'으로 불리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영화 자체보다 영화의 상영 환경이 주목을 받는 경우가 몇몇 있었는데, 비간(畢?)의 <지구 최후의 밤(地球最后的夜?)>(2018)과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의 <로마(ROMA)>(2018) 정도가 있을 수 있겠다. <지구 최후의 밤>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2D와 3D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한 작품이 주어진 러닝타임 안에서 차원을 넘나든다는 아이디어는 분명 새롭다. 그러나 <지구 최후의 밤> 또한 각각의 차원이 영화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논의되었을 뿐, 매체의 환경 그 자체가 논쟁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지구 최후의 밤>은 3D 버전으로 개봉하지 않았음에도 평단의 주목과 고른 지지를 받았다. 매체의 재현환경이 영화를 평가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다. 그에 반해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할 당시부터 '넷플릭스'(NETFLIX)라는 환경 아래 제작된 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칸영화제, 스필버그(Steven A. Spielberg)를 비롯한 영화계 인사들이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되는 영화를 진정한 영화라고 볼 수 없다'며 취한 비판적 태도도, <로마>를 뜨거운 감자로 만드는 분위기였다.

    <로마>에 박혀버린 '미운털'은 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평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넷플릭스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주된 비판사항은 현재까지도 "넷플릭스의 환경은 영화적 경험을 제공할 수 없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넷플릭스' 그 자체보다, 작은 디스플레이로 최적화된 넷플릭스의 환경은 영화적 경험을 제공할 수 없다는 데에 비판의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더불어 알폰소 쿠아론이 <로마>의 상영조건으로 주문한 사항은 '넷플릭스'를 둘러싼 논쟁을 심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쿠아론은 "영사기는 70mm, 사운드 시스템은 돌비 애트모스"라는 극장 상영조건을 간청했다. 조건을 충족한 극장이 <로마>에서 구현한 자신의 의도를 재현할 수 있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구축된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면 작가의 의도를 재현하지 못할 거라는 믿음. 그리고 극장이라는 특정한 공간이 제공하는 장소체험의 일회성. 작은 디스플레이를 통해 스트리밍 되어 어디에서나 모두에게 무한히 재생산되는 유통 시스템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 발전된 기술을 바탕으로 구축된, 상이한 지향점을 가진 너무도 다른 두 환경. 이 모든 요소는 개봉 전부터 일찍이 <로마>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를 둘러싼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넷플릭스의 무엇이 칸영화제를 배타적 방향으로 돌렸고, 스필버그가 비판하도록 만들었는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넷플릭스를 둘러싸고 생겨난 파열음을 단순히 '매체가 변화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벌이고 있는 하나의 시대착오' 정도로 격하시키기는 어렵다. 앞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넷플릭스'와 관련된 논쟁에는 '극장이냐, 디스플레이냐' 하는 영화의 재현공간과 관련된 논점이 얽혀있다. 하나의 해프닝으로만 바라보기에는 사태가 앞으로 미칠 파장과 논쟁 자체의 무게감이 너무나 큰 것이다. 넷플릭스의 등장은 영화의 재현공간을 물리적으로 재편시킬 수 있는 사건일 수 있다. 넷플릭스의 등장이 영화의 생산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부분은 유통과정뿐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넷플릭스가 '온라인 대여 서비스 플랫폼'에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플랫폼'까지 확장된 지금, 넷플릭스 영화들에서 재현과 투사의 경계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넷플릭스는 현재 플랫폼에 쌓인 사용자 데이터에 기반을 두고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런칭하고 있다. 사용자들에게 투사된 재현물이 쌓은 거대한 환상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넷플릭스 영화들의 보편적인 재현환경인 작은 디스플레이가 극장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환상과 투사의 경계가 콘텐츠 자체에서 이미 흐려졌기 때문일 수 있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고유성 중 하나인 '시차'(들)을 잃어버릴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미 오래 전에 기 드보르(Guy Debord)는 만족과 열광을 자아내는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통해 상품논리와 전략이 가져올 소통 잃은 사회를 예견한 바 있다. 곧, '넷플릭스'의 '사용자 데이터 기반 콘텐츠'는 영화의 '시차'라는 주요한 소통방식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를 허문다는 것이 단절의 해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도리어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은 차이를 인식할 기준들이 기능부전을 일으킬 가능성을 함축하는 사태다. 칸영화제, 그리고 스필버그를 비롯한 영화계 유력인사들이 넷플릭스 영화를 '벤'까지 해가며 유례없이 비판적 자세를 취한 데에는 넷플릭스가 경계를 허물며 가져올, 영화의 '전체화'가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스영화제는 '넷플릭스'의 손을 잡아주었다. <로마>는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고, 이는 곧바로 베니스영화제를 칸영화제와 비교하게 만들었다. 베니스영화제가 이를 필름마켓의 확장 기회로 삼는다든지, 오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칸영화제와 차별성을 두려는 단순한 계산 이상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칸영화제 역시 단지 프랑스극장협회의 반대서명 때문에 '넷플릭스 영화'들을 경쟁부분에서 제외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칸영화제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온도 차 뒤에는 <로마>라는 영화가 나온 '지금'이라는 순간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는 독특한 지위와 그 지위가 던져주는 고유한 시사점이 있다. 요컨대 베니스는 <로마>의 독특한 지위와 고유한 시사점에 동의한 것이고, 칸은 동의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베니스와 칸 사이에는 영화가 가진 고유한, 혹은 고유했던 재현공간인 '영화관'이 있다. 이 공간을 이해하는 것이 <로마>가 위치한 독특한 지형과 지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영화압축; 영화의 벽이 사라기기까지



    '넷플릭스'의 등장이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정의를 흔들어 놓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

    제 불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위기는 '넷플릭스'의 등장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넷플릭스'는 '인터넷'(Net)과 '필름'(Film)을 '엮는다'(곱하기 X)는 명분으로, 1997년 (앞서 말했던 바처럼) '온라인비디오대여서비스'로 출발하였다. 당시 넷플릭스는 지금과 같은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을 이용한 서비스가 아니었다. 이용자가 넷플릭스에 이메일을 보내면 택배로 DVD를 보내주는 식이었다. '넷플릭스'의 기초 골자는 초반부터 집과 영화관 사이의 거리를 압축시킨다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압축은 90년대 걸쳐 일어난 현상으로 넷플릭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압축은 영화 매체 전반에 일어난 만큼, 영화관만의 일은 아니었다. 즉, 영화의 정체성 위기는 '압축'이라는 단어에 녹아있는 것이다. 영화의 압축은 90년 후반에 등장한 디지털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디지털 시네마의 가장 주요한 흐름은 '영화압축'이었다. 영화압축은 DCP(Digital Cinema Package)와 같은 '필름으로부터 디지털로의 전환'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 중심에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당시 영화관의 목표는 디지털을 통해 필름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연 디지털이 필름을 대체할 수 있느냐는 매체 형이상학적인 질문들과 함께, 화질을 포함한 디지털 특유의 물성이 감성 내지 미학으로 자리 잡으려는 움직임들로 활발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디지털을 하나의 보편적인 감성으로 통일하기 위해 공유 가능한 물성에 대해 합의를 보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7개 메이저 스튜디오가 공동으로 설립한 DCI(Digital Cinema Initiatives)이며, 이들에 의해 2005년에 개발된 DCP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양상으로 빠르게 확산하며 변모하던 디지털 시네마에 대한 최초의 공공환경이 등장한 것이다. 디지털 시네마에 대한 공공환경으로서 DCP는 필름체제에서는 기대할 수 없던 합리성을 구축하였다. 이 합리성은 곧바로 영화계를 뒤흔들었고, 각기 다른 환경에서 구축된 영상을 '인코딩'이라는 과정 아래 (영화의 물성 중 하나인) '필름'을 하나로 압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디지털 시네마가 하나로 압축되어 가는 과정 안에서도 영화는 다양한 카메라-스크린을 실험했었다. 알렉산더 소쿠로프(Aleksandr Sokurov)의 <태양(The Sun)>(2005)은 가벼움과 가변성이라는 디지털 조건의 카메라에 비친 고정적 조건으로 육체를 지명하고, 그 육체에서 이미지의 무거움을 발견한다. 급속도로 변하는 디지털 조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을 고정적 조건을 육체에서 찾았던 소쿠르프를 넘어, 데이빗 린치(David Lynch)는 <인랜드 엠파이어(Inland Empire)>(2006)을 통해 그 육체조차 결국 디지털 환경을 지나면 전환과 변용의 재료가 됨을 설파한다. 곧이어 미학을 넘어 디지털은 본격적으로 현장으로 침입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종국에는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재현될 풍경을 위해 크로마키(chroma-key)를 깔아놓고 진행해야 했던 <인셉션(Inception)>(2010)과 <인터스텔라(Interstella)>(2015)를 생각해보라. 현장 재현을 그토록 중시하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J.J. Nolan)조차 디지털 타임라인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 노장의 아날로그 액션으로 주목을 받았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에서 가장 중요한 자연요소로 등장한 사막 또한 디지털 물성으로 재현되었다는 사실도 상기해보라.

    디지털 기술이 영화현장을 장악한 뒤에도 디지털 시네마가 극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모든 압축의 목적이 극장의 스크린 상영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디지털에 의한 영화의 압축은 스크린에 공유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극장이란 공간 혹은 인터페이스의 구조적 특징에 있다. 디지털이 인간에게 의미를 갖기 위해선 인간과 접촉할 인터페이스가 필수적이다. 디지털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극장은 벽과 문이라는 두 가지 건축적 조건을 통해 닫힘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극장의 벽은 격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완벽히 격리된 공간은 애초에 외부에서 접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터페이스'라고 볼 수 없다. 극장을 단순한 공간이 아닌, 인터페이스로 만드는 것은 문이다. 그리고 '문'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출입으로 기능하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차단으로 기능하는 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기능이 교차-변형하는 극장의 유일한 공간이 바로 스크린이다.

    스크린은 필름과 같은 기억매체의 관점에서 보면 차단벽이다. 기억매체가 이미지로 맺히기 위해서는 스크린이라는 차단벽이 있어야 하고, 차단벽에 맺히기 위해서는 극장에 들어설 입구가 필요할 것이다. 기억매체를 극장에 입장할 수 있게 만드는 문은 영사기이다. 따라서 기억매체는 영사기를 통해 빛으로 극장에 입장하고, 스크린이라는 벽을 통해 이미지로 맺힌다. 기억매체는 출입과 벽에서 각기 상태가 변한다는 특징 덕에 극장을 넘나들 수 있는 특권적인 지위를 가졌다. 영사기와 스크린의 관계를 떠올리며 사운드를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사운드는 스피커라는 출력장치를 통해 입장하지만, 스크린과 같은 벽이 없어 상태 변화없이 극장을 맴돈다. 따라서 관객은 졸든, 그렇지 않든 극장 안에서 사운드에 상시 노출된 상태다. 그리고 사운드는 출구 없는 극장에서 분산되며, 물리적 조건에 의해 사라질 때까지 극장 안을 맴돈다. 그러나 기억매체는 영사기의 빛으로 극장에 입장하여 스크린을 통해 기억매체로 복귀해나간다. 관객은 극장 안에 입장한 순간, 빛을 타고 스크린에 맺히는 기억매체의 기억을 쫒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스크린은 기억매체의 기억을 따라갈 유일한 문이다. 바로 이 점이 극장 안에서 스크린을 시차가 가능한 특권적 장소로 만들고, 동시에 기억매체를 극장 안의 특권적 요소로 승격시킨다. 극장을 지키겠다는 것은, 바로 이 기억매체의 특권을 옹호하겠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디지털은 극장을 인터페이스 중심으로 압축시켰고, 결과적으로 인터페이스 자체를 압축시켰다. 그 압축의 대상은 기억매체의 특권을 보장하는 스크린이 대상이었다. 영화압축은 문의 기능을 하나로 압축시켜 입구로 만들었다. 이 전조는 넷플릭스의 기원이 된 비디오였으며, 본격적으로 압축이 시작된 것은 DVD의 등장 이후이다. 비디오의 디스플레이는 사운드와 이미지를 하나로 압축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극장의 구조를 본격적으로 압축시키지는 않았다. 비디오를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플레이어가 반드시 필요했고, 거기에 연결된 모니터가 필요했다. 풀어서 말하자면, 비디오에게 플레이어는 영사기와 같은 입구이며, 모니터는 스크린과 같은 출구이자 벽이었다. 비디오를 보기 위한 조건을 갖추지 않는다면, 영화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디오는 명확히 영상을 위한 기억매체였다. 그러나 기억매체가 DVD로 변하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DVD를 'Digital Video Disc'로 알고 있으나, 정작 소니, 필립스 등 10개 회사가 연합하여 설립한 (DCI급 기관이라 할 수 있는) 'DVD포럼(DVD Forum)'에서는 DVD를 'Digital Versatile Disc'로 정의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DVD는 단순한 비디오매체가 아닌, 굳이 비디오가 아니어도 되는 다용도 매체다.

    DVD가 영화를 압축시킨 방식은 디지털이 영화를 압축시킨 방식과 동일했다. 이미 DVD가 굳이 비디오가 아니어도 되었던 것처럼 DVD는 영상 아닌 기억으로도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이는 벽으로 기능하던 스크린을 열린 문으로 압축시켰다. 스크린에서 차단이 사라진 순간부터, 영화는 문자 그대로 모두에게 열린 존재가 되었다. '닫힘'이 제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열린 문을 타고 복제기술이 영화를 덮쳤고, 수많은 복제파일이 인터넷을 떠돌기 시작했다. 물리적 조건을 벗어난 기억매체는 비가시계에서 분산되었다가, 관객의 부름을 받을 때만 모였다. 온라인 스트리밍이 가능해지며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매체이다. 한때 모니터의 영화에서는 '되감기'가 가능했었다. 비디오라는 고정된 매체 안에서 되감기는 동일한 궤적을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온라인 스트리밍에서 되감기는 동일한 궤적을 되돌아가는 게 보장되지 않는다. 그 무엇도 내가 목격하고 있는 기억이 조금 전에 본 바로 그 기억인지 증거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할 수 있다면, 압축되다 못해 가루가 되어 공중을 부유하는 데이터 사이에서, 추상화되어 실재가 사라진 이미지를 불러 모으는, 이게 '바로 그 영화'라고 지목하고 있는, 영화의 제목이라는 전체만이 가상의 벽을 더듬을 것이다. 고정된 좌표와 기준이 없는 공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시차를 구원할 수 있는가.



    불순(Impure)에 대한 단호한 긍정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로마>는 바로 여기에 서있는 영화다. <로마> 또한 기준 없는 공간을 정확히 지목하고 있는 듯하다. <로마>는 그 제목으로, 제목이라는 전체를 불순하게 만든다. 우리가 <로마>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곧바로 생각할 수 있는 공간적 배경은 이탈리아의 로마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배경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가 아닌, 멕시코시티의 한 거리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우리가 '로마'라는 이름을 통해 이탈리아의 로마를 떠올리는 건 단순히 인지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탈리아의 로마는 경계가 있으며, 행정상 존재가 명확하다. 하지만 '거리'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명확한 경계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있다하더라도, 행정상 독립되어 있지 않다. <로마>의 거리 '로마'는 장소 그 자체로 공간이 될 수 없다. 바꿔 말해 <로마>의 공간 배경인 멕시코시티의 '로마'는 공간을 구획할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 모호함은 결국 영화 속 로마와 실제 멕시코시티 어딘가에 있을 로마를 혼동하게 만든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는 하나, 그가 했던 경험과 영화에서 추가된 창작을 구분할 기준을 흔들다. 이는 영화 안에서 펼쳐질 재현의 영역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로마>의 논쟁은 결국 리얼리티의 문제다.

    영화 속 리얼리티의 영역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이 사태는 알폰소 쿠아론이 <그래비티>를 통해서도 보여주었던 바가 있다. 대표적으로 라이언 스톤(산다라 블록 분) 박사가 우주에서 중심을 잃고 회전할 때, 영화는 라이언 박사의 얼굴을 비추는 관찰의 쇼트에서 라이언 박사의 시점쇼트로 넘어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접합시켜 놓았다. 이 접합 속에서 두 쇼트를 구분할 수 있는 장치는 라이언 박사가 쓰고 있는 헬멧의 유리 외에는 없다. 본 장면은 <그래비티>에서 카메라가 시점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전지적 시점으로 합의한다면, 카메라는 이미 시점 쇼트로 넘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칭적 시점이라 보기에는 헬맷이라는 장치를 쉽게 넘나든다. 이는 재현과 실제를 구분하는 카메라의 기능을 무력화한다. 카메라 안에 담긴 공간과 카메라 밖의 공간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리얼리티를 공격적으로 재현의 영역에 몰아넣는다. <그래비티>에 그토록 실감나는 리얼리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재현된 것이 실제에 가깝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비티>에서 재현과 실제의 경계를 따지는 것은, <그래비티>의 카메라를 관찰쇼트와 시점쇼트를 나누겠다는 시도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그래비티>는 시점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무력화함으로서 영화의 리얼리티와 재현의 영역을 (루시오 풀치의 영화만큼이나) 재구성하였다.

    다만 <로마>가 <그래비티>처럼 재현과 리얼리티의 문제에 극단적으로 천착하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 없다. 리얼리티를 정의하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지만 결국 리얼리티의 수용은 감성의 영역에 속한다. 그 감성이란, 그 감각은 무언가가 압박하고 있다는 감각과 그것에 저항하는 감각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성이다.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는 정확히 '압박'까지만 영화 안에서 해결한다. <로마>는 압박은 <그래비티>처럼 공격적이지 않지만, <그래비티> 못지않은 힘으로 관객을 압박하는 영화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마>에서의 사운드와 카메라 운용에 있다. 앞에서 알폰소 쿠아론이 극장의 상영조건을 걸었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그것이 감독의 연출의도를 구현할 조건과 연계된다고 이야기했었다. <로마>의 상영이 그토록 높은 스펙의 환경을 요구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로마>의 리얼리티를 위해 관객을 압박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극단적인 딥포커스와 다채널 사운드가 구현된 영화다. 카메라는 계단과 통로를 관통하며 시선의 중심을 분산시키고 있고, 사운드 역시 중심없이 다채널 스피커를 통해 객석을 향해 유출된다. <로마>에서 분산은 관객을 압박하는 가장 핵심 전략이다.

    시선과 사운드의 분산을 의도하는 <로마>의 전략은 첫 장면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제시된다. 그 시작은 마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같이 제시되지만, 극장 내 사운드의 운용은 하늘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곧 비행기가 지나가고 하늘이 흔들리더니, 지금 보고 있는 시선은 하늘이 아닌 땅에 쏟아진 물에 비친 상을 바라보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선가 솔질하는 소리가 틈입하고 이윽고 지금까지 보고 있던 것이 바닥을 물청소하는 광경을 하늘에서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로마>의 첫 장면이 지나가는 동안 관객은 온갖 종류의 소음이 다양한 방향에서 침투해오는 것을 견뎌야 한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사실상 중심점이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시선의 방향도 물의 흐름처럼 분산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늘과 땅이 물을 통해 교차됨으로써 동시적으로 시선이 땅과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있다. 이미 디자인되어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과 땅이 수직으로 이어져 있는 카메라의 방향을 자연적인 시점의 결과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로마>의 리얼리티는 실제에 있지 않다. 초고화질 딥포커스라는 극단적 기술재현과 애트모스 시스템이라는 사운드가 관객을 압박하는 그 지점에, <로마>의 리얼리티가 있다.

    알폰소 쿠아론이 제시한 극장의 환경에서 <로마>를 본다는 것은 닫힌 환경이 압박하는 감각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적극적으로 화면의 중심과 사운드를 구분해가며 기억매체가 압박하는 감각에 저항해야 한다. 이때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감각과 정반대의 감각을 요구하는 리얼리티와 마주한다. <로마>의 리얼리티는 이야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로마>의 리얼리티를 이야기의 관점에서 추격한다면, 결국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로마(Roma)>(1972) 마냥 '로마'라는 모호한 공간 안에서 길을 헤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감각은 알폰소 쿠아론 자신이 언급했듯, 까다로운 조건 안에서 경험될 수밖에 없다. 이 경험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올해 몇몇 기획 상영의 자리에서만 가능했다. 알폰소 쿠아론은 고의로 영화에의 접근을 어렵게 한 것인가.

    <로마>를 논쟁적으로 만든 것은, 앞에서 길게 말했던 바와 같이 '넷플릭스'였다. 단순히 '넷플릭스'가 알폰소 쿠아론에게 거부할 수 없는 조건으로 제작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에 <로마>가 '넷플릭스'"로도" 공개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로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어야 했던 이유는 모호한 지리감을 낳는 '로마'라는 언명에 있다. 앞서 말한 '로마'라는 공간은 명확히 합의되기 어렵다. 그러나 감독이 <로마>를 자전적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증거력은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로마'가 모호한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로마'가 없다(혹은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로마>의 캐릭터들이 견인하는 영화의 주제의식과 끈끈하게 결합되어 있다. <로마>의 주인공은 지금 우리가 당장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알폰소 쿠아론이 아니며, 그를 통해 존재를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그의 가족들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로마>의 주인공은 그를 키웠으며, 그의 집을 위해 일했던 가정부 클리오(알리차 아파리시오 분)다.

    '클리오'의 존재는 영화의 배경인 '로마'만큼이나 모호하다. 알폰소 쿠아론이 직접 소개하지 않았다면, 그 존재가 실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영화를 통해 그 존재가 진술된 현재에도 만약 누군가 클리오의 존재에 의문을 던진다면, 그 존재는 의혹에 붙여질 수도 있다. 이는 스트리밍의 영상재현방식과 비슷하다. <로마>를 넷플릭스 플랫폼으로 관람한 이들이 관람을 통해 획득한 물리적 증거란 온라인을 통해 남겨진 시청기록 몇 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같은 영상을 봤다는 사실을 증명할 명확한 근거도 없다.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데이터 조각이 완벽히 같은 방식으로 재조립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청기록 몇 자가 영화 티켓처럼 물리적인 증거력을 가질 리도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해킹을 통해 키보드로도 조작될 수도 있는 아주 작은 증거다. 클리오의 존재는 그 작은 존재들을 통해 증거력을 갖는다. 거대한 시스템과 한줌 남은 증거의 기록. 이 대조가 클리오의 존재를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한 재현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클리오는 혁명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이후에는 자기 존재의 터전(소피아의 집)도 소피아 남편의 외도로 무너져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그러나 '클리오'를 보았다는 단호한 긍정이 클리오를 실재하게 만들고 있다.

    클리오가 알폰소 쿠아론의 기억 속에서 변형을 거쳐 가공된 것만큼, 넷플릭스 플랫폼에서 구현된 <로마> 또한 그 실체를 명확히 하기 어렵다. 온라인과 연결된 작은 디스플레이는 기억매체의 입장에서 입구일 뿐, 출구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사기와 스크린의 관계 속에서 기억매체의 존재가 지지되는 식의 재현은 불가능하다. 작은 디스플레이로 출력된 <로마>는 누군가의 방에 내던져질 뿐, 어디론가 향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처럼 기억이 이동하는 원뿔형의 궤적은, 작은 디스플레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위대한 방식으로 영화의 존재를 증명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앙드레 바쟁이 불순한 영화(Impure Cinema)의 강력한 옹호자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앙드레 바쟁은 「완전영화의 신화」를 통해 리얼리즘의 재현은 각자 가진 형식의 한계 속에서 부분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영화를 온전히 소유할 어떤 이도, 영토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영토를 가로지를 것이며, 어떤 경계도 그 흐름을 막지 못할 것이다. 작은 디스플레이와 극장 사이에서 <로마>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순한 영화에 가까울 것이다.



    한때 형식의 전환과 진보가 교차하는 흐름 속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은 실재를 간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영화사를 돌이켜보면, <기차의 도착>이 최초의 영화일 수 있는 이유는, 그랑 카페 있던 모든 인물이 동일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기차가 실재였다고 간증할 30여명의 사람들. 그것이 영화의 존재 조건이었으며 동시에 영화가 사진적 이미지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탈주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레임으로부터 탈주하여 관객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 <로마>의 리얼리티는 극장에서나 작은 디스플레이에서나 외부로 탈주하고 있다. <로마>의 탈주가 시차를 회복시켰는가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대답을 주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디스플레이의 <로마>는 지나치게 가시적일 우려가, 극장의 <로마>는 지나치게 과시적일 우려가 있다. 그러나 영화 밖으로 탈주하는 그 감각들이 어쩌면 시차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화라고 불리는 새로운 환영을, 그리고 낯선 유령을 목격하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기차를 에워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현재

    이현재

    1993년 서울 출생

    경희대 철학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 망각(妄覺)과 망각(忘却)사이의 재난
    봉준호의 <기생충>


    봉준호는 <플란다스의 개>부터 <기생충>에 이르는 7편의 장편영화에서 늘 '망각'(忘却/妄覺)이라는 사태에 집착해왔다. 그만큼 봉준호의 영화에서 '망자'(忘/妄者)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봉준호의 '망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망각'의 조건이 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망각'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진술이 곡해된다는 것(妄覺)이며, 다른 하나는 주어진 사실이 잊어진다는 것(忘却)이다. 이 때 방향 모두 어떤 사실이 누군가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굴절되어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망각'이란 어떤 사실이 누군가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즉, 알고 있다는 상황이나 정황도 없이 '망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망각의 조건에는 캐릭터를 둘러싼 환경, 즉 '주어진 사실'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기생충>은 알려진 바대로 두 계급의 가족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택(송강호 분)네 식구는 반지하에서 피자박스를 접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가정이다. 하지만 아들 기우(최우식 분)의 친구가 그에게 박 사장(이선균 분)네 과외를 주선하며 상황이 달라진다. 기우와 기택네 가족은 박 사장 가족의 필요를 조작해가며 모든 식구를 박 사장 집에서 근무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상호 간의 망각(妄覺)을 일으킨다. 먼저 기택의 가족은 그들의 신분을 스스로 조작해가며 박 사장과 그 가족의 '망각'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기존에 일하던 이들을 밀어낸다. 목적은 박 사장의 집에서 일자리를 얻어 좀 더 나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는 원래부터 그 장소에서 일하던 사람뿐만 아니라 그 공간과 관련된 거의 모든 기억을 밀어내며 박 사장이 거주하는 공간 자체를 망각시킨다. 그렇게 기택의 가족이 마지막으로 밀어낸 인물은 집사 역할을 담당하던 국문광(이정은 분)이었다. 그는 단순히 집사가 아닌 집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국문광이 기우를 집에 들이며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집의 역사였다. 지금은 박 사장네 가족이 거주하는 대저택은 본래 건축가 남궁현자 선생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집의 주인이라 할 만한 건축가 남궁현자는 더 이상 살지 않는다. 대신 그 집을 돈 주고 산 박 사장 네, 박 사장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고 있는 집사가 살고 있을 뿐이다. 이때, 국문광은 그 집의 내력을 알고 있는 유일한 극 중 인물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생충>은 그를 통해 망각이 드러나는 방식을 현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쫒겨났던 국문광이 귀환한 순간을 생각해보자. 그는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집으로 귀환하지 않는다. 그는 일자리 대신 집이 품은 시대의 과거에 묻었던 비밀을 되찾기 위해 귀환한다.

    국문광이 되찾고자 한 것은 집의 방공호에 숨긴 병든 자신의 남편 근세(박명훈 분)였다. 국문광의 남편이 있는 방공호는 <기생충>의 주제를 관통하는 주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박 사장네 집에 방공호가 있는 까닭이 시대를 반영하는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지하 방공호는 과거에 북한의 침공을 대비하여 만든 공간이었다. 결국, 냉전과 반공의 결과물인 것이다. 국문광이 이 곳에 병든 남편을 숨길 수 있었던 까닭 역시, 국문광에게 남궁현자의 집은 단순한 건축물 이상으로 생의 터전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렇기에 이 공간을 알고 있는 생존자 또한 국문광과 그 남편을 제외하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박 사장이 거주하고 있는 집에 있는 방공호는 실재의 공간이었다기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망각(忘却)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문광이 이 공간을 다시 실재의 세계로 복원시킨 순간, 기택의 가족이 조직했던 망각(妄覺)은 곧 위기에 처한다.

    이후 기택의 가족은 국문광과 망각된 방공호를 차단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이는 박 사장이 예민하게 생각하던 "선을 넘는다"는 투정과도 관련되어 있다. 자본을 통해 구축한 자신의 망각(妄覺)된 공간 역시, 망각(忘却)에서 복원된 상들에 의해 위협받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택의 가족 역시 계층과 계급에 관계없이 망각(忘却)된 공간이 선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현실을 망각(忘却)시키는 망각(妄覺)에 공모하고 있었으나, 서로 깨닫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봉준호의 <괴물>은 이상하게 시작된다. 실패한 사업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한강으로 투신하기 전, 괴물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를 말리려는 동료들에게는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살아 들"이라는 냉소를 남긴다. <괴물>에서 그는 한강물에 휩쓸려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 기택은 돌아올 수 있을까? 돌아온다 한들, 그는 과연 근세가 몰고 온 재난과 다를 것인가?
    이현재

    이현재

    1993년 서울 출생

    경희대 철학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 김시무 영화평론가

    이번에 응모된 영화평론은 모두 38편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다룬 평론이 11편을 차지하여 해당 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반영했다. 전체 응모작중 열다섯 편 정도는 공모전에 내도 될 만한 수준을 갖춘 듯이 보였다. 그 중에서 본 심사자는 '베스트 5'를 추려 다시 정독하면서 한편을 선정해야 했다. 우선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를 넷플릭스(Netflix)의 제작과 연관시켜 분석한 글이 눈길을 끌었다. 넷플릭스는 스크린이 아닌 모니터로 스트리밍 해서 콘텐츠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영화적 경험을 줄 수 없다는 논쟁을 초래했다. 평자는 매체 환경의 변화에 직면하여 <로마>라는 작품이 갖는 영화사적 맥락을 상세하게 지적하는 한편, 텍스트 자제의 미학적 의미까지 심도 깊게 분석하고 있다. 매우 시의적절한 평론이라 여겨졌다. 들뢰즈의 리좀(rhizome) 개념을 원용하여 봉준호의 <기생충>을 김기영의 <하녀>까지 거슬러 올라가 비교분석하고 있는 글도 인상적이었다. 지층을 파고들어 무수한 뿌리를 내리는 리좀적 행위가 기택 가족의 욕망을 은유한다면, 위로 솟구치는 수목의 가지는 동익의 가족을 상징한다. 평자는 <기생충>이 양 극단의 충돌로 인한 파국을 스릴 있게 다루고 있다고 해석한다. 전고운의 <소공녀>를 희망 난민의 '취향'이라는 표제어로 다루고 있는 글도 흥미로운 평론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계몽의 순교자'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는 글은 전문성이 돋보였다. <조커>와 <82년생 김지영>을 '광기와 신체'라는 화두로 분석하고 있는 글은 다소 무리한 병치임에도 불구하고 야심찬 분석을 보여주었다.
  • 이현재

    이현재

    1993년 서울 출생

    경희대 철학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당선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든 것은 의문이었다. 의문에 대한 답은 심사의원만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용한 일이지만 썼던 글을 다시 읽었다. 졸업생이 쓴 학위논문을 다시 읽는 심정이 이럴까. 문장마다 '왜?'라는 의문이 따라 붙었다. 학부 시절 교수님들이 흘리던 문장이 잠언처럼 맴돌았다. '뭐가 안 되는 데에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지만, 뭐가 되는 데에는 단 하나의 이유도 없다'는 말. 일단 당선된 사실을 그렇게 받아드리기로 했다. 기쁜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내 글이 응답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선가 어떻게든 응답이 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지금까지 꾸준히 응답들을 보내주었던 이들에게 감사하다. 영화에 대한 우정으로 응답해주었던 한상훈 프로그래머, 김상목 프로그래머, 연극하는 양지모씨, 대구 사는 이석범씨, 창원 사는 이배정씨에게 감사하다. 함께 공부해주고 있는 지혜 선배와 가연, 유진, 하영, 다혜, 지혜 후배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학부시절 경청과 응답을 베풀어주셨던 송유레 교수님, 허술한 말에도 일일이 응답해주시는 안숭범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응답을 일상으로 느끼게 해주는 우리 누나와 동료를 찾을 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내 글이 응답받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나 자신보다 내가 만난 이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글을 나를 증명하는 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누구의 것도 아닌 이름 없는 글들로 씨가 되어 한 걸음 씩 깊고 울창해지길 바란다. 그 후에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걸음이 나를 이끌었으면 좋겠다.

    p.s: 늘 여행의 든든한 거점이 되어주는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 한국영상자료원에도 감사를 드린다
  • 작품전문
  • 단평
  • 심사평
  • 당선소감